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한글 
◈ 대하(大河) ◈
◇ 대하(大河) 14장 ◇
카탈로그   목차 (총 : 16권)     이전 14권 다음
1939
김남천
 

1. 14장

 
2
문길덕이네 제사를 끝까지 보지 않고, 두칠이는 비가 푸뜩푸뜩 듣을 때에 제 집으로 돌아왔다.
 
3
처음 상전댁 맏서방님 형준이의 말을 듣고, 그는 댓바람에 제 집으로 쫓아오고 싶었다. 안해에게 사연을 다져서 묻고, 대다이 애매하고 모호하면 분나는 대로 한바탕 후려 갈 기기라도 해아만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어이된 일인지를 좀더 자기 혼자 되새겨 보려고, 그대로 가만히 아무 일 없은 듯이, 같은 친구들이 모인 방안으로 들어가 앉아서 한참 동안을 생각에 잠겨 있었다.
 
4
어디로 하루바삐 떠나달라는 말은, 물론 대수롭게 여길 건덕지가 되지 못한다. 제 아무리 맏 서방님이라 할 갑시, 집안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날이 오든가, 박참봉이 세상을 떠나든 가하기 전에는, 그가 나가라 들어오너라 할 그런 계제는 되지 못하는 걸 두칠이는 잘 알고 있다. 형준이가 박참봉보고 말해서 박참봉이 다시 이러니저러니 할 수는 있다 쳐도 형준이 그의 말만 갖고는 곧 집을 떠난다든다 그러지 않더라도, 과히 뒤탈이 없을 것쯤은 두 칠이 로서도 짐작이 된다. 박참봉까지도 친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라면, 뒷날 다시 자기를 불러놓고 분부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형준이가 하루바삐 이 집을 떠나달라는 말은, 그렇게 겁나는말이 되지는 않는다.
 
5
그러나 사실을 따져놓고 보면, 집을 떠나달라는 말이 사실이라고 하여도, 그로서는 결코 그것만으로 인하여 뼈 아픈 일이 생기든가 그렇진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단 두 식구, 이즈음 농토를 떠나서 신작로 닦는 델 쫓아다니든가, 측량대를 둘러메고 싸다니든가, 남의 짐을지고 다녀도, 입에 풀칠이나 하기엔 그리 힘들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성한 몸이 하루 종일 뼈가 노근하도록 일해주고, 어디 가선 못 살 것이냐 하는 생각이 가끔 들었으나, 저에게 쌍네를 안해로 주고, 다시 절게로부터 막서리로 한 등 높여주기까지 한 박참봉 나리 댁을, 아무 분부 없는데 제 편에서 뛰쳐나오는 것은, 배은망덕도 심한 일이라고 제 스스로 단념하고 마는 것이었다.
 
6
그러므로 박참봉이 친히, 이러저러한 까닭으로 인연해서, 너는 차후로 내 집을 떠나서 살어라, 하고 말한다면 모르거니와, 그러기 전에는 형준이 말쯤을 갖고, 봇짐을 싸서 지는 게 되려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7
그러나 두칠이의 생각이 외곬로 흘러 웅덩이 속으로 침전해버리는 것은, 그의 안해의 소위 '행실머리’와 두뭇골 도련님과의 관계 여부에 있었다.
 
8
두칠이도 물론 안해가 그를 달가워하지 않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머리를 올려주기 퍽 전에 제가 아직 절게로 있을 때 일만 해도 그렇고, 그 뒤 두칠이가 분명히 쌍네의 남편이 된 뒤에도 안해가 그를 정성껏 모시든가 그러지 않는 것쯤은 두칠이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떻다고 반항을 하거나, 실없이 포달거리거나, 구박을 하려 들거나, 그런 일은 없었으니, 날이 가고 아이가 생기고, 그러노라면 저절로 화합한 가정이 되리라고,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다. 으레껏 잉태했던 아이가 유산을 해버려, 적지 않이 낙망이 가씅나, 그는 그것으로 결코 절망하지는 않았다. 안해는 그대로 아름다웠고, 비록 말은 없고, 보는 사람 따라서는 서먹서먹하다고도 할 것이나, 결코 그에게 슬픔을 주든가 그렇진 않았다. 부잣집 색시나, 첩들이 하는 것처럼, 간사하고 삽삽하고 살뜰스러운 맛은 없으나, 가난하고 비천한 집 안 해다 웁게, 건강하고 부지런하고 순박하다고 생가갷온 것이다. 그는 안해를 믿어왔다. 안해를 사랑 하는 마음은, 절게 시절보다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십 년이 하루 같은 고 된 일을 하면서도, 안해를 생각하면 즐거움이 되었고, 하루종일 일에 시달린 몸에서 감발을 풀고, 저녁상을 받으면서 아름다운 안해의 얼굴을 보면, 이튿날 호미 들고 집을 나설 생각이, 괴로움이 되진 않았던 것이다. 쌍네만 옆에 있다면, 그는 무슨 일이라도 할 것 같았고, 그가 손을 잡고 쫓아만 온다면, 어디라도 무서울 것 없이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던 쌍 네 였고 그러던 안해이다.
 
