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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정(有情) ◈
◇ 유정 (6) ◇
카탈로그   목차 (총 : 7권)     이전 6권 다음
1933
이광수(李光洙)
1
유정(有情) - 6
 
 
2
나는 이 편지를 받고 울었다. 이것이 일 편의 소설이라 하더라도 슬픈 일이어든, 하물며 내가 가장 믿고 사랑하는 친구의 일임에야.
 
3
이 편지를 받고 나는 곧 최석 군의 집을 찾았다. 주인을 잃은 이 집에서는아이들이 마당에서 떠들고 있었다.
 
4
“삼청동 아자씨 오셨수. 어머니, 삼청동 아자씨.”
 
5
하고 최석 군의 작은딸이 나를 보고 뛰어들어갔다.
 
6
최석의 부인이 나와 나를 맞았다.
 
7
부인은 머리도 빗지 아니하고, 얼굴에는 조금도 화장을 아니하고, 매무시도 흘러내릴 지경으로 정돈되지 못하였다. 일 주일이나 못 만난 동안에 부인의 모양은 더욱 초췌하였다.
 
8
“노석헌테서 무슨 기별이나 있습니까.”
 
9
하고 나는 무슨 말로 말을 시작할지 몰라서 이런 말을 하였다.
 
10
“아니오. 왜 그이가 집에 편지하나요?”
 
11
하고 부인은 성난 빛을 보이며,
 
12
“집을 떠난 지가 근 사십 일이 되건만 엽서 한 장 있나요. 집안 식구가 다 죽기로 눈이나 깜짝할 인가요. 그저 정임이헌테만 미쳐서 죽을지 살지를 모르지요.”
 
13
하고 울먹울먹한다.
 
14
“잘못 아십니다. 부인께서 노석의 마음을 잘못 아십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15
하고 나는 확신 있는 듯이 말을 시작하였다.
 
16
“노석의 생각을 부인께서 오해하신 줄은 벌써부터 알았지마는 오늘 노석의 편지를 받아보고 더욱 분명히 알았습니다.”
 
17
하고 나는 부인의 표정의 변화를 엿보았다.
 
18
“편지가 왔어요?”
 
19
하고 부인은 놀라면서,
 
20
“지금 어디 있어요? 일본 있지요?”
 
21
하고 질투의 불길을 눈으로 토하였다.
 
22
“일본이 아닙니다. 노석은 지금 아라사에 있습니다.”
 
23
“아라사요?”
 
24
하고 부인은 놀라는 빛을 보이더니,
 
25
“그럼 정임이를 데리고 아주 아라사로 가케오치를 하였군요.”
 
26
하고 히스테리컬한 웃음을 보이고는 몸을 한 번 떨었다.
 
27
부인은 남편과 정임의 관계를 말할 때마다 이렇게 경련적인 웃음을 웃고 몸을 떠는 것이 버릇이었다.
 
28
“아닙니다. 노석은 혼자 가 있습니다. 그렇게 오해를 마세요.”
 
29
하고 나는 보에 싼 최석의 편지를 내어서 부인의 앞으로 밀어 놓으며,
 
30
“이것을 보시면 다 아실 줄 압니다. 어쨌으나 노석은 결코 정임이를 데리고 간 것이 아니요, 도리어 정임이를 멀리 떠나서 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중대 문제가 있습니다. 노석은 이 편지를 보면 죽을 결심을 한 모양입니다.”
 
31
하고 부인의 주의를 질투로부터 그 남편에게 대한 동정에 끌어 보려 하였다.
 
32
“흥. 왜요? 시체 정사를 하나요? 좋겠습니다. 머리가 허연 것이 딸자식 같은 계집애허구 정사를 한다면 그 꼴 좋겠습니다. 죽으라지요. 죽으래요. 죽는 것이 낫지요. 그리구 살아서 무엇 해요?”
 
33
내 뜻은 틀려 버렸다. 부인의 표정과 말에서는 더욱더욱 독한 질투의 안개와 싸늘한 얼음가루가 날았다.
 
