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한글 
◈ 지새는 안개 ◈
◇ 재 4 장 ◇
카탈로그   목차 (총 : 5권)     이전 4권 다음
1923.2~
현진건
목   차
[숨기기]
1
지새는 안개
2
제 4 장
 
 
 

1

 
 
4
영 숙의 집에서는 조석 때이면 전 가족이 모두 안방에 모이어 식사를 하는것이 항례이었다. ─ 전 가족이라 하여도 행랑 사람 겸 드난 하인 겸으로 있는 할멈의 내외를 빼고 보면 영숙의 양친과 영숙이와 창섭이 네 사람 뿐이었다. 그리고 이 네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상(床)은 단둘뿐이니 창섭은 삼촌과 겸상이었고 영숙은 어머니와 겸상이었다.
 
5
이렇듯이 단촐하고 따스러운 가족이건만 평상시엔 피차에 별로 교섭이 없었다. 부친은 어데인지 노오 출입을 하고, 모친은 안방에서 바느질을 하든지 담뱃대를 먹든지 한숨을 쉬든지 하고, 영숙은 학교에 가든지 건너 방에서 공부를 하든지 하고, 창섭은 아랫방에서 누으락 앉으락 책을 보든지 몽상을 하든지 하였다. 제각기 저대로 흩어졌던 그들이 밥 때야 한자리에 모여 앉아 서로 얼골도 보고 담소도 하는 법이었다.
 
6
관립 일어학교의 최초의 출신으로 일본 공사관 서기도 지내고 어전( 御殿) 역관( 譯官) 도 지낸 영숙의 부친은 이미 예순이 다 된 노인이었다. 마흔이 넘어서 안해를 잃은 그는 저보담 스무살이나 연하인 처녀에게 장가를 들었었다. 전실에는 소생이 없고 영숙은 후처의 몸에서 난 외동딸이었다.
 
7
그도 한참 서슬이 푸를 때엔 첩을 셋씩 넷씩 두고 굉장하게 거들 먹거 렸었 다. 그 허여멀끔한 얼골빛과 노인답지 않게 새까만 눈썹에 시방도 오히려 젊던 날의 풍도(風度)를 찾을 수 있다.
 
8
그는 일어로 입신을 하였으되 어쩐지 일본 사람을 싫어하였다. 그 탓으로 세 상이 변하자 제 수하에 돌던 사람들은 도장관(屠場官)이다 참여 관( 參與官)이다 무엇이다 떡떡 하여 갔건만 그 호올로 찌그러지고 말았다. 묵은 정치가의 기풍으로 금전을 대수롭게 알지 않은 그는 재산이 ─ 뿌리는 깊지 않아도 끌어만 모았으면 꽤 많았을 재산이 온 곳 간 곳 모르게 되었다. 형편이 글러감을 눈치 빠르게 알아 본 첩들은 정분이 좋을 제 지나치게 정 해놓은 제 몫을 떼어 가지고 선선히 갈라섰다. 먹고 입는 것 같은 것은 염두에도 두지 않았던 그가 쌀이 없다 옷이 없다 하는 후처의 바가지조차 듣게 되었다. 줄행랑집을 팔아 단행랑집을 사고 단행랑집을 또 팔게 되자 더 작은 집엔 들 수 없다 하여 차라리 한 달에 백 원 돈이나 내어 가며 큼직한 셋집을 얻게 하였다. 시방 들어 있는 집은 백 원짜리 셋집이 또 줄어서 사십 원짜리 사글세이었다. 이렇게 궁해 들어가면서도 몇 달만 지내면 동양척식회사( 東洋拓植會社)에게 억울하게 빼앗긴 동대문 밖 땅을 찾는다는 둥, 일본서 기계를 주문해 내어와 밀양 근처의 개포에 논을 풀면 여러 수천 석 추수를 할 수 있다는 둥, 어데 큰 금광을 경영한다는 둥 왕청되게 큰 소리만 하면서 밤낮으로 바쁜 듯이 돌아다니었다. 기실 가끔 가다가 큰 돈이 생기 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돈은 며칠 안 되어 또 간 곳 없이 사라졌었다.
 
9
그 돈의 간 곳을 영숙의 모친은 어느 계집년의 집이거니 한다. 모친의 말을 밀리면 제 버릇을 개 못 주어 백발을 흩날리면서도 제 손녀뻘이나 되는 계집한테 미쳐 날뛰는 것이었다. 이런 비난을 들어도 그는 조금도 쾌념치 않는 것 같았다. 희끗희끗 센 자가 넘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껄껄 웃고만 있었다. 그 모양은 마치 대장부의 배포를 아녀자가 어찌 알까 보냐 하는 듯 하였다. 과연 그 돈의 간 곳은 계집의 집이 아니었다. 큰 일을 경영하는 데 새에 든 사람, 부리는 사람의 여비, 생활비 및 그 외의 이루 헤일 수 없는 잔잔한 부비로 말미암아 손가락 사이로 물이 흐르듯 덩잇돈이 흘러나리고 만것이다.
 
10
그것은 그렇다 하고 일본 사람을 싫어하는 그는 영숙을 미인(米人)이 세운 ×× 여 학교에 넣었었다. 그리고 옛날 녹의홍상의 마음을 쏠리게 하는 그 눈매는 인제 자애가 넘쳐흘렀으되 자녀 ─ 자녀라 해야 영숙이 하나뿐이지만 ─ 에게는 절대로 방임주의이었다. 낡은 개화당의 일인(一人)인 그는 시 대사조의 변천을 남 먼저 알아야 될 줄 안다. 자녀를 제 자유대로 내어 버려 두는 것이 가장 새로운 사상인 줄 아는 까닭이다. 그리고 그보담 더 큰 원인은 제 몸이 분주도 하고 이래라 저래라 시키고 따르고 하는 거시 딱 귀찮았음 이었다.
 
11
그러므로 썩 긴급한 일이 아니면 일부러 부르지 않는 법이다. 할말이 있으면 밥을 먹으면서도 하고 밥상이 막 들어오기 전 또는 막 끝난 뒤에 하는것이 그의 버릇이었다.
 
