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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도일기(馬島日記) (1907년) ◈
◇ 마도일기(馬島日記) (1907년 3월) ◇
카탈로그   목차 (총 : 12권)     이전 3권 다음
문석환 의사
1
馬 島 日 記
 
 
2
1907년 3월
 
 
3
3월 초1일 임신.
 
 
4
구름과 안개가 산을 덮고 음산한 바람이 나무를 울렸다. 회포를 쓰는 오언율시 10수73)를 지었다.
 
5
平生慷慨意  평생 강개한 뜻에
6
涕淚獨憑軒  눈물 흘리며 홀로 난간에 기대었네.
7
逐鹿時猶在  사슴을 쫓는 것도 때로 있었고
8
牽羊志尙存  양을 끄는 것은 뜻을 오히려 가졌네.
9
有纓繫南粤  긴 끈을 청하여 남월왕을 묶어오려 하고74)
10
無舌下東藩  동쪽 번방을 항복시킬 구변이 없구나.
11
窮達歸同轍  곤궁과 영달은 같은 데로 귀착되니
12
行藏付一樽  출세와 은둔을 술 한 잔에 부치네.
13
艱難天不恤  어려움을 하늘이 불쌍해 하지 않으니
14
骨肉摠離恩  형제는 온통 은혜가 떨어졌네.
15
途窮泣岐路  길이 다하자 기로에서 울고75)
16
國亂息忠言  국가가 어지럽게 되자 충성스러운 말이 그쳤네.
17
怊悵臨高峀  서글피 높은 바위에 임하고
18
徘徊駐綠原  배회하며 푸른 언덕에 머무르네.
19
塞雲春送夢  변방의 구름은 봄에 꿈을 보내오고
20
邊月夜驚魂  하늘가의 달은 밤에 혼백을 놀라게 하네.
21
古道嘶征馬  옛 길에는 가는 말이 울고
22
空山嘯斷猿  텅 빈 산에는 애타는 원숭이 울어대네.
23
人生分有定  인생은 분수가 정해져 있으니
24
榮辱不須論  영광과 오욕은 논할 필요가 없네.
 
 
25
초2일 계사.
 
 
26
초3일 갑오.
 
 
27
眉湖(申輔均)가 詩韻 하나를 골라 지어 고독한 회포를 풀었는데, 역시 東施의 찡그림을 본받아76) 지었다.
 
28
芹泥隨燕遶花林  미나리에 낀 진흙이 제비에 딸려 꽃 숲에 돌고
29
十二欄干接翠森  열두 난간 푸른 숲에 닿았네.
30
春歸上苑烟塵暗  봄에 상림원에 가자 아지랑이 어둑하고
31
客宿南天瘴海陰  나그네는 남쪽 하늘 아래에서 자니 바다 풍토 음산하구나.
32
靑山空對思鄕意  청산을 부질없이 마주하니 고향 생각이 나고
33
黃鳥一傳喚友心  꾀꼬리 소리 한번 전하니 친구를 부르는 마음이네.
34
憎渠孤舟樽酒夢  저들의 배 하나에 술잔 권하는 꿈을 증오스러워하며
35
何人獨自臥江深  어느 사람이 홀로 강 깊은 곳에 누워 있나.
 
 
36
상등병 田中茂가 붓으로 써서 보였는데 말하기를,
 
37
“한국 황제께서 일본에 유람한다는 풍설이 있습니다.”
 
38
하므로, 내가 말하였다.
 
39
“이 섬이요?”
 
40
“東京입니다.”
 
41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모든 일은 틀렸습니다.”
 
42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말합니까?”
 
43
“예부터 임금은 그 나라에 있어서 그 지경을 넘어가지 않거늘 하물며 타국이겠습니까?”
 
44
“한국 황제가 정치상 밝지 못하므로, 동경을 보고서 문명의 정치를 숭상하게 하려 하면, 한국 백성에게 크게 이로운 정치가 있게 될 것입니다.”
 
 
45
초4일 을미.
 
 
46
초5일 병신.
 
 
47
(나무판자 울타리 밖에 총포성이 연이어 그치지 않았다. 지방 백성이 말을 타고 훈련장 주위를 두루 돌았다. 이는 대대장 부관이 새로 부임한 뒤에 처음으로 순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48
초6일 정유.
 
 
49
오후에 대대장이 우리들을 보러 와서 통역에게 말하였다.
 
50
“감금된 사람들에 대하여 몸과 기운을 잘 보전하여 안심하고 지내면 반드시 잘 돌아가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51
平山 申泰觀 공은 바로 鉉斗의 재종조이다. 그 효행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들었고, 또 한 마디 말을 적어달라고 부탁함이 있었으므로, 그 실제 일을 서술하여 다음에 기록한다.
 
52
“정성이 아니면 하늘을 감격시키지 못하고 효가 아니면 사물을 감동시키지 못한다. 사람들이 모두 정성스럽다고 말하더라도 하늘을 감격시키지 못하면 정성이 아니고, 사람들이 모두 효도한다고 말하더라도 사물을 감동시키지 못하면 효가 아니다. 효를 잘함은 어찌 사람마다 가능하겠는가. 옛날 王祥77)이 얼음을 깨자 잉어를 얻어 부모의 반찬으로 올렸으니, 이는 이른바 정성이 하늘을 감격시킬 수 있었던 것이고 효가 사물을 감동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왕상의 정성을 능히 다하면, 왕상의 효가 아름다움을 옛날에서 독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성은 하나로되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은 정성을 능히 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에 애석해 하지 않고 다만 옛날에 감동만 할 것인가. 平山 申泰觀 공은 바로 우리 동국의 빛난 가문이다. 그의 아버지가 병들어 몇 달을 누웠는데 영험한 약도 효과가 없고 훌륭한 의원도 계책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노루의 피를 얻으면 치료할 수 있다’고 하였다. 마침내 재계78) 목욕하고 제사를 지극히 드려 노루 한 마리를 산채로 잡아서 그 피를 올리자 그 병이 나았다. 이 효도는 왕상과 아울러 아름다워서 이의를 달 수 없는 것이다. 思雲 鉉斗 선비는 바로 그의 재종손이다. 나와 대마도의 재액을 함께 하면서 그 일을 말함이 매우 자세하였고 나에게 말 한마디 지어 주기를 부탁하였다. 비록 졸렬하고 글을 못하지만 어찌 한 마디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사람이 申公의 효도를 능히 다하면 사람마다 모두 신공이고 또한 왕상이다. 진실로 하늘과 사람에게 감동시키는 것이 있지 않으면 누가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효성스럽구나, 이 공이여! 효성스럽구나, 이 공이여! 정성을 덮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도다. 南平 사람 文奭煥은 기록한다.”
 
 
53
초7일 무술.
 
 
54
蔡奎信·申鉉基가 각각 편지를 申鉉斗에게 보냈는데, 蔡가 편지에 말하였다.
 
55
“士君子는 반드시 높고 거대함으로 인품을 삼아야 하고 드높고 청초함으로 일의 공적을 삼아야 한다. 그렇다면 거센 바람의 꿋꿋한 풀과 쓰러뜨리는 물결 속의 지주도 이것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대는 금년에 약관으로 먼저 반드시 그 뜻을 크게 하여 공리의 근처로 달려가지 말고 의리의 속에 전적으로 힘쓰면, 이는 충성이 금석을 꿰뚫고 기운이 푸른 하늘에 닿는 것이 아니겠는가. 가산이 텅 비고 처자가 외로워서 마침내 의탁할 곳이 없으며 또 보호하는 사람이 없어도 조금도 마음에 두지 말고서, 명예를 우레 아래에 세우며 몸을 풍토병 기운 속에 던지면 누가 감히 그 기운을 늠름해하면서 그 일을 탄력 받지 않겠는가. 이는 이른바 차라리 구슬이 부셔질지언정 기와로 온전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차라리 난초가 꺾일지언정 쑥으로 영광스럽지 않겠다는 것이다. 대마도는 본래 동떨어진 섬의 外地인데 그대가 옮겨간 이후로 편지와 소식이 막혔다. 다만 본가에 편지가 돌아왔다고 들은 것이 두세번뿐이 아니나, 그 정상을 생각하면 마음이 감개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소리 없이 눈물을 닦은 것이 수차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情이지 일이 아니다. 일은 흔쾌하지만 정은 측은하다. 측은한 정으로 흔쾌한 일에 우는 것이 이치에 합당하지 않은 듯하지만 또한 이치를 어기는 데에 이르지 않으니 보는 사람은 이해할 것이다. 또 더구나 연초에 정겨운 편지 글씨를 거듭 보게 되니 만가지 회포가 전날 본가에 편지가 왔다고 듣고서 감탄한 것보다 배나 됨에랴. 그 사이에 편지 한 글자를 부치지 않은 것은 허물이 진실로 나에게 있으나, 편지를 부치고서 혹은 인편을 놓침이 많음을 전혀 알지 못해서였다. 지금 확실한 인편을 얻어 이에 몇 글자를 부치는데 없어져서 보지 못하게 될지 알지 못할 것이 십상팔구이니 한탄한들 어찌 하겠는가. 비록 풍토가 맞지 않는 땅에 있더라도 각별히 조심하여 작은 병도 생기지 않게 하고 또 곤궁하여 견디기 어려운 일에 있더라도 뜻을 세워 굳건히 하여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으면 지금 세상에 열렬한 장부는 그대를 놓아두고 그 누구이겠는가. 만일 병이 생기면 그 몸을 보전하기가 어렵고 게으름이 이르면 그 명예를 보전하기가 어렵다. 몸과 명예가 모두 온전하면 곤궁이 근심될 것이 없으므로 말하기를 ‘생강과 계피의 성질은 늙어가면서 더욱 맵고 소나무와 회나무의 자질은 하늘에 이르러도 굽히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困阨之說 1부를 베낀 것을 살펴보면 옛사람이 어떻게 온전히 보전했는지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그대의 집이 운수가 비색하다.’고 하지만 나만은 홀로 ‘형통하다.’고 하고,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그대의 성품이 고루하게 막혔다.’고 하지만 나만은 홀로 ‘통달하였다.’고 할 것이다. 사람이 세상 사이에서 평생 주재하는 것은 하나의 義일 뿐이다. 의를 위주하면 집안이 텅 빈들 무슨 일이겠으며 몸이 죽은들 또한 무슨 일이겠는가? 장생(莊生: 莊子)이 말하기를 ‘사람을 살피는 데에는 법칙이 있으니, 멀리 시켜보고서 충성을 살피고, 가까이 시켜보고서 경건을 살피고, 번거로움을 시켜보고서 능력을 살피고, 곤궁함을 시켜보고서 지조를 살피고, 갑자기 물어보고서 지혜를 살피고, 오래 주어보고서 신의를 살피고, 때로 맡겨보고서 어짊을 살피고, 위급을 고해주고서 절개를 살피고, 술로 취하게 하고서 재물을 살피고, (남녀를) 섞어 처하게 하고서 덕성을 본다. 이 10가지 징험으로 사람을 살피면 사람의 어진지 아닌지가 바로 판가름난다.79)’고 하였다. 군이 행하는 것을 보건대 목숨을 기러기 털처럼 가벼운 데에 부친 것은 멀리 시키고서 충성을 살핀다는 것이 그것이다. 발이 호랑이 굴을 밟은 것은 위태로움을 시키고서 절개를 살핀다는 것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어려움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허망하게 말하니 어찌 잘못되지 않았는가? 편지로 뜻을 다하지 못하고 말로 정을 다하지 못하니 붓을 놓는다.”
 
56
困阨之說에 이렇게 말하였다.
 