34
나는 부인의 이 태도에 반감을 느꼈다. 아무리 질투의 감정이 강하다 하기로, 사람의 생명이 제 남편의 생명이 위태함에도 불구하고 오직 제 질투의 감정에만 충실하려 하는 그 태도가 불쾌하였다. 그래서 나는,
 
35
“나는 그만큼 말씀해 드렸으니 더 할 말씀은 없습니다. 아무려나 좀더 냉정하게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이것을 읽어 보세요.”
 
36
하고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와 버리고 말았다.
 
37
도무지 불쾌하기 그지없는 날이다. 최석의 태도까지도 불쾌하다. 달아나긴 왜 달아나? 죽기는 왜 죽어? 못난 것! 기운 없는 것! 하고 나는 최석이가 곁에 섰기나 한 것처럼 눈을 흘기고 중얼거렸다.
 
38
최석의 말대로 최석의 부인은 악한 사람이 아니요, 그저 보통인 여성일는지 모른다. 그렇다 하면 여자의 마음이란 너무도 질투의 종이 아닐까. 설사 남편 되는 최석의 사랑이 아내로부터 정임에게로 옮아 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질투로 회복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미 사랑이 떠난 남편을 네 마음대로 가거라 하고 자발적으로 내어버릴 것이지마는 그것을 못 할 사정이 있다고 하면 모르는 체하고 내버려 둘 것이 아닌가. 그래도 이것은 우리네 남자의 이론이요, 여자로는 이런 경우에 질투라는 반응밖에 없도록 생긴 것일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39
시계가 아홉시를 친다.
 
40
남대문 밖 정거장을 떠나는 열차의 기적 소리가 들린다.
 
41
나는 만주를 생각하고, 시베리아를 생각하고 최석을 생각하였다. 마음으로는 정임을 사랑하면서 그 사랑을 발표할 수 없어서 시베리아의 눈 덮인 삼림 속으로 방황하는 최석의 모양이 최석의 꿈 이야기에 있는 대로 눈앞에 선하게 떠나온다.
 
42
`사랑은 목숨을 빼앗는다.'
 
43
하고 나는 사랑일래 일어나는 인생의 비극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최석의 경우는 보통 있는 공식과는 달라서 사랑을 죽이기 위해서 제 목숨을 죽이는 것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44
`사랑은 목숨을 빼앗는다.'
 
45
는 데에는 다름이 없다.
 
46
나는 불쾌도 하고 몸도 으스스하여 얼른 자리에 누웠다. 며느리가 들어온 뒤부터 사랑 생활을 하는 지가 벌써 오 년이나 되었다. 우리 부처란 인제는 한 역사적 존재요, 윤리적 관계에 불과하였다. 오래 사귄 친구와 같은 익숙함이 있고, 집에 없지 못할 사람이라는 필요감도 있지마는 젊은 부처가 가지는 듯한 그런 정은 벌써 없는 지 오래였다. 아내도 나를 대하면 본체만체, 나도 아내를 대하면 본체만체, 무슨 필요가 있어서 말을 붙이더라도 아무쪼록 듣기 싫기를 원하는 듯이 톡톡 내던졌다. 아내도 근래에 와서는 옷도 아무렇게나, 머리도 아무렇게나, 어디 출입할 때밖에는 도무지 화장을 아니 하였다.
 
47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 부처의 새가 좋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서로 소중히 여기는 마음도 있었다. 아내가 안에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든든하고 또 아내의 말에 의하건대 내가 사랑에 있거니 하면 마음이 든든하다고 한다.
 
48
우리 부처의 관계는 이러한 관계다.
 
49
나는 한 방에서 혼자 잠을 자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누가 곁에 있으면 잠이 잘 들지 아니하였다. 혹시 어린것들이 매를 얻어맞고 사랑으로 피난을 와서 울다가 내 자리에서 잠이 들면 귀엽기는 귀여워도 잠자리는 편안치 아니하였다. 나는 책을 보고 글을 쓰고 공상을 하고 있으면 족하였다. 내게는 아무 애욕적 요구도 없었다. 이것은 내 정력이 쇠모한 까닭인지 모른다.
 
