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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분(花粉) ◈
◇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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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이효석
 

1. 4

 
2
집으로 돌아온 미란은 사람이 변한 듯 생활의 경영에 잡념이 없었다.
 
3
새 생활은 피아노와 함께 시작되었다.
 
4
대청에다 피아노를 들여놓고는 아침 저녁으로 닦고 꽃병을 세우고 맞은편 벽에 쇼팽의 초상화를 붙이고 자련자련 서두르는 것을 보고 세란은 새로운 한 사람의 동생을 보는 듯 변한 미란을 느꼈다. 변했다면 단주도 변한 것이 었거니와 미란도 그에지지 않게 변했음을 알았다. 단주가 얼굴이 길어지고 눈이 패어 들어간데 비겨 미란은 살이 붙고 눈망울은 우울을 떨치고 희망을 가득 담아 왔다. 밝은 빛이 보일 뿐이지 어두운 아무것도 없었다.
 
5
"여행 선물은 톡톡히 되는군. 피아노를 우려낼 젠 수완이 상당해."
 
6
야유 비슷 동생을 조롱은 해보아도 그 맑은 표정 속에서도 어두운 그림자라고는 찾을 수 없다.
 
7
바이야의 교칙본을 사가지고는 밤늦게까지 피아노를 울리는 것이었으나 온돌방에서 일찍 잠자리에 들어간 세란은 그 유치한 단음의 연속을 들으며 현마의 가슴을 뜯으면서 여행의 이야기와 피아노를 사게 된 곡절을 이야기 하라고 조르는 것이었다. 어세를 높이고 화를 내보고 하는 것은 현마가 도리어 자기들의 관계를 묻지나 않을까, 자기들의 저지른 상처를 다치지나 않을까 하는 조바심에서 나온 것은 물론이었다. 부엌 옆방에서 이 역 이불을 쓰고 누운 옥녀도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서 웬일인지 집안이 한꺼번에 밝아진 듯 두 사람이 돌아오자 모두 제대로 바로잡혀진 듯 느끼면서 주인 없는 속에서 밤낮으로 보게 된 무서운 광경이 사라지게 된 것을 기뻐했다.
 
8
단주는 주인이 돌아온 이상 자기의 직책은 다한 듯 다음날부터 제대로 아파트로 돌아게 되었다. 피곤한 속에서 지난 나날을 생각해 볼 때 날카로운 반성의 바늘이 가슴을 따짝따짝 찌르면서 미란을 만날 면목이 없는 듯 그는 벌써 잃어버린 것, 자기 손 닿지 않는 먼 곳에 날아가 버린 것인 듯한 착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자주 교외로 나갈 수도 없고 미란이 시내로 날마다 들어오는 것도 아니어서 만나는 날도 떴으나 만나도 침묵이 흐르고 사이 가 거북스러웠다. 적극적을 감정을 지도해야 할 것이 자기면서도 전에는 어 린 마음에 무섭고 부끄러워서 주저되던 것이 어른이 된 오늘에 있어서는 무서운 대신 죄스럽고 마음이 숙어지고 주저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미란의 감정의 적극적 발로는 원하는 것도 어리석은 것이 아직도 순결한 그에게는 지금에 있어서도 단주를 대할 때만은 마음이 두렵고 주저되는 것이었다. 그 외의 또 한 가지 그에게 오물되는 중요한 것---피아노에 마음이 쉴새없이 날아가는 것이 아니던가. 동경 갔던 여행의 이야기라고 천재소녀의 연주회 날 밤 이야기와 악기점에서 자기를 모욕한 청년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가 이번에 터득한 음악예술에 대한 불붙는 열정을 말할 때에 단주는 묵묵히 앉은 채 감동도 격려도 하는 법 없이 울적한 표정만을 지녀간다.
 
9
"왜 그리 말이 없어요."
 
10
단주는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들어 미란을 보는 것이나 똑바모 못 보고 다시 외면해 버린다.
 
11
"코밑에 수염은 무어예요. 연필로 칠한 것같이 까마잡잡하게. 벌써 그렇게 자랐나요. 어제까지 맨숭맨숭하더니."
 
12
말을 듣고 손이 코 아래로 간다. 제법 굵은 것이 거칠거칠하게 손가락을 간질이며 사실 이제는 벌써 아이의 솜털이 아니고 어른의 수염임을 느낀다.
 
13
여러 날 동안의 어지러운 생활 속에서 얼굴 하나 옳게 건사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길 때 더욱 용기를 잃어버린다.
 
14
"수염이나 멀끔하게 깎구 정신을 차려요. 정신이 나거든 놀러 오구요.
 
15
난 가요."
 
16
미란이 일어서는 것을 볼 때에야 잠을 깨인 듯이 덩달아 벌떡 일어서면서, 인전 사랑하는 사람이 "피아노란 말이지. 피아노가 제일이구 나 같은 건……"
 
17
수척한 꼴이 가엾어서 동정을 느끼면서도 미란은 솔직하게 대답한다.
 
18
"누구보다두 피아노가 나를 제일 부르는 걸요. 잠깐만 밖에 나와두 금시 불러들이군 하면서---그런 새암쟁이는 없어요."
 
19
피아노의 매력에 비기면 단주 역시 한 마리의 나귀 폭밖에는 안되었다.
 
20
훌륭하고 높은 것이 아닌 평범하고 속되고 다른 천마가지와 고를 바못되는 흔한 것으로밖에는 안 보이는 것이다. 가엾기는 하나 어쩌는 수없는 이런 감정으로 단주와 작별하면 쏜살같이 집으로 돌아와 피아노 앞에 앉는다. 마 음은 조급하게 앞을 내닫건만 손가락은 제 고집만을 피우는 초조한 심사로 건반 위에 임할 때 천분에 대한 의혹이 생기면서 악기점에서 자기를 모욕한 젊은 피아니스트의 기억이 마음속에 떠오르는 적이 많았다.
 
21
"차차 천분이 알려지나."
 
22
현마는 동경서 돌아온 뒤로부터 침착해진 듯 보이며 다시 점잖은 아저씨로 돌아가고 사의 일도 바빠져서 미란과 지내는 시간이 많지 않게 되었다.
 
23
저녁에 식사나 마치고 나면 대청에 들어가서 피아노 앞에 놓인 교칙본을 들고는,
 
24
"겨우 요 것밖엔 못 나갔어."
 
25
하고 페이지를 들척거린다.
 
26
"소설책이라구 머 며칠에 뗄까요."
 
27
미란은 샐쭉해지면서도 속으로는 부끄럽기도 하다.
 
28
"하긴 둔재는 일년두 걸린다더구만---아침부터 밤중까지 둥둥거리구 그래 겨우……"
 
29
책을 놓고 담배를 붙여 물면서,
 
30
"천분이 있다구 해두 바른 방법과 적확한 연습이 필요한 것인데."
 
31
"선생을 얻어 주세요 어서."
 
32
"배우는 바에는 격식대로 좇아야지."
 
33
이런 의론이 난 후부터 현마는 미란의 계발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마음에 훌륭한 선생을 염두에 두게 된 하룻밤 역시 대청에서 미란과 식후의 잡담을 건네다가 라디오를 틀었을 때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왔다. 피아노라면 귀가 뜨이게 된 미란은 주의가 집중되어 가는 동안에 그 곡조가 귀익은 생각이 났다. 폭풍우같이 열정적이다가 금시 고요해지면서 낙엽이나 떠는 듯 잔잔하고 서글픈 멜로디로 변하는 대목---갈데없이 천재소녀에서 들은「환상 즉흥곡」임에 틀림없어TEk. 쇼팽의 쓸쓸한 그 곡조였다. 연주하는 기술도 흡사 그날 밤의 소녀의 것과 같은 능락한 것임을 느끼면서 그 자리로 아침 신문을 헤치고 라디오란을 찾았다. 지방 방송의 연예시간에서 쇼팽의 작품집이라는 대목을 발견하고 신진피아니스트로 소개된 영훈이라는 이름을 신기한 것으로 들여다보았다. 영훈, 영훈---이름을 익히려는 듯 속으로 외어 보면서 쇼팽을 살리는 사람은 천재소녀뿐만이 아니라 가까운 한 고장에 그런 숨은 사람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또 한 사람의 공명자를 얻은 듯 마음이 빛났다. 예술의 길은 서로 통하는 듯, 다 같이 소팽을 목표로 하는 천재소녀, 영훈, 자기……사이에는 한 가닥의 피의 흐름이라도 있는 듯이 친밀히 느껴지며 그런 이해를 가지고 들을 때 음악도 한층 정답고 아름다웠다. 동경의 밤의 감흥을 다시 느끼면서 감격에 취하는 반면 예술에 대한 조바심이 더욱 치밀어 오른다.
 
