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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분(花粉) ◈
◇ 1 ◇
해설   목차 (총 : 9권)     처음◀ 1권 다음
1939년
이효석
 

1. 1

 
2
오월을 잡아들면 온통 녹음 속에 싸여 집안은 푸른 동산으로 변한다. 삼십 평에 남는 뜰 안에 나무와 화초가 무르녹을 뿐 아니라 사면 벽을 들러싼 담장으로 해서 붉은 벽돌 굴뚝만을 남겨 놓고 집 전체가 새파란 치장으로 나타난다 모습부터가 . 보통 문화주택과는 달라 남쪽을 향해 엇비슷하게 선 방향이며 현관 앞으로 비슴듬히 뻗친 차양이며 그 차양을 고이고 있는 푸른 기둥이며---모든 자태가 거리에서는 볼 수 없는 마치 피서지 산비탈에 외따로 서 있는 사치한 산장의 모양이다. 현관 앞에 선 사시나무와 자작나무도 깊은 산속의 것이라면 뜰을 십자로 갈라 놓은 하아얀 지름길도 바로 가 산장의 것이다. 생명력의 표징인 듯도 한 담장이는 창 기슭을 더듬어 오르고 현관을 둘러싸고 발그스름한 햇순이 집안까지를 엿보게 되는---온전한 집이라기보다는 풀 속에 풀로 결어 놓은 한 채의 초막이라는 감이 있다.
 
3
원체 집들이 듬성한 주택지대인지라 초목 속에 싸인 그 푸른 집은 이웃과는 동떨어지게 조용하고 한적하게 보인다. 한편으로 도회의 거리를 멀리 바라볼 뿐 뒤와 옆으로 모란봉의 가까운 자태가 솟아 울창한 산기슭에 달이나 비낄 때에는 그곳이 도회의 한 귀통이가 아니라 짜장 산속의 한 모퉁이인듯한 느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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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사람들은 그 조용한 한 채를 다만‘푸른 집’이라고 생각할 뿐 뜰 안에 어른거리는 사람의 그림자를 보는 때조차 드물다. 수풀과 나무와 화초와 뜰 안이 그렇게 어지러운 것도 하기는 자연의 운치를 사랑하려는 주인의 마음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실인즉 그것을 멀끔하게 거두고 정리할만한 사람이 집안에 없는 까닭이었다. 애잔한 여자들의 손만으로는 삼십 평의 뜰을 다스릴 수는 없었다. 세란은 그래도 한집의 주인답게 집안을 구석구석 돌볼 때가 있기는 하나 꽃 한 포기 옳게 옮겨 심지 못하는 주제며, 동생 미란을 불러내오나 가제 여학교를 마치고 나온 귀여운 응석둥이는 풀을 뽑기보다는 언니와 나란히 서서 자작나무 아래로 거닐기를 즐겨한다. 부엌일을 맡아보는 나 어린 옥녀까지를 동원시킨다고해도 세 사람의 여자만의 식구로는 근 백 평의 집을 건사하기에 힘이 부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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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만의 나라에 남자라고는 남편 현마와 그의 단주가 그림자를 나타낼 뿐이나 현마는 남편이라고는 해도 큰댁이 시내에 있는 까닭에 그 편이 주장이 되고 하루건너만큼씩이나 나오게 되는 것이 요새 와서는 단주와 함께 영화회사를 시작하면서부터 분주한 판에 그것도 뜨는 날이 많았다. 세란이 애초에 현마를 졸라 집을 장만할 때에 큰댁과 멀리 떨어진 숨은 곳에 자리를 잡자는 생각으로 그 집을 손에 넣은 것이었으나 요새 와서는 한적한 판에 차라리 시내에다 조촐한 몇 간 집을 샀었더면 생각하게 되었다. 남편을 무시로 독차지하고 있을 수 없는 외로운 집에서 두 식구를 데리고 가장노릇을 하려니 아쉽고 허전한 때가 많다. 풀은 우거질 대로 우거지고 현관 기둥이며 창 기슭이며 나뭇가지에는 거미가 겹겹으로 그물을 드리워서 마치 폐가인양 부지런히 줄을 쓸어버려도 왕거미는 씨가지지 않는다. 담장이 속 돌벽 위로는 다람쥐가 밤낮으로 농간을 부리며 오르내리는 눈치다. 불과 백평의 세상 안에서도 여왕노릇을 하기가 얼마나 힘든가를 생각하며 뜰을 거니는 세란은 모르는 결에 자꾸 얼굴에 와 걸리는 거미줄을 주체스럽게 쥐어 뜯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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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나리가 지더니 찔레꽃 봉오리가 연지같이 진하게 맺혔고 라일락이 만발했다. 몇 포기 안되건만 덤불을 이루어서 송이 송이 붕그런 자색 꽃방치가 풍준한 향기를 휘날리고 있다. 라일락 향기는 유난스럽게 진하고 세어서 한포기 덤불의 향기가 집 구석구석에 배어 뒤꼍에서나 방안에서까지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흘러오듯 코 끝에 찰락거린다. 따뜻한 햇볕같이 땅 구석구석에 젖어드는 봄 향기--- 그것이 라일락 향기이다.
 
7
덤불 옆에 서서 파줄기같이 밋밋하게 살찐 찔레순 껍질을 벗기는 미란의 자태를 나뭇가지 사이로 바라보면서 세란은 느린 걸음으로 지름길을 거닌다. 철없는 아이로만 보고 있던 미란의 육체의 변화에 요새 차차 놀라게 되었던 것이다. 여학교를 마친 것이 마치 아이의 세상을 졸업해 버린 셈인 듯이 봄을 잡아들면서부터 애잔하던 팔다리가 볼 동안에 늘어나고 어깻죽지와 허리가 활짝 퍼지면서 어른의 체격을 갖추어 왔다. 큰 발견이나 한 듯 세란은 동생의 급작스런 발육에 놀라며 동생이라는 느낌보다도 이제는 한 사람의 동무를 대하는 듯한 느낌이 솟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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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과 아이의 구별이 없어지고 어른과 어른의 대등한 대립이 시작된듯한 ---두 사람의 세상의 문이 한데 합쳐서 무엇이든지 숨김없이 터놓고 말할 수 있는 듯한 그런 급격한 변화를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치마아래를 뻗친 질레순같이 밋밋한 동생의 다리를 탐스러운 것으로 바라보면서 꽃덤불 쪽으로 가까이 갈 때 미란은 흘끗 세란을 바라보고 괴덕스럽게 꽃방치를 잡아 흔드는--- 그 희멀건 얼굴이 꽃다발같이 향기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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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냄새 같을까. 언니."
 
10
"백합 냄새 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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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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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에 맞지 않는 대답을 우습게 여기면서 형의 얼굴을 쏘아붙인다.
 
13
"네 얼굴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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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덕만 부리네. 누가 얼굴 말인가, 라일락 말이지."
 
15
가까이 온 형이 얼굴을 꽃송이를 휘어 가볍게 갈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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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냄새 같잖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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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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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 냄새두 같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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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두 잘은 맡어."
 
