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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치상지 ◈
◇ 첫 싸움 ◇
카탈로그   목차 (총 : 8권)     이전 7권 다음
1939년
현진건
 

1. 첫 싸움

 
2
차근차근하고도 오밀조밀한 편지 사연, 어디까지 냉정하면서도 군데군데 불같은 정열의 입김이 서린 듯하다.
 
3
한 발이 넘는 길고 긴 사설이건마는 편지가 끊어진 것이 오히려 안타깝고 미협한 듯이 상지는 다 읽고 난 그 편지를 다시 보고 또다시 보고 차마 놓지를 못하며 깊은 생각에 잠기었다.
 
4
한 개 여자의 매서운 결심으로도 이만한 대담하고 중요한 일을 할 수 있거든 하물며 수미 대장부로 이만큼 인심이 돌아오고, 군사와 병장기와 양초를 얻은 다음에야 하늘을 돌이키는 큰 업을 세우고 큰 공을 이루는 것도 무엇이 어려우랴 하였다.
 
5
이 불쌍하고 가련한 백제 백성으로 하여금 해와 달을 바루 보게 하고, 적 병의 발굽 아래 점점이 피로 어룽진 이 도성과 산하(山河)로 하여금 새로운 빛을 발하게 못하면 무슨 얼굴로 이 여인을 대하랴 하였다.
 
6
‘두고 보십시오. 그 나라를 배반한 충상영이란 놈과 그까짓 소정방의 수 하편장인 유인원 따위야 한칼에 목을 베어 그대의 성의를 저버리지 않으리 다.’ 상지는 감격과 호기에 떨면서 그 귀부인에게 답장이나 하는 듯이 호올로 속살거리었다.
 
7
더구나 편지 끝에 정성들여 그려 보낸 그 지도(地圖)는 만금의 보화보담 더 유용한 것이었다.
 
8
한 번 그 지도를 들여다보면 당병과 신라병이 어디어디 얼마 얼마씩 배치되었다는 것을 환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손바닥을 가리키는 듯이 분명하고 자세하다.
 
9
상지는 마츰내 그 편지를 무릎 아래 나려놓고 벌떡 일어나 팔짱을 끼고 방안을 왔다 갔다 하였다. 왼 몸에 용솟음치는 힘을 가만히 앉아서 배기기 어려웠던 것이다.
 
10
한동안 감격의 회호리바람에 둥둥 뜨는 몸과 마음을 걷잡지 못하다가 당 병과 신라병이 내일 모레로 이 맡있성에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편지 구절을 생각하고 자기 혼자만 알고 있을 일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
 
11
그는 자기의 동지요, 막하의 제일 맹장인 지수신(遲受信)과 사질상여(沙 叱相如)를 불러 같이 의론해 보기로 하였다.
 
12
두 사람은 상지의 처소로 불려왔다.
 
13
"일은 되었소. 적진 중에 이런 기이한 여자가 있어 연통을 하였구려."
 
14
하고 상지는 두 사람에게 그 편지를 내어 보이었다.
 
15
두 사람의 눈도 한동안 어린 듯 그 편지에 붙고 떨어지지 않았다.
 
16
"참 훌륭한 여인도 있습니다그려. 그러면 그 기급을 할 당병과 신라병이 싸울 뜻도 없으면서 체면 수습으로 쉬이 꾸벅꾸벅 올 모양이군요. 그래도 그렇지 않으니까 오늘부터라도 일층 더 각별 방비를 해야 될 것 아닙니 까?"
 
17
사질상여가 먼저 입을 열었다. 흑치상지보담 못하지 않게 훤츨한 키에 떡 벌어진 어깨판, 두툼한 입술과 쏘는 듯한 안광(眼光)이 믿음직스러우면서도 기운차 보이었다.
 
18
"이런 죽일 놈이! 그 늙은 여우 같은 놈이 어디 가서 뒈졌나 했더니만, 이놈이 신라군에게 항복을 해 가지고 무슨 낯싸대기를 쳐들고 선봉장이 되어 온다! 이런 죽일 놈, 이놈이 내 눈앞에 얼씬만 했단 봐라. 이런 놈은 칼에 피를 묻히는 것도 더러우니 그대로 잡아다가 사지를 찢어 죽여야……."
 
