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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하(大河) ◈
◇ 대하(大河) 15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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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
김남천
 

1. 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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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오가 왔다. 단오를 맞고, 단오를 이용하기 위하여, 이 고을은 새로운 활기를 띠었었다. 그것이 드디어, 제철 만난 함박꽃과 부득꽃과 싱싱한 창포와 더불어, 난만하니 피어 터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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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선문 안 박리균네는 박참봉한테서 집문서를 잡히고, 육자변으로 400냥의 돈을 취 해다가, 짐을 활짝 떨어 고쳤다. 국수장수를 그만두고 방을 많이 갈라서 신식 여관을 차려놓았 다. 동명여관이라는 넉 자와, 주인에 박리균이란 다섯 자가 먹 냄새 상끗하니 나무 현관 위에 찬연하다. 백묵을 갈아 나무에 바르고 지게 같은 먹으로다 반초로 홀려서 써붙인 것이다. 그의 동생 박성균네 집도 대충 낡은 군데를 고쳐서, 리균이가 하던 국수집을 인계 하여 크게 벌여놓고, 전에 하던 마방도 그대로 겸하였다. 단오에 이 고장에 모여들 씨름꾼과, 각처에서 운동회로 인연해서 몰려들 학도들이 이 집에 들게 될 것을 미리부터 예상했던 것이다. 운동회가 끝난 뒤에도 손님이 잇대어 끊일 날이 없을는지는, 아무도 단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선 출발만은 화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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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 빠른 나카니시네가 단오 전에 다룩지에 한차판을 실어온 잡화 상품은, 단오도 되 기전에 대부분이 팔리어서, 그는 몇 가지 운동회때 쓰일 상품을 더 첨가해서 다시 한 달구지 가까운 짐을 평양서 해 왔다. 집집이 남포등 없는 집이 없고, 양말 신지 않은 젊은이가 드물었다. 대팻밥으로 만든 농닙도 순식간에 팔려버렸고, 몇 통씩 해온히로 담배도 나래가 돋힌 드싱 사람사람의 호주머니 속에 날아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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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참봉네 아랫집 김용구네는, 남처럼 밑천이 없어서 활짝 가게를 번화하게 늘리지는 못 했으나, 어떻게 재치 있게 이익을 취해보자고, 커다란 납지게를 하나 장만해다가 이층으로 덕대를 매고, 나무 목판 2개를 질 수 있도록 마련하였다. 이 지게에다, 호두엿이며, 쳇다리 과자며, 얼음과자며, 깨엿이며, 과줄이며, 혹은 둥굴레나 각색 과일같은 것까지라도 듬북이 실어 가지고, 씨름터와 운동회장과 부인네들이 오르는 소재에를 번갈아 행상해볼 생각을 먹었다. 밑천이 맡으면 밭은 대로, 자분자분이 이익을 내보자는 게 그의 심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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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 자행거를 처음 사온 것과, 평양서 하이칼라 색시를 얻어온걸로 인기를 끌었던 세 매 끼 장수 이칠성이는, 이번 기회에 포목점을 벌여보든가, 잡화상을 차려놓든가 할 생각으로 두루두루 생각한 끝에, 포목점이라야 이 고장엔 벌써 50개두 더 넘는 큰 상점이 전부터 있어서, 그 틈에 끼어 이익을 취하기도 힘들었고, 잡화상은 어름거리는 통에 나 카니 시네한테 눌리어서 단념해버리고, 그 대신 자그막하니 두 세 종목을 골라서 그들과 경쟁해불 채비를 차렸다.