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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정(有情) ◈
◇ 유정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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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
이광수(李光洙)
1
유정(有情) - 5
 
 
2
날이 밝자 나는 비가 갠 것을 다행으로 비행장에 달려가서 비행기를 얻어 탔소.
 
3
나는 다시 조선의 하늘을 통과하기가 싫어서 북강에서 비행기에서 내려서 문사에 와서 대련으로 가는 배를 탔소.
 
4
나는 대련에서 내려서 하룻밤을 여관에서 자고는 곧 장춘 가는 급행을 탔소. 물론 아무에게도 엽서 한 장 한 일 없었소. 그것은 인연을 끊은 세상에 대하여 연연한 마음을 가지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 까닭이오.
 
5
차가 옛날에는 우리 조상네가 살고 문화를 짓던 옛 터전인 만주의 벌판을 달릴 때에는 감회도 없지 아니하였소. 그러나 나는 지금 그런 한가한 감상을 쓸 겨를이 없소.
 
6
내가 믿고 가는 곳은 하얼빈에 있는 어떤 친구요. 그는 R라는 사람으로서 경술년에 A씨 등의 망명객을 따라 나갔다가 아라사에서 무관 학교를 졸업하고 아라사 사관으로서 구주 대전에도 출정을 하였다가, 혁명 후에도 이내 적위군에 머물러서 지금까지 소비에트 장교로 있는 사람이오. 지금은 육군 소장이라던가.
 
7
나는 하얼빈에 그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오. 그 사람을 찾아야 아라사에 들어갈 여행권을 얻을 것이요, 여행권을 얻어야 내가 평소에 이상하게도 그리워하던 바이칼 호를 볼 것이오.
 
8
하얼빈에 내린 것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이었소.
 
9
나는 안중근이 이등박문(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을 쏜 곳이 어딘가 하고 벌판과 같이 넓은 플랫폼에 내렸소. 과연 국제 도시라 서양 사람, 중국 사람, 일본 사람이 각기 제 말로 지껄이오. 아아 조선 사람도 있을 것이오마는 다들 양복을 입거나 청복을 입거나 하고 또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말도 잘 하지 아니하여 아무쪼록 조선 사람인 것을 표시하지 아니하는 판이라 그 골격과 표정을 살피기 전에는 어느 것이 조선 사람인지 알 길이 없소. 아마 허름하게 차리고 기운 없이, 비창한 빛을 띠고 사람의 눈을 슬슬 피하는 저 순하게 생긴 사람들이 조선 사람이겠지요. 언제나 한 번 가는 곳마다 동양이든지, 서양이든지,
 
10
`나는 조선 사람이오!'
 
11
하고 뽐내고 다닐 날이 있을까 하면 눈물이 나오. 더구나, 하얼빈과 같은 각색 인종이 모여서 생존 경쟁을 하는 마당에 서서 이런 비감이 간절하오. 아아 이 불쌍한 유랑의 무리 중에 나도 하나를 더 보태는가 하면 눈물을 씻지 아니할 수 없었소.
 
12
나는 역에서 나와서 어떤 아라사 병정 하나를 붙들고 R의 아라사 이름을 불렀소. 그리고 아느냐고 영어로 물었소.
 
13
그 병정은 내 말을 잘못 알아들었는지, 또는 R를 모르는지 무엇이라고 아라사말로 지껄이는 모양이나 나는 물론 그것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소. 그러나 나는 그 병정의 표정에서 내게 호의를 가진 것을 짐작하고 한 번 더 분명히,
 
14
“요십 알렉산드로비치 리가이.”
 
15
라고 불러 보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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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병정은 빙그레 웃고 고개를 흔드오. 이 두 외국 사람의 이상한 교섭에 흥미를 가지고 여러 아라사 병정과 동양 사람들이 십여 인이나 우리 주위에 모여드오.
 
17
그 병정이 나를 바라보고 또 한 번 그 이름을 불러 보라는 모양 같기로 나는 이번에는 R의 아라사 이름에 `제너럴'이라는 말을 붙여 불러 보았소.
 
18
그랬더니 어떤 다른 병정이 뛰어들며,
 
19
“게네라우 리가이!”
 
20
하고 안다는 표정을 하오. `게네라우'라는 것이 아마 아라사말로 장군이란 말인가 하였소.
 
21
“예스. 예스.”
 
22
하고 나는 기쁘게 대답하였소. 그리고는 아라사 병정들끼리 무에라고 지껄이더니, 그 중에 한 병정이 나서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제가 마차 하나를 불러서 나를 태우고 저도 타고 어디로 달려가오.
 
23
그 아라사 병정은 친절히 알지도 못하는 말로 이것저것을 가리키면서 설명을 하더니 내가 못 알아듣는 줄을 생각하고 내 어깨를 툭 치고 웃소. 어린애와 같이 순한 사람들이구나 하고 나는 고맙다는 표로 고개만 끄덕끄덕하였소.
 
24
어디로 어떻게 가는지 서양 시가로 달려가다가 어떤 큰 저택 앞에 이르러서 마차를 그 현관 앞으로 들이몰았소.
 
25
현관에서는 종졸이 나왔소. 내가 명함을 들여보냈더니 부관인 듯한 아라사 장교가 나와서 나를 으리으리한 응접실로 인도하였소. 얼마 있노라니 중년이 넘은 어떤 대장이 나오는데 군복에 칼끈만 늘였소.
 
26
“이게 누구요.”
 
27
하고 그 대장은 달려들어서 나를 껴안았소. 이십오 년 만에 만나는 우리는 서로 알아본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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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나는 그의 부인과 자녀들도 만났소. 그들은 다 아라사 사람이오.
 
29
저녁이 끝난 뒤에 나는 R의 부인과 딸의 음악과 그림 구경과 기타의 관대를 받고 단둘이 이야기할 기회를 얻었소. 경술년 당시 이야기도 나오고, A씨의 이야기도 나오고, R의 신세 타령도 나오고, 내 이십오 년 간의 생활 이야기도 나오고, 소비에트 혁명 이야기도 나오고, 하얼빈 이야기도 나오고, 우리네가 어려서 서로 사귀던 회구담도 나오고 이야기가 그칠 바를 몰랐소.
 
30
“조선은 그립지 않은가.”
 
31
하는 내 말에 쾌활하던 R는 고개를 숙이고 추연한 빛을 보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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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R의 추연한 태도를 아마 고국을 그리워하는 것으로만 여겼소. 그래서 나는 그리 침음하는 것을 보고,
 
33
“얼마나 고국이 그립겠나. 나는 고국을 떠난 지가 일 주일도 안 되건마는 못 견디게 그리운데.”
 
34
하고 동정하는 말을 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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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더니, 이 말 보시오. 그는 침음을 깨뜨리고 고개를 번쩍 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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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나는 고국이 조금도 그립지 아니하이. 내가 지금 생각한 것은 자네 말을 듣고 고국이 그리운가 그리워할 것이 있는가를 생각해 본 것일세. 그랬더니 아무리 생각하여도 나는 고국이 그립다는 생각을 가질 수가 없어. 그야 어려서 자라날 때에 보던 강산이라든지 내 기억에 남은 아는 사람들이라든지, 보고 싶다 하는 생각도 없지 아니하지마는 그것이 고국이 그리운 것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그 밖에는 나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고국이 그리운 것을 찾을 길이 없네. 나도 지금 자네를 보고 또 자네 말을 듣고 오래 잊어버렸던 고국을 좀 그립게, 그립다 하게 생각하려고 해 보았지마는 도무지 나는 고국이 그립다는 생각이 나지 않네.”
 
37
이 말에 나는 깜짝 놀랐소. 몸서리치게 무서웠소. 나는 해외에 오래 표랑하는 사람은 으레 고국을 그리워할 것으로 믿고 있었소. 그런데 이 사람이, 일찍은 고국을 사랑하여 목숨까지도 바치려던 이 사람이 도무지 이처럼 고국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놀라운 정도를 지나서 괘씸하기 그지없었소. 나도 비록 조선을 떠난다고, 영원히 버린다고 나서기는 했지마는 나로는 죽기 전에는 아니 비록 죽더라도 잊어버리지 못할 고국을 잊어버린 R의 심사가 난측하고 원망스러웠소.
 
38
“고국이 그립지가 않아?”
 
39
하고 R에게 묻는 내 어성에는 격분한 빛이 있었소.
 
40
“이상하게 생각하시겠지. 하지만 고국에 무슨 그리울 것이 있단 말인가. 그 빈대 끓는 오막살이가 그립단 말인가. 나무 한 개 없는 산이 그립단 말인가. 물보다도 모래가 많은 다 늙어빠진 개천이 그립단 말인가. 그 무기력하고 가난한, 시기 많고 싸우고 하는 그 백성을 그리워한단 말인가. 그렇지 아니하면 무슨 그리워할 음악이 있단 말인가, 미술이 있단 말인가, 문학이 있단 말인가, 사상이 있단 말인가, 사모할 만한 인물이 있단 말인가! 날더러 고국의 무엇을 그리워하란 말인가. 나는 조국이 없는 사람일세. 내가 소비에트 군인으로 있으니 소비에트가 내 조국이겠지. 그러나 진심으로 내 조국이라는 생각은 나지 아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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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저녁 먹을 때에 약간 붉었던 R의 얼굴은 이상한 흥분으로 더욱 붉어지오.유 정유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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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는 먹던 담배를 화나는 듯이 재떨이에 집어던지며,
 
