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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치상지 ◈
◇ 깨어진 첫사랑 ◇
카탈로그   목차 (총 : 8권)     이전 8권 ▶마지막
1939년
현진건
 

1. 깨어진 첫사랑

 
2
그믐 가까운 밤이라 달은 없었으나 군데군데 하늘을 태울 듯한 화톳불과 횃불로 말미암아 바깥은 낮같이 밝았다.
 
3
파수병을 따라나온 상지는 저만큼 말을 타고 있는 부인이 첫눈에도 고량 부리 길거리에서 만난 그 귀부인이란 것을 대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4
상지는 어떻게 반가운지 몰랐다. 그리고 그리던 고운 님을 무망중(無妄 中)에 만난들 이렇게 반가우랴.
 
5
상지는 거의 체모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허둥지둥 달음박질을 하다시피 그 귀부인의 말머리로 달겨들었다. 손이라도 쥘 듯이.
 
6
그 귀부인도 자기에게 가까이 오는 이가 다른 사람 아닌 흑치상지인 줄로 알아보자 선뜻 말에서 나려선다. 그 휘청하는 가는 허리가 간드러지게 부러질 듯했으나, 가볍게 땅을 디디는 발을 사뿐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7
그 귀부인도 반가운 충동을 걷잡지 못한 탓이리라. 줄달음치듯 몇 걸음 마주 나오다가 두 사이가 너무 가까운 것이 혐의쩍다는 듯이 주춤 발길을 멈추었다.
 
8
"창화 부인이 아니시오니까? 이 밤에 어떻게……?"
 
9
천군만마를 호령하는 흑치상지였건만 웬일인지 목이 꽉 잠기는 듯하며 선선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10
"흑치 장군님! 그 그동안 안 안녕하셨습니까? 제가 제가, 당돌히 여기 온 뜻은……."
 
11
그렇게 돌올한 기상을 가졌던 창화 부인이었건만, 어쩐지 말을 잘 얼버무리지 못한다.
 
12
"부인의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사랑하시는 그 뜨거운 정성에는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일신의 위험하심도 돌아보시지 않으시고 적진 중에 뛰어드시다니……."
 
13
상지는 한순간 까닭 없는 흥분을 스스로 누르고, 제대로 인사말을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14
거물거물하는 불빛에 발그스름하게 타는 듯하던 창화 부인의 두 뺨도 새 하얀 상아빛으로 돌아갔다.
 
15
"천만에 말씀, 저 같은 것이 무슨 갸륵한 정성이 있사오리? 다만 천한 목숨이 살아있는 동안 장군님의 재생지은(再生之恩)의 만분지일이라도 갚사올까하고."
 
16
"그 편지를 쓰기기에 얼마나 애를 쓰시고 위험을 무릅썼을지 이루 생각도 못할 바인 줄 생각합니다."
 
17
"도리어 부끄럽습니다. 참 이번에 대공을 세우시고 당병을 혼띔을 주신 것을 생각하오면 어떻게 시원하온지."
 
18
"아직도 앞일이 창창하온데 그까짓 조그마한 승전이 무엇이 장하리까?
 
19
그것을 전수이 부인께서 지시해 주신 덕택이 아니오니까? 어떻게 그렇게도 적정을 영절스럽게 살피셨는지 그저 감복 감복할 따름입니다."
 
20
상지는 빙그레 웃으며 창화 부인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겼길래 이 부인 이 그렇도록 영리하고 여무지고 자세할까…… 하는 것을 얼굴 어느 모습에서 찾아보려는 것처럼.
 
21
"아녀자의 소견으로 적정을 살핀다 하온들 오죽하리까? 그저 제가 아는 대로 허둥지둥 적었으니 알아보시기에 얼마나 지리하셨을지."
 
22
맑은 눈이 샛별같이 번쩍이어 정기는 있어 보이지만 그 다소곳한 머리와 어둠 속에 떠오른 꽃잎 같은 입술이 그저 얌전하고 어여쁜 한낱 여인네로밖에 보이지 아니하였다.
 
23
"누추하나마 장막 속으로 들어가십시다. 밤 기운이 너무 냉랭해집니다."
 
24
상지는 단둘이 얘기를 주고받는 것이 저도 모르게 즐거워서 부인네를 한 데 너무 오래 세워둔 것을 깨닫고 미안해 하였다.
 
25
"아닙니다. 제가 한만히 장막 속에 들어갈 겨를이 없을까 합니다. 아까 곧 말씀을 드리려 한 것이 쓸데없는 사설 때문에 늦어졌습니다. 제가 여기 온 뜻은 다름이 아니라 오늘 내일로 소정방이 떠나게 된다는 눈치를 채고 온 것입니다. 유인원이가 군사를 끌고 나갔다가 여러 날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다고 소정방은 노발대발을 하였습니다. 그까짓 조그만한 성을 입때 무찌르지 못하고 무얼 하느냐고 날마다 첩보만 기다렸는데, 웬걸 어제는 도리 어 패전하였다는 급보를 듣고, 발을 구르며 유인원에게 이곳 치기를 고만두고 빨리 군사를 거두어 돌아오라고 명령을 나린 모양입니다. 오늘쯤은 유인 원이가 몰래 달아날지도 모릅니다. 이 기틀을 타서 한 번 시살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26
"참으로 귀중한 소식입니다. 그는 그렇다 해도 잠깐 들어가시는 게 어떠 하십니까? 이 밤중에 더구나 난군 중에 어디를 또 가시려고 하십니까?"
 
27
"그렇게 말씀하시니 잠깐 머물까요? 이번에야말로 장군님의 쾌히 승전하시는 광경을 좀 구경할까요?"
 
28
하고 창화 부인은 어둠 속에서 방그레 웃었다.
 
29
당병이 오늘밤쯤 슬그머니 영을 빼어 달아날지 모른다는, 창화 부인의 정보에 상지는 급급히 장막 속으로 돌아와 창화부인을 여러 장수들에게 소개를 하는 둥 마는 둥, 일변으로 적정을 살필 두목 몇몇을 당진으로 띄워 보낸다, 일변으로 잠든 군사를 깨워 일으킨다, 한동안 야단법석을 쳤다. 이런 준비에도 떡 두어 시루 찔 시각을 지내었으리라. 급기야 졸리운 눈을 비비는 군사들 휘몰아 폭풍우같이 당진에 짓쳐들고 보니 당진 속에는 횃불과 화톳불만 거물거리고 기치창검을 야단스럽게 꽂아둔 허수아비가 즐비하게 늘어섰을 뿐, 산 물건이라고는 어리친 개아미 한 마리 없었다.
 
30
" 이 오랑캐들이 벌써 도망질을 쳐 버렸군요. 아이 분해라. 제가 하루만 더 일찍이 왔던들……."
 
31
상지를 따라 말을 채쳐 달려온 창화 부인이 누구보담도 더 애통해 하였다.
 
