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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許生傳 (이광수) ◈
◇ 17. 돌아와서 ◇
해설   목차 (총 : 19권)     이전 17권 다음
1923.12
이광수
1
변진사는 너무도 놀라운 일이라 어찌할 줄을 모르고 해매 다가 몸소 마당에 뛰어내려와 섬거적에 싼 것과 궤짝을 열어 본즉, 모두 주먹덩이 같은 금이 아니면 은이라 그 자리에서 입을 딱 벌리고 말을 못하고, 주위에 둘러 섰던 수십명 문객들도 모두 얼빠진 사람들 모양으로 「이게 무에어?」할 따름이요, 말도 잘 나오지 아니합니다.
 
2
그래도 그 중에서 변 진사가 먼저 정신을 차려서 방으로 뛰어 올라가서 허생의 앞에 엎드려 절하며,
 
3
『화식 먹는 인생이라 누구신지를 몰라 뵈옵고, 설마한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생원님께옵서 하도 차리신 모양이 초하옵기로, 장사에 밑지신 줄만 알았사옵더니, 이렇게 불과 육칠년에 나 같은 것이 일생에 모은 것보다도 많은 재물을 얻으셨사오니 과연 생원님께옵서는 신인이시옵니다.』
 
4
하고 백발이 날리는 머리를 체면도 불하고 수없이 수그립니다.
 
5
허생은 황망히 일어나 마주 절하며,
 
6
『왜 이러시오? 나 많은 이가 젊은 사람 보고 절하는 법이 어디 있나요? 말으시오.』
 
7
하고 매우 귀찮은 듯이 얼굴을 찡기며 일어나,
 
8
『나는 갑니다.』
 
9
하고 나가려고 합니다.
 
10
변 지사는 절을 하다 말고 일어나 허생의 소매를 붙들며,
 
11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이 재물은 내가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 돈은 허생원께서 맡으셔야 하옵니다. 만일 주신다 하면 애초에 돌려 드렸던 만 냥은 받겠습니다. 만일 장사하는 사람의 돈이라고 이식을 주신다 하오면 만냥 갑절 이만 냥은 받으려니와 그 나머지는 내가 받을 까닭이 없습니다.』
 
12
합니다. 허생은 변 진사의 하는 말을 듣고 있더니,
 
13
『그럴 것이 아니오이다. 나는 본래 글이나 외우는 선비라 돈을 모르는 사람이니 내게는 이 돈이 아무 데도 쓸 데가 없소이다. 재물에는 각각 주인이 있는 것이니 진사께서 이 돈을 가지고 쓸만하다고 생각하는 곳에 쓰시오. 나는 좀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얼맛동안 돈을 만졌거니와 인제는 생각하였던 것도 좀 해보았으니 다시는 내게 백만금의 재물도 쓸 곳이 없소이다.』
 
14
하고 붙드는 것도 뿌리치고 대문 밖으로 홱 나가 버리고 맙니다.
 
15
변 진사는 툇마루까지 따라오다가 하릴없이 사람을 시켜 허생을 따라가 보라 하고, 회보 오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마당에 쌓인 금덩어리 은덩어리는 말도 없이 번쩍번쩍하고 있습니다.
 
16
담배 두 대를 태울 때 쯤하여 허생을 따라갔던 사람이 돌아 왔습니다.
 
17
『그래 그 어른이 어디로 가시드냐?』
 
18
하고 변 진사가 황망히 물은즉, 그 사람이,
 
19
『그 어른이 걸음을 어떻게 빨리 걸으시는지 저는 달음박질하다시피 해서 가까스로 따라갔읍니다…큰 광충다리를 건너서 홍문섯골로 내려가더니 개천을 건너서 구리개로 초전골을 향하고 얼마를 내려가더니 무엇을 찾는지 한참동안 머뭇머뭇하더니마는 거기서 꺾어서 진고개를 항하고, 도로 올라와서는 묵적골로 들어가십니다. 그래 뒤를 슬슬 따라가 노라니까 바로 남산 및 쓰러져 가는 조그마한 집으로 들어 갔습니다.』
 
20
합니다. 변 지사가,
 
21
『그래 들어가서는 아무 소리도 없드냐?』
 
22
하고 물은즉 그 사람은,
 
23
『모르겠습니다 그리로 들어가시는 거슬 보고는 곧 돌아서 왔습니다. 』
 
24
합니다.
 
25
『그래 그 집이 아주 말이 아니야?』
 
26
하고 또 변지사가 물은즉 그 사람의 말이,
 
27
『아주 말이 아니올씨다. 서까래가 팔을 부르걷고 사람사는 집같지 아니합니다.』
 
28
변진사는 곧 사람을 시켜 나무 한 바리와 쌀 한 섬과 간장 한 동이와 고기 한 근과 젓갈 한 항아리와 술한병을 허생의 집으로 보내며,
 
29
『얘, 누가 보냈단 말도 말고, 그저 갖다가 대문안에 다가 들여 놓고만 오너라. 만일 안 받으신다고 야단을 하시거든 소인네는 모릅니다 하고 못 들은 체하고 달아오너라.』
 
30
하고 분부하였습니다.
 