43
“내가 하얼빈에 온 지가 인제 겨우 삼사 년밖에 안 되지마는 조선 사람 때문에 나는 견딜 수가 없어. 와서 달라는 것도 달라는 것이지마는 조선 사람이 또 어찌하였느니 또 어찌하였느니 하는 불명예한 말을 들을 때에는 나는 금시에 죽어 버리고 싶단 말일세. 내게 가장 불쾌한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고국이라는 기억과 조선 사람의 존잴세. 내가 만일 어느 나라의 독재자가 된다고 하면 나는 첫째로 조선인 입국 금지를 단행하려네. 만일 조선이라는 것을 잊어버릴 약이 있다고 하면 나는 생명과 바꾸어서라도 사 먹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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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R는 약간 흥분된 어조를 늦추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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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스크바에 있다가 처음 원동에 나왔을 적에는 길을 다녀도 혹시 동포가 눈에 뜨이지나 아니하나 하고 찾았네. 그래서 어디서든지 동포를 만나면 반가이 손을 잡았지. 했지만 점점 그들은 오직 귀찮은 존재에 지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단 말일세. 인제는 조선 사람이라고만 하면 만나기가 무섭고 끔찍끔찍하고 진저리가 나는 걸 어떡허나. 자네 명함이 들어온 때에도 조선 사람인가 하고 가슴이 뜨끔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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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R는 웃지도 아니하오. 그의 얼굴에는, 군인다운 기운찬 얼굴에는 증오와 분노의 빛이 넘쳤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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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자네 집에 환영받는 나그네는 아닐세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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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나는 이 견디기 어려운 불쾌하고 무서운 공기를 완화하기 위하여 농담삼아 한 마디를 던지고 웃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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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R의 말이 과격함에 놀랐지마는, 또 생각하면 R가 한 말 가운데는 들을 만한 이유도 없지 아니하오. 그것을 생각할 때에 나는 R를 괘씸하게 생각하기 전에 내가 버린다는 조선을 위하여서 가슴이 아팠소. 그렇지만 이제 나 따위가 가슴을 아파한대야 무슨 소용이 있소. 조선에 남아 계신 형이나 R의 말을 참고삼아 쓰시기 바라오. 어쨌으나 나는 R에게서 목적한 여행권을 얻었소. R에게는 다만,
 
50
`나는 피곤한 몸을 좀 정양하고 싶다. 나는 내가 평소에 즐겨하는 바이칼 호반에서 눈과 얼음의 한겨울을 지내고 싶다.'
 
51
는 것을 여행의 이유로 삼았소.
 
52
R는 나의 초췌한 모양을 짐작하고 내 핑계를 그럴듯하게 아는 모양이었소. 그리고 나더러, `이왕 정양하려거든 카프카 지방으로 가거라. 거기는 기후 풍경도 좋고 또 요양원의 설비도 있다.'는 것을 말하였소. 나도 톨스토이의 소설에서, 기타의 여행기 등속에서 이 지방에 관한 말을 못 들은 것이 아니나 지금 내 처지에는 그런 따뜻하고 경치 좋은 지방을 가릴 여유도 없고 또 그러한 지방보다도 눈과 얼음과 바람의 시베리아의 겨울이 합당한 듯하였소.
 
53
그러나 나는 R의 호의를 굳이 사양할 필요도 없어서 그가 써 주는 대로 소개장을 다 받아 넣었소. 그는 나를 처남 매부 간이라고 소개해 주었소.
 
54
나는 모스크바 가는 다음 급행을 기다리는 사흘 동안 R의 집의 손이 되어서 R부처의 친절한 대우를 받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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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는 나는 R와 조선에 관한 토론을 한 일은 없지마는 R가 이름지어 말을 할 때에는 조선을 잊었노라, 그리워할 것이 없노라, 하지마는 무의식적으로 말을 할 때에는 조선을 못 잊고 또 조선을 여러 점으로 그리워하는 양을 보았소. 나는 그것으로써 만족하게 여겼소.
 
56
나는 금요일 오후 세시 모스크바 가는 급행으로 하얼빈을 떠났소. 역두에는 R와 R의 가족이 나와서 꽃과 과일과 여러 가지 선물로 나를 전송하였소. R와 R의 가족은 나를 정말 형제의 예로 대우하여 차가 떠나려 할 때에 포옹과 키스로 작별하여 주었소.
 
57
이 날은 퍽 따뜻하고 일기가 좋은 날이었소. 하늘에 구름 한 점, 땅에 바람 한 점 없이 마치 늦은 봄날과 같이 따뜻한 날이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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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떠났소. 판다는 둥 안 판다는 둥 말썽 많은 동중로(지금은 북만 철로라고 하오.)의 국제 열차에 몸을 의탁한 것이오.
 
59
송화강(松花江:쑹화 강)의 철교를 건너오. 아아 그리도 낯익은 송화강! 송화강이 왜 낯이 익소. 이 송화강은 불함산(장백산)에 근원을 발하여 광막한 북만주의 사람도 없는 벌판을 혼자 소리도 없이 흘러가는 것이 내 신세와 같소. 이 북만주의 벌판을 만든 자가 송화강이지마는 나는 그만한 힘이 없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오. 이 광막한 북만의 벌판을 내 손으로 개척하여서 조선 사람의 낙원을 만들자 하고 뽐내어 볼까. 그것은 형이 하시오. 내 어린것이 자라거든 그놈에게나 그러한 생각을 넣어 주시오.
 
60
동양의 국제적 괴물인 하얼빈 시가도 까맣게 안개에서 스러져 버리고 말았소. 그러나 그 시가를 싼 까만 기운이 국제적 풍운을 포장한 것이라고 할까요.
 
61
가도가도 벌판. 서리맞은 마른 풀바다. 실개천 하나도 없는 메마른 사막. 어디를 보아도 산 하나 없으니 하늘과 땅이 착 달라붙은 듯한 천지. 구름 한 점 없건만도 그 큰 태양 가지고도 미처 다 비추지 못하여 지평선 호를 그린 지평선 위에는 항상 황혼이 떠도는 듯한 세계. 이 속으로 내가 몸을 담은 열차는 서쪽으로 서쪽으로 해가 가는 걸음을 따라서 달리고 있소. 열차가 달리는 바퀴 소리도 반향할 곳이 없어 힘없는 한숨같이 스러지고 마오.
 
62
기쁨 가진 사람이 지루해서 못 견딜 이 풍경은 나같이 수심 가진 사람에게는 가장 공상의 말을 달리기에 합당한 곳이오.
 
63
이 곳에도 산도 있고 냇물도 있고 삼림도 있고 꽃도 피고 날짐승, 길짐승이 날고 기던 때도 있었겠지요. 그러던 것이 몇만 년 지나는 동안에 산은 낮아지고 골은 높아져서 마침내 이 꼴이 된 것인가 하오. 만일 큰 힘이 있어 이 광야를 파낸다 하면 물 흐르고 고기 놀던 강과, 울고 웃던 생물이 살던 자취가 있을 것이오. 아아 이 모든 기억을 꽉 품고 죽은 듯이 잠잠한 광야에!
 
64
내가 탄 차가 F역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북만주 광야의 석양의 아름다움은 그 극도에 달한 것 같았소. 둥긋한 지평선 위에 거의 걸린 커다란 해! 아마 그 신비하고 장엄함이 내 경험으로는 이 곳에서밖에는 볼 수 없는 것이라고생각하오. 이글이글 이글이글 그러면서도 둥글다는 체모를 변치 아니하는 그 지는 해!
 
65
게다가 먼 지평선으로부터 기어드는 황혼은 인제는 대지를 거의 다 덮어 버려서 마른 풀로 된 지면은 가뭇가뭇한 빛을 띠고 사막의 가는 모래를 머금은 지는 해의 광선을 반사하여서 대기는 짙은 자줏빛을 바탕으로 한 가지각색의 명암을 가진, 오색이 영롱한, 도무지 내가 일찍 경험해 보지 못한 색채의 세계를 이루었소. 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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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속에 수은같이 빛나는, 수없는 작고 큰 호수들의 빛! 그 속으로 날아오는 수없고 이름 모를 새들의 떼도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아니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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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차에서 뛰어내렸소. 거의 떠날 시간이 다 되어서 짐의 일부분은 미처 가지지도 못하고 뛰어내렸소. 반쯤 미친 것이오.
 
68
정거장 앞 조그마한 아라사 사람의 여관에다가 짐을 맡겨 버리고 나는 단장을 끌고 철도 선로를 뛰어 건너서 호수의 수은빛 나는 곳을 찾아서 지향 없이 걸었소.
 
69
한 호수를 가서 보면 또 저 편 호수가 더 아름다워 보이오. 원컨대 저 지는 해가 다 지기 전에 이 광야에 있는 호수를 다 돌아보고 싶소.
 
70
내가 호숫 가에 섰을 때에 그 거울같이 잔잔한 호수면에 비치는 내 그림자의 외로움이여, 그러나 아름다움이여! 그 호수는 영원한 우주의 신비를 품고 하늘이 오면 하늘을, 새가 오면 새를, 구름이 오면 구름을, 그리고 내가 오면 나를 비추지 아니하오. 나는 호수가 되고 싶소. 그러나 형! 나는 이 호수면에서 얼마나 정임의 얼굴을 찾았겠소. 그것은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동경의 병실에 누워 있는 정임의 모양이 몽고 사막의 호수면에 비칠 리야 있겠소. 없겠지마는 나는 호수마다 정임의 그림자를 찾았소. 그러나 보이는 것은 외로운 내 그림자뿐이오.
 
71
`가자. 끝없는 사막으로 한없이 가자. 가다가 내 기운이 진하는 자리에 나는 내 손으로 모래를 파고 그 속에 내 몸을 묻고 죽어 버리자. 살아서 다시 볼 수 없는 정임의 「이데아」를 안고 이 깨끗한 광야에서 죽어 버리 자.'
 
72
하고 나는 지는 해를 향하고 한정 없이 걸었소. 사막이 받았던 따뜻한 기운은 아직도 다 식지는 아니하였소. 사막에는 바람 한 점도 없소. 소리 하나도 없소. 발자국 밑에서 우는 마른 풀과 모래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릴 뿐이오.
 
73
나는 허리를 지평선에 걸었소. 그 신비한 광선은 내 가슴으로부터 위에만을 비추고 있소.
 
74
문득 나는 해를 따라가는 별 두 개를 보았소. 하나는 앞을 서고 하나는 뒤를 섰소. 앞의 별은 좀 크고 뒤의 별은 좀 작소. 이런 별들은 산 많은 나라 다시 말하면 서쪽 지평선을 보기 어려운 나라에서만 생장한 나로서는 보지 못하던 별이오. 나는 그 별의 이름을 모르오. `두 별'이오.
 
75
해가 지평선에서 뚝 떨어지자 대기의 자줏빛은 남빛으로 변하였소. 오직 해가 금시 들어간 자리에만 주홍빛의 여광이 있을 뿐이오. 내 눈앞에서는 남빛 안개가 피어오르는 듯하였소. 앞에 보이는 호수만이 유난히 빛나오. 또 한 떼의 이름 모를 새들이 수면을 스치며 날 저문 것을 놀라는 듯이 어지러이 날아 지나가오. 그들은 소리도 아니 하오. 날개치는 소리도 아니 들리오. 그것들은 사막의 황혼의 허깨비인 것 같소.
 
