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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동어(冷凍魚) ◈
◇ 6 ◇
카탈로그   목차 (총 : 6권)     이전 6권 ▶마지막
1940.4~5
채만식
1
冷 凍 魚[냉동어]
 
2
6
 
 
3
이튿날.
 
4
오전 두시가 거진 가까와오는 정밤중, 예정했던 대로 춘추사(春秋社)의 망년회가 배설이 된 동소문 밖 저 우이동 근처의 한적한 요정에서……
 
5
대영, 병수 그리고 김과 박까지 도통 네 사람 한 집안식구에 다만 이삼명의 기녀가 시중을 들며 있어 물론 조촐한 자리였으나, 배반은 엔간히 낭자했고 술들도 저으기 취했다.
 
6
그러나 그 중 대영만은 처음부터 양을 조심도 했거니와, 따로 끊이지 않고 촉량을 하는 데가 있는 터라 초랑초랑 정신이 맑았다.
 
7
그는 간밤 그때부터 이내,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이 같은 그 생각이었었다.
 
8
가면 가는 것이 좋고, 안 가면 안 가는 것이 좋고, 오늘 떠나도 좋고 내일 떠나도 좋고…… 이것이었었다.
 
9
그러므로 이것은 유예미결이나 주저가 아니라, 아무렇게 해도 상관이 없다는 하나의 버젓한 결정이었었다.
 
10
자리는 술이 몇물 지나간 뒤라, 제각기 상으로부터 물러앉아 이야기가 어우러지고…….
 
11
대영은 한 기생의 무릎을 베고 버얼떡 누운 채 마침 또 시계를 꺼내서 본다.
 
12
한시 사십분.
 
13
인제 한 시간 후에는 자동차를 몰아 경성역으로 달려야 하고, 그리하여 다시 두 시간 후에는 스미꼬와 더불어 부산행 제5호 급행열차 히까리를 잡아타야 한다.
 
14
대영은 손뼉을 쳐 보이를 불러서 아까 시킨 대로 두시 사십분까지에 어김없이 차 한 대를 배비해야 하느니라고 다시금 신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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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저만치서 병수가 커다랗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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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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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불러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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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시게! …… 방금 숨은 안 넘어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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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어허 허허…… 그래 그여코 가보셔야 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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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봐야 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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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따아, 뭐얼 그러시우?…… 고만 내던져 두구서, 눌러 술이나 먹읍시다!”
 
22
“안돼!”
 
23
“거, 대체 누가 그대지 요란스런 사람이 떠나길래, 이 밤중에 부둥부둥 전송만 나가야 한다는 게요? 여보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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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이래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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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어! 아냐…… 우리 형님이 이뭉해 놔서, 정말 애인이면 애인이라구 하덜 않지!”
 
26
“허허실실(虛虛實實) 모르나?”
 
27
“아냐 아냐! …… 아뭏던지 꼭 도루 오시지? 두 시간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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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렴! …… 내가 선량한 자넬 저바릴 택이 있나!……”
 
29
제 입으로 말을 해놓고 보아도 어쩐지 마음이 좀 언짢았다.
 
30
‘그러면 오늘 저녁은 작파하나?’
 
31
‘쯧! 그래도 좋지……’
 
32
‘기왕이니 떠나도 좋고……’
 
33
덤덤히 기다리기가 갑갑하여 판은 헤식으나따나, 가야금 병창을 한 대문 듣고, 그리고 나서 이럭저럭 두시 반이 된 것을 보고는, 병수와 김·박 세 사람을 상 앞으로 모이게 한 후(마지막 작별인 양) 쓰렁둥 술잔을 나누었다.
 
34
이윽고 차가 대령이 되었다는 전갈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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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일으키다가 넉넉하니 오 분만 지체하도록 일러 두고서, 또 한 순 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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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정말 인전 동경으로 떠나느니라고 벌떡 일어서는 것을, 옆에서 병수가 팔을 붙잡아 앉히더니, 형님 눈치가 아무래도 좀 수상하다면서, 꼭 도로 온다는 명세로 큰 잔에 한 잔을 먹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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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는 또 제가 제풀에 주저앉으면서(안 떠나도 그만이라고) 술잔을 들었다.
 
38
그러나 이내 일어섰다.
 
39
그러나 다시 또 앉았다.
 
40
또다시 일어섰다.
 
41
또다시 주저앉았다.
 
