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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동어(冷凍魚) ◈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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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4~5
채만식
1
冷 凍 魚[냉동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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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
건성으로 궐련을 뽑아올려 건성으로 입술에 물었을 뿐, 대영은 이내 박인듯이 스미꼬를 바라다보고 앉아 여념이 없던 시선이 한참만에야 차차로, 머리털과 모피의 깃 속에 하얗게 묻힌 그 목덜미로부터 이동을 하여, 소곳이 숙인 프로필을 어루만진다.
 
4
단명해 보이게 부리가 촉하고 작은 귀, 그 앞으로 하늘거리는 듯 연한 살쩍, 갸름하니 하관이 빨아 약간 나온 듯싶은 광대뼈, 그 위로 길게 팬 눈초리를 지나, 심은 듯이 가조롱하고 촉이 긴 속눈썹, 그리고 유난히 오똑 날이 선 콧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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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제각기 한 부분 한 부분은 말하자면 조각적으로 인상이 또렷또렷했고, 물론 의식하고서의 음미인만큼 처음 비로소 머릿속에 들어와 박히는 결정적인 인식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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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그러나 이미 한 꺼풀 망막(網膜) 위에 드리운 관념의 베일이란 매우 기묘한 것이어서, 한 부분 한 부분을 차례로 그렇게 한번 씻어보고 난 다음 일순간 후에는 그와 같이 인상적이던 부분부분의 특징이 삽시간에 죄다 해소가 되면서 따로이 전체의 모습만 오래오래 사귀던 친구랄지 혹은 집안 권솔 아무고 누구처럼, 조금도 낯이 설거나 어색한 구석이 없는 얼굴로 어느덧 통일 전화가 되어 가지고는 담쑥 와서 마음에 안기는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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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하되 실상인즉 일찍이 친한 적도 없고, 따라서 기대도 상상도 하지를 못한 모습인 것이 사실인데, 그런데 그것이 전혀 의외로운 느낌이 없이, 응당 다 그러한 것인 줄로 여기고 기다리던 기정사실인 것처럼, 지극히 자연스럽게 수감이 되던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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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잔이나 얼큰히 먹고 밤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백년 묵은 여우가 둔갑을 하여 이쁜 각시로 보인다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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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만일 허랑한 미신에만 그치지 않고, 한편으로 우화(寓話)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한다면, 지금의 대영을 거기에다가 한번 견주어 보는 것도 노상 실없은 편은 아닐 것이다. 일방의 인물 스미꼬한테는 물론 애먼 악담이기야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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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아뭏든 다년간 상종하던 친구라거나 오랫동안 동거를 해온 안해라거나 할 것 같으면, 그들의 모습이 웬만큼 잘생겼다든지 반대로 웬만큼 못생겼다든지 하더라도 항용 거기에 관해서는 좀처럼 주의가 가질 않고 대개 심상하듯이, 시방 대영의 스미꼬에게 대한 것도 바야흐로 그와 근리함이 있어, 가령 어디가 이쁘게를 생겼다거나 또는 어디가 밉게를 생겼다거나 하는 시각적인 미·추의 분별과 거기 따르는 감각은(어느 겨를에 벌써 후방으로 물러가 침착이 되었는지) 통히 일지를 않고, 그러고는 한갓 마음이 가서 차악 안주(安住)를 할 수가 있도록, 훨씬 임의롭고 반가움이 곰곰 솟는 모습일 따름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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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급작스럽고 또한 부전스러움이 없지 않았으나, 이른바 동류감(同類感)으로부터 오는 보통 이상의 강한 친화력이라고 할는지, 진작 요전날 만났을 때 벌써 여자에게서 저 자신을 느낀 것이, 수월히 오늘 지금의 이것이 있도록 씨앗을 뿌렸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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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껏 앉은 자세도 그대로 스미꼬한테 가 자지러졌던 상념이 이윽고 한단 더 주관적인 가치의 판단을 얻어 대영은 아까처럼 속으로 혼자 그러나 더 적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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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그랬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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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연해 수없이 고개를 끄덕끄덕, 딴사람인 양 얼굴은 흔연히 화기가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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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져서, 그를 갖다가 한 여자임을, 여자다운 매력으로서가 아니라 이번에는 눈에 함빡 고이는 그 여자로서의 여자임을 짐짓 저 자신에게 새 채비로 관념시키는 것도 또한 흥그러웠을 터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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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느라고, 그 끝에 연달아(아무리 골똘해 있었던 끝이기로서니) 별안간 걷잡을 사이도 없이 소리를 내어 불쑥 한단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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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꼬상이 여자드랬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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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놓았으니, 가뜩이나 짝소리 없이 조용하던 방 안이겠다, 모두들 퍼뜩퍼뜩 놀라서는 제가끔 고개를 쳐들고 대영에게로 눈이 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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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영업사무를 맡아보는 왼편의 박(朴), 편집을 맡아보는 바른편의 김(金), 둘이는 다 그러면서야 대영이 하던 말을 되생각하고서, 혹시 졸다가 잠꼬대를 했나 하여 빙긋빙긋 한번씩들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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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꼬는 무심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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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아〉(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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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하도 어이가 없는 듯 대영을, 말을 해놓고는 고만 계면쩍어 싱그레 웃고 앉았는 그의 얼굴을 빠안히 바라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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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으로 하면, 당장 일 망신스런 품이 허허 한바탕 웃어젖히기라도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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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꼬는 한참을 그렇게 꼼짝도 않고 말끗이 바라다만 보고 있다가, 이윽고 남자의 그 미묘한 비밀을 어쩌면 알아채기나 한 듯, 입가로 가느다란 미소가 드러나는 입을 오믈뜨리면서 조용히 다시 책 위로 머리를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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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그제서야다. 점직했던 건새로, 비로소 저 자신을 완전히 객관하는 순간 대영은, 얼굴은 더럭 비양스럽게 코웃음을 흥 한번, 그러고는 자포적으로 드윽 성냥을 그어당겨, 여지껏 입술에 물고만 있던 담배에다가 커다랗게 불을 붙이면서, 걸상째 허리를 뒤로 버얼떡 풀씬풀씬 천장으로 대고 연기를 뿜어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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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에게 대하여 그와 같이, 더구나 어느새 색다른 흥미가 기울고 있는 저 자신을 막상 발견을 하자니, 우선 자조가 앞을 서는 것도 그로서는 일변 그럼직하다 할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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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그는 혼자서 속으로 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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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 책력이!……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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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 책력이란 건 대영이 저를 두고서 스스로 비웃어 이르는 그의 새로운 어휘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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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대영 저 자신이 묵은 책력일진댄, 그 묵은 책력이 뻐젓이 기상(氣象)을 말하고 계절을 가리키고, 즉 연애를 하고 하는 등 적극적인‘생활’을 갖는다는 것은 가히 냉소와 민소거리이기에 족한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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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그는 아무려나 일단 생겨진 사실을 갖다가 구태여 들어서 앨 써 배척을 하네, 아등바등 거비를 하네 하며 청렴을 부리잘, 역시 적극적인 의사는 또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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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이를테면, 묵은 책력의 결국 묵은 책력다운 면목이겠고, 그러했기 때문에 그는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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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 어떨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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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려나 묵은 책력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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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으로 손쉽게 처단을 할 수가 있었다.
 
