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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하(大河) ◈
◇ 대하(大河) 9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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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
김남천
 

1. 9장

 
2
박참봉은 오늘, 유난히 유쾌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가 이 고을에 이사와 근 20년 동안 큰일 작은일에 훼방을 놓고, 앞으로 뒤로 방망이를 들던 박리균네 형제가, 인제 드디어 박참봉한테 완전히 굴목할 날이 왔기 때문이다.
 
3
두뭇골 집 사랑에서 ---형걸이 모친 윤씨는 일찌감치 자리를 떠나 안방에서 평양 영감이 잡아 들여온 물고기를 조리는데, 간을 맞추어 장을 두어주고 갱엿을 청간(광)에서 내 다가 간장이 한소끔 끔어오를때에 넣으라고 종에게 이르고 있었고, 박참봉은 혼자 자릿속에서 새벽 잠에 아직 취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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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대문 밖에서,
 
5
"박참 봉 어른 기침하셨쉥까."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박리균이가 아니면 그의 동생일 게 분명한 건, 어젯 저녁에 사랑에 와서 대충 이야기를 맺고, 내일 아침 박리균이든가 박성균이를 직접 들여 보내겠노라고 한, 중간에 선 김생원의 말로써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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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참봉은 부르는 음성을 듣고, 그게 누구라는 걸 짐작하고도 인차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삼남이란 놈이 대문간에 나갔다 와서 전갈을 할 때까지 베개에 머리를 눕힌 채 있었다.
 
7
그는 힘들게 일어나서 옷을 대충 주워 입고 자리를 부욱, 요포단을 가운데로 접어서 뒷 목으로 밀어놓은 뒤에, 사랑문을 열어서 공기를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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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오라구 그래라."
 
9
이렇게 이르고 그는 버릇인 기침을 두어 번, 그 다음엔 자릿기 숭늉 남은 걸로 입을 가시어 타구애 뱉었다. 아랫목 보료 위에 돌아와 담뱃대를 들어 소털 같은 기새미를 담으려는데 박리 균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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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일러서 이거 안됐소외다." 하며 들어온다. 오십이 넘어 감투 쓴 머리에는 흰 털이 많이 섞이고, 궁이 끼고 초란스럽게 생긴 갤즘한 상에는, 잔 주름과 노란 수염이 채신없이 없어 보인다. 이 상판때기가 술이 얼근하면, 연신, '성씨는 박귀성의 처니 성논산의 장녀라’만 되풀이하니, 과시 볼 만한 일일게 라고 박참봉은 속으로 생각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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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들어오십시오. 머, 이번에 또 큰 배포를 가지셔서, 아무려나 시세에 따라 남보담 먼저 손을 써보는 것두 괜찮은 일이웬다. 담배나 한 대 붙이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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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럭부스럭두루마기 속에서 주머니를 만지는 품이, 집문서를 꺼내려는 게 분명한 걸, 박참 봉은 또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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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한 대 붙이우다." 하고 기새미 담은 옥초합을 밀어 내놓는다. 그러니까 박리균이도 주머니 만지던 손을 빼서, 담배를 한 대 담는다. 옥초합을 밀어놓고, 놋화로에다 긴 담뱃대를 박고 뻐끔뻐끔 빨아 올린다.
 
14
"어젯밤 김생원한테서 대강한 이야기는 들었는데, 머 거기에 더 다른 말씀은 없겠 습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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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뱃대를 물고, 문갑 옆 사방침에 의지하여 척 한마디를 한 뒤에, 다시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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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문서에, 400냥, 육자 변으루." 하고 이야기의 요령을 추려서 말하니, 박리균이는 물고 있던 담뱃대를 급작스레 쪽 소리 가나게 입에서 뽑고, 안 나오는 웃음을 노란 수염 오라기 옆에 그려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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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 틀릴 리가 있가쉥까." 하고 저보다 여남은 살이나 아래인 박참봉에게 껀듯 머리를 숙이듯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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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참봉이 쇠를 들고 뒷벽 창문을 열려고 일어서는데, 박리균이는 주머니에서 집문서 2 장과 표 쓴 걸 내놓느라구 앉은 자리에서 아무적거린다.
 
