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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성대(帝星臺) ◈
◇ 문죄(問罪)의 사師(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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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5-1939.4
김동인
1
제성대(帝星臺)
2
問罪[문죄]의 師[사]
 
 
3
취군 나발소리에 어리어 대궐 밖 너른 마당에 어지러이 들리는 인마의 소리에 스스로 만족을 느끼며, 후백제 임금 견훤은 따르는 신하도 없이 홀로 큰 창을 비껴들고, 뭇 전각을 뒤로 돌아 후원에 나섰다. 그 후원 북쪽은 높은 담으로 막혀 있고 그 담의 협문을 나서면 거기는 역시 대궐의 비원(秘苑)으로서 울창한 송림과 숲과 바위 샘물 등등이 대자연 그대로 남아 있고, 바위 틈 나무 등걸 아래는 여우며 토끼며 혹은 이리 늑대 등의 맹수까지도 여기저기 자기네의 삶을 살고 있다. 이 일곽에서 나서 자라서 새끼치고 늙어 죽고 하는 짐승들이었다.
 
4
누구에게 구경시키려고 꾸민 동산이 아닌지라, 외발자욱 길도 없었다. 때는 바야흐로 구월 하순 - 웬만한 나무며 풀은 거의 낙엽되고 마르고 하여, 발 짚는 맛도 푸근푸근하였다.
 
5
임금은 협문을 나서서 이 만추의 동산을 찾아 들었다. 임금의 건장한 신체는 벌써 오십도 넘고 육십줄을 바라보는 나이나 흰 털, 주름살 같은 것은 하나도 없고, 푸근푸근한 낙엽을 통하여서까지 대지에 쿵쿵 울리는 걸음걸이는 어느 젊은이도 따를 수 없었다. 마치 바위와 같이 건장한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 있다 하면 그것은 그의 두 눈이었다. 젊었을 때부터 그랬지만 표정다운 표정을 나타내 본 일이 없는 그의 두 눈은, 언제든'세상에 피곤한 늙은이의 눈’과 같았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 관찰에 지나지 못 하였다. 피곤한 듯, 내려덮이려는 듯, 얼른 보기에는 천하만사에 무관심한 듯이 보이는 그의 눈이었으나, 그것은 그의 눈껍질이 그에게 이런 표정을 자아내는 것이지, 그 일견 피곤한 듯이 보이는 눈껍질 아래 숨어 있는 눈동자는 놀랍도록 위압력이 있었다.
 
6
임금은 창을 오른손에 잡고, 발에 걸리는 넝쿨들을 창끝으로 끊어가면서 한 걸음 두 걸음 차차 깊은 데로 찾아들어갔다. 이렇게 얼마를 들어가다가우거진 송림이 약간 트이고 양지가 드는 어떤 커다란 바위 앞에 서서 바위 틈을 들여다보았다. 바위 앞에는, 짐승의 뼈 같은 것이 수두룩히 널려 있고, 바위 아래 있는 구멍으로는 짐승의 드나든 발자국이 어지러이 있었다.
 
 
7
"늑댄가, 여순가."
 
8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뒷걸음쳐 물러섰다. 동자(瞳子)를 절반 덮었던 눈꺼풀도 약간 들렸다. 창자루를 오른편 옆구리에 꼭 끼고 왼손까지 내밀어 받쳐잡고, 창끝을 구멍으로 견주었다.
 
9
한 순간, 두 순간 - 그 구멍 속에서는 짐승의 고통하는 신음성이 차차 들리기 시작하였다. 한 마리만이 아니라 너덧 마리의 부르짖음이었다.
 
10
신음성은 차차 커 갔다. 쿵쿵 공중거리까지 하는 모양이었다.
 
11
잠시 움직임 없이 창끝을 구멍으로 향하고 있던 임금은 한 번 고함치며 창을 홱 낚우었다. 동시에 그것은 마치 지남석(指南石)에 끌리는 쇠와 같이한 마리의 이리가 데구르 구을러 구멍 밖으로 나와서 번뜻 넘어진 채 발버둥질을 몇 번 하다가, 죽었는지 기절했는지 잠잠해 버렸다.
 
12
이렇게 크고 작은 이리 다섯 마리를 구멍에서 끌어내었다. 다섯 마리의 이 리가 가지런히 구멍 밖에 네 활개 펴고 넘어져 있는 꼴짝사니를 잠시 굽어 본 뒤에 임금은 창자루를 다그어 창날을 눈앞에 높이 들고 검분하였다.
 
13
가을 누르칙칙한 별 아래서도 창연히 빛나는 그 창날은, 지금껏 연습에 혹은 전장에 - 적지 않은 피까지 발랐으나, 한 점의 흐림이 없고 바늘 끝만치라도 이지러진 데가 없다. 명공이 갈아 낸 명창 - 지금 바야흐로 이 창은 이백여 년 전에 자기의 조상에게 가하여진 커다란 수치를 '눈은 눈으로 코는 코로’갚으러 길 떠나려 한다.
 
14
최후의 맹연습까지 마친 일만의 장정은 지금 대궐 밖에서 어서'우리 나랏님’ 의 영자(英姿)를 보고자 기다리고 있다.
 
15
"신라로. 신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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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죄의 사의 대진군의 막은 바야흐로 열리려 한다. 때때로 바람결에 여기까지도 들려오는 대궐 밖의 인마성은 임금의 출어를 재촉하는 듯하였다.
 
17
잠시 창끝을 들여다보며 귀로는 인마성을 듣고 있는 동안, 이 임금의 얼굴에서는 얻어보기 힘든 미소의 그림자까지 나타났다.
 
18
"한동안 쉬었지만 손도 무디지 않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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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중얼거리며 임금은 대궐 쪽으로 향하여 돌아섰다.
 
20
대궐에는 임금의 백마'비룡’이 등대되어 있었다. 백마에 높이 앉아 창을 비 껴 들고, 시종 몇 명을 뒤에 달고 중문 밖으로 나서매 임금의 출어를 보도 하는 소라수의 소라성이 천지가 뒤집힐 듯이 울린다. 임금은 고요히 머리를 끄덕이며 대궐 밖에 나섰다.
 
21
일만 명의 정병은 열 대로 나뉘어서 각각 한 사람의 비장이 인솔하고 있고 그 앞에는 친위대가 종렬로 서 있고 맨 앞에는 고급 막료며 모장(謀將)들이 마상에서 임금의 출어를 기다리고 있다가 임금이 궐 밖에 나서자, 창과 칼을 높이 들어 성수의 만만세와 종사의 만만세를 외쳤다. 온 일면에 번득이는 창과 칼 - 만만세를 부르는 고함성 - 산이 떠나갈 듯, 해가 갈라질듯, 후백제 창건 이래 처음 보는 장관이었다.
 
22
임금은 그들과 마주 말을 멈추었다.
 
23
잠시 전까지 산이 떠나갈 듯이 외치던 만세성도 가라앉고 쥐죽은 듯이 고요한 일만 정병의 맞은편에 말을 고요히 멈춘 뒤에, 임금은 눈을 들어서 왼 편에서 비롯하여 오른편까지 한번 쭉 둘러보았다. 스물두세 살에서 서른 살까지 - 정병 중에서도 정병만 추려낸 이 일만 군졸은 또한 나이가 나이 인지라 꼭 새 안해를 맞이하여 즐거운 살림살이의 첫걸음을 내어 짚었을 청년 이었다. 그러나 지금 바야흐로 싸움의 길에 나감에 임하여 조금이라도 주저하 거나 근심하는 기색이 없었다. 나라를 위하여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 하여 목숨을 바친단들 무엇이 아까우랴. 신라로. 신라로. 긴장된 일만 쌍의 눈은, 경애하는'우리의 나랏님’에게로 집중되었다. 이 열정으로 충혈까지 된 일만 쌍의 눈을 받고, 임금의 표정은 여전히 무관심한 듯하였지만 - 좌우 눈가로는 두 줄기 눈물이 쭈루루 흘렀다.
 
24
"여러분!"
 
