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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치상지 ◈
◇ 메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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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현진건
 

1. 메아리

 
2
맡있성 고을은 맡있산 줄기인 새머리산을 비스듬히 등지고, 동북으로 범근 내 하류를 건너 가차산이 어긋나게 두 나래를 벌린 듯, 에둘린 데다가 남으 로 남으로 뻗어 나려간 밝달산의 길고 장찬 준령이 깎아지른 듯이 서남방의 장벽을 이루었다.
 
3
후면과 좌우 양면이 험준한 산악으로 어마어마한 병풍을 펼쳐 놓은 듯 빈틈 없이 둘러막히었고, 전면만 비록 터졌다 하나, 평원광야가 허허벌판으로 멋없이 열린 것이 아니요, 큰 내가 지로 세로 여러 갈래를 누비질한 것 같다. 이 누벼 놓은 듯한 냇줄기마다 크고 작은 산들이 또다시 우긋하게 기어 들어와서 서로 부둥켜안을 듯이 가루누웠다.
 
4
막기에 쉽고 치기에 어려운 요험지대(要險地帶), 이른바 지키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쳐들어오는 사람 만 사람을 능히 당해낼 수 있다 함은 이런 지형을 두고 이름이리라.
 
5
밝달산, 맡있산, 새머리산, 세 산 줄기가 서로 어우러진 펑퍼짐한 산기슭에 돌로 쌓아 올린 맡있성이 아늑하게 튼튼하게 들어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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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성 안팎에는 큰 공사가 벌어졌다.
 
7
지세도 이렇듯 험준하거니와 당나라 신라 연합군이 침입한 지점과는 반대 방향인 서북쪽 변방에 치우친, 말하자면 두메에 가까운 곳인 탓에 사나운 당병의 파괴의 손도 이 성까지는 미치지 못하였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다스리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둔 까닭으로 천연의 요지에 인공을 다한 이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좋은 성도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성돌이 빠져 달아나 군데군데 무너지고 허술해진 데가 많았었다.
 
8
천으로 헤아릴 역군들이 이 성의 외벽에 개미떼처럼 둘러붙어서 수장(修粧)에 눈코를 못 뜬다. 큼직큼직한 바위를 이엿사이엿사 메어 오고, 메와 겨누와 마치와 정으로 돌을 짜개고 쪼고 다듬고, 아귀를 맞춰 쌓아올리고, 땜질을 하고 보공을 괴고 잡석을 져 내고…….
 
9
늦은 가을 바람이 쌀쌀하게 헐벗은 옷 안으로 기어들건만 역군들의 얼굴과 잔등엔 땀이 주욱주욱 흘러나렸다. 일하기에 고비끼인 그들은 이 땀방울을 옳게 씻을 겨를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10
이따금 주먹으로, 또는 앞섶자락으로, 쓱 한번 문지르고 일손을 쉬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도 고된 빛이란 찾으랴 찾을 수 없었다. 불콰하게 상기된 얼굴엔 긴장과 감흥이 넘쳐흘렀다. 그들의 손길은 번개같이 빠르고, 올리고 나리는 팔뚝엔 새 힘이 샘솟는 것 같다. 신이 저절로 나는지 어깨가 우쭐우쭐하며 잽싸게 놀리는 발길도 춤추는 듯하다.
 
11
그들은 불 같은 적개심(敵愾心)에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12
적병이 오기 전에 이 공사를 마쳐야 한다. 오밀조밀하게 쩍 말없이 이 수장(修粧)을 끝내어야 한다. 아무쪼록 우리 군사는 한 명도 다치지 않고, 적군은 함몰을 시키도록 화살 나갈 구멍과, 끓는 물을 내어 쏟을 자리를 공교하게 단단하게 맨들어야 한다.
 
13
이 이글이글 끓는 정성 앞에는 귀찮음도 없었다. 괴로움도 없었다. 성밖에 지지 않게 성안도 야단법석이다.
 