42
이렇게 연해 앉았다가는 일어서고, 일어섰다가는 주저앉고, 그러면서 줄곧 시계는 꺼내 보았다 집어넣었다 하면서 하는 동안에 어언간 세시가 되고, 이어서 5분, 연달아 10분, 마침내 15분…… 15분이자 드디어 최후의 시간은 완전히 지나버리고 말았다.
 
43
이 최후의 시간이 지나고 말면서, 그리하여 오늘은 필경 일이 파가 되었느니라는 것을 새삼스레 관념을 하는 순간, 웬일인지 이상스럽게 가슴이 울적한 것도 같고 일변 거뜬한 것도 같아, 예라 이왕지사 술이나 맘껏 먹어야지야고, 보이를 높이 불러 위스키를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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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나니, 정거장에서 저 혼자 고만 허탕을 치고는 애를 태우다가 하릴없어 돌아설 여자의 추렷한 양자가 자꾸자꾸 눈에 밟혀싸 못내 가엾어 못하겠었다.
 
45
그래, 이따가 회로엔 아파트로 가서 잘 위로도 시켜 주려니와, 내처 같이 거기서 기다렸다가 내일 낮차엘랑 꼭 떠나도록 하려니, 이쯤 단단 유념을 해 마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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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뒤미처 또 생각을 하잔즉, 일단 아파트를 비워 주고 나갔는데, 그러니 십상 그리로 되짚어 찾아들지는 못했으련 싶고, 해서 깊은 물에 고기를 놓친 것같이 자못 막막하기도 했다.
 
47
하나, 그렇더라도 막상 모를 노릇이니, 어쨌든 들러는 보아야 하고 그게 또한 도리겠지야고, 그랬다가 역시 돌아오지 않았으면 상필 역 앞의 가까운 여관에서 하룻밤 묵는 시늉을 하는 게 분명하니, 내일 일찌감치 사에로 무슨 소식이 있을 테지야고…… 마지막엔 이만큼 안심을 해두었다.
 
48
제가 아무려면 그 그물 속에 들어 있지 어디로 가리요 하는 일종 취중의 장담이었던 것이고……
 
49
긴장은 풀렸는데 술은 더욱 독했겠다, 그제서부터 한꺼번에 와락 취하기 시작하여 미구엔 억병이 돼가지고 정신을 놓았다.
 
50
그러고서 새벽녘 다섯시에는, 동행들의 지시를 받은 운전수가 동대문 밖을 향해 내달리는 자동차의 쿠션에 쓰러져, 세상 죄다 모르고 떠실려 가며 있었다.
 
 
51
밝은 아침, 해가 높아서야 겨우 잠이 깨자 비로소 제네 집 건넌방에 누워있는 저를 발견함과 동시에, 스미꼬의 일이 퍼뜩 생각이 났다.
 
52
늦어서는 안되지야고 번쩍 고개를 쳐들곤 책상의 좌종을 올려다보는데(열시가 지났으나, 그보다도) 배 불룩하니, 조간신문 위에 포개놓은 한 장 편지에 눈이 더 띄었다.
 
53
연필로 갈겨 썼고, 문대영 양(文大永樣)이란 투가 벌써 아무것도 없는 뒷등이야 넘겨보나마나 알 속이고.
 
54
간밤의 일로 소갈찌가 단단히 났을 건 빠안한 노릇, 마침 주소도 알겠다, 선길에 아마 새살깨나 적어넣었으려니쯤 생각하고 빙긋이 웃으면서 피봉을 뜯어 읽는데, 허두가 나오기를 느닷없이……
 
55
“용서해 주세요! 분상. 분상을 떼어놓고 스미꼬 혼자서 고만 대륙을 향해 떠나고 있답니다!……”
 
56
대영은 정신이 화닥닥 나 눈을 쥐어뜯듯 마음을 급히 내려 읽는다.
 
57
“……많이많이 생각해 보았어요. 그러고도 어떻게 할 바를 몰랐어요. 그렇지만, 스미꼬, 사랑이 하도 소중해서, 하도 아까워서, 그야 차마 못 할 노릇이긴 해도, 필경 이 도리가 부득불 옳을 것 같아요.
 
58
스미꼬, 스물셋도 다 가는 이 나이에, 실은 처음이라고 해야 할 사랑이고, 겸해서 빈틈이 없는 진정이었어요. 어진 우리 분상 덕분에 말씀예요.
 
