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한글 
◈ 마도일기(馬島日記) (1907년) ◈
◇ 마도일기(馬島日記) (1907년 8월) ◇
카탈로그   목차 (총 : 12권)     이전 8권 다음
문석환 의사
1
馬 島 日 記
 
 
2
1907년 8월
 
 
3
8월 1일 경신.
 
 
4
2일 신유.
 
 
5
3일 일술.
 
 
6
柳濬根의 백씨가 서찰을 보내왔는데 의복과 함께 왔다. 자잘한 것은 기록할 필요가 없으나 근래 가뭄이 옛날에 없던 것이어서 붉은 밭에 곡식 싹이 없고 전국[八境]의 풍년과 흉년이 어떠한지 알지 못하겠는데, 충청도의 靑陽ㆍ定山ㆍ瑞山ㆍ泰安 등지는 비가 자주 내려서 풍년의 형세가 있고, 保寧ㆍ藍浦 등지는 가뭄이 심하여 앞으로 생활을 어찌 견디어나갈까 라고 하였다. 그 곳에 李應三ㆍ康善文이 각각 환약 수백 개를 지어 보냈는데 배꼽에 습기를 없애며 체증을 사라지게 하였다. 庇仁 고을은 보령ㆍ남포의 이웃이라 생각컨대 가뭄을 함께 입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거처하는 곳은 먼 바닷가이어서 도무지 물이 나오는 흙이 없고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가문 해에 흉년이 드는 것이 다른 데보다 더욱 혹독하다. 또 곡식을 쌓은 부자가 없고 별도로 매매하여 진휼할 가망도 없다. 신축(1901)년 이래로 생산이 매우 어려워서 혹은 유랑하는 폐단이 많았다. 이 위태로운 세상을 만나서 사람 마음이 순박하지 않고 사람의 굶주림을 보아도 편안히 보통인 듯하고 또 흉년까지 들었으니, 형제와 처자가 굶주리며 친척과 붕우의 고생이 어떠하겠는가? 나는 신축년 흉년을 당하여 거의 죽다가 다행히 면하였다. 지금 몸이 이 지경에 이르러 거의 새장의 새와 같으니, 스스로 한탄한들 어찌하리.
 
 
7
4일 계해.
 
 
8
礪山군수 李相天이 안부 편지와 옷을 그의 중씨 相斗에게 부쳤는데 紙貨 50緡 표를 아울러 봉해 넣었다. 편지 뜻은 안부뿐이었다.
 
 
9
5일 갑자.
 
 
10
친구 曺秉直이 편지를 부쳐 와서 본국의 소식을 대략 알았다. 말하기를,
 
11
“새 황제가 즉위하여 연호를 隆熙라고 고치고 이 때의 일이 어지러워서 매우 불행하다.”
 
12
하였다.
 
13
○ 川上에게 들으니 일본에 괴질이 크게 일어나서 죽은 사람은 헤아리지 못하고 또 이 섬에 침범할 것이라고 하여 경계되는 것이 컸다. 질병이 그치기 전에는199) 또한 밖에서 운동해서는 안 될 뜻을 대대장이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14
6일 을축.
 
 
15
曺친구에게 답장을 보내고, 한글 편지로 재종숙과 재종형에게 아울러 올리는 편지를 썼다. 曺친구의 편지에 말하였다.
 
16
“한결같이 5월 이후로 집 소식과 친구 편지가 아득하여 參商200)과 같습니다. 항상 정리에 억제하기 어려운 것은 구름과 달이 이끌어 감회를 일으키며 바람과 비가 함께 상상을 달리게 하는 것입니다. 뜻밖에 편지를 받고 손 씻고 와서 반복 읽으니, 정리가 있는 이는 만 리도 지척이어서 이 섬이 세상과 막히지 않았음을 다시 느꼈습니다. 그러나 소식이 드문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함께 고생하는 이가 모두 그러합니다. 이것으로 하여 헤아려 보건대 대략 이 속의 연고를 생각함이 어찌 우리 형과 같이 자세히 말함이 있으며, 혹은 … 시국의 어지러움을 헤아림이 어찌 우리 형의 신기함과 같은 것이 있겠습니까? 삼가 가을 샛바람에 부모를 모시는 귀하가 어머니의 편찮음으로 날마다 애탄다는 것을 알고 저의 기도가 멀리까지 미치는 정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조섭하며 지내는 것이 이전과 같아서 말씀드릴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많은 환난을 당하여 위험을 피하지 않고 자주 편지를 주시며 자잘한 것을 거리끼지 않고 굳건함을 크게 지키시어 사람마다 능하지 못한 것을 능히 하시니, 저의 보잘 것 없는 몸으로 장차 어찌 마음을 먹어야 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천리의 성쇠와 세상 도리의 치란은 진실로 없을 수가 없습니다. 이미 국가 운명이 어렵고 장차 生靈이 魚肉이 될 것이어서 통곡뿐이니 어찌하겠습니까? 우리 형의 절개가 돌과 같은 것은 제가 미리 아는 것입니다. 다시 부탁함을 기다리지 않겠으나, 바라건대 시골 속으로 용감히 은퇴하시어 운수가 다하고 이치가 극도에 달하였을 때 굽힘을 도리어 펴게 되는 것으로 한다면 어찌 견해가 고정되며 지킴이 확고하지 않겠습니까? 옛글에 말하기를 ‘기색을 보고 날아오른다.201)’ 하였거늘, 하물며 지금 발이 위에 있는 거꾸로 된 세상이겠습니까? 기미를 아는 이는 남이 보지 않는 것에서 보고 의혹을 결단하는 이는 남이 결행하지 않는 것에서 판단하니 그러한 뒤에 몸을 보전하는 영예가 있게 됩니다. 반드시 매우 삼가며 노력하여 백배나 생각을 깊이 하여 말이 틀리는 지경에 이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저의 집 일은 오로지 우리 형을 따를지니 정세를 자세히 살펴 주소서.”
 
