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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별의 노래 (원명 Aloha O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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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8
홍난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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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별의 노래(抄[초]) (ALOHA 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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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미국 유학의 길을 떠나던 전후의 일기를 더듬어가며 눈물겨운 추억의 이 추억의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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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봄에 나는 미국 유학을 해보겠다고 섣불리 여권 신청을 했다가 실패를 하고, 2년 후에 다시 독일 여권을 주선하다가 또한 실패를 했다. 이러한 경험을 가진 나로서는, 양행(洋行)이란 것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며, 또 혹시 이 다음에 사주팔자가 좋아서 백만장자가 된다면 그때에는 별문제려니와, 그렇지도 못한 나로서는 부질없이 양행이란 허울좋은 이름 아래에서 팔자에 없는 객고(客苦)를 하고 싶지도 않았던 것만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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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이 단념하고 지내기를 10년 가까이 한 1931년 봄 3월 12일에, 나의 마음에는 뜻하지 않은 커다란 변동이 생겼던 것이다. 그때의 심적 변동이란, 거의 잊어버리게 된 지금에 있어서 새삼스럽게 그것을 회상하고 싶지도 않고, 또 여기에 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하여간 그때의 나로서는 평정한 생활을 해갈 수 없었던 것만은 지금도 잘 기억하는 사실이다. 그때에 나는 마치 정신병 환자가 전지요양하듯이, 실연당한 사람이 새 애인의 품에서 전날의 상흔(傷痕)을 씻어보려는 듯이 이 강산을 떠나서, 산 설고 물 선 만리 타향에서 방랑의 생활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리하여 나는 때를 머물지 않고 곧 나의 가장 신뢰하는 벗 D씨에게 나의 심중을 토로했던 것이다. 그때에 만일 D씨가 "글쎄……" 하기만 했더라도 나는 그냥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D씨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기가 마치 나와 꼭 같은 심경에 있는 것처럼, 아니 오히려 자기 자신이 당한 것 이상으로 몹시 앙분(昻奮)하여, 나의 양행설(洋行說)에 공명해 준 것이다. 그날 밤이다. 나는 곧 미국에 있는 친구에게 글을 썼다. 아무리 해외 방랑이라고 하지마는 터무니없이 무모한 짓을 할 수 없어서, 그래도 비교적 안전지대가 되리라고 생각한 미국으로 방랑의 첫걸음을 내어놓기로 결심했던 까닭이다. 그러나 미국에 입국하려면 나중에는 어찌 되든 간에, 우선 그 나라 노동장관이 승인한 학교의 입학 승낙서가 없이는 여권수속을 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 이유 아래 나는 입학 승낙서를 얻어 보내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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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2개월이 지난 5월 7일 아침에 미국으로부터 일봉(一封)의 서류 우편이 떨어졌다. 이것은 물어볼 것도 없이 입학승낙서였던 것이다. 호적등본을 만든다, 사진을 찍는다, 부형(父兄)의 양해를 구한다, 사실상 문자 그대로 동분서주한 끝에, 그 다음다음 날인 5월 9일에는 여권수속에 필요한 일체 서류를 만들어서 경기도청에 내밀었다. 그러나 전년에 두 번이나 실패한 경험을 가진 나로서는 여권이 나오기 전에는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않기로 하고, D씨나 또는 나의 형까지도 이 약속만은 굳게 지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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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이 지난 후, 경찰서로부터 여권이 나왔으니 찾아가라는 전화가 왔다. 