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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정(有情) ◈
◇ 유정 (2) ◇
카탈로그   목차 (총 : 7권)     이전 2권 다음
1933
이광수(李光洙)
1
유정(有情) - 2
 
 
2
믿는 벗 N형!
 
3
나는 바이칼 호의 가을 물결을 바라보면서 이 글을 쓰오. 나의 고국 조선은 아직도 처서 더위로 땀을 흘리리라고 생각하지마는 고국서 칠천 리 이 바이칼 호 서편 언덕에는 벌써 가을이 온 지 오래요. 이 지방에 유일한 과일인 `야그드'의 핏빛조차 벌써 서리를 맞아 검붉은 빛을 띠게 되었소. 호숫 가의 나불나불한 풀들은 벌써 누렇게 생명을 잃었고 그 속에 울던 벌레, 웃던 가을 꽃까지도 이제는 다 죽어 버려서, 보이고 들리는 것이 오직 성내어 날뛰는 바이칼 호의 물과 광막한 메마른 풀판뿐이오. 아니 어떻게나 쓸쓸한 광경인고.
 
4
남북 만 리를 날아다닌다는 기러기도 아니 오는 시베리아가 아니오? 소무나 왕소군이 잡혀 왔더란 선우의 땅도 여기서 보면 삼천 리나 남쪽이어든…… 당나라 시인이야 이러한 곳을 상상인들 해 보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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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곳에 나는 지금 잠시 생명을 붙이고 있소. 연일 풍랑이 높은 바이칼 호를 바라보면서 고국에 남긴 오직 하나의 벗인 형에게 나의 마지막 편지를 쓰고 있소. 지금은 밤중. 부랴트 족인 주인 노파는 벌써 잠이 들고 석유 등잔의 불이 가끔 창틈으로 들이쏘는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소. 우루루 탕 하고 달빛을 실은 바이칼의 물결이 바로 이 어촌 앞의 바위를 때리고 있소. 어떻게나 처참한 광경이오?
 
6
무슨 말부터 써야 옳을까. 지금 내 머리 속은 용솟음쳐서 끓어오르고 있소. 중년 남자의 자랑인 자존심과 의지력으로 제 마음을 통제하려 하나 도무지 듣지 아니하오. 아마 나는 이 편지를 다 쓰지 못하고 정신과 육체가 함께 다 타 버리고 말는지 모르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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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말은 다 그만둡시다. 내가 이 편지를 쓰는 것이 오직 남정임과 나와의 관계를 분명히 하려는 데 있으니까. 남정임과 나와의 관계를 형도 대강은 짐작하리라고 믿지마는 역시 다 아신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오. 인제 와서 내가 형께 이런 말을 다 한댔자 세상을 하직하는 나에게야 무슨 이해 관계가 있겠소마는 세상에 남아 있을 정임의 누명을 씻는 데 한 도움이나 될까 하고 구차스레 이 편지를 쓰는 것이오. 아아 머리가 아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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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도 아시겠지마는 남정임은 내 친구 남백파(南白坡)의 외딸이오. 백파는 남화(南火)라는 가명을 가지고 중국 각지로 표랑하다가 바로 기미년 전 해에 천진(天津:톈진)서 관헌에게 체포되어 ▣▣감옥에서 복역 중에 병으로 형의 중지를 받고 퇴옥하여 ▣▣병원에서 세상을 떠날 때에 그는 내게 그의 유족인 아내와 딸을 맡긴 것이오. 남화는 나의 친구라 하나 기실은 아버지와 더 친하고 내게는 부집은 못 되지마는 노형 연배로, 이를테면 내 선배였소. 그래서 나는 관헌의 양해를 얻어 가지고 북경(北京:베이징)으로 가서 남화의 유족을 조선으로 데리고 왔소. 그 때의 정임의 나이 여덟 살이었소. 정임은 중국 계집애 모양으로 앞머리를 이마에 나불나불하게 자르고 푸른 청옥 두루마기를 입은 소녀였소. 말도 조선말보다 한어를 잘하고 퍽 감정적인 미인 타입의 소녀였소. 그 때에 정임은 나를 부를 때에는 `초이시엔성' 하고 중국말로 불렀소. 최 선생이란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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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화는 본명을 상호(相灝)라 하고 호를 백파(白坡)라고도 하고 태백광노(太白狂奴)라고도 하여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과 함께 강유위, 장병린 같은 중국의 지사들과 교유하며 비분강개한 시와 글을 짓고 다니던 이요. 그 초취인 조선 부인은 남백파가 중국에 유랑하는 동안에 죽고, 정임을 낳은 부인은 장병린의 친척이라는 중국 여자로서 장씨요. 이 장씨 부인이 남백파의 글을 보고 사랑하였다느니만큼 글을 잘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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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북경서 장씨 부인에게 어디로 가겠느냐고 의향을 물었더니 장씨 부인은 내가 묻는 뜻을 의아하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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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고국으로 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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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단연한 결심을 보였소.
 
13
장씨는 비록 상해의 중서여숙(中西女塾)에서 서양식 교육을 받은 여자라 하지마는 그의 도덕 관념은 장씨가 중지학인 동양 사상을 기초로 하였던 모양이오. 남편이 조선 사람이니 아내도 조선 사람이다. 남편이 죽었으니 아내는 남편의 고국에 돌아가 남편의 분묘를 지키는 것이라는 것을 거의 본능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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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해서 나는 남정임 모녀를 조선으로 데리고 온 것이오. 나도 장씨 부인의 그 깨끗하고 굳은 마음에 얼마나 탄복하였는지 모르오. 나는 이 장씨 부인 한 사람을 본 후로는 중국 사람을 존경하고 그 문화를 존경하는 마음이 아니 날 수 없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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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돌아와서 일시 내 집에 남정임 모녀를 유숙하게 하였으나 언제까지 그리할 수도 없어서 필운동 내 집에서 얼마 멀지 아니한 곳에 집 하나를 얻어 두 모녀를 우접하게 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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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듬해가 기미년 아니오? 그 때에 내가 옥에 들어갔다가 삼 년 만에 집에 돌아오니 장씨 부인은 그 동안에 죽어 버리고 정임은 내 집에 와 있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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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옥에서 나온 날 저녁에 내 아들딸들이 `아버지'를 부르고 내게 와서 매달릴 때에 정임은 방 한편 구석에 우두커니 서서 훌쩍훌쩍 우는 것을 보고 나는 창자가 미어지는 듯이 불쌍한 생각이 나서 정임을 안고 머리를 쓸어 주며 위로하였소. 이 때에 정임의 나이가 열두 살. 그는 아비를 여의고 어미마저 여의고 그 다음에는 가장 친하고 믿는 나마저 감옥에 있어서 외로운 세상을 살고 있던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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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아내가 결코 보통 여자라고는 생각지 아니하오. 그는 좋은 가정에서 자라났고 상당한 교육도 받았고 내게 대해서도 그리 순종하는 아내는 아니라 하더라도 또 그리 남편을 못 견디게 굴고 망신을 시키는 아내는 아니었소. 그는 나를 위하고 인사범절도 그만하면 흠잡을 것은 없는 아내라고 나는 믿소. 형이 내 아내를 잘 알지마는 내 아내는 결코 보통 조선 여성보다 못한 여성은 아니라고 믿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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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마는 형아, 내 아내는 정임을 제 친딸과 같이 사랑하지는 못하였소. 정임이가 내 딸들과 차별을 받을 때에 슬퍼하는 양을 보면 내 가슴은 찔리는 듯하였소. 어미를 본받아 내 딸들이 정임을 구박하는 양을 볼 때에는 나는 내 딸들이 미웠소.
 
