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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치상지 ◈
◇ 귀부인과 말구종 ◇
카탈로그   목차 (총 : 8권)     이전 2권 다음
1939년
현진건
 

1. 귀부인과 말구종

 
2
엊그제까지도 서슬 푸르던 고관대작의 귀한 몸으로 말구종 노릇을 하는 것만 해도 기막힌 수치요 모욕이거든, 하물며 계집이 탄 말, 더구나 적장의 사랑을 받는 제 나라 계집이 탄 말을 몰고 가는 신세…….
 
3
"내가 이 꼴을 보다니!"
 
4
하는 탄식이 아니 나올 수 없으리라. 말을 모는 백제 귀인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자 당장과 노닥거리던 말 탄 백제 귀부인은 입을 비쭉하였다.
 
5
"흥, 누구 때문에 이 꼴을 보기에."
 
6
귀부인의 비웃는 듯한 말가락은 귀인 마부의 잔뜩 오른 골을 더 돋군 것 같았다. 앞만 바라보고 꾸벅꾸벅 말을 몰면서도 그 젊지 않은 몸은 부르르 떨리었다.
 
7
"누구 때문에 이 꼴을 보느냐? 그러면 내 때문이란 말이냐? 죽일 년 같으니!"
 
8
귀인 마부는 안간힘을 쓰며 잇새로 말을 배앝았다.
 
9
"그래도 입청만은 살았구료. 그럼 대감이 처사를 잘못한 탓에 이 지경이 지 뉘 때문이오? 내 때문이란 말예요? 맙시다."
 
10
"이년아! 남편의 등뒤에서 당나라 오랑캐놈과 그게 무슨 짓이냐! 이 천참만륙을 해도 시원하지 않을 년!"
 
11
그러면 말 몰고 가는 구종이 바루 남편이요, 말 탄 여자가 다른 사람 아닌 그의 안해이었던가.
 
12
"아스세요. 욕설을랑 잠깐 접어 넣어 두시구료. 이 다음 후일에 다시 좌평이 세도를 하시거든 나를 잡아다가 찢어 죽이든지 갈아마시든지 마음대로 하시구료. 지금은 다 같이 따라지 목숨, 욕보기는 매일반인데 욕설은 왜 하시오? 점잖지 않게."
 
13
아주 의젓하게 남편을 타이르고 나서 바루 그 입으로 당장에게 너스레를 쳤다.
 
14
"그렇지 응? 장군님, 우리 목숨을 맡으신 장군님. 지금 요 모양에 자기가 죽일 년 살릴 년 하면 소용이 무엇이람? 그렇지. 응, 응, 응."
 
15
안해는 흥얼흥얼 콧소리까지 내고 들어보라는 듯이 당장의 곰 같은 등을 또닥또닥 두드렸다.
 
16
귀인 말구종은 기색을 하고 말았는지 대꾸조차 없었다.
 
17
"왜 말이 없으시오? 입이 붙어 버렸소? 여보 대감 마부님!"
 
18
"도대체 네가 내게 무슨 함원이 있었더냐? 끝까지 내 비위를 뒤집으니."
 
19
악에 오른 남편은 아까보담 오히려 순하게 나왔다.
 
20
"함원이야 무슨 함원?"
 
21
"네가 그럴 줄은 참으로 몰랐구나, 후후…… 무슨 지독한 함원이 없으면 야 일부러 남편이 들으라고 그 몹쓸 시늉을 하겠느냐? 응, 무슨 함원이냐?
 
22
알아나 두자. 말을 해라."
 
23
"흥, 이 계제에 웬 또 삼십리 강짜시오? 남이야 무슨 시늉을 어떻게 하든 또박또박이 말이나 잘 몰아요. 오호호, 아이 우스워 죽겠네."
 
24
귀부인은 땍때굴 웃었다.
 
