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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치상지 ◈
◇ 칼과 돌 ◇
카탈로그   목차 (총 : 8권)     이전 3권 다음
1939년
현진건
 

1. 칼과 돌

 
2
여러 사람들의 입에서는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3
"앗!"
 
4
소리가 저절로 흘러 나왔다.
 
5
그들의 눈앞에는 비호같이 닫는 말 꽁무니에 매어 달려 대굴대굴 굴러가는 백제 귀인의 참혹한 꼴이 지나갔다. 그것도 한 순간이요, 나종엔 말과 사람의 모양은 알아볼 수 없게 되고, 풀씬풀씬 연기처럼 떠오르는 티끌을 보아 말이 시방 어디만큼 달려가는 자최를 지점할 수 있을 뿐.
 
6
"저런, 저런! 저런 악착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7
"말이 저렇게 빨리 달아나니 저이가 살 수 있을까?"
 
8
"여보, 살기는 어떻게 살겠소? 벌써 목숨이 끊어졌겠지."
 
9
"그래도 사람의 목숨이란 모진 것. 간대로 죽기야 하겠소?"
 
10
"아무튼 가엾은 일. 한다하는 백제 재상이 당병의 말꼬리에 매달려 죽게 되다니."
 
11
"오늘날 당해서야 재상이면 별수 있소?"
 
12
"그자가 좌평으로 거드럭거릴 제 우리네 백성의 고혈을 얼마나 긁어 갔겠소? 오늘날 저 지경을 당하는 것도 천벌이야, 천벌."
 
13
"참 그래, 그 사람은 그래도 호강을 할 대로 했으니 오늘날 죽어도 여한 이 없겠지만, 우리네야 여태까지 고생살이, 고생 끝에 또 이 욕이니……."
 
14
"대관절 저 사람은 무슨 일로 저 몹쓸 벌을 받는다오?"
 
15
"누가 아나? 이 오랑캐놈들이 무슨 까닭 있어 벌을 줍디까?"
 
16
"아니어, 저 뒤에 웬 말 탄 부인네가 있지 않소? 그 부인네가 바루 저 사람의 여편넨데. 저 사람이 제 여편네 탄 말을 몰고 가다가 뒤를 돌아본 탓이라오."
 
17
"옳아, 옳아, 그 여우 같이 생긴 계집 말이지."
 
18
"그래, 그 낯싸대기에 분을 보얗게 바른 년 말이야."
 
19
"그년이 벌써 당장과 정분이 났다지? 세상에 죽일 년 같으니."
 
20
묶여 가는 장정들 사이에 이런 수작이 오고 갔다. 이들은 동안이 좀 떨어 졌기 때문에 사단(事端)의 켯속을 잘 모르면서도 먼 빛으로 본 그 백제 귀 부인의 태도가 눈에 거슬리었던 것이다.
 
21
"에구! 저분이 죽겠구만. 아이 가엾어라."
 
22
"세상에 몹쓸 년도 있지. 어쩌면 제 남편 등뒤에서 그런 해참한 짓을 한담?"
 
23
"당장(唐將)하고 노니는 꼴이란 정말 두 눈 뜨고 볼 수가 없구먼."
 
24
"대매에 쳐 죽여도 시원치 않을 년."
 
25
어쩌면 "제 남편을 끝끝내 골을 올려 저 지경을 맨들게 한담?"
 
26
"그분이 참기도 많이 참았지. 그 자리에 설령 죽기로서니 그 년을 가만 둔담!"
 
27
"저런 년이 재상가 부인이랍시고 곤댓짓을 하였으니, 나라가 안 망할 수가 있나?"
 
28
"글쎄 원, 이 판이 어느 판이라고 제 남편에게 원정을 한단 말이오?"
 
29
"독사보담도 모진 년. 제 남편이 끌려가는 걸 봐도 어쩌면 눈 한번을 깜짝하지 않는구료."
 
30
"무슨 좋은 수가 났는지 생글생글 웃는 저 꼴이란!"
 
31
웃기는 웃어도 그 웃음엔 찬바람이 나더군요.
 
32
"사람 여럿 잡아먹을 년이야."
 
33
"저 당장 놈도 멋모르고 좋아라고 입을 헤벌리고 있지만 아마 저 년의 손에 녹아나고는 말 거야."
 
34
"그렇다면 제 남편의 원수를 갚는 폭이 되고, 그년이 바루 열녀가 되게, 맙시사."
 
35
"여보, 열녀란 소리는 이렁성거리지도 말아요. 아까 그년이 길길이 뛰는 소리를 못 들었소?"
 
36
"사내도 적악은 하기는 했습니다그려. 젊은 년을 공방살이를 시켜 놓으니."
 
37
"아니 여보. 백년을 홀로 늙힌들 그래 저 오랑캐놈들하고 정분이 난단 말이오?"
 
38
"저년 좀 봐요. 인제는 당장 놈의 수염을 쓰담고 있구려. 짐승만도 못한 년."
 
39
"여보, 어디를 돌아다보오? 큰일 나게."
 
40
"내야 어디 그년의 사냅니까? 혈마 어떨라고."
 
41
"여보, 혈마가 사람 죽이는 줄 모르오? 아예 돌아다보지는 말아요."
 
42
"저년 좀 봐요. 당장 놈의 어깨에 고개를 비스듬히 누이고 아주 눈을 스르르 감았구려."
 
43
"돌아다보지 말래도 왜 이러오? 글쎄 원."
 
44
이것은 바루 그 귀부인 앞에서 얽혀가는 부녀자들의 수작이다.
 
45
날리는 티끌조차 안 보이고 가뭇없이 사라졌던 말이 별안간 나타나자, 이리로 향하고 쏜살같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아마 당장이 명령한 활한 바탕 거리를 벌써 돌았음이리라.
 
46
"에그, 저 말이 되돌아오는구먼."
 
47
쇄하고 회호리바람이 이는 듯 멀리 몬지가 자욱히 떠오는 것을 재빠르게 알아본 부인네 하나가 수근거렸다.
 
48
참 그렇구만 저 몬지 " . 좀 보아. 말도 기승스럽게도 돌아오는구먼, 맙시사."
 