 
17
7일 병인.
 
 
18
밤 3경에 경비영에서 포성이 어지러이 나고 서로 고함치는 소리가 났는데 한참만에 그쳤다. 생각컨대 야간훈련인가 한다.
 
 
19
8일 정묘.
 
 
20
통역이 공일이기 때문에 들어오지 않았다. 午時에 소대장 한 사람이 위병소에서 와서 바둑을 두고 갔다.
 
 
21
9일 무진.
 
 
22
川上에게 물었다.
 
23
“이 섬에 이즈음 전염병은 지금 과연 어떠하오?”
 
24
“전체 섬은 알지 못하겠으나 嚴原은 그저께 죽은 사람이 6~7명이고 오늘 병자가 2명이라고 합니다.”
 
25
“근래 공의 모친의 안부를 들었습니까?”
 
26
“어제 모친의 편지를 보았습니다.”
 
27
“들은 것이 있습니까?”
 
28
“별로 들은 것이 없습니다만 한국 서울에 큰 博覽會社를 설립하였으므로 우리 모친이 이를 구경하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갑니다. 지난번에 부산항에 있었다.”
 
29
“큰 박람회사는 어떤 일을 주관합니까?”
 
30
“천하의 기괴하며 화려한 물건으로서 사람 눈에 구경할 수 있는 것은 갖추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31
일찍이 川上에게 들었는데 일본 東京에 이 회사가 있다고 한다. 이는 서양에서 처음 유래한 것이다.
 
 
32
10일 기사.
 
 
33
11일 경오.
 
 
34
12일 신미.
 
 
35
愼懼堂의 조카 秉曄, 靜觀亭의 아들 火邕, 南湖의 처남 任相鎬의 편지가 동시에 왔다.
 
 
36
13일 임신.
 
 
37
14일 계유.
 
 
38
川上이 말하였다.
 
39
“명일은 바로 우리나라의 佳節입니다. 잠깐 밖에 나가서 바람을 쏘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40
“내 뜻도 이와 같이 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이 섬의 이즈음 전염병이 아직도 꺼지지 않고 이따금 죽기도 합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대대에서 외출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부대에 있는 병정도 외출하지 못하고 근신하면서 지냅니다. 바람을 쏘이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니 전염병이 그친 뒤에야 되겠습니다.”
 
41
“그렇겠습니다.”
 
 
42
15일 갑술.
 
 
43
바로 추석이다. 시 한 수를 읊어 회포를 풀었다.
 
 
44
秋夜天高露下林  가을 밤 높은 하늘에 이슬이 숲에 내리고
45
關雲塞月兩蕭森  관문에 구름 끼고 변방에 달이 떠서 둘 다 쓸쓸하구나
46
日域行裝同曛隱  일본 땅에 행장 차려 암울을 함께하고
47
燕山險阻憶淸音  燕山202) 험함에 맑은 소리 생각하네
48
髣髴相隨兄弟夢  형제의 꿈은 비슷하게 서로 따르고
49
艱難始識友朋心  친구의 마음은 고생에 비로소 안다네
50
古今不易經圖力  고금에 쉽지 않은 경영하는 힘
51
高臥何人梁父吟  어느 사람이 편히 누워 梁父吟을 부르는가
 
 
52
16일 을해.
 
 
53
17일 병자.
 
 
54
이 섬 사람들이 지금 전염병에 죽은 이들이 1백여 명이라고 한다.
 
 
55
18일 정축.
 
 
56
19일 무인.
 
 
57
本室의 한글 편지 및 朴昌祚ㆍ崔萬奉ㆍ朴分吉의 편지가 왔는데, 편지에 대략 말하기를 고국이 매우 어지러워서 창황함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였다. 朴昌祚가 그의 完丈203)과 藍浦 寒泉洞에 우거하고 잠시 전일의 資料로 삼았다.
 