31
그날 저녁에 허생이 오래간만에 부인과 함께 저녁을 먹으려 할 때에 대문 밖으로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32
『이리 오너라!』
 
33
하고 부른는 소리가 납니다.
 
34
부인이 방금 밥을 뜰 양으로 들었던 숟가락을 핵 내어 던지며,
 
35
『제길, 남 밥 먹으려는데 어떤 녀석이 왔어?』
 
36
하고 화증을 냅니다.
 
37
『손님이 오셨으면 맞아 들여야 하지 아니하오. 왜 그러시오.』
 
38
하고 일어나 몸소 대문으로 나갔습니다. 안에서는 화증난 부인이 덜거덕 소리를 내며, 밥상을 치우는 소리가 들리고 무어라고 거둘덜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건너방은 한간 있지마는 나무가 있나 장판 떨어진 안방 간 방이 안방 겸 사랑입니다.
 
39
허생이 대문 빗장을 벗기니 문 밖에는 변 진사가 초롱을 들리고, 술 쟁반을 들리고 기다리고 섰습니다. 허새은 반가운 듯이,
 
40
『술을 가지고 오셨어요? 꼭 한 잔 먹고 싶던 때외다. 자 들어오시오.』
 
41
하고 변 진사를 불러 들입니다.
 
42
허생의 조그마한 안방에는 술이 벌어졌습니다. 변진사가 손수 따라 주는 대로 허생은 사양도 아니하고, 변진사에게 권하지도 아니하고, 한량없이 들이마십니다. 허생의 얼굴이 벌개지고, 콧김이 차차 더워감을 따라서 차차 말이 많아지고 어성이 높아집니다.
 
43
『대관절 술이란 좋은 것이요. 취한 눈으로 보면, 천지가 닭의 알과 같이 보이고, 영웅 호걸이 하루살이 같이 보이는 것이요. 원래 달인은 취하나 깨나 천지 인생을 일장 춘몽같이 보는 것이지마는 우리 같은 범인은 술의 힘이나 빌어서 취한 동안에나 잠시 달인이 되는 것이요. 옛날에 우 임금이 술을 보고 울었다 허거니와 그것은 술의 맛을 몰랐던 까닭이지요.』
 
44
『달마에게는 즐거움도 없고, 괴로움도 없고, 즐거게보면 앓는 것도 즐거움이요, 죽는 것도 즐거움이요, 슬프게 보면 꽃피는 것도 슬픔이요, 장가드는 것도 슬픔이지요…마누라가 화증을 내니 슬프지요, 바가지를 긁으니 슬프지요. 어떠시오? 진사께서는 그런 슬픔이 없으시오?』
 
45
하고 따라 놓았던 술을 들이마십니다.
 
46
『인생이 슬픔이지요. 왜 낸들 슬픔이 없겠소니까.』
 
47
하고 어떻게 대답해야 될는지를 몰라 어물어물합니다. 허생은 술을 마시고 다시 말을 이어,
 
48
『그러니까 인생의 슬픔을 잊노라고 사람들이 술을 먹는 것이지요. 술이 아니고 슬픔을 잊을 도리가 없으니까요. 허 허 허』
 
49
하고 또 한 잔을 들이킵니다. 그리고는 취안이 몽롱하여 변지사의 풍후한 늙은 얼굴을 바라봅니다. 그러더니마는 갑자기 얼굴빛이 엄숙하게 되며,
 
50
『인제는 가십시오. 우리 마누라가 아직 저녁도 아니 먹고 부엌에서 손님 가시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가시오.』
 
51
하고 자기가 먼저 일어납니다. 그런즉, 변진사도 어이가 업서 부시시 일어나 나가며,
 
52
『좀 조용히 여쭈어 볼 말씀이 있는데요.』
 
53
한즉, 허생은 변 진사의 등을 밀어내며,
 
54
『오늘은 부엌에서 내자가 떨고 섰으니까요. 내일 저녁에 또 오셔요─술 가지고 오시지요. 안녕히 가십시오.』
 
55
하고는 변 진사가 신을 신는 것도 다 보지 아니하고, 안방 문을 닫고 들어가며,
 
56
『여보 마누라! 들어오시오!』
 
57
합니다. 변 진사는 기가 막혀서 슬며시 대문 밖으로 나섰습니다. 방안에서는 내외가 무에라고 떠드는 소리가 들립니다.
 
58
변 진사가 나간 뒤에 부인은 밥상을 들고 들어와서 허생의 앞에 놓으며,
 
59
『글세 어쩌면 손님더러 그렇게 가라오?』
 
60
하고 책망을 합니다. 허생은,
 
61
『당신이 부엌에서 떨고 섰으니 그랬지요. 자 앉으시오. 오래간만에 같이 밥이나 먹읍시다…이를 어찌오.l 국이 다 식었구료.』
 
62
하고 다정하게 부인에게 앉기를 권합니다. 그런즉, 부인이 매우 못마땅한 듯이 불쾌한 얼굴을 가지고 스르르 앉습니다.
 