76
나는 자꾸 걷소. 해를 따르던 나는 두 별을 따라서 자꾸 걷소.
 
77
별들은 진 해를 따라서 바삐 걷는 것도 같고, 헤매는 나를 어떤 나라로 끄는 것도 같소.
 
78
아니 두 별 중에 앞선 별이 한 번 반짝하고는 최후로 한 번 반짝하고는 지평선 밑에 숨어 버리고 마오. 뒤에 남은 외별의 외로움이여! 나는 울고 싶었소. 그러나 나는 하나만 남은 작은 별 외로운 작은 별을 따라서 더 빨리 걸음을 걸었소. 그 한 별마저 넘어가 버리면 나는 어찌하오.
 
79
내가 웬일이오. 나는 시인도 아니요, 예술가도 아니오. 나는 정으로 행동한 일은 없다고 믿는 사람이오. 그러나 형! 이 때에 미친 것이 아니요, 내 가슴에는 무엇인지 모를 것을 따를 요샛말로 이른바 동경으로 찼소.
 
80
`아아 저 작은 별!'
 
81
그것도 지평선에 닿았소.
 
82
`아아 저 작은 별. 저것마저 넘어가면 나는 어찌하나.'
 
83
인제는 어둡소. 광야의 황혼은 명색뿐이요, 순식간이요, 해지자 신비하다고 할 만한 극히 짧은 동안에 아름다운 황혼을 조금 보이고는 곧 칠과 같은 암흑이오. 호수의 물만이 어디서 은빛을 받았는지 뿌옇게 나만이 유일한 존재다, 나만이 유일한 빛이다 하는 듯이 인제는 수은빛이 아니라 남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오.
 
84
나는 그 중 빛을 많이 받은, 그 중 환해 보이는 호수면을 찾아 두리번거리며, 그러나 빠른 걸음으로 헤매었소. 그러나 내가 좀더 맑은 호수면을 찾는 동안에 이 광야의 어둠은 더욱더욱 짙어지오.
 
85
나는 어떤 조그마한 호숫 가에 펄썩 앉았소. 내 앞에는 짙은 남빛의 수면에 조그마한 거울만한 밝은 데가 있소. 마치 내 눈에서 무슨 빛이 나와서, 아마 정임을 그리워하는 빛이 나와서 그 수면에 반사하는 듯이. 나는 허겁지겁 그 빤한 수면을 들여다보았소. 혹시나 정임의 모양이 거기 나타나지나 아니할까 하고. 세상에는 그러한 기적도 있지 아니한가 하고.
 
86
물에는 정임의 얼굴이 어른거리는 것 같았소. 이따금 정임의 눈도 어른거리고 코도 번뜻거리고 입도 번뜻거리는 것 같소. 그러나 수면은 점점 어두워 가서 그 환영조차 더욱 희미해지오.
 
87
나는 호수면에 빤하던 한 조각조차 캄캄해지는 것을 보고 숨이 막힐 듯함을 깨달으면서 고개를 들었소.
 
88
고개를 들려고 할 때에, 형이여, 이상한 일도 다 있소. 그 수면에 정임의 모양이, 얼굴만 아니라, 그 몸 온통이 그 어깨, 가슴, 팔, 다리까지도, 그 눈과 입까지도, 그 얼굴의 흰 것과 입술이 불그레한 것까지도, 마치 환한 대낮에 실물을 대한 모양으로 소상하게 나타났소.
 
89
“정임이!”
 
90
하고 나는 소리를 지르며 물로 뛰어들려 하였소. 그러나 형, 그 순간에 정임의 모양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소.
 
91
나는 이 어둠 속에 어디 정임이가 나를 따라온 것같이 생각했소. 혹시나 정임이가 죽어서 그 몸은 동경의 대학 병원에 벗어 내어던지고 혼이 빠져 나와서 물에 비치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가슴이 울렁거림을 진정치 못하면서 호숫 가에서 벌떡 일어나서 어둠 속에 정임을 만져보려는 듯이, 어두워서 눈에 보지는 못하더라도 자꾸 헤매노라면 몸에 부딪히기라도 할 것 같아서 함부로 헤매었소. 그리고는 눈앞에 번뜻거리는 정임의 환영을 팔을 벌려서 안고 소리를 내어서 불렀소.
 
92
“정임이, 정임이.”
 
93
하고 나는 수없이 정임을 부르면서 헤매었소.
 
94
그러나 형, 이것도 죄지요. 이것도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일이지요. 그러길래 광야에 아주 어둠이 덮이고 새까만 하늘에 별이 총총하게 나고는 영 정임의 헛그림자조차 아니 보이지요. 나는 죄를 피해서 정임을 떠나서 멀리 온 것이니 정임의 헛그림자를 따라다니는 것도 옳지 않지요.
 
95
그렇지만 내가 이렇게 혼자서 정임을 생각만 하는 것이야 무슨 죄 될 것이 있을까요. 내가 정임을 만 리나 떠나서 이렇게 헛그림자나 그리며 그리워하는 것이야 무슨 죄가 될까요. 설사 죄가 되기로서니 낸들 이것까지야 어찌하오. 내가 내 혼을 죽여 버리기 전에야 내 힘으로 어찌하오. 설사 죄가 되어서 내가 지옥의 꺼지지 않는 유황불 속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기로서니 그것을 어찌하오. 형, 이것, 이것도 말아야 옳은가요. 정임의 헛그림자까지도 끊어 버려야 옳은가요.
 
96
이 때요. 바로 이 때요. 내 앞 수십 보나 될까(캄캄한 밤이라 먼지 가까운지 분명히 알 수 없지마는) 하는 곳에 난데없는 등불 하나가 나서오. 나는 깜짝 놀라서 우뚝 섰소. 이 무인지경, 이 밤중에 갑자기 보이는 등불 그것은 마치 이 세상 같지 아니하였소.
 
97
저 등불이 어떤 등불일까, 그 등불이 몇 걸음 가까이 오니, 그 등불 뒤에 사람의 다리가 보이오.
 
98
“누구요?”
 
99
하는 것은 귀에 익은 조선말이오. 어떻게 이 몽고의 광야에서 조선말을 들을까 하고 나는 등불을 처음 볼 때보다 더욱 놀랐소.
 
100
“나는 지나가던 사람이오.”
 
101
하고 나도 등불을 향하여 마주 걸어갔소.
 
102
그 사람은 등불을 들어서 내 얼굴을 비추어 보더니,
 
103
“당신 조선 사람이오?”
 
104
하고 묻소.
 
105
“네, 나는 조선 사람이오. 당신도 음성을 들으니 조선 사람인데, 어떻게 이런 광야에, 아닌 밤중에, 여기 계시단 말이오.”
 
106
하고 나는 놀라는 표정 그대로 대답하였소.
 
107
“나는 이 근방에 사는 사람이니까 여기 오는 것도 있을 일이지마는 당신이야말로 이 아닌 밤중에.”
 
108
하고 육혈포를 집어넣고, 손을 내밀어서 내게 악수를 구하오.
 
109
나는 반갑게 그의 손을 잡았소. 그러나 나는 `죽을 지경에 어떻게 오셨단 말이오.' 하고, 그가 내가 무슨 악의를 가진 흉한이 아닌 줄을 알고 손에 빼어들었던 육혈포로 시기를 잠깐이라도 노린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였던 것이오.
 
110
그도 내 이름도 묻지 아니하고 또 나도 그의 이름을 묻지 아니하고 나는 그에게 끌려서 그가 인도하는 곳으로 갔소. 그 곳이란 것은 아까 등불이 처음 나타나던 곳인 듯한데, 거기서 또 한 번 놀란 것은 어떤 부인이 있는 것이오. 남자는 아라사식 양복을 입었으나 부인은 중국 옷 비슷한 옷을 입었소. 남자는 나를 끌어서 그 부인에게 인사하게 하고,
 
111
“이는 내 아내요.”
 
112
하고 또 그 아내라는 부인에게는,
 
113
“이 이는 조선 양반이오. 성함이 뉘시죠?”
 
114
하고 그는 나를 바라보오. 나는,
 
115
“최석입니다.”
 
116
하고 바로 대답하였소.
 
117
“최석 씨?”
 
118
하고 그 남자는 소개하던 것도 잊어버리고 내 얼굴을 들여다보오.
 
119
“네, 최석입니다.”
 
120
“아 ▣▣학교 교장으로 계신 최석 씨.”
 
121
하고 그 남자는 더욱 놀라오.
 
122
“네, 어떻게 내 이름을 아세요?”
 
123
하고 나도 그가 혹시 아는 사람이나 아닌가 하고 등불 빛에 얼굴을 들여다 보았으나 도무지 그 얼굴이 본 기억이 없소.
 
124
“최 선생을 내가 압니다. 남 선생한테 말씀을 많이 들었지요. 그런데 남 선생도 돌아가신 지가 벌써 몇 핸가.”
 
125
하고 감개무량한 듯이 그 아내를 돌아보오.
 
126
“십오 년이지요.”
 
127
하고 곁에 섰던 부인이 말하오.
 
128
“벌써 십오 년인가.”
 
129
하고 그 남자는 나를 보고,
 
130
“정임이 잘 자랍니까? 벌써 이십이 넘었지.”
 
131
하고 또 부인을 돌아보오.
 
132
“스물세 살이지.”
 
133
하고 부인이 확실치 아니한 듯이 대답하오.
 
134
“네, 스물세 살입니다. 지금 동경에 있습니다. 병이 나서 입원한 것을 보고 왔는데.”
 
135
하고 나는 번개같이 정임의 병실과 정임의 호텔 장면 등을 생각하고 가슴이 설렘을 깨달았소. 의외인 곳에서 의외인 사람들을 만나서 정임의 말을 하게 된 것을 기뻐하였소.
 
136
“무슨 병입니까. 정임이가 본래 몸이 약해서.”
 
137
하고 부인이 직접 내게 묻소.
 
138
“네. 몸이 좀 약합니다. 병이 좀 나은 것을 보고 떠났습니다마는 염려가 됩니다.”
 
