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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분(花粉) ◈
◇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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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이효석
 

1. 5

 
2
영훈이 학교를 사퇴하고 나온 후 세 시부터 두어 시간 동안 연구소는 연구생들로 해서 한바탕 요란들 했다. 성악과 피아노의 초보의 연습생들 이 차례로 수십 분씩의 시간을 잡으면서 지도를 받게 되었다. 음악학교를 지원 하는 수험생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심심 파적으로 음악을 시작하려는 패들이었다. 그중에서는 가야가 가장 실력 있고 착실한 편이어서 그가 부르는 슈베르트의 서정곡은 제법 제식의 것이었다. 다른 패와는 달라 거의 날마다 연구소를 찾는 그는 다섯 시가 지나 연구생들이 돌아간 후 소 안이 고요할 때까지 그 안에 혼자 남는 것이었고 밤에도 그의 그림자는 자주 눈에 띠었다. 그 이층은 영훈에게는 살림터로 되어서 연구실 옆 조그만 방이 거처하는 방이었다. 그 살림방에서까지 가야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는 적이 있었다. 가야는 반드시 음악을 배우러만 그곳을 찾는 것이 아니었고 이것은 아직 영훈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나 결혼기를 앞둔 가야는 집안 사람의 성화를 피해서 그곳을 피난처로 삼는 것이었다. 약혼자는 고명한 럭비선수--- 여기에 비극의 근원이 었었다. 부모가 하필 체육가를 고른 것은 외딸의 약 질임을 생각한 결과였으나 약질인 딸 편으로 보면 그런 우생학의 입장같이 어리석은 것은 없었고 체육가같이 천하게 보이는 것이 없었다. 육체의 힘을 재주 삼는다는 것이 인간의 재조로서는 가장 핫질인 것이어서 체육 편중의 혅대주의라는 것이 원시로 돌아가라는 고함소리같이 속되게 들리는 것이었다. 육체라는 것은 인간의 원시적 전제인 것이요, 체육을 힘쓰지 않는다고 문화를 감당해 나가지 못하리만큼 체력이 퇴화되고 인류가 멸망할 법은 없 는 것이다. 육체는 동물의 자랑거리일는지는 몰라도 인간의 자랑거리는 못 된다. 수십 명을 때려눕히는 권투가의 영광이라는 것은 투우장에서 두 뿔로 사람의 창자를 받아넘기는 황소의 영광 이상의 것은 아니다.---이런 의견을 가진 가야에게 체육의 선수 갑재는 처음부터 어그러진 배합이요 경멸의 대상이었다. 그에게는 권투나 럭비나 갑을 을 매길 것이 못 되는 것이었고 황소의 영광으로서 인간 일생의 영광을 짝 지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부모 와의 충돌을 피해서 집을 나오는 날이 많았다. 이 얼마간 봉건적인 육체 멸시의 정신주의는 어디서부터 유래했는지 모르나 가야의 마음속에 깊게 뿌리를 박고 있어서 이것이 영훈과의 사이의 관계도 스스로 규정해 주는 것 같았다. 그의 음악을 존경하고 재주를 찬양하는 마음이 어느덧 그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변한 것이었으나 그 사모하는 마음이 바늘 끝 같이 점점 곧고 뾰족해졌다. 정신력이 유달리 강한 것일까, 한 곳으로 집중되면서 밖으로 활짝 타 나가는 것이 아니고 안으로 뜨겁게 피어들어가는 것이었다. 영훈과 마주 앉으면 한마디 하소연을 못하면서도 속으로는 무섭게 타오르는 불꽃을 느껴 갔다.
 