49
"몬지가 저렇게 일어날 적에는 여간 급히 달리는 게 아니겠지요?"
 
50
모듬 중에 가장 나 어린 부인네가 어림없이 물었다.
 
51
"여보, 그것도 말이라고 하오? 그야 말할 나위도 없지 않소?"
 
52
나이 좀 찬 부인이 핀잔을 주었다.
 
53
"좀 천천히 몰아오면 어떻담?"
 
54
"여보, 그 당병이 보살님이나 되는 줄 아시오? 그렇게 사정을 보아 주게."
 
55
"그러면 그 말꼬리에 매달린 사람은 어떻게 되란 말예요?"
 
56
"어떻게 되기는, 죽으라는 게지."
 
57
나이 찬 부인은 나이 어린 부인을 철딱서니 없다는 듯이 구박을 주었다.
 
58
"아이 끔찍스러워라!"
 
59
나이 어린 부인은 소매로 눈을 가리었다.
 
60
말은 어느 결에 그들의 앞에 들이닥치었다. 말도 기가 났던지 두 발씩 모두 꿇어 뛰며 흐르렁 소리를 벽력같이 질르는 바람에 어른 부인네들도 몸을 흠칫하고 고개를 숙이었다.
 
61
꽁무니에 매달린 사람은 사람 같지도 않았다. 말꼬리에 매달린 머리도 몬지가 켜켜이 앉아 그양 흙투성이이지 사람의 검은 머리칼로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가 얼굴인지 어디가 팔다리인지 분간조차 할 수 없고, 다만 시뻘건 핏덩어리가 질질 끌려 왔다. 만일 사람을 매달고 가는 것을 보지를 않았던들, 개를 잡아서 가죽을 홀랑 벗겨 버리고 끌고 오는 줄 알았으리라.
 
62
그 몬지를 그렇게 쏘여도 핏빛이 그대로 붉은 것을 보면 몬지가 앉는 대로 피가 스며 나와 두루마리를 하고, 지금도 왼 몸에서 피가 솟아 나오는 탓이리라.
 
63
말은 펄쩍펄쩍 널 뛰듯 하며 당장과 백제 귀부인의 말고삐를 나란히 해 가지고 있는 데로 달겨들었다. 말 탄 당병은 제 장수에게 복명을 하려는 것 이리라.
 
64
바루 그 부인 등뒤에서 말을 안 타고 있던 남매는 이 끔찍스러운 광경을 보고 누이는 고개를 외우서고, 동생은 볼이 붓는 듯이 울기 시작하였다.
 
65
아까도 질겁을 하고 우는 것을 제 누이가 가까스로 달래놓았는데, 바루 제게로나 뛰어 달겨들 듯한 말을 또 보아 놓았으니 이번에 터진 울음은 여 간해서 그치기 어려웠다.
 
66
"얘가 왜 이래? 울지 말아. 울지 말이."
 
67
하며, 누이는 그 총명한 눈으로 힐끔힐끔 당장의 기색을 살피며, 또 아까 모양으로 제 동생의 입을 틀어막으려 하였다.
 
68
동생은 고개를 도리질을 하며 제 누이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와,
 
69
"나 무서! 나 무서워!"
 
70
악을 쓰고, 저도 말 모양으로 펄떠 꿍질을 하며 울어 재친다.
 
71
"얘가 왜 이래? 울면 큰일, 울면 큰일 나요."
 
72
누이는 목메인 소리로 아무리 달래었건만, 동생은 좀처럼 울음을 참으려 들지 않았다.
 
73
"집에 가. 우리 집에 가!"
 
74
"얘가 또 이러네……. 그래 그래. 집에 가자. 울지 말아요. 안 울어야 얼핏 집으로 가게 되는 거야 응."
 
75
"아냐, 아냐, 아까부터 집에 간다고……. 거짓말야."
 
76
하고 동생은 더욱 펄펄 뛴다.
 
77
"엄마한테 가. 아빠한테 가!"
 
78
"아버지, 어머니가……."
 
79
하고 누이도 쏟아지는 눈물을 걷잡지 못하다가 꺽꺽 울음을 삼키고,
 
80
"제발 빕시다. 울지 말아요. 울지 말아."
 
81
우는 동생을 휩싸 안으며, 곁눈으로 당장과 당병을 보살폈다.
 
82
당병은 당장에게 무에라고 복명을 하는 모양이었으나, 당장이 고개를 기우뚱기우뚱하는 것은 애 우는 소리에 말낱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다.
 
83
"엄마한테 가! 엄마, 엄마!"
 
84
동생은 미친 듯이 어머니를 부르다가 숨이 꺼뿍 넘어가며 울었다.
 
85
"글쎄 울지 말아요. 글쎄 큰일 나. 큰일난대도."
 
86
누이도 하다하다못해 짜증을 내며 근두박질이라도 할 것 같다.
 
87
당장의 성난 눈꼴은 마츰내 이 이린 남매에게로 쏘여온다.
 
88
누이는 지릅뜬 당장의 눈깔을 보고 벌써 무서운 운명이 제 동생의 뒷덜미를 짚은 줄 알아차리었다. 그 자들은 어린애를 제일 싫어하였다. 그 어머니를 잡아오면서도 젖먹이 같은 것은 마구잡이로 동댕이를 치기가 일쑤였다.
 
89
그 무지하고 검센 손길에 한번 걸리면 그 애들의 운명은 물을 것도 없다.
 
90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어머니의 사정을 혹 보아주어 데리고 가기를 눈감아 주었다가도, 성가시게 보채기만 하면 그 자들은 어머니의 등에서 애를 무 뽑듯 쑥 뽑아 내어 길바닥에다가 메다붙이를 예사로 하였다. 어린애란 그들에게는 아무 소용도 닿지 않고, 오히려 그 짐승 같은 쾌락에 방해가 되는 탓인지 모른다. 혹은 그자들에게도 실낱같이 남아 있는 사람다운 감정이 애들의 울음으로 말미암아 고개를 쳐드는 것이 아찔한지 모른다.
 
91
어린 동생 데린 누이는 오는 도중에도 여러 번이 지긋지긋한 광경을 목도하였고, 그럴 적마다 제 동생의 신상을 염려하며, 그 콩만한 간을 오들오들오그라 붙이었던 것이다.
 
