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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마만리 (駑馬萬里) ◈
◇ 제1부 탈출기 ◇
해설   목차 (총 : 4권)   서문     처음◀ 1권 다음
1945년 6월 9일
김사량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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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탈출기
 

1. 1. 복마전(伏魔殿)의 북경반점(北京飯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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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일본의 금면류관 위에 해가 저물어 가는 1945년 3월의 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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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사람으로는, 더구나 조선 사람의 신분으로는 발을 들여놓기조차 어려웠다는 호사로운 북경반점이 마치 조선인 합숙소처럼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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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중 화북의 여러 도시와 오지로부터 안전지대라고 찾아 몰려온 사람들로 들끓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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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패전한다면 일본 제국주의와 운명을 같이해야 할, 옆구리에 피묻은 돈이 수두룩한 사람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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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는 미어지게 배가 부른 아편장수도 있고 칠피구두를 신고 삐거덕거리는 갈보장수도 있으며 혹은 화북권으로 교환하러 온 이른바 사업가, 다시 말하면 송금부로커─그리 고는 대동아성 촉탁이니 군 촉탁, 총독부 총탁이라는 명색 모를 사내와 이 밖에도 헌병대니 사령부의 밀정 등등 별의 별 종류의 인간들이 다 들고 날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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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를 중심으로 악랄한 수완을 휘두르고 있다는 헌병대의 어떤 밀정은 새로 150만원인가 주고 사들인 자동차에 기생을 싣고 어디론가 드라이브차로 떠나며, 동경을 무대로 활약했다는 전 헌병보조원은 3층에 일본 계집을 데리고 살면서 4층에 새로 얻어 둔 카페걸이 못미더워 허덕거리며 오르 내리고(이 사내는 해방이 되자 우리 의용군이 산해관에서 체포하였다), 서주서 돌아온 잡곡장수는 소위 신여성을 첩으로 얻어 데리고 조용한 육군반점으로 옮아가며, 남경서 왔다는 무슨 회장인가는 급전직하로 떨어져 가는 돈값을 걷잡을 길이 없어 시계니 보석이니 알지도 못하는 골동품을 사들이기에 분주하며 그 외에도 돈을 뿌리며 요리집으로 나가는 패거리, 회의(도박)차로 밀려 나가는 패거리, 그리고 이 방에서도 쑤군쑤군 로비나 복도에서도 모여 서서 쑥덕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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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조선인 총영사 격이라는 영사관 끄나풀은 아침낮으로 드나들며 자칭 대정객연 호화로운 연회를 베풀고 있으며 어느 박스에서는 충실한 애국주의자가 미군의 공세에 대하여 이를 갈며 떠벌리고 무슨 문화단체의 이름을 팔아 모은 기부금으로 어떤 문필 정치가는 신새벽부터 취해 돌며 새로 들이닿은 여장수들은 여기저기서 주워 얻은 돈으로 파리의 화장품을 사들이기에 골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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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새로 조선서 ××악단이라는 군 위문 패거리가 당도 하고 또 앞서 장가구로 공연하러 나갔다던 ×××가극단 일행까지 쓸어 들어오니 정녕 정신을 차릴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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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고지지한 주제에 진기름으로 머리를 마늘쪽처럼 갈라 붙인 예술가씨와 음악가양들이건만 무슨 재주에서인지 한번 나갔다 돌아올 때면 구두가 새것이 되고 두 번째 나갔다 올 때는 옷차림이 달라지며, 세번 만에는 향수 내가 코를 찌르게끔 되니 그야말로 눈알이 빙글빙글 돌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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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북경반점의 236호, 이것이 내 방이었다. 아니 그것도 숙객이 폭주하기 때문에 방 한 칸이 독차지되지 못 하여 내가 생면부지의 K씨 방으로 굴러 들어오게 되었던 것 이다. 생면부지라고는 하나 사실인즉 며칠전 남경으로 내려가는 길에 들러서 이삼일 머무는 동안 로비에서 여러번 대하던 얼굴이며, K는 K대로 나를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여간 새로 인사를 마치고 방안에서 저녁을 같이 하며 맥주가 거나하게 떠오르게 되자 지나온 과거의 편력을 이야기하는데 그 내용의 허황함이 역시 이 반점 초야부터가 아라비안 나이트라는 느낌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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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중에서 잡곡장수를 하여 얼마간 돈을 모아 가지고 올라와 4개월 동안이나 이 반점에 머물면서 거처할 집을 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번도 집을 구하러 나가는 길은 볼 수 있고 무슨 심사라도 편치 않은 일이 있는지 아침부터 밤까지 웅크리고 앉아서 애매한 맥주 대배로 벌컥벌컥 들이 키는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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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호언에 의한다면 언젠가 신문 지상에도 보도될 법 하지만 7.7(중일)사변의 하나의 도화선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 천진시 정부 점령사건을 일으킨 장본인 중의 하나였 다. 혹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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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국 천지에는 이런 대언장어파가 하도 많으니─혹은 정말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일수 그럼직도 하여 보이는 인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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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런 사람과 한방에서 침식을 같이하게 되었으니 역시 중국이로구나 하는 느낌도 느낌이려니와 아이러니도 어지간하다. 그러나 이 사내 덕분에 나는 이 북경반점에 드나드는 사람과 숙객들에 대하여 비교적 정확한 판단과 분별을 가지게 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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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야 일이 그렇게 거창스레 될 줄이야 알았소……” K는 거쉰 목소리로 이렇게 이야기하며 껄껄거렸다. 자랑도 아니요, 뉘우침도 아닌 수호전 식의 낭인을 자처하면서의 술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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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괴문이나마 이 천진시 정부 점령사건이란 아마 조선인 좌익사에서는 커다란 페이지를 차지할 일의 하나일 것 같다. 유명한 V라는 사내가 그 당시 중국 침략정책에 적극 주의를 쓰던 일본 관동군으로부터 밀파되어 천진에 들어와 부랑인, 양차(洋車)꾼, 거지 이런 것들을 약 2백 명 모아 놓고서 만두로 배불린 뒤에 총을 한자루씩 메워 가지고 시정부를 갑자기 들이쳐 점령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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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V 선생은 제법 시정부 주석의 의자에 걸터앉아서 일본인 기자단과 회견이랍시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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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는 참모장 격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된 영문은 모르고 진짜 주석이 제 방으로 찾아 들어와 보니 웬 모를 녀석이 제 자리에 앉아서 노상 성명을 발표하고 있어 눈이 휘둥그래졌 다. 가(假)주석 V는 그의 귓바퀴를 잡아 쥐고 몇 걸음 끌고 나가다가 꽁무니를 걷어차 내쫓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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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북지파견군의 사전 양해를 얻어 두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일을 알고 일군들이 총을 메고 쏟아져 오는 바람에 성명서를 읽다 말고 뒷문으로 빠져 화물차로 삼십육계를 놓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달음으로 통주까지 달려가서 절간을 한 채 점령하고 새로 정부를 차려 놓았으니 그 이름이 가로되 화북농민 자치정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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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북경, 천진 등지에서 민중들이 연일연야 대 시위운동을 일으키며 한간대적(漢奸大賊) 왕모 〔汪精衛〕를 잡아 죽이라고 소리 높이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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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협잡정부 주석 왕인즉 두말할 것 없이 바로 V 그자이며 이를 토벌한다는 일이 소위 통주사변을 이루어 이것을 구실로 일본군의 진격을 보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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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내 계획인즉은 한 대는 시 정부을 점령하고 한 대는 은행을 점령하여 몇백만 원 검쳐 쥐었다가 군세 부득이 달아나게 되면 하다못해 저 감숙성(甘肅省)까지라도 달아나 거길 근거지로 중국 천지를 호령을 하자는 것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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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되었다면 요즘 좀 좋겠소?” 생각할수록 부아가 떠오르는지 대배를 들어 한입에 들이키더니 내 얼굴을 쳐다보며 조그만 눈을 찌기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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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못하였소?” “대장도 그건 강도와 같다는구만…… 놈의 나라 시 정부를 치는 것은 강도가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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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K는 또다시 껄껄 웃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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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북경반점을 복마전이라면 나는 정녕 마왕의 방으로 굴러 들어온 듯하였다. 혹시 내가 이 사내에게 은연히 감시를 받고 있지나 않는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머리에 들기도 한다. 경각성이 너무도 단단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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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 노크 소리가 들리면서 쑥 들어서는 그림자를 보니 먼젓번 들렸을 때에 인사한 기억이 있는 화중에서 백화점인가 하는 사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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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오셨구먼요! 이렇게 돌아오시는데 무얼 안 오실 게라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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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잣소리같이 놀라는 말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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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덜컹하였다. 남경에 내려간다고는 하지만 필경 어디로든지 빠져 새리라는 소문이 돌고 있지나 않았는가 하는 생각에 불안한 기분이 엄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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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내가 나간 뒤에 K더러 슬며시 물어보니까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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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해 먹는 자인지 글쎄 알 수가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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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망상인지는 모르나 등줄기가 쭈뼛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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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서주와 남경에서 보기 좋게 실패하고 올라온 길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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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의 P군과 대강 한 약속이 있었으나 퍽 오래 전의 일이 었기 때문에 불안한 끝도 없지는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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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P군이 내가 오기를 기다리다 못해 먼저 떠났다면 되돌아 올라오며 서주에 들리리라 하였다. 그러나 남경에 닿아 P군이 근무하고 있는 상행(商行)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매우 대답이 의심스러운 것이 세세한 것을 알려거든 찾아오 라는 것이었다. 그래 양차(羊車)로 달려가 주인(조선인)을 만나 물어 보니, P군이 이하 칠팔 명 젊은이가 거취불명이라 한다. 그것이 겨우 10일 전의 일이었다. 여기서 나의 오작교가 끊어지고 말았다. 연 사흘 동안 헌병대와 영경(靈警 =지역 경찰)이 총출동으로 수색망을 쳤으나 종적이 묘연할 뿐더러 서주에 있던 S군 이하 삼사 명도 같이 없어진 듯하 다는 말에 거듭 놀라게 되었다. 이 S군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저번 귀국하여 P군과 같이 나를 집으로 찾아왔을 때 내가 도중(渡中)하게 된다면 저도 행동을 같이하기로 서로 약조하 였던 사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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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이 캄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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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날부터 밤마다 새벽마다 요란히 울리는 공습경보에 애꿎게 신경쇠약만 걸릴 지경이었다. 이왕 내친 김에 상해로 내려가 볼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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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공작의 중심지이니만큼 무슨 좋은 길이 열림직도 하다는 막연한 기대에서였다. 아닌게아니라 지난해 도중하였을 때 7월 한달을 상해에서 지내는 동안에 중경(重京)측의 공작원이라고 칭하는 청년에게 호텔로 방문을 받은 일이 있었 다. 그러나 상해라는 도시가 도시요 또 백귀암행(百鬼暗行)의 시절이니만치 이 청년이 일경의 끄나풀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지 않는 바도 아니지만 그래도 내 딴에는 나대로의 조그만 신념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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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조선의 독립이 조선을 떠나서 있을 수 없으며 조선 민족의 해방이 그 국토를 떠나서 있을 수 없느니만치 왕성한 해외의 혁명역량에 호응할 역량이 국내에도 이룩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자면 국내에서 배겨나지 못하게 되어 망명 하는 이는 별 문제로 하고 나와 같이 국내에 발을 디디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일부러 망명한다는 것은 하나의 도피요 안일을 찾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더구나 제1선에서 총을 들고 싸우는 곳이면 또 모르려니와 몇천 리 산 넘고 물 건너 대후방의 중경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보다 더 비겁한 도피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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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중경이란 곳에 매력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야말로 구도자의 성지가 아니요 반동의 거지인 아시아의 마드리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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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민족의 신성한 이익을 배반하여 투항과 퇴각의 일로로 만리 오지에 도망해 들어가 내전의 흉계를 꾸미기에 영일(寧日)이 없는 반동정부의 수도, 이런 정부의 뒤를 창녀 처럼 따라다니며 장개석의 테러단으로 유명한 남의사(藍衣 社)와 CC단이 던져 주는 푼전으로 목을 축여 가는 행랑살이 임시정부 선생들의 독립운동 영업집에 찾아 들어가기에는 너무나 계산에 어두웠다. 일껏 배워야 장개석의 매국흥 정이며 독재간계(獨裁奸計)와 테러행사일 터니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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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 듣누리없이 재중경 임시정부의 파쟁과 자리싸움이 귓결에 들려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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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인식을 다시금 새롭게 하면서 돌아와 보니 때는 나날이 정세가 급박해져 붓대를 꺾고 학교 일에나 묻혀 있을 수도 없게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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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비좁은 평양에 거주한다는 사실이 문단인으로 보아 미미한 존재나마 그냥 방임하고자 하지 않았다. 게다가 중국에서 돌아온 뒤부터는 일경의 주목과 내사(內査), 감시가 일층 더 심해진 것이다. 학도병으로 내몰려 서주 근방에 나갔던 조카가 나를 만나 본 지 몇 달 안 돼 탈주한 사실이며 숙현(宿縣)에서의 헌병대 놀음, 그리고 상해에서의 1개월 이런 일 저런 일이 모두 놈들의 의심을 사기에 꼭 알맞았던 것이다. 하루는 중학 시절에 스트라이크를 팔아먹던 동창생이 서울로부터 독립운동을 하자고 내려왔다. 알고 보니 경무국의 끄나풀이었다. 또 한 번은 명색 모를 사내가 공산주의인가 하자고─이것은 헌병대의 앞잡이였다. 이헌 형편이니 시시각각으로 조여드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출국의 결심이 여기서 다시 생기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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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안한 환경으로부터 빠져 나가 어떻게든지 중국 땅으로 다시 건너 서서 연안으로 새들어가 싸움의 길에 나서리 라…… 냉엄함 자아비판을 하자면 역시 무서운 현실에서 도망하자는 것이 최초의 동기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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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떠나 온 길이 남경까지 내려와서 오도가도 못하 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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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온 이상 상해로 나가면 무슨 좋은 수가 생겨도 생기리라…… 그러나 실제 문제로 상해까지 가서 여러 날 묵어야 된다면 적지않은 숙비를 어떻게 조달하느냐는 난제가 앞을 가로막았다. 하기는 불의의 경우에 이용하려고 홍삼 한 근에 시계도 두어개 가지고 다니지만 그렇게 벌써부터 처분해서야 앞길이 매우 불안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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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생각에 지리적 관계로 상해에서는 연안과의 연락이 대단히 힘들리라는 추측도 들게 되었다. 그래서 3등차의 통로에 꿇어앉아 건들먹거리며 다시 올라오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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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에서 하차하여 알아본 결과 S군의 실종을 또한 확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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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새벽녘 천진에 닿는 참으로 이번은 일본 조계에 있는 우인이 박사의 병원으로 찾아 들어갔다. 나의 중학 동창으로 친족의 의업을 도와 주면서 조선학 연구에 종사하고 있는 온공독실(溫恭篤實)한 호학이다. 지난해 도중하였을 때도 이 병원에 찾아와 한 방에서 여러 날을 같이 지내며 심정을 토로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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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시절로부터 깊은 우정이 서려 있는 사이라 이심전심 (以心傳心)이었던지 내가 쓱 들어서니까 어떤 예감이 짚이는 모양으로 얼굴빛이 달라진다. 나는 그의 이층으로 인도되었 다. 이군은 내 결심이 굳음을 알고 이날 밤부터 나의 떠날 길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머리를 앓게 되었다. 그러나 진찰 실과 서재 속에만 묻혀 있는 그에게 좋은 길이 있을리 만무하였다. 연안으로는 북경 방면에서 떠나는 이가 많다는 소문이 들린다고 하면서 그것도 자칫하면 횡횡하는 가공작 원(밀정)의 그물에 걸리기가 쉬운 모양이라고 염려한다. 여기서도 나는 일상 하던 버릇으로 지도를 펴놓고 궁리하였 다. 연안이 그 중 가까워 보이는 역을 짚어 가면서 동포선 (同浦線)이라면…… 태원(太原)에라도 믿을 만한 이가 있다 면…… 북경서 그냥 산을 넘어 들어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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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연안 방면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이유는 여기에 새삼 스러이 까놓을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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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국 땅에는 새로운 태양이 섬강녕변구(陝甘寧邊區)에 떠올라 광대한 구역을 밝히기 시작한 지 이미 오래다. 장개 석의 독재를 반대하고 그 내전정책을 두들기며 혁명의 깃발을 높이 들고 적에게 무장항변을 거행하면서 인민의 정부를 조직하여 농민을 해방하고 대중을 도탄 속에서 건져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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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들과 같이 우리 조선의 우수한 혁명가와 애국 청년들도 또한 총칼을 들고 싸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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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국의 깃발이 해방구역의 산채에마다 퍼득이고 있다. 생각만 하여도 가슴속이 뒤설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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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찾으려 싸우는 이 전쟁마당에 연약한 몸을 던짐으 로써 새로운 성장을 얻어 나라의 조그마한 초석이라도 되고자 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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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로 해방구역내의 중국 농민의 생활이며 인민 군대의 형편이며 신민주주의 문화의 건설면도 두루두루 관찰하여 나중에 돌아가는 날이 있다면 건국의 진향(進向)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함이 있으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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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하나의 낭만으로는 이국 산지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적들과 싸워 나가는 동지들의 일을 기록하는 일에 작가로서의 의무와 정열을 느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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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나는 다시 북경으로 올라가 보리라 하였다. 떠날 때 이군은 옆구리에 만원 돈을 찔러 주며 모쪼록 성공하여 일로 평안하기만 축원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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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호혈(虎穴)로 들어오는 마음으로 이 북경반점에 륙색을 부려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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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야말로 천행으로 여기에 온 지 사흘째 되는 날 저녁에 비밀공작원의 손길이 나에게 뻗치게 되었다.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할일없이 나는 이날도 로비에 앉아 책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궂은 비가 하루 종일 오기 때문에 모든 박스가 거의 만원이었다. 더구나 이날 밤 부터 호텔 지층 대홀에서 열리는 ××악단의 공연을 보려고 북경 시내의 조선 사람이 물밀듯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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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흔한 국민복을 비롯하여 양복, 중국옷, 심지어는 일본 유까다까지 튀어 들며, 부녀자는 너나없이 이방(異方)의 간고한 살림살이에 부대껴 얼굴이 싯누런 할머니, 어린애를 둘러업은 아주머니, 양장이 어울리지 않는 창기(娼妓)들이며 호화로운 옷차람의 매소부(賣笑婦)…… 모두 들어오며 떠들 썩하니 고아 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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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반점 생긴 이래 이런 고약한 손님들은 처음일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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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한 사내가 히히덕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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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뒤적이던 책을 덮어 놓고 멀거니 이들의 광경을 바라 보며 혼자 암연해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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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난데없이 굴뚝처럼 키가 큰 사내 하나가 입에 문 파이프로 연기를 내뿜으며 듬석듬석 중앙으로 다가와 끙 하더니 안락의자에 걸터앉는다. 그러자 주위에 둘러앉았던 촉탁 이니 사업가니 밀정패들이 나 가까이 가서 공손히 인사를 한다. 아마 상당히 세도라도 쓰는 인물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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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국민복지로 물큰하게 내려씌운 모양이며 번지르한 구두, 아편 부자로서는 너무 위엄기가 서려들고 흔한 촉탁감 으로선 지나치게 파격이며 사업가로선 적이 교격(驕激)해 보여 이게 무슨 종류의 인간일까 하고 이월없는 호기심으로 유심히 훑어보게 된다. 이때에 동숙의 K가 어정어정 내려오 기에 누구냐고 눈짓으로 물으니까 저 사람이 바로 일전 말하던 천진시 정부 점령사건의 주역 V라고 한다. V라고 하면 이런 전력이 있을 줄은 알기는 여기와서 처음이나 신문에도 훤전(喧傳) 되던 이름이라 기억에도 새로운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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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일본 화족의 영양(令孃)과 결혼한다고 떠들더니 몇 달 안 돼 평양 명기와 또다시 조선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 다는 신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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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에 내가 어떤 일본의 주간지에 기생을 주제로 하여 끄적거린 소설이 바로 이명기 부인의 일이라고 오해되어 가정불화가 일 뻔하였다는 풍설까지 들은 바가 있어 혼자 몰래 쓴웃음을 짓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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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대단한 역사적 인물이구려…… 저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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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는 껄껄 웃으며 “적어도 한때는 화북 농민 자치정부의 주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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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 회색 헬멧을 쓴 셔츠 바람의 Y씨가 곰처럼 둥기적 거리며 기린처럼 사방을 둘러보면서 뚜벅뚜벅 들어온다. 들어오며 손에 든 살부채를 연신 흔들어 보이며 이리저리 인사를 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나는 북경의 거인들과 한자리에 만나게 되는 모양이다.
 