25
"장군님 우스워 죽겠지? 저 마부가 우리 시늉이 눈꼴이 틀린다오. 아이 가소로워라. 번번이 뒤 한 번도 옳게 못 돌아다보면서. 자아 장군님, 우리 뺨이나 한번 대어 볼까! 응."
 
26
하고 귀부인은 정말 제 뺨을 당장의 퉁퉁 부은 듯한 뺨에 철썩하고 갖다 대었다.
 
27
당장은 계집의 태도가 점점 대담해지는 것을 멋모르고 좋아라고 헤벌린 입을 다무릴 줄 몰랐다.
 
28
"무슨 함원이냐? 말을 해라. 말을 해! 호강도 시킬 만큼 시켰겠다. 첩년으로 있는 것을 정실부인으로 승적까지 시켰겠다……."
 
29
귀인 마부는 귀부인 말마따나 뒤 한번을 못 돌아보고 눈망울만 속절없이 뒤로 구을리며 혼자 되풀이를 하였다.
 
30
"어규 장해라. 그 알량한 정실부인!"
 
31
정실부인이란 말이 무엇보담도 그 귀인의 부아를 찌른 모양이었다.
 
32
"그 말라 비틀어진 정실부인! 이건 명색이 정실부인이랍시고 백주에 귀 밑이 새파란 년을 그 휘넓은 안방에다 집어넣고 생으로 날밤을 밝히게 하는 것.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가 치는군."
 
33
하고 말 탄 안해는 참으로 오싹 몸을 떨고 당장에게서 일순간 눈을 떼어 말모는 남편을 노려보았다. 그 눈에는 미움에 타는 불길이 반짝 흩어졌다.
 
34
"귀밑털이 허연 것이 뭇 년을 데리고 밤새도록 뚱땅거리고, 마지막엔 이년 끼고 저년 끼고 뒹굴고……. 밤뿐인가 한낮에도 아무 년이나 끼고 들어가고. 말을 할려면 흉장이 막혀서 으호오!"
 
35
귀부인은 가쁜 듯이 숨을 모두 꾸려 쉬고 잠깐 말을 끊었다.
 
36
"새 날이 밝고 새 밤이 새어도 날마다 밤마다 그 날이 그 날, 그 밤이 그 밤. 좌평대감 부인이란 빈 이름뿐, 생판으로 홀과수를 맨들어 놓으니 이 젊은 년이 허구한 날, 어떻게 견디란 말이오? 방문 앞에 발자국 소리가 나는 듯 나는 듯하여서 몇 번 설 든 잠을 소스라쳐 깨고 울었는지 아시기나 하오? 더구나 달 밝은 밤 새벽잠 한잠 못 이루고 울화가 치받치어 뜰을 거닐라치면 어느 첩년 방에서 들려오는 그 음탕한 소리! 살이 떨렸소. 살이 실룩거리는 내 허벅지를 내 손으로 수도 없이 꼬집었소. 지금도 그 자리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소. 그 생각을 하면 요까짓 짓거리쯤 가지고 그런 시늉을 하느냐 마느냐, 흥. 말귀도 못 알아듣는 오랑캐하고 희희낙락거리자니 오죽하오? 흥."
 
37
지금까지 무슨 노래나 듣는 듯이 제 아름다운 포로의 나불거리는 입만 멀거니 바라보고 있던 당장은 얼굴빛이 별안간 시무룩해진다. 무딘 그의 귀에 도 그 귀부인의 말조가 아까와 달라졌음인가. 귀부인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 곱게 다스린 이마가 쌀쌀하게 일어서고, 두 뺨에 살짝 살기가 도는 것을 알아보았음인가. 아무튼 시방 재빠르게 주워 섬기는 귀부인의 말이 자기를 향해 어리광을 피고 아양을 떠는 것이 아닌 것만은 어렴풋이 깨달은 모양이었다.
 
38
귀부인은 잽싸게 당장의 눈치를 알아차리고 얼른 얼굴빛을 곤치었다.
 
