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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단(文壇) 30년의 자취 ◈
해설   목차 (총 : 39권)   서문     이전 0권 다음
1948.3~
김동인
1947년 3월 '백민'에 산문 '망국인기(亡國人記)', 1948년 5월 '백민'에 산문 '속 망국인기', 1948년 3월부터 1949년 8월까지 '신천지'에 산문 '문단 30년의 자취'등을 발표하면서 일제강점기 수 많은 친일 활동 행적에 대해 변명하는 등 논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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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文壇) 30년의 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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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12월 스무닷샛날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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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동경 本鄕(본향)에 있는 내 하숙에는 나하고 朱耀翰(주요한)하고가 화로를 끼고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파우리스타의 커피 시럽을 진하게 타서 마시면서 그날 저녁(한두 시간 전)에 동경 유학생 청년회관에서 크리스마스 축하회라는 명목으로 열렸던 유학생들의 집회에서 돌발된 사건 때문에 생긴 흥분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서 그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야기에 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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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일본에 병합된 지 겨우 8, 9년, 아직 그 날의 원통함과 분노가 국민에게 생생하게 남아 있던 시절이라, 더우기 선각자요, 지도자로 자임하고 있던 유학생들의 마음에는 애국지사적 기분이 맹렬하게 불타고 있었으며 ‘한국의 독립은 우리의 손으로’라는 포부가 유학생들의 마음에는 깊이 새겨져 있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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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때에 歐洲大戰(구주대전)이 끝나고 미국 대통령 윌슨이 인류에게 민족자결주의라는 것을 제창하였다. 한 개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의 자유의사로서 결정될 것이지 어떤 강력한 국가의 실력으로 좌우될 것이 아니라는, 그러니까 어떤 국가로서 그 나라의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다른 강국에게 먹히운 자가 있다면 그런 무리한 실력주의는 배제하고 그 민족의 자유의사 로서 그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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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이 부족하여 일본에게 병합된 한국이라, 이 기회에 윌슨 대통령의 제창에 따라서 한국은 마땅히 그 국권을 회복해야 된다는 부르짖음이 동경 유학생(선각자로 자임하는) 새에 부르짖어졌고, 그 날(1918.12.25) 크리스마스 축하를 핑계삼아 청년회관에 집회하여서 거기서 드디어 커다란 결의까지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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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3․1운동의 씨가 그 밤에 배태된 것이었다. 운동을 진행시킬 위원을 선출하고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內地(일본)와 연락할 방도를 토의하고 헤어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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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과 나는 거기서 헤져서 파우리스타에 들러서 차를 한 잔씩 마시고 커피 시럽을 한 병 사가지고 함께 내 하숙으로 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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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우리들 새에는 아까의 집회의 이야기가 사괴어졌다. 그 집회에서는 徐椿(서춘)이 우리(요한과 나)에게 독립선언문을 기초할 것을 부탁했었지만, 우리는 그 任(임)이 아니라고 사퇴(뒤에 그것은 春園(춘원)이 담당했다)했었는데 사퇴는 하였지만 내 하숙에서 마주 앉아서는 처음은 자연 화제가 그리로 뻗었었다. 처음에는 화제가 그 방면으로 배회하였었지만 요한과 내가 마주 앉으면 언제든 이야기의 종국은 ‘문학담’으로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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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운동은 그 방면 사람에게 맡기고 우리는 문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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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문학으로 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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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한 ‘문학담’‘문학토론’보다도 구체적으로 신문학운동을 일으켜 보자는 것이 요한과 내가 대할 적마다 나오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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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밤도 우리의 이야기는 그리로 뻗었다. 