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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땅 봉천 시가의 어두운 밤! 지옥 길 같이 캄캄하고 음침한 길로 숨을 죽이고 뒤를 밟아가던 상호와 기호는 앞에 가던 거짓 절름발이가 별안간 휘쩍 돌아서는 것을 보고 가슴이 성큼하여 말뚝같이 우뚝 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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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보다도 더 흉악스러운 곡마단 단장 놈이, 무슨 맘을 먹고 돌아섰을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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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할 사이도 없이 그는 절름절름 우뚝 서 있는 두 사람 편으로 걸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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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 났다!’싶어서 두 사람의 머리는 으쓱였습니다. 정신이 멍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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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놈 한 놈뿐만 같으면, 그리 염려할 것 없이 힘대로 싸워 보자마는, 만일 저놈이 달려들면서 군호를 하여 이 구석 저 구석에서 부하들이 뛰어 나오면 어찌할까……. 그런 것 저런 것을 믿는 것 없이는 저렇게 혼자서 가깝게 달려들 리가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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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같이 이 생각 저 생각이 두 사람의 머리에 빛났다 꺼졌다 할 사이에, 벌써 그 놈은 두 사람의 코앞까지 와서 우뚝 섰습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쑥 내밀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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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능청스럽게 늙은이 소리로 묻습니다. 어둠 속에서 자세히 보니, 딴은 그의 입에는 꼬부랑 골통대가 물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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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들지 않는 것만 다행히 여기고 기호가 성냥갑을 꺼내 주려고 양복 주머니를 뒤적뒤적 하는데, 상호가 한 손으로 기호의 팔을 왁 잡으면서 그 놈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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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미안합니다마는 우리는 담배를 못 피우므로 성냥을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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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이거 밤길을 걷는 데는 담배를 피여 물어야 하는데, 성냥이 없어서 오늘도 못 피우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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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는, 다시 돌아서서 절름절름 걸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그제서야 마음을 휘 놓았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또 그 뒤를 밟아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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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왜 아까 내가 성냥갑을 내주려는데 당신이 없다 하고 막아 버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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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기호가 상호에게 궁금히 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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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이 정말 성냥이 없어서 우리더러 달라 할 리가 있나요. 우리에게 성냥을 달래서, 담뱃불 붙이는 체하고 성냥불로 우리들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 그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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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나는 깜빡 모르고 있었소. 꺼내 주었더라면 큰일 날 뻔하였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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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 나구말구. 그렇게 얼굴을 코앞에 들이대고, 불을 켜 들고 들여다보면, 우리 얼굴에 수염 만들어 붙인 것과 변장한 것이 모두 들킬 것 아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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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말이요. 나 때문에 혼날 뻔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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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수군거리면서 뒤따르는 상호와 기호는 앞에 절름거리면서 가는 단장 놈이 어떻게 능청스럽게 보이고 흉측해 보이는지, 총이라도 있으면 그냥 곧 쏘아 버리고 싶게 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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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캄한 거리로 골목을 몇 번인지 꺾어서, 절름발이는 어느 창고같이 생긴 이층집 문 앞에 우뚝 섰습니다. 붉은 벽돌로 모양 없이 튼튼하게만 지은 집. 어두운 밤이라서 그 무거운 문이 마치 감옥문같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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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따라가던 두 사람은 냉큼 길가 어두운 구석으로 기어들어 숨어서 그의 동작을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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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름발이가 거기 서서 전후 좌우를 휘휘 둘러보더니, 아무도 보는 이가 없는 줄 알고 안심한 듯이 문 앞에 바싹 들어서자, 대문은 안으로부터 열리고 그 안에서 한 사람이 내다보고 무어라 쑤군쑤군하는 것 같더니, 절름발이도 안으로 쑥 들어가고 무거운 문은 다시 굳게 닫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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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놈의 집이 까닭이 있는 집인 모양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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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두 사람은 어두운 구석에서 뛰어나와 그 이상한 벽돌집을 두루 살피기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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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 앞에까지 바싹 가서 성냥불이라도 켜 들고 문패며 번지수를 조사하고 싶었으나, 그놈의 대문 한 겹 안쪽에 어떤 놈이 문지기 노릇을 하고 앉은 모양이니, 신발 소리를 내거나 성냥 긋는 소리를 내기만 하면 당장 뛰어나 오겠으므로 그러지는 못하고 그 집 옆에 골목이 있는 것과 뒤로는 야트막한 중국집과 맞붙어 있는 것과 골목으로는 높은 담이 싸여 있는 것만을 조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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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크, 또 와요. 또 한 놈이 오니 들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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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가 속살거리는 소리에 상호도 그 옆 골목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서서 보니, 과연 양복 위에 외투 입은 한 놈이 그 집의 대문 앞에 우뚝 섰습니다. 여기는 바로 그 집 벽 밑이라 아까보다는 훨씬 가까워서 그 놈의 손짓 하나 말소리 하나도 빼놓지 않고 듣고 보구 할 수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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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은 대문의 손잡이 위를 손등으로‘똑똑똑똑똑’천천히 꼭 일곱 번을 때렸습니다. 