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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동어(冷凍魚) ◈
◇ 4 ◇
카탈로그   목차 (총 : 6권)     이전 4권 다음
1940.4~5
채만식
1
冷 凍 魚[냉동어]
 
2
4
 
 
3
명치정 어귀의 다방으로 들어가 목을 축이던 길에 내처 간단한 저녁을 마치고 이어서 영화를 구경했다.
 
4
대영은 언제나 마찬가지로, 싱싱한 전선의 뉴스 영화가 좋아, 보암직했고, 겸하여 크라우스의 「뿔그극장」이 근래에 드문 순수작품이어서 무던했었다.
 
5
교대 전 한 삼십 분, 끝을 미리서 보았기 때문에 좀 얼추 아홉시 반쯤 되어 극장을 나왔다.
 
6
굵지는 않으나 눈발이 제법 날리고 길바닥으로 가냘프게 한 꺼풀 덮이고 있었다.
 
7
눈도 오고 아직 밤도 여리어, 지향없는 마음들이라 발길 또한 지향없이 거닐기 시작했다.
 
8
극장을 막 나와 문 앞에서 잠깐 충그리면서,
 
9
“어떡헐꼬?”
 
10
“거닐죠?”
 
11
“쯧! 아무리나……”
 
12
하는 걸로 고만이요, 더 상량이 필요치 않았었다.
 
13
천주교 성당의 어둔 고개를 거진 다 올라와서다.
 
14
“인생은 풍부하다구요오?……”
 
15
문득 생각이 나는 모양, 스미꼬가 비로소 입을 열어, 방금 보던 「뿔그극장」의 다이얼로그를 한마디 되뇌던 것이다.
 
16
“남은 단조해 죽겠는데?”
 
17
대영이 주를 다는 것을, 여자가 다시
 
18
“그러게 말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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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는 조금 있다가……
 
20
“……그런데 말씀이죠? 가만히 생각하믄 생활의 매력이랄 게 수월찮이 큰 건상불러요.”
 
21
“생활의? 매력이?”
 
22
“좋거나 궂거나 제 자신의 생활…… 어떤 도저한 신념을 가지구 몸과 정신을 고스란히 다아 거기다가 쏟구서 달리 여념이 없두룩 진지한 생활, 그런 생활은 비극적이라두 아름다운 것 같아요…… 그러니깐 부럽구……”
 
23
“부럽구……”
 
24
“생활 그것이 부러운 건 아니죠. 그렇게시리 생활을 할 수가 있다는, 뭣이냐, 태도라구 할는지, 그게 부럽더란 말씀이지. 「뿔그극장」을 보믄서 퍼뜩 그런 생각이 났어요.”
 
25
“일종의 관극심리(觀劇心理)가 아닐까요?”
 
26
“혹시 그런지두 모르겠지만…… 아뭏든 그렇게 한평생을 흔한 연애두 아무것두 일체 모르구서, 연극 한 가지만 가지구 정성껏 생활을 해왔구…… 그러믄서 어찌다가 좀 잘못된다 치믄 비관을 하구 걱정을 하구 다시 더 노력을 하구…… 그러다가 다아 늙게야 남 애인 있는 어린 색시한테 짝사랑이 걸려 가지구는 우롱을 당하구 지지리 번민을 하구, 아이고 코앞에 문이 타앙 닫히는 바깥에서 후루루 한숨을 쉬는 형용허구…… 뺨싸대길 때리던 건 위선이나 훈계가 아니라 정말 불타는 증오겠다요?”
 
27
“리얼하더군.”
 
28
“그렇게 모두 심각하구, 그래서 어디 한구석 빈틈이 있거나 할 만한 무엇이 없이, 생활과 주체가 꽉 달라붙어설랑은 싸움을 하구 있잖아요? 물론 비통한 거야 사실이지만……”
 
29
“스미꼬상 자신이 만일 그 사람이었다구 한다면?”
 
30
“아무것두 없는 지금 이 상태보담은 월등이죠.”
 
31
“실상 아까 우리 사에서두, 그 젊은 두 친구가, 그 비슷한 걸 가지구 또 한바탕 싸웠습니다마는…… 뀌리부인이 연상 나오잖습디까?”
 
32
“오오! …… 건데?”
 
33
“뀌리부인의 영광이 행복이냐, 행복이 아니냐, 그거야……”
 
34
“딴은!”
 
35
“그래, 스미꼬상두 그러지 않으셨소? 행복이니 불행이니 하는 건 결국 주관 나름이라구…… 세상엔 스미꼬상이나 스미꼬상은 또 몰라! 날보담은 나으니깐…… 그렇지만 날 같은 사람의 생활을 가져가 미(美)라구 볼 사람이 더러 있을는지두 모르잖습니까? 마치 기집을 추하게 그려놓구서 소위 미술적인 미를 발견하구, 졸라 류의 자연주의 작가가 인생의 치부와 암흑면을 묘사해 놓구서 소위 문학적인 미를 발견하구 하듯이, 마치 그러하듯이 병적인 퇴폐의 미를 말이죠!”
 
36
이야기를 하면서 오는 줄 모르게 온 것이, 전차가 달리는 황금정 큰거리였었다.
 
37
눈은 꽤 쑬쑬히 내려, 두 사람의 머리와 옷에도 앉고 거리를 허옇게 덮는다.
 
38
“고만하구, 사처루 가십시오. 바래다 드리죠……”
 
39
대영은 네거리를 향해 길을 잡고, 여자는 미흡스레 잠깐 망설이는 듯했으나, 이내 따라선다.
 
40
“……눈두 오구 해서 좋은 밤이긴 합니다마는, 머어 밤을 새면서 걷구 다닐 정취라군 없는 바닥이니깐요.”
 
41
그렇게 타이르기는 했어도, 대영 저 자신부터가, 말없이 뚜벅거리는 발걸음소리만 들으면서, 벌써 인적 드문 포도 위를 여자와 더불어, 괜히 마음 우수스러운 이 여자와 더불어, 눈을 맞으며 눈을 밟으며 걸어가는 정은, 결코 회포 연연한 바가 없는 게 아니었었다.
 
42
부청 앞을 바라고 거진 당도했을 무렵하여 여자가
 
43
“분상 참, 약주 잡숫죠?”
 
44
하고 묻는다.
 
45
“좀 먹죠. 많인 못 하구……”
 
46
“잡수시까요?”
 
47
“자시려우?”
 
48
“술이 정말 맛이 어떤 건가요?”
 
49
“쓰구……”
 
50
“또오?”
 
51
“톡 쏘구……”
 
52
“또오?”
 
53
“위가 아프구, 심장이 늘어나구……”
 
54
“또오?”
 
55
“마취가 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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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
 
57
“과대망상증이 생기구, 반대루 솔직해지기두 하구……”
 
58
“그뿐?”
 
59
“신경의 한 부분은 되려 흥분이 돼서 동물적으로 흉포해지기두 하구
 
60
……”
 
61
“술하구 담배하구는 근심을 잊게 한다구 이르잖아요?”
 
62
“얼마쯤은…… 그렇지만 고통이나 근심을 잊자구, 더우기 화가 난다구 곧잘 술들을 먹는데, 흔히 핑계구, 실상은 일종의 분풀이 같더군요. 상전한테 닦이운 남의 집 종이 발길루 개를 걷어지르는, 그런 심리 비슷한……”
 
63
“왜장녀는 천하 왜장녀래두 술허구 담배허구는 여태 못 먹어 봤어요. 어머니 아버지가 하두 구짜에 엄하게 해놔서……”
 
64
부청 건너편의 낡은 다방엘 찾아들어, 마침 구석진 자리를 자리잡고 마주 앉았다.
 
65
이왕이니 압생트로 할까 했으나 독해도 너무 독할 것 같아, 위스키를 청했다.
 
66
사동이, 단골이어서 대영을 잘 아는 놈이라 싱글싱글, 조그마한 글라스에 다가 마노빛으로 노오란 액체를 남싯남싯, 한 잔씩 붓고는 병째 놓아두고 물러간다.
 
67
레테르만은 멀끔하니 백마를 그렸지만, 속알맹이는 내일 아침 골치가 팰 산또리인 것쯤 각오를 한 터.
 
