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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하(大河) ◈
◇ 대하(大河) 12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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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
김남천
 

1. 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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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나카니시 상점에서는 이 고장에선 보지 못하던 잡화상품을, 새로이 평양서 소달구지에 한차판이나 실어왔다. 여태껏 평양과 이 고을과의 160리 길에 짐을 나르는 데는 마 바리꾼이나 돌림 장수 모양으로 당나귀나 노새에 실고 다니든가, 도붓돌이나 납지개 장수처럼 등에 지고 다니든가, 상사에 겨울날 눈과 얼음을 이용하여 소발구를 쓰든가 하는 외 엔별 도리가 없었다. 그러므로 웬만한 이삿짐이나 잡곡이나 소금이나 그 밖에 해산물 같은 큰 짐은, 대동강을 치거슬러서 비류강까지 올라오는 뾰루대나 수상선 편을 이용해왔었다. 두서너 집 포목점에서 주단이나 포목을 실어오든가, 칠성이네가 자전거를 타고 평양 가서 물건을 해오는 것도, 이 배 편을 이용하였고, 나카니시네가 부패짐이 되는 잡화를 상자로 해올 때나, 심지어는 김선구네가 고 알뜰한 과자를 몇 상자 해오는 데도 이 뾰루대와 수 상선 편을이용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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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던 것을 단오를 앞두고 날이 가물어서 물이 적어진 관계로 배편은 날이 지체 된다고나 카니 시네 는 단연코 새로난 소달구지에 한차판을 실어서, 번뜻한 신작로로 밤낮 하루 해를 걸려, 평양서 이 고장까지 운반해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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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중한 2개의 커다란 바퀴가 붙은 달구지를, 황소가 헐럭씨며 끌고서 돌차니 고개를 넘어서 망지다리를 지나 방선문으로 들어설 때, 후루매 (오래된 옷) 입고 게다 신은 젊은 나 카니 시는 물론, 그 밖에 많은 아이들과 일없는 한가한 친구들이 일부러 구경을 하러 마중을 나왔었다. 그들은 달구지를 따라 거리를 올라와서, 그 달구지 위에 실었던 짐짝을 내려놓고하나하나 끄르는 것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짐을 내려놓은 뒤에 소는 박성균네 마방으로 끌고서 여물을 먹이고, 따라온 달구지꾼은 방안에 들어가서, 국수 두 돈 오 푼짜리를 세 그릇이나 조져대었다---국수는 박리균네가 누르던 것을 이즈음 집을 떨어 고치노라고, 분채를 성균네 부엌으로 옮겨놓았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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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들 중에는 달구지가 신통할 뿐 아니라, 달구지 부리는 험상궂은 작자가 국수 세 그릇을 먹어대는 것이 또한 신기해서, 인차 나카니시네 집 앞에 몰려 있는 저이 동무 아이 들께로 뛰어가서, 좀더 이야기를 보탬해가며 인제 달구지 끌고 온 장정이 연거푸 국수 다섯 그릇을 먹어대더라고 헛소리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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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까짓 국수를 먹는 것보담 아이들은, 지금 한창 짐을 끄르는 대로 그 상자나 볏집 수세미 속에서 보지 못하던 이상하고 괴상한 물건이 자꾸만 쏟아져 나오는 것이 더 재미나고 신기하였다. 한 가지 물건이 나올 때마다 어른들 틈에 어깨를 걸고 서서, 그들은 그것이 무엇에 쓰는 것인지를 맞춰대느라고 새새덕거리고 재깔대었다. 나카니시도 우쭐했고, 그 집 고초카이 다로오라고 하는 군청 하인의 아들도 무슨 큰 벼슬이나 한 것처럼 의기양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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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구지에 실어다 부리고, 지금 가게에 벌여놓고 싸놓고 하는 상품 가운데서는, 석유( 石油) 열 상자가 제일 돈 먹은 물건이었다. 미국 뉴욕 솔표석유라고 쓴 나무상자 속에 흰 상철 로만든 왜유초롱이 두 개씩 들어 있었다. 이놈을 아홉 상자는 그대로 져다가 뜰 안에 쌓아놓고 그 분주한 통에 천천히 해도 좋으련만, 여러 사람이 보는 중에서 그 중 한 초롱을 쑥 뽑아놓더니 아깝지도 않게 장도리로 칼을 대고 구멍을 뚫는다. 그러더니 볏집 수세미 속에서 양 철로 만든 펌프를 빼들고 와서 구멍에다 넣고, 연신 쇠줄을 한 손으로 낚았다 놓아다 한다. 수채처럼 된 구멍에서 석유가 쪼루루 갓난애기 오줌싸듯 나와서는, 남포 방둥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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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꼍에 쭈르니 매어 달은 크고 작은 남포둥 중에서 큰 놈을 하나 내리어서 갓을 씌우고, 알을 꽂고, 석유 든 방등(등잔) 가운데 치억 늘어진 심지 위 끝에 성냥을 그어댄다. 해도 지기 전에 불을 켜놓는 것이다. 길 가운데 둘러서서 나카니시의 하는 품을 보고 고을 사람들은, 신기해서 혀를 빼문다. 연신 그 가격이 얼마냐고물어대니, 장끼를 보아야 알겠다고 상점 사람은 장한 듯이 뻐겨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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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것을 갖고 이를 지경이면, 지금 나카니시가 남포둥에 불을 붙여 댄 갑에 든 성냥도, 이 고을엔 처음 오는 물건이었다. 부싯돌이나, 이런 것보다는 편리하다고 많이 사용해오던 잎성냥 대신에, 끝에 노란 인이 붙은 놈, 아무데나 되는 대로 대고서 찍 그으면 켜지는, 들고다니기 간편한 가치로 된 성냥이 지금 처음 이 고장에 들어온 것이다. 이쑤시개나, 댓 자박이나, 샅가시 같은 놈을 돌잔등이나, 기둥이나, 바람벽에 그으면 불이 나니 신기하지 않을수가 없다. 담배 붙이는 데는 일등 십상이겠다고 누가 말하니, 어린아이 있는 집에서 밤에 불 켰다 죽였다 하기에 무한 좋겠다는 사람도 있고, 또 밤중에 통숫간(변소)에 가기에 알맞겠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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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버선은 벌터 알고 있기는 하였으나 타래채로 묶어놓은 놈은 처음이다. 갱고지 최  ㅜ 관술이가 목다리까지, 올려 엮은 구두 속에, 꾸여진 놈을 삼성자박지로 볼을 받아서 신고 다니는 것만 보았지, 무슨 생선 말린 것처럼 툭을 지어서, 맥기를 묶어놓은 놈은 보지 못 하였던 것이다. 갱고지 최조사 나리, 이젠 볼 받은 구두 버선은 안 신게 됐다고 누가 말 해서, 둘러선 사람들은 모두 소리를 높여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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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물을 들인 종이 봉지에 불광을 그린 딱지를 붙인 건 양초요, 네모난 양철통에 색시 가서 있는 그림이 붙은 건, 오색이 각각 딴 봉지니 물감통이 분명하고, 단장 모양으로 강충 하니 껍데기 구럭을 싸서 넣은 놈은 필시 양산일 게다. 커다란 나무상자를 조심성 있게 뜯고서 많은 수세미, 대팻밥을 집어내길래, 그것이 무엇일꼬 하고 바라보니, 말깃말깃한 사발과 물이든 가 밥알이든가 김치쪽이든가가 빤하니 들여다 보이는 유리그릇과, 오줌을 누기엔 너무나 황송한 꽃 그린 찬란한 요강들이었다. 동창(東唱)이나 직동(直洞) 있는 토점이나 사 기점에서 왜글찌글한 커다란 놈을 시프르덩덩한 바탕에다 왜정빛으로 줄을 돌려 긋고, 생선 같은 걸 되는 대로 짓갈겨 그려서 구워낸 쌍사발만 보아오던 눈으로, 이 반들반들한 사기그릇과 유리그릇을 보니, 어디 김치나 된장국이나, 이런 걸 담아서는 금시에 흠이 나고 터질 것만 같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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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그리 크지 않은 상자가 둘이 남아 있다. 하나는 동아연초주식회사라고 쓴 것으로 미우어 히로 궐련이 분명하다. 그보다 좀더 작은 또 한 상자 속에서는 작은 말똥 땅 지로 만든 서너 너덧 상자 갑이 나왔다. 그 중의 하나를 아깝지 않게 터뜨리니, 그 속에서 작은 종이 봉지를 하나 꺼내고, 다시 그 종이 봉지를 터뜨려, 팥알처럼 발간 놈을 쪼루루 손을 쏟아 입에다 탁탁 털어 넣는다. 버작버작 씹어 삼키고는 하아 하고 고추 먹은 입을 불듯한 다. 그의 앞에서 입을 헤에하니 벌리고 쳐다보던 김존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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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먹었소까." 하면서, 나카니시가 너덧 알 집어서 치받치는 손에다 놓아주니,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그는 텁석부리를 헤치고 입안에 한 알씩 집어넣고 정성들이 어금니로 잘근잘근 씹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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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이 있소까." 하고 물으니 존위는 후우하니 숨을 내뿜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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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이 있소. 맛이 있소." 하고 고개를 꺼뜩꺼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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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선이는 학교에서 점심을 먹으러 오다가, 나카니시네 집 앞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선 게 수 상애서, 대문간을 들어가다 말고, 그집 앞에 가까이 와서 사람들의 등뒤로 가게 있는 쪽으로 넘겨다보았다. 불을 켜서 매달은 남포등을 바라보고 지금 막 상자와 궤짝 속에서 꺼내서 별여놓는 여러 가지 상품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다가, 시간이 늦을까 하여 저이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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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아버지가 있었으나, 그는 안방으로 들어가서, 어머니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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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피랑, 구두버선이랑, 양산이랑, 머 이런 거 많이 나카니시네 집이 왔습디다, 사랑에나 하구 두 서너 방에 쓰게, 석유하구, 남포등 서너 너덧 개 사옵세다." 하고 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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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나 사오믄 사왔지, 거 네 개씩 무슨 소용이간. 