3
미란이 가야를 안 것은 연구소를 찾기 시작한 때부터였으나 당초에 그에게 그닷한 후의를 보내지 않은 것은 그닷 눈을 끌지 않았던 까닭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가야의 외양이 미란에게 미치거나 혹은 지났던들 미란이 그를 범연히 보았을 리는 만무한 것이요, 그녀으 우월감이 애초에 가야를 얕잡아 보게 한 것이 사실이었다. 슬픈 일이었으나 가야의 외모의 인상은 백 사람 가운데서의 예외의 한 사람의 그것이었다. 백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는 표정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이 그의 불행을 결정적으로 판 박아 놓았다. 두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외눈으로 세상을 본다. 바른 눈이 대상을 볼 때 왼눈은 딴전을 본다. 두 눈의 초점이 각각 달라서 실상은 한 가지 대상을 노리는 것이언만 한편으로 또 다른 한 가지에 눈이 가고 있는 것이다 이 육체적 불행이 . 그의 인상을 비극적으로 보였고 미란으로 하여금 그를 주의하지 않게 한 것이다. 피차의 용모의 비교라는 것이 여자끼리로서는 거의 운명적으로 일상의 의식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가야와 의 경쟁에서 미란은 첫 순간부터 이긴 셈이다. 이기기보다도 먼저 그의 불행을 측은히 여기는 데서 부주의가 왔고 안심이 생겼다. 영훈과 세 사람이 한자리에 앉게 되면 가야의 시선은 영훈을 향하고 있는 것이나 왼 눈동자는 엉뚱한 미란을 바라보고 있는 결과가 되었다. 한 곳을 목적하면서도 뒤틀려져 나가게 되는 결과---거기에 가야의 비극의 암시가 숨어 있음을 느끼면서 미란은 가야의 영훈에게 대한 감정을 범연하게 추측하고 두 사람의 사이가 아무리 가깝다 하더라도 영훈에게 대한 자기의 자신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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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신을 시험하고 영훈과 가야의 사이를 엿볼 수 있는 날이 왔다. 미란은 바이야의 교칙본을 두 달이 채 못되어서 떼어 버리고는 다음 과정으로 체르니 삼십 번을 시작하고 있었다. 초년생의 신세를 면한 그는 연구소를 찾아 그곳 피아노를 이용하는 때가 많았다. 오후가 늦어서 영훈을 찾았을 때 연습실에는 아무리 없이 옆방에서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익은 후이라 목소리도 안 걸고 불쑥불쑥 드나드는 터에 살며시 연습실을 들어선 것이 불찰이었던지는 모르나 옆방에서 흐르는 목소리는 영훈과 가야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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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 앉은 후에 새삼스럽게 인기척을 내기도 우스워서 잠자코 있는 동안에 말소리는 한마디 빠지지 않고 들려왔다. 영훈은 철저한 구라파주의자여서 그와 마주앉으면 대개는 이야기가 그 방면으로 기울어졌다. 그는 흔히 뜰을 예로 들었다. 정원 안에는 화단도 있고 나무도 서고 풀도 우거지고 지름길도 있고 그늘도 있고 양지도 있는 것 그 전체를 세계로 보면 그 속에서 구라파의 문화라는 것은 가장 아름다운 화단에 상당하다는 것이다. 색체와 그림자의 여러 폭의 부분이 합쳐서 화단을 중심으로 하고 정원 전체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므로 그 부분 부분을 숭상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이다. 그 의 구라파주의는 곧 세계주의로 통하는 것이어서 그 입장에서 볼 때 지방주의같이 깨지 않은 감상은 없다는 것이다. 진리나 가난한 것이나 아름다운 것은 공통되는 것이어서 부분이 없고 구역이 없다. 이곳의 가난한 사람과 저곳의 가난한 사람과의 사이는 이곳의 가난한 사람과 가난하지 않은 사람과의 사이보다는 도리어 가깝듯이 아름다운 것도 아름다운 것끼리 구역을 넘엇 친밀한 감동을 주고받는다. 이곳의 추한 것과 저곳의 아름다운 것을 대할 때 추한 것보다는 아름다운 것에서 같은 혈연과 풍속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같은 진리를 생각하고 같은 사상을 호흡하고 같은 아름다 운 것에 감동하는 오늘의 우리는 한구석에 숨어 사는 것이 아니요, 전 세계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 동양에 살고 있어도 구라파에서 호흡하고 있는 것이며 구라파에 살아도 동양에 와 있는 셈이다. 영훈의 구라파주의는 이런 점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음악의 교양이 그런 생각을 한층 절실하게 해주었는지도 모른다. 음악의 세상에서 같이 지방의 구별이 없고 모든 것이 한 세계 속에 조화되고 같은 감동으로 물들어지는 것은 없다. 오래 전부터 그는 「인간의 노래」의 교향악의 작곡을 계획하고 있었다. 탄생, 싸움, 운명, 죽음, 네 악장으로 되는 그 곡조 속의 수많은 주제는 전인류의 것이어야 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탄생의 기쁨 죽음의 슬픔을 풀어내는 주제는 동양의 것이며 동시에 구라파의 것이다, 구라파의 것이며 동시에 동양의 것이어야 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피아노를 위한「생활의 노래」는 일곱 제목으로 되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것, 사랑, 행복, 잔치, 고독, 슬픔, 사상---즉흥곡의 형식으로 되는 이 일곱 가지의 제목 속에도 역시 가장 보편적이고 타당한 인류의 감정을 부어 넣자는 것이 그의 계획임을 미란은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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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름다운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것을 구해서 직접 구라파로 갈 작정이요. 화가가 그림의 모델을 구하듯이 나 두 음악의 모델을 거기서 구할 생각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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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옆방에서 새어 나오는 영훈의 목소리는 역시 그 구라파주의의 논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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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 고장에는 아름다운 것이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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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대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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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둔 정원이나 빈민굴 같은 속에 아름다운 것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 습니까. 고려나 신라 때에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 있었던지는 모르나 오늘 어는 구석에 아름다운 것이 있습니까. 흰 옷을 입기 시작한 때부터 빛깔을 잊었고 아악과 함께 음악이 끊어졌고---천여 년 동안 흙벽 속에 갇혀 있느라구 아름다운 것을 생각할 여지나 있었습니까. 제 고장을 나무래기가 야박 스러우니까 허세들을 보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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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옷은 흰 옷으로서 아름답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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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것과 초록과 어느 것이 더 아름답습니까. 흙과 페인트와 어느 것이 더 아름답습니까. 흰 것이나 흙은 문화 이전의 원료이지 아름다운 것이라고 발명해 낸 것은 아니거든요. 아이들의 소꿉질과 같이 알롱알롱한 옷도 생각해 보구 유리창 휘장에 푸른빛도 써보구 하는 대담한 장난이 문화의 시초였고 그런 연구 속에서 아름다운 것도 생겨 나오는 법이지 재료만으로 아름다운 것이 있을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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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두 아름답구 풍속두 아름답구 인물두 아름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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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연쩍은 듯이 가야의 말꼬리는 가늘게 흐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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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사람의 말을 "들으면 이곳의 자연이 유독 아름다운 것이 아닌 것 같구 사람으로 해 두터가 든든하구 등뒤의 믿는 것이 굳은 때에 인물이 나는 법이지 빈민굴 속에 인물이 있으면 얼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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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훈의 말소리도 거기에서 흐려졌다. 사실 그의 말속의 한 사람으로서의 미란도 그의 판단에 낯이 뜨거워지면서 가야의 앞에서 그렇게 대담하게 인 물에 대한 단정을 내리는 것이 여북한 마음에서 나온 것일까를 느끼며 자기 도 그런 대상의 한 사람이라면 얼마나 부끄러운가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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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환멸 속에서 어떻게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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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예술 속에서 설죠. 꿈속에서 아름다운 것을 생각하면서 살죠.---그것이 누구나 가난한 사람의 사는 법이지만. 주위의 가난한 꼴들을 보다가두 먼 곳에 구라파라는 풍성한 곳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신기한 느낌이 나면서 그래두 내뺄 곳이 있구나 하구 든든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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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파로만 가면 그 꿈이 채워질까요. 또 새로운 환멸이 생기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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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때의 일 아름다운 것을 흠뻑 보구 듣구 하면서 그 영감 속에서 맘먹은 일을 할 수 있다면 행복스럽겠죠. 「생활의 노래」속의 ‘아름다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 그곳 생활 속에 살면서 모든 아름다운 것을 볼 작정입니다. 예술두 보고 생활두 보구 고전두 보고 현실두 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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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그건 마지막 피난처를 가질 수 있다면 오직 행복스럽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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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할 때에 도망질해 갈 수 있는 그런 마지막 구원을 가질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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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란은 마주앉아 가야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건만 옆방에서 그의 뜻을 짐작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두 눈으로 영훈을 곧바로 바라보려고 애쓰는 것이나 왼눈은 한결같이 빗나가서 딴전을 본다. 영훈은 그양이 민망해서 똑바로 그를 맞보지 못하고 외면해 버린다.---그런 그들의 모양이 눈앞에 보이는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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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하룻밤이나 꿈속에서 갑재에게 쫓기지 않는 날이 있을까요. 쫓기다가는 구렁 속에 빠지구 바다에 떨어지구. 그러나 바다나 구렁 속두 피난처는 못돼서 거기까지 쫓기구 나면 전신에 진땀이 쪽 내배군 해요. 제겐 마지막 피난처가 없어요. 마지막 구원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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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훈의 말까지에는 한참이나 동안이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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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더 힘쓰실 수두 있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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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권고였으나 미란에게는 그 한마디가 구원의 목소리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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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릿자릿한 마음으로 동정을 살피고 있던 그로서 가장 듣고 싶던 결론의 한 마디를 들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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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만으로 살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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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한 기품이 없이 어찌 어려운 예술의 길을 걸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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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인생의 전부란 말씀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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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요량을 하여야죠.---예술의 길에 있어서는 전 언제까지나 좋은 동무 되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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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일이면서도 미란에게는 영훈의 선언 이청천의 벽력 같이도 들리면서 몸에 식은땀이 흐르는 판이었다. 사랑의 까막잡기를 하다가 상대자의 선언을 들었을 때같이 세상에서 두려운 때가 있을까. 두 사람의 말소리는 그것으로 끊어진 채 어느 때까지나 침묵이 흘렀다. 아마도 그 다음은 말이 아니고 가야의 울음소기가 들릴 차례가 아닐까 하면서 미란은 그것을 조바심하고 기다리게 되는 무서운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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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란은 우연히 그들의 말을 엿듣게 된 그것만으로도 허물이나 저지른 듯 가야에게 대해서는 그의 중대한 비밀을 훔쳐낸 듯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 우연한 기회로 영훈과 가야의 내용을 확실히 안 셈이었고 가야 의 비극의 인상을 확적히 손에 잡은 셈이었다. 가야의 처지를 가엾어는 여기면서도 한편 자기 자신의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그대로 남아있아는 의식에서 오는 안심---그것을 내심으로는 악마의 기쁨이라고 느껴는 보면서도 막을 수 없는 자연의 심정임은 어쩌는 수 없었다. 그런 심정을 탄할 사람도 없는 것이요, 막을 능력도 세상에는 없는 것이다. 경쟁과 싸움은 숨은 속에서도 거세게 계속되는 것이다. 치밀한 주의 아래에서 미란의 시험은 더욱 계속되었다. 두 사람 사이를 엿보고 가야의 마음의 성과를 살펴 나가는 동 안에 처음 인상이 더욱 선명해 갈 뿐이었다. 영훈의 마음이 태연하고 범연한 데 비겨 가야의 감정은 반비례로 격해가고 더워 가는 것은 미란은 애닯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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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표현은 결국 글자로 나타나야 하는 것일까. 글자는 표식이 있으므로 가슴속에 담고 있을 때보다는 확적은 해지나 결과는 슬프고 애달플 듯하다. 글자 속에 담긴 가야의 안타까운 감정을 보았을 때 미란은 남의 일 같지 않게 가슴이 떨렸다. 아무도 없는 연구소 연습실에서 하루 가야의 편지를 발견한 것이었다. 가야는 연거푸 날마다 연구소에 나타나다가도 여러 날씩을 번기는 때가 있었다. 그런 때에는 반드시 영훈에게로 편지가 오는 모양이었다. 편지를 내기 위해서 쉬는지도 모르고 만나서 못할 말을 편지 속에 부탁하자는 것인지도 모른다. 책상 위에 놓인 봉해있는 편지를 미란은 견디기 어려운 숨은 충동으로 먼저 손을 대었다. 장황한 편지가 아니라 짧은 노래였다 하아얀 백지. 위에 가느다란 먹으로 적어 놓은 마음의 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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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는 하룬들 그 이름 안 부르는 날 있으리 일년이라 삼백육십오일 가슴속에 그 어느 하룬들 그 이름 안 부르는 날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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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의 마음속을 엿본 듯 자기 자신의 하소연을 들은 듯 미란은 얼굴이 화끈해지면서 눈시울이 더워졌다. 그가 즐겨 부르는 가요곡 속의 한 구절일까. 손수 창작한 사랑의 노래일까. 글자 사이사이에 새겨진 마음의 고백에 놀라며 미란은 심상치 않은 결말을 예감하고 소름이 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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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중에 서랍을 여니 거기에는 한 묶음이나 되는 가야의 편지 뭉치가 들어 있는 것이다. 정신없이 이것저것을 닥치는 대로 뽑아서 임의로 펴 볼 때 모두가 같은 감정의 발로요 슬픈 노래였다. 하아얀 종이 위에 피 흔적 같이 꼼꼼히 뿌려진 가느다란 먹자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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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사모의 생각 부질없는 바람결 같도다 내 슬픔 어쩌는 수 없고 내 눈물 그칠 바 모르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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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질없는 이내 생각 목숨이 진한대도 뉘우침 없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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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내 그를 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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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같이 솟는 슬픔의 감정. 악보 위에 적힌 것을 읽으면 목메이게 부르는 노래의 구절을 듣는 듯 마음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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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가리켜 본다 내 맘의 허공 내 맘의 허공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다.
 