 
36
대영은 몸을 다시 바로잡고 앉아 교정 아까지를 들여다보았으나, 연해 주의가 여자에게로 헛갈리고 일에 정신이 잘 쓰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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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바른편의 김이 별안간 커다란 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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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뚫, 뚫…… 에잇 그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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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짜증스럽게 두런두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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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이게 글자람!…… 쌍디귿에 리을을 하구, 또 그 옆댕이다가 ㅎ을 붙이구, 이게 무슨 놈의 천하 괴벽들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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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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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문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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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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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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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두, 요? 우리두 우리 춘추사식(春秋社式) 한글을 좀 만들어 가지구이 흉악한 뚫자 따위, 끊자 따위 이런 괴물일라컨 보이코틀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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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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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은 덤덤한 대답을 하고 마는데, 마침 김과 마주 앉은 박이 내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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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그기야 어데 델 말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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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박의 의견에 반대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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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 농삼아 히죽히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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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 안될 말잉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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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박의 영남 사투리를 전라도 악센트로 흉내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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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 그러나 상관 않고 벌써 결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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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데지 안코?…… 그랄세라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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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대들고, 김도 그제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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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될 건 어딨어? 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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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같이서 성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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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둘은 다 같이 열심한 문학청년이었고, 그러나 박은 체집도 깔끔하니 조그맣고 선비처럼 미목이 곱살한데, 한편 김은 덜퍽 큰 덕대에 얼굴도 우툴두툴 아무렇게나 생기고, 외양이 이렇듯 제각기 다르듯이, 하나는 얌전스럽디얌전스런 그래서 소극적이로되 정확하고 현실적이요, 또 하나는 덜렁덜렁 선머슴처럼 거칠고 그래서 일변 적극적인 기상이 있되 독단적이요 하여, 정반대의 성격이었었다.
 
59
그러한만큼 둘이는 사사이 의견이 서로 달라, 앉아서는 곧잘 싸우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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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여보, 그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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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 일손을 멈추고, 테이블 너머로 몸을 내실면서 대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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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글통일안만 하더래도 우리 선배네들이 오래오래 두고 애로 써가 문서 정성으로 디리서 다아 그만침이나 통일 정리항기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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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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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 고개를 쳐들고 마주 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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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아니래? ……나두 그분들의 성의만은 높이 사구 또 경의두 표해요. 그리구 통일안을 대부분은 지지를 하구…… 그렇지만 불편한 것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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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아야 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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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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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로 위해서 참아야 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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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까진 너무 엄살스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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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 엄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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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가 질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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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 아니고? …… 항글통일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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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글이 뭐야? 항글이…… 한글광(狂)두 그따위루 발음을 하나?”
 
74
“하아! 가마안 있자…… 그런데 보소, 항글통일안이 그르키 제정이 데에 각고, 시방 우리가 다아 그데로 쓰지 않소? 그라니……”
 
75
“어디가 다아 써? 첫째 왈 신문산데 세 신문 중에 하나나 제대루 써?”
 
76
“그기사 또 다르제! ……신문들도 항글통일안으로 지지는 하문서도 미처 활자로 갖추지 몬해서 그룽 기 아니오? 그라니 종차 신문도 다 통일안으로 통일이 델 끼 아니오?”
 
77
“소용 없는 소리야! ……통일안은 말구서, 제엔장 천하 없는 거래두 불합리한 걸 어쨌다구 그대루 쫓나? ……그러나마 불합린 해두 편리하기나 하다면 또 몰라! 그렇지만 불합리해서 불편한 데야 안 고칠 택이 뭐람!”
 
78
“가사 불합리하다고 하고…… 실상 불합리하지도 않지만 말이제, 가사 불합리하다고 하고…… 그기 질서 아니오? 잉? ……약간 불편 불합리해도, 벌써 일반이 다아 그대로 쓰고 있능 기니 당분간 참고 쫓다가, 차차로 정세로 따라서 개량도 하고 하야제, 아 고만에 쪼꼬매 불편하다고 아침에 뜯어 고치고, 또 쪼꼬매 불합리하다고 지냑에 뜯어고치고, 어느 천년에 완성으로 하노? 또오, 쓰는 백성들은 정신이 사나 워여 하노?”
 
79
“미완성에 만족하는 건 천민근성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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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완성은 어데 있노? 역사는 앞으로 나가고 제도는 임시임시 만등 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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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데한 현상유지파! …… 고만 해두구서, 일이나 해! 인전.”
 
82
“하하하!…… 히틀러의 어데서 나쁜 본만 뜨고,……흉악한 파괴주의자!”
 
83
“허허 허허!”
 
84
“하하 하하!”
 