58
川上이 口誦한 名詩集
 
 
59
贈秋渚唫壇
 
60
錦牋彩筆染胭脂  비단 쪽지에 채색 붓으로 연지를 찍어서
61
妙曲當筵付雪兒  어여쁜 노랫소리는 잔치에 당하여 눈빛 살결 소녀에게 부치네
62
一瞥劫塵尋夢影  세상에서 잠깐 보고 꿈 속에서 찾고
63
朅來舊雨話襟期  가고 오는 친한 친구204)에게 속마음을 이야기하노라
 
 
64
咏花月妓名
 
65
香顰珠咲成春社  향기로운 찡그림과 구슬 같은 미소가 봄 사일205)에 이루고
66
剪綠裁紅本事詩  녹색 홍색 색종이 잘라 춘사 시를 쓴다네
67
花月新聞天下遍  花月(화초와 풍월)에게 새로 들음이 천하에 두루하니
68
風流儘許共追隨  풍류를 온통 인정하여 함께 따른다네
 
 
69
朴昌祚가 紙貨 20緡을 부쳐 보냈다.
 
70
讀本에 말하였다.
 
71
“郡都 만 리이다.”
 
72
趙碩士 儀舜 씨가 늦벼[晩租] 10말을 본가에 보내 곤궁함206)을 면하게 하였다. 藍浦 平章里의 李生員 秉斗 씨가 작년 가을 이후로 벼 10말을 보내왔으므로 올 여름에 값을 쳐서 갚았으나 받지 않고 도로 보냈다. 年事는 습지는 작년보다 낫지만 건조지는 작년보다 못하다고 하였다. 미투리 한 켤레, 버선 한 켤레를 이번 인편에 부쳐 보낸다고 하였으나, 해당 물건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73
20일 기묘.
 
 
74
晩鳳 등에게 절구 2수를 보냈다.
 
 
75
圍棋已罷欲眠時  바둑을 마치고 잠이 올 때
76
忽見鄕書慰我思  홀연히 보는 고향 편지가 내 마음을 위로하네
77
千里遞郵雖迅速  천리에 우편이 비록 빨라도
78
非君致送奈由斯  그대에게 보냄이 아니면 어디에 말미암을까?
 
79
南海秋風留我日  남해 추풍이 나를 머물게 하는 날
80
西湖明月憶君時  서호 밝은 달에 그대를 생각할 때라
81
鳳來鳳去群山渡  봉황이 오고 가며 많은 산 넘는데
82
片片瓊音尙未遲  반가운 소식 글 늦지 않겠지
 
 
83
이 편지는 21일에 있어야 한다.
 
 
84
頭註: 萬鳳 등의 편지는 아래에 있다.
 
85
頭註: 이전에 勉菴 선생께 의지하여 교육을 받아 몽매함을 벗어나게 되는 데에 효과를 바라게 되었다. 선생의 상을 당하여207) 문득 교육을 못 받게 되었다. 국가에 불행인데다가 내가 좋아하는 분을 곡하였다. 하늘을 믿기가 어렵다는 것이니, 애통 또한 어찌 끝이 있으랴!
 
 
86
21일 경진.
 
 
87
집의 편지 및 崔ㆍ朴 두 秀才에게 답장을 써 보냈다. 또 趙先達 泰瑞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말하였다.
 
88
“동해를 건넌 뒤로 어찌 문안을 드리고 싶지 않겠습니까마는 이목에 거리껴 일을 수행하지 못하였습니다. 비록 그러하나 마음으로 절로 서운하며 송구해집니다. 삼가 여쭙건대 가을 날씨에 靜體候 건강하시며 아드님도 부모 모시면서 힘써 공부하여 날로 진취함이 그치지 않는지요? 궁금함이 밤낮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저[下生]은 허망히 행동하여 이에 이르렀는데 이는 또한 하늘이 정한 것이니, 한탄한들 또한 어찌하겠습니까? 다만 天道가 좋게 돌아오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근래 집의 편지를 보건대 10말 벼를 주신 것은 은혜가 산이라도 가볍고 정리가 황하라도 얕은 것이니, 어찌 감명될 뿐이겠습니까? 실로 갚을 수 없음이 부끄럽습니다. 저의 보잘것없는 것으로 무엇을 취할 바가 있어서 이러한 후한 베풀음이 있는 것입니까? 도도한 우주 안에 더욱 그 덕이 후함을 흠모합니다. 만약 살아 돌아간다면 우선 찾아뵙고 안부 드리겠습니다. 이것으로 이해하심이 어떻겠습니까? 글로 말을 다하지 못합니다. 이만 줄이고 안부 드립니다.”
 
 
89
22일 신사.
 