32
"내가 다 불명한 탓입니다. 저기 저 지 장군께서는 벌써부터 진군하기를 주장하셨지만, 내가 쓸데없이 은인자중하다가 필경 긴 배암을 놓치고 말았소이다."
 
33
침 같은 수염이 꼿꼿이 일어선 지수신이 눈을 흘기다시피 하여 상지를 바라보는 눈초리에 마주치자, 상지는 면목 없는 듯이 이런 사과 비슷한 말을 하였다.
 
34
"그 원수엣놈들을 좀 더 시살을 못한 것이 유감은 유감이오마는 제출물에 달아난 것이 그리 해롭지는 않은 것인즉, 어디 흑치 장군의 불명한 탓으로 야돌릴 수 있소?"
 
35
안상한 사질상여는 은근히 상지를 위로해 주었다.
 
36
"나는 그까짓 당병 몇 놈을 더 죽이고 덜 죽인 게 분하다는 말이 아니오. 그 충상영이란 놈, 하루라도 한시라도 하늘을 같이 못 일 충상영이란 놈을 곱다랗게 놓쳐버린 것이 분해서 견딜 수가 없구려."
 
37
하고 수신은 제 주먹으로 제 가슴을 쳤다.
 
38
"그놈을 놓친 것은 참 분하오마는 그 쥐새끼 같은 놈이야 한두 놈쯤 살아 있다기로 대세에 그리 큰 상관이야 있을 거요? 지 장군 고정하시오."
 
39
상여의 이 말에 수신은 더욱 천길 만길 뛰었다.
 
40
"사질 장군! 그게 무슨 말이오? 어느 것은 일어탁수(一魚濁水)라고 고기 한 마리가 맑은 큰 강물을 흐려놓는단 말이 있지 않소? 고까짓 충상영이 한 놈이라고 하지마는 고따위 놈이 무참한 죽음을 죽지 않고 어엿한 부귀를 누려 보시오. 고놈의 뽄을 따라 몇 백 명 몇 천 명 충상영이란 놈이 생겨날지 모를 것 아니오?
 
41
바른 말이지 나는 당장과 당병은 그렇게 밉지 않소. 저희들도 저희 나라를 위하여 피를 흘리는 것이니, 우리에게 적은 될지언정 원수야 될 것 있소? 그런데 이 충상영이란 놈은 우리의 원수가 아니오? 원수를 눈앞에 두고 갚지 못하니 어찌 통분하지 않단 말이오? 고놈이 대당(大唐) 선봉장이란 깃발을 앞세우고 머 ‘순천자는 흥이요, 역천자는 망이라’ 고놈을, 고놈을!
 
42
수신의 입길에는 불길이 활활 일어나는 듯하였다.
 
43
글쎄 지 장군 고만두시구려 " , . 고놈이 고런 소리를 암만한들 대세에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흑치 장군의 한 번 호통에 고놈의 얼굴이 흙빛이 되지 않았소?"
 
44
"대세, 대세, 장군들은 걸핏하면 대세를 내어세웁디다마는 대세가 기울어진다면 장군들은 하던 일을 고만 집어치울 터요!"
 
45
지수신의 말낱엔 칼날이 울었다.
 
46
"지 장군, 그것은 너무 과하실 말씀……. 어디 우리가 대세를 따라 마음이 변한단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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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때까지 입을 닫치고 있던 상지가 벌컥 화를 내었다.
 
48
"그런 말로 괜히 때를 보낼 것이 아니라 횃불이 아직도 남아있는 걸 보면 당병이 달아나도 멀리 달아나지는 않았을 것인즉, 이대로 추격을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오늘밤은 군사를 쉬이고 다시 방략을 생각하든지……."
 
49
"물론, 추격의 손을 늦추지 말고 사자성까지라도 짓쳐 들어가야지요."
 
50
지수신은 상지의 말을 받았다.
 
51
"당병의 의병(疑兵)을 꾸미고 횃불까지 잡혀 놓은 것을 보면 단단히 준비를 차리고 달아난 것인즉, 중도에 복병(伏兵)이 없지 않을 것이매, 이 어두운 밤에 눈 딱 감고 그 뒤를 추격한다는 건 위태로운 일일 듯하오."
 
52
상여는 언제든지 자중론을 주창하였다. 이때까지 세 장수의 수작을 들으면서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창화 부인이 입을 열었다.
 
53
"제가 당돌히 한 말씀 여쭐까 합니다. 이런 좋은 기회에 사자성까지 짓쳐 들어가 보는 것도 물론 좋을 줄로 압니다. 중도에 복병이 있다 하온들 무에 신신하리까? 그러하오나 시방 적군을 함몰을 시키오면 소정방이 회군을 않을 줄 압니다. 제 알기로는 소정방이 내일 모레쯤은 돌아갈 터이온즉 그때를 기다리시는 것이 가장 상책일까 합니다."
 
54
이 적세에 밝고 사리에 맞은 창화 부인의 말에 세 장수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55
창화 부인의 말을 좇아 지나친 추격은 고만두고 그 날 밤은 뺏은 당영(唐 營)에서 쉬기로 하였다. 급살량으로 지은 영이긴 하지마는 물자가 넉넉하고 규모가 큰 그네들의 솜씨라 장수와 두목들의 장막 치장이 자못 구비하였다.
 
56
값진 비단 장막을 곱다랗게 남긴 것을 보면 계획적으로 물러는 갔다 해도 여간 다급하고 창황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57
상지는 유인원이가 거처하였을 듯한 장막 속으로 창화 부인을 데리고 들어왔다.
 
58
은촛대에 팔뚝만한 밀초가 거물거물 춤을 춘다.
 
59
그놈들이 숭하게 도망질을 " 쳤으나 매우 황급은 했던 모양입니다그려.
 
60
은촛대를 그대로 내버려두었으니."
 
61
상지는 촛농이 많이 녹아 나려서 한 쪽으로 기우뚱해진 초를 바루잡으며 창화 부인을 돌아보고 빙그레 웃었다.
 
62
"참 그렇구먼요. 별일은 별일입니다. 그 욕심꾸러기가 촛대를 잊고 가다니요."
 
63
창화 부인도 방싯 웃고, 그 아름다운 입술을 삐쭉하였다.
 
64
"당진 중에 계실 적에 그자들에게 곤욕도 많이 받으셨지요?"
 
65
상지는 창화 부인의 동그스름한 어깨판과 바람에 나부끼는 듯한 가느스름한 허리를 바라보며 동정을 억제치 못하였다. 저렇듯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호랭이 같은 오랑캐들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배겨났을까? 나라와 백성을 위 하는 한 조각 붉은 마음이 아무리 불같이 탄다 해도 여간 고되고 어려운 노릇이 아니었으리라.
 
66
"뭘요. 그자들도 웃두리 장수들은 제법 체모를 알더군요."
 
67
하고 창화 부인은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이었다. 쥐면 꺼질 듯한 저 풍 정! 그 어디에 그런 매서운 용기가 숨어 있을까?
 