20
"사향 냄새두 나구."
 
21
"수다스럽다.……"
 
22
형은 꽃봉오리 하나를 뜯어서 코 끝에 대면서.
 
23
"바로 말하면 라일락 냄새는 몸 냄새라나. 잘 익은 살 냄새라나. 가진비밀을 다 가진 몸 냄새.……알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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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수다스럽지 누가 수다스러우."
 
25
찔레순을 꺾으면 푸른 진이 빠지지 돋아난다. 그 진을 손가락 끝에 묻혀서 풀장난을 하는 미란의 팔을 세란은 문득 휘어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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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깝다. 이 고운 몸을 날도적한테 뺏길 생각을 하면."
 
27
"망령이 났나봐."
 
28
"무르녹은 봉오리가 하룻밤 비에 활짝 피어 버린다는 게 슬픈 일이란다."
 
29
"아저씨가 며칠 안 오더니 실성해진 모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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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단주가 날도적이 될 테지.……선머슴 호박이 떨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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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주와 누가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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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안단다. 멀술하게 빠진 위인이 여간내기가 아니거든. 회사에서 아저씨 눈에 반짝 들어서 집에까지 붙이게 된 모양인데 위인이 아저씨보다 한길 위야. 됩데 코 떼우지 않나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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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잖은 개 부뚜막에 오른단다.---벌써 올랐는지두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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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요."
 
35
팔을 징긋이 꼬집하워 미란은 펄쩍 뛰면서 꼬집히운 자리를 매만지면서 찔레덤불로 옮겨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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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잖게 언니 행세 좀 해요. 괴덕만 부리지 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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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행세보다두 동무 행세를 해야겠다. 말같이 자란걸 꾸질 수나 있나. 사람이 자라면 누구나 동무, 이젠 동무같이 얘기하구 싸우구 하게 되잖나보지 어서 목욕하구. …… 몸단장이나 하려무나. 단주가 올 날이야. 성큼성큼 뛰어들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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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기다리기가 천추 같지.……내 찔레나 꺾어 줄게 잠자쿠 서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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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장미 아래에 웅크리고 앉아서 포기 속을 들추기 시작한다. 풀 냄새와 흙냄새가 후끈 흘러오면서 미란은 진귀한 것을 찾는 기쁨에 눈망울이 별같이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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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가시 조심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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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까짓 가시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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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리워서 법석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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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리우신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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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담을 하고 풀 속에 팔을 넘큼 넣던 미란은 금시에 기급을 할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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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 머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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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 나동그라졌다. 손을 번개같이 입에 대고 토끼같이 움츠린 모양을 보고 세란은 싱글싱글 웃음을 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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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 봐. 누가 아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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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란은 황겁지겁 일어나서 형의 곁으로 몸을 쏠린다. 부르르 떨리는 것을 형은 괴이히 여기며,
 
49
"야단두. 범에게 쫓긴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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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이야."
 
51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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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란도 주춤하면서 몸에 소름이 쪽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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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를 꺾으려는데 굼틀하고 손을 스치겠나요."
 
54
세란은 몸을 으쓱하면서 미란의 팔을 붙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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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것 봐요. 저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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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그머니!"
 
57
찔레포기 저편으로 늠실 기어가는 뱀을 보고는 두 사람은 바싹 얼싸안으면서 뒤로 물러간다. 두어 자 길이는 되는 늘메기었다. 푸른 바탕에 붉은 점을 아롱거리면서 풀 속을 해서 지름길을 타고 판장 밑으로 사라지는 것이 놀라는 꼴들을 비웃는 듯 유유하고 능글진 것이었다. 아롱거리는 모양이 눈 속에 배어들 지경으로 선명한 인상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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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기두 해라."
 
59
"십년감수는 했어."
 
60
미란은 화가 나는 듯 돌멩이를 집어 올려 판장 밑으로 던졌으나 뱀의 종적은 씻은 듯이 사라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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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순 아예 꺾어 먹을게 아니구나."
 
62
세란은 한 번 더 몸을 으쓱 떨면서 미란의 손을 끌고 지름길을 걷기 시작했다.
 
63
"괴덕부리는 바람에 이 변이지."
 
64
"집안에 뱀까지 꼬이니 맘놓고 산본들 하겠니."
 
65
"방에까지 기어들지 않을까. 위험해라."
 
66
세란은 아직도 떨리는 동생의 팔을 쥐다가 문득 얼굴을 바라보고,
 
67
"안색이 푸르다. 톡톡히 놀란 모양이구나."
 
68
걱정되는 마음에 부리나케 데리고 들어가서는 옥녀에게 목욕물을 가늠 보여 목욕실에 먼저 들여보냈다.
 
69
부엌 옆으로 거의 두 평 가량이나 차지하고 창으로는 이웃집 붉은 지붕과 먼 산을 바라볼 수 있는 목욕실이 자매에게는 집안에서도 즐거운곳의 하나였다. 기쁠 때에는 물론이어니와 슬픈 때에나 노여운 때에도 그 속에 뛰어 들어 시간을 보내노라면 마음이 풀려 버리는 그 맛을 그들같이 즐겨하는 사람도 드물 듯하다. 죽을 것이 옥녀여서 목욕물을 끓이는 것이 부엌이 중에 서도 가장 큰 시중이었다. 이틀도리로 데우는 것이나 세란들의 요구에 따라 서는 아닌 때 금시에라도 물을 대고 불을 지퍼야 하고 바깥주인 현마가 올 때에는 부랴부랴 또 한바탕 난리가 난다. 불이나 안들일 때에는 아궁 앞에 웅크리고 앉아서 서리우는 연기로 눈물을 흘려가며 그런 고생은 없으나 주인들이 하고 난 끝의 목욕물이 차례올 것을 생각하면 불평도 없어지고 세란들의 목욕하는 자태를 창으로 엿보는 것도 즐거운 것의 하나였다.
 
70
지금도 옥녀는 한가한 틈을 타서 잠깐 부엌일을 멈추고 철벅거리는 미란의 자태를 창밖에 서서 물끄러미 들여다보면서 그 고운 살결을 탐내고 있는 것이다. 보얗게 서리운 안개 속에 움직이는 처녀의 자태는 배춧단 같이 멀쑥하면서도 물고기같이 퍼들퍼들하다. 봉곳한 팔이며 앵도알 같은 젖꼭지가 그대로 보기는 아까운, 뛰어들어가서 만져라도 보고 싶은 것이다. 자기가 만약 사내라면 그 흰 다리를 독수리같이 물어뜯고야 말 것. 망간 북새들을 친 찔레나무 아래 뱀이 마음 있던 짐승이라면 그 고운 팔다리를 그대로 두지는 않았을 것을 생각하면서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귀중한 보물같이 싫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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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란이 나간 후에 뒤를 이어 세란의 몸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다. 같은 모습이기는 하나 팽팽한 처녀의 몸과는 달라 함박꽃같이 활짝 피어난 허벅진 한 송이다. 목욕실 안이 꽉 차며 금시에 서리었던 김이 젖어드는 듯도 하다 무슨 복을 가지면 . 사람이 저렇게도 곱게 태어날 수 있을까---황홀한 정신으로 확실히 꿈속에 잠겨 있을 때에 세란의 목소리가 창밖으로 새어 나왔다.
 