50
그러나 최석의 편지를 본 그 날 밤에는 도무지 잠이 잘 들지 아니하였다. 최석의 편지가 최석의 고민이 내 졸던 의식에 무슨 자극을 준 듯하였다. 적막한 듯하였다. 허전한 듯하였다. 무엇인지 모르나 그리운 것이 있는 것 같았다.
 
51
“어, 이거 안되었군.”
 
52
하고 나는 벌떡 일어나 담배를 피워 물었다.
 
53
“나으리 주무셔 곕시오?”
 
54
하고 아범이 전보를 가지고 왔다.
 
55
“명조 경성 착 남정임”
 
56
이라는 것이었다.
 
57
“정임이가 와?”
 
58
하고 나는 전보를 다시 읽었다.
 
59
최석의 그 편지를 보면 최석 부인에게는 어떤 반응이 일어나고 정임에게는 어떤 반응이 일어날까, 하고 생각하면 자못 마음이 편하지 못하였다.
 
60
이튿날 아침에 나는 부산서 오는 차를 맞으려고 정거장에를 나갔다.
 
61
차는 제 시간에 들어왔다. 남정임은 슈트케이스 하나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검은 외투에 검은 모자를 쓴 그의 얼굴은 더욱 해쓱해 보였다.
 
62
“선생님!”
 
63
하고 정임은 나를 보고 손에 들었던 짐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내 앞으로 왔다.
 
64
“풍랑이나 없었나?”
 
65
하고 나는 내 손에 잡힌 정임의 손이 싸늘한 것을 근심하였다.
 
66
“네. 아주 잔잔했습니다. 저같이 약한 사람도 밖에 나와서 바다 경치를 구경하였습니다.”
 
67
하고 정임은 사교적인 웃음을 웃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눈물이 있는 것 같았다.
 
68
“최 선생님 어디 계신지 아세요?”
 
69
하고 정임은 나를 따라 서면서 물었다.
 
70
“나도 지금까지 몰랐는데 어제 편지를 하나 받았지.”
 
71
하는 것이 내 대답이었다.
 
72
“네? 편지 받으셨어요? 어디 계십니까?”
 
73
하고 정임은 걸음을 멈추었다.
 
74
“나도 몰라.”
 
75
하고 나도 정임과 같이 걸음을 멈추고,
 
76
“그 편지를 쓴 곳도 알고 부친 곳도 알지마는 지금 어디로 갔는지 그것은 모르지. 찾을 생각도 말고 편지할 생각도 말라고 했으니까.”
 
77
하고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78
“어디야요? 그 편지 부치신 곳이 어디야요? 저 이 차로 따라갈 테야요.”
 
79
하고 정임은 조급하였다.
 
80
“갈 때에는 가더라도 이 차에야 갈 수가 있나.”
 
81
하고 나는 겨우 정임을 끌고 들어왔다.
 
82
정임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대강 말을 하고, 이튿날 새벽 차로 떠난다는 것을,
 
83
“가만 있어. 어떻게 계획을 세워 가지고 해야지.”
 
84
하여 가까스로 붙들어 놓았다.
 
85
아침을 먹고 나서 최석 집에를 가 보려고 할 즈음에 순임이가 와서 마루 끝에 선 채로,
 
86
“선생님, 어머니가 잠깐만 오십시사구요.”
 
87
하였다.
 
88
“정임이가 왔다.”
 
89
하고 내가 그러니까,
 
90
“정임이가요?”
 
91
하고 순임은 깜짝 놀라면서,
 
92
“정임이는 아버지 계신 데를 알아요?”
 
93
하고 물었다.
 
94
“정임이도 모른단다. 너 아버지는 시베리아에 계시고 정임이는 동경 있다가 왔는데 알 리가 있니?”
 
95
하고 나는 순임의 생각을 깨뜨리려 하였다. 순임은,
 
96
“정임이가 어디 있어요?”
 
97
하고 방들 있는 곳을 둘러보며,
 
98
“언제 왔어요?”
 
99
하고는 그제야 정임에게 대한 반가운 정이 발하는 듯이,
 
100
“정임아!”
 
101
하고 불러 본다.
 
102
“언니요? 여기 있수.”
 
103
하고 정임이가 머릿방 문을 열고 옷을 갈아입던 채로 고개를 내어민다.
 
