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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동어(冷凍魚) ◈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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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4~5
채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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冷 凍 魚[냉동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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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 석양때, 평소엔 별반 상종도 없는 영화 관계자 김종호란 사람이 돌연 전화를 걸고는, 며칠 전 동경서 온 귀객인데 긴히 문(文)선생을 만나 뵙고자 한다고, 시방 시간은 어떠시냐고 그 수다가 빠안히 보이게 선통을 하더니, 이내 데리고 와 초면인사를 시켜 주는 게 바로 이 스미꼬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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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는 대영을, 현재 조선문단의 혁혁한 ‘중견 대가’요, 방금 조선 안에서 십만 독자를 거느리고 가장 ‘인기’가 높은 이곳 문학잡지 『춘추(春秋)』의 주간이요, 그밖에 무언 어떻고 무언 어떻다면서 마치 거리의 약장수가 만병수를 놓고 풍을 치듯이 갖은 최고급의 형용사를 종작없이 씨월데월, 소개랍시고 손에게 설명을 하는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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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스미꼬는 가리켜 조선의 각반 예술, 그중에도 특히 영화에 대해선 이해와 관심과 동정이 깊은 분으로, 거기 관한 연구와 조력을 하기 위하여 멀리 이렇게 조선엘 찾아왔는데, 그래 아마 어쩌면 영주를 할 듯하다고, 더욱 기쁘고 경사스럽기는 그 첫 선물로, 이번에 제가 원작·각색·감독을 하는 「청춘아, 왜 우느냐!」에 찬조 출연을 하기로 이미 내락까지 했느니라고, 그러니 부디 잡지를 통해 많은 원조를 아끼지 말아 달라고, 대영에게 소개인지 선전인지를 한바탕 떠들어놓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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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은 마지 못해 코대답이나 응 응, 고개를 끄덱거려 줄 뿐, 하는 수작이 벌써 시쁘디시뻐, 하나도 흥미라곤 생기지를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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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세상엔 일 좋아하는 여자도 다 있던가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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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하거든 차라리 가만히 앉아서 낮잠을 자든지 할 것이지, 대체 무엇이 어쨌다고 이 어설픈 구석엘 찾아오는 것이며, 그나마 하필 얻어 걸린다고 얻어 걸린 양반이 어디서 저 알량한 김종호 서방님이니, 참 딱한 일도 많지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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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저러나, 웬걸 제법 중추가 있고 내노라는 여자라고 한다면야 아예 쓰잘데없이 그따위 허무맹랑한 거조를 하려고 들 이치는 만무한 것, 소견머리 없는 품이 매양 김종호와 한 바리에 실을 꼭같이 데데한 축일 테지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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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모르면 몰라도 뉘네 집 하찮은 오피스 걸이 아니면 다직 삼류 사류의 영화배우로, 실행(失行)을 했던지 실연을 했던지 하고서 홧김에 도피행을 해왔기가 십상일 것, 한 것을 멀쩡한 저 활량이 얼씨구나 좋다구 실끔 들쳐 업고는 바로 조선의 예술이네, 영화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네, 게다가 동정은 무어며 연구란 어디 당한 것인지, 시방 저렇게 통나팔을 불고 돌아다니는 속이겠지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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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대영 제 류의 심술스런, 그래서 자못 무책임한 판단이었으나, 하여간 판단이 그러하고 보니, 자연 그 나그네가 대단할 것도 달가울 것도 없을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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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은 그 자신이 소위 세대의 룸펜으로 제 코가 석자나 빠져가지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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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뚤어진 빈집(廢屋)에서 거주를 하고 있는’ 터이매, 모든 사물에 대하여 좀처럼 흥미와 관심이 일지도 않는 형편이었지만, 우환 중 선입지감이 없지 못한 김종호가 웬 여자를 데리고 와서는 또 횡설수설한다는 게 여전히 부황한 소리요 한 데에 고만 그는(일종의 自己暗示[자기암시]랄 것에 걸려) 우선 초면한 객의 행색이나 상모 같은 것이라도 일단 차근차근 음미를 해볼 나위도 없이 덮어놓고 긴찮은 생각과 멸시부터가 앞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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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질없은 짓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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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할 여잘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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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인물까지도 통틀어 치지도외를 해버리고 만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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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를 하고 난 즉시는(어쨌건) 관념한 바가, 그리고 태도가 무릇 이러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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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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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주저앉아서 김종호는 스미꼬의 편리를 위함인지, 와락 유창하지는 못하나마 종시 국어로다가 작금 내지 영화계의 현상에 대한 비판을, 요령이 없는 대신 심히 장황스럽게 설론을 늘어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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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하는 대영으로서는 대단히 괴로운 응접이요 억울한 낭비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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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은 그러느라니, 응접 처소를 만들어둔 것이나 부질없이 후회를 하면서, 처음 얼마 동안은 그대로 저대로 말대꾸를 해주는 시늉을 하던 것도 엔간히 감당을 못해, 필경은 건성으로 우두커니 마주 앉았기나 해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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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가 우연히, 하 무료타 못해 부지할 바를 모르고 한만하게 두루 떠돌던 주의가 마침내 스미꼬한테로 향해질 기회를 드디어 만나게 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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훨씬 값진 모피 외투와, 윤 좋게 새까만 그 모피 자락으로 덮은 무릎 위에 놓였는 흰 손가락의 상당히 굵고도 잘 빛나는 다이아, 이 두 가지 물품의 썩 호사스러움에 문득 눈이 띄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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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와 고개가 절로 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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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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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다시금 보아야 역연 녹록지 않은 사치요,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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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만큼이나 호사를 할 수 있는 신분이라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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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되짚어 생각을 하노란즉, 방금 아까 뉘네 집 하찮은 오피스 걸이니 삼류 사류의 영화배우붙이니 한 것은 아무려나 좀 동떨어진 짐작이던 성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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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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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그래도 심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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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잣집 영감쟁이의 소위 인텔리 이호? …… 싫증이 나 도망질을 빼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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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둘러붙여 보다가, 또 고개를 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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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절 어떻게 생겼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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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눈을 