12
아들이 없는 그는 창섭을 매우 사랑하였다. 성질이 온공하고 영리한 창섭이라 물론 그의 눈에 거슬리는 일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13
"이애, 이것 너 두고 써라."
 
14
하면서 이따금 돈을 이 원씩, 많을 때는 십 원씩 창섭을 주기도 하였다.
 
15
창섭이가 막 저녁밥을 다 먹은 때이었다.
 
16
삼촌은 숭늉으로 양치를 한두 번 나더니 창섭을 보며,
 
17
"너 요사이 무엇을 하니? 라고 다짜고짜로 묻는다.
 
18
"뭐…… 하는 것이 있습니까?"
 
19
라고 창섭은 고개를 숙여 장판만 나려다보며 대답하였다. 이것은 창섭의 어른을 뫼시고 이야기할 때의 버릇이었다.
 
20
"그래, 놀기가 심심치 않으냐?"
 
21
"네…… ."
 
22
창섭은 모호하게 어물어물하며 겸연쩍게 해죽 웃었다.
 
23
"그래, 노는 맛이 어떻단 말이야, 설탕 맛이나 소태 맛이냐? 응."
 
24
하고 삼촌은 껄껄 웃는다. 그는 제 자질(子姪)을 데불고도 이런 우스개를 잘 붙이었다. 창섭은 무에라고 말을 해야 옳을지 몰라 묵묵히 앉아 있었다.
 
25
"왜 아모 말이 없느냐? 응. 놀기가 설탕 맛도 아니고 소태 맛도 아니고 심심하게 물맛이냐?"
 
26
하고 늙은이는 또 한번 크게 웃었다. 그리고 젊은이가 또 머뭇머뭇해 하는것을 보고,
 
27
"너 신문 기자 노릇 좀 해 볼 터이냐?"
 
28
라고 인제야 정작 제 물을 말을 물었다.
 
29
"신문 기자요?"
 
30
창섭은 놀래인 듯이 재우쳤다.
 
 
 

2

 
 
32
신문 기자! 창섭이가 속 은근히 희망하던 직업이었다. 붓 한 자루를 휘둘러 능히 사회를 심판하여 죄 있는 놈을 버히고 애매한 이를 두호하며 세계의 대세를 추측하여 능히 선전(宣戰)도 하고 능히 강화(講和)도 하는 무관 제왕( 無冠帝王) 이란 존호를 가진 신문 기자! 젊은이의 가슴을 뛰게 하는 직업 이었다. 더구나 창섭으로 말하면 동경 유학을 반둥건둥하고 서울에 있는 동안 문학서류를 탐독하였다. 볼수록 그의 문학에 대한 취미는 깊어 갔었다. 따라서 그는 시인으로나 문사로 몸을 세워 보려고 하였다. 문사와 기자가 그 성질에 있어서 아주 다른 것이건만 창섭의 생각에는 대동소이한 듯 싶었다. 문사는 고만두더라도 훌륭한 기자나 되었으면 그뿐이란 생각도 그에게 없지 않았다. 만만장야(漫漫長夜)에 단 코를 고는 우리 겨레를 깨움에도 신문의 힘이라야 되리라, 황무(荒蕪)한 폐허에 새로운 집을 세움에도 신문의 힘이라야 되리라 하였다. 그러므로 거기 붓을 드는 이들은 모두 인격 이 고결도 하려니와 의분에 피가 끓는 지사들이어니 한다. 자기가 그들과 같이 있게 되면 그들의 하나가 되면 이에 더한 영화가 어데 있으랴!
 
33
삼촌의 말을 이었다.
 
34
"응 신문 기자 말이다. 오늘 예전 황성신문사에 있던 유택근이를 만났는데 그의 말이 반도일보가 일년 동안이나 발행 정지를 당하였다가 이번에는 해금이 되었데. 제가 거기 편집국장이라더라. 내일 모래로 신문은 시작 해야되 겠고 적당한 기자들은 들어서지 않고 해서 걱정이라기에 내가 네 말을 했다. 한문도 유여(有餘)하고 신지식도 상당하니깐 그러면 대단히 좋다고 제 게로 한 번 보내라고 하더라. 그래, 너 거기 다녀 볼 마음이 있니?"
 
35
"네, 될 수 있는 대로 다녀 보았으면 좋겠습니다마는 제가 신문 기자 노릇을 할 자격이 있을까요?"
 
36
창섭은 눈을 번쩍이며 이런 말을 하였다.
 
37
"반편이 같으니. 할 자격이 다 뭐냐! 사내로 이 세상에 못할 일이 무엇 이 람? 내가 석달 일어 공부를 해 가지고 어전 역관 노릇도 하였는데."하고 지낸 날을 추억하는 듯이 한 번 수염을 쓰다듬고,
 
38
"세상 일이란 생각 할 때는 어려워도 다 닥쳐 보면 쉬우니라. 다녀볼 마음이 있거든 내일 그 사람을 한 번 찾아보아라."
 
39
창섭은 이 말에 용기를 얻었다.
 
40
"그 분의 댁(宅)이 어데인가요?"
 
41
"응, 그 집이 어데든가 잘 생각이 아니 난다마는 그는 낮에는 노오 신문사에 있다더라."
 
42
"그 신문사가 어데인가요?"
 
43
"왜 저 장교(長橋) 근처에 있는 그 신문사를 네가 모르니? 그러면 광충교( 廣沖橋) 는 아나? 알아? 광충교에서 왼손 편 개천으로 들어서 남쪽 천 변으로 얼마 가지 않아 반도일보사란 큰 간판이 붙었느니라."
 
44
"네 그렇습니까?"
 
45
"그러면 내가 내일 명함(名函)을 줄 터이니 그것을 가지고 그 사람을 찾아가서 한 번 수작을 해 보아라."
 
46
"네."
 
47
하고 삼촌의 앞을 떠나오는 창섭은 기쁜 기대에 가슴을 뛰었다.
 