104
순임은 구두를 차내버리듯이 벗어 놓고 정임의 방으로 뛰어들어간다.
 
105
나는 최석의 집에를 가느라고 외투를 입고 모자를 쓰고 정임의 방문을 열어 보았다. 두 처녀는 울고 있었다.
 
106
“정임이도 가지. 아주머니 뵈러 안 가?”
 
107
하고 나는 정임을 재촉하였다.
 
108
“선생님 먼저 가 계셔요.”
 
109
하고 순임이가 눈물을 씻고 일어나면서,
 
110
“이따가 제가 정임이허구 갑니다.”
 
111
하고 내게 눈을 끔쩍거려 보였다. 갑자기 정임이가 가면 어머니와 정임이와 사이에 어떠한 파란이 일어나지나 아니할까 하고 순임이가 염려하는 것이었다. 순임도 인제는 노성하여졌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112
“선생님 이 편지가 다 참말일까요?”
 
113
하고 나를 보는 길로 최석 부인이 물었다. 최석 부인은 히스테리를 일으킨 사람 모양으로 머리와 손을 떨었다.
 
114
나는 참말이냐 하는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 분명하지 아니하여서,
 
115
“노석이 거짓말할 사람입니까?”
 
116
하고 대체론으로 대답하였다.
 
117
“앉으십쇼. 앉으시란 말씀도 안 하고.”
 
118
하고 부인은 침착한 모양을 보이려고 빙그레 웃었으나, 그것은 실패였다.
 
119
“그게 참말일까요? 정임이가 아기를 뗀 것이 아니라, 폐가 나빠서 피를 토하고 입원하였다는 것이?”
 
120
하고 부인은 중대하다는 표정을 가지고 묻는다.
 
121
“그럼 그것이 참말이 아니구요. 아직도 그런 의심을 가지고 계십니까. 정임이와 한 방에 있는 학생이 모함한 것이라고 안 그랬어요? 그게 말이 됩니까.”
 
122
하고 언성을 높여서 대답하였다.
 
123
“그럼 왜 정임이가 호텔에서 왜 아버지한테 한 번 안아 달라고 그래요? 그 편지에 쓴 대로 한 번 안아만 보았을까요?”
 
124
이것은 부인의 둘째 물음이었다.
 
125
“나는 그뿐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이 도리어 깨끗하다는 표라고 믿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126
하고 나는 딱하다는 표정을 하였다.
 
127
“글쎄요.”
 
128
하고 부인은 한참이나 생각하고 있다가,
 
129
“정말 애 아버지가 혼자 달아났을까요? 정임이를 데리고 가케오치한 것이 아닐까요? 꼭 그랬을 것만 같은데.”
 
130
하고 부인은 괴로운 표정을 감추려는 듯이 고개를 숙인다.
 
131
나는 남편에게 대한 아내의 의심이 어떻게 깊은가에 아니 놀랄 수가 없어서,
 
132
“허.”
 
133
하고 한 마디 웃고,
 
134
“그렇게 수십 년 동안 부부 생활을 하시고도 그렇게 노석의 인격을 몰라 주십니까. 나는 부인께서 하시는 말씀이 부러 하시는 농담으로밖에 아니 들립니다. 정임이가 지금 서울 있습니다.”
 
135
하고 또 한 번 웃었다. 정말 기막힌 웃음이었다.
 
136
“정임이가 서울 있어요?”
 
137
하고 부인은 펄쩍 뛰면서,
 
138
“어디 있다가 언제 왔습니까? 그게 정말입니까?”
 
139
하고 의아한 빛을 보인다. 꼭 최석이하고 함께 달아났을 정임이가 서울에 있을 리가 없는 것이었다.
 
140
“동경서 오늘 아침에 왔습니다. 지금 우리 집에서 순임이허구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조금 있으면 뵈오러 올 것입니다.”
 
141
하고 나는 정임이가 분명히 서울 있는 것을 일일이 증거를 들어서 증명하였다. 그리고 우스운 것을 속으로 참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는 이 병들고 늙은 아내의 질투와 의심으로 괴로워서 덜덜덜덜 떨고 앉았는 것을 가엾게 생각하였다.
 
