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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분(花粉) ◈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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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이효석
 

1. 2

 
2
그날부터 세란에게는 이상한 역할이 시작되었다. 어제까지는 가장 가까웠던 미란이 오늘에는 가장 멀어진 것 같고 그의 육체는 모나리자의 표정같이 알지 못할 수수께끼로 변했다. 하나의 비밀을 가지게 된 미란의 자태가 세란의 호기심을 완전히 흡수하며 그 비밀의 내용을 밝히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충동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3
"짜장 그럴까. 그렇지 않을까."
 
4
의심이 바늘 끝같이 가슴속을 따작거리면서 한시도 동생의 몸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는다.
 
5
"내게 확실히 말 못할 것이 있지.---그야 형제간이라구 다 말할 수 있는 법 아니지만."
 
6
"아무리 그래두 언니 속이는 건 없어요."
 
7
"속이건 말건---내가 무언 모를 줄 알구."
 
8
"제발 그렇게 쏘아붙이지 말아요. 흡사 탐정의 눈초리 같으니."
 
9
미란은 이 며칠 동안의 언니의 눈을 사실 싫은 것으로 여겨왔다. 지금 얼굴을 매만져주면서도 자기가 눈을 감고 있는 동안 얼마나 자기의 몸을 샅샅이 살피고 있을까를 생각하면 께름하기 짝이 없다. 도대체 오늘 다따가 계란 화장법을 권한 것부터가 그런 심산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얼굴의 주름살을 펴는데 직효가 있다는 계란 화장법을 세란은 오래전부터 계속해 오는 터이다. 아직 주름살 걱정을 할 것 없는 미란에게 오늘 그것을 굳이 권해 지금 무릎 위에 미란을 눕히고 얼굴 위에다가 온통 겹겹으로 계란 풀칠을 해주는 것이 도시 그런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번듯이 누워 얼굴을 드러내 놓고 주무르는 대로 맡기고 있는 자기 꼴이 어리석은 것같이도 발 같이 느껴지면서 전신의 신경이 선득선득 곧 서는 것이다.
 
10
"……닭을 본 일이 있지 왜.---울 아래 한 자웅을."
 
11
무슨 소리를 또 하려나 하고 미란은 얼굴이 근실거린다. 계란을 한 덕지 바르고는 속히 마르도록 부채질을 하는 까닭에 얼굴 살은 삽시간에 팽팽하게 죄여들면서 근실근실 가려워진다.
 
12
"아이들이 닭싸움이라구 겁을 먹구 뛰어드는 바람에 나두 처음엔 싸움인 줄만 알지 않았겠니. 두 마리가 고함을 치구 법석을 하는걸 보면 정말 싸움이나 하는 것 같더라. 사랑은 싸움---평범한 말이나 사랑은 싸움이란다."
 
13
뿌더뿌더 마른 얼굴 살이 활같이 바짝 당겨져서 힘줄 하나 움직여지지 않고 계란 흘러내린 귓불이 근실거릴 따름이다. 성을 낼래야 웃을래야---얼굴 살이 문 창호지 같이 팽팽한 것이다.
 
14
"수탉이라는 것이 워낙 부락스러워서 암놈만 가엾거든. 날개를 푸득이구 거역을 해봐야 헛일이구 고생고생 욕을 당하구야 마는걸. 사랑이 아니구 싸움. 지배를 받구 모욕을 받는 것이 암탉의 운명인지두 모르지."
 
15
마른 얼굴에다가 이번에는 누른 자위를 바르기 시작한다. 얼굴이 선득차 지면서---비로소 긴장이 풀리며 제살 같은 감각을 회복해 간다. 떴던 눈을 다시 감았을 때 세란은 언제까지나 말을 이어간다.
 
16
"…… 무어라구 할까---흡사 가위에 눌린 격. 꼼짝달싹 못하고 겁만 먹구 있는 동안에 지내 가는 소낙비같이 휩쓸어 가지구 달아나는---"
 
17
무릎 위에 누운 미란의 찬란한 육체를 환상하면서 세란은 제 스스로의 흥분을 못 이켜 얼굴이 우렷이 달아간다. 그 아름다운 육체가 과연 이미가위에 눌리운 것일까 어떤 것일까 하는 의혹이 불같이 치민다. 단순한 호기심인지 그렇지 않으면 단주를 두고 나오는 질투인지 자기 스스로도 알 수 없는 허황한 충동이었다.
 
18
"최면술을 걸라는 생각이지만--- 괜히 헛수고하세요."
 
19
눈을 뜨고 언니를 쳐다볼 때 상기된 얼굴에 빛나는 눈으로 내려누르는 품이 흡사 꿈속에서 보는 가위 같은 생각이 들면서 미란은 겁이 버럭 난다.
 
20
"걱정하기보다두 낳기가 쉽다구 처음엔 겁이 나두---"
 
21
징긋이 윽박아 드는 언니의 얼굴에 소름이 치면서 미란은 벌떡 몸을 일으킨다.
 
22
"언니 하는 소리가 도무지 내 귀엔 경 읽는 소리예요."
 
23
"그러게 솔직하게 실토를 하라니까."
 
24
"없어요."
 
25
화를 내면서 수선스럽게 문을 열고 목욕실로 세수를 하러 들어가는 미란의 뒷모양르 보고는 세란은 사실 처녀의 마음을 믿어야 옳은지 안 믿어야 옳은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헐하게 믿어버리기에는 너무도 미묘한 처녀의 마음인 것이요, 믿지 않기에는 너무도 가엾은 어제까지의 순직하던 동생인 것이다. 흑인지 백인지 하룻밤 사이의 변화조차도 알 수 없는 미묘한 자연의 조화를 세란은 야속히 여기면서 머리 속이 혼란해만간다.
 
26
부엌에서는 사과 삶는 냄새가 흘러오며 사과밀이 거의 되어가는 모양이었다. 세란은 유난스럽게 사과밀을 즐겨해서 옥녀의 알뜰한 솜씨로 삐는 때가 없었다. 유리접시에 담긴 식은 사과밀이 차와 함께 방에 날라 왔을 때 세라 은 장난의 심사를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또 다른 꾀를 생각해 낸다. 미란의 접시에 초를 두어 방울 쳐서는 탁자 위에 살며시 올려 놓은 것이다. 요량으로는 미란의 신경을 시험하자는 것이었다. 어리석다고는 오늘의 자기의 마음은 자기로도 헤아릴 수 없는 세란이었다.
 
27
목욕실에서 나온 미란은 식탁 앞에 주저앉자 목이 마른 김에 익은 사과 조각을 한입 넓적 물었다가 금시에 낯을 찡그리며,
 
28
"무슨 놈의 사과밀이 이 모양이다. 돌배두 아니구."
 
