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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단(文壇) 30년의 자취 ◈
◇ 《廢墟(폐허)》·《白潮(백조)》 ◇
해설   목차 (총 : 39권)   서문     이전 4권 다음
1948.3~
김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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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文壇) 30년의 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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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廢墟(폐허)》·《白潮(백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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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봄에 나는 소위 《창조》 주식회사의 창립총회를 하자는 김환의 초청으로 서울로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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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 김찬영, 안서 김억, 그 밖 몇몇 글벗과 짝지어 종로를 지나가다가 문득 동무들이 발을 멈추어 김억의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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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하지. 한동안 紙上(지상)에서 싸우던 염상섭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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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바람에 나도 발을 멈추고 맞은편에 얼굴이 커다랗고 입이 너부죽한 사람을 마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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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小星(소성) 玄相允(현상윤)에게 쓸데없는 시비를 걸고 그 위 김환에게 인신공격(소설 비평이라는 핑계로서)을 한 염상섭에게 대한 나의 선입관은 자못 좋지 못하였다. 필시 얼굴도 인상이 나쁜 인물이리라는 선입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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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 얼굴에 미소를 가득 띄고 내게 향하여 손을 내미는 염상섭은 다만 짝없는 호인일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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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섭의 내미는 손에 마주 손을 내밀었으나, 나는 여전히 그의 얼굴을 주시하여 마지 않았다. 선입관과 실물이 너무도 相違(상위)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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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상면한 사람은 염상섭뿐 아니라 고 남궁벽, 오상순, 황석우, 김만수 등 《폐허》파 주요 동인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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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과 작별하자 곧 안서가 날 꾸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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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尙燮(상섭))은 자네를 그렇듯 호의로 대하는데 자네는 왜 옛날 논전을 했으면 했지 오늘 그렇듯 악의의 눈으로 염을 대하는가. 사람이 그래선 못써 너무 狹量(협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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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년의 안서는 노염 잘 내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조금만 비위에 거슬리면 곧 절교로 선언하고 옷을 떨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나간다. 그러나 30분 내지 한 시간 뒤에는 싱글벙글 웃으며 아까의 절교는 잊은 듯이 찾아 오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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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안서지만 지금의 내게 대한 책망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염상섭이 나의 선입관과 달라 예상 외의 호인이므로 나도 내심 상섭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판에 안서의 이 꾸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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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대하여 惟邦(김찬영)이 대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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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 군, 자도 기회 있을 때 자네에게 말하려고 벼르고 있었지만 자넨 ― 아마 생장과 환경의 탓이겠지만 대인응대에 남보기에 몹시 거만해 뵈어. 그게 자네 처세에 큰 방해가 될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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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로는 모르지만 사실 그런 양하여 건방지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으며, 더우기 경찰이나 경무부 도서과 같은 데서는 ‘나마이끼(なまいき―건방 짐)’하다는 탓으로 부당한 대접을 받은 일이 비일비재다. 그러나 이 ‘거 만하다’는 것도 나이와 지위의 나름인 듯, 내 나이 오십(마흔아홉이다)이 되고 지위도 문단의 늙은이로 되고 보니, 건방지다는 폄은 어언간 없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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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 창조사의 제1회 拂入株金(불입주금)을 곧 김환에게 보내고 나는 자금 이후는 원고와 편집 책임밖에는 지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랬더니 내 불입금을 오입에 죄 소비해 버린 김환은 어떻게 수단을 썼던지 《창조》 제8호와 제9호의 발행비 책임을 廣益書舘(광익서관)에 떠지워서 8호와 9호는 광익서관의 손으로 무사히 세상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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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주식회사 창조사의 발기인회에 참석코자 상경하여 발기총회에서 어떤 기생과 사괴게 되어 한번 쏠리면 끝장을 보고야마는 성격으로, 문학이고 예술이고 집어치고 방탕의 방면으로 쏠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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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는 뒤에 나서 먼저 없어지고(2호로 폐간), 《창조》도 9호로 폐간해 버리고 이 땅에는 한때 그 흔했던 문예잡지는 종자도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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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폐허》가 단 두 호를 낸 뿐으로 조선 문학사상에 커다랗게 이름을 남긴 것은 전혀 염상섭의 공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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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가 간행되는 동안 염상섭은 내내 한 작품 비평가로 종사했지만, 그 뒷날 《開闢(개벽)》이 간행되고 《조선문단》이 간행될 때에 《개벽》 지상에 처녀작 「청개구리」로 출발하여서 大(대)염상섭의 오늘을 이루었는지라, ‘염상섭 요람’의 마을인 《폐허》가 따라서 이름이 살아 있지 않은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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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와 전후하여 생겼던 문예잡지 《三光(삼광)》이며 그 밖의 다른 잡지들 이 모두 잊히어졌는데 오직 《폐허》의 이름은 《창조》에 버금하여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상섭의 덕이라 보는 것은 나의 실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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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와 《폐허》가 다 없어지고 잠깐 잠잠하던 이 땅에는 문예잡지 《백조》가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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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신문학 초창기를 회고할 때에 분명 창조파라는 색채와 ‘페허파’라 는 색채를 구분할 수 있지만 《백조》에는 색채가 없었다. 