 

2. 2. 회색헬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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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Y 거인은 전문학교 시절에 명 스포츠맨으로 이름을 날리다가 신문사 생활을 거쳐 북경에 들어온 지 이미 칠팔 년 이 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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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상해로 내려갔을 때 어떤 우인으로부터 소개장을 받기도 하였으나 북경과 차에 일이 없어 만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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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국내에서도 이모저모 여러 가지로 이야기를 들어 그의 인품이며 자성(資性)에 대하여 대강한 예비지식이 없지 않았다. 거대한 몸뚱이에 비해 대단히 부드럽고 상냥한 사람으로 이번이 겨우 두 번째의 상봉이었으나 십년지기처럼 악수를 하며 서로 농담까지 할 수 있었다.
 
80
Y 거인은 내 옆자리에 듬직히 그 거대한 엉덩이를 묻으며 살부채를 펼쳐 들더니, “언제 올라왔소? 최대 급행이구려. 그래 곧 귀국하시려오?” “보아야 알겠습니다. 다만 며칠이라도 더 있어 보렵니다.”
 
81
“왜 무슨 좋은 일이 있소?” “글쎄요.”
 
82
하며 마주 웃었다. 이때에 홀에서 음악회가 시작되는 모양 으로 박수 소리와 같이 현악 소리가 들려온다. 그때 우리들도 일어나 그리로 밀려가게 되었다.
 