29
접시 위에 게우며 들었던 포크를 던져버린다.
 
30
"옥녀야. 너 이러기냐."
 
31
죽을 것이 옥녀이나 그러나 옥녀가 달려오기 전에 세란이 가로채어서,
 
32
"사과 맛이 원래 단 것이라더냐. 이가 곱고 눈이 감겨질수록 좋은 것이지."
 
33
"언니 장난이구먼."
 
34
화를 내면서 경대 앞에 다가앉으며 화장병을 함부로 손찌검한다. 거울에 비취인 얼굴이 계란의 덕으로 종이같이 팽팽하고 윤택이 흐르기는 했으나 석류알같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35
같은 때 세기영화사 사무실에서도 현마는 세란과거의 같은 역할을 단주에게 대해서 하고 있었다. 책상 맞은편 단주를 바라보면서 현마는 문초나 하는 듯이 엄하다가도 목소리가 금시 부드러워지곤 한다.
 
36
"행여나 무슨 일이 있을까 해서 데려오란 것이지 같이 영화구경을 하구 아파트에서 밤을 지내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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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삠을 하러 간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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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우의 밤이란 일상 위험한 것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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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했으면 그만이죠."
 
40
"무섭지들 않았단 말이야."
 
41
"무섭기에 가만히들만 있었죠. 심호흡을 해봐두 위스키를 먹어봐두 손바닥에 땀이 나면서 몸이 덜덜 떨리는걸요. 도랑을 잘못 건너뛰다가 언덕을 채 디디지 못하고 종아리를 상하구 물에 나빠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가슴을 누르면서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있어야죠. 밤새도록 잠 한숨 오지 않구……"
 
42
비유 속에서 거짓 없는 진실을 들을 수는 있었으나 그러나 하룻밤 사이에도 몇 치씩을 자라는 소년의 마음을 그 자리에서 믿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라고 현마에게는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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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아이들은 숙성하고 엉큼해서 속을 좀체 알 수가 있어야지."
 
44
솜털이 아니고 까마잡잡하게 자라나는 풋수염을 단주의 코 아래에 보면서 현마는 신기한 생각이 들며 볼 동안에 자라가는 것이 문득 두려워도 진다.
 
45
어느 결엔지 자라서 어른이 되어서는 어른의 악덕을 배우고 우주의 비밀을 샅샅이 알고야마는 그 인생의 생장의 법칙이 두려워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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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특출한 한 사람만이 장구히 그 세상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요, 차례차례로 대를 이어가고 꼬리를 물어가는 그 자연의 법칙에 현마는 오는 알 수 없는 일종의 질투조차 느끼게 되었다. 단주들이 자기의 세상을 뺏고 들어앉게 될 때 자기는 벌써 그 자유롭던 세상을 하직하고 물러서지 않으면 안되는 그 운명적인 신세를 깨달음에서 오는 두려움이요 질투인 것일까. 도랑을 사이에 두고 겁만 먹고 손에 땀을 흘렸다고는 하는 도랑을 건너뛰는 것은 순간의 서술이다. 약차하면 숙성한 단주가 그날 밤을 경계로 감쪽같이 국경선을 넘어 이미 이 나라에 한발을 들여놓은 것이나 아닐까--하는 의혹이 그 두려움과 질투 속에서 여전히 솟는다.
 
47
담배를 뽑아서 피우면서 단주에게도 권하니 그도 제법 익숙한 손맵시로 불을 붙여서는 입에 문다. 연기가 코와 입에서 새어 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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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입에서 나오는 자색 연기가 흡사 산골짝에서 도룡뇽이 뽑는 안개같이 볼 동안에 방안에 차지며 공기를 흐려 버린다.
 
49
구석 책상에 일없이 앉아 있는 어린 여급사 애영의 눈에는 연기를 뽑는 두 사람의 자태가 신기하게만 보인다. 쓰고 떫은 담배라는 것을 왜들 피울까, 담배를 피워야만 어른된 표정이 나고 어른된 체면을 갖출 수가 있는 것일까---어린 마음에 의혹이 솟으며 차라리 어른이 못되면 못되었지 제아무리 귀한 것을 준대도 자기는 담배를 먹게 되지 않을 것을 생각하며 유난스럽게 단주에게로 눈이 간다. 손가락 사이에 흰 권연을 날씬하게 든 맵시며 입술에다가 주제넘게 비스듬히 무는 격식이 제법 어른 이상으로 능란한 것 이면서도 먹는 품이 현마같이 흡족하고 대담하지 못하고 겨우 입안에 연기를 한 모금 머금어서는 멋지게 흡연을 하는 법도 없이 그대로 뿜어 버릴 뿐이다 겁이 나는 탓일까 .. 그렇다면 아직도 애숭이요, 현마 같은 어른이 못 되는 것일까. 모양만이 어른이지 실속은 아직도 아이인 것일까.---의심하면서 보고 있는 동안에 단주는 별안간 재채기를 하면서 쿨룩쿨룩 기침을 짓기 시자하는 것이 아닌가. 어른 흉내를 내서 흡연을 하다가 객긴 것이다. 눈물을 흘리고 허리를 구부리면서 책상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설레는 것을 보고는 애영은 모르는 결에 웃음이 터져 나오며 깔깔깔깔허리가 꺾어진다.
 
50
"지질치두 못하게 원 연기에 객겨서 이 야단이야."
 
51
현마도 데 설 데설 웃으며 조롱하는 듯이 그 꼴을 바라보는 것이나 간주는 아마도 호되게 객긴 듯이 체면도 눈치도 없이 법석을 대며 좀체 기침이 멎지 않았다. 처음에는 싸다고 생각하던 애영도 그 괴로워하는 꼴을 보고는 차차 동갑을 대할 때의 가엾은 생각이 솟았다.
 