68
상지는 수수께끼 같은 이 아름다운 여인을 흥미 깊게 한동안 이모저모를 뜯어보다가, 깊은 밤 호젓한 장막 속에 젊은 부인과 단둘이 오래 앉았기가 예에 어그러진 짓인 줄 깨닫자 상지는 몸을 일으켰다.
 
69
"고단하실 텐데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시지."
 
70
"무에 고단할 거야 있어요? 휘젓해서 어디 잠이 올 것 같지도 않구요."
 
71
창화 부인은 상지가 몸을 일으키는 걸 보고 질색을 하며 발버둥이라도 치고 부여잡을 눈치를 보이고서, 다시 말을 잇대었다.
 
72
"제 걱정을랑 말아 주세요. 장군님께서 정 고단하시다면 몰라도……."
 
73
말씨는 매우 나긋나긋하고 서운한 울림이 역력하다.
 
74
상지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75
"내야 뭐 고단하지는 않습니다마는……."
 
76
"그러시다면 더 앉아 계시는 게 어떠하실지? 오래지 않아서 밤이 밝을 것을."
 
77
"그렇기는 합니다. 벌써 축시가 지나 인시로 들어가게 되었을 테니 ……."
 
78
상지도 굳이 돌아갈 생각은 물론 없었다. 체모를 돌보아 몸을 일으킨 것이지만, 이런 어여쁜 젊은 여성과 하룻밤을 얘기로 밝혀도 조금도 싫지는 않았다 임자 의 . (任子) 안해인 줄 알았지만, 또 그 전신이 무엇이었는지 궁금과 흥미를 한꺼번에 느끼었다.
 
79
상지는 도루 앉았다.
 
80
상지가 도루 앉는 것을 보고 창화 부인은 매우 반색을 하였다.
 
81
"저, 이 조그마한 가슴속에 첩첩이 쌓인 원과 한을 들어 주실지?……."
 
82
"참, 그 편지에도 긴 사연은 접어둔다 하셨지. 그 사연을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83
"이야기를 다하자면 이 밤이 다 밝아도 끝이 안 나겠습니다마는…… 호호."
 
84
창화 부인은 한숨을 길게 쉬었다.
 
85
상지는 창화 부인 앞으로 몇 뼘 다가앉으면,
 
86
"그러면 얘기를 시작하시지."
 
87
간단하게 재촉을 하였다.
 
88
"들려 드렸자 신신치 않은 아녀자의 신세타령, 장군님의 귀를 더럽힐까 저어합니다마는 어디다가 호소할 데도 없는 야릇한 운명에 번롱된 이 몸입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제 가슴속 깊이 감추어 둔 비밀, 장군님께는 꼭 한 번 이 비밀을 호소할까 벼르고 별렀던 차입니 다. 이야기를 하자니 흉격이 막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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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호수같이 맑은 눈에 어른어른 눈물 안개가 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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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집은 바루 사자 강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답니다. 저의 아버지는 장덕(將德)이란 벼슬을 다니시다가 연만하시어 고만두시고 오랍동생도 없이 외톨이로 자라났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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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화 부인은 마츰내 신세타령의 허두를 내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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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얘기는 십 년 전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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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창화의 나이는 열여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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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꼭두식전의 사자강은 적막하도록 종용하다. 젖빛 안개에 휩싸 안긴 물결은 밤새도록 울어예다가 샐녘에야 고달픈 잠에 떨어진, 수멸수멸 졸음 오는 눈을 깜박이는 듯 실바람조차 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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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화는 연년 묵은 수양버드나무 밑에서 물을 풍풍 펐다. 그 나무는 반 아름이나 되도록 굵었지만 중허린 껍질이 벗겨지고 드러난 속고갱이가 우글쭈글 울퉁불퉁, 더러는 시꺼멓게 썩고 여기 저기 구멍조차 움푹움푹 뚫리어 겪은 풍상이 얼마나 오래고 고된 것을 일러준다. 그러나 밑둥과는 딴판으로 윗줄기는 씽씽하게 뻗을 대로 뻗어 새파랗게 물오른 품이 연연할 지경인데 휘어진 가지는 천 가닥 만 가닥 늘어져서 두어 간통이나 어란을 잡았다.
 
97
창화가 철철 넘도록 물 한 동이를 길어 놓고 할 일을 다 마쳤을 때, 돌리는 숨을 호오 내쉬고 정겨운 물결을 떼치기 어려운 듯이 손으로 몇 번 물을 움켜 보다가 물동이를 이려고 들여다보니 이게 웬일인가? 분명히 수정같이 맑고 정한 물을 길러 놓았는데 웬 버들 잎사귀가 한 줌이나 동이 위에 둥둥 뜨지 않는가. 이상도 스러운 일, 바람도 불지 않거늘 어디서 버들잎이 이렇 게 많이 날아들어 왔을까? 아마도 물 위에 뜬 버들잎을 몰라보고 그대로 퍼부은 듯.
 
98
창화는 하는 수 없이 한 동이 물을 그대로 쏟아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99
창화는 다시 물을 펐다.
 
100
이번에는 눈을 닦고 티꺼풀 하나 들어가지 않도록 바가지로 물을 여러번 저어 가며 한 바가지 두 바가지 정성스럽게 퍼넣었다.
 
101
물을 골라 뜨노라고 정신이 쏠리어 정작 제 물동이 속을 보살피지 못하였다.
 
102
이번에도 거의 치면하게 길었을 때, 아까보담도 더 많은 버들 잎사귀가 넘실넘실 동이 물을 덮었다.
 
103
이것은 정말 속이 조화 붙을 일이다.
 
104
창화는 등뒤의 버드나무를 돌아다보았다. 가지는 척척 늘어지기는 하였지만 간댕도 하지 않는다. 갸름갸름한 잎사귀들이다. 소곳하게 고개를 숙이 고, ‘난 안 그랬어요, 난 안 그랬어요.’ 변명하는 것 같다.
 
105
"참 속상해 죽겠네!"
 
106
창화는 짜증을 내었다.
 
107
‘혹시나 도깨비 장난이나 아닌가?’ 창화는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108
휘젓한 강가, 몽실몽실 물 얼굴에서 피어오르는 실안개도 어쩐지 무시무시 한 생각을 자아낸다.
 
109
머리끝이 쭈뼛쭈뼛해지자 그의 손에서는 바가지가 저절로 떨어졌다.
 
110
집으로 줄달음을 칠까?
 
111
막 한 걸음을 내어 디디려 할 제 문득 버드나무 뒤에서 ‘카악!’ 하는 사람 기침 소리가 났다.
 
112
창화는 왼몸이 오그라 붙었다.
 
113
어슬렁어슬렁 둔덕을 나려오는 걸 보면 바루 옆집에 사는 총각 수진(守眞)이었다.
 
114
"에그 깜짝이야! 난 누구라고."
 
115
창화는 놀라는 중에도 아는 사람을 만난 것이 반가웠다.
 