139
하고 나는 무의식중에 고개를 동경이 있는 방향으로 돌렸소. 마치 고개를 동으로 돌리면 정임이가 보이기나 할 것같이.
 
140
“자, 우리 집으로 갑시다.”
 
141
하고 나는 아직 그의 성명도 모르는 남자는, 그의 아내를 재촉하더니,
 
142
“우리가 조선 동포를 만난 것이 십여 년 만이오. 그런데 최 선생, 이것을 좀 보시고 가시지요.”
 
143
하고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나를 서너 걸음 끌고 가오. 거기는 조그마한 무덤이 있고 그 앞에는 석 자 높이나 되는 목패를 세웠는데 그 목패에는 `두 별 무덤'이라는 넉 자를 썼소.
 
144
내가 이상한 눈으로 그 무덤과 목패를 보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145
“이게 무슨 무덤인지 아십니까?”
 
146
하고 유쾌하게 묻소.
 
147
“두 별 무덤이라니 무슨 뜻인가요?”
 
148
하고 나도 그의 유쾌한 표정에 전염이 되어서 웃고 물었소.
 
149
“이것은 우리 둘의 무덤이외다.”
 
150
하고 그는 아내의 어깨를 치며 유쾌하게 웃었소. 부인은 부끄러운 듯이 웃고 고개를 숙이오.
 
151
도무지 모두 꿈 같고 환영 같소.
 
152
“자 갑시다. 자세한 말은 우리 집에 가서 합시다.”
 
153
하고 서너 걸음 어떤 방향으로 걸어가니 거기는 말을 세 필이나 맨 마차가 있소. 몽고 사람들이 가족을 싣고 수초를 따라 돌아다니는 그러한 마차요. 삿자리로 홍예형의 지붕을 만들고 그 속에 들어가 앉게 되었소. 그의 부인과 나와는 이 지붕 속에 들어앉고 그는 손수 어자대에 앉아서 입으로 쮸쮸쮸쮸 하고 말을 모오. 등불도 꺼 버리고 캄캄한 속으로 달리오.
 
154
“불이 있으면 군대에서 의심을 하지요. 도적놈이 엿보지요. 게다가 불이 있으면 도리어 앞이 안 보인단 말요. 쯧쯧쯧쯧!”
 
155
하는 소리가 들리오.
 
156
대체 이 사람은 무슨 사람인가. 또 이 부인은 무슨 사람인가 하고 나는 어두운 속에서 혼자 생각하였소. 다만 잠시 본 인상으로 보아서 그들은 행복된 부부인 것 같았소. 그들이 무엇 하러 이 아닌 밤중에 광야에 나왔던가. 또 그 이상야릇한 두 별 무덤이란 무엇인가.
 
157
나는 불현듯 집을 생각하였소. 내 아내와 어린것들을 생각하였소. 가정과 사회에서 쫓겨난 내가 아니오. 쫓겨난 자의 생각은 언제나 슬픔뿐이었소.
 
158
나는 내 아내를 원망치 아니하오. 그는 결코 악한 여자가 아니오. 다만 보통 여자요. 그는 질투 때문에 이성의 힘을 잃은 것이오. 여자가 질투 때문에 이성을 잃는 것이 천직이 아닐까요. 그가 나를 사랑하길래 나를 위해서 질투를 가지는 것이 아니오.
 
159
설사 질투가 그로 하여금 칼을 들어 내 가슴을 찌르게 하였다 하더라도 나는 감사한 생각을 가지고 눈을 감을 것이오. 사랑하는 자는 질투한다고 하오. 질투를 누르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지마는 질투에 타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 아닐까요.
 
160
덜크럭덜크럭 하고 차바퀴가 철로길을 넘어가는 소리가 나더니 이윽고 마차는 섰소.
 
161
앞에 빨갛게 불이 비치오.
 
162
“자 이게 우리 집이오.”
 
163
하고 그가 마차에서 뛰어내리는 양이 보이오. 내려 보니까 달이 올라오오. 굉장히 큰 달이, 붉은 달이 지평선으로서 넘석하고 올라오오.
 
164
달빛에 비추인 바를 보면 네모나게 담 담이라기보다는 성을 둘러쌓은 달 뜨는 곳으로 열린 대문을 들어서서 넓은 마당에 내린 것을 발견하였소.
 
165
“아버지!”
 
166
“엄마!”
 
167
하고 아이들이 뛰어나오오. 말만큼이나 큰 개가 네 놈이나 꼬리를 치고 나오오. 그놈들이 주인집 마차 소리를 알아듣고 짖지 아니한 모양이오.
 
168
큰 아이는 계집애로 여남은 살, 작은 아이는 사내로 육칠 세, 모두 중국 옷을 입었소.
 
169
우리는 방으로 들어갔소. 방은 아라사식 절반, 중국식 절반으로 세간이 놓여 있고 벽에는 조선 지도와 단군의 초상이 걸려 있소.
 
170
그들 부처는 지도와 단군 초상 앞에 허리를 굽혀 배례하오. 나도 무의식적으로 그대로 하였소.
 
171
그는 차를 마시며 이렇게 말하오.
 
172
“우리는 자식들을 이 흥안령 가까운 무변 광야에서 기르는 것으로 낙을 삼고 있지요. 조선 사람들은 하도 마음이 작아서 걱정이니 이런 호호탕탕한 넓은 벌판에서 길러나면 마음이 좀 커질까 하지요. 또 흥안령 밑에서 지나 중원을 통일한 제왕이 많이 났으니 혹시나 그 정기가 남아 있을까 하지요. 우리 부처의 자손이 몇 대를 두고 퍼지는 동안에는 행여나 마음 큰 인물이 하나 둘 날는지 알겠어요, 하하하하.”
 
173
하고 그는 제 말을 제가 비웃는 듯이 한바탕 웃고 나서,
 
174
“그러나 이건 내 진정이외다. 우리도 이렇게 고국을 떠나 있지마는 그래도 고국 소식이 궁금해서 신문 하나는 늘 보지요. 하지만 어디 시원한 소식이 있어요. 그저 조리복소니가 되어가는 것이 아니면 조그마한 생각을 가지고, 눈곱만한 야심을 가지고, 서 푼어치 안 되는 이상을 가지고 찧고 까불고 싸우고 하는 것밖에 안 보이니 이거 어디 살 수가 있나. 그래서 나는 마음 큰 자손을 낳아서 길러 볼까 하고 이를테면 새 민족을 하나 만들어 볼까 하고, 둘째 단군, 둘째 아브라함이나 하나 낳아 볼까 하고 하하하하앗하.”
 
175
하고 유쾌하게, 그러나 비통하게 웃소.
 
176
나는 저녁을 굶어서 배가 고프고, 밤길을 걸어서 몸이 곤한 것도 잊고 그의 말을 들었소.
 
177
부인이 김이 무럭무럭 나는 호떡을 큰 뚝배기에 담고 김치를 작은 뚝배기에 담고, 또 돼지고기 삶은 것을 한 접시 담아다가 탁자 위에 놓소.
 
178
건넌방이라고 할 만한 방에서 젖먹이 우는 소리가 들리오. 부인은 삼십이나 되었을까, 남편은 서른댓 되었을 듯한 키가 훨쩍 크고 눈과 코가 크고 손도 큰 건장한 대장부요, 음성이 부드러운 것이 체격에 어울리지 아니하나 그것이 아마 그의 정신 생활이 높은 표겠지요.
 
179
“신문에서 최 선생이 학교를 고만두시게 되었다는 말도 보았지요. 그러나 나는 그것이 다 최 선생에게 대한 중상인 줄을 짐작하였고, 또 오늘 이렇게 만나 보니까 더구나 그것이 다 중상인 줄을 알지요.”
 
180
하고 그는 확신 있는 어조로 말하오.
 
181
“고맙습니다.”
 
182
나는 이렇게밖에 대답할 말이 없었소.
 
183
“아, 머, 고맙다고 하실 것도 없지요.”
 
184
하고 그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한참이나 생각을 하더니 우선 껄껄 한바탕 웃고 나서,
 
185
“내가 최 선생이 당하신 경우와 꼭 같은 경우를 당하였거든요. 이를테면 과부 설움은 동무 과부가 안다는 것이지요.”
 
186
하고 그는 자기의 내력을 말하기 시작하오.
 
187
“내 집은 본래 서울입니다. 내가 어렸을 적에 내 선친께서 시국에 대해서 불평을 품고 당신 삼 형제의 가족을 끌고 재산을 모두 팔아 가지고 간도에를 건너오셨지요. 간도에 맨 먼저 ▣▣학교를 세운 이가 내 선친이지요.”
 
188
여기까지 하는 말을 듣고 나는 그가 누구인지를 알았소. 그는 R씨라고 간도 개척자요, 간도에 조선인 문화를 세운 이로 유명한 이의 아들인 것이 분명하오. 나는 그의 이름이 누구인지도 물어 볼 것 없이 알았소.
 
189
“아 그러십니까. 네, 그러세요.”
 
190
하고 나는 감탄하였소.
 
191
“네, 내 선친을 혹 아실는지요. 선친의 말씀이 노 그러신단 말씀야요. 조선 사람은 속이 좁아서 못쓴다고 <정감록>에도 그런 말이 있다고 조선은 산이 많고 들이 좁아서 사람의 마음이 작아서 큰일하기가 어렵고, 큰사람이 나기가 어렵다고. 웬만치 큰사람이 나면 서로 시기해서 큰일할 새가 없이 한다고 그렇게 <정감록>에도 있다더군요. 그래서 선친께서 자손에게나 희망을 붙이고 간도로 오신 모양이지요. 거기서 자라났다는 것이 내 꼴입니다마는, 아하하.
 
192
내가 자라서 아버지께서 세우신 K여학교의 교사로 있을 때 일입니다. 지금 내 아내는 그 때 학생으로 있었구. 그러자 내 아버지께서 재산이 다 없어져서 학교를 독담하실 수가 없고, 또 얼마 아니해서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보니 학교에는 세력 다툼이 생겨서 아버지의 후계자로 추정되는 나를 배척하게 되었단 말씀이오. 거기서 나를 배척하는 자료를 삼은 것이 나와 지금 내 아내가 된 학생의 관계란 것인데 이것은 전연 무근지설인 것은 말할 것도 없소. 나도 총각이요, 그는 처녀니까 혼인을 하자면 못 할 것도 없지마는 그것이 사제 관계라면 중대 문제거든. 그래서 나는 단연히 사직을 하고 내가 사직한 것은 제 죄를 승인한 것이라 하여서 그 학생 지금 내 아내도 출교 처분을 당한 것이오. 그러고 보니, 그 여자의 아버지 내 장인이지요 그 여자의 아버지는 나를 죽일 놈같이 원망을 하고 그 딸을 죽일 년이라고 감금을 하고 어쨌으나 조그마한 간도 사회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단 말이오.
 