52
단주와 미란을 대하는 현마와 세란의 태도가 지나쳐 되고 까다로웠던 탓인지도 모른다. 책망했다가 달랬다가 마치 탐정 같은 눈초리로 밤낮으로 노리우고서야 마음이 편할 리도 없었거니와 그 귀찮은 눈치 속에서 단주와 미란은 말없는 동안에 자유의 나라를 구하게 되고 반역의 마음을 기르게 되어서 드디어 그 계획을 세웠던지 모른다. 허물없는 숲 속을 쑤셔 불을 질러놓은 셈이었다. 계획이 발각되었을 때 현마와 세란은 크게 놀라며 처음으로 불찰을 느끼기 시작했다.--- 며칠 지난 때였다. 현마는 새로 배급해야 할 영화의 선택, 선전 등의 일로 별안간 분주해져서 그날은 거의 아침부터 오후까지 움직이지 않고 사무실 책상에 붙어 있었다. 아침에 잠깐 나왔다 간 간 후로는 낮이 지난때까지 얼굴을 보이지 않는 단주의 태도가 그날만은 현마에게도 수상스럽게 여겨졌다. 침착을 잃고 서먹서먹해하다가 볼일이 있다고 다시 나가서는 급한 일이 많건만 안 돌아오는 것을 의아해하고 있을 때에 세란에게서 전화가 오기를 아침에 집을 나간 미란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으니 흑사무실에나 들지 않았느냐는 질문이었다. 현마는 의혹이 덜컥 나며 뒤미처 아파트에 전화를 걸었 으나 단주가 없을 뿐 아니라 사무원의 대답이 행장을 차리고 트렁크를 들고 방을 나간 지가 벌써 두어 시간이나 되었다는 것이었다. 뜨끔해지면서 기어코 또 일들을 치나 보다 하고 기차시간표를 훑어보나 임박한 차시간은 없다. 궁금한 마음에 자리에 앉아 있을 수도 없어 가지가지 궁리에 잠기면서 거리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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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전 단주가 사무실을 다녀서 아파트로 돌아갔을 때 방에는 미란이 기다리고 있었다 행장이래야. 그닷한 것이 없었으나 두 사람은 한 짝의 트렁크 속에 필요한 것을 주섬주섬 넣기 시작했다. 약속은 여러 날 전에 된 것이었고 그렇게 된 마음의 시초는 이미 폭풍우의 밤부터 시작되었다. 그날 밤의 두려운 마음, 차지 못하는 마음을 현지의 피차의 환경의 탓으로 여기 고 그 환경의 굴레를 벗어나서 자유로운 나라를 구하고 그속에서 인ㅅㅇ의 문을 열었으면 하는 생각이 두 사람 마음속에 똑같이 싹텄던 것이다. 안타깝고 두려운 마음이 두 번째 반역으로 변한 셈이다. 수풀 속 으늑한 그림자 속에 사랑의 자리를 찾자는 것이다. 인생의 첫 문은 그렇듯 두 사람만의 안온한 사랑의 자리를 찾자는 것이다. 인생의 첫 문은 그렇듯 두 사람에게는 무섭고 어려운 고패인 모양이었다. 할 바를 몰라 몸들이 무겁고 머리 속이 탁하고 알 수 없이 조금들 슬프고 그러면서도 신경이 날카로워진 그들에게 있어서 한 트렁크 속에 두 사람의 세간을 주섬주섬 수습하는 것이 여간 범상한 일이 아니고 신성하고 경건한 경영인 듯---그렇게 그들의 자태들은 유괘하고 명랑하다느니보다도 무겁고 침통한 것이었다. 세간이래야 급한 판에 알뜰하게 갖출 수는 없었고 몇 벌의 옷가지와 화장품과 공동으로 쓸 수 있는 책권과 거울 등속이었다. 공동으로 쓸 수 있는 것이라면 이외에도 가령 속잠방이 같은 것---잠방이는 양말이나 구두와는 달라서 눈에 띠이지 않는 것이라 공동으로 쓴댔자 무망한 비밀인 것이다---단 한 짝의 트렁크라 될 수 있는 대로 공동으로 쓸 것을 넣는 것이 피차의 공덕이었다.
 
54
"이것두 넣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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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란은 지녔던 돈지갑까지를 트렁크 속에 던진다. 여행권을 사고 난 나머지의 노자가 들어 있는 그 지갑도 말하자면 두 사람 공동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미란은 말할 것도 없이 그 비용의 전부를 세란의 핸드백 속에서 들쳐 낸 것이요, 단주는 현마의 품 속에서 찾아낸 것으로 결국은 한 줄기에서 나온 같은 돈인 까닭이다. 단주는 현마를 의지하고 미란은 세란을 의지 하고 그 세란은 다시 현마에게 붙어서 결국 집안의 세사람이 모두 현마라는 커다란 나무줄기를 토대로 해서 뻗어 오르고 자라나는 셈이 아니든가. 그 현마의 넓은 나무 그림자 속에 숨어서 조그만 계획들이 있고 비밀이 있고 음뫄 생겨 나가는 것이 아니든가. 그들 네 사람이 꾸미고 있는 그 한 폭 나 무의 그림자와 분위기라는 것은 세상에서도 야릇하고 신비로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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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장이 되었을 때 단주와 미란은 아파트를 나와 마치 산보나 하듯 느릿한 걸음걸이로 백화점을 행했다. 백화점 아래층에 투어리스트 뷰어로가 있는 것이요 이미 동경으로 . 가는 항공권을 산 그들은 거기서 비행장으로 가는 자동차를 타면 그만인 것이었다. 시간의 여유를 이용해서 살 것을 더 갖추 고 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후 비행장으로 향한 것은 떠날 시간이 거의 임박해서였다. 기차 편을 버리고 하필 비행 편을 고른 것은 젊은 모험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동방비행---처음에는 그 엄청난 생각에 눈이 돌았으나 이미 모험의 첫걸음을 내디딘 그들에게는 그것이 금시 신기한 자극으로 여겨지면서 자기들의 그 기발하고 천재적인 착상이 얼마나 평범한 세상 사람들을 놀래며 현마와 세란의 눈을 감쪽같이 속일 수가 있을까를 생각할 때 두려움과 흥분과 자랑으로 마음속이 그득 차지는 것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 오름은 확실히 흡연을 하는 이상의 대담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니 만약 동방비행에 성공만 한다면 두 사람이 지금껏 두려워하고 주저해 오던 인생의 문도 손쉽게 열 수 이으리라는 벌판 한구석에 서서 때마침 신경에서 날아오는 여객기의 은빛 날개를 우러러볼 때 두 사람의 가슴속을 알 수 없이 술렁거렸다.
 
57
거리로 나온 현마는 웬만한 찻집과 두 사람이 감직한 곳을 몇 군데 들치고는 그 길로 정거장에 나갔으나 그림자가 보일 리는 만무했다. 식당에 들어가 차를 청해 놓고는 아득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맞은편 벽에 걸린 항공 우편의 포스터가 눈을 끌었다. 창공을 날아가는 비행기의 그림이 신선한 생각을 일으키며 홀연히 한 가지 생각을 뙤어 주자 아까 사무실 단주의 책상 서랍 속에서 집어낸 여행 시간표가 또한 바로 항공편의 페이지를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 아울러 기억 속에 소생되면서 그 두 가지의 부합이 현마에게 한 줄기 광명을 주었다. 차를 먹은 둥 만 둥 뛰어나가 시간표를 살피니 동방비행의 시간이 바로 임박해 있는 것이다. 두말없이 택시로 비행장을 향했다. 일종의 영감이라고 할까. 눈앞을 도망치는 한 자웅의 노루라도 추격하는 듯 알 수 없는 흥분으로 가슴속이 차졌다.
 