83
“그럼 나는 M네 집에 가서 ……!”
 
84
굴뚝같이 기다란 자치정부 주석 V는 긴 몸뚱이를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85
“독립운동 이야기나 들을까?” 천연스레 이런 소리를 하는 또 족히 그럼직도 한 그였다.
 
86
요즈음 와서는 이 역사적 인물이 떡먹듯이 독립운동을 차려 놓기 시작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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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1945년이란 시기의 조선은 참으로 형형색색의 인간을 창조하고 있었다. 아마도 모르기는 모르되 이 북경 천지에도 얼핏 보기에는 범놀음을 하는 범가죽을 쓴 개들이 많을 것이다.
 
88
나중에 알고 보니 V가 독립운동 이야기를 들으려 찾아간다는 M도 또한 특무기관의 뒷문으로 드나들던 사내로, 현재는 어떤 테러당의 두목으로 행세중이다.
 
89
홀 입구로 가까이 다가가서 사람떼가 들이밀어 어지간히 혼잡하다. 그때 나는 나중에 보아 들어가기로 하고 창가의 조용한 티 박스를 점령하고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여기에 곰처럼 기린처럼 크고 긴 Y 거인이 또다시 나타나더니 마주 앉으며 부채로 활활 바람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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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오셨을 때 꼭 만나려 하였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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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여기서 하룻밤밖에 쉬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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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중국을 좀더 공부해 볼 생각이 있어 어쩌면 이 북경에 눌러앉을지도 모르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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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이 중국 재지에서 옥새하고 싶으신 모양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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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더니 부채를 도로 접으며 빙긋이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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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형은 북경을 사수하실 생각이오? 가족이라도 어서 귀국시켜 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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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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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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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不穩)하오, 불온하오…… 그러나 형같은 이야. 이왕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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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끝을 슬쩍 돌리며 헬멧을 벗어 놓는다.
 
100
“이왕이면 어쩌란 말이오”
 
101
“……가보시지.”
 
102
삽시에 가슴이 뜨끔하였다.
 
103
“어디로?” “글쎄……”
 
104
일순간 두 눈이 마주치며 불꽃이 튀는 듯하였다. 그러나 나는 슬며시 웃어 넘기려 하였다.
 
105
“역시 북경은 고약은 하구려. 당신도 그렇게 되었소? 나 같은 선량한 시민까지 떠보아야 할 모양이오?” “무엇이오?“ “……별직업이 다 있다더군요……”
 
106
“특무 말이오?” 끄덕이니까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다가 갑자기 부채를 펼쳐 제 잔등을 두드리며, “어떻소? 이 내 듬쓱한 잔등을 믿어 보구려.”
 
107
“그럼 그 잔등에 업혀 볼까요.”
 
108
하니까 헬멧을 올려 놓으며 거인이 일어난다. 나도 일어났다.
 
109
“언제 떠나기로?……”
 
110
“나는 내일이라도 좋소.”
 
111
“그럼 내일 연락하시오. 전화번호는 4, ××××.”
 
112
“이목이 번다하니 먼저 실례합니다……”
 
113
하며 다시 부채를 펴들고 훨훨 부치면서 아까와 같이 사위를 위압하며 밖으로 사라졌다. 불과 이삼 분 사이의 일이었 다. 마치 꿈속의 일처럼 한참 동안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114
북경서 사업가로도 비교적 탐탁한 존재라는 이 Y 거인이 과감스레도 지하공작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놀람 이지만 이렇게 수월히 단시간에 연락이 될 줄은 꿈에도 예 기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혹시 내가 너무도 경솔히 믿고 들어붙지나 않았나 하는 의구의 마음이 금시로 꼬리를 저으며 일어난다. 하나 이미 운명은 결정된 것이니까. 소기의 곳으로 가게 되든지 혹은 헌병대로 끌려가게 되든지……
 
115
천진서 이군이 주의 주던 이야기가 주문처럼 들려 온다. 하 여간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방으로 올라와 여 간한 짐을 정리하고 나서 침상 위에 드러누웠다. 짧은 밤이 깊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이날 밤 K는 돌아올 줄 몰랐다.
 
116
이튿날 새벽 전화로 연락되었다.
 
117
동안시장(東安市場) 안 어느 조그마한 중국 음식점에서 다 시 만나기까지 안심이 안 되는 초조한 하룻밤이었다.
 
118
다섯 냥 쭝 가량의 고량주를 나누며 출발을 하루 연기하여 내일모레, 갈 수 있는 데까지는 기차로, 만날 장소는 역의 1, 2등 대합실, 떠날 시간은 내일 하오 한 시에 다시 여기서 만나 작정하기로 하고 총총히 헤어졌다.
 
119
공작상 여러 가지로 비밀도 있을 것이리라, 나는 다사스레 묻지도 못하였으며 Y 거인도 필요이상의 말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120
“어쨌든 동맹본부로 직행하도록 할 터이니……”
 
121
“복장은?” “입은 채로 가시오. 오늘 떠나는 일행이 있지만 두어 달 걸려야 될 게요. 형은 건강이 좋지 못해 보이니……”
 
122
“기차가 위험하지는 않겠소?”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힘있게 단언한다.
 
123
“그럼 내일 다시 만납시다.”
 
124
악수하고 헤어지기까지 주고받은 이야기라고는 이것이 거의 전부였다. 틀림없는 이로 믿어지기는 하나 소상한 이야 기를 들을 수 없어 역시 한 끝으로는 마음이 불안하였다.
 
125
그러나 반점으로 돌아와서는 아는 사람을 만나면 나는 모레 쯤 상해로 갈 생각이라고 미리 이야기해 두었다. 그리고 입 고 온 양복이 아무래도 목적지에 가서는 불편스러울 모양이 라 다시 거리로 나와 몇천 원 주고 튼튼해 보이는 작업복 한 벌을 사고 남은 돈으로는 어린애들에게 보낼 장난감을 고르기 시작하였다.
 
126
육국반점에 묶고 있는 시인 R 여사를 만났더니 돌아가는 길에 평양에서 하차하여 전해 주겠다는 고마운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애들에 대한 마지막 선물이 될지도 모르 겠다는 생각에 정성스레 물품을 고르고 또 고르며 한 가지 라도 더 많이 사 보내고 싶어 하루 종일 쏘다녔다. 하나 일 년 전보다 10배 이상의 엄청난 물가이기 때문에 눈에 걸리는 것은 하나도 살 수 없었다.
 
127
다음날 오후 한시에 우리는 다시 그 음식점 그 자리에서 만나게 되었다. 여기서 내일 만날 시간이 약속되었다. 오전 아홉시 반 1, 2등 대합실에서─ 이른바 최후의 점심을 나눈 뒤에 헤어져 나오노라니까 Y 거인이 허둥지둥 뒤따라오며 나를 불러세운다.
 
128
“주머니에 있는 돈이 이뿐이오.”
 
129
하며 지전 뭉치를 덥썩 쥐어 주는 것이다.
 
130
“한 5천 원 됩니다. 어린애들에게 구두라도 사 보내시오.”
 
131
다시 악수를 하고 돌아설 때 왜 그런지 눈물이 핑 돌았다.
 
132
사람들의 물결 위를 회색 헬멧이 둥실둥실 떠가며 사라진 다. 이윽하여 나는 시장안으로 들어가 어린애들의 탐스러운 가죽구두 두 켤레를 사들고 돌아왔다.
 
133
메고 갈 륙색의 짐을 덜어 고향에 보낼 헌옷 꾸러미를 만 들고 이 속에 어린애들의 물건을 차곡차곡 넣어 묶어 놓았 다. 공교로이 이 다음날 아침 일곱시 차로 R여사가 귀국하 기로 되어 일이 더욱 순조로웠다.
 
134
그날 밤 나는 어머니와 아내에게 무량한 감개 속에서 몇 장의 편지를 쓰게 되었다. 떠날 때의 암호대로 '여불비(餘不 備)'라고 상서하여 드디어 떠나게 된 사정을 알게 한 것이 다. 그리고 떠나는 날짜와 시간도 내박았다. '여불비'라고 쓴 편지가 마지막 편지인 줄 알라고 아내에게 이르고 떠난 것 이었다.
 
135
이날 새벽 일찌감치 일어나 R 여사에게 집으로 보내는 짐을 부탁할 겸 전송차로 역에 나가려고 부스럭대는데 같은 방의 K가 눈을 부비며 일어나 고약스런 꿈을 꾸었노라고 중 얼거린다.
 
136
“무슨 꿈이오?” 하고 돌아보며 물으니까 “역시 분명히 이 반점인데 지붕 위로부터 뱀이란 놈이 슬 슬 기며 내려오기에 놀라 쳐다보고 있노라니까 얼마쯤 내려 와서는 그놈이 사람이 되더란 말이오. 꿈에 뱀을 보면 하나 도 되는 일이 없다던데……”
 
137
나는 어쩐지 마음이 언짢았다. 나중에라도 내가 항전진영 으로 탈출한 일이 드러나 이 자칭 풍운아를 곤경에 빠뜨리 지 않을까 하는 가책지심(苛責之心)이 없지 않았다. 하나 어 쩔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이 우중충하니 솟아선 복마 전의 북경반점으로부터 쥐도 새도 모르게 빠져 나오게 된 것이 한량없이 유쾌할 뿐이었다.
 
138
고도(古都)의 새벽 거리는 안개 속에 휘감겨 고요할 대로 고요하였다. 양차꾼들이 길가의 노점 앞에 웅크리고 앉아 콩죽을 훌쩍훌쩍 들이키고 있었다.
 
139
양차를 몰고 역으로 달려 나오니 바로 발차종이 울리고 있 었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였을 때 나는 R 여사에게 짐을 맡기고 따라가며 귓속말로 이렇게 부탁하였다.
 
140
“나도 오늘 차로 남쪽으로 떠나오마는 우리 집에 들르시거 든 아무런 일이 있어도 놀라지 말도록…… 그리고 오늘 나도 떠나더라고 일러 주시오.”
 
141
여사는 눈을 깜짝거리며, “되도록 빨리 귀국하세요.”
 
142
기차는 차츰 속력이 빨라졌다. 나는 구보로 따라가며 부르 짖었다.
 
143
“이 편지도 꼭 전해 주시오. 믿습니다.”
 
144
전날의 약속대로 아홉 시 반에 1, 2등 대합실로 들어와 한 가운데 서 있는 기둥을 기대고 앉았노라니 정각에 시커먼 화북 교통국의 모자를 쓴 이가 나타나 눈짓을 하면서 돌아 선다. 볕에 그을은 얼굴이 무뚝뚝하며 몸뚱이가 둥실둥실하 여 중국 사람같이 보이는 청년이었다. 따라 나가서 그로부터 차표를 받아 들고 안내대로 사람떼를 헤치고 나가 평한로(平漢路) 홈에서 남방행 열차 위에 몸을 실었다. 나무도시락 세 개와 담배 '전문(前門)'을 다섯 갑 사서 들려주며, “거의 도착하게쯤 되면 인사하는 이가 있을 터이니 그 뒤를 따르시오.”
 
145
이렇게 일러준다.
 
