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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許生傳 (이광수) ◈
◇ 15. 새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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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12
이광수
1
그날 밤을 거기서 쉬어 사람들이 기운을 회복한 뒤에 이튿날 다시 배를 타고 바닷가를 휘 돌아 동남쪽으로 한나절 일을 간 즉, 꽤 큰 강이 있는데, 배들은 머리를 돌려 그 강으로 올라갑니다. 강 넓이는 노들강 밖에 안 되지마는 심히 깊고, 흐름이 심히 느리며, 강 좌우에는 일망 무제한 벌판이고 벌판은 온통 기름이 흐르는 조선에서 보지 못하였던 잎사귀 넒은 나무들이요, 바로 물가에도 이름 모를 나뭇가지들이 축축 늘어져서 가만가만히 흘려내리는 강물을 스치는데, 어떤 나무에는 붉고 송이 큰 꽃이 피엇고, 어떤 나무에는 송이 작고 노란 꽃이 피어 형언할 수 없는 향기가 진동하고, 또 어떤 나무에는 누르스래하고 기름한 열매가 축축 늘어지고, 어떤 나무에는 분홍빛 호박 같은 열배가 금시에 떨어져 내려올 듯이 매어달렸습니다. 대체 조선서는 구경도 못하던 나무들인데 그 나무 사이로 붉은 새, 푸른 새, 노랑 새, 자주 새, 초록 새, 알록 새, 그 알록 새 중에도 분홍 바탕에 초록 박힌 놈, 노랑 바탕에 다홍점 박힌놈, 모두 조선서는 보지도 못한 샌데, 그중에 꼭 수탉같이 생기고도 고리가 굉장히 길고 벗이 무시무시하게 크고 털빛이 금시에 기름 항아리에서 때어내인 듯이 반질반질 윤택이 나서 마치 조선에 있는 수탉에게다 비단옷을 입혀 놓은 듯한 놈을 보고, 사람 들은 이것이 봉황이 아닌가 하여 그 후에 그러한 새를 만날 때마다 봉황이라고 부르며,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모두 생면부지인 강산에 그림으로만 보던 것이라도 만나 보는 것이 반가운 까닭이외다.
 
2
이러한 속으로 모두 지금까지의 고생도 다 잊어 버리고 눈에 보이는 이상한 것을 재미있게 보고 물을 거슬러 올라가 노라니 문득 맨 앞에 가는 허생이 탄 배에서,
 
3
『아이가, 저게 무엇이야?』
 
4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 앞을 내이다 본즉, 과연「아이가!」하고 소리를 지를 만합니다. 대체 날개가 없으니 날짐승은 분명히 아니어니와 네 발을 허우적거리니 길짐승도 같건마는 몸뚱이는 물고기와 같은 이상야릇한 놈이 제 몸뚱이를 한꺼번에 사킬 만한 커닿고, 시뻘건 아가리를 벌리고 배를 향하여 마주 옵니다.
 
5
『저놈이 무에라는 짐승이야?』
 
6
『암다, 저놈이 어쩌자고 우리를 향하고 나와?』
 
7
하고 모두들 무서워하는 차에 그 괴물이 허생의 배에 앞발을 걸고, 무슨 말이나 하는 듯이 입을 뻐끔뻐끔하며, 몸집에 비켜서는 조그마한 눈으로 사람들을 휘 둘러보더니, 볼일을 다 본 듯이 뚝 떨어져서 그 다음 배로 가고, 거기서 또 처음 모양으로 앞발을 배삼에 턱 걸고 시뻘건 아가리를 벌렸다. 닫쳤다 하며, 무서워서 한편쪽으로 몰려선 사람들을 물그러미 치어다보다가는 또 세쨋배로 가고, 이 모양으로 하기를 대여섯 번 하더니, 별로 재미있는 것도 없다는 듯이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슬며시 몇 걸음을 헤어가서는 물속으로 쑥 들어가 버리고 그 뒤로는 넘실넘실하는 물결만 남는데 놀란 듯한 물고기들이 두서넛 공중으로 펄떡펄떡 뛰어 올랐다 떨어집니다. 그리고는 여전히 조용해지고, 이 나뭇가지에서 져 나뭇가지에 깡충강충 뛰어다니는 작은 새 큰 새들의 지지재재 쪼르릉하는 귀여운 노래, 청승스러운 노래, 짚조각을 찢는 듯하는 노래뿐입니다.
 
8
하늘이 어떻게 푸른지 푸르다 못하여 파랗고, 파랗다 못하여 짚은 야청빛인데, 여기 저기 하얀 양의 때 같기도 하고, 갓핀 면화 송이 같기도 한 구름들이 조는 듯이 죽은 듯이 고요히 떠 있고, 바로 머리 위에 걸린 해는 밝다 못하여 하얀 빛을 푸른 잎 붉은 꽃에 우거진 산림에 내려 쬐입니다.
 
9
거울과 같이 맑고 평평한 물에는 구름 그린자 나무 그림자, 만물이 다 고요히 무엇을 생각하는 듯한 속으로 열두 척 배가 가는 듯 마는 듯 물굽이를 돌고 나뭇가지를 헤치며 깊이깊이 산림 속으로 들어갑니다.
 
10
붉은 돛들도 꽃향기와 수증기에 무거운 바람을 견디지 못하는 듯이 축 늘어지고, 뱃사람들의 노젓는 소리만 이국총 지국총할 뿐입니다.
 
11
이 모양으로 혹은 번질전질한 물소를 만나고, 혹은 늙은 나뭇가지에 늘어진 이름 모를 덩굴에 원숭이 수십 놈이 매어달려서 그네 밟듯이 슬쩍슬쩍 밟아 가지고는 강을 건너는 광경도 보고, 혹은 큰 나뭇가지가 휘끈휘끈할 만한 징글징글한 큰 구렁이도 보고, 머리가 아프도록 처음 보는 것을 많이 보면서 몇 번인지 모르게 물굽이를 돌아 두어 번 조그마한 산굽이도 돌아 혹 산림이 좀 터지고, 풀판을 지나 멀리 뾰족뾰족한 산봉우리도 바라보고, 한번 푸른 하늘에 갑작소나기를 맞아 째듯한 볕 속에 비 목욕을 한 일도 있고, 그리하다가 석양이 산림의 푸른 잎사귀에 걸릴 때 쯤하여 강 넓이가 점점 좁아질 때에 어떤 높은 산 굽이를 돌아 휘임한 물 굽이에 배가 닿았읍 본 즉, 뒤에는 큰 산이 있고, 산 너머로 또 산봉우리들이 방싯방싯 엿보고 있는데 산꼭대기에는 하얀 바위가 있고, 중턱부터는 푸른 산림이며 산밑에서 강가까지는 산림 때문에 자세히는 지세를 알 수 없어나 평평한 벌판인 듯한데 바로 강가에는 웬일인지 나무가 없고, 길이 넘는 풀밭을 이루고, 거기는 각색 꽃이 피어서 석양에 부드러운 향기를 발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12
『우리가 찾아온 데가 아마 여긴가?』
 
13
할 때에 허생이 먼저 배에서 뛰어내리며,
 
14
『자 다들 내리시오. 여기가 우리가 살 곳이요. 이곳은 천지개벽 이래로 한번도 이적이 들어 본 일이 없는 땅이니, 이 땅에 들어오기는 우리가 처음이요. 이 땅에는 사시 봄과 여름과 가을이 있거니와 겨울이 없으니, 한 해에 두 번 농사를 지을 수가 있고, 또 이 땅이 비록 크지 못하나 사방 오백리는 되니 만일 우리 천여 명 사람이 이 땅에서 살면 삼백년 동안에는 결코 부족함이 없을 것이요. 우리가 천신만고로 이곳에 왔으니, 이제부터 우리는 집을 짓고, 땅을 갈고, 길을 만들고, 여기서 새 나라를 세울 것이요. 이곳이 물이 좋고, 땅이 넓으니,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살림을 시작할 것이요. 자 다들 내리시오.』
 
15
합니다. 허생의 말이 끝나기까지 사람들은 감격한 생각을 가지고 고개를 숙이고 있더니 허생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은 마치 제상 앞에 슬장을 드리러 가는 제관 모양으로 하나식 하나식 남자 하나, 여자 하나, 열두 뱃머리에서 휘끈하는 발판으로 걸어 내려옵니다. 걸어 내려오는 대로 허생을 가운데 두고 열 겹 스무 겹으로 둘러섭니다. 마치「무슨 말씀이나 하십시오. 저희들은 당신의 말씀만 기다립니다.」하는 듯 합니다. 그렇게 우락부락하던 도적놈들이 마치 큰 제사에 제관과 같이 엄숙하고 공손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16
사람들이 다 내려온 뒤에는 소들이 내려오고, 그 뒤에 개와 고양이들이 내려오고, 그뒤에은 닭장 속에 든 닭과 비둘기가 내려오고, 그 뒤에는 의복과 양식과 농사에 쓰는 모든 장기며 톱, 대패, 변탕 같은 목수의 쟁기며, 도끼, 자귀, 마치 같은 기구들이 내려옵니다.
 
17
사람들과 짐승들가 모든 짐이 다 내린 뒤에 허생이 붉은 기를 두르며,
 
18
『우리가 이 땅에 온 것은 남을 부려먹지도 말고, 남의 부림을 받지도 말려 함이니, 누구든지 이마에 땀을 흘리고, 몸소 일하기를 원치 아니하는 이가 있거든 이리고 나서시오.』
 
19
하였습니다. 그런즉, 사람들이 「누가 나서는고?」하고 서로 얼굴을 바라보나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습니다. 그런즉, 허생은 또 한번 기를 두르며,
 
20
『만일 다 몸소 땀을 흘리고 일을 하기를 원한다 하거든 옳은 손을 드시오.』
 
21
하였습니다. 그런즉, 천여 명 사람들이 일제히 옳은 손을 듭니다.
 
22
다음에 허생은 또 기를 두르며
 
23
『우리가 이 땅에 온 것은 어떤 이는 많이 가지고 어떤 이는 적게 가져서 많이 가진 자는 가진 것이 많은 것을 자랑하고, 적게 가진 자는 많이 가진 자를 시기하여 서로 다투지 말고자 함이니 비록 이미 이 땅에 왔다 하더라도 네것 내것을 가리려 하는 이는 다 이리로 나오시오. 만일 그런 이가 있다 하면 타고 오던 배로 돌아가야 할 것이요.』
 
24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한 사람도 나서는 이가 없었습니다.
 
25
허생이 다시 기를 두르며, 아까보다는 더욱 큰 어조로,
 
26
『누구나 사람을 대하여 성내고 싸우려 하는 생각이 있거든 다 이 앞으로 나오시오. 성을 내기 때문에 싸움이 나고, 싸우기 때문에 때리는 일이 나고, 때리는 일이 있기 때문에 죽이는 일이 있고, 죽이는 일이 있기 때문에 원수가 생기고, 원수가 생기기 때문에 싸움이 끊이지 아니하고, 싸움이 끊이지 아니하기 때문에 관원이 생기고, 관원이 생기기 때문에 세격이 생기고, 세력이 생기기 때문에 남을 부리는 자와 남에게 부리우는 자가 있고, 많이 가지는 자와 적게 가지는 자가 있기 때문에 도적이 생기고, 도적이 생기기 때문에 병정이 생기고, 병정이 생기기 때문에 큰 싸움이 나고, 큰 싸움이 나기 때문에 나라가 흉하고, 나라가 망하는 것이니, 사람의 모든 화단과 슬픔이 그 근본을 캐면 성내는 대에 있는 것이요. 우리들 둥에 성을 내는 자가 있다 하면, 우리의 새 나라에 화단과 슬픔을 끌어들이는 자니. 그러한 사람은 이 땅에 머물지 말고 싸움이 있는 옛 나라로 돌아가야 할 것이요.』
 
27
하고 허생이 한번 더 기를 드르며,
 
28
『 자 성낼 뜻이 있는 이는 앞으로 나오시오.』
 
29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도 싸우는 옛 나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이가 없습니다.
 
30
그것을 보고, 허생은 만족한 듯이 빙그레 웃으며, 또 한번 기를 두르고,
 
31
『만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는 아무러한 일이 있더라도 성을 아니 내겠노라, 만일 성을 내는 일이 있으면 싸우는 옛 나라로 돌아가겠노라 하는 것을 허락하는 이는 옳은 손을 들으시오.』
 
32
하였습니다. 그런즉, 일제히 옳은 손을 높이 들었는데 석양의 붉은 빛이 허생의 얼굴과 천여 명의 높이 든 손을 비치었습니다.
 
33
이대에 무리 속으로서 한 사람이 뛰어나와 허생의 앞에 엎드려 이마를 조아리며,
 
34
『그저 대왕마마께서 소인의 무리들을 인도하셨사오니, 이후에도 소인의 무리는 그저그저 대왕마마의 분부대로 하겠사옵니다. 죽으라 하시오면 죽사옵고, 그저 그저 물에든 불에든지 대왕 마마께옵서 분부하오시는 대로만 하겠습니다.』
 
35
합니다. 허생은 이 광경을 보고 잠시 얼굴을 찡기며, 그
 
36
『이 땅에는 대왕도 없고, 소인도 없고, 나 많은 이가 형이 되고, 젊은이는 아우가 되며, 사내 아이는 모두 아들이요, 계집아이는 모두 딸일 것이요. 이 땅은 이러한 땅이요.』
 
37
하였습니다. 말이 끝난 뒤에 허생은 마지막으로 또 한번 기를 두르며,
 
38
『내일부터는 우리의 일을 시작할 터이니 오늘 저녁을 여기서 편안히 지내도록 저녁을 예비하고 잘자리를 예비하시오.』
 
39
하였습니다. 이 말에 사람들이 비로소 오글오글 움직이기를 시작합니다. 얼마 아니하여 이 개벽 이래로 사람이 들어와 본일없는 새 땅에서는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나고, 저녁밥을 짓는 연기가 오르고, 새 땅의 부드러운 풀에 배불린 마소들의 기운차게 부르는 소리가 깊은 산림과 적막에 잠겼던 새로운 강산을 울립니다.
 
40
밥이 어찌도 그리 맛난고? 모든 반찬은 어찌도 그리 맛이 좋은고? 대체 물은 어떻게 그처럼 맛이 좋은고?마치 꿀맛 같다. 이 더운 나라에 어디서 그런 찬물이 나오는고? 마치 얼음 냉수와 같다. 이 좋은 물을 개벽 후 몇 백만년에 누가 마셨던고? 속절없이 흘려 내려서 강물이나 보태었던가. 하늘에 나는 새들의 고운 털이나 씻겼던가. 수풀 속으로 짝을 구하노라고 목마른 사슴이나 기린의 쉬는 터나 되었던가.
 
41
또 기나긴 밤에 하늘에 가는 그림자나 비치이고, 꽃 향기 불어오는 바람에 비단길 같은 잔물결이나 일으켰던가. 이끼 푸른 바위 밑으로 끊임없이 보글보글 끓어 오르는 구슬같이 맑고 얼음같이 차고 꿀같이 단 좋은 샘물을 마시고, 또 마시고, 사람들은 시름없이 풀 위에 누웠습니다.
 
42
산림 속으로 떠오른 아침 해는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장관입니다. 먹장같이 시커멓던 산림 머리에 문득 금빛같은 불이 붙으며, 금화살 같은 빗발이 가지 사이 잎사귀 사이로 흘러 이슬에 것은 풀잎사귀에 점점이 구슬 등불을 켜 놓습니다.
 
43
그때에 어둠 속에 소리도 없이 졸던 강물이 은빛으로 자주 빛으로 금빛으로 연해 새 옷을 갈아입고, 그 서풍에 새들이 날고 뛰고 지저귀며, 아침 노래를 부릅니다.
 
44
사람들도 곤한 잠을 깨어 강물에 얼굴과 몸을 씻고, 기름과 같은 아침빛 속에 하늘을 바라보니 새 하늘 새 망에 기쁨과 소망의 따뜻한 피만 콸콸콸 흐릅니다.
 
45
이때에 어디서,
 
46
『아, 저게 무엇이야?』
 
47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소리 오는 관을 바라본즉, 귀가 훨쩍크고, 목이 가늘고 길고, 고동색 바탕에 검은 점이 드문드문 박힌 야릇한 짐승 두엇이 고개를 번쩍 들고, 우거진 종여나무 그늘에서 물끄러미 사람의 무리를 내려다 봅니다.
 
48
그러더니마는 그중에 한 놈이 슬슬 어디로 가버리고 말더니 얼마 아니하여 대여섯 놈을 데리고 와서는 아까 모양으로 우두커니 서서 사람들을 내려다봅니다. 사람들도 일변 무섭 기도 하고, 일변 이상도 하여 말없이 그 짐승들을 물끄러미 마주보고 섰습니다. 얼마 동안을 이렇게 하더니 그 모가지 긴 짐승 하나가 슬슬 사람들 있는 곳을 향하고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보고 다른 놈들도 하나씩 둘씩 그놈의 뒤를 따라 뚜뻑뚜뻑 걸음발로 무겁게 걸어 내려옵니다.
 
49
『아이구, 저놈들이 왜 내려와?』
 
50
『에그! 이를 어찌해?』
 
51
하고 사람들이 슬슬 피하는 것을 보고, 그놈들은 이상한 듯이 걸음을 멈추고,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무슨 생각이 났는지 오던 길로 도로 슬슬 걸어갑니다. 그리고는 아까서서 보던 종려나무 밑에서 또 한참 동안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보자 하는 듯이 뒤를 쓸쓸 돌아보며, 수풀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맙니다. 사람들도 무서운 마음이다 없어지고, 도리어 그 이상한 짐승들이 다시 왔으면 하는 정다운 생각이 납니다.
 
52
이 모양으로 새 나라의 첫날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아침을 먹고 나서 세 패로 갈리어 한 패는 길과 집터를 만들고, 한 패는 산림에 들어가 집 제목을 찍고, 한 패는 벌판에 흩어져 풀을 베어 농사할 터를 만들고, 부인네들은 뒤에 남아 더러는 배타고 오는 동안에 묵었던 빨래를 하고, 더러는 풀속과 나무 속으로 다니며, 나물과 과일을 따 오고, 더러는 기명을 부시고, 그 중에도 건장한 부인네는 사내들 모양으로 도기와 낫을 들고, 산림 속으로 들어가 불 때일 마른 나무를 합니다.
 
53
허생은 말뚝과 장도리를 들고 집터를 잡으며, 돌이는 웃통을 벗어붙이고, 시커먼 몸뚱이에 구슬땀을 흘리면서 괭이를 들어 집터를 팝니다.
 
54
점심때에 모여들 때에는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기운이 넘치도록 붉게 되었습니다. 혹은 도끼에 적삼을 걸어 둘러메고 오며, 혹은 종려 나무 잎사귀를 뜯어 우산 모양으로 받고 오고, 혹은 누런 으름을 따서 아내를 위하여 아리랑타령을 불고 오고, 혹은 불때일 마른나무를 무슨 덩굴로 얽어 매어 두 사람이 마주메고, 「영혀리 영혀」를 부르며 모여 들고, 또 혹은 무슨 가댁질을 하노라고 풀속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웃음에 목이 메어 킥킥거리고 달려오고, 또 혹은 바쁜 일도 없다는 듯이 도끼를 둘러메고 길게 소리를 하며 내려 옵니다. 사람들이 오글오글 새로 쳐 놓은 집터 위에 톱으로 갈라 놓은 둥근 나무 토막들을 깔고 턱턱 들어앉아서 밥 한그릇 국 한그릇 나물 한그릇을 앞에 놓으니, 하늘에는 하얀 태양이 둥둥 뜨고, 오정 지낸 부드러운 바람이 나뭇가지를 가볍게 흔들어 땀 흘리는 건장한 몸뚱에에 그림자가 얼른 얼른합니다.
 
55
참 맛나다. 어떻게도 이렇게 밥이 맛난가. 밥 알알이 맛이 나고,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고, 국 모금 모금이 맛이 납니다. 이렇게 밥이 멋이 날진댄 밥 하나면 그만이지 다른 것은 해서 무엇하나. 밥만 먹고 물만 마셔도 살이 찔 것 같고, 천년 만년이나 살 것 같습니다. 게다가 향긋하고 연연한 멧나물이 맛나는가. 내 입이 맛나는가. 「좀더.」「나도.」하고 먹고는 또 먹는데 산더미같이 무쳐 놓았던 멧나물이 하나도 안 남고 순식간에 다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식후에 나오는 것은 으름, 딸기, 귤, 보기만 해도 침이 스르르 도는 시원한 과일을 먹고 나니 날아갈 듯이 정신이 쇄락하여집니다.
 
56
배고프다가 먹는 밥, 일하고 나서 먹는밥, 이러한 밥맛은 오직 지내 본 사람만 아는 것입니다. 왕후 장상이 천만금을 들여서 용함봉장에 갖은 팔진미를 다 갖추기는 하리다마는, 이 밥맛 하나는 천하를 주어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57
『나야 밥이야! 밥이야! 맛나는 밥이야!』
 
58
밥을 먹고는 일을 하고, 일이 끝나면 소리하고 놀고, 그리 다가 배가 고프면 또 밥을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고, 더우면 종려 나무 그늘 부드러운 풀위에 드러누워 낮잠을 실컷 자고, 땀이 흐르면 맑은 강물에 덤벙 뛰어들어 헤엄을 치고, 때를 씻고, 이러하는 동안에 밭이 생기고, 논이 생기고, 새롭고 깨끗한 집들이 생기고, 넓은 마당이 생기고, 넓은 마당에는 여러 가지 열매 열리는 덩굴로 지붕까지 만들고, 사람 들이 일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한 포기씩 파다가 심은 꽃으로 넓은 마당 가장자리가 오색이 찬란한 꽃밭을 이루었 습니다.
 
59
뜨겁던 해도 넘어가고, 서늘한 저녁 바람이 스르르 돌아갈 만한 때에 일터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이 넓은 마당에 커단 식탁을 벌여 놓고, 웃고 떠들고, 저녁밥을 먹고 나서는 그 자리에서 소리할 줄 하는 이는 소리를 내고, 피리불 줄 아는 이는 피리를 불고, 장단을 칠 줄 아는 이는 나무 젓가락 으로 식탁을 두드리어 장단을 맞추고, 어떤 이는 피리와 식탁 장단을 맞추어 얼씬얼씬 춤을 춥니다. 그러할 때에 끝없는 바닷물에 말끔하게 씻은 금쟁반 같은 달이 수풀 가지를 헤치고, 별이 총총한 하늘에 쑥 올라오면 티끌 하나 없는 공기를 통하여 참기름 같은 서늘한 달빛을 동이로 담아다 붓듯이 새 나라에 쏜아집니다. 새로 지은 집들이 시커먼 그림자를 뒤에 끌며 쑥쑥 나서고 산들이 나서고 , 커단 나무 들이 쑥쑥 나서고, 강물이 번쩍번쩍 밫나기 시작하고, 이름 모를 밤새들이 후루루 후루루 날아다니며, 청승스러운 울음을 웁니다.
 