85
둘이는 일껏 싸우고 나서는, 보는 사람도 미소롭게 같이 어우러져 유쾌한 웃음으로 끝을 둥글리고, 벙글벙글 이내 다시 일에 잠심을 한다.
 
86
성질이나 주장이랄 것은 달라도 공리적인 충돌이 생길 세계가 아닌 이상, 또 둘이 다 학자 타입으로 착하고 하여 감정의 갈등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싸움은 언제든지 한갓 머리의 스포츠에 그칠 뿐 뒤가 없고 끝이 명랑했다.
 
87
스미꼬는 둘이서 주거니받거니 떠드는 것을, 눈에 호기심이 가득하여, 말은 전연 못 알아듣는다지만 눈치로나마 기분이라도 좀 이해를 하고 싶어하는, 맛보아보고 싶어하는 그런 열심한 얼굴로 연해 바라다보고 있었고, 그러다가 마지막 그들의 쾌활한 웃음에 섭쓸려 빙긋이 저도 웃는다.
 
88
대영은 또 대영대로, 처음부터 그들의 하는 양을 곰곰이 미소를 드리우고 앉아 재미스럽게 구경을 하고 있었고, 그러나 맨 나중에 가서는 그는 남과 더불어 명랑하지가 못하고서 얼굴이 흐려들었다.
 
89
젊은 그들의 발랄한 기운에 대한 감심이라고 할까, 흠망이라고 할까, 그리고 저 자신과의 대조되는 괴치(乖馳)라고 할까……
 
90
물론, 그들이 서로 우기며 고집을 하는바, 즉 박의 소위 질서를 위한 기성의 긍정이니, 또는 김의 소위 완성을 전제로 한 불합리의 비정이니 하는 주장이, 그야 결국은 다 같이 어떤 한 개의 상식적인 세계와의 타협이라는 점에서 일치가 될 수 있는 것으로, 결코 그대도록 상극이게 피차간 거리가 멀 것은 없는 것이고 해서, 그 내용이랄지 이론이 별반 그리 새삼스럽거나 추앙할 만한 것은 아니었었다.
 
91
그러므로 만일 그가, 박이며 김과는 진작부터 친험이 없는, 그래서 그들에게 대하여 우선 인간적인 우정을 가진 그들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그리고 어디 다른 좌석에서 낯모를 혹은 평소에 경멸을 하던(가령 김종호처럼) 그런 어떤 젊은이들이 앉아서 그와 같이 하찮은 주장을 가지고 천하에 없는 노릇인 듯 우김질을 하는 양을 보았다고 한다면, 그는 영락없이
 
92
‘흥! 천민들이!…… 저게 요새날, 고작 젊은 것들이 안고 늘어지는 세계람?’
 
93
하고 입이나 삐쭉했을 따름일 것이었었다.
 
94
따라서 그는 곧 죽어도 그렇듯 속스런 내용이며 2 3은 6(2×3=6)쯤의 범상한 이론이, 구차히 부러운 것은 아니었었다.
 
95
그러나 그들 박이나 김은 제각기, 그런데 좋건 궂건 또 남이야 무어라고 하건 말건, 버젓이 제네들 스스로의 현실을(크게는 세계를) 파악하고 있고, 파악한 바 그 현실 그 세계의 유지를 위하여 혹은 보다 나은 발전을 위하여 끊임없이 안으로는 탐색을 하고 밖으로는 대고 주장을 하고, 해서 마지않는 기개가, 싱싱한 기개가 그들에게는 지녀져 있는 것이었었다.
 
96
그리고 그와 같은 현실과 일치되는, 신념과 생활의 병행…… 이것이야말로 가난하나마 젊음의 패기요, 산 정열인 것이었었다.
 
97
거기에 비하여 대영은 저 스스로를 돌아볼진대, 만약 그들이 근검하고 착실한 소상인이라고 치더라도, 대영 저 자신은 ‘삐뚤어진 빈 집에서 홀로 거주하는’ 몰락된 귀족의 신세에 지나지 못했었다. 세대의 룸펜 즉 거지……
 
98
박처럼 긍정하는 현실과 세계를 가지지 못한 것은 물론, 모조리 죄다 비정은 하는 것이나 그렇다고 해서 김처럼 현실적인 이 지구를 위한 비정인 것이 아니라 화성을 욕망하는 비정이니, 인간 세상에선 용납지 못할 유령(否定)인 것이다.
 
99
신념이야 오죽 오만하며 찬란한고!
 
100
그러나 아무리 산을 뽑잘 신념인들, 대지의 현실을 딛고 서지 못한 이상, 즉 생활이 따르지 못한 이상 그는 결국 남의 집 식객이요 걸인에 지나지 못하는 것…….
 
101
그리하여 좌우에서는 바람 소리가 휙휙 날 만큼 사실이 세찬데, 제 앞은 보면 회색의 안개가 자욱하고 등 뒤에만 옛 양식의 고성이 구중중 섰을 따름……
 
102
대영은 마음이 부지할 수 없이 울적하면서, 남 또들 놀래라고 손에 쥐었던 펜을 교정 아까지 위에다 타앙 놓고는 벌떡 일어나 스미꼬의 앞으로 쿵쿵 걸어간다.
 
103
“나가시까? 거리루나……”
 
104
스미꼬는 책에서 고개를 쳐들고 바투 앞에 와 막아 섰는 대영을 빠꼼 올려다보다가
 
105
“벌써?…… 괜찮으세요?”
 
106
하면서 소매를 헤쳐 팔목시계로 눈을 잠깐 떨어뜨린다.
 
107
“머어, 쯧!”
 
108
대영은 여자와 나란히 앉으면서, 저도 건너편 벽의 전기시계를 올려다본다.
 
109
네시 하고 마침 반.
 
110
스미꼬는 보던 장을 접어 책을 덮고 다시 고개를 돌린다.
 