19
문서와 표를 훑어본 뒤에, 박참봉은 400냥의 돈을 박리균이 앞에 내놓았다.
 
20
"그럼 집을 곧 떨어 고쳐야 단오에 쓰게 되겠군요. 그러구 이왕이니게루 방선문 비각두 떨어 고치기루 하지요."
 
21
이 마지막 말은 적지 않이 박리균의 귀를 간지럽게 할 줄 알고 하는 말인데, 오히려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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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엔 그렇게두 생각해봤는데, 내 집을 떨어 고치구, 또 내 아우의 집두 대강 고칠 곳이 많아서 돈이 자랄 것 같지가 않구만요. 그래 비각 같은 건 차차루 하구. 우선 두 집에 달린 열 넘는 식구가 살구야 볼 일이 아니웽가."하고 자기를 완전히 죽여버리듯이 박참봉의 말에 빌붙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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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그 다 이를 말슴이웽까. 비각이 밥 멕여 주는 건 아니닌게루. 아무려나 생각은 잘 하신 생각입네다. 이제 총차루야 객줏집두 새법을 좇어야지 마방을 가지구야 마바리군이나 재웠지, 어데 점잖은 손을 맞을 수가 있쉥까. 신작로두 나구, 인제 평양과 원산 새에 길이 열리구 볼 지경이면, 아마 점잖은 객이 많이 들릴 게구, 지금 칭량사(測量師)나, 모두 이런 신식 양반들이 통히 이 큰 객주에 들게 될 게 아니웽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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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려나, 처음은 적지 않이 마음이 불쾌한 대로 하는 수 없이 김생원을 이 집에 보내 돈 교섭을 시켰을 감시, 이왕 이리된 바에는 별수 없는 일이었다. 겉으로라도 기쁘두룸해서 물러 나갈 밖에, 뒷일을 위해서는 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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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박리균이도 단오에 열리는 대운동회를 기회삼아 제 집을 떨어고쳐 신식 여관을 차리고, 동생 성균네 집은 그래도 좀 성성하니 그대로 낡은 곳만 고쳐서 마방과 국숫집을 차려 보자고, 형제간 성론이 되어 돈을 내려고 할 때, 처음부터 박참봉을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집 저 집 다녀보아도 집을 잡고 돈을 줄 곳은 없었으나, 끝으로 나 카니 시네 집에서는 틀림없이 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운동회 앞두고 잡화상을 부쩍 늘릴 생각인지 돈이 바르다고 거절을 당하여, 결국 하는 수 없이 박참봉에게로 사람을 보내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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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참봉은 박참봉대로 딴 배짱이 있었다. 종차론 여관이나 잡화상 같은 것이 성해갈 눈치가 뻔하지만, 제 손으로 그런 걸 벌여보기엔 아직 시기 상조라고 본다. 그러나 이런 걸 남보다 먼저 손쓰는 편이 결국 이긴다는 것도 또한 뻔한 일이고 보니, 구차한 일은 남에게 시켜놓고 자기는 뒤에서 실권만 잡아두는 게 어느 모로 따져도 영리한 계책이라고 생각 하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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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누가 여관 같은 걸 차려놓겠다면, 손해나지 않을 정도로 돈을 융통 해주겠다는것이 박참봉의 본배짱인데, 마침 날아 들어온 불벌레가 박리균네 형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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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는 두집 문서를 잡고, 그 중의 한 채는 단오 전에 곧 떨어 고칠 것을 약조로, 그 편에서 요구하는 대로 한 푼도 깎지 않고 알돈400냥을 돌려주기로 한 것이었다. 여관이 잘 되면 잘 되는 만큼씩 변리를 물어가느라 바쁠 것이요, 생각대로 잘 안 되면 1,2년 안짝에 집을 뺏기고바가지쪽을 차게 될 판이다. 그야 어찌 되었건, 박참봉으로서는 무엇으로든지 한번 박리균네 형제를 꿇어 엎으려고 별러오던 참이다.
 
