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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정(有情) ◈
◇ 유정 (3) ◇
카탈로그   목차 (총 : 7권)     이전 3권 다음
1933
이광수(李光洙)
1
유정(有情) - 3
 
 
2
동경에 가는 길로 나는 여자 고등 사범 학교 기숙사를 찾았소. 때는 오전 여덟 시쯤.
 
3
오야마라는 사람은 아직 집에서 돌아오지를 아니하고 어떤 일본 여학생이 나와서 접대를 하오.
 
4
“나는 조선서 왔습니다. 남정임의 보호자입니다. 오야마 선생의 전보를 받고 왔는데 남정임의 병이 어떠합니까?”
 
5
하고 물었소.
 
6
“네 그러십니까.”
 
7
하고 그 여학생은 다시 공손하게 일본식으로 두 손을 다다미에 짚고 절을 하더니,
 
8
“남정임 씨는 그저께 T대학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갑자기 각혈을 하여서.”
 
9
하고 동정하는 낯빛으로,
 
10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남정임 씨와 한 방에 있는 동무를 불러 오겠습니다.”
 
11
하고 그 여학생이 일어나서 통통통 걸어간 지 얼마 만에 웬 양복 입고 키 큰 여학생 하나를 데리고 와서 내게 소개를 합니다. 나는 그 양복 입은 이의 골격을 보아서 이것이 조선 학생인 줄을 알았소.
 
12
“이 어른이 지금 조선으로부터 오신 어른이신데, 남정임 씨 보호자시라고.”
 
13
하고 그 양복 입은 여학생에게 나를 먼저 소개하고 다음에는 나를 향하여,
 
14
“이 이가 긴 상이라고 남정임 씨하고 한 방에 있는 이입니다.”
 
15
하고 소개를 하오. 그리고는 내가 김이라는 여학생과 이야기하는 동안 그 일본 학생은 곁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소.
 
16
“정임이가 어떻게 병이 났어요?”
 
17
하고 내가 양복 입은 학생에게 물은즉, 그 학생의 대답은 이러하였소.
 
18
“오래 불면증으로 잠을 잘 못 자고 애를 써서 몸이 좀 약해졌는데 그저께는 아침마다 하는 새벽 체조를 하다가 말고 갑자기 각혈을 하였습니다. 새빨간 피를 한 컵은 더 토하였어요. 그래서 방에 들여다 뉘고 선생님께서 오시거든 입원을 시킨다고 하다가 의사가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위험하다고 그래서 사감 선생이 보증을 하고 T대학 병원에 입원을 시켰습니다.”
 
19
각혈이라니! 우리 정임이가 각혈이라니! 하고 나는 가슴이 설레고 앞이 캄캄해짐을 깨달았소. 지금은 각혈이라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병이 아닌 줄을 알았지마는 그 때까지의 내 의학 상식으로는 각혈이라면 죽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오.
 
20
정임이가 죽다니! 이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것이었소. 만일 정임이가 죽는다고 하면 세상이 온통 캄캄해질 것 같았소. 그렇게 몸과 마음과 영혼으로 아름다운 정임이가 꽃봉오리째로 떨어지다니! 이것은 가슴이 터질 노릇이었소.
 
21
나는 택시를 몰아서 T대학 병원을 향하고 달렸소. 내가 오랫동안 있던 동경, 청춘의 꿈 같은 기억이 있는 동경의 거리를 보는지 안 보는지 몰랐소. 내 가슴은 놀라움과 슬픔과 절망으로 찼던 것이오.
 
22
T대학 병원 S내과 X호 병실이 정임의 병실이라는 것은 아까 키 큰 여학생 김에게서 들었소. 어쩌면 김이 나를 병원까지 안내해 주지 아니하였을까. 어쩌면 김의 태도가 그렇게 냉랭하였을까 하면서 나는 X호실을 찾았소.
 
23
X호실이라는 것은 결핵 병실인 것을 발견하였소. 침침한 복도로 다니는 의사, 간호부 들이 가제 마스크로 입과 코를 싸매고 다니는 것이 마치 죽음의 나라와 같았소. 어디나 마찬가지인 심술궂게 생긴 `쓰키소이' 노파들의 오락가락하는 양이 더구나 이 광경을 음산하게 하였소.
 
24
“남정임은?”
 
25
하고 나는 간호부실 앞에서 모자를 벗고 공손하게 물었소. 병원에서는 간호부가 제일 세도 있는 벼슬인 줄을 알기 때문이오.
 
26
“X호실.”
 
27
하고 뚱뚱한 간호부가 나를 힐끗 보며 냉담하게 대답하더니,
 
28
“남정임 씨는 면회 사절입니다. 중증 환자로 절대 안정이니깐 면회는 못 하십니다.”
 
29
하고 권위를 가지고 거절하였소.
 
30
“나는 남정임의 보호자로서 병이란 전보를 받고 왔습니다.”
 
31
하고 나는 간호부의 태도에는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청하러 온 사람이라 더욱 공손하게 절을 하였소.
 
32
이렇게 어렵게 허락을 얻어 가지고 나는 X실이라는 병실에 들어갔소. 그것은 아마 무료 병실이나 아닌가 하리만큼 나쁜 병실이었소. 게다가 한 방에 칠팔 인이나 환자가 누웠소. 나는 우리 정임을 이러한 병실에 입원시킨 데대하여서 굳세게 모욕감을 느꼈소.
 
33
간호부는 나보다 한 걸음 앞서 들어가서 정임의 침대 곁에 서며,
 
34
“난 상 오쿠니카라 멘카이닌(남정임 씨 본국서 손님 왔소).”
 
35
하였소. 정임은 감고 있던 눈을 슬쩍 떴소. 그 눈은 내 눈과 마주쳤소. 수척해서 본래 좀 크던 눈이 더욱 커진 듯하였소. 그러나 그 얼굴은 더욱 옥같이 아름답고 맑아서 인간 세계의 사람 같지 아니하였소.나는 하도 억해서,
 
36
“정임아 내가 왔다.”
 
37
하고 담요 위로 정임의 가슴에 내 손을 대었소. 정임은 담요 밑에 있던 싸늘한 손을 꺼내어서 내 손을 잡고 말은 없이 눈물이 핑 돌았소.
 
38
“하나시오 시데와 이케마센(말을 하면 안 돼요)!”
 
39
하고 간호부는 부하에게 호령하는 태도로 정임을 노려보았소.
 
40
“응 말은 말아라.”
 