25
임금의 우렁찬 음성이었다. 공중에 불던 가을 바람조차 멈춘 듯 천하는 고요하여졌다. 그 가운데서 임금의 둘째 말이 울리어 나갔다.
 
26
"오늘 이 기쁜 날을 축복하세."
 
27
와아! 울려 나가는 함성. 쟁그렁거리는 쇠소리. 번득이는 창과 칼.
 
28
"자. 신라로 영광의 길을 떠나세."
 
29
와아! 뒤를 잇는 함성.
 
30
그날 오정 경, 신라 문죄를 표면 기치로 삼은 백제의 일만 정예는 임금 친솔 하에 동으로 동으로 진군하였다. 길가, 길거리마다 남녀노유의 백성들은 술과 고기를 가지고 나와서 이 명예의 장졸들을 향응하였다.
 
31
"꼭 이겨 주세요."
 
32
"조선(祖先)의 원수를 꼭 갚아 주세요."
 
33
이 길가의 백성들의 끓는 성의에 장졸의 의기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덥지 않고 춥지 않은 좋은 절기에 일만 장졸의 밟는 힘있는 발자욱에, 대지는 굴복하는 듯이 널따랗게 길을 트이어 주었다. 그 가운데를 보일보 더욱 힘 있게 나아가는 백제의 대군….
 
34
때는 후백제 이십년, (견훤이 칭왕한 지 이십구 년) 신라 경명왕(景明王) 삼 년, 고려 태조 천수(天授) 삼년, 한 땅〔漢域[한역]〕에는 후량 말제(後 粱末帝) 정명(貞明) 오년 경진(庚辰) 구월 하순이었다.
 
35
이 백제의 대군이 추수 뒤의 기름진 평원을 건너고 준령(峻嶺)을 넘고 하여 백제의 국경선을 지나 신라 땅을 밟은 것은 시월도 열흘경이나 되어서였다.
 
36
반항하는 군민(軍民)도 만나지 못하여 마치 내 땅인 듯이 진군을 계속 하여 대량(大良) 성하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일지군은 손재게 우회하여 구사(仇史) 성하로 돌아갔다. 이 대량과 구사의 두 성은 신라 방위의 중요 지점으로 무론 상당한 반항이 있으리라 보았다.
 
37
그런데 급기 이르러 보니, 성주 이하 성을 지킬 장졸은 어느덧 모다 재게 도망쳐 버리고 백성들만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망설이고 있는 것이었다.
 
38
"무고한 백성들을 애호하라!"
 
39
"부녀자를 건드리지 말라!"
 
40
엄격한 백제 군율에 지배받는 백제 군졸들은 행렬도 어지럽히지 않고 두성을 무난히 접수하였다.
 
41
대량성의 성주 아문(衙門)을 임시 시어소(時御所)로 삼고, 임금은 거기서 신라 경문왕에게 대하여 이성위왕(異姓爲王)에 대한 문죄사를 보내기로 하였다.
 
42
"후백제의 임금은 신라 국왕 및 신라 조정에 역성위왕(易姓爲王)의 죄를 묻노라. 본시 신라국을 세운 시조가 박씨인 것이야 뉘 모르랴만, 왕위는 박씨만이 계승한 것이 아니라, 박씨와 석(昔)씨가 교체하여 계승해오다가 지금으로부터 칠백 년 전에는 박씨는 아주 종사(宗社)에서 물러나고 그 뒤는 석씨와 김(金)씨가 교체하여 종사를 계승, 거금 오백오십 년 전부터는 김씨만이 이 종사를 계승하여 지금까지 이르렀도다. 박씨와 석씨가 교체하여 왕위를 계승할 동안은, 아직 국가라 하는 체제를 갖추지 못한 촌락촌락의 덩 어리러니 김씨가 왕권을 잡은 이후에 비로소 남으로 가락 임나 등을 멸하고, 서와 북으로는 백제와 고구려에 국경을 다투어 비로소 한 개의 국가를 이룩 하였으니, 계림(鷄林)의 주인은 혹왈 박씨일는지 모르지만 신라의 주인은 김씨임이 분명하도다. 후일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하고 고구려를 멸하여 천하에 용명을 떨치고 신라 있음을 밝힌 자 또한 김씨 아니었더뇨?
 
43
신라를 이룩하고 신라를 크게 한 자 이 모두 김씨어늘 향자 효공왕 승하 후에 수많은 김씨 왕족이 조야에 널려 있거늘 하필 계림 시조 박혁거세의 천년 후 후손을 모셔다가 위에 오르게 함은 이 무슨 뜻이뇨. 짐(朕)은 그대나라의 속사정을 모르는도다. 따라서 상세한 까닭은 알 수 없지만, 반드시 무슨 곡절이 있을지라, 짐은 이웃 나라의 주인으로 앉아서 곁나라에 생긴 이런 망칙한 일을 방임하면, 그를 본딴 재화가 언제 짐의 위에도 미칠지 난측이라 가슴이 송구하고 머리털이 스스로 일어서 묵시하려야 할 수 없어 지금 문죄의 대군을 이끌고 왔노라. 그대 만약 전죄를 뉘우치고 짐의 군문에 항복을 하고 퇴위를 하면, 짐은 더 추궁치 않으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계림은 한 덩어리 불탄 흙으로 화할지라, 잘 생각하고 깊이 궁구하여 처사에 그릇 함이 없도록 하기를 바라노라."
 
44
이러한 문죄와 권항(勸降)을 겸한 장서를 신라 임금에게 보냈다.
 
45
그 새 보름 동안을 이곳까지 행진해 온 장졸의 피곤을 수일간 대량, 구사, 두 성에서 쉬어 가지고 다시 전진하기로 하였다.
 
46
엿새 동안을 쉬었다. 처음 일이 일간은 장졸들은 그 새의 피곤 때문에 지금의 안식을 즐겨 누렸지만, 사흘이 지나고 나흘이 지남에 따라, 혈기 방농한 그들은 이 안일(安逸)에만 잠겨 있을 수가 없었다. 고양이는 쥐 많은 고장에 놓아 주어야 기뻐하는 것이요, 혈기의 장졸은 전진으로 싸우러 보내어야 만족해 하는 것이다. 군중에는 차차 어서 진군하자는 요망이 높아 갔다.
 
47
엿새 뒤에 임금도 드디어 문죄 진군의 거보(巨步)를 다시 내어짚기로 하였다. 이미 점령한 두 성에는 각 이백 명씩의 군졸을 남겨서 신라 병정의 역습이라든가 신라의 폭동을 누르게 하게 하고 나머지 일만 대군은 국왕 친솔하에 진례군(進禮郡)을 향하여 우렁찬 걸음을 내어짚었다.
 
48
멀리 진례군에 피는 연기가 보일이만치 가까이 이른 때였다. 밝은 날 진례군 함락의 즐거운 꿈을 고이 덮어 두고 그들은 오늘 밤 여기서 야영을 하기로 하였다.
 
49
그날 밤 임금의 막 안에는 주요한 장수 몇 명이 임금을 중심으로 둘러앉아서 인제 치려는 진례군의 공략방식을 의논하고 있었다. 임금은 조는지 깨었는지, 두 팔을 겯고 눈을 감고 무심한 태도로 앉아 있었다. 그 앞에서 장수들은 갑론을박으로, 제각기 자기의 용병법을 자랑하고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해(亥)시.
 
50
어느 틈에인지 모른다. 버썩 하는 소리에 장수들이 펄떡 정신을 차릴 때는 어느 틈에인지 임금은 일어서서 천정에 걸린 작은 활과 게다가 살 두 대까지 뽑아들었다. 이게 웬 일인가고 놀랄 시간의 여유도 주지 않고 어느덧 임금의 활에서는 살이 날아갔다. 막을 꿰고서 바깥으로…. 한 대, 두 대.
 
51
동시에 막 밖에서는,
 
52
"악!"
 
53
하는 사람의 비명성과 동시에 땅에 사람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54
임금은 다시 고요히 앉았다.
 
55
"누구 나가서 끌어들이오."
 
