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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정(有情) ◈
◇ 유정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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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
이광수(李光洙)
1
유정(有情) - 4
 
 
2
그것은 어느 월요일이었소. 나는 조회 시간에 생도들에게 `여자를 존경하라, 여자를 희롱하는 생각을 가지지 말아라.' 하는 훈화를 하였소. 그것은 전날 신문에 어떤 학교 학생 셋이 지나가는 여학생을 희롱하다가 어떤 의분있는 행인과의 사이에 말썽이 되었다는 기사를 보고 느낀 바 있어서 한 말이었소.
 
3
첫 시간인 사년급 수신 시간에 나는 가장 엄숙한 안색과 태도로 출석부와 교과서와 분필갑을 들고 교실로 들어갔소.
 
4
그랬더니 출석부를 부를 때부터 교실에는 끼득끼득 한두 사람의 웃는 소리가 들렸으나 원체 까다롭게 굴려고 아니하는 나는 그런 것을 못 들은 체하였소. 그리고 태연히 출석부를 다 부르고 나서 책을 펴 놓고 교수를 시작하려 할 때에 사십여 명 학생 중에서 거진 반수나 되는 듯싶도록 교실을 흔들게 웃었소.
 
5
아무리 까다롭지 못한 나로도 낯이 화끈하고 불쾌한 감정이 일어나서,
 
6
“웬일들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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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소리를 질렀소. 내 소리는 교실 유리창이 울리도록 크고 또 떨렸소. 이전에 없던 성난 소리에 학생들은 웃음을 그쳤소. 나도 내 음성이 어떻게 그렇게 컸던가, 또 떨렸던가를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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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정연해지기로 나는 더 추궁하려고 아니하고 다시 강의를 시작하려고 하였소. 그러나 내가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들은 또 소리를 내어 웃었소. 아주 유쾌하게 그리고 조롱하는 듯한 웃음이었소. 이에 나는 필유곡절이라고 생각하고 책을 덮어 놓고 무서운 눈으로 학생들을 노려보았소. 내 눈을 보고 마음이 약한 아이들은 시치미를 뗐으나 평소에 다소 불량성을 띤 놈들은 `허, 허', `하, 하' 하고 분명히 선생이요 교장인 내게 대하여 적의와 모멸을 표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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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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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한 학생이 일어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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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들은 칠판에 써 놓은 저 글이 우스워서 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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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손가락으로 칠판을 가리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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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제야 몸을 돌려서 칠판을 보았소. 그리고 앞이 캄캄해짐을 깨닫는 동시에 뒤에서 아이들이 일제히 발을 구르며 웃고 칠판에 쓰인 글을 노래하는 듯이 합창함을 들었소. 나는 그 순간에 교단 위에 쓰러지지 아니한 것을 이상하게 여기오. 내 심장의 고동과 호흡은 분명히 정지가 되었었소. 내 수족과 등골에는 언제 어떻게 솟은 것인지 찬땀이 흘렀소. 세상에 이런 일도 있소? 그러한 지 거의 일 년을 지낸 오늘날이언마는 이 글을 쓸 때에도 내 심장의 고동과 호흡이 막힘을 깨닫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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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득아득하는 눈을 다시 떠서 칠판을 한 번 더 바라보았소. 그러나 칠판에 쓰인 글자는 아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을 뿐더러 내 눈의 관계인지 더욱 크게 보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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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 교장 최석, 에로 여자 고등 사범 학생 남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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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써 놓은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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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번개같이 내 날이 온 것을 깨달았소. 나의 십오 년 간 교육자로의 생활의 끝날이 온 것을 깨달았소. 그리고 나는 그 칠판에 쓴 것을 지워 버릴 생각도 아니하고 출석부와 책과 분필갑을 들고 교실 밖으로 나왔소. 뒤에서 아이놈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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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 교장 만세! 만세!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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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만세를 합창하고는 박장을 하고 발을 구르고 웃는 소리가 나오.
 
20
나는 그 중에 어느 소리가 어느 놈의 소리인지 분명히 알 수가 있었소. 내가 몸소 입학 구술 시험을 보아서 들이고 또 내 손으로 사 년 동안 가르친아이들이 아니오? 그 한 놈, 한 놈을 내가 내 친자식과 같이 애지중지하던 것들이 아니오?
 