 
90
노니는 구름이 때로 홀로 가고 남은 바람이 가늘게 가지를 흔들었다. 鷄知 사령관이 와서 부대 병사를 검열한다고 하였는데 川上이 들어올 차례여서 공일이라고 해도 쉬지 못하였다.
 
 
91
23일 임오.
 
 
92
푸른 하늘이 한결같은 빛이었고 종일 동풍이 불었다. 眉湖가 퉁소 하나를 만들었는데 혹은 낮에도 밤에는 항상 誦讀을 한 뒤에 한 두 곡조를 불어 가슴을 상쾌하게 하니 또한 나그네 시름을 삭여 보낼 수 있었다. 절구 두 수를 읊었다.
 
 
93
淸哀一曲喚愁膓  맑고 애절한 한 곡조 시름을 자아내니
94
忽憶美人天一方  홀연히 미인을 먼 하늘가에서 생각하네
95
安得古人籠絡手  어찌 고인의 감싸는 손을 얻을까?
96
楚人一夜盡思鄕  갇힌 사람이 온 밤에 모두 고향을 생각하는데
97
窮途行事與誰論  곤궁한 길에 행할 일을 누구와 논의하는가!
98
訴得中心未敢言  마음에 호소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네
99
千古無雙慷慨地  천고에 둘도 없는 강개한 땅에
100
曾令楚員過吳門  초나라 伍員으로 하여금 오나라 문을 지나가게 하였네208)
 
 
101
24일 계미.
 
 
102
흰 구름이 끊겼다 이어졌다 하였다. 군인을 보니, 봄과 여름에는 황색 옷을 입었고, 가을과 겨울에는 흑색 옷을 입었는데, 오늘에 와서는 군중이 흑색을 숭상하였다.
 
 
103
25일 갑신.
 
 
104
川上이 들어와서 말하였다.
 
105
“어제는 공일이 아니었는데 밖에서 쉰 것은 지난날 鷄知 사령관이 검사하는 연고로 쉬지 못했기 때문에 공일로 대신 허락받아서 이것으로 연유하여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106
또 나갔다가 본부에서 돌아와서 主計의 말을 대신하여 말하였다.
 
107
“韓人들이 목욕할 때에 숯을 피워 물을 데우는 일은 모두 食主 石田이 담당하는 것입니다. 石田에게 들으니 2일을 걸러 목욕탕 물을 쓰는데 일하는 도구와 들어가는 숯은 모두 그가 담당하는 것입니다. 川上은 응당 알 것이라고 하였으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일하는 도구와 들어가는 숯을 아직 보지 못하였고, 다만 한인이 스스로 탕물을 데워 목욕하는 것만 보았는데 숯은 모두 공용 창고의 숯을 썼습니다.’ 하니, 主計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떼어 주었는데 그가 거짓으로 꾸며 말하니, 숯 값으로 2백 20냥을 거두어야 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108
우리들이 말하였다.
 
109
“石田이 한 짓은 역시 가증스러우나 해로움만 있고 이로움은 없게 한다면 그가 이로움을 취하여 우리들의 식주가 되는 것이 도리어 부끄럽지 않습니까! 公의 말에 의지하여 그에게 손해가 있지 않게 하시오.”
 
110
“그러하겠습니다.”
 
111
頭註: 8월 21일에 萬奉 등에게 부친 편지
 
112
사람이 학문을 하는 것은 心性을 기르는 데에 있다. 사람이 心性을 기르는 것은 땅이 나무를 기르는 것과 같으니 그 이치는 추측하여 알 수 있다. 지금 여기에 나무 하나가 있는데 처음 생겨난 초기에는 키가 1치에 불과하고 크기는 1개 바늘에 불과하다. 기르면 큰 건물이 될 수 있고 기르지 않으면 섶도 될 수 없으니, 기르는 것이 어찌 대단하지 않은가! 1치 나무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明堂209)의 기둥이 되며 靈臺의 들보가 된다.”고 하면 과연 인정할 것인가, 인정하지 않을 것인가! 인정한다고 하는 것은 재목을 기를 줄 아는 사람이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재목을 기를 줄 모르는 사람이다. 그 性을 기르는 것이 어찌 재목을 기르는 것과 다르겠는가! 어떻게 나무를 기르는가! 그 뿌리를 북돋으면 밑둥이 절로 이룩되고, 그 가지를 잘라주면 줄기가 절로 뻗는다. 어떻게 性을 기르는가! 그 誠을 보존하면 사악이 절로 막히고 그 의리를 바로하면 욕심이 절로 막히니, 어찌 여기에 독실하지 않을 것인가! 눈은 보는 기관이다. 보는 것을 밝게 하고 마음을 바로하면 사물에게 유혹을 당하지 않는다. 귀는 듣는 기관이다. 듣는 것을 밝게 하고 밖에서 제어하면 사물에게 변화를 당하지 않는다. 입은 말하는 기관이다. 말하는 것을 삼가고 이전에 정해놓으면 후회가 없게 된다. 心은 생각하는 기관이다. 행동하는 바를 삼가고 그 행위를 지키면 허망한 작위가 없게 되니, 어찌 심성을 기르는 방법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그 사람을 보고 그 말을 들으며, 그 생각하는 것을 보고 그 행실을 고찰하면 그 사람의 선악을 알 수 있다. 말함이 心에 부려지며 性이 心에 통솔되면서, 心性에서 구하면 천하의 물건이 이 이치가 아닌 것이 없게 되고, 이치에서 구하면 천하의 사물이 이 善이 아닌 것이 없다. 길러 이루면 비록 1치의 나무일지라도 明堂에 기둥이 되며 靈室에 들보가 될 수 있거늘, 하물며 사람은 만물의 영장임에랴! 사람이 性을 길러서 德業을 완성함에 이르면 어찌 나무를 길러서 큰 건물을 만드는 것과 다름이 있겠는가! 원컨대 君은 본받아 힘쓸 것이다.
 