56
졸음오는 소리로 이렇게 분부한 뒤에는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57
장수 두 사람이 횃불을 켜 가지고 나가 보았다. 웬 괴한이 양 넓적다리에 살 하나씩을 받아 뛰지도 못하고 앉은걸음으로 도망하는 즈음이었다.
 
58
장수들은 그 괴한의 뒷덜미를 끌고 진문 밖에 갖다 꿇려 놓았다. 그리고 거기서 복명하였다.
 
59
"괴한 잡아다 대령하왔읍니다."
 
60
임금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잠시를 더 눈감은 채 가만 있다가 한순간 눈을 약간 뜨고 괴한을 본 뒤에 다시 감아버렸다. 잠시 침묵.
 
61
"원 장군."
 
62
임금의 부름이었다.
 
63
"네이."
 
64
"저 고려인을 -."
 
65
"저게 고려인이오니까?"
 
66
물음에 대해서는 대답치 않고 임금은 자기의 말을 계속하였다.
 
67
"고려인을 저편으로 끌고 가서 토사를 받아 보시오. 실토를 않거든 박살 을해도 무관하오."
 
68
고려인이라 한 명확한 지적과, 박살을 해도 좋다는 말에 괴한은 거지 반제 혼을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몸을 사시나무와 같이 와들와들 떨기 시작 하였다.
 
69
원노는 군졸을 불러서 그 괴한을 끌어 가지고 저편으로 돌아갔다.
 
70
진례군 공략의 토의도 흐지부지 하여 버렸다. 모다들 멍하니, 원 장군이 어떤 토사를 받아 가지고 돌아오는지 기다릴 따름이었다.
 
71
반 각경이나 지나서야 원노가 돌아왔다.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였다.
 
72
원노의 가져온 보고는 이러하였다.
 
73
- 이번 백제에서 문죄의 군사를 보낸다는 소식을 듣고 신라 왕은 아찬 김률(阿粲 金律)을 고려에 보내서 고려 왕에게 구원병을 청했다. 원대한 야망을 품고 있던 고려 왕은, 이 기회에 신라에게 은혜를 팔아 두려고 친히 정병을 이끌고 백제군의 측면을 교란할 작정으로 전속력으로 남하(南下) 하여 지금 여기서 칠십 리 밖에 밤을 지내고, 밝는 날은 백제군의 뒤를 엄 습하러 달려오려는 것이다. 그 괴한은 백제의 군정을 알아보려 보낸 고려군의 염탐 이었다.
 
74
"그래 그 염탐꾼은?"
 
 
75
"목을 베어 버렸읍니다."
 
76
잘했다 말이 없이 임금은 눈을 감은 채 입까지 닫쳐 버렸다.
 
77
한참 흐르는 침묵. 그 뒤에 임금이 입을 열었다.
 
78
"다들 가서 주무시우."
 
79
명일의 진례 공격은? 고려군에 대응할 방략은? 여러가지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퇴출을 명하는 것이었다. 하릴없이 장수들이(그냥 눈을 감고 있는) 임금께 절하고 물러갈 때에, 임금은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80
"더벅머리 아이놈이…."
 
81
그날 밤 이 임금으로는 평생 처음 겪는 일이지만 좀체 잠이 못 들었다. 기침 소리 부시럭거리는 소리만 연하여 내었다. 자시(子時)경에 대량성(大良城)에 주둔시켰던 백제군의 한 사람이 말을 달려와서 아뢴 바에 의지하 건대 염탐꾼의 토사가 조금도 에누리없는 정말이었다.
 
82
이튿날 동틀 때에 임금은 고등 막료 전부와 열 대(隊) 비장을 죄 진 밖에 불렀다. 아무리 남국(南國)이라 하지만 첫겨울의 새벽은 꽤 싸늘하였다. 왕명으로 잠자리에서 뛰쳐나온 장수들은 살을 꿰는 산들바람에 몸을 약간씩 떨면서 임금의 출어를 기다렸다.
 
83
이윽고 임금도 진문 밖에 나섰다. 장료들의 드리는 아침 문안도 받는둥 마는 둥 눈을 감고 잠시 서 있었다.
 
84
드디어 말이 나왔다.
 
85
"오늘 회군(回軍)합시다."
 
86
"?"
 
87
청천의 벽력이었다. 무슨 일인지를 알 수 없었다.
 
88
임군은 눈을 약간 떠서 원노를 불러 가지고, 어젯밤의 괴변을 말하라 하였다. 그 분부대로 원노는 어젯밤 괴한 출현에 관한 전말을 장수들한테 들려주었다. 그러나 그렇다기로서니 회군까지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은 원 노는, 뒤를 임금께 밀고 자기는 물러섰다.
 
89
"그렇기로서니 회군까지야 왜 하겠읍니까?"
 
90
이것이 장군들의 일치된 의견이었다. 임군은 탄식하였다.
 
91
"그럼 계림으로 직입을 하잔 말이오? 그랬다가는 뒷길 끊기는 것도 큰 변 이어니와 빈 본국(本國)을 어떻게 하겠소?"
 
92
"고려군을 영격(迎擊)하옵시다."
 
93
"잊지 마시오. 우리 군사의 하늘을 찌를 듯한 의기는 계림 정벌 때문이오.
 
94
지금 계림 정벌을 홱 그만두고 고려 군사 영격을 하자 하면 지금의 예 봉 이 그냥 유지될 듯싶소? 풀이 꺾이지 않을 것 같소? 군심이 해이되면 승부는 벌써 결정되는 법…."
 
95
"……."
 
96
"여러분 충의야 모르는 배 아니지만 더우기 예까지 왔다가 - 두 성까지 얻었다가 그것조차 내버리고 회군을 한다는 것은, 남애에 차마 하지 못 할 일이지만 천의(天意) 이미 그리 된 것을 어찌하겠소? 후일을 기다립시다.
 
97
후일을…. 내 몰랐소. 신라 왕이 이리를 피하고자 호랑이에게 몸을 던질 줄은…."
 
98
그리고는 가(可)타 부(否)타 대답을 듣기도 귀찮은 듯이, 몸을 안으로 돌이키었다. 돌이키면서 혼자 중얼거리는 말 -"코 흘리 개 임군과 더벅머리 아이놈…."
 
99
그리고는 성가신 듯이 기침을 한 번 하고 안으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100
겨울 불그스럼한 해가 동편 하늘에 겨우 모양을 나타낸 때는 백 제군에서는 회군의 준비를 다 끝내었다.
 
101
싸움에는 패하지 않았지만 전략에 패한 백제군은 맥없는 걸음걸이로써 국경선으로 국경선으로 후퇴를 하였다. 그리고 국경선을 넘어서서는 국경 가까운 열 고을에 이 군졸들을 나누어 두어 장차의 기회를 기다리게 하고, 임군은 막료들과 친위병 수백 명만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102
대군을 인솔하고 대량 구사(大良, 仇史) 등지까지 진공을 하다가 고려 왕건의 군사 때문에 도로 퇴군을 한 이래 임군 견훤은 앙앙불락하였다.
 
103
본시 무표정하고 침울한 얼굴이매 표정이 더 음침하다든가 한 바는 아니었지만 식량이 전보다 줄고 잠도 전만 못하게 되었다.
 
104
벌써 귀밑에 희뜩희뜩한 털이 적지 않게 보이게 되었다. 완장한 체격 이 매 몸집이 눈에 보이게 약하여진 듯하지마는 않았지만, 어디인지 지적 하기는 힘드나 그림자 엷어 가는 것은 감출 수가 없었다.
 
105
왕건(王建)의 출현과 송도 도읍 등등에서 벌써 마음의 위협을 느끼던 차 에이번 신라 정벌에 왕건이 또한 곁들이를 하여 일을 중동에 깨뜨려버린 것은 이 임군의 마음을 더욱 어둡게 하였다.
 
106
"송경에 왕기(王氣)가 보이더니라."
 
107
인젠 벌써 근 오십 년 전의 아득한 옛날 은사 도선(道詵)이 들려주던 이 말이 마치 환성과 같이 늘 그의 머리에 상기되고 하였다.
 