 
 

3

 
 
49
그 이튿날 연한 점 쯤 되어 삼촌의 명함을 맡아 가지고 나선 창섭은 어렵지 않게 그 신문사를 찾아내었다. 과연 삼촌의 말대로 한 간이 넘을 듯한 큼직한 간판에 문짝 같은 굵은 글자로'반도일보사’라고 쓰여 있다. 이 엄청난 간판에 창섭은 일종 위협을 느꼈으되, 여기저기 칠먹이가 떨어진, 허 술한 목제 이층은 굉장한 건축물을 상상한 그에게 조금 실망도 주었다. 문 앞에 딱 다다르 매 웬일인지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마음이 조마조마해서 선뜻 문을 열 수가 없었다. 그 앞에 어물어물하고 서 있는 사이에 사람이 몇이나 그 문으로 들고 나고 하였다. 사람이 올 적마다 저 섰던 자리에서 한 걸음 물러서며 흠칫하고 몸을 피하였다. 이 모양으로 얼마를 망실 거리다 가마 츰 내 용기를 내어 문을 열고 들어는 섰다. 문을 연즉 거기가 곧 방 이었다. 장판방은 아니라도 사방으로 판벽(板璧)이 물려 있고 여기저기 테이블이 서너개 놓이고 사람이 육칠 인이나 웅긋둥긋이 서고 앉고 하였으니 방이 아니고 무엇이랴. 창섭은 또 어찌할 줄을 몰랐다. 어느 사람을 붙잡고 말을 물어야 옳을지 알 길이 없었다. 또 한동안 어줍게 서 있노라니 그 중에 큼직한 검은 대모테 안경을 쓰고 배가 터질 듯이 뚱뚱한 사람 하나가 힐끗 창섭을 바라보더니 건방지제 반말로,
 
50
"누구를 찾아?"
 
51
라고 묻는다. 옥양목 두루막에 캡을 쓴 창섭의 모양이 초라도 하였고 겸연쩍게 기웃기웃하는 양이 서툴기도 하였음이리라.
 
52
창섭은 자존심에 조금 상처를 입으며,
 
53
"저어 편집국장 되시는 이를 좀 뵈오려 왔습니다."
 
54
"댁은 누구요?"
 
55
하고 이게 다 편집국장을 찾는가 하는 듯이 (청섭에게는 그렇게 생각 하였다.) 위아래로 훑어본다.
 
56
"나는 김창섭이란 사람이올시다."
 
57
창섭은 불쾌한 생각이 와락 일어나 조금 성낸 소리로 대답하였다.
 
58
"무슨 일로 왔소?"
 
59
그 사람은 창섭을 노리다시피 바라보며 어르듯이 묻는다. 창섭은 이분이 편집국장인가 하였다. 그래서 나는 성을 꿀꺽꿀꺽 참으며,
 
60
"저어…… 편집국정 되십니까?"
 
61
이 말에 그 사람은 분명히 당황해 하는 빛을 나타내었다. 그래도 여 일 령하게 위엄 있는 소리로,
 
62
"그래, 무슨 일로 오셨단 말이오?"
 
63
창섭은 그 사람이 제가 찾는 이가 아님을 깨닫고 숨을 내쉬며 이것 봐라 하는 듯이 삼촌의 명함을 내어 주었다. 그 뒤에는 창섭의 간단한 소개가 적혀 있었다. 그 사람은 뒤 곁을 보더니 창섭에게 대한 태도가 갑자기 달라졌다. 시방껏 저는 앉고 창섭은 서서 말을 주고받고 하였는데 갑자기 제 자리에서 일어서며,
 
64
"이리 앉으시지요."
 
65
라고 은근히 자리를 권한 후 친절한 목소리로,
 
66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67
하고는 제 뒤에 있는 조그만한 문을 열고 나간다. 나종에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신문 발송인이었다.
 
68
한 이삼 분 기다린 뒤이리라. 그 사람이 도루 나와 그 조그만한 문으로 대가리를 쑥 내어밀며 창섭을 보고, '이리 들어오시지요.’ 한다. 그 말 대 로그 문을 나서니 왼편으로 그을음이 디룽디룽한 목제공장 집이 있고 그 맞은편에 십여 간이나 될 듯한 조선집 한 채가 있었다.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큰 마루가 있는데 문들은 모두 열려 있었다. 창섭은 그 안에 너저분하게 책상과 교의가 널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 곳은 휑덩그렁하게 비었고 한편 구석 이전 안방 웃목이었던 곳에 커다란 책상을 해 놓고 사람 하나가 앉아 있다. 저이가 내가 찾는 편집국장인가 하매 창섭의 가슴은 새삼스럽게 흔들리었다.
 
69
인도하는 이를 따라 그의 앞에 들어서니 그이는 아까 그 사람과는 아주 반대로 매우 정다웁게 눈웃음까지 띠우며 자리를 권한 후,
 
70
"노형이 김창섭 씨 되십니까?"
 
71
한다. 그이는 한 사십 되어 보이는데 바짝 마른 가냘픈 몸집이고 볼이 빨갛고 입이 합죽한 사람이었다. 창섭은 이 친절로 말미암아 아까 받은 불쾌가 일시에 풀리는 듯하였다.
 
72
"○○ 씨의 함씨 되시지요?"
 
73
"네, 그렇습니다."
 
74
"참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75
제가 할 말을 저편에서 먼저 해 버리매 창섭은 또 어찌할 줄을 몰라 무밋무밋하며 얼골을 붉히었다. 이 창섭의 도련님 같은 태도가 더욱 그의 마음 에 든 것 같았다. 그는 사교에 익은 미소를 눈에 입에 연해연방 띠우며 동경 유학을 하였느냐, 무슨 학교를 마쳤느냐, 한문을 많이 읽었다지, 문필을 좋아 한다지……, 여러 가지로 물었다. 그리고 맨 끝으로,
 
76
"신문에 취미가 계십니까?"
 
77
하였다. 이것은 대답하기가 조금 얼떨떨하였으되, 창섭은,
 
78
"네……."
 
79
하고 고개를 숙이며 빙그레 하였다. 책상물림의 수줍어함과 어려워함이 만만한 제 사람을 얻으려는 이에게 만족을 주었음이리라.
 