그리고 문학운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同人制(동인제)로 문학잡지를 하나 시작하자는 데까지 우리의 이야기는 진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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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원이면 창간호를 낼 수 있다. 그리고 매호 100원씩만 추가하면 계속 발간할 수 있다는 요한의 말에 그러면 그 자금은 내가 부담하기로 하고 자금도 자금이려니와 손맞잡고 일해 나갈 동인을 고르자 하여 늘봄(長春(장춘) 田榮澤(정영택)), 흰뫼(白岳 金煥(백악 김환)), 崔承萬(최승만) 등을 우선 내일이라도 찾아가서 동인되기를 권유하고 장차 孤舟 李光洙(고주 이광수)를 끌어넣고 그때는 이 땅에 어찌도 엉성한 지 이 이상 동인 될 만한 인물을 찾아내기조차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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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의 이름은 《創造(창조)》라 하기로(처음에는 요한이 《창조》는 종교 내음새가 있다고 약간 반대하였지만)하고 밝는 날 곧 평양 어머님께 전보쳐서 창간비 200원을 청구하기로 하고, 둘(요한과 나)이서 내 하숙집 자리에 든 것은 새벽 다섯시도 지나서 우유배달 구루마의 소리를 들으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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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서 요한과 나는 하숙에서 함께 조반을 먹고 아오야마(靑山(청산))의 전영택을 찾으러(동인되기를 청하러) 내 하숙을 나섰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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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국에 들러서 200원 보내달라고 전보를 어머님께 치고 아오야마의 전영택을 찾아서 함께 김환을 방문하고 다시 최승만을 방문하여 모두 동인되마는 쾌락을 듣고 요한, 전영택, 나 셋이서 어떤 양식점에 들러서 함께 런치를 먹을 때, 우리들의 기쁨과 흥분으로 떠드는 이국말 소리에 다른 객들은 놀라는 눈을 우리에게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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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4천 년, 이 민족에게는 ‘신문학’이라는 꽃이 그 봉오리를 벌리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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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은 모르지만 한문이 이민족의 글로 통용되며 모방 한문학으로 민족의 문학욕을 이렁저렁 땜질해 오던 이 민족에게 그 ‘문학 갈증’의 욕구에 대응하고자 우리 몇몇 젊은 야심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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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국권을 회복하려는 ‘3․1운동’의 실마리가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이 1918년 크리스마스 저녁이요, 민족 4천 년래의 신문학 운동의 봉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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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잡지 발간의 의논이 작정된 것이 또한 같은 날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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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더러 그 《창조》 창간호가 발행된 1919년 2월 8일은 또한 ‘3․1운동’의 전초인 ‘동경 유학생 독립선언문’ 발표의 그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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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신문학 운동의 봉화는 기묘하게도 3․1운동과 함께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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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내 나이 열아홉― 요한도 동갑으로서 내가 요한보다 한 달인가 두 달 먼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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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역사는 4천 년이지만 우리의 문학의 유산을 계승받지 못하였다. 우리에게 상속된 문학은 한문학이었다.前人(전인)의 유산이 없는지라, 우리가 문학을 가지려면 순전히 새로 만들어내는 수밖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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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가운데서도 나는 ‘소설’을 목표로, 요한은 ‘新詩(신시)’를 목표로 주춧돌을 놓고서 그 자리를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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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문장으로 구성되는 자이라, 우선 그 문장에서 소설이면 소설용어, 시면 시용어부터 쌓아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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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30년 전의 일이요, 오늘날은 벌써 소설이며 시에 대하여 그 용어의 스타일이며 본때가 확립되어 있어서 오늘날 소설이나 시를 쓰는 사람은 그 방면의 고심이라는 것은 아주 면제되어 있지만 지금에 앉아서 보자면 평범하고 당연한 ‘문장’도 처음 이를 쓸 때에는 말할 수 없는 고심과 주저라 는 관문을 통과하고서 비로소 되어진 것이다. 