108
싸우지 않고 패전하여 돌아온 이래, 후백제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속전즉결(速戰即決) 주의로, 한숨에 신라를 무찌르고 그 여세로써 신흥 고려까지 둘러엎어 버려서, 이 반도의 패권을 혼자 잡아 보려던 계획이 깨어진 이후, 후백제는 한동안 양병에만 힘쓰고 은인자중하였다.
 
 
109
주의하여 살피건대 고려는 호시탐탐히 백제의 빈 틈만 엿보고 있다. 만 약 감시의 눈을 잠시라도 게을리하고, 헛눈을 파는 기회만 있으면 고려병은 즉시 백제를 침략하고자….
 
110
이러한 정세 아래서 백제는, 그의 방략을 고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전에는, 경기(輕騎)로써 먼저 신라를 무찌르고 그 여세로 고려를 엎을 방략 이었지만, 그것이 약간 힘들게 된 지금에는, 전략을 고쳐서, 동쪽으로 신라에 대해 서는 견제의 의미로 시위만 하여두고, 일로 고려를 먼저 엎어 놓으면 힘없는 신라는 저절로 백제의 손 아래서 놀아날 것이었다.
 
111
먼젓번 대량 구사 등지 정벌에서 돌아온 군사들은 그냥 신라와의 국경 가까이 멈추어 두어, 신라를 견제하는 일방 국내에서는 고려 정벌을 위한 정예군을 조련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112
이리하여 일 년, 이 년, 삼 년, 사 년….
 
113
사 년 이라는 준비의 날짜를 지나서, 신라 경명왕 칠년(견훤왕은 벌써 쉰 여덟 살이었다) 여름이었다.
 
114
숙명적으로 단명(短命)한 운명을 타고난 신라 왕실이라, 신라 임군은 재위 겨우 칠 년으로 그 해 첫여름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것이 아주 위중하게까지 되었다.
 
115
아무리 나라 정사가 어지러웠지만 국왕의 중환에 온 국내는 수심이 가득하였다. 더우기 임군의 재위 기간이 모두 너무도 짧기 때문에, 임군께 환후가 있으면 반드시 국상을 예기하여야 하는 습관이 들어 있는 신라라 민심이 두 선두 선하며 최후의 불길한 일을 모두들 예기하고 있었다.
 
116
이렇듯 신라는 국내적으로 불행한 일이 있어서 다른 일은 돌볼 여유가 없는 기회를 타서, 백제에서는 시험적으로 왕자 신검과 양검(神劒, 良劒)에게 약간한 군사를 맡겨 고려의 조물군(曹勿郡)의 허실을 엿보게 하였다.
 
117
고려군의 허실과 군심 등을 등떠보기 위하여 조물군까지 진군하였던 백 제 왕자의 군은 얼마 동안 서로 대치하고 있다가 짐짓 패한 체하고 그냥 퇴군 하여 버렸다. 그러나 그동안 고려의 군심이 짐작이 갔다. 이 시험 공략에서 퇴군한 뒤에, 백제는 은인자중하는 체하면서 극비밀리에 동원(動員)을 하였다.
 
118
환후 중하던 신라 임군은 그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승하하였다. 그리고 승하한 임금의 친동생 위응(魏膺)이 새 임금으로 등극하였다. 즉 경애왕(景哀王) 이었다.
 
119
신라에서는 새 임군의 등극을 하며 승하한 임금의 인산을 치르며 할 동안, 견훤왕은 이 기회에 고려와의 국경 방면으로, 일변 병기를 나르며 대군을 집결하며, 싸움 준비에 열중하였다.
 
120
백제에서는 아무리 비밀히 하노라 하는 일이로되 이런 큰 동병이 끝까지 비밀 히 될 수가 없었다. 소문은 어느덧 고려까지 이르러서, 고려 왕은 기선(機先)을 제키 위하여, 지금 한창 백제에서는 준비에 분망한 동안 고려 장군 유금필(庾黔弼)을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으로 삼아 앞서 백제 정벌 차로 떠나게 하고 뒤어어 임군도 몸소 대군을 이끌고 유 장군의 뒤를 따랐다.
 
121
백제와 고려의 군사(유금필의 인솔한)는 연산진(燕山鎭)에서 전초전이 있었다. 그리고 고려 임군의 친솔한 주력군은 조물군까지 이르러서 거기서 백제 임군의 친솔한 대군과 마주쳐서 여기서 큰 회전은 벌어지게가 되었다.
 
122
장구(長驅) 송경에서부터 여기까지 달려온 고려의 군사는 아직 피곤이 삭지 않은 위에 진형(陣形)도 정제되지 못하였다. 그 대신 백제의 장졸은 미리부터 정밀한 계획 아래서 진군하여 왔을 뿐더러 더우기 작년의 시험 공략에 있어서 이 근방의 지리며 지세를 상세히 연구하여 두었더니 만치 빈틈이 없었다. 그런 형태로써 양군은 대치를 하였다.
 
123
고려군에서는 이맛 눈치를 짐작하였기 때문에 할 수만 있으면 수일간의 휴식 기간을 얻고 싶었다. 휴식을 하며 그동안 피곤도 삭이고 진형도 정제하고 싶었다.
 
124
그런데 대치되자 그 날 저녁으로 백제군은 총공격을 시작하였다.
 
125
군사 피곤한 뒤에 진형조차 정제되지 못하였던 고려군은, 백제군의 날카로운 군사를 당할 수가 없었다. 개전 즉시로 고려군의 동익(東翼)은 무너져 나갔다. 그리고 중앙과 서익이 간신히 무너지지만 않고 지탱하여 나아갈 동안 요행 날이 어두워서 휴전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서 익도 백 제군의 포위권 안에 들어서 한 시각만 해가 더 길었더면 고려군의 전면적 참패는 면치 못하였을 것이요, 오늘은 요행 날이 어둡기 때문에 참패는 면 하였다 하나, 밝는 날에는 엊저녁에 받을 뻔한 참패를 피할 도리가 없게 되었다. 말하자면 날이 어두운 것은 겨우 고려군으로서 참패를 하루 늦구어 준 것뿐이지, 형세의 호전은 바랄 바이 없었다.
 
126
교교히 밝은 달밤이었다.
 
127
시월 중순 - 맑게 개인 하늘에는 만월이 이 전장을 내려비추고 있다.
 
128
백제 중군에서는, 작년에 이곳에 시험공략을 왔던 신검과 양검을 중심으로 백제 장정들이 둘러앉아서, 밝는 날의 공격 방략을 의논하고 있었다.
 
129
고려의 진세가 갖기 전에 공격을 하려고 저녁부터 공격한 것이 불행히 날이 어둡기 때문에 장사(長蛇)를 놓친 백제군은, 비록 오늘은 놓쳤지만, 아까의 공격으로 백제 전군의 의기를 꺾어 놓았으므로 밝는 날은 약간한 노력만 하면 고려전군을 잔멸시킬 만한 자신이 있었다. 고려의 중앙군은 고려 임군 왕건이 직접 지휘하고 있느니만치 그래도 좀 버틸 심이 있을 것이나, 서 익은 함성만 질러도 난군판이 될 것이고, 난군판이 된 서군을 포위 체세를 취하면서 중앙으로 몰고 들어가면 중앙 역시 함께 뒤섞이어 어지러워질것이고 그럴 때에 이곳 중앙의 정예로 직충을 하면 고려군은 전멸을 면 치못 할 것이고, 혹은 국왕까지도 사로잡을 기회가 있을는지도 모를 것이라 - 이러한 전략을 세운 뒤에, 서익 공격에 주력하기 위해서 오늘의 승리자인 동 익군을 밤 동안에 몰래 중앙의 뒤를 우회하여 서익으로 돌렸다.
 
130
장정들이 이런 의논을 하고 있는 동안 임군 견훤은 홀로이 몸을 빼서 진영 밖으로 나왔다. 이번 싸움을 전승(全勝)으로 본 임군은, 장령들의 의논을 귀 담아 들을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아무 꾀도 베풀지 않고, 밝는 날 단지 백 제군에서 함성만 요란히 지를지라도 고려군은 무너져 나갈 만치 군심이 쇠한 것은 이 임군의 삼십여 년의 군인생활로써 넉넉히 추측이 갔다.
 