14
병화를 면한 병영과 관아의 여느 집들이 더러는 남아 있었지마는, 그것쯤 가지고는 시시각각으로 조수처럼 밀려드는 이 숱한 사람을 수용하기엔 어림도 없었다. 널찍한 병영도 여러 채 지어야 하고, 피란민이 위선 거접(居接)이라도 할 울막도 마련해야 하고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성안까지 짓쳐오는 적병을 막아낼 목책(木柵)도 세워야 한다.
 
15
다행히 밝달산에는 굵고 잔 재목감이 들이 쌓이었다.
 
16
수백 수천의 도끼질 소리는 산과 골(谷, 곡)을 울리었다.
 
17
아름드리 소나무가 여기저기서 와지끈하고 우람한 비명을 지르면 역부들의 환성도 골짜기를 뒤흔들었다.
 
18
공사가 벌어진 한 편에 군사의 조련도 밤늦도록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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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잉 하며 활시위와 화살 나르는 소리는 여러 만 마리 벌떼가 우는 듯, 이따금 화포 놓는 소리는 하늘을 뒤흔들고, 검은 연기는 아득히 구름과 같 이 사라진다. "으악!"하는 호통이 벽력같이 일어나고, 창빛과 칼빛이 언덕과 들판을 뒤덮으며, 짓쳐오고 짓쳐 가는 것은 백병전(白兵戰)을 연습하는 것이었다.
 
20
백제 왼 나라가 웅진(雄鎭),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蓮), 덕안(德安) 다섯 군데 도독부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어 굴욕과 비참에 울고 떨었으되, 이 서북의 한 모서리에는 거듭 나는 기쁨과 감격에 싸이어 새로운 힘과 기운을 길르고 있었다.
 
21
이 맡있성을 웅거한 장수는 묻지 않아 흑치상지 그 사람이었다.
 
22
그 날 고량부리거리에서 당병을 쫓아버리고 잡혀 가던 백제의 장정과 부녀를 구해 낸 그는, 매어 달리는 백성들을 떼치기 어려워 그대로 데불고, 바른길로 이 맡있성을 찾아 들어온 것이었다.
 
23
그는 당나라 신라 연합군이 부소리 서울을 짓쳐 들어올 때에는 풍달군(風 達郡)의 장수로 있었다.
 
24
도성이 위급하다는 급보를 듣고, 수하 정병을 이끌어 막 구원의 길을 떠나려 할 제 때는 벌써 늦었다. 뒤미처 서울은 함락이 되고, 임금은 곰나루로 파천(播遷)하셨다는 슬픈 소식이 들이닥치었던 것이다.
 
25
서울이 이렇게 속히 적군의 손에 떨어질 줄은 몰랐다.
 
26
그는 발을 굴러 통분했으나, 혼돈한 형세에 방향도 없이 군사를 움직일 수도 없었다.
 
27
더 자세한 소식을 듣고자 며칠을 머뭇거리지 않아서, 파천하셨던 왕이 다시 돌아오시어, 태자와 대관들을 거느리시고 굴욕의 항복을 하셨다는 비보가 다시금 날아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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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세는 이미 기울어지고 말았다. 큰 집이 넘어지는데 나무 한 개로 지탱할 바 아니다. 미친 물결이 곤두섰으니 무슨 수로 돌릴 수 있을 것이냐!
 
29
사자성도 부지를 못하였거든, 이 손바닥만한 작은 성으로 대적을 항거한 다 함은 연가시가 수레바퀴를 떠미는 것보담 더 하염없는 노릇이었다. 애꿎은 인명만을 해할 뿐 무슨 도움이 있으며 보람이 있을 것인가.
 
30
설령 흑치상지 제 자신이나, 몇몇 충의가 끓는 동료와 두목들이 들고 일어선다 하여도 사기는 벌써 저상(沮喪)이 되었다. 임금이 사로잡히고 서울 이 함몰되었다는 소문에 병정들의 마음은 술렁거렸다. 기운은 죽었다. 이런 군사로 여러 번 승전에 기가 날 대로 난 당병과 신라병의 날카로운 칼끝을 막는다는 것은 무모한 부질없은 짓이었다.
 