142
정임이가 지금 서울에 있는 것이 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임이 판명되매, 부인은 도리어 낙망하는 듯하였다. 그가 제 마음대로 그려 놓고 믿고 하던 모든 철학의 계통이 무너진 것이었다.
 
143
한참이나 흩어진 정신을 못 수습하는 듯이 앉아 있더니 아주 기운 없는 어조로,
 
144
“선생님 애 아버지가 정말 죽을까요? 정말 영영 집에를 안 돌아올까요?”
 
145
하고 묻는다. 그 눈에는 벌써 눈물이 어리었다.
 
146
“글쎄요. 내 생각 같아서는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아니할 것 같습니다. 또 그만치 망신을 했으니, 이제 무슨 낯으로 돌아옵니까. 내라도 다시 집에 돌아올 생각은 아니 내겠습니다.”
 
147
하고 나는 의식적으로 악의를 가지고 부인의 가슴에 칼을 하나 박았다.
 
148
그 칼은 분명히 부인의 가슴에 아프게 박힌 모양이었다.
 
149
“선생님. 어떡하면 좋습니까. 애 아버지가 죽지 않게 해 주세요. 그렇지 않아도 순임이년이 제가 걔 아버지를 달아나게나 한 것처럼 원망을 하는데요. 그러다가 정녕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제일 딴 자식들의 원망을 들을까봐 겁이 납니다. 선생님, 어떻게 애 아버지를 붙들어다 주세요.”
 
150
하고 마침내 참을 수 없이 울었다. 말은 비록 자식들의 원망이 두렵다고 하지마는 질투의 감정이 스러질 때에 그에게는 남편에게 대한 아내의 애정이 막혔던 물과 같이 터져 나온 것이라고 나는 해석하였다.
 
151
“글쎄, 어디 있는 줄 알고 찾습니까. 노석의 성미에 한번 아니 한다고 했으면 다시 편지할 리는 만무하다고 믿습니다.”
 
152
하여 나는 부인의 가슴에 둘째 칼날을 박았다.
 
153
나는 비록 최석의 부인이 청하지 아니하더라도 최석을 찾으러 떠나지 아니하면 아니 될 의무를 진다. 산 최석을 못 찾더라도 최석의 시체라도, 무덤이라도, 죽은 자리라도, 마지막 있던 곳이라도 찾아보지 아니하면 아니 될 의무를 깨닫는다.
 
154
그러나 시국이 변하여 그 때에는 아라사에 가는 것은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었다. 그 때에는 북만의 풍운이 급박하여 만주리를 통과하기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마점산(馬占山) 일파의 군대가 흥안령, 하일라르 등지에 웅거하여 언제 대충돌이 폭발될는지 모르던 때였다. 이 때문에 시베리아에 들어가기는 거의 절망 상태라고 하겠고, 또 관헌도 아라사에 들어가는 여행권을 잘 교부할 것 같지 아니하였다.
 
155
부인은 울고, 나는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하고 있는 동안에 문 밖에는 순임이, 정임이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156
“아이, 정임이냐.”
 
157
하고 부인은 반갑게 허리 굽혀 인사하는 정임의 어깨에 손을 대고,
 
158
“자 앉아라. 그래 인제 병이 좀 나으냐…… 수척했구나. 더 노성해지구 반 년도 못 되었는데.”
 
159
하고 정임에게 대하여 애정을 표하는 것을 보고 나는 의외지마는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나는 정임이가 오면 보기 싫은 한 신을 연출하지 않나 하고 근심하였던 것이다.
 
160
“희 잘 자라요?”
 
161
하고 정임은 한참이나 있다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162
“응, 잘 있단다. 컸나 가 보아라.”
 
163
하고 부인은 더욱 반가운 표정을 보인다.
 
164
“어느 방이야?”
 
165
하고 정임은 선물 보퉁이를 들고 순임과 함께 나가 버린다. 여자인 정임은 희와 순임과 부인과 또 순임의 다른 동생에게 선물 사 오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였다.
 