그때 풍설(風說)에 들리기로는 여권 발급까지에는 적어도 2,3개월은 걸린다고 함으로, 나는 이 전화를 받고도 반신반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너무도 의외로 속히 나왔다는 말에, 나는 일종의 낙망과도 같은 이름할 수 없는 심적동계(心的動悸)까지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청각에 갑자기 이상이 생기지 않는 한, 여권이 나왔다는 것은 분명히 귀에 들은 사실이요, 더구나 여권 수령에 필요한 10원 인지를 사가지고 오라는 말까지 들었은즉, 나온 것만은 확실했던 것이다(이하 4행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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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5월 29일에는 서울에 있는 유한양행(柳韓洋行)을 통하여 일본우선회사(日本郵船會社)에 선실을 예약하였던 것이다 (이하 11행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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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때의 나의 생각은 유학이라는 것보다도 방랑에 있었고, 여권수속상 편의와 그 밖의 일신상의 사정으로 미국을 택하기는 했지만, 사실인즉, 미주(美洲)를 거쳐서 유럽대륙을 편력해 보려던 것이다. 하여간 정깊은 고국 산천을 등에 지고 산 설고 물 선 무의무친(無依無親)한 이족(異族)의 나라로 떠나려는 나에게 있어서, 더구나 환향(還鄕)할 기약조차 망연하고 보니 어찌 고국에 대한 한 줄기 석별의 눈물이 없었을 것이랴. 6월 16일 밤 경성공회당(京城公會堂)에서 열렸던 고별 연주회 때, 순서 마지막에 있던 〈고별의 노래〉를 연주할 때에는 사실상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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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날 날이 차차로 가까워짐에 따라서 여러 친우들의 송별의 잔치도 잦았고, 가구·서책 등의 처리에도 다망했을 뿐 아니라, 도미(渡美) 이후의 생활비나 학비를 한 푼이라도 더 만들어보려기에, 낮이 되면 눈코 뜰 새도 없었지만, 그러나 늦은 밤 외로운 방에 나의 침상에 홀로 누웠을 때에는 까닭을 모를 만치 착잡한 정회(情懷)에서 솟아나는 눈물이 베개를 적신 적도 한두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남은 외국에 가지를 못해서 애를 태우는 일도 있는데, 나는 영년(永年)의 숙원을 풀게 되었다고도 할 만한 이때에 무엇이 그다지 슬펐던가. 이것은 차마 쓸 수 없는 눈물의 기억이지만, 그러나 일기에 역연히 씌어있는 것을 그냥 묵살할 수도 없어서 새삼스럽게 울렁거리는 가슴을 누르고서 그때의 나의 심경을 윤곽만 그려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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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나에게는 가장 사랑하는 세 사람의 여성이 있었다. 하나는 나의 친조카로 나에게 가장 귀엽게 굴고 따르던 당연 21의 옥임(玉姙)이, 하나는 나의 제자요 동시에 의매(義妹)로 내일을 위하여 특별히 나의 장래를 위하여 성심껏 애써주던 당년 21세의 금영(錦榮)이, 그리고 또 하나는 나의 유일한 이성(異性)의 동무로 나와 일생을 같이 하겠다는 약속까지 한 K양. 그런데 3월 12일이란 날은 K와 나 사이에 아무 불만, 아무 시의(猜疑), 아무 부실(不實), 아무 서어(齟齬)도 없이 그러나 K의 여성으로서의 본능적(?)인 약한 마음에서 눈물을 흘려가며 서로 헤어지기를 애석해 하면서도, 그러나 전날의 굳은 약속을 해소하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부딪쳤던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운명의 신의 ──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를 기르고 가르친 소위 은사의 얄궂은 악희(惡戱)였던 것이다. K는 자기의 앞길을 희생해가면서도 소위 은사에 대한 값싼 은의(恩義)에 얽매여서 본의 아닌 짓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의외에 생긴 이 사실은 옥임이와 금영이의 어리고 천진한 가슴에도 나에 못지않은 수탄(愁歎)과 낙망과 분만(憤懣)을 던져주었다. 물론 이 두 소녀도 K를 잘 알았고 K의 사랑도 많이 받았으며, 또 내가 K를 알게 된 것도 말하자면 이 두 소녀의 아리땁고 고마운 생각에서 비로소 싹이 트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서로 원망하고 미워하고 욕하고 헤어진 것이 아니요, 울며 원통해 하며 헤어진 일인 이상, 옥임이의 순정도, 금영이의 지성도 여기에는 아무런 효험을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이 두 소녀는 매일매야(每日每夜) 틈만 있으면 내게 찾아와서, 나의 쓰라린 심중을 위로해 주기에 애썼던 것이다. 이것이, 이 고맙고 아름다운 생각이 후일에 나의 마음 속에 영원토록 사라지지 못할 큰 가시못을 박아줄 줄이야 그 애들인들 어찌 생각했을 것이며 낸들 어찌 알았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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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한 일도 어떤 때는 우연으로 생각할 수 없이 되는 때가 많은 것이다. 나의 사진 앨범의 어떤 장에는 세 사람이 찍은 사진이 붙어 있다. 