아지까리 기름대레논 게 한 말이나 되는데, 건 언제 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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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실속을 차리려고 아들의 말엔 좀처럼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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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세 사다 한번 켜만 보시구레, 당초에 낮처럼 밝구, 그놈만 켜놓았으면 넓은 방안이 왼 통 낮같이 밝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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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지보구 말해보려므나. 내야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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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선이는 서너 너덧 개라고 하지만, 두뭇골 집에서도 이곳에서 켜면 본따서, 너덧 개 쓸것이니 적어도 열 개는 가져야 될 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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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참, 오마니도 무던히 딱하시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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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를 차며 제 방으로 들어가는 형선이 뒤에서, 어머니 최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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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돈으루 기름 세력을 할라구. 등피 없이두 비단 저고리에 버선코만 잘 기웠다." 하고 혼잣말하듯 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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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선이는 제 방으로 와서 안해가 들어다주는 점심상을 받아놓고도 한참이나 남포 등이며, 구 두 버선이며, 양산이며, 이런 걸 본 대로 안해에게 설명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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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 맏형 형준이는 저이 방 윗목에서 낮잠을 자다가 깨어났다. 그는 낑하면서 벌써부터 몇 놈씩 밀려 다니며 웅웅거리는 파리떼를, 손으로 휘날린다. 그러더니 아랫목에 앉아서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안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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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선이는 뭐라구 저리 짓거린다나. 남 잠두 못 자게." 하고 잠투정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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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니시네 집에 남포등이라나, 등피라나가 왔다구, 오마니보구 사라구 그럼네다." 하고 안해는 제말 같지 않다는 듯이 종알거려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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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올라믄 사오든지 하지, 떠들기는 왜 떠들어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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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머 얼마나 떠들었다나오. 생뚱한 소리 하지 말우. 또 괜히 의만 덧나지 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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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해가 핀잔주듯 하니 형준이는 아무말도 안하고, 픽 돌아누워 다시 잠을 청해본다. 그는 아까부터 꿈을 꾸려고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뭣이든 꿈만 꾸면 곧 그놈을 풀어서 해몽을 한 다음 통수로 있는 신도감을 따라서, 삼십육계(三十六計)의 덕대가 앉아서 기다리는 박리 방네 뒷방으로 갈 참이다. 그런데 대낮에 일부러 잠을 청하려니 그게 좀처럼 올 리도 없거니와, 겨우 들었던 잠은 아이가 울든가, 파리가 콧잔등에 날아와서 간지럼을 피든가, 또 뜰 안에서 머라고 중얼거리든가 하면, 꿈도 채 맺기 전에 깨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눈만 벌겋게 퀭 해가지고 아무리 꿈꾼 것을 생각하려고 했자, 무어 시시펑덩한 걸 꾼 것도 같은데, 도무지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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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겨우 으레껏 눈을 붙이고 잠을 이루었던 것을, 형선이가 안방 마루에서 어머니 와중 얼대는 바람에 놀라 깨었는데, 그 다음은 다시 잠을 청하여도 눈만 새록새록해질 따름이었다. 꿈을 꾸었던 것 같기도 해서, 이리저리 머리를 가다듬어 갈피갈피 더듬어보나, 어딘가 풀숲을 자꾸만 뛰어가다가 무슨 구렁텅이를 보고, 이 걸 넘을까, 그렇지 않으면 돌아서 갈까, 하고 망설이다가 깨인 것도 같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웬 한 처녀하고 나무를 배러 시퍼런 낫을 들고 산속으로 들어가다가 깨인 것도 같아서, 통히 어이된 판국인 걸 알 수 없어 화만 더럭더럭 나는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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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병할 놈의 남포등이고 뭐이고,그놈 까탈 나 넝쿨째 떨어지려던 호박이 하늘로 올라가 버린 것 같아금시 아무개고 손에 잡히는 대로 쥐어박기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도 두지 속에 시집 올 때 갖고 온 돈을 뒤져가지고, 며칠째 밖으로 나가는 통에 어지간히 골치가 틀린 안해가, 이런 대목에 화를 터뜨려 놓기만 하면 대낮에 그것도 적지 않이 두통 거리 겠다고, 그는 천둥같이 동하는 울화르 꿀꺽 들이삼키고 휙 몸을 뒤채 벽을 향해 돌아 눕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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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준이가 삼십육계라고 손을 대인 것은 불과 얼마밖에 안 되는 최근의 일이다. 그가 남아돌아가는 정력을 처치할 길이 없어, 하룻밤 막서리 처 방에를 들어가려다가 형걸이와 부딪치던 그때만 해도 형준이는 도박이나 잡기의 성질을 :띤 것엔 손도 대지 않았었다. 어렸을 때부터 투전장을 갖고 노는 데는 더러 섞였으나, 투전판을 따라 다닌다든가, 돈을 대고 큰 판을 벌여놓든가,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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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두칠이 처 쌍네에 대하여 품었던 정이 제대로 쏠려 흐르질 못하고, 깊은 웅덩이 속에서 부글부글 끌어오르고 있을 때, 그는 집안에 처박혀 있을 수는 없었다. 이런 때엔 어디, 신선한 산속이나 해변 같은 데 여행을 하든가 했으면, 정신도 깨끗해지고 마음도 제법 후련해지련만, 그런 데까지는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그는 곡우(穀雨)가 훨씬 지난 어느 맑은 날 아침 소만(小滿)이 가까우니 꺽지가리가 한창이겠다고, 평양영감에게 자리 그물을 한떼 얻어 들고 비류강으로 나갔다. 안집에 처박혀 있으면 마음만 더 초조하고 집안 식구가 눈에 바로 보이지 않아서, 고기 사냥이나 하면서 소풍이나 할 참이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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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로 결은 삿갓을 머리 위에 올려놓고, 다리를 종아리까지 활짝 걷어 붙여서 맨발로 짚신을 신은 뒤에 으슥한 뒷대문을 나섰다. 방수성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향교 골목과 직통하 는 숭선교 다리에 이른다. 그는 다리에 올라서 난간도 없이 밋밋하니 저편 쪽 회진대 옆까지 뻗친 거머턱턱한 길을 건너간다. 다리 밑에는 맑은 강물이 급류가 져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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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봉 앞에서부터 십이봉을 끼고 뚱그렇게 커다란 호수처럼 퍼졌던 강물은, 잔잔하니 강선루와 자복사의 탑을 거꾸로 비치면서 기름처럼 유유히 흐르다가 바로 다리 위 출운대 앞에서부터 여울이 져서다리 밑에 이르러선 제법 옥계를 이룬 곳조차 있다. 초여름 아침 강바람에 볼편을 쏘이면서, 여물물에 어울려서 그는 콧속으로 흥얼흥얼 강서메나리를 한 곡조 넘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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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개는 잡아서 구럭에 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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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님은 잡아서 품안에 넣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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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한 곡조 뽑아 넘기고는 '홍야라 뎅야라 앙’ 하면서 후렴을 정조 있게 가늘게 지어 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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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리를 다 건너고 산길에 올라섰다. 고개를 넘어서 넘은 강으로 가려는 것이다. 비류 강은 반도처럼 된 긴 산을 돌아서 다시 위쪽으로 흘러 오른 것이다. 