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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정(有情) ◈
◇ 유정 (7) ◇
카탈로그   목차 (총 : 7권)     이전 7권 ▶마지막
1933
이광수(李光洙)
1
유정(有情) - 7
 
 
2
며칠 후에 순임에게서 편지가 왔다. 그것은 하얼빈에서 부친 것이었다.
 
3
하얼빈을 오늘 떠납니다. 하얼빈에 와서 아버지 친구 되시는 R소장을 만나뵈옵고 아버지 일을 물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희 둘이서 찾아 떠났다는 말씀을 하였더니 R소장이 대단히 동정하여서 여행권도 준비해 주시기로 저희는 아버지를 찾아서 오늘 오후 모스크바 가는 급행으로 떠납니다. 가다가 F역에 내리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정임의 건강이 대단히 좋지 못합니다. 일기가 갑자기 추워지는 관계인지 정임의 신열이 오후면 삼십팔 도를 넘고 기침도 대단합니다. 저는 염려가 되어서 정임더러 하얼빈에서 입원하여 조리를 하라고 권하였지마는 도무지 듣지를 아니합니다. 어디까지든지 가는 대로 가다가 더 못 가게 되면 그 곳에서 죽는다고 합니다.
 
4
저는 그 동안 며칠 정임과 같이 있는 중에 정임이가 어떻게 아름답고 높고 굳세게 깨끗한 여자인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정임을 몰라본 것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제 아버지께서 어떻게 갸륵한 어른이신 것을 인제야 깨달았습니다. 자식 된 저까지도 아버지와 정임과의 관계를 의심하였습니다. 의심하는 것보다는 세상에서 말하는 대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임을 만나 보고 정임의 말을 듣고 아버지께서 선생님께 드린 편지가 모두 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친구의 의지 없는 딸인 정임을 당신의 친혈육인 저와 꼭 같이 사랑하려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갸륵한 일입니까. 그런데 제 어머니와 저는 그 갸륵하신 정신을 몰라보고 오해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질투하시고 저는 시기하였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아버지를 그렇게 갸륵하신 아버지를 몰라뵈온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부끄럽고 원통한 일입니까.
 
5
선생님께서도 여러 번 아버지의 인격이 높다는 것을 저희 모녀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마는 마음이 막힌 저는 선생님의 말씀도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6
선생님, 정임은 참으로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정임에게는 이 세상에 아버지밖에는 사랑하는 아무것도 없이, 그렇게 외▣으로, 그렇게 열렬하게 아버지를 사모하고 사랑합니다. 저는 잘 압니다. 정임이가 처음에는 아버지로 사랑하였던 것을, 그러나 어느 새에 정임의 아버지에게 대한 사랑이 무엇인지 모를 사랑으로 변한 것을, 그것이 연애냐 하고 물으면 정임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정임의 그 대답은 결코 거짓이 아닙니다. 정임은 숙성하지마는 아직도 극히 순결합니다. 정임은 부모를 잃은 후에 아버지밖에 사랑한 사람이 없습니다. 또 아버지에게밖에 사랑받던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깐 정임은 아버지를 그저 사랑합니다 전적으로 사랑합니다. 선생님, 정임의 사랑에는 아버지에 대한 자식의 사랑, 오라비에 대한 누이의 사랑, 사내 친구에 대한 여자 친구의 사랑, 애인에 대한 애인의 사랑, 이 밖에 존경하고 숭배하는 선생에 대한 제자의 사랑까지, 사랑의 모든 종류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저는 발견하였습니다.
 
7
선생님, 정임의 정상은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안부를 근심하는 양은 제 몇십 배나 되는지 모르게 간절합니다. 정임은 저 때문에 아버지가 불행하게 되셨다고 해서 차마 볼 수 없게 애통하고 있습니다. 진정을 말씀하오면 저는 지금 아버지보다도 어머니보다도 정임에게 가장 동정이 끌립니다. 선생님, 저는 아버지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정임을 돕기 위하여 간호하기 위하여 가는 것 같습니다.
 
8
선생님, 저는 아직 사랑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정임을 보고 사랑이란 것이 어떻게 신비하고 열렬하고 놀라운 것인가를 안 것 같습니다.
 
9
순임의 편지는 계속된다.
 
10
선생님, 하얼빈에 오는 길에 송화강 굽이를 볼 때에는 정임이가 어떻게나 울었는지, 그것은 차마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송화강을 보시고 감상이 깊으셨더란 것을 생각한 것입니다. 무인지경으로, 허옇게 눈이 덮인 벌판으로 흘러가는 송화강 굽이, 그것은 슬픈 풍경입니다. 아버지께서 여기를 지나실 때에는 마른 풀만 있는 광야였을 것이니 그 때에는 더욱 황량하였을 것이라고 정임은 말하고 웁니다.
 
11
정임은 제가 아버지를 아는 것보다 아버지를 잘 아는 것 같습니다. 평소에 아버지와는 그리 접촉이 없건마는 정임은 아버지의 의지력, 아버지의 숨은 열정, 아버지의 성미까지 잘 압니다. 저는 정임의 말을 듣고야 비로소 참 그래, 하는 감탄을 발한 일이 여러 번 있습니다.
 
12
정임의 말을 듣고야 비로소 아버지가 남보다 뛰어나신 인물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는 정의감이 굳세고 겉으로는 싸늘하도록 이지적이지마는 속에는 불 같은 열정이 있으시고, 아버지는 쇠 같은 의지력과 칼날 같은 판단력이 있어서 언제나 주저하심이 없고 또 흔들리심이 없다는 것,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호의로 해석하여서 누구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심이 없는 등, 정임은 아버지의 마음의 목록과 설명서를 따로 외우는 것처럼 아버지의 성격을 설명합니다. 듣고 보아서 비로소 아버지의 딸인 저는 내 아버지가 어떤 아버지인가를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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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이해가 사랑을 낳는단 말씀이 있지마는 저는 정임을 보아서 사랑이 이해를 낳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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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어머니와 저는 평생을 아버지를 모시고 있으면서도 아버지를 몰랐습니까. 이성이 무디고 양심이 흐려서 그랬습니까. 정임은 진실로 존경할 여자입니다. 제가 남자라 하더라도 정임을 아니 사랑하고는 못 견디겠습니다.
 
15
아버지는 분명 정임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처음에는 친구의 딸로, 다음에는 친딸과 같이, 또 다음에는 무엇인지 모르게 뜨거운 사랑이 생겼으리라고 믿습니다. 그것을 아버지는 죽인 것입니다. 그것을 죽이려고 이 달할 수 없는 사랑을 죽이려고 시베리아로 달아나신 것입니다. 인제야 아버지께서 선생님께 하신 편지의 뜻이 알아진 것 같습니다. 백설이 덮인 시베리아의 삼림 속으로 혼자 헤매며 정임에게로 향하는 사랑을 죽이려고 무진 애를 쓰시는 그 심정이 알아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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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이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저는 정임의 짐에 지니고 온 일기를 보다가 이러한 구절을 발견하였습니다.
 
17
선생님. 저는 세인트 오거스틴의 <참회록>을 절반이나 다 보고 나도 잠이 들지 아니합니다. 잠이 들기 전에 제가 항상 즐겨하는 아베마리아의 노래를 유성기로 듣고 나서 오늘 일기를 쓰려고 하니 슬픈 소리만 나옵니다.
 