 
113
26일 을유.
 
 
114
川上에게 물었다.
 
115
“귀국의 금년 농사 형편은 어떻습니까?”
 
116
“풍년도 아니고 흉년도 아닙니다.”
 
117
“우리나라의 농사 형편은 어떻다고 합니까?”
 
118
“신문에 게재된 말로 기준한다면 한국 역시 풍년도 아니고 흉년도 아닙니다.”
 
 
119
27일 병술.
 
 
120
“일전에 귀국 황태자가 한국 황제에게 하례할 일로 부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한국 서울에서 근간에 환국하였습니까?”
 
121
“알지 못하겠습니다.”
 
 
122
28일 정해.
 
 
123
신문에 기재된 조선의 歷代를 보아 그 뜻을 대략 뽑았다.
 
124
“朝鮮의 초기에 王儉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太白山지금 寧邊 妙香山 檀木 아래에 내려왔다. 그 호칭을 檀君이라 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여 애초 평양에 도읍하고 1천 17년을 지내고서, 그 뒤에 白岳山 阿斯達지금 文化郡 九月山로 도읍을 옮겨 1백 95년을 지냈다. 나라 백성들이 머리를 땋은 것은 단군 때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지금까지 4천 2백 40년이다.
 
125
箕子는 平壤에 도읍하여 9백 20년을 지냈다. 그 구역은 서쪽으로 廣寧 永平府遼東 등지로 지금 盛京省와 경계하고 남쪽으로 洌水지금 漢江에 미치고 동북으로 穢貊ㆍ沃沮에 닿았다. 후손이 점점 쇠미하여 서쪽으로 천리 땅을 燕에게 잃어 滿潘汗으로 경계를 삼았다. 그 뒤 41世孫 箕準이 燕나라 사람 衛滿에게 쫓겨나 바다를 건너 남으로 가서 金馬郡지금 全羅道 益山郡 彌勒山 아래에 살았다.
 
126
衛滿은 지금부터 2천 1백 년 전에 평양 王儉城에 도읍하였다. 그의 손자 右渠에 이르러서 漢武帝가 토벌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四郡을 설치하였는데, 樂浪지금 평안도 등지ㆍ臨屯강원, 황해, 경기 이북ㆍ玄菟咸鏡 이남ㆍ眞蕃지금 鴨綠江 婆豬江 등지이다. 그 뒤 27년을 지나서 漢昭帝 弗陵 始元 5년에 진번을 없애 현도에 소속시키고, 임둔을 없애 진번에 소속시켰다. 그 뒤 현도는 夷貊에게 침략을 받아 도읍을 고구려 서북 單太嶺지금 薛寒嶺 이동으로 옮겼는데 연대를 기록하지 않았다.
 
127
三韓은 洌水 이남의 땅이다. 馬韓은 지금 경기ㆍ충청ㆍ전라가 바로 그 땅이다. 기준의 금마군은 그 구역이 북쪽으로 낙랑과 경계하고 남쪽으로 倭의 땅과 닿고 서쪽으로 큰 바다와 통하였다. 50여 국지금의 州郡을 통합하여 웅거하고 數世를 지낸 뒤에 백제에게 멸망당하였다.
 
128
辰韓은 지금 경상도 낙동강 이동의 땅인데 북쪽으로는 예맥과 연이었고 서북쪽으로는 마한과 닿고 동남쪽으로는 辨韓ㆍ일본 경계와 닿았다. 12국지금의 州郡을 통합하여 웅거하고 뒤에 新羅에게 멸망당하였다.
 
129
辨韓일명 辨辰은 지금 경상도 낙동강 이서의 땅인데 서남쪽으로는 지리산에 걸치고 서북쪽으로는 마한에 닿고 동쪽으로는 진한 땅과 섞이고 日本의 경계와 닿았다. 뒤에 신라에게 멸망당하였다.
 