9
지금 제 안해가 자기를 속이고 마음을 다른 사람과 나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두 칠이가 한참 동안 그게 어이된 수작인지 종잡을 바가 없었던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속으로 몇 백 번을 도리질 하고나서, 그러나 머리를 들어 보니 역시 맏서방님이 움직이지 않는 표정으로 제 앞에 서 있다. 분함보다 슬픔이 앞을 섰다. 말할 것을간단히 해치우고는 형준이는 노한 사람처럼 뚜벅뚜벅 걸어가 버린다.
 
10
제 안해와 통한다는 사나이가 다른 사람이 아니고 바로 두뭇골 도련님이라니, 그렇다면 어이 된 영문으로 그 말을 받서방님, 친히 제가 와서 나에게 일러바치는 것일까. --- 물어보고도 싶었으나 이미 형준이는 그 자리에 없었다.
 
11
두칠이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어디 뒷간이라도 잠깐 다녀올 사람처럼 길덕이네 집을 나왔다.
 
12
"주안 나오게 됐는데 어데 가나?" 하고 길덕이가 묻는 것을,
 
13
"요, 밖에 잠  다녀오겠네." 하고 대답해버리었다. 대문 밖에 나서니 비가 푸뜩푸뜩 떨어진다.
 
14
걸음을 바삐 옮겨놓으면서 얼굴과 머리에 찬 빗방울을 맞으니, 마음은 더한층 초조해진다. 강역으로 돌아서, 가시 울타리께로 와서 제 방을 바라보았을 때, 그는 난생 처음 무서운 격정이 화염처럼 가슴속에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홱 문을 낚아채고 들어가면, 캄캄한 방 가운데서 뭣이든가 손에 잡히는 대로 휘둘러 칠 것 같다. 그는 제 자신이 두려웠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어디로 뛰어다닐지 모를, 성난 말처럼 생각이 갔다. 그는 손으로 울타리 문을 열고 뒤뜰로 들어서, 제 방문을 연다. 방안은 캄캄하다. 문 여는 기척이 나면 안에서 일어나는 인기척이 있어야 할 텐데 그것이 없다.
 
15
"어데, 갔나?"
 
16
대답이 없다. 문 옆에 세운 무푸레 채로 방안을 휘저어본다. 반짇고리가 걸리고는 아무 것도 닿는 것이 없다. 방안은 텅 빈 것이다.
 
17
'이것이 어데로 갔을까.’
 
18
'과연 형준이 서방님이 이르는 말은 사실일까.’
 
19
두칠이는 방안에 들어갈 염도 하지 않고, 빗발이 제법 잦아진 뜰을 향하여 문턱에 허리를 걸치고 앉았다.
 
20
한참 앉았으려니 뽕밭 머두리에서 발자취 소리가 잦게 들리고, 이윽고 가시 울타리 문을 밀더니, 쌍네가 비를 피하여 들어온다. 토방에 올라서서, 어디서 얻어 쓴 것인지, 낡은 자루를 한 귀퉁이를 넣어서 고깔처럼 둘러썼던 것을 벗어놓고, 덥벅 문설주로 대서다가, 무릎으로 남편의 정강이를 건드렸다.
 
21
"아이머니나." 하고 그는 약간 놀래었다.
 
22
안해의 살냄새가 비에 젖어서 두칠의 코숭이 앞에 풍겨 돌았다. 그는 가만히 앉은 채로 묻는다.
 
23
"어데 갔더랬어?"
 
24
안해는 주춤거리다가 엉 겁결에,
 
25
"품 한 자루 빌릴까 해서 꼬맹이 집에."
 
26
그 다음은 마무리를 채 않고 남편의 몸을 피해서 방안으로 들어간다. 눅눅하니 젖은 치마 폭이 두칠이의 볼편을 스치고 방안으로 넘어간다.
 
27
쌍네는 방안으로 들어가더니 천연스럽게 자리를 깔아놓는다. 그는 지금 엉겁결에 한마디 내 붙인 거짓말에 용기를 얻은 것이다.
 
28
형준이한테 그 일을 당할 뻔하곤, 쌍네는 한참 동안을 생각다 못해 점 잘 친다는 보살 할미를 찾아 갔었다. 조용히 늙은 노파를 마주 대하고 앉아서,
 
29
"내가 지금 무슨 죽을 혼이 들었는지 큰 일이 났소와요." 하고 이야기를 시작할 땐, 그는부끄럼도 아무것도 생각지 못하였다.
 
30
"임자나이 몇이든가."
 
31
"스물 둘입지요."
 
32
까맣게 때에 걸음 (그을은) 등잔에 콩알만한 작은 불심이 기름을 빨아 올리고 있다. 그 밑에 쭈그렁 바가지처럼 오골쪼골한 보살할미가 개다리상에, 길게 꿴 엽전 타래와 따로 몇 잎 꿰지 않은 엽전을 들고, 까치다리를 야무지게 한 채 당돌하니 앉아 있다.
 