57
“困阨은 고금이 없이 일치하는 일이다. 그 때를 당하여 십분 크게 반성하여 백배 노력하면 어찌 장대하며 아름답지 않겠는가? 고금의 초장에 고생하고 후년에 형통한 자들을 대략 써서 보내노라. 이를 보면 거의 상심되지 않을 것이고 반드시 느긋이 억제하는 실마리가 있을 것이다. 천지에는 기이한 운수가 있으니, 陽九·百六80)의 때가 그것이다. 그 수에 재액이 있는 것은 그 누구인가? 虞舜81)은 우물과 창고에서 곤궁하였고, 膠鬲82)은 魚鹽에서 비색하였고, 傅說83)은 담틀을 쌓는 데에서 곤궁하였고, 太公은 棘津에서 노쇠했고, 周公은 武王의 의심을 제거하지 못하였고, 孔子는 魯侯의 미혹을 가라앉히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최상 지혜자의 곤액이다. 이 이외에 屈平의 충성을 楚懷가 적대시하였고, 伍子胥의 총명을 夫差가 내쳤고, 伏波84)의 공로를 光武皇帝가 꺼렸고, 陽城85)의 정직을 德宗이 배척하였고, 岳飛의 용맹을 秦檜가 원통해 하였으니, 이것이 모두 재액이다. 또 周勃86)은 누에 발을 다루었고, 樊噲87)는 도살과 술장사에 침체되었고, 寗戚88)은 소를 먹이는 일을 했었고, 衛靑89)은 돼지를 기르는 일을 하였고, 朱買臣90)은 걷고 노래하며 땔나무를 졌고, 王章91)은 소 덕석에서 누워 울었고, 班仲升92)은 글씨 쓰는 품팔이에 뜻을 꺾였고, 公沙穆93)은 몸을 절구질하는 데에 낮추었으니, 이 몇 사람은 스스로 곤궁하여 억울한 중에 나온 것이 아닌가? 아! 말에 뿔이 돋기 전에는 燕나라 태자 丹94)은 秦나라 조정의 통한을 삼켰고, 숫양이 젖이 나오지 않자 蘇郞95)은 눈내린 움막의 혼백이 녹았으니, 외국에서 곤액을 당한 것이 서글퍼할 만하다. 백 리보다 먼 대청96)에 鬷明97)은 자리에 나아갈 인연이 없었고,98) 문하 식객 3천 명에 毛遂는 주머니에 처할 경우가 적었으니, 하급 관료에서 곤액을 당한 것이 슬퍼할 만하다. 孫臏은 龐涓에게 다리를 잘려 드디어 폐질이 되었고, 范睢는 須賈에게 갈비가 부러져 완전한 신체를 못가졌으니 투기에 곤액을 당한 것이 애도할 만하다. 許永은 명확히 바른 말을 하다가 감옥에서 죽었고, 劉輔99)는 강직하게 충성스러운 간언을 하다가 鬼薪100) 형벌로 옮겨졌으니, 탄핵에 곤액을 당한 것이 애처로워할 만하다. 范孟博101)은 백성에게 의지함을 받아도 머리에 자루를 씌움을 지고 있었고, 李元禮102)는 선비들에게 추앙을 받다가 형벌103)에 잘못 걸렸으니, 黨禍에 곤액을 받은 것이 애통해할 만하다. 이 뿐만이 아니라, 冠準104)은 정성으로도 바다로 물리침을 당하였고, 王嬙105)은 화려한 용모로 오랑캐에게 시집갔고, 賈誼106)는 현인을 좋아하는 文帝의 조정에서 축출되었고, 董仲舒는 무제의 사람을 등용하는 세상에 폐기되었고, 顔駟107)는 郎署에서 늙어갔고, 長卿108)은 園令109)으로 마쳤고, 絳侯110)는 감옥에 갇혔었고, 史馬遷은 蠶室111)에 내려졌고, 杜甫는 嚴武112)의 칼날에 거의 피를 볼 뻔하였고, 權德輿113)는 裵延齡114)의 손에 험하게 죽었고, 校尉는 모두 侯에 봉해졌으나 李廣115)만은 후가 되지 못하였고, 난장이는 배불러 죽으려 하고 曼倩은 굶주려 죽으려 하니,116) 이는 모두 하늘을 믿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志士와 의로운 사나이는 반드시 서리를 밟고서 슬퍼한다. 구름에 오르는 것은 큰 사람에게 의탁하고 조화는 어린이에 비유하니, 대개 까불러 희롱하는 것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을 분개할 뿐이다. 그렇다면 90일 봄의 맑은 경치는 적고 천년 일의 어지러운 때는 많으니, 운수를 거슬려 곤궁하면서도 적중함을 형용한 것이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은 십중팔구이고 함께 말할 만한 사람은 하나 둘도 없으니, 기회가 막혀서 절실하면서도 마땅한 것을 신음한 것이다. 밥짓거나 물긷지 못하여 새벽에 춥고 옷이나 침상이 없어 밤에 떠는 것은 원인이 없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인생이 불우함이 많아 반평생 떠돌아다님이 많은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어서 발언하는 것이다. 또 한 걸음씩 가서 太行山117)을 오르듯이 한번씩 노저어서 灩澦堆118)에 닿듯이 하는 것은 또한 곤궁에 처한 사람이 분발하는 것이다. 비록 그러나 剝卦가 사라지면 復卦가 반드시 이르고 否卦가 다하면 泰卦가 반드시 돌아오는 것119)은 이치이다. 그러므로 管仲은 檻車에서 벗어나서 바로 齊나라의 仲父가 되었고, 伊尹120)은 솥과 도마를 벗어놓고서 商나라 阿衡이 되었고, 長卿은 쇠코잠방이를 벗어버리고서 붉은 기를 들었고,121) 曲逆侯122)는 자리로 만든 문에서 내려와 제후가 되었고,123) 百里奚124)는 한번 소 뒤를 떠나자 드디어 진나라 재상이 되었고, 韓信은 한번 바지 아래로 빠져나왔으나 漢나라 장군이 되었다.
 
58
어떤 까닭인가 하면, 소나무와 회나무는 서리와 눈을 실컷 맞지 않으면 절개가 드러나지 않으니 어찌 明堂의 기둥이 되며 大廈의 마룻대가 될 수 있겠는가? 原玉을 모래와 돌로 갈지 않으면 광택이 나지 않으니 어찌 제사그릇[瑚璉]을 만들며 珪璋을 이룰 수 있겠는가? 孔子가 말하기를 “임금이 곤란을 당하지 않으면 왕을 이루지 못하고, 통달한 선비가 곤란을 당하지 않으면 행실을 이루지 못한다.”고 하였고, 張子[張載]가 말하기를 “蛟龍은 연못에서 떨쳐나고, 현명한 이는 미천한 데에서 일어난다.”고 하였으니, 진실하구나, 이 말이여! 이것을 본 뒤에 마음을 느긋이 하고 기운을 펴서 매일 한번 강독하면 거의 근원을 보게 될 것이다.”
 
 
59
초8일 기해.
 
 
60
川上이 말하기를,
 
61
“小倉(地名)의 12사단 경리부장이 무기와 군복을 검열하기 위해 왔습니다.”
 
62
하기에,
 
63
“대마도가 小倉의 소속이오?’
 
64
하니,
 
65
“그렇습니다.’ 하였다. 말하기를,
 
66
“매년 이러한 예가 있습니까?”
 
67
하니,
 
68
“해마다 있습니다.”
 
69
라고 하였다.
 
70
川上이 또 말하기를,
 
71
“내가 어제 본부에 가서 ‘石田義一이 근일에 감금인의 접대에 소홀하다.’고 말하였므로, 소대장이 石田에게 꾸짖는 말이 있었습니다. 石田이 나에게 말하기를, ‘오늘 이후로는 점심 밥을 제공할 수 없으니, 일의 실마리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였습니다. 나는 그 사람이 일이 어지럽기 때문에 그러하지 않음을 압니다. 소대장에게 꾸짖음을 받는 것은 나에게 말미암은 것을 알기 때문에 이렇게 조금 유감이 있습니다.”
 
72
하므로, 우리들이 말하기를,
 
73
“公이 우리들 때문에 점심 밥의 절차에 불편한 바가 있으니 마음에 불안합니다.”
 
74
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75
“아닙니다. 내가 매번 장관을 대할 때마다 말하기를, ‘차라리 우리들에게 손해가 있을지언정 한국 사람에게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니, 장관 역시 모두 좋다고 말하였습니다. 내가 어찌 사사로운 감정으로 공무를 폐기하겠습니까? 내가 담당한 것은 공무이고, 저들이 유감스러워하는 것은 사사로운 감정입니다. 사사로움이 공무를 폐기하지 않는 것은 이치상 당연한 것입니다. 또 그 책임은 石田에게 있지 川上에게 있지 않습니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양쪽으로 적합하여 그르치지 않는 것은 聖人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76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77
“공무와 사사로움에 양쪽으로 적합한 것은 비록 성인이라도 혹은 난처한 길이 있거늘, 하물며 범인이겠습니까? 비록 그러나 오늘 이후로 점심 밥은 어떻게 제공합니까?”
 
78
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79
“자신이 가지고 와도 되겠고, 저기에서 사 먹어도 되겠습니다. 이와 같은 자잘한 일을 어찌 마음에 둘 것이 있겠습니까? 내가 보건대 근일에 石田이 공 등에게 접대한 것은 지난날보다 줄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소제하는 절차에도 게으른 마음이 상당히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부에서 따로 한 사람을 고용하여 소제하는 일에 이바지하게 하였습니다.”
 
80
하였다. 이에 앞서서 川上이 이곳에 통역을 한 이후로는 방 몇 칸을 다른 곳에 세들어서 어머니 및 아내가 잠시 거처하였다. 그러므로, 아침 저녁으로 침식을 권속과 함께 하였다. 아침 밥을 먹은 뒤에 이 감금소에 들어와서 사무를 간섭하고 해가 저물면 나갔으므로 점심 밥을 石田에게 기탁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石田이 공급한 것이 아니고 모두 공적인 급여에서 나간 것이다. 石田이 공궤에 이로워하여 이 자잘한 일을 썼던 것이다. 이것은 공궤자에게 이로운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81
초9일 경자.
 
 
82
초10일 신축.
 
 
83
川上이 말하기를,
 
84
“築城의 음식 제공이 대부분 정결하지 못하므로, 食主 石田이 다시 한 사람을 골라 들여와서 아침과 저녁을 제공합니다. 築城은 비록 그 행위하는 바가 나쁠지라도 그 집안 형편이 군색함을 불쌍히 여겨서 축출할 수 없어 잠시 여기에 남겨두고 다만 소제하는 일을 이바지하게 하고, 약간 품삯을 얻어서 입에 풀칠할 계책에 도움을 줍니다.”
 
85
하므로, 말하였다.
 
86
“우리들 (역시 築城의 집이 가난함을 대략 알기에, 지난번) 내쫓으려 할 때에 만류시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저 사람이 끝내 마음에 두지 않고 갈수록 더욱 심하여져서 도리어 처음이 나은 것만 못하니, 오직 공께서 처리함이 어떠한지에 달렸을 뿐입니다.”
 
87
“이 사람은 얼굴은 옳으나 마음은 그릅니다. 지금 비록 잘못을 알더라도 내일 다시 이전과 같이하여 어찌 할 수 없습니다.”
 
88
“매일 石田에게 급료를 주는 것은 얼마입니까?”
 
89
“공 등에게 접대하는 것이 사람마다 1일에 3냥이고, 소제하는 일에는 1일에 5냥입니다. 지금 공 등 8인에게 접대하는 것이 도합 24냥입니다. 그러나 이 물건 값을 따져보면 1일에 들어가는 것은 14냥에 불과합니다. 접대하고 남는 이익이 10냥쯤 되니, 저 사람은 마땅히 애써 복역해야 하겠으나 이와 같이 하지 않습니다. 비록 무식의 소치이지만 돌아보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로 인해 금일 점심을 먹고 내가 스스로 가지고 왔습니다.
 
90
자줏빛 건으로 싼 것을 풀어서 보여주는데, 작은 철통에 담은 것이 불과 3홉이었고, 饌은 竹筍에 한 것이었다.
 
91
申時 가량에 舍兄의 편지가 왔는데, 편지에 말하였다.
 
92
“매우 그리움은 말할 필요가 없다. 온 편지는 신년의 기쁜 소식이어서 간절한 그리움은 전보다 배나 된다. 온 편지가 출발한 것은 정월 14일인데, 도착해서 보게 된 것은 2월 16일이니, 그 사이는 1개월이 된다. 편지를 본 뒤에 또 10여 일이 지났으니, 그 사이에 객지 몸에 탈이 없으며 같이 고생하는 여러분들도 모두 각각 한결같이 편안하신지 알지 못하겠다. 멀리 생각이 달려가서 절실하게 안타깝다. 내 모습은 한결같이 그전대로이고 온 집안과 堂內가 탈없이 편안히 지낸다. 너의 처가도 탈없이 그전대로이다. 또 각처 산소도 연초에 봉심하였는데 모두 안전하다. 반드시 집안 일을 생각하지 말고 오직 의리가 있는 곳에 한결같은 마음으로 해 나가서 네 형의 바램을 저버리지 말라. 林樂安 영감이 우리 집을 찾아오기 위해 다른 곳으로 빙 둘러 왕림하시니 매우 감격스럽다. 그런데 먼저 기별한 하인이 曺秉直 친구를 대하여 말한 것이 모호하였는데, 曺 친구의 생각은 나와서 출입하는 행인을 일일이 검사하고 두 나라의 경비 관리가 읍 밑의 지점에 머물러 있으면 의심을 일으키거나 혐의를 받을 소치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앞 역참에서 기다리다가 돌아왔으니, 마침내 편지를 열어보지 못하고 살피지 못하여 그러한 것이 아니겠느냐? 네 편지를 보게 되어서는 훤히 알게 되었으니, 환영하여 모셔 오려고 기약하고 곧바로 중도에 이르렀으나 미리 온 심부름꾼이 전하는 바에 헛일이라는 것을 듣고 나서는 定山 길로 곧바로 향하여 彌勒堂에 이르러 뵈었는데, 대개 네가 현기증으로 손상된 것과 풀려 돌아옴이 멀지 않을 것 같다는 상황을 탐지하려 한 것이다. 기쁘고 한편으로 염려하던 중에 林 영감이 부쳐 보낸 망건과 아울러 중국 무명 두루마기[唐木周衣] 1건, 무명버선[木襪] 한 켤레, 미투리[麻鞋] 한 켤레, 주머니[囊] 한 개를 보자기에 싸서 우편으로 보내니, 찾아 받아가라. 수개월간이면 행여 풀려 돌아올 방도가 있겠느냐? 여름옷을 지어 보낼 계획이다. 나머지 많은 것은 일일이 적지 않는다. 林 영감이 부친 편지 및 曺 친구의 편지를 싼 보자기 속에 넣었다. 정미 2월 29일 舍兄 씀.”
 