63
부인은 한참이나 말없이 먹기 싫은 모양으로 밥을 먹고 있더니 참다 못한 듯이,
 
64
『말 좀 하오!』
 
65
하고 한 마디 내어쏩니다. 허생은 놀라는 듯이,
 
66
『왜 그러오? 무슨 말이요?』
 
67
한즉, 부인은 어성을 높여서,
 
68
『그래 내가 당신께 무엇을 잘못했어? 무엇을 잘못했기로 손님을 보고 내 흉을 보우? 나를 옷 한 가지나 해주어 보았소? 여태껏 입는 것이 모두 친정에서 해가지고 온게야! 나를 무엇이나 좋은 것을 해 주었소? 밥 밖에 더 굶긴 것이 무엇이요? 그리고는 또 사람을 보고 내 흉을 보아? 당신도 인제는 나이 사십이니 그래도 생가기 있겠구려.』
 
69
하고 울기를 시작하며,
 
70
『내가 왜 이런 사람에게로 시집을 왔담. 전생에 무슨 업원이 있길래 당신 따위를 만나서 일생을 이 고생이야──밤 낮 거지 꼴을 하고, 밥이나 굶구, 우우우. 내가 왜 어디 가서 풍덩 빠져 죽지도 못하고, 오늘까지 살아왔어? 저번에도 가장 큰 소리를 하고 떠나길리 이번에는 그래도 돈푼이나 벌어 가지고 오려니, 빈손으로는 안돌아오려니 하고 그래도 믿고 있었더니, 사람을 심년 동안이나 혼자 기다리게 해놓 고는 여전히 저 꼴을 가지고 돌아와? 가서 막벌이를 했더라도 돈 백 냥은 가지고 오겠지, 남의 집 머슴을 살더라도 돈 백냥을 벌었겠소…그래 무엇을 했소? 그 동안 무슨 장한 일을 했소? 어디 말 좀 하오! 말 좀 해요!』
 
71
하고 차차 몸부림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72
그러나 허생은 눈만 껌벅껌벅하고 가만히 앉았습니다. 부인은 말을 그치고 이윽히 허생을 바라보더니 또 발악을 하며,
 
73
『왜 말이 없소? 왜 대답도 없소? 말이 말 같지를 아니하오?』
 
74
하고 들이대입니다.
 
75
『글세 여보! 오래간만에 집에라도 돌아왔거든 그 동안 어떻게나 살았느가? 병이나 없었나, 하고 묻기라도 하는 게지 이것도 저것도 아니하고…우우우…아이구 어쩌면 좋은가? 어쩌란 말이요?』
 
76
하고 목을 놓아 웁니다.
 
77
허생은 한 손으로 부인의 등을 만지며,
 
78
『자 저녁이나 자시오. 팔자가 그런 것을 인제 그러면 어쩌오? 인제 당신이 나를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을 간단 말이요? 옷 보퉁이를 싸 들고 친정으로 도로 들어간단 말이요?』
 
79
하고 위로하는 말을 한즉, 부인은
 
80
『친정이요? 이골을 하고 내가 친정에를 가요?』
 
81
합니다.
 
82
『그러면 어쩌오?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하고라도 쓰나 다나 죽는 날까지 살았지 별 수 있소? 자──추운데 어서 저역이나 먹읍시다. 저녁을 먹고나서 또 말을 못하오?』
 
83
하고 숟가락을 들어 준즉, 부인은 그것을 집어 내더지며,
 
84
『죽을 테야! 나는 오늘 안으로 죽을 테야! 내가 이 앞에서 목적비를 하고 죽는 양을 보려오?』
 
85
하고 버둥을 칩니다.
 
86
허생은 기가 막히는 듯이 우더커니 앉았더니,
 
87
『글세 여보! 이러면 어쩌잔 말이요? 우는 것도 젊었을 때에 울어야 귀엽기나 하지, 나이가 사십이나 된 마누라가 몸부림을 하며 운다고 누가 귀여워나 하겠소? 자──저녁이나 자시오…또 그 동안에 아떻게 살았나 하는거니 물어볼 필요가 있소? 집에 돌아온 즉, 당신이 아직도 살아으니, 어── 아마 굶어 죽지는 아니한 모양이다 하고 다행으로 알께지 여러 말은 해서 무엇하겠소? 안 그렇소?』
 
88
듣고 보니 허생의 말이 옳지야 앟습니까. 부인도 「나이 사십에」란 말에 그만 몸부림하는 것도 부끄러워지고, 우는 것도 부끄러워져서 한참이나 말이 없이 앉았다가 숟가락을 들어 남편의 국을 한술 떠 먹어 보더니,
 
89
『에그, 이를 어찌해! 다 식었구려. 데워옵시다.』
 
90
하고 자기 국그릇까지 들고 부엌으로 나갑니다.
 
91
부엌으로 나가는 양을 본 허생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합니다. 가엷은 인생, 그 인생의 가엷은 인정을 생각할 때에 견딜 수 없이 슬퍼진 것입니다. 부엌에서는 부인의 나뭇가지 꺽는 소리가 들립니다.
 
