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한글 
◈ 흑치상지 ◈
◇ 총각과 동행 내외 ◇
카탈로그   목차 (총 : 8권)     이전 4권 다음
1939년
현진건
 

1. 총각과 동행 내외

 
2
고량부리에서 맡있산(任存山, 임존산)으로 가는 노정은 아홉 봉재(峰嶺, 봉령)를 휘어넘고 평지길로 한 십 리쯤 걷다가 또다시 산길로 접어들어, 굉이산 고개 하나만 타고 나려서면 탄탄대로로 가까운 삼십 리 길이다.
 
3
굉이산에도 가을은 깊었다.
 
4
밤나무 참나무의 누른 잎사귀는 거의 다 떨어졌고, 푸른 소나무 사이사이에 멋대로 자란 이름 모를 풀들이 쥐면 바싹바싹할 듯한 메마른 담갈색 진 몸을 꼿꼿이 세웠는데, 어떤 놈들은 천연 갈대 모양으로 솜같은 허연꽃을 삐죽이 빼어문 것도 쓸쓸하였다.
 
5
여느 때에도 행인의 발자최가 드문 산길, 가뜩이나 요새 같은 난리 통에 지나가는 나그네가 많을 리 없었다. 잔디 위에 꼬불꼬불 실낱 같이 난 길도 희미해져서 알아볼 둥 말 등하게 되었다. 이따금 청승맞은 바람이 낙엽을 구을리며 뿌시럭뿌시럭 지나갈 뿐.
 
6
밤은 술시나 겨웠다.
 
7
보름 지난 이지러진 달이 슬며시 떠올랐다.
 
8
그 으릿한 흰 빛을 띠고 웬 젊은 남녀가 가만가만히 발소리를 죽이며 산길을 더듬어 올라온다.
 
9
남자는 거무트레한 얼굴과 떡 벌어진 어깨판이 기운 꼴이나 세어 보이나, 인중(人中)이 좀 긴 듯한 입모습 언저리는 애티가 나고, 뚱그런 눈은 자못 양순해 보이었다.
 
10
여자는 둥글넓적한 얼굴에 살결이 희고, 쌍꺼풀 진 눈매에 귀염성이 뚝뚝 듣는 듯하다.
 
11
남자는 괴나리 보따리를 해 짊어지고 감발을 하였고, 여자도 짚세기를 신은 꼴이 행장은 자못 초초하였으나 입성은 그 행장에 걸맞지가 않았다. 아랫두리는 흙이 묻고, 몬지가 앉고, 어룽이 지고, 말이 못 되었으나마 웃막이는 비록 구김살은 졌을망정, 달빛에도 지르르 윤이 나는 것을 보면 명주나 비단 일시 분명하였다.
 
12
여자는 남자의 걸음을 따라오느라고 진둥한둥 종종걸음을 치면서도 째기 발을 디디고, 이따금씩 뒤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다.
 
13
거진 산 중허리쯤 다다랐을 제 두리번두리번 사면을 살피고 있던 여자는 남자에게 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14
"이게 무슨 소리예요?"
 
15
남자는 발길을 멈추고 힐끗 여자를 돌아다보며,
 
16
"무슨 소리?"
 
17
"어디선지 무슨 소리가 자꾸 나지 않아요?"
 
18
둘은 나란히 서서 한동안 귀를 기울였다.
 
19
바람도 자고 적적한 주위는 죽은 듯이 종용하다. 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20
"소리가 무슨 소리요? 얼들은 게지."
 
21
"아까는 분명히 나던데. 수럭수럭, 버썩버썩 하는 소리가……."
 
22
하고 여자는 무안한 듯이 고개를 수그렸다.
 
23
또한동안 걸었다.
 
24
"저것 봐요. 여보, 저 소리……. 여보."
 
25
여자는 참다못해 또 걸음을 멈추고 앞에 가는 남자를 불렀다.
 
26
"소리가 무슨 소리여?"
 
27
하고 남자가 다시금 발길을 멈추자,
 
28
"아이 무서!"
 
29
하고 여자는 예닐곱 걸음쯤 떨어진 남자에게로 뛰어갔다.
 
30
과연 소리는 났다.
 
31
수럭수럭, 버썩버썩!
 
32
여자가 남자 옆에 와서 서자 또 이상한 소리는 사라졌다.
 
33
남자는 여자의 뒤를 살펴보다가 웃어대었다.
 
34
"어허 여보! 소리는 임자한테서 나는구려."
 
35
"네?"
 
36
하고 여자도 제 뒤를 돌아보았다.
 
37
제 뒤에 기다란 피륙이 꼬리처럼 달려서 늘어진 것이 보이었다.
 
38
여자의 얼굴은 대번에 새빨개졌다. 그는 질팡갈팡 오느라고 제 허리띠가 끌러진 것을 몰랐던 것이다.
 
39
덴겁을 하고 잡아 올려 보매, 넓은 허리띠 끄트머리가 땅에 구을면서 낙엽을 둘둘 말아 제법 불룩하게 싸 놓았다. 이것이 낙엽 위를 걷는 대로 끌려오고, 또 발부리에 밟히는 낙엽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서 그 이상한 소리를 낸 것이었다.
 
40
"어허허, 이거야말로 제 발소리에 제가 놀라는 격이구료. 어허허."
 
41
남자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너털웃음을 내어놓았다.
 
42
주고받는 말씨로 보아 그 젊은 남녀는 애송이 부부간임에 틀림이 없었다.
 
43
애송이 안해는 귀밑까지 빨갛게 물을 들이며, 옷 매무새를 곤치고 섰다가 남편이 마음놓고 웃는 것을 보고 질색을 하였다.
 
44
"어디라고 그렇게 웃으세요?"
 