31
그러면 그에게 남은 길은 단 두 가지밖에 없었다.
 
32
달아날까? 항복할까?
 
33
울분과 번민 가운데 밤과 낮은 새고 밝았다.
 
34
들어오는 소문은 갈수록 악착하고 참혹한 것뿐이었다.
 
35
당장(唐將) 소정방이 항복한 왕을 꿇어 앉히고 쇠채 쪽으로 후려 갈겼다는 둥, 신라왕과 함께 전승 축하연을 굉장히 배설해 놓고 의자왕을 첩이나 하인처럼 푸른 옷을 입혀 술을 따르게 하였다는 둥, 왕과 비빈과 왕자 왕손과 공경대부(公卿大夫)를 옥에 나려 가두었다는 둥, 항복한 백제 장수와 병정을 모조리 잡아다가 도륙을 해서 그 흐르는 피로 사자강물이 발갛게 되었 다는 둥, 당병과 신라병의 노략질이 어떻게 지독하였던지 사내는 보는 대로 잡아죽이고, 부녀는 욕보인 다음에 찢어 죽이고 거치는 곳마다 쑥밭이 된다는 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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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운데 믿지 못할 거짓말도 있고, 또는 참말도 있는 것 같았으나 아무튼 송구스러워서 바늘 방석에 앉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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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츰내 흑치는 피신하기를 결단하였다. 잡히어 욕을 보느니 차라리 잠시 피신을 하여 형세를 보아 다시 거사하기로 작정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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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와 동료 요 절친한 친구인 지수신(遲受信), 사질상여(沙叱相如)와, 가장 믿는 두목 십여 명을 데리고 몰래 풍달군을 빠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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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뜻을 품은 그에게 요충지대인 맡있산이 눈에 아니 뜨 일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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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 처자권속들을 그리로 안돈을 시키고, 그는 몇몇 동지와 부하를 데리고, 교묘하게 변장을 차린 다음에 당병의 동정을 살피려 나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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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츰 고량부리 거리에서 당병의 해참한 행악을 보고 용솟음치는 의분을 걷잡다가 못하여 필경 환도를 빼어 들고 달겨든 것이었다. 더구나 잡혀 가는 사람들 중에는 못하여 필경 환도를 빼어 들고 달겨든 것이었다. 더구나 잡혀 가는 사람들 중에는 자기와 결의 형제를 맺고 사생을 같이하자던 아술 성주(牙.城主) 사반(沙絆)의 딸 달아기(月英)와 그 어린 아들 귀복(貴福) 이가 끼어 있는 것을 보고 눈에 불이 일어났는데, 귀복이가 당병의 손에 무참한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자 앞뒤를 헤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42
한 번 내친 걸음은 다시 옴츠릴 수도 없었다.
 
43
얼마 동안 더 형세를 보살피고 준비를 단단히 한 뒤 의병을 일으켜야 할 것이었으나 이왕지사 일은 벌어진 것, 지금 와서 어름어름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44
백 명도 못 되는 잡혀 가던 백제 장정을 골라서 군사 조련을 시키며, 거의(擧義)의 깃발을 날리었다.
 
45
그 메아리는 흑치 자신이 생각한 이상으로 매우 굉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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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없는 말은 천리 만리를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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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치상지가 맡있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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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문은 의엿한 격서(檄書)가 돌기도 전에 한 입 건너 두 입 건너 울끈불끈한 공기에 싸이어 변을 기다리는 백제의 방방곡곡에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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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아츰에 나라와 임금을 잃고, 갈 바를 모르던 관원과 선비들, 외로운 손바닥이 울기 어려워 산 속으로 숲 속으로 몸을 피해 다니며 칼과 활을 어루만지고 속절없이 끓는 피를 걷잡지 못하던 충성 있는 장수와 군사들, 무도한 당병의 노략질과 박해에 안해를 빼앗기고 자식을 빼앗기고 가장집물을 빼앗기고 뼛골에까지 원한이 사모친 백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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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이나 한 것같이 맡있성으로 맡있성으로 모여들었다.
 
