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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許生傳 (이광수) ◈
◇ 14. 邊山盜賊 ◇
해설   목차 (총 : 19권)     이전 14권 다음
1923.12
이광수
1
효종 대왕 시절에 삼남에 도적이 치성한 것은 전에도 말하였거니와 삼남 도적 중에도 변산 도적이 가장 세력이 컸습니다. 변산 다음에 가는 것이 지리산, 그 다음이 보은 속리산, 또 그 다음이 양산 통도사, 그 밖에 수없는 도적의 소굴 이 있었습니다. 변산 같은 데는 삼천명이나 웅거하였고, 그 밖에는 혹은 이 천명, 혹은 천명으로부터 몇 백명 몇 십명에 이르기까지 수 없는 둥문이 있어고, 수십인씩 모여 다니는 좀도둑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이 도적들이 혹은 부자를 잡아오고, 혹은 장거리나 촌락을 치고, 심하면 읍내와 감형까지도 부수어서 수령 방백을 혹은 죽이기도 하고 혹은 사로잡기도 하였는데, 그 세력이 어떻게나 창궐하였던지, 나라의 힘으로도 어찌할 길이 없었습니다.
 
2
감영이나 읍내나 장거리에 그 도적의 끈이 없는 데가 없고, 큰 고개나 나루에 염탐군이 없는 데가 없습니다. 조선에 일직 이와 같이 도적이 왕성하였던 것이 없었다 합니다.
 
3
그런데 워낙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부자가 다 없어지고, 게다가 전에는 북도에 연 삼년 흉년이 들고, 다시 삼남에 연 삼년 흉년이 드니, 아무리 도적인들 빼앗아올 데가 있어야 먹지를 아니합니까. 당장 먹을 것이 없으니 들어와 도적 이 되기는 하였지마는, 도적이 되어도 먹을 것이 없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도적들 중에도 여러 패로 갈려서 도적들끼리 서로 도적질을 하게 되었으나 인는 도적들끼리도 도적질을 할 것이 없이 되어서 「이일을 어찌할꼬?」하고 모두 근심 이 되었습니다.
 
4
이러므로 팔도 도적에 도두목 되는 변산의 조 곰보도 하릴 없이 한양의 홍 총각에게로 일부러 찾아갔습니다.
 
5
이 홍 총각이란 이는 어떠한 사람인가. 그는 삼각산 밑에서 사냥하고, 나무해 먹는 총각인데 힘이 많고 지혜가 깊으며, 능히 앞길을 내다본다 하여 도적들 간에 굉장히 이름이 높은 사람이외다. 그래서 팔도 도적이 홍 총각을 도두령으 로 모실 양으로 여러 번 간청도 하고 위협도 하였으나 종시 듣지 아니하고,
 
6
『무슨 어려운 일이 있거든 오라.』
 
7
할 뿐이었습니다.
 
8
홍 총각의 말이 났으니 말이지, 이 완이 이 대장이 한번 이 홍 총각에게 혼이 난 일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좀 하 지요.
 
9
한 번 이 완이 이 대당이 스무남을 살 되었을 적에 호기롭게 토끼 사냥을 나갔더랍니다. 동소문 밖에서부터 토끼 한 놈을 만나서 따라가는 것을 종일을 따라가서 삼각산 어떤 골짜구니에 다다랐습니다. 이 완이 이 대장도 뜻 굳은 남아 라 동행은 다 중로에서 떨어지고,
 
10
『에라 요놈 어디 누가 지나 보자.』
 
11
하고 혼자 어디까지든지 따라간 것입니다. 그러다가 날은 저물고 눈속에 길을 잃었습니다. 그래 「어찌할꼬?」하고 한참 방황하던 차에 문득 바라본 즉, 저쪽에 불이 반짝반짝 하더랍니다. 그래 따라가 본즉, 조그마한 오막살이가 있습니다.
 
12
『주인 계시오?』
 
13
하고 부른즉, 방안으로서,
 
14
『누구신지 모르나 바깥 주인은 어디 출입하시고 안계십니다.』
 
15
하는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이 대장은 문고리를 턱 잡으며,
 
16
『그렇더라도 인제 밥 굶고, 길 잃은 사람이 어디를 간단 말이요. 웃목이라도 좋고, 발치라도 좋으니 하룻밤 자고 가게 하시오.』
 
17
하였습니다.
 
18
『그럴 수 없습니다. 단간방에 바깥 손님을 들일 수가 없으니 다른 데로 갑시오.』
 
19
하고 서릿발 같이 거절을 합니다.
 
20
이 모양으로 한참을 다투다가 마침내 무슨 생각이 났든지 그 여자가 방싯 문을 열며,
 
21
『그러면 들어오셔서 저녁이나 한 술 잡수시고 다른 데로 가십시오.』
 
22
하는데, 이 대장이 보기에 그 여자가 어지간한 미인이더랍니다. 이 대장은 눈 묻은 신발을 벗어 놓고 방에 들어 앉았습니다. 또 그 여자가 보니 참으로 일생에 보지 못한 잘난 사내라, 그 여자도 정신이 황홀해졌다 합니다.
 
23
여자는 부엌에 내려가 불을 몇 거듭 집어넣어 숭늉을 데워가지고는 밥상을 차려 들여다가 이 대장에게 주니, 이 대장은 시장하였던 판이라 주발 위에 주발을 올려 놓은 듯한 한 그릇 밥을 순식간에 다 먹어 버리고 꿀떡꿀떡 숭늉을 들이 킨 뒤에 다시 눈 묻은 신발을 신으며, 그 여자를 보고,
 
24
『밥을 주어 배불리 먹었으니, 그 은혜는 후일에 갚을 날이 있겠소.』
 
25
하고 일아나 나가려 한 즉, 그 여자가 이 대장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26
『보아하니 양반댁 서방님이시니 이 깊은 밤에 어떻게 가시게 하겠습니까. 저는 부뚜막에서 잘 터이니 이 방에서 하룻밤을 쉬어서 가심이 어떠하니이까?』
 
27
하고 만류를 합니다. 그래서 이 대장도 못 견디는 체하고 그 집에서 자는데 닭 울때 쯤 되어 쿵쿵하는 소리가 나더니 마는 문고리를 잡아채며 우레 같은 소리로,
 
28
『문 열어라!』
 
29
하고 외칩니다.
 
30
『아이구! 이 일을 어찌하오? 사흘 후에 온다는 남편이 돌아왔구려.』
 
31
하고 여자가 벌떡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고, 불을 켜고 문을 엽니다.
 
32
이 대장이 이불 밑에서 가만히 바라보니 어떤 시커넘 더덕머리 총각놈이 들어오는데 키는 천장에 닿고, 두 눈에는 붉은 눈길이 납니다. 「이거 죽었구나!」하고 가만히 있노라니 그 총각이 불룩 한 이불을 가리키며,
 
33
『저건 무엇이야?』
 
34
『지나가던 손님이 길을 잃고, 날이 저물어서 찾아왔기에….』
 
35
하고 말끝을 못 맺는 것을 보고, 총각이 한 번 힐끗 그 여자를 보더니마는 이 대강이 덮은 이불을 와락 잡아 벗기며, 눈을 부릅뜨고,
 
36
『이놈! 어떤 놈인데 주인도 없는 집에 들어와서 남의 계집을 끼고 자빠졌단 말이냐. 냉큼 일어나거라.』
 
37
하고 발을 구릅니다. 이 대장은 할 수 없이 부시시하고 눈을 비비며 일아난 즉, 총각이 허리에 찾던 바오라기를 꺼내어 빨가벗은 이 대장을 잡으려는 돼지 모양으로 꽁꽁 둥여 놓더니, 한손으로 반짝 치어들어서 웃목으로 떼구루 굴러 보냅니다. 그리고는 이불을 집어 던지고 아랫목에 턱 앉으며, 곁에서 떨고 있는 여자더러,
 
38
『가서 술 가져 오너라.』
 
39
합니다. 그런즉, 그 여자가 부엌으로 내려가 큰 동이와 큰 노루 다리 하나를 들어다가 총각의 앞에 놓습니다. 총각은 벽에 걸었던 큰 칼을 쭉 뽑아서 노루 다리에다 꾹 박아 놓 더니마는, 두 손으로 동이를 들어 목마른 소가 물 마시듯 꿀떡꿀떡 한참 들이마시고는 번쩍번쩍하는 칼로 노루 다리 고기를 주먹덩이 같이 썩 베어서 안주를 합니다. 술 마시는 소리, 고기 씹는 소리, 씨근씨근하고 숨쉬는 소리, 조용하던 방안이 떠나갈 듯한데 여편네는 벌벌 떨고 섰고, 이 대장은 동여 놓은 돼지 모양으로 웃목에서 눈만 반짝반짝합니다.
 
40
이때에 이 대장이 콩하고, 입에 가래침을 한입 물고서는 술동이를 들이키는 총각의 뺨을 향하고 탁 뱉았습니다. 총각은 깜짝 놀라는 듯이 술동이를 방바닥에 내려놓고 방안을 둘러보다가 웃목에 눈만 반짝이고 있는 이대장을 보고,
 
41
『요놈! 어른이 술을 먹는데 가래침을 왜?』
 
42
하고 노려본즉, 이 대장 말이,
 
43
『글세 이놈아! 곁에다 사람을 두고서 술을 혼자 먹는 그런 용렬한 놈이 있단 말이냐.』
 
44
하고 호령이 추상 같습니다. 총각은 눈을 크게 떠서 이대 장을 이윽히 바라보더니,
 
45
『이놈 보아라! 그래 술을 주면 먹을 테냐?』
 
46
합니다. 이 대장은,
 
47
『남아가 술 한동이를 마다겠느냐.』
 
48
하고 태연 자약한 것을 보고 총각은,
 
49
『허, 고놈 제법이다.』
 
50
하고 벌떡 일어나서 노루 고기 베던 칼로 이 대장을 결박 지었던 줄을 끊고, 발치에 놓였던 옷을 던져 주며,
 
51
『어따 옷 입어라. 그리고 한잔 먹자.』
 
52
하고 이 대장이 옷 입기를 기다립니다.
 
53
이 대장이 옷을 입고 자리에 앉기를 기다려, 그 총각이 술동이를 들어 이 대장에게 주며,
 
54
『자 먹어라.』
 
55
한즉, 이 대장은 서슴치 않고 술 동이를 받아 꿀떡꿀떡 마십니다. 얼마를 마시고 나서 동이를 내려 놓으니까 그제는 총각이 노루 고기 한 점을 칼 끝에 끼어 들고,
 
56
『자 안주 먹어라.』
 
57
합니다. 이 대장은 또 서슴치 않고 입을 내밀어 칼 끝에 꿰인 노루 고기를 듬썩 받아 먹습니다.
 
58
이렇게 얼마를 먹고 나서 총각이 무슨 희한한 일이나 보는 듯이 고개를 끄떡끄떡하며,
 
59
『흥, 놈 제법이다. 성명이 무어냐?』
 
60
하고 이 대장을 보고 물은즉, 이 대장은,
 
61
『내 성명은 이 완이다.』
 
62
합니다.
 