58
비행기가 착륙한 것과 현마의 자동차가 비행장에 닿은 것이 같은 시각이었다. 차창으로 막 와닿는 비행기의 모양과 잔디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의 조그만 그림자를 현마가 내다보고 있을 때 단주와 미란은 잔디를 밟으면서 요란한 폭음을 남기며 눈앞에 굴러와서는 비행기의 육중한 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선을 피우는 프로펠러는 씨근덕거리는 동물 같다. 비행기 전체가 혼을 가진 짐승임이 완연하다. 옛날 시인이 곤어라는 고기와 붕새라는 위대한 새를 상상하고 그 크기가 각각 수천 리가 된다고 허풍을 떨었으나 별것 아니다. 지금 눈앞의 기계체가 바로 그 붕새임을 느끼면서 수천 리를 날아오고 수천 리를 날아갈 그 기계 새가 좀 있으면 자기들을 후려차 가지고 갈 것을 생각할 때 신기한 감격이 생각면서 한편 무시무시한 모험의 감정이 전신을 스치고 흘렀다. 등뒤에 현마가 나타난 것이 바로 그런 때였다.
 
59
어깨를 스치어 뒤를 돌아다보고 단주는 깜짝 놀랐다. 우뚝 나타나 선 현마의 자태에 미란도 기급을 할 듯 몸이 움츠러듦을 느끼면서 돌아섰다. 바로 어깨 위로 유들유들한 얼굴을 들고 서 있는 현마의 꼴은 술래잡기를 할 때에 어느 결엔지 나타난 술래의 모양같이 혼을 뽑는다.
 
60
"놀랐지."
 
61
목석같이 서 있는 두 사람을 두 팔에 안을 듯 다가서면서 현마는 싱글싱글 웃는다.
 
62
"세상에서 나를 속이진 못해. 눈치가 귀신 같거든."
 
63
두 사람은 할말을 모르고 우두커니 바라볼 뿐이다.
 
64
"이런 법이 있나. 어린들의 승낙두 안 말구 제 맘대로들."
 
65
현마는 엄한 얼굴을 지녀도 보았다가 다시 누그러지면서 그들의 안색을 살핀다.
 
66
"사람이 졌을 때엔 어떻게 하더라. 이긴 사람의 명령대로 좇아야겠다."
 
67
아직까지도 마음이 살아 있고 꿋꿋한 것은 그래도 미란이었다.
 
68
"지긴 누가 져요. 여기서 이렇게 들켰다구 이주 진 줄 아니요. 천만에요."
 
69
"뽐을 내보면 뭣해. 손안에 든 쥔 걸. 공연한 수고를 끼치지 말구 솔곳이 투구를 벗구 칼을 버리는 법야."
 
70
꾸짖으려면 톡톡히 꾸짖어서 단속을 하는 법이 아니라 긴급한 때라도 미란들에게 대해서는 항상 이렇게 웃음 반 농 반으로 누그러지게 구슬려 오는 현마였다. 새삼스럽게 정색을 하고 위엄을 보이려고 해도 벌써 그른 것이 수염은 온전히 끄들리우고 있었던 것이다.
 
71
"귀찮은 집에는 안 들어갈 작정이예요. 이왕 나선 걸음에 바람이래두 쐬 여야지. 언니와 아저씨 집이지 왜 우리들 집인가요."
 
72
미란이 무심히 던진‘우리들’이라는 대명사에 현마는 귀가 번쩍 뜨이면서 위험하다는 생각이 불현듯이 들자 두 사람의 팔을 잡아 낚으며 뒷걸음을 친다.
 
73
"엉큼한 소리 말구 내 분부대로 좇으리나까."
 
74
현마는 비로소 소리를 높이면서 두 사람을 끌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75
이유와 사연을 말하고 표를 무르려고 할 때 밖에서는 비행기의 발동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미란은 발을 구르며 안타까워하나 어쩌는 수 없는 잡힌 몸이다. 별수없이 표는 물리우고 여객기는 두 사람의 낙오자를 대수롭지 않게 무시해 버리고 쏜살같이 달아나 버린다. 그 무례한 태도를 창으로 내다볼 때 단주는 인생의 굴레에서 밀리워 떨어진 듯한 모욕을 느끼면서 화가 버럭 나는 것이었다.
 
76
"자유를 이렇게 속박해요. 권리를 짓밟구.…… 창피해 못 견디겠네."
 
77
"자유는 무슨 자유야 주제넘게. 미성년에게 아직 그런 권리 없어."
 
78
현마는 맹랑한 단주를 핀잔을 주고 팔들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미란은 팔을 끌리우면서도 몸을 흔들며 어린아이 모양으로 투정을 부린다.
 
79
"대답하게 가두구는 바람두 못 쏘이게 하니."
 
80
"바람을 쏘이려거든 다음 기회는 없나 왜. 꼭 비행기가 맛이라면 내 타워 주지 않으리. 다음 번 동경 갈 때……"
 
81
뾰로통하고 빼진 미란과 얼굴에 심술의 빛을 가득 담고 게정을 부리는 단주와를 데리고 자동차 안에 앉았을 때 현마는 비로소 안심이 되면서 가슴이 놓였다. 인생의 낙제생들을 떨어 버리고 홀로 자랑스럽게 나는 여객기는 어느덧 하늘 멀리 멀어진다. 그것을 좇으려는 듯 자동차도 내닫기 시작했으나 단주와 미란에게는 여객기와 자동차의 거리가 벌써 만리 길이나 되는 듯 생각되면서 그 위대한 붕새는 아직 자기들로서는 다칠 수 없는 엄격한 영물 같이만 보이는 것이었다.
 
82
인생의 문을 열 계획을 세우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낙오해 버린 두 사람은 일단 반역하고 나온 집으로 다시 끌려 들어가는 수밖에는 없었으나 그 일건을 실마디로 이상한 관계가 생기게 되었다.
 