18
사랑하는 어른이여. 저는 멀리서 당신을 존경하고 신뢰하는 마음에서만 살아야 할 것을 잘 압니다. 여기에서 영원한 정지를 하지 아니하면 아니 됩니다. 비록 제 생명이 괴로움으로 끊어지고 제 혼이 피어 보지 못하고 스러져 버리더라도 저는 이 멀리서 바라보는 존경과 신뢰의 심경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옮기지 않아야 할 것을 잘 압니다. 나를 위하여 놓여진 생의 궤도는 나의 생명을 부인하는 억지의 길입니다. 제가 몇 년 전 기숙사 베드에서 이런 밤에 내다보면 즐겁고 아름답던 내 생의 꿈은 다 깨어졌습니다.
 
19
제 영혼의 한 조각이 먼 세상 알지 못할 세계로 떠다니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마음 조각 어찌하다가 제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20
피어 오르는 생명의 광채를 스스로 사형에 처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때 어찌 슬픔이 없겠습니까. 이것은 현실로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것보다 더 무서운 죄가 아니오리까. 나의 세계에서 처음이요 마지막으로 발견한 빛을 어둠 속에 소멸해 버리라는 이 일이 얼마나 떨리는 직무오리까. 이 허깨비의 형의 사람이 살기 위하여 내 손으로 칼을 들어 내 영혼의 환희를 쳐야 옳습니까. 저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21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선생님 이것이 얼마나 피 흐르는 고백입니까.
 
22
선생님, 저는 정임의 이 고백을 보고 무조건으로 정임의 사랑을 시인합니다. 선생님, 제 목숨을 바쳐서 하는 일에 누가 시비를 하겠습니까. 더구나 그 동기에 티끌만큼도 불순한 것이 없음에야 무조건으로 시인하지 아니하고 어찌합니까.
 
23
바라기는 정임의 병이 크게 되지 아니하고 아버지께서 무사히 계셔서 속히 만나뵙게 되는 것입니다마는 앞길이 망망하여 가슴이 두근거림을 금치 못합니다. 게다가 오늘은 함박눈이 퍼부어서 천지가 온통 회색으로 한 빛이 되었으니 더욱 전도가 막막합니다. 그러나 선생님 저는 앓는 정임을 데리고 용감하게 시베리아 길을 떠납니다.
 
24
한 일 주일 후에 또 편지 한 장이 왔다. 그것도 순임의 편지여서 이러한 말이 있었다.
 
25
……오늘 새벽에 흥안령을 지났습니다. 플랫폼의 한란계는 영하 이십삼 도를 가리켰습니다. 사람들의 얼굴은 솜털에 성에가 슬어서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하얗게 분을 바른 것 같습니다. 유리에 비친 내 얼굴도 그와 같이 흰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숨을 들이쉴 때에는 코털이 얼어서 숨이 끊기고 바람결이 지나가면 눈물이 얼어서 눈썹이 마주 붙습니다. 사람들은 털과 가죽에 싸여서 곰같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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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런 말도 있었다.
 
27
아라사 계집애들이 우유병들을 품에 품고 서서 손님이 사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도 두 병을 사서 정임이와 나누어 먹었습니다. 우유는 따뜻합니다. 그것을 식히지 아니할 양으로 품에 품고 섰던 것입니다.
 
28
또 이러한 구절도 있었다.
 
29
정거장에 닿을 때마다 저희들은 밖을 내다봅니다. 행여나 아버지가 거기 계시지나 아니할까 하고요. 차가 어길 때에는 더구나 마음이 조입니다. 아버지가 그 차를 타고 지나가시지나 아니하는가 하고요. 그리고는 정임은 웁니다. 꼭 뵈올 어른을 놓쳐나 버린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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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이 주일 동안이나 소식이 없다가 편지 한 장이 왔다. 그것은 정임의 글씨였다.
 
31
선생님, 저는 지금 최 선생께서 계시던 바이칼 호반의 그 집에 와서 홀로 누웠습니다. 순임은 주인 노파와 함께 F역으로 최 선생을 찾아서 오늘 아침에 떠나고 병든 저만 혼자 누워서 얼음에 싸인 바이칼 호의 눈보라치는 바람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열은 삼십팔 도로부터 구 도 사이를 오르내리고 기침은 나고 몸의 괴로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러하오나 선생님, 저는 하나님을 불러서 축원합니다. 이 실낱 같은 생명이 다 타 버리기 전에 최 선생의 낯을 다만 일 초 동안이라도 보여지이라고. 그러하오나 선생님, 이 축원이 이루어지겠습니까.
 
32
저는 한사코 F역까지 가려 하였사오나 순임 형이 울고 막사오며 또 주인 노파가 본래 미국 사람과 살던 사람으로 영어를 알아서 순임 형의 도움이 되겠기로 저는 이 곳에 누워 있습니다. 순임 형은 기어코 아버지를 찾아 모시고 오마고 약속하였사오나 이 넓은 시베리아에서 어디 가서 찾겠습니까.
 
33
선생님, 저는 죽음을 봅니다. 죽음이 바로 제 앞에 와서 선 것을 봅니다. 그의 손은 제 여윈 손을 잡으려고 들먹거림을 봅니다.
 
34
선생님, 죽은 뒤에도 의식이 남습니까. 만일 의식이 남는다 하면 죽은 뒤에도 이 아픔과 괴로움을 계속하지 아니하면 아니 됩니까. 죽은 뒤에는 오직 영원한 어둠과 잊어버림이 있습니까. 죽은 뒤에는 혹시나 생전에 먹었던 마음을 자유로 펼 도리가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그립고 사모하던 이를 죽은 뒤에는 자유로 만나 보고 언제나 마음껏 같이할 수가 있습니까. 그런 일도 있습니까. 이런 일을 바라는 것도 죄가 됩니까.
 
35
정임의 편지는 더욱 절망적인 어조로 찬다.
 
36
저는 처음 병이 났을 때에는 죽는 것이 싫고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죽는 것이 조금도 무섭지 아니합니다. 다만 차마 죽지 못하는 것이 한.
 
37
하고는 `다만 차마' 이하를 박박 지워 버렸다. 그리고는 새로 시작하여 나와내 가족에게 대한 문안을 하고는 끝을 막았다.
 
38
나는 이 편지를 받고 울었다. 무슨 큰 비극이 가까운 것을 예상하게 하였다.
 
39
그 후 한 십여 일이나 지나서 전보가 왔다. 그것은 영문으로 씌었는데,
 
40
“아버지 병이 급하다. 나로는 어쩔 수 없다. 돈 가지고 곧 오기를 바란다.”
 
41
하고 그 끝에 B호텔이라고 주소를 적었다. 전보 발신국이 이르쿠츠크인 것을 보니 B호텔이라 함은 이르쿠츠크인 것이 분명하였다.
 
42
나는 최석 부인에게 최석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전하고 곧 여행권 수속을 하였다. 절망으로 알았던 여행권은 사정이 사정인만큼 곧 발부되었다.
 
43
나는 비행기로 여의도를 떠났다. 백설에 개개한 땅을, 남빛으로 푸른 바다를 굽어보는 동안에 대련을 들러 거기서 다른 비행기를 갈아타고 봉천, 신경, 하얼빈을 거쳐, 치치하얼에 들렀다가 만주리로 급행하였다.
 
44
웅대한 대륙의 설경도 나에게 아무러한 인상도 주지 못하였다. 다만 푸른 하늘과 희고 평평한 땅과의 사이로 한량 없이 허공을 날아간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것은 사랑하는 두 친구가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을 생각할 때에 마음에 아무 여유도 없는 까닭이었다.
 