63
『응 네가 이 완이어?』
 
64
하고 총각을 아라차린 듯이 또 한번 고개를 끄떡끄떡하더니,
 
65
『나는 홍 총각이라는 도적놈이다. 내가 너를 오늘 저녁에 꼭 죽여 버리려고 했지마는 너도 인물이어. 그래 살려준다. 내가 한 이십년 후면 포도 대장 하나는 하겟다.』
 
66
하고 또 술을 권합니다. 이 대장은 지금까지도 꼭 이놈의 손에 죽을 줄말 알았는데 홍 총각이 안 죽인단 말을 듣고, 또 홍 총각의 기상이 결코 범연한 사람이 아닌 것을 보고, 일변 감사하기도 하며 일변 공경하는 맘도 나서 일어나 총각에게 절을 하며, 형제의 의를 맺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런즉, 총각도 쾌히 허락하는 듯이 빙그레 웃습니다. 그리고 피차에 나이를 따져 본즉, 홍 총각이 스물다섯, 이 대장이 갓 스물. 이래서 홍 총각이 형이 되고 이 대장이 아우가 되었는데, 그리고 나서는 더욱 피차에 홍이 나서 술을 먹습니다.
 
67
그러나 이 대장이 홍총각의 태도를 엿본즉, 웬일인지 쾌하게 마시고 웃는 중에도 숨길 수 없는 무슨 근심이 있습니다.
 
68
웬일일까. 혹시나 내가 저 여자와 함께 잤기 때문에 그것이 근심이 되는 것이나 아닌가 하고,
 
69
『형님 어째 형님 얼굴에는 무슨 근심의 빛이 있습니까?』
 
70
하고 이 대장이 참다 못하여 물은즉, 홍 총각은 무슨 깊은 비밀이 발각이나 된 듯이 깜짝 놀라며,
 
71
『응, 물을 건 없어. 너도 차차 알지.』
 
72
하고 분명한 대답을 아니합니다. 그러즉, 이 대장은 더욱 궁금증이 나서,
 
73
『제가 아직 나이는 어립니다마는, 어찌 형님의 근심의 연유를 몰라서 될 수 있습니까. 만일 형님께서 숨기고 말씀을 아니하시면, 그것은 이 동생을 아니 믿으시는 것이 아닙니까.』
 
74
하고 어세를 높여 다시 물은즉, 홍 총각은 이윽히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더니, 다시 고개를 때에 본 즉, 두눈에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그것을 보매 이 대장도 자연 비창해져서 잠깐 얼굴을 찡기며,
 
75
『흑 제가 오늘밤에 한 일이 형님을 슬프시게 한 거시나 아닌지…?』
 
76
한 즉, 홍 총각은 눈을 부릅뜨고 언성을 높여,
 
77
『내가 일개 아녀자를 위해서 논물을 흘리듯 싶으냐.』
 
78
하고 이 대장을 노려보더니 다시 화색을 내며,
 
79
『응, 네가 아직 어려 내 얼굴이 근심 있는 것을 본 것만도 기특하다.』
 
80
하고 어디 먼 곳을 바라봅니다. 이 대장은 스스로 부끄러운 생각이 나서, 「내가 왜 그런 소리를 했던고.」하였습니다.
 
81
그도 호기 있는 남아라, 일찍 남에게 져 본 적이 없고, 천하에 자기만큼 잘난 사람이 없는 줄을 생각하였거니와 홍 총각 앞에서는 웬 일인지 자기가 보잘 나위 없는 쪼꼬매져서 마치 캄캄한 밤에 인적도 없는 큰 산 밑에서 혼자 그 큰 산만 바라보고 섰는 것 같습니다. 애써 기운을 내어서 자기를 크게 하려 하였으나 그러하면 그러할수록 더욱 홍 총각은 커지고, 자 기는 작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아니 홍 총각은 나보다 큰 사람이구나.〉 하고 탄복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82
홍 총각은 물끄러미 이 대장을 바라보고 앉아서 이 대장의 말을 듣고 낯빛을 보더니,
 
83
『어찌해 내 얼굴에 근심이 없겠느냐. 가슴에 품은 경륜을 펼 곳이 없구나.』
 
84
하고 눈물을 뚝뚝 떨굽니다.
 
85
『왜 그렇게 근심을 하셔요? 형님과 같은 경륜과 기개를 가졌으면 왜 나아가 임금을 섬겨서 나라 일을 나이하시고 이렇게 산속에 숨어 계십니까?』
 
86
하고 이 대장이 권면하는 듯이 말한 즉, 홍 총각은 팔을 내어 둘러 아니라는 뜻을 보이며,
 
87
『응, 그래 그것은 네가 할 일이지 나 같은 사람은 도적질이나 하고 이 세상을 살아 가다가 언제 한번 할 일이 생기 면 좋고, 안 생기면 말고…자 술이나 먹자.』
 
88
하고 또 모든 것을 다 잊어비린 듯이 술동이를 들어 마시기를 시작합니다.
 
89
이튿날, 아침을 먹고 나서 이 대장이 홍 총각에게 절하고 떠나려 할 때에 홍 총각은 이 대장의 손을 잡으며,
 
90
『한 이십년 지나노라면 다시 만날 때도 있겠지. 부디 나라 일 잘해라.』
 
91
하고 떠나기 어려운 정을 보입니다. 이 대장은,
 
92
『왜 그렇게 말씀하셔요? 가끔 이리로 찾아와 뵈올 터인데 요.』
 
93
한즉, 홍 총각은 껄걸 웃으며,
 
94
『허허, 내가 정처가 있는 사람인가. 또 와야 못 만날터니 후일에 내가 포도 대장이 되거든 만날 날이 있지.』
 
95
합니다. 이 대장도 할 수 없이 한번 더 읍하고, 몇 걸음 나왔을 때에 홍 총각이 다시 손을 들어 이 대장을 부르므로 돌아가 본즉, 홍 총각이 곁에 서 있는 여자를 가리키며,
 
96
『너 이 계집 데리고 가거라. 네가 가만 두었을 리가 있니?』
 
97
합니다.
 
98
『아니올씨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99
하고 사양한즉, 홍 총각은,
 
100
『응, 싫거든 그만두어라.』
 
101
하고 어서 가라는 뜻을 표합니다.
 
102
이 대장이 동구로 나가다가 문뜩 뒤를 돌아본 즉, 홍 총각이 큰 칼을 들어 그 여자의 허리를 썩 배입니다.
 
103
그 후에 이 대장이 몇 번 홍 총각이 있던 곳에 찾아 왔으나 홍 총각은 간 곳이 없었습니다.
 
104
이러한 홍 총각에게 변산 조 곰보가 앞날 일을 물으려고 찾아온 것입니다. 이때에는 벌써 이 대장이 홍 총각의 집에 서 자고 간지가 이십년이 넘었습니다. 홍 총각의 나이도 벌써 마흔 다섯이나 되어서 얼굴에 굵은 주름이 잡혔으나, 여 전히 뺌 가웃이나 되는 노란 꼬리를 달고 삼각산에서 나무를 하고 지냅니다. 조 곰보는 몇 해전부터 들은 조 진사라고 행세를 하게 되어서 좀 나이 많은 사람들은 조 곰보라고 불러야 알고, 좀 젊은 사람은 조 진사라고 해야 압니다. 조 곰보는 홍 총각과 달라서 속속들이 비단으로 감고, 인모망건 대모풍잠에 그 차림차림이 어떤 고가댁 양반 부자같이 보입니다. 게다가 곰보는 곰볼망정 낯빛은 희것다 수염이 성긋성긋 어디로 보든지 쑥 뺀 양반이시외다. 그러나 홍 총각의 오막살이에 들어와서는 그 밑에 이마를 대고 홍 총각이 일어나라고 할 때까지는 감히 머리를 들지 못합니다.
 
105
『그래 어째 왔나?』
 
106
하는 홍 총각의 묻는 말에 조 곰보는 몇 번이나 더 고개를 조아리며,
 
107
『예 장군께서도 통촉하시는 바와 같이 지금 삼남에 삼년이나 연하여 흉년이 들어서 도적은 날로 왕성하오나 도적해 먹을 것도 없어서 도적 도적끼리 서로 도적을 하게 되었삽고, 지금은 도적 도적끼리도 도적해 먹을 것조차 없이 되어서 인제는 제자의 힘으로는 어찌할 길이 없사옵니다. 그래서 산중이 모두 와 의논하옵고, 제자가 장군께 와 뵈옵게 되었사오니 이번에는 팔도 호한들의 원을 들으시와 장군께 오서 팔도 도두령이 되오셔야 하옵제, 그렇지 아니하오면 여러 만명 호한이 모두 돌아갈 길을 알지 못하오니 물리치지 마시옵소서.』
 
108
하고 마치 축문이나 외우는 듯이 떨리는 목소리로 간절히 청을 합니다.
 
109
『관병(官兵)의 형세능 어떤가?』
 
110
하고 홍 총각이 다시 물은 즉, 조 진사가 또 한 번 이마를 조아리며,
 
111
『예, 이 완이 이 대장이 새로 포도 대장이 되어서 삼남의 도적을 소탕한다 하오나 그까짓 관병은 걱정할 것이 없사옵고, 먹을 것이 걱정이옵니다.』
 
112
합니다. 조 진사의 말을 듣고, 홍 총각은 이윽고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문득 고개를 들며,
 
113
『한 사람이 꼭 있기는 있지마는….』
 
114
하는 것을 보고 조 진사는,
 
115
『아니올씨다. 이번에 꼭 장군께서 우리 두령이 되서야 하옵지, 그렇지 아니하옵고는 어찌할 도리가 없사옵니다.』
 
116
합니다. 홍 총각은 길게 한숨을 쉬며,
 
117
『백성들이 벌어 먹으려도 벌어 먹을 길이 없고, 도적질을 하며 먹으려도 도적질할 것도 없다 하면, 이 백성들을 어떻게 살리나.』
 
118
하고 혼자 한탄하더니, 조 곰보를 보고,
 
119
『지금에 수 만명 사람을 구해낼 사람은 허생원 하나 밖에 없지.』
 
120
하고 스르르 눈을 감습니다. 홍 총각이 어찌하여 허생원을 알았나.
 
121
독자 여러분은 안성서 허생이 도적맞은 사실을 기억하시리라. 그때 그 도적들 중에 허생의 집에 돈 보내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적이 홍 총각의 부하 중의 한 명인데 홍 총각은 그 도적에게서 허생원의 말을 듣고 부터는 맘으로 항상 허생 원을 흠모하여 달마다 허생원 집에 양식과 용돈을 보내던 터입니다.
 
122
조 진사가 아무리 간청을 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오직 허 생원을 청할 것만 재삼 말한 끝에,
 
123
『그 어른의 허락을 받기는 어려울 듯하나 그만 꾀야 너희인들 없겠느냐. 힘껏 해보아라.』
 
124
하고는 마당에 놓았던 지게를 지고, 낫을 둘러메고, 휘파람을 불며 산으로 올라갑니다.
 
125
조 곰보는 하릴없이 그 길로 변산으로 돌아와 도적들에게 홍 총각의 말을 전하고, 그 날로 수백명 사람을 놓아 허생원을 찾아올 것을 명하였습니다.
 