21
나는 교장실로 들어가기 전에 교무주임 K를 힐끗 보았소. 그는 전 교장 S라는 서양인이 늙어서 그만두고 귀국할 때에 나와 함께 교장 후보자가 되었던 사람이오. 그러다가 이사회에서 선거한 결과로 내가 당선이 되고, 그가 낙선이 된 것이오. 그는 본래 이 학교에 오래 있었고 나는 J전문 학교의 교수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었소? 형도 다 아시는 바이어니와 이 사람은 나 때문에 자기가 교장이 못 된 것을 원한으로 알고 항상 무슨 기회를 엿보던 판이 아니었소? 겉으로는 내게 대하여 부하로서의 충성과 친구로서의 우의를 꾸미나 나도 바보가 아닌 연에 그 사람 K의 심정을 노상 모를 리야 있소. 그렇지마는 일전에 순임이가, `교무 선생님도 보셨답니다.' 하는 말을 듣기는 들었지만 설마 이것을 가지고 나를 잡는 연장을 삼으리라고까지는 생각지 못하였었소. K도 나와 같이 교회의 직분을 띤 사람이 아니오? 예배당에서는 성경을 강론하고 기도를 인도하는 지도자가 아니오? 설마 그 사람이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지 않소. 그러나 이 일은 K교무주임의 음모에서 나온 것임을 나는 나중에 알았소. 그리고 K교무주임은 지금은 소원 성취하여 내 뒤를 이어서 교장이 되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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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장실에 들어가는 길로 사표를 써 놓고 K교무주임을 불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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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히 무책임한 일 같소이다마는 나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사직하니 곧 선생이 이사회를 모으고 처리하시지요. 그 때까지는 교장 사무를 선생이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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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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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일이시오? 청천 벽력으로 웬일이시오? 교장이 사직을 하시면 학교는 어떻게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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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펄쩍 뛰던 그의 모양이 지금도 눈에 선하오. 아직까지도 K씨, 지금은 교장이 나를 그렇게 아끼는지 한 번 물어 보고 싶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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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려나 이 모양으로 나는 교육가로서의 생활을 끝을 막음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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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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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교육가로서의 생활의 끝만 되겠소? 내가 이번 일로 하여서 받은 타격은 내 명예와 자존심을 파괴해 버렸소. 나는 가정에서는 남편으로나 아비로나 완전히 위신을 잃어버렸고, 학교에서는 교장으로나 교사로나 완전히 큰 죄인이 되어 버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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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석간 모 신문에 `에로 교장'이라는 문구를 수없이 늘어놓은 기사가 났소. 내가 교장을 사직한 이면이라고 해서 내 아내의 입에서 나온 말과 거의 같으나 거기다가 살을 붙이고 문체를 돋친 기사가 난 것이오. 이 기사에 의하면 나는 본래 위선자요, 행실이 부정한 자였소. 형도 반드시 이 기사를 보고 놀랐으리라 믿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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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모 당국자 담'이라는 제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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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교장이 사직한 것은 사실입니다. 글쎄 그것이 사실이라면 교육계의 큰 불상사입니다. 사람이란 외모로만 취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러나 사실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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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말이 그 신문 기사에 붙어 있었소. 이 모 당국자라는 것이 교무주임인 것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학생들을 선동해 놓고 내가 사표를 제출할 때에는 펄펄 뛰며 붙잡고, 그리고 신문 기사에 관해서는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는 말을 하면서 외모로만 취할 수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 이 교무주임의 재주외다. 교장이 되리라고 이사회에서 말하면 그는 반드시 `천만에!' 하고 펄펄 뛸 것이지마는 이사회의 공기가 자기에게 불리할 것 같으면 반드시 또 어떠한 음모를 할 것이 눈에 보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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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던 신문을 내던지고 최후의 결심을 하였소. 가정과 학교에서 쫓겨난 나 최석은 인제는 조선에서 쫓겨 나갈 프로그램에 다다른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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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도리어 태연하였소. 내가 어떻게 이 경우에 이렇게 태연하였을까. 지금 생각하면 몇 가지 이유가 있었소. 첫째로는 하도 의외에 오는 큰 타격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는 큰 타격이니까 이 큰 타격이 내 정신을 마비시킨 것이겠지요. 둘째로는 도무지 내 양심에 부끄러워할 것이 없는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셋째로는 아내, 자식, 동지, 동료, 세상의 믿을 수 없음에 낙망하여 에라 이런 놈의 가정이나 세상을 떠나 버리자 시원하게 떠나 버리자 한 것이 이유가 되었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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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도무지 힘들게 생각하지도 아니하고 딱 결심을 하여 버렸소. 집을 떠나자, 조선을 떠나자, 그리고 아무쪼록 속히 이 세상을 떠나 버리자 하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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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 결심을 하고 태연히 저녁상을 받고 아내더러 오늘 신문 석간을 보라고 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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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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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나는 밥을 몇 숟가락 먹은 뒤에 뾰로통하고 앉았는 아내를 불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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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 챙견이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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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아내는 내가 예기하였던 바와 같이 톡 쏘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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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런 게 아니라 오늘 ▣▣신문 석간에 당신이 보면 퍽 좋아할 말이 났단 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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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나는 웃었소. 정말 유쾌하게 웃었소. 내가 아내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이 유쾌하였단 말이오. 나는 아직 내가 교장을 사직한 것을 아내에게도 알리지 아니하였소. 알릴 사이도 없고 알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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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현재의 심리 상태로서 내가 보란다고 아내가 곧 신문을 볼 리가 없소. 내가 밥을 먹고 나간 뒤에야 볼 것이오. 그 때까지는 아무리 호기심이 있더라도 아니 볼 것이오. 미운 남편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 골딱지가 난단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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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물 만 밥을 거의 다 먹은 때에 순임이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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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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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문을 박차듯이 뛰어들어왔소. 내가 있는 것을 보고 주춤하였소. 순임의 손에는 내가 말한 석간이 들려 있었소. 나는 속으로 또 한 번 유쾌한 듯이 픽 웃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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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이 신문 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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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순임은 내 사진까지 난 신문을 내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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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안 봐? 그런 재미있는 기사를 놓칠 듯싶으냐. 너 어머니나 보여 드려라, 심심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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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나는 바늘을 박은 독한 말을 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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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이를 어쩌우? 이걸 좀 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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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순임은 신문을 제 어머니 앞에 펴 놓고는 훌쩍훌쩍 울기를 시작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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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임이가 우는 것을 보니까 얼음같이 찬 웃음으로 찼던 내 가슴에는 뜨거운 무엇이 흐름을 깨달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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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그 기사를 읽었소. 나는 밥을 다 먹고 나서도 아내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가, 이 기사가 내 아내에게 어떠한 반응을 주는가를 알고 싶어서 가만히 벽에 기대어 있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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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그 기사를 다 읽고 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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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고소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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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한 마디를 내던지고는 우는 순임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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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기는 왜 우니? 왜 신문에서 없는 말을 썼니? 신문 기자가 날더러 물었더면 좀더 자세히 말을 해 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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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다음에는 나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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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됐구려. 원래 교장 노릇을 하기가 잘못이지. 무슨 낯으로 뻔뻔스럽게 교장 노릇을 한단 말요? 애시 고만둘 게지. 흥 교육가. 인제 잘됐구려. 짓망신하고 인제야 더 망신할 나위 없으니 마음대로 정임이하구 사랑을 하든지 건넌방을 하든지 하시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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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는 잠깐 쉬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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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모양 좋소. 인제 어디 낯을 들고 나가 댕긴단 말요? 아이 고소해라! 깨깨 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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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길게 한숨을 내어 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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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임은 복받쳐오르는 울음을 참을 수 없어 건넌방으로 가 버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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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아내의 이런 독한 말을 듣고도 조금도 노엽지도 아니하였소. 다만 순임이가 우는 것이 마음이 아플 뿐이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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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날 밤에 거의 밤이 새도록 재산 목록을 만들고 유언을 썼소. 나는 내 재산을 오 등분하여 아내, 순임, 선임, 희, 정임 다섯 몫에 평균 분배할 것을 말하고 은행에 현금 예금 중에서 얼마를 찾아서 내가 세상을 하직하는 날까지 마음대로 쓰기로 하였소. 이튿날 아침에 나는 이것으로 공정 증서를 만들어 원본을 내 집 금고에 넣고 등본 한 벌을 형에게로 보낸 것이오. 그리고 나는 온다간다 말 없이 슬그머니 집을 떠나서 여의도 비행장에서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소. 비행기를 탄 것은 아무쪼록 남의 눈에 뜨이지 말자는 뜻이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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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처음은 만주 방면으로 달아나려고 하였소. 우리 조선 사람이란 달아난다면 곧 만주 방면을 연상하는 버릇이 있는 까닭이었소. 세상을 버리려고 가는 길에 방향이 있을 리가 있소? 그러나 어디를 가든지 나는 마지막으로 정임을 한 번 보아야 하겠어서 동경으로 향한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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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루룩 하는 프로펠러 소리에 한강, 서울 삼각산이 까맣게 안개 속으로 숨어 버리고 추풍령을 멀리 천여 미터 밑으로 내려다보는 새에 어느덧 울산에 다다라 잠깐 쉬고 창파 묘망한 천 리 검은 바다 위에 날 때에는 벌써 내가 사랑하던 조선의 땅은 구름 밖에 숨어 버리고 말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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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다시 볼지 모르는 조선의 땅이여! 하고 나는 가슴이 아팠소마는 그런 생각도 순식간이요, 벌써 후쿠오카 이 모양으로 이튿날 오후에 동경에 다다랐소.
 
71
정임의 병실 문을 두드리니 문을 여는 것은 정임이었소.
 
72
“웬일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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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나는 깜짝 놀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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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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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정임은 나 이상으로 놀라는 모양으로 뒤로 물러섰소. 정임은 머리를 아무렇게나 틀고 자줏빛 줄 있는 배스로브를 입고 발을 벗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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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오는 길이다. 그런데 어느 새에 일어났느냐. 그래도 괜찮으냐. 간호부랑은 다 어디 갔니?”
 
77
하면서 정임의 모양을 훐어보았소.
 
