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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치상지 ◈
◇ 허리띠의 글발 ◇
카탈로그   목차 (총 : 8권)     이전 6권 다음
1939년
현진건
 

1. 허리띠의 글발

 
2
듣바위가 붙들 사이도 없이 달아나듯 가고 없어지자, 상지는 다시 문을 닫고 들어와서 그 이상한 선물을 들고 보고 놓고 보고 하였다. 몇 번을 뒤집어 보고 털어도 보았다. 기다랗게 늘어진 자락이 너울너울 춤을 추고 쏘 르럭 싸르럭 매끄럽고 그윽한 속살거림을 낼 따름,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3
그러다가 한 모서리에 유표하게 붉은 실로 꿰맨 자리가 눈에 뜨이었다.
 
4
시험 삼아 그 꿰맨 어름을 뜯어보매 머리 올같이 가는 실이 쉽사리 터졌다.
 
5
그 터진 자리를 양가로 잡고 빵긋이 벌리니, 실밥은 재미가 나도록 조루룩 일어났다.
 
6
터진 데를 제치니 비단 위에 노다지로 적은 글발이 은은히 내다보이었다.
 
7
밖으로 내어 비칠까 염려한 탓이리라. 그 글자는 진하지 않은 수먹(繡墨, 수묵)으로 거무스름하게 적기는 적었으되, 자형을 몰라볼 만큼 희미하지 는 않았다.
 
8
그 허리띠 안이 온통 일폭 서신이다. 그야말로만지장서.
 
9
깨알같이 가는 글씨가 달필은 달필이나, 해정(楷正)하고 노숙한 가운데 군데군데 애티가 나는 것이 얼른 보아도 여필이 분명하였다.
 
10
문체는 순한문이 더러는 섞이었으나, 교묘하게 한자의 뜻과 음을 이용하여 백제 방언을 취음한 것이었다.
 
11
그 사연은 대개 이러한 뜻이었다.
 
 
12
흑치 장군 휘하 별안간 글월을 올리어 놀라시고 괴이쩍어하실 듯.
 
13
그러하오나 부끄러움과 당돌함을 무릅쓰고 이 글을 올리옴은 이 몸의 간 절하온 마음을 걷잡을 수 없는 탓이오니 굽어살피시고 천만 용서해 주시기 바랄 뿐입니다.
 
14
그 날 이 몸은 장군님의 구원해 주심을 입사와 만사(萬死)에 일생을 얻었사오니, 그 하해 같으신 은혜야 무엇으로 그 만분지일, 만만분지일이라도 갚사올지 주소몽매(晝宵夢寐)에 잊을 길이 없습니다.
 
15
만일 그때 장군님이 아니 계시었던들, 이 몸은 백 조각 천 조각 돌무더기 속에 속절없이 장사를 지내고 말았을 것이 아니오니까?
 
 
16
상지는 예까지 보고 나서 무릎을 쳤다.
 
17
‘옳지, 그렇구나. 그 날 고량부리에서 같이 가자 해도 아니 오고 말을 채쳐 달아나고 만 그 귀부인이구나.’ 그제야 상지는 그 이상한 선물을 보낸 임자를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18
원광(遠光)으로 보았지만, 그 이슬을 촉촉이 머금은 해당화 한 송이 같은 얼굴과 한없이 곱고 맑으면서도 어딘지 사람을 잡아끄는 듯한 그 열기 있는 눈매가 생생하게 기억에 살아온다. 더구나 간드러지고도 여무진 그 카랑카랑한 목청이 시방도 귓가에서 잉잉 도는 듯하다.
 
19
‘내가 왜 진작 그 부인인 줄 짐작을 못하였던고.’ 한 번 생각하면 이대도록 또렷또렷하게 나타나는 인상을 지금까지 까맣게 잊어버린 제 자신이 오히려 멍청이인 것도 같았다.
 
20
그러하오나 바른 대로 말씀을 사뢰오면 이 몸이 그때 살아난 것이 그대도록 달갑지는 않습니다.
 
