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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분(花粉) ◈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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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이효석
 

1. 3

 
2
그러나 미란의 경우는 실상에 있어서 이와는 퍽도 달랐다.
 
3
만리 허공을 날아서 낯선 도읍에 이른 그는 새같이 하늘을 날았다는 것과 화려한 도회에 왔다는 두 가지 신기한 사실로 해서 감격으로 마음이 그득 불렀다. 현마를 따라 종일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저녁때가 되어서 여관으로 돌아오면 피곤한 몸에 고요한 일순 집 생각과 단주의 생각이 나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다음날의 분주한 계획을 궁리하노라면 그런 수심ㅇㄴ 오래 끌지 않고 금시 사라졌다. 처음 보는 도회의 구석구석이 진미를 갖춘 찬란한 식탁같이 마음을 유혹했다. 백지 같은 미란의 마음은 그것들을 일일이 맛보고 받아들이기에 겨를이 없었다. 놀러 나갔다 흐뭇한 잔칫상을 받고 집도 오물하던 생각도 다 잊어버린 아이 모양으로 그 가지가지의 자극에 정신을 송두리째 뺏긴 미란이었다. 거리를 걸어도 한 가지 한 가지가 눈을 끄는 것이었고 조그만 찻집애를 들어가도 새로운 감각이 마음을 즐겁게 했다. 새 것을 보아도 모르는 척, 귀한 것을 보아도 대수롭지 않은 척, 좋은 것을 보아도 놀라지 않는 척하는 가스러진 어른의 버릇에 아직 물들지 않은 그의 마음은 가지가지 오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진귀한 것에 대해서 솔직한 감동과 놀람을 나타냈다. 그 마음을 살핀 듯 현마는 뒤를 이어 차례차례로 새것을 그의 눈앞에 드리우고는 욕심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4
"영화구경을 갈까."
 
5
제일 크다는 영화관에를 따라서 들어가면 언제나 가장 새것이---아직 세상 사람 눈에 다스려나지 않은 풋 작품이 걸려 있어서 새로운 지식을 더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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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에 저녁을 먹으러 갈까."
 
7
호텔 객실과 식당에서는 탁자마다 국제적인 풍속이 눈에 띠이면서 안계가 넓어졌다.
 
8
"촬영소 견학을 갈까."
 
9
촬영소 견학은 아마도 현마 자식의 이번의 용무 중에서도 중대한 부분이 고 장래 계획에도 참고가 되는 조목인 모양이었다. 거기서 미란은 한새로운 세상을 본 듯 야단스런 기계의 장치며 오락가락하는 배우들이며 촬영하는 현장의 요란스런 장면이며가 알 수 없는 흥분을 자아내면서 예술의 분위가 가 정신을 흠뻑 취하게 했다. 제작의 기쁨이라고 할까 한 토막 한 토막 꾸며내고 빚어내는 그 사업을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흥이나면서 막연히 여배우 지원의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을 회상하며 예술에 대한 열정이 가슴속에 새로 불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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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피지 말구 말만 잘 들으면야 나중에 촬영소 세우게 되면 여배우 안 시켜주리."
 
11
현마는 오락가락하는 여배우들의 이름을 누구니 누구니 띄어주면서 미란의 마음을 한층 달뜨게 불지르며 가까운 장래의 계획을 토막토막 이야기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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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시간마다 목격하게 되는 허다한 새로운 재료와 사실이 미란의 마음을 한없이 열어주며 절을 때나 앉았을 때나 볼 때나 그 무수한 것을 받아 들이기에 마음은 분주하고 세상이 이렇게도 넓은가, 생각하지도 못한 동쪽 한구석에 이런 놀라운 생활의 사실이 있을 제는 세상을 통튼다면 얼마나 인생이란 넓은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 어지럽고 착잡한 재료의 세상에서 차차 한 가닥의 방향과 통일이 마음속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 한없이 착잡한 재료 속에서 골라낸 것은 역시 아름다운 것의 요소였고 요소였고 그것의 배열---예술의 감동이 마음을 다시 불지르게 되며 평생의 방향과 결의 가 작정되었다. 예술의 사업---이 제목이 눈앞에 선하게 떠으로면서 한결같은 감격이 박하같이 전신에 퍼졌다. 촬영소에서 받은 감동도 큰 것이었으나 그보다도 더 큰 감동이 그의 마음을 회오리 바람같이 저어놓고 그 속에서 아름다운 힘과 최후적 결심을 자아내게 하는 날이 왔다. 촬영소를 견학한 다음날 밤 이이었다. 공회당에서 열린 음악회를 들으러 간 날 밤---해외에서 음악수업을 마치고 가제 돌아온 천재소녀의 피아노 음악이 미란의 마음을 그다지도 흔든 것이었다.
 
