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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ㄷ씨 행장기(行狀記) ◈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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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2월
이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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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씨 행장기(行狀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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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 씨는 오늘도 회색 두루마기에 꾀죄죄한 동정, 원래는 깜장이었던 뿌우연 진 회색 모자에 코는 벌름하고, 뒤축은 짚신처럼 찌그러진 구두―라는 30년 전 그대로의 그 초라한 행색으로, 이 또한 30년 가까이나 살고 있는 청파 연화봉 마루턱에 다 쓰러져가는 함석집을 나오면서 기침이라기보다는 너 이놈들 오늘은 어디 한번 견디어봐라, 하고 빼무는 듯싶은 앙칼진 애햄! 소리를 치고 한길로 나서는 것이었다. 실상 이 되바라진 기침만 해도 이미 30년 이나 된, 아니 그보다도 훨씬 더 많은 세월, 아마 40년 가까이나 된 버릇일 것이, ㄷ씨는 열다섯 되던 해부터 이 사회에 대하여 꽁한 생각을 품은 채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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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남산골 샌님의 외아들로 태어난 ㄷ씨였고 보니 열다섯 이전이라고 그런 생각이 안 들었을까만, 그때까지는 그래도 언제 한번 딛고 일어서 보리라는 바람〔希望[희망]〕이란 것을 갖고 살아왔었으나 아이들 칼 장난처럼 위태롭게만 보여지던 당파싸움이 급기야 을사조약을 맺게 만들고, 그래도 무슨 도리가 있겠거니 막연한 희망을 붙이고 있는 때 한일합방이란 청천에 벽력이 내린 후로부터는 그야말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기가 되고 말았었다. 합방이 발표되자 ㄷ씨의 아버지 ㄷ생원은 머리를 풀어헤뜨리고 머리를 벽에다 꽝꽝 들이받아가며 울었었다. 머리가 터졌는지 방안에는 선혈이 흥건했었다. ㄷ씨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진정시키려 들었으나 그것은 헛된 노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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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피를 확확 품어가며 온 방안을 뒹굴었었다. 아버지의 몸부림은 샐 녘에 가서야 진정이 되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이 아니라 종말이었다. ㄷ생원은 그날 새벽에 자결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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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놈들, 어디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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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정신을 차리면서 ㄷ씨가 처음 입밖에 낸 말이 이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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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 죽일 놈들! 당파싸움에 나라마저 팔아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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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열다섯 살에 무엇을 알았을까만 사내자식이 열두 살이면 호패를 찬다던 시절이었고 또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일컫던 ㄷ씨이기도 했다. 아니 어려서부터 권세를 잡지 못한 불우한 남산골 샌님들이 모여앉아서 비분의 눈물 흘리는 광경만을 보면서 커온 ㄷ씨인지라 그 자신도 '권세’라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또 얼마나 위대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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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들, 권셀 잡았다구 저희들 끼리끼리만 해먹어? 인잴 등용해야지. 저의 놈은 사둔의 팔촌까지두 감사다 원이다 해먹으면서 옛 친구의 의리를 저바리구 ― 어디들 보자, 이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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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두고 봐야지! 화무십일홍이구 달두 차면 기우는 법이지! 언제나 저의 놈들 세상일 줄 알지? 어리석은 놈들 같으니, 음지두 양지될 때가 있다는 천리를 알아야지! 천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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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민가 놈들을 죽여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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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 놈두 죽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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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두 그냥 둬선 안 되지! 그놈들을 한 올가미에다 꽁꽁 등돌려 묶어다가 마포강에다 한꺼번에 집어 처넣어야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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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지, 작두에다 놓구서 목을 댕겅 잘라야지! 그리구 그놈들의 가족을 멸해서 다시는 맥을 못 쓰게 절종을 시켜놔야만 나라가 태령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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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들 두시오. 두고 봅시다. 제놈들이 얼마나 해먹는가 좀 두고 보라지! 내 눈으루 보구야 말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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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씨의 아버지 ㄷ 생원과 그의 친구들은 집에서 빚은 술에 김치 한 그릇을 안주랍시고 갖다놓고는 이렇게 밤들을 세웠던 것이다. ㄷ씨가 권세란 얼마나 좋은 것이며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을 안 것도 이때문이었지만 그가 걸핏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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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놈들, 어디 좀 보자!" 하고 벼르는 버릇도 기실은 이 남산골 샌님들한테서 전해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문간에 나서면서, "애햄!"하는 기침이 이 세상에 대한 도전처럼 된 것도 그의 아버지 ㄷ 생원한테서 배운 것이요, 세상 매사에 아랫입술을 밑으로 말고 입을 약간 밀죽하니 움직이며 한쪽 눈을 찡긋이 감고서 좋이 못마땅하니 보는 버릇이 생긴 것도 기실 말하자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습성의 하나라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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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적이라기보다 지금은 거의 무의식이 되어버렸지만 일체의 권력 앞에 아부를 할 줄 모르는 그 꼬장꼬장한 성격도, 모르는 사람들은 순 서울 태생의 양반인 탓이라고 오해를 하지만 근본을 따지고 보면 아버지 ㄷ생원의 성품을 그대로 물려받은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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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ㄷ의 아들녀석, 고놈 참 되양되양하던 걸―고런 괘씸한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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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뿔두 없는 사람이 까치 뱃바닥처럼 흰 체 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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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ㄷ이란 사람 참 몹시두 깐족이더군! 어떤 땐 딱한 생각이 들다가두 얄미워져서 내밀었던 손두 되굽어든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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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들이 대체로 ㄷ씨에 대한 측근자들의 정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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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세평으로만 본다면 ㄷ씨가 이 세상 그 어떤 사람에게서도 도움이라든가 원조 같은 것을 안 받았는가? 