78
수척한 것이야 말할 것도 없지마는 그래도 병색은 좀 덜한 것 같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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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제가 이렇게 기동을 하게 되어서 간호부는 돌려 보냈어요. 오늘 선생께서 회진을 오시면 퇴원을 시켜 달랄려고 했는데요.”
 
80
하고 정임은 제가 병이 나았다는 것을 실지로 보이려는 듯이 비틀거리지 않는 걸음으로 서너 걸음 걸어 보이고 내가 앉을 교의를 밀어 놓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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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임이가 권하는 교의에 앉았소.
 
82
“그래 먹기는 무얼 먹니?”
 
83
“죽 먹는데, 죽에 물렸어요. 밥을 좀 먹고 싶은데 밥을 안 줍니다.”
 
84
하고 주저주저하면서 내 곁에 걸어와서 내가 앉은 교의에 한 손을 얹고 서오. 나는 정임의 일기에 `그이의 옷자락이라도 손끝이라도 스치고 싶은 걸 어찌하나.' 한 것을 생각하였소. 정임이 제야 내가 그 일기를 읽은 줄도 모르고 또 내 몸에 어떻게 큰 변화가 생긴 줄도 모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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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떻게 오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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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정임은 내가 침묵하고 있는 것을 견디다 못하여 물었소. 나는 내가 전번 정임을 보고 간 뒤에 일어난 모든 일이 어지럽게 생각이 나고 또 앞에 내가 나갈 일이 막연하게 보여서 말이 막혀서 우두커니 앉았던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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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볍게,
 
88
“네가 어떤가 보려고 왔다.”
 
89
하고 무의식중에 길게 한숨을 쉬었소.
 
90
“학교도 쉬시고?”
 
91
하고 정임은 내 양복 깃을 만져서 접히는 것을 바로잡는 모양이었소.
 
92
“학교는 사직해 버렸다.”
 
93
“네에? 왜요?”
 
94
하고 정임은 교의에 얹었던 손을 떼어 가지고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서오.
 
95
“다른 일을 좀 해 볼 양으로.”
 
96
“네에.”
 
97
하고 정임은 더 파서 묻기가 미안한 모양이나 그 눈에는 의심과 불안이 꽉 찬 것이 분명하였소.
 
98
그러나 나는 지금 정임의 마음을 괴롭게 할 말을 하여서는 아니 될 것을 생각하였소. 그러나 정임에게 가장 놀랍지 아니하게 가장 정임이가 받을 타격의 분량이 적도록 그 동안 일어난 사정을 말하지 아니치 못할 필요도 있는 것은 사실이오. 그 일은 정임에게도 관계가 되는 일이니까.
 
99
“나는 어디 여행을 좀 하고 올란다. 그래서 떠나기 전에 너를 한 번 더 보고 가려고 왔다. 몸도 성하지 못한 것을 혼자 두고 가서 안 되었지마는 내가 있대야 별 수 없고 네 치료비는 P선생에게 맡기고 가니 아무 때에나 필요하거든 찾아 써라. 절약해 쓰면 네가 일생이라도 먹고 살 만하니 돈 걱정은 말고 부디 몸조심해서 공부를 잘해라. 네가 호흡기가 약하니까 학교를 졸업하더라도 교사 노릇할 생각은 말고 혼인하기까지에는 너 혼자서 네 마음대로 책이나 보고 너 하고 싶은 일을 하여라. 내가 너를 여덟 살부터 길렀으니 의로나 정으로나 내 친딸과 조금도 다름이 없을 뿐더러 부모도 안 계시고 몸도 약하니 내가 순임이를 생각하는 것보다 너를 더 가엾게 생각한다. 내 생각 같아서는 너를 늘 내 곁에 두고 싶건마는 어디 사정이 그리 되느냐. 그러니 너는 내 집에 올 생각도 말고 너 혼자 네 길을 개척하여라. 나는 네가 범상한 아이가 아닌 것을 믿는다. 너는 반드시 남 못 한 일을 할 아인 줄을 믿는다. 그러니까 부디 몸을 조심해서 부디 주의해서 세상이 너를 향하여 무슨 말을 할지라도 무슨 참을 수 없는 말을 할지라도 도무지 괴로워 말고 흔들리지도 말고 태연하게 나가거라. 너는 내 크나큰 희망 중에 하나다. 부디 내 말을 허술히 알지 말고, 알아들었니?”
 
100
이 모양으로 말을 하였소. 여행 중에 준비하여서 아주 냉정하게 말하려던 것이 정작 정임을 대해서 이 말을 하게 되니 점점 흥분이 되어서 말이 떨리고 눈물이 끓어오름을 깨달았소.
 
101
고개를 숙이고 서서 듣던 정임은 울기 시작하였소. 그는 울음을 참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양이었으나 몸이 흔들리고 눈물이 쏟아졌소.
 
102
나는 아뿔싸 이거 안 되었구나 하고 벌떡 일어나서 정임의 어깨에 손을 얹고,
 
103
“아가 울지 마라, 울면 병이 더친다. 자, 가 드러누워라. 내 여관에 갔다가 내일 아침에 오마. 어서 울지 말고 가 드러누워.”
 
104
하고 정임을 침대 곁으로 밀었소.
 
105
그랬더니 정임은 열정에 견디지 못하는 듯이 내 가슴에 얼굴을 대고 더욱 느껴 우오.
 
106
“얘! 울지 말어!”
 
107
하고 나는 아비의 위엄으로 소리를 질렀소. 그리고 정임의 어깨를 잡아서 몸에서 떼어 밀었소.
 
108
정임은 눈물이 흐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소리로,
 
109
“저를 딸이라고 불러 주셔요!”
 
110
하고는 또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몸을 내게 기대었소.
 
111
“오냐, 네가 내 딸이다. 내가 네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네 아버지다. 정임아, 네가 내 딸이다!”
 
112
하고 나는 터지려는 울음을 참으면서 정임의 등을 한 번 만져 주었소.
 
113
그리고,
 
114
“정임아 인제 울지 말고 드러누워서 안정해라.”
 
115
하고 나는 정임을 억지로 떠밀어다가 침대에 누이고 담요를 덮어 주고 눈물을 씻어 주고, 그리고는,
 
116
“그런데 이 간호부는 어디 갔단 말이냐? 오, 내보냈다지? 그럼 쓰키소이는 어디 갔단 말이냐?”
 
117
하고 교의에 돌아와 앉았소.
 
118
정임은 대답이 없고 다만 두 손으로 낯을 가리우고 울기만 하였소.
 
119
이 때에 간호부가 저녁 검온을 하러 들어왔소.
 
120
나는 일어나서 공손하게 인사하고 정임이가 신세진 치하를 하였소.
 
121
“속히 나으셔서 기쁘시겠습니다.”
 
122
하고 간호부는 답례를 하고 정임의 곁으로 가서,
 
123
“난상(남 선생), 주무시오? 우시오? 이케마센요(좋지 않습니다).”
 
124
하고 검온기를 정임의 배에 놓고 나가 버리오.
 
