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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분(花粉) ◈
◇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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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이효석
 

1. 8

 
2
영훈의 방에서 마치 그 방의 주인인 것처럼 잠자고 일어나고 영훈만을 생 각하고 지내고 미란에게는 참회의 수녀 같은 기쁨이 있었으나, 한편 그 기쁨의 반주를 하는 슬픔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슬픔은 가야가 보내는 것이었다. 기괴한 인연을 맺게 된 가야는 언제든지 그의 뒤를 따르고 슬픈 그림자를 던져 준다. 음악실에서 북새가 있은 후로는 까딱 자태가 눈에 안 띠이 고 못 보아 온 지는 오래였으나 그 자태 대신에 혼은 날마다 연구소를 찾아 온다. 방문을 잠궈 놓아도 영훈에게로 오는 편지 속에 날개를 싣고 날아드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미란이 방안을 정리하고 피아노 앞에 앉았노라면 문틈으로 배달부가 전하는 한 장의 편지가 삐죽이 들어와서는 마루에 떨어진다. 영훈에게로 오는 가야의 글씨임을 알 때 그대로 덮어두기에는 마음이 허락지 않아서 기어코 헤쳐 보면 일상 하던 격식으로 한 장 종이 위에 슬픈 노래가 적혀 있곤 했다.
 
3
마음 덮이고 괴롬 더하면 때도 잊고 여위어 가다 전에 그가 부르던 같은 노래의 계속이다. 참으로 지금쯤은 얼마나 여위었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갔다. 그렇게 되기 시작하면 그 하루가 전부 가 야의 생각으로 채워져서 날이 맞도록 올 가망한 것을 날이 새면 또 다른 편지가 숨어드는 것이다.
 
4
이 내 몸 부질없이 먼 하늘 헤매이다 불리는 잎새같이 날리고 또 날려서 한없이 병들어 가다 가야의 눈이 떠오른다. 여위고 병들어 바람결에 날리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왜 그와 알게 되었던고, 왜 하필 영훈을 싸고 그와 맞서게 되었던 고---기구한 인연이 원망스럽다. 가야는 남을 한하는 법도 없고 무턱대고 영훈에게 대해 마음껏의 정성을 보이고 있을 뿐인 것이 더욱 괴롭고 견딜 수 없다. 자기를 미워학 저주해 주었으면 차라리 마음이 편할지 모른다. 악 한 것보다도 착한 것 앞에서는 마음이 괴롭고 두려운 것인 듯하다.
 
5
이 괴롬 면하고 진할 날 언제리 슬픈 노래 남기고 진할 날 언제리 이 노래를 읽는 날 미란은 무서운 예감이 들고 겁이 벌컥 나면서 편지를 떨어트렸다. 마지막 노래나 아닐까 생각이 들면서 불길한 예감이 전신을 흘렀던 것이다. 수많은 노래를 불러오다가 마지막 노래에 이른 듯---그 마지막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그 이전의 수많은 노래를 불러온 것인 듯--- 느껴진다. 가야의 일이 아니고 바로 자기의 일인 것만 같아서 그 하루는 그 생각으로만 그득 찾었다.
 