21
언제 죽어도 섭섭할 것 없고 아까울 것 없는 더러운 이 목숨입니다. 그 사정을 자세히 아뢰자면 가뜩이나 긴 이 사연이 이보담 열 곱절, 스무 곱절 더 길어져도 소상하지 않겠삽기로 다 접어두거니와 아무튼 이 몸이란 이 몸은 죽는 것보담 사는 것이 더 괴로운 몸입니다. 차라리 그때의 분에 떠오르는 여러분의 뭇매에 맞아 죽는 것이 이 몸에겐 다시 없는 기회요 다행이었을는지 모릅니다. 그때 길이 눈을 감아 버리었던들 원도 잊고 한 도 잊었을 것을. 이 좁고 좁은 가슴속에 서리고 맺힌 슬픔도 설움도 다 잊어 버렸을 것을.
 
22
꼭 죽었을 이 목숨이 또다시 살아나서 다시금 악착한 세상 시름에 부대끼게 되었으니 이 몸의 운명은 어찌 이다지도 기구합니까! 그러므로 장군님께서도 이 몸을 구해 주신 것은, 황송하옵고 하늘 무서운 말이오나, 이 몸에겐 원망이 될지언정 은혜가 되올 것은 털끝만큼도 없습니다.
 
23
장군님께서 이 몸에게 베푸신 은혜는 실상인즉 이 몸을 구하신 데 있지 않사옵고, 이 몸이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데 있습니다.
 
24
‘이것은 또 무슨 말인가?’ 상지는 혼자 중얼거리고 고개를 기울여 또 그 밑을 읽어 나려갔다.
 
 
25
대체 이 몸이 무엇이오니까? 간신의 계집이 아니오니까? 장군님께서도 통분해 하시는, 나라를 좀먹게 하고 백성의 피와 기름을 빨아먹던 좌평 임자의 가속이 아니오니까? 이번에 당나라 신라 군사가 그렇게 쉽게 물밀듯 짓쳐 들어 온 것도 이 몸의 남편이 적국과 연통한 까닭이 아니오니까?
 
26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은 고만둔다 하더라도 이런 줄을 밝히 살피시는 장군님께서, 이 몸이 개죽음을 하는 것을 고소해 하실지언정 오히려 두둔하시고 두호하실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한 노릇이 아니오니까?
 
27
그러나 그뿐이오니까? 오랑캐놈에게 버린 이 몸이 아니오니까? 구구한 목숨을 살아지이다 하고 그 원수엣놈에게 아양을 팔고 웃음을 팔고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더러운 줄도 모르는 해괴망측한 계집년이 아니오니까?
 
28
더더군다나 까닭 없는 말질로 제 남편을 무참하게 죽게 맨든 년이 아니오니까? 순전히 이 몸의 탓이라고는 못할망정 아무튼 같이 피란해 가는 남편을 원수의 칼을 빌려 죽인 것이나 같사오니, 이런 인륜에 벗어나고 불외천 불외지한 천참만륙을 당해도 오히려 죄가 남을 이년이 아니오니까?
 
29
이러한 이 몸이어늘 오직 백제 사람이라 하여 건져주심을 받을 때, 이 몸의 눈앞에는 이때까지 보지 못하던 다른 세계가 갑자기 열려졌습니다.
 
30
장군님!
 
31
"다같이 불쌍한 백제 사람을 해하지 말라!"
 
32
눈물 섞어 부르짖으신 그 말씀은 우레와 같이 이 몸의 귀에 울리었습니 다. 벽력과 같이 이 몸의 정수리에 떨어졌습니다. 이 몸의 잠자던 넋을 뒤 흔들고 말았습니다. 이 더러운 창자를 뒤집어놓고 말았습니다.
 
33
한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다가 문득 바위 같은 불덩어리가 디굴디굴 구으는 듯한 광명을 알아보았습니다.
 
34
장군님의 이 말씀을 듣기 전에는 워낙 악독한 바탕이라 비록 입으로는 죽음을 두려워할 이 몸이 아니라고 희떠운 입정을 놀렸으되, 간이 콩만하게 오그라 붙고 살이 떨리었습니다.
 