125
나는 병원에서 어떤 모양으로 여관에 돌아왔는지 모르오. 어디서 어떻게 택시를 주워 타고 어떻게 호텔 문을 들어와서 층층대를 올라왔는지 모르오. 어떻게 보이에게 키를 달래 가지고 문을 열고 들어왔는지 모르오. 정임의 앞에서 억제하였던 모든 감정이 병원 문을 나서면서 폭발이 된 것이오.
 
126
방에 들어와 앉아서 나는 불을 켤 생각도 아니 하고 저녁을 먹을 생각도 아니 하고 취한 사람 모양으로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언제까지든지 몸도 꼼짝 아니 하고 앉아 있었소.
 
127
밖에서는 비가 오는 모양이오. 전차와 자동차 달리는 소리가 빗소리에 섞여서 우는 소리 모양으로 들리오.
 
128
나는 교의에서 벌떡 일어나며,
 
129
“가자. 내일 아침에 떠나자. 정임에게는 온다간다 말도 없이 가 버리고 말자.”
 
130
하고 혼자 중얼거렸소.
 
131
그리고 식당에 가서 요기를 하고는 로비에 앉아서 사람들이 오락가락하는 것을 보고 있었소. 밖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의 외투에 물방울이 번쩍거리는 것을 보니 상당히 비가 오는 모양이오. 로비 한편 구석 테이블 앞에 어떤 인도 사람인 듯한 이 하나가 혼자 앉아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소. 그렇게도 고요하게, 그렇게도 애수의 빛을 띠고, 다른 아리안족들은 모두 혹은 동족 여자와, 혹은 일본 여자와 유쾌하게 기운 있게 환담을 하는데 인도인 신사 한 분만이 그렇게도 적막하게 앉았소.
 
132
내가 내일 이 곳을 떠나면 어디로 갈는지 모르거니와 내 앞에 닥칠 내 신세가 꼭 저 인도인의 신세와 같을 것 같았소.
 
133
영국인, 미국인 그 호기 있는 사람들에게는 말을 붙일 생각이 없었으나 나는 이 인도인 신사와는 말을 붙여 보고 싶었소. 그는 나와는 퍽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소. 처음 보지마는 정다운 것 같았소.
 
134
그러나 내 가슴에 사무친 한량없는 근심은 이 인도인 신사에게 말을 붙일 여유를 주지 아니하였소. 아까 병원에서 정임이가 울고 내 가슴에 안기던 모양이 눈앞에 번쩍하면 내 심장은 형언할 수 없는 격렬함과 불규칙함을 가지고 뛰었소. 쾅쾅쾅쾅 하는 절망적이요 어지러운 소리가 내 귀에 들리는 듯하였소.
 
135
나는 이층인 내 방으로 올라왔소. 나는 내 마음의 평정을 억지로 회복할 양으로 활활 옷을 벗고 목욕을 하고 그리고 자리옷을 갈아입고 그리고는 불을 끄고 침대 속으로 뛰어들어가서,
 
136
“나는 잔다.”
 
137
하고 스스로 소리를 질렀소.
 
138
나는 몇 번이나 등을 켰다가는 끄고, 켰다가는 끄고 하다가 마침내 벌떡 일어났소.
 
139
나는 편지지를 내어 놓고,
 
140
“사랑하는 딸 정임아.”
 
141
하고 썼다가는 `사랑하는'이라는 말이 온당치 아니한 듯하여 찢어 버리고,
 
142
“내 딸 정임아.”
 
143
하고 썼다가는 `내'라는 말이 불온하다 하여 찢어 버리고, 마침내,
 
144
“딸 정임아!
 
145
나는 간다.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나는 간다.
 
146
나는 조선을 버리고 내가 지금까지 위해서 살고, 속에서 살고, 더불어 살던 모든 것을 떠나서 나는 지향 없이 간다.
 
147
내 딸아!
 
148
나는 네 일기를 보았다. 네가 나를 얼마나 사모해 주는지를 잘 알았다. 그리고 아까 네가 울면서 내 가슴에 안기던 정을 내가 안다. 부모도 없는 너, 외로운 너, 병든 너의 그 형언할 수 없는 적막을 내가 안다. 그러나 정임아, 나는 네 사모함을 받을 수가 없는 사람이다. 네가 나를 사모하느니만큼 나도 너를…….”
 
149
하고 그 다음 말을 무엇이라고 쓸까 하고 붓을 정지하였소.
 
150
`나도 너를 사모.'
 
151
라는 것은 물론 말이 아니 되고,
 
152
`나는 너를 사랑.'
 
153
이라고 하면? 하고 나는,
 
154
`아니! 아니!'
 
155
하고 힘있게 몸을 흔들었소.
 
156
나는 `사랑'이란 말에 이르러서 힘있게 몸을 흔들고는 붓대를 내던지고 황송한 망상을 떨어 버리려고 문을 열고 루프로 나갔소. 한참이나 인적 없는 루프로 거닐다가 빗방울이 내 뜨거운 뺨을 치는 것을 깨달았소. 동풍인지 북풍인지 모르나 바람이 부오. 입김 모양으로 훅 불고는 그치고, 그럴 때마다 빗발이 가로 뿌리오.
 
157
긴자의 네온사인 빛이 <파우스트>에 나오는 요귀의 불빛 모양으로 푸르무레 하게 허공을 비추오. 동경의 불바다는 내 마음을 더욱 음침하게 하였소.
 
158
이 때에 뒤에서,
 
159
“모시모시(여보세요).”
 
160
하는 소리가 들렸소. 그것은 흰 저고리를 입은 호텔 보이였소.
 
161
“왜?”
 
162
하고 나는 고개만 돌렸소.
 
163
“손님이 오셨습니다.”
 
164
“손님?”
 
165
하고 나는 보이에게로 한 걸음 가까이 갔소. 나를 찾을 손님이 어디 있나 하고 나는 놀란 것이오.
 
166
“따님께서 오셨습니다. 방으로 모셨습니다.”
 
167
하고 보이는 들어가 버리고 말았소.
 
168
“따님?”
 
169
하고 나는 더욱 놀랐소. 순임이가 서울서 나를 따라왔나? 그것은 안 될 말이오. 순임이가 내 뒤를 따라 떠났더라도 아무리 빨리 와도 내일이 아니면 못 왔을 것이오. 그러면 누군가. 정임인가. 정임이가 병원에서 뛰어온 것인가.
 
170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하면서 내 방문을 열었소.
 
171
그것은 정임이었소. 정임은 내가 쓰다가 둔 편지를 보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 내게 달려들어 안겨 버렸소. 나는 얼빠진 듯이 정임이가 하라는 대로 내버려두었소. 그 편지는 부치려고 쓴 것도 아닌데 그 편지를 정임이가 본 것이 안되었다고 생각하였소.
 
172
형! 나를 책망하시오. 심히 부끄러운 말이지마는 나는 정임을 힘껏 껴안아 주고 싶었소. 나는 몇 번이나 정임의 등을 굽어 보면서 내 팔에 힘을 넣으려고 하였소. 정임은 심히 귀여웠소. 정임이가 그처럼 나를 사모하는 것이 심히 기뻤소. 나는 감정이 재우쳐서 눈이 안 보이고 정신이 몽롱하여짐을 깨달았소. 나는 아프고 쓰린 듯한 기쁨을 깨달았소. 영어로 엑스터시라든지, 한문으로 무아의 경지란 이런 것이 아닌가 하였소. 나는 사십 평생에 이러한 경험을 처음 한 것이오.
 