44
무수한 노래가 꽃묶음같이 흔하다. 어느 구석에 그렇게 흔한 정서가 숨어 있는 것일까. 가야의 얼굴이 눈앞에 떠오른다. 한눈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서도 한눈으로는 딴전을 보아야 하는 슬픈 얼굴이 떠오르면서 세상에서 몇째 안가는 불행한 사람인 것같이 여겨진다. 슬픈 속에서는 마음이 채로 받친 듯이 맑게 고여 복잡하던 미란의 감정도 적어도 그 순간에는 불순하고 지저분한 티를 흘려 버리고 가야와 같은 감정으로 변해지고 개어 갔다. 영훈이 들어온 까닭에 그 감정을 제대로 되돌리기에 한참 동안의 노력이 필요 했다. 책상 위에 널려진 종이들을 미처 수습할새도 없이 목소리가 가까워 왔다.
 
45
"또 편집니까."
 
46
자기가 먼저 헤쳤던 그날 편지를 내보이면서 미란은 서랍 속에 묵은 편지 묶음을 황급하게 몰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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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을 헤쳐 보려는 생각은 아니었으나---변명으로 들으셔두 할 수 없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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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한번은 말씀 드리려구 한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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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뒤로 보냈던 시선을 돌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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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는 시인예요. 나더러 작곡을 해달라구 수많은 시를 적어 보내나 제 정성이 미치지 못해서---"
 
51
"왜 아름다운 반주를 붙여 드리지 못해요. 고운 멜로디와 고운 화음으 로."
 
52
"감동 없이 곡조가 생기나요. 영감이라는 것이 말하자면 운명적인 것이 어서 아무리 기다려두메마른 감동 속에서는 솟는 법이 아니거든요. 모두가 슬픈 노래---샘같이 솟는 그 흔한 슬픈 감정을 일일이 좇아갈 수가 없어요."
 
53
피아노 앞에 앉아 한참이나 고개를 숙이더니 손가락이 건반 위에 살며시 놓여졌다. 곡조에 맞춰 입에서 노래가 새어 나왔다.
 
54
서글픈 날이었다 길을 걸어도 길을 걸어도 마음속 흐붓한 서글픈 날이었다 눈물 그칠 줄 모르고…… 베토벤의 어두운 「무덤 속에」와도 같은 무거운 화음이 방안에 찼다.
 
55
영훈은 눈을 감고 마치 자기 자신의 노래인 듯 동정에 넘치는 조화된 즉흥 의 한 곡조였다. 곡조가 끝나도 침통한 리듬이 방안에 배어 귀에 쟁쟁하다.
 
56
"또 한 곡조---"
 
57
건반 위로 손가락을 달렸다.
 