111
지분 냄새가 고요히 스며 싫지 않았고, 대영은 아까 그 마음 울적한 대로 애먼 데다가
 
112
‘빌어먹을, 모르겠다!……’
 
113
면서 그래 위정 그렇게 여자의 앞으로 바싹 다가섰던 것이며, 또 건너편 자리를 두어두고도 이렇게 옆에 가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다붙어 앉았는 것이며를, 스스로 피쓱 웃어야 할 것인지
 
114
‘흥!’
 
115
하고 코웃음을 해야 할 것인지, 저로서도 섬뻑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116
“그런데……”
 
117
대영은 이윽고 혼자 말하듯 여자의 의향을 묻는다.
 
118
“……어디루 안낼 해디린다?”
 
119
여자는 그러나 잠깐 그대로 앞만 내려다보고 있다가
 
120
“그런데 말씀예요!…… 저어 전요오……”
 
121
하면서 약간 구체적이게 이야기를 낸다.
 
122
“……절, 무어 그렇게 손님으로 취급을 해주실라 마시구서 말씀예요. 저어 그냥 거저…… 아따 걸 무어랬으믄 졸지.”
 
123
“동무? 친구?”
 
124
“물론 동무나 친구루 여겨 주시는데, 그렇지만 동무나 친구두 손님으루 취급할 수두 있구, 또오 손님 아니루 취급할 수두 있구, 그렇잖아요?”
 
125
“그러니깐 한 집안식구처럼 말이죠?”
 
126
“거예요, 참!……”
 
127
여자는 속이 시원해서 마주 바라다보고 좋아 웃는다.
 
128
“한 집안식구처럼…… 손님이란 생각은 두지 마시구……”
 
129
“한 집안식구처럼!…… 손님이란 생각은 두지 말구!……”
 
130
“무릴까요?”
 
131
“찬성입니다!”
 
132
대영은 단지 저 한 사람을 두고서 하는 소린 줄 알고 대답이었었다. 그러나……
 
133
여자는 반가와라고 고개를 까땍
 
134
“고맙습니다!……”
 
135
하면서, 다음을 다시……
 
136
“……그리구, 그래 주서예지…… 일테믄 여기 이 춘추사만 하더래두, 지가 찾아왔다구 위정 따루 시간을 내서 또박또박 응접을 해주시구, 어딜 안내해 줘야 할 텐데…… 걱정을 하시구, 그게 벌써 손님이거니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은 거 아녜요? ……더구나 여자요, 에뜨랑제라구 어려워하시구, 그러시믄 전 백날 가야 거저 그대루 손님이구, 정말 참 에트랑제인 채 비잉빙 따루 나가 돌 게 아니겠어요? 그렇죠?”
 
137
“그런데?”
 
138
“그러니깐 마치 이 경성 안에 기신, 늘 상종하시는 동무 어떤 분이 이 앞으루 지나다가 거저 잠깐 들른 것처럼, 아주 소탈하구 그리구 심상하게, 네?”
 
139
“그리구?”
 
140
“그래 주서야 첫째 지가 어려운 생각이 없구…… 그렇게 여러분이 여러분의 일상적인 생활에다가 절 임의럽게 참옐 시켜 주신다치믄, 그러는 동안에 전 제 육체루다가 여기 이 조선이란 걸 배우구……”
 
141
“조선이란 걸 배우구! …… 그리구 배워선?”
 
142
대영은 말결에 물어 놓고 보니 부전스럽기도 하고 박절한 것도 같아 속으로 민망했다.
 
143
“다른 건 없어요! 거저 그렇게 해서 맘을 붙이구 생활이랄 것을 가질 수가 있을까 하는 것뿐이지……”
 
144
“자알 알았습니다! 힘껏 노력을 해디리죠…… 그렇지만……”
 
145
“그런데 저두……”
 
146
“그렇지만 과연 몇 사람이나 그 기모치를 올바루 이해해서, 뜻에 맞두룩 해디릴 사람이 있을는지, 건 좀 의문일 것 같군요!”
 
147
“그야 단 한 분이나 두 분두 상관없구, 또오 문학이랄지 예술 방면에 간여하시는 분들이믄야 비교적……”
 
148
“김종호군을 통해서 여러 사람 소갠 받으섰지?”
 
149
“다아 잊어버렸어요!……”
 
150
여자는 배시기(딴 속 있이) 웃고 나서, 다시……
 
151
“……영화에 관계하시는 분은 죄다 소갤 받은 것 같아요. 그리구 극단에 기신 분두 여러 분…… 참, 문예봉! 영화에서 보더니보다두 더 얌전하구 좋던데요?”
 
152
“그밖엔? 영화 관계자나 극단 사람 말구?”
 
153
“신문기자 두 분…… 그리구 미술하신다는 저어, 남씨라구……”
 
154
“좋은 친구지! ……그런데 참, 김종호군은 전부터 아섰던가요?”
 
155
“송죽에 아는 이가 있어서, 발이 설다구 걱정을 했더니…… 허긴 다른 이두 동경 기신 조선 양반을 아는 이가 있었지만……”
 
156
대영은, 김종호와의 반연이란 역시 짐작했던 대로 그런 무엇이겠지 하고 고개를 끄덱거리는데, 여자는 조금 만에
 
157
“그런데 참, 아까 말씀예요……”
 
158
하면서 음성을 낮춘다.
 
159
“……저기 마주 앉은 두 분이 무얼 가지구 아마 논전을 하셨죠?”
 
160
“응…… 그런데?”
 
161
“분명 그런 것 같은데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어예죠!…… 그래두 눈치루나마 기모찌만은 짐작할 수가 있어서 기뻤어요!”
 
162
마침 사동이 전화를 받아 가지고 대영을 청한다.
 
163
대영은 무심히
 
164
“네에.”
 
165
하는데, 저편에서는 장모가 전화통이 떠나가게
 
166
“거, 대영이가아?”
 
167
하면서 그야말로 와아짝 곤다.
 
168
대영은, 집에서 해복을 했나 혹은 달리 사고라도 생겼나 하면서 또 한번
 
169
“네에!”
 
170
하는데 저편에서도 또다시
 
171
“거, 대영이가아?”
 