45
만주리에서도 비행기를 타려 하였으나 소비에트 관헌이 허락을 아니 하여 열차로 갈 수밖에 없었다.
 
46
초조한 몇 밤을 지나고 이르쿠츠크에 내린 것이 오전 두시. 나는 B호텔로 이스보스치카라는 마차를 몰았다. 죽음과 같이 고요하게 눈 속에 자는 시간에는 여기저기 전등이 반짝거릴 뿐, 이따금 밤의 시가를 경계하는 병정들의 눈이 무섭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47
B호텔에서 미스 초이(최 양)를 찾았으나 순임은 없고 어떤 서양 노파가 나와서,
 
48
“유 미스터 Y?”
 
49
하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
 
50
그렇다는 내 대답을 듣고는 노파는 반갑게 손을 내밀어서 내 손을 잡았다.
 
51
나는 넉넉하지 못한 영어로 그 노파에게서 최석이가 아직 살았다는 말과 정임의 소식은 들은 지 오래라는 말과 최석과 순임은 여기서 삼십 마일이나 떨어진 F역에서도 썰매로 더 가는 삼림 속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52
나는 그 밤을 여기서 지내고 이튿날 아침에 떠나는 완행차로 그 노파와 함께 이르쿠츠크를 떠났다.
 
53
이 날도 천지는 오직 눈뿐이었다. 차는 가끔 삼림 중으로 가는 모양이나 모두 회색빛에 가리워서 분명히 보이지를 아니하였다.
 
54
F역이라는 것은 삼림 속에 있는 조그마한 정거장으로 집이라고는 정거장 집밖에 없었다. 역부 두엇이 털옷에 하얗게 눈을 뒤쓰고 졸리는 듯이 오락가락할 뿐이었다.
 
55
우리는 썰매 하나를 얻어 타고 어디가 길인지 분명치도 아니한 눈 속으로 말을 몰았다.
 
56
바람은 없는 듯하지마는 그래도 눈발을 한편으로 비끼는 모양이어서 아름드리 나무들의 한쪽은 하얗게 눈으로 쌓이고 한쪽은 검은 빛이 더욱 돋보였다. 백 척은 넘을 듯한 꼿꼿한 침엽수(전나무 따윈가)들이 어디까지든지, 하늘에서 곧 내려박은 못 모양으로, 수없이 서 있는 사이로 우리 썰매는 간다. 땅에 덮인 눈은 새로 피워 놓은 솜같이 희지마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구름빛과 공기빛과 어울려서 밥 잦힐 때에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와 같이 연회색이다.
 
57
바람도 불지 아니하고 새도 날지 아니하건마는 나무 높은 가지에 쌓인 눈이 이따금 덩치로 떨어져서는 고요한 수풀 속에 작은 동요를 일으킨다.
 
58
우리 썰매가 가는 길이 자연스러운 복잡한 커브를 도는 것을 보면 필시 얼음 언 개천 위로 달리는 모양이었다.
 
59
한 시간이나 달린 뒤에 우리 썰매는 늦은 경사지를 올랐다. 말을 어거하는 아라사 사람은 쭈쭈쭈쭈, 후르르 하고 주문을 외우듯이 입으로 말을 재촉하고 고삐를 이리 들고 저리 들어 말에게 방향을 가리킬 뿐이요, 채찍은 보이기만하고 한 번도 쓰지 아니하였다. 그와 말과는 완전히 뜻과 정이 맞는 동지인 듯하였다.
 
60
처음에는 몰랐으나 차차 추워짐을 깨달았다. 발과 무르팍이 시렸다.
 
61
“얼마나 머오?”
 
62
하고 나는 오래간만에 입을 열어서 노파에게 물었다. 노파는 털수건으로 머리를 싸매고 깊숙한 눈만 남겨 가지고 실신한 사람 모양으로 허공만 바라보고 있다가, 내가 묻는 말에 비로소 잠이나 깬 듯이,
 
63
“멀지 않소. 인젠 한 십오 마일.”
 
64
하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은 아마 웃는 모양이었다.
 
65
그 얼굴, 그 눈, 그 음성이 모두 이 노파가 인생 풍파의 슬픈 일 괴로운 일에 부대끼고 지친 것을 표하였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살아간다 하는 듯하였다.
 
66
경사지를 올라서서 보니 그것은 한 산등성이였다. 방향은 알 수 없으나 우리가 가는 방향에는 더 높은 등성이가 있는 모양이나 다른 곳은 다 이보다 낮은 것 같아서 하얀 눈바다가 끝없이 보이는 듯하였다. 그 눈보라는 들쑹날쑹이 있는 것을 보면 삼림의 꼭대기인 것이 분명하였다. 더구나 여기저기 뾰족뾰족 눈송이 붙을 수 없는 마른 나뭇가지가 거뭇거뭇 보이는 것을 보아서 그러하였다. 만일 눈이 걷혀 주었으면 얼마나 안계가 넓으랴, 최석 군이 고민하는 가슴을 안고 이리로 헤매었구나 하면서 나는 목을 둘러서 사방을 바라보았다.
 
67
우리는 그 등성이를 내려갔다. 말이 미처 발을 땅에 놓을 수가 없는 정도로 빨리 내려갔다. 여기는 산불이 났던 자리인 듯하여 거뭇거뭇 불탄 자국 있는 마른 나무들이 드문드문 서 있었다. 그 나무들은 찍어 가는 사람도 없으매 저절로 썩어서 없어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나서 아주 썩어 버리기까지 천 년 이상은 걸린다고 하니 또한 장한 일이다.
 
68
이 대삼림에 불이 붙는다 하면 그것은 장관일 것이다. 달밤에 높은 곳에서 이 경치를 내려다본다 하면 그도 장관일 것이요, 여름에 한창 기운을 펼 때도 장관일 것이다. 나는 오뉴월경에 시베리아를 여행하는 이들이 끝없는 꽃바다를 보았다는 기록을 생각하였다.
 
69
“저기요!”
 
70
하는 노파의 말에 나는 생각의 줄을 끊었다. 저기라고 가리키는 곳을 보니 거기는 집이라고 생각되는 물건이 나무 사이로 보였다. 창이 있으니 분명 집이었다.
 
71
우리 이스보스치카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았는지, 그 집 같은 물건의 문 같은 것이 열리며 검은 외투 입은 여자 하나가 팔을 허우적거리며 뛰어나온다. 아마 소리도 치는 모양이겠지마는 그 소리는 아니 들렸다. 나는 그것이 순임인 줄을 얼른 알았다. 또 순임이밖에 될 사람도 없었다.
 
72
순임은 한참 달음박질로 오다가 눈이 깊어서 걸음을 걷기가 힘이 드는지 멈칫 섰다. 그의 검은 외투는 어느덧 흰 점으로 얼려져 가지고 어깨는 희게 되는 것이 보였다.
 
73
순임의 갸름한 얼굴이 보였다.
 
74
“선생님!”
 
75
하고 순임도 나를 알아보고는 또 팔을 허우적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76
나도 반가워서 모자를 벗어 둘렀다.
 
77
“아이 선생님!”
 
78
하고 순임은 내가 썰매에서 일어서기도 전에 내게 와서 매달리며 울었다.
 
79
“아버지 어떠시냐?”
 
80
하고 나는 순임의 등을 두드렸다. 나는 다리가 마비가 되어서 곧 일어설 수가 없었다.
 
81
“아버지 어떠시냐?”
 
82
하고 나는 한 번 더 물었다.
 