80
유씨는 흉금을 풀어 헤치고 탁 신임하는 어조로,
 
81
"아시는 바와 같이 이 신문은 일년간 정간을 하였다가 다시 발간이 되는것 입니다. 말하자면 계속을 하는 것이로되 모든 것이 초창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곤란이 많을 줄 압니다. 그러나 모든 곤란을 무릅쓰고 나가기만 하면 얼마 아니 되어 잘 될 줄로 믿습니다. 노형과 같이 순 실하신 이와 일을 같이 하게 ─ 만일 허락하신다면 ─ 됨은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남의 일로 생각 마시고 내 일같이 힘을 써 주십시오. 내일 초하 로부터 신문을 발간하겠으니 그믐날부터 출석은 해 주셔야 되겠습니다."
 
82
하다가 어조를 사무적으로 곤치며,
 
83
"그런데 한 달에 생활비는 ─ 신문사가 극히 가난하니까 최소한도의 생활비 밖에 지발(支撥)을 못할 형편입니다 ─ 얼마나 하면 되겠습니까?"
 
84
생활비! 삼촌 집에서 밥은 거저 얻어먹는 터이니 내 생활비야 십원만 있으면 족하리라 하였다. 할 수만 있으면 한 푼도 아니 받고라도 이런 위대한 사업에 헌신적 노력을 하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미처 대답을 하기 전에 유 씨는 벌써 그 눈치를 알아채었던지 말을 이어,
 
85
"얼마 동안만 견디면 물론 보수도 상당해지겠지만……."
 
86
다른 사람이 들을까 두려워하는 듯이 텅 빈 그 근처를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추어,
 
87
"위선은 극소한도로 한 육십원 갖다 쓰시게 하십시오."
 
88
육십 원템이나! 창섭은 제 귀를 믿을 수 없었다. 한동안 입을 벌릴 수도 없었다. 창섭의 좋아하는 꼴을 번연히 알아보였건만 유 씨는 더욱 보수가 적음을 괴탄하는 듯이,
 
89
"신문사가 여간 가난해야지요. 어떻습니까, 그것이면 최소한도의 생활비나 되겠습니까?"
 
90
라고 아까 말을 되풀이한다. 창섭은 더할 수 없이 감격하였다. 그래 떨리는 소리로,
 
91
"그것은 너무 많습니다."
 
92
유 씨도 만족한 듯이 빙그레 웃으며,
 
93
"그러면 오실 때에 이력서 한 장을 가져 오십시오. 형식이 그렇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믐날 하로는 호의로 거저 보아 주십시오."
 
94
일은 벌써 다 되었다. 만일 처음 보는 이 앞이 아니언들 창섭은 득의와 환희에 춤이라도 추었으리라.
 
 
 

4

 
 
96
창섭은 반도일보사에 다니게 되었다. 자기가 일찍이 동경하던 직업을 얻게 된 그는 하는 일에 감격적 열심을 가지기 때문에 실연(?)으로 하여 입은 상처조차 아물어 갔었다.
 
97
그의 하는 일은 대개 번역이었다. 아츰 열 점에 가면 오후 네 시나 다섯시까지 한자리에 꼭 붙어 앉아 일본 신문의 가리누키와 각 전 보통신( 電報通信)을 우리말로 옮기기에 눈코를 뜰 사이가 없었다. 그가 번역한 가운데 비교적 긴 것은 일면에 얹히고 짜른 것은 이면에 실리었다. 그래도 그는 주 로이면 내근(二面 內勤)이었다. 편집을 맡지 않은 다음에야 항용 외근을 하는 법 이언만 그 신문사는 외근보담도 내근에 힘을 썼다. 위선 지면을 채우기에 골몰 하였다. 그것은 아직 사람이 째이지 않은 까닭이다. 그러나 몇 달을 지나도 사람은 여전히 째이지 않았다.
 
98
이면을 맡아 보는 이는 윤창운이라고 위아래가 괴인 얼골이 둥그스름한 사십 남짓한 사람이었다. 그도 황성신문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십유여 년( 十有餘年)을 조고계(操觚界)에 종사한 분이었다. 바닷물에 갈리고 갈린 자각 돌이 동글동글한 바둑돌이 되는 것 모양으로 티끌 세상에 닳고 또 닳은 그는 제 얼골과 같이 인격도 둥그스름하였다.
 
99
창섭의 재능을 제일 먼저 인정한 이는 그이었다. 아모 경험도 없고 이 력도 없는 창섭이가 처음 들어와서 어느 면에 가야 마땅할지 모를 때에 그이 가한두 번 번역을 시켜 보고 고만 이면(二面)으로 끌어갔었다.
 
100
"창섭이가 번역을 매우 잘합니다. 그리고 한문도 유여(有餘)한가 봅니다. 창섭 씨는 이면(二面)에 있게 하지요."
 
101
"창섭이가 들어간 지 일주일쯤 되어 편집회의가 열렸을 제 그이는 이렇게 제의 하였다. 창섭은 일변으로 기쁘고 일변으로 고마웠었다.
 
102
그 이가 일본 신문의 기리누키 할 것과 각 통신의 쓸 만한 것을 골라서 자기도 하고 창섭에게 맡기기도 하였다. 줄 때이면 그이는 반드시 빙그레 웃 으며,
 
103
"이것 좀 해 주실랴오?"
 
104
하였다. 창섭은 거의 감지덕지로 그것을 받아 일시반시 놀지 않고 해 내 뜨 리고 해 내뜨려 한 장이라도 제가 더하려고 애를 썼다.
 
105
그이는 창섭이가 번역한 것을 받아서 읽어 보다가 고칠 데를 고치면서 창섭이에게 그 번역을 가르쳐 주었다. 그럴 적에도 제 의견 비슷하게,
 
106
"이런 것은 이러는 편이 좋아요."
 
107
하였다. 그러므로 창섭은 조금도 감정이 상치 않을 뿐인가 속으로 모르는 자기를 가르쳐 주는 그의 호의에 감사하였다.
 