60
아롷개 덜아 쑥 올라오면 사람들은 반가운 사람이나 만나는 듯이 욱 일어나서 소리를 지릅니다. 그런 뒤에는 끝없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나오고, 옛 나라 이야기와 일하던 이야기를 하고, 그러다가 밤이 깊으면,
 
61
『인제는 가 잘까.』
 
62
하며, 하나씩 둘씩 집으로 돌아갑니다.
 
63
집에는 부인네들이 둘씩 셋씩 모여 앉아서 바느질도 하고, 이야기도 하고, 웃고 떠들다가 남편이 돌아오면 동넷집 부인들은,
 
64
『우리 집에도 왔겠지요?』
 
65
하고 슬며시 일어나 나갑니다. 나와서 자기 집에 가면 벌써 남편이 들어와서 앉지도 않고, 우두커니 서 있다가,
 
66
『어디 갔었어?』
 
67
하고 못마땅한 듯이 눈을 흘깁니다.
 
68
『뒷집에 갔었지요. 이것 자시우.』
 
69
하고 치맛자락에서 무슨 과일을 꺼내어 남편에게 줍니다.
 
70
남편은 그 과일을 받아 먹고,
 
71
『아이구 곤해, 어서자!』
 
72
합니다. 이라하여 스르르 잠이 들고, 달과 별과 이따금 불어 오는 바람과 강에서 고기 뛰는 담방담방하는 소리만이 밤 깊은 줄을 모르고 이 조그마한 새 나라를 지키고 있습니다. 꿈! 이 백성들은 무슨 꿈을 꾸는고?
 
73
새벽 닭이 홰를 치고 울더라도 그 울음소리가 맘놓고 자는 이 백성의 꿈을 깨울 수는 없었습니다.
 
74
『닭아! 가만 있거라. 한잠만 더 자고 나도 일 나갈 시각은 안 늦을 것을.』
 
75
해가 뜨고 지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동안에 밖에는 보리와 밀이 누렇게 고개를 숙이고 논에는 벼가 금 물결을 굼실거리게 되었습니다. 보리 밀과 벼를 한꺼번에 심거 한거번에 거두는 것도 이상하거니와 외, 참외, 호박, 수박이 모두 한거번에 자라서 한거번에 열려서 한거번에 익는 것도 이상합니다.
 
76
바닷가에 동을 막아 놓고, 바닷물을 길어 부어 마르게 하니 뒤에 남는 것은 소금이요, 농사하고 쉬는 여가에 노를 꼬고 그물을 떠 바다에 넣으니, 펄떡펄떡 뛰는 생선이요, 광주리를 끼고, 산림 속으로 한참을 돌아다니면 향기 나는 멧나물이요, 또 한참을 돌아다니면 금빛 이슬이 뚝뚝 떨어지는 으름과 각색 과실이요, 또 한참을 돌아다니면 향기가 코를 찌르는 각색 버섯이요.
 
77
톱으로 켜고 대패로 밀고, 오귀칼로 우비면 각색 나무 그릇이요, 흙을 척척 빚어 가마 속에 넣고 불을 처때이면, 각색 질그릇 사기 그릇이요, 도기요,문고리요, 문데는 밭이요, 낮은 데는 논이외다.
 
78
『목욕을 할라는가 강물은 긷고요, 냉수를 먹을라나 석간수를 길어라.』
 
79
그러나 사냥은 말자. 사람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집 근처로 내려와 마당으로 다니면서 사람과 친해 노는 짐승을랑 죽이지 말자. 이래서 사냥은 아니하기로 하였습니다.
 
80
『밥만 먹어도 살이 찌는데요 고기는 해서 무엇하나요 풋나물 좋고요 생선도 좋은데요.』
 
81
『소를 어떻게 잡아 먹나요 밭 갈아 주고요 짐 날라 주고요 그 눈을 보아요 순하디 순한데요 소를 어떻게 잡아 먹어요.』
 
82
『산짐승도 못 잡아 먹어요 어슬렁 어슬렁 놀러 오는데요 놀러 왔다가는 한참 놀고는 어슬렁 어슬렁 제 집으로 가는데요.』
 
83
『닭은 어떻게 먹나요 구 구 구 하고요 날 따라 다니는 걸 새벽이면은 꼬끼요! 하는 걸요 닭을 어떻게 먹나요.』
 
84
『새들도요 건드리지 마라요 찌찌째째 하고요 제 소리 하는데요 모두다 모두다 의좋게 살아요.』
 
85
없는 것이 있나. 땀 한방울만 떨어지면은 먹을 것 한섬이 올라옵니다. 이것을 어떻게 다 먹나요. 너무나 많아서 어떻게 다 먹어요. 밥도 지어 먹고, 떡도 해먹고, 감주도 해먹고, 식혜도 해먹고, 이것도 해먹어 보고, 저것도 해먹어 보고, 맛날 듯한 것은 다 해먹더라도 허생님 분부시니 술을랑 해먹지 맙시다. 감줄랑 해먹어도요.
 
86
이 모양으로 새 나라의 세월은 강물 흘러내리듯이 부족함도 없이 바빠함도 없이 술술 흘러 내려갑니다. 그러할수록 사람들의 기쁨도 흘러내리는 강물 모양으로 더욱 넓어 가고 더욱 깊어 갑니다.
 
87
추수가 다 되었습니다. 이번 추수만 가지고도 사년은 먹을 만합니다. 그중에서 만일을 염려하여 일년만 먹을 양식을 남겨 놓고는 그 나머지 삼천여 석으로 열 두 배에 가뜩 싣고, 허생이 새 나라를 떠낫습니다. 사람들은 배 떠나는 곳에 모이어 아무쪼록 일 없이 속히 다녀오기를 원하고, 배들이 안 보이게 되도록 팔을 두르며 작별하였습니다.
 
88
허생이 열두 배를 끌고 동북으로 향한지 열 이틀만에 한 항구에 다다르니 이곳은 일존 장기라 하는데라, 마침 그 전 해에 일본 전국에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먹을것이 없어 사람이 사람을 서로 잡아 먹는 곳도 있다 하는데, 눈 파랗고 코 큰 양인들이 멀리 명나라 땅에서 곡식을 실어다가 비산 값으로 팔아 많은 돈을 남겼다 합니다. 허생의 곡식 실은 배가 항구에 들어오매 장사하는 일본 사람들이 딸깍하는 나막신들을 신고, 떼를 지어 모여 들어서 저마다 자기에게 많이 팔아 주기를 청합니다.
 
89
『조선 사람이 양식을 실고 왔다.』
 
90
하는 소문이 들리자, 장기 일판에서 모두 떨어 나와 허생의 배를 에워사고, 알아듣도 못할 말로 지걸이는 판에 웬 긴 칼 차고, 이상하게 활개치는 사람 사오인이 가가이 오는 것을 보고, 딸각딸깍 나막신 신은 사람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 나가서 땅바닥에 꿇어 엎덥니다. 긴 칼 찬 사람이 두 어깨를 잔뜩 추켜들고, 몸을 이상하게 어찔어찔하면서 갈지자 걸음으로 뚜벅뚜벅 허생의 뱃머리로 오더니, 품속에서 지필을 내어들고, 머리를 두리번두리번하며 필담할 사람을 찾는 모양입니다. 이것을 보고, 허행이 나서서 필담한 결과로 그 긴 칼찬 사람들은 이 지방을 맡아 다스리는 대명(大名)의 신하인 것과, 그 대명이 지금 이웃 대명과 전쟁을 하기 위하여 군량을 산다는 것과 그 대명의 명령으로 자기내가 허생이 싣고 온 곡식을 좋은 값을 주고 살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런즉, 허생은 필담으로,
 
91
『나는 장사라러 온 사람이라, 누구나 좋은 값을 주는 이면 내 물건을 팔 것이어니와, 듣건댄 귀국에 흉년이 들엇다 하니 같은 값이면 사람의 생명을 끊는 군량으로 파는 것보 다 굶주리는 백성들의 양식으로 팔기를 원하노라.』
 
92
하였습니다. 그런 즉, 그 긴 칼 찬 사람들이 무료한 듯이 서로 마주보더니 그 중에 한 사람이 눈초리가 위로 올라가고, 이마에 핏줄이 불록불록하더니마는 벌떡 일어나 무슨 소리를 빽 지르고, 칼자루에 손을 대어 당장에 배려는 듯이 하고 무에라고 허생을 보고 큰소리를 하자, 곁에 섯던 다른 사람이 필담으로,
 
93
『이것은 우리 대명(大名)의 땅인즉, 만일 우리 말에 응하지 아니하면 곡식을 억지로 압수하겠다.』
 
94
합니다. 허생은 얼른 붓을 들어 종이에 이러한 뜻을 썼습니다.
 
95
『그대에게 칼이 있고, 나에게 의 있도다. 칼이 한때에 이김이 있으나, 만세에 이름이 있고, 의일시에 눌림이 있더라도 만세에 이김이 있으리로다. 그대의 나라가 나의 나라와 서로 이웃하였으니 내 그대에게 삼천석의 옳지 못한 양식을 팔기는 차라리 그대에게 의의 가르침을 주리라.』
 
96
하였습니다. 이것을 보고, 칼자루에 손을 대었던 사람이 더욱 대노하여 칼을 빼어 허생을 치려 합니다. 허생이 웃고, 다시 붓을 들어 이렇게 썼습니다.
 
97
『그대 의를 모를진댄 내 이로써 말하리라. 그대 만일 장사를 후히 대우할진댄 천하의 장사가 그대에게로 모이려니와 그대 만일 장사를 옳지 못하게 대할진댄 천하의 장사 그대에게 오지 아니하리니, 그대의 땅이 작고, 백성이 많거늘 천하의 장사 아니 올진댄 어떻게 나라를 하이려 하나뇨. 그대 만일 나의 뜻을 막을진대 내 다시 그대의 땅에 양식을 실어 오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나의 뜻을 좇을딘댄 내 한 해에 두 씩 양식을 실어 오리라.』
 
98
하였습니다. 그런즉, 칼을 때어 들었던 사람이 옳다는 뜻으 로 고개를 끄떡거리고, 칼을 도로 칼집에 꽂은 뒤에 다시는 아무 말이 없이 돌아섭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허생을 대하여,
 
99
『우리의 무례하였음을 허물치 말라. 우리 나라 사람이 다 저러한 것이 아니니라.』
 
100
하고 은근히 고개를 숙이고 뒤를 따라 가버리고 맙니다.
 
101
그제야 좌우에 엎드렸던 나막신 신은 사람들이 우 일어나 허생의 앞에 허리를 굽히며,
 
102
『저희 무리들이 살아났습니다. 곡식 실은 배가 들어오는 대로 사무라이(일본 양반)들이 군량한다고 다 사버리고, 우리 백성들은 사무라이에게 애걸복걸해서 다섯 갑절 여섯 갑절이나 값을 주고야 겨우 몇 섬씩 얻어 샀습니다,』
 
103
하고 배에 실은 곡식을 전부 자기네 백성에게 팔기를 원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조선 말을 모르고 저선 사람들은 일본 말을 모르므로, 허생은 모여드는 일본 백성들 중에서 글 아는 사람을 찾아 필담으로 겨우 이런 뜻을 알아 들었습니다.
 
104
이렇게 피차에 말을 모르고 또 무식한 일본 백성들이 쓰는 글이 이상하여, 피차에 뜻을 잘 통하기가 어려워할 즈음에 어떤 사람들이 멀리로서부터 뛰어와 허생의 앞에 조선 풍속으로 절을 하며, 조선 말로,
 
105
『우리가 조선 양반을 오늘이야 만났습니다. 우리 증조부께서 임진왜란 통에 어떤 일본 사람을 따라 건너와 이곳에 살게 되었는데, 증조부님게는 우리 형제가 나기도 전에 돌아가시옵고, 조부님게는 지금 성존해 계시오며, 저희 형제를 보시고 항상 말슴사시옵기를, 장기는 각국 장사가 많이 오는 곳이니 너희 항구에서 날마다 기다리다가 혹 조선 사람이 오거든 모시어 오라고 ─ 증조부님께서도 고국 사람을 다시 못 대해 보시고 돌아가시는 거슬 항상 한탄하시었고, 임종에도 고국을 못 보고 죽는 것이 삼생의 원한이니 너일랑 부디 고국으로 돌아가 내 노뼈를 고국 산천에 묻어 달라고 하시었다고 조부님게서노 그렇게 말씀을 하시길래 저희 형제가 벌서 십년을 두고, 장기에 나와 날마다 들어오는 배를 바라보고 기다려도 조선 배는 보이지를 아니합니다. 그래서 조부님게서는 아버지는 고국 강산을 구경이나 하셨거니와 나는 고국 강산은 커녕 고국 사람도 구경도 못하고 죽을 라나 보다고노 슬퍼하시는 것을 보니 저희 형제가 두 날개만 있사오면 조부님을 업고 고국으로 날아 건너가기라도 하련마는 수로 만리에 할 길이 없사옵니다가 오늘 우연히 고국 양반을 뵈오니 어찌하올 바를 모르겠습니다.』
 
106
하고 조선 절과 일본 절을 섞어서 무수히 허생과 다른 사람들에게 절을 합니다. 허생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만리 타국에 고국 사람을 만나는 것이 너무도 반가와서 수 없는 사람들이 형제를 에워쌌습니다. 성명을 물은즉, 그는 본래 경상도 진주 사람으로 성은 김시라 하며, 일본에 온 후에는 김자 밑에 촌자를 달아 김촌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본즉, 형제가 다 일본 옷을 입엇으나 아가 왔던 사무라이들 모양으로 긴 칼 하나 작은 칼 하나를 차고 언어와 행동이 심히 정중합니다.
 
107
물건을 다 판 뒤에 형제를 따라 형제의 집을 찾아가기로 하고, 우선 그 형제를 따라 형제의 집을 찾아가기로 하고, 우선 그 형제들이 통사가 되어 열두 배에 실은 곡식을 백성들에게 다 팔고, 허생은 돌이를 데리고, 그 형의 뒤를 따라 가고 아우되는 사람은 배와 사람들을 보호하노라고 배에 남아 있기로 하였습니다.
 
108
한곳에 다다라 일본 교군을 타고, 또 몇 십리를 가니 조그 마한 산밑 잔잔히 흐르는 개천가에 한 그리 작지 아니한 오륙십 호 집이 둘러박힌 촌락이 있고, 그 촌락의 중앙에 가장 큰 집 하나이 잇는데, 그 앞에서 세 사람은 교군을 내렸습니다.
 
109
세 사람이 내리는 것을 보고 집으로서 많은 노복과 남녀가 마주나와 절할 자는 절하고, 허리를 굽힐자는 허리를 굽힙니다. 형되는 이가 허생을 가리키며,
 
110
『이 어른이 고국서 오신 손님이라.』
 
111
고 소개하는 말이 끝이 나기도 전에 사람들은 땅바닥에 엎드렸습니다.
 
112
이때에 파파노인 하나가 어떤 젊은 사람에게 끌리어 버선 발로 비틀비틀 나옵니다. 허생을 인도해 온 사람이 허생을 보고 그 노인이 자기의 조부인 것을 말하니 허생이 그 노인 앞으로 뛰어가 엎드려 절하며,
 
113
『만리 타국에서 고국 부로를 뵈오니 감격하는 뜻을 이루 형언할 수가 없사옵니다. 이렇게 문밖에까지 나와 맞아 주시오니 너무 황송하옵니다.』
 
114
하였습니다. 그렇게 무엇에 감동하는 빛을 보이지 아니하던 허생도 이때에는 퍽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런즉, 그 노인 이 손을 내어밀어 허생을 붙들어 일으키며,
 
115
『고국 손님이 오시는데 아무리 내가 늙었기로 방에 앉아 맞을 리가 있습니까. 내 선친께서 일생에 고국을 못보시고 돌아가실 것을 한탄하시옵다가 임중에「조선아! 조선아! 조선아!」하시고 조선을 세 번 부르시고 운명을 하시오니 감겨 드리와도 감겨지지 아니하는 눈에는 고국을 생각하시는 눈물이 맺히었습니다. 이 늙은 것도 나이 팔십이 넘사오니 밤낮에 생각하는 것이 고국 일이라, 나도 금생에는 고국 천지를 보지 못하고 죽을까 하여 설어하였사옵더니 이제 하늘이 지지하시와 고국 손님을 보내시오니 고대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116
하고 친히 허생의 손을 잡아 안으로 인도합니다.
 
117
넓은 방의 아랫목에 노인이 앉고, 노인과 마주 허생과 돌이가 앉고, 아이들은 전에 보지 못하던 야릇한 복색 입은 사람을 보고, 혹은 재미있어 하며, 혹은 놀라서 눈이 둥그레지며, 혹은 무서워서 어머니 뒤로 피하며, 혹은 으아 하고 소리를 내어 웁니다. 노인의 방에 앉고 나서 장지를 떼고, 그 곁방에 까지 넘치고, 그리고도 자리가 없어 뒷마루에까지 앉고, 또 그리고도 자리가 없어서 마당에 까지 서고, 이 모양으로 조용하던 이 집에는 갑자기 큰 잔치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118
노인은 친히 술을 따라 허생에게 권하며,
 
119
『내 선친께서 혼자 이곳에 오셔서 이만큼 자손이 퍼졌소 이다. 모두 합해서 한 팔십명 되지요. 저렇게 모두 일본 옷을 입고, 조선 말도 잘 모르지오마는 그래도 뼈다귀와 피는 조선 것이니까, 천년을 간들 맘이야 변하겠습니까. 그래도 고국 말을 하지요...... 사내 자식들은 본국 말을 알지마는 계집아이들은 일본 사람의 집으로 시집을 가니까 말도 잘 모르지요. ...... 자 어서 한 잔 더 잡수시오. 이게 일본 술이라 입에 맞으실는지 모르지마는 이 늙은 것이 정으로 드리는 것이니까.』
 
120
하고 연해 술을 권합니다. 노인의 말은 약간 서투르나 알아들을 만한 경상도 사투립니다.
 
121
허생도 노인이 권하는 대로 사양도 아니하고, 술을 받는데 뒤를 이어 나이 차례로, 나도 나도 하고 그 노인의 아들과 손자들이 술을 권합니다. 허생도 본래 술을 즐겨 하엿으나, 오랫동안 여러 사람을 위하여 술을 끊었다가 이 이상한 좌석에서는 사양을 아니하고, 주는 대로 받아 마십니다.
 
122
허생이 얼쯤 취하는 모양을 보고 노인은 잠간 술 권하기를 그치고, 허생을 향하여 본국 형편을 물습니다.
 
123
『내 선친께서는 임진란이 다 끝도 나기 전에 이곳으로 어셨다는데, 대관절 그 뒤에는 어떠하오니까. 천하가 태평하온지요. 성상께옵서도 내내 강녕하옵시고, 만민이다 안락하온지요? 』
 
124
하고 무릎을 꿇고 옷깃을 바르며, 극히 엄숙한 태도로 물습니다. 허생도 몸을 바르게 하고,
 
125
『임란이 지난 후에 얼마 아니하여, 또 병자호란이 낫습니다. 중원에 명나라가 망하고, 만주에 호가 천하를 차지하여 가지고, 우리 조선이 자기를 돕지 아니하였다 하여 대군을 끌고 바로 서울을 엄습하였습니다. 그래 경상은 남한산성에 몽진을 하셨다가 마침내 어찌할수 없음을 보시옵고, 성하지맹을 하시왔습니다. 』
 
126
하고 임란 이래의 고국 형편을 일일이 설명합니다.
 
127
허생은 말을 이어,
 
128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연거푸 겪고 나니, 조선 팔도도 가위 쑥밭이 된 심이지요. 게다가 그동안 육년동안 흉년은 들고, 조정에는 간신들만 모여서 밤낮 싸움들만 하고, 각처에 도적이 붕기하여 만민이 가위 도탄 중에 있습니다.』
 
129
하고 길게 한숨을 쉬었습니다.
 
130
이 말을 듣고 노인은, 매우 근심되는 듯이 주름잡힌 얼굴을 찌푸리고, 곁에 모여 앉았던 젊은 사람들도 본국이 편안치 아니하다는 말을 듣고 모두 얼굴에 근심된 빛을 보입니다.
 
131
허생은 모든 사람들이 슬퍼하는 빛을 보고, 심히 마음에 불안하여 말끝을 돌리어,
 
132
『어떻게 임란에 일본으로 오시게 되셨는지 그 말씀을 들려 주셨으면 좋겟습니다.』
 
133
한즉, 노인은 방안과 툇마루와 마당에 모여 있는 자손들을 돌아보며,
 
134
『나도 이곳에 와서 났으니까 자세히 못하오나 선친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서 알 뿐이지요.』
 
135
하고 정다운 옛일을 생각하는 듯이 눈을 감고, 무엇을 생각하기도 하고 죽 둘러앉은 자손들을 돌아보기도 하더니 자손들을 향하여,
 
136
『어, 내가 너희들에게 이야기를 한지도 벌써 여러 해가 되었다. 그 동안에 새로 난 아이들도 있고, 그때에는 철없던 것이 지금은 철이 난 아이들도 있으니 한번 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좋겠다. 마친 본국 으로서 오신 손님도 우리가 이곳에 와 살게 된 것을 듣고 싶어 하시니 오늘은 내가 아버지께 들은 말씀을 또 한번 하려 한다. 』
 
137
하고 다시 허생을 향하여,
 
138
『나도 나이 팔십이 넘어 구십이 가까웠으니 세상 일도 다 잊어 버렸지마는 제 성명을 잊어 버리는 일은 있다 하더라도 선친께서 고국을 떠나시게 된 일이야 잊어버릴 리가 있습니까. 내가 나이 사오세쯤 되어 겨우 말귀를 알아듣게 된 뒤로 부터 내 가친께서는 노 나를 안으시고, 그 이야기를 하셨지요. 아마 찬해에도 몆 번씩 내가 입시여 세가 되기까 지에 무릇 몆 십번을 들었는지 알수 없습니다. 하도 여러 번 들으니까 내가 몸소 당한 것처럼 눈에 선하지요. 』
 
139
─ 내 선친께서 아직 젊었을 적에 임진왜란이 나서 진주성에 일병이 들어와 오랫동아 웅거하였는데 진주 일경의 어른들은 다 나가 싸워 죽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도망하여 버리고, 집에 남아 있는지 이는 늙은이와 아이들 밖에 없었더랍니다. 아마 이 세상이 다 일본 세상이 되나 보다 하던 차에 마침 무엇이라든가 하는 기생이 진주 남노인들과 부녀들 까지 일어나서 몽둥이 있는 자는 몽둥이를 들고, 식칼 있는 자는 식칼을 들고, 불시에 술취해 엄벙거리는 일병을 엄살 하여서 진구 있던 수천벙 일병이 모두 수족을 놀리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때에 더러는 도망하여 촌가로 달아났으나 다 촌민에게 맞아 죽고, 살아 남은 사람이 얼마가 안 되더랍니다. 그때에 도진이라는 젊은 일병 하나가 진주성을 빠져 나와서 산으로 들로 살 길을 찾아가다가 뒤에서 따르는 자는 급하고, 살 맞은 자리에는 피가 흐르고, 몸은 피곤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헤맬 즈음에 마친 내 조모께서 세사가 구차하셔서 산에서 나뭇가지를 줍고 계시는 것을 보고, 그 젊은 일병이 땅에 엎드려 손을 싹싹 비비며,
 
140
『그저 목숨만 살려 주시오. 저는 일본 사람이 온데 지금 뒤에서 사람들이 저를 죽일 양으로 따라오니 어디다 저를 숨기셔서 목숨만 사려줍시오.』
 
141
하고 눈물을 흘려 가며 애걸을 하더랍니다.
 