83
순임은 벌떡 일어나 두 주먹으로 흐르는 눈물을 쳐내 버리며,
 
84
“대단하셔요.”
 
85
하고도 울음을 금치 못하였다.
 
86
노파는 벌써 썰매에서 내려서 기운 없는 걸음으로 비틀비틀 걷기를 시작하였다.
 
87
나는 순임을 따라서 언덕을 오르며,
 
88
“그래 무슨 병환이시냐?”
 
89
하고 물었다.
 
90
“몰라요. 신열이 대단하셔요.”
 
91
“정신은 차리시든?”
 
92
“처음 제가 여기 왔을 적에는 그렇지 않더니 요새에는 가끔 혼수 상태에 빠지시는 모양이야요.”
 
93
이만한 지식을 가지고 나는 최석이가 누워 있는 집 앞에 다다랐다.
 
94
이 집은 통나무를 댓 개 우물 정자로 가로놓고 지붕은 무엇으로 했는지 모르나 눈이 덮이고, 문 하나 창 하나를 내었는데 문은 나무껍질인 모양이나 창은 젖빛 나는 유리창인 줄 알았더니 뒤에 알아본즉 그것은 유리가 아니요, 양목을 바르고 물을 뿜어서 얼려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통나무와 통나무 틈바구니에는 쇠털과 같은 마른 풀을 꼭꼭 박아서 바람을 막았다.
 
95
문을 열고 들어서니 부엌에 들어서는 모양으로 쑥 빠졌는데 화끈화끈하는 것이 한증과 같다. 그렇지 않아도 침침한 날에 언 눈으로 광선 부족한 방에 들어오니, 캄캄 절벽이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아니하였다.
 
96
순임이가 앞서서 양초에 불을 켠다. 촛불 빛은 방 한편 쪽 침대라고 할 만한 높은 곳에 담요를 덮고 누운 최석의 시체와 같은 흰 얼굴을 비춘다.
 
97
“아버지, 아버지 샌전 아저씨 오셨어요.”
 
98
하고 순임은 최석의 귀에 입을 대고 가만히 불렀다.
 
99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100
나는 최석의 이마를 만져 보았다. 축축하게 땀이 흘렀다. 그러나 그리 더운 줄은 몰랐다.
 
101
방 안의 공기는 숨이 막힐 듯하였다. 그 난방 장치는 삼굿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었다. 돌멩이로 아궁이를 쌓고 그 위에 큰 돌멩이들을 많이 쌓고 거기다가 불을 때어서 달게 한 뒤에 거기 눈을 부어 뜨거운 증기를 발하는 것이었다.
 
102
이 건축법은 조선 동포들이 시베리아로 금광을 찾아다니면서 하는 법이란 말을 들었으나 최석이가 누구에게서 배워 가지고 어떤 모양으로 지었는지는 최석의 말을 듣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다.
 
103
나는 내 힘이 미치는 데까지 최석의 병 치료에 대한 손을 쓰고 어떻게 해서든지 이르쿠츠크의 병원으로 최석을 데려다가 입원시킬 도리를 궁리하였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하면 최석은 살아날 가망이 없는 것만 같았다.
 
104
내가 간 지 사흘 만에 최석은 처음으로 정신을 차려서 눈을 뜨고 나를 알아보았다.
 
105
그는 반가운 표정을 하고 빙그레 웃기까지 하였다.
 
106
“다 일없나?”
 
107
이런 말도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108
그러나 심히 기운이 없는 모양이기로 나는 많이 말을 하지 아니하였다.
 
109
최석은 한참이나 눈을 감고 있더니,
 
110
“정임이 소식 들었나?”
 
111
하였다.
 
112
“괜찮대요.”
 
113
하고 곁에서 순임이가 말하였다.
 
114
그리고는 또 혼몽하는 듯하였다.
 
115
그 날 또 한 번 최석은 정신을 차리고 순임더러는 저리로 가라는 뜻을 표하고 나더러 귀를 가까이 대라는 뜻을 보이기로 그대로 하였더니,
 
116
“내 가방 속에 일기가 있으니 그걸 자네만 보고는 불살라 버려. 내가 죽은 뒤에라도 그것이 세상 사람의 눈에 들면 안 되지. 순임이가 볼까 걱정이 되지마는 내가 몸을 꼼짝할 수가 있나.”
 
117
하는 뜻을 말하였다.
 
118
“그러지.”
 
119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120
그러고 난 뒤에 나는 최석이가 시킨 대로 가방을 열고 책들을 뒤져서 그 일기책이라는 공책을 꺼내었다.
 
121
“순임이 너 이거 보았니?”
 
122
하고 나는 곁에서 내가 책 찾는 것을 보고 섰던 순임에게 물었다.
 
123
“아니오. 그게 무어여요?”
 
124
하고 순임은 내 손에 든 책을 빼앗으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125
나는 순임의 손이 닿지 않도록 책을 한편으로 비키며,
 
126
“이것이 네 아버지 일기인 모양인데 너는 보이지 말고 나만 보라고 하셨다. 네 아버지가 네가 이것을 보았을까 해서 염려를 하시는데 안 보았으면 다행이다.”
 
127
하고 나는 그 책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128
날이 밝다. 해는 중천에 있다. 중천이래야 저 남쪽 지평선 가까운 데다. 밤이 열여덟 시간, 낮이 대여섯 시간밖에 안 되는 북쪽 나라다. 멀건 햇빛이다.
 
129
나는 볕이 잘 드는 곳을 골라서 나무에 몸을 기대고 최석의 일기를 읽기 시작하였다. 읽은 중에서 몇 구절을 골라 볼까.
 
130
“집이 다 되었다. 이 집은 내가 생전 살고 그 속에서 이 세상을 마칠 집이다. 마음이 기쁘다. 시끄러운 세상은 여기서 멀지 아니하냐. 내가 여기 홀로 있기로 누가 찾을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내가 여기서 죽기로 누가 슬퍼해 줄 사람도 없을 것이다. 때로 곰이나 찾아올까. 지나가던 사슴이나 들여다볼까.
 
131
이것이 내 소원이 아니냐. 세상의 시끄러움을 떠나는 것이 내 소원이 아니냐. 이 속에서 나는 나를 이기기를 공부하자.”
 
132
첫날은 이런 평범한 소리를 썼다.
 
133
그 이튿날에는.
 
134
“어떻게나 나는 약한 사람인고. 제 마음을 제가 지배하지 못하는 사람인고. 밤새도록 나는 정임을 생각하였다. 어두운 허공을 향하여 정임을 불렀다. 정임이가 나를 찾아서 동경을 떠나서 이리로 오지나 아니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어떻게나 부끄러운 일인고? 어떻게나 가증한 일인고?
 
135
나는 아내를 생각하려 하였다. 아이들을 생각하려 하였다.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함으로 정임의 생각을 이기려 하였다.
 
136
최석아, 너는 남편이 아니냐. 아버지가 아니냐. 정임은 네 딸이 아니냐. 이런 생각을 하였다.
 
137
그래도 정임의 일류전은 아내와 아이들의 생각을 밀치고 달려오는 절대 위력을 가진 듯하였다.
 
138
아, 나는 어떻게나 파렴치한 사람인고. 나이 사십이 넘어 오십을 바라보는 놈이 아니냐. 사십에 불혹이라고 아니 하느냐. 교육가로 깨끗한 교인으로 일생을 살아 왔다고 자처하는 내가 아니냐 하고 나는 내 입으로 내 손가락을 물어서 두 군데나 피를 내었다.”
 