드는데, 얼굴은 생각잖이 몹시도(인상적으로) 침울하여, 퍼뜩 놀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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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을, 어떻게 생긴 얼굴인지 본다고 심상히 올려다보았던 것인데, 뜻밖에 표정만 그렇듯 인상적이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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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생긴 얼굴인지 본다고 보았다지만 물론 처음 비로소 정면으로 대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무심했던 탓이겠는데, 하여튼 그다지 침울한 줄은 몰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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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고개를 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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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럴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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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그제야 이것저것 두루 여살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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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그의 지적(知的)으로 세련된 총명한 기상이 매우 노블했고, 뿐만 아니라 거진 제 살결에 가깝도록 가볍게 다스린 화장이랄지, 색채와 무늬가 야하지 않고 잘 조화된 의복이랄지, 통틀어 전체의 풍모가 다 기품이 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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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걸로 미루어(아직은 속단의 혐의가 없지야 않지만) 아무커나 우선 교양이 쌍스럽지 않음을 알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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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가 필경 이번에는 앞뒤로 끄덱거려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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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그래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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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은 애초의 그와 같은 짐작과 판단에 대하여 시방의 새로운 발견이 저으이 신통스러웠던 때문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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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결국 그것은 애먼 수확이요 오히려 명랑할 조건일지언정, 그러므로 저렇듯 침울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재료는 아니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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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잘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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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니 참 그러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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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맨 처음, 김종호가 대영더러 하라 스미꼬상이라고 성명을 일러 소개하는 뒤를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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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 요로시쿠……〉(잘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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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단 한마디 항용 인사에 쓰는 말을 했을 뿐, 졸연히 입을 여는 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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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잠잠히 앉아, 김종호가 저 혼자서 연신 지껄여쌓다가는 중간중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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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요? 스미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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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고개를 들이대고 두 번 세 번 조르듯 다져야만 겨우,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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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거나, 혹은 “네에……”라거나, 짧은 대답을 해주곤 할 따름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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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한번도 제가 자진하여 말참견을 한다든가 이야기를 꺼낸다든가 한 적이라고는 이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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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막상 초면인사를 하고 난 낯선 타방(他方) 남자의 앞이라서, 자연 여자답게 삼가를 하는 조심도 없지는 못했을 것이었었다. 그러한데다가 또 줄곧 들이 생철동이 두어 몫 혼자서만 떠들어대는 김종호의 수선에 치여, 가령 무어라고 말을 내고 어쩌고 하기는새로에, 좌석이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겠는 모양인 것도 사실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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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것도 그것이려니와) 문제인즉은 도시에 기분이 차악 갈앉아 조금치도 남과 함께 섭쓸려서 담화를 나누고, 어우렁더우렁 놀고, 그리하잘 경황이란 것이 나지를 않는 때문인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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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되, 그렇다고 해서 또 가사 하찮은 오피스 걸이나 삼류 사류 영화배우의 실연도피행은 아니더라도, 좌우간 저렇듯 배젊은 여자겠다 첩경 그럴 성싶은 걸로, 역시 연애 등속의 사단에서 오는 순전히 감정적인 번뇌 이것이냐 하면, 그러나 심각하되 훨씬 침착하여 맑은 이성의 빛을 지니고 있음을 보아, 일변 흔히 그 바지직바지직 아픈 고민을 깨무는 표정적인 상심(傷心)의 자취가 전혀 없음을 보아, 아무래도 그와 같은 일종 근육적인 심장의 사건과는 판연 계통이 다른 자라 안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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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필경 갈데없이 그것은 저 깊이 머릿속에 가 서려 있는 어떤 사색적인 세계로부터 우러나는 정히 절망된 한 개의 상심(喪心)…… 이 증상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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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대영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와 동시에 불현듯 여자에게서 저 자신의 많은 일부분이 느껴짐을 느끼면서 새삼스럽게 정신이 들어 더럭 더 호기심이 끌리지 않질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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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는 여전히 귀 먹은 토키 같은 열변을 토하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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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꼬 역시 그대로 절에 간 색시인 채로 앉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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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은 절절히 감심스러워 여자가 다시금 치어다보이고,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일이 하도 상상 밖이요 당돌했던만큼 미심조로 한걸음 물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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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로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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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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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혹시 천착이 지나쳤던 게 아닌가 하여 넌지시 의심을 일으켜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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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하잔즉은 과연 그 이상의 확증을 잡을 만한 조건은 미상불 찾아낼 수가 없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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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반대로, 이미 도달한 결론을 갖다가 도로 번복을 시킴직한 조건도 마찬가지로 발견은 할 수가 또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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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역시, 