34
"얼른 선생을 얻어 주세요, 영훈이를 밀치구 소녀를 따라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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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를 때 현맏도 쇼팽을 웬만큼 짐작하는 터에 감동 속에 잠겨 있다가 정신을 차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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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구 보니 제일 가까운 곳에 선생이 있군 그래."
 
37
라디오를 가리키면서,
 
38
"같은 쇼팽 해석자구 십상됐어."
 
39
"영훈이 말예요."
 
40
예술가의 이름은 소락소락 불러도 좋다는 듯 신문에서 알았을 뿐인 모르는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서 미란은 딴은 그 생각을 그럴듯한 것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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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것두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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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하고는 금시 졸라댄다.
 
43
"그럼 영훈이를 교섭해 주세요."
 
44
결국 영훈을 초빙하기로 작정하고 이튿날 현마는 방송국을 통해서 주소까지를 알아냈다. 여학교에서 음악시간을 맡아보는 외에 개인 연구소를 열고 제자들을 가르친다는 영훈을 현마는 미란과 함께 그날 오후 연구소로 찾기로 했다.
 
45
연구소란 것은 악기점 이층 넓은 방 두 간을 얻어 장만해 놓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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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점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이층으로 오르는 층대가 제물에 벽에 붙어 있다. 가게로 들어가지 않고 바로 그 층계를 올라가 음악실이나는 데를 들어 갔을 때 조촐한 방안의 분위기부터가 마음에 들었다. 검소한 속에 피아노 한 대와 축음기가 있고 의자들이 놓이고 벽에 몇 장의 그림이 붙어 있을 뿐이나 그 침착한 장식 속에 알 수 없는 매력이 숨어 있었다. 마음이 달뜨면서 주인이 보이지 않는 잠시 동안을 못 참아 자리에 앉았다 일어서서는 벽의 그림을 보면서 저정거리는 미란이었다. 천칠백 사십칠년 프리드리히 대왕 때 궁정에 들어가 대왕 앞에서 피아노를 탄주하던 바흐의 사진 앞에서 한참이나 서서 부질없는 흥분에 잠겼다. 늠름한 왕은 한 손으르 턱을 어루만지면서 허리를 굽힌 채 대청을 거닌다. 그 등뒤에 뭇 신하들이 궁싯거리고 서 있는 엄숙한 자리에서 풍채가 위대한 바하는 왕을 바라보면서 즉흥의 곡조를 울리는 것이다. 삼엄한 광경이 자아내는 아름다운 공상 속에 자기의 몸까지를 잠그면서 있노라니 옆방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며 주인이 나타난 것도 잠시는 몰랐다.
 
47
"내가 영훈 이외다."
 
48
목소리에 돌아선 미란은 앞에 선 주인 영훈의 자태에 놀라면서 그의 얼굴을 정신없이 쏘아붙였다. 꿈인가, 현실인가, 바로 이 사람이었던가---벙어리같이 입이 붙어서 멍하니 있을 때,
 
49
"동경에 만난 양반들이군요."
 
50
저쪽에서도 놀란 듯 그러나 태연하게 먼저 기억을 일깨워 준다.
 
51
"세상에 우연한 일두 있지."
 
52
너그러운 웃음을 띠이면서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하는 젊은 음악가의 태도는 동경 악기점에서 피아노 때문에 시비를 하던 때와는 판이하였다. 패기에 타면서 예술가의 기상을 주장하고 고집하던 때의 기색은 간곳 없고 오늘은 부드럽고 연한 평인의 기상이다.
 
53
"한 고장 한 동리에 살면서두 그 줄 모르구 그때엔……"
 
54
온화한 말소리에 미란도 엉겼던 마음이 누그러지면서 그렇게 되고 보니 도리어 오래 동안의 구면인 듯 농담의 한마디도 건네게 되었다.
 
55
"나귀에겐 역시 거문고가 당치않은 것 같아요. 아무리 혼자 꿍꿍거려두 마음대로 돼야 말이죠."
 
56
농임을 영훈도 알고 껄껄껄 웃으면서 이번에는 자기의 차례인 듯 피아노를 가리켰다.
 
57
"덕에 겨우 저런 것이 차례져 이 역 죽어라 하구 말을 들어야죠."
 
58
현마가 웃음 속에 참가해 오면서 결론을 말하게 되었다.
 
59
"서로 주인을 바꿔 만났나 보군요. 나귀에겐 나귀의 것, 준마에겐 준마의 것이 가야 할 것을."
 
60
미란은 짜증을 낼 것도 없이 웃음 속에 화하면서,
 
61
"누구 편에서든지 산 것만은 잘했군요. 불편할 때가 있거든 얼마든지 집에 와서 쓰세요."
 
62
쓸 뿐인가 나귀를 " . 교육해 주셔야지. 실상 오늘 온 것은 그 때문인데 가르쳐 보아서 유망하거든 잘 지도해 주셨으면."
 
63
현마의 말로 그들의 목적을 알고 영훈은 얼떨떨해졌다.
 
64
"간밤의 라디오의 쇼팽을 듣구 오늘 벼락같이 수소문해서 찾아온 것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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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만 책임을 맡아 보면 일상 힘이 부치는 것을 느끼군 해서……"
 
66
사양하는 속에서 은연중 약속이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67
미란은 생각할수록에 그날의 인연이 이상스러웠다. 사람의 인연이란 어디서 어떻게 맺어지는 것이지 원수같이 으르던 영훈이 열흘을 채 못 넘어서 자기의 스승이 될 줄은 짐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스승이 된 이제 그의 재주는 더욱 귀한 것으로 여겨지며 그의 예술에 대한 존경과 흠모의 생각이 한층 솟아오름을 느꼈다.
 
68
미란이 연구소를 찾는 때도 있었으나 영훈은 한 주일에 사흘씩 교사의 자격으로 미란들의 집으로 나왔다.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었다. 교칙본은 첫 장으로 다시 돌아가서 정확하고 치밀하게 되풀이 되었다. 바른손 연습 왼손 연습 두 손 연습---악보드 스케일에서 시작해서 점점 복잡한 것으로 변해 가고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 여러 가지의 변주법의 생기면서 바른 방법으로 진보는 빨랐다. 영훈은 언제든지 미란의 왼편에 나란히 앉게 되어 손가락을 지도하는 한편 간단한 연습에 대한 반주의 부분을 울릴 때에는 두 사람의 자태는 흡사 듀엣을 타는 한 쌍의 배필같이 보였다. 연습곡의 변호가 높아 감을 따라---미란의 발전이 날로 더함을 따라 두 사람은 더욱 친밀한 것으로 눈에 익어졌다. 제법 멜로디를 가진 곳조면 미란의 멜로디와 영훈의 화음이 합쳐서 귀여운 조그만 음악회를 이루어 세란과 현마는 귀를 기울이고 대청으로 모여들고들 했다.
 
69
그런 때 만약 단주가 그 자리에 있다면 그의 처지가 제일 딱했다. 미란과 자기와의 사이에 뛰어든 돌연한 침입자 영훈의 존재를 무심히 바라볼 수는 없었고 자기로도 설명할 수 없는 구름 같은 무거운 덩어리가 피어오르다가 차차 한 줄기의 날카로운 감정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날카로운 것은 스치는 것을 상하게 한다. 그 날카로운 감정은 우선 그의 가슴속을 난도질하기 시작했고 다음으론 주위의 사람들을 다치게 헸다. 세란과 같이 앉으면 마치 세란의 허물인 듯이 잠자코 앉아서는 심술을 피우고 투정을 부린다.
 
70
"왜 내게 투저이야. 어디서 뺨 맞구 어디서 화풀이한다드라."
 
71
핀잔을 맞아도 헛것이어서 단주는 뿌루퉁해서는 그에게 그 무슨 특권이나 남은 듯이 대꾸한다.
 
72
동경인지 무언지를 "간다구들 야단이더니 이런 일 꾸며 놓을려구……"
 
73
"부러 일을 꾸미러 갔나. 결과가 그렇게 된 것이지."
 
74
"나를 따랴구 한 것이 아니구 무어요."
 
75
"아니 결과구 무어구 영훈이가 무얼 어떻다구 벌써부터 이 야단이야."
 
76
한마디 박아놓고는 세란은 여기서 전법을 들린다.
 
77
"도대체 욕심이 많지. 물고기라구 한 손에 둘씩 낚으려구 그러나. 세상에 그런 법이……"
 
78
"아니 그럼……."
 
79
닩주는 세란과의 기쁨을 아주 잊어버린 듯 새로운 욕망에 대한 욕심으로서 인생의 입문을 뙤어 준 세란의 공이 지금 와서 점점화되기 시작해감을 느끼게 된다.
 