앞 강에서 산속으로 숨어 들었던 물이 넘은 강에서 콸콸콸 솟아오른다고 비류강이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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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돌아서 강기슭으로 내려오면서 그는 또 한 곡조를, 이번엔 흥에 겨워 소리를 바짝 높여가지고 뽑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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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항라 적삼에 소낙비 맞은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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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리알 같은 젖통 좀 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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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을 걸직하게 한번 섬겨놓고, 이제 다시 후렴으로 간드러지게 메겨 넘기려는데 산등에 있는 사직정 쪽에서 인기척이 난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어인 소리일는가---해서 소나무 틈으로 소리나는 쪽을 보니,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웅성거리다가, 누가 이편을 가리켰는지 모두 형준이를 바라본다. 무얼 하는 사람들이 남의 눈을 피하여 저렇게 둘러섰는지, 갑자 기겁이 덜칵 났다. 그래서 못 본 셈치고 강기슭으로 덥벅덥벅 몸을 피하려고 하는데 등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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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준네 재장 아닌가." 하고 아는 척하는 목소리가 따라온다. 돌아보니 신도감이었다. 호둘기바람에 감투만 쓰고 그는 헐레벌떡거리며 산을 내려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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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어데루 가는 길이와." 하고 거반 가까이 와선 발을 천천히 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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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해서 꺽지래두 좀 잡아보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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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준이가 대답하니, 도감은 그의 앞에 와 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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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 참 꺽지가리 할 때로구먼." 하고 대꾸를 한다. 그러더니 사면을 한번 둘러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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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 자미난 거 한번 안 해보려나." 하고 나직이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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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로 대강 짐작은 했으나 형준이는 짐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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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미난 거라니요. 머 새박에 술추렴은 아닐 게구." 하고 반문하였다. 그랬더니 바른손으로 '그게 무슨 말이냐’고 툭 공기를 휘젓듯 하면서, "술추렴이 머 자미난는 겐가." 하고 다시 바싹 귀에다 입을 대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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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계의 폭지 하나 안 써보려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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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오. 내가 무슨 그런 걸 할 줄 아능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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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준이는 낯색을 달리하며 사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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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두 머, 할 줄 알구 모르구가 있답마. 꿈 꾼대루 해몽해서 치장 붙이문 되는게지. 임 자느 일수가 좋을 테니까 해볼 만하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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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감은 형준이를 꼭 삼십육계판으로 끌고 가려고 한다. 순사의 눈이나 끄나풀의 눈을 피해서 날마다 자리를 옮겨가면서 하는데, 오늘은 사직정 뒤 수풀 속에서 육계판을 벌여놓았던 것이다. 인기척이 안 나게 조심해서 하던 차에, 마침 육계문을 열어보니 만금( 萬金)에 대포다. 그래서 육계꾼이 신기한 바람에 그만 처소를 잊고 으아 하니 환성을 올렸으나, 문득 아래쪽을 보니 그물을 메고 강가로 내려가는 삿갓 쓴 사람이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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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막 대치장을 읽기도 전에 주(走)자를 놓으려고 하다가, 신 도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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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박참봉의 맏아들일세." 하는 바람에 모두 달아나기를 그만두었던 것이다. 말이 다른 데로 나가면 재미가 없으니, 형준이를 붙들어다 한몫 끼워놓자고 성론이 되어, 신도감이 그를 쫓아 이리로 내려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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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 만금에 대포가 터졌는데, 육계끈이 일수가 좋은가볼세. 치장 돈이 백 냥인데 덕대가 삼천냥을 물으려니 똥을 싸는 판일세. 자 이런 판에 한번 해보지 않구 언제 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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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좀처럼 듣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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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쓸데없는 고집은 그만두게. 임자가 너무 제기면 모두 끄나풀인 줄 알구, 또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구 그러능가." 하고 은근히 위협하듯이 말이 나온다. 마음이 그리 꿋꿋치 못한 형준이는 하는 수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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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돈 가진 것두 없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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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야 내 얼마든지 꾸어주지. 머, 임자만 해가지구야 돈 안 대줄 사람이 있겠나. 꿈만 바로 꾸었다문 대구 푼 대루 대게나." 하는 수 엇이 형준이는 그를 따라 산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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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니 사람은 불과 여남은 사람 밖에 없었다. 그 중에 육계꾼은 다섯 여섯, 그 밖에는 덕대와 치장과 통수들이다. 통수들이 점잖은 사람들한테서 모아온 폭지와 돈을 맡아 갖고 그들 대신 육계문 열 때 세음을 보아주는 것이다. 난봉꾼이기는 하나 삼천 냥 돈을 물어내는 덕대는 그래도 상판이 새파랗게 질리었다. 그는 형준이도 잘 아는 이였다. 투전 잘 하기로 유명하던 오만달이란, 사십이나 되었을까, 말까 한 건달놈인데, 눈이 하나 헤뜩한 알백이다. 지금 치장을 부르는 대로 커다란 전대에서 돈을 치러주는데, 정각 뒤 수풀 속 웅덩이 가진 속에서는, 서너 너덧 육계꾼이 처소도 잊어버리고 떠들어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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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내 꿈을 좀 보게, 어찌됐던간에 흰 백설기를 한 시루 잔뜩해놓구, 이놈을 떡집 작은 메 누리하고 마주 앉어 서루 시시닥거리며 먹어냈는데, 양껏 먹구 그 댐엔 그 색시와 또 적지 않게 의좋게 놀았단 말일세. 그러니 이놈이 꿈을 뭘루다 푼단 말인가. 처음은 떡을 실컷 먹은 것보다두, 색시와 논 게 더 생각이 내끼드리니. 사부인(四婦人) 가운데서 명주( 明珠) 든가, 상초(上招)루 쓰려구 했다가, 저 알백이가 사부인을 달았을 것 같진 않단 말야. 그리 구이 놈이 또 첫판이길래, 만금에다 썼네그려. 그랬더니 아 이놈 보게, 대포루 맞어 떨어지데 그 려, 대포루, 참 그놈 신통두 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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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상투에 그냥 수건만 질끈 동인 젊은 녀석이 지점벌여대니, 맞은편에 앉았던 곰보 딱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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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생에 꼬장떡을 또 배가 터지두룩 먹어본 적은 금시 처음일세." 하고 꼬장떡 먹은 꿈 꾸고 만금에 붙였다가, 대포가 맞은 게 신기하다고 지저귀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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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게 말 말게. 난 어젯밤 물 떠놓구 아주 손이 발이 되두룩 빌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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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펑덩한 꿈타령을 주절대고 있으니 돈을 다 나누어준 덕대는 눈살을 찌푸리고,
 