92
다시 끓여 온 국에 허생 내외는 아까 다툼도 씻은 듯 부신 듯,
 
93
『더 잡수오.』
 
94
『더 잡수오.』
 
95
하고 정답게 밥을 먹었습니다. 밥이 다 긑난 뒤에 밥상도 치우지 않고 앉아서 정담을 시작합니다.
 
96
『그 동안 어디를 가셔서 그렇게 오래 계셨소?』
 
97
하고 부인이 먼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98
『안성 계시단 말을 들었지요. 아이구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가 쳐.』
 
99
하고 밤에 웬 사람들이 와서 찾더란 말과 사랑에서 안 계시다고 했더니 저희들 손으로 대문 빗장을 열고 들어오서, 안성서 허생원님께서 보내더라고 무슨 짐을 짐을 져다가 안 마루에 놓고는 저희들끼리 또 어떻게 대문 빗장을 걸고 나 갔던 말, 그런 뒤에야 마루에 나가본 즉, 웬 어린애 송장으 로 알았던 것이 돈이더란 말을 하고는 혼자 그때 일이 우스워서 웃습니다. 허생도 웃으며,
 
100
『그래도 그놈들이 제법이다. 내 말대로 돈을 전했으니.』
 
101
합니다.
 
102
『대체 그게 무슨 사람들이야요?』
 
103
『도적놈들이라오. 안성서 도적놈들이 들어왔기에 우리집에 돈 백냥이나 전해 달라고 했더니 가져온 것으로구려.』
 
104
한즉, 부인은 깜짝 놀라 눈이 둥그레지며,
 
105
『무에요? 도적놈들이야요? 에구머니!』
 
106
하고 기절할 듯이 놀라는 모양을 보입니다.
 
107
『왜 그렇게 놀라오? 도적놈이면 무슨 상관이 있소? 그 사람들도 사람이라오. 없이 도적질이지 저 먹을 것만 잇으면 다들 우리보다 더 착한 사람들이라오. 제 먹을 것이 있고도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놈들이 도리어 더 나쁜 도적놈이지요.』
 
108
하고 허생은 새 나라를 생각합니다. 그 도적놈들이 새 나라에 가서 어떻게 화목헤가, 어떻게 부지런하게, 어떻게 서로 도우며, 어떻게 서로 아끼며, 어떻게 서로 맛난 것을 권하며, 살아가는 양을 생각합니다. 그런즉, 부인은,
 
109
『아니야요. 그런 것이 아니라 이상한 일이 있단 말이야요』
 
110
하고 무슨 이상한 옛일을 생각하는 듯힙나다.
 
111
『무슨 이상한 일이요?』
 
112
하고 허생도 좀 이상한 생각이 났습니다.
 
113
『그런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그 도적놈들이 말씀이야요. 한 달에 한 번씩 꼭 초하룻날이면 한달 먹을 것을 가져다 놓고 가고, 장 담글 때면 꼭 메주와 소금을 가져오겠지요─ ─그런데 꼭 밤에만 와요. 밤이라도 달도 없는 밤에 쿵쿵쿵 하고 져다가 놓고는 암말도 없이 끼득끼득 웃고는 달아나요. 그래서 나는, 당신이 아마 사람을 시켜서 사보내나 하다가, 당신이 그렇게 가까이 계시면 집에 한 번도 안 들어 오실 리는 없고, 도깨비들이 그러는 것이 아닌가, 우리 집에 복도깨비가 돌어오제나 않았나 했어요...... 아니 그게 도적 놈이야? 도적놈들이 왜 다달이 양식을 가져오오?』
 
114
하고 부인은 알 수 없다 하는 듯이 남편을 치어다봅니다.
 
115
그런즉, 허생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116
『응흥, 그러려든.』
 
117
하고 빙그레 옷습니다.
 
118
부인은 잊어버렸던 것이 생각난 듯이 깜짝 놀라며,
 
119
『아차, 오늘이 초하루야요. 동짓달 초하루── 오늘이 그 사람들이 양식하고, 돈하고 지고 올 날이야요.』
 
120
하고 무엇을 엿듣는 듯이 귀를 기울이더니 아무 소리도 없는 것을 보고,
 
121
『이전 같으면 올 때가 되었는데.』
 
122
하고 또 귀를 기울입니다.
 
123
한참 있어도 아무 소리도 없는 것을 보고 부인은,
 
124
『그런데 오늘 왔던 사람이 누구야요? 우리 집에는 그런 사람이 와 본 적이 없는데.』
 
125
하고 남편에게 물습니다.
 
126
『변 진사라고 다방골 사는 사람이오.』
 
127
하는 남편의 대답에 부인은 깜짝 놀라며,
 
128
『변 진사? 저 부자 변 진사?』
 
129
합니다.
 