72
"아니 이게 무슨 물이야. 물감을 풀었니."
 
73
옥녀는 냉큼 일어서서 창께로 가까이 갔다. 손을 대기 전에 창은 안에서 열렸다.
 
74
"목욕물이 아니라 온통 오미자 화채니 어떻게 된 노릇이야. 좀 들어와봐요."
 
75
영문을 몰라 옥녀는 사이문을 열고 목욕실에 뛰어올랐다. 흰 대리석 목욕통 안의 물이 짜장 오미자 화채인양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있다. 자옥하게 서리었던 물김이 말끔하게 거둔 후이라 흰 도가니 안에 고인 물이 유리잔 안의 술과도 같이 깨끗하고 선명한 빛깔을 띠이고 있지 않은가.
 
76
"수돗물이 망령을 피웠나요."
 
77
옥녀는 사실 곡절을 몰라 주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다.
 
78
"대체 무슨 조화야. 수돗물두 성하구 물감두 안 풀었다면."
 
79
"지금 망간 작은아씨가 다녀 나갔을 뿐인데요."
 
80
"작은아씨가 별안간 살을 베었단 말이냐.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81
세라는 말을 그치자 자기의 던진 그 한마디가 도로 귀로 흘러 들면서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솟아올랐다.
 
82
"---아니 이게 그래 피야. 끔찍두 해라."
 
83
옥녀를 더 족칠 것 없이 급하게 목욕실을 나가 버리더니 방에서 미란과의 말소리가 수군수군 들린다. 희롱하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간간이 높게 흘러온다. 미란은 허약한 기력에 벌써 자리에 누운 듯 대답하는 소리만이 들릴까 말까 하다.
 
84
"오미자 화채가 아니구 그러니 이게 모두……."
 
85
옥녀는 목욕물을 한 움켜서는 손가락 사이로 흘리면서 미란의 몸의 다달이 정해논 날수를 속으로 따져 보았다. 조금 일찍 온 듯하나 아마도 뱀에게 놀란 탓인 듯하다. 뱀의 독이 무서운 것을 깨달으며 그 화채 물 속에 그대로 뛰어들까 어쩔까를 생각하려니 별안간 부끄럼이 왈칵 오면서 옥녀는 고개를 숙여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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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칙해라."
 
87
방에서는 자매의 목소리가 자별스럽게도 은은히 흘러온다.
 
88
세란들 자매의 사이같이 정다운 것이 다시 있다면 그것은 현마와 단주의 사이다 세란과 미란이 자매간이면서도 . 가장 친한 동무의 사이라면 현마와 단주는 동무의 사이면서도 형제 이상의 정이 두 사람을 얽었다. 십여 년이 나 연소한 단주를 사실 현마는 동생을 대하는 이상의 정으로 사랑해 온다.
 
89
영화사에 있을 때에나 거리에 나올 때에나 두 사람의 그림자는 떨어지는 법이 없으며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말소리가 그치는 적이 없다.
 
90
"오늘은 약속이 있었지."
 
91
"교외 말씀이죠."
 
92
"싫은가."
 
93
"나가구 말구요."
 
94
성큼성큼 손가방을 들고 앞서는 단주를 보고는 빙그레 미소를 띠이며 오늘 저녁은 교외에서 먹을 양으로 사를 나서는 현마였다.
 
95
"교외 집 맘에 드나."
 
96
"담장이 우거지구 라이락이 피구---아름다운 동산예요. 그러게 맘이 이렇게 뛰놀죠."
 
97
"라일락 때문인가.--- 누굴 속 일냐구."
 
98
"속이다뇨."
 
99
"…………"
 
100
"미란 말이야."
 
101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는 소년의 자태, 그는 미란보다도 못지않게 미목이 수려하다.
 
102
"고와요.--- 무어라고 할까요, 마치 --- 옛적 ‘비너스’ 같은."
 
103
"미란이 ‘비너스’라면 단주는 무얼꼬. ---‘아도니스’. 신화 속의 미소년 ‘아도니스’--- 그게 단주야."
 
104
다시 얼굴을 물들이는 단주를 그림같이 아름다운 것으로 생각하면서 현마는 지나는 택시를 잡아 세우고 운전수가 문을 열고 기다릴 때 문득 무슨 마음이 내켜선지 단주의 몸을 달눙 안아서는 차 속에 앉히는 것이다. 세란의 몸을 장난삼아 몰래 들어보는 적이 있었으나 그 세란의 몸보다도 부드럽고 해까운 단주의 몸이다.
 
105
이어 성큼 뛰어들어가서 단주의 몸을 거의 윽박을 듯이 주저앉는 현마의 모양은 마치 어린양을 차가는 독수리의 시늉과도 같고 미소년‘아도니스’를 후려 가는‘퍼슈스’나 ‘플루토’의 모습일 듯도 하다. 짐승같이 육즁한 현마와 아름다운 단주와의 대립되는 인상은 삼십대와 이십대의 차이도 아니요, 이십 관과 십오 관의 체중의 차이도 아니요,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괴이한 애정관계에서 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자태는 형제의 그것도 아니요 주인과 종의 그것도, 아니요,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모양이었다. 현마는 사실 마음속으로 은근히 세란과 단주를 달아보고는 어느 편이 더 무거운가를 주저하는 때가 많았으며 그 감정을 스스로 괴이히 여기곤 한다.
 
106
소설가가 되느니 영화감독이 되느니 하면서 거리에서 펀둥거리는 단주를 현마가 당초에 주워 올린 동기부터가 그의 용모에 혹한 까닭이었다. 이십세를 잡아들라 말라 한 이쁘장한 얼굴에 머리를 길러 내린 나어린 보헤미안의 꼴이 알 수 없이 마음을 댕겨 현마는 그날로 그를 데려다가 몸을 가꾸고 치장을 갈아서 멀끔한 딴사람을 만들어 놓았다. 집도 절도 없고 또렷한 내일의 요량도 없던 불결하고 궁측스럽던 보헤미안이 하루아침에 말쑥한 미소년 ‘아도니스’로 새로 태어난 셈이었다. 그다지 놀라운 천재를 감추고 있지는 않았으나 숙성한 만큼 쓸모도 있으려니 생각하고 영화사 비서격의 일을 맡겨서는 옆 책상에 앉히기로 했다. 영화사라고 해야 당초부터가 현마의 취미에서 시작된 사업으로서 영화제작은 아직 앞일이고 주로 배급의 일을 하는 것이었으나 단주로서는 그런 호박은 없는 것이, 빌딩 삼층 훗훗한 간 사무실에서 기껏 하는 일이래야 현마가 맡기는 영화잡지의 기사를 번역학나 그렇지 않으면 여배우의 사진을 가위로 속속들이로 오려서는 사무실 벽에다가 어지럽게 붙여놓는 일쯤이었고, 그 외로는 현마와 거리를 걸으며 점심을 먹으며 차를 마시며 배급 교섭을 하며 할 때에 그림자같이 현마의 옆에 붙어서 혹은 단장노릇을 하고 혹은 한 송이의 꽃 노릇을 하면 그만이었다. 아파트의 한 간을 구해 가지고 유숙하게 된 때부터 현마는 거의 밤마다 찾아와서는 별일 없으면서도 이야기하고 놀고 하다가는 늦어서야 돌아가거니 그렇지 않으면 한 침대에서 같이 밤을 새우거나 했다. 참으로 한 송이의 꽃을 대하듯 현마는 신화 속의 미소년 같은 단주를 정신없이 바라보는 것이었다.
 