20
정임이가 보통 학교를 졸업하던 해 봄에 내 아내와 나와의 사이에 마침내 정면 충돌의 시기가 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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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내막은 아마 형도 모르시리다. 형도 아시는 바와 같이 내 맏딸년이 바로 정임과 동갑 아니오. 나는 정임을 내 딸이 다니는 보통 학교에 넣어서 졸업도 함께 하게 되었소. 그런데 문제는 어디 있는고 하니, 내 딸 순임이가 정임이만 못한 데 있던 모양이오. 정임은 학교에서 수석이요, 내 딸 순임은 부끄러운 말이지마는 열째 이상에 올라가 본 일이 없구려. 게다가 정임이가 창가를 잘해서 학교에서 귀염을 받는데 순임이년은 나를 닮았는지 창가와 그림이 아주 말이 아니오. 게다가 정임은 그 아버지 남씨 집과 그 외가 장씨 집의 미인 계통을 받아서 얼굴이나 몸이나 모두 미인이란 말이오. 내 딸년은 머리가 노랗고 길지를 못한데 정임은 동양식 미인의 특색으로 칠 같은 머리가 치렁치렁하지 않소. 이런 것이 모두 이유가 되어서 내 아내는 정임을 미워하였던 모양이오. 또 내 딸 순임이년도 제가 제 집에 붙어 있는 정임이만 못한 것이 마음에 불쾌하였던 모양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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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도 없는 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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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순임이가 정임을 울리는 꼴을 내가 밖에서 돌아오다가 여러 번 보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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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임이는 어느 학교에 보낼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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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하루는 내 아내가 유쾌하지 못한 낯으로 바로 옷을 입고 나가려는 내앞을 가로막고 물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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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임이와 한 학교에 들여보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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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나는 물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대답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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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학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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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아내는 또 묻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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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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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나는 아내를 못마땅스러이 바라보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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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임이를 K학교에 넣는다면 우리 순임이는 M학교에 넣을 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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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내 아내는 뾰로통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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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만 한숨을 한 번 쉬고 나와 버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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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아내의 속을 알아줄 양으로 아내의 말대로 정임을 K학교에 넣고 순임을 M학교에 넣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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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더니 의외에 하루는 내 아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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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임은 학교에 아니 보낼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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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청천 벽력의 딴소리를 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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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당신 하라는 대로 했는데 또 무엇이 못마땅해 그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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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나도 적이 불쾌함을 느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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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까짓 년은 학교에 보내서 무엇 하오? 재주 있는 정임이나 좋은 학교에 넣어서 공부를 시키면 그만이지, 우리 순임이 같은 년이 공부는 해서 무엇하오? 순임이년은 집에서 바느질이나 가르치고 부엌일이나 시켜 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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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아내는 울기를 시작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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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깨달았소. 내 아내의 생각에는 정임이가 입학한 학교보다 내 딸 순임이가 입학한 학교가 지위가 낮은 것으로 아는 모양이오. 여자의 말이란 흔히 뒤집어 들어야 되는 것인데 나는 철없이도 내 아내의 말을 바로 들어서 정임을 K학교에 순임을 M학교에 넣었던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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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어떡할까? 순임도 K학교에 넣어 볼까, 그렇지 아니하면 정임을 M학교로 옮겨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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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나는 아내의 마음의 화평과 가정의 화평과 또 정임이가 내 아내와 순임에게서 미움을 덜 받게 하는 것과 이러한 여러 가지 사정을 생각하고 아무쪼록 아내의 비위를 맞추기로 결심을 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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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요. 순임이는 학교에 안 보낼 테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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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아내가 이성의 판단력을 잃어버린 때에 순임이가 뛰어들어오지 않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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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나도 K학교에 가. M학교는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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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떼를 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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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년. 네까짓 년이 학교가 무슨 학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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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내 아내는 순임을 노려보고 낯에 핏대를 돋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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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임이같이 재주 있고 부모 없는 애나 학교에 다니지 너같이 소같이 생긴 년이 학교가 무슨 학교야? 인제부터는 부엌일이나 하고 걸레질이나 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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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소리를 지르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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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학교는 입학 기일이 지나면 도무지 변통할 수가 없으니 어찌하오? 그래서 별별 운동을 다해 가지고 M학교에 사정을 해서 정임이를 K학교에서 끌어다가 M학교에 넣었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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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임과 순임은 도저히 한 반에서 경쟁할 재질이 되지 못하지 않소? 시험만 치르면 정임은 첫째, 순임은 열다섯에서 스무째 안으로 오르락내리락하니, 이 때문에 내 아내의 불평은 끊일 날이 없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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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임에게 너무 시험을 잘 치르지 말아서 순임이보다 한두 자리 밑으로 가라고도 하고 싶었으나 차마 어떻게 그런 말이야 하오? 또 정임이나 순임이나 어느 애 하나를 다른 학교로 옮겨 볼까 하기도 하였으나 그겐들 차마 어떻게 하오? 누가 보든지 웃을 것 아니오. 내 아내와 내 집안의 망신이 될 것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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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임이는 K학교에 입학했다가 왜 M학교로 옮겨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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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묻는 이가 있으면 내 아내는 영절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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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기 애들이 잠시나 떨어지랴나요? 둘을 딴 학교에 넣는다고 순임이년이 지랄을 해서 기예 정임이를 다려오고야 말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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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설명하는 것을 나는 여러 번 들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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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참 어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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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듣는 사람들은 모두 두 아이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에 탄복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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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순임이하고 정임이하고 어느 애가 내 친딸인지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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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아내는 더욱 신이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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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임이나 정임이나 무엇이나 꼭 같이 해 준답니다. 옷감을 바꾸더라도 꼭 같이, 먹을 것이 있어도 꼭 같이 저희들이 동갑이니깐 쌍둥이 같지요. 또 순임이년이 끔찍하지요. 생일이 정임이가 먼저라고 언니, 언니 하고 그건 아주 친형제 같답니다. 또 이 애 아버지는 순임이보다도 정임이를 더 귀애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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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선전까지도 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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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내의 이러한 말을 나는 믿지 아니하지마는 남들 중에는 아마 더러 믿는 이도 있고 아니 믿는 이도 있었을 것이오. 그러나 내 아내의 이러한 거짓말에서 나는 오직 한 가지 고맙게 여긴 것이 있었소. 그것은 내 아내도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 하고 관념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오. 나는 내 아내가 관념을 행위로 표현하게 되기를 하나님께 빌고 단군 할아버지께 빌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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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제로 내 집에는 옥신각신이 끊일 날이 없었소. 아침 밥상을 대할 때부터 벌써 암투가 일기 시작하여 저녁에 내가 사무를 끝내고 돌아올 때와 저녁밥을 먹을 때와 침실에서까지 아내와 나와의 충돌은 끊일 줄을 몰랐소. 나는 어디까지든지 참자, 그저 참자 하고 꾹꾹 참았지마는 어떤 때에는 더 참을 수가 없어서 나도 폭발되는 때도 있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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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다시피 우리 집이 그리 큰 집이 아니니까 우리 내외가 언쟁을 하게 되면 온 집안이 다 알 수밖에 없지 않소? 순임이나 정임이도 알 것이요, 집안 하인들도 다 알게 되지 않소? 또들 싸운다 하고 다들 시끄럽게 생각했겠지요. 정임이가 만일 우리 내외가 싸우는 원인이 자기인 줄 알면 얼마나 괴롭겠소? 나는 그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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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임이가,
 