13
그날 마침 현마는 아마도 회사와의 영화 교섭의 일이 순조롭게 되었는지 유쾌한 기분에 대강 볼일이 끝났다고 기뻐하면서 미란에게 항구 구경을 안 가겠느냐고 자청했다. 항구라는 말에 할 줄기 감상感傷을 느끼면서 미란은 따라 나섰다. 기차로 한 시간 남짓 걸려 태평양의 물이 바라보였다. 잘 개인 그날의 바다는 전을 편 듯이 고요하면서도 약간 쌀쌀한 맛이 여린 피부에 사무쳐 들었다 깨끗이 . 정돈되어 있는 넓은 부두, 아마도 만 톤급에 가는 듯한 육중한 외국 기선, 그것을 중심으로 흩어져 있는 무수한 배들--모두가 고요한 풍경이었다. 현마의 작정으로는 배 떠나는 광경이 눈앞에 보자는 것이었으나 공칙히 배는 벌써 떠나 버린 듯 닿았던 부두 아래편에는 오색의 테이프가 거미줄같이 얼크러진 채 떠 있었다. 남은 정이라고 할까. 그 테이프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보지 못한 작별의 광경이 눈앞에 떠오르면서 먼 바다 밖을 그리는 마음이 일어났다. 눈물을 흘리며 눈물을 받으며 떠났을 ㅂ 탄 사람들의 자태가 선해지며 부두 위에 드뭇한 남녀의 그림자는 막 그 들을 떠내 보내고 난 쓸쓸한 사람들이 아닐까 보이면서 까닭 없는 슬픈 여정이 솟는다. 그 여정 속에 단주의 그림자가 안개같이 우렷이 묻혀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러나 그런 감정 전부가 단주에게 대한 것은 아니었고, 말하지면 또렷이 지목할 수 없는 막연한 감정이었다. 그 막연한 애상을 도리어 향락이나 하는 듯 별일 없으면서도 몇 시간 동안이나 부두를 거닐며 바다를 바라보았는지 현마가 재촉하는 바람에 거기를 떠나 거리로 들어간 것이나 호텔에서 식사를 하면서도 미란에게는 바다에서 받은 감상이 가슴을 떠나지 않았다. 항구는 덮어놓고 슬픈 곳이라는 인상을 얻어 가지고 돌아오게 된 것이었으니 이 반날 동안의 해변의 소요가 그날 밤의 음악회에서 받은 감동과 마음의 관련을 가졌던지도 모른다.
 
14
"내친 걸음에 음악회에나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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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충대는 바람에 따라 나선 것이 알고 보니 천재소녀의 귀국 제일회 공연이었던 것이다. 미란이 음악회에 간 것은 그 밤이 생전 처음은 아니었고 유명한 음악도 허다하게 들어는 왔에도 참으로 음악에 귀가 뜨고 예술에 혼을 뽑히운 것은 그날 밤이 처음이었다. 음악은 조물주가 보낸 가장 아름다운 말---이라는 비유가 마음속에 떠오르며 영감이 전신을 휘둘러 쌌다. 소녀는 쇼팽이 장기인 듯 쇼팽의 밤이라고 해서 에튜드 마주르카 즉흥곡 등 십여 곡의 연주 곡목이 전부 쇼팽의 작품이었다. 이름을 들었을 뿐인 쇼팽을 미란이 참으로 알게 된 것도 물론 그 밤이 처음이었고 쇼팽의 천재와 아울러 연주하고 해석하는 소녀의 천재가 일종의 무서운 위엄을 가지고 눈앞을 협박해 오는 듯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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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즉흥곡」의 멜로디는 그대로가 바로 느껴 우는 영혼의 울음소리였다. 폭풍우같이 감정이 물결치다가 문득 잔잔하게 가라앉으면서 고요한 애수가 방울방울 떴는 듯---그렇게 느끼면서 듣노라니 미란에게는 낮에 본바다 생각이 나면서 항구의 감상이 다시 가슴속에 소생되었다. 가을 나무가 우수수 흔들리다가 한잎 두잎 낙엽 지는 광경이 떠오르면서 그런 나무 선 바다의 애수를 노래한 것이 그 곡조의 뜻인 듯이도 해석되며 지금 몸이 마치 그런 배경 속에 서 있은 듯 감상 속에 온통 젖어 버렸다. 폴란드의 정서는 왜 그리도 모두 슬픈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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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작품 「배랫 A플랫 작품 47」에서도 미란은 같은 감정을 느끼면서 쇼팽의 이름이 가슴속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호숫가에 선 옛성 속에 살고 있는 젊은 기사는 호숫가를 거닐다가 하루는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게 되자 첫눈에 사랑하게 되어 장래를 약속하고 헤어진다. 얼마 있다 다시 호숫가를 거닐 때 또 다른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게 된다. 기사는 그 자리로 그 여인을 연모하게 되어 전에 약속한 사람 있음을 잊어버리고 여인의 뒤를 따라 호수 복판에 이르렀을 때 별안간 파도가 이는 바람에 기사는 호수 속에 빠져 버리고 만다. 문득 일어나는 조소의 쓸쓸한 웃음의 소리, 그것은 처음에 약속하고 헤어졌던 여인의 목소리였던 것이다---이런 뜻을 가졌다는 그 곡조는 바로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듯 애달픈 환상을 눈앞에 떠오 르게 했다. 음악은 원래가 환상을 가져오게 하는 요술쟁이다. 피아노 속에는 조그만 우주가 들어앉고 사람의 혼이 숨어 있어서 가지가지 세상의 그림 자 감정이 임의로 그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그 악마 같이도 새까만 요술쟁이 앞에 앉아서 그 조그만 우주를 마음대로 번국질하고 사람의 혼을 멋대로 울려보는 흰 옷 입은 천재는 천사의 모양이 아닐까. 비스듬히 고여 놓은 피아노의 뚜껑은 흡사 새날개도 같고 배의 키와도 같다. 새까만 날개를 타고 혹은 키를 저으면서 소복한 천사는 하늘과 바다를 자유자재로 훨훨 날아다니면서 우주를 모방하고 영혼들을 흠뻑 울리는 것이다. 사실 미란의 영혼은 남몰래 흑흑 느껴 울었다. 그렇든 감동이 회오리바람같이 마음을 저어 놓았고 음악과 천재의 생각이 전신을 난도질해 놓아서 마음과 몸이 감격과 피곤 속에 풀싹 사그라졌다. 음악과 천재---세상에는 이것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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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위대한 것이요 아름다운 것이다. 거리보다도 항구보다도 집보다도 뜰 보다도 나무보다도 별보다도 꽃보다도 지혜보다도 자기의 육체보다도 청춘 보다도 사랑하는 단주보다도---무엇보다도 아름다운 것이 음악이요 천재이다. 쇼팽이요 피아노요 그 소녀인 것이다. 이때까지 눈을 감고 있어TEjs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계시된 듯 미란은 현혹한 느낌으로 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한 곡조 한 곡조가 끝날 대마다 정신이 들면서 왜 지금까지 이 아름다운 세상을 못 보고 왔던가, 왜 참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왔던가 하는 탄식이 나고 뒤를 이어 한 가닥 결의가 생기면서 새로운 힘이 솟는 것이었다…….
 