41
하고 나는 간호부를 향하여,
 
42
“이야기 아니 시킬 테니 안심하시오. 고맙습니다.”
 
43
하고 간호부에게 고개를 숙였소. 그제야 간호부는 나가 버렸소.나는 정임의 침대 곁에 놓인 동그란 교의 위에 앉으며 베개 밑에 있는 가제를 접어서 정임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씻어 주었소.
 
44
“정임아, 왜 우느냐. 마음을 든든히 먹어야지. 아무 염려 마라.”
 
45
하고 나는 정임의 해쓱한 얼굴과 가늘어진 목을 들여다보았소. 그리고 베개 위에 흐트러진 검은 머리를 보았소. 그리고 다른 환자들을 돌아보고 목례를 하였소. 다들 동정하는 듯이 나를 보고 환자의 친족인 듯한 어떤 늙은 부인이,
 
46
“따님이세요? 저렇게 예쁜 이가 병이 나서 아이 가엾어라.”
 
47
하고 말을 붙이는 이도 있소.내가 할 첫 일은 우선 방을 옮기는 것이었소. 소중한 정임이를 한 시각도 이런 하등 병실에 둘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소.
 
48
“쓰키소이는 안 달았니?”
 
49
하고 나는 정임에게 물었소.
 
50
“하나 있는데 어디 나갔어요.”
 
51
하고 정임은 들릴락말락한 음성으로 대답하오.
 
52
“병자를 혼자 두고 나가?”
 
53
하고 나는 불쾌하였소.나는 정임의 손을 들어 담요 속에 넣어 주고,
 
54
“내 얼른 댕겨오마.”
 
55
하고는 모자와 단장과 외투를 교의 위에 놓고 나갔소.나는 의국을 찾아가서 S박사를 만나려 하였으나 박사는 진찰 중이라 하기로 겨우 J라는 조교수 하나를 붙들고 사정을 말하고 혼자 있을 병실 하나를 달라고 하였소.대단히 까다로운 여러 가지 교섭이 있은 후에 겨우 일등실 하나를 얻어 놓고 정임에게로 돌아와서,
 
56
“내가 조교수에게 말해서 병실을 하나 얻었다. 한 시간만 기다리면 옮겨 주마고. 여기서야 어디 병이 더하면 더하지 낫겠니? 또 조교수더러 물어 보니까, 네 병은 염려할 것은 없다고, 한 일 주일 안정하면 괜찮을는지 모른다고. 그러나 몸이 대단히 쇠약했으니 주의해야 한다고 그러더라.”
 
57
하여 정임을 위로하였소. 사실인즉, 조교수는 정임의 병에 대하여서 아직 분명한 진단도 얻지 못한 모양으로 말을 하였지마는 나는 이 경우에 정임에게 이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었소.
 
58
내가 온 것을 처음 보고는 정임도 퍽 흥분된 모양이어서 기침도 자주 하고 빨간 피를 두 번이나 뱉었으나, 차차 낯에 안심한 빛이 돌고 기쁜 빛까지 보였소.약속한 시간보다 좀 더디게 오정 때나 되어서야 간호부가 환자 태우는 구루마를 끌고 들어와서 새 병실로 옮길 것을 말하였소.
 
59
간호부들이 정임을 안아서 구루마에 누이고 끌고 나간 뒤에 나는 정임의 담요와 세간을 정리하여 들고 여러 병자들께 인사를 하고 정임의 새 병실로 따라갔소.
 
60
이 병실은 이층으로 대학 정원을 바라보게 된 방인데 북향이지마는 넓고 깨끗하고 침대도 주석으로 되고 간호하는 사람이 잘 만한, 펴 놓으면 침대가 될 만한 걸상과 가족이 있을 만한 부실까지도 붙었소. 양복장, 테이블, 우단으로 싼 교의까지 있고 유리창에 커튼까지 있는 아주 훌륭한 방이오. 흠이라면 바닥에 깐 리놀륨이 좀 더러운 것일까. 침대에 깐 시트도 새롭고 희어서 얼룩이가 없었소.
 
61
이러한 병실에 정임을 갖다가 누이니 내 마음이 좀 편안하였소.
 
62
그리고 나는 간호부 하나를 구하여서 정임을 간호하게 하고 아침도 점심도 굶은 채로 오후 네 시나 지나서야 잠시 병원에서 나와서 병원 근처에 여관을 하나 정하였소. 집에다가 전보를 치고 목욕을 하고 저녁을 먹고 나서는 그만 고꾸라져서 잠이 들어 버렸소.
 
63
하루 지나 이틀 지나 어느덧 사오 일이 지났소. 나는 아침을 먹고는 병원에를 가서 정임을 보고 간호부에게 잠을 어떻게 잤나, 무엇을 얼마나 먹었나, 체온이 얼마, 또 피가 나왔나, 이런 것을 물어 보고 손수 정임의 이마도 만져 보고, 그리고는 J조교수를 찾아서 정임의 병세도 물어 보았소. J조교수는 처음에 까다로운 사람 같더니 차차 사귀어서 나중에는 저녁을 같이 먹으러 다니리만큼 친하였소. 이 친구가 위스키를 좋아하고 댄스를 좋아하는 모양이나 나는 두 가지 다 못 하는 처지이므로 J조교수가 댄스를 할 때에는 나는 옆에 앉아서 구경을 하고, 그가 위스키를 먹을 때에는 나는 탄산을 먹었소.
 
64
“한 잔 자시오!”
 
65
하고 J조교수는 농담 절반으로 내게 술을 권하고,
 
66
“자 한 번 추어 보아!”
 
67
하고 나를 억지로 끌어내다가 여자를 껴안겨 주기도 하였소. 그도 내게 무관하게 된 모양이었소.
 
68
병원에서 하얀 진찰 옷을 입고 있을 때에는 장히 까다롭고 빼는 편인 그도 진찰 옷을 벗고 이렇게 친구를 대하면 무척 천진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었소.이렇게 친하게 된 뒤로는 J조교수는 무시로 정임의 병실에 나를 찾아왔소. 이것은 간호부들의 눈에 정임과 나와의 지위를 높여서 대우가 퍽 좋아졌소.이런 조건들이 모두 합하여 정임의 용태가 퍽 좋아 가는 모양인데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집에서 도무지 기별이 없는 것이오. 전보로 답장하라고 날마다 전보를 쳐도 한 번도 회전이 없단 말이오. 회전이 없을 때에는 무사한 것은 분명하지마는 대단히 마음이 궁금하고 불쾌하였소. 그래서 나는 순임의 학교로 순임에게,
 
69
“집 무사하냐. 어머니 병환 어떠시냐. 희도 잘 있느냐, 곧 전보해라. 네 피아노는 고르는 중이다. 정임은 그만하다. 아비.”
 