92
그 무서운 운명이 정말 제 동생 머리 위에 떨어질 줄이야!
 
93
누이는 부들부들 떨면서 왼 몸으로 우는 동생을 막았다. 아니나 다를까, 당장은 제 동생을 손가락질하며, 그 말 탄 당병에게 뭐라고 호령하였다. 그 당병은 야차(夜叉) 같은 상파대기를 이리로 향해 번쩍 쳐들고 달겨들었다.
 
94
그 핏발 선 눈은 찢어진 것 같고, 무에라고 외치는 입은 삐뚤어졌다.
 
95
"에구구!"
 
96
누이는 외마디 소리를 치고, 팔과 몸뚱이로 제 동생의 숨이 막히도록 얼싸 안았다.
 
97
시커먼 손은 과연 제 동생의 새새끼 같은 손을 부여잡았다.
 
98
"안 울어요. 얘는 안 울어요."
 
99
동생도 겁결에 질식이 되었는지 과연 울지는 않았다.
 
100
"안 돼! 안 돼!"
 
101
당병은 누런 이빨 사이로 뇌까렸다.
 
102
"한번만 용서! 한번만 용서!"
 
103
누이는 껴안은 동생을 놓치지 않으려고 죽을 힘을 다하였다.
 
104
누이의 열정에 그 사정 없던 검은 손도 한 순간 주저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에는 우는 애가 우쩍 들려 올라갔다.
 
105
"에구구! 나를 죽여요. 나를 죽여요."
 
106
누이는 동생의 몸에 딸려 말 위에서 같이 일어서며 악을 썼다.
 
107
당병은 한 손으로는 동생을 껴들고, 한 손으로는 동생의 몸에 휘감긴 누이의 팔을 비틀고 떨어뜨리려고 한동안 애를 썼다. 아무리 연약하고 어린 소녀의 팔뚝일망정 죽기 한사하는 힘은 뜻밖에 매서웠다.
 
108
"나를 죽여요! 나를. 아버지 어머니도 네 놈들 칼끝에 돌아가시고, 내가 살기는 오직 이 동생 하나 때문. 동생을 뺏아갈 테면 나를 죽여요, 나를……."
 
109
동생을 죽으라고 껴안은 채로 누이는 말 위에서 엎어지며 자빠지며 모지락을 썼다.
 
110
그러나 누이의 필사의 저항도 소용이 없었다. 동생은 필경 당병의 손에 번쩍 뽑혀 들리고야 말았다.
 
111
"엄마!"
 
112
어린애의 마지막 비명이 사라지기도 전에 당병은 제 손에 들린 그 애를 힘껏 매어다붙이고 말았다.
 
113
"에그머니!"
 
114
외마디 소리를 남긴 채, 그 누이도 그대로 제 말 위에서 구을러 떨어지고 말았다.
 
115
이때였다. 어디선지,
 
116
"으악!"
 
117
우렁찬 호통이 일어났다.
 
118
호랭이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무서운 그 소리에 여럿의 귀는 찡하고 울렸다. 그러자 난데없는 백제 장정 하나가 나는 범보담도 더 빠르게 짓쳐 왔다. 그의 손에는 서리 같은 환도가 번쩍였다.
 
119
몸을 한번 솟구치듯 하더니 그 장정은 어느새 그 당장(唐將) 탄 말 위에 선뜩 올라섰다. 당장은 미처 칼집에 손도 대기 전에 그의 목은 벌써 피를 뿜으며 땅바닥에 구을렀다.
 
120
당장의 말을 뺏아 탄 그 장정은 시퍼런 한 줄기 무지개 같은 칼날을 휘두르며, 말을 번개같이 몰아가자, 놀랜 빛이 채 사라지지 아니한 당장과 당병의 목은 수없이 떨어졌다.
 
121
잡혀 가는 백제 사람들도 웬 영문인지 정신도 차리기 전에 그런 장정이 둘도 되고, 셋도 되고, 별안간 여남은이나 되어, 시방까지 호기를 부릴 대로 부리던 당병을 이리 쫓고 저리 찔렀다.
 
122
실상인즉 그런 장정이 하나가 아니요, 앞선 장정의 뒤를 이어 꼭같은 복색을 차린 장정 여럿이 달겨든 것이었다.
 
123
그들의 겉옷은 백제 농군 복색을 차렸으나, 옷자락이 펄렁거릴 때 보면 갑옷을 단단히 차린 장사들이었다. 당병이 수효로는 열 곱 스무 곱 더 되었지마는, 워낙 마음을 턱 놓고, 거드럭거리며 돌아가는 판이라 이런 변이 생기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더구나 술에 곯고 색에 곯아 헐개들이 빠져 놓았으니 대항할 만한 기운도 힘도 없었다.
 
124
여러 장사들 중에도 먼저 나타난 장사의 활동이 역시 놀라웠다. 그 후리후리한 큰 키와 어마어마한 몸집은 마치 산이 움직이는 듯하였으나, 그 동작의 빠르기란 샛바람과 같았다.
 
125
옻빛 같은 구레나룻이 그 희고 넓은 두 볼에 선을 둘렀고, 한 자가 넘을 듯한 긴 수염을 거스렸는데, 그 부릅뜬 두 눈에서는 번갯불이 번쩍번쩍 흩어지며, 우렁찬 호통은 벼락이 떨어지는 듯하다.
 
126
그 늠름한 위품과 세찬 기세에 당나라 장수와 병정들은 벌써 반남아 혼이 떴다.
 
127
더구나 한 번 당장의 말을 뺏아 탄 그 장사는 그야말로 범이 나래를 얻은 셈이었다. 말발굽이 땅에 붙지도 않고 그대로 휙휙 나는 것 같다. 더구나 그 능란한 검술, 수없는 흰 뱀이 공중에 넘노는 듯하며 싸아! 하고 찬바람을 몰아온다.
 
128
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던 당나라 병정들은 어리둥절해 하고만 있을 때가 아닌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129
그들은 죽을 판 살 판 삼십육계의 줄행랑을 놓았다.
 