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 날래게 평양과 기타 원산지(原産地)를 오락가락하면서, 단오에 옷감으로 많이 쓰일, 당항라, 명주항라, 갑사, 모시, 고사, 이렇듯 한 것만 골라서 여러 필씩 사다가 싸게 팔았고, 한편 잡화로는 석유하고, 농닙하고, 양말하고, 성냥 같은 몇 가지만 밑지지 않을 정도로 헐값으로 팔아서 싸게 판다는 효과를 내어 인기를 끌었다. 그 덕에 쌀, 미역, 소금, 명태, 준치, 이런 것을 위주로 하던 세매끼 장수가 제법 번화스리 잘 팔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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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장수, 국수장수, 지짐장수, 묵장수, 술장수, ---이런 음식점들도 각각 양껏 지략을 짜내어서 판로를 열어보려고 애썼고, 이 밖에 서너너덧 집 되는 마방에서도, 비록 박리 균네처럼 신식 여관은 못 차려놓았으나, 깨끗한 손님을 맞아서 재울 수 있도록 설비를 고쳐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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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이 고장에 근래에 없는 호화스런 단오가, 한참 가무는 쾌청한 천후를 타서 유감 없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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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초사흗날부터 놀이를 시작하여, 첫날은 부인네들로 하여금 금산(錦山)에 올라 그네를 뛰게 하였는데, 특히 이날, 사자춤과 학춤의 구경이 있었고, 이튿날 초나흗날은, 부인네 들의 놀이는 저대로 맡겨놓고, 이와 어울려서 방선문 밖, 소우전 마당에서 씨름을 붙였다, 씨름꾼이 양덕이나 강동-삼등 등지의 다른 고을에서도 많이 쓸려온 탓에, 이틀을 잡아서 일정을 변경한 것이다. 대운동회가 이 고을에 열리는 발련으로 씨름꾼이 이렇게 많이 모여들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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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은 처음 송아지로 했다가, 여러 고을서 쉽지 않게 모여들었는데 좀더 남부끄럽지 않은 걸로 높여야 한다고, 송아지는 이등으로 돌리고 일등엔 살진 암소 한 마리 를 내걸었다. 이렇게 이틀을 씨름으로 보내고 단오 이튿날, 마지막 날에 이 고장서 처음인 대운동회가, 향교밭 삼일경을 헝클어서 갓 닦아놓은 동명학교 넓은 운동장에서 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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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에 오르는 부인네들의 놀이도, 첫날은 금산, 둘쨋날은 십이봉, 셋쨋날은 향교 솔밭으로, 남정들의 씨름과는 관계없이 모이었으나, 대운동회가 열리는 날만은, 딴 모임은 일체 갖지 못하도록 명령이 나리었다. 씨름은 사나이들의 노름이라, 부인네들의 구경꾼은 하나도 없었으나, 운동회는 개화된 모임이어서 스스로 씨름같은 것과는 다른 것이라고, 어린 색시나 처녀나, 새파란 집난이(시집 간 딸)들은 할 수 없다 치고, 삼십을 넘어 사십 줄을 접어 드는 삿가지 쓰는 축들이나, 늙은이, 기생들만은 많이 관람할 수 있도록, 날자도 요량해서 작정하고 널리 장려도 하였던 것이다. 특히 동명학교의 문우성 교사나 정영근 교사나가 열심히 주장하여, 체육 사상과 건강 증진의 필요를 이런 기회에 부인네들 속에까지 널리 솔선 하여 자녀들을 학교로 보내어 신학문을 공부하도록 장려하자는 취지를 대회의 취지로 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므로 대회의 참모 본부가 있는 바로 옆자리, 가장 점잖은 자리를 택하여, 넓은 차일을 치고 부인 관람석을 특설해서까지, 이네들의 참관에 편이를 도웁고자 한 것이다. 대운동회의 회장은, 이 고을 군수요, 동명학교 교장인 강문필 군수가 되었다. 그는 까만 연미복에 윗보리가 쫙 퍼진 윤나는 산고모를 쓰고, 앞자락에 커다란 꽃을 달고 운동회장에 임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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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회에는, 평양서 대성학교와 일신학교 학도가, 각각 10명씩 온외에, 용강과 강서와 영유의 앞대에서 5명 6명씩 참가하였고, 가까운 고을에선 순천이 빠지고, 은산, 자산서 10 명씩, 그리고는 이 고장서 고을보다도 먼저 개화 사상을 받아 들인 대드리, 갱고지, 남전서, 학교 생도 전부가 거진 참례하여서, 동명학교 학도까지 합하니 250명이 훨씬 넘었다. 