131
- 달도 밝기도 하군.
 
132
비교적 마음이 흥그러웠다. 고려 임군 왕건에게 대하여 까닭없이 품던 위압 감도 줄었다. 오늘 밤만 지나면 밝는 날은 모든 일이 해결된다. 잘 되면 혹은 고려 임군을 사로잡거나 군문에 항복을 받거나 하게 될 것이요, 불행 놓친다 손 치더라도, 이 격앙된 장졸을 인솔하고 송경까지 쫓아가서 무 찌르면, 고려는 수족을 쓸 틈이 없이 잔멸이 될 것이다. 전자이든 후자이든 고려는 인젠 이 임군의 눈에는 잔멸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33
요행히 고려 임금을 사로잡거나 항복받게 된다면, 그때는 전승군의 여 세로 발을 돌이켜 계림으로 향할 것이다.
 
134
송악에 왕기가 있더라는 스승(도선)의 말에 응하려는 듯이 왕건이 송악에도 읍을 한 그 이래 때때로 폭풍우와 같이 이 임군의 마음을 엄습하던 불안도 바야흐로 소멸되려는 듯하였다.
 
135
가벼운 기분으로 진영 밖을 나선 임금은, 지금 동익(東翼)에서 서 익으로 이동하는 군마의 어지러운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오늘의 전장(戰場)이요 겸하여 승전한 곳인 북벌동군영(北伐東軍營)으로 천천히 말을 몰았다. 이임군의 적지 않은 왕자 중에 가장 사랑하는 네째 왕자 금강(金剛)이 동 군영 솔장 이었다.
 
136
아까 저녁 때의 격전장(激戰場)이었던 곳은 벌써 백제군에게 점령한바 되어 달빛 아래 무더기무더기로 고려군의 송장이며 중상자들이 쓰러져 있고 백 제의 진영은 썩 북쪽 - 고려 중앙군이 진치고 있는 조물(曹物)의 곧 성하(城下) 였다. 고려 임군의 진영인 조물성은 남쪽으로는 곧 눈앞에 백제 임군 견훤의 중앙군과 맞섰고 동쪽으로는 동쪽을 방호할 동익군이 전멸을 당하고 금강 왕자의 백제 동익군에게 압축을 받고 있는 것이었다. 고려군은 동쪽과 남쪽을 백제군에게 에워싸이고 서쪽은 간신히 서익(西翼)으로 버티고 있으나 몇 시간이나 버틸 수 있을는지 불안키 짝이 없고, 북쪽으로 겨우 장차 송악으로 도망칠 길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137
견훤왕은 이곳저곳서 울리는 중상한 고려 군졸의 맥없는 신음성에 눈살을 찌푸리고 처참한 전장을 건너서, 금강 왕자의 진옥까지 이르렀다.
 
138
뜻 안한 임군의 임어에 놀라서 맞는 종졸에게 말을 맡기고 진옥 안으로 들어서니 금강 왕자는 마침 매부 되는 영규(英規) 장군과 마주 앉아서 소박한안주로 대작(對酌)을 하고 있다가 부왕의 임어에 창황히 일어나서 영접 하였다.
 
139
"야반에 - 나랏님께서는…."
 
140
창황히 맞는 처남 매부에게 임군은 고요히 머리를 끄덕이고 아들이 비켜주는 정면 의자에 가서 앉았다.
 
141
"전승장조을 보러 왔니라."
 
142
어른거리는 횃불에 그들의 젊고 씩씩한 얼굴을 비추면서 맞은편에 읍 하고서 있는 사랑하는 아들과 사위를 바라볼 때에 임군의 마음은 매우 흡족하였다.
 
143
"소신 등의 공이 아니오라, 오로지 우리 나랏님의 신위의 덕이로소이다."
 
144
임금은 당신의 아들과 사위가 대작하고 있던 큰 잔을 들어서 술을 따르려는 아들을 손쳐 말리고 손수 한 잔 그득히 부어 들이켰다.
 
145
"내일은 왕모(王某)를 결박지어 끌어와얄 터인데, 어떠냐 너희들 침이 안 넘어가느냐?"
 
146
마음이 가볍기 때문에 농담이라도 한 마디 하고 싶어서 던져보는 말이었다. 뚱하여 해학과 농에는 어울리지 않는 이 임군의 근래의 걸작이었다.
 
147
왕자는 한순간 매부를 보았다. 매부도 처남을 보았다. 영규 장군이 입을 열었다.
 
148
"나랏님. 밝는 날로 결승이 나리까?"
 
149
임군은 눈을 들어 사위를 보았다. 무슨 당찮은 말을 하느냐는 듯하였다.
 
150
금강 왕자가 말을 끼었다.
 
151
"나랏님. 동군, 중군, 서군 중에 내일 아침 싸움에 나갈자는 뒤로 옴 쳐서 편안히 밤을 쉬게 하옵고, 각 군에서 한 이백 명씩을 따로 뽑으와 고려 진영에 접근한 곳에서 한식경에 한참씩을 함성을 지르며 시석(矢石)을 날려 보내고 해서 고려군으로 하여금 이 밤을 딸깍 새게 하면 내일 아침 싸움에 퍽 유리할까 하옵니다."
 
152
임군은 요전에 사위에게 던졌던 것과 꼭같은 눈을 아들에게 던졌다. 그것은 또 무슨 말이냐는 뜻이었다.
 
153
"좌우간 앉아라. 너희들의 이야기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양춘 만난 빙설에 화력(火力)까지 가해서 무얼하랴."
 
154
"글쎄올시다."
 
155
"야."
 
156
임금은 눈을 굴려 아들과 사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오늘 저녁으로 고려군을 전멸시킬 기개를 가지고 싸움을 시작한 그들이 설사 전멸을 못 시켰을망정 밝는 날의 재기(再起)는 염도 못 낼 만치 큰 타격을 주어 동군은 전멸서 군은 반멸, 중앙군 혼자 겨우 잔명을 보전하고 있는 패잔 고려군에 대하여 너무도 신중한 태도를 취하려는 두 젊은이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157
"너희들 무슨 낌새라도 맡았느냐. 내버려두어도 자멸할 고려군에 헛된 힘을 보탤 필요가 어디 있느냐. 좌우간 앉아라. 앉아서 이야기해 보아라."
 
158
젊은이들이 고려군에 대하여 신중한 태도를 취하려는 것은, 아래와 같은 근거 하에서였다.
 
159
첫째 고려군이 비교적 평정하다 하는 점이 있다. 회전(會戰) 순간에 동 군은 전멸당하고 서군은 백제군에게 포위되고 중앙군도 동쪽과 남쪽으로 포위 된 형태 아래 있는 고려군이라, 밝는 날 다시 백제의 공격을 받기만 하면 전멸 - 적어도 참패는 면치 못할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 형편이면 이 밤은 고려군 전체가 낭패와 동요가 있어야 할 것이다. 어지러이 두선거리고 낭패해 돌아가고, 일변 퇴각, 일변 도망 - 패망군이 연출 하여야 할 추태가 보여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군은 무슨 심산이라도 있는 듯이 평정하게'잔멸’의 전날밤을 보내는 것이었다. 이 것이 좀 신중히 생각하여야 할 일이다.
 
160
둘째로 병력의 다소였다. 고려군은 이번의 원정에 임군 왕건의 친솔군 만이일만 명이 있다. 거기 반하여, 백제군은 삼군 합계가 겨우 삼천 명이었다.
 
161
고려군은 먼 길을 온 위에 진형도 정비되기 전에 정예한 백제군의 공격을 받아 참패를 하였거니와, 오늘 한 밤을 지날 동안은 어떻게 될지 예측을 허락 치 않는 배다. 아까 싸움에서 무려 이천 명은 꺾어 놓았지만 팔천 명의 고려군은 그냥 남아 있다. 백제는 비록 한 군사를 꺾이지 않았으나, 수 효로서 팔대 삼이다. 특별한 유리한 조건 아래서가 아니면, 실수 없으리라고 보증 할 수 없다.
 
