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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시순(朴始淳) 일기(日記) - 운불일기(雲紱日記) ◈
◇ 을미년(1895) 6,7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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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순(朴始淳)
- 임실문화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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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을미년(乙未年, 1895) 6월
 
 
 

6월 20일

 
3
서리내무협판 유길준이 아뢰어 임실 군수에 임명되었다. 면천에 부임한 지 겨우 9개월만이었다. 7월 9일에 이르러 면천에 새로운 사또가 내일 부임하였기에 향청(鄕廳)에 나가 기거하였다. 13일에 면천의 서쪽 영탑사에 머물다가 길을 나설 계획이다.{治行之計} 읍에서 5리 떨어진 곳이다.
 
 

 
4
을미년(乙未年, 1895) 7월
 
 

7월 21일 기미

 
6
맑음. 사시(사시)에 영탑사에서 임실 부임지로 출발하였다. 내행(內行)은 여종 2명을 데리고 뒤따랐다. 책실(冊室) 이탄운(李灘雲)과 시종{傔} 문흥운(文興雲)이 수행하였다. 면천에 있을 때에 양성한 포군(砲軍) 50명이 자기들이 경상(境上)에 배행(陪行)하겠다고 이른 아침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체관(遞官)의 영군(領軍)이 접경에 나와 과연 보고 듣는 데 장애가 있어서 마음으로 끝내 지나가기 어려웠다.{果碍於瞻聆而以情難終過} 억지로 허락했다. 아전 유치헌(兪致憲)의 동생 유치관(兪致寬), 읍한(邑漢) 김옥성(金玉成), 관노(官奴) 등길(等吉) 및 남창(南倉) 사령(使令) 구만호(具萬戶)가 따라 와서 동구(洞口)에 나와 작은 고개 하나를 넘으니 유학 오복선(吳腹善)이 전별(餞別)하러 와서 아울러 인척 김동좌(金東佐)의 편지를 전해 주었다.
 
7
일해상인(日海上人)이 상경(上京)할 것이라고 하면서 박덕유(朴德裕)와 인사하고 헤어져 갔다. 남산점(南山店)에 이르러 겸인(傔人) 홍태산(洪太山)과 인사하고 헤어지니 슬픈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모든 아전 및 관노와 사령[奴令]들이 모두 슬픔을 머금고 인사하며 헤어졌다.【170】친구 이종대(李鍾大) 및 삼공형(三公兄)이 뒤를 따랐을 뿐이다.
 
8
가게에 이르러 유학 홍관후(洪寬厚)가 전별하러 와러 신장(贐章)을 주었으니{贈之以贐章}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덕산(德山) 석교점(石橋店)에 이르러 삼공형 및 포군들이 인사를 하고 갔는데 모두 서운해 하였다. 나도 같은 마음이었다. 친구 이장헌(李章憲)도 여기에서 전별하고 돌아갔다. 오후에 덕산군(德山郡)에 이르러 일행을 숙소[私次]에서 쉬도록 하였다. 곧장 관아{衙舍}로 들어가 사또{主倅} 친구 조두환(曺斗煥)이 문을 열고 맞이하였다. 인사를 마치고 둘째 아이{二胤}를 들어와게 해서 대인(大人) 동중추(동중추) 어른을 뵙고 인사를 올렸다. 물러나서 품었던 회포를 풀었다. 사또가 술을 내오도록 하였고{進盃酒} 이어서 점심을 내오게 하였다. 밥을 다 먹고나서 고별했다. 조사또도 슬퍼하며 보냈다.{含悵而送之}
 
9
인생 헤어지고 만나는 일이 이렇게 많으니 어찌 하겠는가! 어찌 하겠는가! 숙소에서 나와 친구 김종대도 고별하고 전행(餞行)하였다. 50리 되는 곳에 이르니 더욱 감사하고 많이 서운하였다. 일행이 홍주(洪州)의 교동(校洞)에 이르러 승지 김복한(金福漢)에게 들렀다. 김복한이 술을 내어 오게 해서 권하기에 잠깐 회포를 풀고 바로 헤어졌다. 드디어 홍주 감영 성내에 이르러 선달(先達) 이관실(李觀實)의 집에 숙소를 정하였다. 이때 관찰사 이승우(李勝宇) 어른이 마침 출타하여 끝내 얼굴을 뵙지 못하였으니 슬프고 한탄스럽다. 그대로 유숙하였다. 오늘 60리를 걸었다.【171】
 
 
 

7월 22일

 
11
맑음. 아침 일찍 출발하였다. 면천읍의 통인(通引) 박경춘(朴慶春)이 마침 찾아와서 돌아가겠다고 하였다. 화암점(花巖店)에 이르러 친구 참봉(參奉) 정경호(鄭敬好)에게 몇 마리 말을 묶어 둘 마장(馬場)이 있는 지를 물었더니 많은 사졸들이 길을 재촉{多卒之催行}해서 미처 찾아가 보지 못하고 그런 뜻을 써서 편지를 부쳤다.
 