80
"애초에---"
 
81
미란이 워니었지 당신이 원은 아니었다는 듯한 밀투이다. 선택을 그르쳤다는 듯 또한---미란을 얻기 위해서의 준비운동이었지 당신이 마지막 목표는 아니었다는 듯한---그런 말투이다.
 
82
"그게 욕심이란 거야.---목표가 또렷하거든 목표만 보지 한 눈은 왜 파."
 
83
"누가 한눈을……"
 
84
"남의 탈로만 돌리지 말구---한눈을 판 건 판 거지 무어야."
 
85
"남에게 씌울려구."
 
86
"아무튼 허물은 허물이지. 그렇게 쉽게 뺄 수가 있을까봐서……"
 
87
길잡이로만 여겼던 것이 지금 와서는 커다란 책임을 요구해 오면서 무거운 짐으로 보여져 간다. 그런 요량이 아니었던 것이 의외의 결과로 나타났음을 야속하게 여기는 것이나 세란으로 보면 그 단주의 다정한 비위에 불만 이 생기며 마음이 안온하지는 않았다.
 
88
"사람이 그렇게두 매정하구 뻔질 뻔질할까."
 
89
무릎을 꼬집는 바람에 단주는 뜨끔해지면서 몸이 솟는다.
 
90
"한 덤불에 진득이 백여 있지 못하구 딸기 찾는 아이같이 이 덤불 저덤불을 기웃거리자는 셈이지."
 
91
"오해하면 안돼요."
 
92
"그래두 고집이야."
 
93
"아야야ㅅ!"
 
94
다시 꼬집히우고 소리를 치며 허리를 굽히는 것이 마치 항복이나 하는 듯 눈에는 뜻 없는 눈물이 --- 빠지지 고였다. 세란과 마주서면 당하는 재주 없었다. 불만과 투정과 심술로 시작된 장면이 번번이 이렇게 흐지부지 한 농으로 끝나고 말았다.
 
95
차라리 사무실에서 현마와 마주앉을 때 그를 은연중 졸라보는 편이 단주에게는 보람 있어 보이는 때가 있다.
 
96
"동경들을 갔다 왔대야 제겐 무슨 실속이 있어야죠."
 
97
"아직 맘이 달뜬 모양이지."
 
98
"공연히 사람의 맘을 농락만 하는 셈이구……."
 
99
"아이가 결혼 말을 할 때같이 앙증스럽게 보이는 때는 없어. 자연스런 때라는 것이 있는 법이지 그렇게 조급하게 군다구 되는 노릇인가. 그동안에 얼마나 자랐다구."
 
100
"약속이란 무엇하자는 것이구요."
 
101
"약속이야 물론 약속이지만 천연스런 시절을 기다리자는 것이지."
 
102
자리가 이상하게 되어 나갔다. 마침 옆에 애영이 없었던 까닭에 현마는 일어서서 단주의 옆으로 간 것이다. 참으로 오래간만의---거의 일종의 간질병과도 같은 다따가의 야릇한 거동이었다. 별안간 솟아오르는 애정의 표현으로 단주에게 몸을 쏠리며 그의 입술을 찾은 것이다. 당초에 현마가 단주를 알기 시작했을 무렵에 그의 아파트에 찾아가서 두 사람만의 비밀한 시간을 가졌던 그때의 애정의 부활인 듯 벅찬 힘으로 단주의 육체에 접촉해 오는 것이다. 침실에서 아내 세란과 같이 지낼 때와 같은 조수같이 세찬 애정의 발로였다.
 
103
단주는 현마와 같이 지낼 때에는 언제든지 그래왔고 그런 때 조금의 거역도 없이 잠자코 현마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는 습관이었으나 이날은 웬일인지 부끄럽고 께끔한 생각이 들면서 하는 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전과는 다른 이미 일정한 자신의 뜻과 고집이 들어서 몸에는 뼈가 생기고 심지 가 서게 되어 현마의 애정을 휘연휘연 잡아들이는 법 없이 장승같이 뻣뻣한 몸에 힘까지 맺혀 있었다. 흡사 물이 밀려와 도 움쭐도 안 하는 말뚝같이 무뚝뚝하고 꼿꼿하고 멋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물론 단주의 성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런 애정을 받아들이는 소년의 경지를 벗어나서 이제는 자신의 사랑을 되려 대상 속으로 쑤셔 넣지 않고는 배길수 없는 어른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증거로도 보였다. 부드러운 볼을 따끔따끔 찌르는 현마의 수염과 듬성한 가잠나릇이 전에는 탐탁하고 즐거운 것으로 생각되던 것이 오늘에는 그같이 천하고 추접스러운 것은 없듯이 느껴졌다. 자기 자신의 몸에 이미 그런 거칠은 수염을 단주는 준비해 가지고 천해 보인다. 그러나 그 단주의 수염을 민첩하게 느낀 것은 단주 자신보다도 도리어 현마 그 사람이었다.
 
104
그러기 때문에 단주가 현마의 이날의 애정을 거역하며 그의 몸을 밀치기보 다도 이전에 그의 입술을 찾다가 되려 따끔하게 입술을 찔러 오는 단주의 수염에 놀라며 몸을 일으킨 것은 현마 자신이었다. 께끔해하고 추접해 여긴 것은 현마 자신이었다.
 
105
즉 서로 몸을 밀치고 몸을 떼고 께끔해하고 천해 여긴 것은 피차일반이었다. 그러나 현마로 보면 그 단주의 변화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벌에게 쏘인 듯 얼굴은 찡그리고 몸을 떼기가 바쁘게 자리로 돌아와 화나 피우듯 덜석 주저앉았다.
 
106
"짜장 자리근했군. 찔레덤불 같이 어느 결에 그렇게 늠출해지면서 가시까지 돋았어.……자란다는 게 무서울 일 같다."
 
107
자란다는 것이 추하면 추했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는 것---아름다운 것을 조각조각 뺏어갈 뿐이지 아름다운 것을 남겨 놓지는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현마는 커다란 환멸을 느꼈다. 무서운 일만 같았다. 아이가 자라서 가시가 돋고 거역하고 요구한다는 것이 도대체 신기하고 엄청난 것으로만 생각되었다.
 
108
"딴은 그만큼 자랐게 자꾸만 보채는걸……"
 
109
벌써 장중의 구슬이 아니고 손을 벗어나 제대로의 인생을 구하려고 달음질쳐 나아가게 된 단주임을 오늘에서야 알고 더 그들을 붙드는 것이 자기 힘에 부침을 깨닫기 시작했다.
 
110
"애초에 자기들끼리 시작한 일을 지금 와서 날 조르면 어떻게 되누. 단 주의 맘을 내가 모르는 것같이 미란의 맘두 내게는 알 수 없는 것이거든."
 
111
자기 손을 벗어나서 달아난 바에는 당사자끼리의 임의라는 듯 자기들끼리 처단하라는 듯---그런 어조였다.
 
112
"동경을 가느니 음악을 시작하느니 하면서……"
 
113
단주의 불만의 진의를 또렷이 알았을 때 현마도 말머리를 돌린다.
 
114
"동경행은 나두 성공이라구는 생각지 않네만."
 
115
성공이 아니라 실패였다. 마음의 기대와는 어그러져 조금도 잇속은 없었고 현마에게도 불만의 결과를 낳았을 뿐이었다.
 
116
"천재 병에 걸려들어 천재 아닌 건 사람으로 치기나 한다구. 잔뜩 교만한 맘에 어떻게 달아날는지……. 폭 씌인 병이라 졸연히 낫지 않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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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마음속에 똑같이 떠오르는 것이 영훈의 자태였다. 단주에게 영훈 이 질색인 것같이 현마에게도 유쾌한 존재는 아니었다. 미란이 조르는 것을 이기지 못해 서둘러 준 것이었고 도시화의 근원이 미란을 소녀의 음악회에 데려갔던 때부터 시작된 것이어서 현마는 그때의 불찰을 지금껏 뉘우쳐 오는 중이었다 예술을 말하고. 음악에 흑하고 천재를 찬양하는 것이 그때부터 시작되었던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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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천재가 못되는 때는 밖으로 천재를 구하고 숭배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모양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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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것도 없이 영훈은 미란이 구하는 바로 그 대상으로 나타난 것임을 현마도 모르는 바 아니었고 영훈이 들어섬으로 인해서 지금까지 미란의 마음속을 차지하고 있던 모든 것이---별도 하늘도 나무도 꽃도 영화배우 되려는 희망도 현마도 세란도---그리고 물론 단주까지도---미란의 마음속을 떠나 버렸음을 못 느낄 바 아니었다. 섭섭한 일이기는 하나 마음의 자유는 어쩌는 수 없는 것이며 한번 굴레를 벗어나 닫기 시작할 때는 인력으로는 붙드는 재주 없는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단주의 몫까지 걱정해줄 여가가 없이 자기 자신의 마음의 불만을 가지고 있는 현마였다. 단주의 하소연이 자기에게는 어려운 숙제여서 그것을 정리는커녕 구슬려 놓는 도리조차 없는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120
"엉뚱한 사람을 집에 거둬 넣고는……. 무엇이 되나 보지, 집 꼴이."
 