71
“학교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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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책 보퉁이를 끼고 우리 내외가 낯을 붉히고 앉았는 곳에 와서 인사를 하고 돌아설 때마다 나는 눈물이 쏟아질 듯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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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년이 왜 하필 이런 때에 들어와서 인사를 해? 암말도 말고 학교에를 가든지 말든지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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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내 아내는 정임의 댕기 꼬리가 중문에서 스러지듯 마듯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75
순임이년은 나더러는 학교에 간다는 인사도 다녀왔다는 인사도 안 하고 내가 안방에 있으면 힐끗 보고는 다른 방으로 달아나 버리고 마오. 그년이 제 어미 이상으로 나를 미워하고 정임을 미워하는 모양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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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왜 불쌍한 어린것을 미워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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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나는 참다못하여 한 마디를 던져 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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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것?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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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내 아내는 조롱하는 어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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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열여섯인데 어린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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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아내의 말에서 나는 놀라운 무엇을 발견하였소. 그리고 하도 의외요, 또 무서워서 몸에 소름이 끼침을 깨달았소.
 
82
내 아내의 눈에는 정임이가 점점 자라는 것을 무심하게 보지는 못하였던 것이오. 인제는 다만 정임이가 딸 순임보다 학교 성적이 좋다는 것만이 아내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요, 정임에게 대하여 일종의 불안과 질투를 느끼는구나 하는 것을 발견할 때에 내가 어떻게 놀라지를 않겠소.
 
83
나는 이것 큰일났구나 하고 여러 가지로 방침을 생각해 본 결과로 하루는 내 아내가 좀 기분이 좋은 때를 엿보아서,
 
84
“여보 정임이를 기숙사로 들여보냅시다.”
 
85
하는 제안을 해 보았소. 내 생각에는 이 제안은 반드시 아내의 환영을 받으리라고 믿었던 것이오.
 
86
“기숙사에는 왜요?”
 
87
하고 아내는 내 말의 진의를 의심하는 듯이 신문을 보던 눈을 들어서 나를 바라보오.
 
88
“당신도 그 애 때문에 늘 노심이 되는 모양이니 그 애를 기숙사로 들여보내면 문제가 없지 않소? 당신도 요새 몸이 늘 약하고 불편한 모양인데 한 가지라도 근심을 더는 것이 좋지 않소? 우리 그렇게 합시다. 정임이를 내일이라도 기숙사로 들여보냅시다.”
 
89
하고 내 아내의 비위를 아니 거슬리도록 좋은 말로 권유하는 태도를 취하였소. 내 아내는 정임이를 차마 내어 놓지 못하는데 내가 우겨서 기숙사로 보냈다는 형식이 되어야만 세상 체면에도 괜찮고 내 아내의 비위에 맞을 것같이 진단을 하였던 것이오.
 
90
“내가 정임이를 미워하니깐 정임이가 내 미움받는 것이 애처러워서 그러시는구려?”
 
91
하고 내 아내의 히스테리의 검은 구름이 또 일기를 시작하였소.
 
92
“왜 그렇게 말을 하오?”
 
93
하고 나는 내 진단이 오진이요, 내가 쓴 약이 예상과 반대되는 효과를 발한 것을 발견하였소. 이렇게 오진되고 약을 잘못 쓰는 일은 가끔 있는 일이지마는 이번만은 내가 무척 생각해 내어서 한 일인데, 참 내 아내의 마음은 신변 불가측인 것을 깨닫지 아니할 수 없소.
 
94
“왜? 내 말이 당신 생각을 꼭 알아맞혔으니깐 좀 가슴이 뜨끔하오?”
 
95
하고 내 아내는 둘째 살촉을 내 심장을 향하고 들이쏘았소.
 
96
“그럼 어떡하면 좋단 말요?”
 
97
하고 나는 역습하는 태도를 취하지 아니할 수 없었소.
 
98
“그럴 것 있소?”
 
99
하고 내 아내는 더욱 날카롭게,
 
100
“당신이 어디 집을 따로 얻어 가지고 정임이를 데리고 사시구려. 그러면 좋지 않아요? 당신도 집이라면 지긋지긋한 모양이요, 또 내나 아이들이 다 미워서 못 견딜 모양이니 당신만 정임이를 데리고 따로 나가 살면 좋지 않아요? 꺼릴 것 무엇 있소? 그러면 소원 성취 아니오? 내야 아이들 데리고 죽든지 살든지 당신 관계하실 것 없지 않아요?”
 
101
이렇게 나오는구려.
 
102
“그게 무슨 말법이란 말요?”
 