우선 문장의 구어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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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이전에도 소설은 대개 구어체로 쓰여지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 ‘구어’라는 것이 아직 문어체가 적지 않게 섞이어 있는 것으로서 ‘여사 여사 하리라’‘하니라’‘이러라’‘하도다’등으 구어체로 여기고 그 이상 더 구어체화 할 수는 없는 것으로 여기었다. 신문학의 개척자인 춘원 이광수의 소설을 볼지라도 《창조》가 구어체 순화의 봉화를 들기 이전(1919년 이전)의 작품들을 보자면 (「無情(무정)」이며 「開拓者(개척자)」등) 역시 ‘이러라’‘하더라’‘하노라’가 적지 않게 사용되었고, 그 이상으로 구어체화 할 수는 없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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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에서 비로소 소설용어의 순구어체가 실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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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어체’화와 동시에 ‘過去詞(과거사)’를 소설용어로 채택한 것도 《창조》였다. 모든 사물의 형용에 있어서 이를 독자의 머리에 실감적으로 부어 넣기 위해서는 ‘現在詞(현재사)’보다 ‘과거사’가 더 유효하고 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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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서방은 일어서다. 일어서서 밖으로 나간다’하는 것보다 ‘김 서방은 일어섰다.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하는 편이 더 실감적이요, 더 유효하다 하여 온갖 사물의 동작을 형용함에 과거사를 채택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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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를 중축으로 《창조》 이전의 소설을 보자면 그 옛날 한문소설은 무론 이요, 李人稙(이인직)이며 이광수의 것도 모두 ‘현재사’를 사용하였지 ‘과거사’를 쓰지는 않았다. 《창조》 창간호에 게재된 나의 처녀작 「弱 (약)한 者(자)의 슬픔」에서 비로소 철저한 구어체 과거사가 사용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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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우리말에는 없는 바의 He며 She가 큰 난관이었다. 소설을 쓰는데 소설에 나오는 인물을 매번 김 아무개면 김 아무개, 최 아무개면 최 아무개라고 이름을 쓰는 것이 귀찮기도 하고 성가시기도 하여서 무슨 적당한 어휘가 있으면 쓰고 싶지만 불행히 우리말에는 He며 She에 맞을 만한 적당한 어휘가 없었다. He와 She를 몰몰아(성적 구별은 없애고) ‘그’라는 어휘로 대용 한 것 ― ‘그’가 보편화하고 상식화한 오늘에 앉아서 따지자면 아무 신통하고 신기한 것이 없지만 이를 처음 쓸 때는 막대한 주저와 용단과 고심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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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말의 ‘違(위)ひなかつた’를 직역하여 ‘틀림없다’‘다름없다’등으로 처음 쓸 때의 그 어색함도 아직 기억에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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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꼈다’‘깨달았다’등의 형용사를 갖는 의의와 전연 다른 방면에 활용하여 재래의 우리말이 표현할 수 없는 특수한 기분을 표현하는 데 사용하였다. 지금은 ‘느꼈다’‘깨달았다’등이 소설용어로는 보편화되었지만, 처음 그 어휘를 쓸 적에는 도무지 틀에 맞지 않아서 스스로도 불안에 불만을 느끼면서(즉 이런 ‘느낀다’는 형용사) 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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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소설이나 시를 쓰는 후배들의 어느 누가 이런 방면의 고심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태고적부터 우리말에 이런 소설용어가 있었겠지쯤으로 써 나아가는 우리의 소설용어―거기는 남이 헤아리지 못할 고심과 주저가 있었고 그것을 단행할 과단성과 만용이 있어서 그 만용으로써 건축된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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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의 혈기. 게다가 자기를 선각자노라는 어리석은 만용 ― 이런 것들이 있었기에 조선 소설용어의 주춧돌은 놓여진 것이다. 그 만용만 없었던들 소설 중에의 주춧돌은 튼튼히 놓여지지 못하고 3․1 전환기를 지내 군웅난립의 세상을 만나서 소설용어는 혼란 상태에 빠졌을 것이다. 3․1은 우리 민족의 큰 전환기다. 3․1때에 旣成(기성)이던 사람은 ‘기성인’으로, 3․1 뒤의 사람은 ‘후인’으로, ‘기성인’은 ‘후인’에게 대하여 지도권을 잡았기에 말이지, 3․1 때에 소설용어에 ‘기성 스타일’이 없었다면 3․1 뒤의 군웅이 亂生(난생)하여 제각기 자기를 주장하여 천태만상의 소설용어 스타일이 생겨났을 것이다. He며 She에 대해서도, 3․1 후에 어떤 사람은 ‘저’‘저 여자’를 주장하고 어떤 사람은 ‘궐’ ‘궐녀’를 주장하여 한동안 제 주장을 고집하였지만, ‘그’라는 용어가 전기에 생긴 것이라 종내 ‘그’로 확 정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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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하면 ‘궐’ ‘궐녀’로 했던 편이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궐’이란 용어가 미처 생각나지 않아서 ‘그’로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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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창간호에 나는 「약한 자의 슬픔」이란 소설을 썼고 주요한은 「불 노리」란 시를 썼다. 