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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분(花粉) ◈
◇ 9 ◇
카탈로그   목차 (총 : 9권)     이전 9권 ▶마지막
1939년
이효석
 

1. 9

 
2
현마는 그 뒤에도 걱정되는 마음에 미란을 찾아서 몇 차례나 연구소를 기웃거렸는지 모르나 미란들은 번번이 그를 솔려 버린 까닭에 미란이 짜장 거리로 돌아오지 않고 모를 곳으로 실종을 해버린 것으로만 여기게 되었다.
 
3
겁이 나는 바람에 별장에다 통지를 해서 세란과 단주를 부른 까닭에 피서고 말고 두 사람 또한 놀라 부리나케 집으로들 돌아왔다. 피서를 떠나기 전과 마찬가지로 집안은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하면서 왁자지껄들 했으나 식구들 이 모였다고 쓸데없이 설렐 뿐이지 그것이 미란을 찾아내는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역시 마음이 다는 것은 현마, 다음에는 단주여서 그는 현마를 본받아 거리를 다닐 때에도 유난스럽게 주의를 하면서 혹시나 미란의 자태가 눈에 띠이지나 않을까 하고 살피는 것이었으나 현마가 못 찾아내는 미란을 그가 찾아낼 리 만무했고 연구소에는 영훈과 온천에서 싸움한 후부터는 꺼리게 되었고 그 위에 현마의 말을 믿고는 살필 염도 안 했던 것이 다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다가. 모든 곡절이 수상스러워서 단주는 분을 현마에게로 씌우면서 사무소에 단둘이 앉게나 되면 항의와 공격으로 현마를 못 살게 구는 것이었다.
 
4
"어떻게 했게 멀쩡한 사람을 충충대 냈단 말요. 시원스럽게 곡절을 말하구료."
 
5
"곡절이 무슨 곡절이겠나. 밤중에 도망한 사람의 곡절을 낸들 알 수 있나."
 
6
단주가 아무리 족쳐도 현마로서는 마음의 비밀을 홀홀히 말할 리 없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말할 것이 아님을 하늘에 맹세하고 있는 것이다. 한 평생 비밀로서 덮어둘 것이요, 그렇듯 그것은 미란을 위해서 보다도 자기를 위해서 귀중한 비밀이었던 것이다.
 
7
"술을 먹구 까막잡기를 하다가 밤중은 돼서 어떻게들 됐단 말예요."
 
8
"각각 방에들 쓰러져 잔걸 낸들 나 잔 것밖엔 무얼 알겠나."
 
9
"쓰러져 잔 것이 무얼 원망해 밤중에 도망을 쳐요."
 
10
"그렇게 판사나 검사같이 족쳐내면 날더러 거짓말이래두 꾸며대란 말인가."
 
11
"거짓말은 왜 참말을 하라는 거죠. 누가 그 눈치 모르겠다구. 첨엔 그래 두 영훈을 의심해서 싸우기까지 했겠나요. 허물은 바로 어두운 등잔 아래 있는 줄을 모르구."
 
12
"시끄럽단 밖에. 쓸데없이."
 
13
현마가 호령을 한댔자 격하기 시작한 단주는 그 한마디로 가라앉기는커녕 더욱 화를 내며 시부렁거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14
"남 멋대로 하게 버려 두지 않구 왜 붙들어 놓구는 결혼을 시켜 주겠다구 얼리면서 미란만을 살짝 빼서 동경엔지로 데리구 가더니 괜히 설굳혀 음악은 무어구 피아노는 무어구 선생은 다 무어야. 남을 훼방하구는 제놀음들만을 위주하구 그 놀음에 들어 멀쩡한 사람만 병신으로 맨들어 놓으면서 결혼은 다 무어야.---자, 언제 결혼시켜 주구 언제 모두 제대로 해준단 말요.
 
15
대체---."
 
16
"결혼을 하느나 무어니 자기들 뜻에 달린 게지내게 무슨 아랑곳인가."
 
17
"그럼 왜 애초에 가만두지 못하구."
 
18
"어떻든 결혼이구 무어구 직접 미란의 맘을 물어 볼 것이지 내게 대든들 어떻게 하란 말야."
 
19
"남의 마음을 뒤집을 대로 뒤집구 설굳힐 대로 설굳혀 놓구 이제 와서 미란의 맘과 물어 보라구. 사람을 욕 주어두 분수가 있지---어서 미란의 맘을 제대로 바로잡아 놓든지 그렇지 않거든."
 
20
"발칙한 것, 그렇지 않거든 어쩌란 말이야. 배은망덕두 유분수지 내게 이렇게 버릇없이 대들 법이 있단 말이냐. 개를 기르다 다리를 물리운다더니 원."
 
21
"개니 무어니 얼마나 길러 주었다구 그런 악담을.---내일부터래두 그까짓 집을 나가면 그만이지. 개는 무슨 개란 말야."
 
22
거리에서 굶주리고 헤매이는 것을 데려다가 길러 주고 사랑해준 미소년 ‘아도니스’의 반항인 것이다. 당초에는 아내 세란보다도 더 사랑해서 집에 데려다가 한 식구를 만들어 주었던 그 소년이 어느 결에 이렇게 거역하고 배반하게 된 것인가. 현마는 어이가 없어서 찬찬히 바라보면서 벌렸던 입이 아물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괘씸하다고는 해도 나 어린 소년을 상대로 소리를 높이기도 어른답지 않아 하는 수 없이 목소리를 낮추는 것이었으나 괴변에 심중은 물론 안온하지 않았다.
 
23
"집을 나갈 때 나가드래두 세상에 이럴 법이 있나. 철부지라구는 해두 대체 무슨 턱을 잡구 이렇게 대드는 거야. 아무리 하치않어두 주인은 주인 이 아닌가."
 
24
"여러 말 말구 어서 미란을 찾아내놔요. 제대로 맨들어 내놔요. 맨 첨의 순진하든 그때의 미란을 맨들어 내놔요."
 
25
말이 미란의 일건에 이를 때 현마도 꼼짝하는 수 없었다. 아픈 상처에 손이 와 닿은 듯 저지른 허물의 생생한 흔적이 마음을 찔렀다. 노염으로 한다면 단주를 그 자리에서 매질이라도 하고 싶으나 미란을 거들고 대드는 데는 꼼짝하는 수 없었다.
 