동명 학교 학도 중에는 머리를 아직깎지 않은 학생까지 있어서, 운동회에 참여하지 않는 작자까지 있었으니 제복도 일치하지 못했으나, 평양이나 앞대에서 온 학도들은, 무명에다 검정 물을 들여서 양복을 일치하게 해 입고, 신발은 그대로 참신이나 메투리(미투리)나 짚신 이었으나, 흰 각반까지 한결로 깍듯하니 올려쳤고, 한두 명씩 나팔수까지 끼어 있어서, 그 복색 하며, 조련하며 거동이 제법 군대처럼 놀라웠다. 그들은 운동회를 앞두고, 혹은 초닷샛날, 초 나흗날 가까운 곳에서는 당일 아침 새벽에, 각각 열을 정비하여갖고, 한 패는 평원 도로를 거쳐 방선문으로, 한 패는 서쪽으로부터 승선교 다리로 비류강을 건너서, 또 한 패는 윗길 로부터 산비탈을 돌아서 마중나간 시민과 동명학교 학도들에게 영접되어 나팔소리 유랑 하게, 이 고을로 들어와서, 숙소를 따라 흩어졌던 것이다. 동명학교 운동장으로 들어가는 향교 골목 입구에는 물론, 읍내의 처처에 커다란 솔문을 세우고, 솔문에는 현판에 메밀이나 좁쌀로 크게 축하와 환영의 문자를 새겨, 흥성흥성한 기분을 돋구어놓았다. 운동장에는 새끼 줄을 돌려 치고 만국기를 오색이 찬란하게 날려 띄우고, 한 쪽으론 차일을 치고, 그 밖에 일반 관람석에는 멍석과 노전을 깔아놓았다. 아침이 되자, 조반을 먹어치우고, 집집에는 운동장으로 행렬을 지어서 올라가는 학도들을 구경하느라고, 남녀와 노유가 모두 문밖에 나와서 있고, 내우하는 아낙들도 대문 틈과 바지 틈으로, 설거지를 하다 말고, 이 광경에 눈을 쏟고 있었다. 학도들이 숙소따라 한 패 한 패 향교 고샅으로 올라가니, 그 뒤에는 운동을 관람 하려는 시민의 무리가, 흰 새의 떼처럼 몰리어 꼬리를 물고 줄을 만들어 뒤따라섰다. 엄하게 내우하는 집 색시 처녀를 남겨놓고, 이 날 고을 안의 집집은 비인 집처럼 텅 비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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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찬란하고, 화려하고, 흥분을 자아내는 날, 박성권, 박참봉은 다른 사람따라 없이, 무척 유쾌하였다. 그는 오늘이야 갓마흔에 첫버선이란 격으로 사십 평생 처음 하늘을 얻은 것처럼, 마음이 흡족하였다. 대운동회에 기부금을 500냥이나 하고, 씨름 대회에도 200냥을 한 탓인지 모르나, 대운동회 부회장의 직함이, 그의 가슴에 커다란 붉은 꽃송이를 달게 한 것 이었다. 진사, 초시도 많고, 생원, 좌수, 참봉, 이 밖에 아전의 경력을 가진 이가 한둘이 아닌데, 차함 참봉 박성권에게 부회장의 명예직이 떨어지게 된 것은, 시세가 벌써 어이 된것을 말하는 증거이기도 하나, 한편 돈의 힘을 무언중에 설명하는 좋은 재료로도 될 것이다. 그러나저러나 박성권, 박참봉은, 이 고을 사람이 추대했고, 관청에서 인정한 운동회의 부회장 바로 강군수의 다음 가는 자리에 올라앉게 된 셈이다. 그가 오늘 아침 유난히 유쾌하고 반가운 새 날을 대하게 된 것도, 결코 이유 없음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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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저러니 시끄럽던 형걸이의 혼사도 편지까지 붙였으니, 이젠 다 된 혼사다. 맞 차운 곳이 없어서 이곳저곳 물색하던 중, 뜻밖에 좋은 혼처가 생겨났다. 세간이 기울어서 가난하다고는 하나, 문벌은 쩡쩡하는 남전 강릉 최씨다. 사돈집 가산이나 재물에 딴 맘을 갖지 않은 바에야, 가난 같은 게 무슨 상관일 것이냐. 궁합도 맞고, 형걸이 모친 윤씨가 친히 숭교를 타고 가서 간선을 한 것이니, 인물도 나무랄 데 없을 게라고 생각했다. 두칠이 처 쌍네의 문제 같은 건, 본시 문제라고 할 것도 없었는데, 그것마저 두칠이가 먼 데로 색시를 둘러지고 이 고장을 떠나가겠다니, 마침 십상으로 잘 도니 일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사 사모사로 일은 쫙 펴지는데, 운동회의 부회장의 직함이 호박처럼 떨어져 굴러왔으니, 이제야 운이 뻗칠 대로 뻗쳤다고 은근히 만족하는 것이다. 형걸이가 제 모친다리, 자기는 누구에게나 장가를 안 든다고 푸념질을 했다고는 하나, 덧나갔던 어린 마음에 한번 중얼 거려보는 말임에 불과할 것이다. 