58
그림자 속에 빛 있으니 흔들리는 꽃송이 제발 꺾지 마소……
 
59
"모두 이런 슬픈 노래---."
 
60
돌아앉으면서 탄식하는 듯이 미란을 바라본다.
 
61
"그 슬픈 노래를 모두 즐거운 것을 고쳐 쓰게 할 분은 영훈씨밖엔 없잖아요."
 
62
"운명이랄 수밖엔 없어도---인력으론 어쩔 수 없는."
 
63
선언과도 같았다. 미란은 몸이 오싹해지며 단순한 그 사실에 대한 동정만 이 그 순간 일어났다. 인생이라는 것이 결코 뜻대로만 수월하게 되어 나가는 것이 아니고 추상같이 엄격한 고비도 있으니 깨달아지면서 엷은 얼음장을 디디고 선 듯한 느낌이 솟았다.
 
64
"왜 어쩔 수 없나요."
 
65
"어쩔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죠."
 
66
"그게 운명이란 건가요."
 
67
"그렇게 마련된 건 마련대로 밖엔 안되거든요."
 
68
아이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인생의 신비를 또 한 토막 발견했다는 표정이다.
 
69
"그래서 구라파로 내빼신단 말씀인가요."
 
70
"원하는 고장이니까 간다는 게죠. 콕토를 만나구 작곡가 라벨을 만나구 아름다운 것이라는 건 죄다 모아서 세계의‘아름다운 것’을 노래해 볼 작정으로요---"
 
71
"아름다운 것이 대체 무엇이길래."
 
72
수수께끼나 거든 듯 영훈은 어조를 변해 가지고,
 
73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게 무언데요."
 
74
"아름다운 것이란 말씀이죠."
 
75
"무지개, 별, 꽃, 인물, 치장, 음악---그런 아름다운 것을 보고 가지고 할 때 마음이 뛰고 행복스럽지만 그런 것을 가지지 못할 때 얼마나 사람은 불행스럽습니까. 제일 훌륭하고 위대하고 힘을 가진 것이 아름다운 것이거든요. 돼지두 꽃만은 먹지 않는다든가요. 아름다운 것을 구하려고 애쓰는 건 예술가뿐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같아요. 그것을 제일 흔하게 가진 백성같이 행복스럽고 넉넉한 백성은 없어요."
 
76
"구라파 사람이 제일 행복스럽단 말씀이죠."
 
77
"얕잡아봐두 사실은 사실인 걸요."
 
78
"이곳에두 아름다운 것이 그렇게 말랐을까요."
 
79
"그야---"
 
80
영훈은 말머리를 돌리면서 웃음으로 어조를 달았다.
 
81
"미란씨 같은 아름다운 분두 계시기야 계시지만."
 
82
"어쩌나."
 
83
미란은 고개를 숙이고 손수건 한 꼬리를 입에 물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반드시 농담이 아닌 그 한마디야말로 가장 듣고 싶어하던 말이었던지도 모른다. 그 한마디를 이제 결론으로서 그의 입에서 직접 들은 것이다. 자기의 아름다움을 띄어 주는 것은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이어야 하고 특히 사모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어리석거나 어질거나 구별 없이 여자란 여자에게 그 반가운 판단을 들을 때같이 기쁜 때는 없다. 부끄럼이 아니라 기쁨과 자랑 이 솟으면서 미란은 두 볼을 물들였던 것이다.
 
84
그날의 많은 이야기 중에서 미란에게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한마디였고 얻음이었다. 오랫동안의 은근한 시험 끝에 얻은 중요한 결말이요 성적이었 다. 가야의 앞에서 아끼던 말을 영훈은 미란의 앞에서 선뜻 말해준 것이다.
 
85
낙제의 선언이 아니고 급제의 선언인 것이요, 경우에 따라서는 영훈의 상을 받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미란의 마음은 흐붓하고 흡족했다.
 
86
그러나 한편 가야의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성공의 반면에 숨은 희생이 가야의 경우같이 큼이 없다. 상대되는 극단에 서 있으면서도 미란은 가야를 미워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그의 슬픔에 부딪치면 마음은 깨끗하게 맑아져서 그를 측은히 여기게만 된다. 찻집에서 찻잔을 마주 앞에 놓고 앉으면 말을 잊은 앵무같이 가야는 언제까지든지 입을 열지 않는다. 경우를 따라서는 사람에게 말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그 무거운 침묵 속에서 역력히 읽을 수 있었다. 참으로 고집스럽 그침묵 속에서는 시간의 한계조차 분명치 못했다. 시간이란 말 속에 적히고 이야기 속에 흐르고 역사책에 적히고 고목나무 연륜 속에 새겨지는 것이다. 침묵 속에서는 때르 헤아릴 수 없어서 시간은 무한한 것 같고 슬픔도 무한하다.
 
87
슬픔이란 무엇일까---정체없이 강감하고 막히고 아득한 것---달랠수 없고 막을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사랑의 슬픔이란 칼날같이 엄격하고 매운 것이 아닐까. 얼굴의 분은 한번 으끄러져도 다시 칠할 수 있는 것이요 마음에 안 드는 한 송이 과실은 그래도 참을 수 있는 것이나 어긋나는 사랑만은 어쩌 는 수 없는 것이요, 그 슬픔에는 타협의 길이 없고 노력도 뜻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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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과 절망이 가로막혀서 그 앞에서 입을 벌리고 우두커니 서 있는 수밖에는 없다. 수술대에 누워서 살을 베일 때에 이를 물고 여자에게 그 반가운 들을 때같이 기쁜 때는 없다. 부끄럼이 아니라 기쁨과 자랑이 솟으면서 미란은 두 볼을 물들였던 것이다.
 
89
그날의 많은 이야기 중에서 미란에게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한미디였고 얻음이었다. 오랫동안의 은근한 시험 끝에 얻은 중요한 결말이요 성적이었 다. 가야의 앞에서 아끼던 말을 영훈은 미란의 앞에서 선뜻 말해준 것이다.
 
90
낙제의 선언이 아니고 급제의 선언인 것이요, 경우에 따라서는 영훈의 상을 받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미란의 마음은 흐붓하고 흡족했다.
 
91
그러나 한편 가야의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성공의 반면에 숨은 희생이 가야의 경우같이 큼이 없다. 상대되는 극단에 서 있으면서도 미란은 가야를 미워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그의 슬픔에 부딪치면 마음은 깨끗하게 맑아져서 그를 측은히 여기게만 된다. 찻집에서 찻잔을 마주 앞에 놓고 앉으면 말을 잊은 앵무같이 가야는 언제까지든지 입을 열지 않는다. 경우를 따라서는 사람에게 말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그 무거운 침묵 속에서 역력히 읽을 수 있었다. 참으로 고집스럽 그 침묵 속에서는 무거운 침묵 속에서는 시간의 한계조차 분명치 못했다. 시간이란 말 속에 적히고 이야기 속에 흐르고 역사채에 적히고 고목나무 연륜 속에 새겨지는 것이다.
 