70
하는 의미의 전보를 놓았소. 피아노 말을 해야 순임이가 곧 답장할 줄을 알았기 때문에 특별히 피아노란 말을 썼소.그리하였더니 아니나다를까 그 날로,
 
71
“집은 무사하다. 어머니는 성이 나서 운다. 어서 오너라. 희도 감기들었다. 피아노 고맙다. 순임.”
 
72
하는 답전이 왔소.집에서 도무지 답전이 없길래 나도 대개는 짐작하였소. 내 아내가 화를 내어서 일부러 회답을 아니 하는 것이 분명하였소. 나는 딸에게 약속을 이행하기 위하여 전보를 받는 길로 곧 은좌 방면으로 나가서 피아노를 돌아보았소. 그리고 일천칠백 원짜리 하나를 값을 해서 수송하기를 청하고 약속금 오백 원을 치렀소.
 
73
이 피아노가 만일 내 딸 순임을 매수하기에 성공한다면 내 생활은 전보다 훨씬 편안하게 될 것이오. 그렇게 생각하면 이 돈 일천칠백 원은 아까운 돈이 아닌 것 같았소.정임의 병도 그만하고 J조교수의 말도 대단치는 아니하리라 하기로 정임에게는 퇴원하게 되는 대로 J조교수의 말을 따라서 어느 요양원으로 가든지 조선으로 오든지 하라고 일러 놓고 나는 집으로 돌아오려고 내일이면 떠난다고 마음을 먹고 자리에 들었소.잠이 들어서 몇 시간이나 되었던지 나는 전화 소리에 잠이 깨었소.
 
74
“하이 하이(네 네).”
 
75
하고 전화 수화기를 떼어 든 나는 어안이 벙벙하였소. 그것은 분명히 정임을 보아 주는 간호부의 음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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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임 씨가 병이 중하십니다. 곧 들어오십시오.”
 
77
하는 전화였소.아까까지 괜찮던 정임이가 웬일인가 하고 나는 시계를 보았소. 어느 새에 새벽 다섯 시. 나는 옷을 주워 입고 병원으로 달려갔소.간호부실에 들러서,
 
78
“남정임이가 병이 더쳤어요?”
 
79
하고 물었소.
 
80
“네, 밤에 각혈을 많이 하셔서 퍽 중하십니다. 아이참, 걱정되시겠습니다. 지금 바로 숙직하시는 선생께서 다녀가셨습니다.”
 
81
하고 인제는 낯이 익은 간호부는 친절히 대답해 줍니다.나는 정임의 병실로 가서 가만히 문을 열었습니다. 방에는 아직도 간호부 하나가 남아서 한 손에 시계를 들고 한 손으로 정임의 맥을 짚고 있고, 테이블 위에는 주사를 하였는 듯한 제구가 어수선히 놓였소.나는 눈을 감고 누웠는, 희미한 전등빛에 비추인 정임의 얼굴을 잠깐 보고, 그리고 K라는 전속 간호부에게로 가서 자세한 말을 물어 볼 양으로 정임의 침대머리를 지나다가 유리 타구가 철철 넘는 빨간 것을 보았소. 그것은 이백 그램 컵으로 셋은 될 것이오! K간호부는 내 귀에 입을 대고,
 
82
“어젯밤 당신(나를 가리키는 말)께서 가신 뒤에 난 상(정임)이 자꾸만 우셔요. 우시면 병에 좋지 않다고 암만 말씀해도 자꾸만 우시는구먼요. 그러시더니 제가 잠깐 잠이 들었는데 난 상이 저를 부르시길래 보니깐 글쎄 저렇게 피를 쏟으셨구먼요.”
 
83
하는 꼴이 우는 정임을 혼자 두고 K간호부는 잠이 들어서 쿨쿨 오륙 시간이나 자다가 정임이가 피를 많이 토할 때에야 비로소 깬 모양이었소. 괘씸한 년 같으니! 하고 나는 K간호부를 한 번 노려보았소.맥 보던 간호부가 나간 뒤에 나는 정임의 맥을 가만히 짚어 보았소. 맥이 끊어지지나 아니하였나 하다시피 약하오. 정임의 입술에도 붉은빛이 줄었소. 정임은 아마 혼수 상태인 것 같았소. 나는 가만히 정임의 손을 놓고 정임의 잠을 깨우지 아니할 양으로 가만가만히 방 한편 구석으로 물러나와서 죽은 듯한 정임을 바라보고 있었소.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따뜻한 사랑도 없는 남의 집에 얹혀서 눈칫밥으로 자라난 정임, 천상 천하에 의지할 곳 없고 알아 주는 이 없는 정임, 저것이 인제 죽어 버린다면! 하고 생각하면 뼈가 저리게 불쌍하였소. 내가 온 뒤에도 웬 놈팡이들한테서 편지도 몇 장 오고, 선물도 몇 가지 들어왔으나 그 편지 사연을 보더라도 다들 제 편에서 외짝 사랑이었고 정임이 편에서는 도무지 응하지 아니하였던 것이 분명하오.
 
84
“너 좋아하는 남자 친구가 있니?”
 
85
하고 어느 날 내가 물을 때에 정임은,
 
86
“없습니다.”
 
87
하고 적막하게 웃었소. 정임은 거짓말할 애가 아님을 나는 믿소.이 세상에 왔다가 얼음같이 찬 속에서만 살고 부모의 정, 형제의 정, 애인의 정, 부부의 정도 하나도 맛보지 못하고 죽어 가는 정임의 정경을 생각해 보시오. 내가 통곡할 생각이 났겠소? 아니 났겠소!이에 나는 결심하였소 아무리 해서라도 정임은 살려 내야 된다고.그리고 나는 간호부실에 달려가서 J조교수 집으로 전화를 걸었소. 아직오전 여섯 시, 이 때는 밤에 늦도록 댄스요 위스키요 하고 돌아다니는 버릇이 있는 J조교수는 아직 곤하게 잘 때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소. 그러나 정임의 생명에 관한 일이 아니오?
 
88
“아침 일찍 전화를 걸어서 미안합니다. 그 애의 병이 대단하니 내가 지금 댁으로 선생을 모시러 가겠습니다. 어떠하신 일이 있으시더라도 지금 꼭 와 주셔야겠습니다.”
 