33
"임자 서방의 나이는 몇이와."
 
34
"아마 서른 하나입지요."
 
35
"서른 하나?"
 
36
지렁이 같은 가느다란 눈을 비집듯이 흡떠본다.
 
37
"그래 말해보시게."
 
38
쌍네는 잠시 눈을 밑으로 깔고 가만히 생각해본다. 생각이 먹혀서 찾아오긴 했으나, 털어놓고 제 몰골을 이야기하자니 부끄럽기 짝 없는 일이었다. 낯을 들어 한번 작은 방안을 두리 번 두리 번하는데,
 
39
"아무두 내 집엔 없으니 마음을 턱 놓으시게." 하고 보살할미는 재촉한다. 쌍네는손을 오므락오므락 만지면서, 가끔 가다 주춤주춤 하면서도, 쪼루루 단숨에 이야기를 놓는다.
 
40
"꽃 떨어질 때니께, 한 달반이나 된가보외다. 우리 집에서 촌에 한 이틀 보항간 새, 늘상 날 보구 수상시레 구시던 셋째 도련님이, 밤에 내 방엘 들어왔으니 어떡헐 도리가 있소와요.
 
41
그래 난두 젊은 마음에 장난으루다 치부 대일 생각 치구서 그랬더니만, 그게 무슨 되 집어 쓴 병집인지, 두 번 뵈온 그이 생각이 도무지 머리빡을 떠나질 않소와요. 그러자 우리 집에서 돌아왔으니, 도련님을 뵈올 길은 없어졌는데, 또 일 숭하게 되려니 맏서방님마저 내 게다 마음을 치시고 찐덕거리시는구만요. 그이는 내가 셋째 도련님과 그런 걸 알구 있지요. 인젠 오늘밤 안으로 필시 우리 집에서두 알게 될 테구, 이리 되믄 한 세상 구박받구 사는 바엔, 아여 일을 터쳐버리는 게 외려 속 시언할 것두 같구, 아니 머 내 손으루 일을 저지르지 않는 대두, 세상은 뒤죽박죽 되구 말 테니, 종차루 어찌야 좋을지 도무지 염이 나질 않는구려.
 
42
그러니 처음부텀 맘에 없는 서방 털어버리구 사는 게 팔자소관인지, 도련님이 그러시는 게 짖 ㄴ 정의 마음인지, 한번 장난에 그치는 겐지, 모두를 신령님께 물으시어, 청청히 밝혀주시도록 한괘 놓아주시우다."
 
43
보살할미는 반백이나 된 머리빡을 끄떡끄떡한다. 터거리로 쌍네의 손 있는 편을 한 번 눈 질하여 쌍네는 바른손에 쥐고 있던 백통전을 가만히 상 위에 올려놓았다. 돈을 본 다음에야 보살 할미는 엽전을 들고 중얼대기 시작한다. 한참을 중얼대다가 엽전타래를 휙 상 위에 던져 본다.
 
44
"본서방과는 팔자에 없는 연분이군."
 
45
이 말을 들으면서, 쌍네는 가슴이 덜럭 물러앉는 것 같은 착각을 맛본다.
 
46
"정녕 그런지 또 한번 던져 보시우다."
 
47
이렇게 말하는 쌍네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는 듯하였다.
 
48
---역시 팔자에 없는 연분임에 틀림없는가보다. 처녀적에 그렇게 싫던 두칠이다. 억지로 한자리에 누워서도, 아무 감흥이 내솟구지 않던 두칠이다. 내 속에 들었던 그의 씨가 세상밖에 나오기 전에 흘러 버린 것도, 인연을 뒷날까지 남기지 않으려 한 때문일 게다. 모든 것이 높으신 존신께서 점지하시는 일임에 틀림이 없다.
 
49
개다리상 위에 두닢 맞붙은 엽전이 하나도 없는 것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쌍네는, 두 칠이와는 갈라져야 할 팔자소관인 걸 거듭 생각하고 앉았다.
 
50
그러나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으면서도, 장차 그와 갈라지게 되기까지의 일이 한심하고 두려웠다. 한편 측은한 생각이 두칠이에게로 가는 것도 속일 수 없는 진정이다. 두 칠이가 그 를 얼마나 미칠 듯이 사랑하고 있는지 쌍네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 점괘에 틀림이 없는가를 다져보듯이, 또 한 번 엽전타래를 던져 보라고 졸라 보는 것이다. 그러나 보살 할미는 머리를 쌀레쌀레 내젓는다. 근ㄴ 염불 소리처럼 곡조를 붙여서
 
51
"두 번 세 번 시끄럽게 굴면 존신 대감께서 노염이 나신답니다." 하고 쌍네의 요구를 거절해버린다.
 
52
쌍네는 하는 수 없이 박참봉네 셋째 도련님, 두뭇골 도련님과의 연분이 팔자에 있는 것인가 를 물어볼 밖에 없었다. 머리를 흔들흔들 놀리며 엽전타래를 바른손으로 들을 때에, 쌍네는 한없이 긴장하였다. 보살할미가 던지는 엽전타리에 나타난 대로, 그의 운명은 결정이 된다고 생각는 것이다.
 