74
"인제 그만들 떠들게. 또 그러다가 감옥 구덩이 속에서 꿈꾸지 말구." 하면서 핀잔을 준다. 형준이는 정각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덕대와 통수들과 육계꾼들이 떠들어 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커다란 장지에 누렇게 들기름을 먹인 뒤에, 먹으로다 사람의 몸뚱아리를 그리고, 서른 여섯 고대에 각각 육계의 문을 적어논 것이 판판한 잔디 위에 놓여 있다. 신도감은 그놈을 집어 들고 형준이 앞으로 온다. 또한 손으론 황 양 목으로 새긴 각판을 들고서, 종이를 쭉 판판한 땅바닥에 펼쳐놓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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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게 모두 삼십 육문일세, 여기서부텀, 점괴(占魁), 판계(板桂), 영생(榮生), 봉 춘( 逢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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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뚝 끊어지곤 각판을 찾아서 가르쳐주고, 다시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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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댐이 사부인으로 간옥(艮玉), 명주(明珠), 상초(上招), 합동(合同). 알지 이건. 부인네와 합동 해본 꿈이거들랑 합동---이렇게 되는 게니께루. 그 댐은 삼괴(三槐), 합해(合海), 구관( 九官), 태평(太平), 자 이럭허군 목뎅이가 일산(日山), 의관이나 삽포나 이런 건 화관( 火官), 정리( 井利), 발뒤축이 천량(天良), 눈은 광명(光明), 유리(有利)는 옹(翁) 유리라고 영감이나 두상 망택이, 강사(江祠), 복손(複孫), 이렇게 쭉 내려가는 겔세. 아마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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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준이도 대강한 걸 알고 있기는 했으나 잠자코 들었다. 이렇게 신도감이 한참 동안을 설명 하느라고 바쁜데,
 