45
"왜 웃으면 어떤가 머? 어허허."
 
46
남편은 한번 터뜨린 웃음을 좀처럼 걷잡지 못하였다.
 
47
"또 그 흉악한 당병 놈들이 웃는 소리를 듣고 쫓아오면 어떡해요?"
 
48
"어디 그 당병 놈들이 쫓아오는 소리를 듣고 놀랬어야 말이지. 우리 발 자최를 우리가 듣고 놀랬으니 우습지 않아, 어허허."
 
49
"그렇지만두……."
 
50
"그렇지만두는 또 머야?"
 
51
"혹시나 오면 어떻게 해요!"
 
52
안해는 아직 놀랜 증이 가라앉지 않아, 그 조그마한 가슴을 팔딱거리었다.
 
53
"이 밤에 그 놈들이 오기는 어디로 온단 말이오? 나도 인제 병정이 되면 그 놈들을 마구 때려잡을 텐데……. 어디 이 놈들 왔담봐라."
 
54
남편은 당병이 제 눈앞에 나온 것같이 팔을 불끈 걷고, 한바탕 해 내는 시늉을 하다가 또다시 웃어 제친다.
 
55
"해낼 때 해내시더라도 제발 웃지 마세요."
 
56
"제발 좀 웃지 마라. 으흐흐"
 
57
남편은 짓궂게 더 소리를 높여 웃는다.
 
58
"웃지 마시래도 또 저러시네, 원 내."
 
59
안해는 남편을 말리면서도 그 쾌활한 웃음소리에 적이 마음이 놓인 듯 저도 해죽이 웃는다.
 
60
"여보, 좀 앉구료. 다리나 쉬어 갑시다."
 
61
앉은 남편은 아직도 서 있는 안해를 쳐다보았다. 달빛 안은 안해의 얼굴은 더 어여뻐 보이었다.
 
62
"언제 앉고 있어요? 어서 가셔야지."
 
63
"갈 때 가더래도 좀 쉬어 갑시다그려."
 
64
"한 시가 바쁘시다고 내동 밤을 도와 가신다더니."
 
65
"가기는 빨리 가야겠지만 다리가 아프니 어떡하오?"
 
66
"아무리 다리가 아파도 갈 데를 가서 마음놓고 쉬어야 될 것 아녜요?"
 
67
"여보, 임자 다리는 무쇠 다리요? 그래 다리가 아프지를 않단 말이오?
 
68
어서 앉아요."
 
69
입을 방싯방싯 여는 대로 달빛이 앵두 같은 입술 속으로 넘나들어, 하얀 이빨이 살금살금 숨바꼭질을 하는 양에 홀린 듯이 쳐다보며, 남편은 제법 늦장을 부리었다.
 
70
안해는 마지못해 남편의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71
남편은 안해의 어깨를 가볍게 밀치며,
 
72
"여보, 펄썩 좀 주저앉구려. 그렇게 쪼그리고 앉아서야 어디 다리를 쉬는 거요? 곡경을 치르는 게지."
 
73
하고 저는 두 다리를 어린애 쭉쭉이 하듯 쭈욱 뻗었다.
 
74
"그래, 임자는 정말 다리가 아프지 않소?"
 
75
"아프기야 왜 아프지를 않아요?"
 
76
안해도 다리를 펴며, 조그만한 주먹으로 제 다리를 토닥토닥 쳐 보였다.
 
77
"좀 아프겠소."
 
78
하고 남편은 안해의 다리를 슬슬 만져 주다가,
 
79
"발도 많이 부르텄지?"
 
80
하고 묻는다.
 
81
"그러먼요."
 
82
"그럼 발을 좀 벗어 봐요."
 
83
"왜 발은 벗으래요?"
 
84
"얼마나 부르텄나 어디 보게."
 
85
"난 싫어요."
 
86
"싫기는 왜?"
 
87
"벌써 몇 날 며칠은 걸은걸."
 
88
"그러니 얼마나 부르텄나 보자는 것 아니오?"
 
89
"그 발꼴이 오죽해요?"
 
90
안해는 상그레 웃었다.
 
91
"오죽하면 부부간에 머 어떤가?"
 
92
"그래두……."
 
93
"그래두는 뭐람?"
 
94
남편은 부득부득 안해의 발목을 잡아당기어 짚신을 벗겨 보고 또다시 웃는다.
 
95
이 짚신이 이렇게 " 헐거워졌으니 끄는 대로 소리가 좀 났겠소? 허."
 
96
아까 안해가 놀란 또 한 가지 원인을 발견하고, 남편은 또 웃다가,
 
97
"발이 왜 그렇게 작았더람? 몇 번을 졸라매었는데 또 그 모양이니."
 
98
"남정네 신발이 어떻게 여편네한테 맞기를 바래요?"
 
99
"신까지 안 맞는 걸 신었으니 발이 좀 아팠을까? 어서 버선을 벗구려."
 
100
그래도 안해가 망실망실하고 있을 제, 남편은 제 손으로 흙과 먼지가 켜켜이 앉아서 몬지투성이가 된 안해의 버선을 벗겨내었다.
 
101
옥 같은 발이 드러났다.
 
102
남편은 안해의 발바닥을 만져보고 놀래었다.
 
103
"이거 대단하구려. 사뭇 꽈리같이 부르튼 것이 여러 군델세."
 
104
안해는 수줍은 듯이 발을 끌어들였다.
 
105
"괜찮아요. 괜찮아요."
 
106
"괜찮다니, 이거 큰일 났네. 그 발을 가지고 어떻게 길을 걸어?"
 
107
남편은 한걱정을 한다.
 
108
"발 좀 부르튼 거야 어때요? 그 당병 놈들한테 안 붙들린 것만 다행이지요."
 