19
지수신은 그 다섯 자도 넘지 않는 짤막한 몸을 벌벌 떨며 분해한다. 그는 백제 좌평 충상영이가 선봉이 되어 온다는 소식에 치를 떠는 것이다. 그 작은 몸이 왼통 그대로 담 덩어리고 용맹 덩어리인 듯 날쌔고 다부지게 생겼는데, 아래턱과 웃입술에 침같이 숭숭 솟은 새까만 수염에도 충성과 의분이 칼날같이 뻗친 것 같다.
 
20
"지 장군, 고정하시오. 늙은 몸이 제 발로 죽으러 꾸벅꾸벅 오는 것이 우습지 않소? 허허."
 
21
사질상여는 가소로운 듯이 웃는다.
 
22
"그놈은 세상없어도 놓치지 말고 짓이겨 죽여야!"
 
23
지수신은 그래도 분기가 가라앉지 않은 듯이 몸둘 곳을 모른다.
 
24
"두 분 장군의 의견은 어떠하오? 저들이 돌아갈 길이 바빠서 속히 싸우는 데 뜻이 있다 하였은즉, 그 말대로 지구전을 하는 것이 어떨는지?"
 
25
흑치상지가 의견을 내었다.
 
26
"우리 군사들의 의기가 충천한 오늘날, 여러 날 두고 갈아놓은 칼과 창이 적군의 피에 주려 우는 오늘날, 지구전까지 할 것은 없을 것 같소 그 허수아비 같은 군사야 갑옷 투구가 한 번 부딪기만 하면 풍비박산쥐구멍을 찾을 것 아니겠소?"
 
27
지수신은 대번에 맞아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28
"일격지하에 적병의 예기를 꺾고, 선봉대를 무찔러 버리자는 지 장군의 의견도 물론 당당한 정론이지만, 그 편지로 말하면 여간 적정을 잘 살핀 것 이 아닌즉, 아무튼 방비를 굳게 하고, 싸울 뜻 없는 적병으로 하여금 더욱 피로하고 진력이 나게 하는 것이 만전지책일까 하오."
 
29
사질상여는 어디까지 그 편지의 의견을 존중하여 정중한 지구전을 주장하였다.
 
30
"충상영이가 온다 하니 더더구나 살이 떨리는구료. 피가 끓는구료."
 
31
지수신은 비분강개한 나머지에 주먹으로 방바닥을 쳤다.
 
32
"그놈이 임가 놈과 서로 짜고 나라를 병들게 만들고, 마지막엔 적병까지 불러들인 놈 아니오? 임금과 나라의 은혜가 태산같이 융숭하였거늘, 도성이 깨어지기 전에 먼저 밤을 타서 신라진으로 달아난 놈 아니오? 임가 놈으로 말하면 워낙 겁쟁이라서 간악한 꾀와 용맹이 그렇게까지는 나지를 못하여 산중으로 도망질을 쳤다가 제가 불러 들인 적병에게 제가 잡히어 말경엔 그런 개죽음을 하였으니 하늘이 나리신 벌이지마는, 이 충상영이란 놈만 오늘 날까지 더러운 목숨을 보전하여 감히 선봉장이 되어 우리를 치러 온다 하니 어지 통분하지 아니하오?"
 
33
지수신의 뜨거운 입술로 뿜어내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충분(忠憤)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다.
 
34
상지와 상여도 말을 끊고 간신이요 역적이요 지금은 적장인 충상영을 노리는 듯 눈을 부릅뜨고, 한동안 앞을 흘겨보며 드윽하고 이를 갈았다.
 
35
방안의 공기도 미움과 분함에 떠는 것 같았다.
 
36
지수신은 다시 제 말끝을 이었다.
 
37
"그리고 이건 물론 지나친 말 같으나 그 편지의 사연이 아무리 곡진해도 나는 그대로 믿을 수는 없소. 왜 그러냐 하면 그 창화란 여자가 본디 임가의 계집이었더라 하지 않소? 그런 역적 놈의 가속의 말을 어떻게 일일이 준신할 수야 있소? 아무리 제가 개과천선하였노라, 인제는 백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노라 하지마는, 흉측하고 의뭉스러운 당나라 놈들이 무슨 수단으로 그 계집을 어떻게 꾀어 이런 편지질까지 하게 하는지 누가 안단 말이오?"
 
38
"그럴 리야 만무할 것 같소."
 
39
상지가 말을 막았다.
 