12
청양(靑陽) 묵방점(墨坊店)에 이르러 이목동(梨木洞)에 사는 족숙(族叔) 박형진(朴瀅鎭), 박교진(朴敎鎭) 형제가 우리 일행이 이곳을 지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와서 인사하였다. 드디어 점사(店舍)에 들어가니 술자리를 베풀고 대략 족의(族誼)를 풀었고 바로 고별하였다.
 
13
청양읍점에 이르러 점심을 들고 말에게 꼴을 먹이고 출발하였다. 싸리치에 도착하였을 때 新經漲遼 풀길이 많이 끊어지고 자갈길이 위험해서 인마(人馬)가 발을 디디기 어려웠다. 담교꾼(擔轎軍)들이 땀흘리며 도망치며 두려워 숨을 죽이고 있으니 영인(令人)이 근심하였다. 드디어 고개를 넘었다. 날이 아직 고용(高舂)에 이르지 않았지만 앞길도 매우 험하고 점사(店舍)마저 드물다는 얘기를 듣고 그대로 머물었다. 오늘 65리를 갔다.
 
 
 

7월 23일

 
15
맑음. 아침 일찍 출발하였다. 사양치(沙陽峙)가 위험하고 구불거려서 달마현(達摩峴)을 따라서 갔다. 큰물이 진 후라서 모래벌에 물이 차올라{遼後沙漲} 간신히 찾아서 건넜다. 은산장(恩山場)에 이르러 사람도 말도{人馬} 모두 고단하고 홍역{疹疾}에 전염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172】교꾼에게 徑過하여 함계점(함계점)에 이르게 하였다.
 
16
염호(濂湖)의 족질(族姪)이 인편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몇 리 밖에 가지 못했다. 수원촌에 사는 족질 동근(東根)이 도좌(道左)에서 앙견(仰見)하였는데 귀두진(龜頭津)까지 뒤따라 와서 나루를 건넜다. 이곳이 백마강(白馬江) 상류이다. 배가 남쪽 기슭에 닿았는데 족숙(族叔) 홍석래(洪錫來)가 안부하였다. 일행이 부여읍에 도착하였다. 부여읍은 백제의 고도(古都)이다. 서쪽으로는 부소대(扶蘇臺)가 있고 북쪽으로는 낙화암(落花巖)이 있는데 그 아래에 조룡대가 있고 위로는 천정대(天政臺)가 있다. 回憶往塵 自不琴曠感之想也
 
17
군돌치(軍突峙)를 넘어 염창리(濂倉里)에 이르러 족숙 홍석(洪錫)의 집에 들렀다. 족숙이 먼저 술잔을 권하였다. 술자리를 마치고{飮訖} 내행(內行)에게 이곳에 머무르라고 하고는 탄운(灘雲)과 더불어 족대부(族大父) 재승(載承)의 집에 갔다. 족대부 재형(載衡)과 그 아들 족숙 준석(俊錫) 및 원석(元錫), 그 윤종(胤從) 인순(寅淳), 족숙 윤석(允錫)․두석(斗錫)․후석(厚錫)․중석(重錫)․창석(昌錫)․돈석(敦錫)․우석(禹錫), 족제(族弟) 도순(道淳)․희순(熙淳)․치순(致淳), 동근의 동생 동환(東桓)이 모두 찾아왔다. 갑자기 화수회(花樹會)가 되었으니 기이한 인연이다. 잠시 술과 면상(麪床)을 내어 오더니 이어서 점심[午飯]을 내어 왔다. 너무나 갖춰 준비하여 도리어 편안하지 않았다. 심창녕(沈昌寧) 어른께서 기꺼이 오셨는데{能肯適} 이웃동네에 우거(寓居)하시는데 우리 일행이 찾아 온다는 얘기를 듣고 얼마 간 회포를 풀고{略敍多少} 헤어져 갔다.【173】벌써 석양이 산에 걸려 여러 집안 어른들이 만류하기에 머물러 묵었다. 오늘은 50리 갔다.
 