116
"왜 사람을 보고 놀래기는!"
 
117
수진은 싱글벙글 웃으며 창화의 곁으로 가까이 왔다. 수진은 창화보담 한 살 더한 열일곱, 어릴 때의 한 살은 어른의 십 년 맞잡이다. 더구나 사내꼭지, 수진은 창화보담 제법 의젓하고 점잖고 의뭉스러웠다.
 
118
"이것 좀 봐요. 물을 길어 놓으니 자꾸 잎사귀가 들어가는구만."
 
119
창화는 곧이곧대로 원정(原情)을 하였다.
 
120
"그것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어디?"
 
121
하고 수진은 물동이를 이윽이 굽어보다,
 
122
"그것두, 바람도 자는데 웬 버들잎이 이렇게 많이 날아올까? 참 이상도 스럽군. 아마 도깨비 장난인 게지."
 
123
"에구, 어마!"
 
124
창화는 질색을 하면서도 수진이 생각이 자기와 꼭 같은 것이 속으로 신통하였다.
 
125
"여기서 어머니를 불르면 그렇게 냉큼 오셔서 젖을 물려 주실 테야? 히히."
 
126
"남 무서워 죽겠는데 웃기는."
 
127
창화는 톡 쏘았다.
 
128
"어디 내가 물을 한 번 퍼 볼까? 버들잎이 또 떨어지나 아니 떨어지나, 허허."
 
129
수진은 면구스럽도록 창화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한번 너털웃음을 웃고, 동이 물을 쏟고서 제가 펑펑 물을 푸니 대번에 한 동이가 되었다.
 
130
"버들잎은커녕 티꺼풀 하나 없지 않아. 물을 푸면 나같이 퍼야 되는 거야."
 
131
수진은 흰소리를 하고 창화에게 물을 이워 주고 허위허위 강둑길을 올라 갔다.
 
132
창화는 수진 총각의 신세를 여간 많이 지지 않았다.
 
133
창화의 아버지는 늙은 병객(病客)이다.
 
134
무슨 병인지 의원에 따라 병명은 다 달랐지만 이따금 쿨룩쿨룩 기침도 하고 먹는 것이 도모지 소생이 되지를 아니하였다. 껄껄 트림을 하며 일 년 열 두 달 자리를 떠나는 날이 별로 드물었다.
 
135
재취댁인 그의 어머니도 나이는 아버지보담 십 년이나 젊었으나, 정수리 머리칼이 다 빠지고 부족증 같은 증세가 있어서 개신개신 몸을 추스르지 못하는 탓에 나이보담 엄청나게 더 늙어서 누가 얼른 보면 아주 걸맞은 부부로 속게쯤 되었다.
 
136
장남한 아들이 없으니 벌어들이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벼슬 다닐 제 근사를 모아 놓은 논밭 몇 뙈기와 얼마 안 되는 전량을 곶감꼬치 빼먹듯 하고만 보니 살림살이는 나날이 구간해질 밖에 없었다.
 
137
그리고 떠나지 않는 우환. 집 안은 언제든지 밝은 햇살이란 비치지 않고 잿빛 안개가 우중충하게 졸 듯.
 
138
집안 형편이 괜찮을 때에는 남종 여종이 두셋씩은 있었지만 상전의 집이 간구해지고 보니 종들이 뿔뿔이 달아나 버린 것이다. 종을 찾을 근력도 없었거니와 설령 찾는다 해도 먹이고 입힐 것이 걱정이 되어 흐지부지 그대로 내어 버려 두고 만 것이다.
 
139
그러니 힘찬 일은 자연 수진이가 보아주게 되었다. 수진은 여러 형제 중에 막내둥이라, 자기 집에는 손보가 갖아서 하필 수진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무방하였던 것이다.
 
140
앞뒷집에 사는 탓으로 수진과 창화는 어릴 적부터 소꿉동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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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찬 뒤에도 그들은 새삼스럽게 내외를 할 필요도 없었다.
 
142
창화가 수진의 집에 놀러를 가도 수진의 부모도 심상히 보고, 수진이가 창화의 집에 놀러를 와도 창화의 부모가 고이쩍게 알지 않았다. 고이쩍게 알지만 않을 뿐인가, 오히려 반색을 할 지경이었다. 장작을 쪼갠다든가, 쌀 가마니를 들만진다든가 하는 힘든 일을 수진이 아니고는 누가 해 준단 말인가.
 
143
그나 그뿐도 아니다. 마음씨 좋은 수진은 나무를 한 짐 잔뜩 해 가지고는 자기 집으로는 가져가지 않고 쉰길로 창화의 집으로 가져오기가 일쑤이었다.
 
144
어떤 때는 고기매나 생선 마리를 사 가지고 와서 창화 어머니를 주며,
 
145
"옛소, 아주머니, 이것 해 잡슈."
 
146
하는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147
수진은 자기 집 살림보담도 창화의집살림살이 켯속을 더 잘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48
그는 창화가 반찬 없는 밥을 목고개를 타라매고 먹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149
이런 선물을 받을 적마다 창화의 어머니는,
 
150
"이것 염치 없구나."
 
151
뭘 그러셔요해 잡수셔요 "?. 저 오늘 품팔이를 해서 돈푼이나 벌었답니다."
 
152
수진은 대답하고, 그대로 휭하니 달아나 버렸다.
 
153
그래도 벼슬깨나 살던 집안에서 외동딸을 농군 집안에 시집보내긴 가당부당한 노릇이로되, 기실 수진이 집안도 웃대에는 좌평, 달솔 같은 높은 벼슬을 산 이가 없지도 않으니 바이 상사람이라 할 수도 없거니와 수진이가 사람이 그만큼 착실도 하고 얌전하니 데릴사위로 만들어 노래(老來)를 의탁하자는 생각도 아주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154
‘아직은 저것들이 나이 어리니 어디 장래를 두고 보자.’ 하는 것이 창화 부모의 생각이었다. 더구나 오늘날 수진이를 떼치고는 아쉬워서 견딜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155
수진의 집안에서는 장덕(將德)이라면 칠품 벼슬이니 그렇게 놀라울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자기네들보담은 양반 명색이니 말하자면 양혼(良婚)이요, 또 많은 아들들 가운데 하나쯤 데릴사위로 주어도 그리 원통할 것은 조금도 없었다. 넉넉지는 않다고 하지마는 그래도 박토(薄土) 마지기나 있는 모양 이니 설마 한 거리야 되지 않으랴고 셈속을 빨리 따지었던 것이다.
 
156
두 집 부모의 묵허 아래 그들의 풋사랑은 봉오리를 맺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157
요즈막 해서는 창화는 수진을 만나면 웬일인지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날 이때까지 조석으로 만나다시피하던 사람이 왜 갑자기 이렇게 부끄럽단 말인가. 밤 사이에 제 코나 비뚤어졌단 말인가.
 