83
흥분되어 있는 두 사람의 마음을 식히고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당분간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서 서로 멀리하고 접촉이 없도록 경계하자는 것이 현마 와 세란 부부의 일치된 의견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맞갖치 않아서 짓부득이 트집을 쓰는 듯 사람이 그렇게 수월하게 언니들의 계획에 좇을리는 만무하므로 피차의 마음이나 가라앉거든 가꺼운 장래에 결혼을 숭낙해 주겠다는 약속을 미끼삼아 달래는 것이었으나 어떻든 두 사람의 마음을 어느 정도까지 설복시켜서 자기들의 뜻에 좋게 했을 때 공교롭게도 현마의 동경행의 일 건이 생긴 것이다. 새로이 봉절할 영화의 교섭의 용무가 일어난 까닭으로 현마의 여행이 긴급히 필요해진 것이다. 그것이 우연히 미란들에게 대한 계 책과도 일치되어서 두 사람을 당분간 가르기에는 마침 한 기회라는 것이 현마와 세란의 의견이었다. 미란의 마음이 더욱 달뜬 것 같으니 바람을 쏘여 주고 구경도 시킬 겸 현마가 맡아서 데리고 떠나고 남은 세란 혼자만의 집을 지켜주고 동무를 해줄 겸 단주는 아파트를 비우고 교외의 집으로 나와 있게 하자는 것이 또한 부부의 선후 없는 똑같은 희망이었던 것이다.
 
84
전날 비행장에서 가까운 기회에 소풍을 시켜주리라고 달랜 미란을 현마가 휴대하게 된 것은 거리낄 없는 자연스러운 일이었거니와 여자들만 남게 된 빈집을 사내붙이인 단주가 세란의 동무를 해서 지켜주게 된 것도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것이다. 부부도 물론 그닷한 생각과 주저가 없이 그거을 의론하고 결정한 것은 거의 그 당장의 일어었다. 단주와 미란 두 사람의 편으로 보면 어른들의 작정하는 일이니 좋고 싫고가 없이 그대로 좇아야 하는 것이요 당초에 계획했던 반역도 수포로 돌아가고 또다시 어른들의 굴레 속에 매이게 되는 것이었으나---이번에는 야릇하게도 그 어른들의 굴레 속에서 각각 인생의 걸음을 재촉하고 주름잡는 결과가 되는 것이었다.
 
85
처음에는 찌뿌득하던 미란도 막상 가벼운 행장을 차리고 나섰을 때에는 처음으로 긴 여행을 하게 되는 기쁨으로 유쾌하게 덜렁거리게 되었다.
 
86
"그렇게 차리구 둘이 나선 건 뚝 무엇 같을까. ‘세란의 웃음을 받아 가지고,
 
87
"무엇 같긴 무엇 같아요. 아저씨와 동생 같지."
 
88
"아저씨와 조카딸은 아니구.---얘기 속에 흔히 있는."
 
89
"망칙해라. 조카딸은 왜 조카딸예요. 그렇게 층이 저뵈나요."
 
90
"무난하게 사장과 비서라구 해두지. 다른 사람이 봐두 숭허물없게."
 
91
현마의 판단을 조롱하는 듯 세란은 미란을 바라보며,
 
92
"얘 비서같이 성가신 자리는 없다더라. 사장의 비위를 늘 맞춰야 하구 마음을 주면서두 속으론 쉴새없이 경계해야 하구."
 
93
결국 그 자리는 모두들 허물없는 웃음으로 돌리고 한 대의 자동차에 두 사람 두 사람씩 네 사람이 앉아서는 현마들을 보내려 비행장으로 향할 때 네 사람의 마음은 다 각각 제 계획에 즐겨웠다. 세란의 옆에 앉은 단주며 현마의 옆에 앉은 미란이며가 지난날의 안타까운 감정은 어느 결엔지 청산해 버린 듯 이제는 벌써 새 옷들을 입고 어른들의 손에 끌려 구경을 떠나는 아 이들같이 개운하고 심드렁해 보였다. 참으로 아이들답게 금시 주의의 목표 가 변하고 관심의 방향이 변해 버리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이란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94
비행장에 다다라 날아날 준비를 하고 섰는 여객기 앞에 이르렀을 때 미란은 문득 전날의 생각이 나면서도 그때의 알 수 없던 불안과 공포와는 다른 일종의 든든한 마음이 솟았다. 동방비행의 발명이 그때에는 한없이 천재적이고 기발하고 두려운 것으로 여겨졌었으나 이제 아저씨와 함께 그 앞에 섰으려니 날개를 푸득이는 그 위대한 붕새도 가장 익숙하고 범상하고 친밀한 것으로 보이면서 그때에 모욕을 받고 낙오를 당한 것쯤은 별반 분하게 여겨지지도 않는다 현마에게 . 의지하는 마음이 단주와 모험을 꾀했을 때 이상으로 오늘의 매력을 가져옴은 사실이었다. 현마의 뒤를 따라 날개를 밟고 새 가슴속에 몸을 간직했을 때에는 전날의 패배의 슬픈 기억은커녕 새로운 용기와 흥분이 솟으면서 전신의 피가 신선하게 수물거렸다.
 
95
밖에 세란과 같이 서서 미란의 자태를 우러러보는 단주는 어떻게 되다가 자기가 앉아야 할 자리에 현마가 대신 앉게 되었나 싶으면서 삽시간의 변화에 정신이 휘둘리며 한 줄기 섭섭한 감정이 없지는 않았으나 이역 옆에 서 있는 세란을 생각할 때 든든한 마음이 생기면서 알 수 없는 의지하는 생각으로 섭섭한 감정쯤은 말살하지 못한 배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세란은 낙오된 꼴을 가엾게 여겨 주는 듯 부드러운 시선으로 자기를 싸주는 것이 아니었던가. 미란의 물고기같이 파들파들한--- 그러므로 물고기같이 싸늘한 감각과 애정에 비겨서 세란의 그것은 따뜻하고 크고 너그러운 어머니의 정으로 신변에 흘러오는 것이었다. 미란과 현마는 그들 한패, 우리는 또 우리끼리 한패가 아니냐고 그의 부드러운 눈이 속살거리는 것도 같았다. 그토록 두 사람은 밀접하게 서서 집에 남는 사람으로서의 동정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사실 발동소리가 나면서 여객기가 막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 작별의 손을 저으면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현마에게는 어깨를 같이하고 나란히 서 있는 단주와 아내 두 사람의 사이가 너무도 밀접해 보이면서 문득 ---단주가 서 있는 자리가 바로 자기가 서 있을 자리라는 생각이 들며 자기 대신으로 들어선 단주의 꼴이 일순 자기 자신으로 보여 저것이 짜장 부부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번개같이 등줄기를 쳤다. 이 돌연히 엄습한 당돌하고 무서운 착각은 땅 위를 떠나 몸이 하늘 위로 높이 솟을 때까지도 그의 골 속을 휭하니 뒤흔드는 것이었다.
 
96
현마와 미란을 하늘 밖까지 떠내보내고 나니 세란은 짐을 벗은 듯 마음이 놓이며 그래도 얼마간 울가망해하는 단주를 한마디 달래주어야 할 책무를 느낀다.
 