130
新羅는 지금부터 1천 9백 44년 전에 신라 시조 赫居世가 鷄林지금 慶州, 일명 金城에 도읍하였다. 그 구역은 동서남 삼면이 바다에 막히고 서북쪽으로는 貝江지금 大同江에 닿고 북쪽으로는 발해ㆍ泥河지금 德源에 웅거하였다. 婆娑王에 이르러 도읍을 月城金城의 동쪽으로 옮기고 또 도읍을 明活城月城 동쪽으로 옮겼다. 敬順王에 이르러 고려에 항복하였는데 지낸 햇수가 합하여 9백 92년이다.
 
131
高句麗는 지금부터 1천 9백 24년 전에 扶餘 王子 高朱蒙이 沸流水 가에서 와서 卒本지금 압록강 이북 興慶 부근에 도읍하였다. 40년을 지내고 琉璃王 21년에 이르러 도읍을 國內城일명 尉那岩城, 지금 楚山江 북쪽 兀剌山城으로 옮겼다. 27년을 지내고 山上王 13년에 이르러 도읍을 丸都城지금 江界 滿浦江 북쪽으로 옮겼다. 39년을 지내고 東天王 20년에 이르러 도읍을 평양으로 옮겼다. 그 뒤 96년에 다시 丸都城에 도읍하였는데 그 사이에 慕容先의 난리를 겪어 다시 평양 東黃城바로 평양 동쪽 4리 木覓山 속이다. 일명 東城이라 한다에 도읍하였다. 그 뒤 85년을 지내고 長壽王 14년에 또 평양지금 江界 滿浦江 북쪽에 도읍하였다. 83년을 지내고 王臧 때에 이르러 신라에게 멸망당하였는데 지낸 햇수가 7백 5년이다.
 
132
百濟는 지금부터 1천 9백 45년 전에 北扶餘開原 사람 高溫祚가 세웠는데 高朱蒙의 次子이다 남쪽으로 洌水를 건너와 도읍을 慰禮城稷山 혹은 漢城에 정하니, 이는 馬韓이 동북 1백 리의 땅을 베어준 것이다. 13년을 지내고 도읍을 漢山지금 廣州 南漢山城으로 옮기고 慰禮의 백성을 이주시켰다. 26년에 마한을 습격하여 파괴하였다. 그 구역은 북쪽으로 浿水遂安 能成江, 혹은 平山 猪灘이라 한다.와 닿고 서남쪽으로 바닷가이고 동쪽으로 신라 지역과 만나고 동북쪽으로 낙랑ㆍ예맥과 닿았다. 3백 76년을 지내고 近肖古王 25년에 도읍을 北漢城지금 漢城으로 옮겼다. 1백 5년을 지내고 蓋鹵王 때에 漢城을 잃고 文周王 원년에 도읍을 熊津지금 公州으로 옮겼다. 62년을 지내고 聖王 15년에 이르러 도읍을 洙泗지금 扶餘로 옮겼다. 1백 12년을 지내고 義慈王에 이르러 어두우며 연약하고 음탕하며 포학하여 신라가 공격하였다. 王子 豊이 군대를 일으켜 周留城지금 燕岐에 웅거하고 熊津에 진격하여 포위하였으나 마침내 패배하여 옛 왕업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왕자 豊이 재위한지 4년만인 지낸 햇수가 도합 6백 81년 만에 마침내 신라에 편입되었다.
 