193
이 문제를 더 크게 만든 것은 지금 내 아내인, 그 딸의 자백이오. 무어라고 했는고 하니,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오, 그 사람한테가 아니면 시집을 안 가오, 하고 뻗댔단 말요.
 
194
나는 이 여자가 이렇게 나를 생각하는가 할 때 의분심이 나서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여자와 혼인하리라고 결심을 하였소. 나는 마침내 정식으로 K장로라는 내 장인에게 청혼을 하였으나 단박에 거절을 당하고 말았지요. K장로는 그 딸을 간도에 두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해서 서울로 보내기로 하였단 말을 들었소. 그래서 나는 최후의 결심으로 그 여자 지금 내 아내 된 사람을 데리고 간도에서 도망하였소. 하하하하. 밤중에 단둘이서.
 
195
지금 같으면야 사제간에 결혼을 하기로 그리 큰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마는 그 때에 어디 그랬나요. 사제간에 혼인이란 것은 부녀간에 혼인한다는 것과 같이 생각하였지요. 더구나 그 때 간도 사회에는 청교도적 사상과 열렬한 애국심이 있어서 도덕 표준이 여간 높지 아니하였지요. 그런 시대니까 내가 내 제자인 여학생을 데리고 달아난다는 것은 살인 강도를 하는 이상으로 무서운 일이었지요. 지금도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마는.
 
196
그래서 우리 두 사람은 우리 두 사람이라는 것보다도 내 생각에는 어찌하였으나 나를 위해서 제 목숨을 버리려는 그에게 사실 나도 마음 속으로는 그를 사랑하였지요. 다만 사제간이니까 영원히 달할 수는 없는 사랑이라고 단념하였을 뿐이지요. 그러니까 비록 부처 생활은 못 하더라도 내가 그의 사랑을 안다는 것과 나도 그를 이만큼 사랑한다는 것만을 보여 주자는 것이지요.
 
197
때는 마침 가을이지마는, 몸에 지닌 돈도 얼마 없고 천신만고로 길림까지를 나와 가지고는 배를 타고 송화강을 내려서 하얼빈에 가 가지고 거 기서 간신히 치타까지의 여비와 여행권을 얻어 가지고 차를 타고 떠나지 않았어요. 그것이 바로 십여 년 전 오늘이란 말이오.”
 
198
이 때에 부인이 옥수수로 만든 국수와 감자 삶은 것을 가지고 들어오오.
 
199
나는 R의 말을 듣던 끝이라 유심히 부인을 바라보았소. 그는 중키나 되는 둥근 얼굴이 혈색이 좋고 통통하여 미인이라기보다는 씩씩한 여자요. 그런 중에 조선 여자만이 가지는 아담하고 점잖은 맛이 있소.
 
200
“앉으시지요. 지금 두 분께서 처음 사랑하시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201
하고 나는 부인에게 교의를 권하였소.
 
202
“아이, 그런 말씀은 왜 하시오.”
 
203
하고 부인은 갑자기 십 년이나 어려지는 모양으로 수삽한 빛을 보이고 고개를 숙이고 달아나오.
 
204
“그래서요. 그래 오늘이 기념일이외다그려.”
 
205
하고 나도 웃었소.
 
206
“그렇지요. 우리는 해마다 오늘이 오면 우리 무덤에 성묘를 가서 하룻밤을 새우지요. 오늘은 손님이 오셔서 중간에 돌아왔지만, 하하하하.”
 
207
하고 그는 유쾌하게 웃소.
 
208
“성묘라니?”
 
209
하고 나는 물었소.
 
210
“아까 보신 두 별 무덤 말이오. 그것이 우리 내외의 무덤이지요. 하하하하.”
 
211
“………….”
 
212
나는 영문을 모르고 가만히 앉았소.
 
213
“내 이야기를 들으시지요. 그래 둘이서 차를 타고 오지 않았겠어요. 물론 여전히 선생님과 제자지요. 그렇지만 워낙 여러 날 단둘이서 같이 고생을 하고 여행을 했으니 사랑의 불길이 탈 것이야 물론 아니겠어요. 다만 사제라는 굳은 의리가 그것을 겉에 나오지 못하도록 누른 것이지요. ……그런데 꼭 오늘같이 좋은 날인데 여기는 대개 일기가 일정합니다. 좀체로 비가 오는 일도 없고 흐리는 날도 없지요. 헌데 F역에를 오니까 참 석양 경치가 좋단 말이오. 그 때에 불현듯, 에라 여기서 내려서 이 석양 속에 저 호숫 가에 둘이서 헤매다가 깨끗이 사제의 몸으로 이 깨끗한 광야에 묻혀 버리자 하는 생각이 나겠지요. 그래 그 때 말을 내 아내 그 때에는 아직 아내가 아니지요 내 아내에게 그런 말을 하였더니 참 좋다고 박장을 하고 내 어깨에 매달리는구려. 그래서 우리 둘은 차가 거의 떠날 임박해서 차에서 뛰어내렸지요.”
 
214
하고 그는 그때 광경을 눈앞에 그리는 모양으로 말을 끊고 우두커니 허공을 바라보오. 그러나 그의 입 언저리에는 유쾌한 회고에서 나오는 웃음이었소.
 
215
“이야기 다 끝났어요?”
 
216
하고 부인이 크바스라는 청량 음료를 들고 들어오오.
 
217
“아니오. 이제부터가 정통이니 당신도 거기 앉으시오. 지금 차에서 내린 데까지 왔는데 당신도 앉아서 한 파트를 맡으시오.”
 
218
하고 R는 부인의 손을 잡아서 자리에 앉히오. 부인도 웃으면서 앉소.
 
219
“최 선생 처지가 꼭 나와 같단 말요. 정임의 처지가 당신과 같고.”
 
220
하고 그는 말을 계속하오.
 
221
“그래 차에서 내려서 나는 이 양반하고 물을 찾아 헤매었지요. 아따, 석양이 어떻게 좋은지 이 양반은 박장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우리 둘은 마치 유쾌하게 산보하는 사람 같았지요.”
 
222
“참 좋았어요. 그 때에는 참 좋았어요. 그 석양에 비친 광야와 호수라는 건 어떻게 좋은지 그 수은 같은 물 속에 텀벙 뛰어들고 싶었어요. 그 후엔 해마다 보아도 그만 못해.”
 
223
하고 부인이 참견을 하오.
 
224
아이들은 다 자는 모양이오.
 
225
“그래 지향없이 헤매는데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구, 어스름은 기어들고 그 때 마침 하늘에는 별 둘이 나타났단 말이야. 그것을 이 여학생이 먼저 보고서 갑자기 추연해지면서 선생님 저 별 보셔요, 앞선 큰 별은 선생님이 구 따라가는 작은 별은 저야요, 하겠지요. 그 말이, 또 그 태도가 어떻게 가련한지. 그래서 나는 하늘을 바라보니깐 과연 별 두 개가 지는 해를 따르는 듯이 따라간다 말요. 말을 듣고 보니 과연 우리 신세와도 같지 않아요?
 
226
그리고는 이 사람이 또 이럽니다그려 `선생님, 앞선 큰 별은 아무리 따라도 저 작은 별은 영원히 따라잡지 못하겠지요. 영원히 영원히 따라가다가 따라가다가 못 해서 마침내는 저 작은 별은 죽어서 검은 재가 되고 말겠지요? 저 작은 별이 제 신세와 어쩌면 그리 같을까.' 하고 한탄을 하겠지요. 그 때에 한탄을 하고 눈물을 흘리고 섰는 어린 처녀의 석양빛에 비췬 모양을 상상해 보세요, 하하하하. 그 때에는 당신도 미인이었소. 하하하하.”
 
227
하고 내외가 유쾌하게 웃는 것을 보니 나는 더욱 적막하여짐을 깨달았소. 어쩌면 그 석양, 그 두 별이 이들에게와 내게 꼭 같은 인상을 주었을까 하니 참으로 이상하다 하였소.
 
228
“그래 인제.”
 
229
하고 R는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오.
 
230
“그래 인제 둘이서 그야말로 감개무량하게 두 별을 바라보며 걸었지요. 그러다가 해가 넘어가고 앞선 큰 별이 넘어가고 그리고는 혼자서 깜빡깜빡하고 가던 작은 별이 넘어가니 우리는 그만 땅에 주저앉았소. 거기가 어딘고 하니 그 두 별 무덤이 있는 곳이지요. `선생님 저를 여기다가 파묻어 주시고 가셔요. 선생님 손수 저를 여기다가 묻어 놓고 가 주셔요.' 하고 이 사람이 조르지요.”
 
231
하는 것을 부인은,
 
232
“내가 언제.”
 
233
하고 남편을 흘겨보오.
 
234
“그럼 무에라고 했소? 어디 본인이 한 번 옮겨 보오.”
 
235
하고 R가 말을 끊소.
 
236
“간도를 떠난 지가 한 달이 되도록 단둘이 다녀도 요만큼도 귀해 주는 점이 안 뵈니 그럼 파묻어 달라고 안 해요?”
 
237
하고 부인은 웃소.
 
238
“흥흥.”
 
239
하고 R는 부인의 말에 웃고 나서,
 
240
“그 자리에 묻어 달란 말을 들으니까, 어떻게 측은한지, 그럼 나도 함께 묻히자고 그랬지요. 나는 그 때에 참말 그 자리에 함께 묻히고 싶었어요. 그래서 나는 손으로 곧 구덩이를 팠지요. 떡가루 같은 모래판이니까 파기는 힘이 아니 들겠지요. 이이도 물끄러미 내가 땅을 파는 것을 보고 섰더니만 자기도 파기를 시작하겠지요.”
 
241
하고 내외가 다 웃소.
 
242
“그래 순식간에…….”
 