59
그리고 그런만큼 예정대로 분상 모시고 동경으로 가서, 둘이서 즐겁게 그 사랑을 누려야 마땅하고, 또한 그리하고픈 원념은 시방도 간절하여 종시 잊지를 못하겠어요?
 
60
그러나 아무리 해도 안될 말이겠어요. 처음 얼마 동안이야 물론 별일 없이 다만 즐겁겠지요. 그렇지만 우리 둘이 같이서 그렇게 한 달이면 한 달, 두 달이면 두 달, 반년이나 혹은 요행히 일 년이라도 지내느라고 지내고 난 그 다음엔?……
 
61
처음의 즐거운 시기가 지나고 난 그 다음엔, 반드시 우리에겐 무위의 권태에서 오는 파탈이 생기고라야 말 것 같아요.
 
62
번연한 노릇이지, 분상도 어둔 얼굴, 스미꼬도 어둔 얼굴, 이 두 어둔 얼굴이 밤이나 낮이나 우두커니 서로 바라다보고만 앉았어야 할 게 아니겠어요? 이야기도 없고 웃음도 없고, 그저 덤덤해설랑……
 
63
그러니 글쎄, 생각만 해도 그 일을 어쩌랴 싶어, 고만 무섭고 기가 딱 질리지 않아요?
 
64
생활이 있어야죠!
 
65
분상이나 스미꼬나 생활을 가질 기운을 잃어버린, 다 같이 아편쟁이…… 아편쟁이요 혈액만 통하는 육괴인 것을, 그 두 개의 육괴가 어떻게?……
 
66
건강스런 생활과 병행해야만 사랑도 애정도 생명이 있는 법이라는데, 그렇게도 답답하고 애브노말한 두 개의 육괴와 육괴가 주야장천 마주 붙어만 있으니, 그 사이에서 어떻게 사랑이 살아 있어지며 지탱이 될 수가 있겠어요?
 
67
잠깐 생각해 보세요? 분상…….
 
68
우리 둘이서 앞으로 동경서 지내게 될 그것보다는 월등이라고 할 수가 있는 분상의 지금 현재의 생활…… 그래도 생활이랄 것이 있는 지금도, 분상은 분상의 가정 즉 ‘낡은 여자’한테 대해서 그처럼 흥이 없고 범연치 않으세요? 더우기 부인께서만은 건전하신가 보던데……
 
69
하물며 그러니, 둘이 다 폐인이면서 전혀 생활이라곤 없는 우리 둘이의 장차 그날은 어떻겠어요?
 
70
필경 그래서, 우리는 시방껏 이 즐거운 사랑일랑 죄다 까먹어버리곤, 그 대신 서로 불쾌한 기억만 안고서 손을 나누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잖으면 견디다 못해 스미꼬, 미치든지 자살을 하든지 할 것이고…….
 
71
그러니 말씀예요, 고까짓것 한 달이나 두어 달, 혹은 반년 조금 더 기쁨을 탐내어, 시방은 스미꼬 이대도록 즐겁고 소중한 사랑을 갖다가 불쾌한 오점을 칠해서 영 장사를 지내야 하겠어요?
 
72
스미꼬, 그거 싫어요! 그리곤 슬퍼도 이 사랑 이대로 좋이 간직을 하는게 오히려 행복이고 자랑이겠어요.
 
73
「뿔그극장」의 미테라가 탄식을 하고 고민을 해도, 보기엔 행복이듯이요. 다까야마 조규가 그랬죠? 인간은 도야지로써 즐겁느니 인간으로써 괴로와야 한다고. 스미꼬, 지금에 분상 모시고 동경으로 가는 거, 마치 그 도야지예요!
 
74
그러니깐 못써요.
 
75
그런데, 그런 줄은 알면서도 자꾸만 그 도야지가 제발 되고가 싶으니요! 차마 애달파서 도야지라도 되고만 싶으니요!
 
76
아까 새벽에 분상 돌아가신 후 이내 그 생각으로 시간을 지우다가, 종시 결단이 없이 조금 일추 아뭏든 역엘 나오지 않았겠어요! 했더니, 우리 둘이 동경으로 가기로 언약을 한 시간보다 삼십 분 앞서, 세시 십오분, 대륙을 향해 떠나는 차가 마침 있겠죠! 그걸 보고서야 문득 비로소 결심을 했어요. 오냐 기왕이니 대륙으로나 가보리라고.
 