89
하고 열렬하게 들이대었소. 그랬더니 원체 나하고는 사귄 터이라,
 
90
“데리러 오실 것 있소? 내 곧 가리다.”
 
91
하고 선선하게 대답합디다.과연 삼십 분 내에 J조교수가 달려왔소. 그는 진찰복도 입지 아니하고 모자도 쓴 채로 바로 병실로 들어왔소. 그렇더라도 간호부실에서 정임의 용태는 물어 가지고 왔을 것은 분명하오.J조교수는 외투도 입은 채로 정임의 맥을 짚어 보고 그리고는 청진기를 내어서 정임의 가슴을 보았소. 그리고 눈을 보고 손톱도 보고 의사가 보는 것을 다 보고 나서는 정임의 정신 없는 얼굴을 이윽히 보고 섰더니 자기가 먼저 방에서 나가면서 나더러 따라오라는 시늉을 하오.나는 불안을 가지고 따라갔소.J박사는 긴 복도로 꼬불꼬불 한참이나 걸어가서 자기 방문을 열고 들어가 모자와 외투를 벗어 던지고 앉으며 나에게도 자리를 권하오.
 
92
“쩟, 걱정이오.”
 
93
하는 것이 J박사의 첫 말이었소.
 
94
“죽을까요?”
 
95
하고 나는 눈을 크게 떴소.
 
96
“죽기야 생명에는 신비력이 있으니까, 꼭 죽을 것 같은 사람이 사는 수도 있고, 그와 반대로 꼭 살아나리라고 믿었던 사람이 죽는 수도 있고 생명에 신비력이 있습니다.”
 
97
하고 그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98
“원체 쇠약한데다가 피를 많이 잃고, 가슴에는 라셀이 가득 찼단 말이오. 그것도 또 걷히려 들면 며칠 안 해서 걷히는 수가 있습니다. 생명의 신비라는 것이지요.”
 
99
하고 담배를 내뿜으면서 휘 한숨을 쉬었소.나는 다만 조교수의 처분만 바라는 사람 모양으로 잠자코 그의 하는 양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소. 내 신경과 근육은 모두 굳어져서 움직이려도 움직일 수 없는 것만 같았소.
 
100
“글쎄요.”
 
101
하고 J조교수는 내가 속으로 생각한 것을 알아듣는 듯이,
 
102
“글쎄. 수혈이나 한 번 해 볼까.”
 
103
하고 나를 바라본다.
 
104
“수혈이라니요?”
 
105
“다른 사람의 피를 병자의 정맥에 넣는 것이지요?”
 
106
“수혈을 하면 살아날까요?”
 
107
“피가 부족하니까. 또 수혈을 하면 출혈이 그치는 수가 있으니까.”
 
108
“그러면 내가 피를 주지요!”
 
109
하고 나는 내 피를 정임을 살려내기에 바치는 것이 기뻤소.
 
110
“아무의 피나 함부로 넣는 것이 아니니까 피를 검사해 보아야지요.”
 
111
하고 J박사는 내가 허둥지둥하는 태도가 우스운 듯이 빙그레 웃으며,
 
112
“피는 사려면 얼마든지 파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럼 수혈을 해 봅시다.”
 
113
하고 J조교수는 전화 앞으로 가오.J조교수는 먼저 정임의 귀의 피를 뽑아 혈형을 검사한 결과,
 
114
“누르로군.”
 
115
하고 나더니,
 
116
“누르 형을 가진 사람은 누구에게든지 피를 줄 수는 있지마는 같은 형을 가진 사람의 피가 아니고는 받을 수는 없단 말이오. 그러니까 늘 주는 편이야.”
 
117
하고 다음에는 내 피를 검사한 결과 J박사는,
 
118
“오케이. 노형의 피가 다행히 누르요. 혈형은 맞는데.”
 
119
하고 말하기 어려운 듯이,
 
120
“노형은 화류병은 없으시오?”
 
121
“없지요!”
 
122
“그렇게 자신이 있으시오? 만일 의심이 있거든 검사를 하게.”
 
123
“절대로 없지요.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124
하고 나는 단언하였소.
 
125
“그러면 좋소이다. 그러면 노형의 피를 얻기로 합시다.”
 
126
하고 J조교수는 간호부에게 수혈 준비를 명하였소.J조교수는 내 왼쪽 팔의 굽히는 곳의 정맥에서 피를 뽑아 정임의 왼편 팔의 정맥에 넣는 일을 하였소. 나는 유리통에 뽑혀 나오는 검붉은 내 피를 보았소. 그것이 정임의 혈관으로 다 들어가 버리는 것을 보았소. 그리고 나는 잠깐 아뜩함을 깨달았소. 사백 그램이라면 두 컵의 피를 뽑아낸 셈이오.한 십 분 동안이나 가만히 누워 있으니까 정신이 평정함을 깨달았소. 나는 내 피가 정임에게 들어가 어떠한 작용을 하는가 알고 싶었소.참으로 신기한 일이오. 수혈이 끝난 지 삼십 분이 못 하여서 정임의 두 뺨에는 붉은 기운이 돌고 죽은 듯하던 입술에도 제 빛이 돌아오지 않겠소.나는 너무도 기뻐서,
 
127
“정임아!”
 
128
하고 불러 보았소.정임은 내가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소. 정임은 살아났소.
 
129
“신효하지요?”
 
130
하고 J조교수는 빙그레 웃었소. 그 때에서 그는 간호부가 준비한 물에 손을 씻었소. 그는 하얀 타월로 손을 씻으면서,
 
131
“수혈도 효력이 날 때도 있고 아니 날 때도 있지마는 효력이 나게 되면 그야말로 쇳소리가 나는 것이오. 노형도 오늘은 피를 많이 잃었으니 좀 안 정을 하시는 것이 좋겠소이다.”
 
132
하고 나가 버렸소.나는 J조교수의 말대로 비워 둔 부실의 침대 위에 쉬기로 하였소. 약간 어찔어찔하고 메슥메슥함을 깨달았소.내 피가 힘을 발하였는지 모르거니와 정임의 병세는 이삼 일 내로 훨씬 좋아져서 J박사도,
 
133
“라셀도 훨씬 줄었고, 맥도 좋고, 신열도 없고 괜찮을 모양이오.”
 
134
하고 안심할 확신 있는 말을 하여 주었소.나는 더 오래 있을 수가 없어서 정임을 J조교수에게 맡기고 집으로 돌아왔소.
 