79
"인제 앉은 자리에 한 번 더 달아매보자나." 하고 덕대가 물어본다. 그는 지금 삼천 냥이나 잃은 놈을 어떻게 반분이라도 봉창을 대고싶었던 게다. 그랬더니, 웅덩이 속에 있던 곰보가,
 
80
"꿈은 어떡허나." 하고 앉은 자리에서 되짚어 벌여놓는 것을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 해서,
 
81
"아니 여보게, 대포 맞치구 안 하는 법두 있는가. 꿈이야 눈 붙이면 꿀 게지. 인제 하자 구해." 하고 마주 앉은 수건 쓴 녀석이 팔을 두르며 뛰어 나온다. 그래 그 자리에서 또 한 판을 벌여놓기로 했다. 신도감이 폭지라고 종이 조각을 갖고 형준이한테로 온다.
 
82
"집에 가서 써 놔두면 내 갖고 와두 되는데 한판에 섞이기가 좀 무엇하거들랑 그렇게 해보지."
 
83
그러나 형준이는 아무 대답도 안 하고 폭지를 받았다. 그는 지금 어젯밤 꿈을 생각 하고있었던 것이다. 덕대는 종이와 붓을 갖고 외딴 쪽으로 간다. 그는 목을 매달아 매일 육계 문을 남이 모르게 쓰려고 숲속으로 가는 것이다.
 
84
"산꼭대기루 오를 땐 아마 곤산(坤山)이나, 지고(志高)를 써널 모양이네그려." 하고 웅덩이서 나온 곰보가 놀려 대니,
 
85
"잘 알거들랑 생각대루 폭지에 써 넣게나." 하고 싱글싱글 웃으며 나무 수풀 속으로 사라진다.
 
86
형준이는 부끄러운 일이긴 하지만, 어젯밤 쌍네의 방엘 들어갔다가, 순사에게 붙들린 꿈을 꾸었던 것이다. 어찌된 판국인지, 반항하는 쌍네를 끌어안고 한참 동안 뒤채고 엎치고 하면서 돌아가는데, 덜컥 문을 열고 달려든 장정이 있었다. 이게 두칠인가, 형걸인가 하고 놀래어 보니 뜻밖에 순사였다. 순사는 네가 지금 강도질을 하러 이 집에 들어온 게 분명하다고, 아무리 변명하엳 박승을 지우며 잔말 말라고 정강이를 후려찬다. 덜미를 짚어 내 동 댕 이치는 바람에, 문으로 내쏠리다가 문턱에 발뒤꿈치가 걸려서 막 앞으로 거꾸러지던 차에, 요행 눈을 뜨니 꿈이었던 것이다.
 
87
그러니 이 꿈을 갖고 사부인이나, 원길(元吉)이나, 원귀(元貴)나, 길품(吉品)을 써 넣을 턱도 안 되고, 불가불 점괴(占魁)나 써 넣어야 할 텐데, 같은 점괴라도, 제 스스로 순검이 되어 봤다든가, 그들과 술추렴을 하던가 했다면 모르겠는데, 남의 유부녀 방에 들어갔다가 강도 혐의를 받고, 순사에게 결박을 당하여 문턱에 발뒤꿈치를 걸고 거꾸로 굴러떨어진 꿈이 되고 보니, 어딘가 깨름직한게 불쾌하였다. 그러나 쓰게 된다면, 점괴밖에 쓸 게 없다고 생각 하면서, 남들이 모두 써 넣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88
한참만에 수풀 속에서 덕대가 보퉁이를 꾸려 들고 나오면서,
 
89
"육계 문 목 매서 달아매네." 하고소나무 가장자리가 꾸부정하니 가지를 챈 끝에 그놈을 꾀꼬리 둥지 모양으로 매달아놓는다.
 
90
치장은 흰 종이에 각판을 들고 폭지가 들어오길 기다린다. 통수들도 모여들고, 다른 육계꾼도 어슬렁어슬렁 모여들었다. 그들은 돈과 각판을 기록한 폭지를 치장에게 내밀었다. 형 준이도 하는 수 없이 점괴를 쓰고 있는데, 신도감이 찾아와서,
 
91
"얼마나 대겠습마. 한 스무 냥 대겠나. 첨인데." 하고 물어본다.
 
92
"그러시구레."
 
93
형준이는 신도감에게 폭지를 주었다. 폭지를 조사해서 치장 붙이는 것은 형준이도 가까이와 보았다.
 
94
"자, 육계문 연다."
 
95
알백이 눈을 샐름샐름하면서 덕대는 나뭇가지에 손을 뻗쳐서 보자기를 따 온다. 모두 그 보자기 푸는 것을 뚫어지게 들여다들 본다. 알백이는 재치 있게 풀어 젖히면서,
 
96
"이번에 아마 또 대포 맞는가보다." 하고 싱글싱글 웃어댄다.
 
97
"흥, 이번엔 아마 모두 헛불인가볼세."
 
98
덕대의 웃는 품이 수상하다고 곰보가 건네보는 수작이다.
 
99
"대포라는데 왜 이러나, 자 대포다, 대포 보게."
 
100
그러나 보재기 속의 육계문은, 필득(必得)이었다.
 
101
"누가 맞혔나."
 
102
필득을 써 넣은 자는 곰보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곰보는 제 꿈에 그리 자신이 없었는지 얼마 많은 돈을 대지는 못하였었다. 댄 돈에 사십 곱을 치러주고 나니, 나머지 붙였던 돈은 모두 덕대가 휩쓸어 갖는다.
 
103
나 시간 안짝에 돈 스무 냥을 날리고 보니,도박이나 잡기에 경험이 없는 형준이는 좀 입맛이 밍밍했다.
 
104
"아니 무슨 꿈이길래 점괴를 썼습나." 하고 신도감이 묻는다. 그래, 쌍네 방에 들어갔던가 이런 건 쪽 빼고, 그저 순사한테 박승을 지워서 내굴리는 통에, 문턱에 발뒤꿈치가 걸려 넘어진 꿈이라고만 말 하니,
 
105
"그럼 해몽을 잘못 했네그려. 발뒤꿈치가 걸렸으니까, 필득이야 되잖나, 꿈은 참 잘된 꿈인데, 그걸 그만 점괴를 써서 틀렸네그려. 참 그 꿈 용하이, 자네는 좌우간 복은 잔뜩 지구 다니는 사람일세." 하고 진정으로 탄복을 한다.
 