억지로 집어내자면 書生(서생) 색채가 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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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재학생 혹은 갓 교문을 나온 젊은이들― 이런 문학소년 내지 문학청년들을 규합하여 동인으로 하였는지라, 다만 문학 애호라는 점만이 공통될 뿐이지 사상이나 경향은 십인십색으로 통일된 색채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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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창조》 《폐허》에 속하지 않은 온 조선의 총규합이라, 《백조》 간행 당시에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동인들도 후일 《개벽》과 《조선문단》을 무대 로 일어나서 한때 조선 신문학 황금시대를 현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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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위에도 쓴 일이 있지만 《창조》 동인 열한 사람 가운데 30년 뒤인 지금에 죽은 사람은 오직 김환 항 사람이요, 《폐허》에는 민태원, 남궁벽 등 두 세 사람이 죽었으나 염상섭을 필두로 오상순, 변영로, 황석우, 중요한 동인은 역시 축나지 않았는데 《백조》는 이상하게도 稻香(도향) 나빈을 비롯하여 빙허 현진건, 노작 홍사용, 춘성 노자영 등 온 동인의 6할이 저 세상으로 갔다 하는 것은 비통하고도 괴상한 숙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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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운데도 도향과 노작의 죽음은 진실로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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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향이 죽은 것이 겨우 스물 서너 살이었으니, 무론 아직 미성품이요, 좀 과히 로만티시즘과 센티멘탈리즘에 기운 느낌은 면할 수 없었으나 그의 천분이 완숙되어 보지 못하고 세상 떠난 것은 조선문학을 위하여 찬탄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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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향에 관해서는 아래 다시 쓸 기회가 있겠거니와 홍노작에 대하여 한두마디 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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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는 잊었지만 《개벽》 지상에서 노작의 시를 보고 큰 시인의 알이 하나 생겼구나, 한 일이 있었다. 그후 얼마 뒤에 서로 면식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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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경, 나는 불경죄라는 죄목으로 형무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 未決監(미결감) 같은 방에 영화감독 尹達春(윤달춘)이 있었다. 그 윤봉춘이 노작에 관하여 이런 말을 하였다. 무슨 영화를 제작하는데 그 영화의 주제가를 하나 지어 달라려 노작을 찾아갔는데, 갈 때 빈 손으로 갈 수가 없어서 쇠고기를 한 근 사들고 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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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작의 집 아이들은 고기의 맛이 하두 신기하여 대체 이 맛있는 물건이 무엇이냐고 부모에게 물으니까 그건 ‘노다지’라고 하여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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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부터 윤봉춘이 노작의 집에 가면 아이들은 노다지 가져온 사람이라고 환영하더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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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윤봉춘에게 이 이야기를 듣고, 아아, 노작이 그렇게 곤란하게 지내는가, 조선문인된 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가엾어라고 깊이 탄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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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년 뒤 감옥에서 나와서는 노작을 한 번 찾아 본다는 것이 어름어름 밀리고 밀리는 중, 1945년 국가 해방의 날도 지난 그 초가을 어떤날, 웬 전문학교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나를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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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만나 보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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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작 홍사용 선생을 아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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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질문이었다. 그래서 아노라고 했더니 지금 홍선생이 많이 위중하십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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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뚱 하였다. 그래서 노작이 나를 한 번 만나기를 부탁하더냐고 물었더니, 그런 배는 아니요 다만 같은 문단이기에 노작의 위독을 알리는 뿐이라 하고는 도로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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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짐작컨대 그 여학생은 노작의 친척이나 친지로서 내 집 앞을 지나다니며 내 문패를 보고 金東仁(김동인)이가 어떤 화상인가 한 번 보고자 노작을 핑계삼아 들어왔던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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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무심하게 버려 두었더니, 2, 3일 뒤에 신문지는 노작의 부보를 알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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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집 전답을 팔아서 그 돈으로 《백조》를 간행한 노작, 《백조》 자체가 조선문학 건설에 남긴 공로는 그다지 없다. 그러나 《백조》를 요람으로 출발한 노작의 많지는 못하나마 몇십 편의 주옥은 조선 문학사상에 영구히 빛날 보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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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빙허의 죽음도 진실로 아깝다. 빙허는 어떤 정도까지 그의 업적을 남기고 죽었으니, 어려서 죽은 도향처럼 원통하게 아깝지는 않지만, 이 《백조》의 세 작가(빙허, 도향, 노작)가 지금도 살아서 현역으로 활동을 한다면 우리 문단은 얼마나 더 흥성스러울 것인가?
【원문】《廢墟(폐허)》·《白潮(백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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