92
침묵 속에서는 때를 헤아릴 수 없어서 시간은 무한한 것 같고 슬픔도 무한하다.
 
93
슬픔이란 무엇일까---정체없이 강감하고 막히고 아득한 것---달랠 수 없고 막을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사랑의 슬픔이란 칼날같이 엄격하고 매운 것이 아닐까 얼굴의 분은. 한번 으끄러져도 다시 칠할 수 있는 것이요 마음에 안 드는 한 송이 과실은 그래도 참을 수 있는 것이나 어긋나는 사랑만은 어쩌는 수 없는 것이요, 그 슬픔에는 타협의 길이 없고 노력도 뜻 없는 것이다. 어둠과 절망이 가로막혀서 그 앞에서 입을 벌리고 우두커니 서 있는 수밖에는 없다. 수술대에 누워서 살을 베일 때에 이를 물고 눈물을 빠지지 흘리며 가만히 참고 있지 않으면 안되는---그런 처지와도 흡사하지 않은가.
 
94
육체의 슬픔이란 참으로 건질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다. 두 눈의 초점이 다른 까닭에 가야의 표정은 때때로 희극배우가 일부러 꾸며낸 표정같이 가짜의 것으로 보이는 때가 있다. 두 눈에 고인 눈물조차 부러 괴덕을 부리려는 거짓으로 보이면서 그것이 한층 뼈저린 효과를 나타내었다. 그런 때 공교롭게도 레코드에서 차이코프키의 교향악「파세틱」이나 흘러나오면 가야의 표정의 반주인 듯 미란의 심사를 찬바람같이 설렁거려 놓고 휘저어 놓는다.
 
95
세상의 슬픔을 죄다 물아다가 마지막 악장에에다 으깨어 놓은 듯도 하다.
 
96
늦은 가을 그믐밤 시산한 바람이 불어 마지막 나뭇잎을 떨어트리는 속으로 낙엽과 함께 휩쓸려 밀려가는 정경 앞에서 절벽이 아래에는 바다가 검다.
 
97
눈을 싸매고 그럴 줄 알면서 절벽 위로 걸어갈 때의 슬픔, 죽음 한 걸음 전의 슬픔, 멸망으로 통하는 슬픔. 가야의 표정을 바라보며「비창곡」을 듣노라면 미란의 마음은 멸망의 감정으로 젖어 버린다. 슬픔의 그 다음은 무엇일까. 미란은 차차 그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느끼게 된다. 슬픔도 극에 달하면 아름다운 것으로 느끼게 된다. 슬픔도 극에 달하면 아름다운 것으로 변하는 것인 듯하다. 아름다우리만큼 슬픔은 깨끗한 감정이다. 가야의 슬픔을 나중에는 한없이 아름다운 것으로 느껴 가면서 미란은 남의 슬픔을 울 밖에 서서 그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기의 입장을 행복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98
아파트에서의 그날 밤 일이 있은 후 단주는 씻은 듯이 몸이 개운하면서 다음날부터 병석을 털고 일어났다. 누웠던 때와는 달라서 거뿐하고 즐거우면서 투정을 부리고 꾀병을 하던 아이가 군것으로 달래임을 받고 무릎을 털고 일어난 격이었다. 태도가 다르면서 확실히 자기를 멸시하고 있는 미란의 표정을 알기는 하면서도 한편 역시 만족스런 마음을 금할 수는 없었다. 처음 한번 같이 중요한 한번이 없다. 실수이든 진정이든 간에 그 한번은 다음에 오는 열 번 백번보다도 중하고 값있는 것이다. 미란이 이제 와서 자기를 멸시하든 말든 간에 그 한 번으로서 그의 비밀을 들쳐보았다는 듯 그의 전 부를 차지해 보았다는 듯 흐붓하게 포화된 감정이 솟았다. 손수 탐험하고 점령한 깊은 처녀지에는 자기의 발자취를 남기고 자기의 깃발을 꽂으면 족한 것이지 뒤에 누가 이민을 하고 어느 자손이와 살든 그것까지를 독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과실에 . 첫입자리를 넣으면 자기의 것임이 틀림없고 한 번 받은 잔칫상은 다 먹든 말든 받은 사람의 차지이다. 단주의 만족과 잘랑은 이런 정복의 쾌감에서 온 것이 사실이었다. 미란이 아무리 자기를 업신 여기고 뽐내든 간에 다 헛것, 나는 너를 다 안다는 항의가 심증에 솟으면서 굽힐 것이 없이 마음이 까불었다. 그것이 있기 전의 우울하고 애닯던 심정과는 소양지판의 변화였다. 그런 꼴을 볼 때마다 미란은 실수를 했다는 뉘우침이 커지며 두 사람 사이에 은연중에 싸움은 삐지 않았다.
 
99
"무얼 믿구 그리 우쭐대."
 
100
"세상에서 나보다 더 장한 사람이 있는 줄 아나. 한 나라의 왕 두 나보다 더 장할까."
 
101
"낯가죽이 두껍긴 해."
 
102
"아무리 멸시해 보지. 이 자랑은 못 꺾거든."
 
103
미란은 풀이 죽어지며 더 대들어야 소용이 없는 것이어서 침착하게 타이르려 든다.
 
104
"실수라는 것두 있거든.---술이 취하면 개천에 발을 넣는 수두였구 상 기가 된 김에 뭇사람 앞에서 옷을 벗는 수두 있겠구 그것이 다 진정이 아니구 정신이 사 깔려서 생기는 일시의 허물이구실수거든."
 
105
"허물이거나 실수거나 된 다음엔 상관이 없거든. 허물이라구 뉘우친다구 개천에 빠진 발이 금시에 씻겨질까. 아무리 뉘우치구 반성해두 허물은 허물 이거든."
 
106
그의 말소리가 높아지는 데는 아찔하여서 미란은 주먹을 쥐고 몸을 부르르 떤다. 자기의 목소리가 도리어 고함으로 변한다.
 
107
"제발 더 말하지 말아요. 잊어버려요. 잊어버려 줘요."
 
108
"죽어두 그것만이야 잊을까봐. 세상일 다 잊는대두 그 기쁨만이야 잊을까봐."
 
109
"내게 조금이라두 관계되는 것은 말갛게 잊어버려 줘요."
 
110
"남의 생명의 특권까지를 짓문지르려구."
 
111
"싫어요. 생각만 해두.---맘을 그물 속에다 잡아 넣으려구 못살게 구는 이 찰그마리 같은……"
 
112
진피를 부리는 단주의 태도에 미란은 화가 나고야 만다. 머리털까지 화끈 달아 올라올 때에는 그가 세상에서 제일 미운 것인 듯 어쩌다가 그런 사내와 인연이 맺어졌나 싶으면서 불서러운 생각조차 들었다.
 