139
최석의 둘째 날 일기는 계속된다.
 
140
“내 손가락에서 피가 날 때에 나는 유쾌하였다. 나는 승첩의 기쁨을 깨달았다.
 
141
그러나 아아 그러나 그 빨간, 참회의 핏방울 속에서도 애욕의 불길이 일지 아니하는가. 나는 마침내 제도할 수 없는 인생인가.”
 
142
이 집에 든 지 둘째날에 벌써 이러한 비관적 말을 하였다.
 
143
또 며칠을 지난 뒤 일기에,
 
144
“나는 동경으로 돌아가고 싶다. 정임의 곁으로 가고 싶다. 시베리아의광야의 유혹도 아무 힘이 없다. 어젯밤은 삼림의 좋은 달을 보았으나 그 달을 아름답게 보려 하였으나 아무리 하여도 아름답게 보이지를 아니하였다.
 
145
하늘이나 달이나 삼림이나 모두 무의미한 존재다. 이처럼 무의미한 존재를 나는 경험한 일이 없다. 그것은 다만 기쁨을 자아내지 아니할 뿐더러 슬픔도 자아내지 못하였다. 그것은 잿더미였다. 아무도 듣는 이 없는 데서 내 진정을 말하라면 그것은 이 천지에 내게 의미 있는 것은 정임이밖에 없다는 것이다.
 
146
나는 정임의 곁에 있고 싶다. 정임을 내 곁에 두고 싶다. 왜? 그것은 나도 모른다.
 
147
만일 이 움 속에라도 정임이가 있다 하면 얼마나 이것이 즐거운 곳이 될까.
 
148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 나는 이 생각을 죽여야 한다. 다시 거두를 못 하도록 목숨을 끊어 버려야 한다.
 
149
이것을 나는 원한다. 원하지마는 내게는 그 힘이 없는 모양이다.
 
150
나는 종교를 생각하여 본다. 철학을 생각하여 본다. 인류를 생각하여 본다. 나라를 생각하여 본다. 이것을 가지고 내 애욕과 바꾸려고 애써 본다. 그렇지마는 내게 그러한 힘이 없다. 나는 완전히 헬플리스함을 깨닫는다.
 
151
아아 나는 어찌할꼬?
 
152
나는 못생긴 사람이다. 그까짓 것을 못 이겨? 그까짓 것을 못 이겨?
 
153
나는 예수의 광야에서의 유혹을 생각한다. 천하를 주마 하는 유혹을 생각한다. 나는 싯다르타 태자가 왕궁을 버리고 나온 것을 생각하고, 또 스토아 철학자의 의지력을 생각하였다.
 
154
그러나 나는 그러한 생각으로도 이 생각을 이길 수가 없는 것 같다.
 
155
나는 혁명가를 생각하였다. 모든 것 사랑도 목숨도 다 헌신짝같이 집어던지고 피 흐르는 마당으로 뛰어나가는 용사를 생각하였다. 나는 이끝없는 삼림 속으로 혁명의 용사 모양으로 달음박질치다가 기운이 진한 곳에서 죽어 버리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도 이 생각은 따르지 아니할까.
 
156
나는 지금 곧 죽어 버릴까. 나는 육혈포를 손에 들어 보았다. 이 방아쇠를 한 번만 튕기면 내 생명은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리 되면 모든 이 마음의 움직임은 소멸되는 것이 아닌가. 이것으로 만사가 해결되는 것이 아닌가.
 
157
아 하나님이시여, 힘을 주시옵소서. 천하를 이기는 힘보다도 나 자신을 이기는 힘을 주시옵소서. 이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눈에 의롭고 깨끗한 사람으로 이 일생을 마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나는 기도를 한다.
 
15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버리셨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힘을 주시지 아니하시었다. 나를 이 비참한 자리에서 썩어져 죽게 하시었다.”
 
159
최석은 어떤 날 일기에 또 이런 것도 썼다. 그것은 예전 내게 보낸 편지에 있던 꿈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러하다.
 
160
“오늘 밤은 달이 좋다. 시베리아의 겨울 해는 참 못생긴 사람과도 같이 기운이 없지마는 하얀 땅, 검푸른 하늘에 저쪽 지평선을 향하고 흘러가는 반달은 참으로 맑음 그것이었다.
 
161
나는 평생 처음 시 비슷한 것을 지었다.
 
162
임과 이별하던 날 밤에는 남쪽 나라에 바람비가 쳤네
 
163
임 타신 자동차의 뒷불이 빨간 뒷불이 빗발에 찢겼네
 
164
임 떠나 혼자 헤매는 시베리아의 오늘 밤에는
 
165
지려는 쪽달이 눈 덮인 삼림에 걸렸구나
 
166
아아 저 쪽달이여
 
167
억지로 반을 갈겨진 것도 같아라
 
168
아아 저 쪽달이여
 
169
잃어진 짝을 찾아
 
170
차디찬 허공 속을 영원히 헤매는 것도 같구나
 
171
나도 저 달과 같이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무궁한 시간과 공간에서 헤매는 것만 같다.
 
172
에익. 내가 왜 이리 약한가. 어찌하여 크나큰 많은 일을 돌아보지 못하고 요만한 애욕의 포로가 되는가.
 
173
그러나 나는 차마 그 달을 버리고 들어올 수가 없었다. 내가 왜 이렇게 센티멘털하게 되었는고. 내 쇠 같은 의지력이 어디로 갔는고. 내 누를 수 없는 자존심이 어디로 갔는고. 나는 마치 유모의 손에 달린 젖먹이와도 같다. 내 일신은 도시 애욕 덩어리로 화해 버린 것 같다.
 
174
이른바 사랑 사랑이란 말은 종교적 의미인 것 이외에도 입에 담기도 싫어하던 말이다 이런 것은 내 의지력과 자존심을 녹여 버렸는가. 또 이 부자연한 고독의 생활이 나를 이렇게 내 인격을 이렇게 파괴하였는가.
 
175
그렇지 아니하면 내 자존심이라는 것이나, 의지력이라는 것이나, 인격이라는 것이 모두 세상의 습관과 사조에 휩쓸리던 것인가. 남들이 그러니까 남들이 옳다니까 남들이 무서우니까 이 애욕의 무덤에 회를 발랐던 것인가. 그러다가 고독과 반성의 기회를 얻으매 모든 회칠과 가면을 떼어 버리고 빨가벗은 애욕의 뭉텅이가 나온 것인가.
 
176
그렇다 하면, 이것이 참된 나인가. 이것이 하나님께서 지어 주신 대로의 나인가. 가슴에 타오르는 애욕의 불길 이 불길이 곧 내 영혼의 불길인가.
 
177
어쩌면 그 모든 높은 이상들 인류에 대한, 민족에 대한, 도덕에 대한, 신앙에 대한 그 높은 이상들이 이렇게도 만만하게 마치 바람에 불리는 재 모양으로 자취도 없이 흩어져 버리고 말까. 그리고 그 뒤에는 평소에그렇게도 미워하고 천히 여기던 애욕의 검은 흙만 남고 말까.
 
178
아아 저 눈 덮인 땅이여, 차고 맑은 달이여, 허공이여! 나는 너희들을 부러워하노라.
 
179
불교도들의 해탈이라는 것이 이러한 애욕이 불붙는 지옥에서 눈과 같이 싸늘하고 허공과 같이 빈 곳으로 들어감을 이름인가.
 