142
그것을 보시고, 조모님께서는 이번 싸움에 죽은 맏아드님의 일들 생각하고, 분이 나셔서,
 
143
『오, 내 맏아들을 죽인 것도 네로구나. 잘 만났다. 옳다! 잘 만났다. 내 아들의 원수를 오늘이야 갚았다.』
 
144
하고 소리를 지르시고 나뭇가지 끊으시던 낫을 들고, 대드셨다 합니다, 그런즉, 그 일본 사람은 그만 낙망이 되었던지 땅에 툭 쓰러지며,
 
145
『아이구! 어머니나 한 번 뵈옵고 죽었으면.』
 
146
하고는 엉엉 소리를 내어 울었다 합니다.
 
147
그때에 좀 떨어져 계시던 내 선친깨서 이상한 통곡 소리를 듣고 조모님께서는 낫을 들고, 그 병정을 찍으려 합니다.
 
148
그것을 보고 아버지께서는 어머님의 팔을 붙들며,
 
149
『어머니 웬 일이십니까?』
 
150
하고 물었습니다. 조모부님께서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치를 떨며,
 
151
『이놈이 네 형을 죽인 놈이다. 마침 도망해 오다가 날간을 내어 먹으려고 하는 판이다.』
 
152
하고 아드님이 잡은 팔을 뿌리치려 합니다.
 
153
이 광경을 보고, 땅에 엎드린 그 일본 병정이 고개를 들고, 다시 손을 비비며,
 
154
『미상불 내 손으로 조선 사람 여럿을 죽였으니 그중에 혹 당신의 아드님이 있어던지도 모릅니다. 내가 당신의 아들과 무슨 원혐이 있는 것도 아니요, 다만 우리 나라에서 나를 조선으로 보내고, 우리 대장이 날더러 조선 사람을 죽이라 하니 죽인 것이지 낸들 사람 죽이기를 좋아서 하였겠습니까? 내가 남들 죽였으니 남에게 죽임을 받는 것도 당연하지 마는, 아들을 잃고 슬퍼하시에는 당신을 볼때에, 내가 조선서 죽었다는 기별을 듣고, 슬퍼 하실 어머님이 생각납니다. 사내가 제 몸 죽기를 슬퍼하려마는 어머님 생각을 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눈물을 흘리는 것이옵니다.』
 
155
이렇게 말을 하고는 또 이마를 땅바닥에 조아리며 슬피 웁니다.
 
156
『이 사람이 비록 원수오나 어버이를 생각하고 슬퍼하는 양을 보오니 소자도 이 사람의 효성에 감동이 되옵니다. 형이 일병에게 죽은 것을 생각하옵고, 어머님께서 애통하시는 양을 생각하오면, 당장에 이 사람의 간을 씹고, 피를 빨고도 싶거니와, 나도 사람이요 그도 사람이라 어버이를 생각하는 정이 같은 것을 보오니 차마 그 목숨을 끊을 생각이 아니 나옵니다. 이제 이 사람을 살려 제 나라로 돌려 보내어 생전에 다시 그 모친을 보게 하는 것이 죽은 형의 뜻을 위로 함이 될까 하오니 소자를 불쌍히 여기와 이사람의 목숨을 보존하여 주시옵 소서.』
 
157
하고 비셨습니다.
 
158
조모님께서 그 말씀을 이윽히 들으시더니 눈에 눈물을 떨 구시고, 손에 들었더 낫을 내거 던지시며
 
159
『네 말이 옳다! 네 말대로 하여라. 내가 내 아들을 애통하는 맘이 간절하거든 남인들 안 그러랴. 애, 네 빨리 집에 달려가서 옷을 한 벌 가져다가 이 사람을 입혀라. 지금 이 사람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 임하였다고 한다.』
 
160
하시고 선친을 보내시자, 곧 고개 너머로서 아 하는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그래 조모님께서 그 일본 병정을 일으켜 웅커리진 곳에 눕게 하고 당신의 치마를 벗으셔서 그 일본 병정을 덮어 주셨습니다.
 
161
그러자, 몽둥이와 칼 든 사람 수십명이 달려오더니 조모님을 뵈옵고,
 
162
『지금 이리로 왜병 하나 지나가는 것 보았소?』
 
163
하고 물은즉, 조모님께서는 나뭇가지를 따시며,
 
164
『보았소.』
 
165
하셨습니다
 
166
『어디로 갔소?』
 
167
하고 그 사람들이 물은즉, 조모님께서는 치마 씌워 놓은 데를 가리키시며,
 
168
『저리로 갔소.』
 
169
하셨습니다.
 
170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은 치마를 들쳐 볼 생각은 아니하고, 그리로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171
이렇게 급한 통을 벗어난 뒤에 내 선친께서 가져오신 올을 입혀서 날이 저문 뒤에 그 사람을 집으로 데려다가 숨겨 두었습니다 그러나 조그마한 집이라 어디 숨겨 둘 방이 있나요, 그래 방에 앉았다가 밖에서 사람 오는 기색이 보이면 혹 부엌에도 숨기고, 혹 뒷문으로도 내어 보내고, 이러기를 얼마를 하는 동안에 살 맞은 자리도 낫고 몸도 다시 충실하여졌으나, 어디로 갈 곳이 있습니까?
 
172
하루는 그 사람이 조모님 앞에 끓어 엎디어,
 
173
『목숨을 살려 주신 은덕은 삼생에 잊지 아니하옵고 열 번 죽었다 다시 살아서 만일이라도 갚기를 맹세 하옵니다.』
 
174
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175
조모님께서 그 사람을 집에 두시고 한 달이 남아 지내시는 동안에 옛날 원수와 분한 맘도 다 잊어 버리시고 아들과 같이 귀애하시며, 어찌하면 어서 바삐 집으로 돌아가 그 어머니를 만날끼, 혹 사람들이 집에 일본 사람이 숨어 있는 줄을 알지나 아니할까 하고 항상 근심하시던 차이라 그 사람이 우는 것을 보고 ,
 
176
『은혜가 무슨 은혜야 , 이것도 다 인연이지. 사람 사는 곳에 인정이 있는 법이댜. 왜 사람들이 부질 없이 싸움을 일으켜서 서로 죽이나. 피차에 그냥 두어도 오래도 살지 못할 인생에 왜 서로 활로 쏘고 칼로 찔러 죽이나. 너도 너희 나라에 돌아가거든 다시는 그런 짓을 말라고 말을 잘 하여라.』
 
177
하고 위로하였습니다. 그런즉, 그 사람이 더욱 느껴 울며,
 
178
『생아자도 부모요 활아자도 부모라니, 저를 죽을 데서 살려 주셨사오니 이제부터 어머님이라 부르게 하시고 저를 아들이라 불러 주시옵소서.』
 
179
합니다.
 
180
『나는 벌써 너를 아들로 알고 있는데. 줄었던 큰아들이 살아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181
하시며, 그 사람의 등을 어루만지 셨습니다. 그런즉, 그 사람이 더욱 감격하여 일어나 여러번 절하며,
 
182
『소자를 아들로 아시오니 무엇이라 감사하을 말씀이 없사옵니다.』
 
183
하고 말이 막혀 한참을 느껴 울기만 하다가,
 
184
『오늘은 소자가 어머님 슬하를 떠나야 하셌습니다. 아무리 하여도 이웃 사람들이 소자가 여기 숨어 있는 줄을 알기 쉽사옵고, 그리하면 어머님과 이 어린 동생에게 큰 누가 도리 듯하오니 소자는 오늘 어머님 슬하를 떠나서 죽든지 살든지 다른 곳으로 달아나려 하옵니다.』
 
185
합니다. 이 말에 조모님께서는 깜짝 놀라시며,
 
186
『가기를 지금 어디로 간단 말이냐. 요새 사람듦이 모이기만 하면 일본 사람을 죽일 말만 하는 이때에 가기는 어디로 간단 말이냐. 여기 숨어 있다가 세상이나 평정해지고 너도 조선 말이나 더 잘 배워 가지고 어디로 빠져나갈 도리를 해야지 지금 가다가는 얼마를 안가서 큰일이날 것이다.』
 
187
하고 간절히 만류 하셨습니다.
 
188
이런 말을 할즈음에 밖에 일하러 갔던 조부님께서 황황이 뛰어 들어오며,
 
189
『어머님, 큰인났습니다. 지금 진주서 병정 수십명이 저 고개를 넘어 오는데 우리 집에 일병 두목 하나이 숨어 있다고 그것을 붙들러 온다고 합니다. 이 일을 어찌합니까?』
 
190
합십니다. 조모님께서는 깜짝 놀라시며 도진이를 보시고,
 
191
『애, 네가 일병 두목이더냐?』
 
192
하신즉, 도진이는 고개를 숙이고,
 
193
『제가 두목이 아니라, 제 삼촌이 이름난 두목이옵고, 저는 제 삼촌을 따라왔옵니다. 아마 죽은 사람들의 모가지를 검사하다가 제 것을 찾지 못하여 사방으로 염탐을 하다가 제가 여기 숨은 줄을 안 모양입니다. 제가 일전 뒷문으로 빠져 나갈 때에 웬 사람이 저를 번뜻 본일이 있는데 아마 그 사람이 고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어머님 아무 염려 마시옵 소서. 저만 나서면 어머님께서나 이 아우에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니 제가 지금 그 사람들오는 곳으로 마주 나가서, 그대들이 찾는 사람이 내노라고 나서겠습니다. 어머님께서 살려 주신 은혜를 금생에 만일도 갚지 못하옵고 금생을 떠나게 되는 것이 칠천지 원이오나,죽어서 귀신만 남더라도 맹세코 은혜를 갚으려 하옵니다. 』
 
194
하고 일어나 하직하는 절을 합니다. 그것을 보시고 조모님 께서는 도진이를 붙드시며,
 
195
『네가 나를 어머니라고무르니 내 말을 거역하지 말아라 사람들 오는 것은 내가 담당할 것이니 너희 둘은 이길로 아무데로나 달아나거라. 젊은 것들이 어디를 가면서 못살랴. 착한 맘을 가진 자에게 복이 따르는 것이니 어디를 가든지 착한 사람이 되어 잘 살아라. 자 여러 말 말고어서 떠나거라.』
 
196
하고 아무러한 말도 들으려 아니 하시고, 두 아드님을 들을 떼밀어 내어 쫓았습니다.─ 허생은 여기까지 하는 노인의 말을 듣고 미친 사람과 같이,
 
197
『좋다! 좋다!』
 
198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갑작스럽게「좋다! 좋다!」 하는 것을 보고, 노인도 놀라고 사람들도 놀라서 허생을 쳐다 보았으나 허생은 여전히 무릎을 치고,
 
199
『좋다! 참 좋다!』
 
200
하고 수없이 감탐을 합니다. 무엇이 좋은 것인지 아무도 허생의 뜻을 아는 이가 없습니다.
 
201
허생뿐 아니라 자손들도 노인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도 모두 침일 삼키며 그뒤를 들으려 합니다. 아이들까지도 그 바람에 모두 잠잠히 손으로 턱을 고이고, 주름잡히고 눈썹까지 세인 보주님 증조부님을 바라보고 앉았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노인은 더욱 감동 많은 어조로 말을 이어, ─그럼게 하도 조모님께서 엄절하게 명령을 하시니 어찌할 수 없이 아버지께서는 도진이를 데리고 짐에서 뛰어나와 뒷 산으로 올랐습니다.
 
202
산에 오르기는 올랐으나 그래도 발길이 아니 돌아서서 솔 포기 틈에 숨어서 기다리노라니 어디서 우아 하는 소을에 워쌉니다. 마침 달밤이 되어서 사람들이 담을 에워싸고 싸고, 마당으로 왔다갔다하는 것이 희미하게 보이고, 확자 떠드는 소리도 들립니다.「댕체 어찌되는 심인고」하고맘이 조마조마해서 숨도 못 쉬고 있는 판에 그 사람들이 조모님을 잔뜩 결박을 지워서 앞세우고 대문으로 나오는 것이 보입니다.
 
203
이 광경을 보시고 아버지께서는 당장 뛰어나가 「나를 죽이고 내 어머니를 놓아 달라.」고 하려 하였으나, 「아니다. 어디 동정을 조자.」하고 먼빛으로 그 사람들의 뒤를 슬슬 따랐습니다. 만일 그 사람들이 조모님께 손만 대면 곧 뛰어나서려 하였습니다.
 
204
그 사람들이 얼마 동안을 조모님을 끌고 오던 길로 돌아가더니 그 중에 한 사람이,
 
205
『아니다. 이럴게 아니라 우리 다시 돌아가서 그 동네를 모저리 뒤져 보아야겠다.』
 
206
하로 발론을 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조모님을 앞세우고 동네를 향하고 돌아 오다가 또 그 중에 어떤 사람이,
 
207
『이럴게 없다. 그 동안에 달아나면 안되겠으니 이 노파는 여기다 놓아 두고 우리 얼른 들어가 보자.』
 
208
합니다. 그리고는 사람 하나만 조모님을 지키라고 거기 남겨 놓고, 다들 달아나고 맙니다.
 
209
아버지께서는「옳다구나!」하시고, 도진이와 같이 달려 내려와 조모님을 결박하였던 것으로 조모님을 지키는 사람을 결박하고, 버선의 솜을 빼어 그사람의 입을 자뜩 특어 막아 소리를 못 내게 하여 놓고는 조모님을 업고 달아납니다.
 
210
『자! 바다로만 가자. 그저 바다 있는 데로만 달아나자』
 
211
하고 도진이와 아버지는 조모님을 번갈아 업고 밤새도록 줄달음 쳐서 삼천포에 다다르니 대체 어떻게나 빨리 왔던지 아직 밤이 새지를 아니하였더랍니다.
 
212
『이제는 위선 아무 배나 닥치는 대로 잡아 타는 수 밖에 없다.』
 
213
하고 바닷가로 돌아다니다가 뉘 배인지도 모른나, 큼직한 배하나를 잡아타고 거기를 떠났습니다.─ 하고 노인은 바로 자기가 무서운 위경이나 벗어난 듯이 하고 노인은 바고 자기가 무서운 위겨이나 벗어난 듯이 휘하고 안심하는 한숨을 쉬고 듣던 사람들도 모두 무서운 통을 벗어나기나 한 듯이 굳게 되었던 몸을 푸는데 잠잠하던 방 안에 바스락거리는 옷소리가 들립니다.
 
214
『할아버지 그래 어떻게 하셨어요?』
 
215
하고 손녀인지 증손녀인지 모르나 열 서너 살 된 어여쁜 계집아이가 노인의 소매를 당깁니다. 노인은 웃는 낯을 돌려 그 계집아이를 물끄러미 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허생을 향하여
 
216
『그런 뒤에도 이야기가 많지요. 죽을 뻔한 일도 한두번이 아니고요.....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다할 것도 없고.......어찌 했으나 이 모양으로 내 선친께서 이 일본 땅에 건너와 살게 된 것입니다. 와 본즉 내 가친께서 살려내신 도징이가 이곳 큰 대명의 아들이던 까닭에 그 대명이 대단히 고맙게 여겨서 여기서 잘 살도록 모두 주선해 주었지요...... 자 약주나 한잔더 잡수시지요. 』
 
217
하고 노인이 허생에게 술을 권합니다.
 
218
그런 뒤에 점심이 들어오고, 점심이 끝난 뒤에 노인은 사람을 보내어 허생의 배를 지키게 하고, 배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청하여다가 수일을 유숙케 하며, 허생이 사기를 원하는 포목과 기명과 철물과 길기와 어린아이들의 옷감과 장난 감과 무릇 생활에 필요한 것을 많이 사들였습니다. 허생이 값을 치르려 한즉, 노인은 손을 흔들며,
 
219
『그게 무슨 말씀이요, 그것은 나를 욕하시는게지 어디 그럴 리가 있어요?』
 
220
하고 굳이 사양합니다.
 
221
허생이 장기를 떠날 때에는 부인네와 어린아이들을 제하고는 모조리 뱃머리에 나와 작별하기를 아끼며, 모두 손에 한 가지씩 물건을 가져와서 신챙으로 받기를 권합니다. 마치 부자 형제가 서로 떠나기를 아껴하는 것 같습니다. 노인도 허생의 만류함도 듣지 아니하고 교군을 타고 나와서 배를 다 돌아보고,
 
222
『인제는 이 늙은 것이 죽어도 한이 없소이다. 어 이런 기이한 인연이 또 어디 있소?』
 
223
하고 허생의 손을 붙들며,
 
224
『자 잘 가시오! 또 오시오! 고국에 가거든 고국 산천과 고국 사람들에게 내 인사나 드려 주시오.』
 
225
하고 목이 메어 차마 손을 놓지 못합니다.
 
226
『잘 가시오!』
 
227
『또 오리다.』
 
228
『순풍에 잘들 가시오!』
 
229
『백자 천손하고 잘들 사시오!』
 
230
배들이 돛에 바람을 맞아 육지에서 차차 멀어지건마는 사람들은 돌아서려고도 아니하고 여전히 그 자리에 모여 서서 손을 두르고,
 
231
『잘 가시오!』
 
232
『잘 있으오!』
 
233
하고 소리들을 지릅니다.
 
234
다시 바닷길을 걸은지 열 이틀만에 저녁때나 되어 새 나라 강 어구로,
 
235
『어야드야 어허리.』
 
236
소리를 높이 들어서 산모퉁이를 돌아설 때에 집에 있던 부인네들과 일하러 나갔던 사나이들은 손에 들었던 것을 던지고, 반가움에 못 이기어 하는 이상한 소리를 지르며 강가로 뛰어나오고, 개 고양이들까지도 사람들의 뒤를 따라나와 강가에서 가댁질을 하며, 풀판에서 풀을 뜯던 마소들조차 고개를 번쩍 들고 강가에 들어와 돛을 내리우는 배들을 향하여 제각기 제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237
『에그, 꼭 한달만에 오시네!』
 
238
『풍랑이나 안 만나셨나요?』
 
239
『장사나 잘 되셨나요?』
 
240
『일본은 어때요?』
 
241
『오늘이나 오늘이나 하고 기다렸는데요.』
 
242
하고 모두 껴안을 듯이 반가와 합니다.
 
243
실상 허생이 떠난 뒤로 이 사람들은 마치 목자 잃은 양 모양으로 맘이 놓이지 아니하여 오늘이나 오늘이나 하고 허생이 돌아 오기만 기다렸습니다.
 
244
『에그 생원님이 안 오시면 어쩌오?』
 
245
하고 밤에 아내가 그 남편을 보고 걱정을 하면,
 
246
『재가 있는데 어때?』
 
247
하고 남편이 큰소리를 하면 아내는 입을 비쭉하며,
 
248
『암 그렇지. 생원님 덕에 당신도 떵떵거리지 인제 생원님이 무슨 일로 못 오시게만 되어 보오. 오도 가도 못하고 쩔쩔 맬걸.』
 
249
합니다. 그러면 남편은 와락 성을 내며,
 
250
『에끼 방정맞은 것 같으니! 생원님이 못 오시기는 왜 못 와!』
 
251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252
『아니 만일 그러하다면 말이야.』
 
253
하고 아내는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여 버리고 맙니다.
 
254
이 모양으로 이 백성들에게는 허생이 없이는 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흙 속에 종자를 넣더라도 허생이 있고야 싹이 날 것 같고, 푸른 풀에 비가 내리더라도 허생이 있고야 풀이 자랄 것 같고, 새벽 닭의 소리에 깊은 잠이 깨어질 때에 처음 생각나는 것이 푸른 콧물 흐르는 허생이어니와 말 것 같습니다. 그래서 허생이 떠난 뒤에 며칠 동안은 온 동네가 쓸쓸하여 웃음 소리도 잘 안 들리고, 모든 일에 흥이 빠져서 마치 상갓집과 같았습니다.
 
255
하늘가에 검은 구름 한 장이 떠도 저것이 생원님 가시는 곳에 풍랑이나 되지 아니하는가. 산림 속으로 바람이 우수수 불어와도 저 바람이 생원님 계신 곳에 풍랑이나 아니 일으키는가. 저녁 먹고 달 그림자 밑에 모여 앉아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휘불고, 달 그림자가 스러지 며, 콩알 같은 소낙비가 말 달리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산으로, 들로, 지붕으로, 강 위로, 달려 가서도 창으로 바깥을 바라보며, 허생을 생각하였습니다.
 
256
『도적 누명은 누가 벗겼나 생원님이시구요 시집 장가도 누가 들였나 생원님이시구요 먹을 것 입을 것은 누가 주셨나 생원님이시구요 이러구 저러구 어느 님 덕인가 생원님 덕이라.』
 
257
더욱이 새나라에 온지 삼사삭이 되어서부터 하나씩 둘씩 아내들의 월경이 끊이고, 허리띠와 치마 고름을 꼭꼭 졸라 매게 됨으로부터 새 나라에는 새 기쁨이 들어왔습니다.
 
258
『건넌집에서도 입맛이 없어졌대.』
 
259
『이히 뒷집 조꼬망이도 드러누웠던데.』
 
260
이 모양으로 집집마다 애기 서는 것이 이야기거리가 되게 되었습니다. 사나이들이야 설마 입밖에 내어서 그런 말은 못하나 그래도 일터 같은 데서 혹 친한 사람끼리 단 둘이 마주 앉으면,
 
261
『우리 집에서도 요새는 밥은 안 먹고, 짜증만 낸다누.』
 
262
『우리 집은 어떻게 해. 오늘도 아프다고 누웠다누.』
 
263
하고 서로 빙긋 웃습니다.
 