먼저의 결론은 어쨌거나 일단 승인을 하지 않을 수가 없던 것인데, 그러자니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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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절 웬 여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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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그의 정체랄 것이 비로소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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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게아니라, 여자의 과거 일체가 드러난다면 시방 현재의 행위도(간접으로써) 자연 판명이 될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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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아쉰 대로 처음 김종호가 너절하니 주워섬기던 명색 소개의 말을 돌이켜 두루 생각을 해보았고, 해는 보았으나, 그러나 막상 그런 걸 가지고서는 바라는 바 여자의 정체를 캐치할 수가 도저히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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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정통은 종시 막연한 채 다만 그 대신 애초에 여자를 한낱 하잘것없는 잡동사니의 룸펜 ── 천민(賤民)인 걸로 보아버렸음은 역연 온당치 못한 편견이었다는 것만은 재삼 자인을 해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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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가령 이번 일로 하더라도 무어 조선의 각반 예술이라더냐 영화라더냐 관심이네 연구네 하던 소리는 정녕 김종호의 어지빠른 고안일 테고, 당자는(어찌 된 내력은 모르겠으나) 십상 마음이 울적한 나머지 구경삼아 놀기 겸, 미지의 세계라서 그저 와보느라고 와본 것이겠는데, 자연 사정이며 형편을 모르는만큼, 또 지리에도 생소하고 하여 전자에 우연한 안면이 있었거나 혹은 누구의(무책임한) 소개로 저 살뜰한 안내자를 찾았던 모양같고, 한 것이 시방 아무 영문도 모르고서 저렇듯 덤덤히 꺼들려 다니며 애꿎이 꼭둑각시 노릇을 하는 참이고…… 이렇게 인식을 시정할 수까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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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호의롭게 생각이 기울자 연달아 그 다음부터는, 만일 그렇다면 인제 보나 안 보나 톡톡히 망신이나 하고 나설 게 빠안한 야바윗속인걸, 그러니 저 일을 장차 어떡한단 말이냐고, 당초에 출발한 코스는 어디로 가고서, 어느덧 저도 모를 사이 걱정이 한참 고부라져 딴전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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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걱정이 되는 것, 이것이 그의 부질없은 다심(多心)이요 그걸로 하여 항상 자기혐오를 느끼는 것이나, 또한 어쩔 수 없는 일면의 천품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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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반동은 와, 이윽고 제정신이 들자 그제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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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별, 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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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냉소로 더불어 한 다른 제 버릇을 내어, 예의‘삐뚤어진 빈집’ 속으로 저 자신을 거둬들이는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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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그러자 김종호가 그동안 한 삼사십 분은 착실히 콩이야 팥이야 지껄이고 앉았던 그 소위 영화비판의 일석을 어름더름 끝을 막고서, 겨우 무거운 뒤를 일으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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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 네시가 다 되었고, 그런 대로 대영은 불행중 다행스러 냉큼 마주 일어서는데, 김종호는 그러나 이번엔 또 같이서 밖으로 나가자는 청을 하는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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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양 찻집이나 가자는 뜻인 듯싶은데, 하기야 대영도 인제는 엔간히 일도 시간도 무방했고 겸하여 종일 아프던 골치겠다, 명과나 금강산의 진하게 끓인 한잔 커피가 따끈한 맛이 미상불 생각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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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그렇더라도 가면 넌지시 혼자서 가는 것이지 어쨌으니 이 귀아픈 동행과 함께 번다한 거리의 다방을 찾아가, 차나 아니나 구정물 같은 사탕국을 마시면서 또다시 그의 무지한 소음(騷音)을 듣고 앉았잘 며리는 없는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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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무어라고 핑계댈 말이 얼른 생각이 안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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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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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시계를 올려다보면서 잠깐 망설이는데, 그런데 뜻밖에 스미꼬가 (웬일로) 입이 떨어져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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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시지 않거든, 저어 저녁진지나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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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더 의외의 제의를 하는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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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은 섬뻑, 여자의 그만큼이나 소탈한 파격의 태도가 미소(微笑)롭고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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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렇다고 하여 사람 근천스럽고 체신 아니게 즉시 거기에 응을 할 의사는 조금도 없었고, 그저 고맙다고, 그러나 이편이 명색 주인인데야 원래의 귀한 손님을 위로할 겸 먼저 경의를 표해야 도리가 옳지 않으냐고, 하니 종차 그러한 기회가 있은 다음에 혹시 나를 부르는 경우라면 그때는 기쁘게 나아가겠노라고, 흔연히 좋은 말로(한다는 것이 부지중 외교관 본으로) 사퇴를 한 것쯤 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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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한번 웃을 뿐 다시 더는 아무 소리도 없고 한 것을 김종호가 부득부득, 아 우리네 ‘문화인’ 서로들끼리 무얼 다 그런 체면과 절차를 차리고 어쩌고 한단 말이냐고, 자 어서 같이 나가자고 졸라쌓는 것이나 종내 불응을 했고, 하다못해 그러면 이왕 말을 낸 초면 나그네의 낯을 보아 잠깐 차라도 한잔씩 마시자고 하여, 그것마저 물리치기는 차마 박절한 것 같아서 부득이 근처의 다방으로 자리를 옮아앉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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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방으로 가서도(미리서 다 각오야 했던 것이지만) 역시 김종호의, 이번에는 저만 빼놓고 죄다 아무것도 아닌 조선의 영화감독 ‘올 바보론’을 지지리 들으면서 무의미한 부역(賦役)을 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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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꼬는 여전히 거기서도 침묵을 하고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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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은 기위 이편이 찾음을 받은 사람쯤 된 입장이요, 연거푸 이렇게 자리를 같이한 터이겠다, 노상 소 닭 보듯이 멀거니 바라다보고만 있을 게 아니라, 저라도 들어서 이것저것 말을 붙여 담화가 얼리도록 이야기를 리드하고 하는 것이 한갓 대접이겠고, 따라서 그리 하자면 물론 못할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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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저편이 결코 무슨 화제를 가지지 못했다거나 또는 파겁이 되지를 못해서라느니보다도 근본적으로 제 기분이, 그리고 좌석의 분위기에 대하여 마음이 내키고 흥이 일고 하질 않아하는 기미가 번연한 것을, 구태여 눈치코치 없이 지분지분 성가시게 굴어주잘 내력이라곤 없는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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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뿐만 아니라, 첫인상이 하여커나 ‘말 않는 여자’이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오히려 말을 않고 있는 태가 차라리 자연스런 것 같은, 일종 막연한 풍치감(風致感)도 또한 없지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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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다가 또 이편따나 매한가지로 경황이 더얼하여, 이야기 같은 것을 힘써 하고 싶은 정성도 일변 나지를 않는 터이고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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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 나그네 국 마다자, 주인네 장 없자, 실없이 잘 되었지…… 무어 발벗고 나서서 억지엣 건사를 물러 들 까닭이 있을 게 있나…… 제 떡 저 먹고, 내 떡 나 먹고 했으면 다 고만이지……’
 
