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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새벽 ◈
◇ 이 날이 흐리기 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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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1.10~
채만식
1
아름다운 새벽
2
8. 이 날이 흐리기 전에
 
 
3
'대체 영감이 날치야! 어디서 용힌 저렇게 새파란 색시를 또……’
 
4
화선은 새삼스럽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제 집 대문간으로 들어서다가 무심코 해끗 다시 돌려다본다. 홍주사와 그의 아낙(이라는) 용순이 어깨를 맞 비빌 듯 나란히 그새 벌써 저만치 걸어가고 있다.
 
5
임바네스로 어깨를 싸고 솜버선에 슬리퍼 구두를 신고 아깃아깃 여덟팔자걸음을 걷는 홍주사와 비단 양말에 쌘 몽실몽실한 두 종아리가 탄력 있 이 두루마기 아랫자락을 차헤치는 걸음매만 하여도 우선 발랄한 젊음을 느끼게 하는 용순과…… 이 한 쌍이 바야흐로 시방 동부인이란 걸 하고 나섰거니 하면, 차마 정시(正視)하기도 민망스런 부조화가 아닐 수 없었다.
 
6
한 십여 일 전에 화선은 이 집으로 이사를 왔었다. 그리고 바로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지붕을 같이한 이웃이라 이사 온 인사를 갔더니 뜻밖에도 저 두 상이 딸 같은 색시와 새살림을 차리고 있었다. 주책망나니가! 라고 웃었으나 쯧 보통이지야고, 예사로 여겼고…… 그날부터 곧 화선은 용순과 친해졌다.
 
7
화선은 용순의 북실북실하니 심덕 무척 좋게 생긴 얼굴이 첫눈에 눈에 들었다. 두드러지게 어디가 이쁜 데는 없어도 그래도 이뻤다. 놀음 세월이 없어서 밤낮으로 그는 와서 놀며 살다시피 했었다. 그러면서 용순이 말 하는것, 마음 쓰는 것이 모두 어리석달 만큼 유순하고 모진 구석이 없는 데에 아주 그만 홀딱해버렸다.
 
8
용순도 화선이 실없이 좋았다. 홍주사의 말대로 하면, 기집이 좀 까불고 수선스럽 기는 했으나 그 까불고 수선스럽고 한 것이 용순은 별로 성가신 줄도 싫은 줄도 모르겠었다. 저의 집 드난이나 행랑사람들에게 하는 것으로 보아 결기와 인정이 있어보였다. 그런 결기와 인정 있음이 더우기나 용 순은 퍽 그를 따르고 싶게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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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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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선은 둘이의 그렇듯 어울리지 않는 뒷모양을 빙그레 웃으면서 잠깐 바라보고 섰다가 갑자기 불러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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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사와 용순이 한꺼번에 고개를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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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선은 실상 홍 주사더러 '제발 좀 따로 떨어져서 가시요!’ 하고 조롱의 말을 하렸던 것이다. 그러나 용순의 그 젖애기처럼 무심히 웃는 얼굴을 보니 아무리 농담이라도(새겨 들으면 뼈 아파할) 그런 소리는 하기가 안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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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선은 그래서 얼른 다른 말로 둘러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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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문 혼자만 재밀 보러 가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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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라니?"
 
16
홍주사는 도리어 다잡듯 그러면서 옆에 섰는 용순을 돌려다보고 벌씸 웃는다. 뚝뚜욱 등이라도 두드려 주고 싶고 사뭇 들이 귀여워 못하겠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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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홍주사는 용순이 귀여웠다. 들쳐 업고 덩실 한바탕 춤이라도 추고 싶도록 그는 이 어린 '색시’가 귀여웠다. 자연 기쁨이 흘러 넘치던 것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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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쁘기는 용순도 기뻤다. 그는 홍주사가 저를 귀애하는 것처럼 저도 홍주사를 '사랑……’ 하는 건지 어쩐 건지 그것은 몰랐다. 아직껏 그런 생각은 해본 일도 없었다. 또 해보았자 모르기가 쉬웠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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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만족할 따름이었다. 홍주사의 해주는 모든 것이 만족했다. 그래서 기뻤다.
 