26
"조르지 말구 더러 나서서 찾아보라는데두."
 
27
"어서 미란을 찾아내놔요. 두말 말구 미란을 찾아내놔요."
 
28
생떼같이 덤비는 데는 어쩌는 수 없이 한 수 꿀리는 현마였으나 그러나 하루 우연히도 기르던 개에게 참으로 다리를 물리운 것을 알았을 때 그는 노염에 정신이 착란되어서 단주에게 대한 마지막 단정을 내리고 무서운 철퇴를 던지게 되었다. 기르던 개에게 다리를 물리었다거나 하는 비유로는 부족하리만큼 현마에게는 무서운 사실의 발로였다. 단주로서는 현마에게 배은망덕을 했을 뿐이 아니요, 그를 몰아 패가망신케 한 셈이다. 원래 현마 자신이 그 음침한 푸른 집의 으늑한 분위기를 꾸며 놓은 괴수요, 근거였던 까닭에 어느 결엔지도 없이 이루어진 탕일한 풍습에 정신을 차릴 여유가 없었 던지도 모른다. 등하불명으로 모르는 것은 남편인 현마뿐으로 되어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관대한 부처님의 의용을 지니고 집안 사람들을 거느리고 탈없이 다스려 왔다고 적어도 --- 미란의 경우만을 빼놓고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이 바위 같은 신념이 깨트려졌을 때 현마의 노염은 하늘을 찌를 듯이 솟고 정신이 착란되어 물인지 불인지 모르고 집안 사람 모두에게 무서운 중오와 복수를 느꼈다.
 
29
---현마와 단주가 미란에 종적에 대해서 근심하고 걱정하는데 비해서는 세란과 옥녀는 심드렁한 편이어서 남의 일보다도 자기 자신들의 일에 더 급급한 형편이었다. 옥녀는 개중에서 척분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 미란에게 대해서 무관심한 것이 당연하다고 하더라도 세란의 편으로 본다면 동생의 일 건에 그렇게까지 심드렁한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주책없다고 밖에는 볼 수 없었다. 그의 주책없음은 단주를 사이에 두고 일어나는 심정이니 피서지에서 극도에 달했던 그 심정이 그대로 남아 집으로 온후까지도 버릴 수 없었 던 것이다. 열정이니 무어니 하기보다도 일종의 생리적 병중이었던지도 모른다. 산바람과 태양에 얼굴을 끄슬 대로 끄슬었고 육신 마디마디에 산에서 받은 정기가 넘쳐서 원래가 야생의 여자인세란은 푸른 집을 바로 별장 그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전에 없이 호담스럽고 대걸해져서 현마쯤은 손안의 노리개로 어려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게 되었다. 뜰에 나설 때에는 피서지 의 뜰인 양 일광욕을 한다고는 웃통을 벗고 방안에서도 무더운 판에 눈에 남는 거동이 삐지 않았으며 그 맞장구를 치는 것이 단주여서 그도 벌써 산 속의 풍습에 젖은 후 허랑한 마음에 현마를 깔보기 시작한지가 오래였고 더구나 그와 사무실에서 미란의 일건으로 말다툼이 있은 후부터는 거역하는 마음에 일부러 현마의 눈에 거슬리는 거동도 꺼리지 않게 되어서 집안은 완연 세란과 단주 두 사람의 세상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방약무인의 태도가 현마에게 보다도 옥녀에게 더 많이 영향을 주게 된 것이요, 현마의 태도가 관대한데 비해 옥녀의 신경은 곧추설 대로 서서 눈에 불심지가 솟고 속이 타면서 원망의 불길이 피어올랐던 것이다. 그런 질투의 자격은 그가 단주와 관계를 맺었음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은 물론이나 그렇게도 자기를 알뜰히 여기고 굳게 언약을 한 단주도 세란의 앞에서는 사족을 못쓰고 옥녀 같은 것은 지릅떠보지도 않는 것이다. 불만이 차차 커지면서 옥녀는 어느 결엔지 앙칼진 원망을 가슴속에 준비해 갔다. 나두 밸두 있구 입두 있다는 것, 여차직하면 가만있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작은 가슴속에 겹겹으로 포개 넣고는 단주에게 대한 원망, 세란에게 대한 노염을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30
하루하루가 그에게는 알맞은 기회 아닌 바가 아니었으나 큰소리로는 떠들지 못할 단주와의 사이의 몸의 허물을 가지고 있었던 까닭에 참고 있었던 것이 한시도 견디기 어려운 세란의 충충댐으로 인해서 기회는 의외에도 빨라왔 다 세란은 단주에게서. 끝끝내 항복은 못 받았어도 자기가 없었던 동안의 옥녀와의 사이를 민첩하게 눈치채고 옥녀에게 대한 미움은 날로 커가고 학 대가 심해서 주제넘은 년, 넌 집안 일에 참견할 권리가 없다는 기세를 노골적으로 보여 옥녀의 반감을 사게 된 것이 드디어 심판의 날을 속히 잡아당긴 원인이었다. 오십보가 아니면 백보요 더 악할 것도 더 착할 것도 없이 한데 어울리게 된 집안 사람의 꼴들이란 흙탕물 속에서 진흙싸움을 하는 격이어서 선악을 가릴 수도 없고 흑백을 고를 수도 없는 혼란하고 불결한 정경이었다. 혼돈한 속에서는 시초라는 것도 없는 것이나 역시 세란의 교만 이 화가 되어 그날 일이 터졌던 것은 사실이다. 옥녀에게 분부해서 다른 날 보다도 일찍이 목욕물을 끓여 놓고 세란은 온천에서 하던 버릇으로 더운물 속에서 철벅거리면서 오후를 조금 지났을 뿐이던 까닭에 현마가 속히 나오지는 않으리라는 예측도 있었고 다른 한편 옥녀에게 대한 시위운동도 겸할 요량으로 목욕실에서 단주를 불렀던 것이다. 단주 역시 미란이 없는 이제 새란 앞에서는 투정을 부릴 수가 없어서 대개는 뜻대로 쫓게 된데가가 현마가 올 시간이 멀었다는 의식이 도와서 옥녀의 눈을 무릅쓰고 목욕실로 뛰어 들었다.
 