107
발이 한동안 뜨게 되자 세란은 하루는 현마의 옷섶을 바톰하게 쥐어 잡고는 불같은 새암이었다.
 
108
"어서 대요. 요새 밖에 꼭 무에 생겼죠. 그렇지 않구야……"
 
109
"예쁜 비서 하나를 두었지."
 
110
"무에 어째요. 이렇게 늠실거리구 말하기요. 어떤 년이야. 그래 비서가."
 
111
"법석을 말아요. 그렇게 속이 편편치 않다면 내 내일 보여 주지 않으리."
 
112
"보긴 누가 보재. 왜 이리 얼릉거려요."
 
113
흰 다리를 꼬집히우고 현마는 펄쩍 뛰면서,
 
114
"그래두 봐야 알 테니 내일 두구 봐요. 얼마나 놀라운가."
 
115
펄펄 뛰는 세란을 간신히 가라앉히고 이튿날 단주를 데리고 나갔을 때 세란은 어제와는 다른 의미로 사실 놀라기는 했다.
 
116
"딴은 예쁘기는 해."
 
117
단주를 면대해 놓고 나오는 말이었다.
 
118
"비서라길래 난 또 어떤 비둘기를 후려냈누 했더니 이런 미남자 비서야."
 
119
세란과 미란은 동물원에나 간 듯 염치없이 단주를 바라보았다.
 
120
"이런 비서라면 집에두 종종 데리구 와요. 말동무두 없는 외딴 곳에 버려들 두 구호나만 밖에서 좋은 수 보지 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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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맘에 들면 가끔 오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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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마의 권고를 옆 귀로 들으면서 단주도 그들에게 밑지지 않을 정도로 세란과 자별스럽게 바라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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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의 맘같이 모를 게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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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란은 중얼거리며 현마의 마음을 한없이 이상한 것으로 여겼다. 원래 다정한 현마의 욕심에 여자를 차례차례로 사랑해 가는 심지는 그래도 이해하기 쉬우나 알 수 없는 선머슴을 주워 올려서는 애정을 나누고 정신을 뽑히우고 하는 그의 마음이 마치 바다 속의 욕심 많은 짐승같이도 생각되면서 괴이한 감정이 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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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짐승이라면 현마는 그 바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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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남편을 비판하면서---그렇다고 단주에게 대해서 게염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호기심이 솟으면서 싱글싱글 그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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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주로서는 그것이 처음이었으나 즐겁고 아름다운 인상에 그날을 실마리로 현마와 함께 자연 걸음이 잦기 시작했다. 아파트와 영화사와의 사이에서 현마 단 한 사람과 같이 생각하고 살고 날을 지우던 그에게 의외에도 신선하고 푸른 딴 세상이 열린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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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목이 우거진 뜰 속에서의 세란과 미란의 자태는 흡사 이야기 속에서들은 도원의 경치였다. 세란의 인상도 찬란한 것이어으나 미란의 존재는 보물같이 진귀한 것으로 보였다. 이런 행복스럼 처지에서 오히려 자기를 구하는 현마의 마음은 얼마나 야릇한 것인가. 바다같이 넓은 그 마음속 한편 구석을 헤엄치고 있을 자기의 꼴을 생각할 때 문뜩 부끄러운 생각조차 들었다.
 
129
그러나 현마로서는 그 여자들만의 세상 속에 난데없는 단주를 한몫 끼워 넣고도 조금도 부자연과 위험을 느끼지 않는 것은 그의 눈으로 볼 때에는 세란이나 단주나 같은 행렬 속에 서는 까닭이었다. 한 방에서 세란과 이야기할 때의 감정이나 아파트에서 단주와 이야기할 때의 감정이나 매일반인 까닭이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 미란에게 대한 감정뿐이었다. 처제 미란에게 대한 감정은 물론 아내 세란에게 대한 감정과는 스스로 달라야 하겠으므로 현마희 흥미는 미란과 단주에게 걸려 있었다. 위험하다느니보다는 아름다운 것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단주를 교외의 집으로 이끌 때 반드시 두 사람의 제목이 머리 속에 떠오른다.
 
130
"‘비너스’와 ‘아도니스’---"
 
131
지금도 차 속에서 현마는 거의 단주를 안을 듯한 자세를 지니면서 말을 잇는다.
 
132
"미란 때문에 그렇게 맘이 뛰노는 게지. 날 속일 수는 없어.---‘비너스’와‘아도니스’의 사랑은 신화 속에서두 아름답지 않았나."
 
133
"미란을 보면 겁이 나요.---들었던 유리잔이 금시에 깨트러질 듯한 위태위태한 생각이 들면서."
 
134
"조심들 해야 돼, 괜히.그 유리잔 깨트리지 않도록들……"
 
135
교외로 나와 주택 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울릴 때 뜰로 미란을 놀라게 한 뱀 뒤 탐지를 나왔던 옥녀는 마치 판장 밖 차 속에서나 뱀을 본 듯 안으로 향해 소리를 치면서 설렌다.
 
136
"나으리들 오셨어요."
 
137
현마와 단주가 뜰 아네 들어와 라일락 가지를 휘어들 잡았을 때 세란은 신을 끌고 현관을 나섰다.
 
138
"행차 길보다 더 야단스러우니."
 
139
무인도에서 사람을 만난 듯 세란에게도 그들이 언제든지 반가웠다. 한마디의 게정은 입버릇같이 나간다.
 
140
"스틱 보이나 데리구 건들건들---"
 
141
하다가 세란은 싱글싱글 웃는 단주를 바라보며 닦아 올린 용모며 빈틈없는 옷맵시에 마음이 끌린다.
 
142
"꽃 병풍 앞에 선 신랑 같네."
 
143
라일락 앞에 웃고 섰는 그들을 이렇게 형용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꽃 앞에 선 미란을 아름다운 것으로 여겼으나 그만 못지않게 아름다운 것이 단주임을 느끼며 천상의 한 쌍이 아닌가 생각하려니 부러운 마음이 솟는다.
 
144
"봄이 별 데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여기에 있군."
 