77
슬퍼도 미련겨워도, 자랑과 행복 속에 사랑을 보전하겠으니 좋고, 아울러 그곳에다가 아편을 버릴 수가 있을는지도 모르니 막상이겠어요.
 
78
요전날 밤, 분상도 이야기를 하신 대로, 일청(日淸)·일노(日露) 전역때 부터, 더는 풍신수길, 또 더 그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일본민족의 유구한 민족적 사명이요, 그래서 한 거대한 역사적 행동인 중원 대륙의 경륜…… 이는 누가 무어라고 하거나 현 세대를 전제로 한 인간정열의 커다란 폭발인 것 같아요.
 
79
스미꼬, 이 길로 거기엘 가서 보고 대하고 접하고 하겠어요.
 
80
새로운 건설을 앞둔 무서운 파괴가 중원의 천지에 요란히 전개되고 있는 그 어마어마한 무대와 행동을……
 
81
스미꼬와 혈통을 더불어 했고 동시에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인 그네 씩씩한 장정들이, 그렇듯 세기적인 사실의 행동자로써 늠름히 등장을 했다가 끊임없이 시뻘건 피를 흘리고 넘어지는 그 핍절하고도 엄숙한 사실을…… 스미꼬 직접 목도를 하고 접하고 할 때에, 진정으로 한 조각의 붕대를 동여주고 싶은 마음이 우러날 것 같아요. 반드시 어떤 흥분과 감격을 느끼고라야 말 것 같고, 아편의 독을 잊어버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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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라우드 스피커가 대륙행의 개찰을 고하는군요!
 
83
봉해서 포스트에 들여뜨리고 인젠 가겠어요.
 
84
그렇지만, 어떻게 가요! 자꾸만 뒤가 돌려다보이고, 눈물이 어려쌓는 걸. 어떡하면 좋아요?
 
85
시방쯤 분상께서, 우연히 만일 일찍 당도를 하셔서 저 육중한 문을 밀치고 쑥 들어서신다면, 제발 그러시기만 한다면 스미꼬 얼른 이 편질라컨 숨겨버리고, 곱다시 분상 따라서 동경으로 가겠구면서두요! 어떻게 글쎄, 안 그리겠어요. 스미꼬가! …… 생각하면, 우연이란 것이 쉽지 못한 것을 원망하고파요?
 
86
분상 부디 틈틈이 그 소파에 앉으셔서, 또 그 찻잔에 차 잡수시면서, 스미꼬 항상 생각해 주세요, 네?……
 
87
그래 주시려니 생각만 해도 스미꼬 죄꼼은 눈물이 걷히면서 이렇게 기쁜걸!
 
88
스미꼬, 그 칙칙한 모란족자 평생토록 고이 신변에 두고 바라보면서, 분상 사모하겠어요.
 
89
매점에서 아쉰 대로 산 간찰지 한 축이 거진 다했건만, 할 말씀은 여태 끝이 없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시간도 촉하고, 자아 인젠 고만…….
 
90
부디부디 안녕히.
 
91
남다른 분상이시겠다, 스미꼬의 이런 마음과 근경 잘 이해하실뿐더러 또한 동감하시고, 괘씸타 노여워는 안 하실 줄 꼭 믿어요!
 
92
자 그러면 한번 더, 안녕히.
 
93
착한 우리
 
94
분상께
 
95
나쁜 스미꼬”
 
 
96
몰아치듯 주욱 다 끝까지 읽고 난 대영은, 마지막 한꺼번에 후유 막혔던 한숨을 내쉬면서 맥은 풀려, 편지째 방바닥으로 힘없이 팔을 내려뜨린다. 그러면서, 눈을 스르르……
 
97
가슴은 다직 그저 주먹만한 무엇이 그 새깐은 들와 묻혀 있었던 성싶은데 막상 몸이 한 귀퉁이나 통째로 뭉떵 패 달아난 것 같은, 그리고 이대로 영영 채워질 길이 없을 것 같은 허전함을 느끼겠으면서도, 머릿속은 한갓 벙벙만 하여 섬뻑 어떻다고 할 수가 없었다.
 
98
죽은 듯 그대로 한동안 누워 있었고.
 
99
마음은 부지할 수 없이, 고달픈 어떤 고독감(孤獨感)이 이윽고 어디선지 모르게 조이듯 사면으로부터 몸에 스며들었다.
 