 
162
이러한 형편 아래 또 한 가지 꺼림칙한 일이 있다. 아까 전장에서 사로잡은 한 사람의 장정의 말에 의지하건대, 이번 싸움에 정서 대장군(征西大將軍)으로 임군보다 앞서 팔천 명의 대군을 인솔하고 떠나서 연산전으로 돌 유금필(庾黔弼) 장군의 군사가 오는 이 조물에서 왕의 직솔군과 합세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한다. 그런데 어떤 착오가 났던지 유 장군의 군사는 오늘 조물 땅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오늘 도달치 못했다 할지라도 밝는 날은 이 곳까지 도달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고려군은 합계 일만육천이라는 - 백 제군의 오 배 이상의 병력이 된다. 그 위에 조물성 내에는 수천 석의 군량이 있고 병기의 준비도 충분하다 하는 것이었다.
 
163
정병으로 급히 습격하여 속전속승을 전술로 삼는 백제군에 있어서는 싸움이 오래 끌린다 하는 것은 매우 역한 일이었다. 그러나 저쪽은 군량 병기가 넉넉한 위에 수효로 오 배 이상의 대군이니, 그 대군이(꽤 견고한) 조물 성내에 농성을 하여 버리면 속전속승은 지난한 일이고 싸움이 오래 끌리면 군사 적은 자가 패하기가 십상팔구다.
 
164
그러니까, 속전속승을 위해서는, (아직 피곤이 삭지 못하고 진형도 정비 되지 못한 위에 아까 받은 상처가 아직도 아플 동안) 오늘 밤새도록 위협을 주고 피곤을 주고 불안을 주어서 시달리고 시달린 뒤에 동트자(유장군의 군사가 합세하기 전에) 거대한 일격을 가하자 하는 것이었다.
 
165
딴은 적절한 전략이었다. 그 의견은 드디어 채용이 되었다.
 
166
백제군에서는 밤새도록 연하여 함성이 나고 시석이 고려진으로 날아갔다.
 
167
가뜩이나 피곤한 위에 전패까지 겹쳐서 상심한 고려군은 밤새도록 백 제군에게 시달리고 시달린 끝에 인제는 겁만 잔뜩 집어먹고 전의(戰意)는 전혀 없어졌다.
 
168
그러나 이러한 분요 가운데서도 고려 임금의 침착한 지휘로써 새벽 동 틀때쯤은 고려의 서익군(西翼軍)도 어름어름 어느덧 조물성 안으로 잠겨 버렸다.
 
169
아침 해가 불그스름히 동녘 하늘에 떠오를 때쯤 유 장군의 인솔한 팔천의 고려군도 조물성까지 도달하였다. 그러나 이 군사 역시 밤새도록 강행군을 하여 새벽에 겨우 이곳까지 득달하기는 하였지만 정예한 백제군을 대적 할 기력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동, 남, 서, 삼면이 벌써 백제군에게 포위당하고 겨우 한쪽만 남은 북문으로 유 장군의 군사도 성내로 피신을 하여 버렸다.
 
170
속전속승의 백제 전술은 실패하였다. 밤새도록 시달리기만 하다가 동틀녘 일거하여 고려 서익을 몰아 성 안으로 들여몰며 성 안으로 몰려 들어가는 고려군과 함께 성 안에 돌입을 하려던 백제군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171
서익군(고려의)을 교묘히 조금씩 조금씩 이동을 하여 성내로 끌어들이기 때문에 백제군에서는, 아직 고려의 서익군이 그냥 성 밖에 있는 줄만 알았다.
 
172
그러나 급기 날이 밝고 보니 고려군은 겨우 수백 명이 서익 진지(陣地)에 남아 있을 뿐이고 대부분은 벌써 성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성문은 굳게 잠겨졌다. 백제군은(전사하기를 각오한) 몇백 명의 고려군만을 잔멸시키고 닭 쫓던 개 모양으로 굳게 잠긴 성문만 원망스러이 바라볼 뿐이었다.
 
173
싸움은 교착상태에 들어갔다.
 
174
유 장군의 군사의 뒤꼬리까지 완전히 성내로 들어간 때쯤 하여 백 제군은 완전히 동남서북으로 조물성을 에워쌌다. 그러나 원체 축성(築城)이 견고하고 성내에는 충분한 군량이며 우물이며 그 밖 식료품 등이 넉넉히 준비 되어있는 위에 군사 넉넉하고 병기 충분하니, 좀체 함락이 될 까닭이 없었다.
 
175
백제에서는 연방 싸움을 돋구어 보았다. 짐짓 물러간 체하여 보기도 하였다. 성문이 단 한 순간이라도 열리기만 하면 그 밖에 매복했던 군사가 돌입을 하려고 온갖 계책을 다 써 보았다. 그러나 고려 군사는 성문에는 절대 로손을 대어 보지 않았다.
 
176
백제군에서 성을 넘어서라도 들어가려고 하면, 고려측은 살(矢[시])의 소 낙비를 내려서 도저히 넘을 수가 없었다.
 
177
인제는 조물성 내에 먹을 것이 떨어지도록 지구전(持久戰)으로 나아갈 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적은 군사로써 많은 군사를 포위하고 오래 끄은 다 하는 것은 매우 불리한 일이었다.
 
178
더우기 임금이며 왕자 이하 두드러진 장수는 거진 다 여기 모여 있고 나라이 비어 있는지라, 나라를 오래 비워 둔다는 것도 곤란하였다.
 
179
일이 딱하게 되었다.
 
180
매일 세 때 끼니밖에는 할 일이 없기 때문에 흥덩흥덩 무위의 날을 보내는 동안 군대도 차차 규율이 해이되어 가는 뿐 외라, 겨울이 눈앞에 임박 했는데 거처며 의복 등도 겨울을 막을 준비가 없으니 이것도 딱한 일이었다.
 
181
싸움에는 이겼다. 결정적 승리까지는 못 얻었지만 형세상 이긴 편이었다.
 
182
그러나 이기고 그 다음은?
 
183
이기고 그런 뒤에 무조건하고 다시 도망친다는 기괴한 희극이 연출 될지도 모르는 형편이었다.
 
184
임금에서 졸병에 이르기까지, 연일 하품으로 세월을 보냈다.
 
 
185
첫눈이 내렸다. 첫눈 치고는 굉장히 많이 쌓였다. 밤부터 시작하여 이튿날 새벽까지 너덧 치나 되게 두껍게 내리고는 개었다.
 
186
천지를 씻은 듯한 눈이 부신 쇄락한 아침에 임금(백제)은 진옥 밖에 의자를 내다놓게 하고 음침한 얼굴로 걸터앉아 있었다. 왕자며 장령들도 모두 임금의 주위에 의자를 놓고 둘러앉아 있었다.
 
187
매일 하는 일과였다. 무슨 의논하는 일도 없이, 한심스러이 조물성 쪽을 간간 바라보는 뿐, 묵묵히 있을 뿐이었다. 할 일이 없어서 단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188
처음 한동안은 행여 성문 열리는 기회라도 있을까 하여 문 밖에 매 복병을 두었었지만, 지금은 그것조차 그만두었다. 성문은 백제군이 완전히 물러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성 안의 양식이 떨어지거나 둘 중에 한 가지의 결과가 생기기 전에는 열리지 않을 것을 인제는 요해하였다.
 
189
"한심한 놈들이올시다."
 
190
"싸움마당에서 싸움을 피하는 겁장이놈들이올시다."
 
191
"공명(孔明)의 고지(古智)를 본받아 치마라도 보내야지, 사내놈의 행사 오니까?"
 
192
장령들이 한 마디씩 제각기 불평을 말하는 것을 임금은 그냥 묵묵히 듣고있을 뿐이었다.
 
193
입을 얽어맨 듯이 잠자코 앉아서 무거운 눈찌를 조물성 쪽으로 부읏고 있던 임금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차차 눈에 힘을 주는 것이 분명하였다.
 
194
머리까지 좀 들었다.
 
195
"저게 뭘까?"
 
196
드디어 입까지 열었다.
 
197
조물성을 등지고 임금께로 향하여 앉았던 장령들은 임금의 이 말에 일제 히 임금이 턱으로 가리키는 편을 보았다.
 
