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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단(文壇) 30년의 자취 ◈

◇ 《創造(창조)》와 《廢墟(폐허)》 ◇

해설목차  서문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9권  10권  11권  12권  13권  14권  15권  16권  17권  18권  19권  20권  21권  22권  23권  24권  25권  26권  27권  28권  29권  30권  31권  32권  33권  34권  35권  36권  37권  38권  39권  1948.3~
김동인
1
《창조》 창간호를 발행하고 제2회의 교정을 간신히 끝내고 만세사건이 폭발되어 나는 귀국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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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경찰서로 감옥으로 꼭 석 달을 세상과 떨어져 있다가 다시 광명한 천지에 나오니, 세상은 예대로 환원되어 시집가고 장가가고 10전 20전 돈을 다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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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발간에서 움이 돈은 조선 신문학은 만세사건에 동인들이 각각 흩어져서 정지상태에 빠졌다. 내가 감옥살이를 끝내고 나와 보니 김환과 최승만은 동경에 있고, 전영택은 그 새 귀국해서 결혼했고, 주요한은 상해로 망명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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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만 하고 쌓아 두었던 《창조》 제2호를 발행케 하며 동인들과 연락하여 제3호 원고 수집에 착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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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李一(이일)과 오천석이 《창조》 동인이 되기를 바란다 하므로 마침 현재의 다섯 사람만으로는 원고난을 느끼던 차이라, 상해의 주요한에게 편지로 교섭하여 역시 상해에 망명해 있던 이광수도 끌어 이일과 오천석을 새로 동인으로 넣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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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일본 정부에서는 조선의 만세사건은 寺內(사내)(뒤에 長谷川(장곡천)) 총독의 무단정치에 대한 반항행동이라 하여 齎藤實(재등실)이를 조선 총독으로 보내고 문화정치를 한다고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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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문화정치의 덕으로 민간신문이 생겨나고 언론도 얼마간 자유의 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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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과거에는 嚴封(엄봉)되어 있던 언론과 출판 등에 약간의 완화가 생기매, 이 땅에는 웬 문학자가 그리도 많았던지 너도 소설 나도 소설, 너도 시 나도 시로, 시인 소설가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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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많은 문학자들의 많은 작품을 소화하기 위하여 사면에서 잡지사와 출판사가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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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토막토막 끊어서 쓰면 이것이 시요, 남녀가 연애하는 이야기를 쓰면 이것이 소설인 줄 안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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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쓸쓸하였다. 이 많은 ‘글쓰는 사람’가운데도 촉망할 작가가 나서지 않고 따라서 《창조》 동인이라는 한 그룹밖에는 ‘문단’이라는 것이 형성되지 못하니, 무변광야에 홀로 헤매는 것 같아서 고적하고 쓸쓸함이 이를 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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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때에 역시 동인제로 문학잡지 《廢墟(폐허)》가 창간되었다. 그 동인으 로는 黃錫禹(황석우) 吳相淳(오상순) 廉尙燮(염상섭) 閔泰瑗(민태원) 金萬 壽(김만수) 南宮檍(남궁억) 金明淳(김명순) 下營魯(하영노) 金億(김억) 金 瓚永(김찬영) 기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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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신문학을 대표하는 소설 작가가 《폐허》에는 없었다. 전인인 통속작 가 민태원이 《폐허》의 소설을 대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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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폐허》 창간호가 발간되면서 《폐허》의 주요 동인인 김안서, 김찬영, 김명순의 세 사람이 《폐허》를 탈퇴하고 《창조》로 건너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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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순은 김탄실이라 하여 이전 《靑春(청춘)》 잡지의 현상 소설에 당선하고 그 문명이 빛나던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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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영은 평양의 전설적 부호요, 명문집 자제로 동경 미술학교 출신으로, 다방면(그림과 글)에 소양 많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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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안서는 만세 이전부터의 시인으로 ‘하여라’‘하였서라’투를 시작하여 시에 독특한 지반을 쌓아나가던 사람이다. 그때 서울에 돌아와 있던 김환에게선 ‘김찬영, 김억, 김탄실이 《창조》로 오겠다니 어떠냐’는 편지가 있어서 그것 좋다고 하여 《창조》로 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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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창조》 제2호의 특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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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제2호 원고를 橫濱(횡빈)(요꼬하마) 인쇄소로 보내자 동경 유학생 독립선언 사건이 생기고, 뒤이어 3․1의 위대한 운동이 발발하고, 귀국하자 감옥에 들어가고 뒤따라 주요한도 본국을 거치어 상해로 망명하고, 전영택도 귀국해 버리고(전영택은 귀국하여 전부터의 약혼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결혼식장에서 약혼자는 만세사건으로 형사에게 잡혀가는 비극을 겪었다), 최승만(현과도정부 문교부 무슨 과장), 오천석(현 과도정부 문교부장), 김환(사망) 등이 겨우 무사한 동인이었지만, 그들도 서로 아무 연락도 없이 지내는 형편으로 내가 꼭 석 달 만에 소위 집행유예로 감옥에서 나와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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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를 실마리로 움돋으려던 조선문학은 된서리를 맞아 그 싹이 꺾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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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여름 감옥에서 나온 한 달 뒤 잠깐 동경을 다녀왔다. 의사도, ‘그대의 건강 상태로는 긴 여행은 못하리라.’고 충고하였지만, 마음을 흔드는 어떤 情事(정사) 때문에 만사를 제치고 동경 여행을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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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서 일이 뜻과 달리 되어, 아프고 쓰린 가슴을 붙안고 귀국한 나는, 번연히 마음을 다시 먹고, 《창조》 속간에 착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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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소위 寺內(사내)의 무단정치의 대신으로 齋藤(재등)의 문화정치가 조선에 펴진다 하여, 민간신문의 발간 계획도 들리고, 文興社(문흥사)라는 출판사가 생겨 《曙光(서광)》이라는 잡지를 간행한다는 소식도 들리고, 曙光社(서광사)에서는 기고 부탁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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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서광》 창간호보다 《창조》 제3호를 먼저 내놓으려고 퍽이나 애를 썼지 만, 동인이 상해 동경 서울 평양에 분산되어 있고, 인쇄소가 횡빈에 있느니만치,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서광》 창간호가 1919년 11월 30일이었는 데 《창조》는 그보다 열흘 늦어, 12일에 제3호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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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해 2월에 창간하여, 그 뒤의 만세사건이며 동인 이산, 입옥 등 온갖 분규를 겪으면서도, 그 해 안으로 3호를 내놓았다 하는 것은 오직 동인들의 불타는 열성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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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창조》 제4호는 다음해 2월 22일부로 발행되었는데, 거기난 신간 소개를 보면, 소위 齋藤(재등) 총독의 문화정책의 물결에 편승하여 그새 막혔던 이 민족의 문화에의 돌진을 볼 수가 있었으니, 그 신간 소개를 초기하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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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曙光(서광)》 제2호, 2월 18일 발행.