39
"왜 성이 잔뜩 나시었소? 네, 네?"
 
40
하고 갸웃이 그 얼굴을 데밀다보며 간이 녹아들 웃음을 보내었다.
 
41
그러나 당장의 틀린 눈꼴은 좀처럼 바루잡히지 않았다. 이윽고 마부와 귀부인을 번갈아 보다가 손가락을 말구종을 가리키며 귀부인을 향해 노발대발 한다.
 
42
"저놈, 저놈이 무슨 말을 하지 않았느냐?"
 
43
종주먹을 대는 눈치다.
 
44
"아녜요. 아녜요. 그 마부 대감이 말이 무슨 말이에요."
 
45
하고 귀부인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어 보였다. 원래 와글와글하는 인마의 소음 때문에 바루 곁이라도 귀담아 듣지 않으면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꼭 지목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46
당장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치켜올렸던 눈꼬리를 쳐뜨렸다.
 
47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군. 이것도 내 덕인 줄 알기나 해요."
 
48
귀부인은 당장의 눈앞에 놓인 제 얼굴을 될 수 있는 대로 화하고 어여쁘게 꾸미며 말을 나리뜨렸다.
 
49
"인제야 네 속을 알았다. 한 남편을 섬기다가 청춘에 과부가 되어도 홀로 늙는 열녀도 있거든, 고 동안에 춘정을 못 참았더람. 에이 더러운 년!"
 
50
말구종된 남편은 먼 산만 파며시 침을 뚝 따고 말 어깨 너머로 말을 올려 보았다.
 
51
"흥, 열녀, 찾을 것은 다 찾는구려. 열녀의 남편은 저마다 되는 줄 아시오? 열녀 못되는 것도 대감 탓인 줄 모르시오?"
 
52
"내가 언제 너더러 오랑캐놈에게 몸을 허락하라더냐?"
 
53
"흥, 몸을 허락한다? 말은 바루 비단결 같구려. 언제 몸을 허락하고 말 고 할 겨를이나 있습디까?"
 
54
"남이라고 절개를 지킬라고, 왜 죽기를 한사하고 항거를 못했느냐? 에이 더러운 년, 튀튀!"
 
55
귀인 마부는 땅바닥에 침을 여러 번 배앝았다.
 
56
"왜침은 애꿎은 땅바닥에 뱉으시오? 그렇게 결기가 놀라운 이가 왜 한 번 홱 돌아서서 내 낯바닥에 침을 못 배앝소? 여보 ‘죽기 한사’ 잘하는 양반, 그렇게 죽음을 겁 안 내는 절개 있는 어른이 서울도 함몰이 되기 전에 왜 임금을 내버리고 도망질을 하였소? 허둥지둥 산속으로 달아났소? 사내의 절개란 그런 거요? 오호호…… 에구 또 이 장군님이 눈치를 챌라. 등이나 또 한번 쓰다듬어 줄까……. 달아나도 옳게나 달아났으면 제법 좋게.
 
57
괜히 겁을 집어먹고, 한 군데 부접을 못하고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말 경엔 이 호랑이 떼에게 걸려들어서 요지경이지. 어느 입으로 누구더러 죽기 한사하고 항거를 해라. 오라! 자기 목숨은 그렇게 아깝고 대견해도 남의 목숨은 파리 목숨이란 말이지. 흥."
 
58
"이년아, 내 혼자만 살려고 그랬느냐? 네년의 목숨도 살리려고 그 애를 썼지."
 
59
나도 이 오랑캐놈을 "얼러맞추는 게 내 혼자만 살려고 이러오? 대감 목숨까지 붙여 드리려고 이러는 게라오."
 
60
"네년의 덕에 내가 살아. 차라리 죽어 버리지!"
 
61
"죽을 때 다 놓치고 인제 와서 새삼스럽게 죽어요? 아스세요. 조곰만 더 참으세요. 그 신라 장수 김유신(金庾信)인가 하는 작자를 만날 때까지."
 