 
93
11일 임인.
 
 
94
安恒植이 편지를 보내왔는데, 한 폭은 柳濬根에게 뜻을 두어 물어 말하였다.
 
95
“독서의 힘이 점차 사탕수수를 먹는 경지에 들어갔습니까? 당시 소식은 말씀드릴 것이 못되옵니다. 오직 담배를 끊어서 국가 빚을 갚겠다는 말은 卿·大夫로부터 심지어 창기 및 거지들까지 그 열렬한 마음이 있는 자가 수합하였는데 지금 몇 백만 元이 되었다고 합니다. 金商悳 영감은 이미 풀려났고, 英親王 혼례는 이번 달이나 다음 달 두 달 사이에 가려 정한다고 합니다. 여러 형들은 생각컨대 또한 오래지 않아 풀려날 것 같으나 어찌 미리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96
1폭은 李侙에게 뜻을 두어 물어 말하였다.
 
97
“지난 달 10일 무렵에 安奭老와 龜洞에 가서 奠을 드렸는데, 秀南 및 여러 문인이 堂에 가득하였고, 祭文·挽辭가 도합 6~7백 장이었습니다. 장사지내기는 아직 뜻에 맞는 곳이 없다고 합니다. 존하의 당질께서 유행병으로 온 집안이 근심하지만, 존하의 매씨와 존하의 부인은 모두 편히 지내는데, 그 경과는 차마 묻거나 듣지 못하겠으나 굶어 이산하는 폐단은 없습니다.”
 
98
한 폭은 申鉉斗에게 뜻을 취하여 물어 말하였다.
 
99
“한 달 전쯤에 龜洞으로 오가는 길에 마침 遯軒 영감을 만나서 하룻밤 담화를 여관에서 하였습니다. 이 영감은 망건을 사서 부쳐 보내려 하였는데, 제가 말하기를 ‘본가에서 이미 부쳐 들였다’고 하니, 서울에 올라가서 팔고 탕건을 사서 들여보낼 계획이라고 합니다. 봄 궁핍이 더할 수 없이 심하므로 令汀頭(마을 이름) 나의 당숙이 郭山 어른과 상의하여 집 앞의 소나무와 박달나무를 도합 1백 10냥에 내놓아 양식을 살 자금으로 하였습니다.”
 
100
연이은 폭에서는 南湖·靜觀亭·滄湖·眉湖를 묻고 아울러 나에게 언급하였는데 말하였다.
 
101
“지난 달에 遯軒 영감을 彌勒堂 주점에서 만나서 하룻밤을 유숙하고 다음 날 아침에 서로 헤어질 때에 존하의 백씨께서 뜻밖에 오셨습니다. 이는 遯軒이 올라올 때에 庇仁邑 밑을 지나다가 사람을 보내어 기별을 曺秉直에게 통하였더니, 도리어 창피한 말로 괄시하여 물리쳤으므로, 다만 일기와 편지만 전한 뒤에 즉시 여기로 왔습니다. 그러므로 존하의 백씨께서 추후에 듣고 뒤를 따라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서로 피차의 안부 및 형편을 다한 뒤에 遯軒 영감이 사서 가지고 있던 망건 및 편지를 즉시 존하의 백씨에게 전하여 군산항에 우편으로 부친다고 말하였습니다. 도착하였습니까? 다음 편에 자세히 보여주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나머지는 바라건대 도리를 萬古不易의 이치에서 연구하고 뜻을 한 시대 변화가 많은 때에 굳건히 하여 마침내 큰 그릇을 이루십시오. 皇天이 어찌 비쳐 임하는 밝음이 없겠습니까? 먼 편지에 뜻을 다할 수 없습니다. 간략히 써서 예를 갖추지 못합니다. 정미 3월 1일. 아우 安恒植 拜手.”
 
102
安炳瓚이 柳濬根에게 뜻을 두어 말하였다.
 
103
“형제가 단란히 모여 지난 재앙의 경우를 온통 잊었는데, 앞으로 또한 어찌 다른 근심이 없다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무사함은 기뻐할 것이 못되고 후일의 근심도 두려워할 것이 못됩니다. 華儂이 돌아와서 무사하지만 조석을 잇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104
또 편지로 主事 李相斗에게 뜻을 두어 말하였다.
 
105
“대저 형국은 갈수록 더욱 차마 보지 못하겠는데 어찌 먼 편지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초목처럼 지각이 없고자 하여125) 이 땅은 제가 즐겁지 않고 저 지역은 형이 근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106
李郭山 商興씨가 申鉉斗에게 보낸 편지가 있었는데 그 뜻을 요약하면 이러하다.
 
107
“친구 宋殷景의 말 안에 李九顯과 상의하여 보조금을 다소간 부쳐 보냈다고 하니, 그 마음을 쓰는 것이 미리 절실함을 칭찬할 만합니다. 槐亭의 粮道는 작년 겨울 좌하의 종중에서 두 포대의 벼를 갈라 준 것이 근래 이미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주선하여 집 앞 끝 기슭의 先山을 벌목하여 판 값 1백 10냥으로 쌀을 사서 지낼지니, 이것으로 이해하십시오. 英親王 전하의 혼례는 반드시 조속히 택일하여 보내게 되니, 반드시 감등으로 사면되는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108
○ 상등병사 上原增吉이 嚴原 시가에서 바람을 쐬자고 청하여 川上과 같이 兵門을 나서서 龜岩에 올라 바람과 파도가 넘실대는 것을 보았다. 龜岩은 嚴原의 첫번째 水口의 막는 문이다. 그 높이는 1백 길인데 늙은 거북이가 웅크리고 있는 것과 같았다. 섬은 ‘馬島’이고 바위는 ‘龜岩’이니, 한 섬의 형체는 말로 모양을 이루고, 水口의 문은 거북으로 허파를 삼았으니, 서로 호응하는 이치가 있는가? 아래는 평지인데 嚴原을 빙 돌렸다. 민속을 살펴보며 市井을 구경하였다. 그 방옥의 정결, 꽃과 나무의 배양, 도로의 보수, 담장의 흰 도색은 풍속에 마땅히 숭상할 것이었으나, 순박·古雅·검소·온후한 기풍은 없이 혼란·야박하며 외면을 힘쓰는 태도에서 저 開明의 다스림을 미루어 알 수 있었다. 둘러보기를 다하고 나서 객지 거처로 돌려 향하는데 兵門에 이르지 못하여 인력거 하나가 경비대 안에서 나오고 그 뒤에는 다만 한 사람만 따랐다. 얼굴을 다하여 살펴보니, 바로 이 섬의 司令이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그 位品은 觀察使보다 못하지 않을 텐데 행동의 초솔함이 이와 같으니, 이는 지위에 있는 사람의 위의가 아니었다. 이미 그 지위에 있으면서 길을 가는 단출함이 일반 백성에 지나지 않으니, 이는 백성으로 하여금 그 공덕을 바라보거나 칭송하지 못하게 하고 보기를 시골 사나이와 산골 노인과 같게 하는 것이다. 간혹 辟除하는 일이 없으면 무엇으로 위엄과 공덕을 백성에게 보이겠는가? 위엄은 몸의 의표가 되는 것이고 백성이 본받는 것이다. 공덕은 몸이 행하는 것이고 백성이 교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위의를 보고 사람의 화복을 안다. 군왕의 지위에 있으면서 군왕의 위의가 있은 뒤에 백관이 본받고, 공경의 지위에 있으면서 공경의 위엄이 있은 뒤에 백료가 따르고, 方伯이 방백의 위의가 있은 뒤에 幕府가 순종하고, 수령이 수령의 위의가 있은 뒤에 온 백성이 칭송하고, 심지어 서인도 그 지위에 따라 그 위의가 있은 뒤에 모두 品等과 節次가 있어서 간혹 분수를 넘거나 명분을 넘치는 칭호가 없게 되니, 이것이 이른바 ‘높은 이를 높이며 낮은 이를 낮게 한다’126)는 것이다. 만일 임금이 임금의 위의가 없으면 무엇으로 백관을 다스리며, 공경이 공경의 위의가 없으면 무엇으로 백료를 다스리며, 방백이 방백의 위의가 없으면 무엇으로 막부를 다스리며, 수령이 수령의 위의가 없으면 무엇으로 온 백성을 다스리겠는가? 서민에 이르러서도 그 지위에 따라 그 위의가 없으면 品等과 節次가 없어서 간혹 분수를 넘거나 명분을 넘치는 칭호가 있게 되니, 높은 이를 높이며 낮은 이를 낮게 하는 것이 아니다.
 
 
109
12일 계묘.
 
 
110
川上이 말하기를,
 
111
“어제 저녁에 집에 돌아왔는데 모친이 감기를 앓아 의사를 불러 약을 썼더니 지금 차도가 있습니다. 아내는 覲親하기 위하여 東京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어제 저녁과 오늘 아침은 내가 스스로 밥을 지어 먹었습니다.”
 
112
하므로, 말하기를,
 
113
“조금 괴롭지 않습니까?”
 
114
하였다. 말하기를,
 
115
(“무슨 괴로움이 있겠습니까?”
 
116
하였다. 그 사람됨을 살펴보니, 간난신고를 많이 겪은 사람이었다. 사람이 어려움을 겪은 뒤에 사람의 실정을 안다는 것이 이것이다.)
 
117
○ 등불을 켠 뒤에 어떤 소대장이 봉함 편지 세 통을 전하였다. 하나는 李侙의 당질 李秉曄의 편지였고, 하나는 遯翁이 서울에 있으면서 여러 사람에게 부친 것이고, 하나는 南奎振의 소실의 언문 편지였다. 遯翁의 편지의 뜻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18
“저는 상소하고 겸하여 선생의 남긴 소를 올리고 12일에 다시 定山으로 향할 계획입니다. 선생의 장례는 4월 1일로 택일하여 정하였고, 산지는 鴻山과 臨陂 두 고을 땅으로 점쳐 정하였으나, 아직 하나로 귀결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일자는 두 곳이 아울러 그 날로 확실히 정했다고 합니다. 선생의 남긴 소 및 저의 상소 초고와 아울러 思雲의 탕건을 장례 때에 당하여 釜山商務會社의 護葬員 편으로 부치겠습니다. 閔대감이 풀려났다는 설은 성에 들어온 뒤에 믿을 만한 곳에서 듣고 편지를 썼습니다마는 이는 또한 와전입니다. 아직 平理院에 있어서 이 달에 다시 공판을 한다고 합니다. 下回가 어떠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정미 3월 7일 林炳瓚 二拜”
 
 
119
13일 갑진.
 
 
120
14일 을사.
 
 
121
저녁을 먹은 뒤에 몇 개 봉함 편지가 왔다. 李相斗의 종질 李炳·李熺·李燮 세 사람이 같은 폭에 그의 당숙에게 안부한 것이었다. 이병·이희·이섭은 같은 폭에 또 李侙에게 위로하는 글이 있었고, 李薰도 李侙에게 위로하는 글이 있었는데, 또한 이상두의 종질이었다. 魯炳憙·崔永卨이 같은 폭에 이식에게 슬픔을 물었고, 노병희는 이미 2월에 위로하는 편지를 부쳤었는데 보셨는지 알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魯炳憙·崔銓九전라인·崔永卨·崔鳳韶함경도인가 연명하여 여러 사람의 안부를 묻고, 선생의 산소 자리는 임시 매장지를 鴻山 땅에 점쳐 정하였다고 하였다. 李薰이 그의 당숙에게 안부를 물었고, 安炳卨華儂의 아들이 柳濬根·南奎振·申鉉(斗)에게 안부하는 편지가 있었고, 또 여러 사람에게 안부하는 편지가 있었다. 申禹鉉申輔均의 아들이 그의 아버지에게 편지를 올렸고, 任相鎬가 그의 매부 崔相集에게 안부하였고, 南奎振의 아내가 그의 남편에게 언문으로 안부하였다.
 
122
李炳의 위로 글에 말하였다.
 