20
오래지 않아 시부모님의 승낙이 나면 떳떳이 그때는 시댁으로 들어갈 것을 그는 믿었다. 또한 만족이었다. 그래서 기뻤다.
 
21
장차는 친정집을 도와줄 것으로 홍주사의 언약이 있었다. 그것을 용 순은 믿었고 더없이 만족했다. 그래서 기뻤다.
 
22
혼인 예식을 남몰래 속살로 한 것이라든가 남편 된 홍주사의 나이 오십이 가깝다 든가 이런 등속의 미흡은 그러한 여러 가지 만족과 및 그 약속에다 대면 족히 문제삼을 것도 못되었다. 따라서 용순은 얼마든지 기뻐해도 좋았다.
 
23
기뻐할 줄만 알았지 한 불길한 그림자가 뒤를 밟는 줄은 그러나 모르고 둘이는 태연히 종로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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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으로 향하던 길이었으나 우선 길 옆의 남양상점엘 들렀다. 둘이는 함께 종로를 나올 적이면 반드시 남양상점에 들러, 그들의 복받은 혼인 중매를 서준 이곳 주인 남주사에게 경의를 표하기를 잊어버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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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상점의 남주사는 용순과 홍주사를 위하여 월하빙인 노릇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전부터도 하나는 주인으로서 하나는 친구로서 각각 인연과 교분을 맺고 지내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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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사는 지물포 남양상점의 이층을 빌어 작년 늦은 가을까지 근 십 년 동안이나 건축사무소를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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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야 단순히 집을 빌어쓰고 빌려주고 하는 주객 관계에 불과했으나 이윽고 둘이는 한가한 때의 이야기벗이 되었다. 나이가 서로 비슷비슷하여 이야기가 곧잘 어울리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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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점심때면 같이 식사를 하러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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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 다음엔 종종 같이 술을 먹으러 다녔다. 같이 술을 먹으면서도 소위 지기상 합하여 단단히 친구가 되었다. 그러기를 근 십 년 하고 나니 이만 저만 찮은 지기지우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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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순은 소학교를 마치고 내내 집에 들어앉았다가 다 늦게 작년 여름부터 남양 상점의 여점원으로 와서 있었다. '여점원입용(女店員入用)’이라고 써 붙인 것을 보고 마침 직업을 얻으려던 참이라 허실삼아 물어본 것이 당장 그 자리에서 남주사의 구두시문(口頭試問)에 무난 합격이 되었었다. (무론 누가 당했어도 낙방이 될 염려가 없는 구두시문은 구 두 시문 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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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사는 지인지감이 무던했던 싶어 현금을 만지는 레지스터로 여 점원을 채용 하려면서 그 부모와 당자더러만 신칙을 했을 따름 '유력한 자산 가의……’ 보증도 받지 아니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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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반 년 남짓한 주객이었지만 남주사는 용순을 매우 신임하고 귀여워도 했다. 용순도 남주사를 아저씨라고 부르면서 잘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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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맺어진 인연이었고 그 인연 그 주선으로 필경은 혼인까지 하게 되고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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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이 되기 바로 십여 일 전이었었다. 가게를 파하고 돌아가는 용순을 남 주사가 자기 집으로 조용히 불러, 마땅한 혼처가 있다면서 홍주사의 말을 내놓는 것이었었다. 연전에 상처를 했고 자녀간 소생은 없고 재산은 오륙 십 만원 실하고 충청도의 양반이요, 사람이야 너도 가끔 보아서 아는 바 더말 할 것도 없고, 오직 한가지 나이가 좀 많은 게 흠절이나 실상 남자 나이 마흔두 살쯤 별반 과하달 건 없고, 그러고 만일 혼인이 되기만 하면 너의 집안도 힘을 볼 것이고…… 대범 이러한 내용과 조건이었다.
 
35
용순은 부끄럼을 타기 말고도, 속히 어떻다고 할 수가 없었다.
 