166
정임과 순임은 한 이삼 분 있다가 돌아왔다. 밖에서 희가 무엇이라고 지절대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 정임이가 사다 준 선물을 받고 좋아하는 모양이다.
 
167
정임은 들고 온 보퉁이에서 여자용 배스로브 하나를 내어서 부인에게주며,
 
168
“맞으실까?”
 
169
하였다.
 
170
“아이 그건 무어라고 사 왔니?”
 
171
하고 부인은 좋아라고 입어 보고, 이리 보고 저리 보고 하면서,
 
172
“난 이런 거 처음 입어 본다.”
 
173
하고 자꾸 끈을 동여맨다.
 
174
“정임이가 난 파자마를 사다 주었어.”
 
175
하고 순임은 따로 쌌던 굵은 줄 있는 융 파자마를 내어서 경매장 사람 모양으로 흔들어 보이며,
 
176
“어머니 그 배스로브 나 주우. 어머닌 늙은이가 그건 입어서 무엇 하우?”
 
177
하고 부인이 입은 배스로브를 벗겨서 제가 입고 두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어기죽어기죽하고 서양 부인네 흉내를 낸다.
 
178
“저런 말괄량이가 너도 정임이처럼 좀 얌전해 보아라.”
 
179
하고 부인은 순임을 향하여 눈을 흘긴다.
 
180
이 모양으로 부인과 정임과의 대면은 가장 원만하게 되었다.
 
181
그러나 부인은 정임에게 최석의 편지를 보이기를 원치 아니하였다. 편지가 왔다는 말조차 입 밖에 내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순임이가 정임에게 대하여 표하는 애정은 여간 깊지 아니하였다. 그 둘은 하루 종일 같이 있었다. 정임은 그 날 저녁에 나를 보고,
 
182
“순임이헌테 최 선생님 편지 사연은 다 들었어요. 순임이가 그 편지를 훔쳐다가 얼른얼른 몇 군데 읽어도 보았습니다. 순임이가 저를 퍽 동정하면서 절더러 최 선생을 따라가 보라고 그래요. 혼자 가기가 어려우면 자기허구 같이 가자고. 가서 최 선생을 데리고 오자고. 어머니가 못 가게 하거든 몰래 둘이 도망해 가자고. 그래서 그러자고 그랬습니다. 안됐지요. 선생님?”
 
183
하고 저희끼리 작정은 다 해 놓고는 슬쩍 내 의향을 물었다.
 
184
“젊은 여자 단둘이서 먼 여행을 어떻게 한단 말이냐? 게다가 지금 북만주 형세가 대단히 위급한 모양인데. 또 정임이는 그 건강 가지고 어디를 가, 이 추운 겨울에?”
 
185
하고 나는 이런 말이 다 쓸데없는 말인 줄 알면서도 어른으로서 한 마디 안 할 수 없어서 하였다. 정임은 더 제 뜻을 주장하지도 아니하였다.
 
186
그 날 저녁에 정임은 순임의 집에서 잤는지 집에 오지를 아니하였다.
 
187
나는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은가, 이 두 여자의 행동을 어찌하면 좋은가 하고 혼자 끙끙 생각하고 있었다.
 
188
이튿날 나는 궁금해서 최석의 집에를 갔더니 부인이,
 
189
“우리 순임이 댁에 갔어요?”
 
190
하고 의외의 질문을 하였다.
 
191
“아니오.”
 
192
하고 나는 놀랐다.
 
193
“그럼, 이것들이 어딜 갔어요? 난 정임이허구 댁에서 잔 줄만 알았는데.”
 
194
하고 부인은 무슨 불길한 것이나 본 듯이 몸을 떤다. 히스테리가 일어난 것이었다.
 
195
나는 입맛을 다시었다. 분명히 이 두 여자가 시베리아를 향하고 떠났구나 하였다.
 
196
그 날은 소식이 없이 지났다. 그 이튿날도 소식이 없이 지났다.
 
197
최석 부인은 딸까지 잃어버리고 미친 듯이 울고 애통하다가 머리를 싸매고 누워 버리고 말았다.
 