40
"아무리 간특한 여자라 할지라도 제 본마음이 아니고선 이렇게 구구절절 이제 폐부에서 우러나는 소리는 하지 못할 것이오. 그런 의심을 하시는 걸 보면 지 장군이 그 편지를 잘못 보신 게지."
 
41
"나도 그 여자의 말을 전수이 아니 믿는다는 것은 아니오. 다만 일개 아녀자의 말을 그대로 취신하기가 어렵단 말이지."
 
42
수신은 간신과 역적에 대한 분격이 심한 끝에 창화 부인의 심사에까지 의심이 간 것이었다.
 
43
"이 사연을 자세히 볼 것 같으면 제 남편 임가와도 무슨 깊은 곡절이 있는 듯 싶소. 그 자세한 사정을 말하자면 그 긴 사연이 몇 갑절이나 더 길어진다 하였을 적에는……."
 
44
상지는 제품속으로 날아든 귀엽고 영리한 파랑새와 같은 창화 부인을 두둔 안 할 수 없었다.
 
45
"필유곡절인 것 같소."
 
46
상여도 상지의 말에 찬성을 하였다.
 
47
"임가와 살기는 살았지만 깊은 원한이 맺혔던 것 같소. 전후 사정은 자세히 모르지만 고량부리에서도 당장을 호려서 제 남편을 죽여 놓았다고 까닭 모르는 백성들이 길길이 뛰고 그 여자를 죽이려 하던 것은 우리가 목도 한 것 아니오. 그것만 보아도 그 여자가 임가 같은 위인을 사람같이 보지 않은 것만은 사실인 듯하오."
 
48
"간신과 음녀의 창자란 천 겹 만 겹, 우리네 여느 사람으론 요량도 할 수 없는 거요."
 
49
수신은 끝끝내 외곬으로 나가는 제 의견을 곤치려 들지 않았다.
 
50
"아무튼 기(奇)여자는 기(奇)여자요."
 
51
상여가 다시 입을 열었다.
 
52
"임가란 놈이 한창 거드럭거릴 제, 얼굴만 반반하면 남의 집 양가(良家) 여자도 함부로 뺏아 왔으니, 아마 그 불쌍한 희생의 하나인지도 모르지."
 
53
"옳소, 옳아. 사실 장군의 말이 근리(近理)하오. 그 여자의 말을 믿고 안 믿는 건 두 번째요. 첫째 우리의 준비와 방비를 굳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할 줄 아오. 성외 성내의 수장은 거의 끝이 났으니 내 생각엔 성밖에 다시 목책을 박고, 성 주위를 둘러 파서 그 밑에 엉구렁을 만들고 그 위를 거짓 다리로 덮기로 합시다. 적병의 형세를 보아 치게 되면 치고 막게 되면 막으면 고만 아니겠소? 자아, 지 장군은 성 밑 파는 것을 막고 사질 장군은 성 밖 모책을 감독하도록 하시오. 나는 하루라도 더 군사를 조련시켜 놓아야겠소."
 
54
상지는 마츰내 단안을 나리었다.
 
55
흑치상지. 사질상여 . 지수신 세 장수가 허리띠의 글발을 가운데 놓고 난상토의로 치고 막을 꾀를 정한 지 사흘이 지나자, 사방으로 떠내어 보내었던 보발꾼으로부터 과연 당병이 쳐들어온다는 첩보가 빗발치듯 들어왔다.
 
56
굉이산을 지나느니, 범근내 줄기를 건네느니, 각각으로 적병이 가까이 온다는 것을 알리었다.
 
57
맡있성 망루에 올라 보아도 기치창검을 번득이며 개미떼 같은 적병이 산과 들판에 깔리어 곰실곰실 움직이는 꼴이 보이게 되었다.
 
58
그러나 성안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당황치 아니하였다.
 
59
성의 주위를 둘러 파는 공사도 마츰 끝이 났고, 성밖에는 굼튼튼한 목책을 박은 지도 벌써 오래다. 어느 때 적병이 밀려와도 아무런 걱정이 없었던 것이다.
 
60
군사들은 적병이 오는 것을 보고,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렸던 것이 인제야 오는구나, 하는 듯이 오히려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창과 칼과 활을 어루만지며 인제야 쓸 날이 온 것을 자못 기뻐하였다.
 