103
하고 나는 성을 내지 아니할 수 없었소. 나는 아내의 마음이 이처럼 벌써 정임에게 대하여 마치 시앗이나 되는 것같이 질투의 불길을 뿜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소. 정임은 내 딸이나 마찬가지 아니오. 딸 같은 정임에게 대하여 어미 같은 아내가 아비 되는 나에게 대하여 질투를 가진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불쾌함을 금할 수가 없었소.
 
104
그도 내가 원체 허랑한 사람이어서 이 계집 저 계집 함부로 따라다니는 사람이라면 모르겠소. 형도 아시다시피 아내나 내가 다 같은 열여덟 살 동갑으로 부모가 짝을 지어 주셔서 혼인한 뒤로는 나는 어느 여자 하나 팔목 한 번 만져 본 일도 없는 사람이 아니오? 나는 사십 평생에 일찍 외입이라는 외자나 연애라는 연자도 모르는 사람이 아니오. 나는 교회의 직원으로 학교의 교원으로 그래도 똑바로 깨끗한 길을 걸어오노라고 애를 쓴 사람이오. 그야 나도 사내니까 유시호 마음에 일종의 적막을 느끼는 때도 없지는 않았소마는 그러나 내 의지력과 내 신앙은 그 모든 것을 눌러 버리고 살아온 사람이 아니오. 그런데 어쩌면 내 아내가 생각하면 기가 막히는 일이오.
 
105
그러나 나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소. 아내도 그 때 벌써 나이 사십을 바라보았소. 그는 아이를 다섯이나 낳았고 또 빨리 늙는 부얼부얼한 타입의 여자여서 삼십이 얼마 안 넘어서부터 얼굴에는 중년의 빛이 보였소. 더구나 늑막염을 앓고 난 뒤로는 몸이 바짝 수척해지고 신경만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워져서 제 속을 제가 끓이고 있었소. 이러한 아내이니까 정임과 나에게 대해서 그런 잘못된 상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고 생각하고 다만 혼자 한탄하고 혼자 기도할 뿐이었소. 그럭저럭 순임이와 정임이는 고등 보통 학교를 졸업하였소. 내 딸 순임이는 스물두째로, 정임이는 첫째로, 그리고 정임이는 학교의 규정에 의해서 교비생으로 동경(東京:도쿄) 여자 고등 사범 학교로 유학을 보내기로 학교에서 작정하고 내게 동의를 구하였기로 나는 기뻐서 동의하였소. 정임이가 명예로운 교비 유학을 가게 된 것이 기쁘다는 것보다는 우리 집에 가정 불홧거리가 없어진 것이 기뻤소. 정임이가 동경으로 가 버린 뒤에야 다시 무슨 내외 싸움의 거리가 있겠소. 그리되면 아내의 건강도 회복되고 과민한 신경도 가라앉아서 지나간 삼사 년 간에 마음 편한 날 없던 내 생활도 좀 안정되리라, 그리되면 정돈되었던 내 사업도 좀 진전되리라 하고 기뻐하였던 것이오.
 
106
내일 아침 차로 정임이가 일본으로 떠난다는 날 나는 정임에게 대한 송별의 의미로 정임과 아내와 순임과 또 M학교 교장 L씨와 여자 교원 두 사람을 조선 호텔로 청하여 만찬을 대접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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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진달래가 필락말락한 이른 봄이요, 바깥에는 찬바람이 부나 호텔 안은 여름날과 같이 따뜻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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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택시 하나를 불러내 아내와 정임과 순임을 뒤에 앉히고 나는 운전수 곁에 앉아서 지극히 유쾌한 기분으로 육조 앞으로 황톳마루로 자동차를 몰아 조선 호텔 현관으로 달려들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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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이 날같이 기쁜 날, 몸이 가뿐한 날을 나는 그 때까지 삼사 년래에 경험한 일이 없었소. 우리 식당은 조그마한 별실이었소. 밝은 전등에 비췬 고전식 붉은 방 장식과 카펫과 하얀 식탁보와 부드럽게 빛나는 은칼과 삼지창과 날카롭게 빛나는 유리 그릇과 그리고 온실에서 피운 가련한 시클라멘, 모두가 몽상과 같고 동화의 세계와 같았소.
 
110
“자 잡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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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손님들에게 권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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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내도 유쾌하게 손님들과도 이야기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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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어린 걸 혼자 동경으로 보내니깐 마음이 아니 놓입니다. 또 이 애가 몸이 좀 약한데 원, 수토 불복이나 안 될지 모두 염려가 되어요.”
 
114
하고 애정 가득한 눈으로 정임을 돌아보면서 선생들께 걱정을 하오.
 
115
그것이 어떻게나 나를 기쁘게 하였던지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소.
 
116
“그럼요, 참 쌍둥 따님과 같이 기르셨는데 친따님인들 어떻게 그렇게 귀 애하실 수가 있어요?”
 
117
하고 내 집에 늘 가정 방문 오던 여선생이 감격에 넘치는 듯이 입으로 가던 삼지창을 멈추고 내 아내와 정임을 번갈아 보아 가면서 말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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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얼 잘해 준 게야 있나요.”
 
119
하고 내 아내는 겸양의 수삽한 빛을 보이며,
 
120
“정임이는 원체 얌전하니까 도무지 말을 이를리지 아니하였답니다. 되려 순임이가 말을 이를리지요.”
 
121
하고 순임을 돌아봅니다.
 
122
다들 순임을 보고 웃었소. 나도 하도 유쾌하여서 소리를 내어 웃으며,
 
123
“우리 순임이는 남자 칠 분에 여자 삼 분이어든. 하하하하.”
 
124
하고 농담을 하였소.
 
125
또 다들 웃었소.
 
126
그러나 나는 순임의 낯빛이 파랗게 질리고 눈이 샐쭉하는 것을 보았소. 그리고 내 아내의 낯빛에도 불쾌한 빛이 도는 것을 보았소. 나는 `아차' 하고 놀랐으나 엎지른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소.
 
127
이 때에 정임은 삼지창을 들다가 도로 놓으며 고개를 숙이는 모양이 내 눈에 띄었소. 아 과연 정임은 미인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내 몸에 찌르르하고 돌았소.
 
128
내 아내가 작별 선물로 지어 준 진달래꽃 빛 나는 양복과 틀어 올린 검은 머리는 정임을 갑자기 더 미인을 만든 것 같았소. 그 투명한 살이 전깃불에 비친 양은 참 아름다웠고 가벼운 비단 양복이 그리는 몸의 선, 그리고 고개를 푹 수그린 양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소. 나는 처음 이렇게 아름다운 정임을 발견하였소.
 