126
이 명령을 받은 도적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혹은 배 들어오는 포구에 뱃사람 모양을 차리고, 혹은 고개턱 주막집에 머슴 모양을 차리고, 혹은 나룻목에 나룻배 사공이 되어 때뭇은 옷입고, 키 작고, 헌 망건에 헌 갓을 쓰고, 미투리 끌고, 콧물 흘리는 선비만 찾는데 그 비슷한 사람만 번뜻 보이면 붙들어서는 수건으로 눈을 동여매고, 교군에 담아서는 빙글 빙글 돌리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변산 산채로 끌어 들여갑니다. 그러다 붙들어다가 심문을 하여본 즉, 혹은 촌학구 로 술 얻어 먹으러 가다가 붙들려 온 놈도 있고, 혹은 눈뜬 판수로 다른 동네에 경 읽어 주려고 가다가 붙들려 온 놈도 있고, 혹은 노름판에서 붕어가 되어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붙들려 온 놈도 있고, 대체 형형색색인데, 정말 허생원은 좀체로 찾아 내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술 먹으러 가던 놈은 술 한잔 먹여서 내어 쫓고, 경 읽으러 가던 놈은 옥추경 한번 읽히어 내어 쫓고, 노름판에 오던 놈은 따귀 한 개 씩 붙여서 쫓고, 이 모양으로 모두 오던 모양으로 수건으로 눈을 동여 매어서는 빙글빙글 돌리고, 교군에 태워 끌고 다니다가 처음 잡아오던 곳에 갔다가 내어던졌습니다.
 
127
이러한 때에 정말 허생이 돌이를 데리고, 암행어사 모양으로 민정을 살피며 전라좌도를 지나 갈재를 넘어 전라우도를 거쳐 충청도로 향하는 길에 태인읍을 바라고 들어오다가 길가에서 지키고 있던 도적들에게 붙들려서 다른 사람 모양으로 수건으로 눈을 동이고 교군에 담겨서 빙글빙글 돌려서 변산으로 끌려갔습니다. 돌이가 한참은 반항을 하였으나 마침내 여러 놈에게 붙들려서 역시 수건으로 눈을 동이어서 허생과 같이 끌려갔습니다.
 
128
대체 언제나 정말 허생원을 붙들어 오나 하고 날마다 줄어 들어가는 양식 그릇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내밀어 기다리던 차에 붙들여 온 화상을 보니 그만 또 낙망이 됩니다. 이것은 또 어디서 어린 아이들 종아리나 때리고, 하늘천 따지나 가르치다가 막거리잔이나 얻어 먹을 양으로 붙들려 가던 길인고 하였습니다. 땟국이 쪼르르 흐르고, 파란 콧물을 두 줄로 흘리는 것이 허생원의 상모와 맞기는 맞지마는 설마 그렇게 눈빠지던 허생원이 요다지도 못났으랴 한 것입니다.
 
129
허생은 세 번이나 심문을 다앟고, 마침내 정말 허생인 듯 하다 하여 조 곰보의 방으로 인도함이 되었습니다.
 
130
본즉, 절 법당의 부처님을 한편 옆으로 집어 치이고, 부처님 앉았던 자리에 부처님 앞에 깔았던 비단 방석 여럿을 겹쳐 깔고, 그 위에 이상 야릇한 값옷을 입고 투구를 쓴 조 곰보가 왼손에 붉은 기를 잡고 좌정을 하였고, 그앞에는 마당과 방안에 칼과 창과 깃발을 든 도적들이 옹위를 하였는데 그 위엄의 무서움이 실로 비길 데가 없습니다. 허생원을 인도하는 도적들이 법당 계하에 이르러 고개를 숙이고,
 
131
『대왕마마 허생인 듯한 자를 잡아 대령하였습니다.』
 
132
한즉, 부처님 자리에 앉았던 대왕이,
 
133
『어디 이리로 불러 들여라.』
 
134
합니다. 그런즉, 계상에와 방안에 있던 무리들이 일제히,
 
135
『웨이─이──』
 
136
하고 대답하는 양이 심히 엄숙합니다.
 
137
허생이 도적놈들에게 팔을 끌려 법당으로 들어가니 대왕이란 자가 위엄 있는 목소리로,
 
138
『그래 이 백성이 허생원이란 말이냐?』
 
139
하고 허생원의 콧물 흐르는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한 번 더 물은즉, 허생원을 붙들어 들어가 놈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히며,
 
140
『그러하옵니다. 대왕마마 이 백성이 차림차림이 대왕마마옵서 말씀하신 바와 여합부절하고, 또 허생원이 데리고 다닌다는 곰보놈도 저 밖에 대령하였사오니 이 백성이 허생일시 분명하옵니다.』
 
141
하고 아룁니다. 말이 끝나자 대왕이
 
142
『그렇거든 네 곰보놈을 불러 들여라.』
 
143
하고 명령을 내린 즉, 아까 모양으로 계상 계하에 벌여 섰던 수십명 도적의 무리가 일제히 허리를 굽히며,
 
144
『웨이──이──』
 
145
합니다. 이윽고 서너 명 도적이 잔뜩 결박을 지은 돌이를 당그렇게 들고 들어와서 허생의 옆에 내려 놓으니 돌이가 소리를 질러,
 
146
『오 이놈! 네가 이 도적놈들의 두목인가 보구나. 이놈 네 듣거라. 우리 생원님께서 어떠하신 양반이신 줄 알고, 이렇게 버릇없이 수건으로 눈을 가리워 너희놈들 소굴로 모신단 말이냐.』
 
147
하고 야료를 합니다. 대왕이 돌이의 얼굴과 그 야료하는 양을 보더니 비로소 이것이 허생원인 줄 알아차린 모양으로 껑청 뛰어 마룻바닥에 내려와 허생의 발 앞에 엎드리며,
 
148
『대왕마마 저희 무리가 누구신 줄도 모르옵고, 이렇게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아니하은 죄를 범하는 것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저 대왕마마를 하루라도 바삐 뵈올 양으로 그 러한 것이오니 만만 용서하시옵소서.』
 
149
하고 마룻바닥이 쿵쿵 울리도록 이마를 조아립니다. 허생원도 불의의 인에 잠깐 놀랐으나 다시 정신을 진정하여,
 
150
『그래 무슨 일로 나를 분들어 왔오?』
 
151
하고 물은 즉, 그제야 조 곰보가 당에 엎딘 대로 고개를 들며,
 
152
『예, 저희 무리는 변산 도적이옵고, 소인은 팔도 도적의 도두목 체천대왕 조 곰보라 하옵니다. 대왕께서도 통촉하시는 바와 같이 조선에 삼년은 북도, 삼년은 삼남 도합 육년 흉년이 들었사와서 농사를 지어 먹던 백성들이 굶어 죽을 지경을 당하오나 부자들이 가난한 백성을 도울 줄을 모르옵고, 또 조정이 어찌 할 도리를 하지 아니하옵는지라. 소인의 무리가 하늘을 대신하여 있는 놈의 것을 빼앗아다가 없는 이를 구제하기를 삼년을 하였사오나 손바닥만한 조선에 인제는 도적할 곳도 없어서 도적 도적끼리 서로 도적을 하옵다가 그것조차도 못하게 되었사옵고, 조정에서는 관병을 보내어 장차 도적의 무리를 소창한다하오나 관병은 두려워할 것이 없사오나 수만명 도적을 먹일 길이 바이 없사와서 오직 대왕님만 기다린 것이오니 대왕마마께옵서는 저희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와 오늘부터 저희 무리의 왕이 되시옵고, 저희 무리에게 살 길을 접지하시옵소서.』
 
153
하고는 또 마룻바닥이 쿵쿵 울리도록 이마를 수없이 조아립니다. 그런적, 법당 안에 있던 무리와 재상 계하에 둘러섰던 무리들도 일제히 꿇어 엎디어 이마를 조아립니다.
 
154
이 광경을 보고 놀란 것은 돌이외다. 혹 생원님을 해하려는 것이나 아닌가 하고 소리를 지르고 발악을 하였으나 이제 본즉, 그런 것이 아니요, 역시 자기의 생원님을 사모하는데서 나온 것이라 결박을 진대로 좋아서 빙그레 웃었습니다. 그리고 생원님을 치어다보며, 어서 무슨 시원한 말을 하여 주라는 듯이 눈을 끔적끔적하였습니다. 허생은 전후 좌우에 부복한 무리를 한번 둘러보더니 발밑에 엎드린 조 곰보를 붙들어 일으키어 곁에 놓인 등상에 걸터앉게 하고 마당에 엎드린 무리들도 다 일어나기를 명한 후에 입을 열어,
 
155
『그만하면 나를 붙들어 온 뜻을 알았거니와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오?』
 
156
하고 물었습니다. 그런즉, 계상에 있던 사람 하나이 턱나서서 허리를 굽히며,
 
157
『예, 그저 이 무리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옵소서.』
 
158
한즉, 다른 무리들도 일제히,
 
159
『먹을 것을 주시옵소서.』
 
160
합니다. 허생은 다시,
 
161
『그러면 그대네들이 도적이 된 것은 먹을 것이 없음인가?』
 
162
한즉, 그 사람이 또,
 
163
『먹을 것이 있을진대 왜 도적이 되겠습니까?』
 
164
합니다. 허생은 다시,
 
165
『본즉, 그대네는 나이 다 삼십이 넘고, 사십이 가까웠으니 그 동안에 무엇을 먹고 살았는가?』
 
166
한즉, 또 한 사람이 턱 나서서 허리를 굽히며,
 
167
『대왕마마 소인이 손을 봅시오. 이렇게 손이 굳은살이 박혔습니다. 소인의 어깨를 봅시오. 이렇게 어깨에 굳은 살이 박혔습니다. 사십 평생에 전신이 굳은살이 되도록 온갖 일을 다하였건마는 한 번도 입에 맞는 것을 먹어 본 일이 없고, 배고픈 설움을 안 당해 본 날이 없습니다. 그러하오나 다른 팔자 좋은 사람들을 보오면 자고 나서 다시 잠들기까지 술이나 마시고, 노래나 부르건마는 금의옥식에 고대광실에 처첩하고 거드럭거리니 에라 이놈의 세상에 가난뱅이로 태어난 것만 잘못이요, 이왕 가난뱅이로 태어났으면, 땀 흘리고 일하는 것만 잘못이다. 빌어먹을 것, 저 놀고 먹는 놈 들의 것을 좀 훔쳐다가 나도 좀 편안히 먹고 입고 살아 보자. 그래서 도적이 된 것입니다.』
 
168
합니다. 그 말에 허생은,
 
169
『그래 도적이 되어서는 살기가 편하던가?』
 
170
한즉, 그 사람이 다시 허리를 굽히며,
 
171
『일할 때보다는 좋았습니다. 그래도 이따금 맛난 것을 먹어도 보고, 부드러운 옷을 입어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관병에게 쫓겨 산꼭대기와 풀숲에서 밤을 새우니 그 고생이 비할 데 없고, 한 번 붙들리면 생명이 끊어지니 그 무서움이 이를 나위가 없습니다. 게다가 요새에는 도적해 올 곳도 없어 이렇게 변산 구석에서 말라 죽게 되었사오니 그저 대왕님께서 살려 주시옵소서!』
 
172
하고 눈으로는 허생원을 치어다보며 합장하고, 또 허리를 굽힙니다. 그것을 보고는 둘러섰던 무리들도 일제히 허리를 굽히고 합장을 하며, 허생원을 치어다 봅니다.
 