180
석가의 팔 년 간 설산 고행이 이 애욕의 뿌리를 끊으려 함이라 하고 예수의 사십 일 광야의 고행과 겟세마네의 고민도 이 애욕의 뿌리 때문이었던가.
 
181
그러나 그것을 이기어 낸 사람이 천지 개벽 이래에 몇몇이나 되었는고? 나 같은 것이 그 중에 한 사람 되기를 바랄 수가 있을까.
 
182
나 같아서는 마침내 이 애욕의 불길에 다 타서 재가 되어 버릴 것만 같다. 아아 어떻게나 힘있고 무서운 불길인고.”
 
183
이러한 고민의 자백도 있었다.
 
184
또 어떤 날 일기에는 최석은 이런 말을 썼다.
 
185
“나는 단연히 동경으로 돌아가기를 결심하였다.”
 
186
그리고는 그 이튿날은,
 
187
“나는 단연히 동경으로 돌아가리란 결심을 한 것을 굳세게 취소한다. 나는 이러한 결심을 하는 나 자신을 굳세게 부인한다.”
 
188
또 이런 말도 있다.
 
189
“나는 정임을 시베리아로 부르련다.”
 
190
또 그 다음에는,
 
191
“아아 나는 하루바삐 죽어야 한다. 이 목숨을 연장하였다가는 무슨 일을 저지를는지 모른다. 나는 깨끗하게 나를 이기는 도덕적 인격으로 이 일생을 마쳐야 한다. 이 밖에 내 사업이 무엇이냐.”
 
192
또 어떤 곳에는,
 
193
“아아 무서운 하룻밤이었다. 나는 지난 하룻밤을 누를 수 없는 애욕의 불길에 탔다. 나는 내 주먹으로 내 가슴을 두드리고 머리를 벽에 부딪쳤다. 나는 주먹으로 담벽을 두드려 손등이 터져서 피가 흘렀다. 나는 내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나는 수없이 발을 굴렀다. 나는 이 무서운 유혹을 이기려고 내 몸을 아프게 하였다. 나는 견디다 못하여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밖에는 달이 있고 눈이 있었다. 그러나 눈은 핏빛이요, 달은 찌그러진 것 같았다. 나는 눈 속으로 달음박질쳤다. 달을 따라서 엎드러지며 자빠지며 달음질쳤다. 나는 소리를 질렀다. 나는 미친 사람 같았다.”
 
194
그러고는 어디까지 갔다가 어느 때에 어떠한 심경의 변화를 얻어 가지고 돌아왔다는 말은 쓰이지 아니하였으나 최석의 병의 원인을 설명하는 것 같았다.
 
195
“열이 나고 기침이 난다. 가슴이 아프다. 이것이 폐렴이 되어서 혼자 깨끗하게 이 생명을 마치게 하여 주소서 하고 빈다. 나는 오늘부터 먹고 마시기를 그치련다.”
 
196
이러한 말을 썼다. 그러고는,
 
197
“정임, 정임, 정임, 정임.”
 
198
하고 정임의 이름을 수없이 쓴 것도 있고, 어떤 데는,
 
199
“Overcome, Overcome.”
 
200
하고 영어로 쓴 것도 있었다.
 
201
그리고 마지막에,
 
202
“나는 죽음과 대면하였다. 사흘째 굶고 앓은 오늘에 나는 극히 맑고 침착한 정신으로 죽음과 대면하였다. 죽음은 검은 옷을 입었으나 그 얼굴에는 자비의 표정이 있었다. 죽음은 곧 검은 옷을 입은 구원의 손이었다. 죽음은 아름다운 그림자였다. 죽음은 반가운 애인이요, 결코 무서운 원수가 아니었다. 나는 죽음의 손을 잡노라. 감사하는 마음으로 죽음의 품에 안기노라. 아멘.”
 
203
이것을 쓴 뒤에는 다시는 일기가 없었다. 이것으로 최석이가 그 동안 지난 일을 적어도 심리적 변화만은 대강 추측할 수가 있었다.
 
204
다행히 최석의 병은 점점 돌리는 듯하였다. 열도 내리고 식은땀도 덜 흘렸다. 안 먹는다고 고집하던 음식도 먹기를 시작하였다.
 
205
정임에게로 갔던 노파에게서는 정임도 열이 내리고 일어나 앉을 만하다는 편지가 왔다.
 
206
나는 노파의 편지를 최석에게 읽어 주었다. 최석은 그 편지를 듣고 매우 흥분하는 모양이었으나 곧 안심하는 빛을 보였다.
 
207
나는 최석의 병이 돌리는 것을 보고 정임을 찾아볼 양으로 떠나려 하였으나 순임이가 듣지 아니하였다. 혼자서 앓는 아버지를 맡아 가지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노파가 오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208
나는 최석이가 먹을 음식도 살 겸 우편국에도 들를 겸 시가까지 가기로 하고 이 곳 온 지 일 주일이나 지나서 처음으로 산에서 나왔다.
 
209
나는 이르쿠츠크에 가서 최석을 위하여 약품과 먹을 것을 사고 또 순임을 위해서도 먹을 것과 의복과 또 하모니카와 손풍금도 사 가지고 정거장에 나와서 돌아올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210
나는 순후해 보이는 아라사 사람들이 정거장에서 오락가락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는 최석이가 병이 좀 나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또 최석과 정임의 장래가 어찌 될까 하는 것도 생각하면서 뷔페(식당)에서 뜨거운 차이(차)를 마시고 있었다.
 
211
이 때에 밖을 바라보고 있던 내 눈은 문득 이상한 것을 보았다. 그것은 그 노파가 이리로 향하고 걸어오는 것인데 그 노파와 팔을 걸은 젊은 여자가 있는 것이다. 머리를 검은 수건으로 싸매고 입과 코를 가리웠으니 분명히 알 수 없으나 혹은 정임이나 아닌가 할 수밖에 없었다. 정임이가 몸만 기동하게 되면 최석을 보러 올 것은 정임의 열정적인 성격으로 보아서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212
나는 반쯤 먹던 차를 놓고 뷔페 밖으로 뛰어나갔다.
 
213
“오 미시즈 체스터필드?”
 
214
하고 나는 노파 앞에 손을 내어밀었다. 노파는 체스터필드라는 미국 남편의 성을 따라서 부르는 것을 기억하였다.
 
215
“선생님!”
 
216
하는 것은 정임이었다. 그 소리만은 변치 아니하였다. 나는 검은 장갑을 낀 정임의 손을 잡았다. 나는 여러 말 아니하고 노파와 정임을 뷔페로 끌고 들어왔다.
 
217
늙은 뷔페 보이는 번쩍번쩍하는 사모바르에서 차 두 잔을 따라다가 노파와 정임의 앞에 놓았다.
 
218
노파는 어린애에게 하는 모양으로 정임의 수건을 벗겨 주었다. 그 속에서는 해쓱하게 여윈 정임의 얼굴이 나왔다. 두 볼에 불그레하게 홍훈이 도는 것도 병 때문인가.
 
219
“어때? 신열은 없나?”
 
220
하고 나는 정임에게 물었다.
 
221
“괜찮아요.”
 
222
하고 정임은 웃으며,
 
223
“최 선생님께서는 어떠세요?”
 
224
하고 묻는다.
 
225
“좀 나으신 모양이야. 그래서 나는 오늘 정임을 좀 보러 가려고 했는데 이 체스터필드 부인께서 아니 오시면 순임이가 혼자 있을 수가 없다고 해서, 그래 이렇게 최 선생 자실 것을 사 가지고 가는 길이야.”
 