173
형! 형이 아시다시피 나는 내 아내 이외에 젊은 여성에게 이렇게 안겨 본 일이 없소. 물론 안아 본 일도 없소.
 
174
그러나 형! 나는 나를 눌렀소. 내 타오르는 애욕을 차디찬 이지의 입김으로 불어서 끄려고 애를 썼소.
 
175
“글쎄 웬일이냐. 앓는 것이 이 밤중에 비를 맞고 왜 나온단 말이냐. 철없는 것 같으니.”
 
176
하고 나는 아버지의 위엄으로 정임의 두 어깨를 붙들어 암체어에 앉혔소. 그리고 나도 테이블을 하나 세워 두고 맞은편에 앉았소.
 
177
정임은 부끄러운 듯이 두 손으로 낯을 가리우고 제 무릎에 엎드려 울기를 시작하오.
 
178
정임은 누런 갈색의 외투를 입었소. 무엇을 타고 왔는지 모르지마는 구두에는 꽤 많이 물이 묻고 모자에는 빗방울 얼룩이 보이오.
 
179
“네가 이러다가 다시 병이 더치면 어찌한단 말이냐. 아이가 왜 그렇게 철이 없니?”
 
180
하고 나는 더욱 냉정한 어조로 책망하고 데스크 위에 놓인 내 편지 초를 집어 박박 찢어 버렸소. 종이 찢는 소리에 정임은 잠깐 고개를 들어서 처음에는 내 손을 보고 다음에는 내 얼굴을 보았소. 그러나 나는 모르는 체하고 도로 교의에 돌아와 앉아서 가만히 눈을 감았소. 그리고 도무지 흥분되지 아니한 모양을 꾸몄소.
 
181
형! 어떻게나 힘드는 일이오? 참으면 참을수록 내 이빨이 마주 부딪고, 얼굴의 근육은 씰룩거리고 손은 불끈불끈 쥐어지오.
 
182
“정말 내일 가세요?”
 
183
하고 아마 오 분 동안이나 침묵을 지키다가 정임이가 고개를 들고 물었소.
 
184
“그럼, 가야지.”
 
185
하고 나는 빙그레 웃어 보였소.
 
186
“저도 데리고 가세요!”
 
187
하는 정임의 말은 마치 서릿발이 날리는 칼날과 같았소. 나는 깜짝 놀라서 정임을 바라보았소. 그의 눈은 빛나고 입은 꼭 다물고 얼굴의 근육은 팽팽하게 켕겼소. 정임의 얼굴에는 찬바람이 도는 무서운 기운이 있었소.
 
188
나는 즉각적으로 죽기를 결심한 여자의 모양이라고 생각하였소. 열정으로 불덩어리가 되었던 정임은 내가 보이는 냉랭한 태도로 말미암아 갑자기 얼어 버린 것 같았소.
 
189
“어디를?”
 
190
하고 나는 정임의 `저도 데리고 가세요.' 하는 담대한 말에 놀라면서 물었소.
 
191
“어디든지, 아버지 가시는 데면 어디든지 저를 데리고 가세요. 저는 아버지를 떠나서는 혼자서는 못 살 것을 지나간 반 달 동안에 잘 알았습니다. 아까 아버지 오셨다 가신 뒤에 생각해 보니깐 암만해도 아버지는 다시 저에게 와 보시지 아니하고 가실 것만 같애요. 그리고 저로 해서 아버지께서는 무슨 큰 타격을 당하신 것만 같으셔요. 처음 뵈올 적에 벌써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그리고 여행을 떠나신다는 말씀을 듣고는 반드시 무슨 큰일이 나셨느니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어, 저로 해서 그러신 것만 같고, 저를 버리시고 혼자 가시려는 것만 같고, 그래서 달려왔더니 여기 써 놓으신 편지를 보고 그 편지에 다른 말씀은 어찌 됐든지, 네 일기를 보았다 하신 말씀을 보고는 다 알았습니다. 저와 한 방에 있는 애가 암만해도 어머니 스파인가봐요. 제가 입원하기 전에도 제 눈치를 슬슬 보고 또 책상 서랍도 뒤지는 눈치가 보이길래 일기책은 늘 쇠 잠그는 서랍에 넣어 두었는데 아마 제가 정신 없이 앓고 누웠는 동안에 제 핸드백에서 쇳대를 훔쳐 갔던가봐요. 그래서는 그 일기책을 꺼내서 서울로 보냈나봐요. 그걸루 해서 아버지께서는 불명예스러운 누명을 쓰시고 학교일도 내놓으시게 되고 집도 떠나시게 되셨나봐요. 다시는 집에 안 돌아오실 양으로 결심을 하셨나봐요. 아까 병원에서도 하시는 말씀이 모두 유언하시는 것만 같아서 퍽 의심을 가졌었는데 지금 그 쓰시던 편지를 보고는 다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192
하고 웅변으로 내려 말하던 정임은 갑자기 복받치는 열정을 이기지 못하는 듯이, 한 번 한숨을 지우고,
 
193
“그렇지만 저는 아버지를 따라가요. 절루 해서 아버지께서는 집도 잃으시고 명예도 잃으시고 사업도 잃으시고 인생의 모든 것을 다 잃으셨으니 저는 아버지를 따라가요. 어디를 가시든지 저는 어린 딸로 아버지를 따라다니다가 아버지께서 먼저 돌아가시면 저도 따라 죽어서 아버지 발 밑에 묻힐 테야요. 제가 먼저 죽거든 제가 병이 있으니깐 물론 제가 먼저 죽지요. 죽어도 좋습니다. 병원에서 앓다가 혼자 죽는 건 싫어요. 아버지 곁에서 죽으면 아버지께서, 오 내 딸 정임아 하시고 귀해 주시고 불쌍히 여겨 주시겠지요. 그리고 제 몸을 어디든지 땅에 묻으시고 `사랑하는 내 딸 정임의 무덤'이라고 패라도 손수 쓰셔서 세워 주시지 않겠습니까.”
 
194
하고 정임은 비쭉비쭉하다가 그만 무릎 위에 엎더져 울고 마오.
 
195
나는 다만 죽은 사람 모양으로 반쯤 눈을 감고 앉아 있었소. 가슴 속에는 정임의 곁에서 지지 않는 열정을 품으면서도 정임의 말대로 정임을 데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 버리고 싶으면서도 나는 이 열정의 불길을 내 입김으로 꺼 버리지 아니하면 아니 되는 것이었소.
 
196
“아아, 제가 왜 났어요? 왜 하나님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셨어요? 아버지의 일생을 파멸시키려 난 것이지요? 제가 지금 죽어 버려서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다면 저는 죽어 버릴 터이야요. 기쁘게 죽어 버리겠습니다. 제가 여덟 살부터 오늘날까지 받은 은혜를 제 목숨 하나로 갚을 수가 있다면 저는 지금으로 죽어 버리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197
그렇지만 그렇지만 저는 다만 얼마라도 다만 하루라도 아버지 곁에서 살고 싶어요 다만 하루만이라도, 아버지! 제가 왜 이렇습니까, 네? 제가 어려서 이렇습니까. 미친 년이 되어서 이렇습니까. 아버지께서는 아실 테니 말씀해 주세요. 하루만이라도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 곁에서 살았으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제 생각이 잘못이야요? 제 생각이 죄야요? 왜 죄입니까? 아버지, 저를 버리시고 혼자 가시지 마세요, 네? `정임아, 너를 데리고 가마.' 하고 약속해 주세요, 네.”
 