130
『그렇다오. 부자랍니다.』
 
131
『부자랍니다가 무어에요. 조선 팔도에 제일 가는 갑부구, 지금 상감님께서 북벌하시노라고 다 불러 보셨다는데...... 그런데 그 부자가 어떻게 우리 집을 알고 찾아 왔소?』
 
132
『우리가 변 진사보다 더 큰 부잔게지요.』
 
133
하고 허생이 웃습니다.
 
134
『오늘이 이전 같으면 그 사람들이 양식을 가지고 올 날인데 웬일일까요?』
 
135
기다리고 있을 때에 대문 밖에서 쿵쿵하는 소리가 납니다.
 
136
부인은 남편을 보며,
 
137
『옳지! 저 소리야요. 저 소리가 나면 문 빗장이 열리고, 그 사람들이 양식을 저 다 놓아요. 첫번에 한 번 이리오너라 하고 부르고는 그 다음부터는 한 번도 부르는 일이 없고, 꼭 저 모양이야요.』
 
138
할 때에 밖에서 우렁찬 소리로,
 
139
『이리 오너라.』
 
140
하고 부릅니다.
 
141
허생이 몸소 나아가 문을 열고 본 즉, 어떤 사람이 셋인데 그 중에 한 사람이 뛰어나와 인사를 드리며,
 
142
『생원님 제올씨다.』
 
143
하고 허생을 치어다봅니다, 허생도 놀라서 본즉, 분명히 육 년 동안 자기 배에 따라다니던 뱃사람입니다.
 
144
『웬 일이요?』
 
145
하고 허생이 물은즉, 그 사람이 곁에 서 있는 어떤 늙은 총각을 가리키며,
 
146
『이 어른이 삼십년 동안 우리 조선 팔도의 도적의 두목으로 계시던 홍 총각입니다. 이 어른이 저를 시켜서 어디든지 생원님 가시는 데로 따라 가서 하시는 양을 뵙고 오라고 하시기로 끝까지 생원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생원님의 뒤를 따라 서울까지 들어와서는 북한산성에 이 어른을 찾아 뵈옵고, 생원님께서 돌아 오신 말씀을 여짜왔더니, 그렇지 아니하더라도 오늘이 동짓달 초하룻날이니 생원님 댁에 양식을 갖다 드릴 날이라고 하시고, 지금 들어오셨습니다.』
 
147
하고 아룁니다.
 
148
그 말에 곁에 섰던 홍 총각의 썩 나서며,
 
149
『성화는 들은지 오래지요. 생원님께서는 나를 모르셨겠지마는 나는 생원님을 안지가 오래지요. 그래 언제나 한 번 만나기를 원했으나, 내가 도적놈의 몸이라 만날 기회도 없었소이다...... 이번에 그 많은 도적들을 다 먹고 살 곳을 얻어 주시니, 그런 다행이 없소이다. 나도 삼십여년을 그 무리를 거느리고 오다가 인제는 도적질도 싫어지고, 그렇다고 내 힘 가지고는 그 많은 것을 어찌할 도리도 없고, 그래서 생원님께 부탁을 하였더니 이렇게 뜻대로 하여 주시니 감사할 바를 알지 못하겠소이다. 인제는 나도 도적의 생활을 버리고 가만히 북한산에 숨어서 죽는 날까지 한가하게 초부 노릇이나 하게 되었소이다.』
 
150
하고 좀 거만한 듯한 그 태도에도 무수히 사례하는 빛이 보입니다.
 
151
허생은 홍 총각의 말을 다 듣더니,
 
152
『그러시오? 나도 노형의 성화는 들었소이다. 그러나 노형이 나를 불렀고, 그 동안 내 집에 양식을 주신 이가 노형이신 줄은 몰랐소이다.』
 
153
하고 세 사람을 인도하여 방으로 들어간 뒤에 지금까지 말 없이 섰던 사람이 허생에게 인사를 드리며,
 
154
『생원님 저를 알으시겠습니까?』
 
155
합니다.
 
156
허생은 이윽히 본즉, 이는 과연 칠년 전 안성 유 진사 집에 들어왔던 도적, 자기가 손으로 그 어깨를 치며 집에 돈을 좀 전해 달라고 부탁한 도적입니다.
 
157
허생은 한껏 반갑기도 하며 한껏 이상키도 하여,
 
158
『알겠소.』
 
159
하고 물끄러미 그 사람을 치어다보더니,
 
160
『나는 노형께 집 일을 부탁하고는 아주 안심하고 돌아 다녔소이다. 노형이 내 집에 한 번 와 보시기만 하면 반드시 내가 돌아오기까지 양식을 대어 주리라고 밎었소이다.』
 
161
합니다. 허생은 아까 변 진사가 가져왔던 남은 술을 내어 세 사람에게 대접하였습니다. 세 사람은 사양없이 술을 마시는데, 얼굴에는 인생을 고생과 근심으로 지낸 표적으로 굵은 주름이 잡히고, 눈에는 유순한 듯한 중에도 표독한 기운이 떠돕니다. 그러나 그들도 이미 인생의 일생 길을 거의 다 걸어온 사람들이라 몸가짐에나 말하는 소리에 가엽게 피곤한 빛이 보입니다. 허생은 이윽히는 소리에 가엽게 피곤한 빛이 보입니다. 허생은 이윽히 세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치어다 보더니.
 