51
단 열흘이 못 되어 삼만 명이 넘는 군사와 역군을 뽑을 수 있었다. 인원은 이만해도 넉넉하였다. 오히려 좁은 성안이 터져 나갈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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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걱정은 군량과 무기이었으나 이것도 거두어들이기에 그렇게 어렵지 는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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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당병 몇 만 명이 들끓어 나와서 샅샅이 뒤져가기는 갔지마는, 짧은 시일이요 또 지리에 밝지 못한 그들이라, 한길가의 큰 고을에만 그 사정 없고 욕심 많은 손이 닿았을 뿐이요, 외딴 데와 변두리 고을에는 곱다랗게 그대로 남은 군기창(軍器廠)과 군량고(軍糧庫)가 얼마든지 있었다. 맡있성 근읍만 해도 사시량(沙尸良)이라든지 까마귀산(烏山)이라든지 하는 대읍의 창고조차 고스란히 다치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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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가을이다. 일 년 동안 피땀 흘려 지어 놓은 농사건만 별안간 난리 만나 피란하기에 바쁘던 탓으로 미처 수확할 경황이 없었다. 논과 밭에는 누렇게 익은 곡식들이 베어 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욕심꾸러기 당 병이지만 워낙 배가 불러 놓으니 제 손으로 추수까지 하기엔 성이 가시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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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창고와 들판의 곡식만으로도 얼마 동안 군량은 그럭저럭 부지를 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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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치상지는 모든 일이 제 뜻같이, 오히려 제가 생각하는 것보담 더 순조롭게 되어가는 데 매우 만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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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백병이 될락말락한 군사, 더구나채훈련도 안 된 군사를 거느리고 맡있성을 웅거하였을 때엔, 아무리 천부의 험을 자랑하는 맡있성으로도 마음이 빈 듯이 허전허전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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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대병이 인제나 저제나 닥칠 듯 닥칠 듯해서 오마조마하였다. 밤 잠을 옳게 이루지 못하고 밝달산을 불어 넘어오는 바람소리에도 몇 번을 소스라쳐 몸을 일으켰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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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제 와서는 얼마쯤 마음이 놓이었다. 이만한 군사와 이만한 군량과 병장기를 가졌으니, 당병이 어느 때 달겨든다 해도 요험한 성을 지키기에는 충분한 자신이 있었다.
 
60
그는 몸소 군사를 교란시키는 한편으로 몰려들어오는 사람을 일일이 점고를 시키고, 이력과 장기(長技)를 따라 장수와 병정될 재목을 골르고, 또 석수 일과 목수 일에 능란한 사람을 뽑아내고, 또 이렇다 할 별 재능이 없는 사람은 역군으로 돌리고, 성 외벽을 수장(修粧)하는 공사와 성안의 공사를 어떻게 진행시킬 대두리를 꾸미고, 감독하고, 분별하고, 여러 군데로 염탐꾼을 보내고, 격서를 올리고……. 제 한 몸을 백 쪽을 내고 천 쪽을 내고 싶도록 눈코 뜰 새가 없이 바빴다.
 
61
이렇게 바쁜 중에도 바늘 만한 틈을 얻으면, 그는 문루에 높이 올라 성안과 성밖을 둘러 살피기를 좋아하였다.
 
62
사람들이 저렇게 많이 모이고, 저렇게 열을 내어 일들을 하고, 저렇게 기운차게 교련을 하는구나 생각하면 그는 회호리바람 같은 감격에 사로잡히었다.
 
63
불쌍한 백제의 유민(遺民)들, 나를 이대도록 믿고 따르는 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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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을 위하여는 내 있는 힘과 정성을 다 바치리라. 이 살과 뼈가 가루가 되더라도 저들을 위하여는 아끼지 않으리라. 내 핏줄 속에 뛰는 피가 마지막 한 방울이 남을 때까지 저들을 돌보고 보호하리라.
 