100
그것은 애정을 놓친 그 가슴의 다만 허전함과도 일변 다른 것이어서……
 
101
어렸을 적, 밤에 늦도록 동무들과 더불어 밖에서 잠착하여 놀다가, 그러는 동안 아이들은 하나씩 둘씩 스실사실 헤어져 가고, 마지막……
 
102
마지막 단둘이만 남았던 맨 친한 동무 하나마저 어느덧 온다간다 소리도 없이 사라져 불러도 대답이 없고 찾아도 나오지 않고……
 
103
필경 그리하여, 혼자서 으슥한 고샅에 가 호출하니 남아 섰던 그때의 그 외롭고 고만 울고 싶게 그지없던 마음……
 
104
대영의 시방의 고독감은 마치 그렇듯 동무들을 깜박 어느결에 죄다 잃고서 홀로 처진, 버림을 받은 그러한 소년 적의 이슥한 밤처럼 안타까이 지향할 바를 모를 막막함이었었다.
 
105
참으로 울 수라도 있다면, 그래서 실컷 울기라도 했으면 조금은 마음 후련할 것도 같았다.
 
106
아무도 없이 외로운데, 또한 가버린 사람에게는 혼자서 어떻게 가눌 바가 없는 정의 미련이 간절하니 더우기나 말이던 것이다.
 
107
하기야 한편 생각을 하면, 둘이는 역시 길이 합쳐지기 어려운 형편에 피차간 처해 있는만큼, 오히려 지당한 괴치(乖馳)요 그 귀정임도 알기는 하겠었다.
 
108
또, 제 편지에 쓰인 말따나, 아무래도 둘이는 즐거움은 짧고 이내 서로 남이어야 할 운명일 터이면, 미련을 탐하여 환멸과 불쾌한 날을 장만하느니 차라리 애련한 한 폭의 그 하찮은 그림이나마 추한 덧칠을 할라 말고서, 미흡한 대신 곱다시 오래도록 간직을 함도 또한 낙이 아님은 아니었었다.
 
109
그러나 그것은 부득이한 단념이요, 인제 오랜 후 많이 애를 삭인 날에 비로소 효험이 있을 낙이지, 지금 당장껏은 도리어 대륙에로 부르르 그 뒤를 쫓아서 가고 싶은 마음이 더럭더럭 솟으며 있는데야……
 
110
여자의 환영을 밟아 줄기차게 대륙에로 쏠리는 마음, 그를 연해 몽스려가며 자제를 하자매, 아픈 노력이 쓰이지 않지 못했다.
 
111
여자와 더불어 동경으로 가기가 그만큼 수월하던 대로, 대륙인들 가지 못할 아무런 이유나 불가함이 있음은 아니었었다.
 
112
그러나 어젯날 여자와 함께 동경으로 떠나는 것과, 오늘에 여자의 뒤를 쫓아 대륙으로 가는 것과는 그 사이에 인간 구차스러움이 천양지차가 없지 못하던 것이다.
 
113
아파도 참지, 구차스럽고 싶지는 않았었다.
 
 
114
방문이 바시시 열리면서, 푸석하니 아직도 산태(產態) 가시지 않은 안해가 조용히 들어선다. 대영은 문 소리에 눈을 돌리다가 말고, 벌써 바람을 쏘이나 싶어 부질없거니 했으나, 무어라고건 참견해 말을 하잘 신명은 날 경황이 없었다.
 
115
그 길에 마침 담배곽만 더듬어 한 개 붙여 물고는 도로 반듯이 누웠는데, 안해는 대견스레 머리맡으로 와 앉으면서
 
116
“어쩌믄 약줄 그리 몹시두!……”
 
117
하고 요 밑에 손을 넣어본다.
 
118
“……무어, 속 좀 안 푸실려우?”
 
119
물어도 대영은 못 들은 성, 우수 서린 담배 연기만 소옴솜 천장으로 피워 올리며 꼼짝 않고 누워 있다.
 
120
늘 그러한 남편이라, 안해는 아무 내색도 않고 한참이나 잠잠히 그대로 앉았다가 생각결에……
 
121
“그리구 참…… 뭣이냐, 신고를 해야 할 텐데…… 어린년 이름이나 하나 지어 주시우?”
 