109
"원, 흉악한 놈들, 하필 남의 첫날밤에 달겨든담?"
 
110
"참 아슬아슬도 했지요. 하마터면……."
 
111
안해는 지긋지긋한 추억에 진절머리를 쳤다.
 
112
"그 애를 쓰며 막 큰 낭자를 끌르고 난 판에……."
 
113
남편도 어이없이 웃었다.
 
114
난리가 났다 하여 왼 동리가 피란을 간다고 발칵 뒤집히었지만, 내일 모레로 날짜까지 받은 혼인을 물릴 수도 없었다. 당병이 쳐들어 온다기로서니 혈마 이 두메에야 그렇게 속히 닥치랴 하고 술렁술렁하면서도 두 집은 그대로 쳐져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혼인날 낮이 겨워도 아무 일이 없었다. 사 람이 오고, 행례를 하고 저녁이 되었다. 텅 빈 동네라 손님도 없고, 일가친척들도 모인 이가 적어서 애저녁부터 불야불야 신방을 차리었다. 내일이라도 피란길을 떠나야겠으니 하룻밤이라도 왼 밤을 지내도록 일찌감치 자게 한 것이었다.
 
115
병풍을 철옹성같이 둘러싼 신방에 벌써 원앙금침이 펼쳐 있고, 유복한 부인네를 따라 들어오는 새색시의 긴 치맛자락에 화촉이 벌룽벌룽 춤을 출 때도 채 유시말(酉時末)이 되지 못하였다.
 
116
나이 찬 신랑의 마음은 바쁘다.
 
117
눈을 나리깔고 그린 듯이 앉은 신부에게 보아 주지도 않는 웃음을 벙글벙글 두어 번 보내자마자, 신랑의 떨리는 손은 어느새 다소곳한 큰 낭자로 올라갔다. 어디를 어떻게 끌러야 좋을지 몰라 한동안 애를 쓰는 판에 봉잠이 빠지자, 낭자는 저절로 떨어졌다. 쏟아지는 듯이 나려진 긴 머리를 다시 틀어 올리느라고 고 비끼었을 제, 별안간 개들이 동네가 떠나가도록 사납게 짖었다. 주인은 도망을 갔지만 개들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118
"당병이 온다!"
 
119
누구인지 외쳤다.
 
120
혼인집은 벅적거렸다. 장모가 신방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와서 어리둥절 하며 일어선 신랑 신부에게 숨찬 소리로 부르짖었다.
 
121
"어서 달아나거라, 어서 달아나거라!"
 
122
신부가 머뭇머뭇하니까 장모는 그 앙탈하는 손을 사위 손아귀에 넣어 주었다.
 
123
"어서 네 남편과 달아나거라. 그 놈들은 새색시만 보면 날로 잡아먹는단다. 어서 어서! 냉큼냉큼!
 
124
작별 인사 여부도 없이 신랑 신부는 등채를 밀리어 뒷문으로 쫓겨 나왔다.
 
125
우둥우둥, 뚜벅뚜벅, 산란한 사람 자최와 말 발굽소리를 등뒤에 들으면서 갓 만난 내외는 천방지축으로 달아났던 것이다.
 
126
"여보, 그 판이 어느 판이라고 얼핏 따라나서지를 않고 얼무적얼무적했단 말이오?"
 
127
남편은 안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놀리었다.
 
128
"부끄러우니 그랬지요."
 
129
안해는 지금도 얼굴을 붉힌다.
 
130
"그래도 집 문밖을 나서니 곧잘 따라오던걸."
 
131
"그럼 어떡해요?"
 
132
"아마 그때가 활 서너 바탕쯤은 되었지?"
 
133
"어느 때가 말씀예요?"
 
134
"왜 한창 달아나다가 숨이 턱에 닿아서 잠깐 내가 걸음을 멈추고, 임자를 돌아볼 때 말이오."
 
135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136
"그 때 말이야. 내가 자세히 보니까 임자가 내 손을 꼭 쥐고 있더구려.
 
137
임자의 손에서 땀이 촉촉이 나서 내 손에도 땀이 배지를 않았겠소."
 
138
안해는 고개를 푹 숙인다.
 
139
"그랬소? 안 그랬소? 그래도 내 말이 거짓말이오?"
 
140
"……."
 
141
"왜 대답을 못하오? 고개를 좀 들구료."
 
142
남편은 안해의 턱에다가 제 손을 괴이어 숙인 얼굴을 일으켜 세웠다.
 
143
안해는 발그스름한 뺨을 주체를 못하며 첫날밤 모양으로 눈을 나리깔았다.
 
144
남편은 다짜고짜로 안해를 얼싸안고야 말았다.
 
145
그 따끈따끈하게 부끄럼에 타는 뺨에 제 뺨을 비비대며 입술을 찾았다.
 
146
안해는 도래도래 고개를 돌리며,
 
147
"누가 보면 어떡해요?"
 
148
하고 앙탈을 한다.
 
149
"이 밤중에, 이 산골에서 보기는 누가 본단 말이오?"
 
150
"그래도 길가가 아녜요?"
 
151
"길가면 어떤가?"
 
152
남편은 끝끝내 입을 맞추고야 말았다.
 
153
"킥킥!"
 
154
별안간 바루 자기들 등뒤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155
으슥한 산골에 난데없는 웃음소리! 정열에 겨웠던 애송이 부부는 질겁을 하고 떨어지며, 호동그래진 눈으로 소리나는 곳을 돌아보았다.
 
156
거기는 늙은 소나무가 어둑하게 들어선 데다가, 더구나 달 그늘이 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157
"그게, 그게 무슨 소리예요?"
 
158
안해는 눈에 띄도록 가슴을 발랑거리며 허전허전하는 소리를 떨었다.
 
159
"또 아까 모양으로 헛들은 것 아니오?"
 