29
박리균이를 보내고나서, 그가 만족하여 아침 밥상을 들은 것도, 과시 까닭이 없지 않진안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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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유쾌한 일이 뜻밖에 불쑥 생겨난 뒤에는, 가끔 또 불유쾌한 일이 뜻하지 않은 곳에서 튀어 나오는 것도, 살아가노라면 흔히 볼수 있는 일인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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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참봉이 아침을 먹고도 한참 동안이나 두뭇골 사랑에 앉아서, 문서를 정리하고 표를 뒤적여서 채국채국 꿰매 간직하고, 어젯밤 김생원과 먹었떤 술찌꺼기를 터느라고 밀수를 타서 시원하니 배를 씻은 뒤에, 오늘은 제법 날이 따가우니 자리 그물이나 한떼 들고 평양 영감과 매 생이( 마상이: 노를 젓게 된 작은 배)나 강 위에 띄워볼까나---이렇게 척 기분을 돋우면서 감루 바람에 두뭇골서 큰집 사랑으로 나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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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엘 들어서니 평양영감이 그물을 추녀 끝에 널고 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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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새 안녕하시웽까." 하며 인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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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어데 넘은 강에나 가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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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참봉은 영감을 위로하느라, 얼마 전부터는 깍듯이 예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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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께서 자리를 치시구, 절랑 어데 쏘가리나 좀 낚아봅세다. 잠수를 했으믄 쏘가리 놈이나 찔러 내겠던 걸, 늙어서 건 못해도, 돌꼬미나 미끼해서 어데 멪놈 낚아봅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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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평양영감도 박참봉의 유쾌한 낯을 대하는 건 기쁜 일임에 틀림없는가보다 담뱃대를 물고 박참봉은 마당을 한 번 훵하니 돌아본다. 연자간으로, 곡식이 가득하니 들어가 있는 토굴 앞으로, 외양간으로 가서 말을 한참 들여다보고, 그 다음은 다시 이 쪽으로 돌아서 바자를 넘어 파종해놓은 나무새와, 잎이 파란 과잉ㄹ나무를 바라보고, 뒷 대문께까지 갔다가 다시 되짚어서, 사랑 마당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모두 평온하다. 소는 밭갈이를 나가고, 노새는 연자간에서 쌀을 찧고, 그리고 재지풍이 옆에는 두칠이 처 쌍네가 수건을 쓴 채겨와 먼지에 싸여서 여전히 일을 하고,---그래서 그는 유쾌한 김에 중대문을 들어가 안마당을 돌아보는 것이다. 며느리들이 인사를 한다. 큰댁도 인사를 한속으론 이렇게 생각 하고있는데, 뜻밖에 형 준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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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걸이 혼사가 어떻게나 되어가는가요." 하고 첫허두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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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형된 몸으로, 나이 차도록 장가를 들지 못한 아우의 혼사 걱정을 하는 건, 지당한 일이다. 그래 새삼스럽게 어데 좋은 규수래도 맞차운 곳에 생겼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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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는 이렇게 생각 해보면서,
 