그 전해(1918) 4월에 나는 결혼을 하였다. 양력 4월에 결혼을 하였는데 그 음력 4월 8일 석가여래의 탄일에 평양에서는 수십 년래 쉬었던 큰 관등놀이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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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못하였던 것이니만치 호화롭고 굉장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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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결혼하고 신혼여행으로 금강산을 돌아서 집으로 돌아오니 관등놀이다. 처갓집에서는 사위맞이 축하 겸 큰 배를 한 척 구하여 뱃속 잔치 열고, 觀燈船(관등선)에 섞이어 유쾌한 한 저녁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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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 잔치, 관등 ― 하도 마음이 기뻐 그 관등놀이의 굉장하고 훌륭함을 요한에게 말하였더니 거기서 名篇(명편)「불노리」의 노래가 생겨난 것이었다. 《창조》 창간호에는 요한의 시 「불노리」와 전영택의 소설, 최승만의 희곡, 내 소설 등으로 인쇄는 橫濱(횡빈)(요꼬하마)에 있는 복음인쇄소에 맡겼다. ‘복음인쇄소’는 조선 성경을 인쇄한 곳이다. 조선글 활자는 충분하였지만 직공이 조선글을 모르는 일본인이라, 글자 모양으로 보아서 문선을 하느니만치 ‘号(호)’자와 못’자‘외’자와 ‘’자 등이 혼동되고 ‘’‘’등 아랫자는 넉넉하지만 ‘깔’‘생’등은 부족한 따위의 불편이 여간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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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글이 활자화되는 것만도 신통하고 신기한데 그것을 자기의 손으로 교정까지 보노라니 마음의 유쾌 만족은 이를 데 없었다. 자기의 글이 활자화되고 그 활자화된 글을 또 독자의 손에 들어가기 전에 교정보면서 고치고 싶은 데는 고치기도 하고, 진실로 유쾌한 일이었다. 「약한 자의 슬픔」의 원고(인쇄소에 넘겨서 인쇄하고 되돌아온)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군데군데 좀 먹은 채 내 손에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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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호의 원고가 인쇄소로 넘을 때 창간호의 견본이 우선 왔다. 그리고, 2 월 초여드렛날 그 1천 부가 횡빈서 동경에 철도로 오기로 되어서 그 전날인 이렛날은 흥분되어 어서 명일이 오기를 기다리며 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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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드렛날은 두 가지의 일이 있다. 하나는 무론 횡빈서 본사(김환의 하숙) 로 도착된 잡지를 보러 본사로 가는 일이요, 또 하나는 이 날 또 유학생의 모임이 청년회관에서 열리는데 거기도 가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여드렛날 일찌기 일어나선 조반을 채근하여 먹고 막 나서려는데 웬 손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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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히 내미는 명함을 보니 와까마쓰(若松(약송)) 경찰서 형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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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펑펑 내리는 이른 아침의 길을 형사와 동반하여 와까마쓰 경찰서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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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조선 여자도 한 사람 와까마스 경찰서로 불리어 취조를 받았다. 金(김)마리안가 黃愛德(황애덕) 혹은 黃信德(황신덕)인가, 조선 학생 집회에서 간간 보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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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는 무슨 취조를 받았는지 모르지만 나는 요컨대 《창조》 창간 비용 으로 집에서 200원 갖다가 쓴 것이 학생의 신분으로는 큰 돈이라 무엇에 쓴 것이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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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잡지 창간 비용으로 쓴 것이 판명되어 당일로 무사히 석방이 되었다. 경찰에서 무사히 나와서 아오야마의 본사로 가서 거기서 비로소 유학생 독립선언 발표의 전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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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 유학생과 일본 경찰의 투쟁의 막은 열렸다. 그로부터 유학생은 청년 회관 혹은 히비야 공원에 집합하여 일본 경찰을 상대로 연일 투쟁을 하였다. 그 어떤날 히비야 공원에서 집회하였다가 경찰에서 해산을 당하고 몇몇은 경시청으로 引致(인치)가 되었는데, 다른 10여 명 학생은 곧 다시 석방되고 나와 李達(이달)이라는 학생이 하룻밤 검속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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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건이 《大阪朝日(대판조일)》과 《東京日日(동경일일)》 신문에 보도되어 집에서는 깜짝 놀라서 ‘어머님 병환이 위독하니 곧 귀국하라’ 전보를 내개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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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보가 거짓 전보인 줄을 알 까닭이 없는 나는 깜짝 놀라서 주요한을 찾아서 《창조》의 뒷일을 부탁하고 그 날 밤차로 동경을 떠났다. 3월 초하룻 날이었다. 