 
 

5

 
 
109
제가 하는 일에 대하여 흥미를 잃기 시작하였을 때, 창섭은 또 같이 있는이에게도 환멸을 느끼기 비롯하였다. 제가 일찍이 상상하던, 고결한 인격과 해박한 지식과 위대한 사상을 구경도 할 수가 없었다. 모두들 평범하고 용렬 하였다. 거기는 조선 어느 사회나, 아니 인간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로 추종과 이기와 아세(阿勢)와 궤휼(詭譎)과 엉터리와 탯가락이 잇을 뿐이었다. 더욱이 괴상한 일은 시대에 앞서야 할 그들이 ─ 앞섰다고 자처하는 그들 이 시대에 뒤져 가지고 저 먼저 달아나는 시대를 저주하고 비방하고 조소 하고 시기하고 개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연령 탓도 탓이리라. 그 신문사에서 내로라고 고개짓을 하는 사람은 대개 사십과 오십의 중간의 낫세이었다. 그 가운데 하나로 일면 논설을 맡아 쓰는 이는 방어(魴魚)토막 같은 굵직한 몸집과 늘 막걸리 기운이 도는 듯한 시뻘건 얼골을 가진 위인인데, 그 어깨를 으쓱 치켜 올리고 땅을 다지기나 하려는 듯이 늘이고도 힘 있게 뚜벅뚜벅 걷는 모양은 청룡도(靑龍刀)와 적토마(赤兎馬)가 없었기 망정이지 하릴없는 옛날 지나(支那) 삼국 시절의 관운장(關雲長)을 생각하게 하였다. 기실 그는 관운장이란 별명이 있었다. 젊은 기자들 가운데서 그의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양을 보기만 하면,
 
110
"이크, 관운장이 출진하시는구나!"
 
111
하고, 옆에 있는 동료와 서로 눈을 맞추며 웃는 법이었다. 가끔 가다가 이소리가 그의 귀에 들어갈 때도 있었다. 그러면 그는 정말 관운장 격으로 호탕스럽게 웃으며,
 
112
"날더러 관운장이라구? 허허!"
 
113
하다가 그 말을 한 이가 무색해 할까 봐,
 
114
"참 웬일인지 모두들 나를 관운장이라고 그래. 제국신문사에 있을 적에도 그런 별명을 들었더니만. 허허."
 
115
하고는 또 한번 쾌활하게 웃는 법이었다. 그리고 관운장이란 별명에 대하여 자기 역(亦) 만족하다는 뜻을 말하고, 삼국 시절에 못 난 일, 외양만 같고 그런 응재대략 없어 그야말로 양질호피(羊質虎皮)인 일, 만일 자기가 그때의 관운장이런들 결코 호녀견자(虎女犬子)란 얼토당토않은 소리로 손권( 孫權) 의 청혼을 물리치지 않았을 것이고, 물리치지만 않았더면 후고( 後顧) 의 우( 憂) 가 없이 승승장구하여 중원(中原)을 권석(倦席)하였을 걸 갖다가……, 하면서 수다 늘어놓는 법이었다.
 
116
그는 한문의 대방가(大方家)로 자임할 뿐더러, 신지식에 들어서도 그리 남에게 떨어지지 않거니 생각한다고. 그 이유는 자기가 논설을 맡아 쓰는 까닭이며, 몇 해전에 벌써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통독한 까닭이다. 세계의 대세를 통찰하기는커녕 열국(列國)의 이름도 잘 몰랐으되, 걸핏하면 ' 태서( 泰西) 제국(諸國)이……’ 하면서 팔목을 부르걷고 천 하사( 天下事) 를 논란 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의 쓰는 논설은 조금도 국제 관계( 國際關係)라든가 실사회(實社會)에 일어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훈 도적( 訓導的) 청년 수양론이 아니면 묵고 썩은 센티멘탈한 문자이었다. 몇 십년 전의 지사들이 불이 닳도록 쓰고 또 쓴 그나마 양계초(梁啓超)를 본뜬 ' 소년 조선 론’이라든지 '시세조영웅야(時勢造英雄惹)아 영웅 조 시세야( 英雄造時勢耶) 아’ 란 곰팡이 내 나는 제목을 끄적거리고 어깻바람을 내었다. 그리고 글이란 순 한문으로 써야 웅경(雄勁)도 하고 운치도 있는데, '요사이는 언문을 섞으니 어데 힘이 있어야.’하고 한탄하였다.
 
117
사회부장 ─ 곧 삼면을 편집하는 이도 또한 그 연세의 사람이니 주독으로 해서 여기 저기 불긋블긋한 점이 있는 얼골, 툭 불거진 핏발이 선 흐리 멍텅한 눈자위, 어훙한 가슴, 엉거주춤한 허리, 얼른 보면 중병을 치른 사람 같았다. 그는 성근(誠勤)하기 짝이 없었다. 사(社)에만 들어오면 제 책상에 머리를 끌어박고 조선에서 나는 일자(日字) 신문을 기리누키 하는 데 정신을 잃었다. 그는 일본말을 도모지 몰랐다. 아주 쉬운 회화조차 못하였다. 혹 전화를 받다가 저편에서 일본말을 하면 질겁을 하고 물러서며 다른 기자들에게 받아 달랄 지경이다. 그러하면서 일자(日字)신문을 번역하는 것은 귀신이 놀랄 일이었다. 더구나 그 번역의 빠르기가 번개 같았다. 다만 이 능란한 번역이 포복절도할 오역일 때가 가끔 있었다. 그 일례를 들면 '( 果敢[ 과감] なさ一生[ 일생] む歎[ 탄] さ悲[ 비] しんた)’ 한 것을 ' 과감( 果敢) 이가 일생을 비탄하였다.’라고 우리 글로 옮기어 큰 웃음거리가 되었었다. 그는 '과감’인명(人名)으로 알고 깍듯이 한문자까지 단 것이다. 그의 일어에 대한 지식은 'ハ’는 '는’, 'か’는'가’, 'こ’ 는 '에가’, 'タ’ 는 '다’…… 등의 토를 외울 뿐이었다. 다행한 일은 이 토만 알고 보면 대개 한문 글자를 보고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한문자를 부드러운 우리말로 붙일 줄을 조금도 몰랐다. 쓰이기는 언문으로 쓰이었으되 한문 모르는 이는 알아보는 재조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의 한문에 대 한 온 축( 蘊蓄) 이 깊은 것도 아니니, 그 무식에 가까운 제목 붙임이 넉넉히 그것을 증명하였다. 그도 십 유여 년 전부터 황성신문사에 종사란 조고계( 操觚界) 의 노장이다. 술잔이나 취하면 꼬지꼬지 마른 노란 팔뚝을 내어 두르며 혀가 꼬부라진 소리로,
 
118
"십 유여 년을 이 노릇으로 입에 풀칠을 하였습니다. 그 때는 단 셋이 신문 한 장을 해 내었지요……."
 