한복판에는 나, 왼쪽에는 금영이, 오른쪽에는 옥임이. 속담에 세 사람이 사진을 박으면 중앙에 있는 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난다는 미신의 말이 있지만, 나의 경우는 그의 정반대였던 것이다. 먼저 오른쪽에 있는 옥임이가 세상을 떠나고, 두 달 후에는 왼쪽에 있는 금영이마저 타계의 사람이 됨을 당할 때에, 나는 이 속담이 적중하지 않았음을 얼마나 슬퍼했으랴? 무위(無爲)의 내 한 몸으로 피어오르는 꽃봉오리 같은 이 두 소녀를 대신했던들 얼마나 기쁜 일이었을지! 그러나 인사는 재천(在天)이라는데 생명을 어찌 사람의 맘대로 할 것이랴. 이 일을 생각하면, 그때부터 5,6년이 지난 오늘날에 있어서도 오히려 비통·절통(悲痛絶通)하고 가슴이 메어짐을 억제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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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9일! 내 가슴의 피묻은 상처가 오히려 선려(鮮麗)한 이날에, 나뿐만이 아니라 온 집안이 애지중지하던 옥임이는 지극히도 악착스러운 죽음을 수행했다. 그에게는 일개의 동성 친구가 있었던 바, 소학교 시대부터 그들의 사이는 이미 성격상으로 공명되는 점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가정 형편이나 주위 환경이 각각 다른 이 두 소녀는 기쁜 일이 있거나 슬픈 일이 있거나 서로 찾고 서로 위로하며, 이날까지 깨끗한 우정을 계속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옥임이가 중학 3년 시절에 상대의 소녀는 그의 부모의 강압으로 학업을 중도에 폐하고 어떤 부호의 집으로 출가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천진한 소녀로 학업을 중도에 폐하게 된 억울함과 슬픔, 이성에 대한 애착심을 가지기 전의 소녀로서의 결혼에 대한 공포와 수괴(羞愧),사랑하고 친하던 동창들과 심지어 옥임이까지와도 생이별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섭섭함과 슬픔……. 이 모든 복잡한 감정을 좁은 가슴에 품은 채로 그는 남의 집 며느리로 들어가서, 거의 감금에 가까운 신산(辛酸)스런 생활을 해가고 있었다. 그 위에 그의 배우자 되는 청년은 신혼의 초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방종허랑(放縱虛浪)한 성격은 매일매야 紅燈紫煙(홍등자연) 속에 싸여서 세월이 가는 줄을 모르고 지내게 되자, 옥임이의 동무는 자신의 불운에 대한 수탄(愁嘆)을 하소연할 길이 없어서, 옥임이에게 글로써 자기의 억울한 심정을 하소연해왔던 것이다. 여기에서 두 소녀의 정의(情誼)는 보통의 동무들로서의 그것보다도 도가 깊어지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그 정의가 동정으로 변하고 그 동정은 세상의 무상을 한탄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그들의 뿌리 깊지 못한 사상에 박아주게 되자, 한 소녀는 세상을 비관하게 되고, 한 소녀는 이에 동정한 나머지 그들은 드디어 범하지 못할 경계선을 뛰어넘어서 자기네의 귀한 목숨을 草芥(초개)같이 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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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애의 유해를 생후 처음 보는 화장장의 무시무시한 홍염(紅焰) 속에다가 내 손으로 밀어넣을 때에, 사람이 이런 때에 미치지 않는다면 어느 때 미칠 것인가? 고인의 동창되는 여러 소녀들의 입으로부터 통곡과 함께 섞여 나오는 찬송가의 소리는 이 세상의 지비지참(至悲至慘)을 그대로 그려 놓은 최대 비극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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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부터다. 내가 밤의 장안 거리를 쏘다니기 시작한 것은. 나는 사실로 반 광란 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애인의 불성실에서 나온 본의 아닌 별리, 지애(至愛)하던 조카의 절참(絶慘)한 횡사, 여기에서 받은 나의 마음의 상처는 정향(定向) 없는 거리로의 방황과 새벽 하늘의 음험한 한기(寒氣)에 한층 더 악화하여, 나는 그 달 중순에 늑막염이라는 듣기에도 무시무시한 병마에 사로잡힌 바 되어, 드디어 세브란스 병원의 병상에 드러눕고야 만 것이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의 병은 초기의 경증이었던 까닭에, 10여일 후에 퇴원은 했지만, 그러나 기거음식(起居飮食)에 있어서 상태(常態)를 벗어난 지 이미 오랬고, 이것이 하루이틀 계속되는 동안에는 위장병까지 병발하여 일일삼식(一日三食)을 제대로 한 날이 없었으며, 요코하마(橫濱)에서 배 타던 전날까지도 미음이나 죽으로 연명해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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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지나는 중에서도 나는 경향(京鄕) 수삼처에서 고별 연주회를 열었으니 이것은 수입을 위하여서 보다도 평소에 나와 가깝게 지냈던 동무들을 떠나기 전에 다시 한 번 만나보기 위하여 한 것에 불과하였다. 