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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향년(享年) 오십칠 세로서 이스탄불(구 콘스탄티노플)에서 객사(客死)한 브루노 타우트(Bruno Taut, 180-1938)는 쾨니히스베르크(Konigsberg)의 산(産)인 근대 세계적 대건축가였다. 에리히 멘델존(Erich mendelsohn),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한스 푈지히(Hans Poelzig), 페터 베렌스(Pe-ter Behrens) 들과 함께 구주대전(歐洲大戰) 후의 독일 표현파의 쟁쟁한 거장이었다. 그는 마이스터(Meister)인 동시에 프로페서(profesor)였다. 마이스터로서의 그는 많은 지들룽(Siedlung)과 볼문겐(Wolmungen)과 바우블록(Baublock)을 독일에 남기었고, 소련과 토이고(土耳古) 정부의 초빙을 받아 도시문제·건축문제에 참가하였지만, 소련에서는 정부의 사정으로 말미암아 계획이 중단이 되어 타우트가 작품을 남기지 못하게 되었고, 토이고에서는 계획 중도에서 절명(絶命)이 되어 또한 남기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은 독일에 중심되어 남아 있다 하겠는데, 건축이라면 항용 우리는 가족 본위의 개개의 소주택 건물, 집상적(集象的)인 것으론 학교·병원·백화점·여관·관청· 공장·정거장·은행·회사 등의 양적으로 클 따름인 대건축을 상상할 따름이지만, 바우블록·볼문겐·지들룽 들은 이 땅의 언어·개념으로서 번역할 수 없는 것으로서 그것은 근본적으로 사회정책에 입각한 전체주의에서 출발하여 개별적 건물들이 이 전체주의에서 파악되어 안배되고 건설되어 각개의 건물들이 유기적으로 종합이 되어 이 전체주의에 기능적으로 연결된 위에 처결(處決)된 건축들이니, 이는 세계대전을 겪고 난 구주 제국(諸國)에 있어 유사 이래에 처음으로 체험한 대동란(大動亂)의 혼효(混淆)를 처리하는 한편, 다시 또 팽창되는 사회의 혼둔(混鈍)을 처리하자는 데 있다. 그러므로 현대의 건축가들은 과거의 목수장이들과 같은 기술자로서의 직분에서 떠나, 그러한 기술자로부터 분간(分揀)된 사회정책의 정견가, 인생관·세계관의 탐구자, 예술철학 기타 일반 문화에 대한 일가견, 이러한 데 깊은 식견을 가지려 하고 또 갖고 있게 되나니, 마이스터로서 프로페서가 되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라 하겠다. 그는 『프룰리히트(Fruhlicht)라는 잡지를 주재(主宰)하고 있었고 저술로서,『도시의 왕관(Die Stadtkrone)』『알프스 건축(Alpine Architektur)』『우주건축가(Der Weltbaummister)』『도시문제의 해결(Die Auflosung der Stadte)』『신주택(Neue Wohnung)』 등 유명한 저술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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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본미의 재발견』이란 것은 193년 5월에 일본건축의 시찰로 왔다가 약 삼 년유 반(半) 1936년 10월에 토이고로 가기까지 일본에 체재한 동안에 발표된 것이니, 내용 목차를 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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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건축의 기초〔日本建築の基礎, 국제문화협회강연, 『일본평론(日本評論)』 1936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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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히다에서부터의 일본해 지역 여행 일기 초록(飛驒から裹日本旅日記抄, 『일본평론』 1934년 1월호-1935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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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눈의 아키타―일본의 겨울 여행〔雪の秋田―日本の冬旅, 『문예춘추(文藝春秋)』 1937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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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영원한 것―가쓰라리궁〔永遠なるもの―桂離宮, 산세이도(三省堂) 발행 『일본의 가옥과 국민(日本の家屋と國民)』 중 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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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되어 있다. 1·4는 본업적(本業的)인 건축미에 대한 이론과 설명이며, 2·3은 기행문이고, 5는 역자가 작자와 내용에 대하여 요령 있는 해설을 한 것이다. 