19
독주회가 끝났을 때 미란은 넋을 잃은 사람같이 자리를 일어서서는 사람 숲에 섞여 흘을 밀려나갔다. 문밖에 나서기가 바쁘게 현마의 소매를 끌고는 공회당 뒷문께로 향한 것은 천재소녀의 모양을 한 번 더 보자는 생각이었다. 같은 생각을 가지고 모여드는 사람들이 줄레줄레 몰려들었다. 천재란 대체 어디가 다르게 생겼을까. 어느 점이 뛰어난 것일까---하늘은 왜 유독 그에게 그런 특별히 선물을 보냈고 그는 무슨 인연과 값으로 그것을 받게 되는 것일까. 호기심이 안타깝게 불을 지른다. 이미 세상을 버린 백여 년 전의 쇼팽은 못 볼지언정 그를 흉내 내고 그를 본받으려고 하는 한 세기 후의 그 소녀만이라도 보고 싶은 생각이 치밀었다. 문앞에 한 대의 자동차가 와 닿더니 안에서 그인 듯한 사람이 나타났다. 미란은 밀리는 파도에 휩쓸려 발돋움을 하고 몸을 비비대며 고개를 질숙거렸으나 원체 첩첩으로 모여드는 인총으로 해서 문 앞은 가리워져 버렸다. 어깨 틈을 비집고 간신히 시선을 바로 돌렸을 때 어머니인 듯한 중년여인의 뒤를 따라 막 차에 오르는 소복한 소녀의 얼굴이 확적히 보여 왔다.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았으나 갸름한 얼굴에 새까만 눈동자를 가진 모습이 분명하게 눈 속에 새겨진다. 천재라고 별다른 인상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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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모습에 새까만 눈망울이 차게 빛나는---그뿐이었다.
 
21
사람의 숲을 뚫고 차는 거만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많은 어리석은 나귀들은 한 필의 준마를 보내면서 천치 같은 얼굴들을 지니고 줄레줄레 움직였다. 자기도 필연코 그중의 한 사람일 것이기는 하나 미란은 그 천치 같은 얼굴들에 구역이 나고 염증이 나며 군중의 낯짝 하나하나에다가 춤을 뱉고 발을 밟아서 까뭉개고 싶은 충동이 솟았다. 어리석고 둔하고 추접스러운 군중의 꼴이 금시 견딜 수 없이 싫어지고 그 감정은 곧 자기 경멸로도 변하면서 범상한 모습 속에 차게 빛나는 눈망울을 감춘 소녀의 자태가 여기 으뜸가는 것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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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으로 모르는 결에 천재와 군중을 저울에 달아보고 어느 편에 더 중한 것일까, 천재란 군중이 있으므로 빛나는 것이나 군중은 천재가 없으면 빛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천재를 살리고 천만의 군중을 죽어야 할 것인가, 천만의 군중을 구하기 위해 한 사람의 천재를 희생함이 옳을 것인가 하는 주저가 온 뒤 역시 천만의 추물보다는 한 사람의 아름다운 것 천재 편에 마음이 기울러진다. 소녀의 인상이 가슴속에 더욱 또렷하게 새겨지면서 그의 자태가 자꾸 높아만 갔다.
 
23
현마의 손에 끌려 밝은 거리에 나와 등불을 우러러보았을 때 긴장과 속박이 풀리며 무거운 굴레를 벗어난 듯 몸이 가벼웠다. 거기에는 천재 아닌 수많은 남녀들이 그날 밤의 소녀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듯 음악의 세상과는 동떨어져 편편스럽고 자유롭게 오고가는 것이다. 그 무심스런 자태들을 볼 때 미란은 불과 몇 시간 동안에 천재의 생각이 얼마나 자기를 얽어매 고 기롭혔나를 느끼면서 겨우 안온한 세계로 풀러 온 듯 마음이 거뿐해졌다. 미란의 긴장되고 오물했던 자태를 처음부터 바라 보고 왔던 현마도 기색이 풀리면서 이제는 편안한 세상 사람된 듯 비로소 인간의 회화를---조물주의 말이 아니라 사람의 말을 회복하고 웃음도 나오고 농도 나왔다.
 
24
"천재의 맛이 어때.---장하긴 해두 된 노릇이지."
 