123
“炳 등은 머리를 조아려 두번 절하고 말합니다. 홀연히 滄桑의 변화를 만나서 몸이 이미 헤아리지 못할 깊은 바다를 건너가고 재앙이 또한 거듭 혹독하여 先夫人께서 미처 마을 문에 기대어 기다리는 노고127)를 풀지 못하시고 문득 天壽로 하늘에 돌아가시니, 매우 놀라움에 무엇을 아뢰겠습니까? 생각하옵건대 효도하시는 마음이 순수하고 지극하셨는데 풍파가 서로 치는 속의 천둥치는 지역에서 갑자기 곡하며 발을 구르시니, 바로 산도 슬퍼하며 물가도 사모함을 깨닫겠으며 해와 달도 응당 역시 그 때문에 빛이 없을 것입니다. 부모를 그리워하며 울부짖는 슬픔을 어찌 견디실 수 있겠습니까? 일월이 빨리 가서 비와 이슬이 때로 적시고 사변이 풀리지 않았는데, 돌아가서 喪次를 지키는 것도 기일이 아득하니 판자집 일본 대마도에서 거처하는 집에서 잠자지 못해 효도 사모의 통렬함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비록 그러나 하늘이 실로 하시니, 말한들 어찌하겠습니까? 바라옵건대 과거 현인들의 효도하다가 몸을 상해서는 안 된다는 훈계를 본받으시어 슬픔을 억제하고 이치를 따라 자신을 아껴서 애써 거친 밥을 억지로 드시고 예제를 따르소서. 그리고 더욱 연마할 것을 생각하시고 명예와 절개를 온전히 하시어 조용히 그 때를 기다리심으로써 자당님의 평소 의로운 방도의 교육에 부응하시며 천하 후세의 희망을 소중히 하십시오. 炳 등은 산골에 처박혀 있어 이 구차한 생활을 꾸리면서 바다를 건너 뵙고 위로함도 실로 정성을 드리기 어렵고 편지로 위로를 드리니 감히 예가 되지 못합니다. 잠시 이 속마음을 펴서 저의 사사로운 정을 보입니다. 저의 종숙이 생사를 함께 한 것은 역시 이미 다행이나 큰 파도가 사나워서 하늘에 닿도록 벽이 없고, 몸은 이미 나아가지 못했는데다 편지 또한 쉬이 멀어져 지극한 정이 있는 곳에 야박함을 용서하십시오. 바라건대 마음을 함께함이 喪制이신 형씨와 같고 의리를 함께함이 여러분과 같은 사람과 무릎을 맞대고 자리를 함께하여 서로 버티어 가면 꽤 적료하지 않아서 저의 마음을 매우 위로할 것입니다. 勉菴 선생은 文山128)과 함께 귀결되어 바로 일월과 빛을 다툽니다. 선생에게 있어서는 의리를 다하여 다시 남은 유감이 없겠으나 다만 世道의 개탄과 후학의 통한은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상제 형씨에게 있어서는 선생을 잃은129) 애통이 다른 사람보다 더욱 갑절이나 되리니, 어떻게 마음을 가누시겠습니까? 시체가 돌아가는 날에 제공이 곡하며 이별하는 형상이 완연히 눈에 있는 듯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부지불식간에 코가 시큼하며 가슴이 막히게 합니다. 붓을 잡고 종이에 임하여 말을 다하기가 어려워 대략 이렇게 삼가 편지를 드립니다. 살펴 주십시오. 갖추지 못하고 삼가 편지합니다. 정미 3월 3일 李炳·李熺·李燮 등은 편지를 올립니다.”
 
124
李薰의 위로 편지에 말하였다.
 
125
“薰은 머리를 조아리고 두번 절하고서 말합니다. 하늘이여, 하늘이여! 先夫人 喪事는 이 무슨 말이며 이 무슨 일입니까? 병환이 비록 깊었다고 하시더라도 연세가 높지 않고 또 효성이 상제 형씨 같은 분이 멀리 수천 리 떨어진 곳의 풍파 밖에 있어서 돌아와 봉양하지도 못하거늘 어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또 어짊을 쌓기를 좌하의 집안처럼 해도 오히려 손자 하나 안아보는 것도 늦었는데 누가 하루 새벽에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를 줄 헤아렸겠습니까? 이를 일러 “하늘을 믿기 어려움은 천명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130)라는 것인가요? 상제 형씨의 효도와 사모에 있어서는 생각에 마땅히 떠나서 장차 마을 문에 기대어 바라보는 부모님의 마음을 돌아가 위로하시고, 그것으로 하여 문을 닫아 일을 사절하고 길이 오랜 昏定晨省의 즐거움을 누릴 터에 갑자기 뱀이 있는 산과 악어가 있는 물에서 이 부음을 받게 되니, 상제 형씨의 혼백이 놀라고 슬픔에 파리해져 곡하며 발을 구르는 형상은 보지 않아도 헤아려집니다. 저 푸른 하늘이여! 어찌 그 한도가 있습니까? 비록 장수와 단명이 운수가 있고 사변은 무상하니 비록 매우 애통해도 또한 다시 어찌 하겠습니까? 〈거상하다가〉생명을 상해함이 효도가 아닌 것은 과거 현인들이 훈계한 것입니다.131) 바라옵건대 슬픔을 억제하고 이치를 따라 자신을 아껴 효도하다가 상해하는 데에 이르지 마시어 위로 자당의 마음을 위로하십시오. 또 곤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132)는 기회를 기다려서 긴 바람을 타고 큰 물결을 수부고서 소박한 집에 돌아와 곡함으로써 하늘을 다하는 애통을 씻으며 능히 장사치르기를 도모하여 효성을 마치셔야 합니다. 상례 가간을 마친 뒤에는 마침내 조용했던 거문고를 연주하여 빨리 아들을 낳을133) 꿈을 꾸어 남는 경사를 길이 하여 효도를 온전히 하시기를 간절히 빌어 마지않습니다. 薰은 사랑해주시는 은혜를 깊이 입어 정리가 골육에 의탁할진댄 제가 돌이나 나무가 아닌데 감히 등을 돌리겠습니까? 이미 대나무 자리[床笫, 상차]의 곁에서 물을 드렸으니, 자리에 달려가서 皐復134)하는 날에 곡하여야 하겠으나, 멀리 상제 형씨를 생각컨대 원숭이 애끊는 듯이135) 백가지로 얽힐 것이고 생각컨대 효도 사모에 있어 감응함이 반드시 잠이나 꿈에서 놀라실 것입니다. 저는 맹춘에 羅에서 寶로 돌아왔으나 잘 조섭하지 못하여 시절의 병이 들어 거의 귀신과 이웃하였다가 지금 비로소 일어나 앉아 어리어리하게 마치 서리 내린 뒤의 파리와 같습니다. 스스로 괴로움은 많으나 오직 부모님을 예전대로 곁에서 모시고 권속들도 탈없이 지냅니다. 많은 돌보아주심을 펴려 하나 산과 바다가 크게 막히고 형편이 구애되며 형세가 금지되어 달려가서 말로 위로하지 못하고 감히 편지에 의지하여 파격적으로 이 마음을 피력합니다. 바라건대 살펴 주십시오. 갖추지 못하고 삼가 편지합니다. 정미 3월 1일 李薰은 편지를 올립니다.”
 
 
126
15일 병오.
 
 
127
아침에 가랑비가 오고 (무지개가 서산 반에 걸렸고 흰 안개가 종일 하늘을 가렸다. 감금실 남쪽 가에 집 세 칸을 지었는데, 병사에게 이렇게 들었다.
 
128
“일용 잡물을 넣어두는 창고입니다.”)
 
129
(頭註: 南奎振이 아내에게 답장하였고, 申鉉斗가 遯翁에게 답장을 올렸고, 申輔均이 그의 아들에게 답장하였고, 여러 사람이 遯軒에게 연명으로 편지를 썼다.)
 
 
130
16일 정미.
 
 
131
17일 무신.
 
 
132
巳時 쯤에 옷 보따리가 왔는데 같은 보자기에 재종숙의 편지와 丈人 李德享 씨, 처외숙 姜正禹 씨, 金昌鳳 형, 曺秉直 친구의 편지가 왔다. 또 崔萬奉·朴分吉·金寶物 여러 아이들의 편지와 遯翁의 편지 속에 注書 應喆, 주서의 아들 鎭의 편지가 있었다. 오후에 申輔均의 사종숙 昇熙, 재종제 亮均이 편지로 보균에게 안부를 물었고, 金命九가 李侙에게 위로하는 편지가 있었다. 上原增吉과 바다 구석과 산굽이에서 바람을 쐬고 돌아왔다. 萬奉이 돈 5냥을 보내왔는데 반드시 먼저 편지의 때 묻은 옷 한 벌을 부쳐 보내라고 한 것의 운송비일 것이다.
 
 
133
18일 기유.
 
 
134
舍兄에게 올리는 편지를 썼다. 金昌鳳·曺秉直에게 답장하고, 朴分吉·崔奉·金寶物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등기로 우체국에서 부쳤다.
 
135
(頭註: 이 조항은 17일 아래에 있어야 한다.)
 
 
136
遯翁의 편지에 말하였다.
 
137
“날씨와 안부는 여러분의 편지에 실려 있으니 겹쳐 쓸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이 길을 가는 이유는 오로지 庇仁을 가기 위한 것입니다. 鐘川에 이르러 산천을 구경하고, 미리 사람을 보내어 그대 집의 편지를 싸서 부치고, 曺秉直의 집에 가서 저물기를 무릅쓰고 도착해 만나겠다고 통고하였더니, 曺는 말하기를 ‘일본 순사가 아침과 저녁으로 내왕하여 읍에 이르지 못할 뜻으로 언급하고, 편지를 가지고 그대의 집으로 간다 운운하고, 나는 鐘川에서 머물러 기다리면 마땅히 가서 방문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매우 창피하였습니다. 그날 板橋에 이르러 자고 어제 이 주점에 이르렀습니다. 網巾은 우리 아들이 이미 사 놓은 것이므로, 이에 부쳐 보냅니다. 나머지는 이만 그칩니다. 정미 2월 18일 硏下 林炳瓚”
 
138
답장하여 올렸다.
 
139
“막혀 그립던 나머지 편지를 받자옵고 더욱 송구하며 감사드립니다. 객지 중에 건강이 편안하사 손상이 없음을 알게 되어 멀리서 쏟는 정성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문하생은 자며 먹는 것이 그전대로이어서 사사로운 바에 다행입니다. 아뢰옵건대 曺친구가 나와 맞이함이 늦어진 것은 잠깐의 실수이지 그의 본심이 아닙니다. 그 일의 형편을 생각컨대 그 때에 까닭없는 재앙136)이 많아서 혐의에 얽히는 바에 마구 걸리는데 귀가 담장에도 붙어 있어 그 실마리가 없지 않고, 또 舍伯과 함께 나가 맞이하려 하였으니 어른을 존경하는 예에 태만함이 아닙니다. 曺친구가 보낸 편지를 보면 ‘이 인생이 이 세상에서 몸을 둘 길이 없으니, 무슨 면목으로 후일에 마주 대하겠습니까?’라고 하니, 저 사람의 부끄러워함이 심합니다. 굽어 살피시기 바랍니다. 망건은 점검해 받았습니다. 나머지는 갖추지 못합니다. 굽어 살펴주시옵소서. 편지를 올립니다. 정미 3월 18일 문하생 文奭煥은 두번 절하고 답장을 올립니다.”
 
140
林注書가 말하였다.
 
141
“해와 달이 바뀜에 그리움이 평소보다 갑절이나 됩니다. 답장을 받자옵고 감격함이 매우 큽니다. 다시 여쭙건대 객지에 건강이 모두 편안하심이 과연 온 편지대로입니까? 그리움에 어느 때고 마음 가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나는 보름께에 다시 沃川 고향으로 성묘를 하고 곧바로 기선을 타고서 覲行을 하려 할 때에 가친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집으로 돌아오니, 온 가족이 기뻐함은 말로 형언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다만 지난 섣달 25일에 庶母께서 돌아가시어 애통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나머지는 뒤에 편지하겠습니다. 갖추지 못하고 답장을 올립니다. 정미(1907) 2월 11일에 生 林應喆은 절하고 답장합니다.”
 
142
(頭註: 昏定晨省하시는 林注書께) 답서에 말하였다.
 
143
“풍상의 뒤에 尊大爺(상대의 할아버지)께서 봄과 함께 고향에 돌아오시어 온 집에 화기가 아마 끝까지 닿았으리니, 밤낮으로 우러러 봅니다. 이 때에 편지를 받자와 기뻐 뛸 만하고 위로됨은 춤출 만합니다. 건강이 모두 편안하시며 춘부장의 기력이 왕성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멀리서 위로가 됩니다. 나는 몸의 모습이 예전보다 낫고 집의 편지도 근래 얻어 보아 다행입니다. 존하의 어머니 상사는 듣고서 시큰하며 싸늘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나머지는 뒤에 편지하겠습니다. 갖추지 않고 답장합니다. 정미 3월 18일 生 文奭煥은 절하고 올립니다.”
 