실은 그렇지만도 못한 것이 열다섯 살에 일본 세력 앞에서는 단 한푼의 가치도 없는 양반 족보와 아비의 상채와 맞 비길 수 있을 정도의 오막살이 초가 한 채만을 유산이랍시고 물려받은 ㄷ 씨가 60이 가깝도록 이렇다 할 직업도 없이 40년을 살아오고 보니 친구들한테 개개치 않았달 수도 없다. 거기다가 물려받지 않아도 좋을 아버지 ㄷ 생원의 주량까지 물려받은 셈이 되어 아닌 말로 술 한 말을 들고는 못 가도 먹고는 갈 수 있는 대주객이요, 또 사실 열여덟엔가 아홉 때에 취한 풋술에서 60을 바라보는 오늘날까지 깨지를 못하고 있으니 평생을 통해서 옛날 돈으로는 십원, 지금 돈으로도 단돈 만원을 한꺼번에 쥐어본 적이 별로 없는 ㄷ 씨가 남의 신세를 안졌다는 말도 우스운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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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유산도 없고 일평생 직업도 없는 ㄷ씨가 술만은 남의 술을 얻어먹고 살았다 하지만 가족들은 곰처럼 발바닥이나 핥고 살았느냐 하겠지만 유산은커녕 빚만을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직업이란 것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드러내놓고 이것이 ㄷ씨의 직업이었더니라 내세울 만 한 것이 못 되었다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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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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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지난 30년간의 그의 직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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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조선어 선생이란 직업도 실상은 그의 가족을 먹여살릴 만한 수입이 안 되었으니 거개가 어엿한 학교선생이 아니라 강습소 아니면 월급도 제 날 주지 못하는 학교랄 값에도 못 가는 것들 뿐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ㄷ 씨가 고만한 실력이 없어 그런 건 아니다. 실력으로 친다면 우리 한글을 바로잡아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주치강 선생의 수제자로 손을 꼽아도좋을 만한 학자이면서도 보통학교도 다니지를 않았으니 첫째 인가 있는 고등 보통학교에서는 쓰려야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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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씨의 실력을 인정하는 C와 W고보에서는 교장이 나서서 인가를 맡아주려고 애도 무진 쓰고 돈도 수월찮게 쓴 일이 있었으나 총독부 학무과의 말이, 아무리 조선어 선생이라 하지만 국어도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고보 교유로 인정을 하겠느냐는 것이었고 거기다가 ㄷ씨가 자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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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까짓 왜말만 배우는 학교면 오래두 안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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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버티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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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그 시학관 놈들이 미친놈들인 게 우리 조선말과 조선글을 왜말과 왜글로 가르치라는 건가? 시러베아들 놈들! 즈 말대루 하자면야 사람을 왜 글 가나루 써야겠는데 뭐라구 쓴담? 사라무―이렇게 쓴다 치구 즈놈들 얼치기 글룬 쓸 수도 없는 말은 어떡한다누? 닭, 솥, 할―이런 건 어떡한다지? 닭은 다르구, 솥은 솟도, 할은 하루로 이렇게 쓰나? 그럼 그건 또 그렇게 쓴다 치구서 '해’같은 건 어떻게 쓸라노? 하이 이렇게 쓰나? 그럼 그건 파리나 재가 되게? 아아니, 대답도 되는군그랴! 기는 것두 되구! 시러베아들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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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씨는 술 한잔만 들고 나면 벌써 이렇게 깐족깐족 되뇌이는 것이었다. 이것을 보면 ㄷ씨가 일본말을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닌 성싶은데, 한번은 ' 아나가찌’ 란 일어를 가지고 몇 선생들이 문득이 옳으니 일테면이 맞느니 하는 것을 옆에서 듣고 있던 ㄷ 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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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우리말루 하자면 모름지기란 뜻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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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일러준 일이 있은 후로는 ㄷ씨가 일어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쓰지 않을 뿐이란 소문이 한동안 돌았었다. 바로 아나가찌를 일러주던 그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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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 선생, 그러질 마시구 정식으루 시험을 한번 쳐보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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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선생 ㄹ씨가 이렇게 권한 것은 정녕코 ㄷ씨의 간궁한 생활을 걱정하고 그의 놀라운 지식을 살리고 싶다는 호의에서였는데 ㄷ씨는 뙤약볕의 콩처럼 튀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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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 선생, 뭣이 어째구 어쨌다죠? 네, 한번 더 말씀해주시죠. 잘못 들었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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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 선생, 노하셨습니까, 난 절대로 다른 의민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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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니, 노엽구 반갑군 말을 알아듣구 난 다음 이야기죠. 난 ㄹ 선생 말씀을 채 못 알아들었쇠다. 자, 한번만 다시 말씀해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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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만두십시다, ㄷ 선생. 다른 의민 아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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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말을 내면 끝장을 내고야 마는 ㄷ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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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그래두 그러시거든. 노엽긴요. 천만에 말씀. 뜻을 알아듣고 봐야 노엽든지 반갑든지 할 것 아닙니까. 하신 말씀을 미처 못 알아들었으니까 한번만 더 말씀해주십산 게죠. 자, 뭐라구 하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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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 달은 인두를 턱밑에다 버쩍버쩍 들이밀듯이 바작바작 달라붙는 통에 ㄹ 선생은 진땀을 쭉 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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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뭐라구 하셨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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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선생은 기어코 한 말을 그대로 하고야 견디었었다.
【원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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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무영(李無影)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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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12월 0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