160
남편도 무슨 소리를 들은 법하였으나, 한창 안해를 시달리느라고 안해처럼 똑똑히 듣지는 못한 모양이다.
 
161
"아녜요. 이건 분명 사람의 웃는 소리예요."
 
162
"이 산중에 웬 사람이 있어 웃는단 말이오?"
 
163
"내 귀에는 정녕코 들렸는데……."
 
164
"무슨 새 소리인지 모르지."
 
165
"아닌 밤중에 무슨 새가 울어요?"
 
166
"왜 밤이라고 새가 안 우나? 올빼미도 울고, 부엉이도 울고……."
 
167
"아녜요, 새 소리는 아녜요."
 
168
"그럼, 무슨 소릴까? 도깨비가 나왔나 봐."
 
169
"아이 무서워라. 그런 말씀을 왜 하세요? 혹시 당병이 어디 으슥한 곳에 숨어 있는 게나 아닐까요?"
 
170
"그놈들이야 무엇이 겁이 나서 숨어 있겠소?"
 
171
"그럼, 정말 당신 말마따나 도깨빈가 봐. 우리 어서 가요. 자 어서 일어 나셔요."
 
172
안해는 몸을 도사리고 일어나려고 할 제,
 
173
"어허헛."
 
174
하는 너털웃음소리가 바루 뒤꼭지 위에서 떨어졌다.
 
175
안해는 벼락이나 맞은 듯이 그 자리에 푹 고꾸라지고 말았다.
 
176
"어허허, 사람 우스워 죽겠네."
 
177
자배기가 깨어지는 듯한 턱 갈라진 목소리가 뒤미처 일어났다.
 
178
남편도 등골에 찬 소름을 끼치면서 소리나는 곳을 쳐다보았다.
 
179
자기네가 앉은 뒷산 꼭대기 소나무 틈바구니에서 허여스름한 무엇이 뻐꿈 히 넘겨다보는 것 같아서였다.
 
180
"두 분이 재미있게 노시는데 이것 안되었구려. 그러나 너무 놀라지를 마시겨오. 허허."
 
181
"게 누구시오?"
 
182
남편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183
"누구라 한들 당신들이 아실 거요? 하지만 난 당신들이 겁내는 당병도 아니요, 또 도깨비도 아닌즉 안심을 하시겨오."
 
184
그러면 부부간에 주고 받은 수작조차 말끔히 다 들은 모양이다.
 
185
"무엇 하는 사람이오?"
 
186
남편은 이 별안간 나타난 방해자에게 화증을 더럭 내었다.
 
187
"뭣 하는 사람? 나도 길 가는 사람이오."
 
188
"어디로 가는 사람이오?"
 
189
"압다, 이건 힐난이 과하구료. 나도 당신네들 가는 데로 가는가 보오."
 
190
"우리 가는 데가 어디란 말이오?"
 
191
"시방 당신이 병정이 되려 간다고 하지 안 했소? 그렇다면 가는 곳이야 뻔하지 않소?"
 
192
"그러면 맡있산(任存山, 임존산)으로 간다는 말이오?"
 
193
남편은 불쾌하여 채쳐 물었다.
 
194
"그렇다는 밖에."
 
195
그 방해자도 퉁명스럽게 대꾸를 하다가,
 
196
"여보, 길동무!"
 
197
하고 척 돌라붙으며,
 
198
"내외가 동행을 하시는데 염치는 없소마는 나는 심심해서 죽을 지경이오. 우리 같이 동행을 좀 합시다. 당신네가 이리로 올라오실 테요? 내가 그리로 나려갈까?"
 
199
하고 묻더니 부부가 대답도 하기 전에 제 혼잣말로,
 
200
"에라, 길을 좀 밑지면 어떤가. 내가 나려가지."
 
201
중얼중얼하자마자 쿵하는 소리가 났다. 아마 나무 위에 나 올라앉았다가 뛰어나려오는 것이리라.
 
202
엉큼성큼 가까이 오는 것을 보니 떠꺼머리 총각이었다.
 
203
"놀라셨지요?"
 
204
싱글벙글 남편에게보다 안해에게 더 많이, 제법 깍듯이 인사를 하고, 앉기는 남편 곁에 와서 앉는다.
 
205
시꺼먼 얼굴에 코허리는 죽고, 콧구녕은 벌렁 위로 쳐들렸으나, 싱글벙글 웃는 넙죽한 입은 작난꾸러기로 보이었다.
 
206
이 난데없이 억지 길동무가 헤치고 달겨들자, 안해는 두어 자 간격이나 남편의 곁을 더 떨어져 앉았으나 정작 당자를 보니 우스웠으면 우스웠지, 아까 소리만 들을 때처럼 무섭지는 아니하였다.
 
207
"뉘 댁이시오?"
 
208
그 총각은 들어닥드미로 남편에게 인사를 청하였다.
 
209
"내 이름은 거북이라 하오."
 
210
"이 사람은 쾌돌이라 하오."
 
211
총각은 아주 의젓하게 제 이름을 대고 나서 안해를 건너다보며,
 
212
"저 아주먼네께도 인사를 드려야 할 텐데……."
 
213
하고 납청장(納淸場)이 된 콧잔등을 찡긋하였다.
 
214
안해는 그 하는 양이 우스워서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215
"말이 말 같지를 않소? 아주먼네는 왜 웃기만 하시는 거요."
 
216
하고 총각은 얼굴빛을 바루고 시비를 걸다가,
 
217
"자, 인사 절이나 받으시오."
 
218
하며, 앉은 채 코가 땅에 닿도록 절한 주기를 하고,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219
"이 사람은 쾌돌이라고 합니다."
 
220
안해는 쩔쩔매며 맞절을 하고 나서,
 
221
"저는 참꽃이라고 불러요."
 