68
대영은 잔을 들어 쭉 마시고는
 
69
“이렇게 먹는 법이랍니다.”
 
70
하면서 곁들인 냉수로 입을 가신다.
 
71
술을 먹는 게 아니라, 술 먹는 법을 가르치는 판이어서 우선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할 수밖에.
 
72
여자는 잔을 입술에 대고 죄꼼 혀끝으로 찍어 맛을 보다가 미간을 찡그리면서 도로 내려놓는다.
 
73
대영은 빙그레 건너다보다가 자작으로 또 한 잔을 부어 마신다.
 
74
여자는 부러운 듯, 이번에는 조금 한 모금 마시는 시늉을 하더니, 마구 오만상을 찡그리면서, 술잔 대신 손수건으로 얼른 입을 가린다.
 
75
뱉은 모양으로, 냉수를 집어다가 양치를 하고 나서……
 
76
“어쩌믄 그래요, 맛이……”
 
77
“그게 술맛이래두.”
 
78
대영은 필경 얼굴을 흐트리고 웃으면서 세 번째 잔을 마신다.
 
79
“어쩌믄 저렇게두 잘 잡술까! 아무렇지두 않아요?”
 
80
“보시구려?”
 
81
“쏘지두 않구?”
 
82
“아아니……”
 
83
“쓰지두 않구?”
 
84
“아아니……”
 
85
여자는 아직도 걱정으로 찡그린 채 바라다보던 얼굴을, 배시시 웃으면서
 
86
“아이, 먹구퍼…… 술은 다아 이렇게 맛이 야만인가요?”
 
87
하고 묻는다.
 
88
“야만이라? 됐어! …… 그야 문명한 술두 있죠.”
 
89
“그럼 그거 좀……”
 
90
“그렇지만 그따윈 어디 술 축에 가야지……”
 
91
대영은 페퍼민트가 생각이 났으나, 남이 보기에도 잡스럽겠어서 작파를 하고, 큐라소는 또 떨어지고 없다는 것이고, 할 수 없이 포도주를 가져오게 했다.
 
92
“어디?……”
 
93
여자는 선혈빛으로 고와진 글라스를 올려다 대고, 먼저에 혼이 난 가늠이 있대서 조심조심 맛을 보아보더니 방싯 웃으면서 한 모금, 그러고는 홀짝 죄다 들이마신다.
 
94
“……이렇게 좋은걸! 진작 안 멕여 주시구서!”
 
95
“술값에 안 간대두?”
 
96
“그래두 카아 쏘는데요? 죄꼼……”
 
97
“쯧? 처음이니깐 오히려 그게 적당할는지두 모르지.”
 
98
여자는 술을 따라서 또 마신다. 그러고는 연거푸 석 잔.
 
99
“저 이 술, 병째 사가지구 가요.”
 
100
“아가씨가 왜 저럴꼬?”
 
101
“아무래두 안 맞는 시곈데, 머!”
 
102
“안 맞는 시계라? 것두 좋아…… 난 묵은 책력이라구 했더니……”
 
103
“묵은 책력?…… 옳아?…… 묵은 책력?…… 안 맞는 시계보담두 꼬옥 아주 적절한데요?”
 
104
순하다지만 명색이 술은 술이요, 또 먹어보지 못하던 장부라, 거푸 석 잔이나 들이켜놔서 눈가가 제법 붉고 볼도 발그레, 완구히 숨이 찬 모양이다.
 
105
대영은 연달아 대여섯 잔이나 기울인 술이 그의 주량에 마침맞아, 이를테면 마악 이야기하기에 좋은 정도이었었다.
 
106
“자, 가세요.”
 
107
술의 풍도를 알 턱이 없는지라, 저 볼일은 다 보았대서 여자는 발딱 일어서더니 카운터로 조르르 간다.
 
108
셈을 못 하게 하고 맡으려고 따라가 보니, 돈을 치르면서 포도주를 사자고 교섭이다.
 
109
저기 가게에 가서 사주마고 달래 가지고 다방을 나서노라니까, 그새 눈은 훨씬 더 쏟아지고 거리가 모두 눈이다.
 
110
못견디겠는지, 여자는 팔에 매달릴 듯 다붙어 따르면서
 
111
“길루 더 돌아다녀요? 네?”
 
112
하고 조른다.
 
113
“사처루 가시오.”
 
114
“싫어요?”
 
115
“동경과두 좀더 달라서, 밤거리를 늦게 남녀가 거닐구 다니면 우선 경찰부터가 질끔으루 알구 금을 합니다.”
 
116
“어떤가요. 머어……”
 
117
“하찮은 일을 가지구 시비를 당할 까닭이 있나요?”
 
118
“퍽 선량하셔!”
 
119
“자아, 그 대신 내 포도주 사 드리께시니……”
 
120
“이대루…… 이 부지할 수 없는 맘으루 오늘 밤을 지낼 일이 아득해요!”
 
121
“아까 그, 영화 가운데의 생활을 객관하듯이, 넌지시 스미꼬상 자신을 객관하구 지내요. 그런다치면 좀은 마음이 편안할 테니…… 방관적이어서……”
 
122
“당돌한 체하더니 고작이냐구 웃으실 테지만, 역시 남자하구두 달라서 센치하기 쉬운 여자 아녜요? 그런데 전 또, 노스탈자가 있잖아요…… 누가 시킨 밴 아니지만서두, 이렇게 밤이 생소하구 사람두 설구 한 여길 와서……”
 
123
“사처루 가서, 내 그럼 스미꼬상 마음 갈앉히구 잠들두룩까지 이야기 벗해 드리지.”
 
124
“것두 실상, 말하자믄 분상한테 책임이 노상 없진 않으셔요.”
 
125
“내게? 책임이?”
 
126
대영은 어떤 짐작 밑에, 너무 헤프지 않은가 하는, 그래서 도리어 가벼운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127
여자는 그러나……
 
128
“책임이라믄 엄살일는지 몰라두…… 여자란 것은 절 너무 잘 알아주는 남자한테는 일상 약하구, 그래서 여자답게 응석을 부리구 그러는 법예요, 믿는 맘에 수동적인 본능으루다가…… 그 고팰 잘 못 넘기믄 고만 딴 걸루 발전이 돼버리구……”
 
129
“그런데 알콜 기운이 들어서 가뜩이나 작희를 하죠?”
 
130
“아마 그런가 봐요.”
 
131
“그러니깐 이 다음엘랑 술 자시지 말아요!”
 
132
“분상하구만 먹구…… 이왕 다아 약점 들키구 났는데야. 자아, 포도주 사주세요, 약속하셨으니깐……”
 
 
133
스미꼬가 든 방은 여러 채로 된 이 아파트 가운데, 바로 들어가는 첫 채의 맨 끝에 가 붙어 있었다.
 
134
스팀이 훈훈하고, 조그마한 방인데 역시 조그마한 침대와 조그마한 양복장은 낡은 손탁자로 더불어 방에 딸린 세간인 듯했으나, 방이 그들먹하게 큰 소파와 비단 쿠션과 침대에 편 새털깃 이불과 저편으로 또 하나 작은 탁자 위에 놓인 차찬장과 두 개의 걸상과 이런 것들은 죄다 사치스런 신품인 것이, 여자가 제라서 장만한 게 분명했다.
 
135
“이걸 글쎄, 모두 들여오구 늘어놓구 하느라구, 어제 온종일 그리구 오늘 한나절……”
 
136
여자는 외투와 모자를 벗어 양복장 안으로 아무렇게나 들여뜨리고 돌아서다가
 
137
“……분상 모자, 외투랑……”
 
138
하면서 방 가운데 우두커니 섰는 대영에게, 손가락을 꼼질꼼질 팔을 내뻗친다.
 
139
초록줄이 널찍널찍, 가로세로 번듯하게 진, 회색 천의 원피스가 몸에 차악 달라붙어 훨씬 더 후릿하고, 그 속에서 근육과 사지는 탄력이 있었다.
 
140
대영은 의관을 벗기도 혐의쩍었지만 그렇다고 청백을 부리는 것도 도리어 제 발이 저려하는 노릇 같아서, 아뭇 소리 않고 저 하자는 대로 했다.
 