31
정신없는 짓들이요 세상을 너무도 달게 여기고 얕잡아 보는 짓들이었다.
 
32
만사가 자기들만을 위해서 생겼다고 보는 데서 온 염치없는 수작들이었다.
 
33
그러지 않아도 비밀이란 조물주의 총애보다도 미움을 받고 있는터에 비밀을 비밀로 여기지 않고 해뚱해뚱 날뛸 때 그 스스로 즐겨서 조물주의 미움을 사자는 것이요, 화를 부르자는 셈이다. 천벌은 즉시 두 사람을 내려쳤다.
 
34
아궁 앞에서 불을 살피면서 목욕실에서 장난치는 남녀의 목소리를 들으려니 옥녀는 피가 용솟음치면서 눈앞이 캄캄해졌다. 물이 금시 불로 변해서 두 몸을 태워 버렸으면도 원하고 창으로 번개가 기어들어 두 몸을 박살해 버렸으면 도 저주하면서 불측한 남녀를 위해서 불행이 일어난다면 그것을 원해서 그 자리로 무슨 짓이든지 할 것 같았다. 기도에는 목소리를 내어도 저주에는 목소리를 내는 법이 아니다. 참으로 옥녀는 목소리만이 없이 마음속으로 깊고 날카롭게 저주하는 것이었다. 그 뼈에 사무치는 저주가 통달했음일까.
 
35
일이 공교롭게 되었다느니 보다는 그의 저주의 공으로밖에는 돌릴 수 없는 것이 문득 뜰 안에 인기척을 듣게 된 것은 마침 눈을 감고 합장을 하고 한 참 저주에 열중해 있는 중이었다. 정신을 차리면ㅅ 열어젖힌 안방 창밖으로 뜰을 흘끗 바라보았을 때 조물주의 지시였던지 아직도 시간이 먼 현마의 자태가 나타난 것이 아니던가. 옥녀는 본능적으로 벌컥 겁을 먹으면서 자리를 일어섰다 두 사람을 저주하던 . 그였지만 그 한순간만은 그들의 위험을 직각 하면서 막아주자는 본능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었다. 쏜살같이 부엌을 뛰어 뜰안으로 나와 현마 앞에 막아선 것은 그런 본능적인 충동인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음 순간 반성이 솟고 날카로운 증오가 복받쳐 오르지 않았던들 그는 그때까지 늘 해 오던 버릇대로 현마를 문밖에 따놓고 다른데로 주의를 쏠리게 해서 잠깐 유예하는 동안에 날쌔게 서둘러 모든 것을 제대로 바로잡 고 평화로운 상태로 돌려놓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알뜰히도 싸오고 받들어 오던 세란에게서 그의 마음이 떠난 지는 오래였고 순간의 전율에서 깨어날 때 세란들에게 대한 분은 새로 솟아나면서 순간의 본능은 자취도 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백 번 생각해도 미운 것들이다 불측한 것들이다---불길이 가슴속에 솟으면서 현마 앞에서 던진 한마디는 정직하고도 무서운 한 마디였다.
 
36
"얼른 들어가 목욕실을 보시지. 아예 대경실색해서 그 자리에 쓰러지시 진 말구."
 
37
옥녀의 태도에 현마도 뜨끔하면서 모든 것을 직각했던 것도 싶다. 아니 그 한마디를 들을 날을 무의식중에 기대하고 있었던지도 모른다. 최후의 한 마디의 뙤임이 필요했던 것이지 아무리 심드렁하다고는 해도 집안 사람들의 기맥을 그렇게까지 모르고 지내 왔을 리는 만무하다. 낯빛이. 변하면서도 엄연한 그의 태도 속에 그런 의마가 스스로 번역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38
"왜 이리 설레는 거야."
 
39
속에 끓는 불덩어리를 싸 가지고도 자약한 말솜씨다.
 
40
"집안 꼴이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보시면 설레는 이치를 아시겠죠."
 
41
"잔소리 맑 내 앞을 물러서라니깐."
 
42
고함은 쳐도 옥녀 보기에는 그의 전신은 부들부들 떨리고 걸음걸이도 허전허전한 것이었다. 현관으로 향하는 것이며 문을 힘껏 드르렁 여는 것이며 들가방을 홱 내던지는 것이며가 보통 때의 거동은 아니요, 그 속에 무서운 분노의 흐름을 감춘 것이었다. 옥녀는 한편 시원도 하고 두렵기도 해서 몸을 움츠리고 부엌으로 뛰어 들어가서는 금시 쏟아질 폭풍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아궁 앞에 납신 웅크리고 앉았다. 눈앞이 핑핑 돌면서 세상이 뒤집히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가 화기와 함께 전신을 달게 한다.
 
43
현마의 수선스런 거동에 목욕실에서는 기미를 알아채었는지 숨을 죽인 듯이 말소리들이 그치고 잠잠하더니 밀창이 열리면서 차례차례로 화다닥들 튀어나가는 눈치였다 지저귀던 . 새들이 포수를 만나자 무뜩 그치면서 수풀 속으로 숨어 버리는 셈이었다. 목욕실 문은 활짝 열어젖힌 채 강감해진 대신 포수의 총소리가 집안을 울리고야 말았다. 옷들이나 갈아입었는지 어쨌는지 혼란한 옥녀의 귀에 현마의 고함이 들린 것은 그런 여유도 없을 바로 그 즉석인 듯했다. 우레가 좀 해 쉬지 않듯 현마의 고함은 한참 동안이나 계속되어도 세란과 단주의 목소리는 쥐 죽은 듯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옥녀는 몸이 숭숭거리는 판에 순간 순간이 견디기 어렵다. 침침한 부엌에 박혀 있기가 더욱 괴로워서 일이고 무어고 집어치우고 뜰로 뛰어나가 현관 앞에 살며시 앉아 버렸다. 일이 그렇게 된 이상 자기에게도 누가 미쳐 올 것은 사실이요, 이제는 될 대로 되고 올대로 오라는 배짱으로 집안의 기맥을 엿듣게 되었다.
 