36
'마흔두 살이나 먹은 새서방? 이층에 들었던 바로 그 홍주사 으런? 그이가 새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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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생각하면 까르르 웃음이 나올 것도 같았다. 그러나 또 어떻게 생각 하면 상관없는 거도 같았다.
 
38
'그렇지만 그렇게 좋은 자리로? 큰부자에 양반이요 한 그런 좋은 자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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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히 겁이 나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재미스런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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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것은 이렇게 얼떨떨했으나 여부없이 귀에 차악 안기 기는
 
41
'…… 너의 집안도 힘을 볼 것이고……’ 라든 이 말이었다. 후취라는 것, 나이 많다는 것, 너무 분에 넘치어 겁이난 다는 것 등의 떠름함을 힘있게 배제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42
이튿날 용순어머니는 남주사를 만나 이야기를 들은 결과, 우선 가합한 줄로 대답했다.
 
43
그러나 박덕대 ——— 박재근은 아낙이 와서 그 상의를 하는 말에 고개를 가로 저 었 다. 사십이 넘어 오십줄에 앉은 사람에게 딸자식을 후취로 주기가 마음에 걸린다는 것이었었다. 항차, 그 덕을 보자 고서야……
 
44
이러는 남편을 누누이 달래어 겨우 응락을 받았고, 혼인은 불일성지로 진행이 되었었다.
 
45
말이 나와가지고 결정이 되기까지 불과 사오 일이었는데, 그 사오 일 동안에, 신랑 홍주사는 나이를 한목 세 살이나 더 먹는다는 재주를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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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매애비 남주사는 일껏 혼인이 다 작정이 되고 난 자리에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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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홍주사가 올해 마흔둘인 줄 알았드니 병신생(丙申生) 마흔 다섯 이드군요?"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지날 말하듯 했다.
 
48
용순어머니는 기가 막혔다.
 
49
'마흔둘도 과한데 마흔다섯이라니! ……’
 
50
마흔 다섯 이면 장모 될 자기보다 한살 위요 장인과는 같은 동갑이었다.
 
51
용순어머니는 그러나 자기 자신의 의견이 어떻다기보다도 남편이 다시 반대를 할 터이어서 걱정이었다.
 
52
"말이 그렇지 갓 그저 마흔밖엔 안돼 보입넨다. 용순이도 늘 보는 배…… "
 
53
"……… "
 
54
"그러구 저러구, 마흔둘이나 마흔다섯이나 얼마 상관이 아니니깐 드루…… "
 
55
"……… "
 
56
세 상일이란 둘러댈 따름이었다.
 
57
이십오 전이면 적당한 물건을 사십이 전에 흥정을 했다. 했는데 삼 전을 더 불러 사십오 전을 내라고 한다. 사람과 형편 따라 너무 비싸다고 파의를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58
그러나 정히 아쉬우면
 
59
'아따 기왕 비싼 줄 알고 해논 흥정…… 십칠 전 비싸나 이십 전 비싸나 삼 전 상관이니 쯧……’ 이라면서 그대로 살 수도 있는 것이었다.
 
60
용순어머니는 딸에게만 알리고 남편에게는 숨기고서 닷새 앞으로 택일이난 벼락혼인 준비를 부랴부랴 서둘렀다.
 
61
어물쩍 준비가 되고 내일이 혼인날인데 별안간 오늘 저녁에 큰 말썽이 뒤집어졌다. 말썽하고도 약간 요전날 신랑이 사오 일 동안에 나이를 서너 살씩 집어먹은 따위가 아니었다.
 
62
홍주사의 양친이 원체 완고한 노인들이 되어서 소위 '신식 여학생 며느리를……’ 더우기나 종로바닥의 가겟방에 나와 앉아서, 뭇놈 눈총 쏘여 가며해 뜩 거리 던 새악시를, 며느리로 맞아들이기를 절대 불응한다는 것이었었다. 십여 일 동안을 밤과 낮으로 혀가 닳도록 빌어도 종시 듣지를 않는다는 것 이었었다.
 
63
용순어머니는 그만 앞이 캄캄했다.
 
64
지금 당하여 파혼을 할 수는 없었다. 또 놓치기가 아깝기도 했다.
 