113
"…… 찰그마리 같은 뇟보!"
 
114
저주는 목소리를 높여서가 아니라 마음속 깊이 하는 법이다. 창자 속에서부터 저주의 한숨이 길게 새어 올라서는 증오에 불타는 눈초리에 그득히 넘치는 것이다.
 
115
그러나 단주는 더욱 뿜을 낼 뿐으로 산을 등진 범같이 의기가 등등해서 이제는 자기가 제일가는 가장이요 어른일 척 집안을 마음대로 짓무즈리는 것이다. 어떤 때에는 미란의 피아노를 점령하고 앉아서는 교칙본이 군데 저 군데를 되고 말고 울려 보면서 미란이 폭발되기만을 기다리는 태도였다. 화음을 이루지 못한 어지러운 불협화음을 음악이 아닌 잡음을 함부로 치는 것 을 들을 때에는 벌집을 쑤셔 벌떼를 만난 것같이 미란은 신경이 아파지면서 음악을 모욕당하고 있는 것 같아서 한마디 쏘아붙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116
"고양이가 걸어가두 그보다는 낫겠다."
 
117
두 팔로 건반 위를 거의 덮다시피 하고 우레 같은 요란한 소리를 한꺼번에 내고는 미란이 그렇게 대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단주는 돌아앉으면서 대꾸하였다.
 
118
"고명한 선생에게서 배운다구 저 큰소리지. 선생의 손가락이나 고양이의 발고락이나 일반인 줄은 모르나."
 
119
"다시 음악을 모욕했다봐라. 그대루 안 둘 테니."
 
120
"그 알량한 음악---그 알량한 선생. 아주 음악가라구 뽐을 내면서. 천재라는 게 한 세기에 한두 사람쯤 태어나는 것이지 어중이떠중이 다 천재가 됐다간 세상이 온통 천채가 되게.---제자의 폼행이 병이라는 것을 알아두 그렇게 점잖을 뺄까."
 
121
"무엇이 어째. 무엇이---"
 
122
"어디 용기가 있거든 자기 품행 이 얘기 선생한테 좀 해보지. 멀쩡하게 제 허물은 싸버리고 제 품행은 갑이올시다구 탈을 쓰구 한 눈은 팔면서두."
 
123
아픈 데를 찔리운 듯 전신의 피가 한 곳 ---얼굴로 모여 미란은 발끈해지면서 마루를 구른다.
 
124
"얌궂은 망나니!"
 
125
"언제든지 부처님 같이만 하구 있을 주 알구---내게 거역만 해보지 가만 있을 줄 아나. 입만 한번 벌리면 하룻밤 일쯤 야 단박에 세상이 알걸 가지 구."
 
126
"비겁한 것!"
 
127
"못난 것!"
 
128
참을 수 없어 닥치는 대로 손에 쥐이는 책권을 단주에게 던진다. 책은 그의 낯짝을 갈기고는 떨어져 건반을 요란하게 스친다. 힘만 자란다면 달려들어 목이라도 눌러 버리고 싶게 몸이 수물거릴 때 수선스런 기세를 듣고 안방에서 세란이 뛰어나온다.
 
129
"웬일이야 요새.---개와 고양이니."
 
130
책망은 하면서도 은근히 두 사람의 옥신각신을 염려는커녕 환영하고 있음 이 사실이다. 단주가 미란에게로 한 걸음이라도 가까워 감이 반가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고 미란의 거역이 한 걸음이라도 단주를 물리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새의 두 사람의 태도가 웬일인지 점점 자기의 원대로 뜨기 시작한 것이 그에게는 숨은 기쁨이었다. 그러나 단주에게는 단주로서 비밀이 있음을 세란인들 어찌 알았으랴. 세란이 어른답게 책망을 하며 법석을 하는 것이 단주에게는 남 모르는 기쁨을 자아내게 한 것은 세란에게 대해서 스스로의 비밀을 가지고 있음을 기뻐하고 자랑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131
비밀이란 것이 무서운 괴롬이 아니고 그에게는 기쁨이요 자랑이었다. 미란과의 비밀을 단주는 아무것도 모르는 세란의 앞에서 한없이 즐기면서 내게는 또 이런 수도 있었다는 듯 한 꺼풀 윗길로 그를 속여 보는 것이 신기한 자랑이었던 것이다. 같은 비밀을 가지고도 단주와는 반대로 세란에게 대해서 그것을 한없이 부끄러워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미란이다. 순간의 실수로 뜻하지 않은 비밀을 가지게 된 미란은 형이 만약 그것을 알면 자기의 꼴을 무엇으로 여길까 해서 세란의 앞에서 무한히 부끄러워하는 것이었다. 그가 만약 세란과 단주와의, 도리어 자기 이전의 비밀을 안다면 이런 생각도 얼마간 변할는지는 모르나 조물주가 아닌 그가 형들의 그것을 알 리는 없었던 것이다. 미란은 형에게 비밀을 감추려고 하고 세란은 동생에게 비밀을 감추려고 하면서 두사람은 방패의 각각 자기편의 한쪽빛만을 알고 건너편의 남의 빛은 모르고 있는 장님이었던 것이다. 장님은 자신이 없고 염려가 깊은 법이어서 두 사람의 대담하지 못하고 활달하지 못한 태도는 그 서로의 흠질을 가지고 있는데서 왔다. 세란과도 비밀을 가지고 미란과도 비밀을 가진단 한 사람 단주만이 두 사람의 비밀의 열쇠는 자기의 손아귀에 쥐고 있다는 듯이 두 사람에게 대해서 자랑을 보이고 은근히 위협을 하면서 기세를 올리는 것이다. 세 사람 속에서는 그만이 가장 유식하고 자랑스럽고---사람의 자리가 아니라 조물주의 입장에 서있는 셈이다. 두 사람을 한꺼번에 마음속에 거느리고 지배하고 운전하면서 활개를 펴고 뿜을 내는 셈이었다.
 
132
"나를 다시 업신만 여겨봐라……."
 
133
세란의 부축으로 힘을 얻은 단주는 미란을 한 겹 더 엎어 씌운다.
 
134
"중병이나 하는 듯 꿍꿍거리면서 가짜의 표정을 꾸미구 어쩌다 남을 올 개미 씌워 가지구는 지금 와서 천하나 잡은 듯이……"
 
135
미란은 불같이 퍼붓다가 세란의 앞임을 깨닫고는 정신을 차리면서,
 
136
"다시 내게 말을 걸었다봐라. 대꾸를 해주니까 괜 듯만 싶어서---"
 
137
"아니 왜들 ---"
 
138
세란의 말리는 소리를 옆 귀로 흘리면서 고개를 뽑고 눈을 부르대고,
 
139
"부루한 것!"
 