기차가 大阪(대판)을 지날 때에 기차에서 신문을 사서 보니 조선서는 무슨 사건이 발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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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큰 사건으로는 알지 않았다. 그 새 10년간 겪은 寺內(사내)와 長谷 川(장곡천)의 무단정치 아래서는 무슨 큰 사건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동경서도 그 새 한 것처럼 몇백 명씩 모여서 수군거리다가는 해산당하고 그런 일쯤이 있은 것으로 추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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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關(하관)서 연락선에 오를 때와 부산서 뭍에 내릴 때에 경계가 좀 심한 것은 느꼈지만 3․1의 그렇듯 크고 웅대하고 장쾌한 사건이 폭발되었으리라고는 뜻도 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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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에서 비로소 윤곽을 짐작하였다. 뿐더러 이전 같으면 일본인인 기차 전무차장에게 벌벌 떨 시골 노인네가 전무차장에게 무슨 호령을 하는 광경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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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민족은 살았구나. 寺內(사내)의 총뿌리로도 민족의 혼은 죽이지 못하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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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칵 눈물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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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경성을 지나면서 因山(인산) 구경 왔다가 3․1을 겪고 돌아가는 사람 에게서 비교적 정확히 3․1의 웅대한 멜로디를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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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에서 듣는 감격의 뉴우스에 도취되면서 평양까지 이르러 집으로 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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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열다섯 살까지의 소년 시기를 평양에서 지냈지만 친구가 없는 사람이다. 본시 교제성이 없는 위에,‘나쁜 가정의 아이들과 사괴지 말라’는 교육방침 아래서 자라니만치 소학교의 동창은 있지만 서로 가정으로 찾아다닐 만한 친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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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의 국민자숙으로 거리도 쓸쓸하고 친구도 없고 집에 박혀서 책이나 읽을 밖에는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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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나의 아우가 제 동무들과 謄刷版(등쇄판)으로 격문을 찍어서 밤마다 시내에 돌리고 있었는데 그 격문의 원고를 하나 초하여 달라 하므로 초하여 주고 그 때문에 3월 스무엿샛날 경찰에 붙들렸다. 경찰로 감옥으로 꼭 석 달을 지내서 6월 스무엿샛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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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징역, 2개년 집행유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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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판결을 받고 다시 밟은 세상에 나와서 보니, 인쇄소에 넘기기만 하고 그 뒤를 관계치 못한 《창조》 제2호는 무론 인쇄는 다 되었지만 격변하는 세태가 어찌될지 예측할 수 없어서 책을 본사에 가려두었다 하며, 본사에는 김환 혼자서 유숙하고 있고 전영택도 귀국해 있었고 주요한도 귀국하여 내 안해와 협력하여 무슨 격문을 하나 꾸며 시내에 돌리고 요한은 上海(상해) 로 피신을 하고, 바야흐로 일어서려던 조선 신문학은 3․1에 봉착하여 정돈상태로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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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운동은 3․1에 봉착하여 동인은 산지사방하고 정돈상태에 있었지만, 시민생활은 3․1 이전으로 복귀되어 시집갈 이 시집가고, 장가갈 이 장가가고 다시 평온한 원상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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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는 조선의 3․1사건을 결국 寺內(사내) 총독 무단정치에 대한 반항이라고 하여 해군대장 齋藤實(재등실)이를 조선총독으로 내보내고 조선에 문화정치를 편다는 것을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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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齋藤實(재등실)의 문화정치의 배에 편승하여 조선에도 몇 개의 잡지와 민간 신문이 발간되었다. 