100
야고 내뻗어 버리자니까는 그동안 무엇인지 모르게 걱정스럽던 어떤 의무감이 후련히 씻겨나가면서 마음이 거뜬해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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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람에 마지막 식어빠진 차를 주욱 들이마셨고, 그러나 언제까지고 앉았어야 언제까지고 별 내력이 없는 노릇, 그런데 김종호는 차례를 잡는 품이 좀처럼 자리를 뜰 채비가 아니고, 그래 무때리고 먼저 돌아가겠노란 말을 하면서 모자를 집어들고 일어섰다.
 
102
아니나다를까, 김종호는 그대로 반만 엉거주춤 마주 일어서더니, 아 그러냐고 대영의 손을 잡아다가 흔들어싸면서 오늘은 참 실례가 많았노라고, 그리고 내일이고 모레고 긴히 좀 찾아가 상의를 할 일이 있노라고, 그러면서 일변 스미꼬더러는 우릴라컨 예서 시간까지 더 기다려 방이 났는지 아파트엘 가보기로 하자고, 자 문선생 우리는 그러면 이대로 실례를 하겠노라고, 한참 들이 너스레를 떤 후에야 겨우 악수를 놓아주었다.
 
103
하는 동안 대영은, 그 살 많지 못한 손가락이 소댕개 같은 손바닥 속에서 당분간 악형을 받되, 아프단 소리도 못 하고 참아야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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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작별차로 같이 따라 일어서서는, 그러나 제격에 맞게 간단히 한마디 〈사요나라〉란다든지, 폐를 끼쳤노란다든지 하는 게 아니고
 