140
외치고는 대청을 뛰어나가는 미란이었다. 집이 굴석 같으면서 잠시도 머 물러 있기가 거북하고 싫다. 종종걸음으로 뜰을 헤치고 문밖에 나서서는 그 모양 그대로 내달았다. 거리에서 그를 용납하는 곳은 어디이던가. 연구소밖에는 없다. 그러나 그날은 연구소에도 괴변이 일어나 있었다.
 
141
전차를 타고 걷고 했으나 가라앉지 않는 마음에 조금 번잡스런 시늉으로 연구소의 문을 열었을 때 의외의 광경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은 듯 벌어져 있었다. 만약 방안에 영훈 혼자만이 있었던들 미란은 문을 열자마자 뛰어들 어가면서 그날만은 기어코 그에게 달려들어 분한 마음을 하소연하고 애정을 구했을는지 모르는 것이며 미란은 그것을 마음속에 원했던 것이다. 그런 것 이 방안의 공기는 의외의 긴장을 띠어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영훈의 옆에 가야가 앉아 있는 것이요, 그 열으로는 알지 못하는 초면의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근골이 장대한 그 위장부는 아무리 보아도 연구생의 한 사람인 듯싶지는 않았다. 이름난 스포츠맨의 한 사람일 듯--- 스포츠맨이란 생각에서 미란은 가야의 약혼자 갑재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났고 말을 듣는 동안에 그 관계라는 것은 급속도로 험악해 갔다. 영훈과 가 야와는 달라 갑재는 미란의 출현을 그다지 대수롭게 여기지도 않고 주의도 안 하면서 담판을 계속해 가는 것이다.
 
142
"……음악이란 간판이구 낚시인 셈이지."
 
143
그 전에 얼마나 많은 말이 오고갔는지 벌써 말은 단순한 말이 아니고 싸움의 쟁기였다.
 
144
"세상에 음악기라는 위인들같이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을까. 저를 위한 음악이 아니구 세상에 보이려구 하구 세상을 놀래려구 하기에 급급한 그런 것이 요새 음악가가 아니구 무언구."
 
145
"당신들 체육가두 자기를 위해서 체육하는 게 아니구 세상에 보이려구 하는 것인가. 펄쩍펄쩍 뛰면서 세상을 놀래려구---그처럼 무의미하구 쓸데 없는 짓이 또 있을까."
 
146
영훈의 대꾸에 체육가는 불근하고 혈기를 돋구면서,
 
147
"간판을 걸구 왜 사람을 모으는 것야. 꽃에 나비 Ep 모아들 듯 거리의 달뜬 것들을 휩쓸어다간---."
 
148
그 달뜬 남녀들의 한 사람이 거기에도 있지 않느냐는 듯 그제서야 갑재는 미란을 멸시하는 눈초리로 흘끗 바라본다.
 
149
나비야 모여들든 " 말든 꽃은 꽃대로 있는 게지. 나비 위해 있는 꽃인가."
 
150
영훈의 목소리에 비기면 갑재는 아우성을 지르는 셈, 말끝마다 어성이 높아졌다.
 
151
"그래두 뻔질뻔질하게 대꾼가.---멀쩡한 사람을 후려낸 건 누구냐. 허구 한날 집을 떠나 여기 와 백히게 하구. 유인이 아니구 무어야."
 
152
"약혼자의 일건을 자기로서 처리를 못하구 이 법석을 하는 당신이 얼마나 부끄럽구 어리석은 줄을 모르나. 약혼자에 대해서 당신 이상으로 알 사람이 누구란 말야. 자기를 모욕하구 약혼자까지를 모욕하는 셈이지."
 
153
가야에게는 과흑했을까. 그러나 영훈은 자기의 입장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거기까지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야는 고개를 숙이고 울고 있지나 않 는가도 싶었다. 미란에게는 그 분위기가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람의 감정을 짓밟고 신경을 장작개비로 짓쑤셔 놓는 듯한 그런 야만스런 분위기였다. 그의 날카롭고 미묘한 감정은 실오리같이 헝클어졌다. 그러나 그 정도쯤을 야만이라고 생각한 것은 미란의 오산이었다. 참으로 야만이 온 것이다. 갑재의 자태는 육신이며 말투가 미란으로서 보면 그대로가 감정의 교육이라고는 받지 못한 야만인의 그것이었다.
 
154
"그래두 어느 때까지 사람을 농락할 생각인가."
 
155
"당신 약혼자를 사람으로 여기구 하는 소린가 그게."
 
156
영훈의 말이 떨어지자 가야는 자리를 차구 벌떡 일어섰다.
 
157
"좀 그만들 둬요 제발."
 
158
눈은 누구를 모는 것일까, 초점이 흩어졌고 얼굴에는 눈물이 어리어 보인다. 방안의 그 무거운 공기를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문께로 휭하니 걸어갈 때 그의 뒤를 잇는 듯 선뜻 자리를 일어선 것이 갑재였다.
 
159
"이 염치없는 것. 남의 일을 죄다 틀어놓구."
 
160
거대한 몸짓으로 다짜고짜로 달려들면서 영훈의 멱살을 쥐어 잡았다.
 
161
"주먹이 떨릴 때 그까짓 말이라는 게 무슨 소용 있는 것이냐. 이것이 체 육가의 버릇이라. 어디 대답을 하려거든 얼마든지 해보렴."
 
162
미는 바람에 영훈은 나뭇가지같이 해깝게 뒷걸음질을 쳐서 들창기슭까지 릴려가고 말았다. 미란이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고 주먹을 쥔 것은 물론이 요 문을 렬려던 가야도 선뜻 돌아서면서 걸음을 멈추었다.
 
163
그것이 야만이었던 것이다. 사랑의 감정은 아무리 진보되어도 야만과 그다지 거리가 벌지 않은 까닭에 스스로 야만을 부르고 요구하는 것일까.
 
164
사내들의 싸움을 보지 못했던 미란에게는 별안간에 벌어진ㄴ 그 한 장면이 진저리가 났다. 공격하는 갑재와 당하는 영훈은 별것 아니라 야만과 문명과 의 대립이었다. 야만의 힘이 눈으로 보기에는 항상 사나운 것이어서 그만큼 그 대립의 꼴은 보기 민망하고 안타까웠다. 미란은 마음이 아파지면서 그런 꼴을 보게 된 것을 불행히 여겼다. 그날은 흡사 싸움의 날 같아서 집에서 단주와 다투고 나오자 또 그 정경이다. 그러나 사내끼리의 그 싸움에 비기 면 단주와의 옥신각신쯤은 아무것도 아닌 듯 그만큼 미란이 받은 충동은 컸다.
 
165
"해결의 방법으로 이렇게 빠른 건 없거든.---강다짐이든 무어든 맹세를 받을 수 있는 건 이 방법 뿐이야."
 
166
"완력으로 해서 이긴다구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건 없어, 맘껏 해보렴."
 
167
"맘만 살아서 힘이 얼마나 장하다는 걸 모르구……."
 