222
하고 웃으며, 실룩거리는 얼굴을 제 무릎팍 위에 비비대었다.
 
223
"네 그러셔요? 참꽃, 참꽃, 이름도 좋기도 해라. 허허."
 
224
한 번 껄껄 웃고는 총각은 다시 남편을 향하였다.
 
225
"여보, 거북님. 그래 살기는 어디 사오?"
 
226
거북은 자청 길동무가 얼레발치는 것을 무슨 큰 구경거리나 생긴 듯이 바라보고 있다가,
 
227
"새촌 산다오."
 
228
"어규 새촌, 새촌이라면 예까지도 오륙십리는 더 되는데, 혼잣몸도 아니고 아주먼네를 데리시고 꽤 먼 길을 걸었구려."
 
229
거북은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230
"그런데 여보. 내 한 가지 물어볼 말이 있소. 어떻게는 아시지 마오마는……."
 
231
총각은 말을 이었다.
 
232
"병정이 되려 갈작시면 홑몸으로 갈 일이지 아주먼네는 왜 데리고 가는 거요? 고 동안이라도 서로 그리워 못 견딜 지경이면은 애당초에 병정 될 생각을 말든지……."
 
233
말을 잠깐 끊고 내외의 기색을 살피었다. 너무 제 말이 과하지나 안 했나 염려를 하는 모양이었으나, 동행들이 노여워하는 빛이 없는 것을 알아보자 또 철철거리었다.
 
234
"넨장 나 같은 놈이야 무 밑둥 같은 놈. 혈혈단신 홑몸이라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병정 노릇이나 하려 간다지만, 당신 같은 이야 꽃 같은 댁네가 있겠다, 뭣이 답답해서 병정 노릇을 하려 간단 말이오? 후우."
 
235
하고 제 신세를 생각하는지 그 벌룸한 콧구녕으로 긴 한숨을 뿜어내었다.
 
236
"원 저런 말 좀 보았나. 당나라 신라 놈 등살에 살 데가 어디 있단 말이오? 아무래도 그놈들을 몰살을 시켜 버리든지 쫓아 버리든지 해야 될 것 아니오? 안해를 두고 가자니 맡길 데도 없고, 그놈들한테 붙들리기만 하면 못 당할 욕이나 당하고 잡아먹힐 것 아니오?"
 
237
거북은 뿌옇게 변명을 하였다.
 
238
"그러면 새촌 같은 두메에도 그놈들이 쳐들어왔단 말이오?"
 
239
"여보, 쳐들어오다 뿐이오? 우리는 첫날밤에 그놈들에게 쫓기어 이 길을 나섰다오."
 
240
"저런 원수엣놈들! 하필 남의 첫날밤에 쳐들어갔더람. 그래 당신네들 행색을 보고 나도 필유곡절인 줄은 알았소마는 어디 자세한 얘기를 좀 들려 주구려."
 
241
거북은 그때 광경을 대강 이 얘기하였다.
 
242
그러면 그 좋은 화촉동방은 " 못 치뤘겠구려. 육시를 할 놈들! 그놈들을 모조리 때려잡아야……."
 
243
하고 팔을 부르걷으며 분해하다가,
 
244
"그래, 그 뒤엔 어떻게 되었단 말이오?"
 
245
궁금한 듯이 채쳐 물었다.
 
246
"그래, 산으로 산으로 죽을 판 살 판 기어 올라가니까 거기 떠들렁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밑은 아주 어웅하게 굴이 되어서 사람 여남은 숨어 있기에 맞춤이었소. 우리 둘도 거기 사흘이나 숨어 있었다오."
 
247
"그럼 꼬박이 굶었겠구려."
 
248
"밥이야 못 먹었지만, 장모님이 허둥지둥 싸 주신 떡 조각으로 연명을 하였소."
 
249
"그러면 신방은 원앙금침도 못 깔고 돌 위에서 치뤘겠구려. 히히."
 
250
총각은 시큰둥하게 웃었다.
 
251
"그래, 사흘을 숨어 있다가 인제는 그놈들이 다 갔으려니 하고 집에를 나려가 보니, 두 집 식구들은 어디로 다 피란을 갔는지 어리친 개아미 한 마리 없구려."
 
252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내외 동행으로 이 길을 떠났구려."
 
253
"그렇다오. 그런데 총각은 어디서 오는 길이오?"
 
254
"나는 붉은 놀에서 오는 길이오."
 
255
"붉은 놀이라면 바루 이 고량부리 고을의 붉은 동네 아니오? 그래 총각 도 당병에게 쫓겨 나왔소?"
 
256
"당병에게 쫓겨 나왔으면 좋게. 나는 내 주인에게 손도(損徒)를 맞았다 오."
 
257
"주인에게 손도를 맞다니?"
 
258
"하룻밤을 늘어지게 자고 나서 어슬렁어슬렁 마당을 쓸려 나가니까, 주인집 식구란 밤새에 피란을 가고 하나도 없구려. 나 하나만 개새끼 모양으로 내버려두고……."
 
259
"그까짓 주인이야 달아났으면 대순가? 그런데 여보 총각. 고량부리에 산다면 지금 맡있산에 계시는 흑치 장군님이 어떻게 당병들을 해내시는지 소식을 들어 자세히 알겠구려."
 
260
거북은 새 화제를 꺼내었다.
 
261
"암, 그 장군님 성식(聲息)이야 잘 아다 뿐이오?"
 
262
처량한 제 신세 타령을 하다가 한 풀이 꺾이었던 쾌돌은, 흑치 장군이란 말에 새 정신이 번쩍 나는 것처럼 주저앉으며 큰 연설이나 할 듯한 너스레를 차리었다.
 