158
밖에서 자기 어머니에게 웅얼웅얼 중얼거리는 수진의 목소리를 들어도 창 화는 아예 문을 닫고 내다보지 않았다. 내다보지 않았으면 고만이겠으되, 까닭 없이 마음이 오마조마해지며 바늘방석에 나 앉은 듯.
 
159
"왜 얼른 가지를 않구. 괜스레."
 
160
창화야말로 괜스레 짜증을 내었다.
 
161
얼굴이 확확 달아오른다. 그러나 막상 수진이가 대문 밖을 휭하니 자가는 기색을 차리면 창화는 안절부절을 못한다.
 
162
쿵덕쿵덕 골목 밖을 걸어나가는 발소리를 들으면 가슴을 쥐어짜고 싶다.
 
163
인제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사람을 영영 놓친 것처럼 눈물이라도 펑펑 쏟아질 것 같다.
 
164
"어쩌면 그새 벌써 달아났담!"
 
165
창화는 제가 일부러 내다보지 않은 것을 잊어버리고 혼자 야속한 듯이 중얼거렸다.
 
166
줄달음이라도 쳐서 뛰어나가고 싶었으나 봉당에 나려선 발길이 얼어붙은 듯 꼼짝을 못하는 창화이었다. 그의 귀에는 어디만큼 걸어가는 수진의 발소리만 우레같이 들리었다. 발자욱뿐만 아니라 자기가 내다도 보지 않았다 하 여 그 골이 팅팅 오른 숨소리가지 씨근씨근 들려왔다.
 
167
그러나 부엌에서 서름질을 하거나 또는 마당에서 빨래가지를 널 때에 수진이가 무망중에 쑥 들어와서 딱 마주치면 가슴속에서 무엇이 뚝딱 하고 부러지는 듯하며 머리골까지 힝힝 내어둘린다.
 
168
수진이가 쓸데없는 말을 건네고 지싯지싯할수록 창화는 땅이라도 파고 들어가고 싶다.
 
169
그렇다고 해서 창화가 수진을 피하고 절대로 만나지 않는 것은 물론 아니다. 열 번에 한 번쯤 안 보고 돌려보내도 염통이 발랑발랑 터질 지경이거늘 어찌 만나지 않고서야 하루인들 배길 수 있을 것이냐!
 
170
더구나 아니 만나랴 아니 만날 수가 없기도 하다. 수진은 창화의 집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창화가 빨래하는 데나 물 긷는 강둑에나 나무 캐는 밭두렁 산기슭에도 언제든지 수진의 그림자는 나타나고야 말았다.
 
171
하루는 부소산으로 산나물을 캐러 갔다.
 
172
수진은 사람 먹지도 못할 풀을 나물이랍시고 뜯어다가 여러 번창화에게 구박을 맞는 탓으로 인제 와서는 나물을 곧잘 알아보고 그 어수선한 이름들도 곧잘 알아 맞추게 되었다. 뚝갈이. 야 부둥이 . 이역취풀…….
 
173
누가 많이 뜯는가 내기까지 한다.
 
174
"이것 봐. 난 이렇게 많이 뜯은걸."
 
175
수진은 제 옷섶 자락에 가득해진 나물을 창화의 보구니에 툭툭 털어 넣으며 자랑하였다.
 
176
"고까짓 것. 난 이만큼 많은데."
 
177
창화도 지지 않았다.
 
178
"어디 허허. 참 사람 기막혀 죽겠네. 눈에 면화씨가 배겼기로 그래, 그걸 이것보다 많다고 한담?"
 
179
사실 창화의 뜯은 분량이 그 난 따라 수진이 것만 어림없이 적었다.
 
180
창화는 골이 올랐다.
 
181
"사내 대장부가 나물 많이 뜯은 게 머 자랑인가."
 
182
하고 입을 배씻하며 쏘아붙인다.
 
183
"이럴 때만 사내 대장부를 찾거든 흥, 계집애 솜씨가 그렇게 맵짜하더라. 흥."
 
184
수진은 창화의 얼굴을 뚫어질 듯이 들여다보며 빙글빙글 웃어댄다.
 
185
"남의 얼굴은 왜 그렇게 들여다본담?"
 
186
하고 창화는 통통 부은 뺨을 앵돌린다.
 
187
다 익은 앵두처럼 아늘아늘한 뺨이 봄볕을 안고 터질 것 같다.
 
188
"하하, 할말이 없으니깐."
 
189
하고 수진은 그 고운 뺨에 악마디 센 제 손끝을 대기가 황송쩍다는 듯이 가볍게 튀기었다.
 
190
"왜 사람을 쳐요?"
 
191
창화는 악을 쓰고 더욱 앵돌아진다.
 
192
수진은 뒤로 벌렁 자빠지며,
 
193
"에이, 무서워라. 사람 경풍하겠네."
 
194
잔디는 보들보들 몸이 폭 잠드는 것 같다.
 
195
그들의 눈위와 눈앞에는 아지랑이가 춤을 춘다.
 
196
창화도 골이 잔뜩 난 듯이 먼 산만 파고 있었다.
 
197
"그렇게 성낼 게 뭐여? 내 튀긴 게 그렇게 몹시 아프더람?"
 
198
수진은 손깍지를 껴서 빌며 혼잣말같이 중얼거린다.
 
199
"그럼, 아프지 않고……."
 
200
하면서도 갸웃이 수진을 나려다본다.
 
201
"어휴, 가엾어. 쉬쉬."
 
202
하고 수진은 벌떡 몸을 일으켜 창화의 뺨을 쓰담으려 하였다.
 
203
"에구머니!"
 
204
창화는 외마디 소리를 치고 내뺐다.
 
205
창화는 뺑소니를 치자 수진이도 몸을 일으켰다.
 
206
"별안간 살매가 들렸나? 달아나기는 왜 달아나?"
 
207
달음박질쳐 내빼는 창화를 느싯느싯 쫓아가며 수진은 소리를 질렀다.
 
208
창화는 저만큼 떨어져서 새빨간 얼굴을 돌이키며,
 
209
"왜 남의 얼굴에 손을 대려 들어?"
 
210
"손을 대기는 누가 손을 대어?"
 
211
"저런, 금새 거짓부리야.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며 남의 뺨을……."
 
212
하다가 창화는 고개를 푹 숙이고 다시 달음박질을 치기 시작하였다.
 
213
"내 안 그럴게. 내 다시는 안 그럴게."
 
214
수진은 미두발괄하며 뒤를 따랐다.
 
215
창화는 들은 체도 아니하고 닫기만 한다. 수진의 걸음도 빨라졌다.
 
216
숨바꼭질이 되고 술래잡기가 되었다.
 
217
아름드리 소나무를 새에 두고 뺑뺑이도 돌았다. 골로 나려 뛰고 메 등으로 기어올랐다.
 
218
그들은 나물 보구니가 어디 있다는 줄은 잊어버리고, 즐거운 장난에 발 닿는 곳으로 마구 닫고 마구 쫓았다.
 
219
"어, 이게 웬 야단이야!"
 