6
짜장 이튿날부터 가야의 편지는 끊어져 버렸다. 미란은 어제는 오히려 그 슬픈 노래를 더 기다리는 마음으로 아침이면 단정하게 피아노 앞에 앉아 조바심을 하면서 문께를 바라보는 것이나 편지는 종시 안 오는 것이다. 슬픈 위에 슬픈 것을 기다리는 마음---슬픈 노래 더 안 오는 것이 미란에게는 도리어 불행이었던 것이다. 만약 가야에게는 마지막의 불행이 있다고 하면 자기도 그 속에 한몫 참가해 온 셈이 되지 않는가---그의 슬픔의 원인이 되고 그의 불행을 한몫 거들어준 셈이 되지 않는가---자기가 없었다면 가야의 비극이 그렇게 절대적으로 결정은 되지는 않았을 것이요 반대의 결과를 가져 왔을는지도 모르는 것이 아닌가---이런 반성과 번민이 솟았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유독 무슨 특권이 있건대한 사람의 인격을 물리치고 그에게 불행을 주게 되었는가, 가야보다 낫고 그를 이길 무엇이 자기에게 있는가, 재주인가, 마음인가, 육체인가, 영훈을 사랑하는 마음에 있어서 그토록 간절한 가야의 순정이 자기에게 떨어질 법은 없는 것이며 그러면 육체---이것을 생각 할 때 눈앞이 캄캄하며 괴로워 갔다. 육체로 말하더라도 자기가 가야보다 나을 것이 없는 것이 순결하고 맑은 점에 있어서 겹겹으로 허물을 입은 자기는 그 앞에 낯도 쳐들지 못할 처지가 아니었던가. 그 무엇 하나 가야보다 나은 것은 자기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라고는 없는 것이다. 참으로 훌륭한 사랑이라는 것은 목욕재계하고 맑은 마음으로 제단 앞에서 드리는 제사와도 같이 경건한 것이어야 할 때 허물없는 자랑과 영광으로 그 제사를 드릴 자격이 자기에게 있는 것일까. 영훈의 사랑을 받고 그를 사랑할 자격이 자기에게 있는 것일까. 영훈은 가야의 것이어야 한다. 가야의 사랑을 받고 가야를 사랑해야 한다. 사랑이 그렇게 호락호락 눈으로부터 만드는 것이라면 무슨 값이 있는 것인가. 영훈의 상대로는 가야만이 참으로 만 사람 중에서 선택된 단 한 사람의 자격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 옳은 길을 모르는 영훈을 뛰어 주고 인도해 주는 것이 자기의 의무요, 슬픈 가야를 위해서 보여 주어야 할 정성이 아닌가---이렇게 생각해 올 때 미란에게는 비장한 감격이 솟고 높은 정신이 싹트기 시작하며 그날 하루는 또 그 생각으로 날이 맞는 것이었다.
 
7
그러나 사람의 생각같이 수월하고 여러 갈래인 것은 없다. 생각은 자유로운 것이요, 반드시 행동의 동반을 요구하지 않는 까닭이다. 미란은 그런 희생의 정신 이상으로 영훈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 괴롬 속에서 돌연히 영훈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미란은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그의 애정 속에 머리를 묻었던 것이다. 단주와 싸운 이튿날로 영훈은 온천을 떠나 고향으로 향했다. 의외에도 자기 방을 차지하고 있는 미란을 발견했을 때 그 역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전보다 곱절의 애정이 솟음을 억제하는 수는 없었다. 마음 속에 여러 가지 질문과 불만과 문책을 준비하지 않은 바도 아니었으나 눈앞에 미란을 볼 때 그런 것은 자취없이 사라지는 것이요, 사모의 정만이 솟았다. 참으로 미란을 사랑하고 있음을 느끼며 그 정을 거역없이 받아들이는 미란의 태도에서 그 역 자기를 사랑함을 깨달으면서 두 사람은 그 순간 전까지의 생각은 고스란히 잊어버린 것이었다. 영훈을 가야에게 맡기고 자기 한 몸은 빠지려고 생각하던 미란의 궁리가 종적없이 사라진 것도 물론 모르는 동안에 욕심이 마음속에 서리서리 서리어서 반성을 덮어버리고 희생의 정신을 막아 버리고 있음을 자기 자신인들 어찌 알았으랴. 영훈이 책상 위의 가야의 편지를 발견하고 한 장 두 장 펴보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가야 가 다시 커다란 제목으로 떠오른다.
 
8
"가야에게 무슨 일이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자꾸만 들어요."
 
9
영훈은 마지막 노래를 눈으로 훑고 나서는 우두커니 창밖을 바라본다.
 
10
"설마---."
 
11
처녀의 " 맘이 안 그래요.……가장 수월한 것인지두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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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죄란 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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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훈은 괴롭다 못해 화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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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라면 차라리 제 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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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뒤를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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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드리려구 벼르던 것이나 제겐 아무리 생각해두 가야를 희생시킬 자격이 없는 것 같아요. 제비를 잘못들 뽑았죠. 전신에 상처와 흠집투성이 구 세상에서두 누추하구 부끄러워서 말 못하구 속이구 있는 것이 한두 가지 가 아니구……"
 
17
"그만두라니까."
 
18
영훈이 막아 버리는 김에 말을 멈추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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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말이나 하면 다 말인 줄 알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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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를 벌떡 일어서면서 책망하는 어조이다.
 