263
그래 그 장군님이 두 ", 겨드랑이에 비늘이 돋혀서 훨훨 날아다녔다니 정말이오?"
 
264
거북은 어디에서 주워 들은 허황한 소문을 따져 보았다.
 
265
"여보, 비늘이 다 뭐요? 비늘을 가지고서야 어떻게 난단 말이오? 바루 나래가 돋혔다오."
 
266
"나래가?"
 
267
거북과 참꽃은 일시에 경탄의 소리를 쳤다.
 
268
"그럼, 나래가 나도 여간 큰 나래가 아니라오. 아마 독수리 나래보담도 여러 곱 더 크던걸."
 
269
쾌돌은 제 눈으로 흑치 장군 겨드랑이 밑을 보고 온 듯이 말을 하였다.
 
270
"그렇게 큰 나래가 났으면 옷을 어떻게 입어요?"
 
271
참꽃이 못 믿겠다는 듯이 한 마디 티를 넣었다.
 
272
"나래가 있다고 왜 옷을 못 입는단 말이오?"
 
273
쾌돌은 펄쩍 뛰었다.
 
274
"나래 위에 옷을 입으면 나래가 옷에 걸려서 어떻게 펼 수가 있어야지요."
 
275
"글쎄, 그러나 머, 그 나래는, 그 나래가……."
 
276
쾌돌은 허풍을 때리다가 참꽃의 영리한 반박을 만나 한동안 말을 떠듬거리다가,
 
277
"그 나래는 보통 나래가 아니라……."
 
278
기를 쓰고 변명을 해 보려고 하였으나, 제 귀에도 조리가 잘 닿지 않는 것을 깨닫고 다시 말을 곤치었다.
 
279
"그 장군님 입으신 옷이 어디 보통 우리네가 입는 옷 같은 줄 아시오?
 
280
갑옷이란 대개 겨드랑이 밑은 터진 게거든."
 
281
하고 내 말이 어떠냐 하는 듯이 동행 내외를 둘러보았다.
 
282
"바루 그렇다면 몰라도……."
 
283
"그러면 참말로 날으셨겠구려."
 
284
부부는 적이 의심을 푸는 눈치였다.
 
285
쾌돌은 더욱 신이 나서,
 
286
"날으셨다 뿐이오? 그 날 당병을 휘몰아 때려잡으실 적만 해도 반공중에 둥둥 떠서 ‘이놈들 게 있거라!’ 소리를 벽력같이 지르시고, 당장과 당병 놈들이 얼떨떨해서 정신을 못 차리는 판에 나지막하게 날아 나려오셔서 서리 같은 환도를 휘둘러 놓으니……."
 
287
"그놈들이 혼띔을 했겠구려."
 
288
거북이도 기운을 우쩍 내었다.
 
289
"여보, 혼띔만 했겠소? 그 칼끝 지나는 곳마다 목숨이 달아나는데 혼띔만 하고 말았겠소? 그리고 나래도 나래려니와, 그 검술이 더 굉장벅쩍하였단 말이오. 칼 한 자루가 천 개도 되고, 만 개도 되어 가지고 왼 천지가 도모지 칼빛뿐이란 말이오. 당병 놈들이 땅 속으로나 기어 들어간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무슨 재조로 이 칼을 피해 낸단 말이오? 동으로 달아나면, 동에도 칼이 번쩍, 서로 달아나면 서에도 칼이 번쩍, 뭐 그놈들 모가 지 팔다리가 된내기에 나뭇잎 떨어지듯 우수수 떨어지고, 피가 흘러 강이 되었다는 밖에."
 
290
쾌돌은 입에 침이 말라서 잠깐 말을 끊었다.
 
291
"그래 그래, 당장과 당병이 몇 명이나 죽었더란 말이오?"
 
292
거북은 넋 잃은 사람 모양으로 한창 주워대는 총각의 입을 바라보다가 물어보았다.
 
293
"수도 없지, 수도 없어. 그놈들 뒈진 걸 누가 세어 보았겠소마는 아마 여러 천 명이 거꾸러졌다오."
 
294
"단 한 사람 손에 여러 천명!"
 
295
거북은 혀를 내어 둘렀다.
 
296
"그러니 하늘이 내신 장수란 말이오."
 
297
"딴은 그래. 우리 백제 사람을 구하시려고 하느님이 나려보내신 거야."
 
298
"우리도 그 장군님 밑에만 가 있으면 그까짓 당나라 놈, 신라 놈이야 몇 만 명이 몰려와도 조금도 겁낼 것이 없단 말이거든."
 
299
쾌돌은 제가 바루 그 장사나 되는 듯이 의기충천이다.
 
300
"나도 그놈들이야 몇 백 명 맨주먹으로라도 때려잡을 테요."
 
301
하고 거북이도 팔을 어루만지며 용을 썼다.
 
302
"첫날밤에 신방도 못 치르고 쫓겨난 원수를 갚아보겠단 말이구려. 허 허!"
 
303
"갚다 뿐이오? 그놈들을 회를 쳐 먹어도 시원하지가 않을 텐데."
 
304
"여보, 당신도 그놈들 뽄을 뜬단 말이오? 사람을 어떻게 회를 쳐 먹는단 말이오?"
 
305
"그래, 그놈들은 사람을 날로 잡아먹는다니 참말이오?"
 
306
"참말이다 뿐이오? 우선 그 장군님 나타나신 그 날만 해도……."
 
307
"참, 그 날은 그 장군님이 어떻게 나타나셨더람?"
 
308
하고 거북은 그 장군 얘기를 더 듣고 싶어하였다.
 
309
그 날 그 장군님이 "어떻게 해서 나타났느냐고? 흥, 그 내력을 말하자면 정말 기가 막히지."
 