173
허생은 이 광경을 보고 깊이 감동이 되어 한참 눈을감고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조 곰보를 바라보며,
 
174
『그러면 팔도에 모든 도적이 다 먹을 것이 없어서 도적인가?』
 
175
하고 물었습니다. 그런적, 조 곰보도 벌떡 일어나 허리를 굽히며,
 
176
『예, 먹을 것이 있으면 누가 즐겨서 도적이 되겠습니까? 게딱지만한 오막살이라도 쓰고 살 집이 있고, 추처악첩이라도 같이 아내가 있고, 눈감은 아들딸이 있어서 귀염을 주고, 재롱을 받고, 조반 석죽이라도 아침 저녁 끓여 먹을 것만 있으면, 누가 즐겨서 도적이 되겠습니까? 그러하오나 세상에는 이만 것을 못가진 이가 많아서 손바닥만한 조선 팔도에는 예로부터 수만명씩은 있었습니다. 그러하와서 삼한 때 도 있다가 없어지고, 고구려, 신라, 백제도 일어났다 망하옵고, 송도 왕씨 오백년도 꿈같이 지나갔사와도 조선 팔도에 도적의 나라는 일찍 없어져 본 일이 없습니다.』
 
177
하고 말이 더욱 신이 나는 듯이 조 곰보가 침을 꿀떡 삼킵니다.
 
178
조 곰보가 침을 삼키더니마는 말을 이어서,
 
179
『그러하와서 조선에는 팔도 도적의 도두령이 있사옵고, 도에는 도두목이 있사옵고, 골에는 골두목이 있압고, 서울에는 서울의 두목이 있사와서, 도두령이 한 번 명을 내리우면 전국 수만명 도적이 일제히 응하였습니다. 이리하와서 아무러한 성군이 나시와도 우리 도적의 나라는 어찌하지 못하시고, 아무리 포악한 임군이 나시와도, 우리 도적의 나라는 어찌하지 못하왔습니다. 그리하오나 우리 도적의 나라에도 이렇게 전하는 말씀이 있사습니다. 몇 백년 후인지 몇 천년 후 인지는 알수 없사오나 도적의 무리가 도적질을 아니하고 살 날이 오리라고 하옵니다. 그러하오나 그날이 언제나 올는지 도적질이라도 해서 먹고 살 날이나 왔으면 좋겠습니다.』
 
180
합니다. 허생은 조 곰보의 말을 유심히 듣더니 길게 한 숨을 쉬고, 여러 무리를 바라보며,
 
181
『그러면 그대네들은 돈이 얼마씩이나 있으면 걱정이 없이 일생을 살아 가겠는가?』
 
182
하고 물었습니다. 그런즉 사람들 중에서 한 놈이 나서며,
 
183
『돈 백냥만 있으면 위선 살겠사옵고, 천냥만 있으면, 일생을 남부럽지 않게 살겠습니다.』
 
184
하고 허리를 굽힙니다. 그런즉 다른 놈들도 그렇다는 뜻으로 일제히 허리들을 굽힙니다. 허생은 다시,
 
185
『그러면 돈 천 냥씩만 있으면 도적질도 그만두고 다른 소원도 없는가?』
 
186
한즉, 그 사람이 또 한번 허리를 굽힙니다.
 
187
『소인의 무리가 백년을 살면 어디서 돈 천냥을 얻어 봅니까. 백년은커녕 삼대 사대를 몸뚱이가 굳은살 투성이가 되어 뼈다귀가 휘도록 일을 한들 어디서 천냥 돈을 만져나 보겠사오리까. 천 냥 부자는 하늘이 안다 하오니 조선 팔도에 돈 천냥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되겠사옵니까. 돈 천냥만 있으면 집도 지을 수 있고, 여편네도 얻을 수 있사옵고, 논밭도 사고, 나무갓도 사고, 마소도 사서, 부자 노릇하고, 살 수 있사온데, 돈 천냥만 있사오면 무엇이 좋다고 도적놈이 되어며, 또 다시 무슨 소원이 있사오리까.』
 
188
합니다. 그런즉,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전보다도 더 많이 허리를 굽히며,
 
189
『천냥! 천냥! 아이구 돈 천냥이 어디야? 돈 천냥만 있으면 삼정승 육판선들 부러워하리. 아이구! 돈 천냥을 꿈에라도 한번 만져 보았으면.』
 
190
하고 모두들 시장한 때에 보기만 하고 먹지 못할 맛난 음 식을 대한 듯이 입들을 우물거리며 침들을 꿀떡꿀떡 삼킵니다.
 
191
해는 석양이 가까웠는데 바람에 불려 떨어지는 금빛 같은 나무 잎사귀들이 우수수 하고 법당 앞에 날아와 둘러선 사람들의 얼굴과 머리를 때리고는 펄렁펄렁 절반은 날고, 절반은 굴러 사람들의 발 밑으로 빙빙 돌아갑니다. 돈에 굶주린 도적들의 눈에는 그것이 다 돈과 같이 보입니다.
 
192
허생은 여러 도적들이 애원하는 말을 다 듣더니, 조 곰보를 보고 한 마다 할 말이 있으니 산중에 있는 모든 도적을 부르라 하였습니다. 그런즉 조 곰보가 계상에 썩나서며,
 
193
『대왕 마마께옵서 산주에 있는 모든 무리들 부르라 하옵 신다.』
 
194
하고 호령을 합니다.
 
195
『웨──이──』
 
196
하고 사람들 중에서 몇몇이 껑충껑충 뛰어 나가더니 얼마 아니하여 우하고 이 구석 저 구석으로 물밑 듯 밀려들어오는데, 대체 그 수효가 얼마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늙은이, 젊은이, 키 큰놈, 작은 놈 뚱둥이, 말라깽이, 눈 큰놈, 눈 가는 놈, 순해 보이는 놈, 심술궂어 보이는 놈, 마치 오백 나한을 여러 패를 모아다가 한마당에 세워 놓은 것 같습니다.
 
197
처음에는 와글와글 시골 장거리에서 나는 소리가 나더니 차차 조용해지고, 사람들의 머리는 모두 법당 문을 향하였습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지 나중에서 터덜거리고 뛰어 들어와서 사람들 틈에 끼어서는 이도 있고,
 
198
『왜 남의 얶에 매어 달리느냐?』
 
199
『왜 남의 발을 밟느냐?』
 
200
하고 짜증을 내며 눈을 흘기는 이도 있고, 서로 제가 아는 듯이 곁에 사람의 귀에다 대고 무엇을 수근거리는 이도 있습니다.
 
201
무리가 다 모인 것을 보고 조 곰보가 영기를 들고 나서며,
 
202
『하늘이 우리를 버리시지 아니하시와 우리에게 새로 대왕을 보내시었으니, 오늘부터 너희 무리는 다 여기 계오신 대왕 마마의 명에 복종하라.』
 
203
에 꿇어 엎디며,
 
204
『웨──이──』
 
205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리고는 조 곰보가 허생의 앞에 꿇어 앉아 손에 들었던 붉은 영기를 허생에게 두 손으로 받들어 드립니다. 그런즉, 허생은 잠깐 주저하는 듯하더니, 그 영기를 받아 듭니다. 허생이 영기를 받아 드는 것을 보고, 곁에 섰던 무리가 사오인이 허생을 반짝 치어들어 가만가만 히 모시어다가 아까 조 곰보가 앉았던 곳에 올려 앉힙니다.
 
206
허생을 올려 놓는 바람에 그 곁에 치어 놓은 금부처가 잠깐 흔들리며, 괴로운 듯이 덜커덕 덜커덕 하는 소리가 납니다.
 
207
허생은 올려 앉히는 대로 부처님 자리에 올라 앉았으나, 모처럼 여럿이 애써 올려 앉힌 것을 당장 뛰어 내리기도 마안 적어서 우두커니 앉았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적, 법당 안에 있는 자들과 마당에 있는 자들이 엎디었다가는 일어나고, 또 엎디었다가는 일어나고, 아마 열 번은 절을 하는 모양인데 돌이만이 법당 문 곁에 서서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느라고 두손으로 입을 가리우고 있습니다.
 
208
허생이 생각해 보니 아무리 자기들 부처님 자리에 오려 앉힌 정성은 고맙다 하더라도 거기 그리고 앉아서는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으므로 맻 번 들먹들먹하다가,
 
209
『내가 말할 것이 있노라.』
 
210
하고 그 작은 키가 그 높은 자리에서 가까스로 기어 내려 왔습니다. 허생이 기어 내려오는 것을 보고 법당 안에 굴복하였던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허생을 옹위합니다. 허생은 정말 군왕 모양으로 법당 층계 위에 썩 나서며,
 
211
『너희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212
하였습니다. 땟국과 푸른 콧물이 흐르는 생원님의 목소리는 꽤 우렁찹니다.
 
213
『예 돈이 원이 올씨다.』
 
214
하고 수천명 무리가 일제히 외치고, 일제히 허리를 굽힙니다.
 
215
『그렇걸랑 구월 보름사리에 산 너머 바닷가로 오라. 너희 들 힘껏 돈을 지워 주마.』
 
216
하였습니다. 그런 즉, 사람들은 일변 기쁘기도 하였으나 다시 생각해 본 즉 아무러면, 〈저 각정이 꼴에 돈이 웬 돈이랴.〉하여 우습기도 하고 근심도 됩니다. 그 말을 하고 나서 허생은 구월 보름날 산 너머 바닷가를 기약하고 돌이를 데리고 어디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217
구월 십오일이 되었습니다. 변산 도적 사천여 명은 아침 밥도 먹는 듯 마는 듯 벌떼 모양으로 변산을 넘어 산 너머 바닷가로 모여 갔습니다. 아직 밀물이 들어오지를 아니하고, 저 덜러 앞곬에서 오고고 하고 밀물 시작하는 소리가 들릴 뿐입니다. 나릉 맑아 하늘에 구름한점 없고, 산산한 높새가 밀물을 따라 솔솔 불어 들어옵니다.
 
218
도적들은 혹은 커단 지게를 벗어 놓고, 혹은 튼튼한 짐바 뭉텅이를 둘러매고, 혹은 할 말이나 돌만한 전대로 허리를 둥여매고, 바닷가 모래판에 죽 늘어 앉아서 어떤 놈은 바다를 바라보고, 어떤 놈은 갈게를 잡으러 다니고, 어떤 놈들은 고누를 두고, 또 어떤 놈들은 씨름을 하고, 어떤 놈은 「저 건너 갈미봉」을 뽑고, 대체 형형색색으로 움직이고, 떠들고 어서어서 저놈의 밀물이 출렁발 밑에까지 들어오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219
은빛같이 하얀 밀물은 차차 우수수 하는 소리를 높이며, 한 걸음씩 밀어 들어오다가 오정이 막 지나자 철썩철썩 하고 도적들이 늘어선 바닷가의 굴조개 붙은 바위를 치기 시작합니다.
 