119
라고 일쑤 제 역사를 꺼내었다.
 
120
그리고 가장 안된 일은 외근을 안중에 두지 않는 일이리라. 세상없이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자기가 출장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외근 기자의 얻어오는 자료조차 홀대하였다. 자기의 기리누키한 것이 차고 남아야만 마지못해서 넣어 주었다. 그 신문사에는 삼면에 딸린 외근이 단지 둘뿐이고 그들의 활동과 필력이 그리 남에게 뛰어나지도 않아, 도저히 삼면 십이 단을 채우는 수가 없기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 때의 반도 일보를 조 금주 의해 보는 이면 사면 기사의 거의 전부가 삼사 일 전 또는 오륙 일 전에 벌써 다른 신문에 났던 구문(舊聞)임을 알 수 있으리라. 또 조금 깊이 신문에 주의하는 이는 삼사 일 전은새려 한 달 전 두 달 전에 일본의 동경과 대판( 大阪) 등지에서 발해하는 일자신문(日字新聞)에 났던 것이 비위 좋게 반도 일보에 실린 것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그것은 남의 신문에 난 것을 되풀이 한다고 비난을 들은 삼면 주임이 조금 전 것보담 오래 전 것이 도리어 새로운 거의 토쿠타네(딴 신문에 아니 난 특별 기사)같이 보인다는 놀랠 만 한 발명을 한 까닭이었다.
 
121
이런 사람들이 아모 철주(掣肘)와 구속 없이 그 신문의 채를 잡았다. 말이 편집국장이지 유씨는 편집엔 아모 관계가 없었다. 그 신문은 어떤 단체에서 기관지로 인가를 맡아 내어 온 것이나 금력(金力)이 없어 해 갈 수 없게 되자, 기사를 함부로 과격하게 써서 압수에 압수를 거듭하다가 마츰내 발행 정지를 당한 것이었다. 이번에 해금이 되자 조고계에 성망이 높은 유씨를 끌어 들여 편집상 경영상 전 책임을 맡기었다. 바꾸어 말하면 유씨가 무슨 노릇을 하든지 돈을 끌어대어 해 갈 대로 해 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유 씨는 아츰저녁으로 어느 귀족 어느 부호를 찾아다니며 신문을 사라고 조르 기도 하고 하다 못하면 사(社)의 명의로 돈을 뀌어 달라고 비두발괄하는 판이라 편집을 돌아 볼 어느 겨를이 없었다. 이러고도 신문으로 당당한 행세를 하고, 부수로 말하여도 늘지언정 주는 법이 없음은 신통한 일이었다.
 
 
 

6

 
 
123
젊은 기자 중의 몇몇에 이르러서는 거의 부랑자나 다름이 없었다.
 
124
그들은 대개 서울서 중학교를 치르고 일본에 건너가서 이 학교 덥적, 저 학교 덥적하다가 졸업은 한 군데도 못하고 돌아왔든지, 또는 구경차로 한 이삼 주일 가량 동경 일판을 헤매고 왔을 뿐이로되, 수삼 년을 유학이나 하고 온 척하는 작자들로 일 년 혹은 이 년 신문에 대한 경험이 있었다.
 
125
그들은 자기가 기자임을 막대한 영광인 줄 생각한다. 제 스스로는 자기 가사 회의 목탁(木鐸), 무관(無冠)의 제왕과는 얼토당토않은 인물이며 또 그리되 려고 조금도 힘을 쓰지 않으면서도 남들은 으레 자기네들을 그렇게 우러러보는 줄 믿는다. 더구나 여자 ─ 그 중에도 기생이 그렇게 아는 줄 믿는다. 그렇게 알아야만 자기네들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그렇게 믿으려 한다. 상식이 없어 그것을 모르면 행위로 설명으로 알도록 하는 것 이자 기네들의 책임이고 의무라고까지 생각한다. 그래, 그들은 첫째로 극장에 대한 기자의 특권을 이용한다. 잘 가지 않으려면 억지로라도 몰고 가서 자기의 표(票)없이 들어가는 것을 보인다. 또한 기생의 온습회(溫習會)나 연극 회 같은 것이 있으면 청하지도 않는데 분장실까지 뛰어들어가서 잘잘못을 비평도 하고 이래라 저래라 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회(會) 있는 것을 신문에 내어 제공치사를 한다. 일부러 그들의 집에 가서 원고를 쓰기도 한다. 심하면 제 좋아하는 기생의 미워하는 사내와 동무의 흠절을 ' 천리안( 千里眼)’ 이란 허접 쓰레기 난에 캐기도 하고 또는 정면으로 그 기생을 추기도 하였다……. '××골 는 ××는 인물도 절묘하거니와 가무도 능란하며 또 손님 대접을 매우 친절히 한다나.’…….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 것이 어느 기사보담도 소중하고 긴요하였다.
 
126
이 짓을 일쑤 잘 하는 놈팽이는 홍군수와 한세환이란 두 사람이었다. 군수는 키가 설멍하게 큰 데다가 얼골이 허여멀겋고 떡 벌어진 어깨판, 길고 곧은 다리의 임자이니 세비로나 입고 금테 안경이나 버티고 단장이나 두 루고 나서면 그 풍채의 훌륭하기가 바루 무슨 회사의 사장이니 취체역( 取締役) 같이 보이었다. 그러나 그 훌륭한 체격의 어데인지 꼭 맺히지 못하고 퍼석을 헤어지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그는 싱거웁다 할 만치 호인물이었다. 결코 남을 비꼬든지 해치지 않았다. 혹 남이 제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여도 마이 동풍으로 흘려들었다. 그는 일을 하나 말을 하나 얼렁뚱땅이었다. 그는 총독부 출입기자인데 아츰에 들어오면 모자를 쓴 채로 단장을 휘휘 내어 두르며 편집실로 왔다 갔다 하다가 물에 물 탄 듯한 웃음을 누구에게 향 하는지 모르게 싱긋 웃으며,
 
127
"인제 또 가 보아야지."
 