21
"속이긴 무얼 속인구 누굴 속히울 사람이 어디 있다구. 누군몰라서 가만 있구 입이 없어서 가만있는 줄 아나. 쓸데없는 건 말할 필요가 없구 캐낼 필요가 없으니 가만있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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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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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훈의 말에 놀라서 미란도 덩달아 자리를 일어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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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신단 말예요. 대체 무얼 아신단 말예요. 절 어떻게 생각하신단 말예요. 말씀해 주세요. 어서 말씀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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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바심이 되고 안타까워서 발을 동동 구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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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쓸데없는 말은 싫다니까. 말에는 반드시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이 있구 진실이라는 것은 야릇한 것이어서 밝히는 것이 필요는 하면서두 무서운 때가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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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야릇한 것이 진실인 듯하다. 미란은 영훈에게서 모든 것을 들으려고 원은 하면서도 한편 공포에 마음이 죄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떨리면서 도 그래도 그 진실이 부질없이 듣고 싶은 것이다. 조르는 아이같이 영훈의 팔에 매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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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스럽게 말씀해 주세요.---제일을 모두 아신단 말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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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을 먼저 말하지.---무엇을 알았든 간에 내 사랑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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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을 붙들어서 의자에 앉히고 그 앞에 막아서서 그의 얼굴을 징긋이 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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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에서 단주와 싸워 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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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마디의 반응의 미란의 얼굴에는 햇빛보다도 빨리 나타났다. 뜨끔하면서 얼굴이 달라지고 표정이 그림자같이 미묘하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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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주나 현마가 다 같은 놈들이야. 애초부터 그 집안 공기를 탁하구 불결하다구 느꼈더니 아니나다를까 그 혼란 그 계책---그러나 차라리 모든 것을 알아버린 것이 내 스스로의 맘을 시험해 본 셈도 되어 내게는 다행하다구 생각돼서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으려구 한 것이 조르는 바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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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란은 고개를 숙이더니 어깨를 떨기 시작한다. 두어 마디 느끼다가 기어코 터져 버린다. 목소리를 놓고 아이같이 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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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감정 죄다 털어버리구 불결한 집안을 벗어나와 버리면 그만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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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선 무엇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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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란은 겨우 고개를 들 듯이 하다가 도로 숙여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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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한 소리를 자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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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때문에 길을 헤매시는 것만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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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게만 굴면 요번에는 내가 됩데 화를 낼 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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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두 사람 앞에 별안간 나타난 것이 뜻밖에 가야의 소식이었던 것이다. 완전히 가야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자기들만의 사정으로 정신이 없을 때 그들의 주의를 끌려는 듯이 바람결같이 방안으로 불어 들었다. 미란은 울고불고 속 태우던 좁은 자기의 세상에서 눈을 뜨면서 어지러운 자기의 꼴을 돌아보고 자세를 바라잡았다.
 
42
낮이 훨씬 넘은 때였다. 문을 벌컥 열고 나타난 후리후리한 사나이를 두 사람은 찬찬히 바라보다가 겨우 갑 재임을 알았다. 창 기슭에서 영훈과 싸우던 그 럭비선수 그의 머리를 미란이 화병으로 때려눕히던 가야의 약혼자 갑 재를 알아내는데 왜 그렇게 한참 동안의 시간의 걸렸던지 모른다. 확실히 두 사람은 자기들의 일만에 정신을 뽑히우고 있었던 것이다. 싸우러 나타났을 것이 아닌 갑재는 성큼성큼 걸어 들더니 전날의 그 버릇 그 표정으로 두 사람 앞에 막아서는 것이었다.
 
43
"다시는 안 올려구 했던 것이 또 이렇게 찾아오게 된 것을 생각하면 내 자신 가소로워서 못 견디겠으나 문을 연 순간 느낀 것이 세상에서 가야같이 불쌍한 여자는 없다는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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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니 무어니 또 시부렁거리러 왔나."
 
45
영훈이 정색할 때 갑재는 빈중빈중 입술을 휘면서 말을 똑바로 받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46
"시부렁거릴 필요두 없거니와 자넨 벌써 싸움의 대상이 못되는 것이며 나와 싸울 자격이 없어 자네들 . 꼴을 보구 안심했다느니보다 자네를 멸시하 기로 했네. 불쌍한 것이 가야야. 가야는 세상에서두 제일 무성의한 사내를 골라 선 생각하구 사모하느라구 아까운 반생을 바친 거야. 자네 따위는 열두 번 죽었다 나두 가야의 사랑에 값가지는 못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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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자는 수작인가 어렇게 장황하게."
 