일은 잘 된다 잘 된다고 그는 혼자서 속으로 중얼거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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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운동회 회장 강군수는 학도 일동을 모아놓고 개회 연설을 한 뒤에 아침 한 때 만회 장석에 앉아서 시상을 하다가 오정 가까워 관가로 돌아가버리고, 부회장 박참봉이 점심을 치른 뒤에 점잖게 앉아서 회장의 대리를 보고 있다. 그의 옆에는 벼슬 있는 사람과 이 고을 유지가 나란히해 앉았는데, 넓은 운동장 안에서 지금 한창 경기중에 있는 줄다리기를, 흥미 있게 바라보고 있다. 학도 전부를 두 번에다 나누어서, 그것을 다시 두 패로 갈라갖고 굵고 기다란 줄을 양쪽에서 당기는 것이다. 한 편에서 발을 벗디디고 힘을 다하여 '영차’하면 또한 편에서도 이를 악물었다가 '영차’하고 맞당기어, 굵은 닻줄은 활찍처럼 곧게 움직일 염을 안 한다. '영차’소리만 세차게 들려오다가, 한 편 쪽의 땅을 벗디딘 발이 앞으로 더듬더듬 하는 듯하다간, 그만 쏴르르 무너져서, 줄은 순식간에 한편으로 끌리어가고, 이어서 ' 와--’ 하는 함성과, 군중의 우레 같은 박수 소리가 하늘을 뒤흔들 듯이 요란스럽게 일어난다. 자리를 바꾸고 다시 경기가 시작되려고 할때에, 비로소 관람석에서는 재재하니 이야 깃 소리가 떠오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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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참봉은 커다란 갓을 단정하니 올려놓고, 기골이 장대하고 관골이 찬 얼굴로 운동장 쪽을 향해서, 버륵하니 으젓한 미소를 입가장에 띤다. 다듬은 모시 두루마기에 항라 겹 바지를 옹 구 뿔로 척 늘어뜨렸는데, 두 짝의 흰 갓신이 삼성버선을 뺑뺑하니 둘러싸고, 책상의 밑 다리 위에 올려 놓여 있다. 이윽고 그는 커다란 부채를 들어 두어 번 쓰적쓰적 앞자락께를 부쳐 본 뒤에, 옆에 앉은 사돈 정좌 수다 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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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습속이 앞대에는 아직도 남아 있는 모양입지요." 하고 물어서, 정좌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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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남쪽에서는 쥐불이라든가 이런 것과 함께 퍽 치성한 모양입니다마는, 그것을 개화 된 운동으로 고쳐놓고 보니, 상당히 자미스런 경기 같으오." 하고대답한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운동장에 일어나는 함성에 휩쓸리어 이야기하던 것을 중지하고 앞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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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다리기가 끝나니, 이긴 편이 쭈르니 나란히하여 대표가 받아간 상품, 연필 두 자루씩을 나누어 받고 있는데, 이편 준비를 맡아보는 쪽에서는, 나팔을 한 번 띠따띠따 불어서 일반의 주의를 환기한 뒤에, 다음은 기마전이라고 경기자들의 출동을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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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마전이라면 말을 타고 싸우는 것인가요." 하고 누가 물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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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야 있겠소마는, 어떤 자는 말이 되고, 어떤 자는 기수가 되겠지요." 