145
단주는 활개를 피면서 뜰 구석구석을 나뭇가지와 풀잎을 빛나는 눈으로 바라본다. 봄은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요, 아파트에나 사무실에 있는 것이 아니요, 참으로 그 뜰 안에---푸른 세상 속에 있는 듯이 한 방울 한방울의 핏속에 스며드는 듯도 하다. 현마도 봄 기운을 깊게 마셔 들이면서 라일락을 한 송이 꺾어 들고는,
 
146
"미란은 웬일인구"
 
147
하고 세린의 뒤를 따라 현관 앞을 향한다.
 
148
"뱀을 보구 놀랐다나요."
 
149
"찔레 사냥만 하니 그렇지."
 
150
"기급을 하구 덜덜거리구 떨더니."
 
151
"놀라는 바람에 또 몇치나 자랐겠군. 찔레순같이 키만 자꾸 자라면 서.---첫 뱀은 복이라는데 올 복은 미란이 독차지할 모양인가."
 
152
"또 아는 소리. 당신 말하는 복이라는 건 언제나 미치광이의 복."
 
153
현관 옆 대청에는 붉은 주단을 편 데다가 창을 덮는 담장이의 푸른 그림자가 어울려 화려한 조화를 띠었다. 의자며 소파며 사치한 세간들이 모두 자매의 호사스런 취미엣 나온 것이다. 단주가 창 기슭에 자리를 잡고 선물로 가져온 「봄 노래」의 레코드를 축음기에 걸었을 때 부드러운 그 봄 소리에 부리운 듯 미란이 비로소 대청으로 나왔다. 나들이옷에다 곱게 단장을 하고---수선을 떨던 아까의 그가 아닌 초초한 자태이다.
 
154
"찔레 사냥만 하다가 싸지."
 
155
"아저씨 발목이나 물리셨더면."
 
156
현마의 농을 곧잘 받는 미란.
 
157
"처녀아이가 집에서 번둥번둥---뱀과 동무할 수밖엔."
 
158
"그러게 어서 공부나 더 시켜 줘요. 음악가가 되든지 여배우가 되든지하게."
 
159
"음악가나 여배운 아무나 되는 줄 아나부다.---그 주제넘은 꼴 누가보게."
 
160
"별사람 있나요. 왜 안돼요."
 
161
"정신이 좀 들었나부지. 속이 살았을 젠."
 
162
세란이 말을 가로채 가지고는 비죽이 웃으면서.
 
163
"뱀이나 뱀뿐인가.---오늘 망신은 얼마나 했는데."
 
164
현마와 단주를 바라보니 미란은 제발 살려 달라는 듯이 언니의 팔을 꼬집는다.
 
165
"애걸을 하면 누가 잠자쿠 있을까봐."
 
166
"입만 열었다간 경쳐요."
 
167
현마나 가만히 있었더면 좋았을 것을 궁금한 판에,
 
168
"망신이라니 먼데."
 
169
세란을 재촉하는 것이다.
 
170
"머겐나 생각 좀 해봐요."
 
171
미란이 얼굴을 홍도같이 붉히면서 억센 손아귀로 입을 와 막는 까닭에 세란은 뒤로 쓰러질 지경이다.
 
172
"망신은 툭툭히 한 모양인데."
 
173
현마가 부채질하는 바람에 세란이 미란의 손을 밀치면서 기어코 입을 열었다.
 
174
"목욕실에를 좀 들어가 봐요. 목욕물이 무슨 꼴이 됐나."
 
175
"몰라요."
 
176
미란이 발끈 짜증을 낸댔자 세란의 마지막 마디는 벌써 입을 새어 나온 뒤였다.
 
177
"온통 오미자 화채니."
 
178
"어쩌란 죽이란."
 
179
미란은 전신이 화끈 달면서 그도 모르는 결에 언니의 볼을 불이 나게 갈 기고는 방을 뛰어나갔다.
 
180
껄껄껄껄 허리를 꺾는 현마의 웃음소리를 듣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마음에 구두를 찾아 신고는 현관 밀창을 드르렁 열었다.
 
181
"봉변을 시켜두 분수가 있지. 다시 들어오나 봐라."
 
182
세란이 악의로 한 것은 아닌 줄을 알면서도 현마와 단주 앞에서의 무안을 생각하면 귓불이 불같이 달면서 도저히 한자리에 앉아 있을 수는 없어싸.
 
183
분풀이로 며칠이든지 언니의 옆을 떠나서 담을 떼어 주고 싶은 생각이 치밀었다. 뒤도 안 돌아보면서 대문 쪽으로 지름길을 걸었다.
 
184
한바탕 웃어대던 방안에서도 나뭇가지 사이를 뾰로통해서 나가는 미란의 자태를 바라보고는 그의 태도가 심상하지 않음을 깨달으며,
 
185
"미란!"
 
186
"미란아?"
 
187
부부가 목소리를 높여서 부르나 들은 척 만 척 그림자는 대문 밖으로 사라진다. 그제서야 현마는 황당해서 방을 뛰어나가 대문 빈지를 붙들었으나 노기가 등등한 귀여운 그림자는 거의 쏜살같이 행길 저편으로 멀어진다.
 
188
"단주 자네 쫓아가 보게. 행여나 무슨 일 없도록 달래서 데려와야 해."
 
189
현마는 뛰어들어와서는 단주를 잡아 일으키는 수밖에는 없었다. 황겁지겁 문밖으로 뛰어나가는 단주를 보고서야 겨우 마음을 놓았다.
 
190
"처녀의 맘이란 만만치 않은걸."
 
191
"모처럼 저녁 준비까지 해놓은 것이 이 분란이네."
 
192
세란은 입맛을 다시면서 적적한 판에 「봄 노래」를 다시 되거는 수밖에는 없었다.
 
193
고양이 앞에 고깃덩이를 "…… 던진 셈이지. 아무리 급한들 단주를 왜추 길까. 변은 생기구야 말걸."
 
194
"아닌 걱정을 다---"
 
195
현마는 아내의 걱정을 쓸데없는 것으로 대꾸하다가 문득,
 
196
"글세."
 
197
하고도 생각해 본다.
 
198
"그렇지 않구. 노엽긴 했겠지만 실상은 이렇게 되기를 은근히 바랐는지 뉘 아우. 다 자란 아이의 맘이란 엉큼한 겐데. 어른들이 됩데 한 수 걸리지 않았나보지. 밖으로 밖으로 뻗어 나가는 힘을 휘어잡을 수가 있수."
 
199
"봄의 힘인가. 무엇에든지 거역하라구---근실거리는 몸으로 마구 문을 뚫고 도망질을 치라구 봄이 충동질하는 모양인가."
 
200
"그래 어쩔 작정이요."
 
201
세란은 성큼 현마의 무릎 위로 옮겨 앉으면서 바른 팔로 목을 둘러안고,
 
202
"---자기들끼리는 결혼을 하게 되리라구 생각들 하구 있는 눈친데."
 
203
"일부러 결혼을 시킬 필요야 있나. 되는 대로 버려 두구 볼 일이지."
 
204
"그러다 짜장 고삐 없는 말같이 뛰어나 나면 더 야단이게."
 
205
"그건 그때 일. 난 결혼을 찬성치 않아."
 