41
"지금두 거저 그러하구 있다." 하고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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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 맞차운 집에 규수가 없어서 그러는 겐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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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세, 말하자믄 그렇다구두 할 수 있지만, 그래 어데 될 만한 곳이래두 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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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올세다. 너머 좋은 델 고르다가 시기를 놓치든가, 잘못이 생기든가 할까봐서 하는말 심이 올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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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델 고르는 게 아니라, 정 너절한 데 피한다는 게 온당한 만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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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박참봉은 말소리를 좀 낮추어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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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이 덜과는 사정이 다르질 않냐. 어데 웬만한 데는 그쪽에서 잘 안 들을 것 같애, 멀찌감치 비쳐만 보구서 마는 일이 많구, 또 체면이 있으니 마구 처져 붙을 수두 없구. 그래 안즉은 거저 여기저기 비쳐만 보구 그러한 채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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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준이는 아버니의 설명을 듣고도 물러 나가질 않고 한참 동안 그럭하고 앉아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안방을 향하여, 고기 사냥 갈테니 점심 준비를 해서 매생이 맨 데로 가져다 두라고 이르려는데, 피끗 형준이의 얼굴을 보니 아직도 할 말이 남아 있다는 듯이, 입 주둥이를 약간 히둘거리고 앉았다. 그래서 다시 박참봉은 자리를 바로하고 한 번 아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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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이 아니오라, 형걸이를 그대루 두다가는 창피한 꼴을 보겠습너니다. 어젯밤 으 슥 해서 마당을 한번 돌아보는데, 형걸이가 두칠네 방에서 나오는 걸 봤습너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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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바람에 쭉 일러바치고 형준이는 잠시 낯을 수그리었다. '마당을 한번 돌아보는데’ 하고 간단하니 말하였으나, 그 한마디 속에 실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만 곡절이 들어 있던 걸 생각지 않을 수 없었던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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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박참봉은 이 말ㅇ 적지 않이 놀래었다. 아닌 밤중에 두 칠이 없는 쌍네 방에서 형 걸이가 나오는 걸 봤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함인지는 설명치 않더라도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박참봉은 잠시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형준이는 이러한 아버지의 태도에 기운을 얻었는지,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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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제가 잡어 세우굴랑, 지금 혼삿말이 여기저기서 빗발치듯 하는데, 네가 몸 처신을 이렇게 하구 보면 어떻게 되겠느냐구 일렀습더니, 그는 잠자코 섰다가, 누가 뭐랜는가구 하는 구만요. 그래 밤두 늦었으니 인젠 가 자라구 하구서, 두칠이 처보구 맻마디기갈이래두 할까 했다가, 외려 덮어두는 게 창피가 덜할 것 같애서 그대로 내버려 뒀습너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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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참봉은 여기까지 말하도록 잠자코 앉았다가 아들의 말이 떨어지자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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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갔다. 이전 네 일이나 나가 봐라." 하고 안문 쪽으로터거리를 돌렸다. 또 무슨 말을 내친김에 좀더 늘어놓으려다가, 형 준이는 아버지의 말에 좀 무색 해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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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하고 나직이 대답하곤, 푸시시하니 안뜰로 통한 문을 열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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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준이가 나간 뒤에 박참봉은 잠시 동안을 멍하니 앉았다가 바꾸어 입었던 옷을 다시 갈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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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영감이 재촉이나 하듯이 윗마루로 올라와서 방문을 벙싯하니 열어보는 것을,
 
58
"난 또 갑재기 볼일이 생겨서 못 갈까부외다. 내일이나 가보갔수다." 하고 말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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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참봉은 지금 당한 일이 적지 않게 불쾌했던 것이다. 평양영감은 얼굴에다 웃음을 띠 우 면서 매생이 놀음을 재촉하려다가, 느닷없이 거절을 당하고나서 어인 일인지는 모르고, 좀 메사 해서, 방문을 닫았다. 그가 그물과 낚시를 들고 매생이죽을 둘러매려 할 제, 박참 봉 이 감투 바람으로 훵하니 대문을 나가는 걸 바라보고 속으로 혼자, 무슨 일이 생겼나보다, 하고 생각해보았다.
 