하고 대답하는 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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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립’ 소리가 나고 '기척’ '우로 나라니’ '번호’ 소리가 연달아 난 뒤에, 두 패로 갈라 선학도 들은, 각각 인솔자의 뒤를 따라 운동장 가운데로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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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참봉은 얼굴에 점잖은 미소를 띠고 누가 누군지 분별키 힘든 학도들의 행렬을 바라보다가, 붉으 끈을 머리에 동인 형걸이를 오른편 쪽 패 첫머리에서 발견하고, 잠시 그의 거동을 눈 붙여 보았다. 윗저고리는 벗어 붙여서 흰 속적삼만 입은 형걸이가, 세 사람으로 된 말 안장을 툭툭 뚜들겨보면서, 기고만장하여 싱글벙글하고있는 것이 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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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내세우고 보니 그놈만한 인물이 없겠군’하고 박참봉은 속으로 만족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다. 무어라고 삑 호령을 치니 양쪽이 모두, 어슬렁거리며 말안장 위에 기어올라 간다. 튼튼한 자가 앞에 서고, 그 뒤에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어깨와 손을 잡아 안장을 만든 것이다. 형걸이는 저이 집 흰 말을 타던 본새로 대번에 휙하고 올라 앉는다. 바른 손으로 잠시 말이 된 앞사람의 머리를 어루만지듯 하다가, 이윽고 높직이 하늘가로 팔을 들어본다. 한편에 기마가 열 필씩이다. 도합 스무필의 기마가, 홍백으로 갈라 서서 백병접전을 할 판이다. 정영근 교사가 마당 가운데서 두 편을 바라보며 기합과 호흡을 맞추다가 장안이 숨을 죽이고 조용해졌을 때, 호각을 불고, '시작, 접전’ 하고 하늘이라도 울릴 듯이 호령을 부르니, 기수들은 번쩍 손을 들고 쌍방에서, '아---’ 하는 함성을 지르고 어슬렁어슬렁 뛰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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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참봉은 이러한 '으아’ 하는 젊은이들의 함성에 가슴이 뿌엿하니 끌어 오르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울렁거리려는 제 가슴의 고동을 가만히 향락하면서, 형걸이를 찾아보았다. 홍군 쪽의 선두를 서서 말잔등에서 익숙한 몸짓으로, 연신 허리를 일으켜 세우고, 바른손을 높직이 들고서 적의 진지로 달려들고 있다. 마침 저편에서 선두를 선 기마와 처음으로 접전을하려고 달려봍는다. 왼손으로 말된 사람의 어깨를 툭 쳐서 무어라고 신호를 건네니, 말은 비스듬히 커브를 돌아서 적수의 옆으로부터 습격해 들어간다. 백군의 기수가 양손을 뻗쳐서 형 걸이의 가슴 있는 쪽을 잡을 듯하는 것을, 몸을 휙 비틀어서 피하고난 뒤, 인차 바른 손을 밑으로 솟구어 적군의 팔때기를 잡아 휘둘러 친다. 안 떨어지려고 말 위에서 허우적대는 것을, 멱암치를 잡아서 또 한 번 밀어버려서, 적수는 몸의 균형을 잃어버리고, 드디어 헝클어지는 안장에서 미끄러 떨어진다. 말에서 떨어지든가, 머링 동인 끈을 빼앗기면 전사자로 된다. 하나를 거꾸러뜨린 형걸이는, 헝클어진 자세를 정비하여갖고, 지금 한창 벌떼처럼 맞붙어서 닝닝거리고 돌아가는, 백병전이 벌어진 가운데로 들이덤빌 차비를 차렸다. 말머리를 쓰다듬듯, 앞장 선 친구의 어깨를 뚜덕뚜덕 뚜드려주면서 막 앞머리를 돌리려고 하는데, 뒤 로부터 제비처럼 날쌔게 적기 하나가 달려든다. 서로 맞붙어 싸우자는 것이 아니라, 그 저 옆을 한 번 뽐내면서 스쳐가고 말 듯이, 적기는 비스듬히 곡선을 그으면서 활살처럼 몸을 뽑아나가더니 형걸이의 뒷잔등께서 꿩 채려는 매마냥으로 그의 머리에 동인 붉은 끈을 낚으 려 한다. 하마터면 앗기고 말 것을, 용하게 몸을 돌려 손을 맞잡아서, 그대로 접전이 되고말았다. 처음은 허리를 돌리고 맞잡고 싸우다가, 형걸의 탄 말머리가 돌아서서 겨우 본격식대로 싸움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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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참봉은 눈덩어리 굴 듯이 돌아가는 마당 가운데와는 좀 떠나서, 변두리 가까운 귀퉁이에서 벌어진 두 적수의 접전을 흥미 있게 바라보고 있었다. 