206
"하긴 나두 반대지만."
 
207
두 사람은 각각 자기들만의 이유로 단주와 미란의 결혼을 고려하는 것이 나 그 이유는 피차의 마음속 깊이 간직되어서 그들 스스로도 그 당장에 집어내서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208
"고독이 얼마나 쓸쓸한 것인지 알기나 하구 그러우."
 
209
바른손으로 현마의 불을 끄들면서 몸을 구른다.
 
210
"쓸쓸하거든 귀족같이 점잖게 잠자쿠만 있지."
 
211
"귀족두 아무것두 다 싫어요. 요새 같아서는 단 하루를 혼자 지내기 괴로워요."
 
212
"것두 봄의 힘인가."
 
213
"몰라요."
 
214
현마의 힘을 마음속으로 은근히 바라면서 세란은 그의 얼굴을 자기의 얼굴로 덮어 버린다.
 
215
"탐정인가 뒤를 쫓게."
 
216
"달래서 데려오라는 분부이니."
 
217
"언제까지 종 노릇할 작정인구."
 
218
"…… 종 노릇이랬다."
 
219
종이란 말이 사실 단주의 가슴속을 따끔하게 후볐다. 주택지대를 벗어나 서 큰 거리에 나왔을 때 미란의 꽁무니를 잡은 것이나 노기가 풀리지 않은 마음에 미란의 태도는 쌀쌀하다.
 
220
"왜 어른들한테 매여만 지내란 법인가. 우리에겐 우리의 차지가 있겠지."
 
221
"지금 종노릇밖엔 할게 더 무어게."
 
222
"종노릇 하는 동안 온전한 사람구실 하나 보지."
 
223
"그럼 어떻거면 모면한단 말요. 어떻게 하면---"
 
224
결국 한 전차를 타고 시가로 들어와서는 약속이나 한 듯 말없는 동안에 백화점 앞에서 또 같이 내려 버렸다. 미란은 조금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단주는‘종’이란 말을 반성하면서 승강기를 타고 사층 식당에 이른 것도 역시 말없는 속에서였다. 창 기슭에 자리를 잡고 저녁을 시키고 났을 때 미란은 비로소 미소를 띠이면서 단주에게 한마디 올가미를 지워 본다.
 
225
"어디 재주가 있거든 날 붙들어서 데려가지. 그렇게 소락소락 끌려가나 보게. 제아무리 장한 게 와두 내 맘을 휘지는 못할걸."
 
226
창밖로는 바로 눈 아래로 거리와 맞은편에 강이 내려다보인다. 강건너로는 벌판이 깔렸고 섬 속에는 수목이 우거졌다. 황혼 속에 저물어가는 느릿한 강산을 바라보던 단주는 문득 강 건너 먼 산 위로 먹같이 피어오르는 검은 구름을 새삼스럽게 발견한 듯 시선을 사방으로 휘두를 때온 누리가 어느 결엔지 컴컴한 그림자 속으로 휩싸여 들어가고 있음을 알았다. 순식간에 강산이 묵화 속에 있는 듯 흐렸고 거리 위 허공 또한 괴괴하게 어두워 간다.
 
227
"비가 오려나."
 
228
중얼거려 볼 때 역시 밖을 내다보고 있던 미란도 같은 느낌 속에서 한가지의 발견을 하고 단주의 주의를 끌었다.
 
229
"저 만수대 쪽을 봐요. 측우소에 가기 올랐죠."
 
230
강 왼편으로 한 킬로쯤 떨어진 언덕 위를 더듬으면서 단주는 측후소 지붕 위에 팔딱거리는 조그만 깃폭을 아련히 알아맞힌다.
 
231
"확실히 붉은 기지."
 
232
"폭풍 경보예요."
 
233
"별안간 날씨가 사나워졌나."
 
234
"소낙비나 오려구."
 
235
"차라리 한바탕 쏟아졌으면---"
 
236
막연한 기대와 불안 속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미란은 한잔 커피에도 도무지 구미가 돌지 않는다 . 식사를 마쳤을 때까지도 흐린 천지는 무죽거릴 뿐이지 빗방울 떴는 기색조차 없다. 한결같이 무거운 공기가 용기를 주지 않을 뿐 아니라 그렇다고 달리는 마음을 속박하지도 않는다.
 
237
"어떻게 할까."
 
238
산속으로 원족을 나온 어린 학생이 어느 길을 취할지 몰라서 망설이는--- 그런 그들의 눈동자다. 아직 비도 안 오는데 부랴부랴 교외 집으로 돌아갈 것은 없고 그렇다고 그 외 또 갈 곳이 어디인가---하는 그들의 태도이다.
 
239
저녁 등불이 와서 식당 안이 환해지고 음악소리가 들려올 때 단주는 한가지 계시나 받은 듯 눈망울을 빛냈다.
 
240
"나두 실상 종노릇은 싫어. 오늘두 미란을 붙들어 가려는 것이 내 본의는 아니거든.---그까짓 한번 심술을 피우고 흔들을 뽑아 볼까."
 
241
"누가 아니래."
 
242
"나만 따라와요."
 
243
용감한 병사같이 앞잡이를 서서 결국 찾은 곳이 영화관이었다. 명화의 밤이란 굉장한 선전에 눈을 흘리운 것이나 사실 고전영화「실락원」의 한편은 두 사람의 혼을 송두리째 뽑을 지경이었다. 검소하면서도 찬란한 화면이 폭좁은 막 위에 꽉 차면서 어두운 홀 안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낙원에서의 아담과 이브의 생활---각각 월계나무 잎으로 앞을 가리운 그들의 자태가 해면같이 시선을 빨아들여 미란은 정신없이 몸을 앞으로 쏠리우다가도 그래도 부끄러운 마음에 문득 자세를 바로잡으며 어두운 주위를 휘둘러보곤 했다. 악마가 뱀으로 변신하고 낙원으로 숨어드는 장면에서는 문득 집 뜰에서 본 뱀 생각을 하고 섬찟해지면서 얼마나 흉측스런 짐승인가를 느끼며 뜰에서 뱀을 본 자기의 자태가 바로 낙원의 이브였던 듯한 생각이 들며 몸서리를 쳤다. 유혹의 장면을 보아 나가는 동안에 한 가지 의문이 가슴속에 서리우기 시작했다.---금단의 과실을 먹었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여간한 허물이 아니기 때문에 금했을 터인데 아무리 유혹이 컸다고 하더라도 얼마나한 용기로 그 천법을 범하게 된것인가. 그 무서운 공포와 불안을 두 사람은 어떻게 얻은 것일까.---하는 의문이었다. 아담과 이브는 얼마나 용감한 사람들인가. 뒷일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그 무서운 율법을 거역하고 깨트리지 않았나. 어떻게 하면 대체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일까.---이 커다란 의문의 벽에 부딪치자 단주와 미란은 그만 머리 속이 혼란해지면서 다음 장면들이 부질없이 눈앞을 어지럽힐 뿐이었다. 그 가장 중대한 의문을 해석하지 못하고는 벌써 그 다음부터의 이야기는 두 사람에게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244
안타까운 마음에 몸을 궁싯거리며 머리를 흔들며 앉았노라니 문득 영사기 의 기계소리 아니 요란한 소리가 연속정로 들려 왔다.
 