226
하고 말을 하면서도 나는 정임의 눈과 입과 목에서 그의 병과 마음을 알아보려고 애를 썼다.
 
227
중병을 앓은 깐 해서는 한 달 전 남대문서 볼 때보다 얼마 더 초췌한 것 같지는 아니하였다.
 
228
“네에.”
 
229
하고 정임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안경알에는 이슬이 맺혔다.
 
230
“선생님 댁은 다 안녕하셔요?”
 
231
“응, 내가 떠날 때에는 괜찮았어.”
 
232
“최 선생님 댁도?”
 
233
“응.”
 
234
“선생님 퍽은 애를 쓰셨어요.”
 
235
하고 정임은 울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웃음을 웃는다.
 
236
말을 모르는 노파는 우리가 하는 말을 눈치나 채려는 듯이 멀거니 보고 있다가 서투른 영어로,
 
237
“아직 미스 남은 신열이 있답니다. 그래도 가 본다고, 죽어도 가 본다고 내 말을 안 듣고 따라왔지요.”
 
238
하고 정임에게 애정 있는 눈흘김을 주며,
 
239
“유 노티 차일드(말썽꾼이).”
 
240
하고 입을 씰룩하며 정임을 안경 위로 본다.
 
241
“니체워, 마뚜슈까(괜찮아요, 어머니).”
 
242
하고 정임은 노파를 보고 웃었다. 정임의 서양 사람에게 대한 행동은 서양식으로 째었다고 생각하였다.
 
243
정임은 도리어 유쾌한 빛을 보였다. 다만 그의 붉은빛 띤 눈과 마른 입술이 그의 몸에 열이 있음을 보였다. 나는 그의 손끝과 발끝이 싸늘하게 얼었을 것을 상상하였다.
 
244
마침 이 날은 날이 온화하였다. 엷은 햇빛도 오늘은 두꺼워진 듯하였다.
 
245
우리 세 사람은 F역에서 내려서 썰매 하나를 얻어 타고 산으로 향하였다. 산도 아니지마는 산 있는 나라에서 살던 우리는 최석이가 사는 곳을 산이라고 부르는 습관을 지었다. 삼림이 있으니 산같이 생각된 까닭이었다.
 
246
노파가 오른편 끝에 앉고, 가운데다가 정임을 앉히고 왼편 끝에 내가 앉았다.
 
247
쩟쩟쩟 하는 소리에 말은 달리기 시작하였다. 한 필은 키 큰 말이요, 한 필은 키가 작은 말인데 키 큰 말은 아마 늙은 군마 퇴물인가 싶게 허우대는 좋으나 몸이 여위고 털에는 윤이 없었다. 조금만 올라가는 길이 되어도 고개를 숙이고 애를 썼다. 작은 말은 까불어서 가끔 채찍으로 얻어맞았다.
 
248
“아이 삼림이 좋아요.”
 
249
하고 정임은 정말 기쁜 듯이 나를 돌아보았다.
 
250
“좋아?”
 
251
하고 나는 멋없이 대꾸하고 나서, 후회되는 듯이,
 
252
“밤낮 삼림 속에서만 사니까 지루한데.”
 
253
하는 말을 붙였다.
 
254
“저는 저 눈 있는 삼림 속으로 한정 없이 가고 싶어요. 그러나 저는 인제 기운이 없으니깐 웬걸 그래 보겠어요?”
 
255
하고 한숨을 쉬었다.
 
256
“왜 그런 소릴 해. 인제 나을걸.”
 
257
하고 나는 정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마치 슬픈 눈물 방울이나 찾으려는 듯이.
 
258
“제가 지금도 열이 삼십팔 도가 넘습니다. 정신이 흐릿해지는 것을 보니까 아마 더 올라가나 봐요. 그래도 괜찮아요. 오늘 하루야 못 살라고요. 오늘 하루만 살면 괜찮아요. 최 선생님만 한 번 뵙고 죽으면 괜찮아요.”
 
259
“왜 그런 소릴 해?”
 
260
하고 나는 책망하는 듯이 언성을 높였다.
 
261
정임은 기침을 시작하였다. 한바탕 기침을 하고는 기운이 진한 듯이 노파에게 기대며 조선말로,
 
262
“추워요.”
 
263
하였다. 이 여행이 어떻게 정임의 병에 좋지 못할 것은 의사가 아닌 나로도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나로는 더 어찌할 수가 없었다.
 
264
나는 외투를 벗어서 정임에게 입혀 주고 노파는 정임을 안아서 몸이 덜 흔들리도록 또 춥지 않도록 하였다.
 
265
나는 정임의 모양을 애처로워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밖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266
얼마를 지나서 정임은 갑자기 고개를 들고 일어나며,
 
267
“인제 몸이 좀 녹았습니다. 선생님 추우시겠어요. 이 외투 입으셔요.”
 
268
하고 그의 입만 웃는 웃음을 웃었다.
 
269
“난 춥지 않아. 어서 입고 있어.”
 
270
하고 나는 정임이가 외투를 벗는 것을 막았다. 정임은 더 고집하려고도 아니하고,
 
271
“선생님 시베리아의 삼림은 참 좋아요. 눈 덮인 것이 더 좋은 것 같아요. 저는 이 인적 없고 자유로운 삼림 속으로 헤매어 보고 싶어요.”
 
272
하고 아까 하던 것과 같은 말을 또 하였다.
 
273
“며칠 잘 정양하여서, 날이나 따뜻하거든 한 번 산보나 해 보지.”
 
274
하고 나는 정임의 말 뜻이 다른 데 있는 줄을 알면서도 부러 평범하게 대답하였다.
 
275
정임은 대답이 없었다.
 
276
“여기서도 아직 멀어요?”
 
277
하고 정임은 몸이 흔들리는 것을 심히 괴로워하는 모양으로 두 손을 자리에 짚어 몸을 버티면서 말하였다.
 
278
“고대야, 최 선생이 반가워할 터이지. 오죽이나 반갑겠나.”
 
279
하고 나는 정임을 위로하는 뜻으로 말하였다.
 
280
“아이 참 미안해요. 제가 죄인이야요. 저 때문에 애매한 누명을 쓰시고 저렇게 사업도 버리시고 병환까지 나시니 저는 어떡허면 이 죄를 씻습니까?”
 
281
하고 눈물 고인 눈으로 정임은 나를 쳐다보았다.
 
282
나는 정임과 최석을 이 자유로운 시베리아의 삼림 속에 단둘이 살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최석은 살아나가겠지마는 정임이가 살아날 수가 있을까, 하고 나는 정임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숨은 실낱 같은 것 같았다. 바람받이에 놓인 등잔불과만 같은 것 같았다.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한 번 대하겠다는 것밖에 아무 소원이 없는 정임은 참으로 가엾어서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283
“염려 말어. 무슨 걱정이야? 최 선생도 병이 돌리고 정임도 인제 얼마 정양하면 나을 것 아닌가. 아무 염려 말아요.”
 
284
하고 나는 더욱 최석과 정임과 두 사람의 사랑을 달하게 할 결심을 하였다. 하나님께서 계시다면 이 가엾은 간절한 두 사람의 마음을 가슴 미어지게 아니 생각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우주의 모든 일 중에 정임의 정경보다 더 슬프고 불쌍한 정경이 또 있을까 하였다. 차디찬 눈으로 덮인 시베리아의 광야에 병든 정임의 사랑으로 타는 불똥과 같이 날아가는 이 정경은 인생이 가질 수 있는 최대한 비극인 것 같았다.
 