53
'도련님, 두뭇골 도련님, 키 크고 미츳하고 사나이다운 훌륭한 도련님. 어이 이 비천한 몸이 작히 귀하신 몸을 섬길 수 있겠나이까. 팔자에 없으소서, 지내가던 길에 한번 걷어차 본 돌멩이로 대해 주시소사.’
 
54
입 밖에 낼 듯이 쌍네는 속으로 빌어 섬긴다. 그러나 그의 내심이 이런 말과는 딴판 이었던 것은, 보살할미가 휙 던지는 엽전타래 맨 마지막에, 두 닢의 엽전닢이 맞붙은 걸 보고, 눈물을 흘릴 만치 기꺼워 한 걸로도 족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두뭇골 도련님과 쌍네는 하늘이 정해준 배필이며, 존신이 점지해놓은 연분이라고, 상 위에 흩어진 엽전타래는 말하고 있지 아니한 가
 
55
쌍네는 보살할미의 집을 나왔다. 비가 내린다. 마음 같아선 비가 줄기차게 오는 속을 흠뻑 물에 젖으면서 걸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꿰어진 자루 하나를 얻어서 고깔처럼 머리에 쓰고, 가만히 생각에 잠겨서 걷는다. 이미 그의 갈 길을 환하니 아는 바엔, 그것을 어떻게 실행에 옮길까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뭣이든가 부딪치고 싶은 대로 부딪쳐오라. 이미 하늘이 정해논 배필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팔을 걷어 붙이고, 칼로 두 뭇 모를 가르듯이, 썽둥썽둥 잘라 댓바람에 두칠이와의 관계도 처리해버리고, 그리고 두뭇골 도련님과 어디 먼 곳으로 도망이라도 치고 마는 게 마땅할 것 같다. 그러나 과일이 여물어 꼭지가 물러서 떨어지도록, 나무 아래 누워서 입을 벌리고 기다리자, 이미 존신이 점지한 인연이니, 저절로 두칠이는 물러가고, 도련님이 무르익은 과일처럼 내 품에 떨어질 것이다. --- 하고 생각하면, 아무말 않고 잠잠히 날이 오기를 마음을 굳게 먹고 기다리는 것이 온당할 것도 같다.
 
56
두루두루 이런 생각으로 맴을 돌 듯하다가, 채 생각이 결론을 잡기 전에, 그는 제 집에다 달았던 것이다. 품 한자루 내달라고 꼬맹이 집에 갔던 길이란 말은, 엉겁결에 지어 만든 생 뚱한 거짓말이었다.
 
57
캄캄한 방안에서 이불을 깔아놓고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쌍네는 치마를 벗고 자릿속에 누워버린다.
 
58
"냉수 한 그릇 떠와."
 
59
두칠이는 문턱에 앉은 채 심부름을 시킨다. 그러나 쌍네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누워 있다.
 
60
"귀가 매였나."
 
61
결코 이런 말을 재차 할 만한 사나이가 아니었다. 냉수를 떠다달라는 것까지도, 두 칠 이입에서 나옴직한 말이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먹구 싶으면 아무말 없이 제 발로 부엌까지 가서 제 손으로 사발을 들어 퍼먹었다. 설사 냉수를 떠오라고 심부름 조로 말했을 갑시, 아무 대답이 없으면 혼잣말로 '벌써 잠이 들었나’ 하고쯤 말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야 할 두 칠이가 오늘은 볼멘 소리로 '귀가 메였나’고 호령이다. 필시 무슨 말이 두칠이 귀에 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62
"이레두 생게 냉큼 못 니러날까."
 
63
이 말이 채 떨어지기 전에, 쌍네는 푸시시 이불을 들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남편의 이 목소리를 들으면서 등살에 오싹 소름이 칼처럼 끼치는 것을 느낀 때문이다. 그는 비로소 사나이의 힘을 눈앞에 의식한다. 어떤 공포가 무서운 폭발력을 감싸고이 캄캄한 비 내리는 어둠 속에 장비되어 있어, 어느 한 귀퉁이를 잠시 건드리기만 하면, 벼락처럼 온 우주를 뒤엎어버릴 것 같은, 그런 힘이 쌍네의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만 같다. 왕대 사발에 냉수를 떠들고, 발끝을 조심히 더듬어서 남편이 앉은 곳으로 간다.
 
64
쌍네가 떠다주는 물사발을 받아 들고, 두칠이는 일순간 안해의 얼굴에 물벼락을 들 씌우고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그는 펄떡펄떡 뛰는 팔을 꾹 자제하면서, 사발의 물을 요란한 소리가 나게 덜컥덜컥 마셔버린다. 비는 아직도 내린다. 한 방울이나 남았을까 한 빈 사발을 뜰 안쪽으로 쏟아버리듯 하고, 그는 사발을 도로 안해에게 주었다.
 