264
이러한 새로운 기쁨이 들어오자 사람들이 허생을 사모하는 마음이 더 간절하여졌습니다.
 
265
이러하던 판에 허생이 한 달이나 떠났다가 돌아왔으니 그 사람들의 기쁨이야 말할 것이 있습니까.
 
266
허생이 일본서 돌아온 날 여러 날수로에 피곤해서 잠을 자노라니 밖에서 누가 찾는 소리가 납니다.
 
267
『생원님, 생원님, 주무십니까?』
 
268
허생은 벌떡 일어나 문을 열며,
 
269
『누구요. 왜 그러오?』
 
270
한즉, 그 사람이 허생의 앞으로 나가서,
 
271
『소인의 지에미가..... .』
 
272
하는 것을 허생이 그 말을 막으며,
 
273
『이 나라에는 소인이란 말은 없소,「내 아내가」이렇게 말하시오.』
 
274
하였습니다.
 
275
『네, 생원님께서는 노 그렇게 말씀을 하시오나 어디 그럴 수가..... .』
 
276
하고 허리를 굽히는 것을 허생은 성을 내며,
 
277
『다시는 아예 내 앞에서 그런 소리를 마시오.』
 
278
하고 언성을 낮추어,
 
279
『그래 부인께서 어떠시단 말씀이요?』
 
280
하고 물었습니다. 그런즉, 그 사람은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이며, 말하기 어려운 듯이 머뭇머뭇하며,
 
281
『제 아내가 배가 아프다고 초저녁부터 그러는 것을 내버 려 두었더니 지금은 죽으랴고 듭니다. 그래서 생원님께.......』
 
282
『응 좋은 일이요.』
 
283
하고 방으로 들어가서 무슨 봉지를 내다가 주며,
 
284
『지금 아기를 낳으시려는 모양이니 이 약을 갖다가 얼른 달여 드리시오.』
 
285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그 약을 받아 가지고는 가노라는 인사도 할새 없이 어두움 속으로 스러져 버릴 뒤에 허생은 마당에 나서서 거닐기를 시작하였습니다.
 
286
아직 동은 트지 아니하고 밤은 더욱 깜깜한데 까만 하늘에는 어린애 눈 같은 별들이 잠들었다가 금방 깬 듯이 반짝반짝합니다. 어떻게 조용한지 흐르는 강물이 물에 잠긴 나뭇가지를 스치는 소리조차 들리는데 허생의 눈 앞에는 반짝반짝하는 등잔불 하나가 보이고, 그 불 앞으로 사람이 움직이는 양이 보입니다. 허생은 가만가만히 걸음을 옮겨 집 앞으로 점점 가까이 갔습니다.
 
287
『으아 으아.』
 
288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허생음 멈짓 걸음을 멈추고 혼잣말로,
 
289
『낳았구나!』
 
290
하며, 빙그레 웃고 고개를 기울였습니다. 여전히 「으아 으 아.」하는 부드럽고도 기운 있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 나라에 서는 처음 듣는 소리, 이 나라에서는 처음 나는 사람 원컨대 이 사람의 이 소리는 「아! 내가 왜 이 세상에를 왔던고.」하는 소리가 되지 말아지이다. 원컨대 이사람의 이 소리가 새 나라의 즐거우을 아뢰는 첫 소리가 되게 하여지이다. 허생은 부지불각에 합장하고 하늘을 우러러보지 아니치 못하였습니다. 고국에서 볼 때보다 훨씬 북쪽으로 치우쳐 보이는 북두성 자루가 서쪽으로 기울었는데 수없는 별들이 여전히 방금 무슨 말을 하려는 듯이 입을 방끗방끗하면서도 말이 없습니다.
 
291
저 푸른 하늘은 언제부터 저렇게 푸르르며, 저 반짝거리는 별들은 언제부터 저렇게 반짝거리나, 처음이 없고 나중이 없고, 어디를 보아도 끝간 데를 모를 이 허공속에 둥둥 떠 있는 조그마한 이 세상. 그 세상에 하루살이 모양으로 아침에 났다가 저녁에 스러지는 사람의 무리, 얼마 살지도 못하는 세상에 왜들 하루도 평안한 날 즐겁고, 빼앗기고 빼앗고, 울고 울리고 하다가 할퀴어진 얼굴 삐어진 팔다리로 원망의 두 줄 눈물을 흘리면서 독한 술에 취한 사람 모양으로 두통이 나고, 사지가 쑤시고, 현기가 나서 보기만 해도 참혹하게 비틀거리면서 시커멓고, 흙내 나는 무덤 속으로 안 들어가면 아니 되는고.
 
292
『으아 으아』
 
293
하고 새로 난 사람의 우는 소리가 또 들립니다.
 
294
『아가 아가 울지마라 여기 여기 새 나라에 울지 말고 방글방글 웃고 웃고 웃고 살자 아가아가 울지마라 여기 여기 새 나라에 밥도 많고 옷도 많고 물도 꿀도 단데 단데 아가아가 울지마라 여기 여기 새 나라에 꽃도 곱고 새도 곱고 우리 아가 더 곱구나 아가 아가 울지 마라 여기 여기 새 나라에 아들 낳고 딸도 낳고 천년 만년 살고지고 아가 아가 울지 마라 여기 여기 새 나라에 죽는 게야 어이하리 살 대로나 살아 보자.』
 
295
이 날에 난 것은 사나이었습니다. 허생은 새 나라에 와서 처음 난 아들이라 하여 한일자 백성민자 일민이라고 이름을 짓고, 나와 남을 가리는 성은 쓰지 말기로 하였습니다.
 
296
일민이가 새 나라에 들어온 날 새 나라에서는 큰 명절을 당한 것 같았습니다. 비록 더운 나라이지마는 옛 나라 풍속대로 산모 있는 방문을 꼭 봉하여 바람을 아니 쏘이도록 하고, 사람들은 그 집 문밖에 모여 말없이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이따금 들리는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는 모두 기쁨을 못이기어 하는 듯이 빙그레 웃습니다.
 
297
허생은 일본서 사 가지고 온 짐을 끌러 갓난아이의 옷감과 장난감과 어머니와 아버지의 옷감을 찬란한 보에 싸서 돌이를 시켜 아기 난 집으로 보내었습니다. 그리고 비단으로 기를 만들어 일만이의 집 앞 눞은 나무에 달았습니다.
 
298
이날부터 거의 날마다 새사람들이 나기를 시작합니다. 「으아」하면 아들이 나고, 또 다른 집에서 「으아」하면 딸이 나고, 또 그 다음 집에서 「으아」하면 또 아들이 나고, 또 그 다음 집에서 「으아」하면 딸이 납니다. 아들이 나면 나는 차례를 따라 「이민이」「삼민이」「사민이」라고 이름을 짓고, 딸이 나면 「일낭이」「이낭이」「삼낭이」하고 차례를 따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299
고요한데 동네에 「으아 으아」하는 아들딸들의 사람을 기쁘게 하는 희망에 찬 울음소리. 일터에 나가 일하던 아버지들도 가끔 집을 항하여 귀를 기울이는 것은 행여나 바람결에라도 「으아」하는 정든 소리가 들릴까 함이요, 부엌에서 밥을 짓느라고 불을 때던 어머니들도 부지깽이 끝에 불이 붙어 오르는 줄도 모르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는 것은 행여나 방안에서 자는 아기의 「색색」하는 숨소리가 들리기나 할게 합입니다.
 
300
언제나 이것이 사람을 알까, 언제나 이것이「엄마」를 부를까, 언제 덥적덥적 기나, 언제나 걸음발을 타나, 언제나 심술 부리고 말썽 부리는 장난군이 되나.
 
301
『오늘은 일민이가 웃었대!』
 
302
하여 이것이 큰일이 되었습니다.
 
303
『아이 어느새 웃어?』
 
304
하고 사람들은 일민이 웃는 구경을 옵니다. 가만히 조그마한 얼굴을 들여다보노라면, 조그마한 조마귀를 두르면서 방그레 웃는 것도 같고 아니 웃는 것도 같습니다. 이것이 「배안에 웃음」이니, 어머니 뱃속에서 가지고 나온 웃음이란 것입니다.
 
305
옛 나라에서는 아이들이 걸음발만 타게 되면, 벌써 세상의 싸라린 풍파에 이 웃음을 흘려 보내고, 그 대신에 양미간에 주름살이 잡히는 것이어니와, 원컨대 새 나라에서는「배안에 웃음」이 잎이 피고, 꽃이 피어 웃음의 나라를 만들어지이다──일민의 웃음 구경온 사람이야 누군들 이 축원을 아니했겄습니까. 그로부터 하나씩 하나씩 웃기를 시작하여 오늘은 삼민이가 웃고, 이튿날에 이낭이가 웃고──새나라에도 새봄이 돌아와 적은 꽃, 큰 꽃, 나무꽃 풀꽃, 붉은 꽃, 흰꽃이 산에 들에 밭둑에 마당가에 향기를 놓고 웃을 때에 새나라 백성들의 불그레하고 젖내 몰큰몰큰 나는 입술과 토실토실하고 이른 봄 살찐 고비와 같은 조마귀에도 향내 나는 꽃이 웃기를 시 작합니다.
 
306
밭 갈고 뿌린 곡식이 싹이 나고, 자라는 대로 새 나라의 아들들과 딸들도 병없이 탈없이 쑥쑥 자라서 햇보리가 솔에서 끓고, 외 참외가 척척 늘어질 때에는 엎디어 배밀이하는 이도 있고, 모으로 뒤는 이도 있고, 「때때때」하고 말 공부를 하는 이도 있고, 일민이는 「아빠」라는 말까지도 하였다고 합니다.
 
307
그러나 그중에도 어머니 되는 복을 타지 못한 여인도 있고, 아버지 되는 복을 타지 못한 사나이도 있어 적막한 듯이 이웃집 아기들이 우는 소리를 부러운 듯이 엿듣는 이도 있습니다. 그 중에 어떤 이는 내외가 서로 의논하고 허생을 찾아가서,
 
308
『어쩝기도 어려운 말씁입니다마는 어째 남들은 다 아이를 낳는데 저희는 아직도 아무 소식이 없습니까?』
 
309
하고 얼굴을 붉히며 물습니다. 허생은 동정하는 듯이,
 
310
『더 기다려 보시지요.』
 
311
한즉, 그 사람은,
 
312
『제 나이 벌써 사십이오니까요. 사십이 되도록 장가도 못 들고 돌아다니다가 생원님 덕에 장가도 들고, 이렇게 좋은 나라에 와서 살기도걱정이 없건마는 왜 작식이 없습니까?』
 
313
하고 무섭던 도적놈의 우락부락하던 얼굴이 비단결보다도 더 부드러운 인정의 근심이 떠돌아옵니다.
 
314
허생도 얼른 대답할 말이 없어서 한참 머뭇머뭇하다가 그 사람의 손을 잡으며,
 
315
『여기서 난 모든 아기들은 다 당신의 아기로 알으시오.』
 
316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낙심하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일터로 나가 버립니다. 그 뒤를 따라 허생도 돌이와 함께 먹줄과 장도리를 가지고 아이들 모여 놀 집을 지으로 나갔습니다.
 
317
새 나라의 세월이 어느덧 삼년이 지내었습니다. 그동안에 혹 전에 보지 못하던 큰 비도 오고, 전에 보지 못하던 큰 바람도 불고, 혹 아이와 어른이 병도 들었으나 별로 큰 불행도 없이 순탄하게 지내었습니다. 그 동안 허생은 일본에도 사오차 다녀와서 곡식과 기타 이곳에 나는 신기한 물품을 갖다 팔아 큰 이익을 얻었으나, 새 나라에서는 돈의 필요가 없으므로 금돈과 은돈 몇 푼을 녹여서 어린애들 노리개를 만들어 주고, 그 밖에는 혹 구멍을 뚤고, 실은 꿰어서 개와 고양이에게 매달아 주고, 한 번은 놀러 내려온 기린의 모가지에 금돈 두 푼을 매달아 준 것 밖에 별로 쓸 곳도 없어서 그냥 비인 배에 쌓아 두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중에도 허욕 많은 사람 하나가 몰래 금돈을 훔쳐다가 땅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 두다가, 한 번은 뱀한테 물려 퉁퉁 부어서 죽도 록 고생을 하고는 병이 낫는 대로 허생을 찾아가서 끓어 엎디어서 일일이 이실직고를 하고 밤마다 그 금돈을 도로 파서는 끙끙하고 제자리에 도로 져다가 두었습니다.
 
318
이러한 일 밖에는 별일이 없이 삼년의 세월이 물 흐르는 듯이 흘러갔는데, 하루는 허생이 큰 마당으로 사람을 모아 놓고,
 
319
『이번 농사도 잘 되었으니 기쁘외다. 먹을 것도 넉넉하고 아들딸도 많이 나고 이만하면 새 나라도 살 만하게는 되었소이다. 나도 여러분이 부족해 하는 것 없니 잘 살아가시는 것을 보니 맘이 흡족하오이다.
320
그러나 나는 본래 이런 일을 하려고 집을 떠난 것이 아니라, 내 집이 가난하여 내 아내가 먹을 것을 좀 벌어오라 하기에 나선 것인데, 벌서 내가 집을 떠난 지가 칠년이 되었으니 아내에게 대하여서도 너무 무심하였고, 또 떠난 때에 어떤 사람에게 돈을 꾸어 온 것도 있는데 그것도 갚아야 하겠고, 또 공부를 좀 하던 것이 있는데, 그것도 중도에 쉬었으니 한 삼년 더 해서 마치어야 하겠고, 또 인제는 나 같은 사람은 이 나라에 있을 필요도 없으니 나는 지금 이곳을 떠나 옛 나라로 돌아가겠소이다.
321
삼년을 사생과 고락을 같이하였으니, 정에 차마 떠나기가 어려워서 나도 혼자 떠날 생각을 할 때마다 홀로 눈물을 흘렸소이다마는 가야 할 길은 아무 때에라도 가야하지요.
322
내 이 땅을 살펴 보니 동서가 삼백리요, 남북이 일백리라, 삼백년 동안은 염려없이 살 것이니 아무 염려말고 일들 잘 하고, 아들딸 많이 낳고, 복 좋게 의 좋게 지금 모양으로만 살아 가시오. 삼백년 후에 이 땅에 사람이 차고 넘치면 또 어찌할 도리가 생길 것이외다.』
 
323
허생이 이 말을 할 때에 사람들은 모두 놀라는 듯이 그리고는 슬픔을 못 이기는 듯이,
 
324
『생원님 못 가십니다.』
 
325
『생원님 믿고 사는 뵙시오.』
 
326
『생원님 가시면 우리는 어찌 살게요.』
 
327
하고 모두 허생의 곁으로 와서 간절하게 만류하는 말을 합니다. 부인네들도 아기들을 안고, 끌고 낙심하는 얼굴로 남편들이 허생을 만류하는 양을 근심스러이 보고 있습니다.
 
328
허생은 가만히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더니 고개를 들며,
 
329
『고맙소이다. 지극히 감격하외다. 그러나 인제는 나는 쓸 데 없는 사람이니 내가 만일 더 쓸데가 있을 것 같으면 간다는 말을 아니할 것이외다. 지나간 삼년 동안은 내가 있어야 하겠기로 있었고, 이제는 있지 아니하여도 좋겠기로 가는 것이외다. 아무 때에 떠나더라도 떠나기는 슬플 것이니, 지금 만일 나를 작별하는 것이 슬프시거든 나를 위하여 울어 주시오. 그러나 가야 한다고 가는 나를 만류하지는 말으시오.』
 
330
하고 힘있게 말을 끊었습니다.
 
331
그런즉, 허생의 성질을 아는 사람들은 더 만류하려고도 아니하고 다만 어쩔 줄 모르고 고개를 숙이고 섰을 뿐입니다.
 
332
품에 안긴 어린애들도 젖꼭지를 놓고 물끄러미 어머니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세 살 잡히는 일만이는 사람들 틈으로 뚫고 들어와,
 
333
『아저씨!』
 
334
하고 허생에게 매어달립니다.
 
335
일민이가「아저씨!」하며, 매어 달리는 것을 보고, 허생은 마치 오래 떠났던 자식을 만나는 모양으로 허리를 굽혀 두 팔로 일민을 꺼앉으며, 너무도 감동이 많은 듯이 한참을 말도 없더니 이윽 일민을 높이 안아 치들며,
 
336
『여러분은 이 아기를 배우시오. 옛날에서 쓰던 모든 풍속과 습관으로 이 아기를 물들이지 말고, 이 아기가 어떻게 한 가만히 보아 무엇이나 이 아기가 하는 대로만 하시오. 누구나 이 아기들에게 혹은 행실을 가르친다. 혹은 글을 가르친다 하여 옛 나라에서 가지고 온 무조가 큰 사람이외다. 이 아기가 지금 옛 나라 일을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으로 여러분도 옛나라에서 하던 생각, 하던 일, 본 것, 들은 것을 하나도 남겨 좋지 말고, 죄다 잊어버리시오. 그 중에도 티끌 만한 것이라도 행여 이아기들에게 전할세라 하고 조심하고 조심하시오. 옛나라에 있던 버릇이 전하는 날이면, 이 나라에도 옛 나라에서와 같이 싸움이 들어오고, 불행이 들어올 것이요. 그러므로 누구든지 아기들을 가르치려고는 꿈에도 생각지 말고, 오직 여러분이 만사를 아기들에게 배워서 하시오. 정다운 사람들을 떠나게 되니 하고 싶은 말도 많거니와 더 말이 나오지를 아니하오. 또 삼년 동안이나 같이 살면서 날마다 밤마다 말을 하였으니 더 할 말도 없을 것이외다. 부두부대 다툼 없이 잘들 사시오.』
 
337
하고 허생은 한참 말을 끊었다가,
 
338
『그러나 여러분 중에 만일 나와같이 옛나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이가 있거든 지금 다들 나서시오. 만일 이번에 같이 가지 아니하면 영영 돌아갈 날이 없을 것이요.』
 
339
하고 사람들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런즉, 사람들도 혹 누가 나서는 사람이나 있나 서로 돌아보았습니다. 하나도 나서는 이가 없습니다.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나는 옛나라, 죽어서 혼령이 간다 하더라도 진저리가 나는 학대받던 옛나라, 누군들 가기를 원하겠습니까.
 
340
『옛 나라요 그립거든요 가만히 생각이나 하지요 가기는 나는 싫어요.』
 
341
하나도 옛나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이가 업는 것을 보고, 허생은 또 한 번 사람들을 돌아보며,
 
342
『누구든지 글자를 아는 이가 있거든 다들 나서시오. 하늘 천자 하나를 알더란 「기역」「니은」만을 알더라도 다 나서시오.』
 
343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하나씩 하나씩 나서는 사람이 오십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허생은 한 번 더,
 
344
『이 밖에는 글자 아는 이가 없어요? 있거든 나서시오?』
 
345
하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더 나오는 이가 없습니다. 그제는 허생이,
 
346
『글 아는 사람은 다 나와 같이 옛 나라로 돌아갈 준비를 하시오. 이 나라에서도 그이 들어오는 날이면 또 놀고 먹는 사람이 생기고, 놀고 먹는 사람이 생기면 또 양반과 상놈이 생기고, 양반과 상놈이 생기면 또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생기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생기면 또 원이 생기고, 감사가 생기고 도적이 생기고 싸움이 생겨서 옛나라와 다름이 없이 될 것이니, 누구든지 이 나라에서 글을 만드는 사람이 있거든 내어 쫓아야 하오. 자! 내일 아침으로는 떠날 것이니 다들 어서 준비를 하시오.』
 
347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다 흩어졌습니다. 내일은 허생이 떠나는 날이니 오늘 하루를 큰 잔치를 베풀어 허생을 전송할 양으로 더러는 산에 올라 과일과 나물을 따고, 더러는 강에 내려 고기를 잡고, 더러는 떡방아를 찧고, 더러는 배에 물과 양식을 싣고, 또 더러는 허생과 또 그와 같이 떠나는 사람 들에게 각각 선물을 봉하고, 온 동네가 벌의 둥지 모양으로 오글오글 끓습니다. 그중에도 허생과 같이 가게된 글 아는 사람들은 모두 낙심하여 짐들을 묶고, 이웃 사람들과 수없이 작별하는 인사를 바꿉니다.
 
348
이튿날 아침 훤하게 먼동이 틀 때에 벌써 사람들이 일어나 허생을 작별할 준비를 합니다. 모두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고, 새 옷을 갈아입고, 아침들을 일찍이 지어먹고는 등잔불 밑에 모여 앉아서 허생이 배에 오른다는 소식이 오기만 기다립니다. 남편과 아내와 어린 아이들과——어린것들도 웬일 인지 모두 잠들을 깽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어깨와 무릎으로 기어 오르고, 등 뒤로 기어들고, 깨득깨득 웃고 떠들고, 가만히 있지를 아니합니다.
 
349
『생원님이 가시면 어찌하오?』
 
350
하고 아내가 어린아이의 등을 쓸며 걱정을 하면,
 
351
『그러니 가신다는 걸 어찌오.』
 
352
하고 어깨에 기어 오른 아기의 두 손을 잡는 남편이 역시 근심스럽게 대답합니다.
 
353
『그래도 좀들 못 가시도록 붙들지 않고…왜 사내들이 다들 그 모양이지요?』
 
354
하고 아내가 불평을 하면,
 
355
『그 양반이나 누군데? 한번 이렇게 한다한 다음에야 상감님이 무어라면 들을 뻔이나 하오?』
 
356
하고 남편도 불평스러운 듯이 대답을 합니다. 집집에 거의 이와 같은 문답이 있을 때에 문밖에서,
 
357
『생원님 떠나시니 다들 나오시오.』
 
358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 소리가 나자 방문들이 일제이 열리며, 남편들과 아내들이 어린 것을 안고 툭툭 뛰어나옵니다. 방안에서는 아직 어두운 것만 같더니, 나와보니 벌써 동편 하늘에는 다홍빛이 돌고, 흰 바위로 된 산봉우리 들이 그 빛을 받아 자주빛으로 타오릅니다. 아아 새 나라의 아름다운 아침!
 
359
나뭇잎들은 구슬같은 땀을 뚝뚝 떨구고 새로 핀 꽃에서는 향기가 피어 오릅니다. 밤새도록 이슬에 푹젖은 흙이 마치 향기 나는 비단 보료 모양으로 포근포근하여 밟아도 소리도 나지 아니합니다.
 