97
"누가 일을 저지르라나 이렇게 되게. 잠자쿠 가만히만 있었으면야 장차는 결혼도 시켜주구 뜻대로 이루워주지 않았으리. 어려운 줄 모르구 섣불리 나서다가 이 꼴이 됐지. 어서 당분간 다 잊어버리구 마음이나 잡을 도리 생각할 수밖엔."
 
98
다시 거리로 들어갈 때 차 속에서 여전히 잠자코만 있는 것을 보면 어깨라도 치면서 정신을 일깨워주지 않을 수 없었다.
 
99
"과즉 열흘 동안이니 마음 풀어 버리구---그까짓 사내대장부가 무억 꼬물꼬물 그래."
 
100
사내대장부라는 말에 단주는 미상불 정신이 띄어지면서 세란을 비스듬히 내려다보며 가슴을 펴보았다 . 세란쯤은 넉넉히 정복할 수 있을 듯 숨었던 새로운 용기를 얻은 듯도 하다. 사실 차를 내려 나란히 서서 걸을 때 비록 몸은 가느나 키는 큰 단주는 세란의 목 위를 훨씬 솟아 그 비교에서 오는 일종의 늘름한 우월감이 의식 속에 솟기 시작하며 그 우월감이 전에 없던 한 가지 태도를 지니게 했다. 벌써 아이가 아니고 어른이요 어른이 여자를 동반했다는 의식이 은연중에 그런 태도를 가지게 한 것이었다.
 
101
식당에 마주앉아 식사를 할 때나 백화점에 나란히 서서 흥정을 할 때나 사람들은 그들 두 사람의 사이를 무엇으로 여겼을까. 부부로 보았을까, 형제로 보았을까. 부부라기에는 나이의 동이 뜨나 형제라기에는 사이가 지나쳐 자별스럽고 허랑해서 판단에 애썼을 것이 확실이다. 그 길로 영화사에 들렀을 때 세란은 주인 없는 사장의자에 덜석 앉아서는 호락호락 서랍을 들치며 책상 위를 살피고 하면서 단주에게서 여사장이라는 칭호를 듣다가 문득 여사장이 격에 맞지 않는다고 그 자리를 단주에게 사양하고 자기는 단 주의 자리를 차지해도 본다.
 
102
"그래두 사내붙이가 다르긴 달러. 그 자리에 앉으니 제법 사장감인데."
 
103
현마의 자리에 앉은 단주의 자태가 제자리에 앉았던 단주와는 다르게 일종의 위엄을 띠인 것을 세란은 보며 그에게도 결국 남편의 자리를 주면 별 수없이 남편같이 보이게 되는 요술을 신기한 것으로 여겼다. 두 사람의 수다스러운 변덕을 옆에서 바라보는 여급사 애영에게도 오늘의 단주의 자태는 전에 없이 어른다운 것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현마가 아직 사에 나오지 않을 때 단주 혼자만이 있을 적에 그는 흔히 현마의 안락의자 앉아서는 몸을 좌우로 틀었다 문서를 들척거렸다 하면서 애영에게 차를 가져오라고는 소리를 지르기가 일쑤여서 그 되지 않은 아이다운 모양에 애영은 웃음이 터지곤 했으나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의 그의 자태에는 의젓하고 그럴듯한 데가 보였다. 세란이 그와 마주앉게 되어 그 젊은 자태와의 대조에서 오는 인상일까 하고 생각하면서 두 사람을 찬찬히 바라보는 것이었다.
 
104
집에서도 같은 격식이 시작되었다. 현마 없는 뒷자리가 완전히 단주의 것이 되었다. 한집에 밖 주인의 권리를 위해서 있게 되는 모든 설비와 범절이 별수없이 잠깐 동안 주인의 뒷자리를 물려받게 된 그의 차지가 되게 된 것은 자연한 형세였다. 현마의 본을 받아 목욕실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것도 단주였고 목욕을 하고 나와서 갈아입은 잠자리옷도 현마의 것이었다. 식탁에서도 현마의 자리 대청에서도, 현마의 자리---그대로가 바로 단주의 자리였다.
 
105
"잠깐 동안이래두 집을 지켜주는 가장이니 가장 대접을 해줘야지. 가장 은 가장이래두 지킴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돼. 말하자면 의장병이라는 것 ---."
 
106
식후의 시간을 대청에서 쉴 때 현마의 의자에 앉은 단주를 경계하는 듯도 한 세란의 말투였다.
 
107
"좋게 말하니까 의장병이지 실속은 노예란 말이죠."
 
108
단주의 대꾸를 세란은 무시하며,
 
109
"암. 실상 주인은 나니까 내 명령대로 쫓는 것이 노예의 직분이거든."
 
110
"맙소서."
 
111
단주에게는 현마의 자리가 주체스럽게 여겨지면서 생각은 멀리 창밖 어두워 가는 하늘로 달렸다.
 
112
"미란은 벌써 동경 땅을 밝고 지금쯤 여관방에서 잠시 고향 생각에 잠겼으렷다."
 
113
"고향 생각은 왜. 좋아라구 날뛰면서 벌써 극장 구경을 안 떠났으리. 남은 패보다는 항상 떠난 패가 더 즐겁거든."
 
114
"그렇까."
 
115
"그렇지 않구 우리같이 이렇게 쑥스럽구 점직할까. 뽑다 뽑다 재수 없는 제비만 차려졌지."
 
116
정신을 차리고 용기를 내라는 듯이 세란은 일어서서 축음기에 레코드를 걸고 나서는,
 
117
"춤이나 가르쳐 줄까.---사내가 춤 못 추는 것같이 치욕은 없어."
 
118
단주의 앞에 와서 손을 잡아 끈다. 레코드에서는 가벼운 트롯이 흘러나왔다. 차차 높아지는 마음의 율동을 느끼면서 단주는 세란의 손을 손에 받으면서 자리를 일어셨다.
 
119
마침 식후의 차를 날라 가지고 들어온 옥녀에게는 두 사람의 모양이 신기 한 것으로 보였다. 주인이 집을 떠난 후로는 별안간 집안의 공기가 일변된 듯이 느껴졌다.
 
120
현마가 세란과 부부라면 단주는 반드시 미란과 짝이 되어야 옳고 그편이 한결 눈에 익고 자연스럽게 보이던 것이 이상스럽게도 그 짝들이 어그러졌을 때 옥녀에게는 일종 어색한 느낌이 왔던 것이다. 현마의 뒷자리에 들어 앉게 된 단주의 꼴이 주제넘으면서도 회뚱회뚱 약해 보이며 전체로 집안의 풍속이 뒤틀리고 젊어져 보였다. 세란은 현마와도 춤을 추며 야단들을 치지 않은 바는 아니었으나 이제 그 춤의 상대자가 아무도 없는 빈방에서 단주 혼자임을 볼 때 아무래도 괴이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부부도 아니 요 형제도 아닌 떳떳하고 의젓하지 못한 관계---그가 막 들어왔을 때에 마치 그 무엇을 훔치다가 들켜서 움출할 때와도 같은 두 사람의 태도를 보고 서는 더욱 그런 생각이 없지 않았다.
 