 
 

7월 24일

 
19
새벽에 달무리[月暈]가 있더니 이른 아침에 안개가 자욱했다.{霧氣}
 
20
일찍 길을 나섰는데, 먼저 가서{先行} 친구 정노진(鄭魯鎭)을 지나는 길에 방문하였다. 정노진이 우리 일행이 이곳에 당도한 것을 알고 어제 이미 족숙 홍석의 집에 찾아와서 인사하였는데 미처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 문에 들어가니 정노진이 신발을 거꾸로 신고 나와 맞이하였다. 자기 둘째 아이 수재(秀才) 더러 들어와 인사하게 하고 술과 면상(麪床)을 내어 오라고 하였는데 이렇게 과연 나를 위하여 준비한 것이었다. 이때 유학 김상필(金相弼)이 앉아 있으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譚論} 갈 길이 매우 급하였기에 회포를 다하지 못하고 고별하였다. 정노진이 서글퍼 하면서 전송하였다.{含悵送之}
 
21
족대부 재승의 집에 들러서 잠시 앉았다가 바로 헤어졌다. 은진(恩津), 논산(論山)에 이르렀는데 드넓은 들녘이 평평하게 펼쳐져 있고 논[水田]이 비옥하니 정말로 거처할 만한 곳이었다. 가호{人戶}는 500에서 600호 남짓이었다. 듣자니 돌림병[沴氣]이 지나고 있다고 해서 은진읍에 이르러 곧장 관아[衙舍]로 들어갔다. 사또 영감 조병성(趙秉聖)이 문을 열고 기쁘게 맞이하였다. 술 자리를 마련하고 회포를 풀고서{宣酒敍懷} 고별하였다. 읍저(邑底)의 점사(店舍)에서 출발하였는데 내행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족숙 홍석도 따라 왔다. 내어오 점심을 먹고 말에게 꼴을 먹이고서야 길을 나섰다.
 
22
황화정점(皇華亭店)에 이르렀다 여산(礪山) 땅으로 두 호남의 교계(交界)이다.{兩湖交界} 여산 읍에 이르러 곧장 관아{衙舍}로 들어갔다.【174】사또 영감 유제관(柳濟寬)이 문을 열고 신발을 거꾸로 신고 나와 맞이하며 손을 꼬옥 잡고 들어가면서 話舊說今 장황하기 그지 없었다.{娓娓不已} 둘째 아들에게 들어와 인사하게 하고 주물상(酒物床)을 내어 오도록 했다. 또 관아의 여종에게 내행을 나가 맞이하여 내아(內衙)에 들이라고 하였다. 일행의 인마도 관예(官隸)를 시켜 먹이를 주었다. 마음 속에 굳게 맺혀 잊혀지지 않는 정{繾綣之誼} 에 도리어 편치 않았다. 임실의 새 유리(由吏)421) 진신엽(晉臣曄)이 나를 기다리면서 이곳에 와 있었다.{爲候我而來此} 현신(現身)하겠다고 하고 즉시 보냈다. 완영저리(完營邸吏)의 집에서 기다렸다. 사또와 상을 맞대고{聯床} 저녁을 먹고 밤이 깊도록 조용히 얘기를 나누었다. 저사(邸舍)에 돌아가 묵었다. 오늘은 70리 갔다.
 
 
 

7월 25일

 
24
맑음. 오늘은 대전(大殿)의 탄신일(誕辰日)이다. 길가는 나그네이어서 망하례(望賀禮)에 참여하여 미력하나마 마음을 펼 수 없었지만 신하{臣分}로서 虧缺하니 너무나 황름(惶懍)하다.
 
25
아침 일찍 일어나 관아에 들어갔는데 사또가 나를 위하여 아침을 이바지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고별하니 사또가 含悵하며 전송하였다. 오리정(五里亭)에서 나오니 임실의 유향(留鄕) 이병록(李炳錄)이 인신(印信)을 가지고 길가에 現하고 있었다. 한낮{午次}에 전주 삼례역(參禮驛)에 이르러 점심을 내어 왔고 말에게 먹이를 먹이고서야 출발하여 전주 감영[完營]에 도착하였는데 서문 밖에 들빛{野色}이 평포(平鋪)하고 산천은 수려하였으며 인가[人煙]은 조밀하니 정말로 한 나라의 큰 도회지(都會地)이구나.【175】
 