25
"되는 말든 될 수만 있다면 천재가 되지 범인이 되겠수."
 
26
"조물주는 천재에게 재주를 준 대신 한편으로 괴롬을 주거든. 천재의 마음이 괴롬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천재만이 아는 것이겠지만---범인의 생활을 하는 편이 얼마나 수월하구 편편한지 이건 나두 알거든."
 
27
"아저씨---."
 
28
말은 듣는 둥 만 둥 문득 가로채면서 은근한 목소리였다.
 
29
"---나두 천재될 소질이 있을까."
 
30
"천재 병에 걸리기 시작한 모양이지. 어릴 때 한 번씩은 다 치르고 나는."
 
31
"어서 대답이나 해요. 제게두 소질이 보이나 어쩌나."
 
32
대답하기 전에 현마는 딴소리를 꺼낸다.
 
33
"미란이 올에 몇 살이지."
 
34
"왜요. --- 열여덟."
 
35
"아까 그 소녀가 몇 살인지나 알구 말인가."
 
36
"…………"
 
37
"미란이와 동갑이야. 벌써 한 수 진 셈이지. 적어두 대여섯 살 때부터 시작해서 십여 년의 연습을 쌓구 오늘의 경지에 이르렀을 것이니 지금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그를 좇아갈 셈야. 음악은 어떤 예술보다두 장구한 시간을 요하는 것이구 음악의 천재란 말하자면 연습의 천재인데."
 
38
"왜 학교 때 음악을 못했던구."
 
39
"공부는 안 하구 장난만 치구 놀구만 지냈으니 그렇지."
 
40
미란은 안타까워지고 슬퍼진다. 천재가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면 그역 운명적인 것일까. 일찍 시작하고 못한데서 자기들의 운명은 갈라진 것일까.
 
41
"또 한 가지 안타까운 얘기 들려줄까.---어떤 동양의 여류 피아니스트가 베토벤을 다 떼구 중년을 넘은 나이에 외국의 고명한 선생을 찾았더라나.
 
42
선생은 여류피아니스트의 연주를 한 곡조 들었을 뿐으로 실력을 알구 다음 날부터 ekfs 선생을 소개해 주구 그 지도를 받으리구 친철을 베풀었다는데 그 선생인즉은 누군구 하니 바로 노 선생의 수제자로 나이가 스물도 못되는 젊은 아이드래 여류피아니스트는 . 늙은 재조를 탄식하면서 독약을 먹었다든 지 물에 빠졌다든지……"
 
43
"그런 소린 왜 해요. 듣기 싫게."
 
44
짜증을 내는 미란을 보고는 말이 지나쳤음을 뉘우쳤다. 미란의 어린 마음 이 지금 커다란 번민 속에 있음을 알 때, 그 때늦게 솟는 열정에 고개가 숙여졌다. 그의 마음을 누그려 주어야 할 책임을 느끼면서 일부러 괴덕스런 태도를 지켜보는 수밖에는 없었다.
 
45
"내 묻는 시험에 대답하면 미란의 소질을 말해 주지.---쇼팽의 음악을 들었으니 말이지 그는 몇 해에 났던가."
 
46
"…………"
 
47
"일천팔백십년.---구년이라는 설두 있으나 십년이 바른 듯. 그의 유명한 사랑의 상대자가 누구던가."
 
48
"조르쥬 상드."
 
49
"것봐. 거저 안다는 게 사랑이야. 사랑이라면 모르는 게 없거든. 그럼 쌍드와 이전의 그가 실연당한 사람이 있었지. 스물대여섯 살 때."
 
50
"몰라요."
 
51
"마리라는 소녀. 열일곱 살 되는."
 
52
다리는 피곤한 김에 찻집으로 미란을 데리고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미란은 선언하는 듯이 현마를 바라보았다.
 
53
"피아노를 시작할 테예요. 집에 가면 곧."
 
54
차 한잔을 분부하는 정도의 말솜씨였다. 다따가 당돌하게는 들렸으나 현 마도 태연하게.
 
55
"기특한 생각이지, 또 한 사람의 천재 탄생되다."
 
56
"천재는 못 따라가더래두 있는 힘 시험해 보아야 마음이 시원할 것 같아요."
 
57
"아무렴, 공부를 해야지 아직두 생애가 기니까. 사람이 만족을 얻는다는 것이 여간 중대한 일이게."
 
58
다음이 중요한 대목이었다.
 
59
"---피아노를 사주시겠어요."
 
60
천연스럽고 수월하게 내던졌다.
 
61
"피아노---"
 
62
현마도 이 대목에서는 막히는 듯 말을 머뭇고는 미란을 꼿꼿이 바라본다.
 
63
"사주시겠어요, 안 사주시겠어요---대답만 하세요."
 
64
다지는 바람에 얼삥삥해지면서 목소리조차 당황했다.
 
65
"누가 안 사준다게 이 다짐인가."
 
66
"그럼 사주시겠단 말이죠."
 
67
"경우에 따라선 안 사줄 법두 아닌데."
 
68
"사주겠으면 사준다구 약속을 하세요."
 
69
"그까짓 약속쯤 어렵지 않으나.---제 청만 제 청이라구 우기지 말구 내 청이라는 것두 있겠지."
 
70
빙그레 웃으면서 찻숟가락을 내흔든다.
 
71
"교환조건이란 말이죠.--- 무슨 청이세요. 들을 것이면 듣죠."
 
72
"아주 선선하게 말한다."
 