141
“거기, 소파에 편안히 좀 앉으세요……”
 
142
스미꼬는 남자가 벗은 것을 제것처럼은 함부로 다루지 않고, 잘 가조롱이 걸어두고 넣어놓고 하느라 한참 수고를 한다.
 
143
“……아 글쎄, 앞으루 다만 얼마 동안이라두 맘을 잡구 배겨 있게 될는지 어떻게 될는지, 아직 작정두 변변히 없으믄서 웬 살림을 이렇게 모두 장만을 하구 해요?…… 그런 걸 보믄, 여잔 괭이 성밀 닮았다구 하는 게 노상 애맨 욕두 아닌가 보죠? 거처에 먼점 정을 들이자구 한대서……”
 
144
여자는 미상불 대영이 이렇게 함께 와 있어 주어서, 작히 심란스럽지 않고 마음이 놓이는지, 연해 쌔와려싸면서 마지막 양복장 문을 찰그랑 닫고는 이리로 돌아온다.
 
145
“자아, 인전 잘 대접해예지?……”
 
146
“거 무어, 그림을 하나구 둘이구 좀 걸었더라면……”
 
147
대영은, 손탁자 위에 수선이 한 접시 놓여 있을 뿐, 민틋하니 아무것도 없는 사면의 벽을 다시금 둘러본다.
 
148
여자는 같이 시선을 따르면서……
 
149
“생각은 있었지만, 시방 형편에 틀집에서 사는 것밖에 별수가 없는데, 그 그림이야 차마 어디……」
 
150
“나한테 족자가 좋은 게 하나 있는데, 그렇지만 이런 양실엔 얼리잖아. 또오 고화가 돼서 스미꼬상의 취미에 맞지두 않을 테구……”
 
151
“고화두 집에두 많이 있어서 늘 구경은 했어요. 무언데요? 누구?”
 
152
“허소치(許小痴)라구 스미꼬상은 그래두 모를 거야…… 그이 진필 모란인데……”
 
153
“가져다주세요.”
 
154
“쯧! …… 거무테테한 묵화니 그리나 아시우.”
 
155
“있을 동안 자알 걸어 두구 보다가, 또 자알 돌려보내 드리께, 네?”
 
156
“기념으루다 영 드려두 좋구.”
 
157
“나두 그럼, 인제 갈 때 기념될 거 무어 드리지?”
 
158
여자는 차관을 들고 나가다가 문의 손잡이를 잡고 돌려다보면서
 
159
“참! 시장하시믄 토스트 만들까요?”
 
160
하고 묻는다.
 
161
대영은 고개를 두르면서……
 
162
“좋습니다.”
 
163
“그래두우…… 계란은? 반숙해서……”
 
164
“스미꼬상이나……”
 
165
“전 생각 없어요…… 아이, 그런데 참, 어쩌나아! 하하하!……”
 
166
여자는 비로소 처음 보게 명랑히 웃던 것이나, 대영은 웬 영문을 몰라 두릿두릿하고.
 
167
“……두 양주서 글쎄, 세간살일 하는 것 같군요, 하하하하!”
 
168
그러다간 미처 무어라고 대꾸를 할 사이도 없이 급작스레, 얼굴에서 웃음이 물 쓸리듯 쓸려 없어지면서 금세, 아미를 담뿍 찌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문을 밀치고 나가버린다.
 
169
남자와의 세간살이란 말을 하던 끝에 별안간 좋잖은 내색이 드러남은, 필시 저 자신이 겪은 불쾌한 기억의 소생일 것이었었다.
 
170
아닌게아니라 아까 그와 같이, 남자의 의관을 달래다가는 얌전하게 다 건사를 하던 것이며, 시방은 또 요기할 것을 토스트야 계란이야 해싸면서 알뜰히 마음을 쓰곤 하는 양이 정녕, 잠시나마 남의 아낙 노릇을 해보던 솜씨지, 노상 생내기의 뉘네 집 얼뚱 딸내미는 아닌 성싶었다.
 
171
대영은 그렇다고 한다면 여자를 가져다 머리에서 우러나는 상심(喪心)이거니만 했던 것은 잘못이요, 역시 심장의 사건도 한 모가치 거기에 결련이 되기는 된 거로다고, 따라서 그가 이쯤 이르른 전후 경위도 어느만큼 구체적으로 짐작이 들어서는 것 같아, 두루 그런 생각을 하며 앉아 있었다.
 
172
얼마 안 있어, 귀에서 김이 오르는 차관을 대롱대롱, 해망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스미꼬는 그새, 가스를 피우는 동안 다시 생각이 또 많았던 모양으로, 기색은 도로 변하여 여느때의 침울한 그 얼굴로 돌아갔었다.
 
173
말이 없으련 했더니 무슨 생각에, 입안엣 소리로 혼자
 
174
“눈두 잘두 오지!”
 
175
하면서 손탁자를 소파 앞까지 바투 다가다 놓고는, 그제서부터야 눈을 내리깔고 잠잠히 차를 거르기 시작한다.
 
176
향긋한 홍차 냄새가 풍기고, 조르륵조르륵 차 거르는 소리만 조용한 방안에서 유난히 높다가 만다.
 
177
또한 제격이게, 대영의 담배 끝에서는 파르스레한 연기가 세 가드락 두어 가드락 소옴솜 피어오르고.
 
178
자릿한 애수가 곱게곱게 어린 침정의 한동안이었었다.
 
179
마침내, 정갈한 사기 찻종에 노리볼깃하니 진하게 받쳐진 차를 두 잔, 또 뒤미처 생각이 나 찬장으로 가더니 초콜릿을 접시에 담아다 놓고, 그리고는
 
180
“오래 기다리셨지요! 자, 어서……”
 
181
하면서 손에게 권을 한다.
 
182
“……설탕일랑 성미대루 넣으시구……”
 
183
“스미꼬상, 가뜩이나 잠 안 오면 어떡허자구?”
 
184
“일없어요!”
 
185
여자는 소파의 이편 끝으로, 팔고이개에 쿠션을 놓아 등을 기대고, 대영의 옆을 향해 넌지시 앉는다.
 
186
더운 차가 들어가서, 둘이는 다 같이 술기운이 한번 더 올라, 새 채비로 얼굴이 단다.
 
187
“저어 어떤…… 어떤 천하에두 몹쓸 사람이 있었더랍니다!”
 
188
밑도 끝도 없이 여자의 입에서, 한동안 차를 마시고 있던 채, 퍼뜩 이야기가 한 토막 흘러나오던 것이다.
 
189
하다가 또 잠깐 말이 뜬 사이 대영은, 으레 그 (어떤) 이야기가 조만간 나올 줄을 미리 다 알고 있던 것처럼(마침 자리의 기분이 십상 그럼직하기도 했었고) 그래, 손에서 찻잔을 내려놓고 담배를 새로 한 개 피워 물고, 그러고서 몸을 뒤로 편안히 기대고는 마지막, 눈은 앞벽을 올려 바라다보면서 귀로 신경을 모은다.
 