146
“서로 모르는 것이 좋으니까……”
 
147
나는 웃으며 끄덕였다.
 
148
“고맙습니다.”
 
149
“우리도 머지않아 걷어메고 들어갈지 모르겠소.”
 
150
“거기서 만나게 된다면 더욱 반갑겠습니다. Y 선생에게 말씀 잘해 주시오!”
 
151
“건강에 부디 조심하셔야 합니다.”
 
152
드디어 발차를 알리는 종소리가 요란히 울리기 시작하였 다. 뜨거운 악수를 교환하고 나는 열차에 올라섰다.
 
153
'북경이여, 잘 있거라!'
 
 

3. 3. 공습받는 평한로

155
첫새벽부터 일어나 분주히 서둔 덕분에 차 안에 널찍히 자 리를 잡고 나니 한꺼번에 피곤이 스며드는 듯하였다.
 
156
이렇게 수월히 연락이 되어 지긋지긋하고도 무서운 북경을 떠나 목적지로 향하게 되매 마음이 푹 놓인 것이다.
 
157
하늘은 맑게 개이고 전원은 푸르렀다.
 
158
차 안에서는 권총을 둘러멘 일본 헌병이 조사를 게을리 하 지 않고, 보총을 메고 경계하는 중국인 승경원(乘警員)도 차 례대로 오고간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불안스런 긴장한 느낌 이 없이 마음은 거울같이 침착하였다.
 
159
세상에 이렇게도 쾌적하고 행복스러운 여행이 없을 듯하였 다. 북으로 북으로 혹은 남으로 남으로 이 중국 대륙을 달 리는 기차 속에서 아득히 먼 지평선을 바라보며 때로는 기 차가 설 적마다 플랫폼에 내려서서 얼마나 혼자 몰래 애타는 가슴을 쓰다듬었던 것일까? 저 마을로 찾아 들어간다면, 저 언덕을 넘는다면, 저 산밑을 돌아선다면 혹이나 맞아 주는 이가 있지나 않을까 하는 두서없는 희망에 젖으며……
 
160
그러나 지금은 흘러다니는 뜬 몸이 아니다. 이 기쁜 소식을 또한 동(東)으로 내 나라를 향하여 질주하고 있는 열차가 좋은 기별 오기를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을 아내의 치마 위에 던지고 갈 것이었다.
 
161
R 여사가 영문을 모르나 탈출의 결행을 알리는 편지를 반 드시 전해 줄 것이다. ─ 역두에 나오셔서 서글픈 표정을 지으시던 칠순 노모의 얼굴이 눈앞에 떠오른다.
 
162
내가 살아서 돌아와 다시 만날 때까지는 결코 눈을 감지 않으련다고 용히도 말씀하셨다. 그러나 여불비의 암호로 작 별 지은 편지가 어머니 앞에 올리는 글자 그대로의 마지막 상서나 되지 않을까? 어머니시여, 부디 안녕하셔서 기다리 시라! 어린애들의 생각이 일어난다. 철모르는 사내놈은 아버 지가 돌아올 때 기차를 사다 주마는 말에 좋아하고 해들거 리며 날치고 있었다.
 
163
이놈은 그래도 떠날 때 역두에서 다시 한 번 안아 보았으 나 제 어머니의 가슴에 곤히 파묻혀 새근거리던 계집애를 다시 한 번 쓰다듬지 못하였음이 새삼스레 애연해진다.
 
164
수첩 갈피에 들어 있는 어린애들의 사진을 집어 들고서 베 레모를 쓰고 담에 기대 해죽이 웃고 있는 큰놈에게 나도 미 소로 갔다 올께 하였다. 그리고는 아침에 여장을 꾸리며 손을 멈추고 큰애와 계집애에게 색연필을 주어 끄적거리게 한 수첩 속을 펼쳐 보며 마음의 손길로 다시금 어린애들을 어 루만졌다. 다섯 살 먹은 큰놈은 아버지라고 제법 허수아비 같이 사람을 그려 놓고 기차 타고 갔다 올적에 사과와 총을 사오라고 빨간 색연필로 총을 그리고 초록색으로 사과를 그 려 놓았음이 한없는 미소를 자아낸다.
 
165
어린 계집애는 영문도 모르고 쭈쭈쭈하며 난필로 부작을 그리듯 하였다. 그러나 이 그림이 이후부터 나에게 끝없는 위안을 주는 동시에 매양 용기를 북돋아 줄 것이다……
 
166
동무들에게도 이렇게 행복스레 들어가는 길임을 알리고 싶은 일이었다. 떠날 때 어떤 동무는 건강에 조심하라고 약봉 지를 내다 주었으며 어떤 친구는 벙어리가 되지 말라고 중 국어 회화책을 빌려 주었고 또 어떤 이는 중국에 가면 그런 문명구가 필요없으리라면서 내 라이터를 접수하는 대신에 마도로스 파이프를 내놓았다.
 
167
골동품을 좋아하는 한 동무는 옛날 장도를 개찰이 시작되 었을 때 호주머니에 넣어 주며 “호신용으로!”하면서 웃었다.
 
168
이때의 일이 바로 어제의 일처럼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이다.
 
169
누구 하나 종내 자네가 떠나는구나 하고 묻지도 않으며 나 역시 먼저 한마디 따지도 않았으나 서로 마음의 영창(映窓) 으로 통하고 있는 동무들.
 
170
아직도 그 동무들의 손길로부터 흘러 들어온 피의 온기가 내 혈맥 속을 달리고 있는 듯하였다. 동무들이여, 나의 이 행복된 출발을 축복해 다오.
 
171
걸상에 비스듬히 앉아 창가에 흐르는 전원풍경을 더듬어 보며 이렇게 깊은 회상에 젖어 있을 때 헌병 일행이 다가와 아래위를 훑어보며 어디를 가느냐고 묻는다. 차표를 꺼내 보이니 무엇 때문에 가는 길이냐고 다그쳐 묻는다. 미리 생 각해 두었던 대로 창덕성(彰德城)에 주둔해 있는 상등병 조 카를 위문차로 찾아간다고 하여 간단히 넘겼다. 위문 간다는 말이 매우 기특해 보이는 모양으로, “무섭지 않은가, 매일처럼 폭격이 있는데?” “무얼.”
 
172
나는 웃어 보였다.
 
173
그러나 놈들이 이렇게 이 잡듯이 조사하여 나간다면 나를 데리고 가는 공작원이 위험치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일어나 불안스럽다. 그렇다고 멋없이 서서 둘러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일부러 나는 기지개를 펴고 나서 신문을 펴들 었다. 이 실내에 앉아 있는 것일까? 혹은 다른 차실에 있으 면서 이미 무사히 조사를 넘긴 것일까?
 
174
가자! 어서 무사히 가자!
 
175
기차는 쉬지 않고 일로 남하하였다.
 
176
그러나 예정대로 오후 다섯 시 전에 정현(定縣)까지는 대었 으나 이 역에 정차한 뒤에는 까마귀 고기를 먹었는지 움직 일 줄을 모른다. 하차하여 서성거리는 사람들 틈에 끼어 홈을 거닐어 본다. 오늘 아침녘 P51기의 폭격을 받아 끊어진 전방의 교량이 밤중에야 복구되어 개통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177
듣는 말에 석가장역(石家蔣驛)이 얼마 전에 형지없이 파괴 된 것을 필두로 매일 두세 차례씩 강습(强襲)을 받아 몹시 앞길이 위험하다고 하더니 우리도 폭격권 내로 어지간히 가 까이 들어온 셈이다.
 
178
공습에 비교적 안전하다고 할 밤시간을 여기서 이렇게 머 물게 되어 큰일이라고 일인(日人)들이 모여 서서 걱정하고 있었다. 나 역시 걱정스러웠다.
 
179
지평선까지 연달린 광야로만 연상되는 중국 대륙이 이 근 방에서는 지세를 매우 달리하고 있다.
 
180
멀리 서남방으로 오대산줄기를 받아 아성(牙城)처럼 연긍 (蓮亘)한 태항산계가 연보라색의 안개 속에 가만히 잠긴 채 보이지 않는 손길로 짙어 가는 장막을 산과 들 위에 펼치고 있었다. 보잘것없는 조그만 성시(城市)인 탓도 있겠지만 주 민들의 살림이 매우 구차스런 모양으로 보따리를 끼고 어린 애들을 데리고 무어라 주절거리며 차에 기어오르는 주민들의 행색이 대체로 말이 아니었다.
 
181
밤에는 차에 불도 켜지 않았다.
 
182
예정보다 앞서 밤 열시 밤에 발차.
 
183
두어 정거장 지나자 자리가 듬성듬성 비기에 누울 자리를 찾아 옮아 앉는다는 것이 눈알이 어글어글하고 콧수염 밑에 의지적인 입을 굳게 다문 어떤 청년과 마주앉게 되었다.
 
184
앉는 참 아뿔사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드러진 광대뼈며 번듯한 얼굴로 보아 첫눈에 조선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었 다. 보아하니 30세 전후, 나를 보더니 외면을 하며 조그마한 천가방을 베고 드러눕는다. 이 차안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조선 사람이다. 혹시 이 청년이 나를 데리고 들어가는 공작 원이나 아닐까 하는 생각이 새삼스러워 계면쩍었다.
 
185
그러나 다시 다른 자리로 옮아 앉기도 멋쩍은 일이어서 나 역시 그 자리에 누워 버리기로 한다. 얼마쯤 가다가 눈을 떠보니 이 사내는 이미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진 뒤였다. 대 단히 졸리던 참이라 아랑곳없이 나는 돌아누워 또다시 잠이 들어 버렸다.
 
186
오밤중에 승객들이 떠들썩거리는 바람에 놀라 일어나 어디 냐고 물으니 석가장이라고 한다. 모두 기차를 바꿔 타느라 고 법석 끓고 있었다.
 
187
허둥거리며 짐을 메고 내려가 불을 켜고 기다리는 기차 속 으로 올라갔다. 1등차가 한 칸밖에 없어서 대혼란을 이루어 자리를 못잡고 비좁은 통로에 서 있노라니 청년 하나가 나타나 내 륙색을 둘러메며, “저기 자리를 잡았습니다” 하며 사람들을 헤치고 나간다.
 
188
잠꾸러기의 부주의 때문에 이 청년의 마음을 매우 졸이게 했던 모양이었다. 무안하기 짝이 없었다.
 
189
'이 사내로구나.' 듬쑥한 어깨가 믿음직하였다. 뒤로 따라가 내주는 자리에 앉고 보니 바로 앞 자리에 아까 그 콧수염을 단 청년이 웅 크리고 앉아서 가벼운 미소를 짓는다.
 
190
“어서 한참씩 눈을 붙이시오!” 하더니 젊은 청년은 어디론가 다시 자취를 감추었다.
 
191
찻속은 피난민차처럼 무덥고 빽빽하였다.
 
192
아침과 저녁으로 두 차례나 겪었다는 폭격소동을 여기저기 모여 앉아 수군거리고 있었다. 이 역에서 새로 올라탄 패거 리였다.
 