128
하고 휙 나가 버린다. 두어 시간쯤 해서 들어와서는 한 두어 가지 발포( 發布) 한 것을 이면 주임군(主任君) 창운을 주며,
 
129
"어데 자료가 있어야지요. 빌어먹을 놈들, 겨우 이게 발포랍니다."
 
130
하고 머리를 긁적긁적하고는 제 책상에 돌아앉는다. 그의 책상은 바루 전 화통 밑에 있었는데 그는 전화 받기와 원고 쓰기에 주체를 못하는 듯이 바빠해 한다. 그러나 그가 무엇을 그렇게 골똘히 썼는지 아모도 몰랐다. 그 의 쓴 기사는 좀처럼 신문에 오르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연해연방 오는 전화를 받았으되 그것은 대개 사(社)의 일이 아니고 저의 일이었다. 그래도 사( 社) 의 일이나 되는 드키 분주히 서둘며 또 저의 총망한 것을 전화 가운데서 여러 번 탄식하였다. 이따금 매우 피로한 듯이 만년필을 동댕이치고 휙 나간다. 한번 나가면 예사로 삼심 분이나 한 시간이나 되어 들어온다. 그럴 때 그 를 주의하는 이면 그 쾌활한 목소리를 영업부에서 들을 수 있고 또는 뒤뜰을 서성서성하는 그를 찾아낼 수 있으리라. 그럭저럭 편집이 끝나면 기사를 쓰려다가 잘못된 것을 화증이나 내는 듯이 그 때까지 열심히 끄적 거리 던 원고를 박박 찢어버리고 휙 뛰어나가 세수를 하고 와서 시방 곧 나갈 듯이 모자를 쓰고 단장을 팔에 걸고 교의에 걸터앉아서 이야기를 철철댄다. 그 중에는 기생이야기가 그 태반을 점령하였다. 순순(諄諄)히 오입하는 설명도 하였다. 누구누구 웃음 피는 이의 역사도 늘어놓았다. 그리고 제 염복과 식복을 자랑하였다. 요리점에 갔던 일, 등선각에 오른 일……. 그의 주위에는 여러 동료들이 모이어 부러워하면서도 경멸해 하는 눈으로 그의 입술을 바라보는 법이었다. 그는 사에 들어선 이런 화류장 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화류장에 들면 사에 대한 불평불만, 자기의 개혁책과 포부를 거의 비분한 어조로 떠들었다.
 
131
세환은 군수와 정반대로 키도 작달막하고 몸피도 가냘팠다. 얼골빛까지 까 무잡 잡하되, 세까만 눈썹과 오똑한 코며 얼골의 짜임짜임이 제 체격과 어울리게 매우 조직적이었다. 대가리를 까불까불하며 궁뎅이를 살랑살랑 흔들며 걸어 다니는 모양은 일본 사람으로 속게 되었다. 그는 경찰서를 돌아다니는 기자인데 군수와 달리 자료를 다부지게 수집도 하고 기사도 곧잘 맨 들었으되, 제 쓴 것이 실리지 않는다든지 귀에 거슬리는 말을 듣는다든지 하면 왼 종일 입을 꼭 다물고 새근새근하다가 기사 한 줄 안 쓰고 휙 뛰어나간다. 그도 신이 나면 화류장 이야기를 잘하였으되, 군수와 같이 철철대지 않고 남을 비웃고 저를 비웃는 어조로 깐죽깐죽하게 말을 하였다.
 
132
그와 군수는 부부나 진배없는 단짝이었다. 사(社)만 파하면 어데를 가도 꼭 같이 다니었다. 세환이가 군수의 어깨에 찰랑찰랑하면서 같이 가는 모양은 마치 미국(米國) 희극 활동사진에 잘 나오는 '함’과 '지내’와 같은 골 계미가 있었다. 그들은 걸핏하면 서로 돌려 세워놓고 흉을 보고, 맞대해 서도 '싱거운 자식’, '패리(悖理)한 자식’하고 욕지거리를 하면서도 이상하게 둘의 사이는 벌어지지 않았다.
 
133
이 두 사람 외에 일면 주임 노릇을 하는 강찬명이란 이가 있었는데, 그 도 그런 방면에 들어서는 남의 뒤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호리호리한 몸피, 갸름하고 해사한 얼골의 임자로 얼른 보면 나이 퍽 어려 보였지만 그 주름이 여러 줄 잡힌 이마와 앙상한 뒤꼴이 나배기 태가 없지도 않았다. 그 의 나이는 서른 여섯이었다. 그는 법관 양성소 출신으로 일찍이 변호사 노릇도 한 일이 있었는데 그 때에 그는 한 번 잘 놀았었다. 제 말이 어느 밤 요리 점에 아니 가 본 일이 없고, 기생첩이 떨어질 날이 없었다 한다. 그러는 즈음에 무슨 불미한 일이 있었던지 변호사가 떨어지고 오늘날 기자 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는 군수의 늘어놓는 말을 들으면 아랫 입술을 턱으로 잡아 다리며 웃었다. 그 모양은 '흥, 미친놈. 저 혼자만 놀아본 줄 아나 봐.’ 하는 듯하였다.
 