172
하고 재차 소리를 지른다.
 
173
“글쎄 대영이여요!”
 
174
“오오! …… 데거사니 데, 날래 돔 오라마, 얘!”
 
175
“왜요?”
 
176
“와안 머어가! 날래 와야디!”
 
177
“글쎄, 가더래두 내력이나 알구 가야죠!”
 
178
“오오, 참! 내 정신 돔 보라! 흐흐흐흐! …… 아일 났이요! 아일……”
 
179
“네에!”
 
180
대영은 낳았다는 그 어린것과 더불어 산요에 누워 있을 안해의 모양이 상상될 뿐, 덤덤하지 이렇다거나 저렇다거나 특별한 감상은 일지를 않았다. 비로소 남의 애비가 되었느니라 하는 생각조차도…….
 
181
“날래 시방, 오라 잉?”
 
182
장모는 전화통 속에서 연해 재촉이다.
 
183
“가죠…… 산파 왔어요?”
 
184
“으응, 와기는 왔는데 머어 일없이요! 에미네 혼자서 쑤웅 낳아 놓았시요! 흐흐흐흐! 아, 그런대 에미나일 났이요, 에미나일. 흐흐흐흐! …… 그르티만 에미나이문 메래나! 머. 이전 던화 고만하구, 니어 오라 잉? 던차 타구 뽀쓰 타구 올래문 한 시간이나 오야 하니, 자동차 타구 오라 잉?”
 
185
대영은, 외딸에 또 첫 외손이니 그야 기쁘기도 하겠지만, 아뭏든 저렇게 덤비고 덜렁대는 마나님 속에서, 어떻게 하다가 딸은 세상 의젓하고 차분한 걸 낳았으며, 겸하여 제대로 길렀는지 모를 노릇이라고 전화를 끊고 돌아서는데, 박과 김이 벙글벙글 기다리다가
 
186
“해복하섰소?”
 
187
“해산하섰어요?”
 
188
하고 한꺼번에 묻는다.
 
189
“쯧! 낳았다는군요!”
 
190
“그름, 어서 가보시지?”
 
191
“어디루 갈라구?…… 천천히 가지……”
 
192
“하아! 그래두!”
 
193
“그런데 참……”
 
194
김이 깜박 급해하면서……
 
195
“……무어? 아들? 딸?”
 
196
“여자라껀 본디 심술이 많아서, 이왕이면 저처럼 생긴 걸 만들어 놓으러드는 법이니깐!”
 
197
“딸이구나! 에잉, 쯧!”
 
198
박은 안됐어하고, 김은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치면서……
 
199
“저어런! …… 아, 문선생이 득남을 하시믄 한탁 단단히 쓰시게 할려던 참인데……”
 
200
“그래도 일없소! 기르기는 딸이 더 귀엽다 않능기요? 또 인제……”
 
201
“귀엽다?……”
 
202
대영은 혼자말로 되뇌면서, 생각삼아 비로소 남의 어버이라는 것의 마음이 되어보느라고, 우두커니 유리창 밖으로 한눈을 판다.
 
203
박은 하던 말끝을 다시 이어
 
204
“……그라고 인제, 뀌리부인맹이로 위대한 따님이 될지, 뉘 아오?”
 
205
하고는 하하하 웃는다.
 
206
“뀌리부인? 그렇지!……”
 
207
김이 박의 말을 받아 일단 동의를 하다가, 그러나 고개를 꺄웃……
 
208
“……그렇지만 뀌리부인은 영광은 영광이래두 행복이랄 순 없지!”
 
209
“하아! 영광이니 그기 행복 아니오?”
 
210
“죽두룩 고생만 한 게 행복할 건 어딨어?”
 
211
“고생한 대상이 그렇게 영광이고, 영광이니 행복 아니오?”
 
212
“영광이라지만, 영광의 배후에서 알짜 이익을 보는 건 실상 세상이지 그당잔 아냐! …… 시방 라듐의 혜택을 누가 받길래?”
 
213
“그르세! …… 그 혜택 대신으로 세상은 뀌리부인한테 존경과 감사로 영구히 바치지 않소? 그러니 그 영광이 행복일 기 아니오?”
 
214
“저런 벽창호가! 대체 행복이란 걸 행복하는 주체가 누군데 그래? 당자가 몰라두 행복야?…… 생리가 파괴되두룩 고생을 했는데, 무덤 앞의 차디찬 기념비가 어쩌니 행복야?”
 
215
“그름, 아무것도 하능 기 없고 안일(安逸)한 기가 천하 행복가?”
 
216
“행복과 영광은 달라요! 이 서방님아……”
 
217
“그거는 흉악한 물질주의자의 궤변이라꼬나 헤에!”
 
218
“남 지지리 고생한 덕을 보믄서, 영광이겠대서 행복꺼정두 했거니 하는건 무모한 찬사야! 잔인한 맘씨야!”
 
219
대영이 마침 그제야 이편으로 돌아서면서 혼잣말같이
 
220
“흐음! 행복이라?…… 영광이라? 그리구 자식이라? 애정이라?……”
 
221
하다가 제풀에 고개를 끄덱끄덱……
 
222
“아뭏던지 남의 어버이 된 사람이, 제각기 제 자식의 행복이라껏을 바라는 게 상정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난 차라리 딸자식이 안심이겠어! 아직은 실감이 없으니깐 모르겠구면서두……”
 
223
“와 그르쏘?”
 
224
“여자란 건 남자와 달라서, 일반으로……”
 
225
대영은 대답을 하다가, 그러자 스미꼬와 눈이 마주쳤다.
 
226
스미꼬는 여태, 셋이서 담론이 요란한 것을, 무언가 싶어 혼자 궁금한 얼굴로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227
대영은 방금, 여자라는 것은 남자보다도 더얼 불행할 수가 있다는, 그리고 무슨 이유로 그러하다는 설명을 하자던 말의 그 산 반증(反證)이 바로 궐녀인 것 같아 문득 입을 다물어버린다.
 