나는 이 책의 편집체재가 바로 수박 같다고 생각한다. 1·4는 표피같이 딱딱한 편이요, 5는 꼭지요, 3·4는 수분 많은 내육(內肉)이다. 감수성의 예리함과 유모리스틱한 기성(氣性)과 자연에 대한 풍부한 시적 향락(享樂), 이런 것들로 채워 있는 순수한 기행문이다. 거기에는 하등의 페단틱(pedantic)한 점도 없다. 본업적인 이론도 없다. 우수한 문학작품의 하나로서의 기행문일 따름이다. 본업적인 건축이론·예술이론은 1과 4에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양자를 종합하여 그의 말한 바 내용을 소개해 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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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본건축을 통하여 무엇이 ‘일본적인 것’이며 무엇이 ‘비일본적인 것’이냐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이 ‘무엇이 일본적인 것’이며 ‘무엇이 비일본적이냐’는 문제는 중국과 조선의 여러 가지 문화가 일본에 영향되는 혼둔기(混鈍期)를 중심하여 그곳에서 일대 전환을 얻으려던 나라기(奈良期) 이후에 성립된 문제요, 그 이전의, 즉 원시일본문화기(原始日本文化期)에선 문제가 되지 않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남과 구별할 필요가 없는 것이요, 일본이니 비일본이니 할 문제가 성립될 필요가 없었던 때문이다. 그런데 이 원시일본문화에서 산출된 건축이란 일본과 같은 풍토의 제국(諸國), 예컨대 스칸디나비아, 스위스, 독일의 슈바르츠발트, 알프스 지방, 세르비아 및 일반 발칸 지방 등 국제적으로 공통되는 요소가 있어 원시문화기의 건축이야말로 이국적 특수적이라기보다 국제적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 로고스(logos)적인 것이니, 이러한 정신의 발달의 극치를 보이는 것이 이세 신궁(伊勢神宮)이다. 이세 신궁의 미는 인간의 이성을 반발시킴과 같은 실없는 요소가 없고, 그 구조는 단순하나 그 자체가 논리적이다. 그곳에는 후대 일본건축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번쇄(煩瑣)로운 장식에 얽매임이 없고, 구조가 곧 미적 요소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고 판〔型)에 박은 듯한, 즉 계산할 수 있는, 즉 청부적(請負的) 기술에 의하여 된 것이 아니요 진정한 의미에서의 ‘건축’인 것이다. 기교적인 것은 예술적인 것이 아니요, 지순(至純)한 구조학적 형식만이 예술적인 것이다. 이곳에 아크로폴리스(Akropolis)의 파르테논(Parthenon)의 가치와 이세 신궁의 가치 사이에 동일점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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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신은 불교문화가 수입된 이후에도 신야쿠시지(新藥師寺) 등 같은 구성적 이성을 가진 건물을 남기었고, 중대(中代)에 들어 헤이가(平家)의 문화가 그 정신을 갖고 있어 그 유풍이 히다국(飛驒國) 백용(白用)의 산골집 같은 데 남아 있고, 근세에 들어 도쿠가와시대(德川時代)의 교토 근방에 있는 가쓰라리궁(桂離宮) 같은 것으로 남아 있다. 이것들은 진실로 탁월한 정신의 자유로운 활동에서 구성된 것으로, 세계 건축계에 관절(冠絶)된 작품들이다. 그것은 ‘영원의 미’를 개두(開頭)한 것이요, 현대인으로 하여금 그와 동일한 정신에 의하여 창조할 것을 알려 주고 있는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일본적인 것’이요 ‘상대적인 의미에서의 일본적인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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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와 반대되는 미가 있으니, 말하자면 특수한 풍속과 지역이란 것이 한정을 받은 이역적(異域的)인 것 또는 이성을 잃은 기형적(畸形的)인 것, 그것은 창조적 정신을 잃고 능동적 정신을 잃고 모방과 반복과 안일의 정신에 젖은 것, 이리하여 엑조틱(exotic)하고 에트랑제(etranger)한 것, 일례를 들면 일본인이 시대에 적취(積聚)에서 곰팡내 나는 ‘사비(寂び)’라든지 ‘와비(佗び)’라든지 하는 것, 선적(禪的)인 일회적인 의미를 잃고 아카데미화한 다도(茶道)한 것, 골동화(骨董化)된 다실(茶室) 건물의 모방적 번복(飜覆)―구조적 특질을 잃은 수많은 불찰(佛刹)들―, 이러한 정신의 대표적 작품이 곧 닛코(日光)의 도쇼궁(東照宮)이다. 