144
林秀才의 편지에 말하였다.
 
145
“鎭은 머리를 조아려 재배하고 말합니다. 지난 섣달에 尊座께서 내려주신 물건을 받자옵고 감격함이 어찌 다함이 있겠습니까? 객지 건강이 큰 손상은 없으시며 고향의 안부는 계속되는지요? 그리움을 견디지 못하옵고 또 그립습니다. 罪生137)은 다행히 천우신조를 입어 할아버지[王親]께서 집으로 돌아오시어 기쁨이 바라던 것 밖에 나오고 온 집안이 기쁘게 경사로워합니다. 그러나 근간에 庶祖母 喪變을 만나 애통을 감당하지 못함이 많습니다. 나머지는 건강이 모두 편안하고 고향에 빨리 돌아가시기를 빕니다. 갖추지 못하고 편지를 올립니다. 정미 2월 11일 罪生 林鎭은 재배하고 편지를 올립니다.”
 
146
편지 끝에 말하였다.
 
147
“보내주신 새로운 시는 상제[棘人]가 화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나, 만 리에 정을 보내오니 답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졸렬함을 잊고 지어 올리오니, 바로잡아 주기를138) 기다립니다.”
 
 
148
東風吹萬里  동풍이 만 리에 불자
149
尺素到山中  편지가 산 속에 이르렀네.
150
明年春色早  명년에 봄 빛이 빠르리니
151
好伴故鄕行  사이좋게 짝지어 고향으로 가리
 
 
152
이것은 지난 겨울에 지은 것이므로 그대로 보냅니다.”
 
153
“林秀才 상제 자리에서 돌려 보십시오. 격식을 생략하고 말합니다. 이전에 이미 명성이 익었고 지금 또 편지를 받으니, 감명됨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전에 王爺(상대의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는데, 존좌 역시 그러하니, 나같은 어리석음으로 어찌 이러함을 얻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편지에 의하여 重省139)이 편안하시고 상제의 상태가 버티어 보전하심을 알게 되니 멀리서 위로가 됩니다. 저는 한결같이 먼저 존좌의 王爺를 이별할 때의 모양과 같을 뿐입니다. 보내주신 시는 진실로 이른바 ‘모과를 던져주자 구슬로 갚음을 받았다’140)는 것이니, 부끄러움과 감사함이 아울러 지극합니다. 나머지는 그만두고 갖추지 않고 답장합니다. 정미 3월 18일 文奭煥은 머리를 조아립니다.”
 
154
金昌鳳의 편지에 말하였다.
 
155
“산이 몇 겹이며 물이 몇 굽이입니까? 땅은 가깝되 사람이 멀어서 여러 해 막힌 회포는 근래에 모두 형용할 수 없습니다. 삼가 근래에 객지 중의 건강이 연이어 편안하온 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생각컨대 물과 흙이 같지 않아 잠과 음식이 손상을 받지 않을 수 없을 테고, 국가를 우려하는 마음과 집을 생각하는 회포가 어느 때인들 그치겠습니까? 위로됨과 함께 그립습니다. 저[生]는 작년 이후로 집안 일이 점점 파손되어〈밥을 못 지어〉시루에 먼지가 앉고〈문짝이 없어〉문에 자리를 치니141) 진실로 나의 오늘을 준비한 말입니다. 아뢰옵건대 어찌하면 행여 얼굴을 뵙고 대화할 예를 가지겠습니까? 항상 한번 나아가서 뵙고자 하오나 곤궁을 굳게 지키는 데에 구애받아 뜻대로 할 수 없으니, 탄식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神明이 돕는 바에 돌아옴이 빠르기만 빌 뿐입니다. 지난 가을에 萬奉의 편지와 함께 동봉하여 부쳤습니다마는, 다만 만봉에게만 답장하시고 生에게는 회답이 없으시니, 이전의 편지에 혹은 실례한 것이 있어서입니까? 도리어 매우 송구스럽습니다. 나머지는 객지 건강이 때에 따라 편안하시기를 빌면서 이만 줄입니다. 정미 2월 그믐날 生 金昌鳳 배상”
 
156
답장하여 말하였다.
 
157
“지난 가을에 편지를 받고 즉시 답장을 써서 萬奉의 편지와 동시에 우체국에 부치고 회답을 기다렸으나 끝내 편지가 없으므로, 저[生] 역시 지금껏 의아해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근래에 편지 한 통을 부쳐 존좌의 안부를 탐문하려 하다가 아직도 지체하고 못한 것은 혹은 일을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조롱을 받을까 우려하여 그러한 것이지 生이 소홀히 하여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또 편지를 받고 서글픔과 기쁨이 매우 교차되어 작은 편지쪽으로 그 경개를 형용할 수 없는데, 하물며 존좌의 꾸짖음이 이와 같이 정중하시니, 한편 감사하고 한편 부끄러워하며 평소 정의를 느낍니다. 봄이 따뜻한데 靜體가 연이어 편안하시며 온 집안이 고루 안정됨을 알았습니다. 그 마을의 사우들도 모두 건강합니까? 그리워하면서 멀리서 빌어 마지않습니다. 生은 경망하게 무모한 행위를 하여142) 이러한 발걸음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 또한 형세이며 운수이니, 한탄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전에 水土가 맞지 않고 현기증까지 겸하여 괴롭게 날을 보내다가 근래에 약물에 힘입어 전보다 조금 나았으니, 혹은 개인적으로 다행이라고 할 것이겠지요? 일지와 책자를 대략 찾아보니, 거의 이러한 형상을 살필 수 있습니다. 말씀하신 집안 일이 점점 파손된다는 것은 조화옹이 미리 정한 것이어서 사람이 힘으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거늘, 하물며 친척의 굶주림과 추위를 秦·越나라처럼 보는143) 세상이겠습니까? 대신 안타까워하고 또 한탄스럽습니다. 나머지는 이만 줄이고 답장합니다. 정미 3월 18일 生 文奭煥 拜首”
 
158
(頭註: 이 조항은 林어른 편지 위에 있어야 한다.)
 
159
형[舍伯]에게 답해 올리는 편지에 말하였다.
 
160
“지난 달 29일에 보내주신 편지는 이달 10일에 받자옵고 봉독한 나머지 감격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에 의지하여 근래 건강이 모두 편안하시고 온 집안이 손상이 없으시며 처가도 경계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니, 아울러 그리우면서 저의 정성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舍弟(저)는 근래 상황이 전에 비하여 조금 건강하오니, 이 이외에 무엇을 아뢰겠습니까? 林어른께서 庇仁에 왕림하심은 舍弟와 함께 고생한 정리, 그리고 舍伯과 한번 단란하게 토론을 가질 뜻을 전적으로 생각하였으므로, 이와 같이 굽혀 고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이 매우 모호하여 끝내 공허히 저버리게 되어 멀리서 한탄합니다. 그러나 彌勒堂에 도착해본 뒤에는 저의 마음에 오히려 풀어짐이 있었습니다. 林어른이 귀국할 때에 羲易 한 부를 남겨주고 힘써 읽도록 면려하였으므로, 혹은 펼치며 혹은 외어가며 객지 중의 세월을 보내니, 이는 하느님이 시켜서 그러한 것이겠지요. 바라건대 형님께서는 농사지으며 땔나무하는 속에 은거할 뿐이니, 이 밖에 다시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이치는 반드시 비색함이 다하면 통함이 이르고 깎임이 다하면 회복되는 때가 있으니, 헤아리십시오. 돌아갈 기일이 멀지 않은 듯하나 또한 기필할 수는 없습니다. 여름 옷은 저[弟]의 뒷날 올리는 편지를 기다려 부쳐 주십시오. (勉菴 先師의 장례는 다음달 1일에 거행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산소 자리는 鴻山 산소 땅이라고 합니다. 그날 형님께서는 당연히 나아가서 한번 위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뜻을 또한 이미 曺친구에게 알렸으니 혹은 함께 가시겠습니까?) 나머지는 이만 줄입니다. 굽어 살펴주십시오. 글을 올립니다. 정미 3월 18일 舍弟 奭煥은 재배하고 답장을 올립니다.”
 
161
“지난 섣달에 편지를 받고 어느덧 계절이 바뀌어144) 달이 또 두번이나 이지러졌습니다. 그리운 회포를 어느 때에 풀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林樂安 영감과 安大人 두 분이 환국하시어 먼저 베푸시는 정중한 인사를 받았으나 저의 보잘 것 없는 몸으로 마침내 내려주시는 경계를 저버렸으니 송구하며 민망함이 얼마나 지극합니까? 건강이 객지에 계시면서 근래 어떠하신지요? 그리워 애타면서 매우 기원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少弟(저)는 고달픈 한 몸으로 公門에 분주하나 감옥에 갇힌 것과 매일반이니, 가련하며 한탄스럽습니다. 오직 부모님과 식솔들이 별로 놀랄 만한 일이 없는 것이 다행입니다. 아뢸 것은 이번 16일에 林樂安 영감이 과연 여기를 오게 되었는데, 근래 먼저 심부름꾼 2명을 보내어 우리 마을에 오시겠다고 통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온 심부름꾼이 전한 것은 매우 애매하였고, 이곳에 주재하는 두 나라의 순경과 관리에게 의심을 받을 듯할 염려가 있었으므로, 弟가 중도에서 맞이하겠다는 뜻으로 온 심부름꾼을 돌려보내고 즉시 존좌의 집으로 가서 우리 兄의 가정 편지를 찾아보고서야 해당 인원이 같이 고생하던 분의 집 식구를 위로차 방문한 실상을 알았습니다. 이에 즉시 鐘川店으로 달려가니 이미 定山으로 떠났다는 말을 듣고 존좌의 伯氏丈을 함께 모시고서 어둠을 무릅쓰고 나아가 새벽에 板橋에 이르렀으나, 이미 길을 떠나 멀리 가서 따라가도 미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므로 弟는 헛탕쳐 돌아오고 존좌의 백씨 어른은 정산 땅까지 따라가서 그 일행을 만나 대화를 다소 하고 부친 편지를 겸하여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에야 싸서 보냈습니다. 弟는 본래 보잘 것 없는데도 겸하여 먹이시고 일시에 알아주셨으나 〈저는〉義를 잊는 데에 이르러 마침내 멀리서 찾아오신 귀빈을 공연히 기다리게 하고 돌아가는 데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이 삶이 이 세상에 몸 둘 곳이 없는데 무슨 면목으로 우리 兄을 뒷날 보겠습니까? 편지를 쓰려 하니 땀이 젖어 아뢸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나머지는 우리 형 댁의 편지에 있습니다. 이만 줄이고 편지합니다. 정미 2월 29일 少弟 曺秉直 재배”
 
162
답장에 말하였다.
 
163
“지난 섣달과 지금 정월에 두 차례 편지를 부치고 답장을 바라기를 목마른 말이 샘에 달려가듯이 하였으나 마침내 편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弟의 뜻에, 이 형도 세상에 물들었거늘, 하물며 弟와 같은 이미 버려지며 또 버려진 자를 생각할 것이 없다고 하고 평범하게 보아 지나치는 뜻이 있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만 마음에 섭섭하고 답답함을 품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弟의 개구리 같은 생각에 헤아린 것이지 어찌 兄의 바다 같은 도량에 이와 같이 하시겠습니까? 이 때에 편지를 받아 매우 감사하면서 슬픔이 잇따랐습니다. 그러나 온 편지는 이전 편지에 대한 것만 말하였고 새 편지는 언급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중도에 분실된 것입니다. 林丈이 전적으로 庇邑에 간 것은 처음에는 弟를 위함이고 다음은 兄을 위하여 그러하였습니다만, 어떤 사람은 ‘弟를 위한다는 것은 옳지만 형을 위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林丈이 여기에 감금되어 있을 때에 형의 편지를 볼 때마다 칭찬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세속의 무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혼란한 세상에 혐의를 피하지 않고 능히 이와 같이 하니 내가 환국하는 날에 만나 대화하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왕림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일이 뜻과 같지 않아 사람으로 하여금 실망케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형세이니 어찌하겠습니까? 형에 있어서는 혐의를 피하며 마땅함에 처할 방도가 없는 것은 아니나 林丈의 편지를 보면 바라던 바를 크게 잃었다 합니다. 林丈은 모르겠습니다만 전하는 사람의 말만 듣고 한쪽의 말만 의혹을 일으킨 소치입니까? 비록 그러나 弟의 일 때문에 노고를 끼침이 오히려 많으니 弟가 어찌 이를 말하겠습니까? 모두 弟의 집이 넉넉하지 못하여 그렇게 된 것이니 형께 무슨 허물이 있습니까? 勉菴 先師의 장지는 鴻山 땅으로 정하였고 날짜는 다음달 1일에 거행한다고 합니다. 이 때에 형께서 비록 긴한 볼 일이 있더라도 행여 틈을 타서 저의 백씨, 중씨 중에 한 분과 장지에 달려가 위로하신다면 이는 한번 가서 둘을 얻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저의 백씨, 중씨 중에 연고가 있어서 참석하지 못하면 저의 재종숙과 함께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뜻은 이미 舍伯에게 여쭈었습니다. 경건히 여쭙건대 늦봄에 부모님 모시고 건강은 이전보다 결함이 없으며 萱堂(자당님)의 건강도 큰 복을 받아 형통하신지요? 나머지는 이만 줄이옵고 답장합니다. 정미 3월 18일 弟 文奭煥 拜拜”
 