35
욕지거리를 하고, 돌팔매질을 하고 달겨드는 여러 사람이 겁도 나고 미웁기도 하였습니다.
 
36
그러하오나 장군님의 그 말씀을 듣고 나매 그네들을 미웁게 생각한 것이 도리어 죄송스럽고 그네들의 손에 맞아 거꾸러지는 것이 얼마나 정답고 떳 떳할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일어났습니다. 이 몸은 이 마당에 꼭 죽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7
끊어져야 할 이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으니 이 남은 목숨을 어디다가 쓸까, 어찌하면 이 많은 죄를 몇 백분지일이라도 삭칠 수 있으까, 이 거룩한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 곰곰 생각하던 나머지에 이 몸의 갈 길이 훤하게 앞에 열린 것 같아서였습니다.
 
38
그 길이란 험난하고 고생스러운 길, 칼을 물고 뜀을 뛰는 것 같은 길이 었습니다. 그러하오나 이 목숨은 벌써 죽은 것이니 이 몸이란 송장이거니 생각하오면 험난하다고 모피하고 앙탈할 줄이 있사오리까? 목숨을 떼어놓고 보니 어쩌면 마음이 이렇게도 든든하고 수월할까요?
 
39
장군님!
 
40
실상인즉 그 날, 장군님을 모시고 같이 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습니다. 말은 줄달음질을 치는데 까닭 없는 눈물이 앞을 가리어 몇 번이나 길 을 헛들었는지 모릅니다.
 
41
필경 이 몸은 찾아올 데를 찾아오고야 말았습니다.
 
42
거기가 어디인 줄 아십니까? 다른 데가 아닙니다. 그 지긋지긋한 당나라 군사가 둔취(屯聚)하고 잇는 사자성 안입니다.
 
43
이 몸은 당돌하게도 필마단기로 적병이 구데게떼보담 더 많이 우글우글거리는 적진 중으로 뛰어들었습니다.
 
 
44
상지는 단숨에 예까지 보고 나서 아물아물해지는 눈을 스르르 감고 잠깐 편지를 놓았다.
 
45
‘세상에 기이한 여자도 있고는 볼 일이다. 저 갈 데가 따로 있다 하고 가더니만 필경에는 적진 중으로 뛰어들었구나.’ 속으로 생각하매 그 날 매정스럽게 말을 채쳐 달아나던 그 뒷모양이 눈앞에 밟히었다.
 
46
얼른 보기에도 보통 여자는 아닌 상 싶었으되, 이렇게 결심이 매서울 줄은 미처 짐작을 못하였다. 더구나 제 말 한 마디가 이렇게까지 그 여자를 감동시킬 줄은 몰랐다.
 
47
‘일은 되었다!’ 그는 허리를 휠씬 펴며 혼자 기뻐하였다. 이런 여자가 적의 심장 속에 들어박혀 있다는 것은 백만의 응원병을 얻은 것보담 못하지 아니하였다.
 
48
‘잔약한 여자의 혈혈단신으로 적진 중에 뛰어들다니! 대담도 하거니와 기절묘절할 일이 아닌가.’ 상지는 뜻깊게 몇 번 고개를 끄덕거리고 감탄을 마지않다가, 다시금 그 첩첩사연을 적어 넣은 비단 허리띠를 집어 들었다.
 
 
49
오랑캐들은 멋모르고 이 몸을 여간 위해 올리지 않습니다. 잡혀 가던 사람 여럿 가운데 이 몸 혼자만 달아나지 않고, 제 발로 꾸벅꾸벅 걸어온 것이 무척 신통하고 좋은 모양입니다. 의리를 지키는 사람이라고까지 추켜세우는데는 코웃음이 저절로 나옵니다.
 