122
가뜩이 신산한 중에 대영은 마음조차 없는 성가신 소리여서, 계집아이 이름쯤 아무렇게나 할 것이지, 그예 나까지 조를 건 어딨단 말이냐고 버럭 지청구를 하자는데, 그러자 문득(진실로 문득) 도저히 그렇지 않을 생각 솔깃한 일이 한 가지 있음을 깨달았다.
 
123
“계집애자식이래두 아버니가 계신데, 에미 혼자서 어떻게……”
 
124
처음 언뜻, 남편이 상을 찌푸리며 마땅찮아하던 것을 보고서, 안해가 달래듯 변명을 하던 것이고.
 
125
대영은 그동안 안색을 다스리느라 잠깐 있다가 밑도 끝도 없이
 
126
“맑을 징……”
 
127
하고 불러 준다.
 
128
“맑을 징?……”
 
129
안해는 뜻밖이라서 반가운 듯
 
130
“……맑을 징! …… 삼수변에 오를 등 한 그 자지요?……”
 
131
하면서 책상의 지필을 내려다가 징(澄)자를 또박이 써놓는다. 대영은 여자 스미꼬한테서 의식코 그 징자를 따오는 것이 일변 자식에게 죄스러울 것도 같았으나, 또 한편 생각하면 노상 그렇지도 않았었다. 기념을 하자는 게 아닌 이상……
 
132
안해는 써논 징자를 연해 들여다보고 고개도 꺄웃거리고 하다가……
 
133
“쯧! 수수해 좋수! 쓰긴 좀 까다라워두…… 그리구 그 다음, 아랫자는?”
 
134
“거, 뭣이냐…… 절개란 글자루, 무어 마땅한 자가 없나!……”
 
135
“송(松)…… 죽(竹)…… 또오 설(雪)……”
 
136
“정조만을 의미하는 절개가 아니라…… 으음…… 문징(文澄)…… 문징(文澄)…… 상! 문징(文澄)상!”
 
137
“상?”
 
138
“상서 상…… 옷의변에 염소 양……”
 
139
“오오, 상서 상! …… 문 징 상……”
 
140
안해는 다시 새로 문징상(文澄祥)이라고 석 자를 써가지고는 들여다보면서……
 
141
“……문징상…… 징상…… 쯧! 좋군요! …… 문 징 상, 문징상…… 어디서 듣던 이름 같다! …… 그러나저러나 상서 상자가 어디, 절개란 뜻이야 되우?”
 
142
“여고쯤 마치구서, 그걸 알면 제법이게?…… 아뭏든 임잘랑은 효도를 보구 싶을 테니, 따루이, 왕상(王祥)이라는 그 상(祥)자루 해석을 하구려
 
143
……”
 
144
“듣느니 고마운 말씀이오……”
 
145
안해는 농엣말을 하자다가 도리어 마디지게 한숨을 내쉬면서……
 
146
“……인전 자식이나 기루구, 잘 길러주구서 즈이한테 효도나 조끔 바라구 해야지, 달리야 내가 무슨 여망이 있수?”
 
147
안해는 말을 맺고 우두커니 생각에 잠겨 앉았다가 문득 남편더러……
 
148
“난 그래, 효도나 바란다구…… 당신은 무얼 바라구서, 뜻있는 이름을 다아 지어 주구 그리시우?…… 설마, 저……”
 
149
“냉동어(冷凍魚)의 향수는 바다에 있을 테지!……”
 
150
대영은 이번에는 제가 한숨을 후르르 길게 내쉬면서 혼자 하는 말로……
 
151
“……잘들 한다! …… 푸달진 계집애자식 하나를 낳아놓구서…… 그나마 첫이레두 미처 안 간 핏뎅일 놓구서…… 에미는 에미대루, 애비는 애비대루, 제마다 제 원념을 그것한테다가 살려보자구 들구! …… 에잇, 구차스러!……”
 
152
혀를 끌끌 차면서 돌아눕는데, 그러자 마침 안방으로부터 빼액하고 어린애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부부는 다같이 소리가 새삼스럽게 반가우면서도, 그러는 한편으로는 또 어쩐지 더럭 더 한심스러워 못 했다. 그들은 그 끝에 제각기 제 몫의 고달픈 수심에 잠겨드느라, 산모조차도 깜박 어린애의 자지러진 울음소리를 잠시 잊어버린다.
 
153
(1940. 1. 19. 於[어] 松都[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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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文評論[인문평론] 1940. 4·5월 호〉
【원문】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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