164
“지난 15일에 편지를 올렸는데 생각컨대 보셨는지요? 회포가 울적하던 차에 뜻밖에 정월 14일에 보내주신 편지를 2월 16일에 받자옵고 읽기를 재삼하니 기쁜 마음이 기운을 타고 날으는 듯하였습니다. 또 듣건대 林樂安 영감과 安先生 두 분이 오시겠다는 말씀을 들었으므로, 曺어른께 탐문하였는데 두 분이 鐘川에 머문다고 하여 미리 심부름꾼을 曺어른의 집에 보냈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나아가 뵙겠다는 뜻을 온 심부름꾼에게 알려 보냈다고 합니다. 이를 듣고는 매우 기뻐서 즉시 師伯氏145)와 曺어른을 모시고 종천에 이르러 탐문하여 보니, 점심을 재촉해 먹고는 이미 定山 長久洞으로 출발하였다고 합니다. 송구하고 부끄러운 생각이 마음에 가득하였으나, 형세상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해가 저물려 하여 師伯과 曺어른이 뒤따라 板橋에 가니 이미 지나갔다고 하였습니다. 曺어른은 사세의 부득이함에 구애되어 집으로 돌아갔으나, 師伯은 기어코 만나보려 하여 彌勒堂 酒店에 달려가서 그 두 분을 만나 낱낱이 사례하고 先生의 객지 중 안부가 어떤지 매우 잘 알게 되었습니다. 林樂安 영감은 서울로 향하고, 安先生은 본가로 돌아갔다고 운운합니다. 문하에 있는 동자인 저는 비록 뵙지는 못하였으나 기쁨은 매우 컸습니다. 이 때에 객지 중에 道體候는 근간에 약을 안 쓸 만큼 정상을 회복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여러분들은 안녕하신지요? 먼 곳에서 위로되옵고 제 정성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문하의 저는 부모님 모시는 일이 대략 편안하와 다행입니다. 그리고 선생께서 돌아오시는 날이 가까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나머지는 건강이 모두 편안하시기를 비옵고 이만 줄입니다. 글을 올립니다. 정미 3월 3일 門下童 崔萬奉·朴分吉은 재배하고 답장을 올립니다.”
 
165
답장하였다.
 
166
“지난 29일에 부친 편지를 근간에 보았는가? 온 편지는 매우 자세하여 위로됨을 이루 다 형용할 수 없네. 林樂安 영감이 그 곳에 가신 것은 전적으로 나[硏下] 때문이었는데 호사다마하여 이 희망을 허탕으로 저버렸으니 한탄스럽네. 다만 그대들에게 부탁할 것은 古書를 부지런히 읽고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않는 것이네. 陳平이 반디불을 주워 공부한 것과, 車胤이 달빛을 따라 공부한 것, 司馬公이 둥근 목침으로 공부한 것, 蘇季子가 머리칼을 매어달고 공부한 것은 모두 후학이 경계하여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네. 사람으로서 옛날에 거울삼지 않으면 이전에서 도움받을 것이 없고 뒤에 바랄 것이 없네. 온 편지를 살펴보니, 근면이 나태를 이기지 못한다는 약간의 뜻이 있네. 반드시 백배 노력하여 여기에 애써서 학문을 힘쓰도록 하게, 瑚璉에 한 점 티내기와 杞梓에 한 자 썩게 하는 짓을 하지 말게. 맹자가 말하기를 ‘학문의 길은 다름이 없고 그 풀린 마음을 찾는 것일 뿐이다.’146)라고 하였네. 그대들이 오늘날 가장 강렬하게 살필 것은 오직 이것인데, 선배들의 터득함도 모두 여기에서 터득한 것이고, 후배의 그르침도 모두 여기에서 그르친 것이네. 그대들은 마땅히 면려하고 경계할지어다. 이 이외에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나머지는 이만 줄이네.”
 
167
金寶物에게 답장하였다.
 
168
“지난 달 그믐 무렵에 편지를 부쳤는데 근간에 보았는가? 밤낮으로 그리워도 자취를 이을 수 없거늘 하물며 그대가 계속하여 편지를 망망적적한 중에 보내줌이겠는가! 그것에 의해 늦봄에 부모를 모시는 몸이 편안하며 춘부장 기력도 한결같이 편안하시다는 것을 알게 되어 위로됨이 또한 한량없네. 雲樵는 그전 모습대로라네. 다만 바라는 것은 독서를 잘하여 남의 지껄임에147) 誤導를 당하지 않는 것이네. 기어코 마음 속에서 맹세하여 완성된 그릇을 이루려고 하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한 움큼 물이 강과 바다를 이루며 한 줌 흙이 산악을 이루고, 쇠는 풀무에 들어가지 않으면 종을 이룰 수 없고, 나무는 먹줄을 받지 않으면 큰 집을 꾸밀 수 없으니, 학문을 진취하는 공부도 이와 같다네. 이것으로 기준을 삼아 때마다 날마다 독실하게 하게. 나머지는 더 언급하지 않겠네.”
 
 
169
3월 19일 경술.
 
 
170
3월 20일 신해.
 
 
171
(頭註: 새로 들어온 조련병이 오늘에 와서 모두 물러가고 옛 병졸 수십 명만 남겨두었다.)
 
172
酒井玉一과 뒷산에 올라가서 御巖津을 바라보았다. 이 섬은 구름 사이에 아득하여 있는지 없는지 하는 속에 둘레가 십리라고 한다. 대마도의 동남에 있는데 거리가 물길로 천리이고, 정남방에 여러 산이 하늘가에 은은하였다. 이것은 馬關 등의 땅인데 역시 물길로 천리이다. 동쪽은 일본 東京이고, 서쪽은 우리나라 부산 등의 땅이라고 하는데, 높은 산이 서쪽에 있어서 멀리 바라볼 수 없었다. 남쪽은 馬關·博多·九州 등의 땅이고, 그 밖은 中原의 江南 등의 땅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아마 吳·越 근처인지 알지 못하겠다. 북쪽은 일본 北海道 등의 땅이다. 평지로 내려와서 한 곳에 이르러 중문으로 들어가니 방이 말끔하였고 꽃이 연못에 피었다. 酒井에게 들으니, 이것은 士族의 집인데 開化 이전에 벼슬했던 사람이 개화할 때를 당하여 뜻을 굽히지 않았으므로 폐기를 당한 것이다.
 
 
173
3월 21일 임자.
 
 
174
川上이 말하였다.
 
175
“금일은 일본 弘法大師의 생신이어서 金剛을 두루 비친다고 하니, 이는 불법에 통달한 사람의 말입니다.”
 
176
“우리들이 어제 어느 곳에 노닐었는데 그 집은 본래 士族이 살던 곳이라 합니다.”
 
177
川上이 말하였다.
 
178
“저기는 본래 對馬藩主 宗重望이 살던 곳인데 明治 이후로 폐기를 당하였으므로 여기에 살았습니다. 그 수년 뒤에 東京으로 불려가서 별처에 두어 은둔한 사람이 되었으니 감금과 일반이었습니다. 지금 그 사람이 죽고 그 아들이 伯爵이 되어 동경에 있어서 그 집은 주인이 없습니다. 이 警備營도 모두 명치 이후에 모두 옛 건물을 헐어버린 터에 새로 설립한 것입니다.”
 
 
179
3월 22일 계축.
 
 
180
3월 23일 갑인.
 
 
181
병사가 말하였다.
 
182
“명일에 3백 명을 불러 경비영에 넣어 조련하고 21일 이후에 물러갑니다.”
 
183
또 말하였다.
 
184
“러일전쟁 이후 지금에 와서 다시 外兵을 볼러모아 조련합니다. 전에 이른바 ‘매년 조련한다’는 것은 과장하는 사람의 말입니다. 지금 일본과 러시아가 서로 전쟁한 뒤에 처음 모인 것은 필시 진정이나 그 속에 연고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85
3월 24일 을묘.
 
 
186
재종숙과 장인[岳丈], 姜正禹 씨의 편지, 그리고 聘母와 室人의 편지에 답장하였다.
 
187
○ 申時 경에 병사 園田茂作이 論語 한 부를 가지고 와서 보게 하자, 말하였다.
 
188
“팔기를 원하시오?”
 
189
“아닙니다.”
 
190
“무엇을 베풀려 하오?”
 
191
“다만 감금된 여러분들을 위하여 왔지 팔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192
“줄 곳을 묻지는 않겠으나 실로 감사하오.”
 
193
“이 聖經을 보면서 객지 감정을 부치시면 바로 이별하고 떠나셔도 그 뜻을 숭상할 수 있습니다. 다스려짐과 어지러워짐은 진실로 세상 도리의 정상인데, 다스려지면 聖人의 도가 시행되고 어지러워지면 성인의 도가 쇠퇴하는 것은 또한 이치입니다.”
 
194
川上에게 들었는데 말하기를, “일본국은 開化 이전에 윗사람부터 아랫사람까지 성경을 읽는 자가 많았습니다. 개화 이후로 성경을 폐기하고 한갓 서양의 어학과 국문만 힘써서, 성경이 대부분 벽을 바르거나 휴지로 되었고, 혹은 그 사이에 높은 누각에 묶어두는 것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지금 이 사람의 논어는 진실로 오래된 책인데 얼마나 아꼈던지 상자에 보관하다가 나에게 드러내어 권장하니, 그 사람의 뜻은 진실로 가상해 할 만하다.
 
 
195
3월 25일 병진.
 
 
196
川上이 들어와서 말하였다.
 
197
“상등병 中島高가 나에게 말하기를 ‘공 등과 밖에서 바람을 쏘입시다.’ 하니, 마음에 어떻습니까?”
 
198
“진실로 바라는 바이오. 최고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서 朝鮮을 바라봄이 소원이오.”
 
199
“이것은 본대에서 허락하지 않아서 할 수 없습니다.”
 
200
“어찌하여 허락하지 않소?”
 
201
“군사기밀이니, 외국 사람에게 지형을 살피게 할 수 없습니다.”
 
202
“그럴 듯하오.”
 
 
203
3월 26일 정사.
 
 
204
병정 한 사람과 川上과 함께 밖에 나가서 소요하다가 한 곳에 이르렀는데, 돌 기둥이 나란히 우뚝하였고 비껴서 돌 들보를 눌렀는데 들보 위에는 ‘乙宮神社’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안에 들어가자 몇 간 집이 있었고 벽 위의 좌우에는 畫板이 많이 걸려 있을 뿐 별로 볼만한 것이 없었다. 돌아와 宗重에 이르러 옛집을 바라보니, 쇠 한 덩이가 뜰에 서 있었다. 川上에게 물었다.
 
205
“이것은 무슨 물건이오?”
 
206
“대포의 탄환입니다.”
 
207
듣고 이상히 여기고서 그 크기를 재어보았다. 둘레는 네 손을 쥐어 잡고서 네 손가락이고, 길이는 발에서 배꼽까지였는데, 이것은 이른바 금일 壞山砲의 탄환이라는 것이다. 川上이 말하였다.
 
208
“이 섬은 鷄知砲臺 위에 이와 같은 대포를 두었다고 합니다.”
 
209
물건됨은 매우 독한데 이것이 하늘의 운수를 되돌릴 수 있겠는가! 운수에 어찌 하겠는가!
 
 
210
3월 27일 무오.
 
 
211
정 무렵에 군대 안에서 호각 소리가 한번 나자 병정들이 혼잡하게 각각 복장과 기계를 갖추고 앞을 다투어 밖으로 나가서 마치 변고가 있는 듯 하였는데 시각이 지나서야 그쳤다. 우리들은 혹은 말하기를 ‘사고가 있다’고 하고 혹은 말하기를 ‘夜警이다’라고 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川上이 들어와 말하였다.
 
212
“새벽녘에 수상한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213
“있었소.”
 
214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군인을 경계시키며 뜻밖을 대비하고, 또한 그 군인들이 진영에 있지 않고 밖에 나가 교활한 짓을 하는 자를 단속하는 것입니다. 만일 사변과 화재 등에는 모두 이러한 예를 씁니다. 사변의 큰 것은 예컨대 러시아와 외국 군함이 우리 국경을 침입한 경우 특별히 이러한 예를 씁니다.”
 
215
“그렇군요.”
 
 
216
3월 28일 기미.
 