193
남으로 남으로 신경질적인 비명을 내지르며 밤을 새워 일 로 맥진하던 기차가 이튿날 아침 벌 가운데서 갑자기 덜컹 하며 정차하여 모두 앞으로 쏠린다. 의지할 데 하나 없는 스산한 벌가였다. 삽시에 불안한 공기가 떠돌았다.
 
194
이때에 멀리서, “비행기 온다! 비행기 온다!”하고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더니 차동(車憧)이 뛰어오며 바삐 내리라고 소리를 지른다. 승객은 일시에 비명을 지르며 일어서서 서 로 밀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차에서 내리뛰어 말거머리떼 처럼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3등차에서와 화물차로부터도 중 국인들이 울며불며 떠들며 쏟아져 내려온다.
 
195
보퉁이를 진 사내, 다랭이를 든 부인, 뾰족발의 노파, 어린 애, 쿠리(苦力). 벌가는 허겁지겁 흩어지는 사람떼로 한참 동안 어수선하다. 혹은 크리크로 혹은 밭도랑밑으로 혹은 우먹다리를 찾아 은신한다. 부리나케 차에서 뛰쳐 내려온 나는 젊은 공작원의 지휘대로 그의 뒤를 따라가 2백 미터쯤 떨어져 있는 부락으로 달려가 웅덩이 속에 몸을 숨겼다. 시계를 보니 여덟시 반.
 
196
급기야 맑은 하늘을 술렁술렁 끓이는 귀에 설은 금속음이 들려 오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웅덩이 속에서 하늘을 쳐다 보았다.
 
197
“P51의 폭음입니다. 저 구름 새를 보시오.”
 
198
아닌게아니라 흰 구름 새로부터 새하얀 비행기 하나가 아 침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며 나타나─고도는 3천 가량─ 바 로 우리 머리 위에서 급강하로 쏜살처럼 내려오며 휙 전회를 하려는가 하였더니 요란한 기총소사의 총탄성이 터져 나 온다.
 
199
드드드드…… 이윽하여 머리를 들고 보니 비행기는 북쪽으로 향하여 그지없이 유유히 달아나고 있었다.
 
200
공작원과 따로 떨어져 기차 쪽으로 가까이 갔더니 은폐장치인 높은 토벽 사이에 기관차가 대가리를 쳐박고서도 꼭대 기와 옆구리에 수없이 명중탄을 받고 헛김을 불며 시글거리 고 있었다.
 
201
“화부가 죽었다.”
 
202
“노파 한 명이 부상하였다.”
 
203
하고 선로 건너편에서 수선거린다.
 
204
이때에 비행기가 재차 내습이라는 고함 소리다.
 
205
또다시 허둥지둥 달아나면서 쳐다보니 이번은 아득한 상공에서 둥금히 원을 그리며 지상을 휘돌아보고는 성공을 확인 한 모양인지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유유히 사라졌다.
 
206
중국 대의(大衣)를 입은 입은 젊은 일인들이 밭고랑에 늘어 서서 우러러보며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었다.
 
207
“고맛다 야쓰다나(참 한심하군)─”
 
208
우리도 속으로 '고맛다 야쓰다나!' 하였다. 앞으로 기관차가 오기를 기다려서야 떠나게 된다고 하니……
 
209
“저것들이……”
 
210
젊은 공작원은 그 일인들을 턱으로 가리킨다.
 
211
“새로 생긴 특설부대 놈들입니다. 이를테면 특무공작을 주 로 하는 결사대지요.”
 
212
“……”
 
213
“저놈들을 조심하시오.”
 
214
부락에서 촌민들이 살 수가 났다고 계란을 들고 나온다.
 
215
묵장수가 나온다. 낙화생장수, 담배장수, 물장수, 먹을 것이 라면 모두 들고 나온다.
 
216
간밤에 잠이 설었던 탓으로 나는 벌가의 잔디밭 위에 네 활개를 펴고 누워 한잠을 늘어지게 자고 났다.
 
217
이럭저럭 기다린다는 것이 거의 일곱 시간이나 지나서 오 후 세 시에야 기적이 울린다.
 
218
얼마 안 되어 순덕역(順德驛)으로, 거기 도착하기는 네 시 십오 분. 생각지도 않고 있는데 멀리 앉아 있던 젊은 공작 원이 짐을 메고 일어나며 눈짓을 하기에 따라 나서니까 홈 으로 내려서며, “따로따로 나갑시다.” 한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219
창덕까지 차표를 끓은 것이 본시부터 일종의 트릭이었는지 혹은 도중의 조난으로 갑자기 예정을 바꾸었는지 모를 일이다.
 
220
표를 받는 사내 옆에 칼 꽂은 총을 든 헌병이 서 있고 요 소요소에 위병들이 늘어서서 자못 삼엄한 경계였다.
 
221
제일 먼저 나가기는 나…… 무사.
 
222
힐끗 돌아보니 수염 청년…… 무사. 다음에 뒤돌아보지도 못하였다.
 
223
광장 한복판에 중국옷을 입은, 첫눈에 알아 볼 수 있는 일 인이 그림자처럼 서서 나오는 사람들을 멀리서 보살피는 눈 치였다.
 
224
날카로운 이 사내의 눈초리까지 무사히 넘기고 골목 안으 로 들어서서 돌아보니 수염 청년, 공작원, 이런 순서로 적당 히 간격을 두고 중국인들 틈에 껴서 이리로 오고 있었다.
 
225
온몸에 땀이 흥건하였다.
 
 

4. 4. 봉쇄선 백오십 리

227
순조로이 온다면 밤중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228
이것이 거듭되는 사고로 인하여 대낮에 도착했기 때문에 나중에 알고 보니 공작원이 심중 적이 불안을 느꼈던 모양 이다.
 
229
이곳에 일본 부대가 주둔해 있으며 또 가는 길나들이에 일 본 경비대의 토치카가 널려 있다는 사실을 나는 여기에 도 착하여 비로소 알게 되었다.
 
230
우리는 어떤 으슥한 음식점에 짐을 풀어놓았다. 이 성시가 바로 평원 한복판에 자리잡고 태항산험에 대비하고 있는 일 군 봉쇄선의 요점이었다.
 
231
“마음을 단단히 가지고 맛 없어도 많이 들어 두시오.”
 
232
불안하고 초조로운 마음이 가슴속을 설레어 가뜩이나 맛스 러운 소면(素麵)맛이 쓰디써 젓가락에 걸리지도 않았다. 수염을 단 사내는 미소를 지으며 “아마 여기서 부터 북경 요리와도 결별인 모양이죠?” 그 커다란 입에서 나온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역시 소면 맛이 좋지 않다는 말일 것이다.
 
233
나도 빙긋이 웃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인사하기를 주 저하였다. 공작원이 소개하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234
공작원은 시계를 들여다보며 잠시 동안 무엇인가 궁리를 하는 듯하더니 가방 속에서 중국신을 꺼내면서 “떠날 준비를 차리지요.”
 
235
수염을 단 청년도 운동화로 바꾸어 신는데 나만은 도무지 준비가 없는 터이라 다만 시골 성시와 노상에서 유난히 눈에 띌 듯싶은 헬멧을 륙색에 집어 넣으니까 공작원이 “좋소, 좋소.” 끄덕이더니 “그럼 내 한바퀴 돌고 오리다” 하며 나간다.
 
236
수염을 단 사내는 피차 인사도 없이 나와 마주 앉았기가 계면쩍은 모양으로 주인한테 물을 달래서 손을 씻으며 무엇 인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모르는 소견에도 유창한 중국말 이다.
 
237
남 몰래 좀체로 궁금하였다. 역시 동행의 공작원이라고 하 기에는 원 공작원과 그리 친해 보이지 않는다. 나같이 새로 들어가는 사람일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언제나 거림낌이 없는, 너무나도 태연자약한 태도였다. 좀 있어 공작원이 양차 세 대를 몰고 와서 바삐 오르라고 하며 “섣불리 어두워지기를 기다리다가는 실수할지도 모르니 봉 쇄선을 백주에 넘기로 합니다. 앞뒤를 잘 살피도록 하시오.
 
238
선생은 가운데─”
 
239
지시에 따라 나를 태운 양차는 공작원 뒤에 달리고 내 뒤를 수염 단 청년의 차가 따르게 되었다.
 
240
모르는 말 짐작에도 올라탈 때에 일본 군대로 가라는 분부 인 것 같았다. 그 앞을 지나가야만 되는 것일까?
 
241
햇볕이 내려쪼이고 먼지가 풀씬풀씬 이는 누추한 거리를 양차가 줄을 지어 내달린다. 앞에서 공작원이 휘장을 늘이 운다. 나도 눈치를 보아 휘장을 늘이운다. 그러자 총검을 든 군병이 그득히 실린 일군 트럭이 먼지를 일으키며 휙 지나 간다. 거리를 거의 뚫고 나가려 할 즈음 개란 놈이 요란히 짖으며 따라오는 것이 섬찍하여 단장을 휘둘러칠 것처럼 위 협하였다. 개는 놀라 물러서더니 다음부터는 뒤차를 따라오 며 소란스레 짖는다. 미릅나무가 대여섯 높이 있는 크리크 옆에서 까마귀 떼가 까욱까욱거리며 날아난다.
 
242
불그스레한 성벽이 크리크에 묵중한 그림자를 띄고 있었다.
 
243
갑자기 앞차가 서는 바람에 뒤를 따르던 우리들의 차도 멈 추었다. 차부와 공작원 사이에 무엇이라고 어지자지 승강이 가 일어났다.
 
244
길이 두 갈래로 찢겨 한 갈래는 내리받이로 잡초가 무성한 흙언덕 사이로 굽어들었다. 이 두 길 어름에 두서넛 인가가 있으며 그 앞에서 중국 남녀가 유과(油果), 만두 등을 팔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멀거니 쳐다보며 말다툼의 내용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싫었다. 차부가 일본 군대는 이리 가야 된다느니 공작원은 갑자기 이리로 가볼 일이 생겼다느니, 그렇다면 처음 약속과 달라 못 가겠다거니 가자거니 승강이 하다가, 결국은 돈을 많이 낼테니 가자는 바람에 타협이 되 어 우리 일행은 흙언덕의 협로로 내려섰다. 양쪽 언덕이 높 아 눈에 띄지 않을 것이 매우 고마웠다.
 
245
더북더북한 먼지가 뽀얗게 일어 우리를 휩싸 주어 한결 안심이 된다. 이런 길이 가다가도 끝없이 연달렸으며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음이 또한 고마웠다. 차부들이 비틀거리는 차체를 끄느라고 연신 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헐떡거린다.
 
246
우리들은 피차 덤덤히 말이 없었다. 그래도 수염을 단 사내는 무료를 달래려는 듯이 이따금 무엇이라고 이야기를 붙이 나 차부는 숨이 턱에 닿아 외마디 소리로 몇 번인가 대답하 고는 무거운 침묵만이 이 언덕 샛길을 내달린다. 그 대신 바람 한점 새어 들지 못하고 뜨거운 태양 아래 대지는 달아 올라 마치 불잿더미 속을 더듬는 듯하는 먼지 속이었다. 숨이 턱턱 막혔다.
 