198
정임이와 순임이가 없어진 지 사흘 만에 아침 우편에 편지 한 장을 받았다. 그 봉투는 봉천 야마도 호텔 것이었다. 그 속에는 편지 두 장이 들어 있었다. 한 장은,
 
199
선생님! 저는 아버지를 위하여, 정임을 위하여 정임과 같이 집을 떠났습니다.
 
200
어머님께서 슬퍼하실 줄은 알지마는 저희들이 다행히 아버지를 찾아서 모시고 오면 어머니께서도 기뻐하실 것을 믿습니다. 저희들이 가지 아니하고는 아버지는 살아서 돌아오실 것 같지 아니합니다. 아버지를 이처럼 불행하시게 한 죄는 절반은 어머니께 있고, 절반은 제게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고 이가 갈립니다. 저는 아무리 해서라도 아버지를 찾아내어야겠습니다.
 
201
저는 정임을 무한히 동정합니다. 저는 어려서 정임을 미워하고 아버지를 미워하였지마는 지금은 아버지의 마음과 정임의 마음을 알아볼 만치 자랐습니다.
 
202
선생님! 저희들은 둘이 손을 잡고 어디를 가서든지 아버지를 찾아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낮에는 구름이 되고 밤에는 별이 되어서 반드시 저희들의 앞길을 인도할 줄 믿습니다.
 
203
선생님, 저희 어린것들의 뜻을 불쌍히 여기셔서 돈 천 원만 전보로 보내 주시기를 바랍니다.
 
204
만일 만주리로 가는 길이 끊어지면 몽고로 자동차로라도 가려고 합니다. 아버지 편지에 적힌 F역의 R씨를 찾고, 그리고 바이칼 호반의 바이칼리스코에를 찾아, 이 모양으로 찾으면 반드시 아버지를 찾아 내고야 말 것을 믿습니다.
 
205
선생님, 돈 천 원만 봉천 야마도 호텔 최순임 이름으로 부쳐 주세요. 그리고 어머니헌테는 아직 말씀 말아 주세요.
 
206
선생님. 이렇게 걱정하시게 해서 미안합니다. 용서하세요.
 
207
순임 상서
 
208
이렇게 써 있다. 또 한 장에는,
 
209
선생님! 저는 마침내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나이다. 어디든지 최 선생님을 뵈옵는 곳에서 이 몸을 묻어 버리려 하나이다. 지금 또 몸에 열이 나는 모양이요, 혈담도 보이오나 최 선생을 뵈올 때까지는 아무리 하여서라도 이 목숨을 부지하려 하오며, 최 선생을 뵈옵고 제가 진 은혜를 감사하는 한 말씀만 사뢰면 고대 죽사와도 여한이 없을까 하나이다.
 
210
순임 언니가 제게 주시는 사랑과 동정은 오직 눈물과 감격밖에 더 표할 말씀이 없나이다. 순임 언니가 저를 보호하여 주니 마음이 든든하여이다…….
 
211
이라고 하였다.
 
212
편지를 보아야 별로 놀랄 것은 없었다. 다만 말괄량이로만 알았던 순임의 속에 어느새에 그러한 감정이 발달하였나 하는 것을 놀랄 뿐이었다.
 
213
그러나 걱정은 이것이다. 순임이나 정임이나 다 내가 감독해야 할 처지에 있거늘 그들이 만리 긴 여행을 떠난다고 하니 감독자인 내 태도를 어떻게 할까 하는 것이다.
 
214
나는 편지를 받는 길로 우선 돈 천 원을 은행에 가서 찾아다 놓았다.
 
215
암만해도 내가 서울에 가만히 앉아서 두 아이에게 돈만 부쳐 주는 것이 인정에 어그러지는 것 같아서 나는 여러 가지로 주선을 하여서 여행의 양해를 얻어 가지고 봉천을 향하여 떠났다.
 
216
내가 봉천에 도착한 것은 밤 열시가 지나서였다. 순임과 정임은 자리옷 바람으로 내 방으로 달려와서 반가워하였다. 그들이 반가워하는 양은 실로 눈물이 흐를 만하였다.
 
217
“아이구 선생님!”
 
218
“아이구 어쩌면!”
 
219
하는 것이 그들의 내게 대한 인사의 전부였다.
 
220
“정임이 어떠오?”
 