190
그럴 즈음 여자는 웬만큼 저도 차를 물린 후 잠깐, 남자의 그렇듯 주의스러운 포즈를 건너다보다가 인하여 그의 프로필에 시선이 멎는 대로 천천히
 
191
“……마악 여학교를 마친…… 나이래야 갓에 겨우 열여덟 살배기……”
 
192
하면서 이야기를 다시 이어, 비로소 술회는 차분하니 풀려 나오는 것이다
 
193
“……무얼 알았으리! …… 아아무 철두 없구, 세상 물정두 모르구, 단지 호기심허구 감성만이 남달리 예민한, 그러니 아직 입에서 젖비린내두 안 가신 계집아이던 걸…… 그런 계집아일 갖다가…… 생계가 유족한 집안이것다, 달리 사나이 손이라군 없구, 단 딸 형제, 그 중에서두 망낭딸…… 조옴 응석받이며 얼뚱애기던고. 선머슴 사나이와 다를 게 없었구, 그렇게 철두 안 들구 한 계집아일, 그런 계집아일 갖다가 말이죠. 야속두 하지…… 그 몹쓸 사람이 들어서 고만 아편을 멕여 주었더랍니다. 소위 연애란 것두 과한데, 아직 일른데, 아편을 말이죠…… 연애라지만 실상 어디 연애랄 게 있었다구?…… 연연한 애정은커녕, 하다못해 인간 그 자신에게 이렇다구 할 무슨 친험이라두 느낀 적이라군 없구, 한갓 그저 그 사람이 가진 아편, 순전히 그 아편의 색다른 매력에만 함빡 반했던 노릇이지…… 그래두 그걸 제법, 아아니 전혀, 연애거니 여겨 의심치 안했구…… 체에! 태양을 집어삼킬 듯 기개 좋은 그 정열이더라니!……”
 
194
차차로 이렇게, 지나간 회상에 폭신 잠겨들면서, 실꾸리 풀리듯 잔지란히 풀어지는 설화의, 그 고요한 음성과 나직하니 한결같은 억양하며 일변 몽상적으로 방심된 얼굴에 꼼짝 않는 몸 자세하며, 모든 하는 양이 어쩌면 누구의 혼백에 씌어 사자의 넋두리를 푸념하고 앉아 있는, 강신술의 피술자(被術者)랄까, 혹은 신 내린 젊은 무녀(巫女)랄까, 자못 요기스러움이 없지 않았다.
 
195
“그것이 아뭏든, 시방으로부터 여섯 해 전, 햇수루 여섯 해 전……”
 
196
여자는 여기서 잠시 말을 멈추고, 그럴 사이 이건 마치 또 그 강신술의 시술자(施術者)인 양 대영이, 예의 포즈 그대로 앉아 한눈을 파는 채 한마디
 
197
“여섯 해 전…… 여섯 해 전이면……”
 
198
하면서 조용히 퉁긴다.
 
199
“……그때쯤이면, 으음…… 그때쯤이면 그 아편이 별반 그리 드세게 유행할 시절두 아니것다? 한물 지나구 나서, 조수가 쓰이느라구……”
 
200
“그건들 알 턱이 없구, 또오 알았은들 상관두 아녔을 것이구……”
 
201
여자는 가만히 고개를 흔들면서 다음을 다시 계속한다.
 
202
“……명색 연애라구 하는 것의 수단을 통해서 그걸, 그 마약을 멕여 주는 대루 죽을 동 살 동 모르구서 받아 먹었구, 하길 한 달? 아아니, 다직 보름…… 그리구 나니 아무것두 눈에 뵈는 것이 없을 만침 미쳐버렸구…… 필경 하루 아침 모든 것을 죄다 내던지구서 뛰쳐나가 그 사람과 더불어 소위 세간살이란 걸 시작했구, 빈민굴 나가야의 삼조짜리 방에서 부둥 개미조각에 밀가루범벅을 해먹어 가믄서 말이죠. 허나 그래두 즐거웠구…… 천하 깜찍스런 계집아이더라구야! …… 하여튼 그 짓을 계속하기 반년, 반년을 대껴나니 그제는 한다 하는 아편쟁이가 됐구, 그러자 그 사람은 마침내, 대세요 정해진 코스라 글러루 수양을 떠났구…… 의지가지 없은 전 요행 살뜰히 안아주는 부모의 품으루 일단 돌아왔구, 그 두호두 입었구…… 돌아와서 기대리기 이 년 반, 그 이 년 반 동안을 어느 사립대학으루 청강을 다니믄서, 또는 안일한 환경이것다 침착한 가운데 규칙적인 많은 독서를 한 걸루 해서, 병은 드디어 골수에까지 사무쳤구, 결국 한 독립한 아편쟁이랄 수가 있었을 테죠. 다만 서재적이어서, 말하자믄 아편을 안 먹는 아편쟁이라구 할는지, 무어라구 할는지…… 그렇게 아뭏든 이 년 반을 지냈구, 지내구나선 그 사람을 다시 만났구.”
 
203
여자는 한숨을 호오 내쉬면서
 
204
“……만났더니!”
 
205
하고는 잠깐 말이 그쳤다가 훨씬만에 다시……
 
206
“……깜박 그때까지두, 애정으루다가 기대린 것이 아니구서 다만 아편을, 아편적인 것을 기대린 줄은 몰랐다가, 막상 만나구 봤더니! …… 큰 환멸이라구 할까, 그 사람은 벌써 나허구는 아무 상관두, 또오 상관을 가질 결련두 없는, 그래서 나한테는 언뜻 지나치는 노방의 사람처럼 전연 무의미한 존재. 이것이 아편의 독을 말끔 다아 씻어 버리구서 이미 완인이 돼가지구 돌아온 그 사람을 처음 만났을 순간의 제 기모찌더랍니다. 남…… 아무것두 아닌 남, 이거죠. 일껀 날 가져다 아편에 중독을 시켜주구서, 오래두룩 기대리게 하구서, 재갸는 실끔 손을 씻구 돌아서구. 돌아선 그 자태의 보기에 헤멀끔하구두 능청스럽더라구야. 당하기에 허망하더라구야. 그리다가 비로소 그제서야, 본디 무슨 조곰인들 애정으루다가 맺혀진 사이두 아니요, 또한 애정으루다가 지탱을 해온 관계가 아닌 바엔, 애당초에 둘이를 비끄러맨 아편의 매력을 저편에게서 찾을 수 없는 이상, 오히려 지당한 결과임을 깨달았구…… 그러나마 인간만이라두 족히 취할 한 구석이 있었다믄, 변했거나 말았거나 예대루 그를 맞아들였으련만, 아편의 탈을 벗구 나선 정첸 세상 고약한 파락호! …… 오까다라구 하는 짝패와 부동이 돼가지군, 날지지리 볶아두 대구, 필경 꼬여 내다가 감금을 시키구서 협박을, 협박을 안 듣는다구 린치를 하구. 우리 부모두 끕끕수 많이 받았지. 모두가 방탕하느라구 돈을 뺏어내가는 수단이죠. 통속소설이래두 되엄즉한 스토리 고대루……”
 
207
스미꼬는 스스로 말을 그치면서 소스라쳐 한숨을 내쉬더니 어느덧 오랫동안 놓았던 정신이 드는 모양으로, 표정도 자세도 일시에 다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208
그러면서, 그 길에 팔을 뻗쳐 초콜릿을 한 개 집다가
 
209
“네? 분상……”
 
210
하고 부르는 음성도 역시 항용 제 음성이다.
 
211
“응?”
 
212
대영은 그러나 그대로 멀거니 얼뜬 대답을 한다.
 
213
“분상은 단 거 안 좋아하시나 봐?”
 
214
“머어……”
 
215
“네? 분상……”
 
216
“응?”
 
217
“그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218
대영은 도리질만 하고, 여자는 초콜릿의 은지를 벗겨 입으로 올려가다가 말고는, 한참이나 남자를 건너다보더니
 
219
“분상허구 같은 혈통?”
 
220
하면서 날름 과자를 씹는다.
 
221
“뭣이?”
 
222
소리도 엉뚱 크게, 대영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이키고 짯짯이 여자의 얼굴을 주목한다.
 
223
“깜짝이야! …… 그렇게 싫으세요!”
 
224
대영은 듣고 보니 비로소, 내가 어째 고만 것을 가지고 사뭇 그렇게 놀랐더란 말인가 싶어, 담뿍 점직해 못 하겠고, 그래 방금 그 딱딱해진 낯꽃을 눅이느라 애가 쓰였다.
 
225
“분상?”
 
226
“응!”
 
227
“아까 그 말씀, 실례?”
 
228
“괜헌!……”
 
229
“그럼 왜 그렇게, 더럭……”
 
230
“하두 뜻밖이어서……”
 
231
“그렇다믄 몰라두…… 정말 분상 아무렇지두 않지이?”
 
232
“정직하게 말하면……”
 
233
대영은 벌떡 일어나서, 뒷짐을 지고 방안을, 그다지 길지도 못한 거리를 오락가락 거닌다.
 
234
“……섬뻑 치욕을 느낀 것만은 사실인데, 말이지……”
 
235
“그런데?”
 