162
『이상한 말을 묻는 것 같소이다마는, 노형네는 무슨 일로 도적이 되셨소?』
 
163
하고 물은즉, 홍 총각이 빙그레 웃으며,
 
164
『말을 하자면 길지요마는 또 말을 하면 무엇합니까.』
 
165
하고 무엇을 생각하는 듯 한참 동안 말을 끊었다가,
 
166
『그러나 생원님이 만일 한 번 우리들을 써 주신다면 그 말을 하지요.』
 
167
하고 뜻 있는 듯이 우습니다.
 
168
허생은 홍 총각의 말에 무슨 뜻이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듯이,
 
169
『노형의 소원이 무엇이길래 나 같은 사람이 써 드리고 말고 한단 말씀이야요?』
 
170
하고 물었습니다. 그런즉, 홍 총각이 길게 한숨을 쉬며,
 
171
『내 소원 말씀이오니까. 내 소원은 조선 팔도에 양반이란 양반과 부자란 부자를 다 없애 버리는 것이지요. 조선이 비록 작으나 저마다 사나이는 농사를 짓고, 고기를 잡으면, 만민이 배고프지 아니할 것이요. 여편네가 저마다 삼을 삼고, 길삼을 하면 만민이 헐벗지 아니할 것이요. 그중에 손재주 있는 이가 공장이 되고, 걸음발 빠른 이가 장사가 되어 유무를 서로 바꾸면, 부족한 것이 서로 없으련만 양반이란 자 와 부자란 자가 있어서 놀고 백성의 피를 빠니 가난한 자가 생기고, 가난한 자가 생기니 도적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요?
172
그래서 나는 일생에 경륜 있는 사람을 만나거든 한 번 조선 천지를 뒤집어 새 나라를 이루려고 하였더니, 벌써 나이 육 십이 가까웠으되 기다리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속절없이 북한산 한 줌 흙이 되고 말게 되었으니 이런 가엾은 일이 있소오니까,,,,,애초에 도적의 두목이 된 것도, 혹 그중에 사람이 있을까, 팔도 도적을 한데 뭉치면 어느 때에 한번 쓸 곳이나 있을까, 한 것인데 세월은 가도 때는 돌아오지 아니 하고, 도적들은 뜻을 알아주지 못하며, 게다가 여러 해 흉년에 수천의 도적을 먹일 도리가 없어서 생원님께 부탁한 것 이지요.....인제 그 무리도 먼 곳에 가버렸으니 삼년 동안 조선 팔도에 도적의 그림자가 그치고 조정에 드나드는 무리들은 이렇게 도적이 평정된 것이 각각 자기네의 공이라 하여 서로 공을 다투고, 임금에게 아첨하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은 그 도적들이 다 금상의 성덕에 감화한 것이라 하여, 송덕표를 올리고, 나라에서는 태평연을 베풀고 태평가를 부르고 장관이었지요. 어는 누가 이렇게 도적인 없어진 것이 생원님 솜씨인 줄을 아기나 하리까......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노라면, 또 없으니, 어찌 될 것인고─ 세상 일을 누구라 압니까.』
 
173
허생은 홍 총각의 속을 떠 보는 듯이,
 
174
『그래 조선 팔도에 사람을 골라 보셨으니 쓸만한 사람이 몇이나 됩더이까?』
 
175
『두 개 반? 이나 되지요.』
 
176
합니다,
 
177
『두 개 반? 어찌해서 두 개 반인가요?』
 
178
한즉,
 
179
『주제넘은 말씀이어니와, 나하고요, 생원님하고요, 그리고는 이완이가 반 개 하고요─그러니까 두 개 반 아닌가요. 사람이 두 개 반 밖에 없으니 무엇을 하나요?』
 
180
하고 홍총각은 기렉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수그리더니, 다시 번쩍 들며,
 
181
『누구누구하는 정승, 누구누구 하는 판서 따위는 말할 것 도 없거니와 학자라는 작자들은 발가락 새에 끼인 때 모양으로, 고리고 고려서 명나라와 신안주씨 밖에 찾을 줄을 모르고 소위 벼슬 한다는 작자들은, 옥관자 금관자개나 얻어 붙이고, 수령개나 방백개나 하여서 집간이나 논마지기나 장만하는 것 밖에 아무러한 생각도 없고, 백성들은 순하고 못나서, 때리면 맞고, 밟으면 밟히고.달라면 주고, 주고는 혼자 울 뿐이니, 상하가 이러하고야 무슨 일을 하겠어요? 지금 이 완이가 불벌을 한다고 한 번 백만 대군을 휘몰랑 중원을 들이친다고 사람을 구하고, 돈을 구하고, 화약을 만들고, 병기를 반들고하니 그래도 그 기운이야 어지간 하지마는 수없는 좀것들이 이하범상(以下犯上)이 어쩐둥 이소범대 (以小犯大)가 어쩐둥 하고, 쏙고 씸고, 찢고 까불고 하니 무슨 일이 되겠어요? 하니까 조선 천지에 무슨 인연으로 두사람 방이 났다가 속절 없이 돌아가게 되겠지요, 그 뒤에는 쥐 같은 것, 벼룩 같은 것, 빈대 같은 것. 모기 같은 것 여귀 같은 것, 도깨비 같은 것들이 찍짹 삑빽 앙당하고 물고 차고, 할퀴고 먹고, 쥐어 뜯고 하다가 애매한 백성들만 동탄에 집어 넣겠지요.....들어보시오─지금 새 나라에서 연해 새 사람들이 나노라고, 우리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우리는 가만히 삼백년 후를 기다립시다.』
 