220
수진에게 잡힐 듯 잡힐 듯하여 엎드러지며 고꾸라지며 앞뒤 분간도 없이 줄달음을 치는 창화의 귓결에 점잖고 꺽꺽한 소리가 떨어졌다.
 
221
창화는 걸음을 주춤 멈추고 소리나는 곳을 돌아다보았다. 이게 운명적 순간일 줄이야.
 
222
거기는 젊도 늙도 않은 한 축이 모이어 술상을 벌여 놓고 봄놀이에 한창 흥이 겨운 모양이었다.
 
223
여럿의 시선은 창화에게로 쏠리었다.
 
224
일순간 술잔도 멈춰지고 말소리도 끊어졌다. 그들은 창화의 뛰어나게 아름다운 얼굴에 넋을 잃었던 것이다.
 
225
"고것 참 예쁘구나!"
 
226
술 묻은 수염을 쓱 닦고 시뻘건 얼굴을 앞으로 내밀어 좌중에 제일 낫살이나 먹은 듯한 위인이 입을 열었다.
 
227
"과연 절색인데……."
 
228
"우리는 이 날까지 괜히 헛돌아다녔구려."
 
229
"아주 됐는데 됐어."
 
230
"고것 그대로 꼴딱 집어삼켜도 목구녕에 걸리지도 않을 것 같은데."
 
231
창화는 무안해서 주춤 걸음을 멈추었다가 다시 몸을 돌려 가려고 할 제, 그 맨 처음에 말을 꺼낸 ‘시뻘건 얼굴’이 벌떡 일어나서 창화 가까이 왔다.
 
232
"얘 아가, 거기 잠깐 있거라. 내 좀 물어볼 말이 있으니."
 
233
창화는 어른 대접으로도 그대로 내빼자는 수도 없었다.
 
234
수진은 머쓱하여 저만큼 떨어져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235
"얘, 아가! 너의 집이 어디냐?"
 
236
그 시뻘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벙글벙글 흘리며 꽤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237
"그건 알아 뭘 하셔요?"
 
238
창화는 그 위인의 기색을 살피며 쌀쌀하게 대꾸를 하였다.
 
239
"아니 저, 아니 저, 그런 게 아니라……."
 
240
그 위인은 꾸며대노라고 잠깐 애를 쓰는 듯하더니,
 
241
"그런 게 아니라, 너 아버지 계시지?"
 
242
"네 계셔요."
 
243
"오옳지, 그러면 그렇지.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오래 못 만난 친구 하나 가 있는데, 그 친구에게 꼭 너 같은 딸이 있었단 말이야. 알아듣니? 그래서 말이야. 네가 어디 사는 걸 알면 내가 좀 따라가 보겠단 말이야."
 
244
창화는 자기 아버지에게 별로 친구라고 찾아오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염량세태(炎凉世態)에 벼슬도 떨어지고, 병들고 가난한 친구를 찾는 사람이 쉽지 않은 탓이리라.
 
245
"그 친구 어른의 함자가 누구신데요?"
 
246
영리한 창화는 이 위인의 어물어물하는 수작이 암만해도 수상쩍어서 한번 따져보았다.
 
247
"함자, 함자? 글쎄, 함자고 뭐고 만나보면 자연 알 테니까, 너의 집이 어디있다는 어림만 알으키라누나."
 
248
창화는 의심이 더럭 났으나, 구태여 제사는 데를 아니 가르쳐 줄 까닭도 없었다. 아무리 총명한 창화이었지만, 제 집을 알리는 게 어떻게 무서운 결과를 맺을지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던 것이다.
 
249
"사자 강둑에서 얼마 들어오지 않는 버들골에 살아요."
 
250
마츰내 순순히 대답을 하고 말았다.
 
251
"오! 그러냐. 그렇다면 바루 그 친구가 적실하구나."
 
252
‘시뻘건 얼굴’은 덩실덩실 첨이라도 출 듯이 기뻐하다가 수진을 힐끗 바라다보며,
 
253
"저 총각은 누구냐? 너 오라비냐?"
 
254
넌지시 묻는다.
 
255
"……."
 
256
창화는 다시 더 대꾸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몸을 홱 돌리어 종종걸음을 쳐서 나물 보구니 둔 데를 찾아갔다.
 
 
257
창화는 얘기가 예까지 이르자 목에 메이는 듯이 잠깐 말을 끊었다.
 
258
새벽 바람이 일어나는지 장막이 펄렁펄렁하고 켜켜이 촛농 앉은 촛불이 거물거물 꺼지려 한다.
 
259
창화는 다시 심지 끄트머리를 떼어내었다.
 
260
"그러면 그 부소산에서 술을 먹던 자들이 임자(任子)네 집 구종들이었나요?"
 
261
흑치상지는 의외의 애틋한 얘기에 끌려들어 뒤끝을 재촉하는 의미로 무거운 입을 열었다.
 
262
창화는 한 번 길게 한숨을 쉬고 나서 말끝을 이었다.
 
263
그렇습니다 구종은 " . 아니라도 임자의 문객들이었습니다. 주인 대감의 은밀한 명을 받고 미색을 찾으려고 산지사방 싸지르는 작자들이었습니다.
 
264
이자들의 눈에 띄고 말았으니 저의 운명은 벌써 작정이 되고 만 것이었습니다. 만일 그날, 부소산으로 나물만 캐러 가지 않고, 그 방정만 떨지를 않았던들 저의 운명은 또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지요. 그자가 능청을 부리는 바람에 혹시 정말 아버지 친구나 되는 줄 알고, 사는 동네 이름까지 꼬박이 대어 주고도 신지무의(信之無疑)하고 사흘을 지냈습니다. 사흘 되던 날 아닌 밤중에 별안간 문간이 들레며 문을 열라고 야단야단을 칩디다. 가까운 일가친척이 없으니 밤중에 찾아올 이도 없었지만, 열라는 문을 아니 열자는 수도 없어서 저와 저의 어머니가 진둥한둥 일어나서 대문 빗장을 벗기고 말았습니다. 저를 잡으러 오리라고는 꿈엔들 생각을 하였겠습니까!
 
265
창화는 지금 생각해도 분한 듯이 몸을 바르르 떨었다.
 