228
그리고는 커다랗게
 
229
“스미꼬상?……”
 
230
하고 부르면서 그의 앞으로 걸어간다.
 
231
여자는 얼굴을 바로 들고 눈으로 대답을 하고.
 
232
“……대체루, 세상에서 남자허구 여자허구 비굘 한다면 어느 편이 더 불행한가요?”
 
233
“불행요? 어느 편요?”
 
234
여자는 한참이나 그대로 깜작깜작 생각을 하다가
 
235
“……글쎄…… 그런데, 양으루요? 질루요?”
 
236
하고 되묻는다.
 
237
“양이냐? 질이냐?…… 그렇지만 질루야 여자가 어디 남자의 고통이나 불행만침 크구 심각한 걸 겪나!”
 
238
“어쩌나!”
 
239
“허허! …… 여자가 걸핏하면 울긴 잘들 하니깐, 양으룬 더할는지 몰라?”
 
240
“행복이나 불행이라껀 결국 주관(主觀) 나름 아닐까요?”
 
241
“그렇다구두 하겠지만……”
 
242
“그런데 여자들은 많이 주관적이니깐……”
 
243
“그 대신 남자보다는 바람은 더얼 타지 않나!”
 
244
“또 그 대신 약하구 만만하니깐 구박이 심하잖아요?”
 
245
“굳세지? 당당히……”
 
246
“굳세믄 시방 말씀 짝으루 남자네처럼 바람을 타죠!”
 
247
“허! 그런 불편이 또 있나!……”
 
248
대영은 휙 돌아서면서
 
249
“……좌우간 오늘은 거리나 나갑시다!”
 
250
하고 옷걸개에서 모자와 외투를 떼어 걸친다.
 
251
스미꼬를 뒤에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내리다가 마침 뛰어드는 병수를 쭈적 만났다.
 
252
“아, 형님!……”
 
253
지체로는 사의 주인이지만 그런 것은 상관이 없고, 같은 한고향이요 나이 네댓 살 삐어질뿐더러, 겸해서 존경을 하는 터라, 그는 대영을 형님이라고 부른다.
 
254
번민 같은 것은 없고, 임의로운 가정에 생활 또한 유족하겠다, 늘 명랑하지만 오늘따나 어디서 무슨 재미있는 일을 본 모양, 연해 싱글벙글,
 
255
“……지금 나가시우?……”
 
256
하고는 이편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아니나다를까)
 
257
“……내 오늘, 쫓아다니면서 광골, 전페지짜리루다가, 이놈들 다섯 장이나 뺏었지!”
 
258
하면서 눈을 찌긋째긋 좋아해쌓는다.
 
259
“흐응! 거, 주우정한데! 새서방님 광고외교원이……”
 
260
“하하 하하! …… 치들이 내가 마구 조르는데야 안 듣구 배기나? 두루 후길 바야겠으니……”
 
261
“이 사람, 그렇지만 춘추사는 사장이 광고 모집 다니더라구 창피한 호나리!”
 
262
“하하 하하! 뭣이냐 사장 겸 광고외교원 겸, 또 고쓰까이 겸? 하하 하하! 괜찮아, 일없어! …… 그런데 참, 아직 머어 늦잖겠다요?”
 
263
“넉넉해! …… 올라가서 박군한테 넹겨게 그려나!”
 
264
“자아, 그럼……”
 
265
“자아……”
 
266
한마디씩 하면서 돌아서다가
 
267
“아, 형님!……”
 
268
하고 또 불러댄다.
 
269
대영은 마주 되돌아서고, 병수는 다른 속이 있이 대영의 얼굴을 빠안히 바라다보면서……
 
270
“오늘 저녁에 술 좀 먹을까?”
 
271
“술?”
 
272
“망년회 합시다?”
 
273
“망년횐 인제 신년호 내놓구서, 사에서 주최하지.”
 
274
“그럼, 우리 둘이만 단촐하게, 이따가……”
 
275
“고만 둬!”
 
276
“왜?…… 추태가 또 나올까 바서? 통곡 좋잖우?”
 
277
“사람두!”
 
278
“여보, 형님!”
 
279
“일없어!”
 
280
“형님은 술 한잔 자시구, 통곡이라두 하는 게 차라리 나아 봬요! 저렇게 잔뜩 찡기리구 있느니보담은……”
 
281
“………”
 
282
“그러지 말구, 기운을 좀 내요!”
 
283
“………”
 
284
“왜, 바싹 요새루 더, 저렇게 으설푼 표정을 하구 다니시우? 저녁은 자셨을 테구, 신어머니두 아닌데……”
 
285
“어서 올라나 가게!”
 
286
대영은 돌아서서 층계를 내려가고, 병수는 끄은히……
 
287
“이따가 어디 기시우?”
 
288
“몰라!”
 
289
“댁으루 나가겠지, 머어…… 차 보내께 꼭 오시우?”
 
290
“나 집엔 늦어야 가……”
 
291
스미꼬는 길로 나가 한편으로 비껴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292
하마 다섯시, 가뜩이나 저물기 쉬운 겨울날의 오후가 금세 눈송이라도 희끗희끗 날릴 듯 납빛으로 자욱이 흐려, 한결 더 음산했다. 석양인 데 겸하여 대목이거니 하고 보아 그런지, 거리는 유난히 바빠들 하면서 정신 아득하게 복닥거린다.
 
293
“미안합니다!……”
 
294
대영은 스미꼬와 나란히 네거리 쪽으로 걸어가면서……
 
295
“……지금 그가 우리 사 주인입니다.”
 
296
“사 주인?”
 
297
“사 주인이라면 처음 듣기엔 생소하겠지만, 사장과는 좀 다르니깐……”
 
298
“배애젊으시던데?…… 그이두 문학?……”
 
299
“아뇨.”
 
300
“그러믄서! …… 들으니깐 늘 결손만 본다구 그러든데요?”
 