221
하고 나는 순임의 편지에 정임이가 열이 있단 말을 생각하였다.
 
222
“무어요. 괜찮습니다.”
 
223
하고 정임은 웃었다.
 
224
전등빛에 보이는 정임의 얼굴은 그야말로 대리석으로 깎은 듯하였다. 여위고 핏기가 없는 것이 더욱 정임의 용모에 엄숙한 맛을 주었다.
 
225
“돈 가져오셨어요?”
 
226
하고 순임이가 어리광 절반으로 묻다가 내가 웃고 대답이 없음을 보고,
 
227
“우리를 붙들러 오셨어요?”
 
228
하고 성내는 양을 보인다.
 
229
“그래 둘이서들 간다니 어떻게 간단 말인가. 시베리아가 어떤 곳에 붙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230
하고 나는 두 사람이 그리 슬퍼하지 아니하는 순간을 보는 것이 다행하여서 농담삼아 물었다.
 
231
“왜 몰라요? 시베리아가 저기 아니야요?”
 
232
하고 순임이가 산해관 쪽을 가리키며,
 
233
“우리도 지리에서 배워서 다 알아요. 어저께 하루 종일 지도를 사다 놓고 연구를 하였답니다. 봉천서 신경, 신경서 하얼빈, 하얼빈에서 만주리, 만주리에서 이르쿠츠크, 보세요, 잘 알지 않습니까. 또 만일 중동 철도가 불통이면 어떻게 가는고 하니 여기서 산해관을 가고, 산해관서 북경을 가지요. 그리고는 북경서 장가구를 가지 않습니까. 장가구서 자동차를 타고 몽고를 통과해서 가거든요. 잘 알지 않습니까.”
 
234
하고 정임의 허리를 안으며,
 
235
“그렇지이?”
 
236
하고 자신 있는 듯이 웃는다.
 
237
“또 몽고로도 못 가게 되어서 구라파를 돌게 되면?”
 
238
하고 나는 교사가 생도에게 묻는 모양으로 물었다.
 
239
“네, 저 인도양으로 해서 지중해로 해서 프랑스로 해서 그렇게 가지요.”
 
240
“허, 잘 아는구나.”
 
241
하고 나는 웃었다.
 
242
“그렇게만 알아요? 또 해삼위로 해서 가는 길도 알아요. 저희를 어린애로 아시네.”
 
243
“잘못했소.”
 
244
“하하.”
 
245
“후후.”
 
246
사실 그들은 벌써 어린애들은 아니었다. 순임도 벌써 그 아버지의 말할 수 없는 사정에 동정할 나이가 되었다. 순임이가 기어다닌 것은 본 나로는 이것도 이상하게 보였다. 나는 벌써 나이 많았구나 하는 생각이 나지 아니할 수 없었다.
 
247
나는 잠 안 드는 하룻밤을 지내면서 옆방에서 정임이가 기침을 짓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내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248
이튿날 나는 두 사람에게 돈 천 원을 주어서 신경 가는 급행차를 태워 주었다. 대륙의 이 건조하고 추운 기후에 정임의 병든 폐가 견디어 날까 하고 마음이 놓이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가라고 권할 수는 있어도 가지 말라고 붙들 수는 없었다. 다만 제 아버지, 제 애인을 죽기 전에 만날 수 있기만 빌 뿐이었다.
 
249
나는 두 아이를 북쪽으로 떠나 보내고 혼자 여관에 들어와서 도무지 정신을 진정하지 못하여 술을 먹고 잊으려 하였다. 그러다가 그 날 밤차로 서울로 돌아왔다.
 
250
이튿날 아침에 나는 최석 부인을 찾아서 순임과 정임이가 시베리아로 갔단 말을 전하였다.
 
251
그 때에 최 부인은 거의 아무 정신이 없는 듯하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고 울고만 있었다.
 
252
얼마 있다가 부인은,
 
253
“그것들이 저희들끼리 가서 괜찮을까요?”
 
254
하는 한 마디를 할 뿐이었다.
【원문】유정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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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수(李光洙) [저자]
 
  조선 일보(朝鮮日報) [출처]
 
  1933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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