360
강가에는 돛과 기구를 새로 장만한 배들이 우두커니 서서 사람을 기다리는데 뱃머리에 꽂아 놓은 붉은 깃발이 새벽 잔잔하고 서늘한 바람에 무슨 뜻이나 있는 듯이 가벼이 나부낍니다.
 
361
이윽고 뱃사람들이 오르고, 사람들이 배 곁으로 모여들고, 허생과 같이 가게 된 글 아는 사람들이 아내와 어린 아기를 데리고 무수히 「잘 있으우」「또 볼까?」「잘 가오」소리를 주고 받고 하면서 얼마 안되는 보퉁이들을 들고 오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지껄이고, 웅성거리는 소리에 풀판에 누워 자던 마소들과 망아지며 송아지들도 잠을 깨어 일어나 일변 이슬에 젖은 부드러운 풀을 뜯어 가며 제각기 게 소리를 하고, 닭들도 지붕에와 나뭇가지에 올락 목을 놓아 소리 껏 「꼬끼요!」하고 홰홰쳐 아침을 부릅니다.
 
362
사림 속에서 잠깐 깨어 눈을 말똥말똥하던 새들도 이 가지로 저 등걸로 왔다갔다하며,「찌찌째째」「회리회리로」하고 저마다 제 소리를를 하는데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강물만 소리없이 물결도 없이 가는 듯 마는 듯 흘러 내려갑니다.
 
363
삼년 전에 이 땅에 들어온 사람들은 주름 없던 얼굴에 주름도 생기고, 까맣던 머리에 백발도 생겼건마는 해마다 새로워지는 풀과 나무도 매양에 한 모양 같고, 나이도 알수 없는 강물과 산 모양도 매양에 한 모양같습니다. 천지는 유유하여 늙을 줄을 모르건마는 사람은 자고 난 때마다 늙어 갑니다 그려. 이제로부터 몇해가다 늙어 죽어 버릴 것입니다.
 
364
저 어머니들의 품속에 안겨서 팔다리를 바둥거리는 아기들 도 이 강물 가에서 어른이 되고, 늙은이가 되어 마침내 죽 어버리겠지요. 그러나 저 산도 예와 같고, 흐르는 강물도 예 와 같고, 강가에 푸르른, 풀과 나무와 향기 피우는 꽃들도 예와 같을 것입니다…이 모양으로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오니, 유유한 천지만 만고에 젊어 있을 것입니다.
 
365
『생원님 나오신다.』
 
366
하는 소리가 나자, 칠년 전에 집을 떠날 때에 쓰던 헌갓, 입던 때묻은 두루마기, 흐르는 푸른 콧물, 바로 고대로 수십 명 사람의 옹위를 받아 배를 향하고 걸어나옵니다.
 
367
『생원님도 늙으셨다.』
 
368
하고 누가 한탄을 한즉,
 
369
『누굴래 늙으셨나.』
 
370
하고 곁에 사람의 눈에 눈물이 고입니다.
 
371
과연 허생도 늙었습니다. 제주도에 있을 때만 하여도 그래도 젊은 모양이 있었는데 인제는 이마에만 아니라 약간 쪼그라진 두 뺨에도 두어 줄 주름이 잡히고, 본래 작은 몸이 언마는 더욱 작아진 것 같습니다. 허생의 뒤를 말없이 따르는 돌이도 인제는 옛날의 익살과 흥치도 거의 다 없어지고, 젊잖은 장년이 되었으며, 늙은 뱃사공도 인제는 허리가 좀 굽고, 눈이 어두워 허생이 일본서 사다 준 돋보기 안경을 혹시나 떨어뜨려 깨뜨릴까 보아 노끈으로 다리를 동여매어 사철 쓰고 있게 되었습니다. 이 늙이는 돌아가면 어디로 가나.
 
372
이런 이야기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돌이가,
 
373
『영감님 본국 가실 맘 있어요?』
 
374
한즉, 노인은 놀라는 듯이,
 
375
『어?』
 
376
하고 눈을 껌벅껌벅하며,
 
377
『본국? 그럼 가고 싶지 않어? 왜 갈 일이 생기나?』
 
378
『아니야요. 갈 일이 생겼다는 것이 아니라요 가시고 싶은 가 말씀이야요.』
 
379
하고 돌이가 웃는 것을 보고, 노인은 낙심하는 듯이 입을 쩍쩍 다시며,
 
380
『나는 또 갈 일이나 생긴다구.』
 
381
하고 본국이 그리운 듯이 멀리 북쪽을 바라봅니다.
 
382
『영감님 본국은 가시면 무엇하셔요? 집이 있나 아드님이 있나…여기 뜻뜻한데 가만히 계시지 무엇하러 본국은 가셔요?』
 
383
하고 돌이가 또 물은즉 노인은,
 
384
『자네는 가고 싶지 아니한가?』
 
385
하고 도로 물습니다. 돌이가
 
386
『제야 가고 싶지요.』
 
387
한즉, 노인은,
 
388
『그럼 나도 가고 싶지, 젊은 사람도 가고 싶은데 나같은 늙은 사람이 안 가고 싶어?』
 
389
합니다. 그래때 돌이가,
 
390
『제야 어머니가 계시니까 가고 싶지요마는 영감님이야 망녕이시오. 인제 무엇하러 본국은 가셔요. 여기서 이렇게 종일 나무 그늘에서 어린애들이나 보아 주고 평안히 계시다가 돌아가시지…여기는 묻히실 데가 없나요?』
 
391
한즉, 노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392
『그래도 본국이 좋아! 산도 본국 산만 못해, 무엇이나 조선이 좋아!』
 
393
하고 또 북쪽을 바라봅니다.
 
394
이러하던 노인이 오늘 떠난다는 말을 듣고, 어린애 모양으로 기뻐하면서 꼬부라진 허리를 지팡이에 의지하고 허생의 뒤를 따라나옵니다.
 
395
『어쩌면 삼년 동안에 저 영감님이 저렇게 늙으셔?』
 
396
하고 누가 한탄하였습니다. 과연 삼년 전 어느 날 저녁때에 처음으로 이곳으로 들어와 배를 내릴 때에 젊은이보다도 더 기운차게 펄펄 날던 영감님이 저렇게도 늙었을까. 사람들은 그 노인을 보던 눈으로 자기네들 서로 돌아보지 아니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도 말을 아니하지마는 속으로는 누구나 다,
 
397
『우리도 늙었구나.』
 
398
『늙었을게다. 아이들이 말을 하게 되었으니.』
 
399
이런 생각을 아니하지 못하였습니다.
 
400
사람들이 각각 자기가 늙은 것으 생각할 때에 그렇게도 원수 같던 옛 나라가 새삼스럽게 그리워져서 자기네도 허생과 같이 타고 오던 배를 도로 타고 가고 싶은 생각이 납니다.
 
401
『늙는 것 생각하니 옛 나라 그리워라 아무리 그리워도 못가을 옛 나라를 생각만 저 배를 따라 돌아갈까 하노라.』
 
402
『옛 나라 간다 한들 기다릴 님 있으랴만 기다릴 님 없사와도 내 홀로 그리운지고 그립고 못 뵈는 님은 꿈에나 뵈일까 하노라.』
 
403
『고국 강산에 부대 이 말 전하시오 만리를 떠나온들 잊을 줄이 있으리까 때 있어 부르시옵거든 달려간다 하시오.』
 
404
허생은 차마 떠나기가 어려운 듯이 이 끝에서 저 끝으로 한 사람씩 한사람씩 손을 잡고, 등을 만지며,
 
405
『부대부대 잘 사시오.』
 
406
하고 작별의 인사를 하고, 이천명이나 되는 어린아이들의 손과 머리를 잠깐 잠깐 만져 보고는 팔을 둘러 떠나노라는 뜻을 표하면서 맨 앞에 선 배에 오릅니다. 허생이 배에 오르자, 사람들은 일제히 허생의 뱃머리로 모여들어 꽃을 던지고 선물을 던지고, 소리를 지르고, 눈물을 흘리고, 허생을 안아 내리려는 듯이 팔들을 벌리고 부르짖읍닐. 허생은 두 팔을 번갈아 둘러 작별하는 뜻을 표하고 돌이는 허새의 곁에 쓰러져 울며, 가끔 고개를 들어 눈물에 흐린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고는 또 쓰러져 울고, 누인은 지팡이에 기대어 말도 못하고, 허생 모양으로 팔도 못 두르고, 고개만 수 없이 끄떡끄떡합니다. 이러한 동안에 뱃사람들은,
 
407
『어야드야 어혀리 어기어차 닻 감아라 새 나라야 잘 있거라 어기어차 옛 나라로.』
 
408
『어야드야 어혀리 어기야차 닻 감아라 만경창파 만리 길에 나는 가네 옛 나라로.』
 
409
『어야드야 어혀리 어기여차 닻 감아라 이제 가면 언제 오나 기약 없는 옛 나라로.』
 
410
『어야드야 어혀리 어기어차 돛 달아라 잘 있으오 잘 있으오 나는 가네 옛 나라로.』
 
411
이 모양으로 닻을 감고 돛을 달고, 찌국 소리가 나면 뱃머 리가 돌아 미끄러나는 듯이 스르르 강가를 떠나 한걸음 한걸음 흘러 내려갈 때에 배 위의 사람이나 밑의 사람이나, 일시에 울음 터졌습니다. 사람들은 눈물일래 잘 보이지도 아니하는 눈을 주먹으로 연해 씻어 가며, 점점 멀어가는 허생의 배를 바라보고, 그저 소리를 지르고, 두 팔을 허우적거 렸습니다. 그러나 찬 돛에 바람 맞아 흐르는 물에 내려 놓은 배들은 살과 같이 물결을 치며 햇빾에 돛이 번쩍하고는 그만 산모퉁이를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한 배 없어지고, 두 배 없어지고 세 배 없어지고, 열 두 배가 마지막 다 없어지 자, 뒤에 남았던 물결조차도 배를 따라 스러지고 말았습니다.
 
412
사람들이야 들어와 살거나 말거나 산 짐승, 물 짐승, 푸른 새, 붉은 새, 알룩 새들은 여전히 저 다닐 대로 다니며, 재갈하는 소리를 지껄입니다.
 
413
『모두가 잘 있거라 새짐승도 잘 있거라 다시 본들 어떠하리 못 본들 어떠하리』
 
414
『모두가 잘 있어라 꽃도 나무도 잘 있거라 만남도 인연일사 떠남도 인연이로구나.』
 
415
『모두가 잘 있거라 산도 물도 잘 있거라 가네 가네 나는 가네 가더라도 잘 있거라.』
 
416
하늘에는 구름 한 점도 없는 알맞은 남풀이 배의 등을 쑥쑥 밀어 옛 나라로 향하는 배는 북으로 북으로 날아가고 새 나라의 산들은 차차차차 멀어갑니다. 허생은 배고물에 서서 점점 멀어가는 새 나라의 산봉우리에 금빛 같은 석양이 비치인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417
그날 밤에 달이 심히 고요하고 물결은 잔잔하여 거울 같은 호수가으로 선유를 하는 듯한데, 허생과 뱃사람들은 삼년 동안이나 정들었던 새나라를 떠난 것이 십년이나 된 듯하여 차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모두 뱃머리에 나와 이야기도 하며, 달도 구경합니다. 그때에 허생이 늙은 사공을 보고,
 
418
『여보, 우리가 연전에 봉변하던 데가 여기가 아니요?』
 
419
하고 물었습니다. 그런즉, 노인은 길게 한숨을 쉬며,
 
420
『조금만 더 가면 연전에 봉변하던 데입니다…참 지독하였 어요. 나도 바다에서 자라서, 바다에서 늙었지마는 그런 풍랑은 처음 당하였어요.』
 
421
하고 무엇을 찾는 듯이 고개를 숙여 바다를 들여다봅니다.
 
422
허생도 무심코 바다를 들여다보았습니다. 금빛 같은 달 그림자와 몇 천길인지 알 수 없는 시커먼 깊은 물뿐입니다.
 
423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그때의 무서운 광경이 선하게 나타나고, 어디로 가버린지 모르는 삼천명 사람의 오래 오래 잊었던 얼굴들이 물결 위에 번적번쩍 보이는 듯하여 사람들의 몸에는 오싹 찬기운이 돌며, 소소름이 쭉쭉 끼칩니다. 저 늠실늠실하는 물결 속으로서 금방 수없는 손들이 쑥쑥 나오고, 그 뒤를 이어 물이 줄줄 흐르는 머리들이 쑥쑥 나와서,
 
424
『우리를 두고 어디를 가? 못가!』
 
425
하고 배를 붙들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서움에 눌린 사람들은 의지할 데 없는 듯이 허생의 얼굴만 물끄러미 치어다 봅니다.
 
426
허생은 눈도 늠실늠실하는 물결을 정신없이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한참 있다가 허생이 무슨 새 결심을 한 듯이 늙은 사공을 보고, 뱃머리를 동북간으로 돌리기를 명하였습니다.
 
427
노인은 깜짝놀라며,
 
428
『여기서 뱃머리를 동북간으로 돌려 어찌한단 말씀입니까? 까딱 잘못하면 방향을 잃고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이제 사흘만 지나면 연전에 봉변하던 날인뎁시오.』
 
429
하고 허생이 시키는 말을 잘 들으려 아니하는 것을 보고 허생은 좀 언성을 높여,
 
430
『생각하는 바가 있으니 어서 뱃머리를 돌리라면 돌리시 오.』
 
431
하고 엄하게 명령을 한즉, 노인도 하릴없이 키를 비끗 돌려 뱃머리를 동북간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럴 때에 잔뜩 바람을 맞았던 돛이 삐꺽삐꺽 소리를 내며, 핑그르 돌아갑니다.
 
432
이로부터 배는 동북간을 향하고 방향도 없이 달아납니다.
 
433
노인과 다른 사람들은 웬 영문인지도 모르고, 근심스러운 듯이 오르락 내리락하며, 허생의 눈치만 바라봅니다. 이렇게 가기를 이 주야는 하여, 하루는 아침해가 바다로서 쑥 올라 오는데 눈앞에는 웬 산이 보이고 커다란 육지가 보입니다.
 
434
허생이 노인을 보고, 그 육지를 가리키며,
 
435
『저기가 어딘지 알겠소?』
 
436
하고 빙글빙글 웃으며 물었습니다.
 
437
노인이 안경 위에 손을 가리워 햇빛을 막고 앞을 바라본 즉, 과연 웬 육지가 있습니다. 오늘은 죽나, 내일은 죽나 하고 근심으로만 기다리던 차에 육지가 보이니 너무도 반가와서 뛰어 일어나며,
 
438
『육지야! 육지야!』
 
439
하고 소리를 질렀읍닐. 이 소리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눈을 비비며 뛰어나와,
 
440
『육지야! 육지야!』
 
441
하고 발을 구르고 팔을 허우적거리며, 소리를 지릅니다. 허생은 한 번 더 노인더러,
 
442
『저 육지가 어딘지 알겠소?』
 
443
하고 물은즉, 노인은 그제야 정신을 진정하는 듯이 물끄러 미 그 육지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의심스러 운 어조로,
 
444
『모르겠어요. 제주도 될 리는 만무하고…대체 어디람…저 것이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데야요.』
 
445
합니다. 허생은,
 
446
『어서 가 보며날 테니 갑시다. 그 사람들이 아! 저기로 흘러 왔는지도 모르겠소. 그랬으면 작히나 좋으리.』
 
447
하고 행여 사람이나 아니 보이는가 하고 그 육지만 바라 봅니다.
 
448
육지가 점점 가까워집니다.
 
449
그러나 산과 풀과 나무뿐이요, 인적은 보이지 아니합니다.
 
450
혹 이리로서나 사람이 번뜻 나설까 행여 저리로서나 집이 번쩍 보일까 하고, 사람들이 눈도 깜짝하지 아니하고, 바라 보아도 육지는 아침 빾만 잔뜩 받아 나뭇가지 하나 흔들리지 아니하고, 다만 바다가 바윗돌에 파란 물결이 부서져 눈바랠를 칠 뿐입니다.
 
451
『사람은 없나보이.』
 
452
『꽤 큰 모양인데.』
 
453
『새 나라보다는 산 모양도 다르고, 나무들도 다른데.』
 
454
『여기 살기 좋겠는걸.』
 
455
이런 말을 하면서 배가 육지를 옆에 끼고 바닷가로 슬슬 돌아가고 있는 차에 누구가,
 
456
『사람 있다!』
 
457
하고 소리를 치기로 일제히 그 사람이 가리키는 곳을 본 즉, 과연 수풀 사이로 파란 연기가 솔솔 올라옵니다.
 
458
『분명 사람이 있어서 아침 밥을 짓는 모양이야.』
 
459
하고 그중에 어떤 사람은 두 손으로 나팔통을 만들어 입에 다 대고 큰소리로,
 
460
『어——어——사람 있나——.』
 
461
하고 외칩니다. 그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도 입에다 손을 대고 첫사람 모양으로,
 
462
『어——이 어——이.』
 
463
하고 외칩니다. 그 소리가 바닷가 절벽에가 울려 「어——이 어——이」하고 반향이 되어 옵니다.
 
464
그러는 동안에 배가 점점 연기 오르는 곳으로 가까이 왔습니다. 거기는 좀 평평하고 나무도 적고, 개천도 하나 흐르는데 바닷가 나뭇가지에 구유배 하나가 매였으니, 사람이 사는 것은 분명합니다. 길이라 할 만한 것도 있지마는 나무가지 때문인지 집은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한번 더,
 
465
『어——이——사람 있어——』
 
466
하고 소리를 질렀더니 어디서,
 
467
『어——이』
 
468
하고 대답이 오는 듯하더니마는 웬 웃통 벗은 시커먼 사내 가 껑충껑충 뛰어 나오다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고 섰습니다. 그것을 보고, 허생이 뱃머리에 쑥 나서며, 예전 벽산을 떠날 때에 두르던 흰 기를 둘렀습니다. 그럿을 보더니 그 시커먼 사람이 발로 발도 땅에 닿지 않도록 빨리 뛰어나와 바닷가에 넓죽 엎드려,
 
469
『아이구 대왕마마!』
 
470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이것은 분명히 벽산 도적 중에 하나이외다. 허생은 뱃사람을 시켜 자기가 탄 배 한척만 바닷가에 돌려 대게 하고 다른 배들은 자기의 명령이 있기까지는 바다에 서서 기다리라 하였습니다. 혹 무슨 일이 있을까봐 두려워합이겠지요.
 
471
배가 물에 닿자마자, 허생이 배에서 뛰어 내리니 그 시커먼 사람은 땅에 엎드려 일어나지도 아니하고, 엉엉 어린애 모양으로 울기를 시작합니다. 가만히 그 사람의 몸을 본즉, 목과 등에는 살이 한 점도 없고, 게다가 매맞은 허물 같은 것이 부스럼이 되어 고름이 질질 흐릅니다. 아아 어쩌면 사람이 저렇게도 참혹하게 되나, 보든 사람마다 모두 눈물이 흘렀습니다.
 
472
허생은 그 사람을 붙들어 일으키며,
 
473
『이럴 것이 아니라, 여기 앉아서 이야기를 들읍시다. 대관절 몇 사람이나 이곳으로 불려 와서 살았소.』
 
474
한즉, 그 사람은 그래도 고개를 들지 못하고, 금방 쓰러질 듯이 비틀거리며,
 
475
『대왕마마, 왜 그때에 죽지를 않고 이 원수엣 목숨이 살아 남아서 이런 죽기보다 더한 고생을 하고 있읍니까…예 그때 통에 그 바람에 불려서 사흘이나 바다 위로 둥둥 떠돌다가 이곳에 왔사옵지요——여덟 배가 어찌어찌하여 여기까지 불려 왔습니다. 사람 천명이나 되옵지요…대왕마마께서도 풍랑에 돌아가신 줄만 알았소이니까요…그러나 다들 죽어 버리고 지금은 오백명도 다 못되오니까요…다들 굶어 죽고, 맞아 죽고, 달아나다가 죽고, 다들 죽었소오니까요…아이구 아이구!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납닐. 소인도 오늘 죽을 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몸이오니까요…대왕마마, 살려 줍시오. 소인을 본국으로 데려다 줍시오. 소인은 하루도 이 땅에 있기 싫소오니까요.』
 
476
하고 미친 사람 모양으로 배로 뛰어오르려고 합니다.
 
477
허생은 불쌍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는 듯이 양미간을 찌푸리며, 그 사람의 손을 잡고,
 
478
『염려 마시오. 이 땅에서 잘 살도록 해 드리지요. 만일 본국에 가기를 원하거든 데려다 드릴게, 위선 그 동안 지나던 이야기나 하시오. 대관절 왜 이렇게 말이 못되게 수척하고, 저 부스럼은 웬 부스럼이요?』
 
479
하고 물었습니다.
 
480
그제야 그 사람이 비로소 안심하는 듯이 허생의 곁에 앉으며,
 
481
『먹어야 살찌오니까요. 먹을 것이 없습니다. 나무깨비로 죽도록 땅을 파서 조깽이 벌이 논대야 대왕이 다가져가시고 …여편네까지도 빼앗기곱시오…』
 
482
하고 자초지종을 일장 설화를 시작하옵니다.
 
483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건대 이러합니다.
 