48
"첨에는 가야를 원망두 했으나 지금 와 보면 가야같이 장한 여자는 없어. 마지막까지두 애를 쓰구 목소리를 놓아서 부르던 그 알뜰한 사내가 자네임을 생각할 때 자네같이 무도한 사내는 없구 가야같이 불쌍한 여자는 없단 말이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가야를 존경하구 자네를 미워하구 싶네."
 
49
"가야가 어쨌기에---"
 
50
영훈은 뜨금해지면서 금시 목소리가 황당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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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정경을 보면 자네게두 눈물이 있으리."
 
52
"마지막이라니 가야가 ---."
 
53
영훈은 외치면서 어느 때까지는 적을 부리는 갑재의 태도가 밉살스러웠다.
 
54
"병원에 누워서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이라네. 아침에 약을 먹구 신음하면서 자네 이름을 부르는 것이--- 오죽하면 내가 이렇게 굴욕을 무릅쓰구 왔을까."
 
55
"어쩌나."
 
56
미란은 어쩔 줄을 모르고 무의미하게 그 자리를 설설 헤매이다가 겨우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57
갑재를 따라서 병원으로 달렸을 때 간신히 마지막 순간을 대었다. 병실에는 집안 사람들이 모여들 있는 속에서 가야는 막 운명하려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눈물이 펀쩍일 뿐 무표정하고 심상들 한 것은 눈앞의 죽음 이 감동들을 빼앗아 버린 까닭인 듯하다. 가야는 눈앞을 와 막는 영훈의 그림자로 눈을 뜨고 입을 벙긋거리고 팔을 들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딴 세상으로 발을 옮겨 놓는 마지막 발디딤이었다. 느끼고만들 있던 울음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방안은 요란해졌다.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슬픔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불간할 수 없는 미란에게는 슬픔보다도 그 순간 겁이 버쩍 솟으면서 그 어지러운 속에 더 있기가 거북스러워서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와 버렸다. 소파에 한참이나 고개를 숙이고 앉아서 방안에서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비로소 눈물이 솟으며 가야가 죽었다는 뜻이 확적히 깨달아졌다. 가야는 벌써 자기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 다시 볼 수 없다는 것, 다시 슬픈 노래를 적어 보내지 않는다는 것---이 알려지며 죽음의 뜻이 가슴을 쳤다.
 
58
"……다시 안 오는 것이라면 가야의 그 몸은 어떻게 되는 것인구. 그룬 은 어떻게 되는 것인구. 무엇 때문에 자기 손으로 자기 한 목숨을 끊었는 구. 슬픔은 그렇게두 큰 것인가. 죽음보다두 큰 것인가. 누구 때문인가. 영훈 때문인가 나 때문인가. 영훈을 위해선가 나를 위해선가. 세 사람이면 왜 안 되는 것인가. 왜 한 사람은 없어져야 하는가. 없어지는 것이 왜 가야의 차례여야 하는가. 가야보다두 나래야 옳은 것이 아닌가. 차례가 바뀌어진 것 같다. 내가 가야 옳은 것이다. 가야를 남기구 내가 가야 옳은 것을 가야 가 잘못 가버린 것이다. 내 허물이요, 내 죄요, 내 책임이 아닌가. 가야여, 왜 그리 조급하게 왜 그리 빨리 가버렸는가. 나를 오죽이나 원망하구 오죽 이나 한하면서 갔을까. 가야, 가야, 가야……"
 
59
백 가닥 생각이 마음을 할퀴면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고 말았다. 가야의 눈과 표정이 피뜩 피뜩 머리 속에 떠오르자 몸부림이 나면서 사람들의 눈치조차 무시하고 목소리를 놓아 버렸다. 방문이 열리는 바람에 방안의 수선스런 기색이 물결같이 밀려나왔다. 소파에 나와 앉는 것은 영훈이었다. 미란 옆에 주저앉아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우더니 그 역봇살같이 울음이 터졌다. 느낄 대로 느끼고 몸을 떨 대로 떨었다. 영훈이 추스르는 바람에 미란은 한층 감정이 볶이우고 울음이 더해졌다. 두 사람에게는 지금 우는 것밖에는 없다는 듯 마음껏 우는 것이 가야에게 보내는 정성이라는 듯---눈물이 뒤를 이었다.
 