44
"고얀 것들! 짜장 기르던 개에게 다리를 물리웠구나."
 
45
현마는 그 육중한 몸으로 그렇게 번민해 본 적은 없었다. 장대한 육체에 고민이 올 때 표정이나 거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앓는 황소같이 꿍꿍 거릴 뿐이요, 무표정하기 짝이 없다. 단주가 옷을 대충 걸치고 안방에서 대청으로 어슬어슬---그에게도 또한 그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나---들어올 때 현마의 격동한 목소리는 농으로나 들릴 정도로 되려 희극적인 어투를 띠인 것이었다.
 
46
"고얀 것들! 짜장 기르던 개에게……"
 
47
"개개하니 얼마나 길러 주었게 사람을 그렇게 천하게 본단 말요 원."
 
48
가만히 있어도 좋았을 것을 단주는 잠잠한 것이 멋쩍은 김에 말대꾸를 시작한 것이다.
 
49
"도적질을 하다 들켜 두 발명을 한다더니 뻔질뻔질한 말버릇 봐라."
 
50
현마는 얼굴을 물들이고 펄쩍 뛴다는 것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고함을 친다. 고함만은 표정과 달라서 고래 같은 대성에 단주는 뜨끔해지면서 놀라면 또 무엇이든지 주워대야지 그대로 못 있는 성미였다. 몸은 떨면서 목소리만이 간들 간들 살아 나온다.
 
51
"내 뜻으로 그렇게 된 건가. 거저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한 거죠. 바른 정신이 없었어요. 모르는 결에 흘린 것같이 덤벙덤벙 들어가서는 꿈속을 헤매다 나오면 전신에 땀이 나구 정신이 혼몽해서 햇빛에 낮을 바로 쳐들 수 없게 눈이 부시구……"
 
52
엄연한 현마의 앞에서 미소년 아도니스는 비로소 정신이 들면서 참회나 하는 듯이 웅얼거리나 현마의 귀에는 벌써 참회로 들리지도 않는 거시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미소년인 대신에 가장 추악하고 얄미운 족제비였던 것이다.
 
53
짐승을 길러두 그렇게까지 " 배은망덕을 한 법은 없겠다. 어서 내 눈앞을 물러가라. 썩 물러가라."
 
54
"잘했다는 것은 아니나……"
 
55
"나가랄밖엔."
 
56
"나가라면 나가죠만."
 
57
그 한마디가 현마를 발끈 불질러 놓아 몸이 활짝 타오르는 바람에 손에 쥐는 것을 물인지 불인지도 헤아리지 않고 단주에게 던진 것이다. 팔죽지를 맞추고 떨어진 것은 화병이었다. 육중한 사기화병이 떨어지자 헤트러지는 꽃, 쏟아지는 물과 함께 단주도 흠! 소리를 치면서 그 자리에 쓰러졌다.
 
58
"어서 나가라니깐. 집을 더 더럽혀 놓지 말구 맘대로 나가. 도로 거지로 돌아가려무나."
 
59
그러나 단주는 대꾸는 새로 금시 얼굴이 파랗게 질리더니 눈을 감고 팔죽지를 만지면서 신음하는 것은 꾀를 피우는 것이 아니라 짜장 화병에 맞은 팔죽지가 떨어질 듯이 쑤시면서 감각이 마비되어 버렸던 까닭이다. 금시에 피가 불어서 넘치는 것 같으면서 입을 벌릴 수도 없고 몸을 꼼짝달싹 요동 할 수도 없었다.
 
60
"그대로 꺼꾸러지는 것이 너로선 옳은 신세다. 어서 꺼꾸러져라."
 
61
그것쯤으로 현마의 화가 플릴 리는 없어서 손에 잡히는 책을 집어 더욱 단주의 어깨를 갈길 때 안방에서 얼굴을 묻고 있던 세란도 그제서야 뛰어나 오면서 쓰러진 단주의 꼴을 보고는 부끄럽던 심정도 사라지면서 현마를 노리는 것이었다.
 
62
"뭘 잘했다구 이야다니오. 그럴 걸 누가 당초부터 집에 붙이랬나. 집에 들이지 않았다면야 누가……."
 
63
"발악을 할려거든 지옥으로나가 해라. 사람의 입이 보물은 보물야. 무슨 짓을 하구서래두 말구멍은 있거든."
 
64
"사람을 집구석에만 버려 두구 밖에서 독판 숨어서 갖은 것을 다하면서 누구 죄란 말요. 아무리 여편네기로서니 쓸쓸할 때두 있겠구……"
 
65
"시끄럽다. 모두 나가라니깐."
 
66
눈앞에 선 것은 벌써 아내도 아니요, 사람도 아니요, 기름진 악마로도 보이고 요사스런 야귀로도 보였다. 눈에 충혈이 되고 손에 살기가 넘쳐서 책상 위에서 집어 든 것은 잉크병인 모양이었다.
 
67
"집에다 불을 놓아 버리기 전에 나가라니깐. 나가서 거지나 돼서 바가 지나 긁으라니깐."
 
68
세란은 면상을 얻어맞고 흑! 느끼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한참이나 손으로 왼편 눈을 가리고 섰더니 그제서야 아이구! 소리를 치면서 현마에게 와락 달려든다.
 
69
"사람 죽이누나."
 
70
여자가 대드는 것은 표범같이 사납다. 앙칼진 목소리에 현마는 한때 멍하니 서 있다가 전심을 쏠려 오는 세란의 몸을 받으면서 뒤로 물러서게 되었다. 물러서기야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어쩔 줄을 모르고 팔을 벌리고 있는 동안에 별안간 면상이 뜨금해지는 것을 느꼈다.
 
71
엉겁결에 외치는 동안에 물리운 한편 볼에서는 검은 피가 쭉 돋았다.
 
72
잇자리가 몸을 찌를 듯이 아픈데다가 거머리같이 달라붙은 세란의 몸은 좀체 안 떨어진다.
 
73
"사람을 치구 받구 하구두 누구를 됩데. 살인다. 사람 살려라."
 