121
단주의 걱정에 현마도 적어도 속으로는 동의를 표하면서 이제는 같은 처지의 불행을 나누는 수밖에는 없게 되었다.
 
122
"시원할 때까지 놓아두는 수밖에는. 그 외에 다른 도리 있어야지."
 
123
비관적 결론을 내리고는 모르는 결에 실토를 하게 된 것을 어른답지 못한 것으로 여기면서 현마는 금시 오도깝스럽게 표정을 누그러트리면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헤적헤적 웃는 것이었다.
 
124
영훈을 맞이한 지 두어 주일 되었을 때 미란의 발기로 집에서는 조그만 환영의 잔치가 계획되었다. 가장 유쾌하게 서두르는 것은 물론 미란이어서 손수 부엌에 들어가 옥녀와 함께 음식을 장만한다, 대청을 치운다, 수선거 리는 것이 세란에게는 자기에게 그런 시절이 있었던 것은 먼 옛날이었던 것 만 같아 부럽게 보였다. 미란이 맞이하려는 청춘의 기쁨은 자기가 현재 가지고 있는 그것보다는 한 시대나 젊은 것인 듯 영훈과 미란과의 사이가 아무쪼록 원만하게 이루어지도록 축수하는 마음조차 일어났다. 당초에 그날의 계획에는 미란만이 아니라 세란의 뜻도 첨가되어서 세란은 현마나 단주와는 달라 영훈을 의외의 침입자로 생각하는 축이 아니고 도리어 기뻐하고 미란과의 사이를 원하는 편이었다. 미란에게서 단주에게 대한 주의를 떼자는 것, 단주의 자리에다 영훈을 앉히자는 것, 단주를 고립시켜서 자기에게 대한 의식을 선명하게 하자는 것---그런 속심에서 나온 것은 물론이다. 야심이 없을 때에만 다른 한 쌍은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다. 미란과 영훈의 한 쌍은 미란과 단주의 쌍보다는 세란에게는 훨씬 아름답게 보였다. 두 사람을 눈앞에 보고 마음속에 그리는 것이 즐겨왔다. 그날의 잔치도 그런 마음의 원에서 나온 것이었다. 잔치래야 스스럽지 않아진 터이라 가정적인 조촐한 것이었고 다르게 말하면 하나의 조그만 음악회여서 이론 만찬이 끝난 후에는 영훈의 독주와 두 사람의 듀엣이 시작되었다. 현마는 물론 단주도 그날 참석은 했으나 우울한 상을 지니고 혼자 생각으로 가슴속이 그득 차면서 물 위에 뜬 기름같이 좌석과는 어울리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유쾌하게 웃고 이야기하고 하는 한자리의 좌석이라는 것이 떨어져 볼 때에는 정해 놓고 즐 거운 것이나 실상 따져 보면 그 속에는 허다한 모순과 갈등을 내포한 것임을 그날의 좌석같이 증명해 보이는 자리는 드물었다. 식탁에 늘어들 앉아 술잔을 돌리고 이야기를 건네고 할 때 단주는 최후의 만찬 때의 유다와도 같이 유독 즐기지 않으며 마음이 갈라져 달아냈다. 차례로 돌아오는 술잔을 찡그린 표정으로 거절하는 짓부터가 유다의 행세였다. 그러면서도 미란의 표정에는 바늘 끝같이 치밀한 주의가 가고 그의 눈치가 두려웠다.
 
125
"한자리에선 다 같이 즐겁게 하는 것이 신사된 예의가 아니예요. 누구에게 허물이나 있듯 찌뿌득해 하면 그 성미를 누구더리 받으란 말요."
 
126
기어코 미란의 한마디가 터져 나왔을 때 단주는 무안해서 얼굴을 붉히면서 자기로 말미암아 이지러지는 자리의 공기를 살피게 되었다. 별수없이 한 자리의 속박이었다. 마음과 몸을 한 줄을 묶이우고 예의를 지키고 자리의 비위를 맞추어 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속박이었다. 그것도 미란을 위한 것이라면 참을 수밖에는 없는 것이었으나 식사가 끝난 다음 대청으로 들어가서 음악이 시작되었을 때는 견딜 수 없었고 마음의 구속을 무한히 참지 않으면 안될 법은 없을 듯했다. 영훈에게도 사실 자기가 가장큰 관심의 대상이요주의의 초점이어야 할 법 한데 그는 도시 자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눈치였고 자기를 위해서는 신경의 한 가닥도 안 쓰는 듯이 보이는 것이 무시 나 당한 듯해서 더욱 자리가 싫어졌다. 영훈과 미란과의 유치한 듀엣의 연주를 간신히 참으면서 들은 그로서 다음 영훈의 독주까지를 들어야 할 의무는 없을 듯했다. 베토벤의 소나타가 울리기 시작했을 때 자리를 일어나 뜰로 나왔다. 통일을 어지럽힌 셈이었다. 전체에 대한 반역이었다.
 
127
월광곡이었다. 제일악장 아다지오의 느릿한 환상이 개시되었다. 아다지오 에서 알레그레토를 거쳐 프레스토로 악장을 따라 급속하게 변해 가는 그 곡조는 대체 어떤 감정의 고패를 나타내자는 것이었을까. 줄리엣타에 대한 베토벤 자신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나타냈다고 일컬으는 그 곡조를 왜 하필 영훈은 선택한 것이며 미상불 그의 기술이 놀랍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고요 하고 침통하고 열은 화음이 쓸쓸하고 외로운 사랑의 환상을 표시하는 듯--- 시냇물 빛나는 달밤에 들으면 한층 효과 있을 그 곡조가 저문 뜰 안에서 들어도 충분히 아름답다. 창으로 새어 나오는 음률이 나뭇잎 사이를 흘러 뜰 안에 퍼졌다. 전날까지도 봄이 주춤주춤 망설이던 뜰 안은 어느덧 봄이 활 짝 지나 구석구석 짙은 여름빛이었다. 초목이 검푸르게 우거지고 꽃도 시절을 갈아 화단의 여름 화초가 피기 시작했다. 나뭇잎은 퍼질 대로 퍼져 군데군데에 밀접한 세계를 이루고 가족을 꾸미고 으늑한 그림자와 구석과 비밀을 마련하고 있다. 월광곡의 선율은 그 구석구석으로 새어들고 잦아들어서 사람의 정서를 초목 속에 퍼붓는 듯하다. 제일악장의 음산한 데 비기면 경쾌한 제이 악장은 ‘두 깊은 골짝 사이에 핀 꽃’인 듯 곱고 즐겁고 유쾌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가슴의 뛰놀고 기쁘다는 것일까, 삼악장의 격정적인 하소연으로 옮아갈 때까지 한동안 그 유쾌한 선율이 울려왔다. 모르는 결에 음악 속에 폭 잠기다가도 문득 자아로 돌아오는 단주였다. 무심한 음악 속에서까지 신경은 싸움을 계속하는 것이다. 유쾌한 음악이 자기의 것이 아니고 자기의 자리를 뺏은 영훈의 것임을 깨달을 때 얼굴의 표정은 이 지러지며 질투와 중오로 변해 갔다. 유쾌한 곡조가 마음속에 파도를 일으킨 것이다. 그 무서운 표정을 만약 가만히 살펴본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음악의 효과를 얼마나 무서운 것으로 여겼을까. 공교롭게도 그 찌그러진 낯을 바라본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옥녀였다. 지름길을 걸어 능금나무 있는 편으로 갈 때 풀숲 꽃포기 앞에 웅크리고 앉아 이쪽을 노리는 옥녀를 보고 단 주는 주춤 머물러 섰다. 가소로운 꼴을 들켰을 때의 얼삥삥한 자세로 옥녀를 노리려니 옥녀는 성큼 일어서면서 웃어 보인다.
 
128
"뜨끔했지.…… 고춧가루를 먹었나. 얼굴이 저렇게 상기가 됐게."
 
129
"왜 풀숲엔 숨었니."
 
130
"숨긴 누가 숨어. 나 있는 곳으로 됩데 오구두."
 