65
그러나, 그렇다고 집안을 주장하는 어른들이 ——— 시부모가 막는 혼인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66
홍주사는 심히 울적하고도 근심스런 얼굴을 들었다 숙였다 할 뿐 말이 없었다. 그러나 이 혼인을 부득불 파혼을 한다든가, 그런 절망적인 태도인 것은 아니었다. 반드시 혼인을 하기는 할 터인데, 졸지에 마땅한 묘책이 없어 답답하고 초조하여 하는 눈치 같았다.
 
67
입맛을 쩌쩝쩝, 담배를 갈아 피우면서 궁리궁리하던 중매애비 남주사가 이윽고 한 꾀를 궁리해냈다.
 
68
예정대로 내일 예식을 그대로 치를 것…… 하되 단솔히 하여 소문 퍼지지 않도록 조심할 것…… 예식을 치르고 나서는 조용한 곳에서 당분간 딴 살림을 차릴 것…… 한 반 년이고 일 년이고 그러면서 한편으로 서서히 노인들을 달래어 허락이 내리거든 비로소 그때는 큰댁으로 떳떳이 들어갈 것…… 그러나 노인들의 허락이 있기 전에 탄로가 나게 되면 불고이취(不告而娶)에 대한 노염이 클 것이매 일이 더 각다분할 것인즉 들어가는 그날까지는 각별히 비밀을 지키도록 할 것……
 
69
무너진 하늘에 솟아날 궁리가 겨우 한 구멍 뚫린 형국이었다.
 
70
용순어머니는 이번에도 딸과만 짜고서, 일후에 불행히 무슨 파탈이 있으면, 남편과 딸 앞에 목숨으로써 사할 요량 잡고, 혼인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오직 딸의 행복을 위한 일념이요 그 모험이 어찌 막상 덕을 보자는 딴궁량이 있었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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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박덕대는 처음부터 와락 내키지 않는 혼인이라 일체를 아낙에게 미루고 알은체를 아니했거니와, 동갑 사위한테 절을 받기가 창피하다고 혼인 날도 참례하기를 피했었다. 그래서 더구나 모험은 여의하게 진행이 되었고, 또 아직껏 탈도 없어오던 차이었다.
 
72
불길한 그림자는 건너편 상점 앞에 가 지켜서서 홍주사와 용순의 거취를 망 보고 있고……
 
73
둘이는 남양상점의 유리문을 밀고 나란히 들어선다.
 
74
점원들이 각기 인사를 하고 뒤미처서 방에서 남주사가 그 위대한 배를 손으로 슬슬 문대며 반겨 나온다.
 
75
"어이 우리 조카님들!"
 
76
"안녕하셌어요 아저씨?"
 
77
남주사와 용순이 서로 이렇게 인사의 말을 하고 홍주사는 눈을 흘기면서 "남 주산 그새 사람이 된 줄 알았더니 종시 그 대종이시구료?"
 
78
"아니 이 조카님, 건 어떻게 하는 말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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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또!"
 
80
"그럼 홍주사가 내 조카뻘이 아니 된단 말씀요?"
 
81
"술 한잔 자알 내께시니 제발 사람 좀 되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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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어허허허!……"
 
83
남주사는 큰 배를 흔들면서 전방이 떠나가게 한바탕 웃는다.
 
84
"건데 여보 홍주사!"
 
85
"무슨 버리장머리 없는 소릴 또 헐 영으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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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건 참 진정 말인데…… "
 
87
남 주사는 말하다 말고 홍주사의 얼굴을 유심스럽게 되씻어 보아쌓는다.
 
88
얼굴 본바탕이야 다시 보나마나 육장 보는 그 얼굴이었지 별다른 것이 없다. 강파른 살피에 쌍스럽달 만큼 두꺼운 입술에 철색(鐵色) 질린 살결에…… 무릇 일부일처(一夫一妻) 제도가 엄격한 고장에서는 살기가 매우 옹 색스 럴 그런 어떤 종류의 남자의 특징을 가진 여전한 그 얼굴이었다.
 