74
소리소리 지르며 밀려드는 바람에 현마는 한참이나 박서다가 세란을 안은 채 뒤로 나둥그러지고 말았다. 나둥그러지면서 눈에 띠인 것이 세란의 눈이 다. 피가 흐르는 것은 자기의 볼만이 아니라 세란의 왼눈시울도 시퍼렇게 멍이 든 속으로 검은 피가 쏟아지는 것이다.
 
75
"나가라면 무서워 할 줄 알구. 나가구 말구. 얼른 사람이나 살려 내놔 생사람을 저렇게 쳐서 쓰러트리구두 무엇이 부족해서……."
 
76
한데 엉겨서 자리 위를 밀리는 동안에 현마는 여전히 쓰러진 채 일어날 염도 못하는 단주의 꼴을 흘끗 보게 되었다. 얼굴을 자리에 박은 채 춤을 흘리고 신음하면서 처음에 쓰러진 그 시늉으로 꼼짝 안 하고 있다.
 
77
미소년 아도니스는 참으로 멧돼지에게 물려 벌판에 쓰러진 것인가. 그 피 흐른 자취에서 아네모네가 피어날 것인가---팔을 부러뜨리운 것일까, 거꾸러진 것일까---현마는 겁도 나서 자기의 상처도 잊어버리고 은연중에 그쪽으로 눈이 가고 주의가 쏠렸다. 그러나 몸을 뻗치고 손을 베풀 여가도 없이 발악을 하며 덮쳐 오는 세란에게 밀려서 한편 구석으로 쏠려 가군 하는 것이었다. 한창 동안이나 들볶이다가 다시 단주의 곁으로 쏠려 갔을 때 현마는 문득 그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본 것이다. 옥녀였다. 현관 앞에서 엿듣고만 있다가 싸움이 수월치 않음을 느끼고 뛰어든 옥녀였다. 쓰러진 단주 앞에 서서 그를 돌보아 줄까 어쩔까 망설이고 있는 자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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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녀야 이년 너두 같은 년이지. 앙큼스럽게 고발은 왜 했어. 너 뉘 종 이더냐. 단주의 손가락 하나래두 까딱 다쳤단 봐라."
 
79
옥녀가 어느 때까지 망설이고 있는 것은 세란의 이 책망 때문인 듯도 했다. 현마는 세란의 입을 막으면서 옥녀에게 눈짓하고 일어서려는 것이었으나 지칠 대로 지쳐 맥이 풀리고 몸이 느른한 그들이었다. 싸우다 피차에 쓰러지고 만용과 범이었다. 흑백이 없고 옳고 그른 것이 없는 피장파장의 피곤한 두 개의 육체였던 것이다.
 
80
미란이 오래간만에 뜻을 먹고 사무실로 현마를 찾은 것은 자기의 여행에 대한 한 가지의 계책을 마지막으로 상의해 보려는 목적이어으나 붕대로 얼굴을 친친 감고 있는 그의 꼴을 보고 미상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미란 보다도 더 놀란 것이 현마였다. 오랫동안 종적을 감추어서 갖은 염려를 다 하게 하던 미란이 그렇게 다따가 찾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하던 터이라 기쁜 마음이 울연히 솟았다. 놀라고 기쁘고 고마웠다. 찾아온 것 그것만으로 자기의 허물을 용서해 준다는 듯이도 보였던 것이다. 물론 지난 허물은 허물이 될 뿐 앞으로 그 이상 더 어떻게 되리라고는 원할 바 못 되었으나 그러나 마음만으로 한다면 미란은 세상에서 가장 그리운 사람이었고 한 송이의 절벽 위의 꽃으로 평생 그를 우러러보고 생각하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에는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그를 대할 수 있었고 그를 위해서는 아무런 희생을 해도 아깝지 않겠다는 생각조차 솟았다.
 
81
"가을이라구 벌써 붕대지짐인가요."
 
82
농도 반가워서 현마는 그간 형편을 대충 귀띔해 주었다.
 
83
"집에선 큰 난리가 났었어. 결국 될 대로 되고 오는 데까지 왔다구 보면 그만이나 세란과 단주의 꼴들을 보구야 가만있을 수두 없어서 집을 떨어 버릴 작정으로 접전이 일어난 것이 상하긴 다 일반, 나두 붕대를 감게 됐지만 저희들두 병원 맛을 보게 됐어. 단주는 팔을 꺾구 세란은 눈알을 깨트리구---무더운 병실에서들 아마두 나보다는 견디기 더 어려울걸."
 
84
미란은 눈살이 찌푸려지고 속이 뉘엿거리면서도 그 역 올 것이 왔다고 느끼는 마음은 현마와 일반이었다.
 
85
"무서운 집안.---일찍이 나오기를 잘했지. 그 꼴들을 보았더라면 맘이 얼마나 뒤집혔을까."
 
86
"나두 그중의 한 사람이구 그런 풍습을 꾸며논 것이 내였던지두 모르긴 하나 생각할수록 몸서리나는 집이긴 해. 담장이와 초목 속에 숨어서 온통 푸른 속에서 무엇이 있는지를 까딱 모르구 왔단 말야. 얼마나 오래 끌었는 지 결국 그다지 길게두 안가 판이 드러나구 결말이 오는 것을."
 
87
"집을 벗어 나온 후부터 난 이렇게 맘이 거뿐해졌어요. 지옥을 벗어나온들이다지야 개운하겠어요. 사람에겐 불행이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결국 잊어버리는 수밖엔 없는데 언제까지나 울구불구만 있을 수두 없는일, 모든 것을 씻어 버리구 난 지금 아침 해를 보는 사람이예요."
 
88
원망하는 법도 없고 한하는 법도 없이 침착하게 재생의 소식을 전해주는 미란의 마음씨를 현마는 고맙게 받으면서 그 맑은 정신의 고류 가운데에서는 지난 허물은 기억 속에 떠오르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의 길을 찬동하고 축복해 주는 생각으로 가슴속은 차졌다.
 