131
언제부터인지 농울 트게 된 사이였다. 단주가 옥녀를 수월하게 여긴 것과 마찬가지로 옥녀도 나 어린 단주를 세란들과는 달라서 만만하게 볼 수 있었다.
 
132
"방안에서들은 저렇게 즐겁게 노는데 또 심술인가. 혼자만 튀어나왔 게."
 
133
"뭘 안다구 버릇없이."
 
134
"보나 안보나 이 게지."
 
135
팔뚝으로 밀쳐내는 시늉을 하면서 외눈을 질끈 하니 단주는 눈을 부릅뜨고 발을 구른다.
 
136
"까불면 용서 없다."
 
137
"무슨 턱으로 뿜을 내. 부뚜막에는 독판 오르면서."
 
138
단주에게는 매일 것이 없다는 듯이 어려워하지 않는 옥녀의 말투, 단주가 어안이 벙벙해 서 있을 때 옥녀는 납신거리며 두려울 바가 없었다.
 
139
"사람이 뺀질뺀질해두 유분수지. 생떼같이 뛰어들어 백줴 집안을 쓸어가 지는 셈이지.---내가 만약 작은아씨라면 까딱 집에 붙이지두 않겠다."
 
140
그제서야 단주는 말눈치를 짐작했다. 세란과의 관계라면 아침 저녁으로 시중을 든 옥녀만큼 눈치 빠르게 알아왔을 사람은 없었겠고 비밀의 열쇠가 그의 손에 간직되었을 것은 정해 논 이치였다.
 
141
"말만 냈다봐라."
 
142
황당해서 어성을 높인다.
 
143
"겁이 나나부지."
 
144
"번설만 했다간 이 집에 붙어 있지 못한다 괜히."
 
145
"큰소리 작작해. 누군 붙어 있게 되구. 그렇게 되는 날에는 집안이 한바탕 뒤집히구야 말걸. 무얼 믿구 큰소리야. 불한당 같으니."
 
146
맞거는데는 허물 가진 몸이라 꿀리는 수밖에는 없었다. 단주는 공연한 벌 집을 헤적거려 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뉘우침이 났다.
 
147
"정말 그러기냐."
 
148
목소리를 누그리면 옥녀는 도리어 기세나 얻은 듯 법석이다.
 
149
"숨은 도적같이 세상에 미운 게 있는 줄 알구. 집안을 휘저어놓구는 욕심스럽게 그래두 더 가져갈 것을 찾느라구 두리번거리는 도적.--- 숨은 간교가 언제나 안 드러날 줄 알구. 눈앞에서 코를 베이려구. 나으리가 아무리 사람이 좋기루 부처님두 성을 낸다구, 알어만 보지."
 
150
"누구 앞에서 이렇게 대서. 괜히 거슬려만 봐라."
 
151
"모르는 주인에게 띄어 주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니구 그럼."
 
152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의외의 적이 나섰음에 놀라며 그 굳건한 대항을 좀체 휠 수 없음을 깨달으면서 불안한 마음이 불현 듯이 솟았다. 미란만을 생 각하고 그가 마음의 대상의 전부였음이 얼마나 행복스러웠던가를 느끼며 이제는 벌써 새로운 근심으로 해서---허물의 발로로 해서 미란을 생각함이 불측스럽고 그럴 자격조차 없는 것이 아닌가---눈앞이 어두워지는 듯도 하다.
 
153
옥녀가 큰 난관이 될 줄야 누가 알았으랴. 그의 입을 봉해 놓음이 지금에 있어서는 급선무임을 느끼면서 옥녀의 자태가 여간 만만치 않은 것으로 어리었다.
 
154
"정말 번설만 했다간……."
 
155
버썩 나서면서 위엄을 냈을 때 옥녀는 눈 하나 깜박거리지 않고 뻣뻣스럽게 맞섰다. 오돌진 태도에 단주는 화를 버럭 내며 반들반들한 얼굴에 손찌검을 하면서 다짐을 받으려고 한편 팔을 잡아 낚았다.
 
156
"주제넘게 사람을 왜 쳐. 가만있을 줄 알구."
 
157
화를 내면서 옥녀는 손을 뿌리쳐 빼고는 샐쭉해서 외면해 버린다. 단주는 황당해지고 마음이 설레면서 옥녀를 잡으려 할 때 옥녀는 치마폭을 뿌리치고는 달아나는 것이다. 초라니를 놓쳐서는 큰일이 날 듯해서 손을 뻗치면서 뒤를 쫓았다. 풀숲을 뛰고 꽃포기를 휘무즈리고 가시덤불을 넘어서 지름길을 뱅뱅 돌면서 흡사 술래잡기였다.
 
158
"붙잡아 보지 용 용."
 
159
화단을 건너서 자작나무 아래로 간 옥녀가 눈을 까면서 으르면,
 
160
"붙잡기만 해봐라."
 
161
주먹을 부르쥐고 앞으로 고꾸라질 듯이 달리면서 덩달아 으르렁댄다.
 
162
"내 입만 여는 날이면 저 꼴 무엇이 될까."
 
163
옥녀가 연못을 돌아 라일락 숲에 몸을 세웠을 때 단주는 한번 거리가 뜬 그를 따르기가 조련치 않아서 돌부리에 채이고 찔레가시에 걸리면서 숨이 찼다. 연못가에 이르렀을 때 맞은편에서 납신거리는 옥녀를 손쉽게 잡으려 면 단숨에 연못을 건너뛰는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164
"입을 열기 전에 혼을 뽑아 놓거든."
 
165
눈앞의 옥녀를 금시 붙잡을 듯 단걸음에 연못을 건너뛴 것이나 피곤한 맥에 아찔해지면서 돌 모서리가 발밑에서 흔들 하고 미끄러진다.
 
166
"아차차!"
 
167
옥녀가 소리를 쳤을 때 단주의 몸은 헐어지는 돌과 함께 주르르 미끄러지면서 못 속에 하반신이 밀려들었다. 미처 발버둥을 칠 새도 없이 몸은 물속에 잠겼다. 럭비를 놀 때의 볼을 잡고 넙죽 엎어진 모양과도 같고 네 활개를 펴고 풀잎에 누운 개구리의 시늉과도 흡사했다. 못가의 풀뿌리를 붙들고 못 속으로 반신을 뻗은 채 넙죽이 엎드린 양이 가엾다기보다는 우스꽝스러워서 옥녀는 한참 동안 깔깔 웃음을 대는 수밖에는 없었다.
 
168
"남을 쫓다가 싸지. 혼자 보기 아까운걸."
 
169
손벽이라도 치고 싶게 통쾌하 것이었으나 단주 자신으로 보면 그런 겸연쩍고 가엾을 데는 없었다. 옥녀 혼자 보았기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 보았던들 얼마나 참흑한 꼴이었을까. 흙 위에 엎드려서 냉큼 일어나지도 않고 상기된 눈으로 옥녀를 반듯이 치어다보는 것은 부끄러운 탓일까 원망하는 것일까 마주보기가. 무서우리만큼 찡그런 험상궂은 표정이었다.
 
170
"얼른 일어나지 못하구 무슨 꼴야."
 
171
움직이는 기색이 없이 그대로 엎드려 있는 것이 이상해서 옥녀는 술래의 자격을 면하고 이번에는 동정하는 태도로 연못가로 향했다.
 
172
"다쳤단 말인가."
 
173
앞에 가서 부축해 주려고 손을 내밀고 몸을 굽혔을 때 단주는 기운이나 얻은 듯 옥녀의 손을 붙들고 벌떡 일어나더니 그 손으로 옥녀의 어깻죽지를 보기 좋게 갈겼다.
 
174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남을 이렇게……"
 
175
옥녀가 대거리를 하려다가 즉시 멈추어 버린 것은 단주가 다리를 저는 것을 본 까닭이다. 젖어서 종아리에 들어붙은 바지에서는 물이 흘렀다. 그 초라한 꼴로 다리까지 저는 것을 볼 때 측은한 생각이 나면서 자기의 탓으로 느껴졌다. 어떻게 해서 오늘의 이 장난이 시작되었던고 하면서 짜장 자기가 쓸데없는 소리를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176
"누가 당초에 뜰로 나오랬나. 방에나 가만히 있지."
 
177
집안에서들 내다보지나 않을까 해서 옥녀는 창 있는 쪽을 바라보면서 단주를 라일락 그늘 속으로 끌어들였다. 부상병같이 절름거리면서 풀 위에 주저앉았을 때 한편 무릎 위로 피가 내배어 있음을 보았다. 돌부리에 무플을 상한 것이다. 다리를 걷어 올리고 마른 수건으로 피를 훔쳐내는 그 꼴이 전에 없이 가엾게 여겨지면서 방안 사람들과 스스로 대조되는 것이었다.
 