65
제 호올로 마음속으로 이런 맹세를 몇 번 재우치고 뜨거운 눈물을 좌악좌악 흘리었다. 아무도 보아 주는 이 없는 감격의 눈물을!
 
66
흑치상지는 금년에 서른 아홉 살이다. 사물에 대한 분별성도 갖출 대로 갖추었거니와, 아직 청춘의 감격이 송두리째 사라지지 않은 낫세였다.
 
67
하루는 상지가 문루에 앉아 홀로 감격에 잠겼을 때였다.
 
68
문 지키는 두목의 한 사람이 웬 젊은 사람을 데리고 와서, 문루 밑에서 길게 읍하고 아뢰었다.
 
69
"장군님께 아룁니다."
 
70
상지는 성안 성밖을 굽어살피고 가슴이 찌르르하면서도, 확 열리어 한량 없이 넓어지고 커지는 이 감동의 순간을 깨치기 싫었으나,
 
71
"무슨 말이오?"
 
72
하고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었다. 여러 사람이 자기를 대장으로 우러러보고 높이었으나, 그는 부하에게 언제든지 겸손하고 존대하였다.
 
73
"지금 저희가 성안으로 들어오는 여러 군정을 점고하고 있사온 중에 이 사람이 들어오기에……."
 
74
두목은 제가 데리고 온 젊은 사람을 가리킨다.
 
75
"그래, 오늘도 사람이 많이 들어왔소?"
 
76
상지에게는 들어오는 사람의 수효가 느는 것이 무엇보담도 큰 흥미였다.
 
77
"새벽부터 들어온 사람이 아직 사시도 안 되었삽는데 이천 팔백 명 가량이 나 되옵니다."
 
78
간단한 보고를 마치고 나서 그 두목은 제 할 말을 잇대었다.
 
79
"사람이 처밀리어 눈코 뜰 새가 없사온데 이 사람은 도모지 제 근지(根地)와 성명을 대지 않삽고 굳이 장군님을 뵈어야 여쭐 말씀이 있다고 말썽을 부리옵니다."
 
80
두목은 남이 몹시 바쁜 판에 성을 가시게 한다고 매우 못마땅한 듯이 그 젊은 사람을 노려본다.
 
81
"응, 꼭 나를 안 보면 어떠하오?"
 
82
하고 상지도 그 문제의 인물을 나려다보았다.
 
83
갈걍갈걍한 키에 해끔한 얼굴이 매우 생명해 보이나 그 대추나무같이 꼿꼿한 몸자세가 여간 악지가 셀 것 같지 않았다.
 
84
글쎄 말씀이올시다 " . 장군님을 뵈옵고 사뢸 말씀이면 저희들을 보고 말을 해도 상관이 없다고 아무리 타일러도 도모지 듣지 않고 악지를 빠득빠득 부리옵니다."
 
85
"그분들이나 내나 다 같소 그분들께 말을 하는 것이 내게 하는 거나 진배 없는 것이오."
 
86
상지는 제 부하를 두둔하며 한편으로 그 말썽꾸러기를 타일렀다.
 
87
"그래서 저희들도 처음에는 혹시나 우리의 허실을 알려는 적군의 염탐꾼이나 아닌가 하고……."
 
88
두목은 말을 이었다.
 
89
"적군의 염탐꾼이면 겁낼 거야 있소? 제 두 눈으로 우리의 실력과 기세가 어떠마한 것을 똑똑히 보고 가도 좋지, 허허."
 
90
상지는 옆누르는 듯 한 마디하고 껄껄 웃었다. 인심이 이러하고, 준비가 이만한 다음에야 적군이 안다 해도 두려워할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91
"또 혹시나 그 흉측한 놈들이 보낸 자객(刺客)이나 아닌가 하고 왼 몸을 대강 뒤져보았으나 비수 같은 흉기도 없삽기로 데리고 왔습니다."
 