198
정임은 아주 담대하게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을 다 하오. 그 얌전한, 수삽한정임의 속에 어디 그러한 용기가 있었던가, 참 이상한 일이오. 나는 귀여운 어린 계집애 정임의 속에 엉큼한 여자가 들어앉은 것을 발견하였소. 그가 몇 가지 재료(내가 여행을 떠난다는 것과 제 일기를 보았다는 것)를 종합하여 나와 저와의 새에, 또 그 때문에 어떠한 일이 일어난 것을 추측하는 그 상상력도 놀랍거니와 그렇게 내 앞에서는 별로 입도 벌리지 아니하던 그가 이처럼 담대하게 제 속에 있는 말을 거리낌없이 다 해 버리는 용기를 아니 놀랄 수 없었소. 내가, 사내요 어른인 내가 도리어 정임에게 리드를 받고 놀림을 받음을 깨달았소.
 
199
그러나 정임을 위해서든지, 중년 남자의 위신을 위해서든지 나는 의지력으로, 도덕력으로, 정임을 누르고 훈계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다고 생각하였소.
 
200
“정임아.”
 
201
하고 나는 비로소 입을 열어서 불렀소. 내 어성은 장중하였소. 나는 할 수 있는 위엄을 다하여 `정임아.' 하고 부른 것이오.
 
202
“정임아, 네 속은 다 알았다. 네 마음 네 뜻은 그만하면 다 알았다. 네가 나를 그처럼 생각해 주는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기쁘게도 생각한다. 그러나 정임아.”
 
203
하고 나는 일층 태도와 소리를 엄숙하게 하여,
 
204
“네가 청하는 말은 절대로 들을 수 없는 말이다. 내가 너를 친딸같이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너를 데리고 가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세상에서 죽고 조선에서 죽더라도 너는 죽어서 아니 된다. 차마 너까지는 죽이고 싶지 아니하단 말이다. 내가 어디 가서 없어져 버리면 세상은 네게 씌운 누명이 애매한 줄을 알게 될 것이 아니냐. 그리되면 너는 조선의 좋은 일꾼이 되어서 일도 많이 하고 또 사랑하는 남편을 맞아서 행복된 생활도 할 수 있을 것이 아니냐. 그것이 내가 네게 바라는 것이다. 내가 어디 가 있든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나는 네가 잘되는 것만, 행복되게 사는 것만 바라보고 혼자 기뻐할 것이 아니냐.
 
205
네가 다 옳게 알았다. 나는 네 말대로 조선을 영원히 떠나기로 하였다. 그렇지마는 나는 이렇게 된 것을 조금도 슬퍼하지 아니한다. 너를 위해서 내가 무슨 희생을 한다고 하면 내게는 그것이 큰 기쁨이다. 그뿐 아니라, 나는 인제는 세상이 싫어졌다. 더 살기가 싫어졌다. 내가 십여 년 동안 전생명을 바쳐서 교육한 학생들에게까지 배척을 받을 때에는 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생각만 하여도 진저리가 난다. 그렇지마는 나는 이것이 다 내가 부족한 때문인 줄을 잘 안다. 나는 조선을 원망한다든가, 내 동포를 원망한다든가, 그럴 생각은 없다. 원망을 한다면 나 자신의 부족을 원망할 뿐이다. 내가 원체 교육을 한다든지 남의 지도자가 된다든지 할 자격이 없음을 원망한다면 원망할까, 내가 어떻게 조선이나 조선 사람을 원망하느냐. 그러니까 인제 내게 남은 일은 나를 조선에서 없애 버리는 것이다. 감히 십여 년 간 교육가라고 자처해 오던 거짓되고 외람된 생활을 끊어 버리는 것이다. 남편 노릇도 못 하고 아버지 노릇도 못 하는 사람이 남의 스승은 어떻게 되고 지도자는 어떻게 되느냐. 하니까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 버리는 것이 조금도 슬프지 아니하고 도리어 몸이 가뜬하고 유쾌해지는 것 같다.
 
206
오직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내 선배요 사랑하는 동지이던 남 선생의 유일한 혈육이던 네게다가 누명을 씌우고 가는 것이다.”
 
207
“그게 어디 아버지 잘못입니까?”
 
208
하고 정임은 입술을 깨물었소.
 
209
“모두 제가 철이 없어서 저 때문에…….”
 
210
하고 정임은 몸을 떨고 울었소.
 
211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마라. 내가 지금 세상을 버릴 때에 무슨 기쁨이 한 가지 남는 것이 있다고 하면 너 하나가, 이 세상에서 오직 너 하나가 나를 따라 주는 것이다. 아마 너도 나를 잘못 알고 따라 주는 것이겠지마는 세상이 다 나를 버리고, 처자까지도 다 나를 버릴 때에 오직 너 하나가 나를 소중히 알아 주니 어찌 고맙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정임아 너는 몸을 조심하여서 건강을 회복하여서 오래 잘 살고, 그리고 나를 생각해 다오.”
 
212
하고 나도 울었소.
 
213
형! 내가 정임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이 잘못이지요. 그러나 나는 그 때에 이런 말을 아니 할 수 없었소. 왜 그런고 하니, 그것이 내 진정이니까. 나도 학교 선생으로, 교장으로, 또 주제넘게 지사로의 일생을 보내노라고 마치 오직 얼음 같은 의지력만 가진 사람 모양으로 사십 평생을 살아 왔지마는 내 속에도 열정은 있었던 것이오. 다만 그 열정을 누르고 죽이고 있었을 뿐이오. 물론 나는 아마 일생에 이 열정의 고삐를 놓아 줄 날이 없겠지요. 만일 내가 이 열정의 고삐를 놓아서 자유로 달리게 한다고 하면 나는 이 경우에 정임을 안고, 내 열정으로 정임을 태워 버렸을는지도 모르오. 그러나 나는 정임이가 열정으로 탈수록 나는 내 열정의 고삐를 두 손으로 꽉 붙들고 이를 악물고 매달릴 결심을 한 것이오.
 
214
열한 시!
 
215
“정임아. 인제 병원으로 가거라.”
 
216
하고 나는 엄연하게 명령하였소.
 
217
“내일 저를 보시고 떠나시지요?”
 
218
하고 정임은 눈물을 씻고 물었소.
 
219
“그럼, J조교수도 만나고 너도 보고 떠나지.”
 
220
하고 나는 거짓말을 하였소. 이 경우에 내가 거짓말쟁이라는 큰 죄인이 되는 것이 정임에게 대하여 정임을 위하여 가장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 까닭이오.
 
221
정임은, 무서운 직각력과 상상력을 가진 정임은 내 말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듯이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소. 나는 차마 정임의 시선을 마주 보지 못하여 외면하여 버렸소.
 
222
정임은 수건으로 눈물을 씻고 체경 앞에 가서 화장을 고치고 그리고,
 
223
“저는 가요.”
 