129
다음 순간에 정임이가 혼란하던 어떤 감정을 진정하고 고개를 가만히 들어 정면을 정향 없이 바라볼 때에는 그 두 뺨에는 홍훈이 돌고 검고 큰 눈에는 눈물이 빛났소. 정임은 다시 고개를 숙여 하얀 목덜미를 보이며 소매 끝에 넣었던 손수건으로 두 눈을 잠깐 눌러 눈물을 찍어 내었소. 어떻게도 가련한 동양적, 고전적 미인의 선인고! 리듬인고!
 
130
식당은 조용하였소. 사람들의 시선은 다 정임에게로 모였소.
 
131
저 자신으로, 감정으로 바쁘던 내 아내와 딸 순임의 시선도 마침내 정임에게로 돌아왔소.
 
132
나는 지금까지 가졌던 모든 유쾌한 것, 모든 몸이 가뿐하던 것을 다 잃어버리고 머릿속과 가슴 속이 무겁게 막히는 듯함을 깨달았소.
 
133
나는 은집게로 호두를 깨뜨리며 전신에 힘을 주어서 내 혼란한 감정을 눌러 버렸소.
 
134
내가 왜 이랬나 나는 지금도 모르오. 그러나 그 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꼭 그 때와 같이 머릿속과 가슴 속이 뻐근하여짐을 깨닫소.
 
135
“순임이는 음악을 배우나?”
 
136
하고 교장 선생님이 입을 열었소. 이 말은 식당 무거운 침묵을 깨뜨렸소.
 
137
“네에.”
 
138
하고 순임이가 들릴락말락하게 대답하였소.
 
139
사람들은 가까스로 무겁고 괴로운 감금에서 풀려 나온 듯이 다시 유쾌하게 이야기를 시작하였소. 나는 이 때에 이 교장의 현명한 처치를 무한히 감사하고 속으로 칭앙하였소.
 
140
“가사과를 하라고 애 아버지는 그러시지만 음악을 배운다고 떼를 쓴답니다.”
 
141
하고 내 아내도 이 자리의 중요성을 깨달아서 낯에 나타났던 불쾌한 빛을 거두고 웃고 말을 하였소.
 
142
“제가 하고 싶어하는 것을 시키시지요.”
 
143
하고 교장은 점잖게 말하였소.
 
144
“그것 보세요. 교장 선생님도 안 그러세요?”
 
145
하고 내 아내는 후원자를 얻은 자랑으로 나를 보고 웃었소.
 
146
나는 순임이가 음악에 재주가 없는 것을 잘 아오. 원체 나와 내 아내가 둘이 다 도레미파도 분명히 구별할 줄 모르는 귀를 가진 사람들이니 그 속에서 음악가가 어떻게 나오겠소. 우리 조상 중에라도 음악가가 있다면 격대 유전이라도 될 수 있겠지마는 내가 아는 한에서는 우리 조상 중에는 시조 한 마디 부를 줄 알았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소. 그래서 나는 순임이년이 음악을 배운다는 것을 반대하고 가사과를 배워서 중등 교원 자격이라도 하나 얻어 주려고 하였던 것이오.
 
147
이것을 내 아내는 내가 순임이가 음악과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순임이를 미워하는 까닭이라고만 해석하고 또 순임이년도 꼭 그렇게만 해석하고 있었던 것이오.
 
148
“당신더러 피아노 사 달라고 안 할 터이니 순임이를 제 소원대로 음악과에 들어가게 해요. 정말 피아노가 필요하면 내가 친정에 가서 돈을 얻어라도 오리다.”
 
149
이 모양으로 내 아내는 나를 딸을 미워하는 아비로만 만들어 놓은 것이오.
 
150
“글쎄, 교장 선생께서 음악과로 가라시면 가려무나.”
 
151
하고 나는 이 좌석을 유쾌하게 하기 위하여 즉석에서 허락하는 뜻을 표하였소.
 
152
“아버지 나 음악과에 가요?”
 
153
하고 순임은 갑자기 희색이 만면하여 내게 물었소. 나는 오륙 년래로 딸년한테 이렇게 기쁜 낯으로 말을 받아 본 적이 없었소.
 
154
“그래 내일 청원해라.”
 
155
하고 나는 선선하게 대답하였소.
 
156
“나 음악과에 가!”
 
157
하고 순임은 뛸 듯이 제 어머니와 정임을 바라보았소.
 
158
이 날 밤의 만찬회는 이 모양으로 여러 가지 방면으로 큰 성공을 하였소. 불과 삼십 원 돈이 이처럼 큰 효과를 내리라고는 예상도 못 하였던 것이오.
 
159
이튿날 열 시 급행에 우리 가족은 전에 없이 유쾌한 생각으로 정거장에서 정임을 전송하기로 되었소. 나는 정임의 짐을 손수 들어다가 제 자리에 실어 주고 여행 중에 소용될 일체를 내가 생각나는 대로는 다 장만하여 주었소. 가령 풍침이라든지, 차중에서 볼 잡지라든지, 정임이가 몸이 약하기 때문에 혹시 배멀미나 아니할까 하여 인삼과 시식이라는 멀미약까지도 장만해서 휴대 약 케이스에 넣어 주었소. 내가 친구의 여덟 살 된 딸을 데려다가 십여 년이나 길러서 이젠 먼길을 떠나 보내게 될 때에 이만한 일이야 아니할 수가 있소? 더구나 이번에 정임이가 내 집을 떠나면 인제부터는 독립한 생활을 하게 될 터이니 다시 내 집을 의뢰하지는 아니하게 될 것이오. 정임이가 방학이나 되면 혹시 집에를 올까, 올 필요는 무엇인가. 시집이나 갈 때가 되면 내가 주혼자가 될까, 그겐들 알 수가 있나? 나는 이렇게 생각한 것이오. 이렇게 생각하면 오늘 정임이를 떠나 보내는 것이 영원한 이별 같아서 퍽 섭섭하고 또 정임이가 불쌍도 하였소. 그래서 나는 지갑에서 돈 삼십 원을 꺼내어서 내 아내가 보지 않는 데서 정임의 손에 쥐어 주고,
 
160
“책값이라든지 용돈이 부족하거든 기별해라.”
 
161
하고 따르르 하는 소리에 차에서 내리면서 나는 정임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었소. 이 때에 나는 정임의 어깨가 떨리는 것을 깨달았소. 정임은 손수건을 눈에 대고 울음이 터진 것이오.
 