484
——삼년 전 새 나라의 산을 번뜻 보고는 그 몸쓸 풍랑을 만나서 사흘 동안이나 돛대로 꺾어지고 키도 떨어진 배로 해매다가 우연히 이곳에 와 닿은 배가 여덟인데 마침 조 곰보가 살아났기 때문에 이 땅에 내리는 대로 양식과 쇠로 만든 장기와 기타 값가는 것은 다 제 것이라고 해서 제가 맡아 가졌습니다. 그리고는 저 고개 너머다가 사람들을 부려 큰 집을 짓고, 저만 편안히 자빠져 있고, 제 맘에 맞는 사람만 한 오십명을 뽑아서 제 집에 두고, 나머지는 양식 한 되도 아니 주어서 내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집을 짓자니 도끼가 있나, 사냥을 하지니 총이 있나 칼이 있나, 몽둥이 하나를 만들자니 그것도 장기가 있어야 하지, 산과 들로 돌아 다니며 과일도 따먹고, 풀뿌리도 캐어 먹고, 버섯도 뜯어 먹다가 모르고 못 먹을 것을 먹어서 배가 아파서 죽기도 하고, 통통 부어서 죽기도 하고, 병신이 되기도 하고…그러다가 할 수 없이 조 곰보의 집으로 가면 몽둥이 든 놈, 칼 든 놈, 도끼 든 놈이 대문에 지켜 섰다가 번뜻 사람이 보이기가 무섭게,
 
485
『이 개같은 놈들!』
 
486
하고 때려 내어쫓고 그래도 배고픈 것을 견디지 못해서 애걸복걸하며,
 
487
『무엇이나 대왕마마께서 하라시는 대로 다 할 것이니 밥 한 술만 줍시오. 밥을 못 주시겠거든 도끼 하나만 빌려 줍시오. 짐승이라도 잡아 먹게. 그것도 못하시겠거든 식칼 하나라도 빌려 주시고 그것도 못하시겠거든 몽둥이 하나라도 빌려 줍시오. 그걸 가지고 사냥이라도 하여 먹게.』
 
488
이 모양으로 쫓아도 모른 체, 몽둥이로 때려도 모른 체, 발길로 차도 모른 체하고, 하고 그저 땅에 엎드려서 비노라면 도끼 가진 놈들이 발로 모가지를 짓밟아도 보고, 타고 앉아도 보고, 몽뚱이에다가 오줌도 누어 보다가 그래도 여전히 이마를 땅에 조아리며,
 
489
『살려 줍시오——밥 한 술만 줍시오. 잡숫다가 남은 것이라도 줍시고, 가싯물에 가라앉은 찌꺼기라도 한술 줍시오.』
 
490
하고 비노라면 그래도 그놈들이 감동이 되는지 조 곰보에게 들어가,
 
491
『저기 어떤 백성이 와서 쫓아도 안 가고, 때려도 안가고, 발길로 차도 안 가고, 아무리 하여도 안 가니, 밥한 술만 줍시오 하고 땅에 엎드려 있습니다. 밥을 못 주시겠거든 도끼라도 빌려 줍시고 도끼도 못하시겠거든 식칼이라도 빌려 줍시오. 그것도 못하시겠거든 몽둥이라도 빌려 주시면 사냥이 라도 하여 먹겠다고 하옵니다.』
 
492
하고 사뢰면 조 곰보는 상쾌한 듯이 껄걸 웃으며,
 
493
『그놈 도끼를 도끼를 빌려 주면 덤비라고. 몽둥이 하나도 주지 말아라. 그놈의 계집이 있더냐? 계집을 데리고 오라고 그래라.』
 
494
합니다. 이말을 듣고 어떤 사람은 분을 못이기어,
 
495
『에끼 짐승 같은 놈! 네가 오늘 저녁을 편안히 자나 보아라. 내가 살아서는 손에 식칼 하나도 없으니 그대로 잔다마는 죽어서 귀신이 되어서 네놈의 혼자 잘 처먹고, 계집끼고 자빠져 자는 모가지를 요렇게 도려 버리고, 네놈의 간을 꺼내서 아삭아삭 씹어 먹으란다.』
 
496
하고, 악담을 하다가 도끼든 놈한테 얻어 맞아 죽는 이도 있고, 어떤 사람은 그래도 배고픈 것을 못이기어서 비슬비슬하고 제 아내를 끌고 들어오기도 합닐. 그러면 조 곰보가 여편네를 보고 맘에 맞으면 쌀 되나 주고 사고, 아니 맞으면 실컷 희롱하고 웃다가 찬밥이나 한술 먹여서 내어쫓습니다.
 
497
이 모양으로 아주 추물이나 아닌 아내를 가졌던 사람은 그 아내를 밥 한그릇이나 쌀 한되에다 팔아 먹고, 모두 홀아비로 살며, 그렇기 때문에 밤이나 낮이나 여편네 싸움이 끝날 때가 없어서, 혹은 머리를 깎고, 혹은 팔다리를 분지르고, 그 때문에 죽은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498
한 의좋은 내의가 산꼴짜기에 숨어서 손으로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집을 짓고, 나뭇개비로 밭을 갈고, 차돌을 주워다가 칼 삼아 쓰고, 이 모양으로 이탯동안이나 곧 잘 사는 것을 홀아비들이 어떻게 알았던지 몰려 가서,
 
499
『오 이놈, 너만 집 가지고 계집 가지고 잘 살고 으흥 안 될 걸.』
 
500
하고 매어달려 우는 어린 아기를 떠밀쳐 버리고 여편네를 빼앗아 가는 것을 그 남편이 따라나오다가 여러 놈들한테 돌맹이로 얻어 맞아 머리가 산산 조각이 나서 죽어버리고, 어린 아기는 혼자서 「엄마 엄마!」하고 울다가 며칠만에 말라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501
그리고 홀아비들에게 붙들려 간 여편네는 저마다 제것이라고 서루 싸우다가 한바탕 너 죽자 나 죽자 하고 싸움이 일어나서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싸우는 틈을 타서 살짝 빠져 나와서, 돌멩이에 맞아 죽은 자기 남편 곁에 와서는 바윗돌에다가 머리를 부딪쳐서 죽어 버렸습니다.
 
502
홀아비놈들 중에 사워 이긴 놈들이 따라왔다가 그만 그 여편네가 죽어버린 것을 보고 그만 한나절 헛수고에 배만 고파서 그 여편네의 넓적다리 살을 뜯어 먹었읍닐. 사람의 고기를 먹은 놈은 눈에 독이 오른다더니 정말이야요. 그놈이 그 여편네의 젊적다리 살을 배꺼 뜯어 먹고는 그만 눈깔이 독사 눈깔 모양으로 빨갛게 되어서 미쳐 돌아다니다가 바로 얼마 전에 죽어서 저기다가 묻어 주었습니다.
 
503
이 모양으로 여편네들도 반반한 것은 조 대왕한테 팔아먹고, 더러는 조 대왕네 장수들한테 빼앗기고, 더러는 홀아비들한테 겁탈받기를 싫어하여 죽고, 더러는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몇 사람 남았대야 힘쎈 사람한테 빼앗겨서 오늘은 이 사람한테 가고 내일은 저 사람한테 가고, 게다가 본국서 입고 왔던 옷은 다 떨어져 버려서 나뭇껍질 풀잎사귀로 겨우 이 모양으로 부끄러운 데나 가리우고 다니고, 사내들도 그러니까 대왕님한테 얻어 맞아 죽고, 저희끼리 싸워 죽고,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지금 몇 개 살아 남았다는 것이 소인같이 못나고 기운도 없어 때리면 얻어 맞고 달라면 빼앗기고 하는 것들뿐입지요. 다행히 이곳에는 일기가 더워서 얼어 죽은 사람은 없지마는 그래도 소나기가 내려올 때에는 모두 그늘로 들어오려고 싸움들이 나서 그래서 죽은 사람들도 적지 아니합니다——, 그 웃통 벗은 시커먼 사람이 여기까지 말하는 것을 듣더니, 허생은 참을 수 없이 슬프고, 분한 듯이 몸을 부를 떨고, 입술이 파래지며, 떨리는 소리로 그 사람을 보고,
 
504
『그래 당신도 아내를 빼앗겼소?』
 
505
하고 물었습니다. 그런즉, 그 사람은 비쭉비쭉 어린애 모양으로 눈물을 참으며,
 
506
『소인의 지어미는 얌전하였사옵지요. 다 대왕마마 덕에 장가를 잘 들어서 소인의 지어미는 맘이나 얼굴이 다 얌전하였소니까요. 배 타고 십여 일 오는 동안에 벌써 피차에 정이 들어서 잠시도 떠나지를 못하였소니까요. 저도 소인에게 정이 들었소니까요. 생각하면 소인의 저어미는 소인에게는 과하오니까요. 예 참으로 과합소와요…』
 
507
『그래 어떻게되었소? 지금까지 같이 사시오?』
 
508
하고 허생도 눈물을 머금고 갑갑한 듯이 재우쳐 물었습니다. 그런즉, 그 시커먼 사람이,
 
509
『예, 지금까지 같이 살 리가 있습니까.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소오니까요. 아마 아직 젊은 것이——지금 스물 한 살이오니까요——젊은 것이니께루 아직 죽지는 아니하였겠습니다. 또 먹을 것도 많고 좋은 집에 있으니 죽을 리도 없사옵지마는 꼭 죽은 줄만 알아도 이렇게 애가 타지는 아니하겠습니다.』
 
510
하고 흑흑 느껴 웁니다.
 
511
허생은 무슨 까닭이 있는 줄을 알고, 한번 그 시커먼 사람 더러 물었읍니다.
 
512
『그래 그러면 뉘게 아내를 빼앗겼단 말이요? 앙식이 없어서 팔아 먹었단 말이요?』
 
513
『천만에.』
 
514
하고 그 사람이 펄쩍 뛰며,
 
515
『소인이 아무리 상것이기로 또 할 수 없어서 도적질까지 한 놈이기로 지어미를 팔아 먹을 리가 있읍니까. 소인이 이 곳에 몰려와서 가만히 형편을 보오니께루 재미가 없는 모양이기로 지어미를 데리고 살짝 빠져나가서 산골짜기에 숨어 살았습니다. 소인도 아까 말씀드린 그 사람 모양으로 나뭇가 지를 꺾어다가 조그맣게 집을 하나 짓고, 과일도 따 오고, 풀뿌리도 캐어 오고 하여 이럭저럭 살면서 마침 짐 속에 옥수수 두어 이삭이 들었기에 밭에 뿌렸더니 어떻게나 잘 되 는지 몇 달이 아니 되어 옥수수가 많이 열려서 먼저 익은 것을 골라다가 삶아도 먹고, 구워도 먹게 되었소오니까요. 그래 소인은 지어미 보옵고, 되었다. 인제는 살았다, 그저 불만 꺼지지 않게 하여라, 그러면 살기는 걱정없다. 하고 참으로 꿀같이 달게 살아갔읍닐. 그러노라니 소인의 지어미가 아이를 밴 것 같다고 그럽소오니까요. 이 말을 들을 때에 소인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소인이 아니가 근 사십에 장가도 대왕마마 덕에 들었거니와 생전에 아들딸을 보고, 아버지 소리를 듣기야 꿈이나 꾸었소오니까요. 그러다가 지어미가 「아이같애」하는 말을 들으니 금시에 재롱 피우는 아이가 눈앞에 보이는 것 같소오니까요. 그래 너무도 기뻐서 힘껏 목소리르를 높여서 「좋다! 좋구나 혜!」하고 소리를 한 마디 했더니, 대왕마마 그 소리가 원수가 되어서 지어미도 자식도 다 빼앗겨 버리고 이 꼴이오니까요.』
 
516
하고 참다 못하여,
 
517
『우후후.』
 
518
하고 소리를 내어 울며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면서,
 
519
『글세 이 망할 놈아! 소리는 왜 하여! 소리는 왜 하여! 그 원수에 소리 한 마디로 우우우.』
 
520
하고 마치 미친 사람 같습니다. 아마 이 사람이 가끔 이렇 게 혼자 하소연을 하고는 우는 버릇이 있던 모양입니다.
 
521
허생은 그 사람의 등을 어루만지며,
 
522
『울지 마시오. 내 당신의 아내와 아들을 찾아 주리다. 자 울지말고 어서 이야기나 마저 하시오.』
 
523
하고 위로합니다. 그런즉, 곁에 섰던 사람들도 주먹을 부르쥐며,
 
524
『그놈이 어떤 놈이요? 어떤 놈이 남의 아내를 빠앗아 갔단 말이요. 자 앞어오! 우리가 찾아 드리리다.』
 
525
하고 모두 팔들을 뽐냅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독이 오르고 팔다리의 힘줄은 불룩불룩거립니다. 하도 분한 생각에 시퍼런 칼날이라도 덤썩덤썩 삼킬 듯합니다.
 
526
그제야 그 사람이 가슴을 두드리기를 그치고, 다시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527
『그때에 누가 대왕——그 조 곰보놈이 뒷산에 사냥 나온 줄이야 알았소오니까요. 그놈이 그 주리를 할 놈이 그 사람을 잡아 먹을 놈이 바로 그때에 뒷산으로 사냥을 돌아다니다가 소인이 소리하는 것을 듣고 따라 내려왔습니다. 내려오는 길로 소인을 무수히 때리고 하는 말이 이놈아! 이게 다 뉘 땅인 줄 알고 내게는 아무 말도 없이 여기다가 집을 짓고, 혼자 농사를 지어 먹고 살어? 응 이놈아! 하고 여러 놈들이 둘러 붙어서 어떻게나 때리는 지 한참은 정신이 다 없어졌읍니다요. 그것을 보고 소인의 지어미가 뛰어나오며, 죽이시랴거든 소녀를 죽여줍소사, 여기 이렇게 숨어 살자고 한 것도 소녀오니 소녀를 죽여 줍소사, 소녀의 지아비는 아무 죄도 없사오니 소녀를 죽여 줍시고, 애매한 소녀의 지아비를 살려줍소사 하고 애걸복걸을 하였습니다. 참으로 소인의 지어미는 열녀오니까요. 그렇게 열녀니께루 곰보놈에게 몸을 아니 허할 양으로 자수를 했는지도 모르오니까요… 그제야 곰보놈이 소인을 때리기를 그치고 소인의 지어미의 손을 잡으며, 어 꽥데 얌전한데 하고 껴안으랴고 하길래 소인이 피투성이가 되어서 땅바닥에 엎드렸다가 벌떡 일어나며, 그놈의 따귀를 떨었소오니까요. 그리고는 어찌되었는지 정신을 잃어 버렸소오니까요.』
 
528
그 사람은 그때 일을 생각하는 듯이 눈으로 어디를 노려보 며 주먹을 불끈 쥐고, 입술을 힘껏 물고, 여윈 몬을 푸르르 떨더니마는 말을 이어,
 
529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 본즉, 얼마나 오래었는지 모르거니와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고 방에는 인기척도 없습니다.
530
부르니 대답이 없나, 엉금엉금 기어서 방에 들어가 방바닥을 쓸어보니 텅텅 비었습니다. 그놈들이 소인의 지어미를 끌어가고 말았습니다. 분한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뛰어 가고 싶건마는 온 몸은 아프고, 기운은 없고, 어찌할 수 없이 비인 방에서 날새기만 기다렸습니다. 그렇게도 살기 좋고, 재미있던 집이 어쩌면 그렇게도 쓸쓸하고 무섭고 더러운 집이 되어 버립니까. 그것이 없어지니까 천지가 온통 캄캄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서 더듬더듬 손으로 방구석을 뒤지니께루 베개하고 지어미가 입다가 벗어 놓은 적삼이 손에 잡히오니까요. 그래 그거슬 껴안고 밤새도록 울었소오니까요. 세상에 나와서 부모의 얼굴을 보지 못한 소인이 눈물을 흘려 본적이 없습니다. 그날 밤에는 일생에 흘린 눈물을 다 흘려보오소니까요.
531
그러다가 밤이 새기고 가까스로 일어나서 지팡이를 짚고, 고개를 몇이나 넘어서 기다시피 곰보놈의 집에를 갔습니다. 가니까 대문에 지켜 섰는 놈이 누구냐고 하기로 나는 내 여편네를 찾으러 왔노라 하고 들어가려고 하니 들여르 줍니까.
532
그놈들도 피투성이 된 내 꼴을 보고는 손을 대일 생각은 없었든지 때리지는 아니하고 빙글빙글 웃으면서, 무엇하러 왔어? 어서 가기나 해! 네 계집은 어제 저녁에 벌써 마마가 되었어! 하고 웃음거리를 만듭니다. 그러니 소인이 어떻게나 분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놈들을, 이놈들아! 내 아내가 어떤 사람인데 저 곰보놈한테 몸을 허할 듯 싶으냐. 우리 여편네가 열녀여. 괜히 생살인 내지 말고 어서 내놓아! 하고 호령을 하였소오니까요. 그러니까 그놈들 말이, 흥 열녀! 어제 저녁에 대왕님 뵈시고 자고 아까 한나절이나 늦게야 하얗게 분을 바르고 아장아장 나오시던데. 에끼 못난 소리말고, 어서가! 괜히 대왕마마 보시면 알경치미 말고…이럽니다요.
533
그러기에 소인이, 이놈들아! 내 여편네 내놓아라! 하고 소리소리 질렀읍지요. 여러 놈들이 손으로 입을 막는 것을 뿌리치고, 내 여편네 내라——내 여편네 내라——하고 자꾸 야단을 했더니, 조 곰보가 그 소리를 들었던지 사람을 시켜 양식 한 자루를 내다주며, 이래야 쓸데 없으니 어서 가라고, 네 여편네는 여기서 평안히 잘 있다고 그럽니다. 그래 소인 이, 이놈들아! 양식 한 자루에 여편네를 팔아 먹을 줄 알고 ——이놈아! 하고 저녁때가 되도록 야단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놈들이 소인을 댕그렇게 들어다가 여기다가 내어 던졌습니다.
534
그때부터 소인은 여기서 옥수수 포기나 심어 먹고 살면서 아무리 잊으려 하나 세월이 갈수록 지어미 생각은 더욱 간절하옵고, 또 뱃속에 들어있던 아이도 났으면 지금 세 살 잡히겠으니 그것도 한번이라도 다만 한번만이라도 보고 싶고… 그래서 며칠만에 한번씩 조 곰보의 집에 가서 한참 야료를 하고, 혹 애걸도 하고, 그러다가 얻어 맞고는 또 쫓겨오고, 이렇게 하기로 삼년이 지났읍니다.
535
소인의 몸뚱이에 있는 부스럼 자국은 다 이렇게 하다가 얻어 맞은 자국이오니까요. 저번에는 꼭 한번만 지어미와 어린애 얼굴을 뵈어달라고 처음에는 애걸을 하다가 아니 듣기로 나중에 화를 내어, 이놈! 이 곰보놈아! 천벌이 내릴 날이 멀지 아니하리라. 내 모가지에 칼들어 갈 날이 멀지 아니 하리라 하고 발악을 하다가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맞고 두 달동안이나 꼼짝을 못하고 있었소오니까요. 요새에는 상처도 다 아물고, 기운도 좀 나기로 오늘은 마지막으로 가서 그 놈과 사생 결단을 할 양으로 막 떠나랴던 판에 어—— 이 사람있나——하는 소리가 나기로 뛰어나온 것이오니까요.』
 
536
합니다. 말이 끝나자, 듣던 사람들이 모두 분을 못 이기어 팔을 부르걷고 나서며,
 
537
『생원님, 이 길로 가서 그 곰보 놈을 잡아다가 불쌍한 사람들의 원수를 갚아 주십시오. 그 짐승 같은 놈의 오장을 꺼내서 까마귀 밥을 만들어 줍시오. 자 이 길로 가게 합시오.』
 
538
하고 허생을 조릅니다. 허생은 무엇을 생각하는 듯이 잠깐 고개를 숙이더니,
 
539
『응, 갑시다. 내가 원래 아무러한 일에도 사람과 싸우기를 원치 아니하거니와 이번에는 참으랴도 참을 수 없소이다.』
 
540
하고 몸에 지녔던 기를 둘러 바다에 떠 있는 배더러 가까이 오기를 명하였습니다.
 
541
배들은 무슨 일인가? 하고 「어그 여차」노를 저어 바닷가에 들어와 닿았습니다. 사람들이 배에서 내렸습니다. 허생은 사람들을 보고,
 
542
『여러분, 조 곰보가 천여 명 사람을 반이나 학대하여 죽이고, 남의 아내를 빼앗고, 모든 불의의 일을 다하였으니, 우리는 조 곰보를 잡아 불쌍한 사람들을 건져내어야 할 것이요. 보니 이 땅도 새 나라와 다름없이 좋은 땅이라 조 곰보 같은 놈만 없었던들 여기도 새 나라와 같이 되었을 것이요. 조 곰보의 무리는 오십명에 지나지 못하다 하니 두려워 할 것도 없거니와 싸움은 아무쪼록 피하고, 생명은 상하지 아니하도록 조심하시오. 그러나 이왕 싸움을 피할 수가 없거든 목숨을 아끼는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요. 남의 목숨을랑 아낄 수 있는 대로 아끼시오. 그러나 제 목숨을 아끼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요…자 누구나 가기를 원하는 이는 나를 따르시오.』
 
543
하고 그 사람을 길잡이로 허생이 앞서고, 뒤에 배 지키는 사람 몇을 내놓고는 백여명 사람이 각각 손에 칼과 도끼와 몽둥이를 들고, 조 곰보의 집을 향하고 갑니다.
 
544
가는 길에도 무덤 속에서 뛰어나온 듯한 헐벗고 여윈 사람들이 길에서 허생을 보고는 모두,
 
545
『살려 줍시오.』
 
546
하고 땅아 꿇어 엎디고,
 
547
『지금 조 곰보를 잡으러 가는 길이다.』
 
548
하니, 그 사람들도 도끼를 빌어 몽둥이 하나씩을 만들어 들고, 기운이 만장이나 나서,
 
549
『이놈 곰보야! 이놈아! 천년 만년 고대로 살 줄만 알았더냐. 이놈아! 오늘은 죽었구나.』
 
550
하고 소리를 지르며, 앞서 뛰어갑니다. 이 모양으로 모여드는 사람이 어언간에 수백명이 되었습니다.
 
551
고개를 셋이나 넘어 골 굽이를 다섯이나 건너 삼십리는 가서 잎을 바라보니, 나무 그늘에 커다란 집이 은은히 보입니다. 허생은 저기가 거기서 군사를 멈추고, 옷 입은 군사 일대를 수풀 속에 매복하고, 옷벗은 시커먼 군사를 두 대로 나누워 일대를 거기서 수십보를 간 곳에 매복하고 나머지 일대를 조 곰보의 집으로 보내어 여차여차하라고 지휘한 뒤에 허생은 먼빛에 선봉대의 뒤를 슬슬 따라습니다.
 
552
선붕대 군사들은,
 
553
『오늘이야 이놈의 원수를 갚는구나.』
 
554
하고 모두 의기양양하여 어언간에 조 곰보의 대문에 다다르니 도끼든 문 지키는 놈들이 도끼를 둘러 매고 마주옵니다. 이때에 사람들이 끌고 가던 몽둥이를 일제히 둘러 메이며,
 
555
『이놈들아! 말 듣거라. 너희나 우리나 다 같은 사람으로 무슨 원수가 있어서 조 곰보놈의 사냥개가 되어 우리를 이렇게 참혹하게 만들었단 말이냐. 분한 생각을 하면 너희놈 들을 당장에 때려 죽이고 싶건마는 너희 놈들인들 실상 무슨 죄가 있으랴. 너희 역시 먹을 것이 없어 그러한 것이니, 만일 너희가 저 짐승 같은 조 곰보 놈만 잡아내 오면 너희들의 목숨을 살려 주마.』
 
556
고 임담 좋게 호령을 하였습니다. 이 서슬에 문 지키던 놈들은,
 
557
『이게 웬일인가. 저놈들이 쟁기가 어디서 나서 몽둥이는 웬 몽둥이야?』
 
558
하고 도끼를 질질 끌고, 안으로 달려 들어갑니다.
 