61
그러나 흑치상지는 성문과 목책 문을 굳이 닫고 깃대를 누이고 북과 쟁(錚)치기를 그치고, 군사에게 망령되이 움직이기를 절금하였다.
 
62
당병은 성 앞 백 보쯤 되는 지점에 진을 치고 성안의 동정을 살폈으나, 성안은 죽은 듯이 고요하다.
 
63
하루가 지났다. 이틀이 지났다. 닷새가 지났다. 엿새가 지났다.
 
64
당진(唐陳)에서 아무리 싸움을 청하여도성 안에서는 도모지 응하지 아니 하였다.
 
65
유인원은 충상영의 선봉대를 명령하여 성 밖의 목책을 두려빼고 성벽으로 짓쳐들라 하였다.
 
66
그러나 당병이 목책 가까이 짓쳐가면 난데없는 화살이 비오듯 쏟아져서 제 군사만 죽일 뿐이요, 목책을 빼기는 용이치 아니하였다. 가까스로 목책 한 머리를 뚫고 나간 당병들이 성 밑 가까이 와서 운제(雲梯)를 곤두세우고 성벽에 기어오르면, 성안에서는 뜨물과 굵은 바위를 구을러 나리어 당병들 이 성벽에서 미끄러 떨어지면 별안간 화포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자, 거짓 다리가 일제히 아가리를 벌려 무수한 당병은 구렁텅이 속으로 떨어지고 만다.
 
67
성벽을 쳐 무너뜨리고 성안에 짓쳐든다는 일은 단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68
열흘이 지났다. 보름이 지났다.
 
69
당진은 날이 갈수록 초조해졌다.
 
70
승전고를 울리고 돌아갈 마음이 살 같은 오늘날, 조그만한 성 하나에 이렇게 날짜를 허비하고 군사를 잃은 것은 무의미한 노릇이었다. 기막힐 노릇이었다.
 
71
여러 번 예기를 꺾인 당병은 인제 겁부터 먼저 집어먹고 목책 가까이 가는 것조차 꺼리고 모피(謀避)하게 되었다.
 
72
유인원은 화풀이로 날마다 충상영을 불러다가 꾸지람 꾸지람하게 되었다.
 
73
충상영은 출전할 때 호언장담한 깐이 있어서 더욱 면목이 없었다.
 
74
나아갈 수도 없고 물러갈 수도 없는 막다른 골목! 충상영 제 자신도 그 늙은 목숨이나마 내어놓고 싸울 뜻은 처음부터 없었다. 손바닥만한 맡있성쯤이야 당병이 쳐들어온다는 소문만들어도 저절로 항복을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대로 달아날 줄 알았다. 돌아가는 백성과 군사가 아무리 많고 성벽은 아무리 튼튼하게 수장을 하였다 해도 애당초에 믿지를 않았었다.
 
75
어째 어름어름해서 뒷전만 보다가 공을 세워서 당장에게 긴하게 보이려 한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와 보니 그 물샐틈없는 방비에 혀를 내어 두를 수밖에 없었다.
 
76
몇 번 쳐들어가 보니, 그 군사들의 용맹스럽고 씩씩한 품이 백제 사람 같지가 아니하였다. 자칫 잘못하면 그 죽을 애를 쓰고 간신히 보전한 이 목숨이 위태할 지경이었다.
 
77
‘내가 왜 방정맞게 자원출전을 하였던고!’ 몇 번이나 자기의 입이 너무 가벼웠던 것을 후회하였는지 모른다.
 
78
그러나 오늘날 와서 슬며시 달아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79
‘에라! 이왕이면 흑치상지란 놈에게 항복을 해 버릴까?’ 하는 생각도 가끔 일어났으나 그럴 만한 기회도 잡을 수 없거니와 지금 한창 적개심에 불타는 그들이 설령 항복을 한댔자 저를 살려둘 리가 만무할 듯도 하였다.
 
80
충상영은 마츰내 일대 결심을 않을 수 없게 되었다.
 
81
내일은 제 자신이 진두에 서서 흑치상지를 불러내어 좌우 양단간 귀정을 내어보리라 하였다.
 
82
충상영은 백발을 흩날리며 손톱으로 찍어놓은 듯한 조그마한 눈을 반짝거리고 무서운 결심으로 밑 아래 바싹 다가섰다. 그 옆에는 ‘대당 선봉장 충 상영(大唐先鋒將 忠常永)’이라고, 굵은 글자 여덟 자를 뚜렷이 쓴 깃발이 펄렁거리었다.
 