220
『물 들어왔다! 물 들어왔다! 구월 보름사리 물이 들어왔구나!』
 
221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바다로 향하였을 것이 아닙니까. 갈매기 하나가 펄펄 날아도, 옳지! 대왕님 배나 아닌가, 물결 하나이 고개를 들어도 대왕님 배나 아닌가.
 
222
『대왕님 배가 언젠나 오나, 언제나 오나?』
 
223
『어찌해 아직도 배가 안 들어올까?』
 
224
『내가 무어랬어? 돈이 무슨 돈이어?』
 
225
이런 소리를 하며, 사람들은 배를 기다리기에 지쳐서 하품을 하면서 수건에 싸 가지고 왔던 점심들을 먹고, 앉았노라니 어디서,
 
226
『배 온다! 배 온다!』
 
227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바다를 바라본 즉, 과연 수십척 배가 가을 달밤에 남방을 날아오는 기러기 떼 모양으로 서로 꼬리를 물고, 붉은 돛에 통통히 바람을 알배어 훌훌 날아듭니다.
 
228
『야 정말 배가 들어오는구나!』
 
229
하고 발을 동동 구르는 이도 있고,
 
230
『저 모두 돈 배야? 저게 모두 돈이야? 아니 저게 저게?』
 
231
하고 기쁨에 목이 메이서 말을 못 이루는 이도 있고,
 
232
『얼씨구나! 절씨구나!』
 
233
하고 두 팔을 들어 얼씬얼씬 춤을 추는 이도 있고, 또 어떤 이는 손가락으로 저 앞에 점점 커 가는 배를 가리켜가며,
 
234
『하나, 둘, 셋, 넷….』
 
235
하고 소리를 지르는 이도 있고, 그러면 다른 사람이 또 역시 턱을 끄덕끄덕하며, 입 속으로,
 
236
『하나, 둘.』
 
237
하고 배 수효를 세다가 큰소리로,
 
238
『아니어! 스물 둘이어!』
 
239
하고 더 좋아하는 이도 있고, 그 중에 하 사람은 무슨 소린지 알지도 못할 소리를 미친 사람 모양으로 지절거리며, 누구를 가슴에다 안으려는 듯이 두 팔을 앞으로 쑥내밀고, 바닷속으로 덩벙덤벙 뛰어 들어가다가 그만 욱밀어 들어오는 큰 물결에 훌쳐 넘어져서 푸푸하고, 입으로 푸푸하고, 거품을 뿜으며, 「하하」웃기도 하고, 「돈! 돈!」하기도 하고, 혀끝이 잘 안 돌아가는 소리로.
 
240
『얼씨구나! 절씨구나!』
 
241
하기도 합니다. 이 친구가 그만 돈 배를 바라보기만 하고도 너무나 좋아서 미쳐 버렸습니다.
 
242
이렇게 수천명 도적들이, 오작복작하고 뛰고, 떠들고 하는 동안에 그래도 조 곰보는 어른스럽게 저쪽 사람들 없는 바위 위에 우두커니 서서 바다 위로 점점 가까이 들어오는 배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243
『야 사람이 보인다!』
 
244
하고 누가 소리를 지릅니다.
 
245
『옳지! 올지! 저기 저 셋째 뱃머리에 선 것이 허생원이다.』
 
246
하고 웬 통통한, 얼굴 똥그란 도적이 깡충깡충 뛰며 소리를 지른 즉, 곁에 섰던 얼굴 희멀끔한 친구가 주먹으로 그 통통한 친구의 볼따귀를 쿡 찌르며,
 
247
『쉬!』
 
248
하고 눈을 부릅뜹니다. 깜짝 놀란 통통한 친구가 처음에는 발끈 골을 내더니, 자기의 허물을 알아차린 듯이 똥그란 얼굴이 발개지며, 희멀끔한 친구에게 주어 질린 뺨을 한 손으 로 쓸어만지면서다.
 
249
『아 저기 서신 이가 우리 대왕님이시다.』
 
250
하고 또 한 번 소리를 지르고는 찬성을 구하는 듯이 희멀끔한 친구를 치어다봅니다. 희멀끔한 친구가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웃는 것을 보고야 안심을 하는 모양인데 꽤 순실한 백성입니다.
 
251
대체 도적들 중에 수십년도 도적으로 닮아져서 상판과 눈깔에 도적같은 도적스러운 험상과 우락부락과 독살이 박힌 놈도 있고, 천생 얼굴이 시커멓고 눈이 움쑥 들어가서 어린 애들이 보기만 하면 으아하고 달아날 만한 녀석들도 있지마는, 대개는 순량해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252
어디 이 세상에 나올 때에 이마빼기에 도적도자 새겨붙이고 나온 사람이 있습니까. 모두 처음 나올 때에야 금자둥이 옥자둥이 수부귀나 남자 하고 하늘 담에 갑시는 상감님은 한 분밖에 안 계시니까, 그 자리를 엿보다가 한번 아차 실수하면 역적 누명을 뒤집어 쓰고, 오사 효수하여 몸뚱이가 까마귀 밥이 될 것이라, 좀체로 생각할 것이 아니지마는 될 수 만 있으면 삼정승 육판서까지는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이상야릇하게 생겨서 그만 도적의 누명을 써 가면서야 겨우 얻어 먹게 된 것입니다.
 
253
배가 가까워졌읍니다. 하나씩 돛을 내리우고 닻을 내리우는데 멍에 밑까지 물에 잠긴 배들은 점잖게 흔들흔들 물결을 좇아 오르내리며, 머리에 수건 동여맨 뱃사람들은
 
254
『「어야드야』
 
255
하고 기운차게 소리를 지릅니다.
 
256
세쨋배가 돛을 스르르 내리우고 들어와 닻을 때에 뱃머리에 허생이 썩 나서는 것을 보고는 도적들은 일제히 땅에 엎드려,
 
257
『대왕마마 만세.』
 
258
를 부릅니다. 조 곰보가 먼저 허생의 배에 뛰어 올라 허생의 발밑에 엎드리니 허생이 조 곰보를 붙들어 일으키며,
 
259
『이 스무 척 배에 실은 것이 모두 돈이니 저 무리더러 맘대로 힘대로 가져가게 하라.』
 
260
하였습니다. 조 곰보는 한번 이마를 조아리고 일어나 뱃머리에 썩 나서며, 팔을 두르고 소리를 높여,
 
261
『이 스무 척 배에 실은 것이 모두 돈이니 너희들 맘껏 저가랍신다.』
 
262
한즉, 지금까지 조용하던 바닷가가 금시에 오고고 설벌의 둥지를 찔러 놓은 것 같이 되며, 사람들이 신은 언제 벗으랴. 바지가랑이는 언제 걷으랴. 나도 나도 하고 물속으로 뛰어 들어 파선당한 사람들 모양으로 배에 매달리는 그 혼잡한 모양은 나같이 말이 졸한 사람으로는 이루 형언할 길이 없습니다.
 
263
앞선 놈은 배에 매달리고, 뒤선 놈은 앞선 놈의 어깨에 매어 달리고, 또 그 뒤에 선 놈은 뱃삼에 매어 달린 놈의 다리에 매어 달리고, 또 어떤 약은 놈은 옷도 입은 채로 허우적거리며 헤엄을 쳐서 닻줄로 기어오르고, 어떤 놈은 그만 배에서 떨어져서 뿌뿌 물을 뿜고…대체 난리라니 이런 난리가 어디 있습니까.
 
264
어찌어찌하여 배에 올라간 놈은 눈앞에 쌓인 물이 질질 흐르는 돈 더미를 보고 떡 벌어진 입이 한참은 닫혀질 줄을 모르다가 갑자기 달겨들어서 돈 더미를 껴안으려 하나 약한 팔이 대체 얼마나 안을 수가 있나, 가까스로 짊어지고, 일어 난다는 것이 쾌 장사라야 백냥 그렇지 아니하면 팔십 냥이나 칠십냥 좀 약한 놈은 불과 오륙십냥을 지고도 끙끙하고 배에서 내려갈 수가 없어서 쩔쩔매고 어름어름합니다. 이러하기를 해질 때까지나 하여 겨우 모든 무리가 돈짐을 짊어 놓았습니다. 옷들이 젖었건마는 추은 줄이나 알았을까. 저녁 때가 되었건마는 배고픈 줄이나 알았을까.
 
265
『돈! 돈! 돈이로구나! 돈이 많구나! 그 좋은 돈이 암만이라도 있구나! 허리에 둘러 띠고, 등에 짊어지고, 주머니가 터져라 하고 집어 넣고, 두 손에 움키어 쥐고, 입에도 한 입 물고, 그래도 끝이 없구나. 더 집어 넣을 곳이 없구나. 더 짊어질 힘이 없구나!』
 
266
아니나 다를까 그 중에 욕심 사나운 녀석은 너무 많이 돈을 졌다가 바다 속에 빠져 들어가기도 하고, 어떤 꾀 많은 놈은 한 짐씩 한짐씩 저다가는 바위 틈에도 감추고 모래를 파고 묻기도 하고, 어떤 놈은 너무도 돈은 욕심이 나고 지고 갈 힘은 없어서 돈 더미에 넓죽 엎디어서 엉엉 울기도 하고, 대체 무엇이 다 없었급니까. 별별장관이 다 많다가 마침내 겨우 돈 백 냥씩이나 걸머지고 모래판에 죽 늘어 앉은 것입니다. 자 늘어안고 보니 바닷물에 젖은 옷이 끈끈도 하고 춥기도 하고, 찬밥 한덩어리 먹은 배가 시장층도 납니다.
 
267
『아이구 배고파!』
 
268
『아이구 추워!』
 
269
『아이구 떨리어?』
 
270
이 모양으로 한 사람씩 한 사람 씩 돈짐을 배게 삼아 푹푹 쓰러지기를 시작하는데, 그 중에 좀 기운이 나은 사람들이 돈짐을 지고 시장한 배를 허리때 끈올 힘껏 조르고, 엉금엉금 기어서 산으로 오르기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올라갈 기운이 있나, 더러는 삼십보에 쓰러지고, 더러는 이십보에 쓰러지고, 마치 올라가다가 거위지처 못 오르는 누에들 모양으로 석양 산비탈에 허연 것이 꿈지럭 꿈지럭합니다.
 
271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공기는 점점 차가는데, 도적들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돈짐을 껴안고 덜덜 떨고만 있습니다.
 