162
차는 떠났소. 정임의 수없이 고개를 숙이는 모양이 보였소. 내 눈에도 눈물이 고임을 깨달았소. 나는 이 눈물을 남의 눈에 뜨이지 아니하게 할 양으로 외면하고 눈을 씻었소.
 
163
정임이가 동경으로 가 버리니 집안은 편안하지마는 어째 쓸쓸하여진 것 같았소. 정임이가 집에 있더라도 별로 이야기가 있던 것도 아니었소. 안방 머릿방인 제 방에 박혀서 공부나 하고 혹시 저녁을 먹을 때에 온 가족이 한방에 모임이 있을 때에나 보았을 뿐이오. 그러하였건마는 정임이가 집을 떠나고 보니 구석이 빔을 아니 깨달을 수가 없었소. 딸을 시집보낸 것과도 달라서 아주 내 집과는 인연이 끊어지는 것이니까. 그렇지마는 가정 불화의 원인이 없어진 것만 다행이었소.
 
164
순임이는 첫째는 소원대로 음악과에를 들어갔고, 둘째로 이길 수 없는 경쟁자이던 정임이가 없어져서 좋아하고 날뛰고 내 아내도 그로부터는 짜증을 내는 일이 줄었소. 그리고 아내와 딸이 내게 대한 태도도 돌변하여서 정말 남편과 아비에게 하는 아내와 딸의 태도가 되었소.
 
165
예전 같으면 아침에 내가 집에서 나올 때에도 본체만체, 딸년이 책보 끼고 학교에 갈 때에도 본체만체할 것이지마는 정임이가 동경으로 가 버린 뒤에는 아내도,
 
166
“오늘 일찍 오시우?”
 
167
한다든지,
 
168
“점심은 청년회 식당에서 잡수시구려.”
 
169
하고 나를 아끼는 태도도 보이고, 순임이도,
 
170
“아버지, 나 바이올린 하나 사 주우.”
 
171
하고 책상 앞에 앉았는 내 어깨 뒤에 와서 어깨를 흔들고 어리광을 하게 되었소. 작은딸년도 전보다 더 아버지, 아버지 하고 따르게 되었소. 우리 가정은 근 십 년 만에 처음 봄을 만난 것같이 화락하게 되었소.
 
172
나도 처음에는 정임의 존재, 아무 죄 없는 정임, 친구의 딸인 정임의 존재를 가정 불화의 원인을 만든 내 아내와 딸의 야박한 마음을 불쾌하게 생각하였지마는 오 이것이 인정이로구나 하고 깨달은 뒤에는 애초에 내 처치가 잘못되었다, 애초에 정임을 집에 둘 것이 아니었다 하고 뉘우쳤소.
 
173
그렇지마는 형. 그렇지마는 내 가슴 속에는 정임이가 없는 것이 대단히 적막함을 어찌하오. 멀리 보낸 딸을 생각하는 아비의 정이겠지, 이렇게 생각하였소.
 
174
정임은 학교의 요구대로 고등 사범 학교의 이과에 들어가서 박물 공부를 하게 되었다는 편지가 왔소.
 
175
그 후부터 여름 방학이면 그래도 내 집을 집이라고 돌아와서 내 가족과 같이 해수욕도 다니고 산에도 다녔소. 박물 공부를 한다 하여 정임은 조가비, 벌레, 풀꽃, 돌멩이를 줍기로 낙을 삼고, 내 딸 순임은 음계도 잘 안 맞는 소프라노와 바이올린을 삐삐거리고 스스로 도취하고 있었소.
 
176
그리고 나는 내 아내와 딸의 심리를 알기 때문에 정임에게 대하여서는 전연 모르는 체를 하고 있었소.
 
177
그러나 정임의 적막해하는 양이 가끔 태도에 나타날 때에, 더구나 정임의 건강이 좋지 못해서 서울 있을 때보다도 퍽 수척해진 것을 볼 때에 나는 불쌍한 생각을 금할 수가 없었소.
 
178
“너 어디 불편한 데는 없느냐?”
 
179
하고 나는 어느 날 이렇게 묻지 아니할 수 없었소.
 
180
“아뇨,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181
하고 정임은 잠깐 웃었소.
 
182
“글쎄 그 애가 무척 수척했어.”
 
183
하고 곁에 있던 내 아내도 걱정을 하였소.
 
184
“너 음식이 맞지 않는 게로구나. 공부를 너무 해서 그러냐. 집이라고 와서도 잘 먹이지도 못하고.”
 
185
하고 내 아내는 정임을 위하여 고기나 생선을 사서 한두 가지 반찬도 더 놓아 주었소.
 
186
그렇지마는 그런 걱정을 하는 내 아내도 웬일인지 근래에는 건강을 잃어서 많이 수척하였소. 그래서 여름이 되면은 나는 가족을 혹은 금강산에, 혹은 원산에, 석왕사에 몇 주일씩 피서를 시켰던 것이오. 내가 보기에는 내 아내나정임이나 거의 같은 병이 아닌가 하오. 혹시 결핵성 병이나 아닌가 하오.
 
187
그래서 돌 지난 희(熙)놈을 어미 곁에 두는 것이 대단히 마음이 놓이지 아니하였으나 신경이 날카로운 아내에게 그런 말을 할 수도 없고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하랄 수도 없었소.
 
188
이 모양으로 내 가슴 속에는 아내의 건강에 대한 근심, 정임의 건강에 대한 근심, 또 젖먹이의 건강에 대한 근심으로 편안할 날이 없었소. 이를테면 정임이가 동경으로 간 후 한 이태 동안이나 마음이 편안하였을까.
 
189
나는 아침이면 일어나 학교에 가서 오후 네 시까지 일을 보고 그리고는 집에 돌아와서 내 아내의 마음을 편하게 하기에 전력을 다하였소. 첫째로 아내가 좋아하는 것은 남편이 집을 떠나지 않는 것임을 깨달았소. 그렇지마는 너무 내외가 함께만 있어도 또 충돌이 생기기 쉬운 것도 깨달았소. 더구나 아내가 몸과 마음이 건강치 못할 때에는 남편의 고심이 여간이 아닌 것도 체험하였소. 그렇지만 내 아내는 병자가 아니오? 그는 외마디 기침을 시작하고 오후에 가끔 신열이 나고 밤에는 식은땀을 흘리고 사지가 쑤신다고 하고 짜증을 내고, 그러면서도 어린애는 안심이 안 된다 하여 유모도 안 대고 이러한 병자가 아니오? 어떻게나 하면 이 아내를 편안하게 하여 줄까. 만일 내 팔이나 내 다리 하나를 잘라서 아내의 몸과 맘을 편안히 할 수가 있다고 하면 나는 시각을 지체하지 아니하고 잘라 버릴 것이오.
 