135
형이여!
 
136
그랬더니 말이오. 집으로 돌아왔더니 말이오!
 
137
내 아내는 나를 보고 미친 듯이,
 
138
“왜 왔소? 무엇 하러 왔소. 그년하고 살지. 왜 왔소?”
 
139
하고 몸부림을 하고 야단이오.나는 어안이 벙벙하였소.
 
140
“그게 무슨 소리요? 그럼 정임이가 병이 중하다는데 내가 안 가 본단 말요?”
 
141
하고 나는 부드럽게 말하였소.
 
142
“흥, 말은 좋지. 정임이가 무슨 병이야? 병이 무슨 병이더냐 말야?”
 
143
하고 아내는 더욱 미쳐 뛰오.
 
144
“무슨 병? 각혈을 했단 말요. 목구멍에서 피가 나왔어. 각혈을 두 번이나 크게 해서 죽을 뻔했는데 면사나 되었으니 다행 아니오?”
 
145
하고 나는 더욱 부드럽게 말하였소.
 
146
“흥, 각혈? 흥, 각혈? 뻔뻔스럽게 나를 속여 보려고. 낙태를 시키다가 피를 쏟았다더구먼, 왜 내가 모르는 줄 알고. 흥, 지난 여름에 나왔을 적에. 아이구 분해. 아이고 분해. 내가 어리석은 년이 되어서 감쪽같이 속았네에. 그런들 설마 제 딸 동갑인 계집애를 건드리랴 했지. 엑 이 짐승 같은 것. 그러고도 교육가. 흥, 교장. 아이구 분해라.”
 
147
이 모양으로 온 동네가 다 들어라 하고 외치는구려.
 
148
“여보, 이거 미쳤소? 글쎄 그게 웬 소리요? 뉘게 무슨 말을 듣고 그런 종작없는 소리를 한단 말요? 원 이거 하인들이 부끄럽고 동네가 부끄럽지 않소? 원 말이 되는 말을 가지고 그래야지.”
 
149
하고 나는 하도 기가 막혀서 방바닥에 펄썩 주저앉아 버렸소.
 
150
“좀 뵈어 주까요? 그럼 증거를 좀 뵈어 주까요? 자 이거를 좀 보시오!”
 
151
하고 아내는 어떤 일기책 하나를 장 서랍에서 꺼내어서 내 앞에 픽 던지오. 나는 배밀이로 엎어진 일기책을 집어 들고 책장을 넘겨 보았소. 그것은 정임의 일기책이었소.나는 이 일기책을 온통으로 형에게 보내어 드리고 싶소마는 그리할 수가 없소. 왜 그러냐고? 나는 정임의 물건으로 이것밖에 가진 것이 없소. 나는 이것을 유일한 정임의 기념으로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날까지는 몸에 지니고 있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소. 그러다가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나는 이 일기를 불에 살라 버리거나 땅에 묻어 버리고 떠나려오.그러므로 나는 이 일기를 지금 형에게 보내어 드릴 수는 없고 그 중에서 이 편지에 도움이 될 만한 몇 구절을 베껴 보내오.
 
152
“오늘이 새해. 오늘부터 내 나이가 23세. C선생은 몇 살이 되시나. 지난 여름에 뵈올 때에는 벌써 얼굴에 몇 줄기 주름이 있던데. 아! 어머니 돌아가신 지가 벌써 십오 년. 이 외로운 아이는 오직, 오직 C선생님의 사랑의 품에서 살았다. 나는, 나는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나. 이 몸과 마음을 C선생님께 다 바치기로니 그것이 무엇인가…….”
 
153
이것은 일기 첫 장인 정월 초하룻날 것이었소.
 
154
“아 웬일인가. 나는 왜 이렇게 외로울까. 나는 무한한 허공에 뜬 외로운 별 하나. 아아 그 허공의 참이여! 어둠이여! 차고 어두운 허공으로 지 향없이 흘러가는 외로운 작은 별이여.”
 
155
이러한 극히 적막한 서정시 같은 것도 있고 또 어떤 날에는,
 
156
“아아 나는 죽어 버릴까. 사랑하는 그이도 내 손이 아니 닿는 하늘 위의 별.”
 
157
이러한 절망적인 말을 쓴 것도 있소.정임의 일기에는 어디나 그 적막하고, 거의 절망적이라고 할 만한 슬픔이 흐르오. 그가 `그이'라고 하는 것이 누구를 가리킴인가. C선생이라고 한 것은 물론 내 성 최의 머릿자겠지마는 그의 일기에는 C선생이라는 말과 `그이'라는 말이 날마다 씌어 있소.
 
158
“아마 나는 죽을까 보아. 이대도록 괴롭고도 살 수가 있나. 오늘은 교실에 들어가 앉았어도 무엇을 배웠는지 정신이 없이 있다가 동무들에게 놀림을 받았다. 동무들은 어찌 그리 행복된가. 그들에게는 부모가 있어서 그러한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러한가. 나는 그들과 같이 유쾌하게 살지를 못하는가.”
 
159
“나는 암만해도 죽을 것만 같다. 이렇게 괴롭고도 살 수가 있나. 괴로울수록 그이가 그리워. 그이 곁에 있으면 내 눈에도 웃음이 있을 것 같다. 낸들 웃을 줄을 모르나, 기뻐할 줄을 잊었나. 그이 곁에만 있으면 나는 춤이라도 출 것 같다.”
 
160
“아아 그이를 떠나 있는 슬픔이여! 외로움이여! 내 타는 마음을 그이에게 통하지도 못하는 슬픔이여, 외로움이여! 아무리 하여도 그이는 손이 안 닿는 하늘의 별인가. 나는 닿지 못할 손을 허공에 허우적거리다가 죽어 버릴 것인가.”
 
161
이러한 구절도 있고, 또 여름 방학이 가까운 유월에 들어가서는 더욱 열렬하게 되어,
 
162
“나는 이번 방학에 가면 그이에게 내 생각을 다 말해 버릴 테야. 이년! 하고 책망을 받으면 어떤가. 종아리를 맞으면 어떤가. 아무리 무서운 일이 생기더라도 나는 이번 방학에 가면 그이에게 내 가슴 속에 뭉친 불덩어리를 내던질 테야. 그리고 미친 듯이 대들어서 그이의 목에 매달릴 테야. 그렇게나 아니하고야 어떻게 내가 그이에게 내 속을 보여 보나.”
 
