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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단(文壇) 30년의 자취 ◈

◇ 《廢墟(폐허)》·《白潮(백조)》 ◇

해설목차  서문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9권  10권  11권  12권  13권  14권  15권  16권  17권  18권  19권  20권  21권  22권  23권  24권  25권  26권  27권  28권  29권  30권  31권  32권  33권  34권  35권  36권  37권  38권  39권  1948.3~
김동인
1
1921년 봄에 나는 소위 《창조》 주식회사의 창립총회를 하자는 김환의 초청으로 서울로 올라왔다.
 
2
유방 김찬영, 안서 김억, 그 밖 몇몇 글벗과 짝지어 종로를 지나가다가 문득 동무들이 발을 멈추어 김억의 말로,
 
3
“소개하지. 한동안 紙上(지상)에서 싸우던 염상섭 군.”
 
4
하는 바람에 나도 발을 멈추고 맞은편에 얼굴이 커다랗고 입이 너부죽한 사람을 마주 보았다.
 
5
얼마 전에 小星(소성) 玄相允(현상윤)에게 쓸데없는 시비를 걸고 그 위 김환에게 인신공격(소설 비평이라는 핑계로서)을 한 염상섭에게 대한 나의 선입관은 자못 좋지 못하였다. 필시 얼굴도 인상이 나쁜 인물이리라는 선입관이 있었다.
 
6
그런데 지금 얼굴에 미소를 가득 띄고 내게 향하여 손을 내미는 염상섭은 다만 짝없는 호인일 따름이었다.
 
7
상섭의 내미는 손에 마주 손을 내밀었으나, 나는 여전히 그의 얼굴을 주시하여 마지 않았다. 선입관과 실물이 너무도 相違(상위)되므로….
 
8
그 날, 상면한 사람은 염상섭뿐 아니라 고 남궁벽, 오상순, 황석우, 김만수 등 《폐허》파 주요 동인 전부였다.
 
9
그들과 작별하자 곧 안서가 날 꾸짖는다.
 
10
“염(尙燮(상섭))은 자네를 그렇듯 호의로 대하는데 자네는 왜 옛날 논전을 했으면 했지 오늘 그렇듯 악의의 눈으로 염을 대하는가. 사람이 그래선 못써 너무 狹量(협양)이야.”
 
11
당년의 안서는 노염 잘 내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조금만 비위에 거슬리면 곧 절교로 선언하고 옷을 떨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나간다. 그러나 30분 내지 한 시간 뒤에는 싱글벙글 웃으며 아까의 절교는 잊은 듯이 찾아 오는 사람이었다.
 
12
그런 안서지만 지금의 내게 대한 책망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염상섭이 나의 선입관과 달라 예상 외의 호인이므로 나도 내심 상섭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판에 안서의 이 꾸중이다.
 
13
여기 대하여 惟邦(김찬영)이 대신 말하였다―.
 
14
“동인 군, 자도 기회 있을 때 자네에게 말하려고 벼르고 있었지만 자넨 ― 아마 생장과 환경의 탓이겠지만 대인응대에 남보기에 몹시 거만해 뵈어. 그게 자네 처세에 큰 방해가 될 걸세.”
 
15
자기로는 모르지만 사실 그런 양하여 건방지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으며, 더우기 경찰이나 경무부 도서과 같은 데서는 ‘나마이끼(なまいき―건방 짐)’하다는 탓으로 부당한 대접을 받은 일이 비일비재다. 그러나 이 ‘거 만하다’는 것도 나이와 지위의 나름인 듯, 내 나이 오십(마흔아홉이다)이 되고 지위도 문단의 늙은이로 되고 보니, 건방지다는 폄은 어언간 없어지고 말았다.
 
16
주식회사 창조사의 제1회 拂入株金(불입주금)을 곧 김환에게 보내고 나는 자금 이후는 원고와 편집 책임밖에는 지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랬더니 내 불입금을 오입에 죄 소비해 버린 김환은 어떻게 수단을 썼던지 《창조》 제8호와 제9호의 발행비 책임을 廣益書舘(광익서관)에 떠지워서 8호와 9호는 광익서관의 손으로 무사히 세상에 나왔다.
 
17
나는 그 주식회사 창조사의 발기인회에 참석코자 상경하여 발기총회에서 어떤 기생과 사괴게 되어 한번 쏠리면 끝장을 보고야마는 성격으로, 문학이고 예술이고 집어치고 방탕의 방면으로 쏠려 들어갔다.
 
18
《폐허》는 뒤에 나서 먼저 없어지고(2호로 폐간), 《창조》도 9호로 폐간해 버리고 이 땅에는 한때 그 흔했던 문예잡지는 종자도 없어졌다.
 
19
그런데 《폐허》가 단 두 호를 낸 뿐으로 조선 문학사상에 커다랗게 이름을 남긴 것은 전혀 염상섭의 공이 아닌가 한다.
 
20
《폐허》가 간행되는 동안 염상섭은 내내 한 작품 비평가로 종사했지만, 그 뒷날 《開闢(개벽)》이 간행되고 《조선문단》이 간행될 때에 《개벽》 지상에 처녀작 「청개구리」로 출발하여서 大(대)염상섭의 오늘을 이루었는지라, ‘염상섭 요람’의 마을인 《폐허》가 따라서 이름이 살아 있지 않은가 본다.
 
21
《폐허》와 전후하여 생겼던 문예잡지 《三光(삼광)》이며 그 밖의 다른 잡지들 이 모두 잊히어졌는데 오직 《폐허》의 이름은 《창조》에 버금하여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상섭의 덕이라 보는 것은 나의 실수일까?
 