190
“의사를 좀 보입시다.”
 
191
하고 나는 참다못하여 진찰을 권하였소.
 
192
“의사는 왜 보라우? 어서 병이 들어서 죽었으면 시원하겠소?”
 
193
하고 아내는 도리어 성을 내오. 원체 기승한 아내는 제가 병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승인하고 싶지 아니하였던 것이오.
 
194
그래서 부득이 나는 친한 의사 한 분을 청하여서 저녁을 대접하였소. 바로 형도 잘 아시는 Y박사 말이오.
 
195
아내는 삼십칠 도 오 분이나 되는 신열을 가지고도 몸소 만찬을 분별하였소. 가끔 기침이 날 때에는,
 
196
“아이구, 감기가 들어서.”
 
197
하고 연해 변명을 하였소.
 
198
“부인 좀 쉬셔야겠습니다.”
 
199
하고 Y박사는 해쓱한 내 아내를 바라보면서,
 
200
“애기는 돌도 지났으니 유모에게 맡기시지요. 그리고 어디 가셔서 두어 달 편안히 쉬시지요.”
 
201
하고 권하였소.
 
202
Y박사의 말에 아내의 낯빛은 아주 핏빛을 잃어버렸소. 그리고 숨이 높아지는 것이 아무의 눈에나 보였소.
 
203
“어머니 손이 얼음장이오.”
 
204
하고 순임이가 제 어머니 손을 만져 보고 걱정스럽게 말하였소. 이 장난꾼인 순임이년도 그 때야 제 어머니가 심상치 아니한 것을 깨달은 모양이오.
 
205
Y박사의 말에 겁을 집어먹고 아내는 진찰을 받기를 허락하여서 저녁이 끝난 뒤에 Y박사의 진찰을 받았소. Y박사는 벌써 이 준비로 청진기와 검온기 등속을 가방에 넣어 가지고 왔던 것이오.
 
206
아내의 가슴을 보고 난 Y박사는,
 
207
“감기가 기관지염이 되었습니다. 좀 쉬시면 괜찮으시겠습니다. 요새 환절에 조심 아니 하시면 병이 중해지십니다. 네, 무얼 염려하실 것은 없지마는 그래도 지금 잘 조리를 하셔야지요. 글쎄, 이렇게 해 보시지요.”
 
208
하고 Y박사는 이윽히 생각한 끝에,
 
209
“애기도 인제는 젖떨어질 때도 되었으니 어느 새너토리엄에 좀 가 계시지요. 일본이라도 두어 달만 계시면 좋으실 것입니다.”
 
210
이렇게 말하였소.
 
211
Y박사가 돌아간 뒤에 내 아내는 마치 사형 선고나 받은 것처럼 울기를 시작했소.
 
212
“그럼 내가 폐병이란 말이지?”
 
213
하고 아내는 미친 듯이 울었소.
 
214
“폐병은?”
 
215
하고 나는 아내를 속이려 들었소. Y박사가 대문 밖에 나서면서 나더러,
 
216
“상당히 중하시오.”
 
217
하고 자기의 오른편 가슴을 가리켰소.
 
218
나는 그 때에 다만 휘우 하고 한숨을 쉬었소.
 
219
“그렇지마는 어린애는 어머니한테서 떼시는 것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결핵이란 어른에게는 별로 옮는 것이 아니지마는 어린애에게는 반드시 옮는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220
하고 Y박사는 힘을 주어서 말하였소.
 
221
이 말을 들으니 더욱 가슴이 무거워지오. 희가 내 외아들이라고 해서, 또 만득자라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지마는 내 집을 믿고 온 손님을 종교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맡긴 어린 손님 하나를 부모의 죄로 병이 들게 한다는 것은 차마 못 할 일이 아니오.
 
222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어서 내 아내더러,
 
223
“여보 희를 유모를 얻어 맡기고 당신은 쉬시오. 그러다가 병이 점점 더하면 어찌하오?”
 
224
하고 차마 희에게 병이 옮으면 안 되겠으니 쉬란 말은 못 하겠소.
 
225
“왜요? 내 병이 폐병이래요?”
 
226
하고 내 아내는 눈을 크게 뜨고 묻소. 그는 희를 안고 앉아서 젖을 먹이고 있소.
 
227
“폐병이라고는 아니 합디다마는 그대로 두면 폐병이 될는지도 모른다고 합디다. 그럴 거 아니오? 성한 사람도 어린애 젖을 먹이고는 못 배기는데 몸이 약한 사람이 어린애 젖을 먹이고 배기겠소. 또 돌만 지나면 젖을 떼 는 것이 아이한테도 좋답디다.”
 
228
나는 어디까지든지 내 아내에게 폐병이라는 말을 알리지 않기로 결심하였소. 내가 일찍 아내에게 거짓말을 해 본 일이 없는 사람인데 비록 이런 말이라도 속이는 것이 아닐까 해서 여간 마음이 거북하지를 아니하였소.
 
229
내 아내는 내 말의 뜻과 내 생각의 뜻과를 비교하는 모양으로 한참이나 나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두 눈에서 눈물을 흘리며 희를 쳐들어 들여다보고,
 
230
“희야, 엄마가 폐병이면 어떡하나. 엄마 병이 옮으면 어떡하나. 그렇기로 이 풋솜 같은 것을 남에게 어떻게 맡기나.”
 
231
하고 흑흑 느껴 울기를 시작하오.
 
232
“왜 우시오? 울면 더 몸에 해롭지 않소?”
 
233
하고 나는 아내를 위로하였소.
 
234
“울지 마우. 두어 달만 정양하면 낫는다는 걸 무얼 그러우? 저, 신열 나리다.”
 
235
아무리 위로하여도 아내는 울음을 그치지 아니하오. 소리까지 내어서 울게 되었소.
 
236
엄마가 우는 것을 보고 희놈도 으아 하고 울기를 시작하였소. 비록 말은 알아듣지 못하여도 그 어머니의 슬퍼하는 것이 통한 모양이오.
 
237
“내가 희를 가까이해선 안 되지요?”
 
238
하고 내 아내는 한 번 더 희를 꽉 껴안아 보고는 방바닥에 떼어 놓으려 하였소. 희는 바람이나 일듯이 엄마에게서 안 떨어지려고 울고 달라붙었소. 나는 마침내 터지려는 울음을 참지 못하여 마루로 나오고 말았소.
 