형걸이가 먼저 하나를 무난 히 넘어뜨리는 데는 별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하더니, 지금 간간한 위기를 벗어나서 겨우 몸을 제 자세대로 가지려고 할 때엔, 이상하게도 두 주먹이 꽉 쥐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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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내솟구기는 했으나, 형걸이는 힘에 꿀리는지 덮치는 손을 피하면서, 말 한편 잔등으로 자꾸만 밀려가는 것 같다. 말안장이 된 두 학도가 연신 팔에다 힘을 주어, 형걸이를 말께서 떨구니 않으려고 젖먹은 힘까지를 다하여 벋대는데, 앞장 선 학도는 자꾸만 몸이 흔들리어 사시나무처럼 상반신을 후들후들 떨고 있다. 이것이 한참을 계속하니, 박참봉은 가슴조이던 것을 좀 풀어놓고, 주먹 쥐었던 것을 가만히 펼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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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식이라서 이토록 마음이 조이는가.’ 생각해보니 우스웠다. 제 편벽된 생각이, 아이들처럼 채신머리없이 보여서 눈을 딴데로 팔려고 하나, 시선은 다시 형걸이에게로 옮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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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걸이는 월등히 말에 능하다. 말잔등에서 떨어져서 배통 옆구리에 달리어서도 좀처럼 굴러 떨어지질 안 했다. 왼손으로 저이 편 앞장선 학도의 어깨를 북 끌어서 누르는 듯 하더니 형 걸이의 몸은 금시에 불길처럼 솟아오른다. 밑에서 허우적대던 것이 절굿공이처럼 불쑥 치솟 구는 바람에, 상대편 기수는 형걸이의 바른손에 머리를 눌리었다. 어느새에 낚아채는 손길에 머리에 동인 끈을 앗겼을 뿐 아니라 남은 힘에 밀려서, 뒤꼍으로 허공에 두 손을 허우적대다가 발디딤보를 잃어서, 마당에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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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초 동안에 번개처럼 해내치는 형걸이으 표범 같은 거동을 바라 보고 있다가, 박참 봉은 하마터면 무릎을 딱 칠 뻔했다. 들었던 손은 아무도 모르게 가만히 무릎 위로 내려놓았는데, 갑자기 옆자리의 부인석에서 높은 함성이 들리어서, 그 소리는 마치, 제 손으로 무릎을 때린 소리처럼 박참봉의 귀에는 들리었다. 어떤 부인이 안타깝게 마음을 조리다가, 저렇게 감탄하는 함성을 부끄럼없이 내쏟고 있는 것일까, 필시 형걸이의 눈부시는 경기를 보다가, 엉 겁결에 지르는 소리임에 틀림없는데, 자기는 아비라서 그렇다 한들, 차일 속에 앉은 부인중에 누가 있어서 그렇도록 유심히 형걸이를 보고 있던 것인가. 아닌 게 아니라 괴이 쩍은 생각도 안 나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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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기 둘을 넘어뜨리고, 형걸이는 의기가 양양해서 진(陳) 가운데로 들어온다. 벌ㅆ 말잔 등에서 내려서 마당에 앉아 전사자가 된 이가 수두룩하다. 남은 것은 오륙 기, 그러나 이 남은 오륙 기가 어우러져 붙기 전에 정전(停戰)의 호각이 울었다. 한 개의 차로서 백군이 이겼다. 만세를 부르며 패군의 장수 형걸이는 제 진지로 말을 탄 채 들어온다. 박참봉은 만족하였다. 그리고 스무 살 전후의 자기의 생활이 눈앞에 뻔히 떠오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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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장의 박수 소리를 넓은 벌판을 휘몰아치는 빗바람 소리처럼 들으면서, 박참봉은 저 의 가슴속에 젊은 혈기가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청춘,---생각하니 마흔에 그는 이미 청춘이 갖는 모든 즐거움을 잃어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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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석을 