89
암 미란에게는 영훈과의 " , 그 길이 가장 옳구 바른 것은 물론 내야 부러워하구 탐내야 하는 수 없구 다만 멀리서 바라보고 빌어줄 뿐이지만---꼭 한마디 말할 자격이 있다면 평생 가야 난 맘속에서 미란을 잊을수 없다는 것, 미란의 맘과 아무 관계없이 내 이 맘만은 첨부터 생긴 것이구 어느 때까지나 변할 리 없는 것---괜히 쓸데없이 장황하게 말할 것두 없는 것이나……"
 
90
미란이 맞장구만 친다면 현마의 회포와 하소연은 끝날 틈이 없었을는지 모른다. 미란의 심경으로도 아무리 길게 그것을 듣는 대도 무방한 것이기는 하나 목적이 있어 온 그는 알맞은 곳에서 용건을 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91
이미 마음을 작정했던 이상 스스러울 것도 없고 부당하다고 생각되지도 않아서 말을 내기가 곤란한 것은 아니었다.
 
92
"세란이 어찌 됐든지 간에 난 세란의 동생임이 틀림없고 지금 말하는 것두 그 동생의 자격으로서 하는 것인데 아시다시피 이번 여행을 떠나게는 됐으나 내 부담까지를 영훈에게 씌울 수두 없구 해서 생각하던 차에."
 
93
"좋구 말구. 솔직하게 말을 해준 것부터가 내게는 기쁜 일인데 요행 내게는 힘두 있구 힘자라는 데까지야."
 
94
미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뜻을 요량하고 앞서서 언하에 말을 주는 것이다.
 
95
"---세란의 동생이라는 뜻을 떠나구 지난날의 지저분한 기억과두 떠나서 참으로 맘속으로 난 그것을 원하는 터에 한 사람을 위해서 그 무엇을 바친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내 처지에 서지 않으면 아마도 모를 걸.
 
96
내게는 재산이 있기는 하나 영화니 무어니 이런 노름에밖엔 쓸길두 없는 것이구 그까짓 하치않은 재산이 다 무어게. 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귀한 것이라두 희생하구 싶은 맘인데 잘 말해 주었소."
 
97
그 자리로 서랍을 열더니 소절수장을 집어냈다. 가진 사람으로서의 자랑을 보이려는 것이 아니요, 숨은 발톱을 감춘 것도 아닌 단순하게 보이는 거동이었다.
 
98
"예금 관계로 우선 이것만을 적으나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또 쓰구 말구."
 
99
내젓는 붓끝에서 떨어지는 숫자는 삼천 원이었다. 담담한 태도에 미란은 넋을 잃은 사람같이 흥미도 감격도 느끼지는 않고 숫자라는 것이 참으로 쓰 기 수월한 것이로구나 삼천이라는 숫자가 대체 그렇게도 헐하고 어처구니없 는 것일까 생각하면서 우두커니 바라볼 뿐이었다. 흡사 남의 연극을 보고 있는 것같이 힘도 맥도 안 들고 신비도 자극도 없는 일순간이었다.
 
100
"돈이 원래 더러운 것이긴 하나 아예 더러운 것으로 여기지 말구 맘속에 엉겼던 것 다 풀어만 버린다면 그 돈을 쓰기가 그다지 괴롭진 않을 것이요.
 
101
길바닥에서나 얻어 본 듯 아예 맘 쓰지 말구 헐하게 없애시오. 영훈에게 말 하기 거북하거던 저금했던 것을 찾았다구 해두 좋을 것이구 앞으로도 필요 할 때에는 언제든지 일러만 주면 더 도와줄 작정이요. 외국에 가서 곯는 것 같이 섭섭한 때는 없을 테니깐."
 
102
미란은 미처 고맙다고 말을 할 사이도 없었거니와 그런 말이 그 자리에서는 쓸데없는 것으로 들릴 성싶었다. 아이가 이웃집에 가서 엿 한 가락 얻어 들고 뒤로 본체 만체 달려오듯 미란도 결국 한마디 말도 보낼 여가가 없이 털고 자리를 일어서는 수밖에는 없었다. 처음에는 그 목적을 위해서 겸연쩍은 새악에 주저도 하고 망설이기도 한 것이 현마의 자발적인 호의로 그렇게 수월하게 해결되었을 뿐이 아니라 당초의 스스럽던 생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미란의 마음은 평온하고 떳떳한 것으로 변했다. 말은 없어도 감사의 생각이 가슴을 밀고 오르면서 좀 더 섰으면 눈물이 돌 것도 같아서 든 손문으로 향했다. 친친 감은 현마의 붕대가 돌부처의 새하얀 귀고리같이 가슴속에 배어오면서 미란은 더 뒤를 돌아볼 용기조차 없었다.
 
103
사람의 행복이란 어떤 길에서 찾아지고 어떤 고패에서 작정되는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길이 행복스럽게 보이다가도 저 길이 탐나 보이며 저 길이 탐나 보이다가도 문득 이 길이 행복스럽게 보이는 수도 있는 것이며--- 아니 저 길에 서면 이 길이 좋은 것 같고 이 길에 서면 저 길이 행복되어 보이는 것이다. 행복을 구해서 헤매이고 갈팡질팡 설레는 것이 온전히 그 까닭인 것이나 그러나 행복이란 그것만으로는 형상을 잡을 수도 없고 종적을 가릴 수도 없다. 불행 속에 있는 사람이 반드시 자기의 불행을 느끼지 못하듯이 행복 속에 사는 사람이 반드시 그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적도 있 으며 되려 게정을 부리다가 일껏 온 행복을 손안에 들었던 미꾸라지같이 놓쳐 버리는 수도 있다. 불행과 마주설 때에 행복을 행복으로 느낄 수 있음은 행복과 대립될 때 불행의 맛이 알려지는 것과도 흡사하다. 이편이 불행할 때 저펀이 행복되어 보이고 저편이 불행 할 때 이편의 행복이 몸 속에 사무치게 느껴지는 법이다. 피서지에서 문득 세란의 편지를 받은 죽석의 심경이 바로 이 경우에 속하는 것이었다. 세란의 편지 속에 자세히 적혀 있는 최근 푸른 집에 일어났던 변괴에 죽석과 만태는 크게 놀라며 세란들의 불행을 뼈 속에 배이게 느끼는 한편 오랫동안 잊었던 자기들의 행복이라는 것을 생각 해 보게 되었다. 하기는 자기들과 세란들의 두 경우에 어느 편이 행복스럽고 어느 편이 불행한 것인지---자기들이 행복스러운 편이고 세란들이 불행스런 편인지는 일률로 말하기 어려운 것이나 죽석은 적어도 자기들의 경우를 행복스러운 것이라고 단정했던 것이다. 그도 한때는---이것은 그만의 마음의 비밀이요. 남편 만태에게도 고백하기 어려운 속뜻인 것이나---세란의 신세를 부러워하고 그가 세상에서 아마도 가장 행복스러운 여자라고 느껴도 보았다. 피서의 전반기 만태가 아직 별장에 오기 전에 세란들과 술을 먹고 춤을 추고들 했을 때 밤중이면 세란이 자기의 방에 살며시 숨어들어 색정의 진의를 설명하고 실감을 말하면서 한 사람의 남편과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수절한다는 것이 천치의 증거라느니 하면서 소군소군 돌려주는 말이 천사의 말도 같고 딴 나라의 유혹도 같으면서 사실 자기는 바보일까 천치일까 하면서 의혹도 해보고 번민도 해보았다. 그러던 것이 지금 와서 우연히도 세란이 반드시 최대한도로 행복스런 처지는 아니라는 것, 색정의 유희라는 것이 도시 위험하고 걱정 많은 것임을 느끼면서 자기들의 자극 없고 무미한 생활을 다시 한번 고쳐 반성해 보게 되었다. 그 결과 그 깐에는 자기들의 단조한 생활이 결코 불행한 것이 아니고 행복된 것이라는 것, 행복 속에 있기 때문에 그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을 알기 시작한 것이었다. 편지를 받은 날 부부는 그 어느 날 보다도 자별스럽게 머리를 뭇고 오래도록 재깔재깔 지껄이면서 세상에서 자기들이 제일 행복스러운 짝이라는 듯 화평한 가정 풍경을 이루었던 것이다.
 