83
그에겐 이 여덟 자가 얼마나 귀중한지 모른다. 이 여덟 자를 머리 위에 내어 걸기 위하여 그 대견한 늙은 목숨을 태웠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광영과 위풍으로 한 번 흑치상지를 얼러 보려는 것이다.
 
84
"너희 주장 흑치상지에게 빨리 보하라. 대당(大唐) 선봉장 충상영이 옛 정을 생각하여 일러듣길 말이 있으니 빨리 나와 명을 받으라 해라."
 
85
수문장을 치어다보며 호기 있게 고함을 질렀다. 제 목소리가 이만큼 크고 카랑카랑할 줄은 제 자신도 몰라 들을 지경이었다.
 
86
수문장은 이 사연을 급히 보하였다.
 
87
흑치상지, 사질상여, 지수신의 세 장수는 한 자리에 모여 적병의 피로하고 겁내는 빛이 현저한즉, 오늘쯤 성문을 열고 공격을 개시하는 것이 어떠냐고 거의 의론이 작정된 때에, 이 소리를 듣고 세 장수는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88
"충상영이란 놈이 할말이 있노라고? 이놈을 오늘일랑 한칼에 목을 뎅겅 베어 버립시다."
 
89
지수신은 충상영이란 말만 들어도 욕지기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
 
90
"제가 무슨 말을 하는가 내가 가서 들어볼 터이니, 사질 장군과 지 장군은 마츰 준비를 하고 있다가 오늘쯤은 기틀을 보아 나리 무찔러보는 것도 무방할 듯하오."
 
91
흑치상지는 문루에 나타났다. 과연 충상영이가 그 꼬챙이 같은 몸이 부러질 듯이 꼿꼿이 세우고, 오초마를 탄 꼴같잖은 풍신이 눈 아래 보였다.
 
92
"오오! 흑치상지냐! 오래간만이로군."
 
93
충상영이도 성 밑에서 재바르게 상지의 모양을 알아보고 점잔을 빼며 부르짖었다.
 
94
"별래(別來) 무사한가? 내 듣기에 그대가 이 성중에 있다 하였지만 믿지를 않았더니 과연 있기는 있구나. 시무(時務)를 아는 자 영웅이라 함은 그 대도 응당 짐작할 듯, 대세가 이미 기울어진 오늘날 손바닥만한 외로운 성을 지킨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대병이 한 번 무찌르면 애꿎은 인명만 해할 것이 아닌가?
 
95
내 소정방 대총관의 명을 받아 그대를 치러 왔으나, 옛날 한 조정에 섰던 정의를 생각하여 그대에게 일르노니 순천자는 흥이요 역천자는 망이라, 그 대가 이 성을 가지고 빨리 항복하면 부귀와 영화를 같이 누리게 될 것이요, 만일 굳이 저항하면 신수이처(身首異處)에 후회한들 어찌 미치리오……?"
 
96
충상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 위에서는 우레같은 호통이 떨어졌다.
 
97
이놈 상영아 네 " ! 듣거라. 너 이놈, 한 나라의 좌평으로 있으면서 적군이 쳐들어오거든 맞아 싸워 적군을 물리치고 종묘사직을 태산반석 위에 놓이게 하는 것이 재상으로 마땅한 일이요, 만일 힘이 거기 미치지 못하거든 배성일전(背成一戰)에 목숨을 바쳐 망극한 국은을 답할 것이어늘, 구구한 목숨을 살리고자 임금과 나라를 배반하고 밤을 타서 적진으로 달아났으니, 그것만 해도 그 미천 죄악(彌天罪惡)은 만 번 죽어도 씻을 길이 없지 않느냐. 또 한번 항복을 하였거든 아는 듯 모르는 듯 숨어 있어 구구한 목숨이 나 보전할 것이지, 인제 감히 진상에 나타나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더러운 줄도 모르고 아가리를 놀리니 네 죄야말로 절절가통하구나. 이 성으로 말하 면 나라를 바루 잡으려는 십만 충의지사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철석같이 굳게 맹서하고 있으니 백만 당병이 쳐들어온다 해도 몰살을 면치 못하려든, 하물며 그까짓 유인원 따위의 소정방 수하 편장이 거느린 오합지졸이리요.
 
