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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가 언제 창간되었다가 언제 폐간되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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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의 동인인 霽月(제월)(염상섭)이며 樹州(수주)(변영로)며 황석우 등 은 《폐허》가 창간되기 전에도 한 개 문학청년으로 《창조》에 투고 등을 하여 그 이름은 기억하는 바였지만 《백조》의 동인들은 모두 갓 중학 출신의 소년들로서 그다지 관심치 않는 동안에 창간되었다가 폐간되었다. 그 《백조》의 동인으로 나빈(도향), 현진건(빙허), 홍사용(노작) 등이 《개벽》이며 더 뒤에 《조선문단》 등을 무대삼아 成家(성가)를 하였기에 말이지 《백조》가 간행되는 당년에는 그다지 주목을 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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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집에 갈지라도 기생에게 ‘금향 씨’‘명화 씨’하여 ‘씨’의 존호로 부르고 기생에게 창가를 가르치며 전연 난봉 학생 같은 행세를 하며 다니던 《백조》 동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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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향은 그의 자랑하는 美聲(미성)으로 ‘김산월’인가 하는 기생에게 창가 춘원 작가 金永煥(김영환) 작곡 ‘백마강’을 가르쳐서 그 창가가 한때 童妓(동기) 새에 유행한 일까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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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 ‘조선 신문학 건설’의 주춧돌을 놓으라고 애쓰는 젊은이들 에게 한결같이 외롭고 쓰린 일은 우리의 이 사업에 대한 일반 사회의 몰이해 및 무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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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전인인 춘원(이광수)의 밟은 문학 발자국을 옳다 보지 않았다. 춘원은 문학을 일종의 사회 개혁의 무기로 썼다. 이상 건설의 선전기관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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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태도 내지 주의를 우리는 옳다 보지 않은 것이다(그런 관계로 춘원이 《창조》 동인으로 있는 2년나마 《창조》에서는 춘원에게 소설을 부탁하지 않 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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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선징악을 목적으로 한 소설을 용납할 관대성을 못 가진 것과 같은 의미로 사회개혁을 목표로 한 소설도 용납할 수가 없었다. 문학은 오직 문학을 위한 문학이 존재할 뿐이지, 다른 목적을 가진 것은 문학으로 인정하지 못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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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리얼이라는 것이 소설 구성의 최대 요소로 여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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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에게 아첨하기 위하여 흥미 본위의 소설을 쓰는 것은 문학자로서 부끄럽게 여길 일이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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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지라, 우리가 그때 산출한 소설이라는 것은 대중적 흥미는 아주 무시한 생경하고 까다롭고 싱거운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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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생경한 ‘이야기’를 소위 ‘문학’이라 하여 대중에게 ‘맛있게 먹기’를 강요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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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후 반항기분과 신흥기분으로 일부의 젊은이들은 이 생경한 문학의 맛 는 체하고 억지로 받아 먹었지만, 일반 대중은 우리의 노력의 결정인 신문학을 아주 무시하여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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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학이 없는 이 땅에 새 문학을 건설해 보겠다고 나선 우리들에게 일반 사회의 이 냉대는 과연 적적하고 가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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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의 폐간도 이 냉대에 정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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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 (무어니 무어니 하여도) 대중의 열렬한 지지와 후원만 있으면 폐간 안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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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창조》 폐간되고, 《폐허》 폐간되고, 《백조》도 없어지고, 조선 사 회에는 문학운동이 한때 冬眠(동면)상태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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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냉대하는 사회에 무슨 문학이랴― 이런 심리로 모두 폐간하여 버린 것이다. 그리고 제각기 제멋대로 놀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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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동인들은 오입장이로 돌아서고 《폐허》의 동인들은 방랑과 표랑으 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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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도 쓴 일이 있거니와 ‘주식회사 창조사’의 불입한 불입금을 ‘안금 향’이라는 기생에게 통 부어 넣고, 그 때문에 김환은 면목이 없어 말을 더듬는 떼, 떼, 떼 하는 눌변으로써 연해 시골(진남포였다) 자기 집 논을 팔아서 변상하겠노라고 쫓아다니며 변명하였지만, 나도 그때 바람이 나서 몇 천원의 돈을 김환에게 먹히운 것쯤은 생각도 안하던 때라 아주 개의치 않고 나 놀대로 놀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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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서는 그때 漢城圖書株式會社(한성도서주식회사)에 「위인 링컨전」이라 「위인 와싱톤전」이라 위인 누구 누구전을 연속적으로 팔아서 술값 수입이 좋던 시절이라, 매일 康明花(당명화)라는 기생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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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봄 전영택은 평양에, 東園(동원) 이일은 서울에 각각 신혼한 애처의 보금자리에 묻혀 있었다. 천원 오천석은 아직 총각으로 몸을 아버지(목사)의 품에 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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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주요한은 상해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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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상섭은 《폐허》 폐간 전후하여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에 교원으로 두석달 가 있다가, 다시 제 집으로 돌아와서 숨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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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모두 붓을 내어던지고 제멋대로 놀아나서 조선문학은 탄생 2년 뒤에 동면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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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의 언론기관으로 민간과 총독부 기관지를 합한 네 개의 신문과 《개벽》 잡지뿐이었는데, 신문은 문예를 다루지 않고 《개벽》 역시 초창기로서 천도교의 인내천만을 주장하는 얘기 잡지로서, 아직 문예와의 인연이 맺어지지 않은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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