243
하고 R는 이야기를 계속하오.
 
244
“순식간에 둘이 드러누울 만한 구덩이를 아마 두 자 깊이나 되게, 네모나게 파 놓고는 내가 들어가 누워 보고 그러고는 또 파고 하여 아주 편안한 구덩이를 파고 나서는 나는 아주 세상을 하직할 셈으로 사방을 둘러보 고 사방이래야 컴컴한 어둠밖에 없지만 사방을 둘러보고, 이를테면 세상과 작별을 하고 드러누웠지요. 지금 이렇게 회고담을 할 때에는 우습기도 하지마는 그 때에는 참으로 종교적이라 할 만한 엄숙이었소. 그때 우리 둘의 처지는 앞도 절벽, 뒤도 절벽이어서 죽는 길밖에 없었지요. 또 그뿐 아니라 인생의 가장 깨끗하고 가장 사랑의 맑은 정이 타고 가장 기쁘고도 슬프고도 이를테면 모든 감정이 절정에 달하고, 그러한 순간에 목숨을 끊어 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요, 가장 마땅한 일같이 생각하였지요. 광야에 아름다운 황혼이 순간에 스러지는 모양으로 우리 두 생명의 아름다움도 순간에 스러지자는 우리는 철학자도 시인도 아니지마는 우리들의 환경이 우리 둘에게 그러한 생각을 넣어 준 것이지요.
 
245
그래서 내가 가만히 드러누워 있는 것을 저이가 물끄러미 보고 있더니 자기도 내 곁에 들어와 눕겠지요. 그런 뒤에는 황혼에 남은 빛도 다 스러지고 아주 캄캄한 암흑 세계가 되어 버렸지요. 하늘에 어떻게 그렇게 별이 많은지.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노라면 참 별이 많아요. 우주란 참 커요. 그런데 이 끝없이 큰 우주에 한없이 많은 별들이 다 제자리를 지키고 제 길을 지켜서 서로 부딪지도 아니하고 끝없이 긴 시간에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주에는 어떤 주재하는 뜻, 섭리하는 뜻이 있다 하는 생각이 나겠지요. 나도 예수교인의 가정에서 자라났지마는 이 때처럼 하나님이라 할까 이름은 무엇이라고 하든지 간에 우주의 섭리자의 존재를 강렬하게 의식한 일은 없었지요.
 
246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에 비기면 저까짓 별들이 다 무엇이오?' 하고 그때 겨우 열여덟 살밖에 안 된 이이가 내 귀에 입을 대고 말할 때에는 나도 참으로 놀랐습니다. 나이는 나보다 오륙 년 상관밖에 안 되지마는 이십 세 내외에 오륙 년 상관이 적은 것인가요? 게다가 나는 선생이요 자기는 학생이니까 어린애로만 알았던 것이 그런 말을 하니 놀랍지 않아요? 어째서 사람의 마음이 하늘보다도 더 이상할까 하고 내가 물으니까, 그 대답이 `나는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가 없지마는 내 마음 속에 일어나는 것이 하늘이나 땅에 일어나는 모든 것보다도 더 아름답고 더 알 수 없고 더 뜨겁고 그런 것 같아요.' 그러겠지요. 생명이란 모든 아름다운 것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을 나는 깨달았어요. 그 말에, `그렇다 하면 이 아름답고 신비한 생명을 내는 우주는 더 아름다운 것이 아니오?' 하고 내가 반문하니까, 당신(부인을 향하여) 말이, `전 모르겠어요, 어쨌으나 전 행복합니다. 저는 이 행복을 깨뜨리고 싶지 않습니다. 놓쳐 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이 행복 선생님 곁에 있는 이 행복을 꽉 안고 죽고 싶어요.' 그러지 않았소?”
 
247
“누가 그랬어요? 아이 난 다 잊어버렸어요.”
 
248
하고 부인은 차를 따르오. R는 인제는 하하하 하는 웃음조차 잊어버리고, 부인에게 농담을 붙이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그야말로 종교적 엄숙 그대로말을 이어,
 
249
“`자 저는 약을 먹어요.' 하고 손을 입으로 가져가는 동작이 감행되겠지요. 약이란 것은 하얼빈에서 준비한 아편이지요. 하얼빈서 치타까지 가는 동안에 흥안령이나 어느 삼림지대나 어디서나 죽을 자리를 찾자고 준비한 것이니까. 나는 입 근처로 가는 그의 손을 붙들었어요. 붙들면서 나는 `잠깐만 기다리오. 오늘 밤 안으로 그 약을 먹으면 고만이 아니오? 이 행복된 순간을 잠깐이라도 늘립시다. 달 올라올 때까지만.' 나는 이렇게 말했지요. `선생님도 행복되셔요? 선생님은 불행이시지. 저 때문에 불행이시지. 저만 이곳에 묻어 주시구는 선생님은 세상에 돌아가 사셔요, 오래오래 사셔요, 일 많이 하고 사셔요.' 하고 울지 않겠어요. 나는 그 때에 내 아내가 하던 말을 한 마디도 잊지 아니합니다. 그 말을 듣던 때의 내 인상은 아마 일생 두고 잊히지 아니하겠지요.
 
250
나는 자백합니다. 그 순간에 나는 처음으로 내 아내를 안고 키스를 하였지요. 내 속에 눌리고 눌리고 쌓이고 하였던 열정이 그만 일시에 폭발되었던 것이오. 아아 이것이 최초의 것이요, 동시에 최후의 것이로구나 할 때에 내 눈에서는 끓는 듯한 눈물이 흘렀소이다. 두 사람의 심장이 뛰는 소리, 두 사람의 풀무 불길 같은 숨소리.
 
251
이윽고 달이 떠올라 왔습니다. 가이없는 벌판이니까 달이 뜨니까 갑자기 천지가 환해지고 우리 둘이 손으로 파서 쌓아 놓은 흙무더기가 이 산 없는 세상에 산이나 되는 것같이 조그마한 검은 그림자를 지고 있겠지요. `자 우리 달빛을 띠고 좀 돌아다닐까.' 하고 나는 아내를 안아 일으켰지요. 내 팔에 안겨서 고개를 뒤로 젖힌 내 아내의 얼굴이 달빛에 비친 양을 나는 잘 기억합니다. 실신한 듯한, 만족한 듯한, 그리고도 절망한 듯한 그 표정을 무엇으로 그릴지 모릅니다. 그림도 그릴 줄 모르고 조각도 할 줄 모르고 글도 쓸 줄 모르는 내가 그것을 어떻게 그립니까. 그저 가슴 속에 품고 이렇게 오늘의 내 아내를 바라볼 뿐이지요.
 
252
나는 내 아내를 팔에 걸고 네, 걸었다고 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지 요 이렇게 팔에다 걸고 달빛을 받은 황량한 벌판, 아무리 하여도 환하게 밝아지지는 아니하는 벌판을 헤매었습니다. 이따금 내 아내가, `어서 죽고 싶어요, 전 죽고만 싶어요.' 하는 말에는 대답도 아니 하고. 죽고 싶다는 그 말은 물론 진정일 것이지요. 아무리 맑은 일기라 하더라도 오후가 되면 흐려지는 법이니까 오래 살아가는 동안에 늘 한 모양으로 이 순간같이 깨끗하고 뜨거운 기분으로 갈 수는 없지 않아요? 불쾌한 일도 생기고, 보기 흉한 일도 생길는지 모르거든. 그러니까 이 완전한 깨끗과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행복 속에 죽어 버리자는 뜻을 나는 잘 알지요. 더구나 우리들이 살아 남는대야 앞길이 기구하지 평탄할 리는 없지 아니해요? 그래서 나는 `죽지, 우리 이 달밤에 실컷 돌아다니다가, 더 돌아다니기가 싫거든 그 구덩에 돌아가서 약을 먹읍시다.' 이렇게 말하고 우리 둘은 헤맸지요. 낮에 보면 어디까지나 평평한 벌판인 것만 같지마는 달밤에 보면 이 사막에도 아직 채 스러지지 아니한 산의 형적이 남아 있어서 군데군데 거뭇거뭇한 그림자가 있겠지요. 그 그림자 속에는 걸어 들어가면 어떤 데는 우리 허리만큼 그림자에 가리우고 어떤 데는 우리 둘을 다 가리워 버리는 데도 있단 말야요. 죽음의 그림자라는 생각이 나면 그래도 몸에 소름이 끼쳐요.
 
253
차차 달이 높아지고 추위가 심해져서 바람결이 지나갈 때에는 눈에서 눈물이 날 지경이지요. 원체 대기 중에 수분이 적으니까 서리도 많지 않지마는, 그래도 대기 중에 있는 수분은 다 얼어 버려서 얼음가루가 되었는 게지요. 공중에는 반짝반짝하는 수정가루 같은 것이 보입니다. 낮에는 땀이 흐르리만큼 덥던 사막도 밤이 되면 이렇게 기온이 내려가지요. 춥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춥다는 말은 아니 하고 우리는 어떤 때에는 달을 따라서, 어떤 때에는 달을 등지고, 어떤 때에는 호수에 비친 달을 굽어보고, 이 모양으로 한없이 말도 없이 돌아다녔지요. 이 세상 생명의 마지막 순간을 힘껏 의식하려는 듯이.
 
254
마침내 `나는 더 못 걸어요.' 하고 이이가 내 어깨에 매달려 버리고 말았지요.”
 
255
하고 R가 부인을 돌아보니 부인은 편물하던 손을 쉬고,
 
256
“다리가 아픈 줄은 모르겠는데 다리가 이리 뉘구 저리 뉘구 해서 걸음을 걸을 수가 없었어요. 춥기는 하구.”
 
257
하고 소리를 내어서 웃소.
 
258
“그럴 만도 하지.”
 
259
하고 R는 긴장한 표정을 약간 풀고 앉은 자세를 잠깐 고치며,
 
260
“그 후에 그 날 밤 돌아다닌 곳을 더듬어 보니까,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마는 삼십 리는 더 되는 것 같거든. 다리가 아프지 아니할 리가 있나.”
 
261
하고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말을 계속하오.
 