60
죽음은 정리를 가져왔다. 슬픔은 그 정리를 위해서 요구되는 희생인 듯하다.
 
61
영훈과 미란 두 사람에게는 한동안은 가야의 죽음이 세상에서 제일 큰사건이어서 그것을 생각하고 슬퍼함에 마음과 몸을 그대로 바쳐왔다. 아침에 잠을 깼다 밤에 다시 잠들 때까지 무엇을 하든 간에 그것은 마음을 붙들어서 뜻대로 떨쳐 버릴 수는 없었다. 시간을 쌓는 수밖에는 길이 없었다. 죽음이니 슬픔이니 하는 것이 세상의 큰 괴변이라면 그런 것들보다 한층 웃길 의 괴변이 시간이다. 시간이 주름잡히는 동안에는 죽음이니 슬픔이니 모든 것이 신통하게도 주름 사이에 접혀 들어가서 잊혀지고 정리되어 버린다. 날 이 거듭되고 주일이 거듭되어 한 달이 지나는 동안에 두 사람에게는 가야의 죽음에서 받은 상처가 점점 나아가고 눈물자취도 뿌덕뿌덕 말라 갔다. 평화롭고 고요한 추억 속에서 두 사람은 가야를 차차 멀고 그리운 것으로 생각 하면서 겨우 자기들 일신 위로 주의를 돌리고 생활을 정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62
생각하면 두 사람의 생활의 정리를 위해서 가야는 가버린 셈이나 둘만이 남았던 까닭에 생각은 단출해지고 방향은 단순해졌다. 두 사람에게 누구보다도 가장 가까운 것이 가야였다. 영훈이 미란을 생각할 때에도 그 등뒤에는 반드시 가야의 자태가 떠오르는 것이었고 미란이 영훈을 생각할 때에도 역시 등뒤에 가야의 자태가 한몫 끼이던 것이 가야가 가버린 까닭에 두 사람은 피차에 한 사람씩만을 생각하면 족하게 된 것이다. 가야의 희생이 이 단순화를 두 사람에게 선물로 보낸 셈이다. 오랫동안 헤매이던 미란도 이제는 확적한 마음의 안정을 얻게 되어 두 사람의 애정은 제물에 결정적으로 맺어지고 굳어졌다. 조촐하고 검소한 두 사람의 사랑이 원하는 것은 창조적 인 것의 생산이요, 예술의 완성이었다. 그것을 생각할 때 영훈에게 오는 문제는 구라파행의 계획이었다.‘아름다운 것’의 창조를 위한 여행의 일건이었다.
 
63
이 계획을 속히 구체적으로 서두르게 한 것은 미란이 뜻을 같이하게 되었음이다. 미란도구라파에 대한 원념을 은연중 불붙여 오던 중 영훈고 맺어 지자 그와 웅당 행동을 같이하려고 한 것이다. 영훈은 준비를 위해 시골에 있는 자기의 몫을 정리할 양으로 여러 차례나왔다갔다 하게될 때 미란도 스스로의 요량이 있었다.
 
64
교직을 물러서고 연구생들을 물리치고---한 가지의 목적을 위해서 모든 것을 정리해 갔다. 신변도 정리하고 생활도 간단하게 해서 언제드니 쉽게 길을 떠날 수 있도록 생활을 단순화했다. 방안에는 몇 짝의 커다란 트렁크와 피아노와 그 위에 몇 장의 악보가 남았을 뿐으로 되었다. 주위는 단순해지고 생각은 한 가지 방향으로 쏠려서 그처럼 몸이 거뿐할 데는 없다. 헌출한 방안에 두 사람이 마주앉으면 어지럽고 복잡하던 혼돈한 세계에서 두 몸만이 솟아서 편안한 세상에 이른 것도 같은 가벼운 신사가 들면서 지나간 가지가지의 일이 꿈결같이만 생각되었다.
 
65
"동경서 피아노 때문에 싸우던 일 생각나세요."
 
66
"먼 옛날 일만 같구료."
 
67
"봄이 가구 여름이 갔으니 옛날두 옛날이죠. 그때 싸우던 일 생각하면 지금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68
"사람의 일 하나나 알 수 있소."
 