239
내 아내는 사람을 놓아 유모를 구하기 시작하고 일변 신문에 `유모 구하오.' 하는 광고를 내었소. 내 집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유모 후보자가 들끓었소. 직업은 없고 살기는 어려운 때요, 게다가 엄동이 가까워 오는 때라 그들은 젖을 자본으로 과동할 시량을 얻으려는 것이오.
 
240
내 아내는 몸소 이 유모들의 선을 보았소. 어떤 사람은 늙어서 못 쓰고, 어떤 사람은 너무 젊어서 못 쓰고, 어떤 유모는 너무 모양을 내서 못 쓰고,또 어떤 유모는 너무 몸 거둘 줄을 몰라서 못 쓰고, 이런 흠 저런 흠 다 고르고 나면 그 수많은 후보자 중에 쓸 만한 유모가 별로 없었소.
 
241
그래도 내 아내는 사십당이 넘어서 낳은 첫아들이요, 막내아들을 아무러한 유모에게나 함부로 맡길 마음은 없었소. 그래서 오면 보내고 오면 보내고 하기를 아마 이십여 명은 더 하였을 것이오.
 
242
“유모 어디 고르겠소?”
 
243
하고 하루 저녁에는 내 아내는 실망하는 듯이 한탄하였소.
 
244
그는 이틀 동안이나 많은 유모를 시험하기에 그만 진저리가 난 모양이오.
 
245
“글쎄 이거 봐요. 제 자식을 떼어 놓고 온 년이야 이 애를 보면 밤낮 제 자식 생각만 하지 아니하겠어요? 또 제 자식 죽이고 온 년의 젖은 먹이고 싶지 않고, 호랑이같이 흉악한 년의 젖도 먹이고 싶지 않고 암만해도 유모는 못 얻겠어.”
 
246
하고 아내는 제 누이하고 앉아서 놀고 있는 희를 보오.
 
247
셋째 날 쓸 만한 사람이 왔으나 피를 빼어서 검사하자는 말을 듣고 달아나 버리고 넷째 날에 온 유모는 회충이 있으니 회충을 빼자고 했더니,
 
248
“별집을 다 보겠네. 회 없는 사람이 어디 있담.”
 
249
하여 엉지회가 빠지면 큰일난다고 달아나 버리고, 하다하다 못 하여 소아과에서 간호부로 있던 여자 하나를 데려다가 아이 보는 조수 하나를 붙여서 희를 기르기로 작정이 되었소.
 
250
잘 때에는 희도 엄마를 찾고 울고 엄마도 희를 찾고 울어서 며칠 동안은 밤만 되면 집안이 울음판이 되었소.
 
251
그러나 사람이란 희랍 신화에 있는 말과 같이 잊어버리는 재주가 있기 때문에 희놈도 간호부를 아주머니라고 불러서 따르게 되고 아내도 희를 떼어 놓고 잘 수도 있게 되었소.
 
252
이렇게 희를 어머니에게서 떼는 사건이 일단락이 되어서 좀 마음을 놓으리만큼 되었는데, 이리하여 하루 이틀 마음을 펴고 내가 보는 학교의 일을 좀 볼까 할 때에 또 벼락이 내렸소.
 
253
“ナンテイニンキフビヨウスグコイ オホヤマ(남정임급병즉래오야마)”
 
254
이라는 전보가 떨어진 것이오.
 
255
내가 학교의 직원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니까 아내가 이 전보를 내게 보였소. 오야마라는 것은 동경 여자 고등 사범 학교 기숙사 사감의 이름인 것은 아내도 알고 나도 아는 일이오.
 
256
“이 애가 무슨 병일까?”
 
257
하고 내 아내는 물었소.
 
258
전보가 오전에 온 것을 곧 학교로 기별도 아니 하고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린 무성의를 나는 원망하였소. 만일 순임이가 동경에 가서 급한 병이 났다고 하면야 이럴 리가 있으랴 하면 마음이 괴로웠소.
 
259
내가 이 전보를 받고 어떻게 놀라고 비통해하는 빛을 보였던지 아내는 도무지 말이 없소.
 
260
예사 때 같으면 나는 아내에게 의논을 할 것이지마는 이런 급한 경우라 나는,
 
261
“밤차로 가 보아야겠소.”
 
262
하고 선언을 하였소.
 
263
그리고 저녁상도 받는 듯 마는 듯 나는 내 손으로 짐을 싸 가지고,
 
264
“몸조심하시오.”
 
265
하고 아내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희를 한 번 안아 보고 잘 보아 주어서 체하거나 감기 들리지 말고 울리지 말라고 신신 부탁하고 정거장으로 나갔소. 순임이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정거장까지 따라나와서,
 
266
“아버지 언제 오세요?”
 
267
하고 묻고, 차가 떠날 임박에,
 
268
“아버지 이번 길에 나 피아노 하나 사다 주세요.”
 
269
하고 졸랐소.
 
270
“돌아댕기지만 말고 네 어머니 잘 위로해 드려!”
 
271
하고 피아노를 사다 준다든지 아니 사다 준다든지 약속은 아니 하고 떠났소. 그러나 마음에는 순임에게 피아노를 하나 사 주고도 싶었소. 잘하나 못하나 내년이면 졸업인데 집에 피아노 하나 없는 제 마음이야 퍽 섭섭할 것을 동정하였소. 야마하 피아노면 오백 원짜리부터 있지마는 순임의 눈에 그런 것이 들 리는 없고 적어도 이천 원 돈은 들여야 순임의 비위를 맞추겠으니 딸의 아비 되기도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였소.
 
272
차 속에서 나는 순임을 생각해 보았소. 그년이 도무지 아비를 아비로 알지 아니하고 제 어미와 부동하여 아비를 헐기만 하는 것을 보면 괘씸하기도 하지마는 그래도 그것이 내 딸이 아니오? 내 첫자식이 아니오? 자식 미워하는 아비가 어디 있겠소? 순임이년이 좀더 내 눈에 들게만 굴면야 아무런 짓을 하기로 음악과에 다니는 저를 피아노 하나야 안 사 주었겠소? 원체 그년이 나를 적대하니까 나도 가벼운 반감을 가지게 된 것이오. 순임이년 하는 일을 보구려. 아비가 먼길을 떠난대도 집구석에 숨어 있고도 모른 척하고 있다가 피아노 하나를 조를 생각이 나서 정거장으로 주르르 따라나온 것을 나는 차 속에서 순임이년의 행사를 생각하고 혼자 웃었소. 아비의 생각에는 이런 것도 다 귀엽게 보이는 것이오.
【원문】유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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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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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유정(有情) [제목]
 
  이광수(李光洙) [저자]
 
  조선 일보(朝鮮日報) [출처]
 
  1933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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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10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