262
“그래서 나는 내 외투를 벗어서, 이이(부인)를 싸서 어린애 안듯이 안고 걸었지요. 외투로 쌌으니 자기도 춥지 않구, 나는 또 무거운 짐을 안았으니 땀이 날 지경이구, 그뿐 아니라 내가 제게 주는 최후의 서비스라 하니 기쁘고, 말하자면 일거 삼득이지요. 하하하하. 지난 일이니 웃지마는 그 때 사정을 생각해 보세요, 어떠했겠나.”
 
263
하고 R는 약간 처참한 빛을 띠면서,
 
264
“그러니 그 구덩이를 어디 찾을 수가 있나. 얼마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아무 데서나 죽을 생각도 해 보았지마는 몸뚱이를 그냥 벌판에 내놓고 죽고 싶지는 아니하고 또 그 구덩이가 우리 두 사람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아서 기어코 그것을 찾아 내고야 말았지요. 그 때는 벌써 새벽이 가까웠던 모양이오. 열 시나 넘어서 뜬 하현달이 낮이 기울었으니 그렇지 않겠어요. 그 구덩이에 와서 우리는 한 번 더 하늘과 달과 별과, 그리고 마음 속에 떠오른 사람들과 하직하고 약 먹을 준비를 했지요.
 
265
약을 검은 고약과 같은 아편을 맛이 쓰다는 아편을 물도 없이 먹으려 들었지요.
 
266
우리 둘은 아까 모양으로 가지런히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았는데 달이 밝으니까 보이던 별들 중에 숨은 별이 많고 또 별들의 위치 우리에게 낯익은 북두칠성 자리도 변했을 것 아니야요. 이상한 생각이 나요. 우리가 벌판으로 헤매는 동안에 천지가 모두 변한 것 같아요. 사실 변하였지요. 그 변한 것이 우스워서 나는 껄껄 웃었지요. 워낙 내가 웃음이 좀 헤프지만 이 때처럼 헤프게 실컷 웃어 본 일은 없습니다.
 
267
왜 웃느냐고 아내가 좀 성을 낸 듯이 묻기로, `천지와 인생이 변하는 것이 우스워서 웃었소.' 그랬지요. 그랬더니, `천지와 인생은 변할는지 몰라도 내 마음은 안 변해요!' 하고 소리를 지르겠지요. 퍽 분개했던 모양이야.”
 
268
하고 R는 그 아내를 보오.
 
269
“그럼 분개 안 해요? 남은 죽을 결심을 하고 발발 떨구 있는데 곁에서 껄껄거리고 웃으니, 어째 분하지가 않아요. 나는 분해서 달아나려고 했어요.”
 
270
하고 부인은 아직도 분함이 남은 것같이 말하오.
 
271
“그래 달아나지 않았소?”
 
272
하고 R는 부인이 벌떡 일어나서 비틀거리고 달아나는 흉내를 팔과 다리로 내고 나서,
 
273
“이래서 죽는 시간이 지체가 되었지요. 그래서 내가 빌고 달래고 해서 가까스로 안정을 시키고 나니 손에 쥐었던 아편이 땀에 푹 젖었겠지요. 내가 웃은 것은 죽기 전 한 번 천지와 인생을 웃어 버린 것인데 그렇게 야단이니…… 하하하하.”
 
274
R는 식은 차를 한 모금 더 마시며,
 
275
“참 목도 마르기도 하더니. 입에는 침 한 방울 없고. 그러나 못물을 먹을 생각도 없고. 나중에는 말을 하려고 해도 혀가 안 돌아가겠지요.
 
276
이러는 동안에 달빛이 희미해지길래 웬일인가 하고 고개를 번쩍 들었더니 해가 떠오릅니다그려. 어떻게 붉고 둥글고 씩씩한지. `저 해 보오.' 하고 나는 기계적으로 벌떡 일어나서 구덩이에서 뛰어나왔지요.”
 
277
하고 빙그레 웃소. R의 빙그레 웃는 양이 참 좋았소.
 
278
“내가 뛰어나오는 것을 보고 이이도 뿌시시 일어났지요. 그 해! 그 해의 새 빛을 받는 하늘과 땅의 빛! 나는 그것을 형용할 말을 가지지 못합니다. 다만 힘껏 소리치고 싶고 기운껏 달음박질치고 싶은 생각이 날 뿐이어요.
 
279
`우리 삽시다, 죽지 말고 삽시다, 살아서 새 세상을 하나 만들어 봅시다.' 이렇게 말하였지요. 하니까 이이가 처음에는 깜짝 놀라는 것 같아요. 그러나 마침내 아내도 죽을 뜻을 변하였지요. 그래서 남 선생을 청하여다가 그 말씀을 여쭈었더니 남 선생께서 고개를 끄덕끄덕하시고 우리 둘의 혼인 주례를 하셨지요. 그 후 십여 년에 우리는 밭 갈고 아이 기르고 이런 생활을 하고 있는데 언제나 여기 새 민족이 생기고 누가 새 단군이 될는지요. 하하하하, 아하하하. 피곤하시겠습니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서.”
 
280
하고 R는 말을 끊소.
 
281
나는 R부처가 만류하는 것도 다 뿌리치고 여관으로 돌아왔소. R와 함께 달빛 속, 개 짖는 소리 속을 지나서 아라사 사람의 조그마한 여관으로 돌아왔소. 여관 주인도 R를 아는 모양이어서 반갑게 인사하고 또 내게 대한 부탁도 하는 모양인가 보오.
 
282
R는 내 방에 올라와서 내일 하루 지날 일도 이야기하고 또 남 선생과 정임에게 관한 이야기도 하였으나, 나는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들을 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어서 마음 없는 대답을 할 뿐이었소.
 
283
R가 돌아간 뒤에 나는 옷도 벗지 아니하고 침대에 드러누웠소. 페치카를 때기는 한 모양이나 방이 써늘하기 그지없소.
 
284
`그 두 별 무덤이 정말 R와 그 여학생과 두 사람이 영원히 달치 못할 꿈을 안은 채로 깨끗하게 죽어서 묻힌 무덤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만일 그렇다 하면 내일 한 번 더 가서 보토라도 하고 오련마는.'
 
285
하고 나는 R부처의 생활에 대하여 일종의 불만과 환멸을 느꼈소.
 
286
그리고 내가 정임을 여기나 시베리아나 어떤 곳으로 불러다가 만일 R와 같은 흉내를 낸다 하면, 하고 생각해 보고는 나는 진저리를 쳤소. 나는 내머리 속에 다시 그러한 생각이 한 조각이라도 들어올 것을 두려워하였소.
 
287
급행을 기다리자면 또 사흘을 기다리지 아니하면 아니 되기로 나는 이튿날 새벽에 떠나는 구간차를 타고 F역을 떠나 버렸소. R에게는 고맙다는 편지 한 장만을 써 놓고. 나는 R를 더 보기를 원치 아니하였소. 그것은 반드시 R를 죄인으로 보아서 그런 것은 아니오마는 그저 나는 다시 R를 대면하기를 원치 아니한 것이오.
 
288
나는 차가 R의 집 앞을 지날 때에도 R의 집에 대하여서는 외면하였소.
 
289
이 모양으로 나는 흥안령을 넘고, 하일라르의 솔밭을 지나서 마침내 이 곳에 온 것이오.
 
290
형! 나는 인제는 이 편지를 끝내오. 더 쓸 말도 없거니와 인제는 이것을 쓰기도 싫증이 났소.
 
291
이 편지를 쓰기 시작할 때에는 바이칼에 물결이 흉용하더니 이 편지를 끝내는 지금에는 가의 가까운 물에는 얼음이 얼었소. 그리고 저 멀리 푸른 물이 늠실늠실 하얗게 눈 덮인 산 빛과 어울리게 되었소.
 
292
사흘이나 이어서 오던 눈이 밤새에 개고 오늘 아침에는 칼날 같은 바람이 눈을 날리고 있소.
 
293
나는 이 얼음 위로 걸어서 저 푸른 물 있는 곳까지 가고 싶은 유혹을 금할 수 없소. 더구나 이 편지도 다 쓰고 나니, 인제는 내가 이 세상에서 할 마지막 일까지 다 한 것 같소.
 
294
내가 이 앞에 어디로 가서 어찌 될는지는 나도 모르지마는 희미한 소원을 말하면 눈 덮인 시베리아의 인적 없는 삼림 지대로 한정 없이 헤매다가 기운 진하는 곳에서 이 목숨을 마치고 싶소.
 
295
최석 군은 `끝'이라는 글자를 썼다가 지워 버리고 딴 종이에다가 이런 말을 썼다
 
296
다 쓰고 나니 이런 편지도 다 부질없는 일이오. 내가 이런 말을 한대야 세상이 믿어 줄 리도 없지 않소. 말이란 소용 없는 것이오. 내가 아무리 내 아내에게 말을 했어도 아니 믿었거든 내 아내도 내 말을 아니 믿었거든 하물며 세상이 내 말을 믿을 리가 있소. 믿지 아니할 뿐 아니라 내 말 중에서 자기네 목적에 필요한 부분만은 믿고, 또 자기네 목적에 필요한 부분은 마음대로 고치고 뒤집고 보태고 할 것이니까, 나는 이 편지를 쓴 것이 한 무익하고 어리석은 일인 줄을 깨달았소.
 
297
형이야 이 편지를 아니 보기로니 나를 안 믿겠소? 그 중에는 혹 형이 지금까지 모르던 자료도 없지 아니하니, 형만 혼자 보시고 형만 혼자 내 사정을 알아 주시면 다행이겠소. 세상에 한 믿는 친구를 가지는 것이 저마다 하는 일이겠소?
 
298
나는 이 쓸데없는 편지를 몇 번이나 불살라 버리려고 하였으나 그래도 거기도 일종의 애착심이 생기고 미련이 생기는구려. 형 한 분이라도 보여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구려. 내가 S형무소에 입감해 있을 적에 형무소 벽에 죄수가 손톱으로 성명을 새긴 것을 보았소. 뒤에 물었더니 그것은 흔히 사형수가 하는 짓이라고. 사형수가 교수대에 끌려 나가기 바로 전에 흔히 손톱으로 담벼락이나 마룻바닥에 제 이름을 새기는 일이 있다고 하는 말을 들었소. 내가 형에게 쓰는 이 편지도 그 심리와 비슷한 것일까요?
 