92
"자객? 그까짓 자객쯤이야 몇 백 명이 오기로서니 어떨 거요?"
 
93
상지는 같잖은 듯이 또 한 번 허허 웃다가 그 말썽꾼을 바라보며,
 
94
"저 사람도 보아 하니 당당한 백제 사람인데 혈마당나라 오랑캐의 개 노릇이나 할 리 있소? 그건 다 지나친 생각이이지. 우리네 사람을 너무 의심을랑하지 마시오."
 
95
상지의 입에서 이 말이 떨어지자 그 젊은 사람은 그 자리에 꿇어 엎드리었다.
 
96
"장군님의 말씀이 과연 지당하십니다. 한 나라 사람을 믿지 않사옵고 성 문에서 힐난이 심하와 적지 않은 불쾌를 느꼈사온데, 장군님께서는 이렇게 믿어주시니……."
 
97
그 젊은 사람은 감동이 지나서 말끝도 맺지 못하였다.
 
98
"우리끼리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는단 말이오? 그런데 대관절 무슨 말이오? 할말이 있거든 이리로 올라오구려."
 
99
상지도 그 말썽꾼이 제 말 한 마디에 감동되는 것을 보고 적지 않게 만족한 모양이었다.
 
100
그 젊은 사람은 불현듯 제 소임을 생각하였던지 재바르게 몸을 일으켜 사 면을 둘레둘레 살펴보다가,
 
101
"여쭙기는 황송하오나 문루는 이목이 번다하온즉 어디 종용한 처소에 가서 뵈옵고 은밀히 사뢸 말슴을 사뢰이지다."
 
102
‘과연 말썽꾼은 큰 말썽꾼이로군.’ 상지도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적이 성이 가시었다.
 
103
"여기도 아무가 없지 않소?"
 
104
"네 네, 그렇기는 합니다마는 실상인즉 여쭐 말씀보담도 드릴 물건이 있습니다."
 
105
"물건!"
 
106
하고 두목은 놀래었다. 아까 자기네가 그렇게 뒤짐질을 하여도 아무것도 발견을 못하였거늘, 물건이란 말이 웬 말인가.
 
107
"물건이 있다?"
 
108
상지도 이상스럽게 생각하고 마지못해 문루를 나려와서 그 젊은 사람을 데리고 자기 혼자서 쓰는 종용한 방으로 왔다.
 
109
방안에 들어오자마자 상지는 궁금한 듯이 다짜고짜 물었다.
 
110
"그래, 가지고 온 물건이 무엇이란 말이오?"
 
111
그 젊은 사람은 방문을 꼭꼭 닫고 나서 제품 속에 손을 넣어 흠칫흠칫하며 옷자락을 뜯는 것 같더니, 차곡차곡 접힌 무슨 피륙을 끄집어내어 두 손으로 공순히 받들어 올리었다.
 
112
상지가 받아보니 혼란한 당나라 비단 겉바탕에 안은 백제 토주(吐紬)로 받힌, 귀부인들이 흔히 허리에 둘르고 뒤에 늘어뜨리는 허리띠였다. 나비는 한 자쯤 될까, 꾸겨 쥐면 줌안에 들 듯한 것이 펼쳐본즉 길이는 열 자도 더 될 듯, 손에 보들보들한 촉감을 남기고 말씬말씬 향기를 풍긴다.
 
113
딴은 전할 사람을 꼭 만나보고 은근히 전하기는 해야 할 물건이었으나, 이 살풍경의 진중에 걸맞지 않은 진기한 선물이었다.
 
114
"이게 뭐요?"
 
115
상지는 어리둥절하며 가져온 사람에게 물었다.
 
116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117
젊은 사람의 대답은 간단하다.
 
118
"누가 보냅디까?"
 
119
"자세히만 보시면 자연 아시게 된다고 합디다."
 
120
가져온 사람의 말도 수수께끼다.
 