272
이 광경을 보다 못하여 조 곰보가 허생 앞에 꿇어 엎디어,
 
273
『대왕 마마, 점 무리들이 먹을 것이 없고, 갈아 입을 마른 옷이 없어서 죽을 지경이오니 어찌하오리까?』
 
274
하고 이마를 조아립니다. 허생은 조 곰보를 바라보고 빙그레 웃으며,
 
275
『그 무리들이 돈이 소원이라기로 돈을 주지 아니하였는 가. 그것이 부족하거든 배에 있는 돈을 맘대로 가져가게 하는 것이 좋지 아니한가.』
 
276
합니다. 조 곰보는 한 개 얻어 맞은 사람 모양으로 멍하니 고개를 들고 있더니,
 
277
『아무리 돈이 있사온들 밥과 옷이 없으면 어떻게 살리이까. 불쌍한 저 무리에게 위선 밥과 옷을 주시옵소서.』
 
278
합니다. 허생은 돌이를 불러 의복과 음식을 내어줄 것을 명하였습니다. 돌이가 허생의 분부를 듣고 다른 배로 뛰어 갔더니 그 배에서 저녁을 먹던 뱃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커단 짐짝을 굴려 내리며,
 
279
『다들 와서 옷을 갈아입어라.』
 
280
하고 외칩니다. 그런 즉, 지금까지 덜덜 떨고 있던 도적들이 욱 일어러나서 돈 짐을 집어 내어 던지고, 달아와서 짐짝을 얽은 노끈을 입으로 물어 뜯고, 새 옷을 갈아입고는 미처 허리띠와 대님도 묶을 새 없이 각각 제 돈 짐 있는데로 돌아 옵니다. 마치 그 동안에 어느 놈이 져 가지나 않는가 하는 것 같습니다. 다들 그 많은 짐 속에서 제 짐을  건마는 그 중에도 제 짐이 어디 있는지 몰라 어릿어릿하고 우는 상으로 갈팡질팡하는 놈도 있습니다.
 
281
이렇게 야단 법석을 하고 새 옷들을 얻어 입고는 또 아까 모양으로 배들이 고파서 돈짐을 껴안고 우두커니 앉았읍니다. 이때에 또 한 배어서,
 
282
『밥들 받아 가거라.』
 
283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 소리가 나자, 어미 닭의 소리를 들은 병아리떼 모양으로 일제히 고개를 번쩍 들더니마는 솔개가 온다는 지휘를 받은 병아리들 모양으로 일제이 일어나서 「밥 받아 가라!」는 소리 오는 배로 달려갑니다. 마치 큰 전장 모양으로 뽀얀 먼지가 일어나고, 우와하는 함성이 들립니다. 거의 다 넘어간 불그레한 햇빛 속에 수천명 무리가 얼른얼른하는 양이 마치 무슨 귀신의 때를 보는 것 같습니다.
 
284
사람들은 밥 덩어리를 받아 입이 터져라 하고 틀어막고는, 또 두 손을 내어밀어 또 한 덩이를 받습니다. 목이 매거나 말거나 반찬이 있거나 말거나 밥 덩어리가 입을 지나 목구멍을 넘어가니 다들 살아난 것 같습니다.
 
285
『아이구 밥이야!』
 
286
『밥두 맛두 좋구나!』
 
287
『밥이야 밥이야!』
 
288
하고 모두 밥들을 얻어 먹고는 또 부리나케 각각 제 돈짐 있는 데로 뛰어 옵니다., 도적들이 밥을 먹고 나서 꿈지럭꿈지럭 짐을 지고 일어나려 할 때에 허생이 뱃머리에 썩 나서며,
 
289
『다들 돌아가서 조선에 있는 모든 도적들더러 와서 돈을 가져가라고 일러라. 또 너희들이 이 돈을 가지고 가더라도 며칠이 묏 되어 다 써버리고 말 터이니 만일 일생에 먹을 것, 입을 것, 걱정없이 살기를 원하거든, 그 돈으로 여편네 하나씩 소 한 짝씩 사가지고 구월 그믐사리까지 다들 이리로 모여들어라.』
 
290
합니다. 그런즉, 도적들은 일제히 땅에 엎드려,
 
291
『대왕 마마!』
 
292
를 부르고 모두 짐을 지고 산으로 기어 올랐습니다.
 
293
구월 보름달이 구름 한 점없는 반공에 걸렸는데 허생만 혼자 고요한 바닷가 모래판으로 오르락 내리락합니다.
 
294
먼 곬에서 밤물 밀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고, 풀숲에서는 채 죽지 아니한 벌레들이 기운 없이 구슬프게 우는 소리가 끓이락 이으락 합니다. 허생은 혹 고개를 들어 하늘에 반짝 반짝하는 별을 바라보고, 혹 걸음을 멈추어 벌레 소리를 듣고, 혹은 가만히 서서 무슨 깊은 생각을 합니다. 그의 속에는 무슨 생각이 있는가?
 
295
구월 그믐사리 이삼일 전부터 모여든 여편네를 데리고요.
 
296
보퉁이 실은 소를 끌고, 꾸역꾸역 모여듭니다. 사십여 척 큰 배는 바닷가에 죽 늘어서서 먼기 떠날 준비를 하노라고 뱃 사람들이 분주히 돛을 깁고 줄을 꼬고 야단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에 이백명식 삼백명씩 모여드는 사람이 그믐날 낮물 때에는 벌써 사천명이나 되었습니다.
 
297
사람들의 얼굴에는 모두 회색이 만연하여 저마다 제 아내와 제 소를 붙들어 배에 올리고, 웃고, 떠들고 마치 큰 잔칫날 이나 온 것 같습니다. 물은 출렁출렁 뱃머리를 때리고 바람으 술술 돛 달기만 기다리는데 사람들이 다 배에 오르기를 기다려 허생이 한 번 붉은 기를 높이 두르니 뱃머리에 섰던 뱃사람들이 일제히 버릿줄을 끄르고 소리를 맞추어 닻을 감습니다. 이것이 닻 감는 소리였다오.
 
298
『어야드야 어어혀리
299
여기여차 닻 감아라
300
이놈의 세상 다 버리고
301
남조선으로 어그여차』
 
302
『어야드야 어어혀리
303
어기여차 닻 감아라
304
고국강산아 잘 있거라
305
때 좋거든 여기여차.』
 
306
『어기여차 어이혀라
307
어기여차 닻 감아라
308
수로 만리 남조선에
309
사시장춘 꽃핀다네.』
 
310
닻이 거의거의 올라 오것다요. 그럴수록 사람들의 팔은 더욱 자주 움직이고, 부르는 노래곡조나 더욱 빨라 가겠다요.
 
311
『어기어차 어기어 어기어
312
어야드야 어혀리고
313
어잉혜 어잉혜야
314
어야드야 어기어 어기어차.』
 
315
닻이 다 감기자 사람들은 돛을 다는데 닻 감을 때보다도 더욱 기운이 납니다. 황톳물 들린 벌건 돛이 사람들이 잡아 다니는 대로 우쭐우쭐 올라갈수록 사람들의 기운은 더욱 왕성하여서,
 
316
『이어차 이어차 어혀리 이어차.』
 
317
하는 소리도 더욱 높아집니다.
 
318
돛을 다 달 만하게 된 배에는 배들은 벌써 우렁울렁 철썩하는 물을 가슴으로 헤치면서 바다 위로 얼마를 미끄러져 나갔습니다. 사공이 키를 스르르 틀더니 사십여 척 뱃머리가 취임하게서 남으로 돌며, 적은 돛 큰 돛이 터질 듯이 바람을 받아서 갈매기떼 모양으로 날아 나갑니다.
 
319
이렇게 남으로 남으로 향한지 사흘만에 옛나라 강산이 아주 안 보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에 나서서 가물 가물 스러져 가는 고국 강산을 바라보며, 모두 말없이 길게 한숨을 쉬고 즐겁게나 괴롭게나 고국서 살던 때 일을 생각하였습니다.
 
320
그렇게 좋은 일이라고는 구경도 못하고, 나면서부터 뼈가 휘도록 고생만 하고, 사람답게 대접 한 번도 못 받아 보던 원수에 고국도 이렇게 떠나고 보니 그리운 생각이 납니다그려. 무엇이 그리운고? 나를 멸시하던 동네 사람들이 그리운가? 여름에는 벼룩 빈대에, 겨울에는 벽바람 찬바람에 단잠도 한 번 못 이루어 본 오막살이가 그리운가? 그 많은 나무에 열매 하나 맘대로 못 꺽어 때던 산들이 그리운가? 누렇게 오곡이 익어 고개를 척척 숙였건마는 굶어 죽더라도 죽 한 술 쓸거리도 얻어먹지 못하던 논밭이 그리운가? 무엇이 그리운고? 어렸을 제 같이 놀던 동무들이 그립고, 볶은 콩 한 줌을 집어 주던 앞니 빠진 뒷집 할머니가 그리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면서도 그래도 고국 강산이 가물 가물 가물 할 때에는 천명 사람의 눈에는 고국 그리운 눈물이 흘렀습니다.
 
321
오리 대강이 모양으로 파랗게 보이던 고국의 산도 아주 안 보이게 되고 어디를 보나 넘실넘실하는 물결뿐입니다. 늦은 가을날이라 바람이 세게 불고, 느리게 부는 변화가 있을 뿐이지, 하늘은 하루같이 파랗게 맑아서 낮에는 몇 백리 밖인 지 알 수 없는 수평선 위에 넘실거리는 물결의 센 머리를 보고, 밤에는 서편 하늘에 걸린 은갈고리 같은 초생달을 보았습니다.
 
322
어디를 보면 섬 하나이 보일까. 섬은 커녕 배 하나인들 보일까. 배는 커녕 바다로 집을 삼는 갈매기조차도 멀미가 나서 못 나오고, 이 끝없는 바다에 기러기때 같은 사십척 배 만 길다랗게 두 줄로 늘어서서 소리없이 남으로 남으로 흘러갑니다. 뱃속에 있는 사람들 조차 떠난 첫날 이튿날은 이야기들도 하고 떠들기들도 하였지마는, 사흘 나흘 날이 지나갈수록 차차 말이 없어지고 물끄러미 서로 마주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생각을 하는 듯, 근심을 하는 듯, 고개를 숙이고 언제까지든지 앉았습니다. 더욱이 밤이나 되면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소와 개 고양이들까지도 모두 깊이 잠을 들고, 뱃사람들만 몇이 깨엇 앞뒤로 왔다갔다하면서 무어라 두런두런할 뿐입니다.
 
323
날이 갈수록 달이 점점 살아서 시커멓던 바다가 더욱 더욱 밝아가고 물결에 깨어지는 달그림자도 더욱더욱 빛이 나게 됩니다. 이렇게 죽은 듯 고요한 밤에 남으로 남으로 흘러가는 배를 보는 이라고는 하늘에 별뿐입니다. 그러다가 일행 중에 어떤 재미있는 이가 사가지고 오던 닭이 「꼬끼요!」 하고 홰를 치며 울면 바다의 밤도 깜짝 놀래어 깨어지는 듯 합니다. 그러다가 동쪽 하늘과 바다의 밤도 깜짝 놀래어 깨어지는 듯합니다. 그러다가 동쪽 하늘과 바다에 검붉은 빛이 스르르 돌자 그것이 점점 변하여 자줏 빛이 되고, 또 변하여 불길 빛이 되어서는 불기같은 물결이 부글부글 끓기를 얼마를 한 뒤에 비쭉하고, 불바퀴가 물 속으로 숙 올라 오기를 시작하면 온 바다와 온 하늘이 모두 이글이글하는 불이 옮아 붙어서 천지가 온통 불덩어리가 되어 버리고, 그 속에 뜬 우리 배들에 활짝 높이 달아 놓은 돛들도 이글이글하는 불이 되고, 배 위에 나와서 동쪽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조차 환한 화경과 김이 이글이글하는 불빛이 됩니다.
 