 
217
병사 한 사람이 와서 뜰 밖에 서 있었다. 책상 위의 論語 한 권을 들고 몇 章을 보아가다가 그치고 물었다.
 
218
“이 뜻을 아시오?”
 
219
“그 뜻을 대략 압니다.”
 
220
“귀국에 이 책을 읽는 사람이 많소이까?”
 
221
“없습니다.”
 
222
“어찌하여 읽지 않습니까?”
 
223
“다만 일본 글[和文]만 익혀서입니다.”
 
224
“和文을 이 책에 견주면 어느 것이 소중합니까?”
 
225
“禮는 이 책이 소중합니다.”
 
226
“소중한 줄 알면서 읽지 않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227
“다만 학교의 학문만 익혀서입니다. 開化에 이른바 語學과 外國學 등입니다.”
 
228
“이 또한 仁義의 말이 있습니까?”
 
229
“그렇습니다.”
 
230
“비록 仁義라고 말하더라도 어찌 聖經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231
“그렇습니다.”
 
232
“옛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이는 성인의 법이 아니면 할 수 없었습니다. 성경은 바로 법이 갖추어진 것입니다.”
 
233
“그렇습니다.”
 
234
“君의 소견으로 말한다면 일본은 文을 숭상합니까? 武를 숭상합니까?”
 
235
“무를 숭상합니다.”
 
236
“무만 숭상하면 뒷날 폐단이 없겠습니까?”
 
237
“마땅히 文武를 겸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238
3월 29일 경신.
 
 
239
川上에게 물었다.
 
240
“어제 부탁한 논어 값을 그 주인에게 물어 보았소?”
 
241
“아직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242
“공은 이 책을 읽었소?”
 
243
“아직 읽지 않았습니다. 일본과 이 섬에 나이가 60~70이 넘은 노인들은 이 책을 읽은 사람이 이따금 있습니다. 그 이후 사람들은 (明治 이후로) 이를 읽은 사람이 아주 없습니다.”
 
244
“이 책이 처음 온 것은 어디에서 하였소?”
 
245
“전수한 유래에 대하여 물으니, 조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246
“조선도 전일에 비하면 오히려 태반이나 감소하였소. 그러나 읽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만약 읽는다면 聖經에 불과한 것이오.”
 
247
“책만 조선에서 유래했을 뿐만 아니라 農工의 일, 布帛의 직물, 음식의 절차와 무릇 백가지 용도도 모두 조선에서 얻은 것입니다. 금일에 와서는 조선 사람이 일본에 들어와서 일본 사람이 된 이가 많습니다.”
 
248
“우리나라도 임진난에 일본 사람이 조선 사람의 성씨로 된 사람이 많은데 우리 고향에도 한두 명이 있소이다.”
 
249
“일의 이치가 마땅히 이와 같을 것입니다.”
 
250
○ 저녁을 먹은 뒤에 병정 한 명이 동편 뜰 아래에 앉아 철사를 끊어서 물건을 거는 갈고리로 하였다. 柳濬根·申輔均이 나가서 함께 말하였는데, 병정이 말하였다.
 
251
“나 역시 조선 사람입니다. 경상도 밀양에 살았는데 세 살에 부모를 잃고 동래의 일본 사람에게 의탁하였다가 이 섬에 들어와서 지금 병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풍속이 마음에 맞지 않아서 장차 부산으로 나가려 합니다.”
 
252
저 사람이 진정 이 마음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부끄러운 마음이 있어서 잠시 외면을 꾸미는 것인가?
 
 