그리고 출판을 목표로 하는 회사도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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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하고 廉尙燮(염상섭)하고의 새에 논전이 한번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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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창조》 동인이라 하면 조선 문화계의 한 빛나는 존재로 되어 김환도 《창조》 동인이 된 덕에 동경 유학생 기관 잡지 《學之光(학지광)》의 편집 위원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위풍(?)으로써 동경 조선인 YMCA의 기관 잡지 《現代(현대)》에 무슨 소설을 하나 썼다. 김환은 자기가 동인관계를 갖고 있는 《창조》에 자기의 소설을 발표하고자 했지만 내가 그것을 엄금하기 때문에 하릴없이 《현대》에 발표한 것이었다. 《현대》는 《창조》 동인인 崔承 萬(최승만)이 편집책임자였다. 그런데 그 《현대》에 실은 김환의 소설에 대하여 염상섭이 비평문을 써서 《현대》 잡지에 보냈다. 그 염상섭의 비평문 가운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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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전의 무슨 소설을 써서 《학지광》(동경 유학생 기관지)에 기고하였더니 그 《학지광》 편집위원인 김환이 내 소설을 沒書(몰서)하였기에 김환은 얼마나 소설을 잘 쓰는 사람인가 했더니 이번 《현대》에 난 것을 보니 이 꼴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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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서두로 김환의 소설을 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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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서두문은 즉 감상문이라 편집원 최승만이 애전에 삭제하고 그 원문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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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실어주고 그 사정을 내게 편지로 알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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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때 문학에 대하여 청교도 같은 결백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라(그러니만치 김환의 소설은 《창조》 지상에는 싣지 못하게 한 것이다) 염상섭의 이 개인 공격적 비평을 문학의 모독이라 보아 성냈다. 그리고 상섭이 봉직하고 있는 창간 초기의 東亞日報(동아일보)에 염상섭의 비평 태도를 공격하는 글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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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 작품에 대하는 비평가는 그 작품의 작자에게는 이래라 저래라 할 아무 권한도 없고, 독자에게 대하여 그 작품의 호불호(즉 감상방법)를 설명하는데 그치는 것이 마치 활동사진에 변사의 지위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염상섭이 김환의 소설을 비평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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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학지광》 편집원 시대에 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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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과거의 원혐을 들고 나왔으니 이는 불순한 비평이요, 따라서 廉(염)의 이번의 태도는 좋지 못하다는 나의 논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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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대하여 염상섭은 같은 동아일보 지상에 대답하여 작품 비평가는 범죄에 대한 재판관같이 그 작품을 쓰게 된 동기며 원인까지도 추궁할 권한이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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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논전이 계속되는 그동안에 염상섭, 吳相淳(오상순), 黃錫禹(황석우) 등이 ‘동인제’로 《廢墟(폐허)》라는 잡지를 창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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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조선에는 《창조》에 대하여 《폐허》가 생기고 ‘창조파’에 대한 ‘폐허파’가 생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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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에도 이광수가 동인으로 가입하고, 吳天錫(오천석)이 들고 李一(이 일)이 들고, 새로 동인들이 늘면서 속간을 시작하였다. 그때 《창조》는 과연 문학청년들의 애모하는 푯대였다. 《창조》 지상에 글 한 번 실어 보는 것을 큰 영예로 알았다. 朴×胤(박×윤)이 자기의 소설을 한 번 《창조》에 싣게 해 달라고 그 교환 조건으로 《창조》 한 호의 발간 비용을 부담하겠다는 소청을 한다고 김환이 누차 조르므로 제5호인가 6호인가의 한 호 발간비를 부담시키고 박×윤의 글을 한 번 실은 일이 있다. 