98
내 들으매 네 군사 중에는 백제 사람이 많다기로 차마 한 나라 사람을 해치기 어려워 오늘날까지 은인자중하였을 뿐이다. 너 같은 늙은 여우의 고기는 비단 우리 성안의 장졸이 찢어먹으려 할 뿐만 아니라 직접 네가 거느리고 있는 백제 군사들도 네 간을 내어 씹기를 원할 것이요, 그나 그뿐인가, 지하에 있는 네 조상까지도 한시바삐 네 피를 마시지 못하여 몸부림쳐 울 것이다!"
 
99
상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충상영의 얼굴은 각각으로 흙빛이 되어갔다.
 
100
상지는 한층 더 소리를 가다듬어,
 
101
"이 충상영을 따라온 백제 군사들 듣거라. 너희야 무슨 죄가 있으랴! 이 간신적자의 꾀에 한때 빠졌을 뿐, 이 역적을 좇다가는 너희들도 죽어 너희 조상을 볼 낯이 없을 것이다. 한시바삐 이 역적의 머리를 베어 이 성 안으로 돌아오라!"
 
102
말이 떨어지기 전에 당진 중에서는 별안간 ‘와!’하는 함성이 일어났다.
 
103
당진에서 일어난 함성은 백제의 항졸 한 떼가 문득 항오를 벗어나서 성밖의 목책을 향하고 내닫기 시작한 것이었다.
 
104
"우리가 우리 원수를 위하여 싸운다는 것은 뒤쪽이오."
 
105
"역적 놈에게 속아서 한 나라 사람을 치러 온 우리가 매친 놈들이오."
 
106
"흑치 장군님의 말씀마따나 우리는 성안으로 돌아갑시다."
 
107
"성안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우리 죄를 사해 주실 테지."
 
108
"그야 여부가 있소! 너희들이 무슨 죄가 있느냐고 흑치 장군님이 바루 그러지 않으셨소!"
 
109
"옳소! 옳소!"
 
110
제각기 떠들면서도 목책을 넘어 성문으로 몰려들었다.
 
111
말이 서로 통하지 않는 까닭에 당병들은 처음에는 백제 항졸들이 충상영 의 명령을 듣고 성을 돌격이나 하는 줄 알았다가, 나종에야 눈치를 알아차리고 달아나는 항졸의 뒤통수에 대고 활을 쏘아 제치었다.
 
112
맨 뒤에 따르던 군사가 ‘에쿠! 에쿠!’ 외마디 소리를 질르고 더러 넘어졌다.
 
113
"자아! 원수의 당병 놈들을 먼저 해냅시다."
 
114
누가 소리를 지르자 닫던 항졸들은 다시 돌쳐 섰다. 그들은 당진을 향하고 활을 맞쏘기 시작하였다.
 
115
얼굴빛이 샛노래진 충상영은 그때까지도 성 밑에 오똑 말을 놓고 있다가, 제 등뒤에서 야단법석이 일어나매 어쩔 줄을 모르고 쩔쩔 매다가 말머리를 돌려 난군(亂軍)을 제지하려 하였지마는, 지금 와서 누가 그 영을 들을 씨알머리는 없었다.
 
116
"저놈부터 죽여라!"
 
117
"저 역적 놈의 목부터 베어라."
 
118
화살은 충상영의 머리꼭지 위로 잉잉하고 소리를 내며 날아들었다.
 
119
충상영은 개고리 모양으로 말 등에 납작 엎드려서 말을 채질하여 당진으로 내뺐다.
 
120
상지는 문루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다가 각 성문을 열고 적진을 짓치라고 명령을 발하였다.
 
121
원수를 눈앞에 두고 살이 떨리고 피가 뛰었으나, 망동을 말라는 군령의 굴레에 얽매어 이를 갈고 있던 성안 군사들은 명령 일하에 사자처럼 날뛰며, 굳게 닫히었던 성문을 열고 물밀듯 밀려나왔다.
 
122
지수신의 거느린 일대는 동문으로 나오고, 사질상여의 거느린 일대는 서 문으로 나왔다.
 
123
상지도 급급히 문루에서 뛰어나려 남문을 열고 주력 병마를 몰아 짓쳐 나갔다.
 
124
함성과 화포 소리는 천지가 뒤눕는 듯하고 벌떼 같은 화살은 폭풍우를 몰아가듯 당진에 퍼부었다.
 