65
"더 떠올까요?" 하고 묻는 말엔 두칠이는 아무대답도 못 한다. 이렇게 물어본 쌍네의 가슴에도, 불현 듯이 남편에 대하여 측은한 생각이 솟아 오르지 않진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남편 두 칠이에 대한애정이 소생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결코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의식 하였을 때, 쌍네의 가슴엔 눈물이 어리었다.
 
66
두칠이는 가만히 문턱에서 일어난다. 방안에 들어서더니, 안해의 옆에 아무 말 없이 서있다. 빗소리와 낙숫물 소리를 귀따갑게 들으며, 그는 안해의 잔등에 왼손을 감았다. 그는 무서운 힘을 갖곤 안해를 부둥켜 안았다. 두 눈으로 펑펑 쏟아지는 눈물을 덜컥덜컥 삼키면서,
 
67
"먼 데루 가 살자."
 
68
안해의 앙가슴에 낯을 부비며,
 
69
"단 둘이 먼 데루 가 살자."
 
70
쌍네도 함께 솟아 오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면서, 그러나 두칠이가 하는 말이 무엇을 뜻함인지 깨달았을 때, 소스라칠 듯이 온 몸을 부르르 떨면서 놀라지 않을 수는 없었다.
 
71
이튿날 아침 두칠이는 일찌감치 조반은 먹고도, 해가 한 발이나 퍼지도록 밭으로 갈 염을 내지 않았다.
 
72
쌍네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을, 예전대로 상전댁 부엌에서 늘상 하는 말은 일을 습관대로 핸치고 있었다. 그러나 여느 때와는 다른 남편의 수상한 태도가, 장차 무슨 일을 저지를 생각인지, 종잡을 길이 없어 일이 손에 붙질 않았다. 연자간으로 겨를 푸러 갔다 오는 길에 두 칠이가 사랑 마루에서 주춤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겨 담은 버주기를 마당에 놓고 그늘에 숨어서, 남편의 하는 양을 눈붙여 보고 있었다. 흰 갓신이 놓인 것을 보니, 박참 봉 나리가 두뭇골서 막 조반을 먹고 금박 나온 김인 듯싶다.
 
73
"나릿님, 저올세다."
 
74
손을 읍하고 두칠이는 서 있더니,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 뒤에,
 
75
"긴하게 여쭈울 말씀이 있사와 왔습너니다." 하고 두어 번 헛기침을 해본다. 들어오라는 분부가 났는지, 신을 마루 밑에 벗어놓더니, 두 칠이는 사랑문을 가만히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76
그 다음은 목소리가 연자간 앞까지는 들려오지 않는다.
 
77
쌍네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필시 적지 않은 사태가 종차루 벌어질 것 같은 무서운 예감이 가슴 속을 구렁이처럼 설레고 돌아간다. 그는 허둥지둥 중대문을 들어서서 사랑방 부엌으로 들어갔다. 여물을 끓이는 겸 사랑에 군불을 때는 부엌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방안의 말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부엌과 방과의 사이에는 두꺼운 바람벽이 가로막혔을 뿐으로 한 짝의 문도 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미친 사람 모양으로 뿌르르 안부엌에 들어갔다. 찬장에서 놋대접을 꺼내 바리에 숭늉을 떠서 받쳐 들고 다시 사랑으로 나갔다. 부엌 안에는 아무도 없고, 둘째 아씨가 혼자서 볏짚물에 머리를 감고 있었다. 사랑에서 숭늉 떠오라는, 호령이 언제 났든가 싶어, 꺼먼 머리칼을 놋대야에 담근 채 둘째 아씨는, 쌍네의 나가는 양을 잠깐 동안 바라보다가 만다.
 
78
사랑문 밖에 서서 쌍네는 물그릇을 든 채 귀를 기울인다.
 
79
"글세 자네 생각이 그렇다니, 나루서는 뭐라 말할 수는 없어 한 대, 누가 도로 공부( 道路工夫) 루 나가본 친구래두 있능가. 공연히 남의 꾀임에 떠서, 인간은 많지 않다 해두, 솔 가해 몰려 갔다가, 낭패보는 수두 많으닝께루."
 
80
이렇게 천천히 말하는 것은 박참봉이었다.
 
81
"따루이 또 이 고장을 떠나야만 할 긴요한 사정두 생겠삼구, 그래서 겸사겸사 한번 가보려구 결심한 것이올습너니다."
 
82
"응, 글쎄 그렇다믄 하는 수 없지, 지어오던 농사나 누구에게 맡기구, 또 이왕이나 단오나내 집에서 새구 가게 하시게. 지금 신작로가 어데까지 갔는지 모르나, 자네 내외가 내 집에 와서 해준 일이 적지 않어. 그러니 게까지 가는 노비나 그러한 건, 내 결코 섭섭하게 안 할 터니께. 단오나 지내서 떠나게 하게."
 
83
으젓하니 박참봉은 두칠이의 요구를 허락하고 앉았다. 이 고장을 떠나야 될 긴요한 사정이 무엇인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묻지도 않고, 두칠이가 이 집을 떠나서 원산 방면으로 도로 공부가 되어 가겠다는 것을 허락하고 앉아 있는 것이다.
 