73
"설마에롬 왕이 조카딸 살로메에게 청한 것 같은 무례한 청이 아닌 바에야 못 들을 것 있어요."
 
74
"요하네의 목을 베라는 원이 아니니까 벌거숭이춤을 청할 리는 없지만."
 
75
"무슨 청이예요."
 
76
그러나 현마의 청이라는 것은 그 자리에서는 보류된 채 두 사람은 밤거리 로 나왔다. 현마는 맑은 정신으로는 그것을 말하기가 겸연쩍은 모양이었다.
 
77
찻집에서 나와서부터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끊어진 채 묵묵히 여관까지 돌아왔다.
 
78
실상인즉 미란이 먼저 택시로 여관으로 돌아오고 현마는 혼자 도중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허출한 김에 술집에 들릴 터이니 먼저 들어가라는 분부였다. 술동무까지를 할 수 없어 미란은 혼자 돌아와 자기 방 잠자리에 들어가 서는 잡지를 펴들고 음악회에서 얻은 기억을 정리하면서 이 궁리 저 궁리에 잠겼다. 차를 따라 주러 들어온 하녀에게는 더 시중이 없다는 것을 말해서 돌려보낸 것이다.
 
79
주의해야 할 것은 당초부터 그들은 여관에서는 방 두 간을 따로따로 빌어 한 사람이 한 간씩 구별을 엄격하게 해 온 것이다. 물론 미란의 희망과 현마의 체면의 두 가지의 협의의 결과로 처음부터 말없는 속에서 자연스럽게 작정된 것이었다. 낮에 함께 거리를 다니고 구경을 가고 할 때에는 두 사람은 같은 일을 하고 같은 기쁨을 가지고 같은 감정을 지녀서 일종의 공동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나 밤만은 세상이 전연 달라져서 각각 자기 방 자기 이불 속에 들어가게 되면 두 사람 사이에는 담이 놓이고 성이 쌓여서 그 독립된 세상에서 제 궁리에 잠기고 제 꿈을 꾸게 되어 완전히 자기만의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낮과 밤이 엄연하게 갈라지는 공동생활---처음에는 예측도 하지 못한 그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법칙에 미란은 안심할 수 있었고 현마는 반대로 차지 못함을 느꼈다.
 
80
두 사람이 집을 떠날 때에 세란은 두 사람의 모양을 바라보면서 이야기 속에 나오는 아저씨와 조카딸 같느니 사장과 여비서 같느니 하면서 인상을 비평하고 두 사람의 여행을 은근히 위험시한 것이었으나 실상의 경우는 이와 같이 엄격한 것으로 세란의 상상은 당지도 않았다. 현마가 걱정하기 시작했던 세란과 단주의 사이가 허랑하게 빛나게 된 것이지 미란과 현마의 사 이는 되려 예측과는 반대였던 것이다. 미란은 밤마다 자기의 맑은 꿈속에서 안온한 잠을 이루고 날이 밝으면 새날의 경영에 마음이 뛰었다. 조그만 마음속에 감격을 가득 담아가지고 밤 자리 속으로 돌아오면 그것이 차례차례로 정리되면서 정신이 차차 가라앉군 한다. 단주의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흔히 이런 때였다. 하녀를 돌려보내고 음악회의 인상을 되풀이하고 있노라니 단주의 생각이 또 한번 떠오르며 집에서는 지금 어떤 생활들을 하고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있을 때 비교적 일찍이 술에 거나한 현마가 돌아왔다.
 
81
얋은 장치 하나를 격한 방이라 미란은 잠자코 있을 수도 없어 소리를 쳐 보았을 때 현마는 대답하면서 방을 나와 미란의 방문을 건드렸다. 자리를 일어나 옷셮을 아물리고 있으려니 현마의 불그스름한 얼굴이 나타났다.
 
82
"유쾌하다.…… 아직두 피아노 생각에 곰시락거리나."
 
83
"혼자만 유쾌하지 나까지 유쾌한가요."
 
84
"누가 술을 먹지 말랬나."
 
85
"술두 그만두구 어서 피아노나 사내요."
 
86
"그렇게 수월하게 사 줄 줄 알구.---고맙다는 인사를 톡톡히 받구야 사줄걸."
 
87
"절이래두 하죠."
 
88
"절쯤으로 되나."
 
89
마음대로 목판의 찻그릇을 집어 두어 잔이나 식은 차를 따라서 켜고 나더니.
 
90
"영화에서 왜 가끔 보는---아저씨에게 고맙다는 뜻을 표할 때 어떻게들 하더라."
 
91
뚱딴지같은 소리를 한다.
 
92
"그 흉내를 내란 말이죠"
 
93
"아무렴."
 
94
"껑층 뛰어오르면서 이마에다 입술을 갖다 대구---그렇게 하란 말이죠."
 
95
"아무렴."
 
96
"그게 청이에요."
 
97
"너무두 적은 청이지."
 
98
미란은 놀랄 것이 없었다. 긴한 듯이 찻집에서 말하기를 주저하던 청이 대체 무슨 청인가 했던 것이 겨우 그 정도의 것이라면 두려울 것이 없었다.
 
99
"그만한 청쯤 못 들을 것 있나요."
 
100
"염량이 그만은 해야지.---그럼 지금 들어줄 텐구."
 