324
『가자 어서가
325
바다 건너 남조선 가
326
만경창과 머나먼 길에
327
후루루 날아 어서 가자
328
에라 만수.』
 
329
그러다가 햇바퀴도 머나먼 청전 구만리 길을 발 탈 없이 다 걸어서 아침에 떠난 물집으로 도로 들어가게 됩니다. 또 아까 모양으로 바닷물은 부르르 끓고 하늘은 이글이글 타고, 천지가 온통 불덩어리가 되었다가 그것이 차차 차차 식어지며, 검붉은 덩어리가 스르르 물속으로 네려가면 자줏빛 섞인 어둠이 후루루 풀려서 바다를 덮습니다.
 
330
『해 넘어갔네 넘어가
331
오늘 해도 또 넘아가
332
구만리 하늘길
333
발 탈없이 걸어
334
서왕모 요지연에
335
해 넘아갔네 넘어가.』
 
336
그런지 얼마 아니하여 지금까지는 눈에 뜨이지도 아니하였던 반달이 서늘하고 맑은 빛을 물결마다 보냅니다.
 
337
『달이 떳네
338
반다리 두둥렷이 떴구나
339
저 달은…
340
고국 강산도 비치련마는
341
부모님도 안녕하신가
342
친구들도 모두 잘 있는지
343
저 달아
344
네 빛을 빌려라 가 뵈올까.』
 
345
이 모양으로 밤이 들고 나고 해가 뜨고 지고, 잠이 오고 가고 하는 동안에 갈고리 같은 달이 반달이 되고, 반달이 점점 더 살아서 배부른 송편과 같이 되었는데, 아직도 바라고 바라는 남조선은 보이지 아니합니다.
 
346
달이 다 둥글면 온다던 온다던 새 나라가, 둥글었던 달이 다시 이지러지기를 시작하여도 아직도 보이는 것은 밤낮 보아야 똑같은 물결뿐입니다. 사람들은 차차 지리한 생각이 나기 시작합니다.
 
347
『아이구! 이놈의 바다!』
 
348
『저놈의 원수에 물결!』
 
349
『하늘도 싫소! 달도 별도 다 싫소! 풀이 보고 싶소! 나무가 보고 싶소!』
 
350
『아이구! 산이 보고 싶어! 풀이나 나무는 볼 팔자가 못되더라도 발가벗은 산만이라도 보고 싶어!』
 
351
『산이니 강이니 말을 마오. 흙이 보고 싶어요. 흙 냄시를 맡고 싶어.』
 
352
『흙이야! 흙이야! 흙 한번만 만져 보고 죽었으면.』
 
353
이 모양으로 사람들이 흙을 생각하게 되자 지금까지 조용하던 뱃속이 와글와글 하기를 시작합니다. 밤낮 똑같은 사람, 마주 앉았으니 할 말이 있나. 밤낮 보는 그 얼굴들까지도 점점 보기 싫은 증이 생겨서 마침내는 시로 외면을 하게 되고, 이 사람의 얼굴을 안 보자니 저 사람의 얼굴이 보이고, 저 사람의 얼굴이 보기 싫어서 고개를 돌리면, 또 그 곁에 사람의 얼굴이 보이고,
 
354
『아이구 어쩌면 이 보기 숭한 얼굴들을 아니 보게 되나.』
 
355
하고 화증을 내어 소리를 지르는 이도 있고, 바깥으로 뛰어나가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밖에 나가면 또 밤낮보는 하늘과 바다, 보고 싶은 흙은 아니 보이고 그만 제 화증에 못 견디어 갑판 위에 펄썩 주저앉아 발버둥을 치고 울게 됩니다.
 
356
『집으로 돌아가자. 풀 있고 나무 있는 데로 돌아가자.』
 
357
하고 사람들은 미친 듯이 날뛰입니다. 허생이 탄 배에서도 이와 같이 사람들이 반이나 미쳐 뛰다가도 허생이 내연히 뱃머리에 서서 멀리 앞을 내다보는 것을 보고는 스르르 맘들이 가라앉습니다.
 
358
이 모양으로 사람들이 반이나 미쳐 울고 불고, 엎어지고 자빠지고, 누웠다 뛰었다 하는 동안에도 배들은 여전히 북풍을 잔뜩 받아 남방으로 날려 갑니다. 날이 차차 더워져서 사람들은 겹것을 벗어 버리고 홑것을 내어 입게 되면, 어떤 날 새벽 붉은 해가 부글부글 끓는 물바다에서 쑥 올라올 때에 저 앞으로 뽀족하고 파란 산끝 하나이 그 빛을 받아 바다 위에 환히 나섭니다. 어디서 먼저 보았는지 모르거니와,
 
359
『흙이야! 육지다! 산이로구나!』
 
360
하고 수천명의 소리가 한꺼번에 우러나왔습니다.
 
361
『산이다! 산이다! 분명히 산이다!』
 
362
『야 남조선이로구나! 오기는 왔구나!』
 
363
『얼씨구나! 절씨구나!』
 
364
『좋다! 좋을시고!』
 
365
이 모양으로 혹은 얼씬얼씬 춤을 추고, 혹은 나오는 대로 소리를 지르고, 혹은 너무나 좋아서 몸부림을 하고, 울고 또 혹은 두 팔을 벌리고, 미친 사람 모양으로 공연히 배 위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왔다갔다 오르락 내리락합니다. 이때에는 뱃머리에 섰던 허생의 푸른 콧물 흐르는 얼굴에도 감출 수 없는 웃음이 빙그레 터졌습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얼마 아니하여 스러지고, 눈이 약간 가늘어지며, 양미간에 두어 줄 주름이 잡힙니다, 이것을 보고 곁에서 기뻐 뛰던 돌이가,
 
366
『생원님 왜 무슨 걱정이 계십시오?』
 
367
하고 허생을 치어다보며 물은즉, 허생은 눈으로 하늘 한쪽을 가리킵니다. 돌이가,
 
368
『거리 무엇이 있어요?』
 
369
하고 허생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본즉, 주먹만한 검은 구름 장 하나가 보일락 말락하게 떠 있습니다.
 
370
『그게 어째요?』
 
371
하고 돌이가 물은즉, 허생은 한숨을 쉬며,
 
372
『꼭 하루만 먼저 배가 떠났더면 저것을 만나지 아니할 것을 하루를 지체했기 때문에 큰 고생하게 되었구나.』
 
373
하고 고물(배뒤)로 돌아가 키 잡은 늙은 사공을 보매, 늙은 사공의 얼굴에도 근심의 빛이 보이며,
 
374
『생원님, 저 구름장이 암만해도 수상합니다.』
 
375
하고 한탄을 합니다. 이러하는 동안에 벌써 그 구름장이 여러 가지로 모양을 변하며 점점 커집니다.
 
376
허생과 늙은 사공이 근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그 수상한 구름장이 차차 팔을 뻗고, 다리를 뻗고, 날개를 펴고, 옷자락을 벌리고, 차차 걸음이 빨라지고, 빛이 검어지더니마는, 날카로운 비수와 같은 번개가 한번 번쩍하고 그 뒤를 이어 그물 눈 같은 실번개가 반짝반짝하더니 마는 잔잔하던 물결 밑으로 굼실굼실 굵은 속물결이 두서너 번 오더니 배가 둥실둥실 춤추기를 시작하고 후끈후끈하는 바람결이 휘휘지나가며, 돛들이 팽그르르 돌며, 앞으로 술술 나가던 배가 멈칫멈칫하고 물결 위로 오르락 내리락하기만 합니다.
 
377
이통에 지금까지 좋아라고 뛰던 사람들은 모두 눈이 둥그레져서 손에 잡히는 대로 무엇을 붙들고는 어쩔 줄을 모르고 쩔쩔맵니다. 앞을 바라본 즉, 아까 보이던 파란 산머리에 서는 빨간 번갯불이 반짝거리고, 뭉게뭉게 부글부글하는 구름 속에 그 산이 숨었다 나왔다 합니다.
 
378
『웬 일인가?』
 
379
『어쩌나?』
 
380
하고 사람들은 허생의 얼굴만 치어다보는데 허생은 늙은 사공을 시켜 다른 배를 향하여,
 
381
『놀이 무서우니 돛을 내리고 피차에 떨어지지 말도록 정신차리라.』
 
382
는 군호를 시켰습니다. 그런즉, 늙은 사공은 키에 몸을 기대고 서서 한 손에는 붉은 기, 한 손에는 푸른 기를 들고, 이리 두르고 저리 둘러 군호를 하는데, 다른 배에서 들은 모두 황황하여 혹은 소리를 지르고, 혹은 비슬거리면서, 속으로 들어가고, 뱃사람들은 황망하게 돛을 내리려고 줄을 끄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십척 배가 돛을 미처 다 내리기도 전에 산 같은 물결이 뱃머리를 번쩍 둘어 공기 놀 듯이 공중으로 올려 던지며 윽하는 마파람이 불어오는데 배들은 물결 고개를 오르락 내리락 이 배에서 저 배를 바라볼 수도 없어졌습니다.
 
383
사람들은 물바대에 숨이 막히고, 옷이 젖어「우우우」하면서 이리 쓰러지고 저리 쓰러지고, 매어달리고, 끌어안고, 앉아 뭉개고, 누워 뒹굴고, 정신을 못 차리는데 허생과 늙은 사공과 돌이의 셋 만이 돛대에 꼭 몸을 붙이고 바람이 오는 모양과 배가 흘러가는 방향을 보고 있습니다.
 
384
『이 지남철에 수천명의 목숨이 달렸으니 우리 셋 중에 둘이 죽고, 하나만 남더라도 이것은 꼭 들고 배가 어느 방향 으로 달아나는 것을 보아야 한다.』
 
385
하고 허생이 돌이와 사공에게 분부를 하였으나, 그 말도 들리는지 마는지 철썩하고 물결이 얼굴을 칠 때마다 두손으로 눈을 가리우고 입으로 푸푸 물과 숨을 한데 내어뿜어 가면서 미쳐 방향을 돌리 새도 없이 바람에 밀려 뒷걸음을 치는 배가 끌고 가는 대로 끌려 갈 수밖에 없습니다.
 
386
순식간에 온 하늘이 구름 바다가 되어 무서운 검은 구름장이 금시에 동으로 흐르다가 금시에 북으로 날고, 금시에 한 곳으로 모여 듣다가, 금시에 무슨 큰 일이나 난 듯이 사방으 로 부리나케 흩어져 달아납니다. 그러기를 얼마 동안을 하더니 번개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기를 시작하고, 우르르 하는 우레 소리가 드르릉 쿠르릉 하고 콩 볶는 소리가 나며, 산더미 같은 물결 위로 쑥 기어 올랐다가는 지옥과 같은 물결 골짜구니로 쑥 기어 들어가는 배들이 나뭇잎 모양으로 번갯빛에 번뜻번뜻 보였다가는 없어집니다.
 