182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더니 홍 총각은 무엇을 생각하는 듯이 이윽히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가,
 
183
『나는 갑니다.』
 
184
하고 일어나 나갑니다.
 
185
이튿날 아침에 허생은 일찍이 일어나 소세하고, 칠년전 집 떠나기 전과 같이 전에 읽던 먼지가 켸켸 앉은 책을 내어 놓고, 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소리를 내어 들을 욉니다. 부인은 오래 간만에 만남 남편이 소중한 생각도 있고 어저께 변진사 같은 큰 부자가 찾아온 것이 신통도 하여 얼마쯤 허생을 존경하는 생각이 나서 글 읽는 것을 훼방도 놓지 아니하고 조용히 한 구석에 앉았습니다.
 
186
그러나 홍 총각이라는 흉물이 찾아왔던 것이 맘이 놓이지를 아니하여 곰곰이 여러 가지로 근심을 합니다. 〈그게 도적놈이라 딴은 험상스럽게 생겼던 걸. 더구나 그 볼이 발발 붙는 듯한 노란 꼬리가 대로대롱 달린 것이 어떻 게나흉물스러웠는지.〉 이 모양으로 부인은 혼자 생각을 합니다. 혹 남편이 그 동안에 도적 노릇이나 하고 돌아다니지를 아니하였나. 설마 그러랴. 이렇게 저렇게 생각이 끝없이 나오지마는 차마 남편더러 (당신 그 동안 도적놈 노릇했소?)하고 물을 용기도 없어서, 에라 잊어버지라 하고 바느질을 시작하였습니다.
 
187
그로부터 거의 매일 변 진사가 밤이 되면 양식과 술을 들리고, 허생의 집에 찾아와서는 늦도록 여러 가지 이야기를 좀 많이 가지고 오거나, 또는 두고 용처에 쓰라고 돈이나 금은을 가지고 오면 허생은 눈살을 삐푸리며,
 
188
『왜 내게다가 걱정을 주려고 하시오? 집에 돈을 두면 잃어버릴 염려가 있고 양식을 많이 두면 쥐가 먹을 염려가 있고, 옷이 많으면 좀 먹을 염려가 았으니, 지금 염려 구태여 살 것이 무엇이요? 사람이 오늘 밤에 잠이 들면 내일 아침에 살아 일어나 것을 기필치 못하고 아침밥을 먹고 나면 저녁밥 때까지 살아 있을 것을 기필치 못하니, 끼니때마다 배가 차도록 먹으면 그만이지 그 밖에 더 쓸 데가 무엇이요?』
 
189
변진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허생에게,
 
190
『어찌하여 그렇게 큰 돈을 벌었는가. 큰 돈 버는 법이 어떠한가?』
 
191
를 물었으나 허생은 매양,
 
192
『좋은 술에 취하여 무슨 할 말이 없어서 돈 이야기만 하시오? 돈을 구하는 것처럼 더럽고, 천하고, 죄많은 일은 없는 것이요. 나도 여러 천명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자니 하릴없어 몇 해 동안 돈을 벌었거니와 돈이란 것이 천하 백성을 도탄에 넣은 요술이지요, 첫째 돈을 가진 사람 편으로 보면, 도적 맞을까봐 걱정, 꾸어 주었던 돈을 잘릴까봐 걱정, 잘리고 나면 분하니 걱정, 물건을 사면 아니 팔릴까봐 걱정, 내 물건 값은 내릴까봐 걱정, 남의 물건 값은 오를까봐 걱정, 돈과 물건을 많이 두자니 집을 크게 지어야 하고, 집이 크면 불날 걱정이 많고 가난한 친척과 고구들이 도와 달라고 오니 안 주면 안 준다고 원망이요, 주면 적게 준다고 원망이요.......대체 돈이란 것을 가지면 이런 걱정이 있으니 어느 겨를에 일월 활짝 열어 젖히고 확개 뻗고 낮잠은 자나요? 하니까 세상에 제일 불쌍한 이는 재물 많이 가진 이지요.』
 
193
하고 변 진사를 조롱하는 듯이 껄껄 웃고, 좀체로 돈 모으는 법을 말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변 진사는 노여워하지도 아니하고 아무리 해서라도 허생에게 돈 모으는 법 하루는 여전히 허생과 변 진사가 밤이 깊도록 술을 먹고 이야기 하던 끝에 또 돈 모으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194
허생은 변 진사 더러,
 