6월27일 밤에 목포에서 연주회를 열고, 그 곳 교회 병원에서 재직하던 나의 맏조카 재유(載裕)군과 함께 대구로 와서 29일 밤에 대구 극장에서 다시 연주회를 열었는데, 그가 목포로 돌아갈 기차 시간 관계로 말미암아 연주하다말고 극장 뒷방에서 재유 군과 분수상별(分手相別)할 때에 우리 숙질(淑姪)은 무언 중에도 이것이 영별(永別)이나 아닐까 하는 생각이 나서, 남아로서의 비장한 눈물을 머금고서 앞날의 성공과 재회를 심축(心祝)하였을 뿐이고, 아무 말도 내지를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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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두 곳의 연주회도 나는 여관의 병석에서 몸을 일으켜가지고 출현했지만, 경성에 돌아온 후에는 신체의 쇠약이 더욱 심하여 사실상 그때 나의 생각으로는 출항 기일(期日) 전에 어떠한 일이 생길는지 예측키 어려웠던 것이다. 바로 그 전후해서 일어난 일이다. 서울에서 고별 연주회를 열던 6월 16일을 2,3일 앞두고서, 금영이는 우연히 득병(得病)하여 자리에 누운 것이 하루 이틀 갈수록 병세는 점점 악화하여 도저히 집 안에서는 치료를 시킬 수 없으므로, 필경은 의전(醫專) 병원에 입원시켰던 것이다. 아아, 그러나 이 무슨 인과일까! 그 애의 병은 듣기에도 소름이 끼치는 장질부사였던 것이다. 매일 간병을 하러 가던 내가목포 ․ 대구 지방의 연주여행을 마치고 또다시 7월 4일에는 평양에서 고별 연주회를 하고 돌아온 때에는, 그 애의 병세는 이미 생사의 분기점에서 일진일퇴(一進一退)하여 가냘픈 명맥이 간병하는 친척들의 하염없는 눈물을 자아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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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2일 새벽! 밤새도록 계속되던 악몽에서 눈을 채 뜨기 전에 금영의 사망을 알리는 놀라운 비보는 기어이 날아오고 말았다. 옥임의 참혹한 죽음을 본 지 100일이 못 되어, 옥임이 못지않게 사랑하고 귀해하던 금영의 죽음을 또 당하고, 또다시 내 손으로 관을 들어다가 지긋지긋한 그 화장장의 같은 화구(火口)에다 집어넣어 회색 연기를 만들어버리고 나온 나는 정말로 더 살고 싶은 생각은 촌분(寸分) 만큼도 없었던 것이다. 세상사 허무하단들 어찌 인생처럼 무상할까보냐? 첫 새벽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울며불며 강팡질팡하다가 겨우 장례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때는 밤 8시 30분경이었다. 종일토록 비워둔 뱃속에서는 응당 영향물을 요구함도 심했거늘, 그러나 나는 이것저것 다 잊어버리고서도 무슨 정신엔지 바이올린을 꺼내서 실산한 사람 모양으로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서, 한껏 켜다가 그대로 기진맥진하여 자리에 쓰러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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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정신없이 아무 생각 없이 켠 이 곡조들이 단장(斷腸)의 비곡(悲曲)이 된 것은 그 이튿날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유하던 집 옆에 있는 중앙보육기숙사(中央保育寄宿舍)의 사생(舍生)들과 사감 선생이 이 밤에 내가 켠 곡조들만은 어찌도 슬피 들렸던지, 내 방 밖 창밑에 와서 밤이 늦도록 울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나의 이 곡조들이 애처롭게 세상을 떠난 고인의 영을 위조(慰弔)하였으리라고 믿어져서, 슬픈 중에도 스스로 마음의 위안을 얻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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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불행이 계속되는 동안에 또다시 한편으로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내가 전날 사랑하던 K양이, 내가 병원으로부터 나온 지 열흘이 지나지 못하여, 내가 앓던 병과 꼭 같은 늑막염으로 부인병원에 입원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은 것이다. 일찍이 내가 알고 내가 사랑하던 3인의 여성 중에 두 사람은 이미 타계로 가버리고, 나머지 한 사람마저 병상에서 오랫동안 신음함을 안 때에, 비록 그는 나와 사랑의 인연은 끊었다고 하지만, 며칠 전까지도 그는 나의 애인이었고, 또 며칠 후에는 그가 사는 이 강산에서 내가 떠나가리란 것을 생각하매, 인정상으로도 모른 척하고 지낼 수는 없었다. 가끔가끔 그러나 거의 매일 같이 그의 병석에 찾아가서 문병을 했지만 그러나 내가 K양을 찾아다니는 것을 눈치 챈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누구나 내가 그렇게도 미련부단(未練不斷)의 비겁한 남자라고까지는 생각지 않았을 터이니까. 그리고 나는 결코 미련이 남아 있으므로 그를 찾은 것은 아니다. 