이 곳에서는 개개의 요소가 자유를 잃고 권력과 위의(威儀)에 습복(褶伏)되어 있고, 건축적 정신, 건축가의 독립적 개성을 잃은 목공장(木工匠)·기술장(技術匠)으로의 청부업자의 손으로 된 것이 있을 뿐이다. 이세 신궁을 그는 천황정신(天皇精神)에 의한 것이라 하고 도쇼궁을 장군정신(將軍精神)이 서려 있는 것이라 하여, 역대 일본의 제종잡다(諸種雜多)한 건물을 이 두 요소로 환원시켜 가지고 천황정신에 의한 이세 신궁이 곧 절대적 일본적인 것인 동시에 이성적 보편적인 것이요, 국제적 보편적인 것이라 하였다. 종장(終章)에 있어서 ‘영원한 것(永遠的なるもの)’이라는 장은 이러한 정신의 최고의 일례인 가쓰라리궁에 대한 구체적 감상평가의 서술이다. 그의 결론으로서 “이 이상 더 단순할 수 없고 이 이상 더 우아할 수 없다”고 가쓰라리궁을 평하였는데, 이는 목차 뒷장에 붙은 그의 명제(Axiom)로서 개현(開現)한 모토 ‘최대의 단순 속에 최대의 예술이 있다” 한 말의 구체적 설명이며, 또 가쓰라리궁 감상의 결론으로 “무릇 우수한 기능을 가진 것은 동시에 그 외관에서도 우수한 것이다” 한 자기의 평소의 주장이 곧 현대 건축정신으로서의 중심됨임을 말하였는데, 세인은 이를 오해하고 공리적(功利的)인 유용성이나 기능에만 국한시켜 해석하지만 자기의 본 정신은 이 가쓰라리궁에 유감없이 나타나 있다 하였다. 목차 뒷장에 붙은 명제로서의 다른 하나, “예술은 의미다” 한 명제의 뜻도 이곳에 있는데, 그는 예술에 대하여 이러한 설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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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자체는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것이다. 즉 예술은 일체의 계량과 합리적 공식화를 거부하는 영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의 영역은 지성과 교섭을 가졌다. 참말로 이러함이 없다면, 단(單)히 지성만이란 것은 빈약하여 생산에 견디지 못한다. 그러므로 예술이란 일체의 합리적 정의라는 것을 거부하면서도, 결코 신비적인 애매모호한 것이 아니다. 예술의 형식, 즉 예술적 소산은 감정에서 나오나니, 감정이 한번 한가(閑假)와 화정(和靜)을 얻어 예술에 집중되면 마침내 극히 명확히 긍정한다든지 혹은 부정함을 상사(常事)로 한다. 미의 형식은 그 기원을 찾을 도리가 없지만, 이리하여 객관적 사실로 성립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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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전(年前) 메이지쇼보(明治書房)에서 『닛폰(ニッポン)』이 발간되었을 적에도, 그곳에서도 그는 상술한 내용의 ‘일본적인 것’으로서의 이세 신궁, 가쓰라리궁 등을 극히 찬미하고 도쇼궁 등을 비일본적인 것으로 폄하하였다. 이때 후지오카 미치오(藤岡通夫) 씨와 같은 이는 그의 이러한 일원론적인 것을 거부하고, 도쇼궁은 기념을 요하는 영묘(靈廟)요, 가쓰라리궁은 주택이요, 이세 신궁은 신궁이라, 이와 같이 각기 목적이 다른 것이니 목적이 달라서 결론이 달라진 것을 이해치 않고 통틀어 거부한 것은 그의 편견일 뿐이라고 반박하기도 하였다.(동경미술연구소 발행 『화설(畵說)』 제1호 및 제3호) 이것은 브루노 타우트가 각개 실물을 거론한 데 있어 각개 건물의 목적, 따라 그것의 존재가치의 제한성을 무시하고 마치 그것이 절대 ‘일본적인 것’을 제시함에 결정적인 것같이 취급한 오류를 지적함에서는 충분한 반박이나, 어떠한 정신이 ‘일본적인 것’이냐는 것을 결정짓자면 타우트의 결론의 가부는 별문제하고 그의 일원론적인 단안(斷案)은 실로 그의 철저한 주견(主見)을 보이는 것으로 그의 태도에는 하등 서스펜스(suspense)한 점이 없다. 진실로 세계 건축계·예술계를 풍미하였던 당당한 그의 풍모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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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시노다 히데오(篠田英雄) 씨는 독일의 감능(堪能)한 이로 많은 철학서류(哲學書類)의 번역이 있는 이며, 타우트와 친교가 있던 사람이다. 또 역문(譯文)이 유려하여 마치 타우트가 일본문으로 직접 쓴 것을 읽는 거와 같은 순탄한 맛을 느끼게 된다. 백육십사 쪽의 장편(掌篇) 소책자이지만 원저서(原著書)의 여행 중 스케치가 많이 삽입되었고 일본 건축미의 정수(情粹)를 보이는 도판도 수엽(數葉)이 있어 정미(情味) 깊은 책자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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