130
그래도 한 번은 빼어 들었던 청룡도를 집어던지는 놈에, 전통을 떨어뜨리는 놈에, 채찍과 깃대를 내 버리는 놈에, 애지중지 가슴에 품었던 남 몰래 훔쳐 넣은 노략물 뭉치까지를 흘리는 놈에…….
 
131
벙거지도 무겁다는 듯이 벗어 던지고, 제 목이 붙어 있는가 알아보려는 것처럼 잔뜩 제목을 틀어안고 달아나는 놈도 있었다. 땅바닥에 그대로 배를 깔고 넙죽 엎드려 두 주먹을 한데 잡아 쳐들고 벌벌 떠는 것은, 아마 살려줍시사하고 애걸복걸하는 뜻이리라.
 
132
당병이 달아나기 시작하자 와 하고 사람들의 함성이 뒤미처 일어났다.
 
133
"당나라 놈은 모조리 때려 죽여라!"
 
134
높이 외치는 소리가 들리자 수 없는 돌멩이는 당병의 뒤통수를 향해 떨어 졌다.
 
135
사람의 그림자 하나 없이 텅텅 빈집인 줄 알았던 길가의 집들에서 어느 결에 모였는지 백제의 백성들이 뭉게뭉게 몰려 나왔다.
 
136
그들은 모두 손에 돌들을 들었다. 다 꼬부라진 늙은 할머니도 낑낑 하며 힘에 벅찬 돌멩이를 주워 들고 힘껏 집어 던지다가 그 자리에 쓰러지는 이 도 있었다.
 
137
원한과 분노에 타고 맺힌 돌팔매! 당병의 뒷꼭지에 비오듯 쏟아졌다. 몇 놈은 대가리를 깨고, 몇 놈은 다릴 얻어맞아 절름절름절기는 절었으나, 그 자들의 도망질치는 발길은 재발라서, 벌써 돌팔매가 닿지 않을 만큼 저 멀리 아득히 사라지고 말았다.
 
138
별안간에 나타난 이 백제 남녀노소는 혹은 아버지 어머니 혹은 안해와 남편을 잃고 산 기슭과 숲 속에서 밤을 밝히며, 당병의 눈에 안띄도록 천신 만고를 하면서 잡혀가는 제 가족의 뒤를 밟아 예까지 따라온 것이었다.
 
139
뿔뿔이 제각기 제 몸을 숨겨 가지고 이 행렬이 지나가는 것을 엿보고 치를 떨고 있다가 마침 장사패가, 나타나서 당나라 장수와 병졸들을 휘몰고 쫓는 것을 보고 용기를 얻어 내달은 것이었다.
 
140
당병을 얼마큼 쫓고 나서 다시 돌쳐 달려온 장사의 일행은 묶어 놓은 백제 장정과 부인네의 결박을 끌러 놓기에 한동안 애를 썼다.
 
141
몰려든 가족들은 채 매듭을 끌르지 못한 남편의 가슴에 몸을 던지고 몸부림쳐 우는 이도 있었다. 여러 사람 보는 앞이건만 체모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제 안해를 껴안으며 엉엉 목을 놓고 통곡하는 사내도 있었다. 몇 번 제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머리를 쓰다듬다가 그대로 그 자리에 기절하는 늙은 어머니도 있었다.
 
142
한동안 낭자한 곡성이 일대의 공기를 슬프게 뒤흔들었다.
 
143
아슬아슬한 고비에 서로 만나는 기쁨보담도, 지극한 설움이 먼저 복받쳐 나온 것이다.
 
144
먼저 나타났던 그 키 큰 장사는 묶여 가는 사람들을 끌러 놓자, 아까 제 동생을 빼앗기고 말께서 떨어진 소녀 앞으로 달겨왔다.
 
145
부리나케 말께서 나린 그 장사는 땅바닥에 자빠져 있는 그 소녀를 안아 일으켰다.
 
146
앙다문 입술은 터져서 피 흐른 자최가 아직 붉으나마 백지장같이 해쓱한 얼굴엔 핏기 하나 없었다.
 
147
그 장사는 가냘픈 사지를 늘어뜨린 소녀를 고이 안아제 무릎 위에 올려 놓고 코 위에다가 손을 대어 보았다. 숨기는 있는 둥 만 둥하다.
 
148
"월 영아, 월영아!"
 
149
그 장사는 자상스럽게 불렀다. 월영(月英)이라 함은 그 소녀의 이름이리라.
 
150
"월 영아, 월영아! 정신을 차려라."
 
151
가늘게 떠는 은행 껍질 같은 눈시울을 데미다보며 그 장사는 또 한 번 부르짖었다. 소녀는 그 가느스름한 몸을 잠깐 트는 듯하더니 그 아늘아늘한 피 묻은 입술을 달싹달싹한다. 목이 마른 모양이다.
 
152
"물, 물!"
 
153
장사는 덮어놓고 외쳤다.
 
154
제 할 일을 마치고, 그 장사 곁에 모여 섰던 장사 가운데 제일 키 작은 장사가 구으는 듯 달겨갔다.
 
155
얼마 안 되어 어디서 구하였는지 그 키 작은 장사는 호로병에 물 한 병을 들고 왔다.
 
156
안고 있던 장사가 소녀의 입을 벌리고, 키 작은 장사가 물을 몇 방울 떨구었다.
 
157
꼴깍하는 소리가 두어 번 일어나더니 그 소녀는 샛별 같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이상한 듯이. 저를 안고 있는 장사와 저를 에워싼 장사들을 두리번두리번 번갈아 보았다.
 
158
"월 영아, 월영아! 나를 모르느냐?"
 
159
깨어난 것이 신통한 듯이 안고 있던 장사는 제 얼굴을 그 소녀에게 대다시피 하고 잼처 물었다. 소녀는 눈을 빤히 떠서 쳐다보다가,
 
160
"아이 아저씨! 아저씨가 어째 여길 오셨어요?"
 
161
하고 제법 정신이 돌아나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고개를 가까스로 쳐들어 제 곁을 살펴보더니,
 
162
"내 동생 귀복(貴福)이는 어디 있어요?"
 
163
하고 급하게 묻는다.
 
164
"귀복이는……."
 
165
안고 있던 장사는 차마 대답을 못한다.
 