236
“결국 혈통에서 오는 반사적인 편견이랄까…… 그렇지만, 왜? 그까짓 녀석이 어디 가서 무슨 짓을 했기루니, 내가 무슨?”
 
237
“그러게!”
 
238
“그러니 더구나, 피해자 스미꼬상한테야…… 스미꼬상이 결코 그걸루 해서 또는 그걸루 미루어 가지구서, 일반을 적시를 한다거나 모욕을 하자는 의사는, 그런 편견은 아닐 테니깐…… 그렇잖우?”
 
239
“그랬다간 싸개 맞구서 경성서 쫓겨나게?”
 
240
대영은 싱그레 여자의 앞에 가 멈춰 서서, 빠꼼 치뜨고 웃으며 기다리는 눈을 들여다본다.
 
241
“자아……”
 
242
여자는 제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다독다독, 그리고는 대영이 가리키는 대로 바투 와 앉기를 기다려……
 
243
“차 더 디리까?”
 
244
“아니……”
 
245
“그럼, 이거?……”
 
246
여자는 아까 사가지고 들어온 포도주가, 잊어버린 채 여태 손탁자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냉큼 집어 든다.
 
247
“……깜박 잊었어! …… 잡수시죠?”
 
248
“배만 부르구 슴슴해서!……”
 
249
“한목 많이 잡숫죠! 그리구 나두 좀 먹구요, 네?”
 
250
찻종을 그대로 술잔삼아, 각기 한 보시기씩 부어 가지고, 대영은 오히려 맛보듯 하는데, 스미꼬는 홀짝홀짝 서너 번에 죄다 마셔버린다.
 
251
“여자가 술을 먹어 취해 버릇하면 흘게가 없구 헤풉닌다!”
 
252
“그러니깐 분상 기신 데서만 먹는대두!”
 
253
대영은 여자의
 
254
‘그러니깐 분상……’
 
255
이라고 하는 그 ‘분상’의 한계를 어디만큼 잡아야 할는지 몰라 궁금했다.
 
256
“자아, 그리구 이저언?”
 
257
“응!”
 
258
“아까 하던 이야기 마저 하께요오?”
 
259
대영은 고개를 끄덱거려 준다.
 
260
“죄꼼 남았으니깐요, 네?”
 
261
술이 미처 몸에 돌기도 전인데 벌써 음성과 말씨가 약간 다름은, 먼저의 한번 경험으로 하여(처음 한번 경험이던만큼 도리어 효과적이어서) 술을 먹으면 기분이 으례껏 달뜨는 것인 줄, 제풀 암시에 걸려든 때문일 것이다.
 
262
“아, 그래서…… 한 일년 장간이나 두구 그 단련을 받다가, 요행 참 면하질 안했겠어요?”
 
263
“용히 면하느라구?”
 
264
“어디 가서 사람을 궂히군 진짜 수양살일 갔죠! 한 십 년……”
 
265
“흐응!”
 
266
“아, 그리구 나서 겨우 맘을 좀 놀 만하니깐, 그 다음엔 집에서 절 졸라 쌓는군요?”
 
267
“매양, 시집이나 가라구 하던 게지!”
 
268
“누가 아니래요! …… 지참금이 자그만치 오만 원! …… 본디 삼만 원이 더랬는데, 계집아이 험값으루 이만 원 더 얹어서! ……”
 
269
“쯧! 헐친 않군!”
 
270
“너두나두죠, 머! …… 아, 그런데 정작 당자 지가 들어먹얼 줘예죠?…… 개중엔 오만 원 하나 바라구 나선 사람두 많기야 했지만, 또 더러는 무얼루 보던지 보통 신랑 재목으루 부족할 게 없는 사람두 없잖아 있었어요. 그렇지만 첫짼 근본적으루 지가 결혼 그것에 도무지 뜻이 없구, 그리구 막상 결혼을 한다구 하더래두, 색시 체껏은 아편쟁이구 저편은 선량한 시민인 걸, 그러니 며칠이 못 가서 파탈이 나구래야 말 건 빠안한 이치 아녜요? 뭣이냐, 유도 삼단짜리 우락부락한 색시허구, 저어 체중 십이 관두 못 되는 빼빼마른 새서방허구 콤비처럼…… 밤낮 유도루다가 새서방을 둘러메꼲기나 하믄 어떡해요! 하하하!……”
 
271
대영은 섭쓸려 빙긋이 웃으면서, 여자의 빠알갛게 피어 가지고는 까알깔 웃는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본다.
 
272
보는 동안에 덮어놓고 와락 그 입술을 뺏고 싶은 충동이 슬그머니 일어나, 그것을 가까스로 누르고서 어려운 고패에 고개를 돌려버렸다.
 
273
그러나, 그럴 즈음 낯꽃이 매우 수상했던 모양으로, 고개를 돌리던 순간, 무심히 웃고 있던 여자의 얼굴에서 졸연 웃음이 지워지며, 퍼뜩 눈이 긴장하는 것 같더라니, 정녕 속을 들킨 성불렀고, 그래 외면한 귀때기가 자꾸만 점직해 못했다.
 
274
“피차간 못할 노릇이 아녜요?”
 
275
여자가 앞서 이야기를 다시 계속하던 것인데, 제 발이 저리더라고 대영은 저더러 나무라는 소린 줄 알고서 움칫 놀랄 뻔했고.
 
276
“……애먼 남의 젊은이한테두 차마 못 시킬 노릇…… 또오 저두 번연히 다아 실패할 것을 알믄서 잠자꾸 쫓는다는 것두 어리석은 짓이구…… 더구나 전 두 번째 그런 실팰 한다믄 영 아주 고만 아니겠다구요?…… 아, 이런 깊은 속은 몰라주구서 글쎄들 졸라대는군요! 어머니가 조르구, 언니가 조르구, 아저씨가 조르구, 아버진 머어 꾸우중 꾸중 무섭구, 작년 가을인가는 동대 연구실에 있는 어떤 소장 의학자란 사람허구 미아일 다아 시키려 들겠죠! …… 죽여라구 마구 뻗었죠. 아, 그랬더니 하다하다 만자저서 올 봄엔, 아버지가 정말 역정이 나서가지군, 나가라구 쫓아내겠죠! 이년, 넌 부모한텐 불효한 자식이구 나라엔 불충한 백성이니 용서할 수가 없다구…… 널 기르는 밥과 옷이 내 것인 동시에 나라의 것인데, 어찌 너 같은 불충불효한 년을 둬두구서 멕이구 입혀 길를까보냐구…… 쫓아내길래 쫓겨나왔죠머…… 집에서 밤낮으루 졸리기보담두 차라리 다행했구…… 또 고생두 별반 안했어요. 어머니허구 언니허구 둘이서……”
 
277
여자는 초콜릿을 집으러 가던 손을 대신 술병을 치켜들면서
 
278
“저 이거, 더 먹어요?”
 
279
하고 묻는다.
 
280
“조선 속담에, 늦게 밴 도둑질이 밤새는 줄 모른단 말이 있습닌다!”
 
281
“죄꼼만?…… 목이 말라서 그래요!”
 
282
“나중에 부대낄 일이나 각오하구서……”
 
283
여자는 먼저대로 찻종에다가 한 반이나 되게 그 새빨간 액체를 부어가지고는 빠알간 입술로 쪼옥쪽, 단꿀 빨듯 마신다.
 
284
대영은 고놈 잔이 방해가 된다고 생각을(핑계를) 하고, 또 말았다.
 
285
“참, 그렇게 어머니허구 언니허구……”
 
286
여자는 잔을 물리고 바투 앉으면서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다.
 
287
“……서루가람 둘이서 아파트엘 종종 찾아와선 드뿍드뿍 용돈을 주구 해서 하나두 옹색을 당하거나, 아따 그 어느 때처럼 밀가루범벅을 쑤어 먹구 지내던 안했어요…… 아, 그리구 참, 분상을 그때 첨으루 알았구먼요!”
 
288
“분상이라니? 날?”
 
289
“네에! …… 그런 게 아니라……”
 
290
“그저끼 첨 만나구서?”
 