 
253
각주)
254
73)  10首는 10韻의 잘못으로 보인다. 읊은 시는 오언에 압운이 10운이다.
255
74)  군사 일로 나라에 보답함을 말한다. 한나라 終軍이 긴 끈으로 南越王을 잡아서 대궐 아래에 데려 오겠다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다.(「漢書」 終軍傳)
256
75)  楊朱가 岐路에 당하여 인간의 본성이 같아도 행위의 인과에 의하여 달라짐에 감개하여 울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淮南子」 說林訓)
257
76)  못난 것을 본받음을 말한다. 東施는 미녀 西施와 상대하여 말하는 越나라의 추녀이다. 서시가 가슴을 앓아 찡그리자 그것을 예쁘게 여겨 동시가 서시를 본받아 가슴을 움켜잡고 찡그렸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莊子」 天運). ‘嚬’은 ‘顰’·‘矉’으로도 쓴다. 여기서는 남의 시를 본받아 지음의 겸양어로 쓰였다.
258
77)  진나라 臨沂 사람으로 24孝 중의 한 사람이다.
259
78)  원문 ‘齎’는 ‘齋’ 또는 ‘齊’의 오자이다.
260
79)  멀리…판가름난다: 원문 ‘遠使而觀忠 近使而觀敬 煩使而觀能 約使而觀操 卒問之而觀智 久與之而觀信 委之以時而觀仁 告之以危而觀節 醉之以酒而觀財 雜之以處而觀德 以此十徵觀人 則人之賢否立判矣’는 「莊子」(列禦寇)에 “遠使之而觀其忠 近使之而觀其敬 煩使之而觀其能 卒然問焉而觀其知 急與之期而觀其信 委之以財而觀其仁 告之以危而觀其節 醉之以酒而觀其則 雜之以處而觀其色 九徵至 不肖人得矣”라고 하여, 9가지로 되어 있다.
261
「마도일기」에는 ‘約使而觀操’가 더 있고, 글자의 출입이 있는 바 ‘久與之而觀信’은 「장자」의 ‘急與之期而觀其信’(급히 약속을 하고서 그 신의를 살핀다.)이고, ‘委之以時’는 ‘委之以財’(재물로 주고)의 잘못이고, ‘觀財’는 ‘觀則’(법칙을 살핀다.)의 잘못이고, ‘觀德’(덕성을 살핀다.)은 「장자」에 ‘觀其色’(그 남녀관계를 살핀다.)으로 되어 있다.
262
80)  厄運을 말한다. 百六은 106년마다 오는 액운이고, 陽九는 陽厄 5와 陰厄 4를 합한 액수이다.
263
81)  堯임금의 신하. 아버지가 우물을 파게 하고 위에서 흙을 덮었으나 옆에 비밀 통로를 만들어 두었다가 빠져 나오고, 또 아버지가 지붕을 수리하게 하고 불을 질렀으나 두 개 삿갓으로 가리고서 내려왔다.(「孟子」 萬章 上)
264
82)  은나라 사람. 紂의 난국에 은둔하여 생선과 소금 장사를 하였다.(「孟子」 告子 下)
265
83)  은나라 사람. 高宗이 꿈에 성인을 보고 관리에게 찾게 하여 傅巖에서 담틀로 담을 쌓는 일을 하고 있던 그를 불러다가 재상으로 삼고 傅를 氏로 삼게 하였다.(「史記」 3권)
266
84)  후한 光武帝 때 맹장 馬援의 칭호. 월남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광무제는 복파장군 마원을 보내어 정벌하였다. 돌아올 때 율무를 싣고 와서 곧 죽었는데 보석을 싣고 왔다고 비방당하였다(「後漢書」 馬援傳). 전한 이후 큰 공을 세운 장군에게는 복파장군이란 칭호가 주어졌다.
267
85)  양성(陽城): 당(唐)나라 사람. 덕종 때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냈다.(「舊唐書 192권」)
268
86)  한나라 사람. 집안 대대로 양잠을 하여 누에 발로 일하였다. 뒤에 呂氏들이 발호할 때 이들을 목베어 한나라를 안정시켰다. 文帝 때 右丞相에 이르렀다.(「史記」 57권)
269
87)  한나라 사람. 도살과 술장사를 하다가 高祖를 도와 한나라를 세웠다. 右丞相을 지냈다.(「史記」 95권)
270
88)  춘추 제나라 大夫. 밝은 임금, 곧 제환공을 만나기 전에 소를 먹이는 등 천한 일을 하였다.(「淮南子」)
271
89)  한나라 사람. 아버지가 平陽侯의 家妾 衛媼과 사통하여 衛性을 썼다. 흉노를 7번 정벌하여 위엄을 떨쳤다. 大將軍·大司馬를 지냈다.(「史記」 111권)
272
90)  한나라 사람. 젊어서 고생하다가 늙어서 會稽太守가 되었다.(「漢書」 64권)
273
91)  한나라 사람. 집이 가난하여 소 덕석에 병들어 누워서는 아내에게 이별하자고 하자 아내에게 격려를 받아 분발하였다. 관직이 京兆尹에 이르렀다.(「漢書」 76권)
274
92)  후한 사람. 이름은 超, 자가 중승. 글씨 고용살이를 하다가 서역을 정벌하여 軍司馬 등이 되고, 50여 나라를 安集하였다. 서역에 있은 지 31년이었다.(「後漢書」 77권)
275
93)  후한 사람. 요동국 都尉를 역임하였다. 아들 다섯을 잘 두어 公沙五龍이라 한다.(「後漢書」 112권 下)
276
94)  전국 연나라 사람. 丹이 진나라에 인질이 되었을 때 秦王이 말하기를 “말에 뿔이 생기기를 기다려서야 석방해 주겠다.”고 하였는데, 이윽고 咸陽의 말이 뿔이 나서 석방되었다. 뒤에 荊軻 등을 보내어 진시황을 찔러 죽이게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격분한 진시황이 연나를 쳐서 멸망시켰다.(「焦氏易林」 8권)
277
95)  한나라 사람 蘇武를 말한다. 자는 子卿. 무제 때 中郞將으로 흉노에게 사신으로 갔다가 흉노가 움속에 가두고 음식을 주지 않아 눈과 담요를 뜯어 먹고 살았다. 흉노는 양을 치게 하면서 말하기를 “암놈의 양이 뿔이 나고 수놈의 양이 새끼를 낳아야 고국으로 돌려보내겠다.”고 하였다. 그러한 생활에도 한나라의 節(기)을 가지고 다녀서 절이 낡았다. 昭帝가 즉위하여 흉노와 화친하면서 19년만에 돌아왔는데 머리가 다 희었다. 돌아온 뒤 典屬國에 임명되었다.(「漢書」 54권)
278
96)  백리보다 먼 대청: 어두운 임금이 인물을 알아보지 못함을 말한다. 대청 위는 가까운 곳이지만 듣는 것이 백리보다 멀게 한다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279
97)  춘추 鄭나라 大夫. 이름은 蔑, 자는 然明. 叔向이 정나라에 갔을 때 종멸은 못생겼는데 숙향을 살펴보기 위하여 그릇을 거두는 자를 따라 가게 하여 대청 아래에 서게 하고 한 마디 말을 훌륭하게 하게 하였다. 숙향이 술을 마시려다가 듣고 말하기를 “반드시 종명이로다.”하고 내려와서 그의 손을 잡고 올라가서 말하기를 “그대가 만일 말하지 않았으면 그대를 잃을 뻔하였다.”고 하였다. (「左傳」 昭公 28년)
280
98)  원문 ‘無卽席之因’은「唐文粹」(88권)에 ‘無撤器之因’(그릇을 거둘 인연이 없었고)으로 되어 있는 것을 따라야 한다.
281
99)  한나라 사람. 宗室. 孝廉에 뽑히고 관직은 諫大夫를 역임하였다.(「漢書」 77권)
282
100)  형벌의 한 가지. 종묘에 사용하는 땔나무를 채취하게 하는 벌이다.
283
101)  후한의 范滂을 말한다. 자는 맹박. 범방은 淸節로 이름난 사람이었는데, 명사들을 黨人으로 몰아 목벨 때 범방 자신은 도피하지 않고 스스로 옥에 나아가 죽음을 당했는데 옥에 나아가기 전에 어머니를 하직하고 아들에게 말을 해 주었다. 이 때 어머니는 범방에게 “네가 지금 李膺·杜密과 명성이 같으니 죽은들 무슨 유감이 있겠느냐?” 하니, 범방은 무릎 꿇어 말씀을 듣고 재배하고서 하직하고, 그의 아들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너에게 악을 하게 한다면 악을 해서는 안 되겠으나, 너에게 선을 하게 한다면 내가 악한 일을 하지 않았다.” 하였다. 당시 범방의 나이는 33세였다. 범방 등이 벌을 받을 때 머리·팔·다리에 형틀을 채우고 머리에는 또 덮개를 씌웠다.(「後漢書」 67권)
284
102)  한나라 사람 李膺을 말한다. 자는 원례. 桓帝 때 司隷校尉까지 지냈으며 太學生의 영수 郭泰 등과 서로 연대하여 宦官의 專權을 반대하였다. 이응에게 접견되는 사람은 자신의 명예가 올라가서, 그 접견이 登龍門이라고 불리는 고사가 전한다.(「後漢書」 李膺傳)
285
103)  원문 ‘桔梏’은 ‘桎梏’의 잘못이다.
286
104)  송나라 사람. 관직은 同中書門下平章事. 封號는 萊國公. 여러번 지방으로 강등되어 나간 적이 있다.(「宋史」 281권)
287
105)  한나라 사람. 자는 昭君. 소군은 元帝 때 궁중에 들어왔는데, 흉노의 呼韓邪單于가 미인을 요구하여 閼氏(황후)로 삼겠다고 하자, 황제는 소군을 내렸다. 출발하는 날에 인사할 때 살펴보니, 소군이 후궁 중에서 가장 예뻤다. 이전부터 원제는 화공을 시켜서 후궁의 모양을 그리게 하고 그것을 보고서 총애하였다. 여러 후궁들이 화공에게 뇌물을 주었으나 소군은 주지 않아서 총애를 입지 못하였다. 황제는 이 사실을 알고 화공을 사형에 처하였다. 소군은 흉노에 가서 자식을 낳고 살다가 죽었는데, 사막 중에 소군의 무덤만 풀이 나서 그 무덤을 靑冢이라고 불렀다.(「漢書」 94권 下)
288
106)  賈誼. 한나라의 문신. 博士·太中大夫로 빠른 승진을 하였으나, 질시를 받아 長沙王 太傅로 좌천되고, 다시 梁懷王 태부가 되었다. 33세로 요절하였다.(「史記」 84권)
289
107)  한나라 사람. 무제가 郎署를 지나가다가 안사의 늙은 모습을 보고 어찌하여 늙도록 낮은 낭서에 있느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文帝는 文을 좋아하였으나 저는 武를 좋아하고, 景帝는 美를 좋아하였으나 저는 모습이 추하고, 폐하는 젊은이를 좋아하나 저는 늙어서, 3世 동안 불우하여 낭서에서 늙었습니다.”라고 하자, 무제는 그 말에 감격하고 발탁하여 會稽都尉로 삼았다.(「漢武故事」)
290
108)  한나라 司馬相如를 말한다. 자는 장경. 武帝 때 불려져 벼슬을 시작하였다. 특히 그가 지은 「子虛賦」·「上林賦」·「大人賦」 등은 한·위·육조의 문인들이 모범으로 삼았다. 그리고 西夷를 굴복시켜 공을 쌓았다. 그러나 병이 많았고, 특히 소갈증에 시달렸다. 소갈증은 물이 많이 먹히는 병으로, 당뇨병이라 한다. 애초 불우했던 시절에 卓王孫의 딸 卓文君이 막 과부가 되어 있을 때, 사마사여가 琴心으로 꼬드겨서 둘이 드디어 도주하여 살다가 탁왕손이 재물을 주어 전택을 사서 부자가 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출세하였다.(「史記」 117권)
291
109)  園墓를 관리하는 관원. 사마상여는 孝文園令을 지냈다.
292
110)  한나라 周勃의 봉호. 呂氏들을 목베고 지위가 높아지자 위태로움을 느껴 갑옷을 입고 집안 사람들에게 무장을 하게 하고서 남을 접견하였다. 뒤에 반란하려 한다고 上書한 사람이 있어 수감되었으나, 太后가 文帝에게 풀어주도록 요청하여 풀려났다.(「史記」 57권)
293
111)  부형을 받은 사람을 거처하게 하는 따듯하고 조용한 방.
294
112)  당나라 사람. 吐蕃을 當狗城에서 격파하고 鄭國公에 봉해졌다.(「唐書」 129권)
295
113)  당나라 사람.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文辭로 유명하였다. 관직은 同中書門下平章事를 지냈다.(「唐書」 165권)
296
114)  당나라 사람. 德宗에게 총애를 받았다. 재상 陸贄가 배연령의 마땅치 않음을 극론하였다가 도리어 파면당하였다. 69세로 죽었는데 백성들은 서로 편안하다고 하였으나, 황제만은 슬퍼하기를 마지 않았다.(「唐書」 167권)
297
115)  한나라 사람. 文帝 때 흉노를 격파한 공으로 郎騎常侍가 되고, 武帝 때 北平太守가 되었다. 흉노에서 겁내어 飛將軍이라 하여 피하고 右北平에 감히 들어오지 못하였다. 흉노와의 대소 전투가 70여 회에 이르렀으나 侯를 받지 못하였다. 뒤에 흉노를 칠 때 길을 잘못 들은 일로 자살하였다.(「史記」 109권)
298
116)  동일한 환경에서 각자의 처지에 따라 행복과 불행을 맞게 됨을 말한다. 원문 侏儒는 키가 3자 남짓한 난장이고, 曼倩은 한나라 東方朔의 자로 9척 남짓한 키다리이다. 주유와 만천이 똑같이 곡식 한 주머니와 돈 240전을 가지게 되면 난장이는 배부르고 키다리는 배고프다는 것이다.(「漢書」 65권)
299
117)  山西省 晉城縣 남쪽에 있는 산. 험준하기로 이름이 나 있다.
300
118)  돌 이름. 四川省 奉節縣 서남의 양자강 瞿唐峽 입구에 우뚝 서 있는 큰 암석이다. 그 부근에 물이 흘러 격렬한 소용돌이를 이루고 배가 가기 어려운 곳이다. 燕窩石·英武石·淫預堆·猶豫堆라고도 한다.(「水經」 江水注)
301
119)  곤궁이 가면 태평이 이르는 것을 말한다. ‘剝’은 주역 64괘의 하나로, 坤下(☷) 艮上(☶)이어서, 소인은 잘되고 군자는 이롭지 않은 象이다. 주역(序卦傳)에서 “박괘가 위에서 곤궁하여 아래에 회복된다. 그러므로 복괘로 받았다.(剝窮上反下 故受之以復)”라고 하였는데, 주역 괘의 차례는 박괘 다음에 復卦로 되어 있어 陽이 박괘에서 소멸해 가다가 복괘에서 회복되는 것이다. 복괘는 震下(☳) 坤上(☷)으로서 陰이 극도에 달했다가 양을 회복하는 상이다. ‘否’는 주역 64괘의 하나로, 坤下(☷) 乾上(☰)이어서, 하늘과 땅이 통하지 않아 비색한 상이다. ‘泰’는 乾下(☰) 坤上(☷)이어서, 하늘과 땅이 조화되어 통하는 상이다.
302
120)  商나라의 재상. 湯王을 도와 폭군 桀王을 내치고 탕왕을 천자의 자리에 즉위하게 하자 阿衡이라고 불렀다. 탕왕을 섬기기 위하여 요리사 노릇을 하여 뜻을 얻었다고 한다.(「史記」 殷本紀)
303
121)  사마상여가 서역에 사신으로 갈 때의 화려한 의장을 말한다.
304
122)  한나라 陳平의 封號. 진평은 가난하여 자리로 문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항우를 섬기다가 얼마 안 가서 유방에게 돌아와 都尉가 되고 여러번 奇謀를 내어 反間을 보내고 공을 세워 曲逆侯에 봉해졌다. 呂后가 죽자 주발과 함께 승상이 되었다.(「漢書」 40권)
305
123)  원문 ‘享茅土’는 띠풀에 싼 흙을 받음을 누렸다는 뜻으로, 제후에 임명됨을 말한다. 천자가 제후를 임명할 때 해당 지방에 맞는 흙을 띠풀에 싸서 하사하였다. 임명받는 곳이 동쪽이면 청색, 서쪽이면 백색, 남쪽이면 적색, 북쪽이면 흑색, 중앙이면 황색 흙으로 하였다.
306
124)  춘추 진나라 사람. 원래 虞나라 사람. 불우하여 여러 나라에 벼슬을 구하다가 우나라로 돌아와서 虞公에게 벼슬하여 대부가 되었다. 진나라가 우나라를 멸망시키자 진나라 穆公 夫人의 媵身이 되었으나 부끄러워하여 도망했다가 초나라 사람에게 잡혔다. 진나라 목공이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五羖羊皮(다섯 마리 양 가죽)로 속죄하고 데려다가 재상으로 삼았다. 7년만에 覇者가 되고 백리해를 五羖大夫라고 불렀다.(「史記」 5권)
307
125)  속 썩지 않으려고 草土처럼 무지각한 존재가 되려 함을 말한다. 원문 ‘艸土之無知’는 「詩經」(檜風 隰有萇楚)의 “진펄에 장초가 있는데 … 너의 무지각함을 즐거워하노라(隰有萇楚… 樂子之無知)”에서 유래한 것이다.
308
126)  원문 ‘尊尊卑卑’는 「增修東萊書說」(권30)의 “由三公 而至于下士 尊尊卑卑 各止其所 而天下定矣”에서 유래한 것이다.
309
127)  어머니가 외출한 아들을 기다림을 말한다. 춘추 때 王孫賈 어머니의 고사. 왕손가의 어머니는 왕손가에게 “네가 저녁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으면 마을 문에 기대어 기다렸다(女暮出而不還 則倚閭而望)”라고 하였다.(「戰國策」 齊策)
310
128)  文山: 송(宋)나라 문천상(文天祥)의 호. 관직은 좌승상(左丞相)·소보(少保)·신국공(信國公)으로서 전쟁에 패배하고 원나라에 잡혀가 죽임을 당하였다. 원나라의 연(燕)에 구금된 지 3년 만에 원나라 세조(世祖)는 그가 끝내 굴복하지 않을 것을 알고 마침내 죽였는데, 형에 임하여 정기가(正氣歌)를 불러 뜻을 보이고 침착하게 집행관에게 말하기를 “내 일이 끝났다.(吾事畢矣)”하고, 남쪽을 향하여 절하고 죽었다. 누린 나이는 47세였다. 원나라 황제는 감탄하여 진남자(眞男子)라고 하였다.(宋史 418).
311
129)  선생을 잃은: 원문 ‘樑摧’는 들보가 부러진다는 뜻으로, 선생의 죽음을 말함.(禮記 檀弓 上).
312
130)  天難諶 命靡常: 「書經 咸有一德」
313
131)  〈거상하다가〉생명을 … 훈계한 것입니다: 「孝經 喪親章」의 “…백성에게 죽음으로 삶을 해치지 말고 파리함으로 생명을 멸하지 말라는 것은 이는 성인의 정치이다(三日而食 敎民無以死傷生 毁不滅性 此聖人之政也)”에 의거한 것이다.
314
132)  곤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 원문 ‘窮則變變則通’은 「周易 繫辭 下」에서 인용한 것이다.
315
133)  아들을 낳을: 원문 ‘維熊’은 「詩經 小雅· 斯干」의 “維熊維羆 男子之祥”에서 유래한 것으로, 아들을 낳을 길몽을 말함.
316
134)  초상에 죽은 이의 이름을 불러 招魂하는 의식을 말한다. ‘皐’는 길게 빼어부르는 소리이고, ‘復’은 초혼함이다.
317
135)  斷腸의 고사를 말한다. 원숭이 새끼가 잡히자 어미가 울며 따라와 달려들어 죽었는데 배를 갈라 보니 창자가 끊어져 있었다고 한다.(「世說新語」 黜免)
318
136)  원문 ‘无妄’은 「周易」(雜卦傳)의 “无妄 災也”에 의거한 것이다.
319
137)  상중에 있는 사람이 자칭하는 말이다.
320
138)  원문 ‘斥正’은 ‘斤正’의 잘못이다.
321
139)  거듭 昏定晨省한다는 뜻으로 조부모를 모시고 있는 사람의 기거를 말한다. 重堂.
322
140)  작은 베풀음에 대해 큰 보답을 받았음을 일컫는 말이다. 원문 ‘投木果報瓊琚’는 「詩經」(衛風 木瓜)의 “나에게 모과를 던져주자 구슬로 갚는다(投我以木瓜 報之以瓊琚)”를 바꾸어 줄여 쓴 것이다.
323
141)  원문 ‘甑塵門席’는 매우 가난함을 말한다.
324
142)  원문 ‘溤河’는 배를 타지 않고 맨몸으로 물을 건너는 무모한 일을 말한다.(「論語」 述而)
325
143)  도외시함을 말한다. 맹자가 사는 곳에서 서쪽으로 가장 먼 지역인 진나라와 남쪽으로 가장 먼 월나라 지역 사람처럼 무관심하게 보는 것을 말한다.(「孟子」 告子 上)
326
144)  원문 ‘燧改’는 「論語」(陽貨)의 ‘부시 나무도 불을 바꾼다.(鑽燧改火)’에서 유래한 것으로, 철이 바뀌어 불을 내는 나무 부시를 바꾸는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327
145)  ‘스승의 백씨’란 뜻으로, 곧 문석환의 백씨를 말한다.
328
146)  「孟子」 告子 上에 나온다.
329
147)  원문 ‘咻楚’는 제나라 말을 가르치려고 할 때 여러 초나라 사람이 떠들게 되면(衆楚人咻之) 제나라 말을 배울 수 없다는 「孟子」(滕文公 下)의 글에서 유래한 것으로, 목적을 성취하는 데에 나쁜 주위환경을 말한다.
【원문】마도일기(馬島日記) (19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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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도일기(馬島日記) (1907년)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3년 03월 0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