105
“저어, 오늘낼 새 거접할 곳이나 덛어서 몸이 갈앉혀지는 대루 수이 한번 찾아뵙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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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여러 말로 된 인사를 하는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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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초면의 두 시간 가까운 교제에, 또 자리를 두 번이나 바꾸어 앉았으면서 그의 입으로부터 나온 말 가운데 비로소 말다운 말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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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은 실러블이 여럿인 것은 신통했으나 내용은 단지 인사엣 말이거니 하여 저 역시 인사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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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에! 부디 놀러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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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을, 여자는 실상 지날말이 아니었던 듯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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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바쁘실 텐데!…… 놀러라구 해두 어디 정말 놀러야 가겠어요? 가면 다가 시간을 뺏어 디려야 하구, 그러니깐 말씀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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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어떡하다가 말문이 터져가지고는 겸하여 이야기가 자못 구체적인 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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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은 속이 시원했고, 워너니 그렇겠지, 무슨 청승에 필요까지도 억누르고서 침묵을 고집하여 생으로 벙어리짓을 하잘 까닭은 없겠지야고, 일변 흔연히 고개를 끄덱끄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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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어 좋습니다! 무슨 그리 대단스런 노릇을 하구 있다구 손님을 …… 다 손님을 맞아서 응댈 하구 이야길 해디리구 하는 것두, 쯧! 사무요 일은 일이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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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데, 김종호가 덜렁 내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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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거 참, 옳은 말씀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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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왁자지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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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구말구!…… 다가 참, 문화 동지를 맞아설랑 이야길 나누구 친절히 상황을 소개하구 하는 건 말하자면, 같은 우리 문화인의 생활 가운데 당연한 한 조목이요, 또 의무요, 허어허 허허…… 거 참, 지당한 말씀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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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떠들어대는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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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레에, 여자는 무어라고 대영더러 짤막하게 대꾸를 했으나, 고만 소리가 먹혀 없어지고 말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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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좌우간 그쯤 하고서 갈렸고, 그러고는 하루를 지나 뜻밖에 속히 오늘, 조금 아까 퍼뜩 혼자서 이렇게 찾아왔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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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리고 여전히 침울한 얼굴은 얼굴이었으나, 자청해 또 저 혼자서 오느라고 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입만은 앞서처럼 무겁지가 않아 대영이 마주 나서서 자리를 권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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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처는 어떻게? …… 정하셨나요? 아파트를 구하신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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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인사 겸 묻는 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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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은 아무래두 번폐스럽구, 또오 출입하기두 편찮구 해서요…… 이왕이니 아파트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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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이내 종알종알 이야기 대꾸를 곧잘 하는 성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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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러워서 좋긴 하지요…… 그렇지만 요새 아파트가 도무지, 머어 부흥채권 빠지기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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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라고 하는 덴 그래서 땅뗌두 못 하겠어요!…… 그리구서 겨우 ×××아파트라구, 부청 앞으루 아따 저 거시키, 커어단 빨강문이 있구 한, 아따 무슨 대궐?……”
 
129
“덕수궁?”
 