198
남문(南門)이었다. 어느 틈에 문이 열렸다가 닫겼는지 모른다. 하여간 성안에서 나온 것이 분명한 한떼의 인마가 이리로 향하여 오는 것이었다.
 
199
맨앞에는 기수(旗手) 두 명이 기를 높이 받들고 도보(徒步)로 오고 그 뒤에는 홍포(紅袍)를 입은 사람이 수레를 타고 양손으로는 서간(書簡)을 높이들고, 그 뒤에는 호위장(護衛將)인 듯한 사람이 열 사람 두 줄로 줄지어 말에 타고 - 이런 일행이 남문에서 이 백제진으로 향해 오는 것이었다.
 
200
백제 장령들은 처음은 머리만 뒤로 돌이켰다가 이 광경을 보고 모두들 임금께 비켜서 그리로 향하여 돌아섰다.
 
201
무론 고려 임금이 백제 임금께 보내는 사신(使臣)인 것은 틀림이 없었다.
 
 
202
홍포를 입었으매 왕족이거나 대신이거나 좌우간 얕은 신분은 아니었다.
 
203
모두들 의혹의 눈을 그리로 던졌다.
 
204
이 의혹의 주시(注視) 가운데서 고려 사신 일행은 백제 임금의 좌어한 곳에서 백 보쯤 되는 곳까지 와서, 수레와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정사(正使)가 맨 앞 서고 그 좌우편으로 비스듬히 기수가 달리고 그 뒤에 장령들이 서서, 먼저 거기서 국궁하여 절하고, 그런 뒤에는 정사는 간찰(簡札)을 높이든 채 허리를 굽히고 배종원들을 달고 차차 백제 왕의 진옥으로 가까이 왔다.
 
205
사신은 삼십 보 거리까지 이르렀다. 거기서 발을 멈추었다.
 
206
"고려국 사신 왕신(王信)으로 아뢰오."
 
207
국궁하고 자기의 신분과 이름을 아뢰었다.
 
208
백제측에서는 원노(元奴)가 행렬에서 나아갔다. 그리고 고려 사신에게 읍 하여 답례하였다.
 
209
"대백제국 대장군 원노라 하오. 전장에 문신(文臣)이 어떤 사명을 띠셨소?"
 
210
"고려국 군주 폐하께서 대백제국 대군주 폐하께 친서를 봉정합고자 진 중임을 무릅쓰고 왔소이다."
 
211
원노는 자기네의 임금을 돌아보았다. 임금은 받아오라는 뜻으로 머리를 끄덕이었다.
 
212
고려 왕에게서 백제 왕에게로 온 편지는 화친을 비는 글이었다.
 
213
거기는 과장(誇張)이며 허위가 없고, 자기 나라를 자랑하는 말귀가 없는 대신 백제에게 아첨하는 비굴한 말도 없이, 사실을 사실대로 지적하고 화친을 청하는 것이었다.
 
214
첫째로, 고려 왕은 지금 조물성 내에 군량이 얼마 많이 남지 않아서 오래 더 성을 지탱하기가 어려운 점을 지적하는 동시에 또한 백제군 역시 군심 이해이하여 고려군이 성을 나와서 응전할지라도 이를 격파할 만한 힘이 빠졌 음을 지적 하였고, 둘째로, 자기도 나라를 오래 비워두어서 마음이 안 놓인다는 말과 함께 백제도 또한 그러리라는 것을 지적 하였고, 세째 로는, 백제와 고려는 본시 아무 은원(恩怨)도 없이 서로 침략하여 빼앗겼다 빼앗았다 하는 것은, 국탕과 인력을 헛되이 소모하는 데 지나지 못 하는 점을 지적 했고, - 그런 형편이니 지금 서로 호미난방(虎尾難放)격인 싸움을 중지하고 친하게 지내자는 말과 그 증거로서 지금 사신(使臣)으로 간 왕신(王信)은 고려 왕 자기의 당제(堂弟)이니 볼미를 맡으시고 백제에서도 또한 한 사람의 볼 미를 보내주셔서 신의에 다짐을 두어 주시면 이 이상 영광이 다시 없겠다는 뜻으로 글을 마치었다.
 
215
그 날 저녁 고려 사신 왕신은 백제 진중에 멈추어 둔 채로, 백제측에서는 어전 회의가 열렸다. 사실 지기지기하였다. 조물성 하에 대처한 지 한 달 미만 이었다. 그러나 싸움도 않고 닭쌈하듯 서로 겨루고만 있는 한 달은 지 기 지기 하기 한량없었다. 더구나 불편하고 부자유한 야영(野營)생활의 한 달 은인 젠 견디기 힘들었다.
 
216
고려측에서도 벌써 진퇴유곡의 상태인 것은 짐작이 안 가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고려의 궁서(窮鼠)가 달려들 때에 이를 때려부수기는커녕 떨쳐 버릴 기운이라도 있는지가 매우 의심쩍을 만한 처지라 이 화친 제의를 물리 칠 수가 없었다.
 
217
어전회의의 결과 고려의 제의(提議)에 좇기로 결정이 되었다.
 
218
고려 왕에게서 백제 왕에게로 볼미로 왔던 왕신은 이튿날 다시 자기네의 임금께로(백제 왕의 답서를 가지고) 돌아갔다. 백제 왕의 답서는 대략 이런것이었다.
 
219
첫째로, 볼미 교환을 승낙하여 왕신을 볼미로 받는 동시에 견훤왕의 생질 되는 진호(眞虎)를 고려에 볼미로 보내고, 둘째로, 고려가 이번 백제를 침노한 것은 무명의 사(無名師)지만 백제가 고려에 출병하였던 것은 이전에 고려 왕이 궁예의 신하로서 이신벌군(以臣伐君)을 한 행사에 대한 문죄사니까, 거기 대한 답변을 들을 것.
 
220
이번 무명의 사를 일으켰던 일에 대한 사죄의 뜻으로 거서(居西) 등 이십여 성(城)을 백제에게 할양(割讓)할 것.
 
221
등등이었다.
 
222
고려 왕은 다시 왕신의 편에 국서를 백제 왕에게 보냈다. 거서(居西) 등 이십여 성은 진정하겠다는 말과 문죄(問罪)의 건에 대해서는 어의에 부(副) 하도록 할 터이니 한번 서로 봄이 좋을 듯하다는 뜻을 말하고, 더우기 친목을 도모키 위해서라도 두 나라 임금이 한좌석에서 가슴을 풀어 헤치고 그 회포를 교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명일 오정께 약소하나마 조물성 내에서 잔치를 한번 열고 용안을 우러러보고 싶다는 뜻을 전하였다.
 
223
여기 대하여 몇몇 장령은'신하로서 임금을 친 반복무쌍하고 무도 무의 한 고려 왕을 성내에서 만나는 것은 위험합니다’고 반대도 하였으나 견훤왕은 잔치에 임하기로 승낙하였다.
 
 
224
백제 임금은 노부도 없이 마치 대궐 후원이라도 거니는 것 같은 간단한 행차로 조물성 고려 왕의 잔치에 임하였다. 네째 왕자 금강과 장군 원노와 시종장(侍從將) 단 세 사람이 배행할 뿐이었다.
 
225
이 너무도 간단한 길신가리에 고려 군인은 눈을 크게 하였다. 말께서 내리는 이 군신 네 사람을 고려 왕은 뜰 아래 내려서 영접하였다.
 
226
"보잘 것 없는 곳에 왕림하셔서 영광 이 위에 없겠읍니다."
 
227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고려 왕께 백제 왕도 상례를 하고 고려 시종의 안내로 연석에 들었다.
 
228
동향하여 고려 왕 서향하여 백제 왕의 자리가 금일월 병풍을 등지고 잡혀있었다. 신하들은 조금 떨어져 앉게 되고 술을 따르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기 위하여 여령(女伶) 몇 명이 연석 뒤에 대령하고 있었다.
 