299
형! 나는 보통 사람보다는, 정보다는 지로, 상식보다는 이론으로, 이해보다는 의리로 살아 왔다고 자신하오. 이를테면 논리학적으로 윤리학적으로 살아온 것이라고 할까. 나는 엄격한 교사요, 교장이었소. 내게는 의지력과 이지력밖에 없는 것 같았소. 그러한 생활을 수십 년 해 오지 아니하였소? 나는 이 앞에 몇십 년을 더 살더라도 내 이 성격이나 생활 태도에는 변함이 없으리라고 자신하였소. 불혹지년이 지났으니 그렇게 생각하였을 것이 아니오?
 
300
그런데 형! 참 이상한 일이 있소.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처해 있던 환경을벗어나서 호호 탕탕하게 넓은 세계에 알몸을 내어던짐을 당하니 내 마음 속에는 무서운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나는구려. 나는 이 말도 형에게 아니 하려고 생각하였소. 노여워하지 마시오, 내게까지도 숨기느냐고. 그런 것이 아니오, 형은커녕 나 자신에게까지도 숨기려고 하였던 것이오. 혹시 그런 기다리지 아니 하였던 원, 그런 생각이 내 마음의 하늘에 일어나리라고 상상도 아니하였던, 그런 생각이 일어날 때에는 나는 스스로 놀라고 스스로 슬퍼하였소. 그래서 스스로 숨기기로 하였소.
 
301
그 숨긴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열정이요, 정의 불길이요, 정의 광풍이요, 정의 물결이오. 만일 내 의식이 세계를 평화로운 풀 있고, 꽃 있고, 나무 있는 벌판이라고 하면 거기 난데없는 미친 짐승들이 불을 뿜고 소리를 지르고 싸우고, 영각을 하고 날쳐서, 이 동산의 평화의 화초를 다 짓밟아 버리고 마는 그러한 모양과 같소.
 
302
형! 그 이상야릇한 짐승들이 여태껏, 사십 년 간을 어느 구석에 숨어 있었소? 그러다가 인제 뛰어나와 각각 제 권리를 주장하오?
 
303
지금 내 가슴 속은 끓소. 내 몸은 바짝 여위었소. 그것은 생리학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나 타는 것이요, 연소하는 것이오. 그래서 다만 내 몸의 지방만이 타는 것이 아니라, 골수까지 타고, 몸이 탈 뿐이 아니라 생명 그 물건이 타고 있는 것이오. 그러면 어찌할까.
 
304
지위, 명성, 습관, 시대 사조 등등으로 일생에 눌리고 눌렸던 내 자아의 일부분이 혁명을 일으킨 것이오? 한 번도 자유로 권세를 부려 보지 못한 본능과 감정들이 내 생명이 끝나기 전에 한 번 날뛰어 보려는 것이오. 이것이 선이오? 악이오?
 
305
그들은 내가 지금까지 옳다고 여기고 신성하다고 여기던 모든 권위를 모조리 둘러엎으려고 드오. 그러나 형! 나는 도저히 이 혁명을 용인할 수가 없소. 나는 죽기까지 버티기로 결정을 하였소. 내 속에서 두 세력이 싸우다가 싸우다가 승부가 결정이 못 된다면 나는 승부의 결정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살기를 그만두려오.
 
306
나는 눈 덮인 삼림 속으로 들어가려오. 나는 V라는 대삼림 지대가 어디인 줄도 알고 거기를 가려면 어느 정거장에서 내릴 것도 다 알아 놓았소.
 
307
만일 단순히 죽는다 하면 구태여 멀리 찾아갈 필요도 없지마는 그래도 나 혼자로는 내 사상과 감정의 청산을 하고 싶소. 살 수 있는 날까지 세상을 떠난 곳에서 살다가 완전한 해결을 얻는 날 나는 혹은 승리의, 혹은 패배의 종막을 닫칠 것이오. 만일 해결이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그치면 그만이지요.
 
308
나는 이 붓을 놓기 전에 어젯밤에 꾼 꿈 이야기 하나는 하려오. 꿈이 하도 수상해서 마치 내 전도에 대한 신의 계시와도 같기로 하는 말이오. 그 꿈은 이러하였소.
 
309
내가 꽁이깨(꼬이까라는 아라사말로 침대라는 말이 조선 동포의 입으로 변한 말이오.) 짐을 지고 삽을 메고 눈이 덮인 삼림 속을 혼자 걸었소. 이 꽁이깨 짐이란 것은 금점꾼들이 그 여행 중에 소용품, 마른 빵, 소금, 내복 등속을 침대 매트리스에 넣어서 지고 다니는 것이오. 이 짐하고 삽 한 개, 도끼 한 개, 그것이 시베리아로 금을 찾아 헤매는 조선 동포들의 행색이오. 내가 이르쿠츠크에서 이러한 동포를 만났던 것이 꿈으로 되어 나온 모양이오.
 
310
나는 꿈에는 세상을 다 잊어버린, 아주 깨끗하고 침착한 사람으로 이 꽁이깨 짐을 지고 삽을 메고 밤인지 낮인지 알 수 없으나 땅은 눈빛으로 희고, 하늘은 구름빛으로 회색인 삼림 지대를 허덕허덕 걸었소. 길도 없는 데를, 인적도 없는 데를.
 
311
꿈에도 내 몸은 퍽 피곤해서 쉴 자리를 찾는 마음이었소.
 
312
나는 마침내 어떤 언덕 밑 한 군데를 골랐소. 그리고 상시에 이야기에서 들은 대로 삽으로 내가 누울 자리만한 눈을 치고, 그리고는 도끼로 곁에 선 나무 몇 개를 찍어 누이고 거기다가 불을 놓고 그 불김에 녹은 땅을 두어 자나 파내고 그 속에 드러누웠소. 훈훈한 것이 아주 편안하였소.
 
313
하늘에는 별이 반짝거렸소. F역에서 보던 바와 같이 큰 별 작은 별도 보이고 평시에 보지 못하던 붉은 별, 푸른 별 들도 보였소. 나는 이 이상한 하늘, 이상한 별들이 있는 하늘을 보고 드러누워 있노라니까 문득 어디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소. 퉁퉁퉁퉁 우루루루…… 나는 벌떡 일어나려 하였으나 몸이 천 근이나 되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소. 가까스로 고개를 조금 들고 보니 뿔이 길다랗고 눈이 불같이 붉은 사슴의 떼가 무엇에 놀랐는지 껑충껑충 뛰어 지나가오. 이것은 아마 크로포트킨의 <상호 부조론> 속에 말한 시베리아의 사슴의 떼가 꿈이 되어 나온 모양이오.
 
314
그러더니 그 사슴의 떼가 다 지나간 뒤에, 그 사슴의 떼가 오던 방향으로서 정임이가 걸어오는 것이 아니라 스르륵 하고 미끄러져 오오. 마치 인형을 밀어 주는 것같이.
 
315
“정임아!”
 
316
하고 나는 소리를 치고 몸을 일으키려 하였소.
 
317
정임의 모양은 나를 잠깐 보고는 미끄러지는 듯이 흘러가 버리오.
 
318
나는 정임아, 정임아를 부르고 팔다리를 부둥거렸소. 그러다가 마침내 내 몸이 번쩍 일으켜짐을 깨달았소. 나는 정임의 뒤를 따랐소.
 
319
나는 눈 위로 삼림 속으로 정임의 그림자를 따랐소. 보일 듯 안 보일 듯, 잡힐 듯 안 잡힐 듯, 나는 무거운 다리를 끌고 정임을 따랐소.
 
320
정임은 이 추운 날이언만 눈과 같이 흰 옷을 입었소. 그 옷은 옛날 로마 여인의 옷과 같이 바람결에 펄렁거렸소.
 
321
“오지 마세요. 저를 따라오지 못하십니다.”
 
322
하고 정임은 눈보라 속에 가리워 버리고 말았소. 암만 불러도 대답이 없고 눈보라가 다 지나간 뒤에도 붉은 별, 푸른 별과 뿔 긴 사슴의 떼뿐이오. 정임은 보이지 아니하였소. 나는 미칠 듯이 정임을 찾고 부르다가 잠을 깨었소.
 
323
꿈은 이것뿐이오. 꿈을 깨어서 창 밖을 바라보니 얼음과 눈에 덮인 바이칼호 위에는 새벽의 겨울 달이 비치어 있었소. 저 멀리 검푸르게 보이는 것이 채 얼어붙지 아니한 물이겠지요. 오늘 밤에 바람이 없고 기온이 내리면 그것마저 얼어붙을는지 모르지요. 벌써 살얼음이 잡혔는지도 모르지요. 아아, 그 속은 얼마나 깊을까. 나는 바이칼의 물 속이 관심이 되어서 못 견디겠소.
 
324
형! 나는 자백하지 아니할 수 없소. 이 꿈은 내 마음의 어떤 부분을 설명한 것이라고. 그러나 형! 나는 이것을 부정하려오. 굳세게 부정하려오. 나는 이 꿈을 부정하려오. 억지로라도 부정하려오. 나는 결코 내 속에 일어난 혁명을 용인하지 아니하려오. 나는 그것을 혁명으로 인정하지 아니하려오. 아니오! 아니오! 그것은 반란이오! 내 인격의 통일에 대한 반란이오. 단연코 무단적으로 진정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반란이오. 보시오! 나는 굳게 서서 한 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아니할 것이오. 만일에 형이 광야에 구르는 내 시체나 해골을 본다든지, 또는 무슨 인연으로 내 무덤을 발견하는 날이 있다고 하면 그 때에 형은 내가 이 모든 반란을 진정한 개선의 군주로 죽은 것을 알아 주시오.
 
325
인제 바이칼에 겨울의 석양이 비치었소. 눈을 인 나지막한 산들이 지는 햇빛에 자줏빛을 발하고 있소. 극히 깨끗하고 싸늘한 광경이오. 아디유!
 
326
이 편지를 우편에 부치고는 나는 최후의 방랑의 길을 떠나오. 찾을 수도 없고, 편지 받을 수도 없는 곳으로.
 
327
부디 평안히 계시오. 일 많이 하시오. 부인께 문안 드리오. 내 가족과 정임의 일 맡기오. 아디유!
 
328
이것으로 최석 군의 편지는 끝났다.
【원문】유정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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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정(有情) [제목]
 
  이광수(李光洙) [저자]
 
  조선 일보(朝鮮日報) [출처]
 
  1933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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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10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