245
"비가 아닐까."
 
246
정신을 가다듬고 들으려니 사실 그것은 영화관 지붕을 후려치는 빗소리였다.
 
247
"기어코 폭풍운가."
 
248
험악하던 날씨가 일을 친 모양이었다. 미란은 그 요란한 소리와 요동하는 생각으로 영화에서는 정신을 돌리고 황겁한 마음에 자리를 일어섰다. 단주도 따라서 어둠을 헤치고 문께로 나왔다. 문밖 거리 위에 종록같이 쏟아지는 빗발과 바람길을 바라볼 때 혼란과 공포가 머리 속에 일며 단주는 두말 없이 미란을 끌고 등대하고 섰는 자동차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249
어디로 가야 되나---가 문제가 아니었다. 비를 피하고 마음을 가다듬을 곳을 찾으면 좋았다. 단주는 엉겁결에 운전수에게 아파트를 분부했다. 물속을 헤엄치는 고기같이 빗속을 헤엄쳐서 아파트에 이르러 방에 뛰어들었을 때 미란은 비로소 왜 집에를 안가고 이곳으로 왔을까 하는 염려가 솟으며 의자에 풀썩 주저앉아 아직도 혼란한 정신에 알지 못할 꿈의 나라로 온 듯 한 착각을 떨칠 수 없었다.
 
250
처음 보는 방안---서너 평 가량밖에는 안 되는 좁은 방안에 침대며 의자며 의걸이며 탁자 위에 널려진 찻그릇들이며가 어수선한 속에서도 독특한 배치로 놓여 있는 것이 미란에게는 일종 신기한 느낌을 일으켰다. 벽에는 여배우들의 그림과 나체화가 함부로 붙었고 잡지와 책들이 구석구석에 널려 졌고 병의 꽃은 거의 시들어가고 반쯤 열린 트렁크에서는 되구말구 담은 옷가지가 엿보이는---그 모든 어지러운 모양 속에서 미란은 단주의 마음속을 헤져 본 듯, 겉으로는 단정하면서도 기실은 보헤미안이ㅛ, 방랑성을 띠인 단주의 성미를 그 방안의 어지러운 치장이 그대로 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겉은 가다듬었어도 속은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단주의 마음을. 정리 되지 못한 그 방안 공기에서 미란은 문득 현마의 냄새를 맡는 듯하며 침대와 의자에서 현마의 지배를 받는 수밖에는 없었고 그 지배를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는 단주의 꼴이 눈앞에 선해지면서 어지러운 방안의 모양이 바로 발버둥치는 단주의 반항의 마음의 표현인 것 같고 요란한 폭풍우의 그 밤 방안은 한층 그 효과를 더하고 있는 듯도 하다.
 
251
"……측후소 오후 구 시 반 발표---밤으로부터 새벽까지 폭풍우가 엄습 합니다. 경계구역은 제일구 동남부, 제이구 해안부.동남부는 더욱 심하겠고 바람의 시속은 약 이십 미터로서 큰 나뭇가지를 흔들만 합니다. 특별히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252
라디오의 기상특보가 요란하게 울려나올 때 미란은 몸을 죄이면서 지금 밖 거리를 온통 휩쓸고 있을 폭풍우의 세력을 느끼자 여러 가지 걱정으로 조바심이 되며 아닌 때 단주의 방에는 왜 침입하게 되었을까, 자기가 침입하므로 현마의 냄새를 방에서 물리치자는 셈일까---하는 생각이 솟는 것이었다. 가슴이 설레고 몸이 떨리기 시작한다.
 
253
같은 생각에 사로잡힌 단주도 떨리는 마음에 머리를 흩트리고 달려가 라디오의 스위치를 돌려 기상특보의 요란한 소리를 꺼버렸으나 이번에는 대신 음악이 들리기 시작한다. 교향악이다. 전원교향악임이 차차 알려진다.
 
254
"거기두 폭풍우구료."
 
255
제이 악장 폭풍우의 대목이었다. 벌판을 엄습하는 빗소리. 바람소리. 새라는 새는 모두 수풀 속 둥우리 속에 숨어 버리고 꽃과 풀들이 쏟아지는 빗발에 물매를 맞는다. 도랑은 순식간에 물이 불어 콸콸콸 풀밭으로 넘쳐 흐르고 더욱 모질어가는 빗발은 바위라도 무너트릴 듯, 빗소리 바람소리 우레 소리---벌판을 온통 떠가려는 듯도 한 우레 소리 …… 우르르르---교향악의 세상에서만이 아니라 어느덧 문 밖 세상에도 우레 소리가 섞여진 듯하다. 점점 높아가며 천지를 둘러 뽑을 듯…… 우르르---우르르르릉---탕.
 
256
뜨금하면서 몸이 움츠러든 것은 우레 소리가 창 기슭을 탕! 하고 울린 까 닭보다도 별안간 그 우뢰 소리와 함께 방안 등불이 꺼진 까닭이었다.
 
257
"에그머니!"
 
258
미란이 고함을 치면서 침대 위로 달려왔을 때에는 단주도 이미 놀란 가슴으로 침대 구석에 웅크리고 앉은 때였다. 정전인 듯 불꺼진 어두운 방안을 우레 소리와 음악소리가 한데 합쳐서 쓸어가는 듯도 하다. 어둠과 음향이 마치 무거운 바위같이 방안에 꽉차서 육체를 누른다. 일순 방안이 환해진 것은 번갯불이 창을 뚫고 비취어 든 것이다. 귀화같이 처참한 푸른 불빛이 그 어느 곳에 벼락이라도 뿌리고 굴러온 듯 방 구석구석에 널름거릴 때 단주와 미란은 간잎이 서늘해지면서 침대 위 요 속으로 숨어드는 수밖에는 없었다. 방안에서 그 속이 가장 안전한 탓이었을까. 어떻든 요 속에서는 몸을 금방 태워버릴 듯도 한 무서운 번갯불을 면할 수는 없었다. 땅속을 파고 든 두 마리 두더지 모양으로 얼굴을 묻고 있을 때 두 몸은 더워지면서 머리 속은 더욱 혼란해 갔다. 일초가 백년 같고 백년이 잏초 같고---무더운 체온이 서리운 요 속 세상은 혼돈의 세상이다. 불안과 공포와---우뢰와 번개에 대 한 그것이 아니라 이제는 요 속세상의 그것이었다. 몸이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리고---우뢰와 번개를 한몸에 간직한 셈이다. 어지럽고 무섭다!
 
259
"용기를 줍소사."
 