178
잊고 있었던 음악소리가 다시 귀에 들려 오면서 방안의 단란의 짐작된다.
 
179
월광곡이 끝나고 쇼팽의 환상곡이 시작되어 있었다. 옥녀에게는 그것이 무 엇인지를 분별할 수는 없으면서도 은근하고 미묘한 곡조가 행복과 기쁨을 나타내는 것임만은 짐작하면서 방안의 행복에 비겨 초라한 단주의 꼴이 더욱 눈에 띠었다. 제 스스로 트집을 잡고 다란을 벗어나온 것이기는 하나 국 외자로서 볼 때에는 그 쓸쓸한 꼴에 마음이 움직여진다.
 
180
웅크리고 앉아서 상한 무릎을 매만지는 모양이 무대에서 쫓겨난 등장인 물과도 같고 자기의 역할을 다하고 뛰어나온 이야기 속의 인물과도 같으면서 넋 잃은 그림자가 저녁 그림자 속에 외로웠다.
 
181
"얼른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용감하게 대청으로 나가요."
 
182
무대감독이나 되는 듯 단주를 격려시키면서,
 
183
"조화 많은 집안의 형편이 대체 어떻게 되어 나갈꼬."
 
184
하고 집안에 숨은 역사가 궁금히 여겨진다. 수풀 속의 비밀같이 꽃 속의 비밀같이 밖에는 드러나는 법 없어 한정된 속 세상 안에서만 풍파를 일으키면서 어지럽게 열려 가는 집안의 앞일이 단주의 앞일과 함께 궁금히 생각되는 것이었다.
 
185
단주는 무릎에 붕대를 감고 자리에 눕게 되었다. 걸음걸음에는 지장이 있 다 하더라도 그렇게 심한 정도는 아니요, 그만 것으로 병석에 눕는다는 것 이 도시 야단스러운 짓이었으나 단주의 감정은 확실히 과장된 것이었고 트집을 부리는 아이의 행동과도 같은 것이었다. 탁자 위에는 탈지면과 가제와 알코올과 물 약병이 있고, 방안에는 소독냄새가 풍겨져 있는 속에서 자리옷 아래로 깨끗한 붕대를 하아얗게 드러내 놓고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꼴은 흡사 큰 병이나 치르고 있는 것 같으면서---단주는 그 야단스런 거동을 은근히 즐겨하고 그 속에서 슬픔을 꾸미고 과장해서 입부러 가련한 신세 속에 몸이 잠긴 듯 마음을 치장하는 것이었다. 멀쩡하던 몸이 왜 이렇게 별안간 앓게 되었누, 누구 때문에 병이 생겼누---하고 그 병의 원인이 그 누구의 허물인 듯 어린양을 상한 것은 사나운 이리라는 듯 슬픈 동화 속에 몸을 두고 정체없는 사나운 이리를 저주하고 어린양을 동정하면서 마음을 달래고 추스르는 단주였다.
 
186
화병에는 꽃이 꽂혀 있었으나 그것은 위문객이 가져온 것이 아니고 자기 스스로 아파트의 하녀에게 분부해서 사다 꼽은 것이었다. 그런 것이언만 그 한 떨기는 마치 위문객이 갖다 준 것인 듯 환상하면서 그 환상속에서 울고 웃고 했다. 방안에는 단순하지 않은 그의 생활의 역사가 차례차례로 흐른 것이었으니 곰곰이 생가하면 그 역사의 한 장 한 장이 모두 슬픈 것이었던 듯 즐거운 것은 조금도 없었던 듯 생각되면서도 그 슬픈 역사가 추억의 기쁨을 가지고 마음을 오물하게 했다. 가령 침대를 바라보면 침대의 역사가 차례차례로 떠오르면서 마음을 흐붓이 잠겼다.역사가 만약 때요 이끼라면 장구한 시간의 덕지덕지의 때가 침대 기둥에 붙었을 것이 사실이요, 그때 속에는 현마와의 불쾌한 때도 있을 것이요, 미란과의 안타까운 때도 섞었을 것이다. 폭풍우날 밤 미란과 침대위에서 떨면서 전원교향악을 들었을 때의 사적이 확실히 방 그 어느 한 구석에 남아 있을 듯 그것을 찾아내고 맡아 내기에 단주의 노력은 집중되었다.
 
187
침대 위에 누우면 모두 그날 밤의 것인 베개와 홀이불이 안타까운 생각을 실어 오면서 눈물을 자아낸다.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면 한이 없어서 한동안 푹 자아낸 다음에야 마음과 몸이 거뿐해진다. 베개를 질펀히 적신 눈물을 자기 혼자만이 보기에는 아까운 듯 세상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은 듯 눈물이 만약 물감이어서 베개를 푸르게 물들이는 것이라면 그 베개를 그대로 간직했다가 얼마나 눈물이 많은 것인가를 미란에게 보이고 싶은 그런 감정이 솟았다 눈물을 흘린 다음 . 몸이 거뿐해지면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나서 책상 앞에 앉아 트럼프로 그날 운수를 점쳐 본다. 스페이드의 검은 빛이 대기요, 하트나 다이아의 붉은 기호에 마음을 뛰놀리면서 거듭 피라미드 모양의 나열을 쌓았다 간 헐고 쌓았다 간 헐고 한다. 옳게 떨어지는 날은 즐거운 기대에 마음이 가벼웠고 종시 말을 잃기고 막히는 날에는 마음이 무겁게 드리우고 흐려졌다.
 
188
위문객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현마가 오고 세란이 오고 미란도 왔다.
 
189
문제는 그 배합이어서 현마는 혼자 올 때도 있으나 대개 세란이나 그렇지 않으면 미란과 짝이 되었고 세란은 현마나 미란과 동무했고 미란의 편으로 본다면 현마나 세란과 같이 온 셈이었다. 물론 세란이 혼자 꽃묶음을 사들고 온 때도 있었으니 단주에게는 그런 때가 난처하고 두려웠다.
 
190
세란은 때와 곳을 가리지 않고 열정을 요구한다. 사랑이라는 것에 처음으로 눈을 뜬 것 같았다. 현마와의 부부생활은 사랑의 생활이 아니었고 단주에 의해서 처음으로 사랑을 안 듯한 그런 무더운 열정으로 단주를 조른다.
 
191
사람이 극도로 욕심스러울 때는 물이나 불을 헤아리지 않는 아이와 같이 날뛰는 것인 듯하다. 세란이 단주와 대할 때에는 피차의 지위가 거꾸로 바뀌어 세란이 아이가 되고 단주가 어른노릇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이가 지각없이 욕심을 부리면 어른은 그것을 누르고 조절해 주어야 한다. 창기병이 들기 시작한 세란의 투정을 단주는 벌써 당하는 재주 없었고 이상한 것은 세란이 욕심을 피우면 피울수록 단주는 그의 열정이 달갑지 않아지고 귀찮아 갈 뿐이었다. 당초의 출발이 잘못되었다는 것, 그른 제비를 뽑았다는 생각이 자꾸 들면서 불만한 생각만 늘어갔다. 어떤 때에는 두려워지면서 웬만한 곳에서 그와의 사이를 청산해야 할 것을 느끼나 그런 티를 조금이라도 표면에 내면 세란은 더욱 물인지 불인지를 모르고 분별을 잃어버렸다.
 
192
"누가 그 눈치 모를까봐. 사람이 앞이 닦여지면 욕심이 나는 법이라구.
 