50
이렇듯 대우가 자못 융숭한 탓으로도원수 격인 소위 신구도 행군 대총관(神丘道行軍 大總管) 소정방(蘇定方)이나 좌위 장군(左衛將軍) 유백영(劉伯 英)이나 우무위 장군(右武衛將軍) 풍사귀(馮士貴) 같은 우두머리 가는 당장 들의 장막 속에 임의로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51
고량부리에서 생긴 사단은 그야말로 출기불의(出其不意)로 그자들에게 여간 큰 두통거리가 아닌 모양입니다. 무인지경같이 짓쳐 들어와서 대번에도성을 두려빼고 임금을 사로잡은 그 자들은 백제 사람이란 순하기 어린 양 같고 하잘것없기 개새끼 같은 줄 알고 교만방자하게 꺼떡대며 망유기극(罔有紀極)으로 못할 노릇이 없다가, 한 번 그 일이 탁 벌어지고 보니, 창황망조 어찌할 줄을 몰랐던 눈치였습니다. 그야 장수 몇 녀석, 졸아치 몇 개 없어진 것쯤으로 자칭 수십 만 대군을 거느렸다는 그자들이 눈이나 깜짝할 노릇이리까마는 그래도 그렇지 않은 켯속이 또 있는 것 같습니다.
 
52
첫째로 그자들은 인제 와서는 호랑이보담 더 무서워합니다.
 
53
단 한 달이 못 되 크나큰 나라 하나를 집어삼키고 공성명수(攻城名遂)한 오늘날, 임금과 비빈과 왕자 왕손과 공경대부며 수많은 장졸과 백성의 부로(.虜)들을 앞세우고 뒤세우고, 금은주백(金銀紬帛)과 진보기화(珍寶 奇貨)를 수레마다 가득가득 싣고 거드럭거려 개선하기만 한시가 바쁜 터입니다. 장수이고 군사이고 마음으로는 벌써 칼자루 창자루를 놓은 지가 오래입니다. 그 귀찮고 위험한 싸움을 또 할 생각은 꿈에도 염에도 없는 모양입니다.
 
54
이런 계제에 고량부리에서 죽고 남은 군사가 헐레벌떡 도망질해 와서 그 연유를 보하자 당진(唐陣)은 발칵 뒤집히었습니다. 우두머리 당장들이 왔다갔다 하며 머리를 모아 수근숙덕 의론이 분분한 듯하더니 마츰내 일 지병마(一枝兵馬)를 고량부리로 보내 보았으나 그럭저럭 수삼 일이 지낸 뒤이 니 장군님 일행이야 저희가 어디 가서 구경인들 할 노릇이리까? 나갔던 군사들은 그대로 바람을 잡고, 거기 오래 지체도 못하고 돌아와 버리었습니다. 그 후로는 그런 일이 생겼다는 것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쉬쉬하며 저희 군사들을 저희가 단속하는 꼴은 참으로 절도할 노릇입니다. 그 일쯤은 고만 눈감아 버리자는 수작이겠지요.
 
55
그런데 그자들에겐 눈감아 버리랴 버릴 수 없는 큰 일이 또 생겼습니다.
 
56
그것은 장군님이 맡있성을 웅거하시고 기세가 놀랍다는 소식이었습니다.
 
57
이 맡있성에 들어앉으신 장군님이야말로 고량부리에서 그 끔찍한 일을 일으키신 어른인 줄 알자, 그자들의 얼굴은 푸르락 누르락 하였습니다.
 
58
맡있산으로 구름같이 모여드는 사람이 천이 되네만이 되네, 성을 곤치느니 영을 짓느니 하는 발쇠꾼의 첩보(諜報)가 빗발치듯 날아 들어옵니다.
 
59
장군님이 기세가 나날이 호대해 간다는 바람에 그자들은 밤잠도 옳게 이루지 못합니다. 밤마다 당장의 장막 속에서 일어나던 요란스러운 풍악 소리도 끊어지고 산해진미를 갖추어 벌어지는 낭자한 배반도 그림자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이럴 때에 만만한 신라병이나 좀 풀어 보내기가 일쑤 좋으련만, 그자들이 신라와 두 손길을 마주잡고 백제를 쳐 멸했지만 백제를 넘어뜨린 다음에는 다시 신라를 넘보았기 때문에 약삭빠른 신라의 군신들은 이 기미를 알아차리고 제 나라의 방비를 튼튼히 하려고 잔뜩 군사를 모아 놓고 안병부동(按兵不動)하여 좀처럼 그자들의 말을 듣고 독담(獨擔)으로 싸우러 나갈 상싶지가 않습니다.
 