229
그것은 흥미있는 대조였다. 늘 얼굴과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시재 무슨 이야기가 나오려고 입술에 맺혀 있는 듯한 고려 왕 왕건과 음침하고 무표정한 커다란 얼굴에 입을 꽉 봉하고 태산 같이 주저앉아 있는 백제 왕 - 이 정반대의 두 임금은 한 상에 마주 앉았다.
 
230
공인(工人)이 울리는 요량한 음악에 어리어 여령의 따르는 술은 두 임금의 잔에 찼다.
 
231
백제 왕이 먼저 말없이 잔을 들이켰다. 그것을 보면서 함께 잔을 들은 고려 왕은 술을 입술에 약간 바르기만 할 뿐 도로 잔을 놓았다.
 
232
"주석(酒席)이 무르익기 전에 대왕께서 과인(寡人)을 힐책하신 건에 대하여 한 마디 변명하겠읍니다."
 
233
"?"
 
234
백제 왕은 눈을 구을려서 고려 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235
"대왕께서는 과인이 고려국을 창업한 것을 태봉(궁예의 세웠던 나라) 국에 반역 했다고 보시는 듯하오이다마는 그것은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태봉국 창업 주는 본시 신라의 왕손으로 따로 태봉국을 세우신 것은 대왕께서도 아시는 바와 마찬가지고, 과인이 한때 태봉국에 신사(臣仕)한 일이 있는 것도 아시는 바와 마찬가지올시다만, 후에 과인이 고려국을 창업한 것은 과인 본시 고구려의 후인으로 조국을 재건한 것이지 태봉국을 둘러엎고 태봉국을 반역 해서 태봉국 전왕을 손위시키고 과인이 태봉국을 찬탈한 것이 아니올시다. 과인은 과인대로 고려국의 창업주가 되고 태봉국은 태봉국대로 무간 섭하려고 했었는데 태봉국 군주께서는 스스로 겁을 젓수시고 피난을 가시다 가토 민에게 해를 보신 것이옵지 과인의 아랑곳할 배 아니올시다. 전혀 근본이 다른 것을 대왕께서는 과인을 힐책하시오니 민망할 따름이로소이다."
 
 
236
백제 왕은 이 변명을 한 마디도 의견을 끼지 않고 묵묵히 들었다. 이론은 성립 된다. 그러나 그것은 궤변이라 보기 때문에 백제 왕은 대답없이 다시 술잔을 들었다.
 
237
고려 왕은 매우 다변하였다. 그의 얇은 입술을 쉴 새 없이 놀려 가면서 백제 용병의 귀신같음을 찬송하고 신라 역대의 난정을 비웃고, 옛날 고구려와 백제가 같은 부여씨(扶餘)의 갈래에서 두 나라를 이룩하고 동남방의 약국 신라를 지도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또 다시 힘을 아울러 신라를 지도 하자는 말이며, 또는 발해(渤海), 거란(契丹), 후당(後唐) 등등 국제적으로 델리 케 잇한 입장에 있는 부여 계통은 힘을 아울러서 이 중압에 대항 하여야겠다는 말이며 - 입을 꾹 봉하고 있는 백제 왕의 목까지 혼자 맡은 듯 이입을 닫칠 때가 없었다.
 
238
고려 왕이 많은 말로써 연석을 흥성스럽게 할 동안 백제 왕은 거진 침묵을 지켰다. 단지 한 번 발해국의 이야기가 났을 적에 한 마디 끼어 보았다.
 
239
"대왕의 창업하신 고려국과 발해국과 관계가 어떻게 됩니까?"
 
240
"특별한 관계는 없읍니다. 고구려 왕실이 무너진 뒤에 나라 없는 고구려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부득불 발해라는 새 나라이 생겨 났지만 과인 이이룩한 고려국은 고구려 왕국의 정통 후계자올시다."
 
241
"고려가 고구려의 정통 후계자면 왜 압록강을 넘어서서 발해를 병합 하고 국내성(國內城)이나 환도성(丸都城)에 서울을 정하고 서쪽으로 중원을 넘겨다볼 생각을 못하고 - 하다못해 고구려 말년의 도읍지인 평양에라도 도읍을 정하고, 남북으로 응시하지 못하고, 맨 남단(南端) 송악에 도읍을 정 하셨수?"
 
242
이것은 지금부터 오십 년 전 이 임금의 스승 되는 도선이 이 임금에게 내린 격려사(激勵辭)였다. 고려가 송악에 정도를 하기 때문에 늘 일말의 불안을 느끼는 백제 왕은 오십 년 전의 스승의 말을 인용하여 고려 왕의 마음을 등 떠본 것이었다.
 
243
그러나 그런 깊은 속사정을 모르는 고려 왕은 아주 가볍게 이 말을 취급 하였다.
 
244
"송악은 과인의 고향이오라 구정을 버리기 어려워 임시로 송악에 정도 했 읍지만, 장차 기초 든든해지는 날은 이도를 할까 합니다."
 
245
어서 그렇게 되과저 - 백제 왕은 축수하였다.
 
246
황혼이 거진 되어서 백제 왕은 조물성을 나섰다. 고려 왕은 백제 왕의 귀어에 친위병 백 명을 시켜 호위케 하였다.
 
247
이 날의 잔치에 있어서 백제 왕이 본 바 고려 왕은 요컨대, 지혜 많고 재간 많은 사람으로서 만약 장래에도 전장에서 그와 대할 기회가 있으면 무엇보다도 잔재간을 피울 기회를 엄밀히 방지하며 일변 정면으로 중압을 가하면 손쓰지 못하고 물러갈 사람이라 보았다. 백제가 신라를 칠 때마다 고려에서 곁들이를 드는 것은 백제가 미워서 그러는 것도 아니요 신라에 특별한 호의를 가진 바도 아니요 단지 신라에 은혜를 팔아서 장차 필요한 시기에 ' 은혜의 값’을 톡톡히 받아내려는 복선으로 보았다.
 
248
그 이듬해(후당 천성 원년) 고구려의 후신인 발해는 드디어 거란(契丹)에게 멸함을 받았다. 전국(傳國) 이백이십팔 년 - 조국 고구려를 잃은 뒤에 발해국을 세워 가지고 몸을 의탁하고 있던 고구려 유민들은 두번째 나라를 잃고 그래도 핏줄 끌리는 국가를 찾아가느라고 혹은 삼사백 명씩 혹은 일이천 명씩 간혹은 몇 가족씩이 집단이 되어 꼬리를 지어 압록강을 건너 신흥 고려국에 몸을 의탁하였다. 압록강 이남의 고구려 옛 터는 그 새 이백여 년간을 주인 없는 땅으로 지내 왔었고, 왕건의 고려국이 창업된 뒤에도 고려국은 남쪽으로 백제와 신라와만 겨누느라고 여전히 무주공성으로 남아 있던 거친 땅에는 차차(옛날의 고구려 유민이요, 그 뒤 발해국 유민이던) 백성들이 들어차서 인연(人烟)이 그쳤던 땅에는 다시 밭갈고 베짜고 장사하는 사람들의 흥성스러운 소리에 고구려의 시대를 재현한 듯하였다. 그리고 이 종주권(宗主權)이 명확치 않던 광대한 지역은 발해 유민들이 고구려에 투신 코자 들어와서 거주하느니만치 저절로 고려국의 영역이 되어 버렸다.
 
249
발해국이 망한 덕에 저절로 국토와 백성이 증가된 고려는 마치 아침 해와같이 찬연히 이 반도 위에서 빛났다.
 
250
그 여름, 불행히도 작년에 고려로 볼미로 와 있던 백제 왕의 생질 진호(眞虎)가 죽었다.
 
251
백제에서는 이것은 필시 고려에서 죽인 것이리라 하여 백제에 볼미로 가있던(고려 왕의 당제 되는) 왕신(王信)을 마저 죽였다. 그리고 고려를 무신 타 하여, 곧 동병(動兵)을 하여 웅진(熊津) 방면으로 진출시켰다.
 
252
그러나 그 새 몇 번 겪어 본 바 백제 군병의 정예함을 잘 아는 고려에서는 응 전하지 않고 성문을 굳게 닫고 오로지 지키기에만 힘썼다.
【원문】문죄(問罪)의 사師(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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