60
박참봉은 담뱃대를 뽑아서 횡횡 내두르며, 향교 골목을 돌아 밭셋길로 틀어서서 두 뭇 골로 댓 바람에 쫓아갔다. 물론 형걸이는 학교로 간 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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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박참봉이 지금 두뭇골 집으로 되짚어오고 있는 것은 , 형걸이를 불러 세우고 책망을 한다든가, 사실의 진부를 가리려든가, 머 그러기 위하여선 아니었다. 그러므로 형 걸이야있건 없건 상관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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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대문을 들어서서, 그가 완전히 두뭇골로 돌아왔다는 걸 의식하였을 때, 금방, 제 가하고 있는 행동이 좀 채신머리 없이 느껴진다. 그만한 일에 제가 고기 사냥 가려던 걸 중지하고, 부리나케 두뭇골로 쫓아왔다는 건생각해보면 창피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들 이비 복의 방에 들었다는 것, ---그것이 가령 형준이 말대로 사실이라고 해볼 갑시, 이렇게 큰 변이 난 것처럼 서둘러댈 거야 없지 않느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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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생각이 가니, 그는 그대로 방안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실인즉 작은댁과 형 걸이의 혼삿말이나 두루두루 급히 이야기해볼 양으로 달려온 것인데, 그것 역시 급히 서둔다고 신통하게 잘 될 일도 아니고, 또 그다지 시각을 다툴 만한 일거리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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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박참봉의 이러한 저 자신조차 종잡을 수 없는 수상한 행동의 동기가 된 것은, 유쾌한 아침을 갑자기 흐리게 한, 그것에 대한 분통이었다. 형준이가 그런 걸 듣고 형걸이의 혼처를 너무 고른다느니 뭐니 하는 게, 마치 작첩(作妾)에 대한 무엄한 비평같이 들려서 그게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러나 형준이의 말에 이러니저러니 타박을 하고 앉았기도 열없고, 그래 어디 대고 분풀이라도 하고 싶은 지향 없는 격분이, 이렇게 그로 하여금 두뭇골로 통 한길을 부리나케 쫓아가게 마련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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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시 마당을 휭 돌아 무어 잊어버린 거나 찾는 양, 구석구석을 기웃거리다가 그대로 대문을 나와버렸다. 그 다음은 누가 보면, 느즈막히 두뭇골 집에서 조반을 먹고, 지금 행길 큰집으로 가는 길이란 듯이, 늘어지게 담배를 뻐금뻐금 빨면서, 왼손을 하나 주먹을 만들어 뒤 꽁무니에 대고 구룡교 옆으로 개울을 끼고 나와서 행길로 올라선 것이다.
 
66
평양영감은 벌써 강으로 나가버린 뒤였다. 그래서 곧 다래끼나 광주리에 점심을 담아 보내라고 이르고, 박참봉은 미심결로 자리 그물을 한떼 더 들고 물역 뒷대문께로 나갔다. 그런데 채 뒷대문을 나서기 전에, 제 방에서 나와 토방으로 돌아드는 두칠이 처 쌍네를 만났다. 오늘 잡아 두 번째 보는 얼굴인데, 형준이의 말을 들은 뒤이라 쌍네의 얼굴이 아까와는 달리 보였다. 그렇거니 해서 그런지, 저편에서 낯을 붉히고 여는 때보다 더 머리를 숙이고 길을 비킨다.
 
67
"얘, 너 점심을 넣어놨을 테니 매생이 있는 데루 니구 나오나라."
 
68
예사대로 이렇게 이르니,
 
69
"예." 하고 대답하기는 하나, 쌍네가 저쪽으로 사라져 없어졌을 때, 박참봉은 제가 지금 말만은 여전히 하였으나 속은 좀 주춤거리던 걸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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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처음은 종간나드니, 막서리의 처를 지내서, 인제는…… 그렇다, 인제는 셋째 아들 의정부 란 말이다.’
 