193
룸펜 노릇을 하면서 찻집에서 뒹굴던 올챙이 저 생각을 좀 해보지. 이래저래 처지가 흡족해지니까 눈앞을 깔보고 아닌 욕심만 내면서……"
 
194
이런 말을 들을 때 반성되지 않는 바도 아니었으나 반성하면 할수록에 현 마에게 대한 민망한 생각이 들며 세란과의 사이를 청산해야 하겠다는 결의는 더욱 굳어졌다. 세란은 참으로 무거운 짐이요 비싼 대상이다. 그와 마주 치면 모처럼 꾸며 두었던 슬픈 마음과 표정도 산산이 부서져 버리고 정염의 노예가 되어서 질질 끌리는 동안에 피곤해질 뿐이다. 창백하게 피곤한 속에서 미란에게 대한 생각이 외줄기 철사같이 가늘고 곧게 솟아오른다. 회오리 바람같이 세란이 지나가 버린 후 빈방에서 홀로 다시 병든 사람의 감상을 회복하고 슬픈 표정을 시작하는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운 일이었으나 미란을 생각한은 그런 처지에서만 적절했고 그런 심정 속에서는 미란밖에는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세란과 미란은 품격이 다르다. 한 사람이 휘저어 놓는다면 한 사람은 가라않혔다. 어쩌닥 미란이 혼자서 찾아와 주는 때면은 방안은 고요하고 침대에 누운 단주의 모양은 한껏 슬프게 보여서 단주가 생각하는 효과가 제물에 충분히 발휘되었다. 의지가지없는 외로운 사람이 여기에 병들어 누었도다---그런 인상을 주기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195
미란이 단독 두 번째 찾아오던 날 저녁 그런 효과는 예측 이상으로 발휘되었던 것을 단주는 안다. 자신 그런 효과를 꾸며 놓고는 동시에 다른편에 서서 그것을 계산하고 측량하는 국외자---말하자면 자기도 모르는 동안에 한 사람의 배우 노릇을 하는 셈이었다. 그 한 간의 방안은 비극의 제삼막째 무대면이고 단주 자신은 훌로 등장하는 비극배우인 것이다. 새로 감은 하아얀 붕대며 잠못이며 부러 코 아래 길러논 수염이며는 배우로서의 분장인 셈이고 새로 갈아 논 깨끗한 침대보며 어항 속에 죽어버린 금붕어며는 일종의 무대장치인 셈이다. 화병에 꽂힌 아지랑이꽃과 호국 등속의 애잔하고 푸른 빛도 무대의 효과를 더하기에 도움이 되었다. 봄부터 차례로 진달래, 개나리, 장미, 스위트피, 튤립, 제라늄을 거쳐 화병도 어느덧 여름을 맞이하여 호국과 도라지꽃의 푸른 꽃을 가진 셈이나 붉은 꽃이나 누른 꽃과 달라 푸른 꽃값이 슬픈 것은 없다. 푸른 것이라면 화병의 푸른 꽃뿐이 아니라 방 전체를 푸르스름하게 물들여 주는 푸른 벽지며 침대보의 푸른 가장자리며 책상 위에 널려져 있는 푸른 표지의 책들이 모두 방안의 빛깔을 한 가지 방향으로 통일하면서 비극적 색채를 나타내고 있다. 그 위에 특별히 그날 전역의 효과로서 방안이 유심히 푸르둥절하게 어두었던 것은 대체로 창밖 공기의 탓이리도 했다. 온 누리가 푸르스름하게 저물어 가는 저녁때라는 것이었다. 바다 속 세상을 그대로 들어다 놓으면 그런 것일 듯 짐작되는 주위가 안개나 연기가 낀 듯 푸르고 자옥해지면서 오고가는 사람들이 꿈속 사람들 같이 보이는 그런때가 있다. 그날이 마침 그런 저녁이어서 열린 창으로 푸른 세상이 내다보이며, 푸른 공기는 바닷물같이 창으로 흘러들어서는 방안을 전체로 밖 세상과 같이 푸르둥절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 푸른 분위기 속에서 주인공인 단주 자신도 푸른빛에 물들어 얼굴은 창백하게 병색을 띠우고 회춘 회춘한 전신이 비극의 주인공을 방불시켰던 것이다. 두 무릎을 곧추세우고 깍지 낀 두 속 위에 뒷머리를 얹고 번듯이 누워 있는 꼴을 맞은편에 걸린 염소의 탈고도 같이 서글프게 보였다.
 
196
고물상에서 진귀한 고물이나 찾아낸 듯 사다가 건 그 염소의 탈이 오늘 그의 연극의 반주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두 뿌리의 뿔을 세우고 좁은 턱 아래로 수염을 드리운 염소의 모양은 비극의 모양 그것이다. 희랍의 옛적 디오니서스의 제삿날 사람들이 염소 가죽들을 쓰고 노래를 불렀을 때 비극 이 시작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 고사를 알던 모르던 간에 단주는 염소탈을 사다 걸고 자기의 신세와 대조시켜서 비극을 가장한 셈이다. 그 바다 속 같이 푸르고 고요한 방에 아무 예고도 없이 별안간 등장한 것이 마란이었던 것이다. 단주 자신이 비극의 주인공이고 아닌 것보다도 그가 그것을 꾸민 것이 중요한 것이요, 그 무대장치가 참으로 비극의 터가 되고 안된 것보다도 미란에게 준 비극적인상이 단주로서는 필요한 것이었다. 그 점에 있어서 그런 성공한 셈이었다.
 
197
짙은 옥색으로 아래위를 단장하고 나타난 미란은 시절의 물고기같이 기운 찬 것이었으나 방 속에 들어오자 같은 빛 속에 잠겨지면서 금시 그기운을 뺏겨 버렸다. 푸르고 침침한 방안 공기에 놀라면서 그 속에 누운 희끄무레 한 단주의 얼굴이 더없이 쓸쓸하고 가엾은 것으로 보였다. 음울한 공기 속에서는 단주는 흡사 세상에서 쫓겨난 홀아이같이 고아원에서 데려온 고아같이 보이면서 전에 없던 측은한 생각이 한꺼번에 솟아올랏다.
 
198
"방이 왜 이렇게 푸르고 찰까."
 
199
창을 모조리 닫아 버리고는 책상 앞에 앉더니,
 
200
"꽃까지 이렇게 퍼렇구."
 
201
화병의 호국을 뽑아서 휴지통에 넣고 가지고 온 샐비어의 새빨간 묶음을 대신 꽂고는 책상 위를 차곡차곡 정리하는 것이다. 잡지는 잡지대로 소설책은 소설책끼리 모아서 시렁에 세울 때 소설 속에서 뽑아 써낸 노트의 한 구절이 문득 눈에 걸린다.
 
202
"---즐거운 사람들이여, 고요히 고요히 춤추라. 내 머리 아프고 내 가슴 쓰리나니---."
 
203
그 장을 떼서 쪽쪽 찢으면서,
 
204
"이런 슬픈 구절만 명심하니 병이 나을 리 있나."
 
205
혼자 서두르며 독백을 계속하는 동안에 방안은 점점 어두워 가고 푸른 빛 속에 단주의 얼굴이 해쓱하게 솟기 시작한다. 몇 달 전에 첫사랑을 속삭이 고 신변의 구속을 피해서 줄행랑을 놓으려고 계획했던 상대자가 바로 이 사 람이었지 생각할 때 무척 오래 전의 일 같은 다른 사람의 옛이야기 같은 장구한 세월의 착각을 느끼게 되었다. 피차의 처지가 몇 달 동안에 왜 그다지 도 변했던가 어찌어찌 . 하다가 여기에 지금 이 해쓱한 병든 사나이가 눕게 되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6
"그만 불을 켤까."
 
207
어두운 데서 주의를 돌려보려고 제의를 했으나 단주는 허수아비같이 침대 위에 일어나 앉을 채 고개를 흔들었다.
 
208
"요새는 밤중에두 불을 끄구 있는데. 캄캄한 속에서 눈을 펀둥펀둥 뜨구 있노라면 별별 신기한 환영이 다 눈 속에 닥쳐오면서 밤새도록 동무가 되어 주거든."
 
209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빗어 올리는 손가락이 아스파라거스같이 길게 보인다.
 
210
"올빼미라구 캄캄한 속에서 눈을 펀둥펀둥 뜨구 있을까. 그러니까 몸이 자꾸 파래가면서 꼴이 저 모양이지."
 
211
"올빼미와 다른 것 없지. 사람은 어둠 속에서 살 수두 있으니까."
 
212
딴은 어둠 속에 솟아 있는 단주의 자태를 미란은 오늘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운 것으로 보았다. 어둠 속에 솟아 있는 짐작된다. 얼굴의 잔 선들은 말살해 버리고 윤곽만을 드러내고 그 윤곽 속에 이목구비를 짐작케 하는 어둠의 수법이 놀라운 것이었다. 약한 것이 약하므로 말미암아 아름답게 보이는 때가 있다. 강한 것이 아니고 영웅이 아니고 천재가 아니고 약하고 병들어 있는 까닭에 아름다운 것---그날의 단주의 자태는 그런 것이었다. 아름다운 것에 대해서 사람은 이치도 연유도 없이 무턱대고 머리를 숙이고 항복해야 한다. 아름다운 것의 절대적인 특권인 것이다. 미란은 그날 저녁 오래간만에 단주의 모양에 정신을 뽑히었다. 반성을 허락하지 않는 순간의 감정 인지는 모르나 그 순간의 감정이 절대적인 것이었다.
 
213
"괜히 법석을 하구 엎어지구 다리를 다치구……. 영훈씨야 내가 선생으로 사모하는 것이지 그 이상---."
 
214
"사람이 자기 맘을 다 안다구."
 
215
"그야 여러 고패 변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216
미란은 확실히 자기 변명을 하고 있음을 내심으로 느꼈다.
 
217
"웬일인지 자꾸만 무서워지구 서글퍼지구……."
 