166
"참, 그 몹쓸 당병 놈이 귀복이를 매다 붙였는데…… 귀복이가 어떻게 되었어요?"
 
167
하고는 금방 까무라쳤던 사람 같지도 않게 몸을 발딱 일으켰다.
 
168
"저기 있군!"
 
169
한 마디 뇔 겨를도 없이 월영이란 소녀는 비칠비칠 제 동생의 곁으로 종종걸음을 쳤다.
 
170
"귀복아! 귀복아!"
 
171
땅바닥에 해삼처럼 늘어진 동생의 머리를 틀어 안으며 또다시 쓰러진다.
 
172
벌써 숨이 떨어진 지 오랜 조고마한 육체도 제 누이의 느껴 우는 소리를 들었는지, 고사리 같은 손이 바둥바둥 떤다.
 
173
"아빠 엄마한테 어서 가자고 그렇게 졸르더니만."
 
174
월영은 흐느껴 울었다.
 
175
"너는 아버지 어머니를 인제는 뵈옵겠구나. 너는…… 너는……."
 
176
장사들도 한동안은 고개를 돌리고 숨소리를 죽이었다.
 
177
월영을 안아 일으킨 장사가 마츰네 월영에게로 왔다.
 
178
"월영아, 일어나거라. 암만 울면 죽은 동생이 살아오느냐? 어서 가자.
 
179
여기 이러고 한만히 있을 수 있느냐?"
 
180
타이르는 장사의 목도 눈물에 젖었다.
 
181
월영은 죽은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으며, 차마 손을 떼지 못하다가 별안간 울음을 뚝 그치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애띠디 애띤 눈썹 가장자리에도 매운 기운이 돌았다.
 
182
귀복아귀복아 ", . 네 원수는 내가 갚아 주마. 내 몸이 가루가 되어도 당나라 놈의 원수를 갚아 주마."
 
183
이 매섭고 눈물겨운 넋두리가 끝나기 전에 별안간 여럿의 떠드는 소리가 와글와글 일어났다.
 
184
"저년을 죽여라!"
 
185
"제 남편을 죽인 저 년을 죽여라!"
 
186
굵은 남성(男聲)에 섞이어 새된 여성(女聲)도 흘러왔다.
 
187
"저런 년을 살려두면 우리 백제 부녀들의 수치."
 
188
"우리 낯을 깎인 더러운 년."
 
189
"죽여라 죽여!"
 
190
"우리 저년을 돌무더기 속에 장사를 지내 줍시다."
 
191
"옳소! 옳소!"
 
192
잉잉 하는 돌팔매가 날아들기 시작하였다.
 
193
죽은 동생과 산 누이가 차마 서로 못 떼치는 자리에도 돌멩이는 사정 없이 떨어졌다.
 
194
이 남매 사별(死別)의 애닯은 비극이 벌어진 곳에서 멀지 않게 아까 당장과 노닥이던 그 백제 귀부인이 입때 말을 탄 채로 호올로 오뚝 서 있었던 것이다. 돌멩이가 자기를 향해 비 오듯 날아오건만 그 귀부인은 눈 한번 깜짝이지 않고, 고개 한 번 외우서는 일 없이 말 위에 덩그렇게 올라앉은 채 나려서려고도 하지 않았다.
 
195
"죽일 테면 죽여라. 내가 그렇게 죽기를 서러워하는 줄 아느냐."
 
196
하는 태도였다.
 
197
"저년 좀 봐라. 눈도 깜빡을 않는구나."
 
198
"어이, 모진 년."
 
199
"괴악한 년."
 
200
"방자스러운 년."
 
201
"어디 이년 견디어 봐라."
 
202
돌멩이는 다시금 우박 쏟아지듯 하였으나, 사람이 피하지를 않으니 돌멩이 자신이 피하는 양. 그 숱한 돌멩이가 하나도 정통으로 그 귀부인을 맞히는 것은 없었다.
 
203
돌멩이가 제대로 들어가 맞지 않는 데 군중의 분노는 극도로 타올랐다.
 
204
"자아, 우리가 멀리서 돌질을 할 게 아니라, 저년을 잡아 나꿔 칩시다."
 
205
깨어진 머릿골을 한 손으로 잔뜩 움켜쥐고도, 기를 쓰고 돌팔매질을 하던 장정 하나가 핏발 선 눈을 부라리며 이런 제의를 하였다.
 
206
아까 장사들이 나타나서 당장과 당병을 한바탕 해낼 적에도, 그 귀부인은 저 있는 그 자리에서 몸을 꼼짝도 아니하였고, 다른 군중들은 비록 자유스럽지 못한 몸이나마 신들이 나서 얼마쯤 당병의 뒤를 쫓아 나갔기 때문에 그 귀부인과 군중의 사이는 상당히 동안이 뜨게 되었던 것이다.
 
207
"좋소. 그 말 좋소. 잡아 나꿔채도 그년이 말께서 나려오지를 않나 어디 봅시다."
 
208
"옳소! 옳소!"
 
209
"그 당나라 장수 놈에게 대었던 뺨을 도려냅시다."
 
210
"그놈과 노닥거리던 혓바닥을 잘라 놓읍시다."
 
211
"그 방글방글 음탕한 시늉을 하던 눈알맹이를 뽑아 놓읍시다."
 
212
"그놈을 껴안던 팔죽지를 부러뜨려 놓아라.!"
 
213
"그 곤댓짓하던 대강이를 바수어 놓아라."
 
214
"그까짓 년 손대기도 더럽지. 발로 지근지근 밟아 줍시다."
 
215
"그 더러운 간과 창자를 밟아 줍시다."
 
216
"자아!"
 
217
"와아!"
 
218
군중들은 그 귀부인을 향해 아귀성을 치며 달겨들었다.
 
219
죽은 동생을 부둥켜안고 차마 놓지 못하는 소녀를 달래고 있던 그 키 큰 장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군중의 앞을 막아섰다.
 
220
"여러분, 이게 무슨 짓들이오?"
 
221
그 웅장한 음성은 큰 쇠북을 두들기듯 처렁처렁 울려나왔다.
 