101
말을 듣고 현마의 얼굴을 바라볼 때 그 불그레한 얼굴에 별안간 구역이 나며 속이 뉘엿거리기 시작했다. 맑은 정신을 가질 때의 그는 부드럽고 정 하고 착한 아저씨이던 것이 술이 들어가면 왜 그리도 추하고 무서워 보이는 지 새로운 발견에 소름을 쳤다.
 
102
"지금은 안돼요. 취하신 얼굴엔 싫어요."
 
103
"세상의 술 취한 아저씨는 인사를 못 받아 보겠네."
 
104
"그럼은요. 술내 나는 얼굴에다 추접스럽잖아요."
 
105
"요 말버릇 봐라."
 
106
현마는 정색하면서 미란의 팔을 잡아 낚은다.
 
107
"승낙한 이상 내 임의거든."
 
108
미란은 겁을 먹으면서 손을 빼려고 애쓴다.
 
109
"안돼요. 내일 아침 맑은 정신 때 해드릴께요."
 
110
"이러긴가."
 
111
"인사하는 사람의 맘이지 받는 사람의 맘인가요."
 
112
"어디 보자. 제 청만 제청이라구 남의 생각은 조금도 안 하구."
 
113
손을 놓는 현마는 저윽이 불만스런 모양이다. 겸연쩍은지 남은 차를 마셔 버리고는 자리를 일어서는 것을 보면 미란은 미안한 생각도 나서 목소리를 누그려 본다.
 
114
"아저씨 대접을 깎듯이 해드리려니까 그렇죠."
 
115
"그만둬."
 
116
투덜투덜 나가는 등뒤에다 한마디 더 던져 본다.
 
117
"내일 아침 잊지 않을께요. 어서 편히 주무세요."
 
118
그러나 자기 방에 들어가 자러 드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고 방에서 모자를 쓰고 나오더니 복도를 쿵쿵쿵 돌아 다시 밖으로 나가는 모양이었다. 또 술을 먹으러 나가는 것일까---내가 잘못한 것일까---이모저모 생각하면서 차차 잠을 이루어 갈 때 현마는 여관을 나와 밤거리를 헤매면서 미란이 모르는 세상 현마 같은 어른들만이 --- 아는 밤 세상을 찾아 가는 것이었다. 집을 떠난 지 여러 날 만이었다. 미란과 같이 거동하게 되는 까닭에 하는 수 없 는 노릇이었으나 그로서는 오랫동안 깨끗한 청교도의 생활을 하게 된 것을 오늘은 도리어 마음속으로 비웃어도 보며 터무니없는 투정질이나 하듯 화를 내면서 비틀비틀 처음 보는 골목을 뒤지는 것이었다…….
 
119
이튿날 아침 미란은 천연스럽게 자기 방에서 일어나 나오는 현마를 보았다. 현마는 좀 어색한 듯 벌겋게 충혈된 눈에 미란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며 궁싯궁싯 제 혼자 움직였다. 각각 늦은 아침을 먹고 난 뒤 미란이,
 
120
"오늘 무슨 날인지 아세요.---피아노 사는 날예요."
 
121
현마는 비로소 제 기색을 돌리면서 데 설 데설 표정을 펴간다.
 
122
"간밤 약속을 이향하겠다 말이지."
 
123
"선물도 받기 전에 먼저 인사를 해야 한단 말인가요."
 
124
"아무렴, 아무렴."
 
125
괴덕을 부리는 바람에 미란도 마음이 누그러지면서 일상의 스스럽지 않은 공기를 회복했다.
 
126
"자, 얼른 와서 경의를 표해, 경의를 표한 담에야 사줘두 사주지."
 
127
말을 그렇게 듣고 보면 도리어 쑥스러워지며 몸이 굳어 간다. 천연스러운 방법은 없을까. 차라리 그렇지 못하다면 그 편에서 자진적으로 그것을 요구 해 왔으면---하는 생각도 들었다.
 
128
"무얼 망설여. 어느 때까지."
 
129
현마는 능걸치게 웃으면서 짜장 자진적으로 나서며 미란의 어깨를 끌어당긴다. 미란은 몸의 힘을 풀고 끌려 들어가면서 모든 것을 맡기는 듯 온순한 태도를 지녔으나 약속대로 이마에 경의를 표한다는 것이 어릿거리는 서슬에 지나치게 되어 현마의 우악스런 힘에는 당하는 재주 없이 기어코 입술을 받 아 버리게 되었다. 전광석화같이 오는 폭력에는 어쩌는 도리없는 커다란 품 안에서 비둘기같이 움츠리고 약속의 한계를 넘어 순간의 자유를 뺏기지 않 을 수가 없었다. 몸이 놓였을 때 미란은 죽지를 비틀린 비둘기같이 이지러진 몸을 털면서 일종의 노기가 솟아 현마의 뺨을 갈기고 싶었으나 기왕의 약속을 생각하고 마음이 풀리기는 했다.
 
130
"실례가 아니예요. 뺨이래두 갈길까 했어요."
 
131
"생판 모르는 귀부인이라구."
 
132
"폭력은 야만이거든요."
 
133
"왜 그런 인사의 법은 없는 줄 아나."
 
134
느물거리며 대꾸는 했으나 실상인즉 마음속으로 부끄럽기도 했다. 간밤의 숨은 행동을 생각하고 더럽혀진 자기의 몸과 순결한 미란의 몸을 대조하게 될 때 누추한 자격으로 신성한 것을 겨누고 범한 듯 부끄러웠다. 사람이 관 대한 때는 반드시 죄를 진 때다. 현마는 허물을 지우려는 듯 그 어느 때보다도 그날은 관대해진 듯했다.
 