26
유리 진신엽, 영저리 김상문(金相文)이 길 가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패서문(沛西門)으로 저리의 집에 들어갔는데 임실의 신영 하인(新迎下人)이 모두 와 있어서 현신하도록 하고 마쳤다. 저리가 주물상을 내어 왔다. 식사를 마치고 경기전(慶基殿)에 가서 승배례(承拜禮)를 실행하였다. 이어서 조경묘(조경묘)에 가서 승배례를 실행하였다. 이어서 순사(巡使)에게 연명장(延命狀)을 올렸다. 순사는 대감 이도재(李道宰)이다. 제례(除禮)하라고 하고서{命除禮} 평복을 입고 뒤를 따라 들어갔다. 순사는 한 번 만난 구면이었다.{巡使一面如舊} 치사하는 말이 장황하였다.{而致款娓娓} 너무나 감사하기 그지 없었다. 날이 이미 저물고 어두워져서 인사하고 도로 저리(邸吏)의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마쳤다. 호막(戶幙) 고창 사또 김성규(金星圭)가 관례(官隷)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기에 답송하였다.{致喝答送}
 
27
감찰 김동현(金東炫)이 입현(入現)하였다. 임실 신평대리(新平大里)의 종인(宗人) 박종원(朴鍾遠)이 찾아와서 만났다. 일찍이 한양에 있을 때 서로 알고 지냈는데 내가 移除된다는 것을 듣고 일부러 찾아 왔다. 청양(靑陽) 축치(畜峙)에 이르렀다가 回還했다고 한다.
 
28
순창 사또 영감 박용원(朴用元)의 편지가 인편을 거쳐[轉遞] 도착하였다. 드디어 유숙하였다. 오늘은 70를 갔다.
 
 
 

7월 26일

 
30
흐림. 일찍 일어나 관예(官隷)를 시켜 김 고창에게 안부를 물었다.{致喝} 또한 호방(戶房) 영리(營吏) 이용섭(李龍燮), 병방(兵房) 학관(學官) 심의운(沈宜雲)을 招見하였는데 동문 밖에 出見하였다.【176】 유학 최상규(崔庠奎)가 찾아 왔는데 일찍이 한양에 있을 때 서로 아는 사이였다. 밥을 먹은 후에 막 출발하려는데 김 고창이 나와서 다소간 略敍하고 고별하였다. 서문 밖으로 나와서 송촌(松村) 승지 김창석(金昌錫)에게 들렀다.[歷訪] 한양에 있을 때 아는 사이였다. 인사를 하고나서 회포{阻懷}를 대략 풀고 고별하였다. 그리고나서 남문 밖으로 반석리(盤石里) 앞 가게에 이르렀다. 내행이 이미 먼저 도착해 있었다. 이에 위의(威儀)를 갖추고 나갔는데 검은 휘장[皁蓋]을 펄럭이며 관예가 앞에서 擁위하고 뒤에서 갈도(喝道)하니 이것이 태수(太守)를 지내는 맛이런가!{太守之味耶} 혼자 생각해도 우습구나{自顧可呵}
 
31
일행이 만마관(萬馬關)에 이르렀다. 바로 호남의 관방(關防)의 요해처(要害處)이니 만 명의 사내로도 열지 못한다는 뜻에서 그 이름을 지은 것이라고 한다. 노암점(蘆巖店)에 이르렀다. 이곳이 임실의 경계이다. 유숙하였다. 오늘은 40리를 갔다. 종일토록 구름끼고 흐렸는데 雨意頗??矣
 
 
 

7월 27일

 
33
흐림. 일찍 점사(店舍)에서 출발하여 작은 고개 하나 넘었다. 본읍의 관예가 나팔(喇叭)을 지니고 악공을 데리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원점(烏原店)에 이르러 작은 거룻배로 건너 사시(巳時)의 초각(初刻)에 임실군의 동구(洞口)에 이르렀다. 삼반(三班)의 관속(官屬)이 모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임실군에서 한 차례 동학교도의 소요[東擾]를 겪은 이후에 신연(新延) 위의(威儀)를 처음 보는 일이어서 남녀노소 좁은 길에서 담장을 친 것 마냥 구경하였다.{觀者如堵}
 