133
高麗는 지금에 9백 90년이다. 태조 王建이 도읍을 松嶽에 정하였는데 그 구역은 서북쪽으로는 女眞과 닿고 동남쪽으로는 바다에 임하였다. 76년을 지나서 成宗 12년에 이르러 거란의 蕭遜寧이 군대를 크게 일으켜 침략해 와서는 소리쳐 말하기를 “고구려 옛 땅을 회복하겠다.”고 하였다. 여러 사람들의 논의가 겁을 먹고 땅을 갈라주어 강화를 요청하려 하였으나 侍郞 徐熙가 항변하여 국경이 무사하였다. 顯宗 10년에 上元帥 姜邯贊이 거란군대를 크게 격파하여 국가 위엄이 비로소 드날렸다. 54년을 지나서 文宗 27년에 東女眞의 7州 酋長이 민중을 이끌고 와서 귀부하자 모두 성명을 하사하고 將軍이라고 호칭하였다. 또 東蕃역시 女眞 11추장이 모두 귀순하여 승복하였다.지금 豆滿江 등지임. 34년을 지나서 睿宗 2년에 여진의 추장 烏雅束이 세력이 강대하여 肅宗 때에 이르러 자주 변경을 침략하자 元帥 尹瓘ㆍ吳延寵을 보내어 병력 17만을 인솔하여 토벌하게 하고 지역 경계를 획정하였다. 동으로는 火串嶺, 북으로는 弓漢伊嶺, 서로는 蒙羅骨嶺이었는데, 英ㆍ福ㆍ吉ㆍ雄 4州를 설치하였다.지금 吉州 이서. 다음해에 또 咸ㆍ宣 2州 및 公嶮ㆍ通泰ㆍ平戎 3鎭을 설치하고, 남쪽 백성 6만 8천여 호를 이동하여 살게 하고, 公嶮鎭에 비석을 세웠다. 그러나 여진의 여러 부락은 복수를 맹세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침략하니 변방의 경보가 그치지 않았다. 4년 뒤에 여진의 太師 烏雅束이 史顯 등을 보내어 강화를 요청하고 9城 땅을 돌려달라고 애걸하자 조정 논의에서 허락하였다. 9城鎭이 모두 철수하자 여진 추장은 咸州 문 밖에 壇을 만들고 이후로 맹세코 朝貢을 들이겠다고 하였다. 쇠퇴한 시대에 이르자 함북 한 도는 여진에게 함몰되었고, 몽고의 침략에 미쳐 恭愍王 5년에 이르러 柳仁雨를 보내어 함북 등지를 토벌하여 회복하고 경계를 摩天嶺으로 정하자 여진이 비로소 고려에 복종하였다. 恭讓王 3년에 와서 甲州甲山를 회복하고, 李必 등을 보내어 斡都里지금 會寧의 兀良哈 여러 촌락을 招諭하였다. 그해 가을 7월에 우리 太祖가 고려를 대신하여 즉위하였다. 고려는 34世 4백 75년을 지냈다.
 
134
本朝는 태조가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여 지금 隆熙 원년까지 모두 516년을 지냈는데 단군부터 지금까지 4천 2백 40년이다. 고려 공민왕 19년에 태조가 騎兵 1만 5천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북으로 東寧府遼東 婆豬江 兀刺山城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또 군대를 진격시켜 遼陽城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북으로 遼潘지금 奉天府을 향하여 遼河 이동의 땅을 회복하고, 백성들에게 유시하여 말하기를 ‘여기는 본래 우리 강토였는데 중간에 몽고 및 漢人의 간섭을 받았다. 그러므로 옛 지역을 와서 회복하니 너희 인민들과 작록을 함께 누리겠다.’ 라고 하였다. 다음해에 北元 遼陽城 平章 劉益이 사신을 보내어 귀부하고 드디어 金州ㆍ復州ㆍ蓋平ㆍ海城ㆍ遼陽 등지를 바쳐 그 뜻을 밝혔으나 조정의 논의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태종 2년에 理山楚山ㆍ渭原ㆍ昌城ㆍ朔州 등의 군을 설치하고, 7년에 慶源ㆍ慶興의 2府를 설치하고, 13년에 閭延郡을 설치하였다. 세종시대에 茂昌ㆍ閭延ㆍ虞芮ㆍ慈城의 4군을 서북에 설치하고, 金宗瑞가 북으로 여진 부락을 두만강 밖으로 몰아내어 강토를 회복하여 六鎭을 개척하였다. 선조시대에 변방 호족을 멸망시키고 茂山府를 설치하여 육진에 편입시켰다. 정조시대에 長津府를 설치하였다. 숙종 3년에 청국 烏喇摠管 穆克登이 우리나라 사신 朴權ㆍ李義復과 백두산에 올라가 分水嶺 위에 이르러 定界碑를 세웠는데 말하기를 ‘大淸 烏喇摠管 穆克登이 황명을 받들어 변방을 조사하여 여기에 이르러 살펴보니, 서쪽으로는 鴨綠江이고 동쪽으로는 土門江이다. 그러므로 분수령 위에 돌에 새겨 기록한다.’라고 하였다. 그 뒤 1백 71년만인 개국 기원 4백 91년이 지나서 북간도의 경계를 勘定하는 일로 청국의 吉林將軍이 조선의 西北經略使 魚允中과 살펴 정하여 드디어 결정하고, 그 뒤 경계를 勘定하는 일은 李重夏가 청국 德玉賈ㆍ元桂ㆍ秦瑛 등과 경계를 살펴 정하였으나 결정되지 않았다. 土門江의 근원은 分水岑인데 白頭山 大澤의 남쪽 10리에 있다. 이 곳이 바로 정계비가 있는 곳인데 그 서쪽편 몇 보 땅의 구덩이가 압록강의 근원이다. 또 江邊 몇 보 땅의 구덩이가 土門江의 근원이다. 그 사이의 도랑 모양은 매우 좁고 두 언덕이 마주 서서 문 모양과 같으므로 이름하기를 土門江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정계비에서 말한 바 동쪽으로는 土門이고 서쪽으로는 鴨綠이라는 것이다. 土門은 각 골짜기의 물이 합쳐서 동쪽으로 3백 리를 흘러가고 또 북으로 松花江으로 흘러간다. 간도는 바로 土門의 남쪽에 있는데, 간도는 지금 조선 영내의 땅이다. 또 두만강의 근원은 長山岑에 있는데 分水岑의 비석을 세운 곳에서 그 거리가 90리이고 동쪽은 土門이다. 분수령의 정계비 동쪽에서 발원하여 이것이 토문강의 근원이 된다고 한다. 뒤에 말함이 있어서 우선 그 대략만 기록한다.”
 