291
“이웃 방에 마침 조선 학생이 내외 양주가 있었는데, 그이들을 알았죠…… 내외가 사람들이 어떻게 어질구 삭삭한지, 정이 들어서 퍽 가깝게 지냈구, 그리구 그제서야 참, 조선 사람한테 대한 제 편견을 곤쳤군요! …… 그래 그 두 내왼데, 내외가 같이서 일대(日大)엘 다녀요. 그리구 또 둘이 다아 아주 맹렬한 문학 지망자겠죠! 그래서 자연 조선문학에 대한 이야기두 가끔 듣구 지가 또 문학이라믄 쑬쑬히 좋아하는 성미겠다, 호기심이 생겨가지굴랑 이것저것 물을라치믄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구. 그리믄서 잡지며 단행본 같은 것두 장님 단청 구경이나따나 구경을 시켜 주구. 그리구 시방 문단에서 누군 어떻구 누군 또 어떻구 하단 이야기 끝에 분상두 한몫 나왔구, 필경엔 작품을 내놓구서 따듬따듬 번역을 해가믄서 읽어까지 주구…… 그런데 말씀예요, 죄다 잊어버렸는데두 유독 분상 한 분이 끝까지 인상이 남았겠죠!”
 
292
“하필! …… 그 설명을 해줬다는 요새 젊은 문학지망자네가 도저히 날 호평했을 이치는 없구, 아마 욕이 대단했던 모양이지?”
 
293
“알아맞히신 말씀예요! …… 그런데 전 그거보담두, 하하하! 노여 마세요, 네?…… 아, 작품이 여간만 껄렁했어예죠! 하하하!”
 
294
“영명이 사해에 떨치도다가 아니라, 추태가 멀리 동경까지 퍼지니라루군?”
 
295
“껄렁하다구 한 건 지가 악담이구, 이를테믄 소설이라느니보담두 논문이라구 하는 게 졸 뻔했어요!”
 
296
“무어던가? 허긴 죄다 그 모양이니깐 이거구 저거구 할 것두 없지만
 
297
……”
 
298
“저두 이름은 잊었어요…… 그런데 논문처럼 그렇게 빡빡하구 맛은 없어두 어쩐지 맘에 차악 앵겼어요! …… 그래서 분상이 우연히 인상에 남았었구, 인상이 그렇게 남은 덕에 이번 조선으루 올랴믄서두 실상 분상을 우선 연줄삼아서 찾을까 했는데, 아 이웃 방의 그 학생 내외가 지가 떠나기 얼마전에 딴 곳으루 옮아가군, 미처 어딘지 알 수가 있어예죠. 허긴 그이들두 분상허구 즉접 안면이야 없을 테지만서두…… 그래, 급하긴 하구, 그러자 마침 그이, 송죽에 있는 그일 길에서 무뜩 만나서 말말 끝에 걱정을 했더니, 그렇다믄 썩 좋은 사람이 있다믄서, 명함에다가 김종호 씨한테 소갤 해주더구먼요. 그리구 따루 자상하게 편질 띄워 두겠노라믄서……”
 
299
“좌우간 조선이라구 하는 곳하구는 이상한 인연이 있으란 팔자루군? 스미꼬상이……”
 
300
“아마 그런가 봐요! …… 정말 참 그런 무엇이래두 아니구서야, 좋건 궂건 이렇게 연해 인연줄이 맺혀져 나갈 까닭이 있어요?”
 
301
“그런 게 아니라, 스미꼬상?”
 
302
“네?”
 
303
“그런 게 아니라, 아마 스미꼬상네 선조 누가 말이지…… 저어 임진란, 일본 역사룬 문록역…… 문록역 알죠? 풍신수길의 조선정벌……”
 
304
“교과서에서두 배우구, 장혁주 씨 『가등청정』두 읽었어요.”
 
305
“그래…… 그런데 그때 말이지…… 그때 스미꼬상네 선대 할아버지가 누구 한 분, 역시 조선으루 출정을 왔다가…… 와서 싸움을 하다가, 응?…… 잘못 고만, 어떤 원통한 비전투원을 혹시 살상을 한 일이 있나보군 그래? 전시엔 부득이 그런 수가 간혹 있는 법이니깐……”
 
306
“글쎄…… 그런 이야기 못 들은걸? 그런데 건 왜?”
 
307
“정녕 그랬나바! …… 그래서 그 원한이 후손 스미꼬상한테 시방 액이 와 단 거야!”
 
308
“정말?”
 
309
여자는 눈이 동그래, 파고들듯 묻다가, 그제서야 대영이 벌씸 웃는 것을 보고는……
 
310
“……가지뿌렁!”
 
311
그러나, 그러면서도 반신반의, 좀 마음이 섬뜩한지 말긋말긋 남자의 낯꽃을 여살핀다.
 
312
밉지 않게 구는 여자를 데리고 앉아, 생각잖은 일로 우연한 말 끝에 딴청을 하여 짐짓 한번 놀려 주는 것도, 요외의 심심치 않은 흥이었었다.
 
313
“역시 여자란 건, 웬만해서 미신엔 저항력이 약하기루 마련인가 바!”
 
314
“누군 곧일 안 들어요? 깜빡 속은걸! …… 시침을 뚜욱 따시군…… 재료가 또 번연한 역사 사실인데다가……”
 
315
“내 소설을 갖다가 껄렁하다구 욕한 복수여든!”
 
316
“오옳지! 난 또…… 걸루 그럼 쓱삭했나?”
 
317
“쯧! …… 내가 좀 밑졌지만……”
 
318
“제엔장! …… 자아, 그럼 서루 물시하구우. 그리구 인전 그 다음 이야길 해예죠?…… 이야기나마나, 모두 딴 갈래루 나가구, 선후가 뒤바뀌구 해놔서…… 아, 그래 아뭏든지 그렇게 집을 쫓겨나가지굴랑 아파트 살일 하믄서, 봄 여름 가을을 그럭저럭 지냈구. 지내구 나서 다시 겨울루 접어들자, 차차루 그제서부텀은 가만히 생각을 하니깐, 못쓰겠어요…… 뭣이냐, 당분간 고생은 않는대지만, 그렇다구 언제까지구 그 모양으루 지낼 수야 없잖아요? 그리구 한편으룬, 것두 꼽시랑꼽시랑 나이 차 가는 탓인지, 막연하나마 장래란 것이 걱정스런 생각두 더러 들구. 안 맞는 시계가…… 분상 말씀 짝으루 묵은 책력이, 어떡허다가 썩 그런 염량을 다아 채릴 줄은 알았는지! …… 그래서 하여턴, 그 다음부터선, 아무래두 맘을 곤쳐 먹어예지만 싶구, 그러다가 한번은, 그럭허자믄 바닥을 어디 좀 떠보는 게 좋잖을까 하는 궁리가 들겠죠? 그리믄서 그 끝에 문득, 대체 그 조선이란 데가 어떻게 생긴 고장인구? 예라, 기왕이믄 한번! …… 이런 담보가 생기겠죠! …… 그리군 머어 다시 더 생각할 나위두 없이 당장 그 이튿날루 떠나자는 참인데, 아 어머니허구 언니허구서 그 말을 듣군, 고만 질색들을 하는군요! 어머닌 한단 말씀이, 얘야 글쎄 조선엔 시방두 호랭이가 시글시글하다는데, 무슨 수루 게를 가며, 조선이라믄 말만 들어두 머리가 내둘리질 않느냐구, 가뜩이나 울기 잘하시는 이가, 디리 눈물을 짜믄서 어쩔 줄을 몰라하구…… 언닌 또, 조선은 하두우 하두 추워서 겨울엔 귀가 마구 얼어 빠진다는데 어찌자구 그런 델 가려 드느냐구, 말려쌓구……들 그리다가 필경 지가 떠나던 날은, 동경역으루 배웅을 나와선, 그냥 울어싸시믄서 어머니가, 이 에미 얼굴 마주막 잘 보구 가라구, 그리구 참…… 반질, 이걸……”
 
319
여자는 차차루 음성이 차악 갈앉다가 왼손의 반지를 내밀어 보인다.
 
320
백금으로 대를 했고, 대가 가는 푼수하면 알이 너무 굵어 본새는 없어도, 약간 노릿한 돌은 불빛에 찬연히 광채가 서린다.
 