247
한 20분 가량 내달린 뒤일까? 앞차가 좁은 길을 가로막으 며 멈춰 서더니 공작원이 내려서 잠시 기다리라는 시늉을 한다. 그러더니 그는 마치 척후병처럼 슬금슬금 언덕으로 기어올라갔다가 한참 만에 내려오면서 다시 차부에게 분부 하였다.
 
248
“자! (罷)”
 
249
얼마 안 되어 한 굽이를 돌아서더니 맑은 하늘이 훤히 내 다보이는 언덕길로 올라섰다. 평한로의 번들번들한 레일이 두 줄기 눈앞을 가로달리고 있었다. 어쩐지 마음이 선뜻하 였다. 공작원이 이 철로의 경계상황을 몰래 정찰한 모양이다.
 
250
“빨리 가자! (快去罷!)”
 
251
소리가 앞차에서 연신 일어난다. 거침없이 철로를 넘어섰다.
 
252
다음부터 우리는 푸른 전원을 달리게 되었다. 들판에는 농 부들이 널려서 김을 매며 어린애들은 밭고랑을 지척거리고 늪가에서는 밭에 물을 대느라고 사내들이 모여서 벅적거린 다. 오래도록 비가 오지 않은 모양으로 푸릿푸릿한 곡초 밑에서 흙먼지가 보슬보슬 일었다.
 
253
우리들의 앞에는 멀리 서남방을 향하여 태항산 줄기가 검 극(劍戟)을 두른 듯이 아아한 산진을 치고 있었다. 그 위에는 양모를 피워 놓은 듯한 흰구름이 움켜 들고 그 변두리를 석양이 오렌지 색으로 물들이며 부채처럼 광선을 펼치고 있 었다.
 
254
이따금 우리들의 차는 조그마한 부락의 뒷길을 흘금흘금 돌아보며 내달린다. 길가 나무 그늘에 앉아서 놀던 애들이 소리치며 뒤따라오기도 하고 촌부녀들이 놀라서 대문 안으 로 들어서기도 한다.
 
255
이렇게 거칠매없이 내달려 다시는 더 갈 수 없다는 데까지 이르러 양차를 돌려보내고 나서 우리는 공작원이 서두는 바 람에 달리다시피 빠른 걸음걸이로 앞길을 재촉하게 되었다.
 
256
“저 마을까지 50리만 갑시다!”
 
257
가없이 먼 산줄기 밑에 마치 둥지를 틀고 앉은 산새처럼 조그만 마을이 숲 속에 잠겨 가물거린다.
 
258
짊어진 륙색의 바랑줄이 어깻죽지에 늘어져 걸음발이 허전 허전하였다. 두서너 마을을 스쳐 지나갔으나 물 한 모금 얻 어먹자는 말도 못했으며 선봉도 그런 눈치 하나 보이지 않 았다. 간단한 생각에 저 마을에는 행복이 사시거니 저 마을 까지만 가면 그래도 마음놓고 다리를 펼 수 있으려니만 생 각하였다. 가다가 오아시스처럼 그늘진 곳이 있었으나 숨을 돌릴 생각도 못하였다. 마치 누가 뒤를 쫓기나 하는 것처럼.
 
259
그리고 저 마을이 이리떼에 쫓겨 가듯하는 우리를 두 팔로 안아 맞이해 줄 어버이라도 되는 것처럼─ 본디 이런 길을 떠난다면 나는 중국 땅에 학병으로 끌려 나왔던 A군과 동행이 되고자 원하였었다.
 
260
용의주도한 지도자를 따라나선 길도 이렇게 무시무시하거 든 오밤중에 병영을 탈출한 그의 가슴속은 얼마나 뛰놀았으랴…… 놈들에게 붙잡히지 않고 바로 들어갔을까? 내가 찾아가는 곳에서 행여나 맞아 준다면 그 얼마나 감격적인 일일까?
 
261
지난해 나는 상해까지 내려가는 길에서 서주에서 하차하여 그를 찾은 적이 있었다. 기미년 만세소동에 남편을 잃은 누 님의 외딸 사위가 바로 그였다. 서주에서 백여 리 떨어진 벌가에 조그마한 촌성(村城)이 7월 염천에 타오를 듯이 무 더웠다. 이 감옥처럼 높은 석벽으로 둘러싸인 성중에서 A군은 나를 발견하자 껴안으며 어쩔 줄을 몰라하였다.
 
262
협구(夾溝)라는 철로 연선의 경비대로 성문을 굳게 닫아 버 리면 이 조그마한 촌성이 글자 그대로의 감옥이었다. 병영을 넘어야 하며 또 성문을 넘어야 하니 이중의 성벽으로 탈 출할 가망이 전혀 없다고 군은 한탄하였다. 피해 보려다 못 해 못 피하고 끌려 나오게 되었을 때 군은 화북에 가거든 용감히 기회를 포착하여 탈주를 결행할 테라고 벼르고 떠난 길이었으나 군에게는 이렇게 조건이 불리하였었다.
 
263
“얼마 안 돼 부대 편성이 달라지면서 저도 자리를 옮게 앉 게 됩니다. 그때에 기회를 엿보아서……”
 
264
군은 이렇게 말하였다.
 
265
“돌아오는 길에 한 번 더 들리겠네마는 정황을 잘 살피고서 하게!”
 
266
“염려없어요. 여기서는 성 밖에 나갈 수가 없으니 말이지……”
 
267
“감쪽같이 해야 하네!”
 
268
이렇게 이르고 떠났다. 성문가에 장승처럼 서서 발길을 정 거장으로 향해 가는 내 그림자를 바래 주며 손을 흔들던 군의 양자(樣姿)가 눈앞에 서물거린다. 그를 데리고 같이 떠나는 길이라면 얼마나 행복된 길일까? 나는 그의 용감성과 총명을 무척 사랑하였다.
 
269
이 A군의 일을 회상할 때 또 하나 잊혀지지 않는 일이 있는 것이다. 바로 그 길로 나는 상해로 내려가고자 한 터였 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대로 차마 직행할 수 없는 마음의 부담이 있었다.
 
270
다름이 아니라 평양을 떠날 때 J 부인이 A 부인의 말을 들 어 알고 역두로 달려와서 자기 남편도 같은 부대여서 그 근 방에 있을 모양이니 찾아 만나 달라고 애원이었다. 그러면 서 양말, 수건, 셔츠 이런 것을 전해 주었으면 하였다.
 
271
신혼 부인의 절절한 부탁이 애처로워 나 자신 쾌히 승낙하 고 떠난 길이나 막상와 보니 중대별로 산지사방(散之四方)이 었다. 하지만 A군으로부터 그의 낭군이 몇 정거장 안 되는 숙현( 宿縣)이란 곳에 있음을 알게 된 이상에는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나는 해가 거밀거밀 질 무렵에 숙현역에 도착하여 거기서 약 반 시간을 걸어 부대로 그를 찾아가 게 되었었다. 위병소의 뒷골방에서 서로 만나 손을 마주 부 여잡았을 때 그의 얼굴이며 몸짓에는 무어라 형용하지 못할 감격과 흥분의 선풍이 휩싸여 돌고 있었다. 그것이 너무도 애브노멀하기 때문에 기이한 느낌이 없지 않을 정도였다.
 
272
두 손을 꽉 붙든 채 한참 동안 치를 떨더니 그의 섬세하고 도 준민한 얼굴에 쭈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간신히 중얼 거렸다.
 
273
“천만 의외입니다. 의외입니다.”
 
274
나는 찾아오게 된 자초지종(自初之終)을 조용히 이야기하였다.
 
275
J군은 심심히 감사의 뜻을 표하며 두번 다시 내 손을 그러 쥐었다. 우리 동포가 몇 명이냐고 물으니까 자기까지 넣어 네 명이라고 하기에 그렇다면 모두 얼굴이라도 보고 돌아가 그들의 집에 편지나마 한 장씩 내어 주고 싶다고 하니까 웬 일인지 그의 얼굴은 비창한 표정으로 굳어졌다. 눈자지에 다시 불기(不期)한 눈물이 어렸다.
 
276
“만나시지 않아도……”
 
277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278
“이 담배와 과자를 우리 넷이서 같이 먹으며 주신 돈도 꼭 백원씩 나누어서 쓸터이니……어둡기 전에……”
 
279
“내 염려는 마시오.”
 
280
“아니 만나시지 않는 게……”
 
281
이 말에 나는 고개를 쳐들고 그의 얼굴을 응시하며 혼자 뜻없이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다. 무엇이라 정체 모를 예감이 나의 가슴속에 스며드는 듯하였다. 저도 모를 말을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282
“조심히들 하십시오.”
 
283
“우리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284
이 말에 나는 미소를 머금으며 다시금 굳은 악수를 하였다. 그러나 영문에서 헤어져 어둠이 내려 덮이던 길가로 나섰을 때 나는 오한 만난 사람처럼 온몸이 와들와들 떨림을 느꼈다. 간신히 역으로 돌아와 양차를 몰고 성내로 들어가 단 하나의 일인 여관에 투숙하였다. 기차가 없었기 때문이다.
 
285
하루 종일 굶다시피 하였지만 저녁밥이 조금도 먹히지 않 았다. 전등 밑에 책을 펴놓았으나 눈앞에 글자가 어른거릴 뿐이었다. 일기책을 펴놓았으나 글씨 한 줄 나가지 않았다.
 
286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까닭없이 불 길한 맘이 일어 구둣발 소리만 나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287
이렇게 전전반측(輾轉反側)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한시를 치는 시계 소리를 듣고 난 지 얼마 가량의 일이었을까……
 
288
무시무시하도록 달이 밝은 밤이었다.
 
289
유리창가에 거무스레한 그림자가 두셋이 나타나더니 덜컹 문 여는 소리와 함께 사내 둘이 유령처럼 들어섰다. 동시에 등불을 켜라는 일어 호령이다. 떨리는 몸을 가까스로 일으 켜 전등 스위치를 돌렸더니 뾰얀 불빛 아래 중국옷을 입은 일인 두명의 권총부리가 바로 내 몸뚱이를 향하고 있었다.
 
290
하나 어쩐 일인지 권총 앞에 몸을 맡겼으나 응당 이런 일이 있을 줄로 미리 짐작한 것처럼 의외에도 나도 태연한 태도를 가질 수 있었다. 손을 들라고 외치더니 달려들어 한 사 내는 내 몸뚱이를 뒤지고 나서 짐가방 밑까지 뒤지각질 훑 어보고 털어 보고 하며 또 한 사내는 준엄히 문초한다.
 
291
“부대에 갔던 일이 있느냐?” “무슨 일로 갔었느냐?” “누구누구와 만났느냐?” “어디서 왔느냐?” “어디로 또 갈 모양이냐?” 이렇게 캐묻고는 내일 아침 남경행할 예정을 연기해야겠다 고 한다.
 
292
그럴 수 없다고 설명하면서 대체로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그 점은 대답할 수 없으나 내일 아침이면 자연 알게 되리라 고 하며 신분증명서를 꺼내 보인다. 예상대로 헌병들이었다.
 
293
무릎마디가 사르르 떨렸다. 싸이드카에 실려 밤중으로 헌병 대에 끌려가게 되었다.
 