104
죽석들이 그때까지도 도회에 돌아가지 않고 별장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만태가 가게 일의 일절을 맡기고 왔던 까닭에 언제까지든지 넉넉하게 늑장을 부릴 수 있었던 터에 피차의 건강을 위해서 산기운을 흠뻑 맞아가지고 가자는 것과 피서지의 진미는 늦여름과 첫가을 사이에 있는 것이므로 이왕 이면 시골맛을 싫도록 보고 가자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피서객들이 거반 다 흩어져 가버린 뒤의 쓸쓸하고 고요한 산속에서 부부는 조금도 적막을 느끼기는새로 도리어 한가하고 시원하다고 생각하면서 큰 별장을 지니고도 처음 예측과는 달라 세란들의 한패가 가버린 후도 결코 휑휑하다는 느낌 없이 피서의 진미를 완전히 음미하고 있었다. 산속의 시절은 봄이 늦은데 비겨 가을 철수는 한결 속히 재촉되어서 야지보다는 빠르다. 뜰의 잡초가 건들하고 훌쭉해 갈 때에는 나뭇잎도 재빠르게 한잎 두잎 물들어간다. 공기가 차지고 개울물 소리가 맑아 가면 산길에도 산사람들이 따가지고 가다가 떨어트린 잃은 머루송이가 군데군데 구르게 되고 누런 다래 잎새도 그 속에 섞이게 된다 화단을 비취이는 . 대낮의 햇빛은 짜링짜링 따가우면서도 아침 저녁으로는 몸이 가다들면서 첫서리 올 날이 오늘일까 내일일까 그 첫서리로 시절을 헤아리려는 듯 즐거운 조바심이 생긴다. 그날 죽석들 부부가 그렇게 일찍이 눈들을 뜬 것은 아마도 간밤의 침대 속이 전에 없이 추웠던 모양, 새벽에 이들을 덜덜 갈면서 일어나 객실로 나왔을 때 아니나다를까 창 밖으로 먼 산의 첫서리가 희꾸무레하게 눈에 띠었다. 곧게 뻗친 마음길도 침침한 속에서 눈에 뜨이도록 하아얗게 분가루를 썼고 뜰 앞 나뭇잎도 축 늘어져 보인다. 서리가 왔다는 느낌이 새삼스럽게 몸에 찬물을 끼얹자 부부는 금시 소름이 돋고 한층 추워지면서 그것만으로 하나의 일거리가 생긴 듯 되려 감동하고 기뻐하면서 수선을 떨고 옆방에서 아직도 잠들어 있는 식모를 들볶아 깨웠다. 세란들이 떠나자 온천에서 한 사람의 여인을 구해 두었 던 것이 넓은 별장에서는 식모인 것만이 아니라 친한 노름동무도 되었다.
 
105
눈을 비비면서 일어나는 식모에게 분부해서 짧게 패인 장작을 날라다가 불을 피우게 한 것이다. 객실에는 한편 벽에 벽돌로 단정하게 쌓아 올린 벽로 壁爐가 있었다. 일상 때에는 헛간 같이 쓰지 않고 묶여 두고 그 위에 책을 쌓아 놓거나 화병을 올려 놓거나 할 뿐이던 그 화덕이 시절의 필요에 응해서 비로소 귀중한 것으로서 등장하게 된 것이다. 휑휑한 속에다 장작을 무지고 불을 달여 놓으니 그 해의 첫 불을 피운 셈이다. 마른나무에 불은 쉽게 붙어 활활 피어오르면서 침침한 새벽 방안을 불그레 비취이고 따뜻하게 눅여주었다. 의자들을 끌어다가 화덕 앞에 놓고 부부가 시절의 첫 불을 싸고 앉아 손들을 내밀었을 때 그곳이 집안에서 가장 행복스런 자리가 되고 두 사람에게는 즐거운 생활의 의욕이 흔흔히 솟아올린다. 따뜻한 불은 그대로가 바로 행복감의 상징이요, 생활감의 달가운 도가니다. 세란의 편지를 받은 것은 바로 그런 때였던 까닭에 죽석들의 행보감은 한층 의식 위에 샘솟아 올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편지는 아마도 전날 저녁때 배달되었던 것인지만 태가 아침마다의 습관으로 현관문을 열고 밖에 달린 우편통을 열었을 때 세란의 두터운 편지가 손안에 집혔다. 묵직한 무게를 기뻐하면서 벽로 앞에서 아내와 함께 봉투를 뜯었을 때 그 내용이었던 것이다. 부부는 의외의 소식에 놀라고 동정하고 하다가 차차 자기들의 생활과의 대립의 의식에 떠오르자 행복감이 넘쳐 흐르면서 아침 내나 화덕 앞에서 즐거운 생각과 회화가 계속되었다. 돌연히 알게 된 남의 불행을 말하고 반성하고 하는 것이 그대로가 바로 자기들의 행복을 뒤집어 말하는 셈이 되었다. 남의 불행을 이용해서 자기들의 행복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불측하다고 해도 하는 수 없는 노릇 두 사람은, 넘쳐 나오는 행복감을 어쩌는 도리 없었던 것이다.
 