222
자기네를 구해낸 은인이 앞을 가루 막는 데는 흥분된 군중도움씰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223
그중에 가장 앞장을 섰던 장정 하나가 그 뻘겋게 상기된 얼굴을 번쩍 쳐들었으나, 그 말씨는 자못 공손하였다.
 
224
"장군님은 목도를 하지 않으셔서 잘 모르실 겝니다. 저년이…… 저 말을 타고 있는 저년이 그 무도한 당나라 장수 놈하고 정분이 나서 제 남편을 말 꼬리에 매달게 하여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래 저런 년을 어떻게 살려둡니까? 저걸 보십시오. 저 피투성이가 지금도 말꼬리에 매달려 질질 끌리는 저 꼴을 보십시오!"
 
225
당병의 시체가 여기저기 가루누운 사이에, 주인을 잃고 갈 바를 모르는 말이 스스로 놀라 뛰는 대로 꼬리에서 크다란 핏덩어리가 꿈틀꿈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226
아무리 "임자의 최후라고 하지만은 너무 끔찍스럽군."
 
227
그 장사도 말소리를 떨어뜨리었다. 장정은 그 장사의 말속을 잘 몰라듣고 제 말만 하였다.
 
228
"저희들도 그 참혹한 꼴을 보다가 못해 분심이 일어났습니다. 아무리 이런 판이라도 저런 악독한 년을 살려야 줄 수 있겠습니까?"
 
229
"암 죽여야 됩니다."
 
230
"죽여야 되고 말고."
 
231
"저런 년은 사지를 찢어 놓아도 시원치가 않습니다."
 
232
한 풀이 꺾이었던 군중은 그 장사도 그 참혹한 꼴을 마음이 움직이는 듯한 기색임을 알아차리자 새 기운을 얻어 제각기 지껄였다.
 
233
그 장사의 얼굴에는 비창한 빛이 떠올랐다.
 
234
"여러분, 안 되오, 안 될 말이오……."
 
235
하고 장사가 무슨 말을 다시 계속하려고 할 제, 지금까지 돌로 새긴 것처럼 얼굴의 근육 하나 움직이지 않던 그 귀부인이 문득 입을 열었다.
 
236
"죽어도 아깝지 않은 이 목숨. 이 몸이 죽어서 여러분의 분이 풀린다면 열 번 죽음도 마다할 내가 아니오."
 
237
"죽기를 마다할 내가 아니오."
 
238
울근불근하는 군중을 앞에 놓고 이 얼마나 대담하고 위험한 말인가!
 
239
"저 말뽄을 좀 들어봐요."
 
240
"지독한 년!"
 
241
"안차고 다라진 년!"
 
242
"그년의 조동아리를 훑어 놓아라."
 
243
"자아! 제 소원대로 죽여 줍시다."
 
244
"죽여라! 죽여라!"
 
245
군중의 분노는 한층 더 부채질 되듯 다시금 그 귀부인에게로 덤벼들었다.
 
246
그러나 그 귀부인은 제 말마따나 죽음도 두리지 않는 듯, 당돌하게 군중을 나려다보고 눈썹 하나 까딱을 하지 않는다. 약간 비뚤게 열린 그 입귀에는 쌀쌀한 웃음조차 흘렀다.
 
247
흥분된 군중은 더욱 골이 올랐다. 두엇은 앞을 막아 선 그 장사의 뒤를 돌아 그 귀부인의 등자 밟은 발목을 잡아당기었다.
 
248
그 장사는 한 걸음 성큼 귀부인 곁으로 다가서자, 그 귀부인에게 덤벼든 몇 사람을 한 손으로 잡아 뿌리치며,
 
249
"이게 무슨 거조(擧措)란 말이오?"
 
250
소리를 벽력같이 질렀다.
 
251
조금 아까까지도 " 이 부인과 같이 잡혀가던 당신들이 아니오? 다 같은 비참한 운명에 헤매던 당신들이 아니오?"
 
252
장사의 말소리는 점점 침통한 가락을 띠어온다.
 
253
"그 흉악한 당나라 병정들에게 다같이 못 당할 욕을 당하던 당신들이 아니오? 그 당병의 채찍에서 말꼬리에서 벗어나자마자 곧 제 나라 사람을 해치려고 드니……."
 
254
장사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잠깐 말을 끊었다.
 
255
"저년이 우리 백제 사람이 아니고 다른 나라 계집, 즉 당나라 년 같으면 우리가 이렇게 분해 않을 겁니다. 제야 무슨 짓을 하든지 우리가 상관을 하 지 않을 겁니다. 저런 년이 있어서 우리 백제 부녀의 얼굴에 똥칠을 하게 되었으니, 어찌 밉지가 않습니까! 분하지가 않습니까?"
 
256
이마에 칼자국 흉터가 있는 장정 하나가 앞을 나서며 그 장사의 말을 되받았다.
 
257
"당신 말이 그럴 듯도 하지만, 저 부인네도 다같이 불쌍한 백제 사람이 아니오? 비록 말을 타서 손발은 묶이지 않았더라도 역시 잡혀 가는 사람이 아니오? 당장과 무슨 짓을 어떻게 하였다 하더라도 어디 그게 본심에서야 나왔을 게요? 당신네들도 꾸벅꾸벅 당병을 쫓아가는 것이 어디 당신네들이 가고 싶어 가는 거요? 그 무지한 매에 못 이겨서, 죽으랴 죽을 수 없어서 따라가는 것 아니겠소? 그런데 하필 이 부인네만 미워할 게 뭐란 말이오?"
 
258
"어쩌면 그 흉측한 당장놈과 부동(符同)이 되어서 제 남편을 죽게 해요?"
 
259
열기 있는 부인네 하나가 그 새까만 눈썹을 꼿꼿이 세우며 이를 득 갈아 붙이었다.
 
260
"그야 이 부인이 죽이고 싶어 죽였겠소? 당장(唐將)놈이 괜히 골을 내어 죽인 것 아니오? 설령 이 부인이 죽이라 한들 그 놈들이 죽이고 싶지 않아 보시오. 죽일 리가 만무할 것 아니오? 더구나……."
 