121
상지는 다시금 이 이상한 선물을 이리저리 뒤적거려 보았건만, 나긋나긋 아양스럽게 손바닥과 손등에 휘감기어 보낸 이의 아리알심을 알으켜 줄 뿐.
 
122
상지는 암만 생각을 해 보아도 오늘날 자기에게 이런 선물을 넌지시 보낼 만한 대상이 머리에 떠오르지 안 했다.
 
123
그도 한 나이나 젊었을 땐 (지금도 결코 늙지는 않았지만) 그 헌걸차게 생긴 풍채로 말미암아 죽네 사네하고 따르던 이성이 한둘이 아니었다.
 
124
첫째로 자기의 정실인 아한(阿汗) 부인만 해도 애끊는 사랑을 주고받다가 갖은 위험을 무릅쓴 끝에 어엿하게 결혼을 하였고, 지금은 그의 소실이 된 실애기(線娘, 선낭)와 향매(香梅)도 혹은 대갓집 딸로 혹은 붉은 다락(紅樓, 홍누)의 큰 애기로 그에게 쏟는 불 같은 정을 떼치기 어려웠던 것이다.
 
125
이 외에도 그를 따르던 여자를 주워 섬기자면 열 손가락을 꼽고도 모자라는 터이니 몰리알리 향기롭고 알뜰한 선물을 받아보기도 여러 번이었으되, 남자에게는 아무 소용이 닿지 않는 허리띠 선사를 받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상지는 호방하던 자기의 청춘 시절로 돌아가서, ‘이인가 그인가?’ 하고 지나간 기억을 더듬어 보다가 혼자 픽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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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는 아들 하나, 딸 둘의 어버이로 단란한 가정생활에 파묻힌 지 오래다. 시방 기억에 떠오르는 아름다운 그림자들도 벌써 십 년 이십 년 옛날옛적의 아득한 과거 속에 스러진 지 오래였다.
 
127
피차에 생사존망도 모르는 오늘날이어늘 지금 와서 더구나 이 난리통에 이런 선물을 보낼 까닭이 도모지 없지 않은가.
 
128
그러고 보니 이 진귀한 선물은 더욱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였다. 그렇다고 보기만 하면 자연히 알리라고 한다 하는 저편의 체모를 돌아본들 그 심바람 꾼에게 다심스럽게 미주알고주알 캐고 파기도 어려운 노릇이었다.
 
129
"그러면 저는 물러갑니다."
 
130
상지가 그 이상한 선물을 들고 이렇듯 망단하고 있을 제, 그 심바람꾼은 선선히 몸을 일으키었다.
 
131
"가기는 어디를 간단 말이오? 그대로 여기 처져 있는 것이 어떠하오?"
 
132
상지는 그 심바람꾼도 여러 피란민 모양으로 으레 이 성안에 남을 줄 지레 짐작을 하였던 것이다.
 
133
"사람이 그렇게 무신(無信)해서야 되겠습니까? 그 어른께 잘 갖다가 전 하고 왔다고 복명을 해야 될 것 아닙니까?"
 
134
"그 어른이 누구란 말이오?"
 
135
상지는 말긑에 또 한번 물었다.
 
136
그 젊은 사람은 문을 열고 나서며,
 
137
"한 마디로 누구라고 여쭈어도 잘 모르시리라 하십디다."
 
138
하고 벌써 대뜰 아래에 나려선다.
 
139
"누구라고 해도 모른다?…… 그러면 노형은 누구시오?"
 
140
전한 사람의 이름이나마 알고 싶었다.
 
141
더구나 저 같은 놈이야 " 성명이 있겠습니까? 그저 듣바위라고 부릅니다."
 
142
"듣바위, 듣바위."
 
143
상지가 뇔 겨를도 없이 그 선물을 전한 사람은 힝허니 가 버렸다.
 
144
상지가 다시 부르려 하였지만 그가 늘고 꼿꼿한 몸이 어떻게 날쌘지 순식간에 제 눈앞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원문】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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