121
"제발 주인 없는 빈집에 아무 일 없도록---"
 
122
축수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슴속이 차지면서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을수도 없어 찻그릇들을 탁자 위에 놓고는 방을 나가 버렸다. 웬일인지 옆에서 보기가 제 스스로 겁이 나는 것이었다.
 
123
같은 나날이 시작되었다. 집에서만 종일을 지내기가 지리한 세란은 거의 날마다 단주를 따라 거리로 나가게 되었다. 백화점을 돌고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고---그런 습관이 현마와의 때에도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어 국 잦게 된 것이 사실이었으며 거리에 나갔던 길에 번번이 한 번씩은 회사에 들려 애영에게 이상한 눈치를 보이게 되고 집에 돌아와서는 옥녀에게 같 은 눈치를 보이게 되었다. 밤은 낮의 연장이어서 세란을 지켜주어야 되는 단주의 직분은 침실에까지 적용되었다. 방에 도적이 들지 않을까 세란이 감기에나 걸리지 않을까---이것을 주의하고 살피는 것이 단주의 충복된 뜻이 아니던가. 단주는 처음에 대청의 침대를 자기의 잠자리로 주장했으나 세란 에게 핀잔을 맞고 방을 옮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현마의 잠자리는 세란과 같은 요 위인 것이다. 단칸방 복판에 조그만 찻상을 놓고는 그것을 지경으로 양편에 각각 자리를 펴는 것이었으나 밤마다 자릿물을 떠가지고 들어와 상 위에 놓고 나가는 옥녀의 눈에는 그 기괴한 방안의 꼴이 아니들 장난 같이만 보이면서도 한편 유난스럽게 신경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다.
 
124
상 하나를 사이에 둔 잠자리 속에는 단주는 고시랑거리면서 잠이 안을뿐 더러 언제인가 폭풍우날 밤 아파트에서 미란과 같이 지냈을 때와 똑같은 운명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불안과 공포가 솟으면서 전신의 피가 개울물같이 넘치고 신경이 삼단같이 흘어졌다. 상 하나의 국경선이 마치 해발 수천 킬로의 험한 분수령 같고 그것을 넘음이 금시 목이라도 달아날 밀수입의 행위 같은 모험으로 여겨졌다. 그 험준한 국경선을 드디어 넘게 된 것은 확실히 세란의 충동질과 조력에 인함이었다. 세란에게는 미란과 같은 불안과 공포는 없었다. 그 편편하고 안온한 상태가 단주에게 대담한 동기를 일깨워준 것이 사실이었다. 울 너머 아이에게 손짓해서울을 넘어 앵도나무 아래로 끌어들이게 한 셈이 아니던가.--- 이튿 밤을 고시랑거리다가 사흘 되는 밤 단주는 역시 잠을 못 이루고 머리맡에 쌓인 묵은 영화잡지를 들척거릴 때 책갈피에서 괴상한 그림 한 장이 눈앞에 떨어졌다 전에 . 본 적이 없던 대담하고 망칙한 한 장의 그림! 단주는 눈이 번쩍 띠이며 그 한 장 위에 시선이 해면 같이 흡수되면서 전신의 피가 수물거리기 시작했다. 잡지 속의 그림들이 대개 여배우들의 천태만상의 변덕스러운 자태의 나열인 것이나 무슨 까닭으론지 그속에 끼이게 된 그 한 장은 그 모든 그림보다 백 곱절의 감각과 자극을 불러 백금의 광채같이 눈을 휘황하게 했다. 지금까지 장막 속에 감추어져 있던 인생의 비밀을 한 눈에 목도한 듯 어쩔 줄 모르고 손바닥으로 그림을 덮고 눈을 들었을 때 상 너머서 세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자기의 황당해 하는 꼴을 세란은 처음부터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125
"그렇게 신기할 것이 무에 있어. 그까짓 그림쯤이."
 
126
단주는 더욱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한층 붉어짐을 느낀다.
 
127
"가방 속을 들치면 얼마든지 있다나. 신경 갔던 길에 수십 장을 사서 가방 속에 감춰 가지구 와서는 몸에 지니면 재수가 있다구 양복 속주머니마다 한 장씩 넣어 가지구 다니더니 한 장 두 장 없어지구 남은 것이……"
 
128
어른에게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일까. 세란은 마치 한 폭의 풍경화인 양 대수롭지 않게 취급하는 것이나 인생의 초년병인 단주에게는 그렇게 간단히 넘겨버릴 물건이 아니었다. 가슴이 울렁거리며 손 아래에 있는 그 한 장을 어떻게 처치할지를 모르고 있을 때 세란은 자리를 벌떡 일어나더니.
 
129
"더 기막힌 것 한 장 보여 줄까. 서양 남녀같이 괴덕스러운 건 없어. 별별 시늉을 별별 수작을 여사로 하거든"
 
130
하면서 옷섶을 아물리고 서서 벽장 속의 가방을 들추는 모양이었다. 종아리를 드러내 놓은 세란의 그 모양을 보고 단주는 몸이 불같이 달아졌다.
 
131
"제발 맙소서."
 
132
입안으로 중얼중얼--- 견디다 못해 이불을 박차고 허둥허둥 문을 밀고 대청으로 달아나 버렸다. 옷을 주섬주섬 갈아입고 세란의 쫓아오는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면서 현관문을 열고 대문 밖까지 뛰어나간 것이 도시 그 무엇에 홀리운 듯도 한 거둥이었다. 꽃이 져버린 라일라의 수풀이며 잎이 퍼지기 시작한 개나리의 포기가 발아래에 되구말구 채일 지경으로 알 수 없는 힘이 전신에 용솟음치는 것이다. 밤늦은 거리로 들어가 대중없이 골몰골목을 더듬어 처음 오는 그 낯선 거리를 찾아낸 것도 온전히 그 힘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무서워하고 겁내고 침 뺕던 그 거리---도회에서 제일 하층 가는 지옥이나 다름없이 꺼려하고 멸시하던 그 지대가 오늘밤에는 그에게 다른 의미를 가져오면서 복받치는 힘이 그를 그곳까지 인도했다. 거기서 우선 인생을 시험하자는 것이었다. 첫 대문을 두드려 보고 용기를 얻자는 것이었다. 뭇사람이 하는 것과는 격식이 달라 선을 볼 것도 없어 문간에 서 있는 아무나 한 사람을 시험용으로 고르면 그만이었다. 과학자가 시험용 토끼 한 마리를 우리에서 집어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얼굴을 볼 것이 없이 방으로 들어가 떨리는 손으로 그의 욱체를 해부하려는 것이었으나 겁을 먹은 탓이었을까, 시험은 실패였다…….
 