옥임이와 금영이를 생각할 때, 또는 그 두 소녀와 K양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 K는 나의 애인이었음을, 그는 자기의 연약한 마음에서 나를 버렸다는 것을 생각해볼 여념조차 없이, 나는 마치 의무적으로 그의 병세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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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날 날이 가까와진 7월 20일부터는 매일매야 친우들의 정다운 작별의 잔치가 뒤를 이어서, 그 덕분으로 나의 심통(心痛)은 적이 가라앉은 것 같지만, 그러나 그것은 단지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던 것이오, 속마음에는 미칠 듯이 불붙듯이 일어나는 슬픔과 아픔의 고통이 쌓이고 뭉쳤다가는 밤중이면 한꺼번에 복받쳐 올라와서 가슴이 터지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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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심경 속에 파묻혀 극도로 쇠약해진 몸을 가지고, 만리 해외로 객고(客苦)의 길을 떠나게 된 나는 앞날이 어찌 될 것은 생각할 여념도 없지만, 그러나 오직 죽음을 찾아서 죽음의 나라로 가는 것과 같은 흐릿한 생각만이 나의 심중에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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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5일 밤 9시 5분. 다수의 친지의 전송을 받으면서 나는 서울역을 등지고, 우렁차고도 몹시 구슬피 들리는 기적 일성(一聲)에, 머나먼 방랑길의 첫걸음을 내어놓은 것이다. 용산역까지 쫓아 와준 D씨와 마지막으로 악수를 할 때까지도 나는 몹시 흥분된 채로 나의 의식을 거의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내 자리에 돌아와서 홀로 앉게 되자마자, 심안(心眼)에서 솟는 눈물은 육안(肉眼)에까지 뻗쳐 올라와서 두 눈을 적시며, 새삼스럽게도 고국에 대한 애착심과 영별(永別) 이나 하는 듯한 비참한 정회(情懷)가 나의 좁은 가슴을 빠개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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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튿날 아침, 연락선에 오른 나는 떠나가는 뱃머리에 나와 서서, 아침 안개가 낀 부산항의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부두를 얼마나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던지! 미워도 내 집이요, 싫어도 내 땅이라, 하물며 거기에는 나를 낳고 기른 부모가 계시고, 나와 같이 자라던 동무들이 있고, 나의 여신같이 애지중지하던 전날의 애인까지 있었음에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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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비록 일시는 단념까지도 했지만, 그래도 심중에는 항상 동경하던 구미(歐美)의 천지를 구경하게 되리란 것을 생각하매, 고국의 산천이 차차 멀어질수록 새로운 용기와 조바심 치는 호기심에 마음이 끌려서 일종의 통쾌한 맛을 느끼지 않음도 아니었던 것이다. 이윽고 선실로 들어온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좁디좁은 침대에 드러누웠다. 어제 저녁에 D씨가 손에 쥐어주던 조그만 종이 조각을 다시 꺼내어 들고, 두 번 세 번 다시 읽으니, 읽을수록 새로운 용기와 굳센 마음을 얻게 되는 동시에, 고국 산천과 막역(莫逆)의 동무들이 벌써 10년이나 못 만난 듯 그리워짐을 새삼스럽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는 이같이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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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은 길 높곤 해도 그 위에도 또 몇 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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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양 바쁜 걸음 기(氣) 더욱 못막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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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봉 오르는 길 마음 모아 받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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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부디 평안하소 마음 또한 기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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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은 뜻 이루어지고 다시 더욱 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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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에 일장검(一長劍) 들고 주유천하(周遊天下) 하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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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 감격햇다. 