89
남주사가 지금 그와 같이 홍주사의 얼굴을 유의하여 보기는 그러므로 새삼스럽게 그 점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90
가느다랗게 다듬어 세운 코밑 수염이 그린 듯 곱다. 웬만큼 잘 그렸다는 여자의 눈썹보다도 맵시가 난다.
 
91
면도를 정갈하게 했다.
 
92
여러 가지 화장수를 써서 닦달한 살결이 윤기 있고 매끄럽다.
 
93
이런 온갖 자상스런 치장으로 하여 훤하니 트인 그의 얼굴은 주름살이 많이 펴지고, 피부도 한결 탄력 있어 보인다.
 
94
남주사는 문득 거기에 주의가 갔던 것이다.
 
95
"아뭏든지 사람이 젊은 색시한티루 장가두 한번 가구 볼 일야!"
 
96
일변 부러움까지 곁들여 남주사는 절절히 이렇게 감심을 한다.
 
97
"그럼 어디 이번일라컨 내가 남주살 중맬 설까?"
 
98
"열살투룩은 빈말이구, 외누리 없이 다섯 살 하난 젊어지섰소!"
 
99
"괜헌!"
 
100
"천만에!……"
 
101
남주사는 용순에게로 고개를 돌리면서 "어때?"
 
102
"………"
 
103
용순은 속으로는 귀에 솔깃한 말이나 대답은 할 줄 모른다.
 
104
"용순이조카 보게두 홍주사가 마흔다섯 살 자셔 보여?"
 
105
"………"
 
106
"응?"
 
107
"몰라요!"
 
108
"저거 보겠지! 허어허허허! 아무래두 중매턱 더 먹어야 할까봐?"
 
109
"중매턱이라니 말이지…… "홍주 사가 거드는 것이다.
 
110
"석잔의 백곱장이해서 삼백잔은 자셨으리다? 그리구두 부족해서?"
 
111
"건 홍주사가 낸 거구…… 우리 용순이조칸 여태 없었으니깐 드루…… "
 
112
"그럼 여자니깐 떡이래두 듭씬 좀 해다 대접하나?"
 
113
"여잔 중매턱이 따루 있는 법이지!"
 
114
"무언구?"
 
115
"보선!"
 
116
조심하고 있던 점원들까지도 그만 참다 못해 와끄르르 웃어젖힌다.
 
117
용순은 부끄러워도 이런 조롱은 얼마든지 들었으면 좋게 싶게 즐거웠다.
 
118
그리고 이렇게 즐거운 것을 사람들은 행복이라고 이르나보다 했다.
 
119
화신으로 들어서니 봄 목도리가 선뜻 눈에 뜨인다.
 
120
봄 목도리가 두르기엔 아직 좀 일렀지만 여우목도리는 철이 벌써 아니었다. 그것을 알 줄을 모르는 용순은 여우목도리를 두르고 나왔었다.
 
121
철만 늦었을 뿐이 아니라 여우목도리는 세월도 이미 지날 대로 지났다고 한다. 이 근년은 미상불 안잠이 쇰직한 아씨네와 꼬부랑할머니가 여우 목도리를 많이들 두른다. 내로라던 유행과 호사거리로부터 추레한 실 용품으로 전락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땟국 묻은 옛날의 호화몽(豪華夢)을 부질없이 촌 술청 색시들의 은총에다 부치고 있고……
 
122
이러한 변천에 대하여 홍주사 또한 감각이 와락 날쌔진 못한 편이라 혼인 때에 목도리로는 가장 호사요 가장 으뜸가는 목도리를 사주느라고 사준 것이 그 여우목도리였었다.
 
123
용순 역시 이 세상에서 가장 호사요 가장 으뜸가는 목도리가 여우 목도리 였기 때문에 목도리에 가장 으뜸가는 호사를 한 줄로 만족하고 즐거울 수가 있었다.
 
124
이를테면 모름의 행복이란 것이겠는데, 진실로 우리는 그런 줄을 알았더라면 곧 기절을 할 재앙이나 불행도 아직 모르고 지나는 덕에 편안하고 호강인 수가 얼마나 많음 이던가…… 형형색색의 여러 가지 봄 목도리를 이걸 집었다 저걸 집었다 몇번이고 뒤적 거리 기만 하면서 용순은 하나 선뜻 골라잡지를 못한다.
 