60
‘옳지 옳아, 그 의뭉한 놈들이 백제를 먹고 신라를 가만둘 리가 만무하지, 만무해. 기걸한 줄만 알았던 그 부인이 이런 점까지 똑바로 보는 것을 보면 그 식견도 놀랍구나.’ 상지는 편지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구절구절에 탄복하였다.
 
61
그 편지는 인제 정작 중요한 대문으로 들어서는 듯, 그 글씨까지 또박또박히 더 안상(安詳)하고 더 해정(楷正)하였다.
 
 
62
신라 말이 난 김에 좀 더 소상하게 말씀을 드릴 것은, 위에도 몇 줄 적었사오나, 두 나라 사이가 결코 좋기만 한 것 같지 않은 점입니다. 겉으로는 신라편에서는 우리네의 대대로 맺힌 원수 백제를 멸해 주셨으니 이런 고마울 데가 없다고 당나라를 발라맞추고, 또 당나라에서도 그대네의 군사들은 묘략도 장하고 용맹도 대단하여 잘 싸웠으니 그 공로는 잊을 수 없노라고 칭찬을 하는 터이오나, 속살로는 조그마한 트집과 흔단만 있으면 서로 잡아먹으려고 으르렁거리는 판입니다. 위선 사자성 싸움 때만 해도 신라 군사가 약조한 시각보담 늦게 왔다는 것을 핑계 삼아 소정방이가 개골을 내고, 신라 독군(督軍) 김문영(金文潁)을 군령 시행으로 목을 버히라고 호령하였더랍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유신은 길길이 뛰고 분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꽂았던 칼을 빼어 들고 백제를 치기 전에 위선 의리부동한 이 놈들부터 먼저 요절을 내야 되겠다고 호랭이같이 고래고래 응컬거리고 호통을 쳤답니다. 이 서슬에 소정방은 자중지란이 일어날까 보아 슬며시 김문영을 놓아주었다는 얘기가 파다합니다. 이것 한 가지만 보아도 그들의 사이를 짐작할 수 있는데, 이 밖에도 신라왕 김춘추가 당장들을 대접할 제 그 술에다가 짐독(.毒)을 쳤다는 둥, 또는 당장이 신라왕과 김유신에게 은근하게 보낸 제 나라 음식 가운데 슬쩍 독을 묻혀 보낸 것을 개를 주었더니 개가 먹고 그 자리에 토혈 즉사하였다는 둥 별별 풍문이 다 많습니다. 일일이 믿을 것은 못 되오나 아무튼 그 자들의 사이가 본래부터 물 부어 샐 틈 없이 합해진 것은 아닌 듯합니다.
 
63
더구나 우리 나라를 자기네들깐으로는 다 먹고 보니 고깃덩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뜯어먹으려는 두 마리 개의 형상이 되었습니다. 당나라는 당나라대로 도독부를 두네, 뭣을 두네 제 손아귀에 넣으려 하고, 신라는 신라대로 수령방백을 두어 슬근슬근 인심을 수습해 보려는 기세를 보입니 다.
 
64
장군님께서 어련히 다 짐작하시리까만 아녀자의 좁은 소견에 그자들의 하는 꼬락서니가 일변으로 괴이쩍고 일변으로 얄궂기로 이런 말씀까지 알 리오니, 여벌일 같지마는 장군님 마음속에 새겨 두시게 하옵소서.
 
 
65
‘마음에 새겨 두고 말고.’ 상지는 마치 그 귀부인이 제 옆에나 있는 듯이 중얼거리고 고개를 수없이 끄덕였다. 자기도 두나라가 겉으로 합했지 속속들이 합하지 않았다는 것쯤은 대강 짐작을 하였지만, 벌써부터 이다지 알력이 생기고 이해가 충돌되는 줄을 생각지 못하였던 것이다.
 