559
이때에 마침 조 곰보는 근일에 가장 맘에 드는 여편네 삼사 인을 데리고, 갖은 희롱을 다하며 놀고 있다가 마당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밖을 내다보며,
 
560
『이놈들아! 왜 이리 웅성거리느냐?』
 
561
한즉, 문지기들이 헐러벌떡거리며,
 
562
『큰일났습니다. 대왕 마마 저 빨강댕이놈들이 어디서 몽둥이들을 얻어 들고 몰려와서 야단을 합니다.』
 
563
『빨강댕이놈들이 몽둥이를 들고 왔어? 그놈들이 몽둥이가 어디서 났단 말이냐. 너희들 중에 어느 놈이 도끼를 빌려주었구나.』
 
564
하고 큰소리를 내어 군사들을 부릅니다. 조 곰보가,
 
565
『이놈들아! 나오너라!』
 
566
하는 호령에 이구석 저구석에서 오십여명 군사가 도끼와 몽둥이를 들고 몰려와서,
 
567
『웨——이——』
 
568
하고 허리들을 굽힙니다. 조 곰보가 무슨 호령을 하려던 차에 대문으로 빨가숭이들이,
 
569
『이놈, 곰보놈아! 나오너라! 이놈, 요대로 천년 만년 살 줄 알았느냐. 이놈아! 내 여편네 내라! 내 양식 내라!』
 
570
하고 오글오글 끓어 들어옵니다.
 
571
이 소리를 듣더니, 곰보가 전신이 불덩어리같이 성이나서 입에 두부 거품을 부그그 불고 발을 구르며,
 
572
『네 저놈들을 모조리 때려 죽여라.』
 
573
하고 호령을 하였습니다. 이 호령이 내리자, 군사들이 고함을 치고, 마주 엄살하여 나가리 빨가숭이들이 모두 혼이 난 듯이 몽둥이를 끌고 달아납니다. 이 편에서 따라가면 쫓기고, 물러오면 도로 욕설을 하고 따라오고, 이 모양으로 졸금졸금 따라가는 것을 첫째 매복한 군사들 앞에까지 따라갔을 때에 매복하였던 군사가 불의에 뛰어나와, 조 곰보의 군사의 뒤를 엄살하여 물러갈 길을 끊고, 앞으로 앞으로 내어 몰아 옷 입은 군사 매복한 곳을 지나 뒤에 옷입은 군사가 뛰어나와, 조 곰보의 군사를 버리고, 바로 조 곰보의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574
조 곰보는 군사들을 내어보내고 대문까지 나왔다가 발가숭이들이 쫓겨가는 것을 보고, 맘 턱놓고 방으로 들어가 여전히 여편네들을 데리고 희롱을 계속합니다. 이러할 때에 옷 입은 군사들은 무인지경같이 조 곰보의 집으로 들어가 모든 문을 다 지키고 허생이 몸소 조 곰보의 방으로 가서 돌이를 시켜 문을 열었습니다. 열고 본 즉, 조 곰보는 한 여편네를 베개를 삼고, 한 여편네에게는 두 다리를 올려 놓고, 오른팔에 한 여편네를 끼고, 왼편에 또 다른 여편네를 끼고 자빠졌습니다. 그 꼴을 보고, 돌이가 발로 마루를 텅 구르며,
 
575
『이놈아 일어나!』
 
576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곰보가 이 소리에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니 문에 선 것이 누군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허 생원이요. 그 곁에 선 것이 허생원의 하인 돌이가 분명합니다. 곰보는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한참이나 말없이 멍멍하고 앉았더니 벌떡 일어나며, 벽에 걸었던 칼을 메어 허생에게 대어듭니다. 곰보놈 생각에, 허생원이 제 아무리 지혜가 과인한들 저 꼴을 하고 힘에야 배기랴 한 것입니다. 저 귀신 같은 놈이 어찌해서 그때 통에 물에 빠져 뒈지지 아니하고 살아나서 나를 못살게 구느냐 하는 생각이 난 것입니다.
 
577
그러나 호랑이같이 대어드는 조 곰보를 잠깐 슬쩍 몸을 비키더니,
 
578
『이놈아!』
 
579
하는 우레같은 소리가 나며, 허생의 팔이 번쩍하며 곰보의 손에 잡혔던 칼이 마당에 나가 쟁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곰보도 땅에 엎드려 허생의 손에 모가지를 눌리고 속절없이 다리만 버둥버둥합니다.
 
580
허생은 곰보를 어른이 어린애를 집어 일으키듯이 반짝 들어 일으키며,
 
581
『이것아! 몇 푼어치 안 되는 힘을 가지고 왜 같은 사람들을 못 견디게 군단 말이냐. 네 죄를 보아서는 당장에 죽여 버려도 아깝지 아니하지마는 너도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죽기 전에 다만 하루라도 사람 노릇을 하고 죽으라고 살려 두는 것이다.』
 
582
하였습니다. 곰보는 다시 어찌할 수가 없어 다만 고개를 숙이고 허생의 처분을 기다리는듯합닐. 허생은 사람들을 시켜 곳간에서 양식을 꺼내어 급히 밥과 국을 끓이게 하고 그 밖에도 저축해 두었던 음식과 반찬을 다 내어 마당에 벌여 놓게 하고, 사람들을 사방으로 보내어 이 땅에 있는 사람 들을 모두 불러 모으게 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시에 빨가숭이 군사들이 곰보의 군사를 모조리 칡덩굴로 결박을 지어 앞세우고 돌아오고, 청함받아 사람들도 모두 반신 반의로 열씩 스물씩 모여 들기를 시작합니다.
 
583
아까 바닷가에서 말하던 시커먼 사람이 허생 앞에 고개를 숙이고 선 조 곰보를 보고, 도끼를 메고 달려 들어오면서,
 
584
『오 이놈! 오늘이야 만났구나. 이놈, 내 여편네 내놓아라!』
 
585
하고 금시에 도끼로 곰보의 대가리를 패려고 듭니다. 그래도 곰보는 몸을 피하려고도 아니하고 나무 깍아 세운 사람 모양으로 가만히 있는데 허생이 그 사람의 팔을 잡으며,
 
586
『참으시오! 이 사람을 죽이면 무엇하오?』
 
587
한즉, 그 사람은 그래도 참을 수 없는 듯이,
 
588
『놓아줍시오. 내가 꼭 이놈의 배를 째고, 간을 내어야 먹어야 속이 가라앉겠소오니까요.』
 
589
하고 이를 악물고 흑흑하며, 금방 숨이 막힐 듯합니다. 그러나 허생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여 도끼를 집어던지며,
 
590
『내 여편네 하고 내 자식 내놓아라!』
 
591
하고 곰보의 팔을 잡아 끕니다. 그런즉 곰보는 끌리는 대로 끌려서 긴 마루를 지나 대문 하나를 지나 저쪽 산 밑으로 늘어 지어 놓은 길다란 집으로 갑니다. 그 집은 사방은 높은 담으로 돌리고 튼튼한 대문이 하나만 있고는 다른 데로 통한 길이 없는데, 그 대문 열쇠는 곰보 혼자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수백명 여편네들을 가두어 놓고, 나는 새도 꼼짝 못하게 합니다.
 
592
마당에 들어서니 수백명 여자들이 마치 큰 승방에 승들 모양으로 죽 나섰다가 대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놀라는 듯이 두어 걸음씩 뒤로 물러섭니다. 여자들은 거의다 젖먹이를 하나씩 안고 젖을 먹이다가 얼른 어린 아기 입에서 젖꼭지를 빼어 감춥니다.
 
593
그 사람은 대문 안에 들어서듯 마듯 삼년 전에 잃어버린 아내의 얼굴을 알아내었습니다. 비록 그 여인이 자기의 옛 남편을 보고 다른 여인들의 뒤로 숨으려 하였으나, 그를 찾는 남편의 눈은 더욱 빨랐습니다. 그 사람은 다짜고짜 달려 가서 그 아내의 품에 안긴 아기를 빼앗아,
 
594
『아이구! 내 새끼야.』
 
595
하고 가슴에 꼭 꼈습니다. 그럴 때에 그 곁에 섰던 어떤 다른 여인이 가엾은 듯이,
 
596
『아니야요. 그 야기는 대왕님 아기야요.』
 
597
하는 소리를 듣고, 그 사람은 몸으로 기어 오르는 벌레를 떼어 버리는 듯이 가슴에 꼭 대었던 아기를 팔이 자라는 대로 멀게 처들고, 그 얼굴을 본 즉,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곰보의 모습이 있고, 또 나이 두 살밖에는 아니 되어 보입니다. 그 사람은 「흑」하고 소리를 지르고, 치를 떨더니 그 아기를 처들어 면목없이 고개를 숙이고 섰는 자기의 예전 아내의 낯바닥을 향하고 집어 던졌습니다. 그때에 아내는,
 
598
『에구머니!』
 
599
하고 놀라는 소리를 내며, 얼른 팔을 벌려 땅바닥에 떨어지려는 아기를 받아 가슴에 품고, 미친 사람 모양으로 저쪽으로 피해 달아납니다. 이것을 보니 그 사람이 어찌 분하지 아니하겠습니까.
 
600
『이 개같은 년아! 죽은 줄 알았더니 살아서 개놈에게 몸을 허하고…그리구는 그놈의 새끼를 끼고 도망을 해! 이 당장에 밟아 죽일 년 같으니…찢어 죽일 년 같으니…내 자식 어찌했니? 내 자식 내놓아라!』
 
601
하고 피하는 아내를 따라가 담 밑에서 붙들고,
 
602
『이년을…요년을…죽여 버려야….』
 
603
하고 어린 것 아울러 깔고 앉아서 두 주먹으로 사정없이 막 쥐어지릅니다. 이 광경을 우두커니 보고 있던 조 곰보가 뛰어가서 힘껏 그 사람의 팔을 끌어 일으키며,
 
604
『이놈아! 그 여편네를 왜 때려? 죄가 있으면 내가 있지. 네 여편네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
 
605
한즉, 이번에는 그 사람이 조 곰보에게 달려들며,
 
606
『이놈아! 내 자식 내어놓아라.』
 
607
하고 할퀴고 차고, 물어 뜯고 야단을 합니다. 그러나 조 곰보는 때르는 대로 맞고 차는 대로 채우고 조금도 대항을 아니하며,
 
608
『응, 내 맘대로 하여라. 내 자식은 내가 돌로 메쳐 죽였다…그래 네 맘대로 해라.』
 
609
하고 섰습니다.
 
610
이러할 즈음에 양식 한 되에 아내를 팔아 먹은 사내들이 우 밀려 들어와 저마다 제 아내와 제 자식을 내라고 야단을 하는통에 여편네들은,
 
611
『이게 대관절 웬 일인가? 천지가 뒤집혔다.』
 
612
하고 어쩔줄을 모르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합니다.
 
613
이 모양으로 수백명 남녀가 한테 엉키어,
 
614
『내 여편네 내라!』
 
615
『내 자식 내라!』
 
616
『이놈 곰보놈 나서라!』
 
617
『아이구!』
 
618
『에구머니!』
 
619
하고 야단이 난 판에 허생이 들어왔으니다. 들어와서 무에라고 말을 하였으나, 모두 저마다 떠드는 소리에 말이 들리지를 아니합니다. 허생은 이윽히 생각하다가 혼잣말로,
 
620
『응, 너희 맘대로 너희 일을 처리하여라.』
 
621
하고 가만히 보고 섰습니다.
 
622
저쪽 끝에 사람 한 뭉텅이가 오글오글하더니,
 
623
『야! 야!』
 
624
하는 소리가 납니다. 허생이 뜅어가 본즉, 아내를 잃어버렸던 사람들이 둘러 붙어 조 곰보를 함부로 때르는데 한 개를 때리고는 물러 나오고, 두 개를 때리고는 물러나오고, 저마다 다만 한 개씩이라도 때리려고 들고, 그중에 어떤 사람은 조 곰보를 안고 메이달려 물고 차고 합니다. 그러나 조 곰보는 대항도 아니하고, 소리도 아니내고, 죽은 사람같이 가만히 있습니다. 마치 개미떼가 큰 사자의 주검에 붙어 뜯어 먹는 것 같습니다.
 
625
허생은 사람들을 헤치고 뛰어 들어가 조 곰보를 가리우고 서서,
 
626
『그만 하였으면 분풀이가 되었을 것이니, 이 사람의 목숨을랑 나를 보아 남겨 두시오.』
 
627
하였습니다. 아무리 불같이 성이 난 사람들도 허생은 건드리지 못하여 하나씩 둘씩 물러섭니다. 조 곰보는 기운없이 허생에게 안기며,
 
628
『나를 죽이도록 내버려 둡시오.』
 
629
하고 이내 정신을 못차립니다. 허생은 조 곰보를 땅에 누이고, 슬픈 낯빛으로 여러 사람들을 치어다 보았습니다.
 
630
그런즉, 지금가지 조 곰보의 간을 먹지 못하여 악을 쓰던 사람들 중에서 냉수를 떠 오는 이도 있고 와서 쭈그리고 앉아서 조 곰보의 팔다리를 주무르는 이도 있고, 그렇지 아니 하더라도 근심스러운 빛으로 둘러섭니다.
 
631
『정신 차리오. 정신 차리오.』
 
632
하고 허생이 불렀으나, 입술만 움찍움찍할 뿐이요, 말은 나오지 아니하다가 마침내 팔다리가 두어번 불불 떨리더니, 그만 숨이 끊어지고 맙니다.
 
633
『아아 죽어버렸구나.』
 
634
하고 허생이 손을 펴서 죽은 사람의 눈을 감기며 곁에선 사람을 보고,
 
635
『이 사람은 죽어버렸소. 이렇게 죽어 버리는 사람은 당신네들이 미워하고 때렸구려. 자 이 사람의 몸이 식어지기 전에 한 번씩 만저나 주시오. 그리고 미워하던 맘, 분해하던 맘을 다 없애 버립시다.』
 
636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는 하나씩 하나씩 허리를 굽혀 아직 따뜻한 기운이 남은 원수의 몸을 만집니다. 얼마후에는 조 곰보의 시체는 사람들이 꺽어 온 꽃가지로 덮였습니다. 그때까지 허생은 죽은이의 머리맡에 서서 눈을 감고, 무슨 슬픈 생각을 하는 듯하였습니다.
 
637
『야 너도 죽었구나 죽으니 모두 그만이로구나 악이니 선이니 말을 마라 죽은 자를 슬러나 하자.』
 
638
『야 너만 죽으랴 나도 죽을 것을 다 죽을 것을 죽으면 그만일 것을 야 우리 서로 화진할까나.』
 
639
싸움은 끝났다. 죽은 사람은 죽었거니와 산 사람은 먹어야 한다. 짓던 밥 끓이던 국 여투던 반찬도 다 되었으니 사람들 아! 밥 먹자! 이렇게 모두 둘어앉아 밥을 먹으려 할 적에 사람들은 밥과, 국과 갖은 반찬 한 상을 따로 차려 꽃에 덮인 조 곰보의 시체 앞에 놓았습니다. 죽은 사람이 어이 먹으랴.
 
640
운감인들 하랴마는 그래도 산 사람의 정이 이러하구나.
 
641
해가 번쩍번쩍하더니 더운 나라의 서늘한 소나기가 우수수 하고 달음박질쳐 지나가고 싸움은 끝난 새 나라는 소나기 지나간 수풀과 같이 고요했습니다.
 
642
소나기 지나가고, 고요하여진 석양에 삼년 동안 굶주리던 수백명 사람들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과 밥을 보고 마치 아귀를 모양으로 곁에 있는 사람들도 못 보는 듯이 젓가락은 무엇이며, 숟가락은 다 무엇인고 손으로 주먹으로 시작하기 바쁘게 안 먹으면 금시에 밥과 국이 어디로 스러지기나 할 듯이 허겁지겁으로 퍼먹습니다. 허생은 한편에 서서 사람들이 무섭게도 먹는 양을 보고 있습니다. 얼마 아니면 채을 조그마한 배를 채을 것이 없어서 삼년이나 굶주렸던 그 무리의 정경이가 가련도 합니다. 역시 사람은 먹어야 산다.
 
643
백성에게는 먹는 것이 하늘이라는 말도 있지마는 어쩌면 이 넓은 천하에서 그 조그마한 배를 채울 것도 없어서 저대도록 굶주리는고.
 
644
사람들은 부리나케 제 몫에 온 밥과 국을 다 먹고 나서는, 커단 눈을 두리번 두리번하다가 아직 다 먹지 아니한 사람의 것을 「나 좀 먹읍시다」하는 인사도 없이 툭 빼앗아서 손으로 와락와락 한 입이나 두 입에 다 틀어 막고, 그리고는 또 다른 사람 곁으로 뛰어가며, 이렇게 먹던 밥 도적을 따라가나 밥 도적은 쫓겨가는 동안에 벌써 다 먹어 버리고 비인 그릇을 따라오는 사람에게 던지며 욕설을 합니다.
 
645
하나씩 하나씩 밥 도적이 생기기 시작하여 사내들 먹던 자리에서는 밥 먹다가 말고 대풍파가 일어나더니 그중에 어떤 사람이 부인네들 먹는 자리로 뛰어가 닥치는 대로 남이 들고 먹는 밥그릇을 빼앗아서 입에다 틀어막고, 그짓을 미처 다 삼키기도 전에 또 다른 밥그릇을 빼앗습니다. 이통에 부인네들은,
 
646
『에구머니!』
 
647
『에구머니!』
 
648
하고 제가끔 제 밥그릇을 들고 달아나고, 달아나면 사내들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따라가서는 안 내놓으려고 가슴에 품는 밥그릇을 억지로 빼앗아 가지고 입에 집어 넣으려 할 적에 또 다른 사람이 뒤로 와서 빼앗은 밥그릇을 또 빼앗습니다. 그래서,
 
649
『이놈아!』
 
650
『아이구!』
 
651
『에구머니!』
 
652
『아야!』
 
653
『이 개자식!』
 
654
『이년 같으니!』
 
655
하는 소리와 쫓기고 따르고, 때리고 차고, 엎어지고 자빠지고 뒹굴고, 울고 소리를 지르고, 참으로 아귀도(餓鬼道), 수라도(修羅道)를 한데 합한 것 같습니다.
 
656
허생은 팔을 두르며 소르를 높여,
 
657
『밥은 암만이라도 있으니 싸우지 마시오! 오늘만 있는 것 도 아니요. 언제나 있으니 싸우지 마시오.』
 
658
하고 소리를 질렀으나, 밥에 미친 사람들의 귀에는 들어갈 리가 있습니까. 내일 아침에 밥 한 그릇을 만날둥 말둥하거든 먹을 수 있는 때에 배가 터지도록 한 번만이라도 먹어 두자, 삼년 동안 굶었던 밥을 한 번에 보충을 하고 앞날에 죽을 때까지 굶을 밥도 이토에나 한 번 먹어 두자. 굶어 죽는 것보다는 배가 터져 죽고지고——이러한 사람들의 눈에 밥 밖에 보일 것이 무엇이랴. 밥, 밥, 밥, 밥 밖에 보일 것이 무엇이랴.
 
659
마침내 사람들은 빼앗을 밥도 없어지고, 오래간만에 배불리 먹은 밥에 취하여 하나씩 하나씩 여기 저기 쓰러지고, 밥을 빼앗기고 얻어 먹지 못한 무리들만 아직도 기운이 남아서 땅바닥에 떨어진 밥 덩어리를 주워 먹으며 돌아다닙니다.
 
660
땅바닥에는 허옇게 밥이 널리고 국이 엎질러졌습니다. 솥에 남았던 밥도 서로 제 것이라고 빼았으려다가 솥은 깨어 지고, 그 아까운 밥은 땅바닥에 엎질러져 밥일래 싸우는 사람들의 발에 밟혀서 어떤 데는 커다랗고 시커먼 엄지발가락 자국이 땅바닥에 이겨 발린 하얀 밥 위에 인 박힌 모양으로 박혀 있습니다. 조 곰보의 시체 앞에 놓였던 밥그릇도 누가 집어가 버리고 텡텡 비인 소반만 우두커니 앉아 있습니다.
 
661
허생은 밥에 취하여 눈을 멀뚱멀뚱하고,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돌아보았습니다. 그중에는 미처 잘 씹지도 아니하고, 너무 마른 밥을 많이 멍거서 숨도 잘 못 쉬는 이도 있고, 입으로 꼴깍꼭깍 퉁퉁 불은 밥알을 뺏는 이도 있고, 남의 밥을 빼앗다가 그랬는지 누구한테 빼앗기다가 그랬는지 얼굴과 손에는 피가 나는 자도 있습니다.
 
662
밥에 취해서 사람들이 말없이 누워 있는 동안에 해가 넘어 가고, 어두움이 오고, 맑은 별들이 반짝반짝 눈을 뜨고 달이 올라옵니다.
 
663
쓰러진 사람들 중에는 끙끙 앓는 소리를 하는 이도 있고, 세상 모륵고 드렁드렁 코를 고는 이도 있고, 네 활개르 활짝 뻗고 푸푸 입을 부는 이도 있습니다.
 
664
부인네들 있는 곳에서,
 
665
『으아 으아.』
 
666
하고 어린애들 우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차차 세상이 사람 사는 세상 같아 보입니다.
 
667
그러다가 달이 거의 하늘 가운데 올라올 만해서, 밤이슬에 시커먼 몸뚱이들이 축축하니 젖을 만한 때에 하나씩 하나씩 눈을 비비고 일어납니다. 일어나서 하품 섞은 기지개를 서너 번씩이나 하고야 비로소 정신들이 드는 모양인지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눈을 껌벅껌벅하며 사방을 돌아보고야, 비로소 해지기 전에 일어난 모든 일이 희미한 머리 속에 생각이 나는 모양인지 입맛을 쩍쩍 다시는 이도 있고, 손으로 피 말라 붙은 생채기를 가만 가만히 만져 보는 이도 있고, 아직 일어나지 아니한 곁에 사람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훑어보는 이도 잇고, 「응」하고, 무서운 꿈이나 꾸다가 깨인 듯이 벌떡 뛰어 일어나서, 서너 걸음 뚜벅뚜벅 걸어 나가다가 주정꾼 모양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는 다릿심이 풀리는 듯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서 머리만 슬슬 치쓰는 이도 있습니다. 달빛에 시커먼 그림자 하나씩을 뒤에 두고 쭈그리고 둘러앉은 무리들이 사람 같지는 아니하고 무슨 귀신들 이나 같습니다. 더구나 그 사람들이 아까하던 모양을 생각하고, 또 말도 없이 정신을 차리노라고 꿈지럭거리는 것을 볼 때에는 더욱 흉물스러웁니다. 만일 이 흉물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어슬렁 어슬렁 춤이나 추고 돌아간다 하면 분명히 옛말에 나오는 도깨비판이 될 것입니다.
 