106
가만히 생각해보니 신도감의 말이 딴은 그럴 듯도 했다. 발뒤꿈치가 걸려서 꺼꾸러지다가 깨었으니 필득이라.---그러고보니 한 가지 꿈을 갖고도 여러 모로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그는 생각해보았다. 스무 냥을 잃기는 했을 갑시, 그놈의 노름도 재미나지 않는 건 아니라고 형준이는 신도감의 말마따나, 제가 짜장 일수가 좋거나 횡재할 운이 텄는지도 모를 게라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107
그날은 그걸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 돈 스무 냥을 갖고 신도감 집을 찾아갔더니 신 도감은 돈을 받으며,
 
108
"인제 내 좋은 판엔 가끔 알기울께니, 꿈만 좋은 놈을 꾸시게. 판에 섞이기 싫으면 폭지만 써서 보내게나. 그러면 다 맡아서 좋도록 하지 않으리. 임자는 모르니 말이지 점잖게 사랑에 앉아서 통수들을 거쳐서 여기다 맛을 붙인 이가, 이 고을 안에도 유만부득일세. 심심파적도 되거니와 가끔 잘 맞아떨어지면 횡재도 하잖나."
 
109
그때에 형준이는 별로 또다시 삼십육계에 손을 댈 생각은 먹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아침에 깨어서 지난 밤 꾼 꿈이, 하도 신기하고 그럴듯할 때엔 조반상도 잘 받지 않고 이러 저러 육계 문이나 각판에 맞추어서 해몽을 하는 것이 여간 재미나는 게 아니었다. 해몽해논 게 잘 된 것 같으면 한 번 붙여 보고픈 생각이 자연히 생겨났다. 그래서는 아침을 먹고 바람을 쏘이는 겸, 안해의 두지에서 돈을 한 오십 냥쯤 꺼내 들고 신도감한테로 가보는 것이다.
 
110
만일 세 번이면 세 번, 그것이 전부 헛방을 놓았다면, 꿈이고 벼락이고, 무에 맞을 턱이 있는 노름이냐고 쉬 집어쳐 버렸겠는데, 장님도 문걸쇠 잡을 때 있다고, 그것이 꼭 한 번 맞아 떨어진 적이 있었다. 그래 한 번 꿈이 들어맞은데 입맛이 당겨서, 그다음도 틈틈이 이 육계에다 손을 대게 된 것이다.
 
111
밥 먹으면 잠을 잔다고 야단이었고, 잠을 잔다고 누우면, 꿈이 꾸어지이다 라고 일부러 손을 숨통 있는 가슴에다 올려놓고 빌어 섬기며 지랄이고, 자다 깨어나선 미친놈 모양으로 눈이 멀게서 꿈을 풀어 보느라고 정신이 빠져 앉아 있는 것이다.
 
112
그의 안해는 처음, 제 남편이 이즈음 어이된 일인 줄을 몰랐다. 가끔 바깥 출입이 잦고, 출입 했다 돌아오면 노 잠이다. 그래 미상불 어디 계집을 하나 두고 보아 다니는 겐 줄 알았다. 그러고 보니 남편의 태도도 어딘가 그전처럼 저엑 삽삽치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하 룻날은 남편 다려,
 
113
"요 지음, 머 볼일이 생겼소." 했더니 그는,
 
114
"볼일은 무슨. 누가 금점이 좋은 게 있다길래 좀 가보는 게지." 하고 대답한다.
 
115
'금점? 금점이라면 아버지도 알게 하지 않고 무슨 금점이랄까.’
 
116
그래서 다시 한번,
 
117
"어데 머 금점을 시작했소." 하고 물어보니,
 
118
"금점을 시작했다나. 좋은겐가 나쁜 겐가 알구야 시작하지. 여편네가 공연한 참견이야." 하고 성까지 내는 바람에 다시 그 이상은 캐어 묻지도 못했다.
 
119
오늘은 그런데 형준이는 낮잠을 자고 있다. 판이 좋고 육계꾼도 많을 텐데, 장근 산에서만 하는 것도 들킬 염려가 있다고, 이번엔 박리방네 집 뒷방에서 치장을 붙이고 육계 문을 열기로 작정한 것이라고 신도감은 말한다. 그래서 아침부터 어젯밤 꿈은 신통치 않다고, 이렇게 새 꿈을 꾸었는지, 형준이는 인차 방을 차고 밖으로 나간다.
 
120
꿈은 커다란 배를 타고 비류강을 건너본 것이니, 판계(板桂)에 틀림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121
그래 제 손에 있는 대로 서른 냥을 댈 건가, 안해나 어머니에게 얼마를 더 타내서 한 쉰 댓냥 댈건가, 하고 망설이다가 그대로 삼십 냥을 들고 신도감한테로 갔다. 신도감은 여태껏 기다리던 참이라고 그래 꿈을 잘 꾸었는가 묻더니, 오늘은 방이 좁고 그래서, 여럿이 모이는 건 위태한데 그래도 가보겠는가고 묻는다. 그렇다면 구태여 갈 필요도 없을 게라고 폭 지에 '판계’라고 써서 꽁꽁 말아주고 돈 냥을 곁붙여 주었다. 육계문은 밤중 으슥해서 열게 될테니 어디 만날 장소를 정하고 기다리라고 한다. 형준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러면 우리 뒷 대문 밖, 가시울타리 앞에서 만나자고 말하였다.
 
122
벌써 저녁때였다. 그는 집으로 오다가 아까 형선이의 말을 생각하고, 나카니시네 집엘 들려 보았다. 거기서 이것저것 새로 들어온 물건 구경을 하다가 집으로 와서 저녁을 먹었다.
 
123
밤이 이슥해지도록 그는 방안에 들어있었다. 형선이가 저녁을 먹고 사랑으로 안방으로 나 들더니, 종시 남포등하고 석유한 초롱을 사왔다. 큰 놈은 사랑에 매달고, 작은 걸 안방에 하나, 형준이 방에 하나, 형선이 방에 하나씩 매어 달았다. 저녁을 먹고는 이 남포등이 신통해서 모두 이야깃거리가 그것뿐이었다. 안방에서는 보패가 등잔불하고 비교해본다고, 둘을 내놓고, 껐다 켰다 하면서 재깔대었다.
 