195
『이세상은 기가의 것도 아니요 이가의 것도 아니요, 천하의 사람의 것이지요. 그러니까 땅이나 짐이나 물건이나 천하 사람이 골구루 먹고, 입고, 살기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어떤 사람 하나가 두 사람 먹을 것을 차지하였다 하면 어떤 사람 하나는 먹을 것을 잃을 것이 아니오니까. 지금 이 술병에 술이 열잔이 들었다 하고 내가 혼자 그 열잔을 다 먹으면 진사께서 잡수실 것 없어지지 아니해요? 그러기에 옛날에 한 장수가 공을 이루자면 만 사람이 죽어야 한다는 말이 있거니와 한 사람이 부자가 되자면 만 사람이 가난해져야 하지요. 그러니까 돈을 모아 부자가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의식을 빼앗는단 말이 되지요.....이런 줄을 알진댄 빈주먹으로 왔다가 빈주먹으로 가는 인생이 애써 같은 인생의 밥과 옷을 빼앗으러 들 것이 무엇이오니 까....양식이 만석이 쌓였더라도 한 끼에 열 섬이나 백 섬 밥을 먹을 것도 아니요, 집이 천 간 있더라도 잘 때에는 요 펼 곳 하나면 족하고, 땅이 몇 만 결이 있더라도, 죽어서 관 하나 들어갈 구덩이만 있으면 그만 아닌가요.....그런 걸 재물은 그리 모아서 무엇하나요?』
 
196
하고 여전히 돈 모으는 법을 말하지 아니합니다.
 
197
변진사는 허생을 만나서부터 지금까지 다만 허생을 고경하고 두려워하여 오직 허생이 하는 말을 들을 뿐이요, 한마디도 대답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제는 서로 사귄지가 오래매 친분도 생겼고, 또 술잔이나 먹은 김이라 자기의 의견을 말할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198
『생원님께서는 지금까지 돈의 좋지 아니한 곳만 말씀하겼 거니와, 돈에는 좋은 곳이 또한 있으니 좋지 아니합니까. 모르시는 것이 없는 생원님깨서는 모르실리는 만무하거니와 술잔이나 먹은 김에 떠드는 늙은 사람의 말을 웃고 들어 주시오...... 대체 돈이란 것이 참 좋은 것입니다. 돈이 없으면, 여름에 비지땀을 흘리며 흙덩이와 싸움을 해야 밥이 나오지 마는 돈만 있으면 가만히 앉아 있어도 천한 백성들이 농사를 지어서 쌀을 만들어서 게 등으로 져다가 밥까지 지어 바 칩니다. 돈이 없으면 초가을 긴긴 밤을 모기에 뜯기어 새어 가면서 수고 질삼을 해야 입을 옷이 생기지마는 돈만 있으면 만리 밖에 가낭 미인들이 누에 치고 실 뽑고 비단 짜서 곱다랗게 바지 짓고, 저고리 짓고, 배자까지 두루마기까지 지어서 갖다 바침니다. 이것만 하여도 돈의 덕의 크거니와 어찌 그뿐인가요. 술이 먹고 싶다 하면 청주, 탁주, 과하주 여름에는 송엽주와 ,추구월에 국화주, 동삼이명 감흥로 오갈피주 할 것 없이 저절로 들어오니, 이것도 돈의 덕이요. 얼굴 이야 제아무리 추하고, 사람이야 제 아무리 못나고 맘이야 제 아무리 흉악하더라도 돈만 있으면 천하 미인이 저절로 모여 드니 이에서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으며 벼슬을 하고 싶으면 벼슬이 오고, 풍악을 듣고 싶으면 풍악을 듣고 싶으면 풍악이 오고 ......큰소리로는 못한 말씀이지마는 대국 퍼자라도 돈만 있으면 할 것이니, 돈의 덕이 어떻게나 큽니까. 다만 돈 가지고 못 할 일은 오는 백발 막는 일과, 가는 춘풍 붙드는 일이지요. 그 밖에는 이 세상에서 돈 가지고 못 할 일이 하나도 없으니 돈 밖에 더 좋은 것이 어디 있읍니까 』
 
199
하고 자못기고 만장입니다.
 
200
허생의 빙그레 웃으며,
 
201
『돈 가지고도 못 할 일이 또 하나 있지요.』
 
202
합니다. 변 진사는 매우 의심스러운 눈으로,
 
203
『그 밖에 무엇이오니까.』
 
204
한즉 허생은,
 
205
『억만금의 돈으로도 내 맘은 못 움직이지요,』
 
206
합니다. 변 지사는 이 말을 하는 허생의 눈에 번개 같은 불길이 번쩍하는 것을 보고, 지금까지 떠들던 기운이 다 줄어 들고, 무서운 생각이 나서 엄숙히 옷깃을 바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허생의 태도는 전과 다름이 없이 제 손으로 술을 따라 시름없이 들이킵니다. 이날부터 변 진사는 감히 돈 모으는 법을 가르쳐 달라는 말을 내지 못하였습니다.
【원문】17. 돌아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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