310
하고 쾌돌은 동행 부부를 바라보며 눈을 끔벅끔벅한다. 이 굉장한 얘기를 어디서부터 허두를 내어야 옳을지 몰라 잠깐 생각을 모으는 모양이었다.
 
311
동행의 눈과 귀는 총각의 입술 위에 몰리었다.
 
312
뻗어 버리고 앉았던 쾌돌은 날아나갈 듯이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입을 열었다.
 
313
"그놈들이, 그 흉측하고 무도한 당병 놈들이 노략질한 물건을 바리바리 실리고, 우리 백제 사람을 남정네 여인네 할 것 없이 쇠줄 밧줄로 불알 까 려는 돼지 새끼처럼 묶어 가지고……."
 
314
"돼지 새끼처럼! 저런 죽일 놈들이……."
 
315
거북은 이를 갈았다.
 
316
"여보, 그양 묶기만 하면 좋게, 어떤 사람은 말꼬리에 매달아 가지고, 그 양 달고 치면 머리가 박살이 나고, 왼 몸 가죽이 벗겨졌다오."
 
317
"천하에 무도한 놈들!"
 
318
거북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319
"그나 그뿐인 줄 아시오? 가다가 심심하거나 배때기가 출출하면 사람을 살려놓은 채 가죽을 벗겨내고 숭덩숭덩 썰어서 화톳불에 구어 먹었다는 밖에."
 
320
"에구머니나!"
 
321
참꽃은 기겁을 하였다.
 
322
"그놈들이 사람을 날로 잡아먹는다더니 그러면 그게 참말이구려."
 
323
거북도 눈을 호동그랗게 떴다.
 
324
"참말이고 말구. 더더구나 젊은 아주먼네나 어린애를 보면 사죽을 못 쓰고 게 눈 감추듯 한대."
 
325
"그래 그놈들도 인형을 뒤집어 쓴 사람일까!"
 
326
"그러기에 오랑캐라 하지 않소? 오랑캐야 어디 사람이오? 말하자면 털만 없단뿐이지, 짐승이거든."
 
327
"개나 소도 많은데, 그놈들이 왜 하필 사람을 잡아먹어요?"
 
328
참꽃은 몸을 오들오들 떨면서 물었다.
 
329
"그게 별민게지요."
 
330
"더구나 불쌍한 아주먼네와 어린애를……."
 
331
"그놈들의 구미에는 아주먼네와 어린애의 살이 더 보드랍고 연한 탓이겠지요."
 
332
쾌돌은 참꽃을 건너다보며 코끝을 실룩실룩하며, 아주머니도 참 용하게 " 모면을 하셨소. 만일 그놈들 눈에 띄기만 했던 날이면 저렇게 어여쁘고 고운 살이……."
 
333
"왜 자꾸만 그런 무서운 얘기만 하셔요? 난 인제 듣기 싫어요."
 
334
참꽃은 샐쭉하며 손으로 제 귀를 막았다.
 
335
"사람 잡아먹는다는 논란은 고만두고 어서 얘기나 끝을 내구려."
 
336
거북이도 증을 내었다.
 
337
"이런 젠장맞을…… 기껏 남에게 얘기를 하라고 졸라 놓고, 정작 얘기를 내놓으니 듣기 싫다. 고만두지, 고만둬! 누가 얘기를 못 해서 걸신이 들린 줄 아나베."
 
338
쾌돌은 한창 신이 났다가 실룩해지며 게두덜거리었다.
 
339
"여보, 하던 얘기를 끝을 내어야 될 것 아니오?"
 
340
그래도 거북은 얘기의 뒤끝이 궁금한 눈치였다.
 
341
"그 장군님이 나타나신 곡절을 말하자면 자연 사람 잡아먹는 얘기가 들어야 되는데, 그건 듣기 싫다면 무슨 얘기를 하란 말이오?"
 
342
쾌돌은 아주 퉁명을 부리었다.
 
343
"자아, 그러지 말고 어서 하구려. 그래, 장군님이 뛰어드신 내력을……."
 
344
"이걸 또 얘기를 해."
 
345
하고 쾌돌은 싱글 웃고 나서,
 
346
"그날도 그놈들이 아주먼네 하나를 벗겨먹고, 또 식성이 당기었던지 네댓 살 된 어린애 하나를 날로 아싹아 싹 베어 먹으려는 판에 그 장군님이 뛰어 드셨다오."
 
347
"그럼, 그 장군님이 어디 숨어 계셔서 그 참혹한 광경을 보신 게로구려."
 
348
"그 장군님이 그놈들이 무슨 짓을 하나 하시고, 슬슬 뒤를 따라오셨더라 오. 그놈들이 그 장군님이 엿보시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 어린애를 잡아 먹으려다가 그 장군님이 짓쳐 드셨단 말이오."
 
349
"그러면 그 아이는 어떻게 됐어요?"
 
350
"당장 한 놈이 막 그 아이를 아싹 한 입 베어 물자고 입을 벌렸다가 그 놈의 모가지가 그 아이보담 먼저 떨어졌다니까."
 
351
"그러면 그 아이는 살았겠군요?"
 
352
참꽃은 그 불쌍한 아이의 운명이 종시 마음에 켕기었다.
 
353
"그 아이 말이오? 그 아이 말이지……."
 
354
쾌돌은 어물어물하였다. 실상인즉 그도 그 아이가 어떻게 되었단 소문은 잘 듣지 못한 까닭에 무에라고 거짓말을 꾸며댈까 궁리를 한 것이다.
 
355
"그 장군님이 한 손으로 그 당장을 쳐 죽이시고, 또 한 손으로는 선뜩 그 아이를 받아 자기 품에 넣으시고, 그놈들을 휘몰아 쫓아 버렸다오." 하고 내 말이 어떠냐 하는 듯이 눈을 크게 떠 보이었다.
 