260
마음속으로 빌어 보나 옆에 누운 미란의 모 자체가 번갯불같이 두려운 것으로 생각되면서 손가락 하나 어쩌지 못하는 단주이다. 거룩한 선물, 거룩한 술잔---외람히 범할 수 없는 것, 천벌이 내릴 것도 같이 어지럽고 무섭다! 단주는 벌떡 요를 들고 침대를 뛰어내렸다. 우레 소리와 음악소리는 여전하다. 어둠 속을 더듬어 책상 서랍 속에서 위스키병을 찾아냈다.
 
261
"무서울 때엔 이것이 제일이라나."
 
262
두어 잔 들이키고는 미란에게도 권한다. 어둠 속에서 잔을 받아 마시고는 다시 요를 썼을 때 몸은 더한층 달고 가슴은 더욱 뛴다. 웬일인지 도리어 맑아만 가는 정신에 단주는 용기는커녕 겁을 먹을 뿐이었다.
 
263
"어리석은 작자여. 실낙원에서 왜 그것을 가르치지 않았던구."
 
264
문득 아까 본 영화 생각이 나며 아담과 이브는 어떻게 해서 그 용기를 얻었던고 하는 의문이 다시 솟기 시작했다. 실낙원의 작자는 왜 그 가장 중요하고 신비로운 수수께끼를 풀어주지 않았던가. 누구에게서 이 용기를 배우면 옳은 것인가.악마여, 나타나라. 악마의 힘이 부치거든 조물주의 힘이 나타나라.--- 망설이는 마음은 안타깝고 떨릴 뿐.
 
265
두어 발되는 도랑---물도 깊지 않고 언덕도 험하지 않아 단걸음에 건너 뛰면 족히 뛰겠건만 막상 뛸 수 없는 것이다. 눈 꾹 감고 이를 악물고---한순간의 용기가 있으면 족한 것이나 그것이 오지 않는 것이다. 언제인가 한 개의 계란을 손아귀에 쥐고 깨트리려다 깨트리지 못한 단주였다. 눈 꾹 감고 주먹을 꼭 쥐면 달삭 깨드려지련만 종시 두려운 생각에 눈 꾹 감고 주먹을 꾹 쥐지 못한 그였다. 즐기지 않는 담배 연기를 입안에 한 모금 머금고 꿀꺽 삼켜 보려면서도 아직 한 번도 그것을 해보지 못한 그였다. 연기를 삼킨 순간 정신이 핑 돌며 그 자리에 쓰러져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공포가 솟는 까닭이었다.--- 어떻게 하면 그 담배 연기를 마시고 계한을 깨트리고 도랑을 건너뛸 것인가. 어떻게 하면 그 순간의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
 
266
요란하던 폭풍우는 어느덧 조금 잦은 듯 번갯불과 우레 소리도 잠잠해지고 빗소리도 덜한 듯하다. 라디오의 전원교향악도 폭풍우의 대문은 벌써 지 나 개인 전원의 풍경이 시작된 지 오래이다. 시냇물이 졸졸대고 무지개가 서고 이슬이 떴고 새들이 노래하며---평화로운 전원의 정서가 넘쳐 흐른다.
 
267
그렇건만 요 속에는 아직도 폭풍우의 공포가 서리운 채로 두사람의 마음은 한결같이 두려움에 떨며 어느 때까지나 계란 못 깨트리고 도랑 못 건너뛰고 망설이고만 있는 것이었다.
 
268
새벽 잠자리 이불 속에서 홀연히 단잠을 깬 세란은 걱정되는 마음에 현마를 찔러 본다.
 
269
"이 애들이 웬일일까. 밖에서 밤을 새우다니."
 
270
"밤새도록 비가 온 모양인데."
 
271
잠꼬대같이 곤한 목소리를 내다가 현마도 정신이 들면서,
 
272
"--- 아무리 비에 맥혔기로서니."
 
273
벌떡 일어난다.
 
274
"그것 봐요. 고양이 앞에 고깃덩이라니까. 단주를 왜 쫓아 보낼꾸."
 
275
세란도 자리 위에 상반신을 일으킨다.
 
276
"이렇게 될 줄 알았나."
 
277
"봄 아니요. 기회만을 엿보는 선머슴들을."
 
278
"그래두 설마."
 
279
"단주를 너무 믿지 말아요. 여간내기가 아닌데. 믿는 도끼에 발 찍는다구."
 
280
"그야 일을 저질렀다면 피차의 허물이지. 옳구 그른 편이 있나."
 
281
"멀쩡한 미란의 몸만 다쳐 봐요 괜히 당신 허물일 테니."
 
282
"대체 어디로 갔을까."
 
283
현마는 확실히 자기의 허물임을 느끼면서 이불을 차고 일어나서 담배를 피어 문다. 간밤의 세란과의 찬란한 기억이 부끄럽게 눈앞을 스치면서 그것도 오늘 아침의 불찰을 일으킨 한 원인인 듯 뉘우쳐진다.
 
284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이나 아우."
 
285
"행여나---"
 
286
현마는 치미는 불안을 느끼면서 방으 나가 현관문을 열었다.
 
287
간밤에 모진 폭풍우도 꿈속의 일이었던 듯 개인 아침은 맑고 고요하다.
 
288
모래를 편 지름길은 벌써 비를 잊은 듯 보돗하고 풀잎에 맺힌 빗방울은 이슬인 듯 맑다. 나뭇잎에서 우수수 떴는 방울도 차차 밝아가는 푸른 하늘 아래에서는 구슬알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신을 끌고 풀 사이를 거닐매 현마는 하룻밤 봄비라는 것이 얼마나 무폭한 것인가를 느끼면서 라일락 포기 앞에 와 섰을 때 참으로 어처구니없게 하룻밤 사이에 그 찬란하던 어제 날의 꽃이 고스란히 떨어져 있음을 발견했다. 자줏빛 꽃방울들이 근처에 지천으로 떨어져 향기도 종적 없이 사라졌고 나무에는 꽃방치만이 드레드레 남아서---그러나 비에 씻기운 잎들은 지난날보다는 한층 파들파들하게 피어나 신선한 기운을 보이고 있다. 잎 하나를 뜯어 입술에 물고 꽃행기 다음에 오는 신선한 기운이라는 거을 생각하면서 대문께로 향할 때 고요한 주택지대에 이른 자동차 소리가 나더니 앞 행길에 와 머무른다.
 
289
대문 빈지를 열었을 때 차에서 내려서 문을 들어오는 것은 미란이었다.
 
290
나갈 때 그대로의 치장으로---조금 피곤한 듯 고개를 숙이고 화장이 벗어져 서 향기는 없어졌으나 도리어 그 어디인지 퍼들퍼들하게 보이는---마치 라일락의 모양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291
"처녀 꼴 좋다. 어디를 밤새껏 쏘다니다가 이제야.……집에서 걱정들을 얼마나 했게."
 
292
반드시 책망하는 것도 아닌 부드러운 어조를 던졌을 때 미란은 전같이 현 마를 똑바로 쏘아보는 법도 없이 약간의 피곤한 빛을 보이면서 이슬에 젖든 말든 풀포기를 헤치면서 종종걸음으로 현관을 향하는 것이었다.
【원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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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효석(李孝石) [저자]
 
  1939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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