224
하고 내 앞에 허리를 굽혀서 작별 인사를 하였소.
 
225
“오, 가 자거라.”
 
226
하고 나는 극히 범연하게 대답하였소. 나는 자리옷을 입었기 때문에 현관까지 작별할 수도 없어서 보이를 불러 자동차를 하나 준비하라고 명하고 내 방에서 작별할 생각을 하였소.
 
227
“내일 병원에 오세요?”
 
228
하고 정임은 고개를 숙이고 낙루하였소.
 
229
“오, 가마.”
 
230
하고 나는 또 거짓말을 하였소. 세상을 버리기로 결심한 사람의 거짓말은 하나님께서도 용서하시겠지요. 설사 내가 거짓말을 한 죄로 지옥에 간다 하더라도 이 경우에 정임을 위하여 거짓말을 아니 할 수가 없지 않소? 내가 거짓말을 아니 하면 정임은 아니 갈 것이 분명하였소.
 
231
“전 가요.”
 
232
하고 정임은 또 한 번 절을 하였으나 소리를 내어서 울었소.
 
233
“울지 마라! 몸 상한다.”
 
234
하고 나는 정임에게 대한 최후의 친절을 정임의 곁에 한 걸음 가까이 가서 어깨를 또닥또닥하여 주고, 외투를 입혀 주었소.
 
235
“안녕히 주무세요.”
 
236
하고 정임은 문을 열고 나가 버렸소.
 
237
정임의 걸어가는 소리가 차차 멀어졌소.
 
238
나는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소.
 
239
창에 부딪히는 빗발 소리가 들리고 자동차 소리가 먼 나라에서 오는 것같이 들리오. 이것이 정임이가 타고 가는 자동차 소리인가. 나는 정임을 따라가서 붙들어 오고 싶었소. 내 몸과 마음은 정임을 따라서 허공에 떠가는 것 같았소.
 
240
아아 이렇게 나는 정임을 곁에 두고 싶을까. 이렇게 내가 정임의 곁에 있고 싶을까. 그러하건마는 나는 정임을 떼어 버리고 가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그것은 애끓는 일이다. 기막히는 일이다! 그러나 내 도덕적 책임은 엄정하게 그렇게 명령하지 않느냐. 나는 이 도덕적 책임의 명령 그것은 더위가 없는 명령이다 을 털끝만치라도 휘어서는 아니 된다.
 
241
그러나 정임이가 호텔 현관까지 자동차를 타기 전에 한 번만 더 바라보는 것도 못 할 일일까. 한 번만, 잠깐만 더 바라보는 것도 못 할 일일까. 잠깐만 일 분만 아니 일 초만 한 시그마라는 극히 짧은 동안만 바라보는 것도 못 할 일일까. 아니, 정임을 한 시그마 동안만 더 보고 싶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벌떡 일어나서 도어의 핸들에 손을 대었소.
 
242
`안 된다! 옳잖다!'
 
243
하고 나는 내 소파에 돌아와서 털썩 몸을 던졌소.
 
244
`최후의 순간이 아니냐. 최후의 순간에 용감히 이겨야 할 것이 아니냐. 아서라! 아서라!'
 
245
하고 나는 혼자 주먹을 불끈불끈 쥐었소.
 
246
이 때에 짜박짜박 하고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오. 내 가슴은 쌍방망이로 두들기는 것같이 뛰었소.
 
247
`설마 정임일까.'
 
248
하면서도 나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소.
 
249
그 발자국 소리는 분명 내 문 밖에 와서 그쳤소. 그리고는 소리가 없었소.
 
250
`내 귀의 환각인가.'
 
251
하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소.
 
252
그러나 다음 순간 또 두어 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소.
 
253
“이에스.”
 
254
하고 나는 대답하고 문을 바라보았소.
 
255
문이 열렸소.
 
256
들어오는 이는 정임이었소.
 
257
“웬일이냐.”
 
258
하고 나는 엄숙한 태도를 지었소. 그것으로 일 초의 일천분지 일이라도 다시 한 번 보고 싶던 정임을 보고 기쁨을 카무플라주한 것이오.
 
259
정임은 서슴지 않고 내 뒤에 와서 내 교의에 몸을 기대며,
 
260
“암만해도 오늘이 마지막인 것만 같아서, 다시 뵈올 기약은 없는 것만 같아서 가다가 도로 왔습니다. 한 번만 더 뵙고 갈 양으로요. 그래 도로 와서도 들어올까 말까 하고 주저주저하다가 이것이 마지막인데 하고 용기를 내어서 들어왔습니다. 내일 저를 보시고 가신다는 것이 부러 하신 말씀만 같고, 마지막 뵈옵고, 뵈온대도 그래도 한 번 더 뵈옵기만 해도…….”
 
261
하고 정임의 말은 끝을 아물지 못하였소. 그는 내 등 뒤에 서 있기 때문에 그가 어떠한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볼 수가 없었소. 나는 다만 아버지의 위엄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오.
 
262
`정임아, 나도 네가 보고 싶었다. 네 뒤를 따라가고 싶었다. 내 몸과 마음은 네 뒤를 따라서 허공으로 날았다. 나는 너를 한 초라도 한 초의 천분지 일 동안이라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정임아, 내 진정은 너를 언제든지 내 곁에 두고 싶다. 정임아, 지금 내 생명이 가진 것은 오직 너뿐이다.'
 
263
이런 말이라도 하고 싶었소. 그러나 이런 말을 하여서는 아니 되오! 만일 내가 이런 말을 하여 준다면 정임이가 기뻐하겠지요. 그러나 나는 정임이에게 이런 기쁨을 주어서는 아니 되오!
 
264
나는 어디까지든지 아버지의 위엄, 아버지의 냉정함을 아니 지켜서는 아니 되오.
 
265
그렇지마는 내 가슴에 타오르는 이름지을 수 없는 열정의 불길은 내 이성과 의지력을 태워 버리려 하오. 나는 눈이 아뜩아뜩함을 깨닫소. 나는 내 생명의 불길이 깜박깜박함을 깨닫소.
 
266
그렇지마는! 아아 그렇지마는 나는 이 도덕적 책임의 무상 명령의 발령자인 쓴 잔을 마시지 아니하여서는 아니 되는 것이오.
 
267
`산! 바위!'
 
268
나는 정신을 가다듬어서 이것을 염하였소.
 
269
그러나 열정의 파도가 치는 곳에 산은 움직이지 아니하오? 바위는 흔들리지 아니하오? 태산과 반석이 그 흰 불길에 타서 재가 되지는 아니하오? 인생의 모든 힘 가운데 열정보다 더 폭력적인 것이 어디 있소? 아마도 우주의 모든 힘 가운데 사람의 열정과 같이 폭력적, 불가항력적인 것은 없으리라. 뇌성, 벽력, 글쎄 그것에나 비길까. 차라리 천체와 천체가 수학적으로 계산할 수 없는 비상한 속력을 가지고 마주 달려들어서 우리의 귀로 들을 수 없는 큰 소리와 우리가 굳다고 일컫는 금강석이라도 증기를 만들고야 말 만한 열을 발하는 충돌의 순간에나 비길까. 형. 사람이라는 존재가 우주의 모든 존재 중에 가장 비상한 존재인 것 모양으로 사람의 열정의 힘은 우주의 모든 신비한 힘 가운데 가장 신비한 힘이 아니겠소? 대체 우주의 모든 힘은 그것이 아무리 큰 힘이라고 하더라도 저 자신을 깨뜨리는 것은 없소. 그렇지마는 사람이라는 존재의 열정은 능히 제 생명을 깨뜨려 가루를 만들고 제 생명을 살라서 소지를 올리지 아니하오? 여보, 대체 이에서 더 폭력이요, 신비적인 것이 어디 있단 말이오.
 