125
그러다가 하다하다 못해 '아이 어느 걸로 해요?’ 하고 구원을 청하는 듯이 걱정 잔뜩 난 얼굴로 옆에 섰는 홍주사를 조른다.
 
126
용순은 그 여러 가지의 목도리 가운데 어떤 색깔이나 어떤 모양이 나의 얼굴 생김새랄지 살빛이랄지 혹은 취미랄지에(이른바 개성에) 조화가 되는가?…… 이것을 신중히 고려하느라고 그래 선택에 고심을 하던 것이 아니었다.
 
127
용순은 저 자신의 개성에 대한 관념이 매우 빈약했다. 그는 얼굴이 너 부스 름하고 살결은 흰떡같이 희었다. 흰떡 같은 고로 살이 무르기도 했다.
 
128
얼굴이 너부스름하고 살결이 희고 무르고 한 것까지는 저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을 개성으로서 인식할 줄은 몰랐다. 따라서 '내 얼굴에는……’ 머리를 어떻게 빗고 화장의 농담은 어떻게 하고 옷은 무슨 빛깔과 무늬와 본을 택하고 해야만 잘 어울린다는 것을 즉 '나의 개성이……’ 살며 발휘가 된다는 것을 그는 알 줄을 몰랐다. 그 대신 그는 저 자신의 개성과 조화야 되거나 말거나 값이 비싼 것이면 아름다우며 호사로 생각할 따름이었다. 혹은 알락달락 원시적인 극채색(極彩色)이면 아름다우며 호사로 생각할 따름이었다. 또는 옆의 사람이 좋다고 골라 주는 것이면 아름다우며 호사로 생각 할 따름이곤 했다.
 
129
그러기 때문에 그는 화장한 것이며 의복 차림차리가 두루 어색하고 촌스럽디 촌스럽다.
 
130
아직 소학교를 마친 학식이요 촌구석에서 가난히 살다가 겨우 한 반 년 동안 먼지 퀴퀴한 지물포의 레지스터로 있으면서 속된 '거리의 호사……’ 를 어설피 약간 눈익힌 데 지나지 못하는 터이매, 오히려 무리 아닌 노릇 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근본된 이유는 그가 제 얼굴 생긴 것처럼 맘씨도 무름하니 심덕 좋기나 했지 자주적일 수 있도록 옹골지고 영리하고하진 못한 그의 천품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었다.
 
131
이렇듯 개성에 무감각하고 자주적이질 못하기는 비단 화장이나 의복에 들어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모든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 전체가 즉 인간 그 자체가 마치 분에다 가꾸는 화초처럼 주장이 없고 수동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남주사가 좋다고 권을 하고 어머니가 가합하다고 하는 데좇아 깊이 생각함도 없이 홍주사와 결혼을 했던 것이었었다. 그리고 그러는것으로써 '좋은 것’(善)을 느꼈던 것이었었다.
 
132
쳐서 말하자면 병신스럽다고 할 것이요, 좋게 보자면 어린 양같이 유순하다고 할 것이었다.
 
133
"그게 어때? 바루 그…… "
 
134
홍주 사는 용순의 손길 앞을 턱으로 가리킨다.
 
135
용순은 연분홍을 집어 보이며
 
136
"이거요?"
 
137
"응! …… 그러든지, 저기 저걸루 하든지."
 
138
"어느 거?"
 
139
"아따 저 놀먐한 거…… "
 
140
"이거요?"
 
141
"응, 응!"
 
142
용순은 양손에 하나씩 치켜들고 홍주사의 얼굴 바로 가져다 보인다.
 
143
"값은 어는 게 많지?"
 
144
"분홍요."
 
145
"그럼 분홍으루 해!"
 
146
홍주사 역시 값이 많은 것이면 더 아름다우며 호사인 줄로만 생각하는 축에 드는 사람이었다.
 
