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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단 침체의 기간을 나는 평양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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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상해 망명에서 돌아온 춘원 이광수와 주요한은 얼마 뒤에 동아일보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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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이 다시 글(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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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주재라는 명색의 춘해의 《조선문단》에 단편이 몇 편 있었지만, 춘원 자신도 창작 방면에 자신이 없었던 듯 《영대》가 폐간되기까지 그 《영대》에 자서전 「인생의 향기」를 연재하다가 중단한 뿐으로 창작방면에서는 손을 떼었다가 동아일보와 특수관계를 맺자 동아일보에 대중소설을 쓰기 시작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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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춘원의 재활동은 신생 조선문학 건전한 발육에 지대한 장해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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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우리는 소설의 기초, 소설의 근간을 ‘리얼’에 두고 아직껏 「春香傳」(춘향전)「沈淸傳」(심청전) 혹은 「九雲夢」(구운몽)「玉樓夢」(옥루몽) 등이나 읽던 이 대중에게 생경하고 건조무미한 ‘리얼’을 맛있게 먹으라고 강요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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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구시대의 마지막 잔물이요, 신시대에 한 풀 들여민 이가 국초 이인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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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초의 뒤를 이어 신문화의 봉화를 든 이가 춘원 이광수였다. 그러나 구시대에서 신시대에 들어서는 춘원에게는 아직 낡은 옷이 너무도 여러 벌 입히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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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소설에 젖은 이 땅 대중에게 ‘리얼’만을 가지고 이것을 맛나게 먹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혹은 무리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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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앞서는 정열에 앞뒤를 가리지 않고 이 생경한 ‘리얼’문학을 대중에게 이거야말로 문학이라고 제공하고 있던 것이다. 대중은 짐작컨대 맛 은 모르고 이 맛없는 문학을 맛있게 받는 것이 이 현대인의 피할 수 없는 의무인가 하여, 맛없는 가운데서라도 맛을 발견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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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세월이 얼마를 계속하노라면 대중도 종내는 리얼의 ‘맛’과 ‘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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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이해하는 시절에 이르리라는 장구한 생각으로, 우리는 그냥 우리의 리얼의 길만 고집하고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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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때에 춘원이 재활약을 시작하여 리얼에 소화불량된 이 대중에게 다시 통속, 흥미중심의 소설을 제공하는 것은 우리 문학발달에 큰 지장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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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장, 이 지장에도 불구하고 온 문단은 춘원과 別立(별립)하여 신문학 건설로 정로만 고루 밟았다. 그러나 발표기관이 없는지라. 움돋는 신문학의 싹은 자라지를 못하고 일견 사멸한 듯한 형태에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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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가 조선 언론계에 군림하고 출판계에 군림하는 자리를 반석처럼 확보하는 반면에, 문학 발표기관은 없는 세월이 한동안 계속되어 문학은 참담한 형태로 떨어지고, 문단에서 고립된 이광수는 동아일보를 배경으로 온 대중에게 지지받으면 커다랗게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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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춘원이 재활동하는 처음 무렵에는 자기는 창작자는 못 된다는 스스로 삼가는 마음으로 「許生傅」(허생부) 등의 講談(강담)으로 카무플라주하는 풍이 보이었지만, 대중의 지지가 자기에게 있다고 믿은 뒤부터는 소설이라는 칭호는 붙일 수 없는 설화를 역사소설이란 명칭으로 연해 동아일보에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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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오직 춘원만을 허물할 것은 아니다. 동아일보의 사시가 그러하였고, 사장 고 宋鎭禹(송진우)의 명령이 그러하였다. 송진우는 자기가 신문소설(동아일보에 실리는)을 읽는 배가 아니요, 그의 안해(본시 평양 기생)가 신문소설의 고문이라, 안해가 읽어서 재미있다는 소설의 작가를 고르자니 자연 그렇게 되는 것이요, 게다가 ‘신문 잘 팔리도록’이라는 조건이 붙고 보니 부득이한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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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적으로 말하자면, 구소설에서 현대문학으로 올라가는 도정에는 그러한 계단은 없지 못할 층계이기는 하다. 게다가 신문지상에 소설을 이용하여 이 우리 민족에게 위정 당국이 감추던 우리의 역사를 알리고 민족사상을 주입한 점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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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신흥 문학도들은 춘원을 문학도의 반역자라 하여 문단에서는 아주 제외하고, 춘원은 춘원대로, 문단은 문단대로 각각 딴 길을 걷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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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은 또는 요한은 나더러도 동아일보에 소설을 쓰라고 몇 번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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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문학의 길에 대하여 청교도 같은 주장을 가지고 있던 당년의 나는 동아일보가 고답적 소설을 용인하지 않는 한 , 나는 거기 붓을 잡을 수 없노라고 내내 사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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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의미의 신문학에 주춧돌을 놓았노라고 스스로 믿고 있는 나로서는 차마 문학의 진정한 발달에 저해되는 일은 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래 다시 쓸 기회가 있겠거니와, 당년에 그렇듯 프라우드하던 내가 돌변하여 역사소설로, 史譚(사담)으로 막 붓을 놀리어서 적지 않은 사람을 뒤따르게 하여 발전 노정에 있던 신문학을 타락케 한 것은 나로서는 나로서의 이론이 따로 있다 할지라도, 또한 스스로 후회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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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나는 평양서 놀아나고 있는 동안에, 그때(안서 김억도 평양에 와 있었다)의 문단은 사멸된 듯 고요하고 춘원이 홀로 대중소설에 붓을 놀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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