321
대영은 그러나, 진귀한 그 보석보다도 여자의 이쁘게 조그마한 손을 담쑥 쥐어다가 조물조물 만지고 싶어 못한다.
 
322
여자는, 저도 한참이나 반지를 내려다보면서 고요히 회상에 잠겼더니, 훨씬만에 가벼운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다시
 
323
“……그래, 이걸 그렇게 손에다가 끼워 주시믄서, 돈을 나우 좀 마련하쟀던 게 미처 못 됐다구, 이거라두 끼구 갔다가 여엉 아숩거들랑 돈으루 바꿔 쓰라구…… 당신이 시집 오실 제 삼천 원인가 딜여서 해 끼구 오신 건데, 막내딸 절 시집보낼 때 주실 양으루 했더니, 이렇게 슬픈 날에 소용이 될 줄은 몰랐다구…… 언닌 그리자 또, 지가 외투를 얄따란 스코치루다가 입은 걸 보구서, 조선은 그렇게 귀가 빠지두룩 칩다는데 저걸루 어디 배기겠느냐구, 재갸 핼 벗어서 입혀주구…… 그러믄서들 당부가, 부디 맘 잡아가지구 수히 돌아오라구…… 널 그 먼 델 보내놓구 어떻게 날을 지낼 거냐구, 또들 울어쌓구…… 그때 참, 첨으루 비로소 지가 눈물이 났어요! …… 멀리 낯선 이향으루 떠난다는 회포두 있었을 테지만, 어떻게두 그이네들의 애정이 살이 아푸두룩 몸에 스미던지, 고만 감격해서 같이서 울었죠! 허긴 부모 동기간의 저한테 대한 살뜰한 애정이 그때 처음 비롯은 건 아니지만서 두, 그걸 지가 옳게 느껴 보긴 첨이댔어요!……”
 
324
여자는 또 말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더니, 그리고는 음성과 말에 약간 힘을 주어 다시……
 
325
“……그리구 그때! 그때 지가 아주 핍절하게 한가지 생각을 한 게 있는데 말씀예요…… 자아, 어머니가 저대지두 날 사랑하셔…… 언니가 그래…… 남이랄값에 아저씨가 그래…… 또오 아버지두 내가 당신 뜻만 좀 받들어 디리믄 다시 없이 귀여하구 위해 주실 터…… 아 그러니 제 주위엔 극진하구두 풍부한 애정이 골고루 다아 쌔서 있잖아요? 과장이 아니라…… 그런데 또, 집안은 넉넉해…… 문벌두 과히 만만하던 않어…… 좋잖아요?……그리구 마주막, 저 자신을 보더래두, 빈약하나마 조고만치 학식이 들었어…… 나이 스물셋에 한참 젊은데 몸은 건강해…… 얼굴이 잘생기던 못했어두 곰보딱지나 과한 추물은 면했어…… 무던하잖아요? 그렇죠?…… 그러니 말씀예요…… 어디루 대구 보던지 하나두 부족하거나 꿀릴 것이 없는 환경이요 컨디션이니, 아 그러니 다만 한가지 병증, 아편 그것만 선뜻 버리구나믄…… 가뜩이나 시대와 세상허구 양립할 수두 없는, 그래서 진작 현실을 떠난 전설이요 아무짝에두 소용이 닿지 않는 한갓 우상…… 전 그걸 우상이라구 생각해요! 우상이지 별거예요?…… 그러니깐 제발 그 우상만 그 아편만, 내다가 버리는 날인다치믄 말씀예요…… 전 이내 그 좋은 환경 가운데서 기를 펴구 맘대루 질겁게 자알 이 청춘을, 인생을 갖다가 누려갈 수가 있을 게 아니겠다구요? 얼마나 좋아요! …… 그렇잖아요? 네? 분상…… 그게 지가 잘못 생각일까요? 무리예요? 괜헌 욕심?…… 네? 분상! 그게 지가 잘못 생각예요? 억질까요?”
 
326
여자는 알콜 기운에 휘둘리거나, 그래서 좀 해롱거리거나 하는 거동이 하나도 없고, 마지막엔 마침내 열을 띠고서 안타까와하는 양이 정상 곡진한 바가 있었다.
 
327
대영은, 아까 석양때 거리에서 일껏 제 입으로도 그러한 말을 했던 터요, 시방 이 자리에서는 더구나 그것이 당자 자신의 아주 절절한 부르짖음이라는 것을, 동시에 지당한 의욕이라는 것을 동감을 하기는 하면서도, 그러나 한편으론 그렇듯 파닥이는 이 여자에게 뉘엿이 서운한 거리감을 느끼지 않질 못하여, 그래 선뜻 무어라고 대답을 해줄 시름조차 없이 우두커니 등신처럼 앞만 바라다보며 앉았을 뿐이었었다.
 
328
밤은 몰래 깊어가고…….
 
329
여자는 그러자, 죄었던 기운이 일시에 타악 풀어져서는 소스라치게 한숨을
 
330
“그런데 말씀예요!……”
 
331
하는 음성도 다뿍 하염없더니, 이내 그대로 몸을 갖다가(생각도 주저도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실리듯 남자의 팔에 머리를 기대고는, 깍지 낀 손을 어깨에다 걸면서 가붓이 논다.
 
332
“네? 분상……”
 
333
“응!”
 
334
“그런데에 말씀예요!”
 
335
“………”
 
336
“왜 글쎄 사람은…… 사람은 왜, 생각허구 행하는 것허구가 제가끔네?…… 제가끔 두 갈래 세 갈래루 갈라져 가지구는 네?…… 괜시리 괴롭구, 고생을 하구 다아 그리게만 마련이래요?…… 네? 분상!”
 
337
“………”
 
338
“나 그거 해득해 줘예지 해요!”
 
339
“………”
 
340
대영은 벌써 마음이 도로 다 놓였고, 그리고 가득히 시방 솟아오르는 연민한 정으로 해서는, 얼른 다독다독 등을 다독거려 주면서
 
341
‘〈기미와 스꾸와레루! 낭에까와시또데나이! 이마니 스꾸와레루 기미와……〉(너는 구조되겠군! 걱정하지 마! 이제 곧 구조될 거야 너는……)’ 하고 위로를 시켜 주면서, 하고픈 생각이 간절은 하나, 또 그렇게 하고 나면 어쩐지 여자를 다시금 저 멀리다가 느껴야 할 것만 같아, 차마 아까와 그리하지를 못한다.
 
342
“아하……”
 
343
여자는 한참만에야 탄식 소리를 지으면서 몸을 도로 가누고 앉는다.
 
344
“……생각하믄 쓸디있나! 아무렇게나 돼가는 대루, 그럭저럭……”
 
345
혼자 이렇게 뇌사리다가, 급작스레
 
346
“……아이, 시장해! …… 몇 시나 됐어? 대체……”
 
347
하면서 팔걸이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깜짝 놀라
 
348
“아이머니! 세시야아! …… 네? 분상……”
 
349
하고 대영의 팔을 잡아 흔든다.
 
350
“……세시가 다아 됐어요!”
 
351
“그렇게 됐나? 벌써……”
 
352
대영은 기지개를 뻗치려다가 말면서 벌떡 일어선다.
 
353
“분상 어떡허세요? 댁이 예서 머세요?”
 
354
“머나마나…… 스미꼬상이 인전 좀 자야 할 텐데 눈이 저렇게 초랑초랑해서 어떡허나!”
 
355
“전 일없어요! …… 이렇게 늦어선 택시두 없대죠?”
 
356
“없지만, 머어……”
 
357
“댁이 머세요?”
 
358
“한 이십 리 되죠.”
 
359
“저를 어째애! …… 그럼 걸어가서야 하게?”
 
360
“아니……”
 
361
대영은 이 밤에 청량리 저쪽 회기정까지 터벅터벅 걸어서 나가잘(가정에의) 정성은 본디 없고, 늦으면 늘 하는 버릇대로 어디 여관이나 친구의 하숙을 찾아갈 생각이었었다.
 