163
“아아 사랑하지 못할 이를 사랑하는 내 아픔이여! 차라리 나를 죽일까.”
 
164
이러한 곳도 있고,
 
165
“나는 오늘 C선생께 내 속을 말하는 편지를 썼다가 불에 살라 버렸다. 이렇기를 모두 몇십 번이나 하였던고?”
 
166
“C선생은 내 아버지가 아니냐. 아아 나는 왜 그이를 아버지라고 못 부르는가. 왜 C선생을 내가 그이라고 부르는가. 내가 죄다! 죄다! 다시는 C선생을 그이라고 아니 부르고 아빠라고 부를란다. 하나님이시여, 딸아기 가아빠를 그리워하는 것도 죄가 되오리까. 죄가 된다고 하여도 무가내하입니다.”
 
167
이런 말이 있소. 이런 말을 보면 C선생이란 것이나 그이란 것이나 아빠란 것이나가 다 나를 가리킨 듯도 하였소. 내가 이것을 발견할 때에 어떻게나 놀랐겠소.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임은 분명히 내게 대하여 일종의 그리움을 느끼는 것이오. 내 아내가 정임이가 열여섯 살 적에
 
168
“흥 어린애!”
 
169
하던 것이 생각나오. 역시 아내가 나보다 정임의 속을 잘 알았던 것이오. 그러면 정임이가 나에게 대하여 한 이성으로의 사랑을 느끼는가 하고 나는 한참이나 숨을 못 쉬도록 놀랐소. 그러나 그 다음 일기를 볼 때에 놀란 것에 비기면 이런 것은 다 우스운 일이오.
 
170
“내일은 서울로 간다. 그 어른의 곁으로 간다. 한 달 동안 그 어른의 곁에 나는 있는다. 한 달 동안에 설마 그 어른의 손끝 한 번이야 못 스쳐 보랴. 비록 그의 품에 안겨 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인제는 나는 어린애가 아니니깐) 그의 옷자락에야 한두 번 못 스쳐 보랴. 나는 그 때에 있을 기쁨을 생각하면 몸이 떨린다.
 
171
내 아빠. 이 외로운 딸은 아빠의 곁을 향하고 갑니다. 저의 손을 잡아 주세요. 예전 북경서 저를 데리고 오실 때 모양으로 차에 저를 안아 올려 주셔요. 머리를 쓸어 주시고 뺨을 만져 주세요. 지금은 왜 못 하셔요? 왜 못 하실 이유가 있습니까?”
 
172
인제는 분명히 정임이가 `그이'라고 한 것이 내인 줄을 알았소.
 
173
정임이는 방학에 내 집에 온 첫날 일을 기록하되,
 
174
“아아 내가 무엇 하러 서울을 왔던고? 누구를 보러 왔던고? 순임 어머니와 순임은 어찌 그렇게도 냉랭한고, C선생께서도 어찌 그리도 본체만체하시는고.
 
175
아아, 이 얼음가루가 날리는 곳을 나는 무엇 하러 왔던고.
 
176
나는 미아리 어머니 무덤에 가서 두 시간이나 울고 왔다. 울면 쓸데 있나. 어머니는 벌써 다 썩어 없어지신 것을. 아아, 나는 어디 가서 울꼬? 울려고 해도 울 곳도 없구나.”
 
177
이러한 곳이 있고, 또 어떤 날에는,
 
178
“학교에를 가니 방학이 되어서 동무도 선생도 다 없다. 미친 사람 모양으로 교실로 잔디판으로 나무 그늘로 기웃거리다가 혹시나 그이를 만날까 하고 그이가 다님직한 길로 해가 지도록 쏘다녔다.
 
179
집에 돌아오니 그이가 계시지마는 한 집에 계실수록 동경서 생각할 때보다 천 리 만 리나 더 떨어진 것 같다. 나는 동경으로 도로 갈까봐.”
 
180
이러한 곳도 있고,
 
181
“C선생님이 가족을 데리시고 원산으로 가신다고 나도 같이 가자고. 원산이나 가면 C선생님께 조용히 말씀할 기회나 얻을까. 몸이 불편하다. 병이 나려나.”
 
182
이 밖에도 정임은 그 일기에 감상적이요, 열성적인 슬픔을 많이 적는 동안에 이러한 기록이 있소.
 
183
“내일은 원산을 떠난다. 아아 그리도 외롭던 원산이여! 슬프던 원산이여! 그러나 나는 원산을 축복한다. 원산은 나에게 그이와 함께 하는 하룻밤을 주었다. 캄캄하게 어두운 밤, 바람에 구름은 뭉게뭉게 하늘과 바다 가 모두 열정으로 끓는 밤에 나는 그이와 단둘이 있는 하룻밤을 가졌다. 비록 그것이 한 시간도 못 되는 아마 반 시간도 못 되는 짧은 동안이었으나 그 동안만은 그이는 완전히 내 것이었다. 아아 일생에 잊히지 못할 그 시간. 내가 세상에 난 것이 그 한 시간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184
나는 알았다. 겉으로는 냉정한 듯한 그이의 마음에는 나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시는 열정이 있음을.
 
185
나는 인제 죽어도 좋지 아니한가.”
 
186
이러한 소리가 적혀 있소.
 
187
“영, 도무지 글을 함부로 쓰는 계집애!”
 
188
하고 나는 좀 불쾌하여서 일기책을 주먹으로 탁 쳤소.
 
189
그러나 다음 순간에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림을 금할 수 없었소. 왜?
 
190
나는 기억하오. 정임의 말과 같이 우리가 원산을 떠나려던 전날, 저녁을 먹고 나서 나는 정임, 순임, 두 애를 데리고 우리가 있는 숙소에서 꽤 먼 데 있는 두 아이 선생 집에 작별을 갔었소.
 
191
선생 집에 가서 이야기도 하고 수박도 먹고 놀다가, 순임이년은 선생 집에 놀러 왔던 제 동무하고 시내로 놀러 나간다고 가 버리고, (뒤에 아니까 순임이년은 그 동무의 오라비와 함께 활동사진 구경을 갔더라오.) 암만 기다려도 돌아오지를 아니하기로 할 수 없이 정임이만 데리고 우리 숙소로 돌아왔소.
 