168
그것이 야만이었던 것이다. 사랑의 감정은 아무리 진보되어도 야만과 그다지 거리가 멀지 않은 까닭에 스스로 야만을 부르고 요구하는 것일까. tso들의 싸움을 보지 못했던 미란에게는 별안간에 벌어지는 그 한 장면이 진저리가 났다. 공격하는 갑재와 당하는 영훈은 별것 아니라 야만과 문명과의 대립이었다. 야만의 힘이 눈으로 보기에는 항상 사나운 것이어서 그만큼 그 대립의 꼴은 보기 민망하고 안타까웠다. 미란은 마음이 아파지면서 그런 꼴을 보게 된 것을 불행히 여겼다. 그날은 흡사 싸움의 날 같아서 집에서 단주와의 옥신각신쯤은 아무것도 아닌 듯 그만큼 미란이 받은 충동은 컸다.
 
169
"해결의 방법으로 이렇게 빠른 건 없거든.---강다짐이든 무어든 맹세를 받을 수 있는 건 이 방법 뿐이야."
 
170
"완력으로 해서 이긴다구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건 없어. 맘껏 해보렴."
 
171
"맘만 살아서 힘이 얼마나 장하다는 걸 모르구……."
 
172
무서운 짓이었다. 갑재는 참으로 자기의 힘을 자랑하는 듯 육중한 몸으로 영훈을 깔아 버린 것이다. 영훈은 창 기슭에 머리를 뉘이고 내려 덮이는 힘을 막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나 졸연해 그 힘을 물리칠 수 없을 뿐이 아 니라 바위 밑에 눌린 자라같이 일신이 괴로워 가고 급해 갈 뿐이다. 미란과 가야는 그런 급한 경우에도 어쩌는 수 없이 한참 동안이나 주먹만을 쥐고 서 있는 수밖에는 없었으나 참으로 경우가 긴급해졌을 때 거의 본능적으로 새우들 싸움에 한몫 참가하게 되었다. 갑재가 여전히 부락스럽게 힘을 쓰는 바람에 깔린 영훈은 멱살을 들리운 채 열린 창밖으로 머리가 밀려나간다.
 
173
창밖은 바로 뒷골목 거리로서 이층이나 땅 위까지는 눈이 한참 내려간다.
 
174
갑재는 흥분된 판에 무슨 짓을 할는지 모르는 것이요, 영훈의 몸은 한마디 거역도 없이 점점 밀려나가고 있음을 볼 때 가야와 미란은 무언증에 반사적으로 달려들었다. 미란에게 대해서 갑재는 대체 무슨 뜻을 가지는 것일까.
 
175
내 편도 아니거니와 원수도 아닌 것이다. 가야의 존재를 의식에 둘 때 원수 라기보다는 되려 그 반대의 것이 아닐까.---이런 반성이 있을 겨를이 없이 가야가 화병을 들고 나섰을 때 미란은 엉겁결에 보면대의 니켈 몽둥이를 집어들고 가야와 합력해서 갑재의 뒤통수를 겨누었던 것이다. 영훈의 몸을 빼려면 갑재의 힘을 깨트리는 수밖에는 없었고 여자의 손으로서는 물건의 힘을 빌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를 모질게 얻어맞고 의외의 강적의 출현에 놀라 흘끗 돌아 본 갑재는 그 분풀이를 영훈에게 하려는 듯 더욱 사나워 갔다. 미란과 가야는 이어 교자와 책들을 집어 들고는 갑재를 박살해 버리려는 듯 후려 갈겼다. 요행 공을 이루었게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던들 영훈의 몸은 일순에 창밖으로 떨어졌을는지 모른다. 갑재가 흠! 소리를 치면서 휘 전휘전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주저않았을 때 두 여자는 달려들어 영훈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충혈된 얼굴이 홍당무같이 발갛고 눌리었던 목은 숨이 차은 듯이 맥이 쇠진한 채로 그 자리에 주저않아 버리는 것이다.
 
176
"……전 전 무어라구 할말이 없어요."
 
177
가야는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고 미란도 목안이 달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싸우고 난 두 사내의 승패는 대체 무엇이었던가. 함께 쓰러져 버리고만 두 사람을 둘러싸고 미란과 가야는 애닯고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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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패는 상반이라고 하더라도 육체의 힘에 농락을 당한다는 것이 모욕중에서도 얼마나 큰 모욕인가. 세상에서 싸움하는 꼴같이 그것도 한편이 기울어져 꼴같이 보기 흉측하고 참혹한 것은 없다. 몸서리가 치고 진저리가 나는 ---그보다도 더 추한 광경은 없을 성싶다. 면상을 짓찟기고 힘에 굴욕을 당하고 있는 영훈의 모양을 볼 때 미란은 부끄러운 생각에 얼굴이 달아지고 귓불이 빨개졌다.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을 제일로 치고 그것을 위해 살고 그것을 찾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고 있는 영훈의 감정을 그 모욕이 얼마나 상하게 하고 아픈 상처를 주었을 것인가. 활촉에 날개를 상한 비둘기같이 얼마나 면목이 없고 가슴이 떨릴 것인가. 생각할수록에 슬픈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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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으로 싸움이 거기에서 그쳤기 말이지 갑재가 폭력을 더 써서 목숨에까지 불행한 결과를 끼쳤더면 무슨 꼴이었을까 생각할 때 미란은 그날을 흉한 날이라고 거듭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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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말없는 싸움이 공연히 각 사람의 가슴속에 상처만을 남기고 그중에서도 미란에게 특별히 한 고패의 슬픔을 더하게 한 것은 그 일이 있은 이튿날로 돌연히 영훈의 자태가 거리에서 사라졌음이다. 연구소와 학교는 물론 거리의 웬만한 곳을 샅샅이 들쳐보아도 자태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간 것이었을까. 한마디의 말도 없이 사라졌다. 싸움에서 받은 부끄럼이 그렇게도 컸던가. 며칠 동안의 간단한 여행을 떠난 것인지도 모르기는 하나 한편 행여나---하고 불길한 예측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하기는 학교도 이미 여름 휴가를 잡아든 것이므로 피서를 겸해 그 기회를 타서 산속이나 바닷가에 가 있음직한 것이 가장 적당한 추측인 것이요, 미란은 그러기를 마음속에 원해도 보았다. 영훈이 거리에 있을 때에는 마치 책상 위에 늘 놓여 있는 화병같이 기쁘기는 해도 심드렁하던 것이 일단 그가 자취를 감추었을 때 그에게 대한 생각이 간절하게 솟아올랐다. 이제는 벌써 한 사람의 스승에 대 한 사모가 아니요, 그 이상의 애끊는 그리움이었다. 피아노 앞에 앉아도 건반의 한구석이 떨어진 것 같은 헙헙한 회포가 솟았다.
【원문】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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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효석(李孝石) [저자]
 
  1939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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