294
병대가 출동하여 골목마다 삼엄하게 경계중이며 검은 그림 자들이 또한 이 골목 저 골목 사이로 밀려다니고 있었다.
 
295
아무래도 병영 안에 무슨 큰 일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J군의 심상치 않던 기색이 유별하게 기억 속에 되살아 오른다.
 
296
밤이 맞도록 성안이 술렁거렸다. 여기저기서 호각 소리가 일어난다. 새벽녘에야 대장이 나타나 취조를 시작하였다. 시 재로 단서를 잡고자 하는 초조한 태도로 마구 강박이다.
 
297
일체 부인으로 시중할밖에 없었다. 심중이 좋지 않은 모양 으로 언성이 높아질 즈음 부대의 부관이 승마로 달려 나왔 다. 만나고 보니 동경에서 같은 집에 하숙하고 있던 낯이 익은 사내로 나를 '킨상'으로만 알지 이름은 알지 못했던 모 양이라 바로 당신이었냐고 눈이 둥그래진다. 나는 도리어 가슴이 내려앉았다. 유치장으로 끌려다니던 시절의 일이어 서 생소한 이보다 더 불리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 그는 나를 알아보자 다짜고짜로 이런 소리를 하였다.
 
298
“킨상, 왜 네 명을 다 만나 보지 않았소?” 어리둥절한 노릇이었다.
 
299
“대체 무슨 일이기에?” “무슨 일이라니 도망쳤습니다.”
 
300
“도망을 쳐? 누가?” “J군 혼자 남고 세 명이 몽땅……”
 
301
이미 진상은 뻔한 일이었다. 무슨 운명의 악회인지 J군 이 하 네 명의 조선인 학도병이 탈주하기로 작정하였던 바로 그날 저녁 공교롭게도 내가 찾아 들어간 것이 분명하다. J군은 형용 못할 감격과 당황속에 휩쓸어 넣게 된 것도 모름지 기 무리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내게 누책이 덜 미치게 하 고자 다른 여러 동무들을 못 만나게 한 것도 미루어 수긍되는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J군이 나를 위하여 혼자 남은 것 이다. 실로 이 때문에 무서운 오해가 풀리게는 되었으나 동 무들만을 떠나 보내는 그의 심사는 어떠하였을까……
 
302
기차가 들이 닿아 차 속에 몸을 싣고 앉으니 하염없이 눈 물이 흘러내렸다. 자꾸자꾸 눈물이 흘러내렸다. 필경 밤 열 한시나 열두시에 탈출한 것으로 친다고 해도 날이 밝도록 아직까지 붙들리지 않은 모양이니 이미 성공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다시 없는 좋은 기회를 나 때문에 놓친 것이 아니 고 무엇이랴?
 
303
자기 일신의 운명을 걸어 놓고 남을 위하여 희생하게 된 그의 심정이 가슴속에 사무치도록 눈물겨웠다.
 
304
거의 한 달 뒤에 상해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다시금 서주에 들르게 되었다.
 
305
J군을 다시 병영으로 찾아 만나 볼 용기는 좀체로 없었으 나 협구(夾溝) 경비대에 있는 A군의 종적이 마음에 거리껴 서 그 뒤의 확실한 일을 알고서 돌아가고자 한 것이다. 서 주에 내려서 알아보니 A군이 바로 숙현 부대로 이동되어 있 었다. J군이 남아있는 부대, 사단(事端)이 벌어졌던 부대─ 감히 찾아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하나 어떻게 생각하면 군을 다시 만나냐 할 의무도 느끼는 듯하였다. 그래 이틀 동안을 두고 주저하던 끝에 마침내 용기를 내서 포구행(浦 口行) 차에 오르려고 역으로 나갔다. 그날따라 대단히 무더 운 날이었다.
 
306
승객들이 모두 홈에서 내려서서 발차하기만 기다리고 있었 다. 한 손에 사이다병 대여섯을 묶어 들고 한 손에 과자봉 지를 들고서 차에 오르려는 순간이었다. 셔츠바람으로 내려 서는 숙현부대의 부관과 승강대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 다. 나를 알아보자 삽시에 얼굴이 찔리는 듯하였다.
 
307
“어디를?” “바로 당신의 부대로 가는 길입니다. 내 조카가……”
 
308
“누구인데?” “A상등병……”
 
309
“달아난 줄 모르오?” 의아스런 눈초리였다. 가슴속에서 심장이 튀어나올 듯하였다.
 
310
“아니 무엇이오?” “사오 일 전에 두 녀석이……”
 
311
나는 작별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마치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허겁스레 달려 나와 그날 밤차로 총총히 귀국의 도상에 오른 것이다.
 
312
둘이서의 탈출! J군과 같이 결행한 것이나 아닐까? 그렇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이랴! 나 개인의 책임도 한결 가벼워질 듯하였다.
 
313
일 년이 넘도록 그 뒤의 그들의 소식은 영 까마득하였다.
 
314
하나 이 A군의 일과 헌병대의 일이 귀국한 뒤의 나를 무척 괴롭게 만들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315
“바로 가기는 갔을까?” 들리는 말에 의하면 한 부대에 있던 학도병 형제가 손에 손을 마주 잡고 탈주를 하다가 형은 총에 맞아 쓰러지고 동 생을 붙들렸다는 둥 누구는 전장에서 수류탄을 안고 자살하 였다는 둥 뛰다가 부락에서 한간에게 유인되어 체포되었다는 둥 소름끼치는 소리뿐이다.
 
316
이네들이 피눈물을 머금으며 왜놈들의 총칼에 몰려 나가던 정경이 바로 어제의 일같이 눈에 선하다. 그리고 슬기로운 이 자제들을 일제의 사형장으로 내보내며 가슴을 치던 뼈저 린 심정이 다시금 가슴속에 새로워진다.
 
317
왜놈의 침략전쟁을 위하여 피를 흘릴 리 없다고 떼를 지어 깊은 산속으로 도망하던 사나이, 남 몰래 국경을 넘어 북으 로 떠나던 사나이…… 반대하던 끝에 검거되어 강제노역장 으로 끌려나간 사나이, 묵묵히 잡혀 들어가 군대 안에서 폭 동을 계획하다가 군사재판에 넘겨진 사나이…… 그리고는 총 쏘는 법, 칼 쓰는 법을 배워 가지고 병영을 뛰어넘어 용 감히 항일진지로 달아난 우리의 청년학도들…… 이네들만이 아니었다.
 
318
벌써부터 수천만의 사랑하는 청년들이 이른바 지원병 명색 으로 혹은 강제소집으로 놈들의 총알받이로 붙들려 나간 것 이다.
 
319
어떤 사나이는 밭머리에서 혹은 부대를 파던 몸으로 어떤 사나이는 신음중의 병상에서 탄갱 속에서 공장 안에서 어디 론가 가는지도 모르고 끌려나갔다.
 
320
동네 사람은 울며 이를 갈았고 어버이는 부여잡고 매달려 울다가 발길로 걷어채이고 친지들은 뽑아 돌려 숨기려다가 놈들의 모진 채찍 밑에 쓰러지고 하였다.
 
321
이렇게 끌려나가는 광경을 바라보며 피에 젖은 혀를 날름 날름 내두르며 미소를 짓던 일경의 앞잡이와 친일배들! 그 러나 이들은 결코 도살장으로 묵묵히 끌려 나가는 축우의 떼무리에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322
우리 민족의 젊은 주인공들을 사지로 내보내는 가슴 아픔 이 여간 아니었으나 그들에게 우리들의 기대하는 바도 또한 적지 않았었다. 이네들은 정녕 우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었다. 포악한 일본 군대 안에서 업신여김을 받고 불의의 전지에서 아까운 피를 흘리는 가운데 나라 없는 설움을 더욱이 뼈아프게 느꼈을 것이다.
 
323
싸움의 옳고 그름을 판연히 깨달았을 것이다.
 
324
마침내 원수를 향하여 열 명 스무 명씩 이렇게 일어나 싸 움의 칼을 들기 시작하였다.
 
325
이런 의미로 볼 때에 이 화북전야로 끌려 나온 이는 그래 도 보다 더 행복스러웠다고 할 것이다. 맞아들일 우리의 진 영이 가까이 있으니.
 
326
“이 길을 같이 걸어 들어간다면 얼마나 행복스러울까?” 이런 두서없는 회상과 감개에 젖으며 조여 걷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수염을 단 청년이 소리를 지른다.
 
327
“자전차 두 대가 뒤를 따라옵니다.”
 
328
뒤통수를 망치로 땅 하고 얻어맞은 것 같았다.
 
329
앞서 가는 공작원에게 다급스레 전달하였다. 그도 놀라 돌 아섰다. 아니나 다를까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두 대가 가물 가물 달려온다. 그 뒤를 커다란 개까지 한 마리 시글거리며 따르고 있었다. 찬바람이 온 몸뚱이를 엄습하는 듯하였다.
 
330
큰길을 피하여 일부러 이리저리 샛길로 접어들어 온 우리 일행의 뒤를 황망히 따라오는 것으로 보아 미상불 우리들에 게 관련된 일임에 틀림없다. 이런 시골 농민치고는 자전차를 달릴 사람이 없을 법하였다. 실상 우리는 이날 기나긴 노상에서 자전차라고는 하나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331
'헌병' '위병' 공작원을 돌아보았다. 돌미륵처럼 우뚝 솟아선 그의 적동 색 얼굴 위에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332
“동무들 앉읍시다.”
 
333
거쉰 목소리로 이렇게 한마디 중얼거렸다.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담배를 꺼내 물었으나 흥분하여 성냥불이 바로 그어지지 않았다.
 
334
공작원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335
“이런 때 서툴게 뛰려다가는 실수하기가 쉽소. 아직까지 알려 드리지 못했소마는 바로 저 마을에도 일군 경비대가 주둔해 있습니다. 아마 그놈들인지도 모르겠소.”
 
336
가슴이 뚱하였다. 천하처럼 믿고 가는 곳에 바로 일군 경 비대가 있다고 하니 얼마나 놀랄 일일까? 그는 우리들의 얼 굴을 한 번 흘낏 쳐다보더니 미소를 지으려고 했으나 입술 이 푸들푸들 떨릴 뿐이었다.
 
337
“그러나 염려할 것 없습니다. 안정하십시오. 만약 저것들이 왜놈이라면 일군 경비대에 물품 납입하러 가는 길이라고 선수를 쳐야 할게요.”
 
338
“나는 장사꾼이라고는 할 수 없을 테니 옛날 동무인 여러 분을 차중에서 우연히 만났다고 합시다.”
 
339
“좋소.”
 
340
공작원은 나의 제의에 동의하였다.
 
341
“나는 동패수매인(銅牌蒐買人), 동무는 재목상…… 거래가 맞소. 그래 저것들이 정말 왜놈인 경우에는……”
 
342
“제가 먼저 말을 걸기로 하지요.”
 
343
나의 발언에 공작원은 또다시 끄덕하였다. 이리하여 우리 일행은 담배를 피워 물고 도리어 그 자전차 일행을 기다리 게 되었다.
 