124
형준이 처도 밝은 불 밑에서 고은 옷을 해본다고 시집 올 때 해갖고온 영초 저고리에 깃을 달고 앉았는데, 성기와 어린 딸아이가 무릎에 기어올라서성화를 부린다고,
 
125
"넌 좀 아버지한테루 가려무나." 하고 성기를 형준이에게로 떠민다. 형준이는 삼십육계 생각을 하느라고 아이고 뭐이고 그런 덴 도시 정신이 가질 않았다. 그런 걸 모르고 아이를 떠맡겼으니, 남편이 발끈하니 성을 내는 것도 까닭이 없지는 않았다. 그는 아이들 성화받기 싫다고 벌떡 일어나더니 밖으로 나가 버린다.
 
126
"아이 안 보랄게, 나가지 마시구레." 하고 나직이 불러보았으나, 그 말엔 귀도 안 기울이고 어디론가 상투 바람으로 나가버렸다.
 
127
그는 남편이 이즈음 집안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는 게 제 불찰인 것 같아서 내심에 조심하고오던 차이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제가 남편에게 한 거동에 대해서도 곧 뉘우침이 갔다. 그러나 그만 일에 성을 내던 남편은 아니었다. 이러다간 남편의 애정을 영영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들어간다. 쫓아 나가 남편의 팔이나 옷자락을 안고, 제발 안 그럴게 나가지 말라고, 어리광이라도 피어보고 싶었으나, 아직 시어머니와 시누이도 안방에 앉아 있고, 또 맞은 방에는 작은동서가 시아우와 자지 않고 불을 켠 채 있으니, 무엄하게 아무렇게나 굴어댈 수도 없다. 하는 수 없이 화나는 것을 아이들께로 돌릴 수도 없어서, 옷가지를 반짇고리에 틀어박고 새츰하니 입술을 감문채 아이들을 끼고 누웠다. 그는 마음이 언 잖아서 갑자기 울고 싶었다.
 
128
형준이는 사랑 마당 가운데 서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날이 찌풋하다. 그믐이 가까우니 아직 달은 없고 별도 큰 것만이 이따금 반쩍반쩍한다. 저녁 바람은 신선하다. 박참봉이 나가 버린 사랑엔 오늘 새로 사온 대등피에도 불을 켜지 않았다. 마루에 와서 궁둥이를 걸치고 앉아 보나 삼십육계 생각만이 머리에 떠올랐다.
 
129
대체 대낮에 꾼 꿈하고는 여간 뚜렷하고 신통한 게 아닌데,---커다란 너벅선(너비가 넓은 배)이를 뱃사공이 이편저편 장대로 짚으면서 건너던 것이며, 함께 배 위에 탔던 나 뭇 단을 옆에다 한 단씩 놓은 여편네들하며, 이런 게 모두 지금도 눈앞에 선하니 나타난다. 그런데 한 가지, 무엇 하러 십이봉에로 갔다가 배를 타고 오던 길인지, 그게 똑똑칠 않았다. 그러나 그까짓 배를 타게 된 원인 같은 건 별로 소용이 없을 게다. 배를 타보았으니 ' 판계’ 면 그 만이다. ---이렇게 혼자 두루두루 생각해가며 생담배가 타는 줄도 모르고, 이번엔 영락 없이 떼어낸 육계문이라고 좋아서 앉았는데, 두칠이가 뒷간 뒷길로 제 방에서 나오더니, 큰 대문으로 나가려고 마당을 건너다가 형준이를 보고 인사를 한다.
 
130
"어데 가나." 하고 물으니,
 
131
"일꾼두 두엇 얻구, 또 제삿집이두 좀 들렸다 올라구 합네다." 하고 공손히 서서 대답한다.
 
132
"누가 제산가?" 해서,
 
133
"문길덱(文吉徳)이 아버지 첫돌이 아니웨니까." 하고 대답한다. 그는 잠시를 더 발을 땅에다 붙이고 주춤주춤하다가, 다시 인사를 하고 대문으로 나가버린다. 그러더니 몇 발자국도 안 나가서, 도로 돌아서 들어와 안으로 빗장을 찔러서 대문을 닫고 저는 온 길로 되짚어 돌아간다. 큰대문을 잠가도 좋을 시각이라, 그는 제 손으로 큰대문을 닫고, 물역 뒷대문으로 나가려는 것이다.
 
134
삼십육계의 '판계’ 생각을, 마치 노루 때린 몽치, 3년 동안 우려먹듯 하고 있던 형 준이는, 이 때에 문득 두칠이 처 쌍네의 생각을 하였다.
 
135
'형걸이는 그 뒤에도 두칠이가 어데 간 줄만 알면 그대로 드나드는 모양이다. 대체 아버지는 형걸이보고 무슨 책망의 말이나 했는가. 책망을 했는데도 형걸이는 저렇게 다니는 것 일까’ 형 준이는 지금 이런 것을 생각하고 있다.
 
136
그러나 실인즉 형걸이는 이틀밖에는 드나들지 않았다. 형준이한테 들킨 건 별로 마음에 치부도 해두지 않은 양, 그 이튿날도 쌍네 방에 왔었으나, 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가서 어머니에게 핀잔을 듣곤 발을 끊듯이 여지껏 한 번도 발길을 안 했다. 하기는 그 이튿날 하루를 지내서 곧 두칠이가 돌아왔으니 올래야 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137
'오늘밤도 두칠이가 좀 늦게야 돌아올 테니, 형걸이가 기맥을 알었으면 또 올는지도 모르렷다. 이번엔 아주 단단히 타이르든가. 집안에 모두 알게 하든가, 그렇게래도 해야만 할 게다.’
 
138
이렇게 생각이 갔으나, 그의 마음 한쪽에서는,
 
139
'쌍네 보고 형걸이와의 관계를 갖고 위협을 하면서 신도감이 찾아오는 걸 기다리기도 할 겸, 한번 장난이래도 쳐볼는가.’
 
140
이런 걸 열심히 생각하고 있었다.
 
141
삼십육계로 인해서 얼마간 잊었던 딴 정력이, 이때에 불쑥이 치밀어 오르는 걸 형 준이도 의식한 다.
 
142
'어데까지든지 형된 도리를 해야만 한다. 형의 책임이란 건 동생들의 행동을 감시하야 그 릇됨이 없게 경계해주는 데 있다.’
 