261
하고 그 장사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262
"더구나 그자로 말하면 죽어 마땅한 위인이오. 그자가 내두 좌평으로 있 으면서 신라 놈들과 짜고, 이 나라를 망쳐 버린 놈이오. 우리 나라의 산천 지리와 군사 형편을 일일이 적어서 신라 장수 김유신에게 보낸 놈이오. 그런 자는 만 번 죽여도 오히려 죄가 남을 놈이오. 천도가 무심하지 않아 당병의 손을 빌려 그자를 죽이게 한 것이오."
 
263
군중들의 흥분은 이 장사의 설명에 점점 식어갔다.
 
264
"그런 나쁜 짓을 한 놈이라면 죽어도 싸지."
 
265
그러면 그렇지 무슨 ". 까닭이라도 있기에 저 부인도 제 남편을 개 꾸짖듯 하였지."
 
266
"옳아. 그렇다면 저 부인을 우리가 미워할 까닭이 도모지 없지 않소?"
 
267
여럿은 손바닥을 뒤집는 듯이 도리어 그 귀부인에게 동정을 하기 시작하였다.
 
268
장사는 한층 소리를 가다듬어,
 
269
"여러분, 다같이 불쌍한 백제 사람이란 걸 잊지 마시오. 여러분에게 이 부인을 죽일 힘과 기운이 있거든, 그 조고만한 힘이나마 한데 어울러서 다 같은 적인 당나라와 신라를 때려 부숩시다."
 
270
하고 부르짖었다.
 
271
"옳소! 옳소!"
 
272
"그 말씀이 옳소."
 
273
군중들은 그 귀부인 앞에서 한 걸음 두 걸음 물러 나섰다.
 
274
자기의 말에 군중들이 숙지는 걸 보자, 그 장사는 나는 듯이 다시 그 소녀의 곁으로 왔다.
 
275
"월영아, 월영아! 어서 일어나거라. 네 동생은 내 손으로 묻어 주마."
 
276
하고 그 장사는 월영의 품에서 죽은 아이를 빼내어 번쩍 안고 길가의 단양 한 밭둑을 찾아갔다. 칼끝으로 땅을 헤적거린 다음에 맨손으로 흙을 후벼내어, 울부짖는 누이가 미처 오기도 전에 어린 영을 곱다랗게 땅 속에 누이고 말았다.
 
277
"자 여러분, 아무리 갈길이 바쁜 우리지만 이 송장을 이렇게 길바닥에 내버려 오작의 밥을 맨들 수야 있소? 이왕 그네들의 목숨이 끊어진 이상 그들에 대한 우리의 원한도 사라진 것, 저희들도 만리타국에 왔다가 나라 일에 죽은 셈이니 어찌 한 줌 흙을 아낄 수 있소? 자아 이리들 오셔서 칼끝 창끝으로나마 땅에 파묻어 줍시다."
 
278
그 장사는 제 동료들과 여러 사람에게 타이르듯 명령하였다.
 
279
여러 장정은 당병의 버리고 간 병장기를 닥치는 대로 줏어 들고 그 장사를 따라 땅을 팠다.
 
280
여럿의 운력으로 순식간에 깊이 한 길이 넘고, 넓이 두어 간통되는 큰 구덩이를 팠다.
 
281
스무 개도 넘는 당나라 장수와 병정의 송장을 엇매어다가 한자리에 묻었다.
 
282
"여러분, 수고스럽지마는 한구덩이만 더 파십시다. 저기 저 말꼬리에 매달려 죽은 좌평 임자도 묻어 줍시다. 그 소위를 생각하면 적장과 정병보담 몇 백 갑절 밉지마는 저도 그 몹쓸 죽음을 하였으니 송장까지야 아니 거두어 줄 수 있소?"
 
283
쓸쓸한 가을볕 아래 갑자기 이루어진 크고 작은 세 무덤.
 
284
대강 대강 흙 덮기를 마치자, 그 장사는 발버둥치며 우는 소녀를 두리쳐 안아 말 위에 올려 태우고 자기도 그 말에 올라탔다.
 
285
여러 장사들도 당병이 버리고 간 말들을 얻어 탔다.
 
286
"자아 여러분, 인제는 우리 할 일이 대강 끝이 났으니 어서들 돌아들 가십시오."
 
287
이 장사는 작별 인사는, 말은 비록 평범하였으나 자못 비창하였다.
 
288
여러 사람들은 차마 떠나기 어려운 듯이 머뭇머뭇 발길을 옮기지 않는다.
 
289
"일시를 지체할 때가 아닙니다. 앞에 달아난 당병들이 제 영에 돌아가면 이 사연을 알릴 터이니 오래지 않아 당나라나 신라의 병정들이 들이닥칠지 모릅니다. 각기 몸들을 조심하시고 어서들 피신을 하셔야 됩니다."
 
290
병정들이 또 들이닥친다는 말에 몇몇은 겁을 집어먹고 달아날 거조(擧措)를 차리었으나, 군중들은 제 은인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더 보고, 그 든든하고 자상한 말 한 마디라도 더 들어보려는 것처럼, 수풀같이 고요한 채 움직이려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다.
 
291
"자아, 우리는 갑시다. 부디 몸조심들……."
 
292
그 장사의 마지막 인사는 분명히 눈물에 젖은 것 같았다.
 
293
"흑! 흑!"
 
294
군중 가운데는 느끼는 울음소리가 일어났다.
 
295
여태까지 그린 듯이 말을 타고 있던 그 귀부인이 말을 채쳐 그 장사의 앞으로 왔다.
 
296
"장군님, 저희들을 버리고 가시면 어떡하십니까? 의지가지 없는 저희를.
 
297
저희들이 지금 돌아들 간다 한들 어디로 돌아갑니까?"
 
298
그 귀부인의 말에 여럿의 귀는 번쩍 뜨이는 듯하였다. 조곰 아까까지도 원수같이 죽이려 들던 감정도 씻은 듯이 없어진 양.
 
299
"그 부인의 말씀이 옳소, 옳아."
 
300
"저희들을 데려가 주십시오."
 
301
"장군님 가시는 데로 저희들도 따라가겠습니다."
 
302
그 장사는 매우 난처한 듯이 한동안 말이 없다가,
 
303
"여러분을 버리고 가는 우리의 발길도 차마 돌아서지를 않습니다마는, 우리 역시 지접할 곳이 없는 사람들…… 여러분이 따라오신대도 고생만 하실 것……."
 