69
여행의 계획 속에 적힌 첫 번의 중요한 도회는 하얼빈이었다. 동경보다 하얼빈을 고른 것은 그곳에 음악의 명인들이 많고 구라파 음악의 전통이 알뜰히 살아 있다는 까닭이었다. 거기서 수법의 교정을 받고 기술을 닦아서 수업을 쌓아 가지고 구라파로 떠나자는 생각이었다. 거기까지 계획이 섰을 때 벌써 좀 있으면 떠나게 될 여행의 기쁨에 가슴들이 술렁거리면서 거리를 걸어도 자랑스럽고 하늘을 우러러보면 꿈의 무늬가 아롱거렸다. 백화점에 들어가면 두 사람은 아래층 투어리스트 뷰어로에서 사무원들을 앞에 놓고 어느 때까지나 속달질이었다. 책상 위에는 두터운 유리 아래로 넓은 세계지도가 깔려 있어서 미란은 시름없이 그것을 들여다보며 철도를 타고 도회에서 도회를 더듬으면서 가슴속에 꿈이 화려하게 피어올랐다. 유리 속에는 미란의 얼굴과 철을 갈아입은 짙은 색 저고리가 비취어서 그 자기 자태에 황홀해지며 세계가 자기의 차지인양 목소리를 높여서 행복을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흰 얼굴에 푸른 양복을 입고 신수가 멀끔한 젊은 사무원은 체험에서 오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얻어들은 지식인지 세계여행에 관한 풍부한 지식을 헤쳐 보이면서 수많은 도회에 대한 인상을 간명하게 일러주었다. 하얼빈에 관한 것은 거짓말이 아닌 듯해서 장황하게 늘어놓는 속에는 실감이 흘러 있었다.
 
70
"…… 한창 지금이겠습니다. 여름이 끝나구 막 가을을 잡아들려구 할때가 제일 좋은 때죠. 송화강 수영의 시절이 끝날 무렵 강에는 늦은 패들이 있을 뿐 그 많던 남녀들이 이번에는 거리로 쓸려 나오기 시작해서 시절의 복색들을 갈아입으면 거리는 꽃밭같이 찬란들 하죠. 나뭇잎이 물드는 것두 여기보다는 빨라서 가로수가 사람들 본을 받는 듯 곱게 치장을 하구 아침 저녁이면 안개가 깊을 때가 있어서 그 안개 속으로 보는 풍경은 한층 정서 있는 것, 공원에서는 밤마다 음악회가 열려서 동양에서는 첫째 가는 관현악단이 고전의 교향악을 연주하면 시민들을 흠뻑 흡수해들이군 해요. 하얼빈만 가면 구라파는 다 간 셈, 인정으로 풍속으로 음악으로 풍경으로 하나나 이국적인 정서를 자아내지 않는 것이 없거든요……"
 
71
사무원 자신의 환영의 재현이요, 꿈의 되풀이인 것이다. 다시 그 땅을 밟아 볼 길이 아득한 김에 미란들을 붙잡고 자기의 취미를 말하고 꿈을 말하 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고 만족시키자는 것이다. 장황한 설명이 미란들의 편으로 하면 한없이 여정을 북돋아 주고 자극해 주는 셈이 되었다. 그의 어투는 설명이라느니 보다도 능란한 묘사여서 구절구절이 실감을 띄고 울려와서는 마음을 들까불게 해놓았다.
 
72
"웬만하면 게서 이해를 날 작정입니다만."
 
73
"좋구 말구요. 가을뿐이 아니라 겨울은 또 겨울로서 좋은 데죠. 눈 오는 거리 무더운 방안 다 각각 그 정취가 있거든요. 놀기두 좋구 공부하기두 좋구 각각 직책을 따라서 얼마든지 즐겁게 할 수 있거든요. 난 세상에서 여행하시는 분 같이 행복스럽구 부러운 분은 없어요. 평생 동안 여행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된 사람임은 말할 것두 없죠. 반생의 짧은 여행에서 절실히 느꼈어요. 지금은 이렇게 갇혀서 꼼짝달싹 못합니다만……"
 
74
하다가 사무원은 마음이 켕기는지 옆 동료들을 피뜩 바라보고 빙긋이 웃음을 띠우면서,
 
75
"……평생 원이 여행이예요. 외국에 대한 동경---이것을 버릴 수는 없어요. 색다른 것이 왜 그리 맘을 끄는지---아마도 사람의 본능이 아닌가해요.
 