133
정신이 깨면서 환멸이 오고 뉘우침이 컸다. 이것이 인생인가, 인생은 겨우 요것뿐이던가---하는 생각이 둘 때 그 요것뿐인 인생을 위해서 좀 더 건 사해야 할 것을 너무도 학대하고 멸시했다는 후회가 솟았다. 자기의 육체를 한없이 천한 것으로 여기면서 거리를 다시 벗어나올 때에 입안에는 군침이 돌며 구역이 났다.
 
134
입맛을 바로잡기 위해 하는 수 없이 담배를 사서 피우면서 거리를 걷는 것이었으나 대중없이 푹푹 연기를 뿜는 동안에 어느덧 제법 한 모금 한모금 흡연을 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 두려워서 엄두도 못 내던 연기가 줄기 줄기 목을 넘어 창자 속을 휘돌아서는 길게 나오는 것이다. 신기한 발견이 나 한 듯 기쁜 마음에 거듭해 볼수록에 흡연의 격식이 자연스럽게 되어 갔다. 그 밤의 시험에 비록 실패는 했으나 모르는 결에 용기는 준비되어 어느덧 인생의 테두리가 육체를 타고 들어앉은 것이다. 삽시간에 아이를 면하고 세상을 바꾼 것이다.
 
135
집으로 돌아가 밤 깊은 잠자리에 살며시 누웠을 때, 인생의 큰 준령을 넘은 듯 일시에 피곤이 엄습해 오면서 그날 밤 잠은 그 어느 때보다도 편편했다.
 
136
새벽에 세란은 짜증을 섞어가면서 벼락같이 단주를 족쳤다.
 
137
"간밤에 어디 갔다 왔는지 모를 줄 알구."
 
138
이불을 와서 활짝 벗기면서,
 
139
"추접스럽게 다시 그따위 버릇을 해봐라. 내쫓을 테니."
 
140
애매한 옥녀를 잡아 일으켜서는 새벽 목욕물을 끓이게 하고 더러운 몸을 말끔하게 씻어야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방에 붙이지도 않겠다고 단주에게 야단야단이었다.
 
141
그날 밤 머리맡 영화잡지 속에도 어제와 같은 그림이 준비되어 있었다.
 
142
끊임없는 샘같이 역시 그것은 신비의 근원이었다. 단주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림을 쭉쭉 찢어 버리고는 화를 내며 일어나 불을 꺼버렸다. 쓰러질 듯이 주저않은 발아래에 채이는 것은 세란이다. 어떻게 그렇듯 수월하게 망설이던 국경을 넘었던지 ---이미 지난 밤의 시험으로 준비되었던 용기의 탓이었을까. 불안과 공포 없이 감쪽같이 준령을 정복했던 것이다. 지난 밤과 같은 뉘우침과 서글픈 생각이 솟은 것도 물론이었고 폭풍우를 지난 안정된 감각 속에서는 당초에 뜻하지 않았던 가지가지의 의식이 뒤를 이어 나왔다.
 
143
"내가 괴악한 사람일까."
 
144
승냥이같이 욕심스럽고 세차던 세란에게도 약한 반면이 있는 것일까.
 
145
뼈 속까지 젖어드는 애잔한 뉘우침의 목소리.
 
146
"내가 괴악한 사람일까."
 
147
이불을 써버린 세란의 눈앞에는 현마의 그림자가 자꾸만 나타난다. 바로 전까지도 완전히 잊어버리고 무시해 버린 남편의 자태가 별안간 고집스럽게 마음을 할퀴면서 끄들기 시작했다.
 
148
"이것이 죄인 된 길인가."
 
149
단주도 서글픈 생각에 마음이 떨리면서 그 자리에서 목소리를 놓고 울고 싶으리만큼 슬프다. 세란에게 현마의 자태가 떠오른 것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미란의 환영이 차차 확적히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150
"미란, 미란!"
 
151
만약 그가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이라면 목소리를 높여 불러보고도 싶다.
 
152
맑고 민첩한 눈초리가 금시 육박해 오는 듯---단주는 그를 대할 낯이 없이 마음이 부끄럽다.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들어가야 할 인생의문---처음 길에서 실패하고 그러므로 말미암아 더욱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공포를 정복하고 다음 번 계획으로 해서 성공하려고 약속한 그 인생의 문을 어떻게 해서 이렇게 갈라진 채 엉뚱한 딴 길로 해서 자기만이 먼저 수월하고 어처구니없게 들게 되었을까. 이것이 옳은 것일까, 세상일이란 이렇게 기괴한 것 일까---생각할수록 서글프고 안타깝다가 문득 칼날에 부딪친 듯 가슴이 섬찟해지는 대목에 이른다.
 
153
"비밀이라는 것이 이렇게도 어처구니없는 것일까. 있게 되면 꼭 있구야 마는 비밀! 행여나 미란도 같은 비밀을 가지게 되는 것이나 아닐까."
 
154
하는 생각이 솟자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하면서 진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155
눈에 안 보이는 갈퀴로 긁어다니는 듯 무서운 망상이 전신을 꼬치꼬치 괴롭힌다.
 
156
"그럴까, 그렇지 않을까."
 
157
잠시도 견딜 수 없어 벌떡 일어나서는 벽장 속을 뒤적거리더니 어둠속에서 술병을 찾아냈다. 허수아비같이 버티고 서서 독한 위스키의 잔을 거듭 들이켜는 그 꼴이 세란에게는 실성해지지나 않았나 하고 생각되리만치 허망한 것으로 보였다.
 
158
그런 자포적 심경에서 오는 것인지 이 밤의 괴롬은 씻은 듯이 잊어버린 듯 세란과 단주의 다음날의 생활은 역시 이날의 연장이어서 같은 낮이 지나 고 같은 밤이 오고 그칠 --- 바를 모르고 계속되었다. 한번 내친걸음은 쉬운 듯이 보였고 눈뜨기 시작한 단주는 한꺼번에 활짝 피어버리려는 듯이 무서운 욕심쟁이가 되었다. 나날의 생활을 목도하는 옥녀에게는 며칠 동안에 눈에 띠이리 만치 얼굴이 길어지고 눈이 패어서 대담하게 빛나게 된 단주의 꼬 이 흡사 장구한 병으로 해서 변모한 사람 같이만 보였다.
【원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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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 근/현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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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분 [제목]
 
  이효석(李孝石) [저자]
 
  1939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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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의 소설(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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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분(花粉)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5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