106
"……단주는 팔이 부러지구 세란은 한쪽 눈이 멀어지구 현마는 볼이 째 지구 옥녀는 쫓겨나구 했다니 결국 한집안이 몰싹 불 속에 빠졌던 셈이죠."
 
107
물론 동정은 하는 것이나 그것이 미소가 되어서 죽석의 입을 비죽이 헤치고 나올 때 남편 또한 그 미소를 받아,
 
108
"병원에서 수술을 한건 단주와 세란이니 그들 둘이 제일 무거운 벌을 받은 셈이지. 하긴 내가 본 경우로 봐서두 그게 흡족한 벌은 못돼. 팔 하나 떨어지구 눈 하나 먼 게 그까짓 무어게. 현마 편으로 본다면 아직두 천벌이 부족한 듯해. 그것쯤으론 맘이 시원하지 못할걸."
 
109
"아무튼 오래는 들키지 않구 용케들 끌언 왔어. 그 길에는 선수요, 천재 니 말할 것두 없지만 세란의 농간과 재주가 무척은 용하거든."
 
110
"세란두 그만하면 잠이 깼겠지. 인생이 그렇게 수월한 것이 아니라는 것 두 알았을 테구 장난이나 연극을 하는 것같이 늘상 흥분만 있구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두 터득했을 테구---인생이 좀 어렵다는 걸 알아야지 아무리 말괄량이기루."
 
111
"알았으면 이 편지를 했겠소. 집을 쫓겨났으니 앞으론 별장을 빌려 달라는 뻔질뻔질한 소리를 부끄러워서두 그 입으로 하겠소. 어떻든 팔병신 눈병신이 동부인을 하구 걸어오는 것두 가관일걸. …… 일껏 말한 걸 별장을 안 줄 수두 없구 지금 식 모두 아마 당분간은 그대로 붙여 줘야지 않겠소. 안전 상 야박하게 딸 수두 없는 노릇이니."
 
112
"난 일절 간섭 안 할 테니 생각대로 하우.……뭐니뭐니해두 그중에선 미란이 제일 사람이 됐어. 내 눈에 어김이 없어. 첫눈에 벌써 세란과는 피는 논았는지 몰라두 인물은 딴판이라구 노렸더니 아니다다를까 제일 똑똑하게 제 처사 제가 하지 않았소."
 
113
"미란은 나두 좋아했어요. 인물이 출중한테다가 경우가 바르구 정이 있구, 게다 영훈이 같이 훌륭한 사람들 만났으니 행복두 받구 음악에두 성공하리다."
 
114
"지금쯤은 하얼빈서 두 사람이 활개를 펴구 거리를 휘젓구 다니렷다.--- 현마는 붕대를 감구 사무실에 들어 엎드려서 무슨 궁리를 할꾸. 아마도 맘을 잡을랴면 한참을 지나야 할걸."
 
115
"옥녀두 벌써 뉘 집 고용살이로 들어갔겠지. 똑똑하구 야무러진 게 식모로는 아깝더니 웬만하면 우리 집에나 둬 두었을걸."
 
116
어떻든 미란들같이 "행복스런 패는 없어.---우리두 가을이나 깊거든 하얼빈으로 구경이나 떠나 볼까."
 
117
"정말. 아이구 얼마나 좋을까. 꼭 떠나요, 네. 안 떠났단 안돼요, 괜히."
 
118
다따가 죽석은 마음이 싱숭거리는 바람에 발로 마루를 구르면서 의자에서 몸을 요동한다. 만약 엿보는 눈이 없었더라면 남편에게 달려들어 목을 안으면서 응석을 부렸을는지도 모른다. 얼마나 오랫동안 재깔들 거리고 있었던지 어느새 식모가 들어와 아침 식사를 고하는 바람에 죽석은 몸을 지만하고 마음을 누르고 자리를 일어선 것이었다.
 
119
참으로 어느 결엔지 활짝 아침이 밝아 와서 방안은 훤하고 화덕의 불도 마 저마저 사그라지는 판이었다. 만태도 정신을 차리면서 화덕 앞을 떠나 창께로 가서 활짝 열어젖혔을 때 먼 산은 햇빛 속에 환히 솟아나고 마을 길어는 사람의 그림자 어른거렸다. 개울 둑에는 어느 결엔지 누런 소가 매었고 소 등어리에서는 더운 김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것이 바라보인다.
 
120
"서리 온 날은 개인다더니 오늘두 날씨는 훌륭하군."
 
121
만태는 먼 개울가 소에게나 지껄이는 듯 소리를 지르면서 활개를 펴고 심호흡을 하면서 체조를 시작한다.
 
122
"고기나 낚으러 갈까요. 오늘두 또."
 
123
즉석이 등뒤에 와서 대답하면서 그도 남편을 본받아 라이오 없는 아침체조를 시작한다. 창으로는 맑은 공기가 무한량으로 쏟아져 들어와서는 두 사람의 몸을 씻어 준다. 이름모를 새가 날아와서 창밖 자작나무에서 높은 단 마디의 노래를 시작한 것은 부부의 체조의 장단을 맞추어 주자는 것이었을까. 라디오의 음악이 아닌 그 소리가 체조의 반주로는 어색한 것이었으나 부부는 그것을 구태여 허물할 것 없이 솔곳이 들으면서 팔을 휘젓고 다리를 들고 여전히 체조를 계속해 가는 것이었다. 부부에게는 아름다운 아침이었다.(작중 시는 시인의 것을 빌려 오다.---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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