84
쌍네는 이 이상 더 방안의 이야기를 들ㅇㄹ 필요가 없었다. 들고 있던 숭늉 같은 건 방안에 들여놓으나마나, 그는 그것을 그대로 들고 다시 부엌으로 돌아왔다. 돌상 위에 물 그릇을 놓고, 둘째 아씨의 눈마저 피하여 그는 혼자서 뒤꼍으로 나간다. 멍울이 밤알만큼식 큰, 함박꽃 포기 앞에 와서 시름하지 쭈그리고 앉아, 그는 흐르는 눈물을 어이할지 모른다.
 
85
둘째 아씨 보부는 머리를 볏짚물에서 빼서 다시 맑은 물에 헹구고 있었는데, 쌍네가 치마폭에서 바람이 날 지경으로 부엌을 앞뒤로 드나드는데, 보아하니 신색과 거동도 수상하고 금방 들고 나갔던 물그릇을 그대로 들고 들어온 것도 무슨 곡절이 있어 보인다. 얼마 전에 맏 동서한테 서 귀넘겨 들은 말로, 두뭇골 시아우가 쌍네방엘 들어갔다는 걸 들은 법 한 데, 그 런 걸로 인연해서 무슨 사연이 벌어진 것은 아닐까 생각이 간다. 수건으로 물을 젓어내고, 머리카락을 대충 틀어서 비녀로 꽂은 뒤에, 그는 넌지시 부엌 뒷문으로 쌍네의 모양을 살펴보았다. 복나까리가 있고,창포가 줄기차게 무성하고 빨랫줄이 건너간 뒤꼍에, 함박꽃 포기를 마주 대하고 앉아서, 쌍네는 어깨를 추며 있다. 울고 앉았는것에 틀림없었다. 보부는 민망스런 생각이 가서, 잠시를 그대로 문설주에 손을 대고 내어다보다가,가만히 발을 옮겨놓아 쌍네의 곁으로 갔다. 뒤에 가서 섰는데도 쌍네는 돌아다도 안 본다. 아는지 모르는지, --- 그래서 보부는 한 발자국 그의 옆으로 대서면서 바른손을 쌍네의 어깨에 얹어보았다.
 
86
역시 손을 얹는 이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는 양,돌아다보지도 않고 쌍네는 슬며시 일어난다.
 
87
"왜 울어, 무슨 일이 생겼는가."
 
88
부드럽게 말을 건네니, 쌍네는 한 번 더 덜컥 울음을 삼키고 발을 옮겨놓아 움등으로 들어간다. 밑은 땅 속으로 움이 되고, 그 위는 광이 된 컴컴한 2칸 방이다. 떡시루, 모랭이, 다랭이, 체, 도투마리, 바가지짝, 챗다리, 콩나물 시루, ---이런 것이 지저분히 놓여 있을 뿐, 퀭하니 어득시근한 시서늘한 방이다. 귀신을 모신 당지기가 벋장 밑에 선반으로 얹히어있고 그 밑에 늘어뜨린 백지장이 너울너울 창살로 숨어드는 바람에 나부낀다. 보부도 따라 들어갔다. 조용한 곳에서 호소라도 해보고 싶다는 쌍네의 심보가 엿보였고, 그것이 그대로 젊은 보부의 마음을 건드리는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89
쌍네는 낡은 노전을 아무렇게나 깔아놓은 데를 신발째 오라서서, 가만히 방 가운데 도 사리고 앉느다. 무릎 위에 팔굽을 괴고, 한곳을 눈붙여 보고 있더니, 푸우 한숨을 내짚는다.
 
90
보부가 아직도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에서 흐르는 물을 수건으로 묻혀내고, 쌍네의 옆에 엉거주춤 히 섰으려니,
 
91
"아씨 제의 일을 어떡허면 좋사와요." 하고 다시 한숨을 내짚는다. 이 바람에 보부도 눈을 약간 찡그리면서 그의 옆에 따라 앉았다.
 
92
"무슨 일인지 얘기해서 될 일이면 들어래두 보자꾸나. 들어서 될 일두 아니겠지만." 하고 보부는 미간 새에 수심을 그려 보인다.
 
93
"전 인제 아씨 옆에두 못 있고, 먼데루 가게 된답니다."
 
94
이야기르 시작하면, 잠시 설움이나 탄식은 잦아드는 법이다. 제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 같아야, 이야기 투가 풍견내는 짠조롬한 구슬픈 맛에, 저 자신도 취하여버린다. 이야기를 듣는 보부도, 어느 결에 이 애처로운 조자에 휩쓸리듯, 마음속에 솟아나는 애끊는 애상을 맛보게 된다. 보부는 저보다 나이는 위이지만, 이렇게 어리광 조로 호소를 하는 쌍네의 감정이 어린 애의 것처럼, 귀엽성이 가고 애처러운 생각이 들었다.
 