344
개짓는 소리가 요란스레 가까이 들릴 때는 자전차가 어지 간히 다가온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악마의 사자들을 일 부러 눈 주어 바라보리만치 대담하지 못하였다. 수염 단 청 년은 네 활개를 펴고 옆에 드러누워 풀잎만 물어뜯고 있었 다. 이때에 갑자기 공작원이 중국말로 무엇이라고 외치면서 일어났다.
 
345
십오륙 세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소년과 20전후의 소년 그 리고 셰퍼드, 그들이 자전차를 던지고 다가서자 공작원은 나이 어린 소년과 굳게 악수하였다.
 
346
본래부터 친밀한 교접(交接)이 있는 눈치였다.
 
347
소년은 담배를 한 대 받아서 앙상스레 붙여 물더니 공작원에게 무엇이라고 수군수군 이야기하였다. 공작원은 때때로 질문도 하고 끄덕이기도 한다.
 
348
“우리의 통신원이오. 앞길에 이상없습니다. 동무, 자전차를 탈 줄 아시오?” 피곤한 것으로 보아서는 마음에 없지도 않았으나 사양하였다.
 
349
나이 어린 소년은 자전차로 저만치 앞서 가며 때때로 뒤돌 아보면서 손짓으로 신호를 한다. 차차 선들바람이 일며 전 원은 보랏빛 안개에 잠기기 시작하였다. 땅거미 질 무렵이 었다.
 
350
20전후의 소년은 개를 데리고 자전차를 끌며 우리들의 뒤를 묵묵히 따라온다. 공작원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우리들을 인도해 가면서 이렇게 중얼거린다.
 
351
“멋적게 되었군요. 우리들의 뒤를 따르는 저 애는 저 마을에 사는 조선 사람 금강상회의 사환입니다. 주인 녀석은 동 패장사를 하며 일군 경비대에 정보를 제공하여 왔지만 우리 들의 끄나플 노릇도 때때로 해줍니다. 우리 일행이 도착하 리라는 통지를 받고 통신원이 정거장에 나와 기다리랬더니 기차가 연착되어…… 망할 녀석, 낮잠 자느라고 도착된 줄 도 몰랐다는군요…… 그래 퍽 뒤에야 알고 허겁지겁 따라 오다가 순덕에 심부름 갔다가 오던 저 사환애와 도중에서 만나 할 수 없이 동행이 되었다나요.”
 
352
“저 애를 곧 돌려보내서는 안 되겠군요.”
 
353
수염 단 청년이 내 얼굴을 돌아본다.
 
354
“전황이 일군에게 불리해지는 일방 팔로군과 우리들의 손길이 감자넝쿨처럼 자꾸 뻗어 들어오니까 금강상회 주인도 두 다리를 걸쳤지요. 요즘 와서는 우리에게 단단한 추파를 보냅니다. 생명과 재산이 아까워 좀처럼 밀고도 못하겠지만 만약을 염려하여 저 사환애는 안전지대까지 데리고 들어갑시다.”
 
355
밭도랑 밑을 저핏저핏 더듬어 나가 숲 사이를 꿰뚫은 뒤에 토성을 끼고 돌아 부락안으로 들어섰을 때에는 이미 어둑어 둑하였다. 통신원이 손을 들어 가리키는 대로 이 골목 저 골목 속으로 하나하나씩 숨어들었다. 가슴속이 두 방망이질을 한다.
 
356
일군의 토벌 침해가 얼마나 심했는지 무너진 담, 떨어진 지붕, 총탄자리, 불에 타 꺼멓게 죽은 나무, 너절하고도 스 산한 마을이었다.
 
357
이따금 걸레처럼 말라빠진 개가 발밑을 달아나며 짖는다.
 
358
우리 일행은 골목안 어느 아늑한 집 속으로 새어 들어갔 다. 금상상회 사환애와 셰퍼드도 들어섰다. 얼마 안 되어 젊은 사내가 나타나 공작원과 악수를 하는데 보니 허리에 삐 죽이 모젤이 보인다. 공작원의 소개로 그가 중국 공산당원 으로 군공작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359
사내는 주인 노부부를 서둘러 더운 물을 끊여 먹인 뒤에 밀기와리떡에 고추와 마늘즙의 저녁찬을 내놓는다. 촌가로 서 이게 고작 잘 먹는 음식이란 말에 이 부근 농민들의 비 참한 생활을 가히 추측할 수 있는 듯하였다.
 
360
벌써 해는 태항산계 속에 떨어져 밤이었다. 하나 우리는 일군 경비대가 경계의 철망을 펴고 있는 곳인만치 한 시 한 분도 머뭇거릴 수 없었다.
 
361
저녁이 끝날 무렵 어떤 중년 사내가 보따리를 들고 들어왔 다. 중구 헌옷과 신발이었다. 우리가 복장을 갈아입으니까 주인 영감과 통신원이 우리들의 짐을 자루에 틀어박고 멜대의 양 끝에 달아맸다.
 
362
“밝기 전으로 90리만 달립시다.”
 
363
팔로 공작원과 통신원, 짐꾼으로 사환애와 주인 영감, 그리 고 우리 셋, 이렇게 일행 도합 일곱 명, 개도 달렸다.
 
364
일군 경비대에는 불빛이 보였다. 이것을 오른쪽으로 200미 터 가량 떨어져 발소리도 날새라 밭도랑 길을 돌아 두덩을 무사히 넘겼다.
 
365
휴─숨길을 돌렸다.
 
366
그믐이라 달도 없는 별바다에 전원은 고요히 잠겨 있었다.
 
367
담배도 엄금하여 피워 물지 못하고 말 한마디 없이 밭두렁 길을 십 리쯤 단숨에 대어 어떤 무너진 성문을 뚫고 들어가 니 멋없이 길게 뻗친 부락이었다. 길가에는 촌민들이 줄렁 줄렁 나와 모여앉아서 우리들의 행색을 의아쩍게 더듬어 본 다. 길 모퉁이를 돌아설 때마다 어둠속에서 누구냐고 고함을 치며 나서는 자가 있었다. 팔로 공작원이 무엇이라고 일 러주어 말없이 통과된다.
 
368
사람들은 보이지 않으나 길가 여기저기에 담뱃불만이 번쩍 거렸다. 어디선가 호궁(胡弓) 소리도 들려온다. 우리들은 이 부락 끝의 어떤 대장간으로 들어가 그 뒷뜰 안에 들어섰다.
 
369
여기서 다시 중국옷을 바꾸어 입고 짐꾼도 갈게 되었다.
 
370
수염 단 사내가 신열이 나면서 코피를 쏟으며 대단히 괴로 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지체할 수 없는 일이었다.
 
371
팔로 공작원이 나가서니 어디선가 나귀를 한 마리 얻어 가 지고 돌아왔다. 그래 나귀에 동행을 싣고 밤중길을 떠났다.
 
372
가도가도 끝없이 멀고 먼 웅덩이 하나 없는 강판이었다.
 
373
혹은 백사지, 혹은 돌작밭, 혹은 잡초밭을 신발도 끌지 못하 며 서쪽으로 서쪽으로─아직도 일군의 봉쇄선 내였다. 그러 나 오밤중에도 길목에서는 촌민조직으로 된 감시원이 누구 냐고 소리를 지르곤 하였다. 갑자기 놀라기도 하곤 하나 한 편 마음이 든든하였다.
 
374
소 휴식 세 번. 산속에서는 부엉이가 울고 있었다.
 
375
언덕 밑을 지나갈 때 한번은 따웅 하고 총소리가 터졌다.
 
376
요란한 산울림을 일으킨다.
 
377
우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숨소리를 죽였다. 근처의 일군 토치카에서 터지는 소리라고 한다. 다시 사방은 괴괴하였다.
 
378
십여 분 뒤에 우리는 또다시 일정한 간격을 두고 행진을 시작하였다.
 
379
절대로 이야기하지 말 일, 꼭꼭 따라설 일, 만일의 경우에 도 반드시 지휘 밑에 움직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380
높은 산모퉁이마다 어둠 속에 우뚝우뚝 솟은 토치카 앞을 숨을 죽이고 조심히 통과하면서 모래 언덕을 대상(隊商)처럼 횡단하여 마침내 저 유명한 태항산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381
보행 90리, 그믐달이 뜨는 새벽 3시 15분.
 
382
우리 일행은 숨을 돌릴 사이도 없이 나귀도 가다가 서고 개도 뒷걸음치는 바위투성이의 좁은 길을 이리 꼬불 저리 구불 산등허리에 새둥지처럼 달린 조그마한 마을에 도착하 였다. 공작원은 먼저 뛰쳐 올라가 어떤 민가의 문을 두드리 며 조선말로 동무들의 이름을 부른다.
 
383
“나 현×(玄×)야, 현×(玄×)야……”
 
384
몇 마디 사이에 안으로부터 환호성이 일어나더니 대여섯 명이 셔츠 바람으로 뛰쳐나왔다.
 
385
“이제야 오냐?” “북경서 오는 길인가?” “다행일세 다행이야.”
 
386
우리들은 컴컴한 방안으로 인도되어 등잔에 불을 켜고 나 서 인사를 교환하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비로소 나는 수염 단 사내의 성이 백가임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국내 조직체로부터 파견되어 연락차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387
그는 빙글거리며 나와 악수하면서 제 이름을 처음으로 고백 했으며 공작원도 다시금 나의 무사도착을 축복하여 주며 제 이름을 알렸다.
 
388
현×, 두 자 이름이었다.
 
389
이곳에 있는 동무들은 적구─우리들이 살던 곳을 이제부터는 이렇게 부르게 되었다─와의 연락공작과 물자교역의 일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었다. 군사상으로 말하면 초소요, 정 치상으로 말하면 연락참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390
모두 젊고도 씩씩한 동무들이었다. 분주히 옷을 주워 입으 며 새벽밥을 짓겠다는 것을 굳이 사양하고 그냥 자리 위에 쓰러지듯이 드러누웠다. 졸리기보다도 곯아떨어지게스리 피 곤하였던 것이다. 반가움에 겨워 그네들은 날이 밝도록 이 야기를 주거니받거니 그칠 줄을 모르는 듯하였다.
 
391
다음날 낮때까지 늘어지게 자고 나서 눈을 부비고 일어나 니까 백 동무는 내가 문인답지 않게 관우처럼 코를 골더라 고 웃으며 충혈된 눈을 섬석였다. 현 동무는 바로 첫잠이 든 참이었다.
 
392
산 동무들은 손수 가꾸어 닭알을 팔아 용돈을 쓰던 종지닭을 잡아 우리가 자는 사이에 밀체비를 만들어 놓고 일어나 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393
이때에 편복(便服) 위에 탄대(彈帶)를 두르고 총을 멘 한 동무가 뛰어들어오더니 현 동무를 발견하자 함성을 지르며 휩쓸어 앉아 일으키고 한 손으로 잔등을 두들긴다.
 
394
“이놈아 인제 왔어? 현 동무, 나야 박사다! 보초로 나갔기 때문에 몰랐었네…… 에이구 이 자식이 이제야 왔구나!”
 
395
현 동무는 으…… 으…… 하며 그냥 잠꼬대를 하며 다시 자리에 쓰러진다.
 
396
여느 동무들은 쉬─쉬─하며 깨우지 말라고 꾸짖으며 자칭 박사 동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원문】제1부 탈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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