356
"아이, 고마워라!"
 
357
참꽃은 꽉 채었던 숨을 ‘호!’ 내어쉬었다.
 
358
"묶여가던 백제 사람도 다 살아났겠구려."
 
359
"그야 여부가 있소? 그 장군님이 묶은 것을 일일이 끌러 주어 부모 처자 가 안고, 뒹굴고, 울고불고……."
 
360
거북이도 제 일같이 기뻐하였다.
 
361
"꼭 죽은 줄 알았던 목숨이 살아났으니 그 사람들이야 좀 좋았겠소? 그래 그 장군님이 돌아서시려니까 그 사람들이 부모를 따르는 자식들같이 장군님께 매어달려서 맡있산으로 갔다오. 당신들도 그리로 간다는 걸 보면, 그 소식쯤은 들어 알겠구려."
 
362
"대강이야 들었지마는 어디 이렇게 자세한 이야기야 들었소? 아무튼 그 장군님한테만 가면 부모님의 슬하보담 더 든든할 줄 믿었을 뿐이지."
 
363
"여보, 지금도 젖을 자실 테요? 부모님은 해서 무엇 한단 말이오? 그 장군님을 모시고, 당나라 신라를 때려부수고 우리 백제 망친 원수를 갚아야……."
 
364
쾌돌은 아주 점잖게 뽐내었다.
 
365
"다 이를 말이겠소? 든든하고 미쁘기가 부모를 찾아가는 것 같단 말이지."
 
366
거북이도 되받았다.
 
367
"그런데 걱정은 저 아주머니야. 그 사내들 틈바구니에 가서 어떻게 지내 시나?"
 
368
쾌돌은 제법 의젓하게 걱정을 한다.
 
369
"왜요? 남정네가 많으시면 그 빨래랑 서름질이랑 누가 해요?"
 
370
"그러면 아주머니가 그걸 다 하실 작정이오?"
 
371
"하구 말고요. 내 힘 자라는 데까지야 왜 몸을 사려요? 남정네같이 칼과 활을 못 잡을망정……."
 
372
아까 무서움만 탈 때와는 딴판으로 참꽃의 결심도 씩씩하였다.
 
373
밤은 깊었다.
 
374
세 동행의 옷자락에 이슬이 축축히 나리었다.
 
375
"어서 가요."
 
376
늦장을 부리고 있는 남편과 동행에게 참꽃이 먼저 길을 재촉하였다. 그는 그렇게 든든한 자리에 한시바삐 들어가고 싶었던 것이다. 공연히 중로에서 바람소리에도 놀랠 필요가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377
"밤새기 전에 가기는 가야 돼."
 
378
거북이도 안해를 따라 몸을 털고 일어났다.
 
379
"혹시나 낱마리 당병들이 쏘다닐지도 모르니 밤을 도와 가야지."
 
380
하고 쾌돌이도 선선히 몸을 일으킨다.
 
381
굉이산 마루터기를 넘어 한길로 나려서서 달내 줄기를 건네니, 벌써 밤을 허여스름하게 새기 시작하였다.
 
382
이 새벽의 행인은 자기네들뿐인 줄 알았더니, 앞에 가는 사람의 그림자가 푸떡푸떡 보이었다.
 
383
처음에는 당병이나 아닌가 하고 길옆 숲 속으로 몸을 숨기고 가다가, 멀리 들리는 말낱으로 보아 백제 사람인 줄 알고야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384
범근 내가 으렷이 보일 때, 그 강가에는 사람이 장꾼처럼 둘러선 것이 보였다.
 
385
이 내만 건너서면 맡있산이 바루 코앞이다.
 
386
강가에 다다르니 사람은 백절 친 것 같다. 자기네만 몰래몰래 맡있산으로 찾아가는 줄 알았더니, 자기네와 같은 뜻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엄청나게도 많은 것을 보고 일변으로 든든하고 일변으로 놀라웠다.
 
387
스물도 넘는 나룻배가 사람을 건네기에 눈코를 못 뜬다. 배마다 손들을 가뜩 가뜩 넘치도록 태웠다.
 
388
사공들의 배 젓는 소리도 우렁차다.
 
389
강을 건너고 보니 사람은 더욱 많아 발길이 서로 밟힐 지경이었다.
 
390
맡있산 밑 맡있성은 성문을 활짝 열어놓은 것이 보이었다.
 
391
그 성문으로 꾸역꾸역 들어가는 사람이 장사진처럼 꼬리를 맞물고 잇대였다.
 
392
"백제 왼 나라 백성들이 이리로만 다 모이는가베."
 
393
앞뒤 사람들에게 몸이 끼어 꼼짝을 못 하면서도 쾌돌은 거북이 부부를 돌아다보며 유쾌한 듯이 웃었다.
 
394
총각과 동행 내외는 사람의 물결에 휩쓸리어 마츰내 맡있성 안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원문】총각과 동행 내외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글쓰기
〔소설〕
▪ 분류 : 근/현대 소설
▪ 최근 3개월 조회수 : 118
- 전체 순위 : 609 위 (2 등급)
- 분류 순위 : 94 위 / 882 작품
지식지도 보기
내서재 추천 : 0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86) 삼대(三代)
• (23) 적도(赤道)
• (21) 어머니
• (20) 탁류(濁流)
▣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 흑치상지 [제목]
 
  현진건(玄鎭健) [저자]
 
  1939년 [발표]
 
  역사소설(歷史小說) [분류]
 
  # 전기소설 [분류]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현진건의 역사 소설 (1939년)
 
목록 참조
 
외부 참조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문학 > 한국문학 > 근/현대 소설 카탈로그   목차 (총 : 8권)     이전 4권 다음 한글 
◈ 흑치상지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6월 0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