301
“그러니깐 고마운 노릇이죠! …… 조선서야 그렇게 이해 다아 몰시하는 파트론이래두 없이는 반반한 잡지 하나 제대루 해가들 못하니깐요! …… 흥! 한심하죠!”
 
302
“이왕이니, 장사를 한다기보담 차라리 그게 질겁지 않아요? 파는 게 아니구 주는 거…… 준단 말이 목사님 말씀 같아서 불쾌한 거라믄, 더불어 같이 질기는 거……”
 
303
“그야 그렇기두 하겠죠! 나두 그리구 한때는 그걸 질겁게 여기기두 했더랍니다마는……”
 
304
대영은 문득 그 동안이야 한번도 마음이 내켜 가까운 친구랄지 아무한테고 일찌기 술회를 한 적이라고는 없는, 문제의 심경을 시방 무슨 내력으로 이렇게 섬뻑 만나 잘 알지도 못하는, 그리고 어쩌면 노방의 사람에 지나지 못할 이 여자더러 두루 그것을 설파하는 것인지, 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마음성이었었다.
 
305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러는 하면서도 웬일인지 별반 그것이 어색하거나 또 부질없은 짓이거니 싶지를 않고, 차차로 이야기는 곰곰 풀리어지는 것이었었다.
 
306
“문학이구 잡지구, 문학을 한다는 것이 지금은 하나두 흥이 없구, 그러느라니 통히 신명이라는 게 나질 않구, 쯧.”
 
307
여자는 고개를 돌이켜, 길 위로 숙인 대영의 얼굴을 찬찬히 보고 또 보고 하면서 따라 걷는다.
 
308
“……문학이 질겁기두 했구, 내 문학을 알아주는 남과 더불어 질긴다는 것이 자랑스럽기두 했구, 물론 보람두 있는 성싶었구…… 그리는 동안엔 문학이 다아 엄숙하기두 하구, 내라는 인생 이상으루 중난스럽기두 하구…… 하던 것이 인제 와서는!”
 
309
대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뚜벅뚜벅 잠깐 말이 없다가 조금만에 다시 그 뒤를 잇는다.
 
310
“……일언이폐지하면 생활을 잃어바렸다구 하겠지!…… 하루 아침 그렇게 생활을 잃어버린 다음부터는, 문학이란 것이 꼭 유령 같아요! 현실성이 없구, 도무지 무의미하기라니…… 그렇게 무의미하구 쓰잘디없는 노릇이, 문학이 말씀이죠, 가뜩이나 그게 짐스럽기까지 하군요! …… 그런 걸 보면 인간의 습관처럼 어리석구 밑질긴 건 없나바요! …… 깨끗이 내다가 버렸어야 할 테지만서두, 그것이 문학에의 미련이 아니라, 아직두 한 조각 인생에의 미련이 남은 탓인지! …… 그러구저러구 간에……”
 
311
대영은 자포적으로 음성을 높이면서 씹어뱉듯……
 
312
“……당금 이, 지굿뎅이가 사뭇 터지기라두 할 만침, 사실이 핍절하게 긴장이 돼가지구, 융케르 시속 육백킬로짜리 전투기같이 웅웅 디리 전진을 하구 있는 이 판국에, 뭣이냐 쇠달구지만도 못한 문학 체껏이, 어딜 괜히! …… 어마어마한 그 현실을 제법 갖다가 한귀탱이나마 감각을 하며, 정통을 캐치할 근력이 있어야 말이지!……”
 
313
네거리를 남쪽으로 꺾여 마침 종각 앞을 지나고 있었다.
 
314
먼지조차 수부욱 저어 멀리 사멸된 시대를, 만국박람회의 아프리카 토인관(土人館)처럼, 썩 요령 있이 클로즈업해 가지고 근처 일대로 가장 첨예하게 반영·생동하는 당세기와 더불어 어엿이 동거를 하는 게 이 종각 보신각(普信閣)이었었다.
 
315
그 대조의 야숙하게 절창인 품이, 그리하여 가령 유심한 타방 사람은 말고서, 응당 여기에 그것이 저 모양을 하고 있는 줄은 번연히 알면서도, 그리고 하루 한두 번씩은 이 앞을 오고가고 하는 터이면서도, 그러면서도 깜박 속아서는(진실로 속아서는) 부지중 그리로 눈이 가지곤 하는 게 이 알량한 물건짝이었었다.
 
316
“자아, 저건 어떻죠?……”
 
317
대영은 고개를 돌려, 짯짯이 종각을 가리킨다. 여자는 그러나 땅만 그대로 내려다보면서 걸을 뿐, 거기엔 주의를 하려고 않는다. 안 보아도 벌써 다 안다는, 그런 낯꽃이었고.
 
318
대영은 그 다음을 혼자말로 두런거리듯……
 
319
“……낡은 시대가 새로운 현대와 동거를 하는, 저 궁상스럽구 초라한 꼬락서니! …… 흥! 나두 진작엔 지금과는 다른 감정으루다가 저걸 지지리두 비웃었더라니!……”
 
320
그러자 여자는(종각 앞을 거진 다 지나쳐서야) 갑작스레 얼굴을 쳐들고는, 거듭 뒤를 돌려다보아쌓더니 필경 발길을 주춤 멈추고 서면서 고갯짓으로 대영을 청한다.
 
321
대영은 두어 걸음 건성으로 되돌아오면서, 여전히 방금 방백(傍白)을 하던 무연한 그 기분인 채……
 
322
“……오직, 오직 그저, 신념만은 버리질 않구서 있으니 유일한 위안이랄는지! …… 공기만 먹구 생명을 지탱하면서 봄을 기대리는 양서류의 동면처럼……”
 
323
하는 소리를 듣는지 마는지, 여자는 대영이 옆으로 와서 나란히 서기를 기다려
 
324
“저어, 제가 말씀예요?……”
 
325
하고 저는 저대로 딴청을 한다.
 
326
“……제가 만일 경성시장이란다믄 말씀이죠……”
 
327
“경성은 시장이 아니라 부윤이랍니다!”
 