147
용순은 핸드백에서 돈지갑을 꺼내어 대문짝만한 백원짜리로 값을 치른다.
 
148
오늘 흥정돈으로 아까 집에서 나오면서 홍주사가 손수 지갑에다 넣어준 것 이었다.
 
149
좋은 목도리를 사고…… 그러면서 백원짜리로 값을 척 치르고…… 용 순은 이중의 기쁨이었다.
 
150
남양상점에서 반 년이나 레지스터로 있는 동안 백원 지폐를 종종 만져 보기는 했었다. 그러나 그때의 백원 지폐는 용순에게는 단순한 종이조각에 지나지 못했었다.
 
151
시방은 그런데 백원짜리 '돈을……’ 용순은 쓰고 있던 것이다.
 
152
몇가지 흥정을 더해 꾸러미 꾸러미 나눠 들고 화신을 나왔다.
 
153
"오늘은 저녁일랑 밖에서 먹자구!"
 
154
"집이 가서 안 잡수시구?"
 
155
"허허허! …… 가만히 볼라치면 집에서 살림살일 하는 게 제일 재미가 나내 봐? 끼니때마다 얌전스럽구 맛있게 온갖 찬을 장만해설랑 오밀조밀하게 밥상을 차리구…… 깨끗이 집안을 닦달허구 세간을 손질 허구…… 바누질을 허구…… 응?"
 
156
"………"
 
157
용순은 말을 아니해도 웃는 눈이 그렇다는 대답을 한다.
 
158
"아암, 여자라껀 다아 그래야 하는 법이구말구! …… "
 
159
"……… "
 
160
"그러니깐 마누라 그게 더구나 이뻐서 오늘은 내가 마누랄 위로할 겸 한 탁 거얼게 쓸 테란 말야, 응?"
 
161
"아이 참 내!"
 
162
"허허허!…… 자아 무얼루다 한탁을 쓴다? …… 지나요리가 어떨꾸?"
 
163
"전 아무거래두 갠…… "
 
164
"옳아 참! 지나요린 둘이서 겉이 먹으러 가긴 첨이지?"
 
165
"………"
 
166
"그리구 아직 진짜 지나요린 골고루 못 먹어봤을 거야?"
 
167
"………"
 
168
용순은 웃는다. 덴뿌라 잡채 탕수육 짜장면 만두 우동 이런 것을 어쩌다 한번씩 구경한 듯 먹어본 적밖에 없었다.
 
169
남촌의 일류 지나요리집으로 가기 위하여 전차를 기다리면서도 남 주사는 지나가는 택시를 연해 물색한다.
 
170
"참 우편국은?……"
 
171
용순이 문득 그제서야 생각이 나서
 
172
"네시꺼 정이죠?"
 
173
"나두 깜박 잊었지!…… 네시 넘었을걸?"
 
174
둘이는 각기 시간을 본다. 아직 십분이 남았다.
 
175
"댕겨가세요? 늦일까요?"
 
176
"미급되지! 지끔 예서 광화문우편국까지 가자면…… "
 
177
아까 집에서 홍주사가 백원짜리를 지갑에다 넣어주면서
 
178
"다아 써어 응?" 하는 것을 용 순은
 
179
"냉겨서 저금해요!" 했었다.
 
180
"저금할 건 따로 주지!" 하는 것을 용 순은
 
181
"다아 쓰기루 한 거 다아 안 쓰구 냉겨서 저금하믄 더 재밌잖아요?" 했었다.
 
182
사실 용순은 그동안 홍주사가 저금을 시켜주어서 한 것과 오늘처럼 다 쓰라는 돈에서 더얼 쓰고 저금을 한 것과 통 다 합하면 이백 원이 훨씬 넘는다. 저금이 차차로 늘어가는 재미 그것 또한 즐거움의 하나였다.
 
183
봄을 제법 머금은 햇볕이 여전히 맑다. 그러나 예의 불길한 그림자 역시 여전히 둘이의 뒤를 밟아 전차엘 따라 오른다.
【원문】이 날이 흐리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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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만식(蔡萬植) [저자]
 
  매일 신보(每日申報) [출처]
 
  1942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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