125
자중지란에 창황망조하던 당병들은 불시에 총공격을 만나, 수각이 황란하여 이리 밀리고 저리 몰리는 바람에 서로 부딪고 엎더지고 자빠져서 죽는 자도 수가 없었다.
 
126
의기충천한 성안 군사들은 창과 칼을 번득이며 호통을 치며 세찬 기세로 당진으로 짓쳐들자 싸움이 채 어울려지기도 전에 당병은 겁을 집어먹고 물러나기 비롯하였다.
 
127
후진에 있던 유인원이 아무리 군사를 동독(董督)하여도 한 번 도망하기 시작한 군사의 발길을 멈출 수가 없었다.
 
128
지수신은 선봉 깃발만 바라보고 충상영의 뒤를 쫓아갔다.
 
129
워낙 벅적거리는 난 군중이라 한 사람의 뒤만 밟기가 용이한 노릇이 아니었다.
 
130
앞을 막는 적병을 헤치고 나가 보면 이따금 깃발이 온 곳 간 곳 없기도 여러 번이었다. 몇 번을 놓치고, 몇 번을 찾고…….
 
131
마츰내 그 깃발은 자기의 눈앞에서 서너 간통 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132
"이놈 충상영아, 게 있거라!"
 
133
벽력같이 호통을 치고 껑충 말을 채쳐 뛰어들며 미움에 서린 칼을 냅다 질렀으나 그 칼에 맞아 나둥그러진 장수의 얼굴을 보니 충상영이가 아니요, 낯모르는 다른 당장이었다.
 
134
지수신의 눈에서는 불길이 일어났다. 입때까지 죽을 애를 쓴 것도 헛일이 었던가.
 
135
깃대 쥔 졸아치를 사로잡아 충상영의 간 곳을 물으려 한즉, 그 졸아치는 이 백제 장군이 저를 쫓아오는 것이 제가 쥔 깃대 탓인 줄 깨닫자 그제야 그 깃대를 동댕이를 치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달아나 버렸다.
 
136
지수신은 그 깃대를 뺏아 칼로 북북 그어서 겨우 분풀이를 하였다.
 
137
기실 충상영은 지수신이 자기를 쫓는 눈치를 채고 말에서 나려 졸아치 옷으로 변장하고 쥐새끼처럼 빠져나간 것이었다.
 
138
겨울 해는 짧았다. 미시에 시작된 싸움이 신시가 지나고 유시로 접어들자 날은 벌써 우둑어둑하게 되었다.
 
139
밑있성 밖으로 한 이십 리 가량이나 당병을 물리치고 상지는 쟁을 쳐 군사를 거두었다.
 
140
이 날 싸움에 당병을 여러 천 명 죽은 모양이나, 성안 군사는 단열 명이 상하지 않았다.
 
141
그 이튿날 날이 밝자 노획물(鹵獲物)을 거두어들이기에 백제 군사들은 한동안 고 비 끼이었다.
 
142
당병이 어떻게 황황급급하게 뺑소니를 쳤던지 길바닥 논두렁 밭둑에 깔린 것이 칼일세 창일세 활일세 화살일세. 다급한 김에 투구도 집어던지고 벙거지를 동댕이치고 심지어 군 복위 아랫마기를 홀랑 벗어놓은 것까지 무수하였다.
 
143
흩어진 병장기와 갑옷 등속을 줏어 모은 것만 해도 산더미 같았지만 고스란히 버리고 간 군량만 해도 천 석이 넘고 게다가 소가 수천 필이요, 말만 삼백 필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 외에 술과 마른 고기와 육포도 끔찍 끔찍하게 남아 있었다.
 
144
싸움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고기수풀(肉林, 육림)과 술못(酒池, 주지)에 진창만창 먹고 마시고 노라리질 하러 온 것이나 진배없었다. 그중에도 마소가 이렇게 많은 것은 아마 이 성을 두려뺀 다음에 노략질한 물건을 바리로 실어 가려고 미리 준비한 노릇인지도 모른다.
 
145
더구나 뒈져 넘어진 당병을 검사해 보매, 호주머니란 호주머니는 말할 것 도 없거니와 바짓가랑이까지 묵직묵직하게 늘어진 것을 보면 그 속에까지 노략질한 물건이 들어 있는 것이다.
 
146
"이런 육시를 할 놈 좀 보아. 이 바짓가랑이 속에 이 가락지를 넣었네 그려."
 