71
이런 걸 생각해보면서,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것이 별로 형걸이의 못된 소행인 탓도 아닌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일을 저질러놓은 형걸이에게 급작스리 미움이 가든가 그렇진 않던 것이다. 강가에 나서면서는 박참봉은 벌써, 그런 지저분한 시끄러운 생각은 애써 털어버리려고, 매생이가 있는 방수성 아래를 눈에 손을 얹고 먼발로 내려다보다가,
 
72
"패 양 영감, 잠시 매생이를 돌려 붙이우. 난두 가치 갑세다." 하고 고함을 질렀다. 매생이는 기슭을 떠나서 고기잡이 터로 막 여울을 훑으려고 하던 참이었다. 그는 삿갓 쓴 머리를 소리나는 쪽으로 돌려보고, 그것이 박참봉 나리라는 걸 알자, 아무 말도 안 하고 매생이를 궁개로 돌려대며 다시 말뚝을 박은 기슭으로 저어온다. 이것을 보고 섰다가 박참봉은 방수성을 내려서서, 어청어청 아래 청파니(靑城)께로 향하여 걸어갔다.
 
73
"아니, 머, 일을 다 보셨습너니까." 하고 비로소 벌죽하니 웃으면서 한 손으론 꽉 매상죽을 붙들고 박참봉을 맞아 들이는데, 그는 그물을 먼저 들여놓고 낑하고 배안으로 들어서면서
 
74
"대강 다 봤수다." 하고 배 가운데로 온다. 다시 매생이를 떼려는 걸
 
75
"가만 있수, 좀 끓일 것과 술을 넣으라고 했으니 인제 누가 니구 나오리다."
 
76
저만큼 방수성 위에서 아랫길을 잡아 쌍네가 광주리에 무얼 담아 이고 이쪽으로 걸어오는것이 보였다.
 
77
해는 따가우나 바람은 비류강 위를 스쳐서 싸늘하다.
 
78
급작스리 쏘가리 생선국을 끓여 반주로 한 그릇 먹고, 박참봉은 얼근히 취해서 두뭇골 집으로 왔다. 어두운 지 한참 되는 초여름 밤인데 저녁때부터 날이 흐릿해오더니 밤중 안에 비가 오려는지 공기가 제법 훗훗이 불쿤다.
 
79
사랑으로 들어오니 작은댁 윤씨가 등잔을 돋우고 자리를 깔아놓고 기다린다.
 
80
"저녁은 머 잡수셨소."
 
81
"잡아온 걸루 쏘가리 생선을 끓여 먹었지. 그래 참 고기 디레 왔던가."
 
82
"쏘가리 두 놈하구 지가리새끼 메기새끼랑은 끓여서 형걸이랑 주구, 모래무치랑 마 지랑은 장조림을 해두었지요."
 
83
박참봉은 발을 뽑고, 자리끼를 부욱 끌어다 벌떡벌떡 마시는데,
 
84
"부주주하시거던, 오미자나 밀수를 타올걸요." 하고 말로만 텀을 한다. 그러나 박참봉은 물을 한참이나 마시고,
 
85
"형 걸인 집에 있나." 하고 묻는다.
 
86
"좀 전에 바람 쏘인다구 나가두군요."
 
87
"또 나가서?"
 
88
박참봉의 낯을 다소 언짢은 기색이 지나간다. 그러더니 곧 되 짚어서,
 
89
"어젯밤은 어느 때에나 돌아왔나." 하고 묻는다.
 
90
"글쎄요. 자정 전이었겠지요."
 
91
윤씨의 대답에 박참봉은 아무 말대꾸를 않고 한참을 멍하니 등잔불만 바라본다. 아직 사십 전인 윤씨는 눈매와 자태가 그대로 이쁘게 젊은 것 같다. 다른 날따라 없이 찌풋한 영감 이 어인 까닭인지를 모르고,
 
92
"어서 저고리랑, 이 감투랑, 좀 벗으시구 누우시구려." 하면서 감투를 벗겨 문갑 위에 놓고, 손수 저고리를 벗기고 또 허리끈도 끌러준다.
 
93
"해가 따거운지 좀 타셨구려."
 
94
그러나 몸을 맡긴채 박참봉은 자리에 누울 염도, 윤씨 말에 대답 할 염도 안 하고 있더니,
 
95
"형 걸이 놈이 밤에 어데가 노는지 몰라." 하고 느닷없이 형걸이 말을 또 묻는다.
 