192
이 날은 정임의 일기에 있는 모양으로 동남풍이 많이 불고 하늘은 검은 구름으로 덮이고 물결은 아우성을 치는 밤이었소. 이러한 밤길을 바닷가 쪽으로 걸어서, 또 송림 사이로 걸어서 아마 반 시간이나 넘어 걸어서 숙소로 온 것이오. 이것을 정임이가 그 일기에 그렇게 유난하게 써 놓은 것이오.
 
193
그야 캄캄한 모래판, 나무판 길도 없는 데로 오는 동안에(거기는 모래가 쌓여서 높아진 데, 패어서 움쑥 깊어진 데, 잔솔포기, 풀포기 같은 것도 있는 곳이 아니오? 갈마 앞에 말이오.) 몸도 서로 스칠 때도 있고 정임이가 쓰러지려는 것을 내가 어깨를 붙들거나 허리를 뒤로 안아 일으킨 때도 있었소. 제가 손을 내밀어 내 팔에 매달린 때도 있었소. 그러나 그저 그뿐이오.
 
194
둘이서 한 말이라고는,
 
195
“동무나 있느냐?”
 
196
“별로 없어요. 퍽 외로워요.”
 
197
“몸조심해라.”
 
198
“제가 편지 드리거든 답장 주세요.”
 
199
이런 문답과,
 
200
“졸업하고라도 더 공부가 하고 싶거든 내게 말해라, 학비는 염려 말고.”
 
201
“일본 있기가 싫어요.”
 
202
이런 말이 있었을 뿐이오.
 
203
그런 것을 정임은 이 날 밤의 일을 무슨 큰 사건이나 되는 듯이 일기에 적어 놓은 것이오. 철없는 계집애라고 생각하였소.
 
204
그러나 제가 얼마나 외롭길래, 또 세계 유일한 친구인 내 곁에 있는 것이 얼마나 간절한 소원이길래, 이 반 시간 남짓한 단둘이의 산보를 그처럼 감격하게 생각하나 하면 눈물을 아니 흘리고 어찌하겠소. 사실상 정임이가 여름내내 집에 와 있어야 나하고 단둘이 있어 본 순간은 실로 이 날 밤 한 번밖에 없었던 것이오.
 
205
나는 일기를 읽어 여기까지 와서는 내 아내가 성낸 이유를 알았소. 또 당연하다고도 생각하였소.
 
206
나는 이 구절에 대하여 아내에게 변명을 하려 하였더니 아내는 밖에 나가 버리고 없기로 일기의 그 다음을 더 읽어 보았소.
 
207
“잠이 아니 온다. 새로 세 시를 치는 소리가 들리는데 잠이 아니 온다. 아니 그리운 이의 생각. 원산 해안의 그 날 밤의 추억! 내 생명에서 그 순간을 떼어 버리면 남는 것이 무엇인가. 없다! 아아, 가엾은 내 생명이여!”
 
208
아마 이것이 정임이가 불면증이 생기는 시초가 아닌가 하오.
 
209
이로부터 정임은 자기의 내게 대한 감정을 여러 가지로 해석해 보려는 말이 많이 나오오. 일례를 들면,
 
210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사랑인가. 사랑이란 것이 이런 것인가. 내가, 이렇게 어린 딸 같은 계집애가, 설마 아버지 같은 그 어른을 사랑함이야 될까. 이것이 사모한다는 것인가. 딸이 아버지를 사모하듯이 사모한다는 것인가. 사모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211
이러한 논단도 있고,
 
212
“나는 사랑이라는 것을 경험한 일이 없다. 사랑이라는 것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다만 그 어른을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사모하고 있으면 그만이다. 그 어른이 내 마음을 알아 주시든지 말든지, 나만 혼자 내 가슴 속에 그 어른을 두고 밤낮에 생각하면 그만이 아닌가. 그러나 보고 싶은 것은 어찌하나. 그이의 옷자락이라도 손끝이라도 스치고 싶은 것은 어찌하나.
 
213
나는 이러다가 말라 죽는 것이 아닐까. 오늘은 체중이 줄었다고 학교에서 걱정을 하였다. 내 기름은 그이를 사모하는 불로 타 버리고 만다. 기름 다한 등잔불 모양으로 내 생명은 진해 버리고 마는 것이 아닐까. 이 간절한 생각을 누구에게 말해 보지도 못하고 영원의 어둠 속으로 스러져 버리는 것이나 아닐까.
 
214
그래도 좋다! 그것이 좋다! 타고 타다가 진해 버려라!”
 
215
이러한 말도 있소.
 
216
각혈하기 바로 며칠 전에 정임은 이러한 말을 적어 놓았소.
 
217
“내 사랑하는 이시여! 나는 당신 곁으로 다가가고 싶습니다. 다가가서 당신의 품에 안기는 서슬에 죽어 버리고 싶습니다. 그러면 저도 당신 품에서 죽는 것이 아니야요? 남들이 세상이 무엇이라고 하기로 그 때에는 벌써 늦지 아니하였어요? 내 시체를 때리고 거기 침을 뱉고 갖은 욕설과 갖은 악형을 다 하라고 하시오. 그것이 무엇이야요? 나는 당신의 몸에 안겨서 죽지 않았어요?
 
218
나의 사랑하는 이! 나는 더 참을 수 없습니다. 나는 당신 계신 곳으로 갈 테야요. 내가 가면 이년! 하고 발길로 차시겠습니까. 그래도 좋습니다. 나는 당신의 발길을 안고 죽어 버리렵니다. 나는 가요! 나는 가요!
 
219
내 몸은 더할 수 없이 약해졌습니다. 내 기운은 줄어듭니다. 이러다가는 나는 당신 계신 곳에 갈 기운도 없이 죽어 버릴 것 같습니다. 아아 얼마나 애처로운 일이야요. 얼마나 기막히는 일이야요?
 
220
내가 인제 큰 병이 들어서 죽게 된다면 당신은 와 주시겠습니까. 오셔서 오, 가엾어라, 내 딸 정임아 하고 나를 안아 주시겠습니까. 그렇다 할진댄 오, 하나님이시여, 내게다 죽을 병을 주소서. 내가 사랑하는 그 어른을 뵈옵고 죽을 큰 병을 주소서!”
 
221
이런 소리를 썼소. 마치 제가 무서운 병이 생길 것을 미리 짐작이나 한 것 같아서 나는 몸에 소름이 끼쳤소.
 
222
이렇게 나는 정임의 일기를 보다가 문 밖에서 내 아내의 음성이 들리는 것을 보고 이 일기를 얼른 감추어 버렸소.
 