95
"무슨 재미에 아무도 없는, 쌍트런 노동꾼만 사는 산 속에 가서, 무서운 세상을 살어 야한답니까."
 
96
그러나 보부는 잠시, 그의 이야기하는 사연이, 어찌된 것인지를 알아듣지 못한다.
 
97
"아니, 난 듣는 배 처음인데, 그게 어찌된 일인가, 좀 자상히 말을 해봐야지."
 
98
나직하니 다정스레 보부는 재촉한다.
 
99
"어데서 무슨 소문을 듣구---."
 
100
여기서 잠간 말을 끝더니 무슨 커다란 비밀이나 건드리는 것처럼, 목소리를 한층 더 낮추어서,
 
101
"맏 서방님이 제 욕심 못 채우시군, 공연한 꼬창질을 해서, 인제 우리는 이 고장을 떠나야 될 판국이야요. 평시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믄 산 속에믄 어떻구 물 속이믄 어떻겠 소마는, 팔자 에두 없구 한 걸 어떻게 서늘쩍하게 살어간답니까. 그런데 그 화상은 부득부득 찰거머리처럼 못 살게만 구는구만요. 이렇게 아씨랑, 마나님이랑 계실 땐, 이런 거 저런 거 마음이래 두 쏘여서 그런대루 살어가든 걸. 인제 단 둘이 떠나서 허구헌 날 그 화상을 눈앞에 보구, 어떻게 살아간단 말이웨까."
 
102
"그러니 어떡허니, 팔자 소관이 그래서, 연분으로다 작정된 남편인데, 바늘이 가는 데면, 실이란 건 따라가지 않을 순 없는 법이 아니냐. 마음을 돌려잡어서 여태껏 살아왔으니, 인제라 구 급작스리 못살변 있겠니."
 
103
"아니와요. 그런 것만두 아니와요, 어찌 어찌해서 길을 잘못 잡은 게지, 팔자에두 없는 연분이 랍니다. 생뚱한 딴 사람 될 그런 화상이랍니다."
 
104
"그럼 무슨 딴 인연이, 어데서 불쑥 솟아난다는 말이냐."
 
105
이 말에 쌍네는 아무 대답도 아니한다. 낯을 푹 수그리고 덤덤히 앉아 있는 것을 보면서, 이 때에야 문득 보부는 두뭇골 도련님의 생각을 하였다. 쌍네는 지금 제가 두뭇골 도련님과 하늘이 정해놓은 배필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닐런가, 쌍네의 여태껏 해온 말과 전날 동서에게서 들은 소문과, 그리고 거침없이 해오던 말이 지금에사 급작스리 주춤거리는 품이 필시 두뭇골 도련님을 마음속에 그려놓고 하는 말임에 영락이 없다고 보부는 생각해본다.
 
106
그러나 보부도 생각이 여기에 미치매, 무어라고 입을 열어 말문을 터줄 수는 없었다. 오늘 아침 시어머니한테서 들은 말엔, 두뭇골 도련님의 혼사가 어젯밤으로 작정이 되었다는것이다. 남전(南田) 강릉최씨(江陵崔氏)의 규수인데 근본은 한다 하는 양반이나 가세가 빈한 해서, 측출(側出)과 혼사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혼사가 작정되었으니, 이젠 불야불야 편지 붙이고 예장 싸고 장가를 들여야 한다고 한다. 늦어진 장가이고, 또 그대로 두면 무슨 일이 생길는지두 모르니, 어서 급히 서두는 게 무방하다고, 시어머니는 며느리들 앞에서도 서슴지 않고 말하였다. 그러니 쌍네에게 이렇게 된 사유를 털어서 들려주고, 공연한 딴 마음일랑 먹지두 말고, 마음을 잡아서 여필종부의 부덕(婦德)을 지킴이 가당하다고 타 이르고도 싶어지나, 그렇게 하는 것이 박정하다기보다는, 무슨 불순한 질투 비슷한 생각에서 나오는 언행 같아서, 보부로서는 선뜻 입밖에 내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107
사실 보부는, 지금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고, 또 저 혼자밖에는 그 일을 속속들이 아는이조차 없다 쳐도, 기왕에 아무 일도 없었던 시아우라고 그대로 넘겨버릴 수 없는, 한 가닥의 희미한 줄기가, 아직도 두뭇골 시아우에 대하여 뻗쳐져 있는 것이 진경에 가깝다. 남편형 선이와 시동생 형걸이를 바꾸어보고, 고이고이 닫아두었던 가슴을 열어 처음으로 자낮 ㄴ 한 물결 속에 파문을 그린 이가, 실로 두뭇골 시동생이 아니었더냐. 지난 겨울, 형선이가 저에게 장가를 드는 날까지, 보부는 형걸이에게 사모하는 마음을 보내었고, 장가 온 새 서방이 형걸이가 아니고 형선인 것을 알았을 때에도, 특별히 어떻다고 불만을 표시 하든가, 불행을 예측하든가 그렇지는 않았을갑시, 역시 서운하고 쓸쓸하고 죄스러웠던 것만은 사실이라 아닐할 수 없다. 그날 밤 마루에 큰 돌을 던진 키 큰 사나이는 혹시 형걸이, 그 사람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도 없지 않다. 그 뒤에 자기가 이 집에 시집온 뒤에도 형걸이는 친밀히 드나들지 않았고, 저에게 대하여도 어떻다 할 행동이나 예절의 표시가 없다. 형수면 형수, 그에 마땅한 예절의 표시가 있어야 안 하냐. 그러나 간혹 안뜰에까지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 하여도, 그는 보고 못 보는 태도다. 그럴 때마다 보부는 형걸이에게 대하여 삐 간지러운 부끄러움을 느꼈다.
 