96
"글쎄요. 저 학도덜끼리 어데 뫼여 놀든지. 교사네 집엘 가든지 그러겠지요."
 
97
박참봉은 자리에 누워버린다. 그러더니 또 일어나서 물을 한 모금 더 마시고,
 
98
"담배 붙일까요." 하고 묻는 데는 대답을 않고,
 
99
"청 시울서 무슨 소식이 없었나." 하고 묻는다.
 
100
"오늘 저녁 해 넘어가기 전에 중매 여편네가 왔는데, 하는 말이 채 말은 안 뗐으나 될 성 부르다구 하긴 합데다만, 원 색시나 기분이 맘에 들으야지요."
 
101
"왜, 그 집이 어드래서."
 
102
"어드렇다니오. 망조에 들어 기우는 집안이 아니웨까."
 
103
"망조에 들었거나 집안이 기울거나, 규수나 똑똑하믄 그만이지, 처갓집 국물을 얻어먹을 차 빈가, 누가."
 
104
"글세, 세간이야 어찌 됐건, 규수가 똑똑하믄 그만이라지만, 처갓집두 너무 가난하구 보면사 사모사로 시끄럽지 않은가요. 그러나저러나 규수나 얌전하다믄 모르겠는데, 말을 들으니질 쿠 냉이두 변변히 못하구, 아이가 또 영리하질 못하다누만요. 게다가 또 궁합이 안 맞는다는가 부외다."
 
105
"궁합이 안 맞아? 그럼 그른 혼사지."
 
106
질쿠냉이를 못한다든가, 생김새가 좀 영리칠 못하다든가, 한다는 것쯤은 어떻게든 우겨 대볼 길도 있을 것이고, 더구나 사돈집이 쇠운에 들어서 세간이 기울어져간다는 것 같은 건소 뱅이 문제도 안 되는 말이라고 재겨라도보겠는데, 실소린진 몰라도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덴, 박참봉도 어이할 방도가 없었다. 그래 그는,
 
107
"뭐이 뭐인데, 궁합이 안 맞나." 하고 좀더 소상히 천착해본다.
 
108
"겉궁합이 토끼하구 뱀이라서 맘이 덜 내키는데, 속궁합은 또 말할 수 없게 나쁘담 네 다그 레."
 
109
이 말을 듣고 박참봉은 붙여주는 담배를 몇 모금 빨다가 이어 윤씨에게 주고, 자리에 누워 버린다. 누비이불을 사뿐히 덮어주면서,
 
110
"불을 끄리까." 하고 윤씨가 묻는 것을,
 
111
"오늘밤 형걸이 들어오거들랑, 인전 밤에 아여 밖에 나가질 말라구 일러두게." 하고 눈을 한 번 감아본다.
 
112
"아니, 왜요. 어데 못 갈 델 간답디까. 기애가."
 
113
윤씨가 좀 실색한 빛으로 묻는다. 박참봉은 그렇게만 말해두고, 사실은 깨우쳐 말하지 않 으려고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114
"그 녀석이 두칠이 처를 봐 댕긴다니, 원, 하구 많은 계집 중에."
 
115
이렇게 말하고, 이야기를 채 아물지 아니하니 윤씨는 깜짝 놀래어,
 
116
"그게 무슨 말씀이웨까. 형걸이가 막서리 처를 보아 당기다니, 어데서 음해의 말슴이라도 들은 게지, 차마 그럴 리야 있겠소. 그래 어데서 진정을 알아보셨나요."
 
117
"글세 그렇게만 알구 있어. 여러 말 옮길 게 없이."
 
118
박참봉은 몸을 한 번 뒤채고 푸 술냄새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윤씨는 무얼 말하려고 입술을 나불나불하며 그의 옆에 앉아 있다.
【원문】대하(大河) 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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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천(金南天) [저자]
 
  1939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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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5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