62
"김유신이 얘기는 왜 또 꺼내느냐!"
 
63
남편은 김유신이란 말에 가슴이 뜨끔하고 마치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64
"언제는 잠꼬대에도 김유신이 사설만 하시더니 왜 인제는 듣기가 싫으세요?"
 
65
귀부인은 비웃는 말끝을 이었다.
 
66
"우리가 오늘날 이 고생을 해도 김유신을 만나기만 하면 다시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가 있다고 열 번 스무 번 이렁성거리지 않으셨소. 내가 그 험한 길을 걷다가 걷다가 발이 통통히 붓고 댓 자욱을 옮겨 놓지 못할 때에도 그 원수엣놈의 신라 장수 김유신의 말을 뇌고 또 뇌시며 나를 달래지 않으셨소? 만날 도리가 없지마는 난리가 웬만큼 평정이 되고 그의 있는 곳만 알아 찾아가 볼작시면 혈마 나를 저버리지 않을 게라고……."
 
67
귀인 말구종의 고개는 더욱 수그러졌다.
 
68
"뭐라든가? 뭐 국가의 흥망은 알 수 없는 일, 만일 신라가 망하면 그는 내게 몸을 의탁할 게고, 백제가 망하면 그는 나를 거두어 주기로 바루 사내 계집끼리의 백년가약 맺듯 단단 맹서를 해 두었다고……."
 
69
"듣기 싫다, 듣기 싫어!"
 
70
귀인 말구종은 손을 내저으며 귀라도 막고 싶어한다.
 
71
"듣기 싫기는 왜? 그 신라 놈 염탐꾼을 사랑 골방에다가 깍듯이 위해 놓고 끼니 끼니마다 고 배대상을 해 먹이고 밤낮으로 쑥덕거리고 무슨 쪽지인 지 한 보따리씩 적어서 주어 김유신에게 보내지 않으셨소? 그렇게 공을 들이고도 오늘날 요 꼴이니 참 기가 막혀 죽을 노릇이지. 그나 그뿐인가 ……."
 
72
"아직도 뒷일을 누가 아느냐?"
 
73
귀인 말구종은 그래도 실낱 같은 희망을 잃지 않는 모양이었다.
 
74
"맙시사, 믿고 바라기는 퍽도 믿고 바라시오. 위선 잡혀올 때만 해도 김 유신이라면 이 당나라 놈들이 행여나 사정을 보아줄 줄 알고 필담으로 내가 신라 장수 김유신을 잘 아노라고 까바쳤다가, 웬걸 이 당나라 장수가 천길 만길 더 뛰고, 제 계집 탄 말을 제가 끌고 가는 해참한 욕을 보지 않소? 그래도 아직 뒷일은 모른다고, 배포가 유하기는……."
 
75
제 남편과 이런 수작을 주고받으면서도 귀부인은 연방 당장을 호려내기에 갖은 재조를 다 부렸다. 기름 같은 제 팔로 그 절구통 같은 목덜미를 휘감기도 하고, 말씬말씬한 제 다리를 놀려 쇳덩이 같은 저 편의 다리를 자근자근 누르기도 한다.
 
76
"세상에 음흉하고 안팎 다르기는 신라 놈. 저의 일을 그만큼 봐 주었으면 당나라 장수들에게 연통이 있어야 될 것 아니오? 백제에 쳐들어가거든 아무개 아무개는 그렇지 않게 대접을 하라고 넌지시 일러 놓아야 할 것 아니오? 부려먹을 적엔 꿀을 담아 붓는 듯이 죽고 살기를 같이 하자고 맹서를 해놓고, 정말 곤경을 당할 때는 본체 만체하니……."
 
77
"죽일 놈들!"
 
78
귀인 말구종도 매우 분해한다.
 