270
이 때 내 상태, 어깨 뒤에서 열정으로 타고 섰는 정임을 느끼는 내 상태는 바야흐로 대폭발, 대충돌을 기다리는 아슬아슬한 때가 아니었소. 만일 조금만이라도 내가 내 열정의 고삐에 늦춤을 준다고 하면 무서운 대폭발이 일어났을 것이오.
 
271
“정임아!”
 
272
하고 나는 충분히 마음을 진정해 가지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정임의 얼굴을 찾았소.
 
273
“네에.”
 
274
하고 정임은 입을 약간 내 귀 가까이로 가져와서 그 씨근거리는 소리가 분명히 내 귀에 들리고 그 후끈후끈하는 뜨거운 입김이 내 목과 뺨에 감각되었소.
 
275
억지로 진정하였던 내 가슴은 다시 설레기를 시작하였소. 그 불규칙한 숨소리와 뜨거운 입김 때문이었을까.
 
276
“시간 늦는다. 어서 가거라. 이 아버지는 언제까지든지 너를 사랑하는 딸 로 소중히 소중히 가슴에 품고 있으마. 또 후일에 다시 만날 때도 있을지 아느냐. 설사 다시 만날 때가 없다기로니 그것이 무엇이 그리 대수냐. 나이 많은 사람은 먼저 죽고 젊은 사람은 오래 살아서 인생의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순서가 아니냐. 너는 몸이 아직 약하니 마음을 잘 안정해서 어서 건강을 회복하여라. 그리고 굳세게 굳세게, 힘있게 힘있게 살아 다오. 조선은 사람을 구한다. 나 같은 사람은 인제 조선서 더 일할 자격을 잃어버린 사람이지마는 네야 어떠냐. 설사 누가 무슨 말을 해서 학교에서 학비를 아니 준다거든 내가 네게 준 재산을 가지고 네 마음대로 공부를 하려무나. 네가 그렇게 해 주어야 나를 위하는 것이다. 자 인제 가거라. 네 앞길이 양양하지 아니하냐. 자 인제 가거라. 나는 내일 아침 동경을 떠날란다. 자 어서.”
 
277
하고 나는 화평하게 웃는 낯으로 일어섰소.
 
278
정임은 울먹울먹하고 고개를 숙이오.
 
279
밖에서는 바람이 점점 강해져서 소리를 하고 유리창을 흔드오.
 
280
“그럼, 전 가요.”
 
281
하고 정임은 고개를 들었소.
 
282
“그래. 어서 가거라. 벌써 열한시 반이다. 병원 문은 아니 닫니!”
 
283
정임은 대답이 없소.
 
284
“어서!”
 
285
하고 나는 보이를 불러 자동차를 하나 준비하라고 일렀소.
 
286
“갈랍니다.”
 
287
하고 정임은 고개를 숙여서 내게 인사를 하고 문을 향하여 한 걸음 걷다가 잠깐 주저하더니, 다시 돌아서서,
 
288
“저를 한 번만 안아 주셔요. 아버지가 어린 딸을 안듯이 한 번만 안아 주셔요.”
 
289
하고 내 앞으로 가까이 와 서오.
 
290
나는 팔을 벌려 주었소. 정임은 내 가슴을 향하고 몸을 던졌소. 그리고 제 이뺨 저뺨을 내 가슴에 대고 비볐소. 나는 두 팔을 정임의 어깨 위에 가벼이 놓았소.
 
291
이러한 지 몇 분이 지났소. 아마 일 분도 다 못 되었는지 모르오.
 
292
정임은 내 가슴에서 고개를 들어 나를 뚫어지게 우러러보더니, 다시 내 가슴에 낯을 대더니 아마 내 심장이 무섭게 뛰는 소리를 정임은 들었을 것이오 정임은 다시 고개를 들고,
 
293
“어디를 가시든지 편지나 주셔요.”
 
294
하고 굵은 눈물을 떨구고는 내게서 물러서서 또 한 번 절하고,
 
295
“안녕히 가셔요. 만주든지 아령이든지 조선 사람 많이 사는 곳에 가셔서 일하고 사셔요. 돌아가실 생각은 마셔요. 제가, 아버지 말씀대로 혼자 떨어져 있으니 아버지도 제 말씀대로 돌아가실 생각은 마셔요, 네, 그렇다고 대답하셔요!”
 
296
하고는 또 한 번 내 가슴에 몸을 기대오.
 
297
죽기를 결심한 나는 `오냐, 그러마.' 하는 대답을 할 수는 없었소. 그래서,
 
298
“오, 내 살도록 힘쓰마.”
 
299
하는 약속을 주어서 정임을 돌려보냈소.
 
300
정임의 발자국 소리가 안 들리게 된 때에 나는 빠른 걸음으로 옥상 정원으로 나갔소. 비가 막 뿌리오.
 
301
나는 정임이가 타고 나가는 자동차라도 볼 양으로 호텔 현관 앞이 보이는 꼭대기로 올라갔소. 현관을 떠난 자동차 하나가 전찻길로 나서서는 북을 향하고 달아나서 순식간에 그 꽁무니에 달린 붉은 불조차 스러져 버리고 말았소.
 
302
나는 미친 사람 모양으로,
 
303
“정임아, 정임아!”
 
304
하고 수없이 불렀소. 나는 사 층이나 되는 이 꼭대기에서 뛰어내려서 정임이가 타고 간 자동차의 뒤를 따르고 싶었소.
 
305
“아아 영원한 인생의 이별!”
 
306
나는 그 옥상에 얼마나 오래 섰던지를 모르오. 내 머리와 낯과 배스로브에서는 물이 흐르오. 방에 들어오니 정임이가 끼치고 간 향기와 추억만 남았소.
 
307
나는 방 안 구석구석에 정임의 모양이 보이는 것을 깨달았소. 특별히 정임이가 고개를 숙이고 서 있던 내 교의 뒤에는 분명히 갈색 외투를 입은 정임의 모양이 완연하오.
 
308
“정임아!”
 
309
하고 나는 그 곳으로 따라가오. 그러나 가면 거기는 정임은 없소.
 
310
나는 교의에 앉소. 그러면 정임의 씨근씨근하는 숨소리와 더운 입김이 분명 내 오른편에 감각이 되오. 아아 무서운 환각이여!
 
311
나는 자리에 눕소. 그리고 정임의 환각을 피하려고 불을 끄오. 그러면 정임이가 내게 안기던 자리쯤에 환하게 정임의 모양이 나타나오.
 
312
나는 불을 켜오. 또 불을 끄오.
【원문】유정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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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수(李光洙) [저자]
 
  조선 일보(朝鮮日報) [출처]
 
  1933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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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10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