135
"내가 무례했거든 대신 내게 무례한 청을 좀 해보지."
 
136
득실은 언제든지 상반되는 것, 미란은 도리어 다행한 듯 뽀로통하던 노기를 풀고 그러나 결코 기뻐라 날뛰는 법 없이 침착한 절도를 지니면서 이번에는 자기가 주인인 척 현마의 앞을 선다.
 
137
"얼마든지 마음에 드는 것 골라 보라니까."
 
138
당연한 보수인 듯 현마가 충충대는 바람에 미란은 마음이 참새같이 뛰었다. 사실 아침의 그 조그만 변괴 때문에 그날의 장사는 미란에게 얼마나 유리했는지 모른다. 그의 의견이 첫째였고 현마는 허수아비같이 옆을 따를 뿐이었다. 성공된 그날의 거래로 미란은 아침에 받은 욕쯤은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139
악기점을 차례로 돌아디면서 비위에 맞는 피아노를 선택할 자유를 도맡게 되자 담이 허랑하게 커지면서 몇 군데를 거치다가 마음에 드는 것을 골랐을 때 두말없이 그것으로 결정된 것은 물론이다. 조금 낡기는 했으나 베히슈타 인 회사의 제작이라는 것이 마음을 댕겼다.
 
140
"이천 원이면 외국치로서야 싼 폭이죠 뭐."
 
141
현마도 반드시 그 값에 놀라는 것은 아니었으나 과즉 칠팔백 원의 것에 만족하리라고 생각한 것이 곱절의 것을 잡은 것이 의외였고 아침의 그 인사 의 값이 이천 원임을 생각할 때 입맛이 얼마간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142
"뭘 그래요. 만 원짜리가 있을야니요."
 
143
별수없이 현마는 큰 염량이나 보이는 듯 선뜻 그것으로 결정하는 수밖에는 없었으나 막상 그것을 흥정하러 들 때 한 가지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
 
144
맞은편에서 점원과 피아노의 흥정에 말이 많은 한 사람의 청년이 있었으 니 알고 보면 그도 그 같은 베히슈타인 회사의 피아노를 마음에 두고 거래 중인 것이었다. 현마들은 그의 높아지는 어성에 주의를 끌리게 된 것이었으 니 그는 무엇인지를 누누이 설명하면서 점원을 설복시키려는 것 같았다. 맨 머리바람의 고수머리며 차면서도 부드러운 얼굴 모습이 한 사람의 아마도 예술가인 듯 범상치 않은 인상이 마음을 끌었다. 장황한 변설을 들으면 그 피아노는 마음에는 드나 값이 과하다는 것이었다. 천오백 원으로만 떨어트 려 준다면 당장에라도 현금으로 사겠다는 것, 자기에게는 지금 얼마나 피아노가 필요하다는 것 장사란, 경우를 따라서 적당한 아량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되씹고 곱씹어 말하는 것이다.
 
145
"일부러 해협을 건너 이렇게 멀리 온 것이 순전히 피아노를 사자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말하지두 않겠소."
 
146
흥정이 아니라 싸움이었다. 점원이야 어떻게 되었든 자기의 말이 가장 중요한 것이요 하고 싶은 말은 모조리 털어놓는다. 예술가란 저렇게 아이같이 속사정을 털어 말하며 아무 자리에서나 흥분하고 하소연하고 부르짖는 것일까---미란은 그 한 고장에서 왔다는 같은 족속의 청년에게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피아노로부터 든 흥미가 우연한 관계로 그 이상한 청년에게로 옮아간 것이다. 미란뿐이 아니라 이제는 벌써 그 상점안의 모든 시선과 주의 가 한갓 그 청년에게로 쏠렸다.
 
147
"말씀은 잘 알겠구 그 열정두 고마운 것이긴 하나 저희로서야 장사니까 손님께 못 드린다구 해두 또 다른 손님이 없는 것 아니구---실상은 지금 여기 또 한 분 사자는 분이 계시는 판에……"
 
148
점원이 현마들을 가리켰을 때 그 청년의 시선은 이쪽으로 향해졌다.
 
149
돌연히 나타난 적수를 바라본 듯 복잡한 표정을 띠인 그 눈매를 미란은 흡사 자기를 쏘는 두려운 것으로 여기며 차게 빛나는 눈동자에서 지나간 그 무엇---옳지, 간밤 음악회의 천재소녀의 눈동자를 문득 생각해 내면서 이 역 보통사람 아닌 자칫하면 소녀의 유가 아닐까 하는 추측이 솟았다. 청년은 두렵고 교만한 눈초리를 돌려 이번에는 점원을 노리더니,
 
150
"개발에 편자지 아무리 흔한 피아노라구 아무나 가져두 좋은 법인가.
 
151
나귀에게 거문고를 주어보지 무슨 꼴이 되나. 예술을 모욕하는 데두 분수가 있지 아무리 상품이라구 예술가에겐 거절하구 객실의 장식품으로 쓸 사람들에게 주어야 옳단 말인가.---내 말이 거짓말이거든 어디 거기 섰는 여류 피 아니스트에게 이 당장에서 한 곡조 울려 보라지."
 