147
하고 어떤 군사는 부연은가락지를 꺼내들고 동료들에게 보이는 이도 있었다.
 
148
"이놈 좀 보아. 이 허리춤에는 은장도 금장도며 새색시 노리개를 그대로 뽑아 넣었구먼."
 
149
"뭐! 은장도? 내 딸도은장도를 차고 있었는데……. 그러면 그 몹쓸 놈이 내 딸을 죽이고 그것을 뽑지나 않았을까?"
 
150
늙은 군사 하나가 그 노리개를 눈에 데미다보며 이런 탄식도 하였다.
 
151
아무튼 노략 물품을 너무 많이 집어 넣은 탓으로 몸이 둔해져서, 다리를 잘못 놀려 제 명을 재촉한 놈도 더러는 있었던 모양이다.
 
152
상지는 노획 물품을 정돈시키고 당병의 죽은 송장은 여러 구덩이를 파고 묻어 준 다음에 크게 군사를 호궤하고 굳이 당병을 추격하지 않았다.
 
153
하루 이틀 군사가 예기를 기르는 것도 필요하였지만, 너무 적병의 뒤를 쫓는 것이 적지 않은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154
당병도 백제 군사가 진(陣)친 자리에서 한 오리 가량 떨어진 자리에서 진 을 치고 다시 대오를 정제하는 모양이었으나, 더 물러가지도 않거니와 그렇다고 쳐들어오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155
양군이 대치한 채로 하루이틀 지내었다.
 
156
이따금 당진에서는 북과 징과 꽹과리를 울리며 야단스럽게 함성을 올리었으되 헛기세뿐이고 싸움을 청하러 들이덤비지는 아니하였다.
 
157
백제진에서는 당진에서 함성이 일어날 때마다 군사들은 팔을 부르걷고, 이 번 한 번만 더 맞닥뜨리기만 하면 당나라 군사를 모조리 도륙을 시켜 놓 는다고 서둘렀으나, 좀처럼 싸우라는 명령이 나리지 아니하였다.
 
158
밤은 깊었다. 장막중에는 상지와 상여와 수신 등 백제군의 우두머리 장수들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서 전략을 의론하고 있었다.
 
159
다혈질인 지수신은 오늘밤에라도 당진을 무찌르자고 주장하였으나, 상지는 종시 응낙을 하지 않았다.
 
160
"그야 지금 짓쳐 들어가면 우리가 이길 줄은 나도 모르는 바가 아니오.
 
161
그러나 우리 군사가 한 명이라도 상하는 것이 아깝지 아니하오? 적군은 몇 십만 명이나 된다 하니 더러 죽어도 얼마든지 더 보충할 수가 있지마는 우리 군사야 어디 또 있고, 또 있단 말이오? 한 번이라도 패전을 하든지, 설령 승전을 한다 해도 우리 군사가 축이 많이 나서는 안 된단 말이오."
 
162
지수신도 상지의 곡진한 이 말에는 경의를 표하였지만 끝끝내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안 했다.
 
163
"흑치 장군의 말씀이 옳기야 옳소마는 하잘것없는 적을 눈앞에 두고 가만히 있으면 어떡하오? 언제나 도탄 중에 든 백제 유민들로 하여금 다시 천 일을 보게 한단 말씀이오?"
 
164
"지 장군의 무지개 같은 충의야 감복하는 바이지만 서둔다고 해서 일이 뜻대로 어디 되오? 며칠만 더 형세를 관망하는 것이 좋을까 하오. 적이 이따금 고각을 울리는 것이 허장성세하는 것인즉, 오래지 않아 싸우지 않고 물러갈 조짐인가 하오. 그때를 타서 시살(.殺)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가 하오."
 
165
서로 의론이 한창 분분할 때에 문득 파수 보던 군사가 장막 안에 나타났다.
 
166
"흑지 장군님께 여쭙니다. 웬 부인네 한 분이 말을 타고 와서 기어이 흑치 장군을 뵈옵겠다고 하옵니다."
 
167
"웬 부인네가?"
 
168
하고 세 장수는 서로 돌아보았다. 그들의 머리 속에는 비단 허리띠에 글발을 적어 보낸 창화 부인이 한결같이 떠올랐다.
 
169
상지는 몸을 일으켜 장막 밖으로 나왔다.
【원문】첫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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