더구나 무슨 일에나 감격하기 쉽던 그때의 나로서는 명함지 뒷등에 적은 이 짧은 노래에 얼마나 많은 감격의 눈물을 뿌렷던지. 그러나 아무리 감격하고 아무리 용기를 얻었다 치더라도, 그때의 나로서는 몸 평안해지고 마음 기쁘게 될 때가 다시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이하 상당 페이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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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8일 하와이 미술관 주최로 동관 노천극장(露天劇場)에서 오후 7시 45분부터 나의 첫 번 독주회가 열렸다. 공교롭게도 이날 밤에는 비가 부실부실 내려서 우산을 쓰고 의자에 앉아서 듣는 청중들이 나의 눈에는 퍽이나 기이하게 보였지만, 그러나 한 곡 한 곡의 연주가 끝날 적마다 그네들은 열심으로 박수하고 환호해 주었으며, 또 간간이 하와이 풍속의 하나인 꽃목도리를 걸어주는 사람까지 있어서, 나는 생후에 이날 밤처럼 감격하고 흥분한 경험은 다시 없다고 할 만큼 득의자약했던 것이다. 프로그램 최종에는 내가 서울에서 고별 연주회를 하던 때와 같이 〈고별의 노래〉를 연주했다. 이 악곡은 본시 하와이를 대표 민요로, 하와이가 미국에 병합될 때에 그 당시 하와이 여왕은 이 노래를 자작하여 사랑하는 자기 백성들에게 마지막 작별로 불러준 것인 만큼, 이날 밤 이곳에서 내가 이 곡조를 연주할 때에, 청중은 일종의 감구지회(感舊之懷)에 싸여 있었던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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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고별의 노래〉(원명 Aloha Oe)는 그네들에게 있어서 보다도 내 자신에 있어서 한층 더 단장의 비곡이 되어 있었으니, 일찍이 내가 서울서 K양과 사랑을 약속하고 지내던 때에 모 축음기 회사의 청탁으로 바이올린 독주를 취입한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이 곡조를 바이올린곡으로 편곡하여 K양의 반주로 취입했는데, 이 또한 무슨 인연인지 나는 이 곡조에 〈고별의 노래〉란 제목을 붙였고, 나와 K와는 이 레코드가 발매되던 때부터 사랑의 해소를 선언하게 되었고, 더욱이나 그 축음기 회사에서는 곡목 해설에 "마치 사랑하는 연인과 연인이 서로 헤어지는 장면을 탄식하는 듯한 비곡" 운운의 설명을 붙였다. 물론 여기에는 아무 예감도 약속도 없는 일이건만도 이 노래가 K와 나 사이에 참말 고별의 노래가 되었고, 금영이가 죽던 날 밤에도 나는 무심히 이 곡조를 켰고, 고별 연주회를 하던 날도 마지막으로 눈물과 함께 이 노래를 연주했거늘, 오늘 밤 이 자리에 이 노래의 참말 주인공 되는 하와이 민중 앞에서 또다시 이 노래를 타게 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우연같지 않은 우연의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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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밤에는 누아누 청년회관에서 제2회 독주회를 열고 독주회 직후에는 하와이 방송국에서 나의 자작인 「애수(哀愁)의 조선(朝鮮)」과 이 〈고별의 노래〉를 전파를 통하여 하와이 도민에게 선사한 후, 나는 21일에 ‘아사마마루(淺間丸)'를 타고 미 본대륙으로 향했다. 미국에 입국한 후의 일은 여기에 더 쓸 필요를 느끼지 않지만, 하여간 나는 나에게 있어서 단장의 비곡이랄 이 〈고별의 노래〉를 5년 전 8월 18일 밤 하와이에서 열린 독주회 때에, 그 노래의 주인공들 앞에서 이것을 들려보낸 후부터는 여러 해 지고 다니던 마음 속의 무거운 짐을 풀어놓은 듯한 가벼운 한숨을 쉬게 된 것이다.
【원문】고별의 노래 (원명 Aloha 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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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 고별의 노래 [제목]
 
  홍난파(洪蘭坡) [저자]
 
  1936년 [발표]
 
  수필(隨筆) [분류]
 
◈ 참조
  # ALOHA 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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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별의 노래 (원명 Aloha Oe)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06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