328
대영이 이렇게 정정하는 것을, 여자는 고개도 끄덱거리지 않고 그 뒤를 잇대어……
 
329
“그렇던가요, 참…… 아뭏든 그렇다믄 말씀예요…… 그렇다믄 전, 절대루 이걸 예다가 이렇게 둬두질 않구서 담박 헐어버리겠어요!”
 
330
불쾌함을 어찌하지 못하겠는 듯, 다뿍 찡그리고 돌아서는 얼굴이, 고적의 관광자다운 호기(好奇)의 눈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음은 물론, 그걸로써 대영은 여자의 그 비밀한 반감의 실체를 수월히 기수 챌 수가 있었다.
 
331
대영은 그러나 천연덕스럽게
 
332
“머어, 보장을 해두 좋은데……”
 
333
하면서 천천히 다시 가던 길을 걷는다.
 
334
“……절대루 무슨 폴리티칼한 위험성은 없구…… 일찍이 그러한 혐의가 다소간 있을 시절에두 매우 도량 넓은 처분을 받았거든, 하물며 지금이야! …… 다아 선량한 관리 경성 시장, 시장이 더 좋군요…… 그 경성 시장으루 앉아서, 고적 보존의 본의를 어겨서까지, 그런 거조를 하려 들 이치는 없을 겝니다……”
 
335
여자는 제 생각에만 잠겨, 들은 둥 만 둥 반응이 없다.
 
336
대영은 우선 그쯤 해두고는 덤덤히 한참이나 걸어가다가 이윽고 광교를 지나면서
 
337
“스미꼬상?……”
 
338
하고 불러놓는다.
 
339
여자는 대답 대신 고개를 쳐드는 시늉만 하다가 만다.
 
340
“아까 그 종각, 그거 말인데……”
 
341
대영은 저도 앞을 바라다보면서 생각 생각, 한마디씩 느릿느릿……
 
342
“……그, 다뿍 주접이 든 낡은 종각을 가령 거울이라구 하구 말이죠…… 그 거울에 가서…… 거울에 가서 스미꼬상의 얼굴이…… 일테면 뭣이냐, 눈곱이 다닥다닥 끼구…… 분 자죽이야 무엇이야 얼룩얼룩 얼룩이 지구…… 이렇게 생긴 스미꼬상 자신의 얼굴이…… 고대루 그 거울에 가서 빠안히 비쳐져 보이는 게, 더럭 고만 마음이 불쾌합디까? 마구 무너트려 버리구 싶두룩?”
 
343
자신이 있는, 그래서 단정적인 속떠보기이었었다.
 
344
말을 맺고는 얼굴을 돌리는데, 여자는 종시 앞만 보고 걷던 눈을, 볼에 남자의 시선을 느끼자 그 긴 속눈썹으로 더불어 조용히 내려뜨린다.
 
345
얼마를 묵묵히 걸어갔고, 가다가 여자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346
“눈이 올려나 보죠?”
 
347
“좀 오는 것두 좋겠죠! 이런 땐……”
 
348
그러고는 또 서로 말이 없이 걷다가……
 
349
“분상?”
 
350
“네에!”
 
351
“저어 예전…… 그쪽측에선 들, ××를 갖다가 아편이라구 하잖었어요?”
 
352
“으음!”
 
353
“지금은 그런데 말씀이죠…… 남을 아편이라구 하던 그 자신이 고만 아편이 됐겠죠!……”
 
354
“그 자신이!”
 
355
“적어두 저한텐……”
 
356
“………”
 
357
“………”
 
358
“스미꼬상?”
 
359
“네?”
 
360
“스미꼬상 올에 몇?”
 
361
“셋……”
 
362
“스물셋! 으음! …… 아직두 젊은데! …… 오히려 어리지!”
 
363
“………”
 
364
“………”
 
365
“분상은? 올에……”
 
366
“나두 셋……”
 
367
“남자 나이루 서른셋인다 치믄, 인제 한참……”
 
368
“아! 난 까마득해! …… 생각하면 대체 그 삼십삼 년투룩 어떻게 살어왔던고오 싶우니! …… 요새 같아서는 하루가 지리한데!”
 
369
“영화에서 보던지, 이야기나 또오 책에서 보기엔 퍽 로맨한 것 같더니, 저 흰옷들 말씀예요, 왜 저렇게 사뭇 못견디게스리 걱정스러 뵌대요?”
 
370
느닷없이 딴소리를 하곤 하는 것은 마음이 줄곧 방심이 되고 헛갈리고 하는 표적이었을 것이다.
 
371
“분상두 흰옷이 그렇게 걱정스러 뵈세요?”
 
372
“난 스미꼬상의 노스탈자는 없으니깐…… 그 대신 모주리 한대씩 쥐어질러 주구는 싶어!”
 
373
“뭐라구 하시믄서?”
 
374
“졸면서 거릴 나와 다니는 건 도시의 미관상으루두 불가하거니와 교통 방해가 되지 않느냐구……”
 
375
“남더러만? 재갼 어떡허시구?”
 
376
“딴은!”
 
377
“………”
 
378
“………”
 
379
“버릴 양으루 왔더니! …… 무어나 생활허구 바꾸구서 아편일랑 버려 볼 양으루 왔더니……”
 
380
“신념의 탓이겠지!”
 
381
“그런 건 잃어버린 지 오래구……”
 
382
“그렇다면야…… 나이 바야흐로 제대의 적령기(適齡期)겠다……”
 
383
“……아무짝에두 쓰잘디없는 찌꺽지를……”
 
384
“……보나 안 보나, 환경이 호강스럴 테었다……”
 
385
“……독이 그대지두 밑이 질긴 물건인지!……”
 
386
“……또오, 스미꼬생은 혈통이 더구나……”
 
387
이로써 둘이는 완전히 십 년의 지기인 듯 하나도 사이에 막힘이 없되, 또한 조금치도 부자연스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원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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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냉동어 [제목]
 
  채만식(蔡萬植) [저자]
 
  1940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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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동어(冷凍魚)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10월 0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