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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단(文壇) 30년의 자취 ◈
◇ 辱設(욕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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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3~
김동인
1
문단(文壇) 30년의 자취
2
辱設(욕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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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1932년경을 전후하여 문단 한편 귀통이에는 욕설 비평이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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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이 일본에게 합병된 지 20여 년 그 새 펴보지 못하여 압축된 감정을 펴보기 위하여 하는 욕이라 누구에게든 다닥치는 대로 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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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批判(비판)》이란 잡지는 이 욕으로 판매정책을 세웠다. 좌익잡지라는 구호였지만 당시의 조선총독부 검열정책이 좌익사상을 약간이라도 선전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던 시절이라, 비록 자칭 ‘좌익계동’의 잡지라 하나 《비판》은 총독부 검열에 파스하는 잡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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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 잡지의 선동의 덕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나도 욕을 꽤 얻어 먹은 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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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누구에게 욕을 먹었는지 지금 기억할 수 없으나 必承(필승) 安懷南(안회남)이며 水原(수원) 朴承極(박승극) 등의 욕은 지금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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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남이 나를 욕한 것을 내가 밉다든가 하여서가 아니라 회남 자신이 출세 욕에 초조한 나머지, 왜 좀 후진에게 글을 비켜주지 않느냐는 나무람에서 나온 욕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에게 할 욕이 아니고 잡지(혹은 신문) 간행자에게 할 욕이었다. 신문이나 잡지의 간행자도 자기네의 신문(혹은 잡지)를 많이 팔자니 자연 지명인에게 글을 청구할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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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또한 원고료로써 생활을 해 나아가는 사람이매 잡지(혹은 신문)의 요구에 거절하지 않고 승낙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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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회남의 초조한 생각으로는 김의 글 부탁을 좀 거절해 주면 그것이 자기 몫에 돌아올는지도 알 수 없으리라는 기대로서 내가 무슨 글을 쓰기만 하면 달려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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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그때 글을 좀 많이 썼다. 寡作(과작)을 자랑하던 예전과 달라서 글을 써서 그것으로 생활을 유지해야 할 입장에 서 있더니만치 부탁받는 글은 하나도 빠지지 않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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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문단이라는 것이 형성된 지 우금 39년, 오직 붓대만으로(딴 직업은 가져보지 않고) 생활을 경영한 사람이 나 단 한 사람밖에 없다면 넉넉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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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나에게는 남의 출세에 방해되고 어쩌고 그런 문제는 고려할 여가조차 없었다. 다만 사람이 살아 나아가는 막대한 비용을 오직 붓끝만으로 변통해 나아가는 일만이 신기하고 기특하여, 어디서 글 부탁하는 사람이 걸려 들기만 하여라고 기다리는 판이니, 어찌 남을 고려할 수가 있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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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지라, 뒷날 회남이 출세를 하여 문단의 일원이 되어 있는 오늘, 나는 회남에게 대하여는 전날의 욕설을 아주 잊어버리고 그의 대성만 고요히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박승극이 내게 욕설을 퍼부은 것은 그 의도가 더럽다 보아서 아직 내게 불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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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조선일보(方應謨(방응모) 조선일보다)에서 학예부의 일을 40일간 맡아본 일이 있다. 그 어떤날 수원 박승극이라는 사람에게서 꽤 방대한 ‘農民文學論(농민문학론)’이라는 원고 뭉텅이가 우편으로 배달이 되었다. 그래서 그냥 서랍에 집어넣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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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일 뒤 편집국장 주요한에게서 ‘농민문학론’을 왜 지상에 싣지 않느냐는 채근이 있었지만, 아직 보지도 않은 것이라 그저 그냥 버려두었더니 그 뒤 또 2, 3일 지나서 수원서 장거리 전화가 왔는데 가로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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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는 박승극이라는 농민문학론의 저자인데 왜 자기 원고를 신문지상에 발표하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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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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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내가 무엇이라 대답했는지는 기억치 못하려니와 좌우간 내겠다고 승락은 안 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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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또 며칠이 지나서 웬 젊은 사람이 조선일보로 찾아와서 박승극의 편지를 내밀며 그 원고의 반환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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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그 박씨와 나와는 원수지간이 되어서 그가 이용할 수 있는 온갖 언론기관을 이용해 나를 욕하기 여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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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는 그 뒤 몇 해를 두고 나를 욕하고 욕하다가 그만 기진했는지 그 욕을 중지한 것은 여러 해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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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작컨대 박씨에게 있어서는 그 ‘농민문학론’이 꽤 애쓴 글이었던 모양인데 그것을 그냥 도로 반환한 데서 그의 노염을 그렇듯 돋우었던 모양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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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문사치고 가장 욕많이 먹는 사람은 춘원이었고 내가 그 다음으로는 가는 모양이다. 가끔 뜻하지 않은 사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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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선생을 좀 욕한 일이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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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는 변명 비슷한 말을 듣는데, 나는 당년 그 욕에는 아주 무관심하여 누구누구가 무슨 욕을 했는지 알지도 못하고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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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방응모 조선일보에 40일간 봉직할 그 어떤날 같은 사의 촉탁으로 있던 故(고) 文一平(문일평)이 은근히 나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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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선생, 미안한 청탁이 하나 있는데요. 내 어떤 친구가 이즈음 생활이 아주 곤란한 모양인데, 그 친구가 소설을 하난 썼노라고 그것을 조선일보사 에 사주면 해서 그러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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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청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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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간 그 원고를 한번 보여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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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 친구가 언젠가 김 선생을 어느 잡지에서 욕을 했대요.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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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런 건 일일이 기억도 못합니다. 원고를 좌우간 보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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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문일평은 한 뭉텅이의 원고를 내어놓았다. 그 원고란 民村(민촌) 李箕永(이기영)의 「쥐불(鼠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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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촌이 언제 어디서 나를 욕하였는지 나는 모른다. 좌우간 민촌 자신이 기억하느니만치 헐한 욕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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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때 민촌이란 이름은 ‘살인 방화’식의 좌익작가로 기억하고 있더니만치 또 여전히 ‘살인 방화’식 소설이려니 하여 썩 마음에 내키지 않는 것을 문일평에게 대한 대접으로 읽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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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계통에 살인 방화가 아닌 소설을 쓰는 사람도 있구나 하여 곧 전표를 떼어 약소한 원고료나마 문일평에게 내어주고 그 「쥐불」은 약간한 가필을 할뿐 조선일보 지상에 싣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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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실마리가 되어서 민촌은 그 뒤이어 조선일보에 연재 장편을 쓰게 되고 그게 문단 한편 구석에서 욕과 살인 방화 소설 따위로 겨우 존재를 알리었던 민촌이 당당한 중앙 무대에 나서게 된 것이다. 민촌더러 말하라면 이것은 자기 작품이 우수했던 탓이라고 호언할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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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시에 있어서 동아일보는 전연 단편 창작은 취급하지 않고 우익잡지들은 좌익계의 작품은 읽지도 않고 몰서하는 형편 아래서 「쥐불」이 다른 신문이나 잡지에서 용납되었을 까닭이 없고 조선일보 곧 아니더면 민촌의 출세는 몇 해를 뒤지든가 혹은 아직껏 「쥐불」의 원고를 부여안고 방황하는 중일는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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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뒤 다시 「쥐불」을 읽을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책으로까지 났다는 그 표지는 보았지만.
 
40
그러나 좌익작가가 고수하여 오던 바의‘살인 방화’식의 소설에서 벗어나려는 그 첫 작품으로 특필할 가치가 있는 작품이었다.
【원문】辱設(욕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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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3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