 
66
아뢸 말씀이 하도 많사와 사연이 갈팡질팡 두서를 못 차리고 딴 길로 나갔습니다마는, 워낙 이 글월은 한숨에 쓰는 것이 아니옵고 행여나 남에게 들킬세라 사람의 눈을 피해 가며 몰래몰래 틈틈이 새로운 소문을 듣는 대로 몇 줄씩 끄적거리는 것임을 통촉하소서.
 
67
오늘 아츰부터 우두머리 당장들의 서두는 품이 대단합니다. 입에 게거품 들을 튀기면서 격론하는 것을 가만히 엿듣자 하니, 말은 잘 알아들을 수 없으나마 저희들도 어쩔 수 없이 군사 움직이기를 결단한 모양입니다.
 
68
군사를 움직이기로 하였으나, 누구를 그 대장으로 보낼까가 큰 말썽인 것 같습니다 . 모두들 슬근슬근 제 꽁무니를 빼는가 봅니다.
 
69
대총관 소정방으로 말하면, 갈 길이 바쁜데 몸소 치러 갈 수도 없는 노릇이요, 그의 굵직굵직한 장수들도 다들 자원 출전하기를 꺼리는 모양입입니다. 섣불리 출전을 하였다가 단숨에 이겼으면 좋으면만 군사(軍事)란 위사(危事)라 뉘 있어 꼭 이긴다 장담을 하올 것이며, 설령 승전을 한다 해도 조그마한 외로운 성 하나를 무찌른 것이 그리 끔찍한 공이 못 될 것이옵고, 만일 삐끗하는 날이면 지금까지 세운 큰 공에 누가 될 것이 아니오니까? 승전했자 큰 생색 없고, 패한다면 큰일 나는 이 싸움을 가루맡고 나설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70
암만 그래도 그자들의 위신과 체모를 보아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형편 이라, 이러쿵저러쿵 의론이 서로 합하지 않고 동병을 결정해 놓고도 또 대장 감이 없어서 그 잘 떠드는 성미들에 입에 게거품을 흘리며 야단들인가 합니다.
 
 
71
‘의론이 백출하고 합심이 잘 되지 않는 것은 우리 백제 사람뿐만이 아니로구나.’ 하고 상지는 빙그레 웃었다.
 
72
그 편지의 깨알 같은 글자는 다시 계속되었다.
 
 
73
적세가 이러하오니 비록 작은 성과 외로운 군사라 할지라도 조금도 두리 실 것은 없을 줄로 아옵니다. 단열 명이 안 되는 수하를 데리시고도 수백 명 당장과 당병을 추풍낙엽같이 무찌르신 장군님이아든, 이까짓 싸울 뜻을 잃은 군사야 몇 천 몇몇 만 명을 끌어 가온들 무엇을 하오리까? 지금 생각 해 보아도 간담이 서늘한 장군님의 칼머리에 제물 감밖에 더 되오리까? 그것을 생각하오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한입니다. 장군님 곁에 모시었던들 그 속시원한 구경을 또 하올 것을 우렁차신 꾸지람은 산천을 울리시고 긴 수염은 바람결에 나부끼시며 반공에 넘노는 칼빛은 여러 줄기 무지개인 양적장의 머리가 북풍에 우박 흩어지듯 어지럽게 떨어지는 광경을 뵈올 것을. 납덩어리를 먹은 듯 멍클하고 답답한 이 가슴이 얼음 녹듯 풀릴 것을.
 
74
장군님! 버릇없는 말을 용서하소서.
 
 
75
상지는 이 대문을 보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자가 넘는 제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또 한번 빙그레 웃었다.
 
 
76
옥신각신하던 끝에 이번 싸움의 대장은 낭장(郎將) 유인원(劉仁願)이가 뽑힌 모양입니다. 지금까지 명색도 없던 그자이지만 우두머리 장수로는 가 기를 꺼리는 판에 이자가 올라선 것인가 합니다. 나이 젊은 탓에 기운은 제법 팔팔합니다마는 이자인들 이 생색 없는 싸움을 즐겨하리까. 대총관 명령이요 지체가 올라 뛰는 바람에 덮어놓고 맡은 것 같습니다.
 