152
미란은 얼굴이 새빨개지며 몸이 달았다. 예술가의 날카로운 직각으로 자기의 재주를 첫눈에 뽑아낸 것일까, 얼마나 교만하고 얄미운 모욕인가. 초면의 당장에서 그렇게 주제넘고 대담한 무례가 다시 있을까. 얼마나한 재주를 속에 감추면 그렇게 사람을 욕 줄 수 있을까---속이 꼬이고 불이 치밀면서 그 정체모를 무레한을 후려갈기고도 싶고, 아니 그보다도 될 수만 있다면 말썽거리 피아노 앞에 넌짓 앉아서 장기의 한 곡조를 울려 청년의 모욕의 말을 무언중에 꾸짖고도 싶었으나 어쩌랴, 조물주는 지금 자기편을 들고 있지는 않는 것이다. 천재에 대한 탄식으로 순간 오장이 녹을 듯이 타면서 대거리의 말 한마디 없이 전신이 나뭇개비같이 꼿꼿해 있는 동안에 보라는 듯이 피아노 앞에 가 앉은 청년은 어느덧 한곡조를 울리기 시작한다.
 
153
어이가 없어 뻣뻣이 섰던 사람들은 요번에는 곡조에 취해서 여전히들 우두커니 서 있게 되었다. 가늘고 미묘하고 조금 슬픈 그 곡조를 미란은 그 역 쇼팽의 것일 듯---쇼팽의 마주르카의 한 곡조쯤일 듯 짐작하면서 청년의 기술이 평범한 것이 아님을 느꼈다. 모르는 척 비웃고 무시하기에는 너무도 열중되는 그의 태도에 사람들은 솔직하게 귀를 기울일 수밖에는 없었다. 미란은 간밤 소녀에게서 받은 흥분을 마음속에 되풀이하면서 청년을 고쳐보기 시작했고 일종의 경의조차 바치는 것이었으나 곡조가 끝나고 다시 청년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았을 때에는 전신의 피가 용솟음치기 시작하며 그 교만한 태도에 경의는 금시 경멸로 변했다. 얄밉고 무례한 것, 네 재주가 몇 푼어치가 되든 간에 피아노를 사랑하는 마음은 밑질 것 없다. 피아노는 내 것이다, 내 것이 되어야 한다---마음속에 굳게 주장하면서 어안이 벙벙해서 서 있는 현마의 팔을 흔들었다.
 
154
"소리 제법 괜찮죠. 어서 사요."
 
155
현마가 정신을 차리고 점원들의 얼굴을 살펴볼 때 한 사람은 청년 앞에서 손을 비비면서,
 
156
"미안하지만 사정이 이러니 단념하시구 다음 기회나 봐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57
하고는 현마를 안내해서 안쪽으로 걸었다.
 
158
"물건을 주면 재조를 뺏구 재주를 준 데는 물건을 애끼구---세상일 공평한지 불공평한지……"
 
159
속으로 중얼거린다는 것이 현마는 입 밖에까지 내버리고 말았다.
 
160
"거문고를 나귀에게 주려고 한다. 나귀에게 거문고를 주려고 한다.---어리석은 무리들이……"
 
161
새끼만 피아노의 가슴에다 자기의 모양을 비취면서 그것을 내것인양 덤석 안으며 외치는 청년을 미란은 요번에는 자기의 차례인 듯 교만한 눈초리로 굽어보면서 대거리나 하려는 듯 한마디 쏘아붙였다.
 
162
"조물주는 천재를 맨들어 놓고는 제 스스로 그것을 질투하다든가.---어서 거문고는 나귀나 가져갈 테니 재주 있는 준마는 탄식이나 해요."
 
163
돌아보지도 않고 현마들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갈 때 우레같이 피아노 의 건반이 고함치더니 폭풍우나 쏟아지는 듯 광상곡의 구절이 울리기 시작 하는 것이었다.
 
164
이 뜻하지 않은 아침의 한 장면이 우연히도 미란에게는 큰 자극을 주어 불같은 열정을 일으키게 한 것이었다. 청년에게서 받은 모욕이 간밤에 소녀에게서 받은 감동과 합쳐서 절대적인 결의를 주었다. 나귀의 신세를 면하고 준마의 세상에 속할 수 있도록---될 수 있다면 새로 태어나서 첫걸음부터 시작하고 싶었으나---때늦은 것을 탄식하면서 최대의 노력을 할 것을 마음 속에 맹세했다. 예술이 제일이요, 창조가 제일이요, 천재가 제일이요---그 외의 모든 일은 우둔한 나귀의 세상일 같이만 생각되면서 예술에 대한 인식이 굳세게 마음속을 차지하고 들어앉았다.
 
165
두말할 것 없이 말썽 많은 피아노를 사서 고향으로 부치도록 하고 났을 때 미란은 마음의 고리가 한꺼번에 풀리면서 며칠 동안에 마음이 여러 길이 나 자라난 듯 불과 열흘 남짓한 이번 여행이 여러 달이나 지난 듯한 마음의 변화를 느꼈다. 확실히 집을 떠날 때의 마음은 아니었다. 불안정하고 안타깝던 상태가 안정한 한 줄기의 길을 찾고 혼돈한 세계가 빛을 찾는 동안에 어린 마음이 여러 길 활짝 자라난 것은 사실이었다. 작정된 길을 위해서 이제는 벌써 집을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얼른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새로운 생활의 첫걸음을 떼어 놓았으면 하는 생각으로 차갔다. 여행을 재촉하고 피아노를 조르던 미란은 이번에는 하루바삐 동경을 떠나기를 조르게 되었다.
【원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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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효석(李孝石)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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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이효석의 소설(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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