또 方×根(박×근)도 그런 사정으로 한 번 싣기로 하였는데 그다지 신통치도 않은 소설을 두 회분을 써 왔으므로 하반부는 몰서하여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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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그때의 작품도 돌아보면 하나도 신통한 것이 없었지만 자기 딴에는 걸작이라는 신념으로 썼다. 더우기 ‘그’라는 대명사며 순구어체와 과거사의 ‘소설용어 방침’이 후배들에게 그냥 답습되어 조선 소설용어의 기준이 되는 것을 바라볼 때 스스로 만족감을 금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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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선문학을 대표하는 두 파― 《창조》와 《폐허》는 그 칭호가 꼭 그들의 길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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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파’는 다 제 밥술이나 먹는 집 자제들로서 생활이 안정되니만치 자연 창조적이요 명랑하고 생기발랄하고 용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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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반하여 ‘폐허파’는 폐허적 퇴폐 기분에 싸이어서 침울하고 암담하고 보헤미안적 생활을 경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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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폐허파’의 퇴폐적 기분을 싫어하여 《폐허》 동인이던 金岸曙(김안서), 金惟邦(김유방), 金彈實(김탄실) 등 몇 사람이 《폐허》를 탈퇴하고 《창조》로 옮겨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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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폐허파’에는 스스로 결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花形(화형)은 ‘소설’인데 ‘폐허파’에는 소설작가가 없었다. 閔泰 瑗(민태원)(牛步(우보))이 《폐허》의 소설을 대표하는 작가인데 그는 통속작가로는 3․1 이전의 사람이지만 끝끝내 통속의 역을 벗지 못했고, 오상순 (시), 황석우(시), 金萬壽(김만수)(철학), 염상섭(평론) 등등으로 소설작가가 없었다. 《창조》에는 이광수가 있고 전영택이 있고 내가 있고 하여 조선 소설계를 대표하는 작가가 전부 모였고, 시로는 요한이 있고 김안서가 있고 오천석이 있고 하여 신시의 수령이 다 모여서 조선 문단은 《창조》로 대표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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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창조파'에서 세운 소설용어 스타일이 조선 소설의 표준(이광수도 과거에 쓰던 문어체의 잔재를 아주 청산하였다)이 되었는지라, 《창조》의 광휘가 찬연히 빛나는 반비례로 《폐허》는 음울한 생명을 유지하다가 그나마 제2호를 간신히 발행하고는 폐간하여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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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창조》에서 엄이 돋아 오늘에 이르기까지 30년, 《창조》를 일으켜 서 키운 주요한, 전영택, 내가 아직 그냥 살아서 이 문단의 일원으로 아직 그냥 움직인다 하는 것은 희유한 경사라고 할 수도 있다. 게다가 당년 《폐허》의 일원이던 염상섭이 소설가로 전향을 하여 그의 건필을 그냥 두르는 것은 이 또한 큰 경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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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받은 조선 문단― 그 창시 때의 사람들의(폐허파와 창조파) 중요한 멤버는 30년이 지낸 아직도 그냥 건재해 있다 하는 것은 인류 역사에도 쉽지 않을 경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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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폐허》에 뒤달려 생겼던 바 《白潮(백조)》가 중요한 멤버의 거지반 을 저 세상으로 보낸 것(羅稻香(나도향), 玄憑虛(현빙허), 洪露雀(홍로작), 金浪雲(김낭운), 李相和(이상화), 盧子泳(노자영), 그 밖 여러 사람이 죽었다)처럼 《창조》 《폐허》의 원로들도 죽었다면 오늘날의 조선 문단은 얼마나 쓸쓸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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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희유의 경사를 스스로 축하하는 뜻으로 내가 과거 30년간 걸어온 문단의 자취를 더듬어 보아서 그간 나의 주변에 일고 잦은 에피소드, 일화 등을 차례로 적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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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현재 살아 있는 사람의 명예에 관계된 일도 없지 않을 것이고, 쓰기 곤란한 일도 없지 않을 것이나 내가 죽으면 무덤 속에 감추어져 버릴 것이 아까와서 모든 고장을 무릅쓰고 적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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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도 그 점을 미리 양해해 주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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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인(金東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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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3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