돌아다보니, 점잖은 유지 신사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 받고 하면서, 조용히 경기를 구경하고 있어, 자기처럼 흥분한 혈조를 몸이나 낯에 나타내인 이는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박참봉은 일시에 제 가슴속을 찬 가을 바람이 스쳐가는 듯한 쓸쓸함을 맛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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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을 모으기에 이십 년 동안, 그는 모든 젊음과 열락을 버렸던 자기를 지금 새삼스럽게 발견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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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는 그러는 동안에 이인삼각을 지나 장내일주경주의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각 곳에서 온 학도들과 동명학교 대표 선수와의 전부의 예선에서 선발된 여덟 사람의 경주였다. 그 중에 형걸이가 있었다. 형선이도 경주는 잘했으나 결승에까지는 못 오고 떨어졌다. 대봉이도 떨어지고, 이 고장 출신으론 형걸이와 또 한 학도의 2명이 겨우 뽑히고 그 외에는 전부 딴 고장 학도였다. 힘이나 기운으론 이 고장 학도들이 개시개시 꿀릴 리 만무였으나, 원 원히 바르게 훈련을 받은 평양이나 앞대의 학도들에게 뜀박질에 견딜 턱이 없다. 그래도 그 틈에 두어 사람 뽑힌 것만 다행이라고 모두 이들이 이기기만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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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제분께서는 개시 명창이군요." 하고 뒷자리에서 누가 말을 건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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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성해서 다행이올세다."하고 박참봉도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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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사람의 경주자는, 횟가루로 줄을 그은 마당에, 왼발을 하나씩 내짚고, 호각 소리가 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주먹을 쥐고, 다링네 아킬레스 근을 긴장시키고, 두 눈은 땅 위를 뚫어지라고 내리파보고 있다. 미상불 귀는 초롱불처럼 밝게 뚤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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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하고 정영근 교사가 쨍쨍 울리는 목소리로 손을 들며 외치니, 일반 관중은 모두 그 쪽으로 눈을 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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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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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은 빽 하고 호각을 분다. 다듬이질 소리 같은 궁그르는 소리가 일어났다. 여덟 명의 경주자는 마당을 달아난다. 둥그렇게 양쪽으로 새끼줄을 친 가운데를 쏜살처럼, 달음박질 치는 것이다. 윙하니 커브를 도는 것을 보니, 형걸이가 앞장을 섰다. 이것을 본 군중은 와하고 소리친다. 박참봉도 남이 지르는 소리를 좇아서 와 하고 소리를 한 번 질렀으나, 인차 본정신이 들어서 그만두었다. 그런데 형걸이의 바로 뒤에서, 부리나케 쫓아가는 선수 하나가 있었다. 그는 그다지 악도 안 쓰면서 한 발자국 떨어져서 유유히 따라간다. 그곳에서 서너자 가량 떨어져서야, 나머지 6명은 각각 삼등을 다투면서 따라가고 있었다.