76
지금 제 눈엔 두 분같이 행복스런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시 이 고장으로 돌아오실 것이 없이 한번 구라파로 가면 평생을 거기서 지내구 싶지 않나 두구 보시죠. 그야 악덕두 많지만 유유한 품이 예서같이 그렇게 좀스럽게 뜯구 할퀴는 법은 없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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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원이 아니라 동무로서 자기의 주의까지를 헤쳐 보이는 것이다. 영훈들의 주의 주장을 그 또한 가지고 있어서 의외의 곳에서 공명자를 얻은 셈이나 생각하면 새것에 대한 호기심, 모르는 것에 대한 원---그런 것이 보지 못한 외국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누구에게나 일으켜 주고 북돋아주는 것인 듯하다. 사람에게는 태어난 고장이 영원한 고향이 아닌 것이요, 고향을 한 번 떠남으로서 새로운 고향을 찾고자 하는 원이 마음속에 생기는 것인가 보다. 외국을 그리워함은 고향을 찾아서 떠난 긴 평생 속에서의 한 고패요 향수鄕愁인 것이다. 영훈을 ‘아름다운 것’의 발견을 위해서 고향 밖을 그리는 것이나 근본 회포에 있어서는 사무원의 심중과 다를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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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원의 설명으로 여정을 북돋아 가지고 거리에 나서면 두 사람은 한시 가 바쁘게 마음이 술렁거린다. 익숙한 거리도 얼마 안가 작별하게 될 것을 생각하면서 걸으면 친밀하고 반가운 것으로 보이면서 지난날의 불유쾌한 기억의 가지가지가 자취 맑게 사라져 버린다. 산에 오르면 홍금을 헤치는 간 들바람에 푸른 하늘이 더욱 가깝고 눈 아래 강물이 한층 빠져서 맑다. 뷰어로에서 사가지고 온 여행잡지 속의 그림보다도 풍물이 깨끗하고 맑아 보인다. 강 건너 비행장에서는 마침 오후의 길을 떠나는 여객기의 자태가 눈에 뜨인다. 푸드득거리고 날개 소리를 내면서 질펀한 벌판을 자유로 내닫다가 사뿐하게 땅을 차고는 볼 동안에 뜨기 시작한다. 평지에서 보던 것과는 달라 멀리 내려다볼 때 한 마리의 새같이 무심한 것으로 바라보인다. 비행장 허공을 맴도는 법도 없이 뜨기 시작하자 그대로 강을 건너서는 비스듬히 북쪽 하늘로 날아가는 것이다. 수리같이 활짝 편 날개가 오후의 햇빛을 받아서 고기 비늘같이 새하얗게 반짝반짝 눈을 찌른다. 북쪽 강산으로 날아가는 새하얀 붕새! 행복을 실은 자유로운 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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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탈 것이 바로 저것이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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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위를 요란하게 울리고 지나갈 때 영훈은 하늘을 손가락질하면서 고함을 쳤다. 날개 위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조그맣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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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타 봤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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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란에게는 세 번째의 희망이었다. 봄의 단주와 계획하던 것이 실패로 끝났던 것이요, 다음 현마에게 끌려 동방을 날았던 것이요---지금 세 번째 영훈과 함께 북으로 날려는 것이다. 첫 번 두 번에서 인생을 시험하다가 실패한 미란은 어제 세 번째에 시험에 성공해서 행복을 완전히 잡은 것이다. 이번 비행은 전 두 번과는 뜻이 다른 것이요, 방향도 다르다. 모험의 불안과 시험의 공포에 떠는 안타까운 출발이 아니고 졸업과 승리의 안정한 출발인 것이다. 지난 반년 동안이 그 어느 때보다도 파란 많고 곡절이 많았던 것은 인생의 생장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치르게 된 까닭이었다. 두어 시절이 갈렸음에 지나지는 않아도 그의 마음속에 받은 인상으로 하면 여러 해를 살아 온 듯한 첩첩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이제 그의 인생으로서는 처음의 평온한 시기를 맞이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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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타구 북쪽 하늘을 날아 봤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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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객기의 자태가 점점 작아져 나중에는 한 개의 점이 되어 먼 산을 넘을락 말락 할 때 미란은 활개를 펴고 재기를 디디면서 원을 또 한번 외쳐 보았다.
【원문】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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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효석(李孝石) [저자]
 
  1939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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