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
|
《창조》 《폐허》 《백조》의 세 동인 잡지 시대가 조선문학 탄생의 진통기였다.
|
|
2
|
|
|
1919년 2월에 창간호를 내어 1921년 6월에 제9호를 내고 폐간한 《창조》.
|
|
3
|
|
|
1920년 6, 7월경에 창간하여 제2호까지 내고 폐간한 《폐허》.
|
|
4
|
|
|
그 뒤에 생겨서 두세 호 내고 폐간한 《백조》.
|
|
5
|
|
|
이 문학 건설의 큰 공사에 있어서 몰각할 수 없는 역할을 한 사람이 있으니, 즉 광익서관의 주인 고경상이다.
|
|
6
|
|
|
고경상의 伯氏(백씨) 裕相(유상)은 滙東書館(회동서관)을 경영하고, 고경상은 광익서관을 경영하여 당시 조선 서적업계에 이 형제가 군림하고 있었는데, 동생 되는 고경상은 그때 일어나는 조선문화운동에 관심을 가져 동경서 발행되는 유학생 기관지 《학지광》이며 《女子界(여자계)》 등 잡지의 조선 판매의 책임을 지고 또는 이광수(春園(춘원))의 「무정」이며 「개척자」등 도 초판 발행을 감행하였고 《폐허》 창간호와 제2호는 순전히 고경상의 힘으로 발간되었고, 《창조》도 내가 출자 책임을 회피한 후인 제 8, 9의 두 호는 고경상의 힘으로 발간되었다.
|
|
7
|
|
|
광익서관의 가게 점두는 문사들의 공동휴게소와 연락처의 소임을 하였고, 더우기 폐허파의 문인들은 제 가정을 피하여 방랑적 표랑적 생활을 즐기더니만치 그들은 늘 광익서관의 점두를 구락부인 듯이 모이고 하였다.
|
|
8
|
|
|
안서(김억)의 처녀 시집(번역) 「懊惱(오뇌)의 舞蹈(무도)」도 고경상의 손으로 발행되었다.
|
|
9
|
|
|
고경상은 이렇듯 영리자로서는 외도인 ‘문학 옹호’를 하다가 마침내 조선의 老舖(노포)인 광익서관을 둘러엎고 심화가 나서 한동안 상해, 북경 부근에 유랑하다가 1930년경에야 귀국하였다.
|
|
10
|
|
|
귀국하여서는 예전의 광익서관의 점원이던 사람이 경영하는 책방에 점원으로 들어가서 주객전도의 구슬픈 살림을 한동안 하였다.
|
|
11
|
|
|
그러다가 내가 「女人(여인)」원고를 그에게 제공하며 출판계에 재출발하기를 권고했더니, 이에 용기를 다시 내어,
|
|
12
|
|
|
“서 푼짜리 원고를 출판함으로써 출판계에 재등장을 하니 社名(사명)을 三文社(삼문사)라 지으라.”
|
|
13
|
|
|
는 농담에 따라서 ‘三文社(삼문사)’라는 간판을 걸고 출판계에 재출발을 하였다.
|
|
14
|
|
|
본시 출판과 책사에 경험이며 솜씨가 있던 사람이라 그 영업은 순조롭게 되어, 큰 집을 사고 전화를 매고 전집 간행에까지 착수를 하더니, 금광 방면에 오입을 하여 일껏 바로 되어 가던 출판과 서적까지 집어삼키고 다시 은퇴하여 버렸다.
|
|
15
|
|
|
그러나 초창기의 문학 건설 운동에 있어서의 고경상의 공로는 조선문학이 생명을 유지하는 동안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고경상의 원조만 없었더면 대체 《폐허》라는 잡지가 나와 보았을는지, 따라서 ‘폐허파’라는 그룹이 생겨 보았을는지부터가 의문이요, 《창조》도 제7호로 폐간되었지 8, 9호는 나보지 못했을 것이요, 여러가지의 단행본도 썩 후년에야 출세해 보았을 것이다.
|
|
16
|
|
|
고경상은 문학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문학 건설에 바친 힘과 희생정신은 조선문학이 감사히 여기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