22
《창조》와 《폐허》가 다 없어지고 잠깐 잠잠하던 이 땅에는 문예잡지 《백조》가 생겨났다.
 
23
조선 신문학 초창기를 회고할 때에 분명 창조파라는 색채와 ‘페허파’라 는 색채를 구분할 수 있지만 《백조》에는 색채가 없었다. 억지로 집어내자면 書生(서생) 색채가 있다고나 할까?
 
24
현재 재학생 혹은 갓 교문을 나온 젊은이들― 이런 문학소년 내지 문학청년들을 규합하여 동인으로 하였는지라, 다만 문학 애호라는 점만이 공통될 뿐이지 사상이나 경향은 십인십색으로 통일된 색채가 없었다.
 
25
그러나 《창조》 《폐허》에 속하지 않은 온 조선의 총규합이라, 《백조》 간행 당시에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동인들도 후일 《개벽》과 《조선문단》을 무대 로 일어나서 한때 조선 신문학 황금시대를 현출하였다.
 
26
그런데 위에도 쓴 일이 있지만 《창조》 동인 열한 사람 가운데 30년 뒤인 지금에 죽은 사람은 오직 김환 항 사람이요, 《폐허》에는 민태원, 남궁벽 등 두 세 사람이 죽었으나 염상섭을 필두로 오상순, 변영로, 황석우, 중요한 동인은 역시 축나지 않았는데 《백조》는 이상하게도 稻香(도향) 나빈을 비롯하여 빙허 현진건, 노작 홍사용, 춘성 노자영 등 온 동인의 6할이 저 세상으로 갔다 하는 것은 비통하고도 괴상한 숙명이다.
 
27
그 가운데도 도향과 노작의 죽음은 진실로 아깝다.
 
28
도향이 죽은 것이 겨우 스물 서너 살이었으니, 무론 아직 미성품이요, 좀 과히 로만티시즘과 센티멘탈리즘에 기운 느낌은 면할 수 없었으나 그의 천분이 완숙되어 보지 못하고 세상 떠난 것은 조선문학을 위하여 찬탄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29
도향에 관해서는 아래 다시 쓸 기회가 있겠거니와 홍노작에 대하여 한두마디 쓰고자 한다.
 
30
제호는 잊었지만 《개벽》 지상에서 노작의 시를 보고 큰 시인의 알이 하나 생겼구나, 한 일이 있었다. 그후 얼마 뒤에 서로 면식은 하였다.
 
31
1942년경, 나는 불경죄라는 죄목으로 형무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 未決監(미결감) 같은 방에 영화감독 尹達春(윤달춘)이 있었다. 그 윤봉춘이 노작에 관하여 이런 말을 하였다. 무슨 영화를 제작하는데 그 영화의 주제가를 하나 지어 달라려 노작을 찾아갔는데, 갈 때 빈 손으로 갈 수가 없어서 쇠고기를 한 근 사들고 갔었다.
 
32
노작의 집 아이들은 고기의 맛이 하두 신기하여 대체 이 맛있는 물건이 무엇이냐고 부모에게 물으니까 그건 ‘노다지’라고 하여 두었다.
 
33
그 뒤부터 윤봉춘이 노작의 집에 가면 아이들은 노다지 가져온 사람이라고 환영하더라는 이야기다.
 
34
감옥에서 윤봉춘에게 이 이야기를 듣고, 아아, 노작이 그렇게 곤란하게 지내는가, 조선문인된 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가엾어라고 깊이 탄식하였다.
 
35
그러나 1년 뒤 감옥에서 나와서는 노작을 한 번 찾아 본다는 것이 어름어름 밀리고 밀리는 중, 1945년 국가 해방의 날도 지난 그 초가을 어떤날, 웬 전문학교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나를 찾아왔다.
 
36
그래서 만나 보았더니,
 
37
“노작 홍사용 선생을 아시오?”
 
38
하는 질문이었다. 그래서 아노라고 했더니 지금 홍선생이 많이 위중하십니다는 것이었다.
 
39
가슴이 뚱 하였다. 그래서 노작이 나를 한 번 만나기를 부탁하더냐고 물었더니, 그런 배는 아니요 다만 같은 문단이기에 노작의 위독을 알리는 뿐이라 하고는 도로 가버렸다.
 
40
아마 짐작컨대 그 여학생은 노작의 친척이나 친지로서 내 집 앞을 지나다니며 내 문패를 보고 金東仁(김동인)이가 어떤 화상인가 한 번 보고자 노작을 핑계삼아 들어왔던 것이리라.
 
41
그래서 무심하게 버려 두었더니, 2, 3일 뒤에 신문지는 노작의 부보를 알리었다.
 
42
자기 집 전답을 팔아서 그 돈으로 《백조》를 간행한 노작, 《백조》 자체가 조선문학 건설에 남긴 공로는 그다지 없다. 그러나 《백조》를 요람으로 출발한 노작의 많지는 못하나마 몇십 편의 주옥은 조선 문학사상에 영구히 빛날 보배다.
 
43
현빙허의 죽음도 진실로 아깝다. 빙허는 어떤 정도까지 그의 업적을 남기고 죽었으니, 어려서 죽은 도향처럼 원통하게 아깝지는 않지만, 이 《백조》의 세 작가(빙허, 도향, 노작)가 지금도 살아서 현역으로 활동을 한다면 우리 문단은 얼마나 더 흥성스러울 것인가?
【 】《廢墟(폐허)》·《白潮(백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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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金東仁) [저자]
 
1948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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