362
하기야 오늘 같은 날은 안해가 해산을 한 터이고 하니 여느때보다는 좀 다르다 하겠지만, 그러나 그것 역시 아침나절에 고뿔쯤 앓고 누웠는 것을 보고 나온 푼수밖엔 더 마음 걸리는 것이 없었다.
 
363
“아니가 머예요!……”
 
364
여자는 성화에 얼굴을 찡그리고 마주 일어서면서……
 
365
“……차라리 예서 그럼 지무세요! …… 전 이 쏘파에서 자구……”
 
366
“걸 뭘, 옹색스럽게!……”
 
367
“아이 참, 나 좀 봐! …… 댁에서 또 기대리시지? 부인께서…… 댁에 부인 기시죠?”
 
368
“명색이……”
 
369
“거 보죠! …… 그러니깐 가서예지! …… 그렇지만 또 어떻게 가시구?…… 댁엔 부인 혼자 기세요?”
 
370
“요새 장모두 와서 있구, 뭣이냐……”
 
371
대영은 그 끝에, 안해가 오늘 해산을 했단 말을 하려던 것이나, 또 한바탕 걱정이 대단할 것 같아 짐짓 고만두고서……
 
372
“……그리구 난, 첨부터 버릇을 그렇게 딜여 놔서, 한 며칠씩 안 들어가구 해두 서루 이상이니깐…… 기대리지두 않는걸, 허허! …… 그러니깐 글랑은 조곰두 염려 할라 마슈!”
 
373
“정말이세요?”
 
374
“거지뿌렁할 택이 있나!”
 
375
“부부간에 그렇기두 한가!”
 
376
“우린 예외야…… 내 안해란 위인이 아주 신경이 유들유들해서…… 그런데다가, 난 또 가정이란 걸 세탁소까지 겸한 여관으루 여기니! …… 객담이지만, 사실 일 년 가야 둘이서 다투는 법이라군 별반 없군요! 허허!”
 
377
“것두우! …… 난두 좀 부인처럼 그렇게 유유했으믄!”
 
378
“지나 사람의 만만디처럼!”
 
379
“그리게 말씀예요! 옆에서 벼락이 떨어져두 꿈쩍두 않구……”
 
380
“잘못하다가 대포 탄환 줏으러 가게?”
 
381
“하하하! …… 참, 정말 그럴까?”
 
382
“상증이겠지!”
 
383
“그런데 참, 댁엔 정말 염려 없으시겠다요?”
 
384
“응!”
 
385
“그럼, 예서 지무세요?”
 
386
“그럴 건 또 없어!”
 
387
“왜? 예절?”
 
388
“글쎄…… 결국 그런 비슷한 거겠지!”
 
389
“걱정 마세요! …… 그리구 아무래두 묵은 책력이시믄서, 하하하!”
 
390
“옳아! 묵은 책력두 쓰이는 데가 있는 거루군!”
 
391
여자는 침대 밑으로 밀쳐 둔 큰 트렁크를 열고 털 푹신푹신한 담요를 꺼내서 소파에다가 안아다 놓는다.
 
392
“난, 예서 이거믄 되구우…… 또오 분상은 침대루 가시구…… 이불은 새루 사서 어제 하룻저녁 덮었어두 그대루 참구 견디세요, 네?”
 
393
“그럴 게 아니라, 이왕 그러면, 자아……”
 
394
대영은 여자를 침대로 데리고 가서 어깨를 눌러 따악 걸터앉혀 놓는다.
 
395
“……스미꼬상일랑 예서 제대루 편안히 자구……”
 
396
“쥔이?”
 
397
“날라컨 절러루 가서, 좀 비끼구 싶으면 비끼구……”
 
398
“손님이?”
 
399
“쥔이구 손님이란 예절루 보면 그렇다지만, 사내꼭지 된 도리루야 어디 그렇소? 여잘 고생시킨다는 것두 일이 아니구 또오 여자의 빈 침대엘 침노한다는 것두 멀쩡한 짓이구, 응?”
 
400
“선량두 하셔! 샌님매니네!”
 
401
“잠이 또 무슨 그대지 올 건 있나! 이야기나 조꼼 더 하다가, 쯧! 졸립거들랑 잠깐 눈을 붙이는 시늉 하는 거구, 오래잖아 인제 밝을 텐데……”
 
402
“참! 내일은? 내일은 어떡허구? 전 인전 영 혼자선, 혼자가 무서워서, 영 혼자선 못견딜 것만 같은데!”
 
403
“푸욱신 자구, 오후에 절러루 오시구려?”
 
404
“오늘처럼 함끠 다니구, 함끠 있구, 그래 주실래요!”
 
405
“그야!”
 
406
“오라잇! 고맙습니다, 분상!……”
 
407
여자는 고개를 까땍 좋아라고 연해 방싯방싯 웃다가,
 
408
“……또오, 모렌?”
 
409
“모레두……”
 
410
“글핀?”
 
411
“글피두?”
 
412
“또 그 댐은?”
 
413
“또 그렇구!”
 
414
“아, 인전 맘놨다! …… 정말이죠오?”
 
415
“물론!”
 
416
“오라잇! …… 그럼 내, 분상 시키시는 대루 하께, 네?…… 자아, 절러루 가서 잠깐 돌아서세요.”
 
417
“이건 좀 벌역인데!”
 
418
대영은 시키는 대로 창 앞으로 걸어가서 그 길에 커튼을 젖히고 바깥을 내다본다.
 
419
희미해도, 눈은 아까 스미꼬가 하던 말따나 잘도 오고.
 
420
서서 문득 생각을 하니, 이건 어디서 이십 고 또래의 어린애도 아니요 먹을 나이 다 먹은 터에, 이게 대체 무슨 치기며 무슨 청승인지, 여태도 이대도록 철이 안 들었던고, 사람이 이대도록 의젓하지가 못하던고 싶으면서 자꾸만 가소롭고, 저 자신이 물끄러미 치어다보여 못하겠었다.
 
421
여자는, 들이비치는 침대의 휘장을 아물리고는 자리옷을 갈아 입은 후 파자마를 가운 자락으로 여미면서, 도로 나와 대롱대롱 변두리에 걸터앉는다.
 
422
“인전 다아 됐어요.”
 
423
“응.”
 
424
“일러루 오세요!”
 
425
“응.”
 
426
“분상?”
 
427
“응?”
 
428
“아, 그렇게 샌님으루 선량하신 이가 말씀예요?”
 
429
“그래서?”
 
430
“어째 가정엔, 그러니깐 부인한테…… 부인한테 그대지 냉랭하세요?”
 
431
“냉랭하다기보담두 등한이지!”
 
432
“그럼, 등한이라구 하구……”
 
433
“만만하니깐…… 또오, 경황이 없구……”
 
434
“그건 선량이 아닌데?”
 
435
“스미꼬상?”
 
436
“네?”
 
437
“내가 언제까지구 스미꼬상한테 그렇게 소위 선량하겠거니 해선 파야!”
 
438
“아이, 어쩌나아! …… 그럼, 앙 하구 잡아 잡수시나?”
 
439
“그건 그때 가바야 알지!”
 
440
“일러루 오세요! 돌아서서 그리지 마시구……”
 
441
대영은 비로소 몸을 돌이키고 천천히 걸어오면서, 옷 맵시 달라진 여자가, 새삼스럽게 더 여자다와 보여 눈이 훨씬 흥그러웠다.
 
442
“또 이야기 들으세요, 네?”
 
443
“한꺼번에 죄다 해버리군 바닥이 나면 이 담은 어떡허나?”
 
444
“그땐 또 그때구……”
 
445
대영은 소파로 가서 비스듬히 앉고, 그걸 보더니 여자는 저도 쪼르르 내려와 나란히 같이 앉는다.
 
446
“멀구, 저만 높이 앉었으니깐 승거워!”
 
447
“좀 안 잘려우?”
 
448
“잠잘 시간을 안 자구서 살믄 생명의 확대가 아녜요?…… 이, 모처럼 좋은 밤을!……”
 
449
말은 이렇게 가끔가다가 도발적인 대목이 있는데, 그럴 때마다 얼굴은 보아야 지극히 심상하고…… 대영은 혹시 여자가 저보다도 한등 더 감정이 세련·침착된 때문이 아닌가도 싶었다.
【원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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