266
"벙치 쓴 놈에, 패랭이 쓴 놈에, 십여 명이 거침없이 문 안으로 쑥 달겨 들었습니다. 종놈에게 횃불을 잡히고 앞장을 서서 들어온 놈이 바루 그 날 부소산에서 본 얼굴 시뻘건 작자이었습니다. 그자는 대번에 저를 알아보고, ‘이 색시다, 이 색시다! 곱게 모시어라.’하고 여러 놈에게 명령하였습니 다. 그제야 어린 맹추 같은 소견에도 이자들이 나를 잡으러 왔구나 생각을 하고 겁결에 마루로 뛰어올라 안방으로 숨으려 하였으나, 안방 문을 채 열 기도 전에 그 자들의 쇠깍지 같은 손은 벌써 저를 붙들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쿨룩쿨룩 기침을 하시고 방에서 뛰어나오시며, ‘이놈들이 웬놈들이냐? 이게 무슨 해괴한 짓이냐!’ 호통을 치셨으나 그자들이 들은 척이나 하겠습니까? 어머니께서도 울며불며 저를 잡아가는 놈에게 몸부림을 치시고 매어 달렸으나 수많은 장정을 잔약한 부인네의 혼자 손으로 어떻게 당해낼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등채를 밀리어 어느 결에 골목 밖을 나오게 되고, 거기 마츰 등대해 놓았던 교군에 태이어 풍우같이 몰려갔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치고 몸부림을 하였지만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267
"저런, 죽일 놈들이……"
 
268
상지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분해 하였다.
 
269
"화적떼도 못할 짓, 그것이 일국의 재상이 할 노릇일까? 천참만륙을 해도 죄상이 남을 놈 같으니!"
 
270
"교군 속에서 바둥거리고 있을 제 ‘창화야! 창화야!’ 세차게 부르짖는 귀에 익은 소리를 듣고 정신이 번쩍 나서 교군 휘장을 뜯고 뛰어나오려고 하였으나, 여러 놈에게 붙잡히어 옴치고 뛸 수도 없이 몰려가는데, 등뒤에 서는 연송 아얏 ‘ ’ 소리가 나고 ‘창화야! 창화야!’ 부르는 애닯은 목청 도 나중에는 실낱같이 들려왔습니다.
 
271
수진 총각이 잠결에도 저의 집에 무슨 야료가 생긴 중 알고 뛰쳐나와 이 광경을 보고 달겨들다가 무지한 그놈들에게 무진 매를 맞고 쓰러진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때 제 마음이 어떠하였겠습니까?
 
272
창화의 눈에는 눈물이 핑하고 고이었다. 그때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었던 추억이 지금도 새삼스럽게 비감한 생각을 자아내는 듯.
 
273
"그래서 저는 천만 가지 원한을 품은 채로 임자의 집사람이 되었습니다.
 
274
처음에는 절곡(絶穀)이라도 하고 기어이 죽으려 하였으나 며칠 후에는 어머니께서 오셔서, 이왕지사 팔자가 기구하여 이렇게 된 받자에야 악지를 부리면 무엇 하느냐, 대감이 그다지 인후하시니 혈마 너 하나야 거두어 주시지 못할 테냐, 아무 염려 말고 밥 발 먹고 잘 있으라고 달래시겠지요. 아마 임자가 사람을 보내어 어머님을 불러오고, 꾀음꾀음한 모양 같더군요. 어머님의 권에 못 이기어 필경 밥을 뜨게 되고, 세월이 약이라 그럭저럭 모진 목숨을 부지는 해 왔지마는, 구곡간장에 맺히고 서린 원한이야 어느 때인들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275
창화는 흐른 때 모르는 눈물을 다시 닦았다.
 
276
"아버지 어머니 생활은 제가 모시고 있을 때보담 얼마쯤 나아진 것 같았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서는 번번이 들어오시지는 못하였지만, 꽤 반반한 차림차림을 한 계집종이 저의 집에서 왔노라 하고, 아버지 어머니의 전갈을 전해 주었습니다. 우정 전갈이 아닐진댄 제 있을 때 없던 종이 있는 걸 보아도 혹시 집에서 데렸거나, 그렇지 않으면 임자가 계집종 중에서 뽑아 보낸지도 모릅니다. 그년의 입으로 오늘은 피륙을 얼마를 들여왔네 어제는 돈을 몇 바리를 실어오고, 그저께는 쌀을 몇 섬을 가져왔네 하고, 임자의 후덕한 것과 인자한 것을 입에 침이 없이 칭찬을 하였습니다. 물론 제 멋대로 하는 말이 아니요, 아버지의 전갈일세, 어머니의 부탁일세 하고 이런 소식 을 전해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도모지 곧이 들리지 않았으나, 그년이 생판으로 거짓만 주워댈 리도 없겠으니 임자가 뒷구녕으로 전곡간 저의 집에 보내주는 것은 참말 같기도 하였습니다. 벌어들이는 이 없는 간구한살림이 풍성풍성해진 것이 어린 소견에 적이 위로가 되지 않음이 아니었지만, 이 몸을 겁탈해 온 별미로 내 부모에게 쌀 말이라도 대어 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임자에게 대한 감사한 생각은커녕 배심은 더욱 심해갈 뿐이었습니다. 딸년은 옥살이보담 더 못할 노릇을 하는데 빼어내 올 생각도 않으시고, 그 흉한 자의 돈과 쌀을 받아 자시는가 생각하면 황송한 말이나 부모님에게까지 배심이 들었습니다(背心). 이래 마음을 도사려 먹어도 원통하고, 저래 생각을 돌려보아도 분 덩이만 치밀어서 거의 눈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277
창화는 가쁜 듯이 잠깐 숨을 돌리었다.
 
278
"그러하시겠지. 그러하시겠지. 그 노릇이야 어디 사람으로 차마 당할 노릇인가!"
 
279
상지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괴탄(愧歎) 괴탄하였다.
 
280
"이것은 부끄러운 말씀입니다마는 장군님께 야 무엇을 기이리까?"
 
281
하고 살짝 얼굴을 붉히고 나서 창화는 다시 제 신세타령으로 돌아갔다.
 
282
"부모님에게까지 배심이 들면 들수록 일구월심에 잊혀지지 않는 것은 수 진 총각이었습니다. 앞뒷집에 같이 살고 신세도 많이 진 탓에 바이 모르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무슨 이렇다 할 아무 까닭이 없었거든 이렇게 떠나고 보니, 이렇게 다시 만나랴 만날 수 없게 되고 보니 그런지 여간 마음이 쓰이고 간절하지가 않습디다그려. 그 시꺼먼 눈썹과 어글어글한 눈매가 자나깨나 눈앞에 밟히어 견딜 수가 없습디다그려. 어느 때는 밖에서 ‘창화야!’하고 부르는 소리가 정녕 난 듯하여 버선발로 뛰어나가 본 적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사람이 그다지도 달뜰까요? 호!"
 
283
창화는 제 자신이 어이없다는 듯이 방싯 웃고 고개를 숙이었다. 그럴싸해서 그런지는 모르나 그 보얀 목덜미도 살짝 붉어지는 것 같다. 천군만마와 검극이 서리 같은 데를 필마단기로 드나드는 이 여장부도 이런 교태는 아주 숫색시다.
 
284
흑치상지의 머리에는, 고량부리거리에서 뭇사람들의 돌팔매 앞에도 굽히지 않다가 자기에게만 고개를 다소곳하고 수줍어하던 정경이 불현듯 떠올랐다.
 
285
상지는 이상한 충동을 느끼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에는 어느 결엔지 창화는 다시 몸을 바루잡고 그 범하지 못할 돌올한 기상을 회복하고 말았다.
 