34
교열루(敎閱樓) 앞에 도착하여【177】가마에서 내려 軒에 올랐다. 주리(廚吏)가 주안상(酒案床)[酒物床]을 내었다. 식사를 마치고서 관복(官服)을 갖춰 입고 가마[籃輿]를 타고 운수관(雲水館)에 가서 망하례(望賀禮)를 행하고 예를 마치고 관문을 나와 관아[衙舍]로 들어갔다. 난리로 불난 나머지 새로 보수하였는데 면천의 관아와 비교하면 웅장하고 걸출한 구조였다. 내아는 아직 지붕을 이지 않아서 책실(冊室)로 우선 사용하고 책실은 관노청(官奴廳)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우러러 동헌(東軒)을 바라보니 평근당(平近堂)이라는 편액(扁額)이 걸려 있었다. 바로 6대조 귀옹공(歸翁公)이 관찰사(觀察使)[按藩]로 부임하셨을 때 쓰신 것이다. 백여 년 사이에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영겁에 누차 겪었으나{桑劫屢閱} 남기신 흔적은 완연하게 여전히 남아 있었다.{手澤} 불초손(不肖孫)이 感愴한 회한을 어떻게 말로 할 수 있겠는가? 한참 동안 손에 들고 매만지다가{擎玩良久} 들어와 앉았다. 주리(廚吏)가 주안상을 내어오더니 이어서 오반을 내어왔다. 이렇게 어리석은 내가 기거(起居)와 음식(飮食)이 언연(偃然)하게 태수라고 자처하니 도리어 부끄럽구나.{以太守自處還覺愧恧}
 
35
오늘은 30리를 갔다. 이 날 밤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7월 28일

 
37
이른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사각(巳刻)이 되어서야 개였다.
 
38
호좌(湖左) 시찰관(視察官) 권명훈(權明勳)이 서울에서 돌아와 읍에 이르러서 예리(禮吏)를 보내 안부하려고 했는데[致喝] 이미 시찰관이 입현하여 그와 더불어 술잔을 잡고 회포를 풀었다. 곧바로 고별하고 갔다. 운봉 사또 영감 이의경(李義絅)의 편지가 인편을 거쳐 도착하였다. 이날 밤에 또 지진이 있었다.
 
 
 

7월 29일

 
40
맑음. 이른 아침에 운수관(운수관)에 가서 망하례(망하례)를 행하였다. 이어서 교궁(校宮)에 가서 분향례(焚香禮)를 행하고 재방(齋房)에 들어갔다. 도향원(都鄕員) 도정(都正) 윤태일(윤태일), 도향원 겸 장의(掌儀) 이경우(李璟宇), 재장(齋長) 김경수(金景秀), 장의 최봉우(崔鳳宇), 색장(色掌) 종인 종헌(宗憲)이 차레로 입견(入見)하였다. 관아로 돌아와 좌기(坐起)와 예수(禮數)를 관례대로 거행하였다. 삼반(三班) 관속(官屬)들을 차례로 점고(點考)하였다.
 
41
오늘 면천의 인마를 還付하려고 하였기에 면천 사또 유제(劉濟), 동촌(東村) 승지 박제경(朴齊璟), 서촌(西村) 친구 이종대(李鍾大), 고도원(古桃源) 도유사 심국경(沈國慶), 가락리(可樂里) 이생사문(李生思文)에게 편지를 부쳤다. 또 서리 박준상(朴準相), 서리 유규항(兪圭恒), 치헌(致憲) 형제, 서리 박종환(朴宗煥)에게 패자(牌子)를 부쳤다.[付牌] 또 순찰사께 안부편지[上候]를 보내고, 김 고창(金高敞)에게 편지를 써서 영저리(營邸吏)가 가지고 가는 편지 가운데 동봉하여 전납(傳納)하도록 했다. 또한 여산(礪山) 사또 및 덕산(德山) 사또에게 편지를 써서 교군꾼[轎軍] 더러 전납하게 했다.
 
42
오후에 도정 윤태일, 유학 이 경우, 유학 최봉우, 종인 종헌, 양사재 장의 홍종성(洪鍾晟), 색장 한형리(韓炯履), 남면사인(南面士人) 곽상표(郭相杓), 진안 사인 김태식(金泰埴)이 찾아와서 만났다. 완동(完東) 유학 최상규(崔庠奎)의 편지가 인편[轉遞]으로 당도하였다. 이날 밤에 또 지진이 있었다. 사흘 밤마다 지진이 있으니 무슨 징조{兆應}인지 모르겠으니 근심하지 않을 수 없구나.
 
 
 

7월 30일

 
44
맑음. 관편(官便)으로 순창 사또와 운봉 사또에게 감사 편지를 부쳤다.{付謝} 또한 진안 사또 친구 심능경(沈能敬)에게 편지를 썼다. 덕치(德峙) 훈장 이종휘(李鍾徽), 대곡(大谷) 훈장 서준수(徐俊洙), 옥전(玉田) 훈장 오채규(吳彩圭)가 찾아와서 만났다. 죽림암(竹林菴) 승려 행문(行文)이 삶은 콩잎[煮藿]을 가지고 와서 문안{來問}하였다.
 
 

 
45
* 각주
 
46
421) 지방(地方) 관아(官衙)에 딸린 이방(吏房)의 아전(衙前).
【원문】을미년(1895) 6,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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