28
《新靑年(신청년)》 제2호, 12월5일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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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綠星(녹성)》 창간호, 11월 5일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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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창간호, 12월 15일 발행.
31
《現代(현대)》 창간호, 1월 31일 발행.
32
《三光(삼광)》 제2호, 12월 28일 발행.
33
《女子時論(여자시론)》 창간호, 1월 24일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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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창조》 지상에 신간 소개가 난 것만이거니와 이 밖에도 많은 잡지가 소나기 쏟아지듯 생겼다. 그 대개는 창간호가 종간호를 겸하거나, 혹은 제2호 내지 제3호까지 간신히 내고 그만둔 것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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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한일합방 이래 막혔던 우리 민족의 울분은 한꺼번에 터진 것이었다. 혹은 재력 부족으로, 혹은 사람 부족으로 크게 자란 자는 없지만, 1919 년 말에서 1920년 초에 걸치어서는 진실로 많은 잡지가 생겼다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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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잡지마다 탕약에 감초격으로 으례 소설 한두 편씩은 실렸지만 그 실린 소설에서 장래성 있는 작가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늘 서운하였다. 《창조》가 신문학의 첫 고함을 친 지 겨우 1년 남짓이 지낸 뿐이지만, 우리는 마음 초조하게 소설작가의 출현을 기다린 것이었다. 소설이 근대문학의 花形(화형)이니만치 소설작가가 배출하여야 문단이 흥성스러워진다 보아서, 장구성 있는 소설작가가 나지 않은 현상을 매우 괴롭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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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는 그 뒤 제9호까지 내고 폐간하여 버렸다. 폐간한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이만 했으면 조선 신문학의 주춧돌도 놓여졌다 하는 것도 하나의 이유요, 《창조》가 아닐지라도 동인들의 글의 발표 기관(신문, 잡지) 이 많이 생겼으니 동인지가 필요없게 되었다 하는 것도 하나의 이유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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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폐간의 진정한 원인 내지 이유는, 첫째로는 무제한한 入費(입비)였으니 마지막에는 2천 부까지 소화되었지만 그 매상대금은 어디론가 없어지고 매번을 새로 새 비용을 내온 것이 괴로왔다. 게다가 나도 차차 방탕에 빠지어 문학보다도 방탕에 더 고혹을 느끼게 되었고, 또 《창조》 유지가 귀찮아져서 폐간의 의향을 꺼내었더니, 그냥 계속하려면 뒤맡을 책임자가 없어서 폐간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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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사실 나는 《창조》의 무제한 입비에 정떨어져서 사무 책임자인 김환에게 누차 불평을 말하였더니, 김환은 그러면 창조사를 주식회사로 하여 보자고 하두 열심히 돌아다니는 그 열성에 감복하여, 나는 ‘주식회사 창조사’ 의 제1회 불입금을 김환에게 솔선하여 맡겼더니 김환은 그 돈을 홀짝 안 (安) 모라는 기생에게 부어넣고 주식회사의 꿈은 영 소멸되어 나도 손떼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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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창조》는 조선 신문학 史上(사상)에 지대한 자취와 공적을 남기 고 제9호로서 끝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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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창조》가 남겨 놓은 공적은, 조선문학이 살아 있는 동안은 결코 몰락할 수 없는 것이다. 더우기 《창조》를 무대삼아 조선문학 건설의 큰 역사에 애쓴 일꾼들이(김환 한 사람이 죽은 밖에는) 30년 뒤인 오늘까지 모두 건재하여, 혹은 정부의 문화 부분의 고관으로, 혹은 민간 문화사업의 책임자로 그냥 꾸준히 조선문화 진흥에 힘쓴다 하는 것은, 조선을 위하여 축하할 일이다. 이나(金東仁(김동인))만은 무능 무재하여 오십 반백의 몸을 서재에서 붓대에만 씨름하고 있지만, 同友(동우)들의 사회에서의 건투하는 양을 보면 남의 일 같지 않다. 마음의 흥분을 억제하기 힘들 지경이다.
【 】《創造(창조)》와 《廢墟(폐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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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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