 
42
이윽고 두 사람은 결승점으로 달려 들어온다. 그러나 박참봉이 앉은 방향에선 똑똑히 보이질 않는다. 둘이 똑 같이 줄을 넘는 것만 같다. 관중은 와 하니 고함을 지르며, 손뼉을 뜨 드리며 야단들이다. 부인석에서도 고함 소리가 들린다.
 
43
"누가 일등입니까." 하고 묻는 소리가, 이곳저곳서 들렸으나,
 
44
"나두 잘 모르겠쇠다." 하는 소리뿐, 아무도 똑똑히는 모른다. 그러나 상을 타러 오는 것을보니, 일등은 평양서 온 학도 였다. 결승점 바로 앞에서 형걸이는 이등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형걸이는 둘째로 서서 벌건 깃발을 메고 싱글싱글 웃으면서 이쪽으로 걸어 온다. 박참봉이 일등에게 상을 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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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장하오." 하고 말하다가, 홀낏 뒤꼍에 선 형걸이를 보니, 그는 부인석으로 딴 눈을 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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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다 받아가지고 박수 소리에 싸여 선수들은 제자리에 물러간다. 박참봉은 가만히 얼굴을 돌려 부인석을 보았다. 엇비슴하니 앞이 휘어서 차일 속은 안 보였으나 앞쪽은 엿볼수가 있었다. 중늙은이들 틈에 이쁜 젊은이가 하나 유난히 눈에 띈다. 장옷도 안 쓰고, 머리를 기름 발라 빗은 품으로 기생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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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참봉은 인차 눈을 돌렸으나, 운동장 저편을 멀리 바라보는 양하고, 또 한 번 부인 석을 엿보았다. 기생은 마침 이쪽을 바라본다. 눈이 마주치니, 기생은 얼굴에 부끄럼을 그리고 곧낯을 돌린다. 일찍이 본 기억 없는 기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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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참봉은 다시 운동장을 보았다. 장애물 경주의 준비로, 경주장 군데군데에, 그물, 사다리, 밧줄, 이런 걸 배설해놓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박참봉의 눈앞에는 금시 옆자리에서 본 기생의 얼굴이 떠나질 않았다. 남에게 눈치채이지 않도록 또 한 번을 슬며시 바라보니, 아름다운 젊은 여자의 그림자는 그때엔 벌써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갔을까. 그는 나의 눈길을 의식하고 어디로 몸을 감추어버린 것일까. 그렇다면 대체 나의 눈에 어떤 수상한 기색이 나타났었다는 말인가. 먹을 것을 노리느 이리 같은 눈살이었단 말인가, 그렇지 않으면, 젖을 달라는 어린 아기의 눈동자였단 말인가. 그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는 것 일까, 그리고 대체 그는 어디서 온 기생일런가.---박참봉은 자기가 속으로 이런 것을 몸달게 안타까이 천착하고 있는 것이 괴이쩍고도 부끄러웠다. 나이 찬 자식이 수북하고, 손자까지를 두고, 첩 큰댁을 두고, 방금 형걸이가 헛눈을 팔고 있던 부인석을 홀낏홀낏 엿보고서 마음이 들떴다면, 그리고 이런 걸 누가 안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냐 싶었다. '나는 어느새에 이렇게 늙었는가.’ 그러나 운동장에서 일어나는 호각 소리에 정신을 차리면서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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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아직 사십이 아니냐’ 하고 혼자 속으로 뇌보았다.
【원문】대하(大河) 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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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천(金南天) [저자]
 
  1939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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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5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