130
“오오 참, 덕수궁…… 거기 그 옆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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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라두 용히 얻으섰지! 아파트래야 와락 출 수는 없어두…… 퍽 음침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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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에, 좀…… 그렇지만 괜찮아요, 앞으루 어떻게 될는지두 모르구 ……”
 
133
대영은 그 말에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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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이냐, 조선서 예술을 연구하네, 영화에 출연을 하네, 또 영주를 하네 한다던 건 어떡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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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이 나던 것이다. 뒤미처, 역시 짐작한 대로 김종호의 조작이요 저 혼자 놀음이거니 싶어, 짐짓 암말도 않고 말았다.
 
136
이야기는 그로써 무뚝 끊기고, 오래도록 서로 덤덤히 앉아 있었다.
 
137
대영은 대체 이 맹랑한 나그네를 어떻게 대접을 해야 좋을지 통히 가늠을 할 수가 없어 작히 걱정스러 못했다.
 
138
설마 김종호 본으로 이리저리 끌고 돌아다니면서 문단 사람들한테 지면이나 시키자니 차마 쑥스러운 짓이고, 역시 김종호처럼(영화론 대신) 문단 고현학이나 작가론의 일석을 들려주고 앉았재도 마찬가지 싱거운 짓이고, 그렇대서 언제까지고 또는 만나는족족(자주 찾아올 눈친데, 하니) 아무렇지도 않은 잡담이나 지껄인다고야 더우기 못할 노릇이고.
 
139
그러나마 여자라도 제가 자진해, 무엇이 되었든 알고자 하는 것이라든지 혹은 듣고 싶은 이야기라든지를 가지고 줄곧 화제를 만들어 이것저것 묻곤 한다면 이편도 요령을 짐작하고서 두루 설명이라도 해주고 하겠는데, 보아야 이건 몇마디 이야기를 하는 시늉 하다간 다시금 입 따악 봉하고서 가만히 앉았으려만 드는 것 같고 하여 일은 무던히 딱한 형편이었었다.
 
140
하되, 그런데 여자는 그와 같은 침묵과 무료함을 별반 부자연스러하지도어색해하지도 않고, 썩 아주 천연덕스럽게 하나도 불편한 기색 없이 의젓하니 앉아 있는 것이고, 앉았는 양이라니 어쩌면 시방 지독한 히스테리가 엉뚱한 얌전을 떠는 변덕이나 아닌가 싶어, 속이 섬뜩하기도 했다.
 
141
대영은 그러자 문득 또 오스카 와일드의 The Sphinx without a secret가 생각이 나서, 미상불 임자한테도 이름만은 그렇게 제수를 함직하다고 혼자 빙긋이 웃는데, 그제서야 스미꼬는 주의가 들었던지 천연히
 
142
“참 저어, 절라컨 상관 마시구……”
 
143
하면서 권을 하는 것이었었다.
 
144
“……어서 일 보세요!…… 보시구서 파하시거들랑 혹시 거리라두 같이 데리구 나가 주시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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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거리요?…… 쯧! 것두 좋겠죠……”
 
146
대영은 역시 그렇게나 하는 도리밖에는 없으련 싶어, 아무려나 자 그러면 미안한 대로 거기 앉아서 신문이든지 그 책이든지 좀 들춰 보면서 잠깐만 기다려 달란 말을 이른 뒤에, 일단 제 자리로 돌아와 얼마 동안 내처 하던 일을 하고 난 참이었었다.
 
147
그리고 종시 그때까지도 깜박 그는 여자에게 대하여 한 남자로서의 고유한 흥미가 끌린다거나 또는 얼굴이랄지 기타 가령 수족이며 몸맵시랄지의 어떤 부분에서 궐녀의 여성적인 독특한 매력이 눈에 띈다거나 하는 줄을 통히 몰랐었던 것이다.
 