304
하고 말을 맺지 못한다.
 
305
장군님이 아니었더라면 "저희들은 벌써 죽은 목숨, 장군님을 모시고 가다가 설령 죽는다 하온들 무슨 여한이 있겠습니까?"
 
306
그 귀부인은 아까의 돌올하던 태도와는 딴판으로 그 장사의 앞에서는 고 개조차 옳게 들지를 못하였다.
 
307
칼날같이 싸늘하고 매서운 줄로만 알았던 그 귀부인이 이대도록 풋솜처럼 부드럽고 공순해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할 노릇이었다.
 
308
더구나 그 말씨는 얼마나 아름답고 씩씩한가.
 
309
군중은 첫째로 그 귀부인의 불면 꺼질 듯한 가련한 태도에 호감을 가지게 되었고, 둘째로 자기네의 흉중을 꿰뚫어 보는 듯이 대변해 주는 것이 고마웠다. 부인네들 사이에서는 감탄의 속살거림이 일어났다.
 
310
"저렇게 얌전한 이를 우리는 몰라보았구려."
 
311
"그 장군님이 말리지를 않았던들 저런 아까운 이를 까닭 없이 죽일 뻔을 하였지. 아이 아슬아슬도 해라."
 
312
"어쩌문 말을 그렇게 잘해요? 그야말짝으로 청산유수 같구료."
 
313
군중은 침을 삼키며 그 장사의 입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314
그 장사는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며, 그 광채 도는 눈을 떴다 감았다 하였다. 자기에게 매어 달리는 이 불쌍한 백성들을 데리고 가자기도 어 렵고, 그렇다고 떼치고 가기는 더욱 어려운 모양이었다.
 
315
"장군님이 살려 놓으신 저희들의 목숨, 장군님을 위해 바치는 것도 저희들의 소원입니다."
 
316
그 귀부인은 머리를 다소곳한 채 또 한 번 그 장사를 졸르고 나서 군중을 돌아보며,
 
317
"여러분들, 그렇지 않습니까?"
 
318
하고 동의를 구하였다.
 
319
"다 이를 말씀이오?"
 
320
"옳소, 옳소."
 
321
"죽는 것도 소원이오."
 
322
"우리들의 목숨은 장군님께 올립니다."
 
323
감격에 겨운 군중은 한꺼번에 외쳤다.
 
324
이윽고 그 장사는 무거운 입을 열었다.
 
325
"여러분, 여러분의 뜨거운 정은 뼈에 사모칩니다. 그러나 칼도 없고 활도 없는 우리, 갑옷도 없는 우리, 군량조차 없는 우리가 아닙니까? 이런 우 리로서 어떻게 당나라 신라 두 나라의 많은 군사와 좋은 기구를 당해 낼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 굳이 우리를 따르신다면 당장 부모 처자를 한자리에 만나시어 그 기쁨도 푸시기 전에 또다시 비참한 운명과 싸워야 되실 것 아닙니까? 이야말로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것. 나로서는 차마 여러분께 같이 가시자고 장담을 못해 드리겠습니다."
 
326
말끝을 맺기 전에 그 장사의 두 눈에서 눈물이 글썽글썽 괴이었다.
 
327
장사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자 군중은 감격의 회호리바람에 싸이고 말았다.
 
328
"장군님의 말씀이라면 불에라도 뛰어들고 물에도 뛰어들겠습니다."
 
329
"칼과 활이 없으니 어떡하오?"
 
330
"맨주먹으로라도 싸우겠습니다."
 
331
"돌팔매로라도 그 적국 놈들을 쳐 죽이겠습니다."
 
332
"겨울은 닥쳐오는데 갑옷도 없으니……."
 
333
"얼어 죽어도 좋습니다."
 
334
"군량이 없으니……."
 
335
"굶어 죽어도 좋습니다."
 
336
장사는 눈물을 거두었다.
 
337
"여러분이 정 그러시다면 우리를 따라 오시오. 우리네에게 아무 다른 것 이 없다 해도, 불 같은 충성만 있다면야 천하에 두려울 것이 무엇이오? 그 까짓 당나라 신라 연합군이래야 오합지졸, 우리의 힘과 뜻과 죽기를 겁내지 않는 용기를 뭉친 다음에야 도탄 중에 든 우리 불쌍한 백제 백성들을 구해 낼 수 있을 줄 아오."
 
338
힘차게 부르짖는 그 장사의 두 눈에는 불꽃이 주렁주렁 흩어지는 듯하였다.
 
339
새 기운을 얻은 군중의 함성은 천지를 뒤흔들었다.
 
340
"자아, 여러분, 인제 시각을 지체할 수 없소. 지금 우리가 가던 길은 버리고 오던 길을 되짚어서 빨리 갑시다."
 
341
장사들은 말머리를 돌리고, 군중은 겅정겅정 뛰고 구르며 그 뒤를 따랐다.
 
342
유독 그 귀부인만 말머리를 돌리지 않고,
 
343
"저는 이리로 가오. 부디 여러분, 안녕히들……."
 
344
도거리로 인사를 하고 여러 사람과 반대 방향으로 충충 말을 놓아 간다.
 
345
"부인은 어디로 가시오?"
 
346
그 장사도 돌아다보며 놀라 부르짖었다.
 
347
"저는, 저는 제 갈 길이 따로 있어요."
 
348
"이 난 군중에 단신 홑몸으로 어디를 가신단 말이오?"
 
349
"홑몸은 더 가벼운 것. 저는 제 할 일이 따로 있어요."
 
350
뜻깊은 말 한 마디를 남기자 매정스럽게 말을 채쳐 가려다가 말고 다시 고개를 돌려 그 장사를 바라보며,
 
351
"여쭙기는 황송하오나 존함을 알아지이다."
 
352
"이 사람은 흑치상지(黑齒常之)……."
 
353
그 장사가 선뜻 대답을 하고 다시 붙들 겨를도 없이, 그 귀부인은 말을 달려 흐르는 별보담도 더 빠르게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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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 참조
현진건의 역사 소설 (193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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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6월 0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