135
頭註: 뒷 기록에 덧붙인다. 統監府에서 간도의 한국 백성을 위하여 保護를 설치했다고 한다.
 
 
136
29일 무자.
 
 
137
食主 石田이 과자 네 덩이를 보내주어 나누어 먹었다. 그 이름은 柏卷인데 사탕으로 속을 넣고 겉은 쌀가루로 싸서 쪄서 만들었다. 그 맛은 달았다.
 
 

 
138
각주)
 
139
199)  전후로 연결이 되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錯簡이 있는 듯하다.
140
200)  서로 만나지 못함을 말한다. 參은 서남방 申의 위치에 있고, 商은 동방 卯의 위치에 있어서 두 별이 동과 서에서 서로 만나지 못하므로 오래 만나지 못함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141
201)  재앙이 닥치면 피해 가는 것을 말한다. 원문 ‘色斯擧矣’는 「論語」(鄕黨)의 글로, 꿩이 자기를 잡으려는 사람의 나쁜 기색을 보고 날아간다는 뜻으로 위험이 닥치기 전에 기미를 보고 안전하게 처신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142
202)  변방을 말한다. ‘燕山’은 ‘燕然山’의 줄임으로, 동한 때에 北匈奴를 크게 격파하고 공을 기록한 비석을 세운 곳이어서 변방을 말하게 되었다.
143
203)  ‘阮丈’(숙부)의 잘못으로 보인다.
144
204)  원문 ‘舊雨’에서 ‘雨’는 ‘友’와 통하므로 즉 옛날에 사귄 친구를 이르는데, 杜甫의 詩序에 “옛날에 사귄 친구는 오는데, 새로 사귄 친구는 오지 않는다.(舊雨來 今雨不來)”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145
205)  춘분의 전후 戊日에 땅에게 제사를 지내는 날. 社祭는 仲春과 仲秋에 지내며, 봄에는 농사가 잘 되기를 빌고 가을에는 보답의 뜻을 보이는 것이다. 春社는 춘분, 추사는 추분의 전후 戊日에 지내는 것이니, 춘분ㆍ추분 바로 앞의 무일을 近戊日, 바로 뒤의 무일을 遠戊日이라 한다.
146
206)  원문 ‘翳桑’은 뽕나무가 우거진 그늘이라는 뜻으로, 굶주림을 말한다. 춘추시대에 靈輒이 3일을 굶고서 뽕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었는데 趙盾이 사냥하다가 보고 묻자 뽕나무 그늘의 굶은 사람이라고 답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左傳」 宣公二年)
147
207)  원문 ‘摧樑’은 들보가 부러진다는 뜻으로, 선생의 죽음을 말한다.(禮記 檀弓 上). 여기서는 崔益鉉이 서거한 일을 말한다.
148
208)  매우 강개함을 말한다. 오운(伍員)은 초나라 사람으로 부형이 살해되자 오나라로 망명하여 초나라를 무찔렀으나 월나라의 뇌물을 받은 오나라 太宰 嚭의 참소를 받아 죽음을 당하였다. 오운은 죽을 때 유언하기를 “낸 눈을 오나라 동문(吳東門)에 걸어 월나라가 오나라를 격파하는 것을 보게 하라.” 하였고, 그가 죽은 3년 뒤에 월나라가 오나라를 쳐서 멸망시켰다.(「史記」 66권). 그리고 ‘伍員吹簫’는 원나라 때 戱曲이 있는데 오운이 통소를 불며 겨우 糊口之策을 삼아 살아가다가 오나라의 병사 60만 명을 빌려 초나라에 쳐들어가서 부형의 원수를 갚은 줄거리이다.
149
209)  王者의 太廟로서 政敎를 행하는 집.
【원문】마도일기(馬島日記) (1907년 8월)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글쓰기
〔일기〕
▪ 분류 : 개인기록물
▪ 최근 3개월 조회수 : 85
- 전체 순위 : 804 위 (2 등급)
- 분류 순위 : 18 위 / 105 작품
지식지도 보기
내서재 추천 : 0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 마도일기 (1907년) [제목]
 
◈ 참조
  1907년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기록물 > 개인기록물 카탈로그   목차 (총 : 12권)     이전 8권 다음 한글 
◈ 마도일기(馬島日記) (1907년)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3년 03월 0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