134
그러나 화류계에 대한 그 신문사의 권위는 따로 있었다. 그는 기자가 아니고 창섭이가 처음 유 씨를 찾아갔던 날 만난 신문 발송인이었다. 그의 이름은 주운해이니 일찍이 백만장자의 외동아들이었었다. 전하는 말을 들으면 그는 열세 살부터 오입 길에 들어서 수십 명의 놈팽이를 거나리고 그야말로 굉장 뻑적지근하게 놀았었다. 어느 미인을 꼭 하롯밤 상관하고 돈 십만 냥을 주었다는 일화까지 있다. 그 덕택으로 많던 재산이 알알이 없어지고 집한 칸 남지 않았다. 그는 입에 풀칠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거의 거지 꼴을하고 돌아다니다가 어째 이 신문사에 들어오게 되었다. 몇 만 금을 쓰고 얻은 것으론 노래 마디나 하고 춤깨나 추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염량 세태를 뼈골에 사모치게 느꼈음이리라. 제 웃머리에 있는 이에게도 무조건으로 허리를 굽실거리며 아첨도 잘하고 보비위도 잘하였다. 다만 무식한 탓으로 그 방법이 너무 칙칙하고 노골적이었다. 웃사람이 담배를 먹을 눈치를 보이면 그는 얼른 제 담배를 빼어 바치고 성냥까지 그어대었다. 여송연(呂宋煙) 갑( 匣) 과 혹은 비단 필을 유 씨에게 바치는 것을 기자들에게 한두 번 들키지 않았다. 이럴 때 세력자는 눈살을 찌푸리고 사정 없이 거절도 하며, 선물 주는 것을 구경한 사람에게 대하여 그를 비웃고 흠점을 캐며 모욕이나 당한듯이 노기등등하였건만, 당장 내어쫓을 듯이 그의 무자격한 것을 타매( 唾罵) 하였건만, 그는 언제든지 제 지위를 보전할 수 있었다. 더욱 이상한 일은 광고에 대한 아모 지식도 경험도 없는 그가 창섭이 들어간 지 넉 달만에 먼저 있던 사람을 밀어내고 광고부장이 된 일이었다. 그도 때때로 편집국에 올라와서 군수 패(牌)와 입을 어울려 기생 타령을 하였다.
 
 
 

7

 
 
136
이 썩은 내, 더러운 내, 곰팡이 내, 음탕한 내가 떠도는 분위기를 처음으로 마실 때 창섭은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는 사람의 집인 줄 알고 들어왔다가 도야지우리에나 빠진 것같이 놀래었다.
 
137
"이럴 리가 있나, 이럴 리가 있나!"
 
138
하며 눈을 닦으면 닦을수록 질퍽거리는 국해, 우글거리는 구데기, 번식 거리는 벌레를 볼 뿐이었다. 그러나 이 도야지 우리야말로 사람의 집인 줄 깨달을 제 그의 놀램은 몇 곱절이었다. 기막히는 환멸이었다. 차라리 도야지 우리에 잘못 들어왔던들 뛰어라도 나가련만, 이것도 사람의 집일 줄이야! 이 오예( 汚穢), 이 추악, 이 암흑! 이것도 사람의 집일 줄이야! 그러나 사람의 집임에 어찌하랴!
 
139
그렇다, 그것도 틀림없는 사람의 집은 집이었다. 제 아모리 처음에는 구역이 나고 머리가 둘리더라도 사람이면 얼마 동안 살려면 살 수도 있는 집이었다. 그 악취가 코를 찌르고 오예가 눈에 띄는 처음이, 곧 냄새에 젖고 더러 움에 물드는 버릇이었다. 시방껏 그 알지 못하던 세계가 어두운 밤의 인광 모양으로 번쩍인다. 제 스스로 나아가 애걸복걸하며 그 국해를 몸에 바르려고도 하는 것이다. 백문(白紋) 같은 마음에 엉겨 붙는 구더기, 씹어 드는 벌레.
 
140
창섭이도 오륙 개월을 지내는 사이에 같이 있는 이에게 동화를 하고 말았다. 늙은이 축보담 젊은이 축에게 동화를 하고 말았다. 배실배실 돌아서 일을 한 가지라도 적게 하려 들었다.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고, 마치 글방에 다니는 아이 모양으로 수도 없이 소변보러 들고나고 하였다. 마지못해하는 번역이나마 그리해서는 아니 될 줄 뻔히 알면서도 애써 곤치기가 싫었다. 남 먼저 하던 입사를 남 나중 하려 하고, 할 일이 끝나도 끈적끈적 늦춰 잡던 퇴사도 될 수만 있으면 일찍이 하려 들었다.
 
141
그것은 그리 한다 하더라도 그로 환멸의 비애가 삭치어질 리는 없었다. 정애에게 걸었던 사랑이 저문 하늘의 노을처럼 흐지부지 사라지자, 망상에 가까운 희망을 신문사 생활에 매였더니 그 또한 수포에 돌아가고 만 그는 제 마음을 어데에 지접(支接)해야 옳을지 알 길이 없었다. 바람은 분다. 물결은 흔들린다. 노를 잃은 조그마한 배는 비틀거린다. 불리어 가거라. 밀리어가거라! 어데로든지.
 
142
창섭이가 군수 일파의 화젯거리가 되는 기생에게 동경하기는 이 때부터 이었다. 이전엔 남자의 몸을 망치는 사갈(蛇蝎)이나 악마로 미워하던 그들 이인제는 이상야릇한 광채로 빛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남국의 포도주처럼 방렬( 芳烈) 한 자극성, 산호 가지가 그늘진 바다 밑에서 허우적거리는 인어처럼 요염한 신비성을 가진 듯싶었다. 그리고 그들은 제 가까이만 오면 세상 없는 근심도 풀리게 하고 슬픔도 잊게 하고, 그칠 때 모르는 웃음이 터져 나오게 하는 신통력을 가진 듯싶었다.
 
143
그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 하나에 매어 달리듯 절망적 노력으로 이 기생이란 알 수 없는 물건에 매어달리려 하였다.
【원문】재 4 장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글쓰기
〔소설〕
▪ 분류 : 근/현대 소설
▪ 최근 3개월 조회수 : 56
- 전체 순위 : 1049 위 (2 등급)
- 분류 순위 : 136 위 / 881 작품
지식지도 보기
내서재 추천 : 0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1) 사의 행렬
▣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 지새는 안개 [제목]
 
  현진건(玄鎭健) [저자]
 
  개벽(開闢) [출처]
 
  1923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문학 > 한국문학 > 근/현대 소설 카탈로그   목차 (총 : 5권)     이전 4권 다음 한글 
◈ 지새는 안개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09월 27일