286
"참 별말씀을 다 여쭙니다마는 그럴 적마다 저의 마음은 야릇하게도 군 성거리었습니다. 세상에 모든 일이 같잖고 시들해지고, 되는 대로 되어라 하는 되지 못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임자(任子)가 권하는 대로 술을 몇 잔씩이라도 받아먹고, 어려서 배우지 못한 춤도 추라는 대로 제치고, 할 줄 모르는 노래를 흥겨운 듯이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아주 참 화냥년이 되어 버렸지요." 하고 창화는 그 유난히 붉은 입술을 빼쭉하였다. 그 얼굴은 한 없이 번화해지면서도 쌀쌀한 찬 기운이 도는 것 같다.
 
287
"이런 말씀을 하면 저의 발뺌 같지만서도 짐작하시다시피 소위 백제 재 상가의 생활이란 (宰相家) 오죽 난잡합니까. 그중에도 임자가 우두머리였으니 말할 것도 없지요. 정실은 고만두고라도 첩만 저 알기 열일곱이었으니까요. 개중에는 별의별 잡년이 다 있었습니다. 자연 저도 물이 든 것이겠지요. 밤마다 놀이요, 날마다 모꼬지가 벌어졌습니다. 술타령에 노래 타령에, 나중에는 음탕한 꿈이 꼬리를 맞물고 이어나갈 뿐이었지요. 이런 난잡한 생활을 얼마쯤하고 나니 제가 오늘날까지 배우고 들은 것이 모두 거짓이요 헛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외동딸이라 남의 아들 부럽지 않게 학문을 가르칠 생각이시던지, 제가 철을 알 만한 때부터 우리 나라의 충신 의사의 얘기도 해서 들리시고, 구멍 틈틈이 당서(唐書)도 알으켜 주셨습니다.
 
288
소위 그 나라의 성경현전(聖經賢傳)이라는 것도 많이 뜯어 배웠습니다. 물론 그야 개 머레 먹듯 하였고 그 참된 뜻이야 알았겠습니까마는, 그러나 신하가 임금을 어떻게 섬겨야 하고, 자식이 어버이를 어떻게 받들어야 효도 요, 또 안해가 어떻게 남편을 공경하여야 열녀가 된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은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 와서 겪어 보니 그것이 백주에 빈말일 뿐 아 니라, 차라리 그 정반대의 길을 밟는 것이 한 세상을 즐겁게 유쾌하게 살아 나가는 길인 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고요한 새벽, 잠이 깨이어 저의 더럽고 요망스런 마음을 들여다볼 제 내가 어찌하면 이렇게 변했나 하고 스스로 놀래기도 하였지마는 그 생각은 잠시 잠깐이요, 눈만 뜨면 환락을 일삼고 투기와 시기에 몸둘 곳을 몰랐습니다. 이런 못된 년이 어디 또 있을까요?"
 
289
하고 창화는 상지 앞에 차마 얼굴을 들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수그렸다.
 
290
"먹에 가까우면 검어진다는 옛말도 있지 않습니까? 보고 들으시는 것이 그러하니 아무리 좋은 바탕인들 어찌 변하지를 않을 수 있겠습니까?"
 
291
상지는 위로하듯 말하였다.
 
292
"이럴 수가 있을까, 이럴 리가 있을까? 하면서도 저의 마음은 타락의 구렁텅이로 굴러 떨어져갈 뿐이었습니다. 나종에는 그렇게 그립고 그립던 부모님 생각조차 잊어버렸습니다. 이따금 수진 총각의 생각을 하면 가슴 한 모서리가 멍하고 우는 듯하였으나 그것도 그때뿐이고, 에라 지난 일을 생 각하면 무엇하느냐, 사람이란 옳든 그르든 한 세상을 떵떵거리고 지내면 고만이라, 의리를 찾으면 무엇 하며, 인정을 차리면 무엇 하느냐 하고, 고개를 쳐들려는 실낱 같은 본마음을 눌러 버렸습니다. 수진 총각만 해도 그때는 나이 어려서 그렇게 순진했지 저도 임자만큼 나이 먹고 임자만큼 지위만 얻으면 무슨 짓을 어떻게 저지를지 누가 아느냐, 세상에 남자란……."
 
293
하다가 창화는 말을 끊고 상지의 기색을 살피듯 쳐다보며,
 
294
"장군님도 남자신데 이런 말씀을 여쭈면 여간 노하지 않으실걸요."
 
295
하며 그 예쁘장한 눈매를 살짝 깔아 메치었다.
 
296
괜찮습니다 나도 분명 " . 남자는 남자입니다마는 남자 앞이라고 남자 흉을 못 보실 거야 조금도 없습니다."
 
297
상지도 말눈치를 알아차리고 빙글빙글 웃어 보였다.
 
298
"그러면 말을 마구 합니다. 눌러 들어 주세요. 호호, 세상에 남자란 의 리부동한 것, 제 쾌락을 위하여는 양가집 처녀도 함부로 뺏아오고, 제 지위를 위하여는 아무리 절친한 친구라도 심지어 제 친족이라도 파리 목숨같이 죽이는 것, 제 부귀와 영화를 누리자면 제 임금도 헌신짝같이 버리고 적국과 내통도 하는 것……."
 
299
창화의 입가에는 찬바람이 솔솔 일어나는 듯하다.
 
300
"이따위 짐승에게 몸을 바치고 정을 쏟고 정절을 지킨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로 생각을 하였습니다. 내 몸만 살아나고, 다시 영화를 본다면야 남편이고 뭐고 돌아볼 것도 없이 적장에게 교태를 부린들 어떠하랴……."
 
301
"허!"
 
302
상지도 어이없다는 듯이 뜻도 없는 말이 아니요 웃음소리도 아닌 감탄사를 발하고 말았다.
 
303
창화는 갑자기 몸을 도사리었다.
 
304
"제가 참으로 매친 년입니다. 장군님 앞에 버릇없이 무엄하게 이 무슨 말 따위예요?"
 
305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306
"그런데 고량부리에서 장군님을 뵈옵고, 저의 매친 생각은 벼락을 맞은 듯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저에게는 천변지이(天變地異)였습니다.
 
307
세상에는 남자 중에도 남자, 참으로 참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위하는 의인이 있구나……."
 
308
예까지 말하고 창화는 입을 담쳐 버렸다.
 
309
"잘못 알아보신 게지. 어서 얘기나 뒤를 이으시지요."
 
310
상지는 면구한 듯 만족한 듯 빙그레 웃었다.
 
311
창화는 부끄러워서 한동안 몸을 가누지 못하는 듯하였다. 무릎 위에 질척 미끄러진 듯한 은어 같은 손이 가늘게 떨린다. 한참 만에야,
 
312
"인제 제 얘기는 끝이 났어요."
 
313
모기 같은 가는 소리로 속살거리었다.
 
314
<未完 (미완)>
【원문】깨어진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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