 
148
일반으로 모든 남자란 것은 언제든지 아무 여자한테고 반드시 그 은근한 흥미를 가지는 법이니라고 한다면, 그야 데마에 많이 가깝고 피상적인 공식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149
그러나 한편, 저 유명하게 강심한 서화담으로도 단 한 꺼풀만 입은 엷은 여름 속옷이 물에 찰싹 젖은 몸뚱이를 해가지고 코앞에서 나풀나풀 춤을 추는 황진이만은 멀끔히 바라다보다 못해 필경 슬며시 돌아앉았다는 일사라든지, 또는 속계(俗界)엘 내려왔다가 마을 앞 개천에서 빨래를 빨고 있는 젊은 여인네의 부우연 너벅다리를 한번 보고는 고만 마음이 현혹하여 몇십 년 닦은 도가 하루 아침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렸다는 옛 스님의 이야기라든지를 미루어 두루 생각을 할진대, 그 데마가 다분히 요망스럽기는 하다지만, 역시 한 귀퉁이 반쪽의 진실성이 머금겨 있음을 또한 승인치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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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물 묻은 준나체(準裸體)로 춤을 추는 황진이의 앞에서는 화담의 근엄도 별수가 없듯이, 몇십 년 쌓은 수도가 촌녀(村女)의 빨래 빠는 너벅다리로 하여 일시에 허사가 되는 수도 있듯이, 항차 범상한 시속 사람인데야, 모든 남자란 것은 그가 어떤 종류의 불구자라거나 늙어 꼬부라진 영감이 아닌 이상 언제든지 아무 여자한테고, 여자가 흉악한 추물이라거나 합죽합죽 노파가 아닌 이상 반드시, 그 소위 은근한 흥미토록은 몰라도, 단지 여자의 순전히 여성적인 매력에 대해서까지 나무토막처럼 무감각하진 못한 것이 거진 생물학적인 운명이어서 말이다.
 
151
대영은 나이 삼십을 약간 넘었을 뿐 아직 젊고, 가정은 가졌다지만 수염없는 불구자도 삼가로운 퓨리턴도 아니고 하여, 그 ‘모든 남자’의 규범에서 조금인들 벗을 게 없는 사나이이었었다.
 
152
또 스미꼬는, 그런데 보기 싫은 추물도 오바상도 아니요, 알뜰한 묘령의 몸이면서 홋홋이 원방의 낯선 타지에 와 이편과 생활을 섞고자 한다는 활달스런 나그네요, 누구의 상사하는 여자인지는 알 수 없으나 버젓한 남의 아낙은 십상 아닐 것이고, 따라서 그 ‘모든 남자’네로 하여금 그의 여성적인 외양의 매력은커녕, 작히 예의 그 은근한 흥미라는 것을 가지게 하도록 컨디션에 미흡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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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과연 김종호 같은 사람은 그 첫소리를 치고 나선 인물이었을 것이고, 대영 또한 열에 열깐의 프로버빌리티를 그만큼이나 갖춘 터이면서, 다만 시간적으로 얼마쯤 활동기가(感染後[감염후]의 活動期[활동기]) 우연히 천추되었을 따름이었었다.
 
154
이를테면 소조한 정원이라든지 혹은 산야의 숲 사이를 호올로 가을을 낙막해하면서 초요하고 있는 옷깃에 가 공교로이 한 잎의 단풍 든 낙엽이 날아와 앉은 형용이라고 할는지, 스미꼬의 출현이 대영에게 대해선 정히 그와 방사한 바가 있었다.
 
155
그러했기 때문에, 감회가 감회이던만큼 초요하던 객은 한 잎의 그 낙엽을 얻고서도 한시름 더 가을을 느끼는 정만 골똘하여 졸연히 그 단풍잎의 단풍으로서의 운치나 아름다움은 깨닫지를 못함과 일반으로, 그와 마찬가지로 대영도, 그는 여자의 안색이 그대도록 침울한 거기에만 온전히 정신이 쏠려 있느라고, 그래서 미처 여자에게서 한 ‘젊은 여자’를 발견하기까지는 채 이르지를 못했던 것이었었다.
 
156
하나 그것은 그러므로 언제까지고 그와 같은 무관심한 상태인 채 있을 수는 역시 없는 것이어서, 마침내는 그처럼 여자의(우선 우연히) 고운 목덜미를 알아봄으로써, 궐녀의 또한 여자다운 매력에 필경 주의가 끌리고라야 만 것이었었다.
【원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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