79
"대감도 이제야 분한 줄 아시오? 말을 하자면 그렇단 말이지. 지금 와서 남을 탓하면 무엇하오? 그야 내숭스럽기야 대감이 신라 놈 뺨치게 더 내숭스러웠지. 한 나라의 좌평으로 있으면서, 적국과 내통을 해 놓고 시치밀 뚝 떼었으니. 흥."
 
80
"아가리를 닫치지 못하느냐!"
 
81
귀인 말구종은 소리를 제법 질렀다.
 
82
"왜 남 듣기 부끄럽소? 오, 참 나더러 절개를 지키지 않았다더라. 그래 절개 있는 양반은 남의 나라와 내통을 하는 거요? 나는 이래 뵈도 대감과 살 적에는 딴 서방질한 일은 없었소. 대감은 백제 벼슬을 살면서 신라 일을 봐 주었으니, 한 방에서 두 사내를 끼고 노는 년과 다를 게 뭐요? 오늘날 이 고생도 싸지 싸. 에이 더러워라!"
 
83
"이년! 뭣이 어쩌고 어째."
 
84
분이 머리끝까지 치민 귀인 말구종은 앞뒤를 생각할 것 없이 성난 눈초리를 흘겨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 눈길은 불행히 당장의 눈과 마주치고 말았다.
 
85
당장은 계집이 아무리 너스레를 놓아도 말하는 눈치가 수상스러워서 기연 가비연가하며, 귀인 말구종의 행동을 살피고 있는 판이었다.
 
86
당장은 불같이 성을 내었다. 등자를 구르며 산이 떠나가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87
"이 놈! 언감생신 누구를 흘겨보느냐! 죽을 것을 살려 놓으니 은혜도 모르고."
 
88
당장의 호통에 귀부인은 경풍을 하고 또다시 웃음꽃을 피워 보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당장은 성난 목소리로 말 탄 당병 한 명을 불렀다.
 
89
당장이 고래고래 뇌까리며 말 탄 당병을 부르자, 명령을 들은 당병이 말 머리를 홱 돌려서 이리로 오는 바람에 그 말꼬리에 매였던 백제 장정은 회술레를 돌리며 꺼들린 머리칼이 더러는 뽑히어 피가 맺히었다.
 
90
"에구 따가워. 에구 죽겠네!"
 
91
고꾸라진 다리를 일으켜 세우지도 못하고 그 장정은 비명을 쳤다.
 
92
잡혀 가는 사람들의 놀램에 흰 눈들은 이리로 몰렸다. 그 퀭하게 홉뜬 눈들은,
 
93
"또 무슨 악착한 일이 벌어지려누?"
 
94
하고 서로 묻는 듯하다.
 
95
바루 그 백제 귀부인 등뒤에는 말을 타고 가는 어린 남매가 있었다. 누이는 열 두어 살 되었고 동생은 네댓 살밖에 되지 않았다.
 
96
그 어린애는 이 광경을 보자 불이 붙는 듯이 울어 제친다.
 
97
성난 당장은 당병에게 무에라고 명령을 하다가 애 우는 소리에 당병이 얼른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화를 버럭 내었다.
 
98
"저런 애를 뭣하러 데리고 왔어? 요절을 못 내 버리고."
 
99
남매를 넘겨다보고 고함을 쳤다.
 
100
"얘, 얘, 울지 말아. 울면 큰일 나."
 
101
누이는 어쩔 줄을 모르고 쩔쩔매며 제 손으로 우는 동생의 입을 틀어막고 부들부들 떤다. 다행히 동생은 꿀꺽꿀꺽 울음을 그친다.
 
102
당장은 잠깐 남매를 노려보다가 다시 당병을 향하여, 귀인 말구종을 손가락질하며,
 
103
"너, 네 말꼬리에 매어 단 놈하고 저 놈하고 바꾸어라. 그래 가지고 활한 바탕쯤 말을 달려갔다가 오게 해라."
 