108
형걸이가 두칠이 처 쌍네의 방에 들어갔었다는 말을 맏동서의 입에서 들었을 때, 그는 처 음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아무런 관계도 없는 그러한 시아우의 일이라면,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남편에게만은 잠자리 속에서도, '두뭇골 작은이에게 이런 말이 들리는데’ 하고, 오늘 아침 부엌에서 형님한테서 이러저러한 말을 들었노라고, 장난삼아라도 옮겼을 것인데 보부는 그대로 귓등에 흘려들어 두었을 뿐, 누구에게 그 말을 옮기지도 않았다.
 
109
지금 이렇게 쌍네의 입에서 눈물 섞인 절절한 고백을 들으면서 컴컴한 광 안에 앉아 있으니 이상한 느낌이 가슴속에 떠오른다.
 
110
두뭇골 시동생이 쌍네의 방에 들어간 것이 사실이라 하여도, 그리고 쌍네의 단 둘이서는 어떠한 맹서를 하였는지 몰라도, 그가 쌍네와 더불어 한평생을 같이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저 발걸음을 내치는 대로 한번 들려본 술막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그것이 공교롭게 퍼져 나가서 일이 여기까지 되었는데, 아무리 비천한 쌍네의 몸이라고 할지라도, 형 걸이의 행동엔 난폭하고 비겁한 데가 있다고 아니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수상하리만큼 보부는 시동생 형걸이의 저지른 행동에 대하여 잘못을 가릴 생각이 나질 않았다. 결코 행실 머리를 아무렇게나 가질 그러한 온당치 못한 청년같이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맏 동서는, 첩 자식이니 행실머리를 가지는 게 아무래도 바르질 못하다고 입을 삐죽거렸으나, 그 말을 들을 때에도, 보부로서는 한결로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면 자기는 역시 두뭇골 시아우에 대하여, 아직 한가닥의 애끓는 사모의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일까.---그 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것도 죄스럽고 불순한 온당치 못한 수작이었다. 그는 도리질을 한다.
 
111
역시 보부 자신이 형걸이와는 아무런 관계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처럼, 육체를 서로 나눈 쌍네도 차후에는 형걸이와 아무 관계 없는 딴 사람이 되어버릴 것이다. 막연하니 이렇게 생각 하면서,
 
112
"두 뭇 골 도련님두 장가는 안 간다구 뻐기두만서두 어찌할 수 없는 가보데, 웃어른이 작정 해주시는 걸 거역하는 법은 없으니께. 그러니 이왕 남편이라고 섬겨오던 바에야 지금 갑작 스리 이러니 저러니 할 수야 있나."
 
113
하고 말하였다. 이러한 말을 해가면서 보부는 뜻밖에 어떠한 가벼운 쾌감을 맛보았다. 이러한 자기의 말에 안색이 어두워가는 쌍네의 표정을 말끔히 쳐다보고, 보부의 쾌감은 조장 되는 것 같았다. 이 쾌감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이 자기의 잔인스런 성미의 탓이 아니라, 형걸이에 대한 질투에서 나온 감정의 한 가닥이라고 생각이 갔을 때, 보부는 제 자신에 대하여 한없이 놀래며 낯이 확끈 붉어지는 것을 깨닫는다.
 
114
그는 이러한 야속스런 자기의 심정에 염증을 느끼며, 몸을 털듯이 불쑥 일어난다.
 
115
"자, 누가 보나다나해두 흉하겠다. 어서 밖으로 나가자. 생각한다구 별 수가 나는 게 아니다. 될 때로밖에는 안 되는 세상이다. 자 어서 밖으로 나가자."
 
116
보부는 앞서서 쨍쨍하니 밝은 초여름의 태양 밑으로 나서면서, 속으로, '두뭇골 형 걸이는나의 시동생이다’ 하고 뇌보았다.
【원문】대하(大河) 14장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글쓰기
〔소설〕
▪ 분류 : 근/현대 소설
▪ 최근 3개월 조회수 : 190
- 전체 순위 : 427 위 (2 등급)
- 분류 순위 : 64 위 / 881 작품
지식지도 보기
내서재 추천 : 0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 대하 [제목]
 
  김남천(金南天) [저자]
 
  1939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문학 > 한국문학 > 근/현대 소설 카탈로그   목차 (총 : 16권)     이전 14권 다음 한글 
◈ 대하(大河)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5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