285
정임은 지쳐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도 가끔 고개를 들어서는 기운 나는 양을 보이려고, 유쾌한 양을 보이려고 애를 썼다.
 
286
“저 나무 보셔요. 오백 년은 살았겠지요?”
 
287
이런 말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다 억지로 지어서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는 또 기운이 지쳐서는 고개를 숙이고, 혹은 노파의 어깨에 혹은 내 어깨에 쓰러졌다.
 
288
마침내 우리가 향하고 가는 움집이 보였다.
 
289
“정임이, 저기야.”
 
290
하고 나는 움집을 가리켰다.
 
291
“네에?”
 
292
하고 정임은 내 손가락 가는 곳을 보고 다음에는 내 얼굴을 보았다.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293
“저기 저것 말야. 저기 저 고작 큰 전나무 두 개가 있지 않아? 그 사이로 보이는 저, 저거 말야. 옳지 옳지, 순임이 지금 나오지 않아?”
 
294
하였다.
 
295
순임이가 무엇을 가지러 나오는지 문을 열고 나와서는 밥 짓느라고 지어 놓은 이를테면 부엌에를 들어갔다가 나오는 길에 이 쪽을 바라보다가 우리를 발견하였는지 몇 걸음 빨리 오다가는 서서 보고 오다가는 서서 보더니 내가 모자를 내두르는 것을 보고야 우리 일행인 것을 확실히 알고 달음박질을 쳐서 나온다.
 
296
우리 썰매를 만나자,
 
297
“정임이야? 어쩌면 이 추운데.”
 
298
하고 순임은 정임을 안고 그 안경으로 정임의 눈을 들여다본다.
 
299
“어쩌면 앓으면서 이렇게 와?”
 
300
하고 순임은 노파와 나를 책망하는 듯이 돌아보았다.
 
301
“아버지 어떠시냐?”
 
302
하고 나는 짐을 들고 앞서서 오면서 뒤따르는 순임에게 물었다.
 
303
“아버지요?”
 
304
하고 순임은 어른에게 대한 경의를 표하노라고 내 곁에 와서 걸으며,
 
305
“아버지께서 오늘은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순임이가 고생하는구나 고맙다, 이런 말씀도 하시고, 지금 같아서는 일어날 것도 같은데 기운이 없어서, 이런 말씀도 하시고, 또 선생님이 이르쿠츠크에를 들어가셨으니 무엇을 사 오실 듯싶으냐, 알아맞혀 보아라, 이런 농담도 하시고, 정임이가 어떤가 한 번 보았으면, 이런 말씀도 하시겠지요. 또 순임아, 내가 죽더라도 정임을 네 친동생으로 알아서 부디 잘 사랑해 주어라, 정임은 불쌍한 애다, 참 정임은 불쌍해! 이런 말씀도 하시겠지요. 그렇게 여러 가지 말씀을 많이 하시더니, 순임아 내가 죽거든 선생님을 아버지로 알고 그 지도를 받아라, 그러시길래 제가 아버지 안 돌아가셔요! 그랬더니 아버지께서 웃으시면서, 죽지 말까, 하시고는 어째 가슴이 좀 거북한가, 하시더니 잠이 드셨어요. 한 시간이나 되었을까, 온.”
 
306
집 앞에 거의 다 가서는 순임은 정임의 팔을 꼈던 것을 놓고 빨리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307
치마폭을 펄럭거리고 뛰는 양에는 어렸을 적 말괄량이 순임의 모습이 남아 있어서 나는 혼자 웃었다. 순임은 정임이가 왔다는 기쁜 소식을 한 시각이라도 빨리 아버지께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308
“아버지, 주무시우? 정임이가 왔어요. 정임이가 왔습니다.”
 
309
하고 부르는 소리가 밖에서도 들렸다.
 
310
나도 방에 들어서고, 정임도 뒤따라 들어서고, 노파는 부엌으로 물건을 두러 들어갔다.
 
311
방은 절벽같이 어두웠다.
 
312
“순임아, 불을 좀 켜려무나.”
 
313
하고 최석의 얼굴을 찾느라고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숙이며,
 
314
“자나? 정임이가 왔네.”
 
315
하고 불렀다.
 
316
정임도 곁에 와서 선다.
 
317
최석은 대답이 없었다.
 
318
순임이가 촛불을 켜자 최석의 얼굴이 환하게 보였다.
 
319
“여보게, 여봐. 자나?”
 
320
하고 나는 무서운 예감을 가지면서 최석의 어깨를 흔들었다.
 
321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마는 최석은 시체라 하는 것을 나는 내 손을 통해서 깨달았다.
 
322
나는 깜짝 놀라서 이불을 벗기고 최석의 팔을 잡아 맥을 짚어 보았다. 거기는 맥이 없었다.
 
323
나는 최석의 자리옷 가슴을 헤치고 귀를 가슴에 대었다. 그 살은 얼음과 같이 차고 그 가슴은 고요하였다. 심장은 뛰기를 그친 것이었다.
 
324
나는 최석의 가슴에서 귀를 떼고 일어서면서,
 
325
“네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네 손으로 눈이나 감겨 드려라.”
 
326
하였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327
“선생님!”
 
328
하고 정임은 전연히 절제할 힘을 잃어버린 듯이 최석의 가슴에 엎어졌다. 그러고는 소리를 내어 울었다. 순임은,
 
329
“아버지, 아버지!”
 
330
하고 최석의 베개 곁에 이마를 대고 울었다.
 
331
아라사 노파도 울었다.
 
332
방 안에는 오직 울음 소리뿐이요, 말이 없었다. 최석은 벌써 이 슬픈 광경도 몰라보는 사람이었다.
 
333
최석이가 자기의 싸움을 이기고 죽었는지, 또는 끝까지 지다가 죽었는지 그것은 영원한 비밀이어서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하다 그의 의식이 마지막으로 끝나는 순간에 그의 의식기에 떠오르던 오직 하나가 정임이었으리라는 것만은.
 
334
지금 정임이가 그의 가슴에 엎어져 울지마는, 정임의 뜨거운 눈물이 그의 가슴을 적시건마는 최석의 가슴은 뛸 줄을 모른다. 이것이 죽음이란 것이다.
 
335
뒤에 경찰의가 와서 검사한 결과에 의하면, 최석은 폐렴으로 앓던 결과로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이라고 하였다.
 
336
나는 최석의 장례를 끝내고 순임과 정임을 데리고 오려 하였으나 정임은 듣지 아니하고 노파와 같이 바이칼 촌으로 가 버렸다.
 
337
그런 뒤로는 정임에게서는 일체 음신이 없다. 때때로 노파에게서 편지가 오는데 정임은 최석이가 있던 방에 가만히 있다고만 하였다.
 
338
서투른 영어가 뜻을 충분히 발표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339
나는 정임에게 안심하고 병을 치료하라는 편지도 하고 돈이 필요하거든 청구하라는 편지도 하나 영 답장이 없다.
 
340
만일 정임이가 죽었다는 기별이 오면 나는 한 번 더 시베리아에 가서 둘을 가지런히 묻고 `두 별 무덤'이라는 비를 세워 줄 생각이다. 그러나 나는 정임이가 조선으로 오기를 바란다.
 
341
여러분은 최석과 정임에게 대한 이 기록을 믿고 그 두 사람에게 대한 오해를 풀라.
【원문】유정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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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수(李光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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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3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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