77
그리고 신라군에는 향도(嚮導) 겸 선봉장(先鋒將)을 내놔라 했는데 이것은 물론 신라군으로 하여금 저희들 군사의 방패 삼아 앞장을 세웠다가 이 기면 좋고 패하면 패전의 책임을 신라군에게 뒤집어씌우려는 수작입니다.
 
78
약고 슬기로운 신라군이 이만 꾀야 모를 리 있으리까.? 이 핑계 저 핑계로 원자기네 사람인 장수는 하나도 내어 놓지 않고 항복한 전 백제 좌평 충 상영(忠常永)을 선봉장으로 내세웠다 합니다. 그리고 모르면 몰라도 군사들은 거의 전부가 백제의 항졸로 채워졌다 합니다. 제 손으로 제 나라 사람을 죽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제 나라 사람 손에 제가 맞아 죽든지 두 길 밖에 없는 비참한 운명, 세상에 이런 지원극통한 일이 또 어디 있사오리까?
 
79
그런데 이 자들의 서두는 꼴이란 정말 눈꼴이 사나워서 볼 수가 없습니다. 당나라나 신라 군사보담도 저희들이 먼저 칼을 갈고 창을 닦고 활을 도지개로 곤치고 야단법석들입니다. 더구나 충상영의 꺼떡대는 꼴이 가관입니다. 몇 번 당영(唐營)에도 불려 왔는데 어디로 해서 어떻게 군사를 몰아가고, 어느 모를 어떻게 치면 그까짓 맡있성쯤이야 후군을 기다리지 않 고 제 선봉대만 가지고도 손에 침 배앝고 두려뺀다고 호언장담이 놀랍습니다. 저렇듯 훌륭한 인물이 있으면서 백제가 망한 것은 운수소관이라 할까 요 기막히고 요절할 일입니다.
 
80
요즈음은 군사들에 대한 호궤(.饋)가 대단합니다. 하루에 소 백 마리, 돼지 오백 마리씩 잡던 것을 요새는 그 갑절 소 이백 마리, 돼지 천 마리씩 잡고 술도 여러 천 동이씩 걸러서만 판 먹이는 판입니다. 아마 모레 글피로는 진군을 할 눈치가 보입니다.
 
81
그리고 이 글발 끝에 그린 명색(名色) 지도(地圖)는 이 몸이 무진 애를 쓰로 소정방의 장막 속에 들어가 그 벽에 붙여 놓은 것을 보고 그린다고 그린 것입니다마는 좀된 솜씨에 잘 알아보시게 되올지 당병과 신라병이 둔 취해 있는 수효와 지점을 기록한 것입니다.
 
82
장군님! 글월 부치기가 급하와 이만적사오나 부디 경적(輕敵)은 마시옵고, 돌아갈 길이 급한 그자들의 뜻이 속히 싸우는 데 있사온즉 방비를 단단히 하옵고 질질 끌기만 하오면 초조함에 못 견디어 저절로 물러갈 듯도 하오니 깊이 살피소서.
 
83
끝으로 한 말씀드릴 것은 이 몸에 감고 있던 허리띠를 올라옴이 예에 어 그러진 줄 아오나 진중에 , 지필묵을 구하기 어렵삽고, 또 종이에 썼다가 혹시 전인이 실수하여 들키거나 하면 큰일이겠기로, 설령 들킨다 해도 무방할 듯한 이 허리띠 안에다가 적어 넣었습니다.
 
84
장군님! 나라를 위하여 이 불쌍한 백성을 위하여 만 금옥체를 보중하소서.
85
고량부리 길가에서 뵈온 백제 여자 창화는 올림.
【원문】허리띠의 글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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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 근/현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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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정보
◈ 기본
  # 흑치상지 [제목]
 
  현진건(玄鎭健) [저자]
 
  1939년 [발표]
 
  역사소설(歷史小說) [분류]
 
  # 전기소설 [분류]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현진건의 역사 소설 (193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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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치상지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6월 0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