223
이 일기를 내놓으라고 내 아내는 여러 번 야단을 하였지마는 나는 결코 이것을 내놓지 아니하였소. 첫째로 아내가 이 일기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선전의 재료로 삼을 염려가 있고, 둘째로는 정임의 일생의(만일 이번에 정임이가 죽는다고 하면) 유일한 유적을 내 아내가 무슨 방법으로든지 욕을 보일까 봐 두려워한 것이오. 그렇지 않아도,
 
224
“그년의 그 더러운 일기책 어디 갔니? 뒷간에 버리기도 되려 미안한 그 일기책 어디 갔어?”
 
225
하고 울고 야단을 하였소.
 
226
나는 이 일기책을 다른 데 갔다 맡길 수도 없고, 어디 한 곳에 두었다가는 반드시 발각이 나겠고 그래서 오늘 여기, 내일은 저기 이 모양으로 옮겨 감추었소. 하루는 내가 그 일기책을 책장 꼭대기, 이를테면 지붕에 감출 때에 순임이한테 들켰소. 순임도 물론 내가 하는 일이 무슨 일인지를 알고 있소. 순임이뿐이오? 온 집안 사람이 다, 내 아내는 정임의 일기를 찾으려고 죽을지 살지를 모르고, 나는 그것을 감추느라고 애쓰는 것을 알고 있소. 내가 아침에 집만 뜨면 내 아내는 어멈, 아이 보는 계집애 할 것 없이 총동원을 해서 이 일기를 찾느라고 집을 발끈 뒤집는다는 말을 들었소. 그러니까 순임이가 모를 리가 있소.
 
227
순임은 내가 정임의 일기책을 감추다가 들켜서 머쓱하는 것을 보고는 못 본 체하고 획 나가더니 일 분도 못 하여 다시 들어와서,
 
228
“아버지 그것을 왜 태워 버리지 않으세요? 어저께도 어머니 눈에 들 뻔한 것을 내가 얼른 집어 감추었답니다. 왜, 거기 두면 못 찾나요? 아버지두. 번번이 내가 없다고 어머니를 속이고 감추고 하니깐 그렇지.”
 
229
하고 마치 불쌍한 범죄자를 타이르듯 한 태도로 말을 하는구려. 내 속이 어떠하였겠소?
 
230
나는 교의에 펄썩 주저앉아 테이블에 두 팔을 세우고 두 손에 내 얼굴을 파묻었소. 이윽히 눈을 감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순임은 내 책장에서 양장한 허름한 책 하나를 꺼내어서 그 알맹이를 뜯고, 빈 껍데기 속에 내가 애써 감추던 정임의 일기를 넣어서 요리조리 검사해 보고 보통 책들 틈에 끼우고 있소. 그것을 꽂아 놓고는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서 그것이 눈에 뜨이나 아니 뜨이나를 검사하오.
 
231
나는 눈물이 흐르고 느껴 울어짐을 금할 수가 없었소.
 
232
“아버지 인제 염려 마세요.”
 
233
하고 순임은 찡그린 내 낯을 바라보오.
 
234
“순임아.”
 
235
하고 나는 평생 처음 정답게 불렀소.
 
236
“네에?”
 
237
하고 순임도 아비의 이 비참한 꼴을 보고는 고개를 숙여 버리오.
 
238
“너 그 일기 보았니? 정임이 일기 말이다. 읽어 보았니?”
 
239
하고 나는 그 대답을 무서워하면서 물었소.
 
240
“그럼요. 어머니가 오는 사람마다 불러 놓고는 낭독을 한걸요. 김 목사도 보고 여러 사람이 보았답니다. 암만 보이지 말라니 들으시나요? 사람만 오면 어머니는 신이 나셔서 그것을 내어 놓고 읽으신답니다. 요새는 그것이 없어서 못 하시지요. 그걸 못 하시니깐 더 화만 내시지 않아요? 그러니까 아버지 태워 버리셔요. 그건 무엇 하러 두세요?”
 
241
하는 순임의 어조는 내게 대해서 적더라도 적의가 없는 것만은 밝히 보이오.
 
242
“그래 너도 읽었어?”
 
243
하고 나는 다른 문제보다도 순임이가 이 일기를 읽었는지가 걱정되었소.
 
244
“그건 물으시면 무얼 합니까.”
 
245
하고 순임은 내 모자를 솔로 떨어 주오. 그 뜻은 물론 다 읽었단 말이오.
 
246
“너도 네 어머니와 같이 생각하고 있니? 너도 일기 문구를 그렇게 오해하고 있니?”
 
247
하고 나는 마침내 순임이도 그 일기를 본 것으로 가정하고 문제의 요점을 들었소.
 
248
“몰라요. 어서 학교에 가셔요, 아버지. 어머니 또 오시면 어떡해요?”
 
249
하고 순임은 제 손으로 먼지를 떤 모자를 내 앞에 놓고는 밖으로 나가 버리오. 그 태도가 마치 아비를 불쌍히는 여기지마는 사람으로도 안 보는 태도였소.
 
250
그러면 벌써 이 일기 속에 씌어 있는 말이 내 아내의 해석을 통하여 서울 안에 누구누구 하는 사람들 중에 퍼진 모양이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동경 다녀와서도 학교에도 다니고 교회에도 다닌 것을 생각하면 전신에서 식은땀이 흐르오.
 
251
그러나저러나 이 일기책은 대관절 어떤 경로를 밟아서 내 아내의 손에 들어왔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도리가 없었소. 다만 동경 정임이가 있던 기숙사에 한 방에 있다던 키 큰 여학생이 마음에 짚일 뿐이오.
 
252
생각해 보면 그 여학생이 나를 도무지 대수롭게 알지 아니할 뿐더러 적의를 가진 눈으로 힐끗힐끗 보던 것이 생각되고, 또 정임의 병실에 한 번 찾아왔을 적에는 나를 보고는 인사도 잘 하지 않던 것을 기억하오. 그렇다면 이 여자가 정임과 서로 좋지 아니하여서 그 일기책을 훔쳐서 내 아내에게로 보낸 것이나 아닌가 하고 생각했소. 그리고 정임의 병명도 내 아내가 분노할 병명으로 지은 것이 아닌가 하였소. 나는 언제 한 번 순임을 보고 물어 보려 하였으나 도무지 말이 나오지를 아니하여 못 물어 보았소.
 
253
그러나 그까짓 것은 다 둘째나 셋째 가는 지엽 문제요, 내 일을 어찌하면 좋은가 하는 것이 나를 내려누르는 큰 문제가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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