104
당병은 선뜩 말에서 나려섰다. 어떻게 단단히 미끄러매었던지 끌려 놓는 데도 한동안이 걸리었다. 어리둥절한 백제 장정을 발길로 툭툭 차서 그 귀인의 말고삐를 잡게 하고, 그 백제 귀인 말구종을 끌어내었다.
 
105
"에구 인제는 죽이려나 부다. 이 몹쓸 년아. 아무리 환장을 하였기로 예까지 끌고 와서 네 남편을 죽이느냐!"
 
106
그 버젓하던 은 화관은 땅바닥에 떨어지고, 머리채는 풀려 덤썩 꺼들리고, 당병의 말 궁둥이 뒤로 끌려가면서 그 귀인 말구종은 그 귀부인을 원망하였다.
 
107
"죽기는 왜 죽는담? 남이라고 말꼬리에 매달려 가도 살기만 하라고."
 
108
그 백제 귀부인은 이런 판에도 말 한 수를 지려 들지 않았다. 아마 당장의 명령 켯속을 자세히 모르고 그저 말꼬리에나 매달고 가라는 뜻인 줄 짐작한 것이리라.
 
109
애구애구나 "!! 죽네. 다 늦게야 이런 죽음을 당할 줄이야. 이년, 창화(昌化)야, 내 죽은 다음에 네년은 잘 살 줄 아느냐?"
 
110
창화라는 것은 아마 그 백제 귀부인의 이름이리라.
 
111
"해갈을 작작 떨어요. 죽기는 왜 죽소? 고분고분히 말이나 잘 들어요.
 
112
괜스리 방정을 떨다가 정말 목숨을 잃지 말고 은화관 벗고 머리 좀 풀었다고 죽기야 하오?"
 
113
창화 부인은 끝끝내 제 남편을 비웃었다.
 
114
"이런 죽일 놈들, 무도한 오랑캐놈들! 그래 백제의 내두좌평(內頭佐平) 임자(任子)임을 몰라보고 머리를 풀어 말꼬리에 매어?"
 
115
임자라는 것은 그 귀인 말구종의 제 이름을 제가 뽐내어 부르는 양이다.
 
116
"애구 장하시오. 고만두어요. 지금 와서 흰소리를 하면 누가 알아주오?
 
117
창피만 하지."
 
118
"애구 따가워라. 이년 창화야. 내가 죽어 귀신이 되어도 네년의 원수를 갚을 테다. 네년을 잡아갈 테다."
 
119
"어휴 무서워라. 기겁을 하겠네. 도대체 내 탓은 왜 하시오? 자기가 뒤를 돌아다보다가 저 지경을 당하면서 내가 무슨 계관이란 말이오?"
 
120
"이년아, 네가 남의 부애를 뒤집어 놓지 않았느냐."
 
121
이때 임자의 머리를 말꼬리에 매느라고 낑낑거리고 있던 당병은 그 입정 놀리는 게 듣기 싫다는 듯이 그 검센 주먹으로 입과 볼을 걸쳐 쥐어질렀다.
 
122
‘에쿠, 이놈이 벌써 사람을 잡는구나."임자의 입술과 잇몸에서는 대번에 피가 뚝뚝 떨어졌다.
 
123
"에쿠 에쿠, 이놈들이 이렇게 무도하고 무지스러운 줄 알았더면 배성 일 전(一戰)에 한 번 겨뤄나 볼걸. 단 한 놈이라도 찔러 죽이고 죽을 것을. 에 이 분해라, 에이 원통해라."
 
124
임자는 피를 버글버글 흘리며 후회하였다.
 
125
당병은 비끄러매기를 마치자 말께 올랐다. 타기가 무섭게 당병의 채찍은 소리를 내며 말을 후려갈겼다.
 
126
말은 별안간 모진 매에 꿈틀하고 왼 몸을 털더니만, 앞발을 번쩍 들고 흐르렁 소리를 치자 쏜살같이 닫기 시작하였다.
【원문】귀부인과 말구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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