668
그러나 얼마 아니하여 맑은 달빛과 서늘한 밤바람에 사람들의 정신이 들었습니다. 하나씩 둘씩 부인네들 모인 곳으로 제 여편네를 찾으러 갑니다.
 
669
허생은 또 아까 밥 싸움 모양으로 여편네 싸움이 날 것을 근심하여 사나이들이 자는 동안에 부인네들을 불러 놓고 남편의 유무를 물어 보았습니다. 그런즉, 대답이,
 
670
『남편이야 하나씩 있어야지요마는 이리로 팔려 들어온 뒤에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소오니까요. 도 사람의 모양들이 모두 변해서 보더라도 알아볼 수가 없사오니까요.』
 
671
하고 별로 보고 싶어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그래서 허생도 하릴없이 밥에 취해 자는 사람들이 깨어 일어나기만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차에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깨어서 여편네들 찾는 것을 보고, 허생은 부인네들을 불러 내어 길게 병정 늘어 세우듯이 한 줄로 늘어 세웠는데 이백여 명 부인네가 각각 아기들을 안고 늘어선 것이 장관이었습니다.
 
672
그리고 나서는 돌이가 문에 지켜서서 하나씩 하나씩 사람을 들여서는 각각 제 여편네들 찾게 하는데 달빛에 비치인 부인네의 얼굴을 첫머리에서 끝까지 차례차례로 보아 가다가 제 여편네가 눈에 뜨이면,
 
673
『여기 있다!』
 
674
하고 손목을 잡아 끌어냅니다. 그러면 말없이 순순히 끌려 나오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675
『아니요. 당신이 잘못 보셨소. 나는 당신의 여편네가 아니요!』
 
676
하고 악을 쓰며 팔을 뿌리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면,
 
677
『내가 잘못 보았나!』
 
678
하고 중얼거리며, 또 다른 사람을 고르는 이도 잇고 어떤 이는,
 
679
『이년! 아무리 딴 서방의 몸에 새끼까지 낳았기로 제 본 서방까지 잊어버려?』
 
680
하고 따귀를 붙이는 이도 있습니다. 그제야 엉엉 울면서 남편에게 끌려 나갑니다. 문밖에 지켜 서서 제 차례가 돌아 오기만 기다리던 사람들은 먼저 들어가 여편네들을 끌고 나오는 사람을 뚫어지도록 들여다봅니다. 혹 제 여편네를 잘못 가져가지나 아니하나 하고 의심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다가 제것이 아닌 줄을 분명히 안 뒤에야 비로소 맘을 놓는듯이,
 
681
『흥, 아이 하나는 공으로 얻었지그려.』
 
682
하고 비웃는 소리를 하고는 자기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 립니다. 한 사람이 여편네를 찾아 가지고 나온 뒤에는 저마다 먼저 들어간다고, 들여밀리는 것을 돌이가 두 팔로 힘껏 내어밀면서,
 
683
『글세 왜들 이려? 여편네들 누가 잡아 먹나! 하나씩 들어가 찾아내어.』
 
684
하고, 그 중에 하나만을 들여보냅니다. 그러면 들어가는 허락을 받은 사람은 또 아까 사람 모양으로 달빛에 비치인 부인네의 얼굴을 차례차례로 둘러보다가 다행히 제여편네를 얻어 만나면,
 
685
『여기 있다!』
 
686
하고 팔목을 끌어내고, 혹 제 여편네가 안 보이면 두 번 세 번 왔다갔다하다가 어떤 이는 정직하게,
 
687
『우리 여편네는 어디 갔어?』
 
688
하고 실망하는 이도 있지마는, 어떤 뻔질뻔질한 사람은 그 중에서 제일 눈에 드는 부인을 붙들고,
 
689
『여기 있다!』
 
690
하고 팔목을 끌어냅니다. 그러면 그 부인은,
 
691
『아니야요. 에그 망칙해라. 내가 언제 당신 여편네야요?』
 
692
하고 팔을 뿌리치면 허생이 따라가서 그 사내더러 여편네의 성과 나이와 표를 물어 보아서 맞으면 데려가게 하고 안 맞으면 나가라고 합니다. 그러면 순순히 나가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693
『아니야요. 그러면 나는 어찌해요?』
 
694
하고 때를 쓰는 이도 있습니다.
 
695
이 모양으로 본여편네 본남편을 다 찾고 나서도, 홀아비가 오십여명, 과부가 팔십명 가량이나 남았습니다.
 
696
인제는 새로 혼인들을 할 수 밖에 없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허생은 오십명 홀아비와 팔십명 한테 모아놓고 서로 남편과 아내를 고르도록 하였습니다. 피차에 성과 본을 말하고 나이를 말하고, 피차에 맘에 맞는 사람을 고르게 하는데, 대개는 무사히 약혼이 되었으나 하나 큰 걱정이 생겼습니다.
 
697
과부 중에 조 곰보의 첩으로 있던 과부 하나는 원래 전라도에서 이름 있던 미인이라 비록 나이 삼십이 가까웠건마는 자태는 십 칠팔세 밖에 아니 되어 보이고, 그 여러 사람 중에 뛰어나게 아름다웁니다. 그런데 홀아비들은 저마다 이 과부를 제 것을 만들 양으로 이십여 명이 들러붙어서,
 
698
『나하고 살아요.』
 
699
하고 조르며, 그중에 어던 사람은,
 
700
『누가나 이 사람에게 손을 대는 놈이 있으면 대강이를 바숴 줄테어!』
 
701
하고 그 과부를 제 것을 만들려고 위협을 합니다.
 
702
사람들은 다투다 못하여 아무리하여도 그대로는 끝이 못 날 줄을 알고, 그 중에 한 사람의 발론으로 허생에게 송사를 청하기로 하였습니다. 허생은 지금가지는 서로 맘에 맞는 짝을 고르기들만 기다리고 곁에서 보고만 섰다가 여러 사람들이 다투는 양을 복, 근심하던 터이라 자기더라 판결을 청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 그 과부의 곁에 나아가,
 
703
『지금 이 사람들이 당신을 아내로 삼으려 하니 이중에서 누구든지 당신의 맘에 드는 일을 택하오.』
 
704
하였습니다. 그런즉, 지금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 과부가 눈물 흐르는 낯을 들며, 허생을 향하여 극히 비창한 소리로,
 
705
『저는 아무한테도 시집은 가지 못하겠습니다. 비록 육례를 갖춘 부부는 아니라 하더라도 십년 동안 남편으로 섬기던 이가 돌아가셨으니 그의 시체도 묻기 전에 남편을 죽인 원수에게 몸을 허할 수는 없읍니다…옛사람같으면 남편의 뒤를 따라 이 자리에서 목숨을 끊을 것이로되, 생각하은즉 집에 늙은 부모도 계시오니 생원님께서 저를 본국으로 데리 나가 부모님의 늙으신 낯이나 한번 뵈옵고 죽게 하여 주셔요.』
 
706
하고 흐르는 듯한 언변으로 하소연을 합니다. 그리고는 얼른 몸을 빼쳐 조 곰보의 시체 곁으로 가서 그 가슴에 얼굴을 대고 흑흑 느껴 웁니다.
 
707
이 광경을 보고 사람들은 다시 그 과부를 끌어낼 생각을 아니하고 한편 구석에서 남아 있던 못난 과부 하나씩을 골라가지고, 슬몃 슬며시 빠져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중에도 건장한 사람 하나가 다른 과부는 거들터보지도 아니하고 조 과부의 곁에 붙어 떠나지를 아니하며, 조르기를 마지 아니합니다. 이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
 
708
허생은 그 사람에게 말을 하였습니다.
 
709
『남편을 생각하고 개가하기를 원치 아니하는 이를 암만 졸라도 쓸데 없으니, 어서 다른 사람을 아내로 택하시오.』
 
710
하였습니다. 그런즉, 그 사람이 허생의 앞에 꿇어 엎디며,
 
711
『소인은 본래 이 과부와 한 동네에 살던 사람이오니까요, 어려서부터 함께 놀고 자랐소오니까요. 그래서 소인은 이 사람이 아니면 장가를 아니 들기로 작정을 하옵고, 부모께 졸랐소오니까요 그래소 소인은 이 사람이 아니면 장가를 아니 들기로 작정을 하옵고, 부모께 졸랐소오니까요, 그래서 거의 다 허락되어서 장가들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때에 조 곰보가 돈을 많이 주고 빼앗아 갔소오까요. 그래 제가 그 길로 따라갔사오니 힘이 없사오니까요. 그래도 조 곰보를 떠나지만 않고 있느라면 무슨 기회라도 돌아오려니 하고 마침 소인이 힘깨나 쓰고 날파람이 있는 것을 보여서 조 곰보 곁에 여태껏 십년이나 있었소오니까요. 그 기나긴 심년 동안 하루라도 맘편한 날이 없고, 언제나 일생의 소원을 달하나 하고 오늘날까지 기다렸소오니까요. 그러다가 오늘 기회에야 조 곰보를 죽여버리고 소원을 달하게 되엇소오니까요. 이러고도 소원을 달하지 못하면 소인은 저 계집과 함께 죽어 버리겠소온까. 그러하오니께루 대왕마마께서 잘 저 계집을 훈계를 하시와 소인의 소원을 이뤄 주시게 하옵소오니까.』
 
712
하고 수없이 절을 합니다.
 
713
아아 그러면 조 곰보를 죽도록 때린 것이 이 사람인가. 또 「어느 놈이든지 이 사람을 건드리면 대강이를 바수겠다」 한 것도 이 사람인가 하고 허생은 달빛에 비치인 그 건강한 사람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과연 세상에 드물게 보는 건장한 골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키가 크고, 어깨가 힘있 게 퍼지고 투듬투듬한 얼굴에 터질 듯 터질 듯한 힘줄 뭉텅이가 불룩거립니다.
 
714
『허지만 저편이 말을 아니 듣는 것을 어찌하오. 사람의 맘을 힘으로 돌릴 수는 없는 것이 아니오? 허니까까 사흘동안에 당신의 수단껏 저 사람의 맘을 돌려 보시오. 그러나 당신의 힘을 믿고 억지로 남의 말을 꺽는 것은 용서 할 수 없소.』
 
715
하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어떤 여편네 하나이 뛰어나와, 그 장사의 팔에 매어 달리며,
 
716
『여보시오. 나하고 삽시다. 내가 삼년째나 당신을 생각하면서도 조 곰보가 무서워서 말도 못하였소. 나는 얼굴은 못 났지마는 부엌 일 바느질 김매기 무엇이나 못할 것이 없고, 어려서부터 바닷가에서 자란 덕으로 배도 곧잘 젓소. 다른 년들은 낯바닥이 반들반들한 덕에 조 곰보의 새끼도 낳았거니와 나는 낯바닥이 못난 덕에 조 곰보의 팔목 한 번 안 만져 보았소. 자 여보, 저까짓 년은 잊어버리고 나하고 삽시다. 내 옷도 잘 지어 주고, 아들딸도 많이 낳아 주께 나하고 삽시다. 나하구 살아요.』
 
717
하고 매어 달립니다. 그 장사는 어이가 없어서 처음에는 어쩔 줄을 모르고 어안이 벙벙하여 우두커니 서 있더니 한 팔로 그 여인을 떠밀었습니다. 그런즉, 그 여인이 장사를 한 번 흘겨 보고, 소리를 빽 지르며, 그 장사에게 달려들어,
 
718
『응, 나를 떼밀어? 안될걸. 내가 꼭 너하구 살아 볼양으로 삼년 동안 맹세를 하고 왔어. 내라는 사람이 그렇게 떼민다고 떨어질 사람인 줄 아느냐. 안될 말이지. 자 어디 네가 힘이 세다더라마는 나하구 사생 결단을 하여 보자.』
 
719
하고 바싹 달라붙어서 아니 떨어지려고 악을 악을 씁니다.
 
720
허생은 이 광경을 보고 섰다가 그 장시의 어깨를 턱치며,
 
721
『여보! 이 부인과 혼인하시오. 이 부인이 비록 얼굴은 미인이 아니나 심상한 부인이 아니요. 이 부인과 혼인하여 자식을 낳으면 좋은 자식이 날 것이니 이 부인과 혼인하시오. 그리하면 몇 백년 후에 당신의 후손 중에서 큰 사람이 나올 것이요.』
 
722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그 장사는 고개를 돌려 조 곰보의 시체 위에 엎드린 조 과부를 바라보았습니다. 허생은 다시 그 장사의 어깨를 치며,
 
723
『십년 동안 먹어온 생각을 버리기가 오죽이나 어렵겠소 마는 당신의 장사가 아니요? 장사답게 하시오!』
 
724
하였습니다. 그제야 장사도 결심한 듯이,
 
725
『그러하겠습니다. 이 여인과 혼인하겠습니다.』
 
726
하였습니다. 그런즉, 그 여편네가 너무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모르는 듯이,
 
727
『정말이요? 정말아요? 생원님 정말이야요?』
 
728
하고 껑충껑충 뜁니다.
 
729
이렇게 혼인이 다 끝난 뒤에 남편을 만나지 못한 삼십여명 과부들은 청승스럽게 달빛을 받고 섰습니다. 그리고 혼인을 한 사람들은 쌍방이 어디로 달아나 버리고 종일 오글오글하던 조 곰보의 집이 비인 집 모양으로 조용하게 되었습니다.
 
730
이따금 조 곰부의 남겨 둔 씨들이 이 구석 저구석에서 「으 아 으아」하고 우는 소리가 들릴 뿐입니다.
 
731
허생도 피곤하여 그 마당에서 나와 잘 자리를 구하려 할 때에 돌이가 허생의 곁으로 오며,
 
732
『생원님 저는 어찌 하랍시오?』
 
733
합니다.
 
734
『응?』
 
735
하고 허생이 돌이의 얼굴을 본즉, 돌이는 심히 말하기가 어려운 듯이 머뭇머뭇하다가 겨우 입을 열어,
 
736
『생원님 제 나이 벌써 삼십이 넘었습니다. 생원님을 모시고 다니는 것도 좋지마는 저도 사람으로 태어나서 낫살이나 먹고 본 즉, 장가도 들고 싶고, 집도 가지고 싶고 자식 새끼도 안아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예 그러니깐으로 제가…』
 
737
하고 말을 맺지 못합니다.
 
738
『그러면 어쩌잔 말이어?』
 
739
하고 허생이 다시 물은즉, 돌이는 늘 하던 버릇대로 발로 땅을 파며, 고개는 숙인 대로,
 
740
『소인 본국으로 돌아간대야 별 수도 없고요…여기서 그저 여기서 과부나 하나 얻어 가지고 아주 살고 싶소와요.』
 
741
합니다. 허생은 의외의 일이나 당한 듯이 한참 주저하더니, 무슨 결심을 한 모양으로 고개를 끄떡하며,
 
742
『그러면 네가 여기 있어서 사람들을 데리고 새 나라 모양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을 듯하냐. 집들도 짓고, 밭도 갈고, 길도 만들고, 그렇게 할 것 같으냐?』
 
743
하고 물었습니다.
 
744
그제야 돌이는 자신이 있는 듯이 고개를 번쩍 들며,
 
745
『예, 저도 이십년이나 생원님 모시고 다녔으니, 생원님의 솜씨를 다는 못해도 여간은 배운가 싶습니다. 아까 저 장사 놈과 손만 맞으면, 여기서도 새 나라보다 낫게 차려놓고 살 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746
하고 언변 좋게 늘어 놓습니다. 허생은 이 녀석이 어디서 이런 언변을 얻었는가 하고 빙그레 웃더니,
 
747
『그러면 네 힘껏 해 보아라. 아내될 사람은 구했니?』
 
748
한즉, 돌이가 껑충껑충 뛰어가서 어떤 튼튼한 과부 하나를 데리고 와서,
 
749
『생원님 보십시오. 제가 사람 보는 안식이 어떻습니까.』
 
750
하고 자랑하는 듯이 빙글빙글 웃습니다.
 
751
허생이 돌이와 그의 데려온 여자를 이윽히 보더니, 두어번 고개를 끄덕거리며,
 
752
『잘 되었다!』
 
753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돌이는 너무도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모르더니, 겨우 뛰는 맘을 진정하는 듯이 손으로 가슴을 만지며,
 
754
『제가 부모도 없이 어려서부터 생원님 수하에서 자라나서 산으로 가나 바다로 가나, 생원님을 뫼시고 다니읍다가 이제 장가를 들게 되오니 자연히 부모가 그리워집소와요…이렇게 그래도 혼인을 하는데 부모도 없고…그래도 저는 이게 일생에 첫 번이 아닙니까. 혼인이 대사라니…생원님께서… 말씀 여쭙기는 황송하옵지요마는…생원님께서 제…아…아버지가 되셔서 여기서 혼인을 시켜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755
하고 어찌나 말하기가 힘이 들었던지 이마에서 땀이 흐릅니다.
 
756
이 말을 듣는 허생도 땀이 흐를 듯하였습니다.
 
757
『그래. 응 응 알아들었다.』
 
758
하고 돌이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부터 알아들은 뜻을 표하였습니다.
 
759
그래서 허생이 아버지가 되고, 돌이는 아들이 되고, 그 과부는 며느리가 되어 달빛 아래 이슬 맺힌 풀판에서 술 대신 냉수를 마시고, 신랑 신부가 마주 절도 하고 시아버지께 폐백도 드리고, 할 수 있는 예식을 다하였습니다.
 
760
돌이까지 혼인을 시켜 내어보내니 남은 것은 삼십명 짝 잃은 과부와 허생 뿐입니다. 과부들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허생의 처분만 기다립니다. 허생은 과부들 앞으로 가서,
 
761
『당신네는 본국으로 돌아갑시다. 본국으로 가서 다들 시집가서 잘 살으시오.』
 
762
하고 내일 아침에 대문 밖으로 다 모이기를 명하였습니다.
 
763
그리고는 허생은 혼자 어디로 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764
이튿날 아침에 먼저 허생의 침실에 찾아온 것은 돌이 부처 입니다. 돌이는 서울 양반 집에서 보고 들은대로 허생의 앞에 아침 인사를 드리고 돌이의 아내도 남편에게 배운 대로 인사를 드링습니다.
 
765
허생은 기쁘게 돌이 부처의 인사를 받고 나서,
 
766
『돌아! 네가 본국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은 다 잊어 버리는 것이 좋다. 결코 다른 사람들에게는 인사니 예절이니 가르치지를 말고, 오직 한 가지만 가르쳐라. 한가지란 무엇인고 하니, 먹을 일에는 나 많은 이를 앞세우고 힘드는 일에는 젊은이가 앞서는 것이다. 양반도 없고 관원도 없거니와 젊은 사람들이나 많은 이를 공경하는 것 하나만 가르치면 그만이다.』
 
767
하였습니다. 그런즉 돌이가,
 
768
『밥 숟가락은 어느 손으로 잡으랄까요?』
 
769
하고 물었습니다.
 
770
『아무 손이면 어떠냐. 흙 묻은 손으로만 먹지 말고 나뭇개비로라도 수저만 만들어 먹으면 그만이겠지.』
 
771
하고 허생이 대답합니다.
 
772
『남녀지변은 어찌하면 좋습니까?』
 
773
하고 돌이가 또 물은즉 허생은,
 
774
『여자들은 여자의 일을 하고, 남자들은 남자의 일을 하면 자연히 남녀 구별이 되는 것이요. 저마다 제 여편네만 여편네로 알면 자연히 남녀 유별이 되는 것이지, 그밖에 또 무엇이 있겠느냐.』
 
775
합니다.
 
776
『그 밖에 사람들이 잘 살기 위하여 하지 아니하면 안될 일이 무엇입니까?』
 
777
하고 또 돌이가 물은즉, 허생은 이윽히 돌이를 치어다보더니,
 
778
『네 생각에 어떠하냐?』
 
779
하고 도로 물습니다.
 
780
『제 생각에는 이렇습니다. 첫째 사람마다 놀고 먹지 말고요, 둘째 사람마다 속이지 말고요, 셋째 사람마다 남을 부리지 말고요, 넷째 다투지 말고요…그러면 잘 살리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이 어떠합니까?』
 
781
하고 돌이가 서슴치 않고 대답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더니 허생이 기쁜 듯이 무릎을 치며,
 
782
『옳다! 옳다! 그러면 그만이다. 그러나 만일 다툼이 생기면 어찌할까?』
 
783
한즉 돌이는,
 
784
『그러면 제가 집니다』
 
785
합니다.
 
786
『좋다! 좋다!』
 
787
합니다.
 
788
이러한 문답을 하는 즈음에 하나씩 둘씩 남편과 아내와 쌍 쌍으로 와서 허생에게 인사를 드리고, 오래 떠났던 내외를 다시 만나게 한 은혜를 감사합니다. 그중에는 바닷가에서 처음 만난 시커먼 사람도 그 아내를 데리고 왔습니다.
 
789
허생이 시커먼 사람을 보고,
 
790
『그래 어찌 되었소? 도로 의합이 되었소?』
 
791
하고 물은즉, 그 시커먼 사람이 부끄러운 듯이 얼굴을 붉히며,
 
792
『그러면 어찌해요. 이왕 조 곰보놈에게 붙들려 갔으니 조 곰보놈의 자식을 낳기도 예사입지요. 이제부터나 제 자식을 낳아 주면 그만입지요. 애헤.』
 
793
하고 젖먹이를 안은 아내를 돌아보니 아내도 부끄러운 듯 이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습니다.
 
794
이 모양으로 이백여 쌍의 내외가 니억니억 허생을 찾아와 보이고는 쌍쌍이 웃는 낯으로 둘러섭니다. 어저께 귀신같던 무리가 오늘은 웃음도 있고, 인정도 있고, 희망도 있는 사람의 무리로 변하였습니다. 허생은 만족한 듯이 그 사람 들을 바라보고 잘 살아 갈 방도를 들려줄 즈음에 과부 삼십 명이 모두 옷 보퉁이를 싸가지고 허생에게 모여 들었습니다.
 
795
『자 다들 부디 잘 살으십시오. 이 땅에서 삼백년은 부족함이 없을 것이니, 부디 잘들 살으시오. 그러나 이 땅에서 살기를 원치 아니하고 본국으로 가기를 원하는 이가 있거든 나를 따라오시오.』
 
796
하고 뱃사람들과 과부들을 데리고 배 있는 데로 나왔습니다.
【원문】15. 새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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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수(李光洙) [저자]
 
  1923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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