143
겉으로는 이렇게 저 자신에게 타이르면서, 또 한편 깊숙한 속으론,
 
144
'두 칠이가 없는 방으로 들어가서, 쌍네에게 한 손으론 사탕을 주면서, 또 한 손으로 칼로 위협도 하면서, 그러면 염려없이 제 손아귀에 들게 되렸다. 그래서 한껏 속이 후련해져서 있노라면 신도감이 판계로 육계문이 딱 맞아떨어졌다고 삼십 냥의 삼십 곱이나 되는 돈을 듬뿍이 날라다줄 것이고, 그럭하면 얼마를 처억 집어서, 신도감 수고했다고 쥐어주고, 그 나머지에서 한 절반은 갈라서 쌍네에게다 주어버릴 것이다. 안 받으려고 한면, 상전 서방님 이주는 돈은 받아야 한다고, 으젓하니 꾸짖으며 그에게 억지로라도 들려줄 것이다.
 
145
이런 걸 생각하면서, 그는 마루에서 통숫간 뒤로 통한길을 걸어 뒷대문께로 갔다.
 
146
두칠네 방은 캄캄하다. 벌써 자지는 않을 텐데, ---바로 얼마 전에 상전댁 부엌에서 짐승의 여물을 들고 외양간으로 나들다가 제 집으로 밥광주리를 이고 나갔으니, 두칠이와 저녁을 먹고 지금쯤은 제 부엌을 겨우 치우고난 뒤에, 방안에서 종일 고되게 일한 몸에 다시 바느질 같은 걸 들고서 남편 돌아온 동안을 기다리고 있을 것인데, 이렇게 일찌감치 불을 껐다면, 이것이 혹 두칠이가 없다는 표적으로 형걸이를 끌어들이는 수단이나 아닌가. 그러나 쫙 열림 뒷대문 밖에서 흰 것이 하나 어른거리는 게 보이었다.
 
147
쌍네는 저녁을 먹은 뒤 겹옷 두어 가지를 에이빨래를 해다가 지금 뒷대문 밖 가시 울타리 옆에 고잇다리를 걸쳐서 널어놓고 있던 참이었다.
 
148
대문 밖에 나서서 형준이는 쌍네가 빨래를 다 널기까지 그를 바라다보고 섰다가, 쌍네가 버 주기를 한 옆에 끼고 들어오려고 할 때에, 그의 옆구리 괴침을 꽉 잡았다. 버주기를 빼앗아 겨우 깨지지나 않을 정도로 토방 위에 동댕이쳐놓고, 덥썩 쌍네의 허리를 돌려 안았다.
 
149
쌍네는 형준이의 행동이 뜻밖이었다. 얼마 전에 두뭇골 도련님이 제 방에 들어왔다 나가는 것 잡아갖고 책망을 하더니, 그 이튿날은 기어이 그걸 상전 나리에게 일러바쳐 말썽을 일으켰고, 그뿐 아니라 늙은 종의 귀에까지 가게 이야기를 퍼뜨려 놓은 이가, 지금 스스로 내 몸에 손을 댄다는 건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것도 늙은 종이 쌍네를 불러 갖고 부엌에서 들었노라고 아리켜주지 않으면 알 턱이 없다. 사나이답지 않게 샐 샐 거리고 다니는 것이 아니꼽고 이튿날 다시 두뭇골 도련님이 왔다 간 뒤론 얼씬 발길도 안 하는 것이 필시 그 탓이라고 적지 않이 얄미웁게 생각하고 있는 터에, 이번엔 제 몸을 통째로 낚아 보려고 팔을 걷고 대서는 것이 아무리 상전 서방님의 하는 행동일망정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몸을 꽉 가다듬었다.
 
150
"노시라구요."
 
151
이렇게 말하면서 제 허리에 감긴 팔을 홱 뿌리쳐버렸다. 그럴 줄은 몰랐던 터에 뜻밖에 쌍네의 하는 품이 왈패스러운 데 놀래어, 뒷들뒷들 한 발자국을 물러섰다가,
 
152
"아니 네가 이럴 참이냐." 하고 적이 위협조로 다시 대선다.
 
153
"이러지 않으면 어떻게 해요."
 
154
그 다음 말은 입 밖에 내진 않았으나,
 
155
'내가 남편에 대한 정조는 못 지킬 갑시. 인륜을 깨트리진 못해요.’ 하는 도고한 심보가 드러나 보인다.
 
156
"아니 너 정말 이러기냐." 하고 재처 말하는 데는 쌍네는 아무말도 대답치 않고, 딱 얼굴을 바로 세우고 쳐다보았을 뿐이다.
 
157
"오냐 그럴락커던 두칠이보구 말해서, 도무지 너들을 내 집안에 두질 않게 매련해줄 테다."
 
158
이렇게 말해놓곤 '이래도 좋으냐’ 하듯이 또 한 번 쌍네의 얼굴을 바로 본다. 쌍네가 아무 말 못 하는 걸 보고, 이건 필시 굴목임에 틀림없다고, 얼굴의 표정을 느긋하니 늦추고 바른 손을 다시 내밀어본다.
 
159
"맘대루 하시구려, 죽기밖엔 더 할라구요."
 
160
그러나 '맘대루 하라’는 것이 '내 몸을 서방님께 맡기니 마음대로 주물며 놀아대슈’ 하는 뜻이 아니고 '죽으면 죽었지 난 당신 소청 들을 순 없소’ 하는 의미라는 건 그의 어조로 넉넉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쌍네의 뺨을 하나 갈겨대곤 그대로 가시울 문을 지나 물역으로 나갔다. 강기슭 방수성 위에 서서 잠시 기다리면서 마음을 진정 시키고 있는데 신 도감 이 아래쪽에서 온다. 물어보니 육계문은 '판계’가 아니고 '청운(靑雲)’이었다고 한다. 그는 아무 말도 안 하고 휭하니 문길덕이네 집으로 갔다.
 
161
싸리문 밖에서 웅성대는 안뜰을 향 하여
 
162
"두 칠이 예 왔나." 하고 부르니 두칠이가 헐레벌떡시며 뛰어 나온다.
 
163
"저를 부르셨습너니까."
 
164
형준이 앞에 서 있는 두칠이에게 그는,
 
165
"자네 안해가 행실머리가 없어 두뭇골 형걸이가 드나드는데, 그대로 두단 집안에 창피 한일 생길 테니 어데루 떠나가게."
 
166
느닷없이 하는 말이 무엇을 뜻함인지, 한참 동안 두칠이는 영문조차 몰랐었다.
【원문】대하(大河) 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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