387
이러는지가 몇 시간이나 되었던지, 늙은 사공도 어디로 가고 돌이까지도 어디로 가버리고 허생 혼자서 몸을 돛대에 비끌어맨 채로 손에 지남철을 들고 섰습니다. 배가 몇 천 물결을 타고 넘고, 밤톨 같은 소나기가 몇 십번인지 모르게 지나가고, 그러한 뒤에야 차차 번개와 우레가 배를 타고 넘어 멀리 북방으로 달아나고, 구름도 그것을 따라 점점 달아나 버리고, 폭풍우로 말끔하게 씻어 놓은 파란 하늘에 오랫 동안 숨었던 해가 번쩍할 때에는 벌써 늦은 저녁 때가 훨씬 넘었습니다. 그러나 뛰는 물결은 아직도 걸음을 멈추지 아니하였습니다. 대체 어떻게나 되었는고.
 
388
그래도 돌이가 제일 먼저 엉금엉금 기어 올라와서 허생 앞에 엎드리며,
 
389
『생원님 소인을 죽여 줍소서.』
 
390
하고 그 무서운 통에 허생을 내버리고 달아났던 죄를 사과합니다.
 
391
허생은 넘어가려는 해를 보고 손에 든 지남철을 보며,
 
392
『물결에 씻겨나간 사람이나 없니?』
 
393
하고 돌이더러 물습니다.
 
394
『지금은 알 수 없습니다. 소인두 얻어 맞은 놈같이 머리가 띵하고 팔다리에 힘이 한땀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죽은 것 같이 거꾸러져서 꼼짝들도 못합니다.』
 
395
하는 돌이의 목소리조차도 죽어가는 소리 같습니다.
 
396
그럴 때에 늙은 사공이 올라오더니 역시 허생 앞에 허리를 굽히고 펼 생각도 아니하며,
 
397
『소인 죽여줍소사. 소인이 바다에서 육십년을 늙었사와도 이런 놀은 겪어 본 적이 없사와요.......참말 생원님께서도 천신이시와요.』
 
398
하며,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합니다.
 
399
『돌아! 배가 몇 척이나 남았나 보아라.』
 
400
하고 돌이에게 분부하고 다시 사공더러,
 
401
『마침 남풍이 불어서 우리 배는 북으로만 불려 온 모양이니 아마 이틀이나 사흘만 더 가면 우리가 오늘 아침에 산을 보던 곳에 갈 것 같소. 자 어서어서 길을 차리오!』
 
402
하고 지남침을 늙은 사공에게 줍니다.
 
403
이럭 저럭 다른 뱃사람들도 일어나 다시 돛을 달고, 불려 오던 길로 다시 남쪽을 향하고 가기를 시작하는데 따라오는 배는 오직 다섯 척뿐 나머지는 혹은 깨어졌는지, 엎어졌는지, 혹은 그대로 바람에 밀려 물결에 밀려 어디로 불려가고 말았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미처 돛을 못 내리운 십여 척 배는 비록 파선은 아니하였다 하더라도 몇 천리를 불려서 어디로 달아났는지 알수 없습니다.
 
404
허생은 손길을 눈 위에 대고, 사방을 둘러보다가 삼십여 척 배가 간 곳을 모르는 것을 보고는 스르르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지우며, 얼마 동안을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늙은 사공을 보고,
 
405
『나는 한잠을 자고 올 터이니 배는 남쪽으로만 놓으시오.』
 
406
하고 이르고, 아래로 내려갑니다. 밤이 깊은 뒤에야 물결이 아주 자고 송편개와 같은 달이 구름 한점 없는 하늘에 달렸습니다. 그때에야 정신 잃고 거꾸러졌던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일어나서 밖으로 기어나와 비씰비씰 거리며 서늘한 밤 바람을 소입니다.
 
407
『아이구 그게 무슨 바람이야.』
 
408
하는 이도 있고,
 
409
『아이구 아이구!』
 
410
하고는 더는 말이 아니 나와서 고개만 쩔레쩔레 흔드는 이도 있고,
 
411
『그래도 다들 살았구려.』
 
412
하고 다시 얼굴을 대하는 것이 신기한 듯이 놀라는 눈으로 사람들의 달빛에 비치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도 있고, 혹은 서로 껴안고, 흐득흐득 느끼는 이도 있습니다. 피차에 그렇게도 보기 싫던 얼굴이 한번 죽을 통을 겪고 나서는 그렇게도 반갑게 되었습니다.
 
413
『에그, 다른 배들은 다 어찌 되었을까? 그 사람들은 지금 어찌나 되었을까?』
 
414
하고 없어진 배들을 위하여 깊이 근심을 합니다.
 
415
밝는 날 아침에 다섯 배를 더 만나고, 배 깨어진 널쭉들이 물결 위에 떠노는 것도 몇을 보았는데 그것을 볼 때에 사람들은 다 울었습니다.
 
416
그날 허생은 사람들을 시켜 소를 잡히고, 흰밥을 짓게 하여 그것을 바다에 뿌리며, 어제 풍파에 물에 빠녀 죽은 원혼들을 제사였는데, 모든 사람아 다 느껴 우는 중에 허생은 바다를 향하고 서서 이러한 축문을 읽었습니다.
 
417
『유세차 갑신 시월 십구일에 허생은 어제 놀에 수중 고흔이 되신 제위에게 고하노라. 슬프다! 제위 세상에 태어나 오직 굶주니고, 도직 헐벗고, 오직 잘 사는 자의 멸시함을 당하여 일찍 한 가지 낙을 조지 못하고, 마침내 몸을 도적에 던지니 어찌 이것이 제위의 원하는 배리요. 제위 일찍 나에게 말한 바와 같이 한간 집과 처자 있고, 갈아 먹을 두어 이랑 발리 있을진대 뉘 즐겨 도적이 되랴 하였도다.』
 
418
하고 허생의 축 부르는 소리가 떨리니 곁에 있던 사람들의 느끼는 소리도 떨립니다.
 
419
허생은 목메인 소리가 더욱 떨리며, 축문 읽기를 계속 합니다.
 
420
『슬프다! 내 우연히 제위를 보고 제위의 정경을 들으매, 가슴이 찔리는 듯 한지라, 다행히 넒은 땅을 얻어 한번 제위에게 춥니 아니하고, 배부른 세상을 보이고자 하였더니, 이 나의 허물인가. 하늘의 뜻인가. 불행히 근 풍랑을 만나 수천의 가련한 생령이 수중에 원혼을 이루였도다. 이에 또 요행으로 살아 남아 제위의 혼을 부를 때에 어찌 방타한 혈두를 금하리오. 울음에 목이 메어 말이 소리를 이루지 못하는도다.
 
421
할때에는 허생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 내리고, 돌이가 먼저「우후후」하고 울음소리를 내자, 다른 사람들도 울기를 시작하고 부인네들은,
 
422
『아이고 아이고!』
 
423
하고 곡가지 터져 나왔습니다. 하늘에 높이 달린 밸일도 무광하고 가이없는 바다에 정없는 창파도 제위를 위하여 잠시 소리를 거둔 듯하였습니다.
 
424
허생은 겨우 눈물은 거두고,
 
425
『눈물에 젖은 눈을 들어 바다를 바라보매, 물결마다 제위의 얼굴인가 의심하고, 귀를 기울여 돛대에 부딪치는 바람 소리를 들으매, 또한 제위의 원혼의 부르짖음을 듣는 듯하도다. 슬프다! 이 만경창파에 제위를 두고 어찌차마 우리 홀로 이곳을 떠나가리요. 바람마저 달리는 배조차 제위를 위하여 걸음을 멈추는 듯하도다.
426
사람이 죽어 앎이 있는가? 만일 앎이 있다 하면 제위의 혼아! 우리의 슬픔을 알지어다. 사람이 죽어도 이 세상에 남아 있음이 있는가. 만일 그러할진댄 우리를 따라 우리의 새 나라로 올지어다. 마땅히 새로운 과실로, 새로운 술로 제위를 제사하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사람이 죽어 가는 곳이 있는가. 있을진덴 제위야, 굶주림과 배고픔이 없고, 잘 사는 사람의 멸시함이 없는 극락 세계로 갈지어다. 제위의 금생의 고초 이미 지극하였으니 어찌 내생의 복락이 없으리요. 묻노니 제위의 혼이 이미 극락으로 가고, 이곳에 남음이 없는가. 가장 좋도다!
427
우리의 눈물과 슬픔으로 하여금 헛된 것이 되게 할지어다.
428
만일 사람이 죽어 아무 남음이 없고, 앎이 없는가. 또는 끝을 모르는 바다 밑에 제위 이미 깊은 잠이 들었는가. 그러 할진댄 부질없는 우리의 눈물과 울음소리로 하여금 고요한 제위의 졸음을 깨뜨리게 말지어다.
429
슬프다! 제위야 있나뇨 없나뇨, 아나뇨 모르나뇨, 조나뇨, 깨었나뇨, 여기 제위 일생에 구하던 밥이 있도다. 받으라. 고기가 있도다. 받으라. 원컨댄 원한을 품은 혼이 되어 인적도 없는 바다 위에 헤매지 말고, 마땅히 돌아갈 곳을 찾아 돌아갈지어다. 슬프다! 제위야 상향하라.』
 
430
하고 측울 마친 뒤에 허생이 손수 밥과 고기를 집어 바다에 넣으니 다른 사람들도 그 모양으로 밥과 고기를 집어 던집니다. 배 곁에 밀어왔던 물결이 그 밥을 띄워가지고 맘 있는 듯이 배를 싸고 돌다가 뒤로뒤로 달아 납니다.
 
431
이튿날 배 두 척을 더 만나 도합 열 두 척 배가 순풍에 찬 돛을 달고 남방으로 나아갑니다. 또 그 이튿날 정오에야 천행으로 사흘 전에 보던 산을 바라보게 되고 그 이튿날 오정이 훨씬 지나서 배가 어떤 이름 모를 육지에 득달하게 되었습니다.
 
432
오랜 물길에 게다가 무서운 풍랑에 더할수 없이 지친 사람 들도 배가 육지에 닿자 마자 모두 죽을 곳에서나 뛰어나는 듯이 기운들을 내어서 턱턱 뛰어 내려서는 한여름 같이 무성한 부드러운 풀밭에 턱턱 쓰러지고, 소만 고양이들도 저 마다 제 소리를 지르며, 오래간만에 보는 풀밭에 뛰어들어 먹을 생각도 없이 누웠다 뒹굴었다 합니다. 평생을 바다에서 늙은 뱃사람돌 초차 그만 땅바닥에 착 달라 붙어서 그립던 흙 냄새를 맡느라고 일어날 줄을 모르고 허생도 무엇인지 이름도 모를 나뭇가지에 매어달려서 누렇게 익은 실과를 따서는 맛나는 듯이 먹고 또 먹고 합니다.
 
433
『아이구 살아났다.』
 
434
하는 생각에 사람들은 도리어 졸리는 듯하게 기운이 빠져 버렸습니다.
【원문】14. 邊山盜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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