218
"앓구 누웠으면 그런 법이지. 그러게 얼른 일어나도록 하라니까."
 
219
"전에는 바로 손 닿는 곳에 있던 것이 어느 결엔지 멀어져서 하늘 위로 달아나 버리는 듯---."
 
220
"파랑새인가 머."
 
221
"그 파랑새.--- 놓쳐 버린 파랑새. 까맣게 쳐다 보이는 파랑새."
 
222
"바로 옆에다 두구두."
 
223
가엾어지는 마음에 어떻게든지 해서 마음껏 위로해 주고 싶음을 느끼고 있을 때 이웃방에서 음악소리가 들려 왔다. 잠잠하고 어두운 방에 별안간 불이나 켜진 듯 한 줄기의 광명을 인도해 넣는 것이었다. 교향악이었다. 초목같이 우거져 나오는 굵고 복잡한 음률이 방안을 환하게 비취이는 듯 방안 의 모양이 음악 속에서 우뚝 떠올라 보이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당돌한 그 침입자로 해서 우두커니 들앉아서 귀를 기울이다가 귀익은 멜로디를 듣고 미란은 반가운 동무나 만난 듯 마음이 훤해지며,
 
224
"전원교향악이구먼."
 
225
동무의 이름이나 부르듯 기쁜 목소리였다. 단주에게도 그것은 반가운 동 무다. 그도 마음속에 그 이름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어서 고개를 끄덕이며 미란의 목소리에 응답한다. 간간이 되풀이되는 귀여운 멜로디는 우거진 초목 속에 군데군데 피어 있는 꽃 같으면서 그 아름다운 꽃이 두사람에게 먼 기억을 실어 왔다. 지나가 버린 봄의 기억. 같은 방에서 같은 곡조를 들으면서 인생의 공포에 떨떤 밤의 기억이 두 사람을 차차 황홀 속으로 끌어넣어 갔다.
 
226
"폭풍우날 밤--."
 
227
요란한 화음의 폭포에 미란은 자리를 일어서면서,
 
228
"그날 밤을 생각하면 무서워져요."
 
229
침대로 달려갔다. 단주는 자기 몸에 와 닿는 미란의 몸이 떨리고 있는 것을 느끼며 전염이나 된 듯 자기의 몸도 덩달아 떨리기 시작하는 것을 걷잡을 수 없었다.
 
230
"오늘밤두 흡사 그날 밤 같으면서---"
 
231
향기로운 화장냄새를 맡으면서 단주는 바로 몇 치 앞 어둠 속에 미란의 하아얀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달보다도 아름답고 해보다도 휘황하다.
 
232
액 속의 그림같이 그 부부만이 세상의 모든 물상과 구별되고 떨어져서 우주의 삼라만상 속에서 오려 내온 가장 아름답고 엄엄하고 높은 것으로 보이면 서 마음을 흠뻑 흡수해 들인다. 그 가장 아름답고 숭엄한 것이 바로 몇치 앞에 놓여 있음을 깨닫자 눈알이 현혹해지면서 손바닥에 땀이 빠지지 나고 목구멍이 울린다.
 
233
동정이라는 것이었다. 미란은 그날 밤 일을 그렇게 시작되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단주로서 보면 일상 그가 꾸미고 늘이고 있던 감상의 그 물 속에 그날 기묘하게 미란이 걸려온 셈이었으나 미란으로서 보면 단주의 자태가 감상의 경지를 넘어서 참으로 쓸쓸하고 가엾은 것으로 보였던 것이 다 방안의 공기라는 것이 . 푸리고 차게 가라앉아 있는 속에서 휘줄그레하게 병들어 있는 단주의 꼴이 운명해 가는 염소같이 꺼져 가는 음악소리같이 애잔하게 보였던 것이다. 애잔한 것이 또 그렇게 아름답게 보인 적은 없다.
 
234
멸망의 아름다움이 정신을 뺏으면서 그 모든 것이 자기의 탓으로 생각될 때 동정의 마음이 솟았다. 동정 속에서는 대상이 아름다워지면서 전에 못 본 새로운 방면을 발견해 낸 듯 그것이 지금에는 자기에게 가장 가까운 것으로 느껴졌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음악보다도 천재보다도 더 가까운 것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불안과 공포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몇 달 전 폭풍우의 밤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즉 그날 밤의 공포의 경험으로 해서 그만큼 감정 이 익숙해지고 부드러워졌던 것이다. 단주의 태연하고 침착한 것이 밉살머리스러우면서도 미란은 그에게서 그 침착성을 본받고 배우는 것이었다. 당초에 같이 길을 떠났음에도 지금 그 인생의 문을 들어서는데 두 사람이 노 정에는 차이가 있어서 단주는 미란보다는 하루의 선배가 된 셈이었으나 어떻게 해서 그가 미란을 따돌리고 인생의 스승이 된 것인가는 물론 아직 미란에게는 알 바 없었다. 단주보다도 미란의 감격이 더 컸던 것은 물론 이것 이 벼르던 길이었다구나, 대체 그것이 무엇일지를 모르면서도 안타깝게 떨면서 속히 그 문을 잡으려고 서두르고 계획하다가 결국 처음 번에는 실패했던 그 길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나면서 이치를 체득한 후의 아이와 같이도 감개가 컸었다. 한꺼번에 세상을 알아버리고 복잡한 우주의 신비를 잡아버리고 아까까지의 세상을 하직하고 새로운 세상에 들어선 듯 ---복잡한 감동이었다.
 
235
그러나 그런 순간의 감개가 지나간 후에 오는 반성의 채찍은 모질고 매웠다. 아마도 모르는 두 사람만의 짧은 시간의---사건은 극히 간단한 것이나 깊이 생각하면 기막히게 중대한 일을 순식간에 저질로 놓은 뉘우침이 났다.
 
236
물을 길으러 갔다가 물동이를 반석 위에다 와싹 깨트려 버린 듯 꼬까옷을 입고 나섰다가 진흙 속에 빠져 망쳐 버린 듯---뜨끔한 생각이 들었다. 옷을 적시거나 동이를 깨트리면 기껏해야 어머니에게 꾸중을 들으면 족한 것이나 자기가 저지른 인생의 실책을 꾸짖을 사람은 어머니쯤이 아니고 더 큰 것, 가령 조물주나 하늘이나 그런 무서운 것일 듯한 두려움이 솟았다. 저지른 이상 영원히 제대로 돌릴 수 없고 지울 수 없고 바로잡을 수 없는 것임을 생각할 때에는 죄의 의식으로 변해갔다. 그 죄에는 벌이 있을 듯---자연의 계시를 기다리지 않고 마음대로 임의의 시간에 계율을 어긴 데 대해서 천벌이 있을 듯도 한 생각이 났다. 이런 복잡한 뉘우침과 반성은 곧 단주에게 대한 염증으로 변했다. 아까까지의 애잔하고 아름답던 것과는 판이해져서 누추한 노예같이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병들고 약한 것은 병들고 약한 것일 뿐이요 아름다운 것도 신비로운 것도 아니다. 방안의 비극적 분위기가 결국 자기를 속였음을 알았다. 신비와 공상은 날아가고 어둡고 침침한 방안은 환멸의 굴속으로 변하고 감상을 위조하고 도롱뇽의 안개를 뿜고 있는 비극배우 단주는 평범하고 산문적인 한 마리의 나귀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평범한 것이 자기의 바라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뒤틀렸다는 생각이 들면서 비위가 거슬려졌다.
 
237
그 결과는 미란을 몰아다가 한갓 예술의 길로 향하게 했다. 정진에 대한 자각이 굳어지고 영훈에게 대한 존경이 극진해 갔다. 참으로 세상에서는 천재만이 귀하고 뜻있는 것이지 그 외의 모든 것은 하찮은 것이요 어리석고 게으른 벌레밖에는 안되는 것이다. 아무리 보아도 나 귀밖에는 못 되는 단주에게 가장 귀한 선물을 바친 생각을 하면 부끄럽고 애틋해지면서 그와의 사 이는 그것으로서 끝을 막아 버리고 그 이상 더 결혼이고 무엇이고 하는 일 절 생각을 칼로 베인 듯이 끊어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한때의 악몽의 환영을 잊어버리려고 애쓰면서 자나깨나 음악을 생각하고 피아노 앞에 앉으면 밤 깊어가는 줄을 잊었다. 영훈이 그의 재분을 발견하고 유망하다는 선언을 했을 때, 두 사람의 이해는 깊었고 그에게 대한 경의는 더욱 짙어가는 것이었다. 그를 놓치지 말고 힘껏 붙들고라야만 목적의 길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을 생각할 때 지금에는 그만이 가깝고 친밀한 세상에서 단 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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