그러니까 아까처럼 안으로부터 문이 열리고 한 놈이 고개를 쑥 내미는데, 그때 안으로부터 희미 하나마 등불 빛도 비쳐 나왔습니다. 외투입고 온 놈은 이번에는 왼편 손을 주먹 쥐어 쑥 내밀더니, 오른편 손의 둘째손가락과 가운데손가락과 문을 내밀어 왼편 주먹에 두 번 들었다 놓았다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내다보던 놈은 대문을 더 활짝 열고, 그놈을 들여보내고, 다시 무겁게 닫혀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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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보았소? 대문을 일곱 번 두들기고 왼손 주먹에 바른손 두 손가락을 두 번 내민 것이 분명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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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그랬소. 아마 그것이 그놈들의 암호인 모양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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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암호까지 있는 것을 보면, 무슨 비밀이 있는 것은 분명한 모양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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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집 어두운 담 밑에서 가슴을 울렁거리면서 소곤소곤 이야기 할 때, 또 그 집문 앞에 와서 손잡이의 위를 똑똑똑 때리는 사람이 있어서, 두 사람은 숨을 죽이고 눈과 귀를 기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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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온 것은 일본 옷 입은 여자 한 사람, 중국 옷 입은 남자 한 사람이 었습니다. 문이 열리고 안에서 문지기의 얼굴이 쑥 나오더니 여자를 보고 머리를 굽혀 인사하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자와 남자와는 역시 각각 왼손을 주먹 쥐어 내밀고, 오른손 두 손가락을 그 위에 두번 내밀어 보이고 쑥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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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보면 아는 사람이거나 모르는 사람이거나, 으레 그렇게 하고야 들어가는 엄중한 규칙인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곡마단 단장과 그 부하들의 비밀! 그것은 대체 무슨 비밀이며, 왼손 주먹에 바른손 두 손가락은 무슨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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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가슴을 울렁거리면서도 그곳을 떠나지 않고 서서 궁리궁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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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지 그놈들이 단순한 곡마단 패가 아니고 이곳에 그들의 나쁜 패가 더 많이 있어서, 모두 연락해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결단코 허투루 볼 패는 아니고 무슨 무서운 비밀한 계획이 있는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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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길, 국경을 넘어서 남의 나라 땅에까지 쫓아와서 어두운 밤! 무섭게 캄캄한 밤에 마귀 떼의 집도 이제는 찾았고 또 그 집 속에 지금 여러 연놈이 모여드는 것까지 알아내었으나, 그러면서도 손끝 하나 대여보지 못하고 있는 생각을 하면 두 사람의 마음은 안타깝기 한량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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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대로 하면 지금 당장에 담이라도 뛰어넘어 이놈의 집 속에 들어만 가면 그 속에 불쌍한 순자가 갇혀 있든지 묶이어 있든지 찾아낼 수 가 있을 것이요, 또 그놈들의 비밀을 알아내고 어머니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아 그러나 이 집, 이 담 너머에는 그놈의 떼가 몇 십 명이 있는지 몇 백 명이 있는지 아는 도리가 없으니, 약하디 약한 두 몸이 섣불리 들어갈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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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 속에 순자가 갇혀 있을 것 같은데요. 그놈들이 모여서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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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우리가 이러고만 있어서는 안 되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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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가슴은 타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떻게 할까? 상호의 두 눈에는 순자의 우는 얼굴과 사진에서 본 어머니 아버지의 얼굴이 번갈아가며 나타나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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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는 불쌍한 순자가 그 곡마단 단장의 그 지긋지긋한 채찍에 두들겨 맞아서 온몸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 참혹한 정상이 눈에 자꾸 어른거렸습니다. 그의 가슴은 떨리고, 그의 손은 저절로 주먹 쥐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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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엉뚱한 일을 뒷일 헤아릴 새도 없이 결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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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들어가 볼 터이니 당신은 여기서 기다려 보아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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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상호는 기호에게 떨리는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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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어쩌자고 그 속에를 들어간단 말씀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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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는 걱정하면서 상호의 손을 쥐고 굳이 말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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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속에까지 들어갈 것이 아니라 문을 열거든 그 문지기 놈을 끌어내서 두들기고 물어 봅시다. 그것이 낫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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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가 생각한 이 꾀는 잘 생각한 꾀였습니다. 그러나 문을 열기만 하면 그놈이 혼자 지키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요, 또 만일 혼자 지키고 있다 하더라도, 그냥 잠자코 끌려 나올 리가 없는 것이니까 소리를 지르던지 또 무슨 군호로 저희 떼에게 통지를 하여 여러 놈이 나올 것이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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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행한 일인지 불행한 일인지 지금의 두 사람은 그런 것을 염염히 생각할 만큼 마음이 조용하지를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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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는 담 밑에 숨어서 망을 보고 있기로 하고 상호 혼자 그 마귀 같은 집 대문 앞에 올라섰습니다. 가슴이 두근두근 몹시도 울렁거리는 것을 참으면서 대담스럽게 ‘똑똑똑똑’ 일곱 번을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안으로부터 문을 열려고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었습니다. 상호의 가슴은 두방망이질을 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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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5권 3호 (1927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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